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훈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재빨리 칸막이를 올렸다.그 역시 젊고 혈기왕성한 청년이었기 때문에, 잘생긴 남녀가 서로 키스하는 장면을 보는 것은 매우 참기 어려웠다.칸막이가 올라가자, 이준혁은 바로 넥타이를 풀어 윤혜인의 손을 묶었다.그는 지금 윤혜인의 기억이 돌아오지 않은 상태에서 그녀와 접촉하는 것을 허락했다가는 나중에 그녀가 정신을 차리고 자신을 몰라볼 것을 우려했다.‘내가 어떻게 날 덜 싫어하게 만들었는데... 노력이 헛되게 놔둘 수는 없지.’하지만 칸막이를 올린 또 다른 이유는, 다른 남자들이 그녀의 모습을 보는 것을 원치 않았기 때문도 있었다.심지어 그녀의 목소리조차 듣게 하고 싶지 않았다.자신을 움직이지 못하게 만들자, 억울해진 윤혜인은 두 번 울고 말았다.몸이 하도 뜨거워서 터질 것만 같았고 너무 힘들고 불편했다.이준혁은 그녀를 아이처럼 달래며 말했다.“힘들지? 조금만 더 기다리면 괜찮아질 거야.”윤혜인은 혼란스러운 정신으로 말은 못 했지만, 표정만으로도 거짓말을 하는 게 분명하다며 꾸짖는 것 같았다.‘거짓말쟁이. 전보다도 더 뜨겁고 목도 마르고 배고프고 갈증도 계속 나고... 전혀 나아지지 않았구먼!’그녀는 무의식적으로 신음소리를 내며 뭔가를 먹고 싶어 했다. 너무 억울하고 화가 났다.그러나 반면 이준혁은 이런 그녀의 모습이 조금 웃겼다.현재 윤혜인의 모습이 어린 아림이가 입술을 삐쭉거리는 모습과 비슷해서 말이다.‘아림이...’아림이를 떠올리자 이준혁의 눈빛이 어두워졌다.분명 그는 다른 사람과 감정을 나누는 타입이 아니었지만, 윤혜인과 다른 남자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에 대해서는 미워할 수 없었다. 그 귀여운 아기 얼굴을 생각하면 마음이 부드러워졌다.그는 심지어 자신이 양아버지로서도 좋은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상상하기도 했다.그러나 그는 또한 그 아이를 생각하게 되는 것은 별수 없었다.‘나와 혜인이 사이에 아이가 만약 아직 있었다면... 아림이보다 더 컸을 것이고 아림이처럼 귀여웠을 텐데.’하지만 이
이준혁은 윤혜인의 가냘픈 허리를 잡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지금 조금 갈증을 풀게 해줄 테니, 나중에 정신 차리면 화내지 마.”그러자 윤혜인은 마치 즐거움을 찾은 것처럼 더욱 적극적으로 행동했다.마침내 방에 도착하자, 이준혁은 그녀를 욕조에 넣고 차가운 물을 틀었다.너무 차가울까 봐 걱정되어 자신도 같이 들어가 그녀를 껴안았다.하지만 윤혜인은 얌전하게 굴지 않고 계속해서 이준혁의 손가락을 물며 애처롭게 울부짖었다.불타는 욕망을 해소할 길이 없어 ‘스스로를 위로’하는 것이었다. 남자는 단순히 그녀의 위안을 위한 도구일 뿐이었다.이런 생각이 들자 이준혁은 불쾌해졌다. 그는 곧 자신의 손가락을 빼내고 그녀의 얼굴을 돌려 물었다.“내가 누구야?”윤혜인은 욕망에 가득 찬 눈을 뜨고 어리둥절하게 말했다.“이준혁...”익숙한 향기와 촉감에 그녀는 본능적으로 그의 이름을 불렀다.마치 하나의 낙인처럼, 그녀는 정신이 혼미한 상태에서도 이 남자에게 충실함을 유지하고 있었다.그러자 이준혁의 마음은 단숨에 달콤함으로 가득 찼다. 그 순간 윤혜인은 그를 기억하지 못하는 윤혜인이 아닌, 그와 가장 가까웠던 시절의 윤혜인처럼 보였다.“우리 혜인이, 정말 착하네.”그는 부드럽게 그녀의 이마에 입맞춤하며 따뜻하게 말했다.“딩동—”문 벨이 울렸다.이준혁은 김성훈이 도착한 것을 알았다.순간 그는 이 상황에서 김성훈이 오지 않기를 바랐다.‘아니지, 안 돼. 그래도 지금은 혜인이랑 할 수 없어.’윤혜인이 말을 듣지 않자, 결국 그는 그녀를 안고 문을 열었다.문이 열리자 김성훈은 이준혁이 이불로 꽁꽁 싸맨 여자를 안고 있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이런 상황에서 날 왜 부른 거야? 네가 직접 도울 수 있잖아!”이준혁은 그의 농담에 신경 쓰지 않고 차갑게 말했다.“쓸데없는 말 하지 마.”조금 전의 말은 이준혁이 변했다는 것을 안 김성훈이 일부러 그를 웃기려고 한 말이었다. 그는 의료 상자를 들고 말했다.“내려놔, 주사 놔야 해.”그렇게 윤혜인을 침실
