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로등 빛이 원지민의 온화한 얼굴을 비추었지만, 이 순간 그녀의 얼굴에는 한 점의 온기도 없었다.‘내가 얼마나 오랫동안 준혁이를 사랑해왔는데... 누구도 빼앗아 갈 수 없어!’...차 안에서.주훈은 뒷좌석을 바라보며 물었다.“대표님, 어디로 갈까요?”이준혁은 피곤한 듯 미간을 주무르며 담담하게 말했다.“일단 기다려.”기다린다는 것은 아직 나오지 않은 윤혜인을 기다린다는 의미였다.주훈은 이준혁이 피곤해한다는 것을 눈치챘다. 계속 비행기를 타느라 몸이 피곤할 것이 분명했으니 말이다.그는 물었다.“먼저 쉬러 가시는 게 어떨까요? 제가 여기서 기다리겠습니다.”“괜찮아.”이준혁은 문 안쪽을 보다가 다시 시간을 확인하며 이쯤이면 끝났을 거라 생각했다. 그는 걱정하며 말했다.“안에 들어가서 상황을 확인해. 누가 혜인이 괴롭히면 바로 처리하고.”그러자 주훈은 고개를 끄덕이며 차에서 내렸다.방 안에서.목이 말랐던 윤혜인은 따뜻한 물을 마셨다.직접 차를 운전해왔기 때문에 자신은 술을 마실 수 없다고 이미 사람들에게는 설명한 뒤였다.사실 이는 핑계였다. 그녀는 주량이 약해서 믿을 수 없는 사람이 있는 자리에서는 절대 술을 마시지 않았다.저녁 식사 자리의 분위기가 무르익어가고 장 대표는 계속해서 사람들과 ‘기프티콘 던지기’게임을 하고 있었다.윤혜인은 모두의 흥을 깨뜨리지 않으려고 노력했지만, 점점 머리가 어지럽고 입안에 침이 고이며 심장이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결국 참을 수 없었던 그녀가 먼저 떠나려 했지만 막 일어섰을 때 몸이 흔들리며 이마에 땀이 송골송골 맺히기까지 했다.그러자 장 대표는 서둘러 종업원을 불러 윤혜인을 휴게실로 안내하게 했다.그렇게 휴게실에 들어가 앉아 있었지만, 그녀의 두통과 심장의 두근거림이 더욱 심해졌다.이상함을 느낀 윤혜인은 곧 오빠인 곽경천에게 전화를 하려고 했다.‘아참, 핸드폰을 테이블에 두고 왔었지.’윤혜인은 힘겹게 일어나 종업원을 찾아 휴대전화를 가져오려고 했지만, 두 걸음도 채 걷지 못하고 문이 삐
장 대표는 자신의 상징적인 안경을 벗어 던지며 가늘고 음흉한 눈매를 드러냈다.그러더니 그는 천천히 윤혜인 앞에 쪼그리고 앉았다.“너무 예쁜 얼굴이야. 유명한 연예인보다도 훨씬 아름다워.”그는 그녀의 어깨를 세게 때리며 침을 흘리기 시작했다.“오늘 밤은 정말 황금 같은 밤이군!”말을 마치자마자 그는 큰 손으로 윤혜인을 휴게실 소파로 끌고 갔다.“살려주세요! 도와주세요!”윤혜인은 필사적으로 소리쳤고 손가락으로 카펫을 어찌나 세게 잡아당겼는지 손톱에서 피가 나기도 했다.“이 빌어먹을 년!”장 대표는 그녀를 발로 차며 소리쳤다.“다시 소리치면 죽여버릴 거야!”허리에 극심한 통증이 느껴졌지만, 윤혜인은 포기하지 않고 소리쳤다.화가 난 장 대표는 그녀의 머리카락을 잡아당기며 소파 쿠션으로 윤혜인의 얼굴을 짓누르기도 했다. 두피가 찢어지는 것처럼 아팠고 머리카락은 여러 가닥이 뽑혔다. 윤혜인은 눈물이 흘러나왔지만 동시에 머리가 약간 맑아졌다.그녀는 울면서 작은 목소리로 애원했다.“장 대표님, 제발, 때리지 마세요... 제가 잘못했어요, 말 들을게요...”이 순간, 윤혜인의 얼굴은 붉게 물들었고 눈물을 흘린 탓에 속눈썹도 촉촉이 젖어 있어 매우 애처롭게 보였다.그러자 참을 수 없이 흥분한 장 대표는 바지를 풀기 시작하며 더러운 말을 내뱉었다.“이제야 말을 듣겠다는 거야? 오빠가 잘해줄게...”뒤이어 그는 그녀에게 달려들며 입맛을 다셨다. 그 눈빛에는 불타는 욕망이 가득했다.윤혜인은 기회가 한 번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현재 그녀의 힘으로도 단 한 번의 기회에만 버틸 수 있었다.순간, 그녀는 목에 걸려 있던 작은 스프레이를 잡아당겼다.“치익-”작은 병에서 나온 스프레이가 남자의 눈에 뿌려졌다.“아아아아!!!”장 대표는 주먹을 허공에 휘두르며 소리쳤다.“이년이! 너 내 눈에 뭐 뿌린 거야?!”보통 가방에 호신용 스프레이를 넣어 두었지만 다행히 윤혜인은 오늘 목걸이에도 하나를 준비해 두었다.그녀는 머리를 숙여 남자의 주먹을
