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신우는 긴 다리를 쭉 뻗고 앉아 있었고 셔츠 단추는 단 하나 남기고 다 풀어졌기에 크고 튼튼한 가슴 근육이 한눈에 들어왔다.윤혜인은 잠시 어리둥절해져서 어쩔 바를 몰랐다.흐트러진 옷을 입고 있던 여자가 귀신을 본 것처럼 놀라서 윤혜인을 욕했다.“당장 꺼져.”그제야 정신이 돌아온 윤혜인은 얼굴을 붉히며 미안하다는 말을 던지고는 재빨리 방에서 나가려고 했다.문을 잠그고 나가려는 그녀를 본 이신우가 말했다.“잠깐만요.”이 말을 들은 윤혜인은 또 한 번 멍해져서 문을 등지고 제자리에 서 있었다.가는 것도 아니고 안 가는 것도 아니었다.이신우는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하마터면 웃음을 터뜨릴뻔했다.“내려가서 기다리세요.”그는 무게감 있는 목소리로 말했다.그러자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른 윤혜인은 재빨리 아래층으로 달려갔다.문이 다시 닫히는 것을 본 여자는 다시 이신우에게 자기 몸을 가져다 댔다.하지만 눈 깜짝할 사이에 남자는 아까처럼 흥분을 느끼지 못했고 몹시 냉담했다.그러는 모습을 보자 여자는 마음속으로 또 쳐들어온 윤혜인을 욕하기 시작했다.“여름 씨, 나가 주세요.”이신우는 냉담한 표정으로 일어나 옷을 정리하고 벨트를 다시 하고 차가운 시선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방금 뜨거웠던 감정이라곤 찾아볼 수 없었다.조여름은 달갑지 않게 느껴졌다.그녀는 서울대의 엘리트였고 다른 사람의 소개로 이신우의 국내 업무 보좌관으로 일하고 있었다.공항에서 이신우를 처음 만났을 때부터 그녀는 이 경험이 많아 보이는 남자를 사랑하게 되었다.그의 프로필에는 35세라고 되어 있지만 얼굴만 보면 그냥 서른이 조금 넘은 것 같았다.그의 이목구비는 나무랄 데 없이 잘생겼고 우월한 집안 형편과 좋은 교육을 받은 그는 어디에 가든, 무엇을 하든 남다른 우아함을 지니고 있었다.진한 향수와 독한 술처럼 매혹적이었다.그 후 그녀는 일 때문에 그와 함께 승마장에도 가고 온천도 갔다. 그의 완벽한 근육질 몸매를 본 그녀는 더욱 이 훌륭한 남자에게 빠져들었다.오늘 그녀는
조여름이 아래층으로 내려오자 소파에 앉아 이신우를 기다리는 윤혜인을 발견했다.보들보들한 니트를 입은 윤혜인은 가느다란 허리에 하얗고 예쁘게 생긴 얼굴이었다...확실히 부러운 비주얼을 가지고 있는 여자였다.남자들이 첫눈에 반할만한 얼굴이었다.두 사람은 눈이 마주쳤지만 서로 말을 하지 않았다.조여름은 문득 익숙한 느낌이 들더니 문득 아까 책상 위의 그 사진이 생각났다.사진 속의 여자와 눈앞의 이 여자는 눈매가 서로 너무 닮았다.하지만 윤혜인은 분명히 젊어 보였고 나이가 안 맞았다...그녀는 뭔가 깨달았는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조여름은 하이힐 소리를 내며 윤혜인의 옆을 지날 때 의기양양한 목소리로 말했다.“신우 씨 집에서 뭐 하세요?”조여름의 일을 망쳤다는 생각에 윤혜인은 미안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저는 가정 교사예요.”“가정 교사?”조여름은 믿지 못하겠다는 듯이 험한 말을 했다.“가정 교사라는 핑계로 신우 씨를 꼬시려고 하는 거죠?”그러자 윤혜인은 어이가 없어서 말문이 막혔다.이신우는 확실히 매력 있는 남자였기에 누가 봐도 그런 생각을 할 수는 있었다.하지만 윤혜인은 단지 그에게서 돈만 벌고 싶다고 하늘에 맹세라도 할 수 있었다.조여름은 그녀가 말을 하지 않는 것을 보고 그녀가 묵인한 줄 알고 더 무례하게 굴었다.“당신처럼 청순한 척하는 여자들을 많이 봤어요. 일한다는 핑계로 더러운 짓거리를 하고 다니죠. 정말 비천하네요.”윤혜인은 어이가 없었다.“아가씨, 모든 사람이 당신과 같다고 생각하지 마세요.”조여름은 윤혜인의 말에 반박할 수 없었기에 화를 내며 말했다.“신우 씨가 당신을 마음에 들어 한다고 생각해요? 당신은 단지 대역일 뿐이에요. 얼굴이 좀 예쁘게 생겼다고 너무 대단하게 여기지는 마세요.”대역이라는 말을 들은 윤혜인은 의심스러워서 이내 물었다.“무슨 뜻이죠?”그러자 조여름은 바로 말했다.“당신은 서재의 그...”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렸다.“조여름 씨.”양복에 구두를 신은
