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풉.”맞은편에 앉은 김성훈은 그만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렸다.그는 하얗게 질린 이준혁의 얼굴을 보면서 장난스레 얘기했다.“윤혜인 씨도 이제는 호락호락하지 않네. 널 속여서 이혼하다니.”그 말에 이준혁의 낯빛은 순식간에 어두워졌다.김성훈이 먼저 윤혜인이 이곳에 있는 것을 발견하고 이준혁을 불러온 것이다.김성훈은 세 사람의 대화를 처음부터 듣고 있었다. 하지만 이준혁은 와서 쓰레기라는 소리밖에 듣지 못했다.하지만 김성훈은 그녀들이 아까 했던 얘기를 하나도 빠짐없이 이준혁에게 알려주었다.친구의 표정이 점점 굳어가는 것을 보면서, 김성훈은 약간 재밌다고 생각했다.계속 솔로라고 놀릴 때는 언제고.지금은 마찬가지잖아.“근데 너도 참 입이 무겁네. 재혼한 일을 알려주지도 않는다니.”김성훈은 이준혁이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것을 보면서 홀로 얘기했다.“그렇지 않았다면 선물을 준비했을 텐데.”이준혁은 못 들은 것 같았다. 김성훈은 다시 세 여자의 대화에 귀를 기울였다.“윤혜인에게 남자 친구를 찾아주려고 하는 것 같은데.”김성훈이 웃으면서 얘기했다.“이번에는 네 실수야. 기회는 없어.”“아니.”이준혁은 술을 들고 한 모금 마시고 차가운 목소리로 얘기했다.“남자 친구를 찾을 기회를 주지 않을 거야.”오늘 한 말처럼, 다시 한번 윤혜인을 짝사랑할 것이다.그리고 백지장이 된 그녀의 기억 속에 이준혁이라는 이름을 다시 새겨넣을 것이다.그래서 속아서 이혼한 것도 크게 중요하지 않았다.지금 중요한 것은 윤혜인이 다시 그를 사랑하게 되는 것이다. 억지로 그녀를 붙잡아두는 것이 아니라.김성훈은 그를 등지고 있는 붉은 머리의 여자를 보면서 눈을 가늘게 떴다. 말하기 어려운 익숙함이 보이는 것 같았다.한참 생각하던 그는 그제야 그 여자가 소원이라는 것을 깨달았다.하지만 귀를 기울여 보면 목소리가 완전히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호기심이 동한 그가 앞으로 가서 그녀의 얼굴을 보려고 할 때, 세 여자는 함께 자리를 떴다.이준혁은 그들을 따라가
여자는 구불구불한 머리카락을 길게 늘어뜨리고 부드럽게 웃고 있었다.윤혜인이 아무 말도 하지 않자 어색해하기는커녕, 혼자 말을 이어 나갔다.“죽다가 살아났다면서요? 정말 축하해요. 언제 한번 같이 밥이나 먹어요.”그녀는 그렇게 말하면서 여전히 이준혁의 옆에 서 있었다. 그저 몸을 약간 윤혜인 쪽으로 기울일 뿐이었다.마치 이준혁 뒤에 숨어있는 가녈픈 사슴 같았다.여자로서, 윤혜인은 바로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이 여자는 이준혁을 좋아한다고.그 순간, 이혼하면서 이준혁에게 쌓인 호감이 눈 녹듯 사라졌다.하, 쓰레기 같은 남자!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여자를 두 명이나 끼고 사시겠다?윤혜인이 담담하게 얘기했다.“죄송하지만 사람 잘못 보셨어요.”원지민이 뭐라고 얘기하려는데 엘리베이터가 마침 14층에 도착했다.윤혜인은 이준혁을 거들떠보지도 않고 걸어 나갔다.그 자리에는 어색해하는 원지민과 차가운 표정의 이준혁만 남았다.코너를 돌기 전에 윤혜인의 핸드폰이 울렸다.전화를 받은 그녀는 “남준 오빠”라고 불렀다. 그 목소리가 너무 부드러워서 마치 남자 친구의 전화를 받는 여자 같았다.그 생각에 이준혁의 표정이 확 굳었다.이혼할 때, 그를 피하지 않겠다고 약속했으면서. 피하지는 않았지만 보기 좋게 무시당했다.윤혜인은 온 힘을 다해서 두 사람이 아무 사이 아니라는 것을 표현하고 있었다.옆의 원지민은 이준혁의 표정을 보면서 그가 화가 난 것을 눈치챘다. 그 이유는...거의 닫히는 엘리베이터 문을 보면서 원지민이 표정이 약간 어두워졌다.그녀는 이준혁에게서 윤혜인이 돌아왔다는 사실을 들었다. 하지만 이준혁은 다른 것을 알려주지 않았다.원지민이 고개를 돌려 이준혁을 보면서 물었다.“윤혜인 씨가 너한테 삐진 거야?”이준혁의 정신은 윤혜인이 입은 드레스에 빠져있었다. 몸에 딱 붙는 드레스는 몸매의 굴곡을 잘 드러내 주었고 청순하면서도 섹시한 매력을 보여주었다. 그런 옷을 입다니...그는 진중한 목소리로 원지민에게 얘기했다.“아니. 기억을 잃었어
