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멈추라고?’이건 그녀가 번복한다는 뜻이었기에 오늘 발생했던 모든 일이 의미를 잃게 된다.윤혜인은 괴로움을 참으며 입을 열었다.“한 시간 반 남았어요.”이준혁은 자신을 쳐다보지 않는 윤혜인의 고개를 잡고 돌리며 언짢은 목소리로 말했다.“확실해?”윤혜인은 입술을 달싹거렸다. 눈물이 흘러나왔지만 물러서지 않았다.이준혁은 빨개진 그녀의 볼을 쳐다보며 애매하게 웃었다.그 웃음은 결코 즐거워서 웃는 웃음이 아녔다.윤혜인은 좋지 않은 느낌에 바짝 긴장했다. 그녀의 허리에 올려놓은 손도 차가워지고 있었다.이준혁은 웃음을 멈추고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그래. 네가 원하는 대로 해줄게.”곧이어 그는 두 손으로 그녀를 세게 눌렀고 윤혜인은 소리도 지르지 못하고 한 손으로 난간을 꽉 잡았다.이준혁은 반드시 말한 대로 하는 사람이었다. 그는 정말 마지막 1분까지 조금도 낭비하지 않았다.이준혁은 그녀를 안아 욕조로 데려갔다. 그녀도 다른 것을 상관할 새가 없었다. 씻고 방으로 돌아와 보니 이준혁은 보이지 않았다.그는 약속을 지킨 것 같았다.그녀도 피곤한 나머지 더는 생각할 기력이 없어 침대에 엎드려 바로 잠이 들었다.윤혜인은 점심때가 되어서야 어렴풋이 방문을 두드리는 소리를 들었다. 방문을 여니 소원이 그녀를 와락 안았다.“혜인아, 배고파.”윤혜인은 그녀를 앉히며 말했다.“잠깐만, 내가 맛있는 거 해줄게.”소원을 자리에 앉힌 뒤 윤혜인은 일어나서 창문을 열었다. 뜨거웠던 어젯밤의 흔적이 은은하게 남아 있었다. 그녀는 소원이 눈치챌까 봐 두려워 방안을 다시 한번 둘러봤다.어젯밤에 이준혁이 베란다에서부터 침대까지 방을 어지럽혀 놓은 줄 알았는데 지금 보니 아주 깨끗했다. 심지어 쓰레기통도 깨끗하게 비어있었다.두 시간 안에 두 번의 관계가 있었지만 이준혁은 만족을 못 했을 것이다.소원이 옆방에서 자고 있었기에 긴장한 윤혜인은 소리도 내지 못했다.나중에 이준혁이 너무 괴롭힌 탓에 그의 뜻에 따라 소리를 내긴 했었다.다행히 술에 취한 소원이 깊
매주 4개의 수업밖에 없었다. 이하진은 배우려 하지 않았지만 지나친 행동은 하지 않았다.윤혜인은 그에게서 금요일에 자신에게 못된 짓을 할거라는 나쁜 의도를 느꼈다.목요일에 윤혜인은 수업이 없었기에 소원과 만나기로 했다.두 사람은 디저트 가게에서 아이스크림을 먹고 있었다. 소원은 핸드폰을 보다가 깜짝 놀라며 소리를 질렀다.“이준혁 이 개자식이 이렇게 빨리 혼인을 한다고?”‘이준혁이 혼인...?’“켁켁...”아이스크림을 먹다가 사레가 들린 윤혜인은 기침을 멈추지 않았다.소원은 재빨리 그녀의 등을 두드려주며 불평했다.“이준혁 이 개자식, 이혼한 지 얼마나 됐다고 정씨 집안 정유미와 매일 출퇴근을 같이해? 정말 접착제로 붙여놓은 것처럼 한시도 떨어지지 않네. 네가 빨리 이혼하길 잘했어. 임세희가 떨어져 나가니 또 정유미가 오고, 후보들이 줄 서서 대기하고 있는 거 같아.”윤혜인은 처음 들었을 때는 마음이 불편하고 기분이 좋지 않았지만 이내 평온을 되찾았다.일주일밖에 지나지 않았는데 다른 사람과 결혼한다는 얘기가 나오는 걸 보니 이번에는 정말 약속을 지키고 그녀를 귀찮게 하지 않으려는 것 같았다.