윤혜인은 기억을 더듬어 엘리베이터 쪽으로 달렸다. 흐릿해진 정신으로 그녀는 엘리베이터가 층마다 올라오고 있는 것을 바라보았다.하지만 그때.“이 빌어먹을 년!”소름 끼치는 목소리에 윤혜인은 온몸의 털이 곤두섰다.장 대표가 목숨을 걸고 쫓아온 것이었다!이미 밖으로 나오기도 했고 호텔에는 CCTV가 있기 때문에 윤혜인은 장 대표가 이렇게까지 무리해서 쫓아오지는 않으리라 생각했다.그런데 그는 셔츠가 풀린 상태로 상의를 걸친 채, 바지도 제대로 입지 않고 쫓아오는 것이었다.윤혜인은 상황이 이상하다는 것을 느꼈지만 더 이상 생각할 수 없었다. 그녀는 벽에 기대어 엘리베이터 버튼을 계속 눌렀다. 엘리베이터가 열리기만을, 그리고 안에 누군가 있어 자신을 구해주기만을 간절히 바랐다.장 대표는 비틀거리며 다가와 침을 흘리며 말했다.“이 빌어먹을 년... 나한테 약 먹여놓고 어딜 감히 도망가려고...”말을 마치자마자 그는 윤혜인의 머리카락을 움켜잡으며 자신의 쪽으로 끌어당겼다.“아! 이거 놔요!”윤혜인은 자신의 머리카락을 꽉 잡고 소리쳤다.“살려주세요!”그때.“띵동-”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윤혜인은 희미하게 회색과 푸른색이 섞인 눈동자를 바라보며 소리쳤다.“살려주세요! 도와주세요!”“짝!”그러자 장 대표가 그녀를 때리며 말했다.“다시 소리쳐 봐. 죽여버릴 테니까.”엘리베이터 안에서 연규성은 벽에 기대어 한 손을 주머니에 넣고 있었다.이런 상황에 그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예전에 한 번 도와준 적이 있긴 했지만 그 여자가 자신은 그저 남자친구와 잠시 다퉜던 것뿐, 연규성이 이렇게 중상을 입힐 정도로 때릴 필요는 없었다며 오히려 그를 고소했었고 그 바람에 연규성은 친구들에게 자그마치 1년 동안이나 놀림을 받았었다!장 대표에게 끌려 모퉁이로 사라져가며 윤혜인의 목소리를 점점 약해졌다.그러다 문득 뇌리에 뭔가가 스쳐 지나갔고 그녀는 곧 날카로운 손톱으로 살을 파낼 듯 세게 장 대표의 손목을 꼬집었다.몰려오는 고통에 결국 손을 놓은 장 대표는
연규성의 품에 감도는 은은한 향기는 윤혜인의 향기였다.이 향기는 다른 여자에게서는 절대 맡을 수 없는 것이었다.사실 이것은 향수가 아닌 윤혜인의 몸에서 나는 자연스러운 체취였다. 하지만 연규성은 이를 알 리 없었다.그는 불편해하며 고개를 돌렸다.“이러다... 나 목 졸라 죽이겠네...”엘리베이터가 닫히기 전, 장 대표가 다시 달려왔다. 그의 눈은 벌겋게 충혈되어 있었고 격렬하게 화를 내고 있었다.“놔, 그 손 놔!”약에 중독된 듯 장 대표의 모습은 정상이 아니었다.연규성은 귀찮은 듯한 표정을 거두고 윤혜인의 등을 단단히 받치며 한 손으로 똑바로 세운 채로 말했다.“한번 덤벼보시던지.”곧이어 잠시 멈칫하던 것을 뒤로하고 장 대표가 달려들려 했지만, 연규성은 그를 공중에서 발로 차 넘어뜨렸다.“쿵!”엄청난 소리가 났다.젊은 남자의 힘은 약에 중독된 윤혜인과 비교할 수 없었다.그는 별다른 힘을 들이지 않고 장 대표를 바닥에 내팽개쳤고, 장 대표는 비명을 질렀다.그렇게 엘리베이터 문이 닫혔고 연규성은 하행 버튼을 눌렀다.‘병원에 데려가야겠네.’밀폐된 공간에는 두 사람만이 남았다.윤혜인은 무의식중에 연규성을 안전한 존재로 느꼈다. 그는 그녀에게 관심이 없었고, 게다가 서로 알던 사이였기 때문에 연규성이 자신에게 해를 끼치지 않을 것이라는 확신이 있었다.긴장이 풀리자, 윤혜인은 목과 가슴이 타오르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온몸이 뜨거워지고 힘이 빠져 결국 그녀는 다시 남자에게 기댔다.어찌나 몸이 뜨거운지 연규성은 자신이 뜨거운 감자를 안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그녀를 밀어내는 것도 아니었지만 너무 가까이 있는 것도 힘들었다. 마치 불 위에 올려진 것처럼, 윤혜인을 안고 있는 것만으로도 연규성은 땀이 흐르기 시작했다.눈을 뜨고 있었지만, 윤혜인의 의식은 자신을 통제하지 못하고 있었다.숨이 점점 가빠지고 몸이 더욱 뜨거워졌다. 약효가 그녀의 의식을 점점 이기고 있는 것이었다.그러던 그녀는 옷깃을 무심코 끌어당기며 연규성을 바라