이하진은 감히 아버지의 말을 듣지 않을 수 없었다. 그가 내려온 후 늘 하던 대로 죽어도 자신이 한 짓을 인정하지 않았다.“전 그런 말을 한 적이 없어요. 아버지도 제가 책을 보기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아시잖아요. 제가 어떻게 선생님께 책을 가져오라 할 수 있겠어요?”그는 이신우를 등지고 윤혜인을 향해 익살스러운 표정을 지었다.“윤 선생님, 왜 저를 모함하세요?”이하진이 갑자기 말을 바꾸자 윤혜인은 당황하지 않고 휴대전화를 꺼냈다.“방금 녹음했어.”그러자 이하진의 안색이 갑자기 어두워졌다.“야! 이 지독한 여자가 감히 날 건드려?”그러자 윤혜인이 담담하게 말했다.“네가 먼저 날 해치지 않았다면 이런 일도 없을 거잖아.”이하진은 화가 치밀어 올라서 이신우를 바라보며 모처럼 기대하는 눈빛을 보냈다.“아버지, 저를 안 믿고 저 여자를 믿으세요?”이신우는 담담한 표정을 지으며 한참 지나서야 말했다.“엎드려.”그러자 이하진은 안색이 몹시 나빠졌다.“싫어요!”그는 큰 소리로 외쳤다.이신우는 조용히 그를 바라보며 물었다.“그럼, L 국으로 돌아가고 싶어?”그 말을 들은 이하진은 어쩔 수 없이 천천히 고개를 숙이고 엎드렸다.이신우는 손에 회초리를 들고 심하게 때렸다.“팍! 팍! 팍!”그는 세 번 내리쳤다.그렇게 아프지는 않았다.다만, 너무 창피한 느낌이 들었다.이하진도 이제 막 열여덟이 되었기에 사내라고 자부했다.엉덩이까지 맞을 줄은 몰랐다.그것도 가정 교사 앞에서 말이다.그는 눈시울을 붉히며 화가 나서 소리쳤다.“전 아무도 건드리지 않았어요.”그리고 자기 방으로 달려갔다.윤혜인은 이신우가 자기 아들을 이렇게 가르칠 줄은 몰랐다. 하지만 이하진이 꼴 보기 싫을 때 그녀도 그의 엉덩이를 후려갈기고 싶어 했다.일도 끝났으니 더 이상 있을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 윤혜인은 이신우에게 말했다.“신우 씨, 별 다른 일이 없으시면 전 이만 가볼게요.”그러자 이신우는 외투를 껴입고 앞으로 가면서 대답했다.“가는 길이 같으니
윤혜인은 고개를 끄덕이었다.“걱정하지 마세요. 제가 잘 가르칠게요.”“공부뿐만 아니라 인성까지 좀 신경 써주세요.”“네. 알겠어요. 지난번에 외할머니 일은 아직 감사드리지 못했는데. 제가 하진이를 열심히 가르쳐서 보답하겠어요.”신호등에 걸리자 차는 다시 멈춰 섰다.이신우는 고개를 돌려 그녀를 뚫어져라 보다가 웃으면서 말했다.“저한테 그렇게 예의를 차릴 필요는 없어요. 그러시면 오히려 멀게 느껴져요.”윤혜인은 그래도 진지한 표정으로 인사를 했다.“아니에요. 병원의 일은 정말 고마웠어요. 항상 기억하고 있죠.”이신우는 그녀에게 감사의 인사를 받으려고 한 게 아니었기에 그는 화제를 돌렸다.“게다가 저는 지금 혜인 씨의 작은 삼촌이 아니니 편하게 말을 놓으셔도 돼요.”“네?”윤혜인은 그가 그런 걸 신경 쓸 줄은 몰랐다.하지만 다시 생각해 보니 너무 예의 바르게 대하면 마치 늙은 사람과 대화하는 느낌이 들었다.이신우는 그녀를 힐끗 쳐다보더니 말했다.“설마 혜인 씨가 준혁이와...”이준혁의 얘기가 나오자 윤혜인은 어깨를 들썩이며 다급하게 말했다.“아니에요. 전 준혁 씨와 아무런 관계도 없어요.”그녀의 모습을 본 이신우는 대략 짐작이 갔다. 분명히 아직 그를 마음에 두고 있는 것 같았다.그는 담담하게 대답했다.“그런 뜻이 아니에요.”그 후로 두 사람은 내내 말을 하지 않았다.윤혜인은 창밖의 별을 바라보았다. 달빛에 반쯤 비친 그녀의 얼굴은 더 하얗고 젤리처럼 부드러웠고 아름다웠다.이신우는 그녀의 옆모습을 바라보았다. 정말 그림처럼 아름다웠다.그녀는 그 사람과 너무 닮았다.그는 내색을 내지 않고 천천히 시선을 돌렸다.목적지에 도착하자 윤혜인은 차에서 내려 인사했다.원래 가는 길이 같은 방향이었기에 그녀도 큰 부담이 없었다.제자리에서 기다렸다가 이신우가 아직 가지 않자 그녀도 그가 바라보는 방향을 따라 앞을 보았다.그러자 그녀는 보자마자 멍해졌다.검은색의 마이바흐가 아파트 단지 길목에 마치 잠복해 있는 맹수처럼 조용히 멈춰