그녀는 이선 그룹 부사장 자리를 얻었다.이후 이준혁은 이 일에 대해 더 이상 언급하지 않았지만, 결코 재혼하지 않겠다는 태도를 행동으로 보여주었다.이씨 집안의 일관된 침묵은 언론에 원지민이 이씨 집안의 미래 며느리라는 인식을 주었다. 다만 문현미가 미신을 믿어 아직 결혼하지 못했을 뿐이라며 말이다. 또한 원지민이 오랜 기간 자선 활동을 하며 대중 앞에서 온화하고 선량한 이미지를 보여준 탓에 사람들은 그녀를 안타까워했다.하지만 원씨 집안이 이 기회를 이용해 남청의 부자에서 이제 서울에서도 자리 잡은 등의 수많은 이익을 챙긴 것이 과연 누구 덕인지 생각해 본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원지민은 여론과 어른들의 핍박에도 대인배의 이미지를 유지하며 이익을 얻어 이준혁이 죄책감을 느끼게 하는 데 성공했다.그녀는 서두르지 않았다. 시간이 많았고 이준혁이 결혼을 하든 안 하든 그의 곁에 있는 여자는 결국 자신일 거라는 확신이 있었으니 말이다.윤혜인이 살아 돌아온 지금, 원지민이 초조하지 않다는 것은 거짓말이었다. 그러나 그녀는 한결같이 침착하고 차분한 모습을 유지했다. 이준혁의 곁에 오래 남아있을 수 있었던 이유도 바로 이 같은 능력을 소유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이 순간에도 원지민은 여전히 여유롭게, 관심을 보이며 말했다.“준혁아, 이번에 며칠 동안 L 국에서 치료받은 건 효과가 어땠어? 머리 아직도 아파?”“그럭저럭.”이 일에는 별 관심이 없다는 듯, 이준혁은 간단하게 대답했다.윤혜인이 사라진 후, 그는 밤새 잠을 이루지 못했다.가장 길게는 일주일 동안 단 한순간도 잠을 자지 못했다.문현미는 그가 급사라도 할까 봐 강제로 병원에 보냈었고, 이후 그는 약을 먹어야만 잠을 잘 수 있었다. 그러나 그 결과로 신경통이 생기고 말았다. 병이 발병하면 이준혁은 도저히 일을 할 수 없었고 약으로도 치료할 수 없었다. 때문에 해외 연구소에서 특정 장비로 개입 치료를 받아야 했다. 다행히도 일 년에 한 번 정도만 발병했지만 이번 이혼 후 또다시 발병했다.지난
룸 입구에 거의 도착할 무렵, 이준혁이 무언가를 분부하려는 듯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5년 동안 지내면서 원지민은 그에 대해 이제 아주 잘 알게 되었다.‘혜인 씨가 마음에 놓이지 않나 보네.’곧이어 원지민이 먼저 입을 열었다.“준혁아, 우리 조금 늦었어. 귀하신 손님을 이렇게 기다리게 하는 건 실례지. 얼른 가자.”그러나 이준혁은 그녀를 그저 힐끗 바라볼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왠지 모르게 마음이 불안해진 원지민은 고개를 숙이더니 말했다.“이번에 마침 네가 치료를 받으러 가는 바람에 마이크 씨께서 며칠을 기다렸어. 하지만 걱정 마. 내가 잘 달래 뒀으니까.”때마침 그때, 종업원이 룸의 문을 열었고 이준혁은 어딘가로 전화를 걸려던 동작을 멈추고 안으로 발걸음을 옮겼다.한편, 다른 방에서 윤혜인은 들어가자마자 시누 엔터의 장 대표가 이미 와 있는 것을 보았다.그녀는 매우 죄송해하며 살짝 몸을 굽혔다.“장 대표님, 정말 죄송합니다. 오는 길에 차가 너무 막혀서요.”뒤이어 장 대표가 말하기도 전에 옆에서 한 여자가 먼저 입을 열었다.“아이고, 달밤의 CEO가 확실히 대단한 사람이 맞긴 하나 봐요? 저희를 이렇게 한자리에 모셔놓고 기다리게 하다니.”귀에 거슬리는 익숙한 목소리였다. 어디에서 들리는 소리인고 하니 윤혜인의 눈에 익숙한 여자가 들왔다. 그 여자는 바로 이준혁의 첫사랑이자 불륜녀였다.윤혜인은 웃으며 말했다.“그쪽은 그 불륜녀 아니세요?”이 한마디에 임세희의 얼굴이 붉게 물들었다.“지금 무슨 개소리를!”임세희는 말을 채 잇지 못했고 테이블에 있는 모든 사람이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저년이 직접 그 얘기를 꺼낼 줄이야... 하마터면 힘들게 유지해 온 내 청순 이미지가 무너질 뻔했잖아?!’임세희는 이를 갈며 억지웃음을 지었다.“대표님도 참, 무슨 농담을 그렇게 하세요?”“농담이 맞겠네요. 참 웃긴 일이거든요.”윤혜인은 그녀에게 체면 따위 주지 않았다. 임세희가 먼저 도발하며 자신을 비꼬았으니 말이다.그러자 장 대표가
장 대표는 눈가에 주름이 잡힌 채로 웃으며 말했다.“이렇게 마음 써주다니, 역시 자기야...”그러자 임세희는 애교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다 당신을 위해서죠.”...약 15분 후, 두 사람은 일을 마쳤고 임세희의 얼굴은 붉어져 있었다.‘아니, 이제 막 흥분할까 했더니 벌써 끝난 거야?’장 대표는 경박하게 그녀의 허리를 꼬집으며 물었다.“자기야, 좋았어?”그 말에 임세희는 속으로 콧방귀를 뀌었다.‘좋기는 뭐가 좋아. 이럴 거면 차라리 부르는 서비스가 낫겠다. 걔네들은 세 시간 동안 멈추지 않고 계속하는데, 이 정도로 짧게 해놓고도 좋아한다니... 진짜 별로야.’하지만 그녀는 일부러 얼굴을 붉히며 말했다.