“아니, 난!”김성훈은 말문이 막혔다. 그는 이준혁의 논리를 따라갈 수 없었다.“정말 넌 미친놈이야!”이준혁은 윤혜인의 팔을 잡고 김성훈에게 주사를 놓게 했지만, 조금도 그와 접촉하지 않게 했다.때문에 김성훈은 이를 갈며 진정제를 주사했다.“후유증이 있을 수 있어. 열이 나거나 갈증이 생길 수 있으니 물을 많이 마시게 해서 빠르게 해독되도록 해.”이준혁은 그의 말을 신중히 듣고 나서 김성훈을 문밖으로 밀어냈다.“고마워.”김성훈은 화를 내려다 안심하며 말했다.“그래도 양심은 있구먼...”그러나 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쾅!”그 모습에 김성훈은 속으로 생각했다.‘양심이 있긴 하지만... 정말 조금 있네.’방 안에서, 윤혜인은 이미 조용히 잠들어 있었다.이준혁은 그녀가 더위를 느낄까 봐 두꺼운 이불을 걷어내고 얇은 이불로 바꿔 덮어주었다.그렇게 밤새 그녀가 열이 날까 봐 걱정되어 그는 옷을 입은 채로 침대 옆에 앉아 지켜보았다.밤이 되자, 윤혜인이 잠결에 “물...”이라고 중얼거렸다.그러자 이준혁은 벌떡 깨어나 따뜻한 물을 준비해 그녀를 일으키고는 물을 마시게 했다.조금씩, 더 이상 마시지 못할 때가 되어서야 윤혜인은 고개를 돌렸고 이준혁이 물컵을 내려놓고 돌아봤을 때 그녀는 다시 잠들어 있었다.이마를 만져보니 다행히도 열이 나지 않았다. 그래도 그는 밤이 거의 새어 갈 때까지 지켜보았다. 김성훈이 밤새 열이 나지 않는 한 괜찮다고 했으니 말이다.이준혁은 베란다로 나가 담배를 한 대 피우고, 주훈에게 전화를 걸어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어젯밤 그 사건의 원인은 찾았나?”“장 대표도 누군가에 의해 약을 먹은 것 같습니다. 지금은 호텔에서 여성 종업원을 성희롱하려다 현장에서 붙잡혀 경찰서에 있고요.”주훈은 계속 보고했다.“장 대표의 가족들이 여성 종업원과 사적으로 합의 중이라 들었습니다. 합의금이 꽤 많아서 아마 곧 풀려날 것 같아요.”“잘 지켜보다가 풀려나면 정확히 물어보고 처리해.”전화를
“드르륵-”욕실의 슬라이딩 문이 열렸다.이준혁은 침대가 비어 있는 것을 보고 마음이 덜컥 내려앉아 긴장된 목소리로 말했다.“혜...”하지만 말이 끝나기도 전에...“쾅!”이준혁은 이마를 강하게 맞았고 순간 상처가 생기며 피가 흘러내렸다.자신이 정확히 때린 것을 보고 윤혜인은 다시 때리려 했지만 남자가 얼굴을 돌리는 순간 멈칫했다.“어떻게 그쪽이 여기 있어요?”그러자 이준혁은 찌푸린 얼굴로, 어제 그녀가 연규성의 품에 안겨 있던 장면을 떠올리며 차갑게 말했다.“누구를 기대한 거지?”윤혜인은 두 걸음 뒤로 물러서며 잔뜩 경계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그리고 이 장면은 이준혁을 더욱 불쾌하게 만들었다.그는 한 걸음 앞으로 나서며 설명하려 했지만, 윤혜인이 입을 열었다.“오지 마세요. 경찰에 신고할 거예요!”윤혜인은 옷깃을 단단히 여미며 경계했다.“약한 방법으로는 안 되니까 강하게 나가려는 거죠? 어젯밤 장 대표님도 설마 둘이 같이 짜고 한 일이에요?”그녀는 이전에 이 미디어 업계가 얼마나 더러운 곳인지 들은 적이 있었다.대기업의 호의를 얻기 위해 미녀를 침대로 보내는 사례는 수없이 많았다. 때문에 윤혜인은 이준혁이 그 장 대표와 한패가 아닌가 하는 의심을 저버릴 수가 없었다.그 물음에 이준혁은 가슴이 답답해지며 말문이 막혔다.윤혜인은 자신의 추측이 어느 정도 맞다고 확신하며 이준혁이 자신을 응시하는 것을 보고 테이블 램프를 들어 그를 방어했다.화가 난 이준혁은 수건을 잡아 이마의 피를 닦고 그 수건을 더러운 세탁물 바구니에 던지며 느긋하게 말했다.“신고해.”‘...내가 신고 못 할 줄 알고?!’곧이어 윤혜인은 주저하지 않고 호텔의 원클릭 호출 버튼을 눌러 주소를 말하고 이준혁을 성범죄자로 정확히 지목했다.그 모든 과정 동안 그녀의 매우 이성적으로 이준혁을 보며 조리 있게 말했다.방안은 차가운 기운으로 가득 찼다. 윤혜인이 한마디 할 때마다 이준혁의 얼굴은 점점 더 차가워졌다.전화를 끊고 나서, 윤혜인은 조금의 두려움