다음 순간 그는 몸을 굽혀 그녀를 뒷좌석에 앉혔고 차 문을 닫을 겨를도 없이 허리를 굽혀 그녀의 턱을 받들고 입술에 키스했다.윤혜인은 손을 뻗어 그의 셔츠를 잡아당겼다. 그러자 셔츠 단추가 하나 터졌는데도 그는 전혀 개의치 않았다. 오히려 그녀가 화가 나서 입을 벌릴 때 그는 그녀의 혀끝을 물고 온몸이 짜릿하게 느껴질 정도로 힘껏 빨아들였다.마침내 그는 만족스러운 듯 손을 놓았고 윤혜인은 화가 나서 손을 치켜들었지만, 그는 그녀의 손을 잡고 그윽한 눈빛으로 바라보았다.“다시 내 여자가 되어줄래?”그의 말을 들은 그녀는 너무 어이가 없고 화가 났다.그는 마치 그녀의 약점이 어디에 있는지 알고 매번 주도권을 차지했다.그녀는 분명히 화가 났지만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다. 얽힐 대로 얽힌 지금 상황이 싫었다.그녀는 이준혁이 빛과 같다고 생각했다.예전에 그녀는 그에게 다가가 빛을 안은 듯 그를 안았다.하지만 그 빛은 그녀에게 무자비한 상처를 주었다.지금 그녀는 무의식적으로 그와 얽히기 싫어서 피하려고 했다. 아직도 그와 엮인다면 또 어떤 희망이 생겨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그런 희망 때문에 또 한 번 상처를 받을 것을 생각하니 질식할 것 같았다.아무도 그녀가 왜 피하고 있고 무엇을 두려워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그녀는 거의 살려달라고 비는 말투로 말했다.“이준혁 씨, 도대체 어떻게 해야 저를 놓아줄 수 있어요? 저랑 자고 싶어요? 자고 나면 저를 바로 놓아줄 수 있는 건가요?”그러자 이준혁의 눈빛은 차갑게 변했다.“무슨 뜻이야?”“제가 무슨 뜻이겠어요? 지금 저한테 매달리는 게 저랑 자고 싶어 그러시는 거잖아요.”윤혜인은 이슬이 맺힌 눈으로 똑바로 그를 쳐다보았다.“뭐라고?”“준혁 씨와 자고 나면 저를 더 이상 괴롭히지 않을 수 있어요? 그렇다면 제가...”이준혁은 경멸에 찬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공짜로 나랑 자주는 거야?”그의 말에는 모욕과 굴욕이 가득했다.윤혜인은 주먹을 쥐고 몸을 떨며 괴로워했다. 자신의 미
윤혜인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등 뒤에서 느껴지는 차갑고 무서운 눈길은 마치 그녀의 가슴을 가르고 마음속을 훤히 들여다보는 것 같았다. 그녀는 몸이 떨려왔다.한구운은 그녀의 손을 잡고 남자의 흉악한 눈빛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고개만 끄덕이고는 그녀를 데리고 떠났다.정신을 차려보니 윤혜인은 어느새 집 앞에 도착해 있었다.한구운은 꽃다발을 그녀에게 건네주며 말했다.“일찍 들어가 쉬어. 무슨 일 있으면 전화해.”한구운은 몇 마디를 더 했지만 윤혜인의 귀에는 그의 말이 들어오지 않았다. 그는 대충 고개를 끄덕이는 그녀를 보며 자리를 떠났다.그녀는 언제 한구운이 건넨 꽃다발을 받았는지도 생각나지 않았다. 오랫동안 그녀는 이준혁 이외의 다른 사람들과 다정하게 지내본 적이 없었다.이준혁 앞에서 다른 사람과 손을 잡는 것도 죄책감이 들었다.그러나 그녀는 오늘 첫걸음을 내디뎠다. 이준혁의 눈빛이 두렵긴 했지만 그것 이외에는 그렇게 어렵지 않은 것 같았다.집안에 들어간 윤혜인은 꽃다발을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몰랐다.한구운이 왜 그녀에게 꽃다발을 줬을까?큰 꽃다발이 정말 예뻤다. 꽃을 싫어하는 여자는 없다.그녀는 꽃다발의 향기로움은 맡을 수 없었지만 꽃의 아름다움은 좋았다. 그녀는 꽃을 거실 탁자 위에 올려놨다.이때, 소원에게서 문자 한 통이 날라왔다.[나, 오늘 너희 집에 가서 잘래.]윤혜인은 알겠다고 문자를 보낸 뒤 샤워하러 갔다.샤워를 마친 그녀가 욕실에서 머리를 반쯤 말렸을 때 초인종이 울렸다.그녀는 아무런 경계도 없이 문을 열며 말했다.“비밀번호 까먹었어?”하지만 밖에 있는 사람은 소원이 아니라 이준혁이었다.윤혜인은 머리가 하얘졌다. 이내 정신이 돌아온 그녀는 손을 뻗어 문을 닫으려 했다.이준혁은 느긋하게 발을 뻗어 닫기는 문을 막으며 날카로운 눈동자로 그녀를 지긋이 바라봤다.“모두가 다 알길 바라는 거야?”그의 말에 윤혜인은 더 이상 그를 막지 않았다.어차피 이준혁에게는 들어올 방법이 있었다. 그는 문을 닫고 집안으로 들어왔