이때, 주훈이 다가와 엄숙한 표정으로 보고했다.“대표님, 외부의 기자들은 일단 저지했습니다.”어찌 된 일인지, 오늘 밤 시누 엔터의 대표가 불법 행위를 저질렀다는 큰 스캔들이 터져 나왔고 이어서 많은 기자들이 호텔 앞을 에워쌌다.이 상태에서 윤혜인이 밖으로 나가면 곧바로 노출될 것이 분명했다.이준혁은 윤혜인을 차에 태우고 자신도 들어갔다. 연규성은 아직도 상황을 이해하지 못한 채 멍하니 서 있었다.곧이어 그도 발걸음을 옮겨 차에 타려 했지만, 주훈이 막았다.“도련님, 작은 문제가 생겼습니다. 혹시 이 여성분을 데리고 나가 외부 기자들의 주의를 끌어주실 수 있을까요? 저희는 사모...”주훈은 멈칫하더니 이내 다시 입을 열었다.“윤혜인 씨를 모시고 치료받으러 가보겠습니다.”연규성은 상황을 듣고는 즉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여자를 차에 태우고 엔진을 켜고는 빠르게 출발했다.그렇게 연규성의 차가 많은 주목을 끌고 난 후, 검은색 고급 승용차는 다른 출구로 조용히 빠져나갔다.병원으로 가는 길.윤혜인의 이성은 이미 무너져 있었다.‘너무 뜨거워... 너무 힘들어...’마치 속에 있는 열이 타올라 몸속의 모든 액체가 증발해버릴 것만 같았다.그녀의 손과 발은 힘이 빠지고 무기력해져 갔다.어떤 알 수 없는 공허감이 윤혜인의 연약한 신경을 계속해서 자극했다.마치 물이 없는 물주머니가 된 것 같은 기분에 그녀의 머릿속에는 오직 채워지고 싶다는 생각만 가득했다. 정말이지 참을 수 없을 정도로 고통스러웠다.“움직이지 마.”남자는 그녀가 더 가까이 다가오는 것을 막으며 말했다.그녀가 더 가까이 다가오면 더 원하게 될 것을 알기 때문이었다.그러나 이준혁이 몸을 멀리하자, 윤혜인은 마치 작은 고양이처럼 눈을 반쯤 감고 그의 가슴에 얼굴을 문지르기 시작했다.단단한 가슴과 남성 특유의 체온이 그녀의 신경을 더욱 자극했다. 순간 그녀의 얼굴뿐만 아니라 몸 전체가 분홍빛으로 물들었다.이준혁은 침을 꿀꺽 삼키며 진정해보려 애썼다.그는 윤혜인의 어깨를
주훈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재빨리 칸막이를 올렸다.그 역시 젊고 혈기왕성한 청년이었기 때문에, 잘생긴 남녀가 서로 키스하는 장면을 보는 것은 매우 참기 어려웠다.칸막이가 올라가자, 이준혁은 바로 넥타이를 풀어 윤혜인의 손을 묶었다.그는 지금 윤혜인의 기억이 돌아오지 않은 상태에서 그녀와 접촉하는 것을 허락했다가는 나중에 그녀가 정신을 차리고 자신을 몰라볼 것을 우려했다.‘내가 어떻게 날 덜 싫어하게 만들었는데... 노력이 헛되게 놔둘 수는 없지.’하지만 칸막이를 올린 또 다른 이유는, 다른 남자들이 그녀의 모습을 보는 것을 원치 않았기 때문도 있었다.심지어 그녀의 목소리조차 듣게 하고 싶지 않았다.자신을 움직이지 못하게 만들자, 억울해진 윤혜인은 두 번 울고 말았다.몸이 하도 뜨거워서 터질 것만 같았고 너무 힘들고 불편했다.이준혁은 그녀를 아이처럼 달래며 말했다.“힘들지? 조금만 더 기다리면 괜찮아질 거야.”윤혜인은 혼란스러운 정신으로 말은 못 했지만, 표정만으로도 거짓말을 하는 게 분명하다며 꾸짖는 것 같았다.‘거짓말쟁이. 전보다도 더 뜨겁고 목도 마르고 배고프고 갈증도 계속 나고... 전혀 나아지지 않았구먼!’그녀는 무의식적으로 신음소리를 내며 뭔가를 먹고 싶어 했다. 너무 억울하고 화가 났다.그러나 반면 이준혁은 이런 그녀의 모습이 조금 웃겼다.현재 윤혜인의 모습이 어린 아림이가 입술을 삐쭉거리는 모습과 비슷해서 말이다.‘아림이...’아림이를 떠올리자 이준혁의 눈빛이 어두워졌다.분명 그는 다른 사람과 감정을 나누는 타입이 아니었지만, 윤혜인과 다른 남자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에 대해서는 미워할 수 없었다. 그 귀여운 아기 얼굴을 생각하면 마음이 부드러워졌다.그는 심지어 자신이 양아버지로서도 좋은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상상하기도 했다.그러나 그는 또한 그 아이를 생각하게 되는 것은 별수 없었다.‘나와 혜인이 사이에 아이가 만약 아직 있었다면... 아림이보다 더 컸을 것이고 아림이처럼 귀여웠을 텐데.’하지만 이
이준혁은 윤혜인의 가냘픈 허리를 잡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지금 조금 갈증을 풀게 해줄 테니, 나중에 정신 차리면 화내지 마.”그러자 윤혜인은 마치 즐거움을 찾은 것처럼 더욱 적극적으로 행동했다.마침내 방에 도착하자, 이준혁은 그녀를 욕조에 넣고 차가운 물을 틀었다.너무 차가울까 봐 걱정되어 자신도 같이 들어가 그녀를 껴안았다.하지만 윤혜인은 얌전하게 굴지 않고 계속해서 이준혁의 손가락을 물며 애처롭게 울부짖었다.불타는 욕망을 해소할 길이 없어 ‘스스로를 위로’하는 것이었다. 남자는 단순히 그녀의 위안을 위한 도구일 뿐이었다.이런 생각이 들자 이준혁은 불쾌해졌다. 그는 곧 자신의 손가락을 빼내고 그녀의 얼굴을 돌려 물었다.“내가 누구야?”