이준혁은 침을 한번 꿀꺽 삼키더니 말했다.“윤혜인, 기억이 돌아온 거야?”“아니요.”윤혜인은 그저 그 이야기 속의 자신을 기억하고 감정 이입을 한 것뿐이었다.되돌아온 대답에 이준혁의 눈빛이 잠시 어두워졌다.그는 그녀가 과거를 기억하길 바라면서도, 좋지 않은 기억을 떠올리는 것은 원치 않았다.도대체 뭐라 말해야 할지 몰랐고, 결국 분위기는 어색하게 흘러갔다.“미안해...”과거의 일들에서 잘못하고 부족했던 부분이 있다는 것을 그는 부정하지 않았다.그러나 그는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 윤혜인을 배신한 적이 없었다.임세희에게 조금 관대한 적은 있었으나 그녀를 사랑한 적도 없었다.윤혜인은 실망한듯한 남자의 표정을 보며 담담하게 말했다."이준혁 씨, 이런 말 들어본 적 있나요? 모든 ‘미안해'가 ‘괜찮아'로 돌아오지는 않아요. 저는 과거의 저를 대신해 당신을 용서할 권리가 없어요.”그녀의 목소리는 차갑고 무심했다. 마치 어젯밤의 열정적인 그녀가 그녀가 아니었던 것처럼 말이다.가슴이 미세하게 떨리며 이준혁은 무언가가 떨어져 나가는 듯한 감정을 느꼈다.그때, 문 벨이 울렸고 윤혜인은 재빨리 문을 열었다.“윤혜인, 괜찮아?"곧 배남준이 들어와 그녀의 어깨를 붙잡고 긴장된 표정으로 위아래로 살폈다.과도하게 걱정하는 듯한 마음이 윤혜인에게도 고스란히 전해졌다.“괜찮아, 남준 오빠.”그러자 배남준은 안도하며 그녀의 등을 토닥였다.현장에 있던 또 다른 사람은 그 행동이 매우 눈에 거슬렸다.이준혁은 갑자기 앞으로 나서더니 윤혜인의 손목을 잡았다. 눈빛은 매우 어두운 채로 말이다.“혜인이한테 손대지 마세요.”얼음처럼 차가운 말이었다.하지만 그가 예상치 못한 것은 윤혜인이 본능적으로 배남준의 손목을 잡았다는 것이었다.그렇게 현 상황은 이준혁이 윤혜인을 잡고, 윤혜인은 다른 남자를 잡고 있는 꼴이 되었다.온도가 마치 영하로 내려간 듯, 주위의 분위기가 냉랭해졌다.어두운 이준혁의 얼굴에는 윤혜인이 가한 공격으로 피가 흐르고 있었다. 때문에 그
배남준의 목소리는 부드러웠지만 단호했다.“대표님, 부부라는 호칭은 이미 이혼한 전처에게는 부적절한 것 같습니다.”이준혁은 배남준까지도 이혼 사실을 알고 있다는 것을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순간 그의 얼굴은 창백해졌고, 마치 수천 개의 화살에 찔린 듯한 고통이 밀려왔다.눈도 한껏 붉어진 채로 그가 윤혜인을 내려다보며 쉰 목소리로 물었다.“윤혜인, 저 남자랑 무슨 관계야?”창백한 얼굴에 밤을 새운 탓에 그의 눈가에는 핏줄이 드러나 있었다.그리고 그 눈빛에는 더 이상의 상처를 견딜 수 없는 듯한 슬픔이 엿보였다. 하지만 그런데도 윤혜인은 그를 보며 차갑게 말했다. 비록 배남준과 아무런 관계도 아니었지만 이준혁에게 희망 따위를 주고 싶지는 않아서 말이다.배남준은 윤혜인의 표정을 보고 그녀의 곤란함을 눈치채고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혜인이와 저는 경천이의 허락을 받고 결혼을 전제로 교제하고 있습니다.”마른하늘에 날벼락 같은 소리를 듣자, 이준혁의 눈동자가 붉게 물들었다.그러더니 그는 배남준을 쳐다보지도 않고 윤혜인만을 응시하며 물었다.“정말이야?”배남준이 이렇게 말하리라고는 생각지 못했기에 윤혜인은 깜짝 놀랐다.‘오빠가 무슨 허락을 했다는 거지? 결혼을 전제로 교제한다고?!’그녀는 어리둥절했다. 하지만 이준혁의 강한 성격을 생각하며 일부러 윤혜인도 맞장구를 쳤다.“맞아요, 우리 사귀고 있어요!”짧은 몇 마디가 원자폭탄만큼의 파괴력을 발휘해 남자의 단단한 마음에 엄청난 구멍을 내버렸다.그의 얼굴에서 혈색이 순식간에 사라졌다.윤혜인은 이 틈을 타서 손을 뺐고 계속해서 말했다.“앞으로 저와 얽히지 말아 주셨으면 합니다. 남준 오빠가 오해할 수 있으니까요!”이준혁은 온몸이 굳어버렸다. 마치 윤혜인의 말이 그의 몸을 산산조각 내버린 듯 말이다.“안 돼!”그때, 이준혁이 갑자기 소리쳤다.“분명 나랑 6개월 동안은 결혼하지 않겠다고 약속했잖아!”“네. 저희는 결혼을 전제로 사귀는 거지, 아직 결혼한 게 아니잖아요!”윤혜인은 계속해서
그러자 배남준은 희미하게 미소 지으며 말했다.“대표님, 사람은 망상할 수는 있지만 그 망상에 계속 빠져있어선 안 됩니다. 혜인이는 현재 독신이며, 나와 그녀는 정당하게 교제 중입니다. 강제로 사랑을 빼앗는다는 말은 성립하지 않죠. 그리고 그 사랑이라는 감정은 아마도 대표님 혼자만의 생각일 겁니다.”이 말에 안색이 즉각 변하더니 이준혁은 배남준의 옷깃을 잡아채며 분노했다.“당신이 북안에서 얼마나 강력한지 상관없습니다! 여기는 서울, 내 구역이에요! 내 손에서 혜인이를 빼앗아 갈 수 있을거라는 생각 추호도 하지 마세요!”남자의 얼굴은 차갑고 살벌해 보였으며 마치 당장이라도 상대방을 잡아먹을 듯했다.윤혜인은 급히 그의 팔을 잡아당기며 초조하게 말했다.“이준혁 씨, 제발 그만해요! 남준 오빠 건드리면 당신이랑도 끝입니다!”