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에 들어가기 전에 그는 멈춰서서 차가운 눈빛으로 탁자 위에 놓여있는 흰 장미꽃을 바라봤다.“꽃 좋아해?”그는 다른 사람에게 꽃을 준 기억이 한 번도 없었다.윤혜인은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낮은 소리로 중얼거렸다.“누가 주냐에 따라서 달라요.”말을 마친 그녀는 자신의 혀를 깨물고 싶었다.아니나 다를까 이준혁은 침울한 표정을 지었다.사실 그녀는 그를 자극할 생각이 없었다. 대학생 때 그녀를 스토킹하던 한 남자가 그녀가 모르는 사이에 그녀의 책가방과 교과서에 붉은 장미를 넣은 적이 있었다.이 일로 그녀는 한동안 정말 무서움에 떨며 지냈었고 장미만 보면 나쁜 생각이 들곤 했었다. 그래서 주는 사람에 따라서 다르다고 말한 것이었지 한구운이 준 장미라서 좋아한다는 뜻이 아니었다.그러나 어떤 사람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이준혁은 방에 들어가지 않고 그녀를 탁자 위의 장미 위에 눕혔다.장미꽃 위의 이슬 때문에 등이 축축해진 탓에 윤혜인은 몸을 파르르 떨며 이준혁의 셔츠를 꽉 잡았다. 등 뒤에 눌린 장미 때문에 온전히 힘을 쓸 수가 없었다. 많은 곳 중에서 왜 여기인지 그녀는 이해할 수 없었다.“여기는 싫어요.”그녀는 긴장했을 때 눈동자가 촉촉해지곤 했다. 어쩔 수 없이 꽃잎 위에 누워 있는 그녀를 보며 덮치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이준혁은 눈을 내리깔고 그녀의 말에 거절하며 다가갔다.“여기서 하자.”딱딱한 포장지가 깔리며 소리가 나자 이준혁은 그녀의 등 뒤로 손을 뻗어 장미의 포장을 풀었다.포장이 풀리며 장미들이 여기저기 흩어졌다. 어떤 꽃들은 탁자 위에 있었고 어떤 꽃들은 탁자 양쪽에 떨어졌다.윤혜인은 탁자가 두 사람의 무게를 견딜 수 있을지 몰라 긴장된 마음이 튀어나올 것만 같았다.그녀는 저항하며 그를 밀어냈다.“난 여기가 싫어요. 하고 싶지 않아요...”이준혁은 그녀를 흘겨보며 말했다.“그럼 넌 내가 계속 이러기를 바라는 거야?”그도 망설이지 않고 일어서며 그만하려 했다.만약 이곳이 아닌 다른 곳이었다면 윤혜인도 그의
그의 말이 사실이 아니라면 미친개한테 물렸다고 생각하면 되고 만약 사실이라면 남은 인생을 평화롭게 보낼 수 있었다.이렇게 비교해 보니 망설임이 사라졌다.그녀는 입술을 달싹이며 자신의 결정을 말했다.“앞으로 나를 속이지 않는다는 준혁 씨의 말을 믿어볼게요.”그녀는 잔머리를 굴려 예전에 그가 했던 말을 내뱉으며 믿어보겠다고 했다.그가 번복하려 할 때 이 말을 떠올리면 예전에 자신이 그녀에게 했던 약속이 생각날 것이다.윤혜인의 착각인지 아닌지 그녀는 이준혁이 자신의 말을 듣고 기뻐하지 않는다는 걸 느꼈다. 심지어 화도 난 것 같았다.그녀의 느낌은 사실이었다.키스하기 전 이준혁이 그녀에게 말했다.“이젠 네가 후회해도 소용없어.”그의 촉촉한 입술이 강압적으로 그녀의 입술에 키스를 퍼부으며 그녀의 매끄러운 작은 혀를 탐했다.그녀를 부술 것 같은 힘이었다.윤혜인은 그의 키스에 혀가 마비가 된 것 같았고 손가락도 떨려왔다.몸 아래 있던 장미꽃에서 매혹적인 향기를 머금은 즙이 흘러나와 탁자를 따라 땅바닥에 떨어졌다.뜨거운 열기가 그녀를 엄습해왔고 이준혁도 고의로 그녀를 괴롭혔다.그의 키스는 입술에서부터 아래로 서서히 내려갔다.정교한 턱을 지나 예쁜 쇄골로 넘어갔고 마지막으로 그녀의 부드러운 목덜미를 가볍게 빨아들이며 키스를 퍼부었다.윤혜인은 떨림이 멈추지 않았다. 조금 후회가 됐지만 그녀는 지금 번복할 수 없었다. 앞으로를 생각하면 참을 수 있었다.이때 문소리가 들려왔고 윤혜인은 깜짝 놀라며 긴장했다.이준혁은 밖에서 나는 소리가 아닌 윤혜인의 행동에 미간을 찌푸렸다. 윤혜인은 그제야 소원이 오늘 저녁에 와서 자겠다고 한 사실이 생각났다.그들은 거실의 탁자에 있는 상태였기에 지금 피하려고 해도 이미 늦은 상태였다.윤혜인은 심장이 세게 뛰었다. 그녀는 반항하는 것도 잊고 있었다.“띠띠... 잘못된 비밀번호입니다.”기계음 소리에 그녀는 잠시 마음이 놓였다. 곧이어 비밀번호를 누르는 소리가 들려왔다.“띠띠... 잘못된 비밀번호입니다.”슬
