한 경호원이 조명을 켜자 할머니가 의식이 없는 상태로 바닥에 쓰러져 있는 것이 보였다.그 옆에는 네다섯 살 정도로 보이는 어린 남자아이가 할머니 위에 엎드려 울고 있었다.남자아이는 사람들이 들어오자마자 윤혜인을 알아보았다.아이에게 있어 그녀는 마치 요정 같은 착한 누나였다.소년은 흐느끼며 말을 제대로 잇지 못했다.“요정 누나, 제발... 할머니를... 구해주세요...”우선 윤혜인은 두 경호원에게 할머니를 데리고 나가라고 손짓했고 자신은 어린 남자아이를 안으려고 했다.경호원들이 할머니를 들어 올리고 나가자 윤혜인은 아이를 안았는데 아이의 발이 무언가에 걸려 있는 것을 발견했다.자세히 보니 아이의 발이 마끈에 걸려 있는 것이었다.윤혜인은 주머니에서 호신용 군용 칼을 꺼내 힘껏 마끈을 자르기 시작했다.귀청이 터질 듯한 굉음이 점점 더 가까워지자 남자아이는 계속해서 떨며 말했다.“요정 누나, 나 무서워요...”아이는 윤혜인이 자신을 버릴까 봐 두려웠다.아직 부모님을 뵙지도 못했는데 이대로 죽고 싶지 않았다.윤혜인은 손을 빠르게 움직이며 아이를 안심시켰다.“걱정 마, 누나는 널 버리지 않을 거야!”마침내, 마끈이 잘리고 윤혜인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아이를 안아 일어서는 순간, 강력한 충격이 그들을 덮쳤다.그녀는 충격파에 의해 벽에 부딪혔지만 다행히 완전히 쓰러지지는 않았다.하지만 윤혜인은 산사태가 바로 코앞에 다가왔다는 것을 알았다.지금 산사태가 내려가는 방향으로 달리는 것은 매우 현명하지 않았다. 완전히 매몰될 수 있었으니 말이다.이윽고 그녀는 결단력 있게 아이를 안고 측면으로 힘껏 달리기 시작했다.일정 거리를 달린 후, 그녀는 이번 산사태가 광범위하게 일어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게다가 최근 비가 많이 내린 탓에 토양은 매우 질퍽질퍽해져 있었다.어느 방향으로 가든 흙이 계속 쏟아져 내려왔다.잔뜩 놀란 아이는 이미 반쯤 넋이 나간 듯 보였다.소년은 윤혜인의 목을 꼭 껴안고 계속 울었다.“누나... 요정 누나...”윤
서준은 얌전하게 듣고 있었다.윤혜인이 말했다.“일단 나무를 꽉 잡고 있어. 절대 자면 안 돼. 조금만 더 버티면 누가 구해주러 올 거야. 사람들은 너 포기하지 않아.”“네...”“무슨 소리 들리면 빨간 스카프를 마구 흔들어야 해. 그래야 사람들이 너 발견할 수 있어. 알겠니?”서준이 울먹이며 고개를 힘껏 끄덕였다.발밑은 갯벌에 빠진 것처럼 꽉 조여왔다. 그런 압박감에 윤혜인은 점점 더 허약해졌다. 숨통이 조여오는 듯한 느낌에 윤혜인은 천천히 입을 열며 이렇게 말했다.“서준아, 만약에 아름이라는 여자애 만나면 대신 전해줄래? 아줌마 딸이거든. 엄마가 많이 사랑한다고 전해줘... 아름이는 늘 엄마의 자랑이라고 이 세상에 태어나줘서 고맙다고 말이야...”목소리가 점점 작아졌다. 눈앞이 점점 흐릿해져갔고 더는 숨을 쉴 수가 없었다. 그렇게 온몸에 힘이 점점 풀려갔다.“...”윤혜인은 이제 의지할 데가 없었다. 어렴풋이 서준의 울음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몸이 거의 물에 잠기려는 순간 아직 인사도 하지 못한 사람들이 떠올랐다.아빠, 오빠, 소원, 구지윤, 홍 아줌마, 그리고 그 남자까지... 너무 화가 났다.‘이럴 줄 알았으면 보고 싶다고 말하는 거였는데...’의식을 잃기 전 윤혜인은 힘껏 입꼬리를 당겼다.정말 이렇게 허무하게 죽는다면 웃으면서 떠나고 싶었다.