윤혜인의 진심 어린 방어는 마치 독을 발라 날카로운 칼처럼 이준혁의 마음을 찔렀다. 그는 심한 고통에 휩싸여 미쳐버릴 것 같았다. “좋아, 평생 나랑 끝장 보자. 이번 생, 다음 생, 끝까지 함께 끝장내 보자고!”윤혜인은 이준혁의 광기 어린 표정을 보며 그가 정말 미쳤다는 직감을 받았다.그러나 이내 이준혁의 말이 더 놀라웠다.그는 갑자기 목욕 가운을 벗어젖히며 단단하고 매력적인 가슴과 배를 드러냈다. 그의 피부에는 수많은 애매한 붉은 자국들이 있었다. “나더러 엮이지 말자며, 근데 이건 뭐야? 녹음도 있어, 들어볼래?”순간 귀가 뜨겁게 달아오르며 윤혜인은 심장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내가 정말 이 남자랑 그런 일을 했다고?!’이준혁의 잘생긴 얼굴과 뚜렷한 이목구비를 보며 윤혜인은 분노가 치솟았다. “짝!”그녀는 그의 얼굴에 강한 뺨을 날렸다.“이 짐승! 내가 어떤 상황인지 뻔히 알면서 이렇게 기회를 노려요? 당신은 인간 이하의 짐승이에요, 짐승!”이준혁은 잠시 멍해졌다.그녀의 손은 분명 뺨에 닿았는데 어쩐지 마음이 더 아픈 느낌이었다. 하지만 그래도 마음속의 고통을 숨기며 그는 무표정하게 윤혜인을 바라보고는 입꼬리
“윤혜인, 나더러 공평하게 대해달라며... 넌 나한테 공평하게 대하고 있는 거 맞아?”분명 그녀는 그에게 공평하게 대하겠다고 약속했었다.하지만 지금 윤혜인이 겨누고 있는 칼날은 오직 이준혁을 향해 있는 것처럼 보였다. 윤혜인은 혼란스러웠다. 이 혼란스러운 관계를 빨리 끝내고 싶었기에 그녀는 차갑게 말했다.“당신에게 상처받은 사람이 당신한테 공평하게 대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해요?”이 말을 들은 이준혁은 심하게 상처를 받은 듯 자연스럽게 두 발자국 뒤로 물러섰다.그러더니 갑자기 ‘퍽’ 소리와 함께 무릎을 꿇었다.평소 강직했던 그의 등도 지금은 살짝 굽어 있었다.그러더니 이준혁은 붉게 충혈된 눈으로 윤혜인을 바라보며 말했다.“윤혜인, 나한테도 공평하게 대해주면 안 돼? 부탁이야, 나한테도 공평하게 대해줘...”그는 모든 자존심을 내려놓고 극도로 비굴하게 애원했다.그러자 윤혜인은 마음속이 마치 솜으로 가득 차 산소가 사라진 것처럼 답답했다.이준혁이 이렇게 비굴하게 구는 모습을 그녀는 여태껏 본 적이 없었다.감히 상상도 할 수 없었던 이 모습에 윤혜인은 그만 말문이 막혀버리고 말았다.하지만 무슨 이유에서든지를 막론하고 윤혜인은 절대 가까이해서는 안 되는 사람에게는 그가 원하는 공평함을 줄 수 없었다!“쾅,쾅,쾅!”그때,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고 곧이어 두 명의 파란색 유니폼을 입은 경찰관이 들어와 신분증을 내보이며 말했다.“신고를 받고 왔습니다. 여기서 성추행 사건이 발생했다고 들었습니다.”경찰관들은 방 안의 두 남자를 훑어본 뒤 윤혜인에게 물었다.“신고자분입니까?”“네, 맞아요.”“누가 당신을 성추행했습니까?”윤혜인은 무릎을 꿇고 있는 남자를 몇 초 동안 응시하다가 차분하게 말했다.“저 사람입니다.”순간, 이준혁의 몸은 다시 수많은 화살에 관통당한 듯 고통으로 얼룩졌다.그는 굽어 있던 등을 곧게 펴며 윤혜인의 얼굴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그녀가 진심으로 그렇게 말하는지 확인하고 싶었다.그는 믿을 수 없었다!하지만 믿지
집사가 대답했다.“소원 씨는 지금 대기실에 갇혀 있습니다.”서진태가 수염을 만지작거리더니 차갑게 쏘아붙였다.“톡톡히 손봐주고 던져버려.”서진태는 독벌레가 진귀하지만 않으면 존재 자체가 화근인 소원에게도 한 마리 넣어 뇌를 남김없이 모조리 잠식당하길 바랐다. 엮이면 재수 없는 여자라 이가 바득바득 갈렸지만 다행히 몸이 좋지 않다는 소문을 들었고 이번 기회에 쌍으로 지옥에나 보내버릴 생각이었다.상황이 종료되자 서진태가 손을 저으며 자리를 떠났다.대기실.소원은 여기 갇힌 후로 도무지 나갈 방법이 없었고 서현재가 한 말은 곱씹으면 곱씹을수록 이상했다. 그 모습은 마치 기억을 잃은 게 아니라 영혼을 뺏긴 사람 같았고 생기가 전혀 보이지 않았다.‘도대체 어떻게 된 거지...?’고민하는데 대기실 문이 다시 열렸고 까무잡잡한 보디가드 두 명이 들어오더니 몽둥이를 들고 험악한 표정으로 소원을 노려보고 있었다. 화들짝 놀란 소원이 뒤로 물러서며 물었다.“뭐 하려는 거야?”“뭐 하긴 뭐해? 위쪽 지시를 받고 너 혼내주러 온 거지.”“이거 불법인 거 알아, 몰라.”소원이 매섭게 쏘아붙였다.