윤혜인은 욕망에 가득 찬 눈을 뜨고 어리둥절하게 말했다.“이준혁...”익숙한 향기와 촉감에 그녀는 본능적으로 그의 이름을 불렀다.마치 하나의 낙인처럼, 그녀는 정신이 혼미한 상태에서도 이 남자에게 충실함을 유지하고 있었다.그러자 이준혁의 마음은 단숨에 달콤함으로 가득 찼다. 그 순간 윤혜인은 그를 기억하지 못하는 윤혜인이 아닌, 그와 가장 가까웠던 시절의 윤혜인처럼 보였다.“우리 혜인이, 정말 착하네.”그는 부드럽게 그녀의 이마에 입맞춤하며 따뜻하게 말했다.“딩동—”문 벨이 울렸다.이준혁은 김성훈이 도착한 것을 알았다.순간 그는 이 상황에서 김성훈이 오지 않기를 바랐다.‘아니지, 안 돼. 그래도 지금은 혜인이랑 할 수 없어.’윤혜인이 말을 듣지 않자, 결국 그는 그녀를 안고 문을 열었다.문이 열리자 김성훈은 이준혁이 이불로 꽁꽁 싸맨 여자를 안고 있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이런 상황에서 날 왜 부른 거야? 네가 직접 도울 수 있잖아!”이준혁은 그의 농담에 신경 쓰지 않고 차갑게 말했다.“쓸데없는 말 하지 마.”조금 전의 말은 이준혁이 변했다는 것을 안 김성훈이 일부러 그를 웃기려고 한 말이었다. 그는 의료 상자를 들고 말했다.“내려놔, 주사 놔야 해.”그렇게 윤혜인을 침실
“아니, 난!”김성훈은 말문이 막혔다. 그는 이준혁의 논리를 따라갈 수 없었다.“정말 넌 미친놈이야!”이준혁은 윤혜인의 팔을 잡고 김성훈에게 주사를 놓게 했지만, 조금도 그와 접촉하지 않게 했다.때문에 김성훈은 이를 갈며 진정제를 주사했다.“후유증이 있을 수 있어. 열이 나거나 갈증이 생길 수 있으니 물을 많이 마시게 해서 빠르게 해독되도록 해.”이준혁은 그의 말을 신중히 듣고 나서 김성훈을 문밖으로 밀어냈다.“고마워.”김성훈은 화를 내려다 안심하며 말했다.“그래도 양심은 있구먼...”그러나 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쾅!”그 모습에 김성훈은 속으로 생각했다.‘양심이 있긴 하지만... 정말 조금 있네.’방 안에서, 윤혜인은 이미 조용히 잠들어 있었다.이준혁은 그녀가 더위를 느낄까 봐 두꺼운 이불을 걷어내고 얇은 이불로 바꿔 덮어주었다.그렇게 밤새 그녀가 열이 날까 봐 걱정되어 그는 옷을 입은 채로 침대 옆에 앉아 지켜보았다.밤이 되자, 윤혜인이 잠결에 “물...”이라고 중얼거렸다.그러자 이준혁은 벌떡 깨어나 따뜻한 물을 준비해 그녀를 일으키고는 물을 마시게 했다.조금씩, 더 이상 마시지 못할 때가 되어서야 윤혜인은 고개를 돌렸고 이준혁이 물컵을 내려놓고 돌아봤을 때 그녀는 다시 잠들어 있었다.이마를 만져보니 다행히도 열이 나지 않았다. 그래도 그는 밤이 거의 새어 갈 때까지 지켜보았다. 김성훈이 밤새 열이 나지 않는 한 괜찮다고 했으니 말이다.이준혁은 베란다로 나가 담배를 한 대 피우고, 주훈에게 전화를 걸어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어젯밤 그 사건의 원인은 찾았나?”“장 대표도 누군가에 의해 약을 먹은 것 같습니다. 지금은 호텔에서 여성 종업원을 성희롱하려다 현장에서 붙잡혀 경찰서에 있고요.”주훈은 계속 보고했다.“장 대표의 가족들이 여성 종업원과 사적으로 합의 중이라 들었습니다. 합의금이 꽤 많아서 아마 곧 풀려날 것 같아요.”“잘 지켜보다가 풀려나면 정확히 물어보고 처리해.”전화를
주석훈이 웃으며 말했다.“허허. 몰랐죠? 저 평소엔 되게 허당이에요.”“변호사님 은근히 유머가 넘친다니까요.”주석훈은 언변에 능했기에 단 몇 마디에 간호사가 함박꽃 같은 웃음을 지었다.“저기는 왜 저런 거래요? 아까 길을 잘못 들었는데 막더라고요.”주석훈이 물었다.“아, 저기요.”간호사가 고개도 들지 않고 대답했다.“어떤 여자애 한 명 들어왔는데 가족이 살해당했다나 뭐라나. 실어증에 걸려서 한마디도 못 했는데 평소 믿고 따르던 언니가 와서 입을 열었다고 들었어요.”주석훈이 물었다.“여자애요? 많이 놀랐나 보네요.”“그러게요.”간호사가 대답했다.“가족이 칼 맞고 죽었는데 누가 견딜 수 있겠어요.”“억울한 사건이 얼마나 많은데 범인만 잡아도 다행 아니겠어요?”주석훈이 말했다.“어려울 것 같던데요?”간호사가 말했다.“뭐 유용한 단서가 안 나왔나 보더라고요. 아빠가 여자애를 지키겠다고 같이 들어가지 않아서 아무것도 못 봤대요. 진술한 상황이 경찰이 알고 있는 상황과 별반 다를 게 없어서 경찰도 어떻게 풀어나가야 할지 모르겠다고 한숨만 내쉬더라고요.”