문이 열리는 동시에 불도 꺼졌다.술에 취한 소원이 습관적으로 불을 켜려다 원래 켜져 있던 불을 끈 것이었다.실내는 어둠에 빠졌다. 이준혁은 일어나지 않고 차가운 손가락으로 그녀의 턱을 잡고 그녀의 입술에 키스를 퍼부었다.그의 키스에 정신이 혼미해진 윤혜인은 미칠 지경이었다.소원이 비틀거리며 소리를 질렀다.“혜인아, 혜인아. 우리 혜인이. 뭐야, 고래 뱃속에 들어왔나 왜 이렇게 어두워? 흑흑... 무서워. 혜인아 어디 있어?”소원이 눈앞까지 다가온 것을 본 윤혜인은 어쩔 수 없이 그의 혀를 힘껏 깨물었다. 그가 아파하는 틈을 타 그를 밀어낸 그녀는 탁자에서 뛰어 내려왔고 마침 다리가 풀렸던 소원에게 안기게 됐다.그녀는 게슴츠레한 눈으로 땅바닥에 널브러진 장미꽃을 보면서 꼬인 혀로 말했다.“올해 눈이 이렇게 일찍 왔어? 혜인아, 우리 눈사람 만들자... 남자들은 믿을 놈이 없어. 기다려, 기다려봐. 내가 너에게 남자친구를 소개해 줄게. 너 어떤 스타일 좋아해? 어린애? 아니면 나이가 좀 있는 아저씨? 비행기 기장?”소원은 술을 많이 마신 탓인지 말실수를 많이 했다.윤혜인은 그녀의 입을 막았다.“그만해.”“읍... 말할래... 사실 선배도 괜찮은 사람이야. 너희 가짜...”이준혁이 사실을 알게 될까 봐 두려웠던 윤혜인은 그녀를 끌고 욕실로 들어가서 쾅 하고 문을 닫았다.‘어떻게 이준혁을 속였는데. 더 이상 문제가 생기면 안 돼.’소원은 술을 많이 마셨는지 얼굴이 새빨갰다.윤혜인은 그녀의 옷을 벗긴 뒤 물을 받아놓은 욕조에 그녀를 밀어 넣었다. 그제야 소원의 몸 곳곳이 눈에 들어왔다.목부터 발가락까지 곳곳에 빨린 것 같은 검붉은 자국이 있었고 어떤 곳은 물렸는지 껍질이 벗겨져 딱지가 앉아 있었다.윤혜인은 그녀의 등과 엉덩이도 자세히 봤다. 마치 무엇에 맞은 것 같은 은은한 붉은 흔적들이 보였다.그녀도 미숙한 소녀가 아니었기에 이런 흔적들의 왜 생긴 것인지 알 것 같았다.이준혁도 예전에 그녀를 이렇게 괴롭혔던 적이 있었지만 이 정도는
소원의 목소리는 아주 작았다. 얼마나 작았냐면 마치 유리처럼 다치기만 해도 부서질 것만 같았다.“혜인이가 날 우습게 볼까 봐 무서워.”윤혜인은 소원을 품에 꼭 안았다. 눈에서는 눈물이 방울방울 흘러내렸다.그녀는 울음을 참으며 말했다.“안 그래. 난 영원히 널 우습게 보지 않을 거야. 소원아, 무슨 일 있으면 반드시 나에게 알려줘야 해. 내가 네 뒤에서 든든한 버팀목이 돼줄게.”소원은 비록 술에 취했지만 무언갈 느낀 듯이 그녀를 안고 엉엉 울었다.목욕하면서 둘다 흠뻑 젖었다.윤혜인은 깨끗이 닦은 후 소원을 끌고 나와 소원에게 잠옷을 입히고 그녀를 부축해 방으로 갔다.소원은 우느라 지쳤는지 베개를 안고 곤히 잠들었다.윤혜인도 샤워를 시키면서 힘이 빠진 상태라 움직이고 싶지 않아 방으로 돌아가 잠을 자려 했다.문을 열고 들어가니 베란다 난간에 비스듬히 기댄 채 담배를 피우고 있는 이준혁이 보였다.그녀는 멈칫했다.이준혁은 고개를 돌려 그녀를 힐끗 쳐다봤다. 남의 집이라는 느낌이 들지 않을 정도로 그는 느릿하게 담배를 피웠다.그는 몸에 샤워 타올 한 장을 대충 걸치고 있었는데 그 모습이 이상하게 보이지 않고 멋있고 섹시해보였다.그의 얼굴은 몸매와 잘 어울렸다. 아무것도 입지 않아도 멋있었다.윤혜인은 그가 아무것도 입지 않은 모습을 생각하고 얼굴이 빨개졌다.지금 그의 몸에 걸친 수건 한 장도 없는 것과 같았다.그녀는 헐렁하게 허리에 걸친 샤워 수건을 달려가서 꽉 조여주고 싶었다.혹시라도 소원이 들을까 봐 그녀는 들어간 뒤 방문을 닫았다.“아직도 안 갔어요?”“시간이 아직 안됐잖아.”윤혜인은 눈을 깜박거리며 물었다.“무슨 시간이요?”이준혁은 돌아서서 그녀를 향해 천천히 다가갔다. 그는 인내심을 가지고 설명했다.“내가 오늘 밤이 지나면 끝내겠다고 말했잖아. 아직 시간 남았어.”그는 침대 옆에 놓인 알람시계를 보며 말했다.“네가 샤워를 하는 데 35분이나 낭비했어. 지금 10시야.”윤혜인은 그의 말이 무슨 뜻인지 알아들을 수가
‘멈추라고?’이건 그녀가 번복한다는 뜻이었기에 오늘 발생했던 모든 일이 의미를 잃게 된다.윤혜인은 괴로움을 참으며 입을 열었다.“한 시간 반 남았어요.”이준혁은 자신을 쳐다보지 않는 윤혜인의 고개를 잡고 돌리며 언짢은 목소리로 말했다.“확실해?”윤혜인은 입술을 달싹거렸다. 눈물이 흘러나왔지만 물러서지 않았다.이준혁은 빨개진 그녀의 볼을 쳐다보며 애매하게 웃었다.그 웃음은 결코 즐거워서 웃는 웃음이 아녔다.윤혜인은 좋지 않은 느낌에 바짝 긴장했다. 그녀의 허리에 올려놓은 손도 차가워지고 있었다.이준혁은 웃음을 멈추고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그래. 네가 원하는 대로 해줄게.”곧이어 그는 두 손으로 그녀를 세게 눌렀고 윤혜인은 소리도 지르지 못하고 한 손으로 난간을 꽉 잡았다.