몽둥이를 잡은 기세를 봐서는 소원을 때려죽이기라도 할 것 같았다. 서진태는 보면 볼수록 음침하고 교활한 노인네였다.“우린 그냥 명령을 받고 결혼식에 물건을 훔치러 온 도둑을 혼내줬을 뿐이야.”보디가드가 한마디 덧붙였다.“결혼식에서 20억짜리 액세서리가 사라졌는데 그 범인이 너야. 지금은 잡힌 거고.”보디가드가 이렇게 말하며 액세서리 몇 개를 바닥에 던졌다.서진태는 소원을 죽이기 위해 만반의 준비를 다 한 것 같았다. 소원은 바닥에 떨어진 액세서리를 보며 넋을 잃었다.“나 아니야. 나는 훔친 적 없어. 이건 모함이야.”보디가드가 한 걸음 한 걸음 다가오더니 말했다.“인증도 있고 물증도 있는데 네가 아니라고 해봤자 아무 소용 없어.”보디가드는 그저 서진태가 시키는 대로 죄명을 소원에게 덮어씌우고는 빠르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시키는 대로만 하면 앞으로 그 누구도
그 터전은 무당 일가의 집이었기에 채벌이 시작되면 더는 지금처럼 영기가 가득 찬 곳을 찾아 독벌레를 기르기 힘들었고 그렇게 되면 무당 일가가 몰락하고 대를 잇지 못하게 된다.독벌레를 만들려면 무당 일가인 그들이 첫 번째 숙주가 되어야 했고 유충을 몸에 넣고 천천히 부화해 움직일 수 있는 생명체까지 만들면 특수한 약초로 독벌레를 유인해서 빼내야 했다.독벌레가 몸에서 나오면 세상에서 가장 맑은 호숫가로 데려가 안개와 이슬, 그리고 하늘에서 내린 비를 양분으로 일정한 크기까지 자라나야만 단향 단지에 넣어 다른 용도에 쓰일 수 있었다.게다가 여자가 들고 있는 단지에 담긴 독벌레는 이미 40년이나 산 독벌레였기에 독성이 상상 이상으로 더 독했다. 하지만 이내 서진태가 큰소리로 보디가드를 불렀고 보디가드가 노인네를 당장 밖으로 끌어냈다.빨간 옷을 입은 여자가 주저하자 서진태가 주름 잡힌 얼굴로 음침하게 웃으며 수염을 만지작거렸다.“월생이라고 했나? 약속한 걸 모르면 안 되는 거 알지? 아니면 너도 너희 사부님도 무사히 서울을 떠나지는 못할 거야.”서진태는 노골적으로 무당 월생을 협박하고 있었다.월생은 창백한 얼굴로 침대에 누워있는 젊은이를 보며 고개를 살짝 숙이더니 묵념했다.‘미안해요. 당신 가족들이 당신을 죽이려 드는데 저도 달리 방법이 없네요.’월생이 손을 우산 모양으로 오므리자 작은 단지에서 하얀 벌레가 기어 나오더니 월생의 손에 앉았고 월생이 그 손을 남자의 눈에 올려놓았다. 5초쯤 지나 월생이 손을 떼자 하얀 벌레는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서진태가 약간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물었다.“이러면 벌레가 들어간다고?”월생이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독벌레가 뇌로 들어가는 방법은 안구밖에 없습니다. 독벌레의 몸통은 안구의 모양에 따라 종잇장처럼 얇아져서 안으로 비집고 들어가게 됩니다. 의학용 감마선을 쏘아봐도 사람의 신경처럼 보이기 때문에 절대 이상한 점을 발견하지 못할 겁니다.”서진태가 반신반의하는데 침대에 누워있던 서현재가 손가락을 움직이며
빨간 옷을 입은 여자가 서현재의 상태를 확인하고 맥을 짚어보더니 하얀 수염을 기른 노인네를 보며 누구도 알아들을 수 없는 언어로 뭐라고 중얼거렸다. 노인네가 이를 듣고는 고개를 젓더니 손을 흔들며 알아들을 수 없는 말로 대답했다.서진태는 그들이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들을 수 없었지만 모습을 보아하니 좋은 상황은 아닌 것 같았다.빨간 옷을 입은 여자가 고개를 돌리더니 말했다.“사부님 말씀으로는 약을 너무 과다하게 사용해서 나온 합병증이라고 합니다. 뇌에 부하가 걸리는 바람에 약간만 외부의 자극을 받아도 머릿속에 두 가지 목소리가 싸우게 될 거예요. 이렇게 쓰러진 것도 다 몸이 좋아서 그런 거지 다른 사람이면 이미 뇌사 상태에 빠졌을 수도 있어요.”서진태가 수염을 만지작거리더니 말했다.“이 결혼은 어떻게든 완성해야 하니 방법은 알아서 생각해.”빨간 옷을 입은 여자가 말했다.“어르신, 지금으로서는 독벌레를 내려서 깨우는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몸을 많이 축내는 방법이라 매우 위험합니다. 독벌레는 사람의 뇌를 갉아 먹고 사는 거라 도련님...”빨간 옷을 입은 여자가 말끝을 흐렸지만 다들 서현재가 살기는 어렵다는 걸 알고 있었다.서진태는 이익을 위해서라면 서현재의 사활 따위는 전혀 개의치 않았다. 