방에 들어가기 전에 그는 멈춰서서 차가운 눈빛으로 탁자 위에 놓여있는 흰 장미꽃을 바라봤다.“꽃 좋아해?”그는 다른 사람에게 꽃을 준 기억이 한 번도 없었다.윤혜인은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낮은 소리로 중얼거렸다.“누가 주냐에 따라서 달라요.”말을 마친 그녀는 자신의 혀를 깨물고 싶었다.아니나 다를까 이준혁은 침울한 표정을 지었다.사실 그녀는 그를 자극할 생각이 없었다. 대학생 때 그녀를 스토킹하던 한 남자가 그녀가 모르는 사이에 그녀의 책가방과 교과서에 붉은 장미를 넣은 적이 있었다.이 일로 그녀는 한동안 정말 무서움에 떨며 지냈었고 장미만 보면 나쁜 생각이 들곤 했었다. 그래서 주는 사람에 따라서 다르다고 말한 것이었지 한구운이 준 장미라서 좋아한다는 뜻이 아니었다.그러나 어떤 사람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이준혁은 방에 들어가지 않고 그녀를 탁자 위의 장미 위에 눕혔다.장미꽃 위의 이슬 때문에 등이 축축해진 탓에 윤혜인은 몸을 파르르 떨며 이준혁의 셔츠를 꽉 잡았다. 등 뒤에 눌린 장미 때문에 온전히 힘을 쓸 수가 없었다. 많은 곳 중에서 왜 여기인지 그녀는 이해할 수 없었다.“여기는 싫어요.”그녀는 긴장했을 때 눈동자가 촉촉해지곤 했다. 어쩔 수 없이 꽃잎 위에 누워 있는 그녀를 보며 덮치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이준혁은 눈을 내리깔고 그녀의 말에 거절하며 다가갔다.“여기서 하자.”딱딱한 포장지가 깔리며 소리가 나자 이준혁은 그녀의 등 뒤로 손을 뻗어 장미의 포장을 풀었다.포장이 풀리며 장미들이 여기저기 흩어졌다. 어떤 꽃들은 탁자 위에 있었고 어떤 꽃들은 탁자 양쪽에 떨어졌다.윤혜인은 탁자가 두 사람의 무게를 견딜 수 있을지 몰라 긴장된 마음이 튀어나올 것만 같았다.그녀는 저항하며 그를 밀어냈다.“난 여기가 싫어요. 하고 싶지 않아요...”이준혁은 그녀를 흘겨보며 말했다.“그럼 넌 내가 계속 이러기를 바라는 거야?”그도 망설이지 않고 일어서며 그만하려 했다.만약 이곳이 아닌 다른 곳이었다면 윤혜인도 그의
그의 말이 사실이 아니라면 미친개한테 물렸다고 생각하면 되고 만약 사실이라면 남은 인생을 평화롭게 보낼 수 있었다.이렇게 비교해 보니 망설임이 사라졌다.그녀는 입술을 달싹이며 자신의 결정을 말했다.“앞으로 나를 속이지 않는다는 준혁 씨의 말을 믿어볼게요.”그녀는 잔머리를 굴려 예전에 그가 했던 말을 내뱉으며 믿어보겠다고 했다.그가 번복하려 할 때 이 말을 떠올리면 예전에 자신이 그녀에게 했던 약속이 생각날 것이다.윤혜인의 착각인지 아닌지 그녀는 이준혁이 자신의 말을 듣고 기뻐하지 않는다는 걸 느꼈다. 심지어 화도 난 것 같았다.그녀의 느낌은 사실이었다.키스하기 전 이준혁이 그녀에게 말했다.“이젠 네가 후회해도 소용없어.”그의 촉촉한 입술이 강압적으로 그녀의 입술에 키스를 퍼부으며 그녀의 매끄러운 작은 혀를 탐했다.그녀를 부술 것 같은 힘이었다.윤혜인은 그의 키스에 혀가 마비가 된 것 같았고 손가락도 떨려왔다.몸 아래 있던 장미꽃에서 매혹적인 향기를 머금은 즙이 흘러나와 탁자를 따라 땅바닥에 떨어졌다.뜨거운 열기가 그녀를 엄습해왔고 이준혁도 고의로 그녀를 괴롭혔다.그의 키스는 입술에서부터 아래로 서서히 내려갔다.정교한 턱을 지나 예쁜 쇄골로 넘어갔고 마지막으로 그녀의 부드러운 목덜미를 가볍게 빨아들이며 키스를 퍼부었다.윤혜인은 떨림이 멈추지 않았다. 조금 후회가 됐지만 그녀는 지금 번복할 수 없었다. 앞으로를 생각하면 참을 수 있었다.이때 문소리가 들려왔고 윤혜인은 깜짝 놀라며 긴장했다.이준혁은 밖에서 나는 소리가 아닌 윤혜인의 행동에 미간을 찌푸렸다. 윤혜인은 그제야 소원이 오늘 저녁에 와서 자겠다고 한 사실이 생각났다.그들은 거실의 탁자에 있는 상태였기에 지금 피하려고 해도 이미 늦은 상태였다.윤혜인은 심장이 세게 뛰었다. 그녀는 반항하는 것도 잊고 있었다.“띠띠... 잘못된 비밀번호입니다.”기계음 소리에 그녀는 잠시 마음이 놓였다. 곧이어 비밀번호를 누르는 소리가 들려왔다.“띠띠... 잘못된 비밀번호입니다.”슬
소종은 육경한이 아이들을 얼마나 그리워하는지 잘 알고 있었다.교도소 안에 있을 때 육경한은 모든 사람들의 면회를 거절했지만 마음속으로는 늘 두 아이를 그리워했다.그는 아이들에게 자신의 안 좋은 모습을 보여주고 싶어 하지 않았다.“타세요, 대표님.”소종이 침묵을 깨며 한마디 했다.육경한이 차에 타자 소종은 그동안 일어난 일들을 이야기하기 시작했다.“이 대표님 가족이 소 대표님을 잘 돌봐주셨어요. 아이들끼리도 친하게 지내고... 그리고 김 대표님도 하정이와 유진이를 돌봐주셨어요... 그리고 윤혜인 사모님의 오빠가 8년 전에 결혼했어요. 집 가정부의 딸 구지윤 씨와 결혼했어요. 처음에 할아버지가 많이 반대했지만 지금은 행복하게 잘살고 있어요. 딸을 낳으면서 할아버지도 받아들이셨고요... 아, 참. 예전에 소 대표님과 친하게 지냈던 여경 강민혜 씨, 기억하시죠? 소 대표님의 친동생이었더라고요. 