이준혁은 반드시 말한 대로 하는 사람이었다. 그는 정말 마지막 1분까지 조금도 낭비하지 않았다.이준혁은 그녀를 안아 욕조로 데려갔다. 그녀도 다른 것을 상관할 새가 없었다. 씻고 방으로 돌아와 보니 이준혁은 보이지 않았다.그는 약속을 지킨 것 같았다.그녀도 피곤한 나머지 더는 생각할 기력이 없어 침대에 엎드려 바로 잠이 들었다.윤혜인은 점심때가 되어서야 어렴풋이 방문을 두드리는 소리를 들었다. 방문을 여니 소원이 그녀를 와락 안았다.“혜인아, 배고파.”윤혜인은 그녀를 앉히며 말했다.“잠깐만, 내가 맛있는 거 해줄게.”소원을 자리에 앉힌 뒤 윤혜인은 일어나서 창문을 열었다. 뜨거웠던 어젯밤의 흔적이 은은하게 남아 있었다. 그녀는 소원이 눈치챌까 봐 두려워 방안을 다시 한번 둘러봤다.어젯밤에 이준혁이 베란다에서부터 침대까지 방을 어지럽혀 놓은 줄 알았는데 지금 보니 아주 깨끗했다. 심지어 쓰레기통도 깨끗하게 비어있었다.두 시간 안에 두 번의 관계가 있었지만 이준혁은 만족을 못 했을 것이다.소원이 옆방에서 자고 있었기에 긴장한 윤혜인은 소리도 내지 못했다.나중에 이준혁이 너무 괴롭힌 탓에 그의 뜻에 따라 소리를 내긴 했었다.다행히 술에 취한 소원이 깊
매주 4개의 수업밖에 없었다. 이하진은 배우려 하지 않았지만 지나친 행동은 하지 않았다.윤혜인은 그에게서 금요일에 자신에게 못된 짓을 할거라는 나쁜 의도를 느꼈다.목요일에 윤혜인은 수업이 없었기에 소원과 만나기로 했다.두 사람은 디저트 가게에서 아이스크림을 먹고 있었다. 소원은 핸드폰을 보다가 깜짝 놀라며 소리를 질렀다.“이준혁 이 개자식이 이렇게 빨리 혼인을 한다고?”‘이준혁이 혼인...?’“켁켁...”아이스크림을 먹다가 사레가 들린 윤혜인은 기침을 멈추지 않았다.소원은 재빨리 그녀의 등을 두드려주며 불평했다.“이준혁 이 개자식, 이혼한 지 얼마나 됐다고 정씨 집안 정유미와 매일 출퇴근을 같이해? 정말 접착제로 붙여놓은 것처럼 한시도 떨어지지 않네. 네가 빨리 이혼하길 잘했어. 임세희가 떨어져 나가니 또 정유미가 오고, 후보들이 줄 서서 대기하고 있는 거 같아.”윤혜인은 처음 들었을 때는 마음이 불편하고 기분이 좋지 않았지만 이내 평온을 되찾았다.일주일밖에 지나지 않았는데 다른 사람과 결혼한다는 얘기가 나오는 걸 보니 이번에는 정말 약속을 지키고 그녀를 귀찮게 하지 않으려는 것 같았다.소원은 윤혜인의 기분이 가라앉은 걸 느끼고 얼굴이 하얗게 질려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혜인아, 괜찮아?”“괜찮아. 방금 사레가 들린 거야.”윤혜인은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평소 모습으로 돌아갔다.소원은 입을 삐죽거렸다.‘아이스크림을 먹다가 사레가 들리는 사람이 어딨어.’그녀는 윤혜인의 팔을 잡고 말했다.“우리 기분도 낼 겸 예쁜 옷 사러 가자.”말하면서 두 사람은 한 브랜드숍에 들어갔다.소원은 가운데 걸어놓은 옷이 한눈에 들어왔다. 짙은 녹색 캐시미어 코트에 흰색 원피스였다.그녀는 직원에게 치마를 가져오라고 한 뒤 윤혜인에게 건네주었다.“들어가서 입어 봐.”윤혜인은 옷의 원단을 만져보고는 가격이 만만치 않을 거라는 걸 알아차렸다. 그녀는 옷을 입어볼 마음이 사라졌다.그녀에게는 지금 빚이 있었고 외국에 나가 대학을 다니는데에도 돈이
이준혁은 정갈한 수제양복에 검은색 외투를 걸치고 있었다. 그의 고상한 분위기는 타고난 것처럼 느껴졌다. 옆에 있는 여자는 그의 팔을 꽉 껴안고 매우 친밀한 모습을 보였다. 두 사람은 흡사 한 쌍의 남녀커플 같았다. 두 눈이 서로 마주쳤지만, 이준혁은 이내 윤혜인에게서 시선을 돌려 정유미를 바라보았다.“골라볼래요?”정유미도 윤혜인을 보고 이전 두 번의 만남이 떠올라 마음이 조금 불편했지만, 이준혁의 부드러운 목소리를 듣고 또 금세 즐거워졌다.들어가서 이리저리 둘러보았지만, 마음에 드는 것이 없었다. 그러다 그녀의 시선이 윤혜인이 입은 옷에 한참 머물렀다.“저 옷 또 있나요?”정유미가 직원에게 물었다. 그러자 직원이 웃으며 말했다.“저희 매장은 맞춤형이라, 각 디자인마다 한 벌 뿐입니다.”정유미의 표정은 실망한 기색이 역력했다. 사실 그녀는 줄곧 환하고 선명한 색깔을 좋아했지 이런 짙은 녹색 같은 색깔에는 별로 관심이 없었다. 그런데 막상 윤혜인이 입은 걸 보니 짙은 녹색 옷도 아주 잘 어울리고 눈길을 끄는 것 같았다. 그녀는 곁눈질로 이준혁을 힐끗 바라보았다. 그의 시선이 윤혜인에게로 향하는 것을 눈치채고는 마음이 좀 아팠다.