간호사가 이렇게 많은 내용을 알 수 있었던 건 안지영의 간호를 책임진 간호사가 바로 그녀였기 때문이다.주석훈이 더 물으려는데 다른 간호사가 들어왔다.“어? 이 간호사 있었네? 저쪽 눈코 뜰 새 없이 바쁘니까 빨리 가봐.”이 간호사가 말했다.“알겠어요. 이것만 마무리하고 갈게요.”치료를 받은 주석훈이 이 간호사에게 고맙다고 말하자 이 간호사가 얼굴을 붉히며 괜찮다고 말했다.주석훈이 멀리 가고 나서야 다른 간호사가 이렇게 말했다.“이 간호사, 아까 저 사람이랑 무슨 얘기 했어? 저 병실에서 나온 얘기는 함부로 하면 안 돼.”“저 별말 안 했어요. 다들 아는 내용 얘기해준 거예요.”이 상황에 자기가 무슨 말을 했는지 인정하면 바보나 다름없었다.“그래. 앞으로 조심해. 자칫하다간 징계 먹을 수도 있어.”나이 많은 간호사가 귀띔했다.“알아요.”이 간호사가 얼른 대답했다.“아
소원이 길게 한숨을 내쉬더니 말했다.“잘됐다. 정말 너무 잘됐어요. 이번엔 하느님이 제 소원을 들어주셨네요.”소원이 주석훈을 바라보며 말했다.“그래도 제가 신세를 졌으니 제 도움이 필요하면 언제든 말해줘요.”감염되지 않았다고 해서 그냥 넘어갈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다. 확률이 반반이라 주석훈도 엄청난 스트레스를 받았을 텐데 주석훈의 마음이 그만큼 단단하니 망정이지 다른 사람 같으면 진작 멘탈이 무너졌을 것이다.소원은 다시 한번 주석훈이 대단하다고 생각했다.“별거 아니니까 마음에 담아두지 마요.”주석훈이 활짝 웃으며 말했다.“소원 씨가 여기 있다는 건 유진도 여기 입원해 있는 건가요?”소원이 고개를 저었다.“유진은 여기 없어요. 아는 동생 좀 보려고 여기 온 거예요.”“동생이요?”주석훈이 물었다.“소원 씨에게 동생이 있는 줄은 몰랐네요. 혹시 괜찮으면 같이 보러 갈까요?”뜬금없는 초대였지만 원래도 열정적인 주석훈이 말하니 뭔가 자연스러워 보이기도 했다. 소원이 별다른 생각 없이 이렇게 말했다.“괜찮아요. 이미 만나고 나오는 길에요. 전에 알고 지내던 동생인데 지금쯤 이미 쉬려고 누웠을 거예요.”“아.”주석훈이 말했다.“그러면 데려다줄까요?”“아니요. 아니요.”소원이 얼른 대답했다.“데려다줄 사람이 있어요.”말이 끝나기 바쁘게 육경한이 다가왔다. 까만 트렌치코트가 육경한의 키를 더 커 보이게 했는데 강압적인 아우라를 뿜어내며 소원에게로 걸어왔다.“가자.”육경한은 옆에 선 주석훈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았지만 육경한과 구면인 주석훈이 먼저 입을 열었다.“대표님.”육경한은 작은 변호사 따윈 상대할 가치가 없다는 것처럼 여전히 대꾸하지 않았다. 이에 난감해진 소원이 분위기를 만회하려고 이렇게 말했다.“나오다가 마침 주 변호사님을 만났어.”육경한이 그제야 옆에 선 주석훈을 보며 ‘응’이라고 대답했다.주석훈은 전혀 난감해하지 않고 웃으며 말했다.“두 분 사이가 좋아 보이네요. 변호사로서 의뢰인과 피고가 잘 지내고 있으니 뿌
제일 의심 가는 사람은 진아연이었다. 안상철은 여자관계가 간단한 편이었고 오랫동안 여자 친구 하나 사귀지 않고 싱글을 유지하면서 모든 심혈을 딸과 어른을 모시는 데 썼다.박혜순도 안상철을 여러 번 타일렀지만 그럴 때마다 안상철은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기 싫다며 거절했다. 그렇다면 싱글인 안상철이 이렇게 격렬하게 다툴 수 있는 사람은 진아연일 가능성이 컸다.경찰 조사가 끝나고 안지영도 검사를 받고 쉬어야 했기에 강민혜는 소원과 함께 병실을 나섰다. 밖으로 나와서야 소원은 자신의 추측을 털어놓았다.소원은 진아연의 힘으로 안상철을 죽이기엔 턱없이 부족하다고 생각했다. 한 방도 아닌 60방이라면 더더욱 말이다. 안상철은 180은 되는 큰 키를 가졌기에 큰 부상을 입어 몸이 허약해 툭하면 쓰러지는 진아연을 이기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게다가 진아연은 얼마 전에 손목을 그으면서 피를 많이 흘렸던 터라 짧은 시간 내에 회복하긴 어려웠다. 그렇다면 이 사건에 진아연 말고도 다른 사람이 개입했다는 의미였다.멀쩡히 살아움직이는 사람을 60번이나 찔렀다는 건 웬만한 정신상태로 저지를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이런 사이코패스가 잡히지 않고 사회에 섞여 들어간다면 악영향이 만만치 않을 것이다.강민혜의 생각도 소원과 별반 다를 게 없었다. 