당시 소 대표님의 어머니가 과다 출혈로 위독하셨을 때 그 여경이 수혈해 줬거든요. 소 대표님이 두 사람의 혈액형이 같은 것을 알고 친자 확인을 했더니 강민혜 씨가 정말 친동생이었어요. 예전에 도둑맞아 죽었다고 알려졌던 아이가 사실은 살아 있었던 거죠...”소종이 이야기를 하는 사이 차는 어느새 호화로운 호텔 앞에 도착했다.그들이 육경한을 위해 환영회를 준비한 듯했다.육경한이 말했다.“이런 거 필요 없어. 어떤 모임에도 참석하고 싶지 않아. 그냥 쉬고 싶어.”그러자 소종이 바로 말했다.“안 돼요. 오늘 식사 자리에는 꼭 가야 해요.”황진수도 말했다.“맞아요, 육경한 씨. 소소하게 준비한 것이니 우리 마음을 봐서라도 꼭 참석해 주세요.”마지못해 차에서 내린 육경한은 호텔 룸에 들어간 순간 방 안에 익숙한 얼굴들이 가득한 것을 보았다.예쁜 소녀가 육경한에게 다가오더니 큰 눈을 깜빡이며 그를 보고 말했다.“그쪽이 우리 아빠예요?”자신과 닮은 소녀의 눈매에 육경한은 순간 말을 잇지 못했다.육하정이 계속 말했다.“엄마가 말했어요. 아빠가 잘못을 저질러
법정 안, 판사가 선고했다.“피고인 육경한, 살인죄로... 그러나 피해자와의 갈등 관계를 고려하고 증인의 증언을 종합하여 본 법정은 다음과 같이 판결합니다. 육경한에게 징역 20년을 선고합니다...”“대표님...”방금 깨어나서 법정에 나와 주석훈의 살인을 증언한 소종은 울며 육경한을 불렀다.뒤에 서서 두 달 된 아기를 안고 있는 소원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눈시울은 이미 붉어져 있었다.아기의 얼굴과 핑크색 이불을 본 육경한은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다.그는 더 이상 소원에게 할 말이 없었다. 대신 소종을 보며 한마디 했다.“잘 돌봐줘.”육경한이 누구를 말하는지 바로 캐치한 소종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대표님, 걱정하지 마세요. 대표님이 나올 때까지 기다릴게요.”...15년 후, 구치소 대문 앞.15년 전 입소할 때 입었던 옷을 입고 나온 육경한은 여전히 가슴을 펴고 당당하게 걸었다.교도소에 있는 동안 좋은 표현 덕분에 감형을 받아 조기 출소했다.10여 년의 세월이 흐른 지금, 육경한의 얼굴에 시간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었지만 왠지 모르게 더 깊고 온화한 매력을 내뿜었다.구치소 밖에서는 황진수와 소종이 육경한을 기다리고 있었다. 소종이 가장 먼저 달려와 그를 붙잡고 울었다.“대표님, 고생 많으셨어요!”키가 185cm나 되는 팔이 하나뿐인 남자가 눈물을 흘리며 울부짖고 있었다.“대표님...”옆에 있던 황진수가 육경한에게 담배를 건네자 담배를 받은 육경한은 깊게 빨아들인 뒤 말했다.“내 재봉 솜씨가 얼마나 좋은지 알아? 나중에 너희들에게 옷 한 벌 만들어 줄게.”소종은 정말 어이가 없었다.슬픈 분위기가 육경한의 한 마디에 완전히 뒤바뀌었다.소종이 울다가 웃으며 말했다.“대표님, 기대하고 있을게요.”육경한이 코웃음을 쳤다.“꺼져.”먼 곳을 바라본 육경한은 소종과 황진수 외에 그를 맞이하러 온 사람이 없는 것을 보고 왠지 실망감이 들면서도 한편으로는 안도감도 들었다.그녀가 오지 않아도... 괜찮았다.결코 좋은
“두 번째 것을 선택할게.”죽어도 소원을 구하겠다는 결심을 하고 온 육경한이었기에 고민할 필요 없이 바로 대답했다.“허허, 육 대표가 소원을 정말 많이 아끼나 봐.”주석훈이 비꼬는 듯한 말투로 한마디 했다.“그럼 시작하지. 육 대표, 6년 전 교통사고를 당했을 때 죽은 소녀의 이름이 뭔지 기억나?”자리에 얼어붙은 육경한은 주석훈이 혹시라도 소원을 해칠까 봐 바로 앞으로 두 걸음 걸었다. 덫이 ‘탁탁’ 소리를 내며 그의 두 다리를 집었고 이내 피가 철철 흘렀지만 육경한은 극심한 고통을 참으며 말했다.“몰라.”손에 칼을 움켜쥔 주석훈은 이를 갈며 말했다.“그 소녀의 이름은 수정이야. 육 대표처럼 모든 지원을 다 받아 치료받은 사람은 기억하지 못하겠지.”큰 고통 속에도 맑은 정신을 유지하고 있던 육경한이 입을 열었다.“그 교통사고에서 소녀가 죽은 것은 알고 있었어. 하지만 나는 우리 미우 그룹의 병원에서 치료를 받았어. 그 사람들이 나를 먼저 치료한 이유는 대동맥이 눌러져 위급한 상황이었기 때문이야. 하지만 그 소녀도 나와 똑같이 심각한 상태라는 것은 예상하지 못했어. 그래서 그 후에 소녀의 가족에게 위로금도 보냈어.”