아직 외국으로 빼돌리지 못한 자산이 있는데 그 자산을 성공적으로 빼돌리려면 한국에 대신 죄를 뒤집어쓸 사람이 필요했다.서현재가 죽어도 괜찮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지금 죽으면 서진태가 공들여 짜놓은 판이 다 무용지물이 되게 된다. 이 판을 위해 서진태는 육씨 가문을 끌어들이는 것도 마다하지 않았다. 만약 육경한이 서진태의 진짜 목적을 알고 있었다면 육연주가 아무리 죽고 못 산다 해도 절대 육연주를 시집보내지 않았을 것이다.애초에 육경한이 서씨 가문에 압력을 넣으며 육씨 가문과의 정략결혼을 밀어붙인 게 오히려 서진태에겐 도움이 되었다. 짬밥은 무시할 수 없다고 서진태는 능구렁이라는 말이 참 잘 어울렸다. 잠깐 고민하던 서진태가 이렇게 말했다.“독벌레든 뭐든
사회자가 큰 소리로 말했다.“신랑분, 큰 소리로 대답해 주세요.”서현재가 입술을 뻐끔거렸다.“저...”말을 채 끝맺기도 전에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안돼.”서현재가 멈칫하더니 의문에 찬 표정으로 뒤를 돌아봤고 하객들도 일제히 소리가 나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소원이 버진 로드로 올라가더니 남자를 보며 이렇게 말했다.“현재야, 이 결혼 하면 안 돼.”북적북적.하객들이 수군거리며 갑자기 나타나 결혼식을 중단시킨 여자를 놀라워했다.서현재는 멍한 표정으로 웨이터 복장을 한 여자와 하얀 웨딩드레스를 입은 여자를 번갈아 바라보더니 이내 극심한 두통을 느꼈다.‘왜, 왜 똑같은 얼굴이지?’소원이 서현재의 팔을 잡더니 큰 소리로 말했다.“현재야, 우리가 한 약속 잊었어? 네가 결혼할 사람은 나야.”현재라고 부르는 목소리가 마치 우레처럼 서현재의 머리를 강타했고 서현재가 지금까지 믿어왔던 모든 게 산산이 조각났다. 과거의 조각들이 너무 하나씩 이어지며 파도처럼 몰아쳤다.“누나, 나랑 결혼해 주면 안 돼요?”“누나, 나 누나 좋아해요. 대답 안 해준다 해도 계속 기다릴 거예요.”“누나, 나 드디어 누나랑 사귀는 거예요?”“소원 누나, 누나.”분위기가 이상하게 흘러가자 육연주가 먼저 반응하고는 소원의 귀싸대기를 날리며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저 미친년 당장 끌어내.”보디가드가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는 다른 건장한 남성을 불러 소원을 끌어내려 했다. 시간이 별로 없었기에 소원은 서현재의 팔을 꼭 잡으며 말했다.“현재야, 너는 육연주 사랑하지 않아. 날 믿어. 너는 육연주 사랑한 적 없어. 육연주랑 결혼하면 너 후회할 거야. 서씨 가문은 너를 이용해서. 아악.”머리채가 잡힌 소원이 외마디 비명을 질렀다. 까만 옷을 입은 한 무리의 보디가드가 달려오더니 머리채를 잡는 사람 따로, 목덜미를 잡는 사람 따로, 팔과 다리를 잡는 사람 따로, 그리고 소원의 입을 막고 들어가는 사람 따로 있었다.“잠깐만요.”서현재가 갑자기 보디가드를 불러세웠
소원은 속았다는 생각에 머리가 윙 해졌다. 아니, 소원이 속은 게 아니라 서씨 가문이 너무 교활했고 혹시나 누군가 결혼식에 훼방을 놓을까 봐 만반의 준비를 한 것이다.캔디를 줍던 소원은 그대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파티장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아니 다 줍지도 않고 어딜 가는 거예요?”화가 잔뜩 난 웨이터가 발을 동동 구르며 말했다.“지금 바로 매니저님 찾아가서 덤벙거리기만 하는 당신을 자르라고 할 거예요.”결혼식 현장.서씨 가문과 육씨 가문이 공동으로 준비한 결혼식이었기에 호화롭기 그지없었고 축하해주러 온 사람도 많았다.사회자의 열정적인 소개와 함께 하얀 드레스를 입은 육연주가 친인척의 손을 잡고 서서히 등장했다.버진 로드의 끝에는 빨간 벨벳 턱시도를 입고 가슴에 꽃을 단 신랑이 보였다. 기다란 체구와 꼿꼿한 자세가 신랑을 더 도도하고 우아해 보이게 했다.육연주는 남자의 준수한 얼굴을 보자마자 심장이 벌렁거렸다. 이날이 이렇게 빨리 올 줄은 몰랐지만 드디어 이 남자를 손에 넣고 서씨 가문 사모님이 되었다.그렇게 신랑 앞까지 걸어간 육연주의 친인척이 육연주의 손을 신랑에게 넘겨줬지만 신랑은 아무런 반응이 없었고 잘생긴 얼굴은 육연주의 손을 받을 생각이 전혀 없어 보였다.