그렇다고 남과 옷을 뺏고 싶지는 않았기에 정유미는 이준혁의 팔을 잡고 고개를 돌리며 떠나려고 했다.하지만 눈치 빠른 직원이 눈동자를 굴리며 정유미와 윤혜인을 번갈아 바라보았다.비록 화려하게 입긴 했지만, 정유미의 신발이며 가방은 모두 맞춤 제작이었고 한눈에 봐도 재벌 집 딸 같아 보였다.게다가 옆에 있는 남자의 몸에서 풍기는 아우라는 10여 년을 이 업종에 종사해온 직원이 보기에 틀림없이 부자 같았다.그러나 윤혜인은 그 옷이 자신에게 아주 잘 어울림에도 사지 않겠다는 의향을 내비치는 것으로 보아 직원은 그녀의 주머니 사정이 좋지 않은 것이라고 생각했다.그럴 만도 한 것이 외투만 해도 몇천만 원 상당이기에 아무나 쉽게 살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실적을 올릴 좋은 기회야.’곧 직원이 정유미를 불렀다.“손님, 잠시만
윤혜인은 현실적인 사람이라 이런 따분한 일에 흥미가 없었다.말을 끝마치자마자 그녀는 빠르게 옷을 갈아입고 나와 직원에게 건네주었다.소원은 화가 치밀어올라 가슴이 답답했지만 확고한 윤혜인의 태도에 그녀도 더 다투기 어려웠다.두 사람이 가게를 나서기도 전에 정유미가 벽을 가리키며 입어보지도 않은 채 말했다.“준혁 씨, 나 이거 다 사도 돼요?”그러자 이준혁이 덤덤하게 대답했다.“네.”정유미도 달콤한 웃음으로 화답했다.“고마워요, 준혁 씨. 정말 나한테 친절하다니까.”“유미 씨가 기쁘면 됐어요.”유난히 부드러운 이준혁의 말투를 들은 윤혜인은 순간 혼란스러워졌다.윤혜인의 기억에는 이준혁이 그녀의 허리를 잡고 목소리를 내도록 강요할 때의 사나운 말투가 남아있었기 때문이다.지금은 그때와는 완전히 다른 사람처럼 보였다.그녀는 소리 없이 쓴웃음을 지었다.‘자기가 원하는 사람한테는 얼마든지 따뜻한 사람이었네.’정유미는 소원이 자신의 옆으로 다가오는 것을 보고 거만하게 그녀를 힐끔 바라보았다.뒤이어 그녀는 갑자기 발끝을 세우더니 이준혁의 볼에 입을 맞췄다.“당연히 기쁘죠.”갑작스러운 그녀의 행동에 윤혜인은 발걸음을 멈췄다. 하지만 이내 고개를 휙 돌리고 담담하게 시선을 거두었다.소원의 분노가 또다시 들끓었다.그렇게 정유미에게 ‘훈계’를 해주려는데 윤혜인이 그녀를 끌어당기며 고개를 가볍게 흔들었다. 충동적으로 행동하지 말라는 의미였다.겨우 화를 참은 소원은 지나가며 매서운 눈길로 이준혁을 힐끔 바라보았다.‘쓰레기!’매장에서 나온 후 소원은 한참 동안 이준혁을 비난했다.“이준혁 씨 저 새 여자가 아주 마음에 드는 모양이지? 직접 쇼핑도 다 오고 말이야. 아마 저 여자 신분 때문일 확률이 커. 정씨 집안 요즘 대체 에너지 사업으로 돈 많이 벌고 있잖아.”윤혜인은 그들의 일에 흥미를 느끼지 못했다.소원은 단번에 그녀의 기분이 좋지 않다는 것을 알아채고 물었다.“쇼핑하고 싶지 않으면 우리 이만 집에 돌아갈까?”그러자 윤혜인이 빙긋 미소를
그러나 발견한 건 한쪽 구덩이 속에 버려진 아이의 옷뿐이었다.그 순간 노인은 절망에 빠졌다.무녀들에게 아이를 돌려달라고 요구하고 싶었지만 지칠 대로 지친 몸이 결국 쓰러지고 말았다.그때 그는 꿈을 꾸었다.꿈속에서 자신이 키운 그 착하고 사랑스러운 아이가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아버지, 제발 돌아가세요. 살아남으셔야 해요.”아마도 하늘이 그를 불쌍히 여긴 걸까.노인이 잠든 사이, 몸이 나무 덤불 아래로 굴러떨어진 덕분에 무녀들에게 들키지 않을 수 있었다.노인은 더 이상 희망이 없다는 걸 깨닫고 혼자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하지만 그날의 상처는 결코 아물지 않았다.그리고 이제 소원이 친구를 찾겠다고 나서는 모습을 보며 노인은 그때의 자신을 떠올렸다.그때의 자신은 너무도 비겁했다는 생각이 들었다.이 어린 여자도 두려움 없이 무곡산으로 향하겠다고 하는데 이제는 늙고 죽음을 앞둔 자신이 무엇을 더 두려워할 게 있겠는가.소원은 노인의 이야기를 들으며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지만 현실을 받아들이게 해야 했다.“어르신, 아드님은 아마 이미... 돌아가셨을 거예요.”노인은 고개를 끄덕였다.세월이 흐르는 동안 그도 이미 짐작하고 있었다.하지만 눈가에는 여전히 뜨거운 눈물이 맺혔다.“알아요. 그래도 한 번은 불러보고 싶어요. 그 아이는 사냥을 나가면 끼니 챙기는 것도 잊고 돌아오지 않았거든요. 내가 부르지 않으면 집에 돌아올 줄도 모르는 바보 같은 녀석이었죠. 그러니 이번에도... 내가 불러야 돌아오지 않겠어요?”“이번만큼은 내 바보 같은 아이를 집으로 데려올 거예요...”노인의 목소리는 쓸쓸하고도 짙은 슬픔이 배어 있었다.소원은 더 이상 거절할 수 없었다.“좋아요. 같이 가서 아드님을 집으로 데려와요.”그렇게 노인은 간단히 짐을 꾸렸다.말린 고기를 챙기고 안으로 들어가 헌터 라이플을 꺼내 들었다.“이거 다룰 줄 알아요?”소원은 고개를 끄덕였다.예전에 서현재가 마을에서 사격을 가르쳐 준 적이 있었다. 그러나 몇 번 해본 적이 없어서 능숙