진아연이 입원했을 때 강민혜도 만나본 적이 있어서 알고 있었다. 진아연은 절대 안상철을 쓰러트릴 만큼 강한 사람이 아니었다. 부검 결과를 보면 약물을 사용한 흔적이 없는데 그렇다는 건 안상철을 그렇게 만든 사람이 진아연이 아니라는 의미였다. 다른 건 몰라도 진아연 같은 몸집이라면 3, 4명이 더 와도 절대 안상철을 이기지 못했을 것이다.그래도 일단 진아연을 잡는 게 우선이었다. 진아연을 잡아야만 다음 단계로 넘어갈 수 있지만 문제는 진아연이 어디로 숨었는지 모른다는 것이다.소원은 의문만 가득 품은 채 병원 밖으로 나가다가 주석훈과 마주쳤다.“소원 씨, 여기서 마주치네요.”주석훈이 소원을 향해 헤벌쭉 웃자 소원이 멍한 표정으로 물었
“내가 너무 욕심이 많았어요.”소원은 안지영이 하는 말을 조용히 들어줬다.“내가 바이올린 계속하겠다고 하지만 않았어도 아버지가 그 돈을 다시 찾으러 가지는 않았을 거예요. 그러면 이렇게 될 일도 없었을 텐데.”안지영이 갈라질 대로 갈라진 목소리로 말했다. 안상철이 소원에게 사건의 전말을 들려줄 때 진아연이 그 돈을 줬는지 말았는지는 말하지 않았다. 안상철의 말대로라면 진아연이 돈을 주려다가 결국 주지 않았으니 그 돈이 없어야 맞았지만 실제로 안상철은 그때 돈을 받은 것이다. 하긴 안상철이 바보도 아니고 아무런 보수 없이 그런 위험한 일을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아무리 상대가 딸의 병을 고쳐주겠다고 약속해도 외국으로 나가야 가능한 일이었기에 확실치도 않은 약속을 쉽게 믿지 못했을 테고 일단은 확실한 무언가, 즉 돈을 줘야만 안상철이 소진용을 찾아갈 결심을 내렸을 것이다.하지만 안상철은 결국 이 일을 소원에게 말하지 않았다. 사실대로 말했다면 소원은 안상철이 그 돈을 찾으러 가지 못하게 막았을 것이고 그 돈은 결국 경찰에게 빼앗길지도 모른다. 어떻게 보면 결국 안상철의 탐욕이 그를 죽음으로 내몬 것이다.소원이 안지영을 위로했다.“아니에요. 그게 왜 지영 씨 탓이에요. 나쁜 사람이 몹쓸 짓을 저지른 건데. 지영 씨도 아버지가 그렇게 될 줄은 몰랐잖아요. 지영 씨, 일단 그날 있었던 일을 경찰에게 알리는 게 좋겠어요. 최대한 자세하게 빠트린 것 없이 말해야 경찰도 빨리 범인을 찾을 수 있고 삼촌도 편히 눈 감을 수 있을 거예요. 내 말 무슨 말인지 알죠?”안지영이 고개를 끄덕였다. 안지영도 말하고 싶지 않은 게 아니라 그저 너무 무서울 뿐이었는데 소원이 곁에 있으니 무서움이 한결 가시는 것 같았다. 어릴 적부터 소원을 믿고 의지해왔는데 최근에는 소원 덕분에 살아날 수 있었다.안지영은 경찰 조사를 받을 때 두려움을 가시기 위해 소원에게 옆에 앉아 있어 달라고 제안했고 강민혜도 안지영의 제안을 받아들여 진술하는 내내 소원이 옆에 있을 수 있도록 했다.안지
소원의 설명을 들은 육경한이 미간을 찌푸렸다.“아직 명확해진 게 아니니까 너도 너무 걱정하지 마. 그래도 안전에는 조심해야 되니까 사람 4명 붙여줄게. 유진이는 내가 알아서 보안 강화하고.”육경한은 소원이 거절할 것 같아 그러는지 얼른 한마디 덧붙였다.“너는 지금 홀몸이 아니야. 내가 이러는 것도 다 아이를 보호하기 위해서고.”육경한의 말이 맞았기에 소원도 거절하지 않았다. 이제 홀몸이 아니었고 유진도 엄마가 없어서는 안 되기에 일이 마무리될 때까지 어떻게든 조심하면서 안전에 심혈을 기울여야 했다.육경한이 골라준 보디가드는 의심할 여지 없는 안전한 사람들이었기에 소원도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 안상철도 소진용이 제일 믿고 맡긴 사람이었지만 결국 아버지를 배신한 걸 보면 이 세상에 영원히 믿을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지금 갈 거지? 내가 데려다줄게.”육경한은 소원이 반대하지 않자 경찰이 지정한 병원으로 데려다주겠다고 말했다. 그렇게 병원에 도착한 두 사람은 강민혜의 안내를 받아 안지영의 병실에 도착했다.문을 열어보니 안지영이 자그마한 몸집으로 무릎을 꽉 끌어안은 채 머리를 파묻고 있었다. 며칠 사이에 종이 인형처럼 삐쩍 마른 안지영을 보니 너무 마음이 아팠다.가까이 다가간 소원이 나지막한 목소리로 불렀다.“지영 씨...”안지영이 소원의 목소리를 듣지 못한 것처럼 고개를 들지도, 다른 반응도 보이지 않자 소원이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지영 씨, 지금 어떤 기분인지 알아요. 하지만 경찰에게 단서를 줘야만 아버지를 죽인 범인을 잡을 수 있어요...”가족을 잃은 슬픔은 소원도 겪어봐서 잘 알았다. 마지막 인사도 형체를 알아볼 수 없는 시신을 보며 했으니 그 아쉬움과 후회는 사람을 통째로 집어삼킬 만큼 컸다. 소원은 그때 왜 아버지와 더 많은 시간을 보내지 않았는지, 왜 같이 밥을 먹고 얘기를 나누지 않았는지 후회했지만 그땐 이미 너무 늦어버렸다.안지영을 다독이던 소원이 더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안지영을 꼭 끌어안았다. 얼마나 지났을까, 안지