현장의 분위기가 싸늘해지자 사회자가 어색하게 웃으며 귀띔했다.“신랑분, 신부님 손을 잡아주세요.”사회자의 귀띔에도 서현재가 움직이지 않자 하객들이 수군거리기 시작했다.“어떻게 된 거야. 혹시 신랑은 결혼하기 싫은 거 아니야?”“그러니까. 근데 신부가 약간 막무가내래. 성격이 오만하면서도 사납다고 들었는데 아마도 서씨 가문 도련님이 후회한 게 아닌가 싶다.”“하기 싫은 건 그렇다 치고 그러면 미리 파혼해야 할 거 아니야. 이제 와서 성질부리면 양가 가문의 체면은 어떡해.”“허허. 억지로 결혼시킨 결과라고 봐야지...”“근데 신랑 어딘가 이상하지 않아?”“어디가?”“예전에 신랑을 본적이 있는데 이렇게 멍하지는 않았던 것 같은데?”말이 좋아 멍하지 서현재는 거의
소원은 바로 대기실 방향으로 향했지만 대기실 앞도 누군가 지키고 있었다.‘서씨 가문 너무 오버하는데?’지금 보면 서씨 가문은 소원만 경계하는 게 아니라 서현재도 같이 경계하고 있었다.‘설마 현재가 뭘 발견했는데 서씨 가문에서 그걸 알아챘나?’소원은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걱정되어 들어가 물어보려 했지만 문 앞을 지키고 있는 보디가드들의 경비가 너무 삼엄해 파리 한 마리조차 그냥 들여보내지 않을 것 같았다.너무 다급했지만 달리 방법이 없었던 소원은 그저 조용히 옆에서 기다리다 서현재가 나오면 기회를 찾아볼 생각이었지만 한참 동안 기다려도 대기실은 아무런 미동도 없었다. 그렇게 두 시간을 족히 쪼그리고 있다가 발이 저려서 감각을 잃어가는데 대기실을 지키던 보디가드가 하나둘씩 자리를 떠나기 시작했다.소원은 그제야 이상한 낌새를 눈치채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상황을 살펴보려고 대기실로 다가가 문을 살짝 밀어 보니 문이 그대로 열렸다.안은 언제 그랬냐는 듯 아무 흔적도 없었다.‘뭐지...?’‘왜 텅 빈 대기실을 지키고 있지?’소원은 자기가 속임에 걸려들었다는 걸 알고 밖으로 뛰어가다 같은 유니폼을 입은 웨이터와 부딪히고 말았다.“아야... 무슨 급한 일이 있다고 그렇게 급하게 뛰어가는 거예요?”웨이터가 놀란 가슴을 쓸어내리며 언짢은 말투로 말했다.“미안해요. 미안해요...”소원이 얼른 사과하고는 자리를 뜨려는데 웨이터가 그녀를 덥석 잡고는 말했다.“어디 가요? 이거 주워주고 가야죠.”바닥에 캔디가 흩뿌려져 있었다. 소원은 어쩔 수 없이 같이 쪼그리고 앉아 캔디를 한 알씩 줍는데 같이 줍던 웨이터가 소원을 힐끔 쳐다보며 이렇게 중얼거렸다.“도대체 어떻게 들어온 거예요? 실수로 부딪혔으면 수습할 생각을 해야지 도망가는 게 어딨어요? 매니저님께 알리면 바로 잘릴 거예요.”소원은 웨이터로 위장한 거라 찍소리도 못하고 머리를 숙인 채 열심히 캔디만 주었다. 이때 결혼식 입장을 알리는 익숙한 음악이 가든을 가득 메웠다. 아무래도 결혼식 파티가 시작된 것
육경한은 냉랭한 표정으로 말했다.“지금 당장 서씨 가문 어르신한테 연락해.”“알겠습니다.”소종은 더 이상 말하지 않고 바로 서진태에게 전화를 걸었다. 하지만 전화를 받은 것은 도우미였다..“어르신은 주무시고 계십니다.”소종은 어이없다는 듯 중얼거렸다.“정말 대단하네요. 손자가 오늘 결혼했는데 이렇게 일찍 잠이 들다니... 참 태평하시네요!”더욱 짜증 난 듯 육경한의 표정이 굳어졌다.“그럼 연주는? 연주는 전화 연결되나?”곧바로 소종이 육연주에게 전화를 걸었지만 역시나 아무도 받지 않았다.소종은 기이하다는 듯 말했다.“이 집안은 정말 이상하네요. 이렇게 큰 경사날에 왜 아무도 전화를 받지 않는 걸까요? 정말 그리 바쁜 건지.”육경한의 마음속에는 불길한 예감이 스며들었다.그는 조사 중 이번 사건이 서진태와 연관이 있을 가능성을 발견했지만 아직 명확한 증거는 없었다.직접 손을 대지는 않았겠지만 서진태의 성격상 누군가를 이용했을 가능성은 충분했다.그러나 당시 더 이상 시간을 허비할 여유가 없었고 사실을 알아채자마자 육경한은 바로 사람을 구하러 갔었다.그런데 이제 소원이 다시 서씨 가문으로 간다는 것은 스스로 위험 속으로 뛰어드는 것이나 다름없었다.서진태 같은 교활한 사람이 소원이 육연주를 싫어한다는 것을 알고 이를 이용해 ‘이익을 위한 희생’같은 일을 꾸민다면 소원이 위험에 빠질 것은 자명했다.그렇게 되면 서진태는 모든 책임을 회피할 수 있었고 심지어 육경한의 보복도 두려워할 필요가 없었다.그야말로 일석이조의 계략이었다.물론 이 모든 것은 육경한의 추측에 불과했지만 가능성은 충분히 있었다.이내 눈빛이 어두워지더니 육경한은 무거운 목소리로 명령을 내렸다.“더 빨리 가!”...소원은 아침 일찍 서울로 향하는 차를 탔다.아무리 이른 시간에 출발했어도 도착했을 때는 이미 오후 1시가 넘어 있었다.서씨 가문의 결혼식은 저녁에 열릴 예정이었고 아직 늦지는 않았다.결혼식장은 경비가 삼엄했고 저택 전체가 철통같이 둘러싸여 있었다.때