육경한의 책임은 아니었지만 소녀가 꽃다운 나이에 세상을 떠나 그녀의 부모님이 통곡하는 모습을 본 육경한은 소종을 시켜 소녀의 가족에게 2억 원의 위로금을 전달했다.“내가 네 말을 믿을 것 같아?!”주석훈이 매서운 눈빛을 내뿜으며 큰소리로 외쳤다.“어쨌든 넌 살아남았고 나의 수정이는 떠났어. 아무도 우리 수정이에게 신경을 쓰지 않았지!”주석훈은 더 이상 게임 따위 생각하지 않은 채 미친듯이 울부짖었다.“너희들은 모두 냉혈 인간들이야. 너희들은 죽어도 싸!”말을 마친 주석훈이 칼을 휘둘러 소원의 배를 찌르려 하자 육경한은 재빨리 몸을 날려 자신의 종아리로 칼을 막았다.소원을 밀어낸 육경한은 격렬한 고통을 참으며 주석훈과 맞붙었다.팔다리가 멀쩡한 주석훈은 이내 다리가 다친 육경한보다 우위를 점했다.도우려고 한 발 나선 소
이후 남자는 기분이 좋은 듯 소원의 입에 물린 천을 빼주며 말했다.“어떻게 여기에!”소원은 깜짝 놀랐다. 눈앞에 있는 사람은 바로 그녀를 계속 도와주던 주석훈이었다!자신에게 접근한 의도를 의심한 적은 있었지만 나중에 그의 여자친구가 병으로 사망했다는 얘기를 듣고 자신과는 원한이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그런데 이 모든 사건의 배후가 주석훈이라니...“소원, 많이 놀랐지?”가면을 벗어 던진 주석훈은 마치 조금 전까지 잔인했던 사람이 본인이 아닌 듯 아주 평온해 보였다.“왜... 이렇게까지?”소원은 처음에 이해할 수 없었지만 자연스럽게 왼손을 사용해 물건을 잡는 모습을 보고 바로 깨달았다.“너였어!”소원은 확신에 찬 얼굴로 말했다.“상철 삼촌과 진아연을 죽인 사람이 너! 맞지?!”주석훈은 부인하지 않았고 그의 표정 또한 모든 걸 말해주듯 가볍게 웃으며 한마디 했다.“소원, 그 사람들은 죽어도 싼 사람들이야. 그들이 죽었으니 네가 기뻐해야 하는 거 아니야? 그 사람들이 공모해서 네 아버지를 죽였잖아?”“아니야!”소원은 단호하게 부정했다.“그 사람들은 단순히 조종당한 희생양일 뿐이야. 내 아버지를 죽인 진짜 범인이 너였어?! 넌 그냥 증거 인멸을 한 거야!”“소원, 정말 똑똑하네?!”칭찬하듯 한마디 한 주석훈의 말에 소원은 분노로 가득 차올라 외쳤다.“왜! 아빠가 뭘 잘못했다고 죽인 건데?!”주석훈은 음흉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소원, 네가 모를 거라고 생각했어. 이유? 알고 싶어? 나와 육경한 사이에 깊은 원한이 있기 때문이야.”“그게 아빠와 무슨 상관인데!”소원은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되지 않았다.“이렇게 간단한 이치를 모른다고?”주석훈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소진용이 죽어야만 너와 육경한의 갈등을 최대로 끌어올릴 수 있으니까. 넌 내 손에 있는 최고의 무기야. 넌 육경한에게 끔찍한 고통을 안겨 줄 수 있는 존재지. 지난 5년 동안, 본인만의 원칙이 있는 사람이 그것을 깨고 괴로워하는 모습을 보는 게 얼마나 즐거운
소원이 두 손을 머리 위로 든 채 남자의 방향으로 걸어가자 남자는 다친 전미영을 바닥에 내던졌다.전미영은 이미 의식을 잃었기에 지금 상태가 어떤지 알 수 없었다.소원은 체념한 듯 보였지만 사실 남자에게 가까이 다가가면서 몰래 반지 속의 장치를 작동시켰다.이내 독이 묻은 바늘로 남자의 팔을 찌르자 팔이 곧바로 마비되기 시작한 남자는 저린 감각이 팔을 타고 온몸으로 퍼져 나가는 것을 느꼈다.“망할 년! 감히 날 속여?”남자는 분노하며 소원을 발로 걷어찼다.배를 보호하기 위해 몸을 돌린 소원은 엉덩이가 세게 걷어차인 바람에 비틀거리며 앞으로 두 걸음 나아갔다. 다행히 앞에 소파가 있었기에 소파를 붙잡고 간신히 몸의 균형을 잡은 뒤 있는 힘껏 소리쳤다.“살려 주세요! 도와주세요...!”그러나 남자가 바로 달려와 순식간에 손수건으로 그녀의 입을 틀어막았다.최면제의 효과가 서서히 올라옴과 동시에 문을 걷어차는 소리와 몇 발의 총성이 희미하게 울리는 것이 들렸다.소원은 속으로 간절히 기도했다.‘제발 엄마를 구해 주세요...’그러고는 있는 힘을 다해 목걸이를 바닥으로 내던진 뒤 점점 의식을 잃고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희미하게 정신을 차렸을 때는 운송 차 안인 듯한 밀폐된 공간에 갇혀 있었다.입안에는 천이 틀어막혀 있었고 팔도 밧줄에 단단히 묶여 있었다.순간 소원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결국 구출되지 못하고 가면을 쓴 남자에게 끌려온 것이다.