무섭냐고 물어본다면 당연히 무서웠다. 무서울 뿐만 아니라 주변 사람들과 제대로 된 인사를 나누지 못한 걸 후회했다.하지만 이런 상황이 다시 닥쳐온다 해도 윤혜인은 서준이 죽어가는 걸 나 몰라라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한 줄기 희망만 있다면 꼭 살리려고 노력했을 것이다....해남 공항.까만 슈트는 이준혁의 기다란 체구를 더 돋보이게 했다. 그 모습이 점잖으면서도 우아했다.손에는 빨간 장미를 한 다발 안고 있었는데 깔끔하고 세련된 옷차림과는 살짝 어울리지 않아 보였다.하지만 김성훈은 와이프에게 선물하려면 꽃부터 선물해야 한다고 했다.이준혁은 윤혜인에게 알려주지 않았다. 먼저 공
작은 촌이라 주민이 그렇게 많지 않았다.봉사팀은 거의 위험에서 벗어났다. 현재 실종된 사람은 5명밖에 없었는데 그중에 윤혜인과 서준이 있었다.“윤혜인 씨는 어떤 아이를 구하다가 제때 대피를 하지 못했다고 합니다. 대표님...”풉.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이준혁이 피를 왈칵 토해냈다.핏기 없이 하얗게 질린 입술에서 빨간 피가 주르륵 흘러나왔다.“대표님.”보디가드가 얼른 앞으로 다가가 이준혁을 부축하려 했지만 이준혁이 그를 밀어냈다.그렇게 바닥에 오랫동안 꿇어있던 이준혁이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그는 차가운 말투로 입을 열었다.“지금 당장 헬리콥터 불러서 수색 범위 확대하고 수색 인원도 더 추가해. 동진촌을 갈아엎는 한이 있더라도 찾아내.”이준혁의 명령에 보디가드가 바로 움직이기 시작했다.얼마 지나지 않아 하늘에서 맴돌던 헬리콥터가 큰 공터에 착륙했다.이준혁은 헬리콥터에 올라 전용 안경을 쓰고 손짓했다. 그러자 헬기가 낮게 선회했다.몇 바퀴 둘러봤지만 사람은커녕 생물의 흔적조차 보이지 않았다. 눈에 들어오는 건 회색뿐이었다.옆에 있는 동진숲은 아직도 진흙 덩어리가 떨어지고 있었다.이곳은 산사태의 중심에 속해 있었고 더 들어가면 안 되는 곳이었다.그렇게 두 바퀴 선회해도 아무것도 보이지 않자 같이 타 있던 보디가드도 희망을 잃고 포기했다.이준혁의 잘생긴 얼굴은 창백하기 그지없었다. 하지만 눈빛은 여전히 회색으로 뒤덮인 폐허를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다.이런 상황에서 과연 살아있을 확률이 얼마나 될까?이준혁은 믿지 않았다. 하늘이 이 정도로 무심하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아니, 절대 그렇게 무심할 리가 없다.보디가드는 이준혁의 병적인 모습에 낮은 소리로 설득했다.“대표님, 아니면 일단 돌아가서 좀 쉬세요. 나머지는 저희가...”“북위 45도, 꺾어.”이준혁이 차갑게 입을 열었다.조종사가 이를 듣고 방향을 꺾었다.보디가드는 그제야 깡마른 나뭇가지에 빨간 스카프가 걸려있는 걸 발견했다. 가까이 가면 갈수록 점점 더 선명하게 보였다