소원은 영문을 잘 모르겠다는 듯 물었다.“어르신, 자제분이 아들이에요 아니면 딸이에요? 그런데 왜 거기 가신 거예요?”소원은 갑자기 경계심이 들었다.‘혹시 여자라면... 설마 무녀인 건 아니겠지?’다행히 그런 건 아니었고 노인은 무겁게 입을 열었다.“내 아이는 아들이에요. 그 백발의 늙은 마귀가 데려갔죠. 아무리 아니라고 발뺌해도 난 확신해요!”소원은 천천히 상황을 이해하기 시작했다.노인은 산 아래로 내려갔다가 쓰레기 더미에 버려진 아이를 발견했다.이미 추위에 온몸이 새파랗게 얼어붙어 있었고 얇은 포대기를 걷어 보니 선천적으로 한쪽 손이 없는 아이였다.노인은 아이를 구조센터로 데려갔지만 센터에서는 복지시설로 보내야 한다며 책임을 미뤘다.산속에서 오랜 세월을 산 탓에 노인은 신고하는 법도 몰랐다.하지만 더 결정적인 건 어쩐지 그 아이와 인연이 있다는 것이었다. 아이는 단 한 손으로 그의 소매를 꽉 움켜쥐고는 울지도 않았고 떼어놓을 수도 없었다.결국 노인은 마음이 약해져 아이를 데리고 산으로 돌아갔다.시간이 지나 아이는 건강하게 자랐고 비록 한쪽 손이 없었지만 생활하는 데 별문제는 없었다. 무엇보다 아이가 있는 덕분에 노인의 외로운 산속 생활이 웃음으로 가득 찼다.노인은 아이에게 글을 가르치고 나이가 더 들면 산을 내려가 학교에 보내려 했다. 그러나 아이가 학교에 가서 따돌림을 당할까 봐 걱정되기도 했다.아이는 오히려 산속 생활을 더 좋아했다. 글을 읽고 쓰는 것보다는 노인과 함께 사냥을 다니는 게 더 재미있다고 했다.공부에는 별다른 흥미가 없어 보였고 노인도 아이를 억지로 밀어붙이지 않았다.그렇게 둘은 산에서 자급자족하며 부족함 없이 살았다. 사냥한 고기를 마을에 가져가 생필품으로 바꾸면 충분했으니 말이다.다만 노인이 아이에게 철저히 가르친 한 가지가 있었다.“산 너머로 절대 가서는 안 된다. 특히 무곡산은 절대 안 돼. 그곳엔 사람을 잡아먹는 무녀들이 있어. 아이를 보면 바로 잡아먹어 버릴 거다.”이 말이 단순한 겁주기가 아
소원이 노인에게 물었다.“여기서 무곡산까지 얼마나 먼가요?”‘무곡산’이라는 단어를 듣자마자 노인의 표정은 급격히 변하더니 조금 전의 온화한 기색마저 사라졌다. 그러고는 거친 눈썹을 치켜올리며 물었다.“그걸 왜 묻는 거죠? 무곡산 사람인가요?”갑작스러운 태도 변화에 소원은 당황했다.노인의 손에는 어느새 고기를 다듬던 칼이 쥐어져 있었다. 하여 소원의 머릿속에는 혹시 자신을 무녀로 오해한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스쳤다.“아뇨. 저는 거기에 있는 친구를 찾으러 가는 길이에요. 친구가 아직 그곳에 있어서 데리고 나오려고요.”소원의 말을 듣고서야 노인은 손에 쥔 칼을 조금 느슨하게 잡으며 말했다.“여기서 나가려면 사흘 정도 걸려요. 하지만 그쪽 체력으로 무곡산까지 가려면 최소 나흘에서 닷새는 걸릴 거예요. 차라리 나가서 구조대를 부르는 게 빠를 겁니다.”이미 배도 채우고 충분히 쉬었던 소원은 자리에서 일어나 손목에 있던 금팔찌를 풀어 노인에게 건넸다.“이거 가지세요. 밖으로 나가시면 돈으로 바꿔서 생필품이라도 사세요.”노인은 황급히 손사래를 쳤지만 소원은 억지로 그의 손에 쥐여주었다. 그런 뒤 혹시라도 마을 사람들이 사기를 당할까 걱정되어 덧붙였다.“이건 순금이에요. 무게가 62g이라 현재 시세로는 8만 원이 넘어요. 바꾸실 때 꼭 이 가격을 기준으로 받으셔야 해요.”400만 정도라는 말에 노인은 더욱 받을 수가 없어졌다.“아니, 아니에요. 난 생필품도 다 사냥한 고기로 바꿔서 쓰고 있어요. 두 손, 두 발 멀쩡하면 굶을 일은 없어요. 이렇게 귀한 걸 받을 순 없죠.”“이건 별거 아니에요. 저한테 이런 장신구 많아요. 어르신께서 절 도와주셨으니 감사의 뜻이에요. 만약을 대비해서라도 받아두세요. 안 그러면 저도 마음이 불편해요.”그럼에도 노인은 계속해서 거절했지만 소원은 끝까지 주려 했다.나이가 적지 않은 노인은 언젠가 몸이 아파 사냥이 못 하게 될 수도 있었다. 그러면 이 금팔찌가 응급자금이 될 터였다.결국 소원은 몰래 팔찌를 고기 접시