주위에 전미영이 보이지 않자 소원은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엄마가 같이 끌려오지 않은 것만으로도 다행이야. 현장에 있던 사람들이 엄마를 병원으로 옮겼을 거야. 그러면 희망이 있어.’하지만 엄마의 상태가 어떤지 알 수 없었기에 속으로 행운을 빌며 기도할 수밖에 없었다.그리고 이 납치범에 대한 분노가 가슴 속 깊이 밀려왔다.‘이 사람은 대체 우리와 무슨 원한이 있길래 이런 짓을 하는 거지?’덜컹거리며 달리는 차 안에 있는 소원은 졸음이 밀려왔다.임신 후기라서 그런지 이런 상황에서도 극심한 피
육경한이 진지한 목소리로 말했다.“지금 바로 그 여경을 찾아서 같이 있도록 해. 이 사람이 아직도 쇼핑몰 안에 있을 가능성이 커. 나도 지금 돌아가는 중이야...”소원은 순간 숨을 죽인 채 눈도 깜빡이지 않고 앞을 응시했다.바로 앞에 하얀 여우 가면을 쓴 남자가 한 중년 여성을 붙잡고 있었다. 그 중년 여성이 바로 모두가 찾는 전미영이었다.육경한의 말대로 그녀의 엄마는 정말 여기에 있었다.육경한의 목소리가 전화기 너머로 계속 들렸지만 소원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전미영은 처음부터 끝까지 밖으로 나가지 않았다. 가면을 쓴 이 교활한 남자는 사람을 쇼핑몰 안에 붙잡아둔 채 밖으로 나가지 않았던 것이다.‘등잔 밑이 어둡다’라는 말이 괜히 있는 것이 아니었다.가짜 번호판 차량은 아마도 이 남자가 미리 파놓은 함정일 것이다.그녀가 상상한 것보다 훨씬 똑똑한 이 사람은 다른 사람의 심리를 읽을 줄 알았다.가면 쓴 남자는 손가락을 입에 대며 ‘쉿’ 하는 제스처를 취하더니 소원에게 말을 하지 말고 전화를 끊으라는 뜻을 내비쳤다.자기 엄마가 상대방의 손에 있기에 소원은 그의 말에 따를 수밖에 없었다.전화를 끊은 후 가면을 쓴 남자가 그녀에게 한마디 지시했다.“전화기를 꺼서 이쪽으로 던져.”소원은 남자의 말대로 순순히 전화기를 끄고 그의 앞에 던진 후 한마디 물었다.“누구세요? 지금 뭘 원하는 거예요? 제발 우리 엄마만 해치지 마세요!”간신히 마음을 진정시킨 소원은 남자를 향해 두 가지 질문을 던졌지만 그녀의 유일한 요구는 상대방이 엄마를 해치지 않는 것이었다.말을 하면서도 소원은 몰래 주변을 관찰했다. 가면 쓴 신비로운 남자는 정말 교묘한 장소를 선택했다.화장실은 휴게실 제일 안 쪽에 있었고 뒤쪽에 있는 창문과 거리가 가까웠다.남자는 전미영을 붙잡고 입구 쪽에서 소원과 정면으로 마주서 있었다. 이렇게 하면 좁은 포위망이 형성되어 소원을 한 구석에 가둘 수 있다.남자는 손에 흉기를 들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자체적으로 제작한 권총 비슷한 것
강민혜는 즉시 지시를 내려 이 수상한 차량을 중점적으로 조사하라고 했다. 육경한이 회사의 위기 대응팀과 협력해 조사하라고 지시하자 그들은 이내 차량의 이동 경로를 찾아냈다.육경한은 즉시 차량을 출동시켜 추적하도록 했지만 소원더러는 가만히 있으라고 했다. 현재 상대방의 목표가 소원의 엄마가 아니라 임신 중인 소원일 가능성이 컸기 때문이다.게다가 차량 추격은 너무 자극적이어서 소원 같은 임산부에게 위험할 수 있었다.소원은 육경한이 그녀를 배려하기 위해 이렇게 하는 것임을 알았다. 이런 상황에서 소원이 차량 추격에 참여해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큰일이다. 어머니를 찾지 못하고 본인까지 안 좋은 상황이 되면 두 마리 토끼를 다 놓친 셈이 된다.육경한의 부탁에 소원은 그의 말에 따라 자리에서 기다리기로 했다. 육경한은 회사 경호원 한 팀을 불러 상대방의 차량을 추적하도록 했다.쇼핑몰에 남아 있는 경호원들은 움직이지 않고 그 자리에서 소원을 경호했다. 소원의 걱정을 덜기 위해 육경한도 차량 추적에 나섰다.이렇게 되어 여러 대의 차량이 CCTV에 찍힌 그 검은 차를 추적하기 시작했다.소원은 쇼핑몰의 휴게실에서 초조하게 기다렸다. 불안감에 휩싸인 그녀는 심박 수가 빨라져 의사가 와서 경고하기도 했다. 이렇게 되면 그녀의 몸에도 해로울 뿐만 아니라 조산할 위험이 있기 때문이다.소원이 걱정된 강민혜는 현장에 남아 그녀를 달랬고 소원이 화장실에 갈 때도 한 발짝도 떨어지지 않고 함께했다.소원은 마음을 진정시키기 위해 화장실에 가서 찬물로 세수를 했고 강민혜도 옆에서 그녀를 위로했다.“소원 씨, 걱정하지 마세요. 어머님은 분명 괜찮을 거예요. 그렇게 큰 고비도 넘겼는데 별일 없을 거예요. 게다가 경찰과 육 대표님이 모두 추적하고 있잖아요. 그러니 마음 놓으세요.”본인이 아무리 불안해해도 소용없다는 것을 알고 있는 소원은 육경한이 좋은 소식을 전해주길 간절히 기다렸다. 하지만 불편한 몸 때문에 자꾸 구역질이 났다.이때 소원의 전화가 울렸다.육경한이었다.당황한