“물론이죠, 장 대표님 정말 대단하세요. 어떻게 그렇게 잘하세요...”그 말에 장 대표는 만족해하며 그녀의 봉긋한 가슴을 살짝 꼬집었다.“다 너 같이 매력적인 애를 만나서 그런 거지.”임세희는 아부를 계속했다.“제가 무슨 능력이 있다고 그러세요. 다 장 대표님께서 타고난 거죠...”그녀의 말을 듣고 기분이 좋아진 장 대표는 이번엔 그녀의 엉덩이를 때리며 말했다.“말도 참 잘한단 말이야. 너 설마 나 없을 땐 여기저기 남자 만나고 다니는 거 아니야?”그러자 임세희가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하늘에 맹세해요. 전 장 대표님께만 이렇게 해요...”진실이든 아니든 듣기에는 좋았기에 장 대표의 어깨는 이미 하늘로 솟구칠 듯했다.임세희는 아부를 끝내고 본론으로 들어갔다. 그녀는 대표의 목을 감싸며 말했다.“장 대표님, 올해는 문제없겠죠?”이 말은 올해도 DS가 이길 거라는 의미였다.하지만 이 말을 들은 장 대표의 눈빛이 갑자기 차가워졌다.“올해는 아닐지도 몰라.”그러자 안색이 급변하며 임세희가 다급히 물었다.“그게 무슨 소리예요? 아닐지도 모른다뇨?”“달밤 뒤에 큰손이 있는 것 같아. 올해는 상관에서 공정한 경쟁을 해야 한다 하더라고.”대형 엔터테인먼트 회사는 보통 뒷거래가 많지만 올해 상관이 특별히 이 말을 한 것은 달밤
식사 자리가 조금 길어졌기에 중간에 윤혜인도 바깥 화장실로 갔다.그렇게 화장실에서 나올 때, 그녀는 그 안에서 나오는 한 여자의 뒷모습을 보았다.‘어? 저 뒷모습 어딘가 익숙한데?’곧이어 그 화장실 안에서는 다른 소리가 들려왔다.궁금해진 윤혜인이 안을 보려는데 뒤에서 한 목소리가 들려왔다.“윤혜인 씨.”그녀를 부른 사람은 원지민이었다.원지민은 화장실 쪽을 힐끗 보고 나서 윤혜인에게 말했다.“아까 제대로 인사도 못 했네요.”윤혜인은 그녀를 이상한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분명 자신은 그녀를 모른다고 했는데 왜 굳이 인사를 하려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하지만 곧 원지민이 우아하게 웃으며 자신을 소개했다.“준혁이한테 혜인 씨가 기억을 잃었다는 소리를 들었어요. 그래서 저를 모를 수도 있겠네요. 다시 소개할게요. 나는 원지민이라고 해요. 준혁이와는 어릴 때부터 함께 자랐어요.”그러자 윤혜인은 눈을 살짝 치켜뜨며 물었다.“그게 저랑 무슨 상관이죠?”원지민은 잠시 멈칫하더니, 다시 온화하게 웃었다.“그냥 인사하고 싶어서요.”윤혜인은 차가운 말투로 말했다.“왜 저에게 인사를 하려는 거죠? 그쪽은 이준혁 씨의 친구잖아요? 저랑 무슨 상관이에요? 우리가 친했나요?”연속된 질문에 원지민의 얼굴이 창백해졌다.이선 그룹의 부사장이자 원씨 집안의 큰딸, 서울에서 촉망받는 여성 강자로서, 이렇게 면박을 당해본 지는 오래전 일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애써 참아내며 미소를 지었다.“제 의도를 오해하신 모양이네요. 그냥 우연히 지나가다 보고 인사하고 싶어서 그랬어요.”하지만 윤혜인은 여전히 기회를 주지 않고 냉정하게 말했다.“오해한 거 아니에요. 전 그쪽과 얘기하고 싶지 않아요.”윤혜인은 이유 없이 다른 사람에게 무례하게 대하는 사람이 아니었다.하지만 원지민이 먼저 다가와 인사를 하려는 것에는 분명히 뭔가 속셈이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그녀의 자기소개를 자세히 들어보면 우월감을 뽐내려는 듯한 느낌도 들었으니 말이다. ‘함께 자랐다는 건 둘이 죽마고우였다는
이 말에는 은연중에 원지민의 억울함이 묻어 있었다.그녀가 이렇게 오랜 세월 동안 참아온 이유가 무엇일까?원지민의 조건은 나쁘지 않았고 높은 지위의 재벌가와 결혼하는 것도 문제가 없었다. 그러나 그녀는 유명무실의 약혼녀 신분을 유지하기 위해 수많은 스캔들을 감내했다. 그리고 그 이유는 단지 이준혁이라는 사람 때문이었다.그의 신분과 지위는 원지민에게 있어 금상첨화 격일 뿐이었다. 그녀는 세상에 자신보다 그를 더 사랑할 사람은 없을 것이라고 믿었다.이준혁은 눈을 들어 원지민을 바라보며, 차갑고 무자비한 말을 내뱉었다.“이미 혜인이를 다시 손에 넣기로 마음먹었으니 어머니께는 내가 직접 말씀드릴게. 네 부모님께도 불편하면 내가 다 설명하고 모든 책임은 나한테 돌릴 거야. 네 명예에는 지장 없게 할게.”이 말은 어떠한 여지도 남기지 않았다.원지민은 조금 전 자신이 가졌던 확신이 얼마나 무의미했는지 깨달았다.이준혁의 말은 사실상 그녀와의 관계를 끝내겠다는 선언이었다.비록 처음부터 동의한 것은 아니었지만, 원지민은 뒤에서 이 모든 것을 조작했었다.이준혁은 당시 이런 일에 신경을 쓰지 않았기 때문에 스캔들이 퍼졌을 때에야 알게 되었다.