반응할 새도 없이 소원의 몸은 강하게 밀려 물속으로 빠졌다.아래쪽은 배수로였다.소원은 거센 물살을 거스르지 못하고 점점 더 멀리 떠밀려갔다.서현재는 이 모든 걸 계산해 둔 것이었다.그는 배수로의 위치를 정확히 알고 있었고 소원이 수영을 잘한다는 사실도 알고 있었다.예전 마을에 있을 때 그가 직접 가르쳤으니 말이다.소원에게 수영뿐만 아니라, 활쏘기, 기초적인 격투술, 그리고 생존을 위한 기술들까지 가르쳤던 것도 혹시라도 위험한 상황에 처했을 때 스스로를 지킬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였다.소원은 빠른 속도로 물살에 휩쓸려갔다.희미하게 들려오는 소음 속에서 강가 위쪽에서 무녀들의 재잘거리는 소리가 들렸다.이어서 남자의 짧은 신음 소리가 들려왔고 그 뒤로 더 이상 남자의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소원의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서현재가 들킨 것일 가능성이 컸다.팔을 힘껏 휘저으며 다시 돌아가려 했지만 거대한 물살을 이길 수 없었다.산속의 배수로는 폭우가 내릴 때면 마치 홍수처럼 변했다.소원뿐만이 아니라 체력이 좋은 성인 남성이나 수영선수라 해도 역류할 수 없을 정도였다.결국 완전히 지쳐버린 소원은 손에 힘이 빠지며 물 위에 몸을 맡긴 채 흐름을 따라 떠내려갔다.그렇게 한참을 떠다니다 눈을 떠보니 소원은 어느 초가집 안에 누워 있었다.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혹시 또다시 붙잡힌 걸까?’그때 온화한 인상의 노인이 다가왔다.“깨어났네요? 물 좀 마실래요?”노인은 진심 어린 눈빛으로 물병을 건넸다.그의 얼굴에는 산골 사람 특유의 순박함이 묻어 있었지 무녀들처럼 음험하고 교활한 느낌은 없었다.하지만 여전히 경계를 풀지 않은 소원은 물병을 받긴 했지만 마시지 않고 먼저 물었다.“어르신, 여기가 어디인가요?”그러자 노인은 부드럽게 미소 지으며 대답했다.“여긴 남이산이라고 해요.”‘남이산?’그렇다면 협곡을 빠져나와 또 다른 산속으로 들어온 셈이었다.이제야 서현재가 구조를 요청하기 어렵다고 했던 이유를 완전히 이해할 수 있었다.이곳은 산
서현재는 서씨 가문 전체를 증오했다. 이 가문 사람들의 존재 자체가 혐오스러웠다.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그를 이용하고 책임을 떠넘기려는 것도 모자라 그의 소중한 사람들까지 해치려 들었으니 말이다.만약 서현재가 서씨 가문을 완전히 장악하지 못한다면 어떤 방법으로든 가문을 벗어나려 해도 결국 그의 존재로 인해 누군가는 다치게 될 것이다.마침 과거 무녀 중 한 명이 해외에서 어느 가문의 어린 후계자를 해쳤다.하지만 그녀가 국내로 도망친 탓에 해외 가문에서는 손을 쓸 방법이 없었다.그러다 빨간 옷을 입은 여자의 흔적을 포착한 뒤 서현재에게 접근해 어떤 거래를 제안했다.그가 지금처럼 정신을 되찾을 수 있었던 것도 그 해외 가문이 생물학 교수와 협력해 독벌레를 차단할 수 있는 약을 개발했기 때문이었다.그 덕분에 서현재는 더 이상 몸속에서 독벌레에게 갉아 먹히지 않을 수 있었다.만약 그 약이 아니었다면 서현재는 아마 오래 버티지 못했을 것이다.그러나 소원에게는 절대 이 사실을 알리고 싶지 않았다.이 모든 위험은 혼자 감당하면 되니 말이다.소원을 다시 이런 위험 속으로 끌어들이는 일은 그야말로 천 번, 만 번 죽어도 용서받지 못할 죄였다.“소원 누나, 내 야망을... 누나는 모르겠죠?”희미한 빛과 그림자가 교차하는 어둠 속에서 서현재의 날렵한 얼굴선이 또렷이 드러났다.그는 씁쓸한 듯 혹은 조소하는 듯한 미소를 지었다.“나는 서씨 가문을 손에 넣고 싶어요. 그 사람들이 날 고통스럽게 만들고 박해했으니... 그에 대한 대가를 치러야 하지 않겠어요?”소원은 서현재가 겪은 고통을 감히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그를 더 다그칠 수도 없었다.서씨 가문이 그를 어떤 방식으로 박해했는지 차마 묻고 싶지도 않았다.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서현재를 포기할 수도 없었다.“현재야, 복수를 하려거든 나도 함께할게. 근데 이렇게 위험한 방식은 안 돼. 네 목숨을 걸면서까지 장난처럼 굴면 절대 안 돼.”소원의 단호한 말에 서현재는 가볍게 웃었다.“소원 누나, 누나는 서