소원이 육경한을 불러세우더니 따라서 나오며 병실 문을 닫았다.“현재 일은 내가 오해했어. 미안해. 그리고 고마워.”소원이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소원은 옳고 그름에 명확한 사람이었기에 잘못된 부분이 있다면 바로 인정하는 편이었다. 허심탄회한 모습은 쉽게 가질 수 없는 좋은 태도였다.육경한은 기분이 좋아졌는지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지만 티가 나지는 않았다.“도와준 거 아니야.”육경한은 연적을 도와줬다는 사실을 인정하기 싫은 것 같았다. 소원도 더는 이 문제에 집착하지 않고 본론으로 돌아왔다.“진아연을 찾고 있다고 들었는데 나도 찾고 있어. 찾으면 바로 나한테 알려줄래?”진아연이 잡혀들어가기 전에 물어봐야 알 수 있는 것들이 있었다. 만약 교활한 진아연을 그대로 들여보낸다면 사실을 말하지 않을 게 뻔했고 베일에 싸인 배후의 지도를 받을 수도 있었다. 아무튼 직접 물어봐야 마음이 놓일 것 같았다.“응. 알겠어. 너는 일단 가만히 있어. 내가 찾고 있으니까.”진아연의 배후에 누가 있는지 아무도 몰랐기에 진아연을 찾는 일은 매우 위험한 일이었다. 그 배후는 신비로울 뿐만 아니라 수단도 만만치 않았다.소원은 일단 고개를 끄덕였지만 의견을 수용하지 않을 생각이었다. 아버지의 죽음과 관련된 일인데 무슨 일이 있든 직접 헤쳐나가고 싶었다.그때 소원의 핸드폰이 울렸다. 강민혜가 걸어온 전화였다.“소원 씨, 안상철이 죽었어요.”전화를 받자마자 강민혜의 무거운 목소리가 들려왔다.쿵.머릿속에서 뭔가 터져버린 것 같았다.‘삼촌이 왜?’소원의 계획대로라면 안상철은 지금쯤 안지영과 외국에 나가 있어야 하는데 왜 갑자기 죽어버린 건지 의문이었다.‘지영 씨는...’소원이 얼른 물었다.“그러면 지영 씨는요? 딸은 어떻게 됐어요?”강민혜가 말했다.“딸은 안전한 상태지만 충격을 많이 받아서 병원에서 치료받고 있어요. 입을 열려 하지 않아서 경찰이 무슨 질문을 하든 침묵으로 일관하고 있어요.”“어... 어떻게 이런 일이...”소원은 믿을 수가 없었다. 안
그때 문 뒤에서 누군가 걸어 나왔다. 소원이었다.소원도 두 사람의 대화를 들었다. 이해하기 어려운 내용은 아니었지만 육경한이 이 정도로 양보했다는 것에 놀랐을 뿐이었다.“현재야...”“누나...”두 사람이 동시에 입을 열었다.“네가 먼저 말해.”소원이 양보하자 서현재가 다시 말을 이어 나갔다.“누나, 그거 알아요? 내가 지금까지 이렇게 노력한 건 다 안정된 삶을 되찾고 누나랑 행복해지기 위해서였어요. 하지만 지금은...”서현재가 뜸을 들이더니 씁쓸하게 말했다.“지금은 그저 누나가 잘 있기만 하면 다른 건 바라지 않을게요. 하지만 이것만 기억해요. 언제든 누나가 고개만 돌리면 보이는 그 자리에 있을게요.”순간 서현재는 능력이든 다른 부분이든 육경한과 비길 자격이 없다는 걸 알아챘다. 앞으로 몇 년간 피타는 노력을 거쳐 원하던 자리까지 올라갈 수는 있지만 육경한처럼 해탈의 경지까지는 오르지 못할 것 같았다. 사람은 일단 사랑에 빠지면 이기적이고 쪼잔해지고 질투에 휩싸이기 마련인데 유진도 아이를 받아들였으니 소원이 이 모든 걸 받아들이는 건 시간 문제라는 생각만 하면 마음이 자꾸만 벼랑 끝으로 떨어졌지만 소원만 행복하다면 서현재로 그것으로 만족하기로 했다.소원은 그런 서현재를 보며 하고 싶은 말이 많았지만 내뱉은 건 결국 한마디였다.“현재 너는 나의 영원한 가족이야. 유진도 그렇고.”서로에게 위안이 되던 나날들, 그리고 그 시간 동안 서현재가 유진을 돌봐준 것도 소원은 잊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이든 앞으로든 서현재가 원하는 바를 이뤄줄 수가 없었기에 차라리 가족이라는 자리로 남는 편이 제일 나을 것 같았다. 게다가 소원은 이미 서현재에게 다시는 재혼하지 않겠다고 약속한 상태였다. 아이가 태어나고 나면 소원의 중점은 아이를 돌보는 것과 아버지가 만든 회사를 다시 일궈내는 것, 그 외에 다른 건 없었다.“누나, 나도 잊지 않을게요.”서현재는 이 말만 남기고 자리를 떠났다.병실로 돌아오는데 육경한이 침대맡에 앉아 깊은 눈동자로 유진을 바