그리고 그때가 되서야 스캔들을 부인했지만, 대중과 미디어는 이준혁이 공개를 원하지 않는다고 믿었지, 그들이 정말 아무 사이가 아니라는 것은 믿지 않았다.나중에 이준혁에게 자신도 이렇게 일찍 결혼하고 싶지 않다고 도움을 부탁한 것은 바로 원지민이었다. 그녀라는 방패 역할이 있는 한 적어도 문현미가 이준혁을 계속 재촉하지는 않을 테니 말이다.눈앞이 새하얘진 원지민은 간신히 감정을 억누르고 있었다.현명했던 그녀는 괜히 이준혁을 붙잡으며 늘어지지 않았고 곧 평소처럼 미소를 지으며 조용히 말했다.“알겠어, 네 말대로 할게.”이준혁은 표정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뒤이어 그가 자리를 떠나려 하자 원지민도 함께 따라나섰다.차 앞에 거의 다 왔을 때, 이준혁은 뒤따라오는 원지민을 보고 우뚝 발걸음을 멈췄다.“주 비서한테 차를 준비
가로등 빛이 원지민의 온화한 얼굴을 비추었지만, 이 순간 그녀의 얼굴에는 한 점의 온기도 없었다.‘내가 얼마나 오랫동안 준혁이를 사랑해왔는데... 누구도 빼앗아 갈 수 없어!’...차 안에서.주훈은 뒷좌석을 바라보며 물었다.“대표님, 어디로 갈까요?”이준혁은 피곤한 듯 미간을 주무르며 담담하게 말했다.“일단 기다려.”기다린다는 것은 아직 나오지 않은 윤혜인을 기다린다는 의미였다.주훈은 이준혁이 피곤해한다는 것을 눈치챘다. 계속 비행기를 타느라 몸이 피곤할 것이 분명했으니 말이다.그는 물었다.“먼저 쉬러 가시는 게 어떨까요? 제가 여기서 기다리겠습니다.”“괜찮아.”이준혁은 문 안쪽을 보다가 다시 시간을 확인하며 이쯤이면 끝났을 거라 생각했다. 그는 걱정하며 말했다.“안에 들어가서 상황을 확인해. 누가 혜인이 괴롭히면 바로 처리하고.”그러자 주훈은 고개를 끄덕이며 차에서 내렸다.방 안에서.목이 말랐던 윤혜인은 따뜻한 물을 마셨다.직접 차를 운전해왔기 때문에 자신은 술을 마실 수 없다고 이미 사람들에게는 설명한 뒤였다.사실 이는 핑계였다. 그녀는 주량이 약해서 믿을 수 없는 사람이 있는 자리에서는 절대 술을 마시지 않았다.저녁 식사 자리의 분위기가 무르익어가고 장 대표는 계속해서 사람들과 ‘기프티콘 던지기’게임을 하고 있었다.윤혜인은 모두의 흥을 깨뜨리지 않으려고 노력했지만, 점점 머리가 어지럽고 입안에 침이 고이며 심장이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결국 참을 수 없었던 그녀가 먼저 떠나려 했지만 막 일어섰을 때 몸이 흔들리며 이마에 땀이 송골송골 맺히기까지 했다.그러자 장 대표는 서둘러 종업원을 불러 윤혜인을 휴게실로 안내하게 했다.그렇게 휴게실에 들어가 앉아 있었지만, 그녀의 두통과 심장의 두근거림이 더욱 심해졌다.이상함을 느낀 윤혜인은 곧 오빠인 곽경천에게 전화를 하려고 했다.‘아참, 핸드폰을 테이블에 두고 왔었지.’윤혜인은 힘겹게 일어나 종업원을 찾아 휴대전화를 가져오려고 했지만, 두 걸음도 채 걷지 못하고 문이 삐
그녀가 당한 모든 불행은 전부 이 남자 때문이었다.어머니의 사랑을 받아야 할 그녀는 이리저리 떠돌며 고통을 감내해야 했다.“원진우 씨, 지금 무슨 헛된 꿈을 꾸는지 모르겠지만 나는 그쪽을 절대 받아들이지 않을 겁니다. 그리고 엄마와 함께 떠날 거예요. 당신이 우리 엄마를 얼마나 오랫동안 감금했는지, 또 얼마나 많은 무고한 사람들을 죽였는지 절대 잊지 않았어요.”윤혜인은 진지한 눈빛으로 그를 쏘아보며 말했다.“당신 같은 사람은 지옥에나 가야 해요!”그러자 원진우는 분노가 가득 찬 윤혜인의 얼굴을 보며 가볍게 웃었다.“이렇게는 대화가 안 되겠군.”그는 손을 휘저으며 말했다.“괜찮아. 우리 세 식구에게는 앞으로 시간이 많으니까. 내가 얼마나 좋은 아버지인지 천천히 알게 될 거야.”윤혜인은 경계심을 품고 원진우를 응시했지만 그가 무슨 꿍꿍이를 꾸미고 있는지 전혀 알 수 없었다.그러나 곧 그 의도를 알게 되었다.원진우는 손짓으로 도우미를 불러 들어오게 한 후, 지시를 내렸다.“아가씨의 짐을 챙겨서 비행기에 실어라.”윤혜인의 창백해진 얼굴을 보며 원진우는 느긋하게 설명했다.“우린 곧 떠날 거라서.”원진우가 윤아름과 자신을 데리고 떠나려 한다는 말에 윤혜인은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그녀는 원진우가 매우 영리한 사람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수십 년 동안 윤아름을 감쪽같이 숨길 수 있었던 걸 보면 그의 경계심이 얼마나 강한지 알 수 있었다.이번에 끌려가면 아버지, 큰오빠, 아이들, 모든 가족과 친구들을 평생 다시 볼 수 없을지도 몰랐다.“난 안 가요!”윤혜인은 근처에 있던 의자를 집어 던지고 온 힘을 다해 문밖으로 뛰쳐나갔다.그러나 문에 도달하자마자 윤혜인은 원진우에게 팔이 붙잡히고 말았다.곧 원진우는 넥타이로 그녀의 손을 묶은 뒤 그대로 어깨에 들쳐 업었다.시간이 촉박했다. 이미 이곳이 노출되었을 가능성이 컸기 때문에 즉시 떠나야 했다.바깥에는 모든 준비가 되어 있었고 떠나기만 하면 전처럼 윤아름과 윤혜인 모두 꽁꽁 아무도 모르게 숨