육경한이 성큼성큼 다가가 물었다.“왜 그래, 장모님은?”“엄마가 사라졌어...”소원이 흐느끼는 목소리로 말했다.방금 충돌이 일어났을 때만 해도 전미영은 그녀 곁에 서 있었다.어떻게 된 일일까... 눈 깜짝할 사이에 전미영이 사라졌다.전미영은 걸을 수는 있지만 말을 잘하지 못하고 지능도 두세 살 아이 수준인데 도대체 어디로 갔을까...소원이 급히 찾으러 가려 하자 육경한이 그녀의 손을 잡으며 달랬다.“너무 급해 하지 마. 우선 CCTV를 보자. 경호원들에게 찾으라고 했어. 네가 걷는 것보다 경호원들이 움직이는 게 빨라.”소원도 육경한의 생각이 맞다고 생각했다. 지금은 최대한 침착한 마음가짐으로 엄마를 찾아야 했다. 절대 당황하면 안 되었다.두 사람이 CCTV 실로 향했을 때 안에 있던 사람들은 이미 전미영이 사라지는 영상을 찾아냈다.영상을 보니 전미영은 처음에는 경호원의 뒤, 소원 곁에 서 있었다.하지만 조금 전 말싸움이 일어나면서 그 남자가 경호원과 몸싸움을 하려 하자 경호원들은 소원이 다칠까 봐 소원과 육경한 주변으로 몰렸다.그러면서 전미영은 자연스럽게 뒤에 갔다. 원래대로라면 전미영도 별일 없어야 했지만 무슨 일인지 전미영이 갑자기 혼자 모퉁이 쪽으로 걸어갔다. 마치 그곳에 그녀를 끌어당기는 뭔가가 있는 것처럼 말이다.그녀는 불과 7, 8걸음 되는 모퉁이까지 아주 빠른 속도로 걸어갔다. 한편 소원과 육경한에게 정신이 팔린 경호원들은 전미영을 발견하지 못했고 전미영이 뒤에서 사라질 때까지 아무도 눈치채지 못했다.다음 모퉁이의 CCTV에는 소원이 비상구로 들어가는 것이 찍었다. 계단에 CCTV가 없었고 출구에 CCTV가 한 대 있었지만 전미영의 모습은 어디에도 찍히지 않았다. 즉 전미영이 출구로 나가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했다.그렇다면 유일한 통로는 지하 주차장이었다. 하지만 지하 주차장 출구의 CCTV가 때마침 고장이 나 있어 전미영이 그 출구로 나갔는지 확인할 수 없었다.전미영이 실종된 지 불과 몇 분, 실종자를 한 시간 이내에
두 모자가 가식적으로 불쌍한 척하며 사람들의 동정을 구걸한 것을 안 사람들은 순간 말문이 막혔다.그 모자를 제일 먼저 도우려고 나섰던 남자는 고개를 숙이며 소원에게 사과했다.“죄송해요. 제가 눈이 어두웠네요. 이런 말썽꾸러기 아이는 정말 톡톡히 교육해야 해요. 얼마든지 책임을 물으세요.”주변 사람들도 같은 입장이었다.입장을 바꿔 생각해 봤을 때 본인이 이런 말썽꾸러기 아이를 만난다면 분명 화가 날 것이다.게다가 이 모자는 역할 분담이 명확했다. 아들은 말썽을 부리고 엄마는 말재주를 발휘해 변명했다. 누구나 이런 일이 생긴다면 진짜로 화가 날 것이다.구경꾼들이 흩어진 후 육경한은 두 모자의 앞으로 한 걸음 앞으로 나아가더니 아이를 내려다보며 싸늘한 목소리로 말했다.“누가 시킨 거야?”엄마가 아이를 뒤로 끌어당기며 말했다.“아무도 없어요! 아무도 없다고 했잖아요. 그냥 우리 애가 장난친 거예요.”여자는 눈물을 흘리며 흐느꼈다.“왜 이래요... 우리가 그냥... 사과할게요... 아이고, 내가 왜 이렇게 불행한지...”그들은 완전히 피해자 행세를 하고 있었다.이런 상황에서도 여전히 자신이 피해자인 척하고 있으니 말이다.하지만 그들의 눈빛은 이미 흔들리기 시작했고 주위 사람들과 눈을 마주치지 못하는 모습은 보기에도 이상해 보였다.조금 지친 소원이 육경한의 손을 잡아당기며 말했다.“됐어, 이만 가자.”“1분만 기다려.”뭔가 이상하다고 느낀 육경한은 아이를 뚫어지게 바라보더니 압박감이 넘치는 목소리로 물었다.“누가 너를 시켰는지 말해. 안 그러면 바로 고소할 테니까.”겁이 많은 아이는 바로 오줌을 지리더니 이내 ‘와’하고 울음을 터뜨리며 말했다.“아저씨가...”아이의 엄마는 아이의 입을 막으려 했지만 이미 늦었다. 육경한이 아이의 엄마를 밀어내고 차가운 눈빛으로 아이를 바라보며 말했다.“똑바로 말해!”“어떤 아저씨가... 아주머니와 부딪히면 엄마에게 100만 원을 준다고 했어요... 엄마가 그러면 게임기를 사주겠다고 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