“윽...”쓰러졌던 윤혜인이 눈을 떴다. 고통에 자기도 모르게 신음했다. 하지만 한편 기쁘기도 했다.아직 살아있다는 것에 감사했다.윤혜인은 팔을 들어 눈 앞을 가리고 있는 머리카락을 치우고 주변 상황을 살피려 했다.차리리 보지 않는 게 더 나을 뻔했다. 상황을 확인한 윤혜인은 혼비백산했다.산자락의 움푹 들어간 곳에 떨어지고 만 것이다. 아래는 깊이를 알 수 없는 벼락이었다. 그리고 옆에는 크고 낡은 타이어가 놓여 있었다.의식을 잃어가는데 진흙이 밀려오길래 살기 위해 자기도 모르게 옆에 있는 물건을 잡았던 게 어렴풋이 떠올랐다. 덕분에 진흙에 매몰되지 않은 것이다.하지만 지금 그녀의 상황은 매몰과 별반 다를 바 없었다.움푹 팬 곳은 혼자 서 있어도 꽉 찰 정도로 작았다. 그것도 모자라 조금만 잘못 움직이면 돌덩이가 마구 흘러내렸다.그리고 지금 밟고 있는 곳이 25kg이 넘는 무게를 견딜 수 있는지도 의문이었다.날씨를 보니 2시간도 채 지나지 않으면 날이 어두워질 것 같았다.잠들어도 떨어지지 않기를 바라기엔 너무 모험적이었다.윤혜인은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 굵은 넝쿨이 자라난 걸 발견했다. 자리에서 일어나 그 넝쿨에 손을 뻗으려고 애썼다.하지만 움직이자마자 뒤에서 돌이 후드득 떨어졌다. 깜짝 놀란 윤혜인이 얼른 다시 몸을 벽에 바짝 붙였다. 낙석이 타이어에 부딪히며 굴러떨어졌다. 얼마나 깊은지 바닥에 닿는 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다.윤혜인은 벽에 바짝 붙어 움직일 엄두를 내지 못했다. 진동에 의해 돌이 다시 부서져 떨어질까 봐 숨도 크게 내쉬지 못했다.너무 오래 서 있었더니 몸 곳곳이 시큰거리기 시작했다.얼마나 더 버틸 수 있을지는 미지수였다. 손에는 구조신호를 보낼 수 있는 물건도 없었고 큰소리로 살려달라고 외칠 수도 없었다.여기에 이렇게 있는 건 죽기를 기다리는 것과 같았다.절망에 빠져 있는데 어디선가 인기척이 들려왔다.“거기 누구 없어요?”“거기 누구 없어요?”“윤혜인 씨...”“혜인아...”마지막 한마디가 윤혜인의 귀
윤혜인은 구조 작업이 진행되는 소리가 들리지 않자 절망에 빠졌다.밟고 있는 진흙도 비가 와서 물컹한 상태였다. 윤혜인이 서 있는 곳이 점점 무너져 내리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더는 이렇게 있으면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얼마 버티지 못하고 곧 무너질 것 같았다.윤혜인은 손으로 넝쿨을 잡아당겼다. 꽤 탄탄한 것 같았다.마음을 단단히 먹은 윤혜인은 넝쿨을 손에 감고는 무게를 두 개의 넝쿨에 실으려 했다.그렇게 위로 올라가려는데 돌이 후드득 떨어졌다.밟고 진흙은 낙석에 의해 크게 갈라지고 말았다.윤혜인은 그대로 아래로 미끄러졌다.“아악.”윤혜인이 절규했다. 밟고 있던 곳은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방법이 없었던 윤혜인은 이를 악물고 허공에 떠 있는 몸을 이리저리 움직이며 발로 벽을 짚으려 했다.전에 곽경천이 암벽 등반할 때 같이 가서 놀아본 적이 있었지만 혼자 해본 적은 없었다.그저 전에 봤던 등반 동작을 떠올리며 조금씩 위로 타기 시작했다.다행히 몸이 가벼웠기에 넝쿨 두 개가 그녀의 무게를 이길 수 있었다.윤혜인이 조심스럽게 한 걸음 한 걸음 고통을 참으며 위로 기어 올라갔다.희망이 코앞으로 다가왔다. 지상과 겨우 두 걸음 남은 상태였다.순간.후드득하는 소리와 함께 넝쿨 하나가 부러졌다. 나머지 하나로 그녀의 몸무게를 지탱하기엔 너무 무거웠다.마음이 급해진 윤혜인은 돌이 떨어져도 아랑곳하지 않고 행동을 서둘렀다.후드득.갑자기 중력을 잃은 듯한 느낌이 들었다. 나머지 한 개도 끊어진 것이다.순간 윤혜인은 심장이 멎을 것 같았다. 자기도 모르게 손을 뻗어 지면을 짚었다. 하지만 윤혜인이 잡은 건 곧 떨어질 것 같은 돌부리였다. 이제는 정말 나락으로 떨어질 일만 남은 것 같았다.엄습해 오는 두려움에 윤혜인은 온몸이 뻣뻣하게 굳었고 눈을 질끈 감았다.그때 손목이 누군가에게 단단히 잡혔다. 윤혜인은 돌벽에 부딪히며 떨어지는 걸 멈추었다.팔에서 찢어질 듯한 고통이 전해졌다. 팔이 그대로 뜯겨 나가는 듯한 느낌이었다.윤혜인이 힘껏 고개