윤혜인이 갑자기 손을 들자 봉투가 바닥에 떨어지더니 안에 들어있던 자료가 쏟아져 나왔다. 윤혜인은 자료를 보고 싶은 생각보다는 하얀 나무젓가락을 들어 원진우의 목에 찔러넣고 싶었다. 두 사람은 신장 차이가 있었지만 원진우는 지금 고개를 살짝 아래로 숙이고 있어 윤혜인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보지 못했다. 뾰족하게 자른 나무젓가락이 그대로 원진우의 목에 들어갔다. 그러자 피가 나무젓가락을 타고 아래로 후드득 떨어졌다. 하지만 떨어지는 피의 양에서 윤혜인은 글렀다는 걸 알아챘다. 동맥을 찌르지 못했으니 원진우를 막아내기엔 역부족이었다.원진우는 고개를 들어 아래로 흘러내리는 피를 보더니 싸늘하게 굳은 표정으로 윤혜인을 바라봤다.“나 죽이고 싶어요?”원진우가 차분하게 물었다. 까만 눈동자는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을 정도로 너무 고요했다. 윤혜인이 뒤로 물러나며 적당한 거리를 유지했다.“곧 사람들이 나와 엄마를 구하러 들이닥칠 거예요. 도망은 꿈도 꾸지 마요.;원진우는 조금도 놀라지 않았다.“연락이 됐나 보네요.”윤혜인도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윤혜인이 굳이 말해주지 않아도 원진우는 어떻게 된 일인지 충분히 알아챘을 것이다. 아니면 윤혜인도 이렇게 무모하게 나가기보다는 계속 위장하는 걸 선택했을 것이다.원진우는 목에 꽂혀있는 젓가락을 뽑지도 처리하지도 않은 채 눈썹을 추켜세우며 말했다.“제법인데? 역시 내 핏줄이라 그런가? 배짱이 커.”윤혜인이 미간을 찌푸렸다. 간사하기로 소문난 원진우가 친자 감정을 보지 않았을 리가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니 이미 자기 핏줄이 아니라는 것도 알고 있을 것이다.원진우는 윤혜인이 아리송한 표정을 짓자 모든 걸 알아차렸다는 듯 큰 소리로 웃었다.“나 속이려 했나 본데...”원진우가 허리를 굽혀 서류를 줍더니 윤혜인에게 건네줬다.“봐... 네 말이 맞아. 너 정말 내 딸이야.”“...”윤혜인은 원진우의 말을 믿을 수가 없어 귀를 의심했다. 하지만 이내 결과지에 적힌 숫자에 눈길이 갔다.99.99%.그럴
문이 삐걱 열리더니 원진우가 안으로 돌아왔다. 표정이 밝아진 윤아름을 보고 원진우의 표정도 살짝 풀렸지만 그렇다고 단둘이 있는 시간을 연장해 주지는 않았다.“시간 됐어요.”원진우가 덤덤하게 말하더니 윤아름이 의향도 물어보지 않고 윤아름을 번쩍 안아 들고는 방에서 나갔다.다음날.윤아름이 제시간에 나타나자 윤혜인은 그 이야기를 다시 한번 들려줬다. 이야기가 결말까지 이어지자 윤아름의 눈빛이 반짝반짝 빛나기 시작하더니 이성을 잃은 후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이거야?”윤아름이 마술을 부리듯 손목에 묶었던 레이스를 풀더니 윤혜인의 얼굴을 보며 헤헤 웃었다.“이거?”윤혜인은 원하던 물건이 윤아름 몸에 숨겨져 있을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다. 손목에 묶여있는 레이스가 그저 장식이라고만 생각했다. 윤혜인은 얼른 자수를 확인했다. 아니나 다를까 위치 추적기가 아직 들어있었다. 윤혜인은 자수를 더듬거리며 버튼을 찾더니 꾹 눌렀다. 그때 문 쪽에서 들리는 작은 소리에 윤혜인이 얼른 자수를 윤아름의 손목에 묶어줬다.발신기의 발신 기회는 고작 두번이었다. 마지막 한 번을 사용했으니 이제 더는 기회가 없다. 윤혜인은 윤아름이 다시 끌려가는 걸 보고 너무 안타까웠지만 곧 구출될 거라는 희망을 안고 꾹 참았다.한편, 곽경천과 배남준은 북안도를 이 잡듯이 뒤지며 윤혜인을 찾고 있었다. 원진우의 출입국 기록이 없는 걸 봐서는 아직 북안도에 숨어있다는 의미였다.이준혁도 온 힘을 다해 윤혜인을 찾았다. 꼬박 3일을 눈도 붙이지 못하고 돌아치던 이준혁은 의자에 기댄 채 눈을 감고 잠깐 휴식하려 했다.그때 문이 열리더니 주훈이 흥분을 감추지 못하며 안으로 들어왔다.“발신기... 발신기에서 또 한 번의 신호를 보내왔습니다.”이준혁이 얼른 외투를 집어 들더니 지하 차고로 향했다. 가는 길에 주훈은 발신기 주변에 위험 물체가 있는지 탐색했다. 이준혁은 이 소식을 곽경천과 배남준에게 알렸다. 세 사람은 서로 다른 곳에서 출발했지만 목표는 똑같이 윤혜인과 윤아름을 구해내는 것이었다.