소원은 윤혜인의 기분이 가라앉은 걸 느끼고 얼굴이 하얗게 질려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혜인아, 괜찮아?”“괜찮아. 방금 사레가 들린 거야.”윤혜인은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평소 모습으로 돌아갔다.소원은 입을 삐죽거렸다.‘아이스크림을 먹다가 사레가 들리는 사람이 어딨어.’그녀는 윤혜인의 팔을 잡고 말했다.“우리 기분도 낼 겸 예쁜 옷 사러 가자.”말하면서 두 사람은 한 브랜드숍에 들어갔다.소원은 가운데 걸어놓은 옷이 한눈에 들어왔다. 짙은 녹색 캐시미어 코트에 흰색 원피스였다.그녀는 직원에게 치마를 가져오라고 한 뒤 윤혜인에게 건네주었다.“들어가서 입어 봐.”윤혜인은 옷의 원단을 만져보고는 가격이 만만치 않을 거라는 걸 알아차렸다. 그녀는 옷을 입어볼 마음이 사라졌다.그녀에게는 지금 빚이 있었고 외국에 나가 대학을 다니는데에도 돈이
이준혁은 정갈한 수제양복에 검은색 외투를 걸치고 있었다. 그의 고상한 분위기는 타고난 것처럼 느껴졌다. 옆에 있는 여자는 그의 팔을 꽉 껴안고 매우 친밀한 모습을 보였다. 두 사람은 흡사 한 쌍의 남녀커플 같았다. 두 눈이 서로 마주쳤지만, 이준혁은 이내 윤혜인에게서 시선을 돌려 정유미를 바라보았다.“골라볼래요?”정유미도 윤혜인을 보고 이전 두 번의 만남이 떠올라 마음이 조금 불편했지만, 이준혁의 부드러운 목소리를 듣고 또 금세 즐거워졌다.들어가서 이리저리 둘러보았지만, 마음에 드는 것이 없었다. 그러다 그녀의 시선이 윤혜인이 입은 옷에 한참 머물렀다.“저 옷 또 있나요?”정유미가 직원에게 물었다. 그러자 직원이 웃으며 말했다.“저희 매장은 맞춤형이라, 각 디자인마다 한 벌 뿐입니다.”정유미의 표정은 실망한 기색이 역력했다. 사실 그녀는 줄곧 환하고 선명한 색깔을 좋아했지 이런 짙은 녹색 같은 색깔에는 별로 관심이 없었다. 그런데 막상 윤혜인이 입은 걸 보니 짙은 녹색 옷도 아주 잘 어울리고 눈길을 끄는 것 같았다. 그녀는 곁눈질로 이준혁을 힐끗 바라보았다. 그의 시선이 윤혜인에게로 향하는 것을 눈치채고는 마음이 좀 아팠다.그렇다고 남과 옷을 뺏고 싶지는 않았기에 정유미는 이준혁의 팔을 잡고 고개를 돌리며 떠나려고 했다.하지만 눈치 빠른 직원이 눈동자를 굴리며 정유미와 윤혜인을 번갈아 바라보았다.비록 화려하게 입긴 했지만, 정유미의 신발이며 가방은 모두 맞춤 제작이었고 한눈에 봐도 재벌 집 딸 같아 보였다.게다가 옆에 있는 남자의 몸에서 풍기는 아우라는 10여 년을 이 업종에 종사해온 직원이 보기에 틀림없이 부자 같았다.그러나 윤혜인은 그 옷이 자신에게 아주 잘 어울림에도 사지 않겠다는 의향을 내비치는 것으로 보아 직원은 그녀의 주머니 사정이 좋지 않은 것이라고 생각했다.그럴 만도 한 것이 외투만 해도 몇천만 원 상당이기에 아무나 쉽게 살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실적을 올릴 좋은 기회야.’곧 직원이 정유미를 불렀다.“손님, 잠시만