소종이 말한 대로였다. 그 사람들이 얼마나 흉포한지는 이미 익히 들어 알고 있었다.과거 미국에서 목숨 걸고 활동하던 시절, 함께 일하던 친구들에게서 그 지역의 소문을 들은 적이 있었다.‘그 사람들이 하지 못할 일이란 없다’는 말이 있을 정도였다. 듣기만 해도 세상이 무너질 것 같은 충격이었다.다행히도 미우 그룹은 그런 사업에 손을 대지 않았다. 그렇지 않았다면 한국에서 발붙일 수 없었을 것이다.모두가 알다시피 한국은 이러한 불법적이고 회색 지대의 산업에 대해 엄격히 단속하며 절대 관용을 베풀지 않는다.이런 위험한 인물들이 한국에서 발호할 기회란 애초에 존재하지 않는다.이번에 잡힌 자들은 겨우 작은 졸개들일 뿐, 진짜 배후 세력은 여전히 해외에 있었다.이번 작전으로 큰 타격을 입었지만 이곳에서 은신처가 전부 드러나고 파괴된 이상, 그들이 가만히 있을 리 없었다.하여 소종은 육경한이 소원 때문에 이런 사람들과 엮이는 건 정말 가치 없는 일이라 생각했다.“소원 씨가 배은망덕한 건 하루 이틀 일이 아니잖아요. 저는 이제 익숙해졌습니다. 대표님이 아무리 잘해줘도 소원 씨는 결국 배신할 뿐이에요.”소종은 소원의 이름만 나오면 마치 한풀이를 하듯 멈추지 않고 말을 쏟아냈다.“그 여자한테는 마음이란 게 없어요! 제발 다시 속지 마세요, 대표님!”그러나 육경한은 들은 척도 하지 않고 엉뚱한 말을 꺼냈다.“오늘이 며칠이지?”그러자 소종이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되물었다.“네?”“오늘 며칠이냐고 묻잖아!”육경한의 목소리에 짜증이 배어 있었다.“26일입니다.”육경한은 차갑게 중얼거렸다.“오늘이 서현재의 결혼식 날이야.”그제야 소종은 모든 것을 깨달은 듯 눈이 번쩍 뜨였다.‘아하! 그래서였구나! 아침 일찍 사라진 이유가 다 있었어. 분명 그 서씨를 만나러 간 거야.’육경한을 보자 소종은 더더욱 억울한 마음이 들었다.‘그 여자는 눈을 뜨자마자 다른 남자 만나러 갔는데 대표님은 그 여자를 위해 목숨을 걸고 싸웠다니... 이거 정말 너무 황당한 막장
“안녕하세요.”달콤한 목소리의 여자가 병실 문을 열며 들어왔다.육경한이 고개를 들어 보니 처음 보는 사람이었다.여자는 육경한을 본 순간 눈빛에 놀라움이 스치더니 다가와 말했다.“안녕하세요. 저는 픽업트럭에 있던 사람 중 하나입니다. 모두를 대표해서 감사 인사를 드리러 왔어요.”그녀는 들고 온 과일 바구니를 테이블에 내려놓았다.육경한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여자는 갈 생각도 없는 듯했다.구해준 사람이 이렇게 잘생겼을 줄은 몰랐던 것이다.그의 외모는 남다른 분위기를 풍겼다. 머리에 붕대를 감고 있음에도 흠잡을 데 없는 이목구비가 돋보였다.마치 드라마 속에서나 볼 법한 ‘냉철한 대표님’ 같았다.날카로운 눈빛과 잘생긴 얼굴은 그녀 같은 평범한 여자들이 평생 가까이할 수 없는 사람처럼 느껴졌다.“제가 사과 깎아드릴까요?”여자가 먼저 제안했다.하지만 그녀가 사과를 집어 드는 순간, 육경한이 차갑게 말했다.“필요 없어요. 나가세요.”그의 목소리는 얼음처럼 차갑고 단호했다.여자는 순간 멈칫하며 사과를 손에 든 채 난처한 기색을 보였다.그러고는 이내 눈가가 붉어졌다.“저는 그저 감사의 마음을 전하고 싶었을 뿐이에요.”“고마워할 필요 없어요.”육경한은 냉담하게 대꾸했다.“나는 당신들을 구하려고 한 게 아니었으니까요.”이 말을 듣고 여자는 눈이 휘둥그레졌다.‘우리를 구하려 한 게 아니면 왜 목숨을 걸고 그런 위험한 싸움에 뛰어든 거지? 그토록 무모한 일을...’옆에서 육경한의 말을 듣고 있던 소종은 속이 답답해졌다.최근 구급차에서 찍힌 사진이 온라인에 퍼지며 언론은 육경한이 수많은 여성을 구한 영웅이라고 대대적으로 보도했다.그 덕분에 미우 그룹의 이미지는 하늘로 치솟았고 주식도 단기간에 급등했다.지금 병원 밖에는 그를 인터뷰하려는 기자들이 몰려 있었다.하지만 육경한의 이런 모습이 퍼지면 언론의 긍정적인 관심은 한순간에 사라지고 말 것이었다.하여 소종은 재빨리 상황을 수습했다.“죄송합니다. 저희 대표님이 머리를 다쳐서 지금 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