“아름아, 왜 그래?”원진우가 앞으로 다가와 윤아름이 도대체 왜 그러는지 확인하려 했다. 뒤를 힐끔 돌아본 윤아름이 원진우를 보고는 화들짝 놀라며 소리를 지르더니 윤혜인의 품으로 파고들었다. 윤아름이 오히려 애가 된 것 같았다.“삼촌, 일단 나가 계세요. 삼촌이 여기 있으면 오히려 자극만 받을 거예요.”윤혜인이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원진우는 자리를 비우고 싶지 않았지만 온몸을 부들부들 떠는 윤아름을 보고 한발 양보했다.“윤혜인 씨, 얌전하게만 있으면 절대 다치게 하지 않는다고 약속할게요. 내 말 무슨 뜻인지 알죠?”원진우가 타이름 반 협박 반으로 말했다. 얕은 수작을 부리면 벌을 내리겠다는 경고였다. 윤혜인은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알겠다고 대답하더니 윤아름의 등을 다독이며 말했다.“엄마, 엄마, 나 혜인이야...”원진우는 겨우 차분해진 윤아름을 보며 더는 자극하기 싫어 방에서 나갔다. 윤혜인은 방문이 닫히는 걸 똑똑히 보았다. 오전에 방안을 둘러보며 카메라가 없다는 건 이미 확인한 상태였다. 새 거처를 바꿔서 그런지 아니면 윤아름을 데리고 떠날 계획이라 그런지 여기는 카메라가 없었다.“엄마, 미안해요. 아팠죠?”윤혜인이 얼른 윤아름의 등을 확인했지만 다행히 살짝 빨개진 정도였다. 이런 위험한 수를 둔 건 윤아름이 조금만 이상해도 원진우가 신경 쓴다는 걸 알고 있었기에 윤아름의 정서를 이용해 원진우를 영향 주려 했다. 다행히 그 방법이 제대로 먹혔다. 윤아름이 아닌 윤혜인이 아프다고 소리를 질렀다면 죽을 정도가 아니고서는 원진우도 절대 흔들리지 않을 것이다.윤아름은 여전히 아무 감각이 없는 듯했지만 윤혜인이 친근하게 다가가도 밀어내지는 않았다. 그저 멍한 눈으로 윤혜인을 뚫어져라 쳐다봤다. 눈을 깜빡였다가 윤혜인이 사라질까 봐 걱정하는 것 같았다. 윤혜인은 윤아름의 팔을 잡고 눈물을 뚝뚝 떨궜다.“엄마...”윤혜인은 한참 동안 속 시원하게 울더니 울음을 그치고는 물었다.“엄마, 그때 그 자수는 어디에다 뒀어요?”윤혜인이 물은 자수는
윤혜인이 문 앞으로 다가가 힘껏 문을 두드리며 큰 소리로 불렀다.“엄마... 엄마...”화들짝 놀란 도우미가 얼른 달려와 윤혜인을 막았다.“아가씨, 이러시면 안 됩니다... 그만하세요.”도우미가 윤혜인을 안더니 힘껏 침대 쪽으로 끌어당겼다. 윤혜인은 문을 두드릴 수 없어 큰 소리로 외칠 수밖에 없었다.“엄마. 엄마. 엄마.”윤혜인이 큰 소리로 외치자 바깥에서 들리던 웅얼거리는 소리가 달라졌다.쿵.문이 격렬하게 흔들렸다.쿵. 쿵. 쿵.휠체어로 문을 힘껏 부수는 소리와 도우미가 다급하게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사모님... 사모님. 안 됩니다. 이러시면 안 돼요.”윤혜인이 더 높은 소리로 불렀다.“엄마. 엄마. 엄마.”방 안에 있던 도우미가 윤혜인의 입술을 틀어막자 윤혜인이 팔다리를 마구 버둥대며 웅얼웅얼 소리를 냈다.문이 다시 한번 격렬하게 흔들리더니 탈칵 하는 소리와 함께 열쇠가 망가졌다. 문이 열리더니 검은 그림자가 안으로 쌩하고 들어왔다. 윤아름은 큰 꽃병 하나를 이고 들어와 윤혜인의 입을 막고 있는 도우미를 내리쳤다. 도우미는 피를 철철 흘리며 바닥에 쓰러지더니 고통에 몸부림치기 시작했다. 윤아름이 휠체어에서 겨우 일어나 윤혜인을 안은 채 놓아주지 않았다. 윤혜인의 두 눈에 눈물이 가득 차올랐다. 정말 오랜만에 엄마를 다시 안아보는 거라 윤혜인도 엄마를 꼭 끌어안았다. 도우미는 바닥에 쓰러져 피를 흘리는 다른 도우미를 보고 윤아름을 말릴 엄두를 내지 못했다. 하긴 윤아름은 아까 정신이 살짝 나간 것 같았다. 게다가 원진우가 윤아름을 다치게 해서는 절대 안 된다고 했기에 과분하게 말렸다가 윤아름이 다치는 날에는 도우미에게 불똥이 튈 수도 있다.이때 소식을 들은 원진우가 다급하게 걸어왔다. 안으로 들어오자마자 얼싸안고 눈물을 흘리는 모녀를 보게 되었다. 원진우는 멈칫하더니 그 자리에 멈춰 섰다.울다가 웃기를 반복하는 윤혜인은 정상 같아 보이지 않았지만 적어도 멍하던 예전과 비기면 정서라는 게 생겼다. 윤혜인이 확실히 윤아름을 치유