윤혜인은 현실적인 사람이라 이런 따분한 일에 흥미가 없었다.말을 끝마치자마자 그녀는 빠르게 옷을 갈아입고 나와 직원에게 건네주었다.소원은 화가 치밀어올라 가슴이 답답했지만 확고한 윤혜인의 태도에 그녀도 더 다투기 어려웠다.두 사람이 가게를 나서기도 전에 정유미가 벽을 가리키며 입어보지도 않은 채 말했다.“준혁 씨, 나 이거 다 사도 돼요?”그러자 이준혁이 덤덤하게 대답했다.“네.”정유미도 달콤한 웃음으로 화답했다.“고마워요, 준혁 씨. 정말 나한테 친절하다니까.”“유미 씨가 기쁘면 됐어요.”유난히 부드러운 이준혁의 말투를 들은 윤혜인은 순간 혼란스러워졌다.윤혜인의 기억에는 이준혁이 그녀의 허리를 잡고 목소리를 내도록 강요할 때의 사나운 말투가 남아있었기 때문이다.지금은 그때와는 완전히 다른 사람처럼 보였다.그녀는 소리 없이 쓴웃음을 지었다.‘자기가 원하는 사람한테는 얼마든지 따뜻한 사람이었네.’정유미는 소원이 자신의 옆으로 다가오는 것을 보고 거만하게 그녀를 힐끔 바라보았다.뒤이어 그녀는 갑자기 발끝을 세우더니 이준혁의 볼에 입을 맞췄다.“당연히 기쁘죠.”갑작스러운 그녀의 행동에 윤혜인은 발걸음을 멈췄다. 하지만 이내 고개를 휙 돌리고 담담하게 시선을 거두었다.소원의 분노가 또다시 들끓었다.그렇게 정유미에게 ‘훈계’를 해주려는데 윤혜인이 그녀를 끌어당기며 고개를 가볍게 흔들었다. 충동적으로 행동하지 말라는 의미였다.겨우 화를 참은 소원은 지나가며 매서운 눈길로 이준혁을 힐끔 바라보았다.‘쓰레기!’매장에서 나온 후 소원은 한참 동안 이준혁을 비난했다.“이준혁 씨 저 새 여자가 아주 마음에 드는 모양이지? 직접 쇼핑도 다 오고 말이야. 아마 저 여자 신분 때문일 확률이 커. 정씨 집안 요즘 대체 에너지 사업으로 돈 많이 벌고 있잖아.”윤혜인은 그들의 일에 흥미를 느끼지 못했다.소원은 단번에 그녀의 기분이 좋지 않다는 것을 알아채고 물었다.“쇼핑하고 싶지 않으면 우리 이만 집에 돌아갈까?”그러자 윤혜인이 빙긋 미소를
순간 정유미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누군가에게 뺨을 얻어맞은 듯 얼굴이 유난히 아팠다.사실 조금 전 그녀는 정말 이준혁의 볼에 입을 맞춘 것이 아니었다. 거의 닿을 뻔할 때 이준혁이 빠르게 피했다. 그녀는 체면이 구겨질까 봐 일부러 크게 소리를 내었는데 뜻밖에도 그것이 남자의 심기를 건드리게 될 거라고는 생각지 못했다.이준혁은 그녀를 기다리지 않고 앞으로 성큼성큼 걸어갔다.정유미는 마음을 가다듬고 작은 보폭으로 뛰며 그를 따라갔다.‘아저씨가 어떻게 만들어준 기회인데, 절대 망치고 싶지 않아.’한편 1층.윤혜인과 소원이 화장품 매장을 구경하고 있다.얼마 지나지 않아 소원이 화장실에 가겠다고 하자 윤혜인은 근처를 돌아다니며 그녀를 기다렸다.그런데 두 걸음 정도 걸었을까 그녀의 눈에 바닥에 떨어진 지갑이 보였다.검은색 소가죽 재질의 지갑 위에는 이니셜이 새겨져 있었다. 그래서 윤혜인은 그것이 누구의 지갑인지 한눈에 알 수 있었다.그녀는 줍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문득 지간 안에 신분증 같은 물건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이 떠올랐다.‘준혁 씨 같은 사람은 신분증 잃어버리면 꽤 위험할 텐데.’결국 그녀는 지갑을 주웠고 안내 데스크에 맡겨 그에게 알려줄 생각을 했다.하지만 얼마 못 가 그녀는 이준혁이 난간에 서서 전화를 걸고 있는 모습을 발견했다. 곁에는 정유미도 보이지 않았다.번거로운 일을 하고 싶지 않았기에 그녀는 바로 앞으로 다가갔다. 