보고 싶었다는 말에 이준혁의 몸이 심하게 흔들렸다.윤혜인이 다시 입을 열었다. 북받쳐 오르는 감정을 더는 숨길 수 없었다.“너무 보고 싶었어요...”곧 죽을 마당에 내려놓지 못할 원망과 증오가 어디 있겠는가.끝내 윤혜인은 마음이 흔들렸음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돌아온 후로 이준혁은 그녀에게 정말 잘해줬다.아무리 그녀가 과거를 내려놓지 못해 막무가내 화내고 때리고 투정을 부려도 그는 여전히 곁을 떠나지 않고 묵묵히 지켜줬다.이 생각을 조금만 빨리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지금 깨달았다는 게 너무 아쉬웠다.윤혜인이 눈시울을 붉히며 가볍게 말했다.“이준혁 씨, 이제 놔요...”윤혜인의 눈빛에 이준혁은 순간 두려워지기 시작했다.“내가 너 아무 일 없게 지켜줄 거야.”이준혁이 확고하게 말했다.윤혜인이 아랫입술을 꽉 깨물었다. 이에 입술에 하얀 이빨 자국이 남았다.“준혁 씨, 우리 같이 떨어질 수는 없잖아요.”윤혜인은 이렇게 말하더니 먼저 꽉 잡은 그 손을 떼려고 했다.“떼기만 해봐.”이준혁이 낮게 소리쳤다.그 바람에 이준혁의 몸이 앞으로 조금 더 미끄러졌다.“혜인아...”이준혁이 갈라진 목소리로 말했다.“우리 아직 희망이 있어.”윤혜인의 눈빛은 서글프기 그지없었다. 더는 자신을 속일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만약 지금 결단을 내리지 않는다면 이준혁도 따라서 끌려 내려갈 것이다.윤혜인이 차가운 눈동자로 매섭게 쏘아붙였다.“이준혁 씨, 당신 정말 최악인 거 알아요? 놓으라니까요.”이준혁은 윤혜인이 일부러 그를 화나게 한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래도 그 말에 상처받는 건 어쩔 수 없었다.이준혁이 씁쓸하게 웃었다.“최악이어도 어쩔 수 없어. 네가 좋은 걸 어떡하라고.”이준혁은 가느다란 팔목을 꽉 붙잡고 눈시울을 붉혔다.“벗어날 생각하지 마. 평생.”이때 바닥이 다시 붕괴했다. 이제 더는 두 사람을 지탱할 힘이 없어 보였다.많아도 겨우 1분일 것이다. 최악의 경우 1분도 채 버티지 못할 수도 있다.윤혜인은 더 잔인한 말을 생
물이다. 물이 있었다. 그러면 죽지 않고 살 수 있다.윤혜인은 수영을 전혀 못 할 줄 알았는데 물에 떨어진 순간 익숙한 느낌과 함께 물 위로 떠 올랐다.하지만 이내 당황한 윤혜인이 어쩔 바를 몰라 하며 큰 소리로 불렀다.“이준혁 씨, 이준혁 씨.”물은 고요하기만 했다.겁에 질린 윤혜인이 심호흡을 하고는 물속으로 들어가 이준혁을 찾기 시작했다.하지만 이내 윤혜인은 누군가에 의해 수면으로 건져졌다.이준혁은 촉촉하게 젖은 머리카락을 아무렇게나 들어 올렸다. 그 모습이 참으로 매혹적이었다.그는 윤혜인을 안고 물가로 헤엄쳐 가더니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나 여기 있어.”윤혜인이 멈칫하더니 그를 품에 꽉 끌어안고 엉엉 울기 시작했다.“당신 정말... 놀랐잖아요.”윤혜인은 생각하면 할수록 너무 무서워서 울음을 그치지 못했다.