“네가 혼자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야. 우선 나가서 지원군을 불러오고 그다음에 저 사람들을 처리하자.”소원이 설득했다.“시간이 없어요.”서현재가 고개를 저었다.“지금 나가더라도 산 중턱까지만 갈 수 있고 거기서 내가 미리 준비해 둔 산속 마을 사람들이 누나를 데리고 나갈 거예요. 하지만 산을 완전히 빠져나가는 데만 사흘이 걸려요. 우리가 지원군을 데리고 다시 오는 데까지 일주일은 족히 걸릴 거예요. 그동안 저 사람들은 이미 눈치채고 도망갈 준비를 마쳤을 거고.”그때가 되면 그녀들이 잡아 온 ‘산 채로 보관된 희생양’들은 오직 하나의 결말을 맞이할 것이다.입막음 당하는 것.이번에는 족장의 육신 교체 의식 때문에 바깥에 배치되어 있던 무녀들까지 모두 소집된 상태였다.이렇게 한곳에 다 모이는 일이 드문 만큼 이번 기회를 놓치면 이 잔당들을 언제 다시 완전히 소탕할 수 있을지 기약할 수 없었다.“그래도 이건 네가 할 일이 아니잖아! 네 몸 상태는 어때? 전에는 왜 기억을 잃었고 왜 갑자기 순순히 말을 듣게 된 건데?”소원이 한꺼번에 쏟아내듯 물었다.하지만 서현재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지금은 모든 걸 설명할 시간이 없었다.“소원 누나, 내 말 들어요. 떠나요. 무조건 떠나야 해요.”서현재의 목소리는 한없이 단호했다.“아니, 나갈 거면 같이 나가야지.”소원이 더 강한 의지로 맞섰다.그녀는 성인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눈앞에서 소중한 사람이 무모한 짓을 하는 걸 보고도 모른 척할 수는 없었다. 지지할 수는 더더욱 없고 말이다.“소원 누나, 난 안 나가요.”서현재의 목소리에는 단호함과 함께 체념이 서려 있었다.떠날 수 없었다.떠나서도 안 됐다.소원은 간절한 목소리로 애원했다.“현재야, 제발 나랑 같이 가자. 나가서 지원군을 부르자. 이건 애초에 네가 혼자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야. 저 사람들 그렇게 많은 데다가 뱀도 다루고 심지어 독벌레까지 조종할 수 있잖아...”생각만 해도 아찔했다.이건 누가 봐도 죽으러 가는
서현재가 입을 열었다.“이거 이혼초에요. 목에 걸고 냇가를 따라서 걸으면 나갈 수 있어요.”소원은 할 말을 잃었다. 서현재의 계획에 소원과 함께 도망가는 건 원래부터 없었던 것 같았다.기다려도 서현재가 말이 없자 소원이 물었다.“너는?”“난 아직 가면 안 돼요.”서현재가 말했다.“얼른 가요. 아직 시간이 조금 있어요.”“너는 왜 안 가는데?”소원이 아랑곳하지 않고 물었다.“족장이 사람 피를 빨아먹는 걸로 청춘을 유지하고 있어요. 몸도 바꿔야 한다는데 천년 이래 성공한 적이 딱 한 번밖에 없대요. 물론 그 한 사람도 소문일 뿐이지 목격한 사람은 없어요. 하지만 무당 가문에서는 믿어 의심치 않고 있어요. 이번에 누나를 잡아 온 것도 다 몸을 바꾸기 위해서래요. 누나 몸에 음기가 양기보다 많아서 뱀신이 선택했다나 뭐라나?”서현재는 소원이 충분히 이해하고 있다는 걸 확인하고는 쉬지 않고 말을 이어갔다.“빨간 옷을 입은 여자의 몸에 뱀신이 있대요. 그때 병원에서 누나랑 마주쳤을 때 뱀신이 누나를 선택했다고 했어요. 그래서 일부러 누나를 유인해서 여기로 잡아들인 거죠.”소원은 몸을 바꾼다는 말은 처음 들어봤지만 백발의 족장이 빨간 옷을 입은 여자와 나눈 대화에 맞춰보면 맞는 말이었다. 믿을 수 없는 얘기였지만 이제 믿을 수밖에 없었다.서현재는 알아둔 정보를 소원에게 남김없이 알려줬다.“빨간 옷을 입은 여자가 차기 족장이 될 사람이에요. 이미 여든은 됐다고 하는데 흡혈술, 그리고 독벌레에서 추출한 알약으로 젊음을 유지하고 있어요. 여기에 살아있는 공물을 가득 기르면서 피를 끊임없이 빨아들이는 거죠.”소원은 믿을 수 없는 이야기를 들으며 이 세상에 이 정도로 미친 사람이 있다는 것에 감탄했다.“그러다 몸을 바꾸는 데 실패하면 나는 어떻게 되는 거야?”소원이 물었다.“그러면...”그 끝이 너무 잔인해 잠깐 망설이던 서현재는 그래도 누군가는 그들의 악행을 알아야 한다는 생각에 말을 이어갔다.“특수 제작한 알코올 화로에 넣어서 굽는다고 들었어