어쩌면 습관이었을지도 모른다. 곧 윤혜인은 이준혁의 소매를 끌어당겼다.그리고 그녀가 입을 열기도 전에 남자가 휙 팔을 뿌리치며 짜증 난 말투로 말했다.“나 건드리지 말라니까요.”예상치 못한 그의 행동에 조금의 방비 태세도 갖추지 못한 윤혜인은 충격을 견디지 못한 채 바닥에 털썩 쓰러졌고 지갑도 날아가 버렸다.손바닥이 쓰라려 윤혜인은 미간을 찌푸렸다. 아마도 피부 껍질이 벗겨진 모양이었다. 발목도 삐었는지 찌릿찌릿 아파왔다.성가신 듯 여전히 찡그린 얼굴을 하고 그제야 이준혁이 고개를 돌렸다. 하지만 이내 바
말을 끝마친 뒤, 그녀는 소원을 끌고 갔다. 이준혁에게는 눈길 한번 주지 않은 채 말이다.발목이 아픈 탓에 걸음걸이가 조금 어색했지만, 그녀는 남에게 들키지 않기 위해 정상적으로 걸으려고 애썼다.성큼성큼 걸어가는 그녀와 달리 뒤에 있는 이준혁의 안색은 어두웠다.정유미는 지갑을 건네받으며 중얼거렸다.“준혁 씨 전처 친구라는 사람 진짜 무섭네요. 전처도 선한 사람은 아닌 것 같은데... 다행이에요. 이미 이혼해서.”이와 동시에 정유미는 어딘가에서 느껴지는 차가운 기운을 느꼈다. 이윽고 고개를 들자마자 그녀는 이준혁의 차갑고 어두운 눈동자와 마주했다.“정유미 씨, 누가 당신 말이 다 맞는 거라고 가르쳤죠?”얼음같이 차가운 그의 목소리에 정유미는 저도 모르게 몸을 떨었다.그녀가 우물쭈물하며 말했다.“준혁 씨, 나는...”정유미의 말을 듣고 싶지 않았는지라 이준혁은 그저 차가운 눈동자로 그녀를 바라볼 뿐이었다.“그 사람은 나한테 매달린 적 없어요. 내가 매달렸지.”정유미는 표정이 일그러졌고 마음도 상했다. 그녀가 울먹이는 목소리로 말했다.“어떻게 나한테 이럴 수 있어요, 준혁 씨. 삼촌께서 분명히 앞으로 내가 준혁 씨 아내가 될 거라고 했단 말이에요...”“내 아내 될 사람은 아버지가 정할 수 있는 게 아닙니다.”이준혁은 더이상 그녀를 상대하지 않고 자신의 지갑을 도로 주머니에 넣으며 차갑게 말했다.“이만 가보세요. 다시는 보고 싶지 않네요.”...IFC몰 입구.윤혜인의 발목이 빨갛게 부어오른 것을 보고 소원은 화가 치밀어올랐다.‘이준혁 이 개자식!’걸으면 걸을수록 심해진다는 것을 알고 소원은 윤혜인을 부축해 입구에 도착해서 말했다.“내가 차 몰고 올 테니까 넌 여기서 나 기다려.”하늘은 점점 어두워지고 거리에는 가로등이 하나둘 불을 밝혔다.입구에 앉아있던 윤혜인은 갑자기 코끝이 시큰거렸다.그러다 얼굴에 웬 차가운 감각이 느껴졌고, 손을 뻗어 만져보고 나서야 그녀는 눈물이라는 것을 깨달았다.하지만 더 생각할 겨를도 없이 소
한구운은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애가 아니었다. 그는 여자의 집에서 샤워한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알고 있었다.그는 그윽한 눈빛으로 윤혜인을 바라보았다. 화장기 없는 작은 얼굴은 유난히 하얗고 매력적인 분홍빛이 감돌았다.따스한 불빛 아래, 한구운은 심지어 그녀의 하얀 볼에 있는 작은 솜털까지 보아냈다. 입을 맞추고 싶은 얼굴이었다.한구운 역시 정상적인 보통 남자인지라 잠시 쳐다보고 있으니 곧바로 느낌이 전해졌다.그가 윤혜인에게 물었다.“그래도 괜찮겠어?”윤혜인은 미안한 마음이 드는 동시에 후회스러웠다.“미안해요, 오빠.”