원진우는 연속 몇 시간이나 윤혜인을 관찰했다. 관찰한 시간이 오래면 오랠수록 원진우는 윤혜인이 자는 모습이 자신과 쏙 빼닮아 있다고 생각했다. 낯선 곳에서 안전함을 느끼지 못하고 언제든 경계 태세에 들어가는 것도 말이다.“일어났으면 뭐 좀 먹어요. 도우미에게 이쪽으로 가져다주라고 할게요.”원진우가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차분하고 온화한 말투로 말했다. 만약 윤혜인에게 예전 경력이 없었다면 원진우를 좋은 사람이라고 여겼을 수도 있다. 하지만 지금은 전혀 티가 나지 않았다. 적어도 그렇게 잔혹한 사이코패스 성향을 뒤로 잘 숨긴 것 같았다.윤혜인은 고개를 숙이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고개를 들었다가는 원망을 이겨내지 못할 것 같았다. 정서도 도라는 게 있어 일정한 포인트까지 닿으면 되지 아니면 원진우가 오히려 경계할 수도 있다. 하지만 원진우는 그렇게 생각한다기보다 그저 윤혜인이 보면 볼수록 귀엽다고 생각했다.“혜인 씨, 이름은 엄마가 지어준 거예요?”윤혜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윤혜인의 몸에는 금패가 하나 있는데 위에 윤혜인의 이름이 적힌 금패였다. 양아버지가 길다가 그녀를 줍고 주변과 경찰서에 윤혜인이라는 아이가 실종됐는지 물었지만 윤혜인이라는 아이를 잊어버린 적은 없다고 했다. 전에 조사가 어려웠던 건 윤혜인이 원진우의 의해 먼곳에 던져졌기 때문이다. 그때는 기술이 좋지 않아 실종자를 찾는 것도 힘든 일이긴 했다. 게다가 양아버지는 인자한 사람이었기에 윤혜인의 아버지가 되어줄 수 있을 것 같다고만 말할 뿐 이기적이게 그녀의 모든 걸 묵살하지는 않았다. 원래 이름을 쓰겠다고 한 것도 어느 날 친부모님을 만나면 그들이 자기를 알아볼 수 있기를 바랐기 때문이다.“듣기 좋네요.”원진우가 말했다. 윤혜인이 아무 말도 하지 않자 원진우가 뭔가 말하려다가 방향을 잃었다.“일찍 쉬어요.”원진우가 이렇게 말하더니 방에서 빠져나갔다. 도우미가 아침을 가져다줬는데 그야말로 진수성찬이었다. 윤혜인은 그 요리와 밥을 이미 보며 원진우가 아직 독을 타지는 않았을 거라는
윤혜인은 다시 눈을 감으며 잠을 자야 체력을 보존할 수 있다고 자기 자신을 타일렀다. 오빠가 사람을 데리고 오기 전까지는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하지만 아무리 자기 자신을 타일러도 윤혜인의 잠자리는 여전히 뒤숭숭했고 악몽만 연거푸 꿨다. 엄마가 여기 있고, 아버지를 죽인 원수도 여기 있다는 생각에 잠에 들 수가 없었다. 그렇게 겨우 동이 틀 때까지 버틴 윤혜인이 눈을 뜨자 침대맡에 놓인 의자에 누군가 앉아 있는 게 보였다. 원진우였다. 윤혜인은 순간 얼굴을 굳히더니 혹시나 하지 말아야 할 잠꼬대를 하면서 마음에 담아뒀던 말을 전부 쏟아낸 게 아닌지 걱정했다.“깼어요?”원진우는 그런 윤혜인을 보며 덤덤하게 물었다. 윤혜인은 바짝 긴장하고 있었지만 표정만큼은 매우 덤덤했다.“네.”“어제 잠을 설치는 것 같던데요?”원진우가 대수롭지 않은 듯한 표정으로 물었지만 차갑디차가운 눈동자에 담긴 의미가 뭔지는 알아내기 힘들었다.윤혜인은 혹시나 실수한 건 아닌지 의심되어 심장이 철렁했다. 얼른 머리를 굴린 윤혜인이 주먹을 꽉 움켜쥐고 이렇게 말했다.“네. 잠을 잘 자지 못한 건 맞아요. 어제 겪었던 일만 생각하면 아직도 무섭거든요. 나는 정말 거기서 죽는 줄 알았어요.”윤혜인이 솔직하게 말하자 원진우의 눈빛도 살짝 풀렸다.“내가 그렇게 무서워요?”원진우가 물었다.“네. 너무 무서워요. 나를 세 번이나 죽이려고 했는데 어떻게 안 무섭겠어요?”윤혜인은 두려움을 전혀 위장하지 않았다. 원진우와 말할 때도 몸을 살짝 움츠리며 뒤로 빼고는 경계 태세를 취했다. 이에 원진우가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평소 곽진명과는 어떻게 지내는데요?”윤혜인은 원진우가 무슨 뜻으로 묻는지 몰라 잠깐 넋을 잃었다.“곽진명과도 이렇게 지내요?”원진우가 물었다. 윤혜인은 그제야 원진우가 자기를 윤혜인의 아버지로 대입해 곽진명과 비교하고 있다는 걸 알아챘다. 곽진명을 떠올리자 윤혜인의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아빠는 내게 무척이나 잘해줬어요. 그래서 한 번도 무섭다고