당황한 소원은 도로 달아갈 시간도 없었다. 문이 열리고 큰 키를 가진 누군가가 안으로 들어왔는데 체격을 보아하니 빨간 옷을 입은 여자는 아닌 것 같았다.눈여겨보니 서현재였다. 서현재는 눈동자가 어두웠지만 낮에 봤을 때처럼 멍한 표정은 아니었다.“누나...”서현재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소원을 불렀지만 소원은 너무 놀라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기억... 잃은 거 아니었어...?”기억을 잃은 그가 어떻게 그녀를 알아보는지 의문이었다.서현재는 별다른 설명 없이 소원의 팔목을 잡고 다급하게 말했다.“이따 설명할게요. 일단 나랑 함께 가요.”소원은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서현재와 함께 나무를 타고 내려갔다. 두 사람은 신발을 벗고 양말만 신은 채 낙엽을 밟아서 생기는 소리를 최대한 줄였다.그때 새가 날갯짓하는 소리가 들렸고 서현재가 귓가에 속삭였다.“엎드려요.”소원이 바로 자리에 엎드렸다.머리 위로 커다란 새 한 마리가 날개를 쫙 펴고 날아다녔는데 두 사람 위를 지나가며 우렁차게 지저귀었다.새가 지나간 걸 확인하고 나서야 서현재가 낮은 소리로 말했다.“이월조인인데 저녁이면 무곡산의 경비를 책임지고 있어요. 낯선 사람을 보면 바로 아래로 내려와 사람을 물고는 높은 곳에서 떨어트리죠.”소원은 듣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떨렸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그들을 드리웠던 거대한 그림자가 떠올라 고개를 들어보니 놀라울 정도로 커다란 새 한 마리가 하늘을 날아다니고 있었는데 마치 바다에서 사는 상어와도 같았다. 이렇게 큰 새라면 한두 사람 정도 물어가는 건 일도 아닐 것이다.궁금해진 소원이 이렇게 물었다.“낯선 사람은 어떻게 구별하는데?”소원은 처음 무곡산에 왔을 때 기괴한 분위기에 몹시 놀랐다. 그래도 관찰해 낸 게 있다면 여기 있는 동물과 새들은 이상하리만치 영민했고 주인의 명령에 잘 따른다는 것이다. 그러니 어쩌면 이곳에 있는 무녀들이 사술을 쓴다고 생각할지 모른다. 게다가 여기 있는 것들 모두가 전설과 연관되어 있었다.다만 실상은 아까 봤던 그 뱀처럼
트릭을 발견한 소원은 마음이 많이 차분해졌지만 급하게 들어오느라 문이 아직 활짝 열려 있어 두 시진쯤 지나 빨간 옷을 입은 여자가 다시 오면 낌새를 눈치챌 게 뻔했기에 얼른 문을 닫아야 했다.잠에서 깬 뱀은 짧은 시간 내에는 다시 잠들지 않을 것 같았다. 소원은 바닥에 놓인 가루를 보며 생각에 잠겼다.시간이 일분일초 흘러갔다. 소원이 가루를 한 줌 쥐고 문 쪽으로 뛰어가자 뱀도 혀를 날름거리며 공격적인 자세로 뒤따라왔다.소원이 손에 든 가루를 뱀에게 뿌리자 뱀은 그대로 바닥에 나동그라졌고 충격이 컸는지 더는 일어나지 않았다. 기회를 잡은 소원이 문을 닫고는 나뭇가지로 빗장을 다시 내렸다.웅황 가루에 다친 뱀은 아직 채 회복하지 못했지만 아까보다는 머리를 살짝 쳐들고 소원을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는데 그 모습이 왠지 모르게 표독스러워 보였다.소원은 뱀에게 총기가 없다는 걸 안 뒤로 모든 게 허세 같아 더는 무섭지 않았다. 그 뱀을 여기에 간 주인도 마찬가지라는 생각이 들었다.같은 시간이 되자 빨간 옷을 입은 여자가 안으로 들어왔다. 여자는 안으로 들어오자마자 뱀이 이상하다는 걸 발견했고 뱀도 여자를 보고는 억울한 표정을 지으며 여자의 팔뚝을 따라 얼굴 옆으로 기어 올라가더니 말하기라도 하듯 혀를 날름거렸다.빨간 옷을 입은 여자가 뱀을 살피더니 차가운 표정으로 소원을 바라봤다.“얘한테 무슨 짓을 한 거야?”소원은 조금도 당황하지 않고 억울한 표정으로 말했다.“내가 무슨 짓을 할 수 있겠어. 움직이기만 해도 물어버릴 것처럼 달려드는데. 나 여기 사흘이나 갇혀 있으면서 아무것도 못 먹었어. 몸이 뻣뻣해져서 움직이는데 갑자기 달려드니까 나도 깜짝 놀랐다니까...”소원은 아직도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했다는 표정으로 말했다.빨간 옷을 입은 여자는 소원의 말을 믿는 듯한 눈치였고 결계로 쳐놓은 분말이 흐트러진 것도 다 뱀 때문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여자가 알약을 하나 꺼내 뱀에게 먹이자 뱀이 고분고분 몸에서 내려가더니 몸을 웅크리고 휴식에 돌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