그녀는 한구운을 이용할 생각을 조금 갖고 있었지만, 상대방이 원하지 않을 수도 있으니 바로 순순히 잘못을 인정했다.‘내 일을 나 스스로 해결해야지.’윤혜인은 자리에서 일어났다.“수건 줄 테니 좀 닦아요.”그때, 한구운이 그녀의 손목을 붙잡았다. 의아해하며 돌아보는 윤혜인의 시선에는 반짝이는 한구운의 그윽한 눈동자가 들어왔다.“나 너 도와줄 수 있어.”여전히 의심스러워하는 윤혜인의 표정을 보고 그가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말했다.“내가 네 남자친구가 되어주면 되잖아, 맞지?”윤혜인의 착각인지 모르겠지만 한구운의 목소리가 조금은 유혹적으로 들렸다.그녀가 대답하기도 전에 한구운은 일어나 외투를 벗고 손가락으로 셔츠 단추를 풀기 시작했다.“샤워하러 갈게.”역시 한구운이 욕실에 들어간 지 얼마 되지 않아 윤혜인은 ‘딩동’하는 초인종 소리를 들었다.현관문 방범 렌즈를 통해 이준혁이 문밖에 서 있는 것을 보고 윤혜인은 문을 열지 말지 망설였다.뒤이어 이준혁은 벨도 누르지 않고 바로 문을 ‘쾅쾅’ 두드리기 시작했다.윤혜인은 이웃들에게 피해를 끼칠까 봐 급히 문을 열었다.문이 열리자 이준혁의 시선은 바로 윤혜인의 얼굴에 떨어졌다.원피스 잠옷 차림에 머리카락은 촉촉하고 부드러운 피부가 분홍빛을 띠는 것을 보아, 그녀는 막 목욕을 마치고 나온 것 같았다.며칠밖에 지나지 않았지만, 이준혁은 몇 달 동안 그녀를 보지 못한 것처럼
윤혜인은 평소처럼 침착하게 몸을 돌려 수건을 가져와 화장실 안에 넣어주었다.“이 대표님, 이렇게 늦은 시간에 웬일이세요?”이준혁은 어리둥절했다. 더욱이는 이 상황을 믿기 어려웠다.한구운은 윤혜인의 머리를 어루만지며 사랑스러운 말투로 말했다.“대표님을 안으로 모셔야지, 왜 입구에 그냥 서 있으시게 만들어?”“시간이 너무 늦었잖아요.”윤혜인이 무표정하게 말했다.두 사람은 마치 이 공간에 이준혁이 없는 것처럼 친밀하게 행동했다.그는 얇은 입술을 꼭 다물고 새빨개진 눈으로 윤혜인을 바라보았다.“두 사람, 잤어?”상처받은 그의 검은 눈동자가 보이자 윤혜인은 잠시 혼란스러워졌다.이준혁은 손을 뻗어 그녀를 끌어당기며 버럭 화를 냈다.“너한테 묻잖아, 두 사람 잤냐고?!”한구운도 손을 뻗어 이준혁을 떼어놓으려고 했지만, 그에게 세게 밀리고 말았다. 뒤이어 이준혁은 주먹을 높이 들고 한구운을 때리려고 했다.그러자 이번에는 윤혜인이 그를 단번에 그를 밀어내고 차갑게 말하는 것이었다.“이준혁 씨, 구운 오빠를 다치게 한다면 그냥 안 넘어갈 줄 알아요!”이준혁의 주먹은 공중에서 멈췄다. 그러고는 두 사람을 힐끔 쳐다보더니 갑자기 입꼬리를 씩 올렸다.‘웃겨, 너무 웃겨.’전에 그는 윤혜인과 한구운이 정말 사귄다는 것을 믿지 않았다.게다가 이준혁의 조사에 따르면 그들 두 사람은 부모님들에게 보여주기식으로 연인 행세를 하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그래서 이준혁은 윤혜인이 한구운의 여자친구 행세를 하는 것을 별로 개의치 않고 천천히 그녀를 빼앗으려고 했다.하지만 지금 그 모든 계획이 무너졌다.두 사람이 이미 잔 사이라니!다른 사람도 아닌 한구운이다. 그들의 결혼 기간 동안 줄곧 윤혜인에게 매달린 남자 말이다.한구운은 그들의 결혼에 여러 차례 도발을 행한 남자였다.‘누가 되든 다 괜찮은데, 왜 하필 한구운인 거야.’이준혁은 더럽다는 느낌이 드는 것은 물론 심지어 조금 역겹기까지 했다.그는 손도 쓰고 싶지 않아 천천히 주먹을 내려놓았다. 그러고