서현재는 육경한이 그를 내쫓는다는 걸 알고 덤덤한 표정으로 말했다.“걱정해 줘서 고마워요. 아직 망하진 않았어요.”육경한은 그를 관심해 주는 게 아니라 그가 쫄딱 망해서 서울에서 더는 살 수 없기를 바랐지만 서현재도 유진의 아빠라는 말이 떠올라 톡 까놓고 얘기할 수는 없었다.육경한도 유진의 아빠인 서현재가 너무 궁색해지는 건 싫었다.“서한 가문의 제일 큰 라이벌이 요즘 해성으로 실사하러 갔다고 들었는데.”육경한이 밑도 끝도 없이 이렇게 말하자 서현재가 미간을 찌푸렸다. 서현재는 아직 모르는 소식이었다. 해성에서 새로 거론하고 있는 프로젝트는 거의 마무리 단계에 접어들었는데 이때 라이벌 회사가 해성으로 간다는 같은 프로젝트를 노린다는 의미였다. 라이벌 회사라 같은 영업 범위였기에 경쟁하는 건 정상이지만 토론이 끝나가는 프로젝트를 뺏는 건 예의가 아니었다.서현재가 잠깐 침묵하더니 말했다.“고마워요.”육경한이 콧방귀를 뀌었다.“약육강식인 세상에서는 승자가 왕이 되는 법이야. 능력이 부족한 건 다른 사람 탓해도 쓸모없어.”이 말은 서현재가 육경한이 했던 탄압을 복수라고 생각한다면 어리석다는 말이었다. 육경한이 없었다면 서한 그룹이 흔들릴 때 다른 회사에서 서한 그룹을 노렸을지도 모른다. 아무리 무너져가는 회사라도 떨어질 부스러기는 남아있었다. 게다가 서한 그룹은 완전히 가치를 잃은것도 아니었기에 기회를 노려 서한 그룹의 주문을 앗아간다면 체급을 늘이고 있는 회사엔 큰 이익이 될 수도 있었지만 육경한이 손쓴 덕분에 기회를 노리던 일부 회사들이 떨어져 나갔다. 그 회사들에게 육경한과 경쟁한다는 건 어리석은 일이었으니 말이다.물론 육경한의 실력도 서울을 제패할 만큼의 실력은 아니었지만 그가 사용하는 방식과 수단은 일반인이 감당하기에 매우 힘든 것들이었다. 완전히 이성을 잃은 상태에서는 3시간 만에 한 상장 회사를 파산하게 만든 적도 있으니 육경한을 건드린다는 건 목숨이 아깝지 않다는 말이나 마찬가지였다.육경한이 손쓴 덕분에 서현재도 숨 돌릴 시간이 있
상황이 매우 긴급했기에 육경한은 몸이 채 낫지도 않았는데 병원으로 나와 곁을 지켰고 소원도 마찬가지였다. 이제 결정을 내릴 때가 된 것 같았다. 장기 이식을 기다리는 일은 운이 좋으면 빨리 되겠지만 그렇지 못할 경우 10년을 기다려도 힘들었다. 게다가 유진의 몸 상태는 그렇게 오래 기다릴 수 없었다.소원은 리스크를 감수하고 유진에게 그 알약을 먹이려고 했고 육경한도 동의했다. 소원도 잘 회복하고 있었고 임신까지 했다는 건 약효가 정말 신기하다는 의미였다.약을 먹기 전에 소원과 육경한이 유진의 손을 잡고 격려했다. 유진은 두 사람이 생각했던 것보다 더 용감했고 오히려 웃으며 두 사람을 위로했다.“아빠, 엄마 걱정하지 마세요. 유진이 꼭 나아서 더 좋은 유진이가 될게요.”유진은 그 알약을 먹은 후로 고열에 시달리는 등 이상 반응이 나타났다. 몸이 작기도 했고 체질이 약해서 감당 능력이 어른과는 비길 수 없었다.소원은 속이 바질바질 타들어 갔고 서현재도 소식을 받고 달려왔다. 유진이 커가는 걸 옆에서 지켜본 사람이라 그 감정이 여간 두터운 게 아니었기에 유진이 아프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바로 달려온 것이다. 육경한은 서현재를 보고도 드물게 화를 내지 않았고 쫓아내지도 않았다. 아마도 서현재의 눈빛에서 유진에 대한 걱정을 보아내서 그런 것 같았다.서현재는 정말 유진을 끔찍이 아꼈고 유진도 서현재를 좋아했기에 육경한은 유진이 깨어났을 때 기분이 조금이라도 더 좋아지길 바랐다. 아버지가 된 후로 육경한은 무슨 결정을 내릴 때 그렇게 차갑지 않았고 감정이라는 게 들어갔다. 아버지가 되면서 얻은 제일 큰 변화였다.지금 이 세 사람에겐 같은 목표가 생겼다. 그것은 바로 유진의 건강이었다.세 사람이 이렇게 화목하게 병원 복도에 앉아 있은 건 처음이었다. 유진이 여기 있으니 병원의 모든 전문가가 대기하고 있었고 조금만 이상을 보여도 바로 응급조치에 들어갔다. 알약을 복용한 이튿날 밤, 유진이 잠에서 깼고 얼굴에 윤기가 감도는 게 상태가 매우 좋아 보였다. 검사 결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