미치지 않고서야 어떻게 같이 뛰어내릴 생각을 한 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짜증이 치밀어오른 윤혜인은 이준혁의 어깨를 가볍게 때리며 원망을 쏟아냈다.“정말 미쳤어. 미쳤다고...”때리고 나서는 마음이 아팠는지 바보처럼 웃기 시작했다.“다행이에요. 무사해서 다행이에요...”이준혁은 아이처럼 울다가 웃는 윤혜인을 보며 입꼬리를 올렸다. 그러더니 손을 뻗어 힘껏 꼭 끌어안았다.“미치지 않았어.”잠깐 뜸을 들이던 이준혁이 다시 말을 이어갔다.“너를 잃었다면 정말 미쳐버렸을지도 모르지.”윤혜인은 무언가에 부딪쳐 구멍 난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이준혁은 복잡한 눈빛으로 윤혜인을 꼭 끌어안았다.윤혜인은 이준혁이 몸을 파르르 떨고 있음을 발견했다. 눈을 깜빡이며 생각해 봐도 영문을 알 수 없었다. 그러다 이내 깨달았다. 이준혁은 무서웠던 것이다. 그는 갈라진 목소리로 말했다.“혜인아, 약속해. 영원히 나를 떠나지 않겠다고.”“나는...”이준혁이 갑자기 그녀를 풀어주더니 어둡고 차가운 눈동자로 말했다.“약속해.”말투는 명령조였고 어딘가 화나 보이기도 했다. 아니, 매우 화나 있었다. 죽다 살아났으니 이제 따질 시간은
윤혜인도 의도한 행위는 아니었고 자기도 모르게 한 반응이었다.순간 곽아름을 대하던 방법으로 이준혁을 대한 것이다.달래기 어렵다면 제일 간단하고 직설적인 방법으로 사랑한다고 표현하면 된다.하지만 볼 뽀뽀를 했는데도 이준혁은 얼굴을 굳히고 있었다. 이에 윤혜인이 난감해졌다.‘설마 아직도 화난 건가?’어쩔 바를 몰라 하는데 이준혁이 고개를 숙이더니 갑자기 그녀를 품에 꼭 끌어안았다.잠깐 멈칫하던 윤혜인이 손을 뻗어 그를 안으려는데 아까 떨어질 때 낙석이 이준혁의 등을 명중했던 게 떠올랐다.하여 자기도 모르게 그를 밀쳐내고는 상처를 물어보려 했다.하지만 몸을 꽉 묶여 있어 벗어날 수가 없었다.이준혁이 시선을 아래로 축 늘어트리더니 말했다.“내가 미우면 밀어내.”윤혜인이 하려던 동작을 멈추고는 가만히 있었다.이준혁이 고개를 숙이더니 낮지만 매혹적인 목소리로 귓가에 속삭였다.“혜인아, 사랑해.”순간 그녀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그녀는 손을 파르르 떨더니 놀란 표정으로 물었다.“왜...”그녀는 사실 왜 이때 이 말을 하냐고 물어보고 싶었다.이준혁이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너한테 말해줄 기회가 없을까 봐 겁나. 나 너 많이 사랑해. 사랑을 나누는 것만으로는 부족해.”윤혜인은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감동해서든 아니면 미안해서든 뭐라도 말해야 할 것 같았다.“고마워요.”이준혁은 고맙다는 말을 듣고 싶은 게 아니라 윤혜인이라는 사람을, 그 마음을 가지고 싶다고 말하고 싶었다. 하지만 너무 욕심스러워 보이지는 않을까 걱정되기도 했다.그는 까만 눈동자로 그녀를 뚫어져라 쳐다보더니 갈라진 목소리로 말했다.“혜인아, 앞으로 절대, 다시는 내 옆을 떠나지 마. 알겠지?”오만하고 도도하기로 소문난 이준혁이 지금은 비굴하게 윤혜인에게 애원하고 있다.윤혜인은 코끝이 찡했다.사실 이준혁이 따라서 뛰어내린 순간 그녀도 더는 고민하지 않았다.전에는 항상 이 남자를 마약 같은 존재라고 생각했다. 그러니 건드려서도 시작해서도 안 된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