원진우가 눈길을 돌리더니 차분한 표정으로 묵묵히 다짐했다. 처음 봤을 때부터 총명한 여자라는 걸 알아챘으니 윤혜인이 한 말과 보이는 행동을 믿으면 함정에 빠지는 거나 다름없다고 말이다. 원진우는 윤아름을 한참 동안 뚫어져라 쳐다보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다 갑자기 무릎을 꿇더니 윤아름의 어깨를 잡고 힘껏 흔들었다.“아름아, 너 나한테 숨기는 거 있어?”윤아름의 동공은 여전히 풀려 있었고 원진우가 무슨 말을 하든 아무 반응이 없었다. 원진우는 윤아름의 어깨를 점점 더 억세게 부여잡더니 이를 악물고 캐물었다.“말해. 말하라고. 있어, 없어?”“...”윤아름은 여전히 별다른 반응이 없었다. 그저 무의식적으로 흥흥거릴 뿐이었다. 진우희가 그렇게 된 걸 본 다음부터 줄곧 이 상태였다.원진우는 윤아름의 멘탈이 이렇게 약할 줄은 몰랐다. 양자를 총으로 쐈다는 소식부터 먼저 알려주고 끔찍한 모습으로 죽어있는 진우희의 시신까지 보여줬다. 지하실에 갇혀 있으면서 몸도 마음도 지칠 대로 지친 윤아름은 충격을 이기지 못하고 그대로 미쳐버리고 말았다. 다 자기 잘못이라고 자책하고 있었다. 곽경천도 그녀를 구하려다 총에 맞았고 진우희도 그녀를 도우려다 원진우에게 잔혹하게 살해당했다. 이 모든 건 다 그녀 때문에 벌어진 일이었다. 그런 생각이 든 순간 이성의 끈이 끊어지고 말았고 그 뒤에 아무리 다시 이어주려 해도 이어지지 않았다. 무의식적인 흥얼거림과 가끔 입가로 흘러내리는 침은 윤아름을 모두가 알아주던 미녀에서 바보로 전락하게 했다. 하지만 미인은 미인인지라 치매에 바보가 되어도 예쁘기만 했다.윤아름은 초점 없는 동공으로 무의식적으로 모니터만 뚫어져라 쳐다봤다. 그때 미약하게나마 “엄마”라고 부르는 소리가 스피커에서 흘러나왔다. 윤아름의 눈동자가 다시 초점을 되찾더니 쿵 하는 소리와 함께 휠체어에서 바닥으로 넘어졌다. 원진우가 부축하려 했지만 윤아름이 그 손을 탁 쳐내더니 미친 듯이 모니터가 있는 쪽으로 기어갔다. 화면으로 보이는 윤혜인은 어느새 몸을 웅크리고 있
그 누구든 오랫동안 보지 못한 아이를 본다면 차분함을 유지하기 힘들 것이다. 게다가 윤아름처럼 아이를 끔찍이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더더욱 그럴 것이다. 하지만 윤아름은 평소와 다를 바 없이 멍한 표정이었다.원진우는 마음이 복잡했다. 이번에는 정말 연기가 아닌 진짜였다. 윤혜인의 쓸모도 이제 끝났기에 원진우는 윤혜인의 손에 올렸던 발을 뗐고는 입을 열었다.“온도 영하 80도로 내려.”“!”윤혜인이 화들짝 놀랐다. 이건 윤혜인을 산채로 냉동시켜 저번에 해내지 못한 일을 해내겠다는 뜻이었다. 원진우가 시야에서 점점 멀어지자 윤혜인은 이번 기회를 놓치고 원진우가 문밖으로 나서는 날에는 죽음밖에 없다는 걸 깨달았다.‘어떻게 해야만 살 수 있을까...’윤혜인은 죽기 싫었다. 살아서 엄마를 구하고 오빠가 오기를 기다리고 싶었다. 윤혜인은 윤아름의 얼굴을 떠올리다 갑자기 자지러지게 소리를 질렀다.“원진우!”윤혜인이 성까지 붙여서 부르자 아니나 다를까 원진우가 걸음을 멈추더니 윤혜인을 돌아봤다. 윤혜인은 혀끝을 꽉 깨물었다. 피비린내가 혀끝에서 느껴져서야 윤혜인은 정신을 조금 차릴 수 있었다. 윤혜인의 목은 마르고 갈라져 있었다.“내가 누구 딸인지 생각해 본 적 없어요?”윤혜인을 보는 원진우의 눈빛에서 보기 드물게 두려움이 묻어났다. 비록 몇초 안 되는 시간이었지만 윤혜인이 그 눈빛을 캐치하고는 반은 성공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나머지 반이야말로 윤혜인이 살 수 있는지 없는지를 결정하는 핵심이었다. 윤혜인은 원진우에게 고민할 기회도 주지 않고 꿋꿋하게 말했다.“삼촌, 그렇게 총명하신 분이 이미 눈치채고 계신 거 아니에요? 경천 오빠랑 나랑 친 남매가 아닌 건 알고 있잖아요. 아버지가 왜 직접 낳지 않고 남자아이를 입양했는지 생각해 본 적 없어요?”원진우가 윤혜인을 보더니 웃음을 터트렸다.“혹시 지금 내 딸이라고 하고 싶은 거예요?”“머리는 썼는데 나도 나이를 먹을 만큼 먹어서 그렇게 쉽게 속지 않아요.”원진우가 이렇게 말하더니 뒤도 돌아보지 않고 밖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