어딘가 이상하긴 했지만 몸이 이성을 앞서 통제할 수가 없었다. 순간 사악한 생각에 사로잡힌 남자는 소원의 머리채를 확 잡아당겨 고개를 쳐들게 하더니 욕설을 퍼부었다.“젠장. 발랑 까졌네. 남자 꼬시는 건 어디서 배웠어?”소원은 강직한 성격이었지만 이런저런 일을 겪으면서 가끔은 성격을 앞세우기보다 머리를 써야 한다는 걸 알게 되었다. 특히 지금처럼 불리한 상황에서는 머리를 쓰는 것만이 유일한 살길이었다.“오빠, 도... 도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거예요...”소원은 몸을 파르르 떨고 있었지만 손바닥엔 어느새 튼실한 나뭇가지가 들려 있었다. 아까 남자가 잠깐 방심한 틈을 타 바닥에서 주운 것이었다.남자가 소원을 확 끌어당겨 품에 껴안자 소원은 깜짝 놀랐지만 여전히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오빠, 지금 이 상태로는 너무 불편한데 손이라도 좀 풀어줄래요?”남자는 소원에게 당한 적이 있었기에 바로 경각심을 세웠다.“무슨 꿍꿍이야?”“아니. 이러면 뭘 하기도 불편하잖아요.”소원이 제안했다.“혹시 걱정되면 한쪽만 풀어주고 다른 한쪽은 창문에 묶어두면 되잖아요. 안 그래요?”남자는 제법 소원의 아이디어가 제법 마음에 들었다. 알아서 결박해달라고 하니 정말 땡큐였다.“정말 다른 꿍꿍이 없는 거지? 경고하는데 다른 수작 부리면 당장 그 모가지를 비틀어 버릴 거야.”남자가 소원에게 경고했다.소원은 너무 무서워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하겠다는 듯 연기했다.“오빠, 그게 도대체 무슨 소리예요? 내가 어떻게 감히 그런 생각을 하겠어요. 사람 하나 죽여도 모를 곳에 버려졌는데 오빠 말이라도 잘 들어야 고통이라도 덜 받을 거 아니에요.”“그래, 총명하긴 하네.”남자가 만족스럽게 말했다.“당연하죠. 오빠, 나 지금 클럽에서 도우미로 일하고 있어서 돈 많은 사람들이 어떻게 노는지 다 알고 있어요. 내가 오빠 잘 모실 테니까 제발 때리지만 말아줘요.”어차피 소원이 아가씨라고 신분을 속여도 남자는 그게 진실인지 아닌지 판단할 방법이 없었다. 아니나 다를까 소원의 말
여자는 소원이 쓰러지는 걸 보고 웃음을 터트렸다.“그래도 꽤 오래 버티네. 다른 사람보다 몇분 더 버텼어.”여자는 이렇게 말하더니 계속 앞으로 질주했다....얼마나 잤을까, 어렴풋이 잠에서 깨보니 작은 판잣집에 누워 있었다. 크지 않은 걸 봐서는 아마 임시 피난처 같아 보였다.손발이 묶인 소원은 약물 때문인지 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밧줄을 풀고 도망가는 건 거의 불가능해 보여 아예 포기하고 체력을 보존하며 주변을 살피며 소리를 유심히 들었다.소원의 판단에 의하면 바깥엔 두 사람이 돌아가며 지키는 것 같았다. 10분 전까지만 해도 두 사람의 대화 소리가 들렸는데 이내 대화 소리가 사라지고 한 사람이 걸어 다니는 소리밖에 들리지 않았다.얼마 지나지 않아 나무문이 끼익하고 열리더니 머리에 붕대를 감은 남자가 들어왔다. 그는 바로 어젯밤 소원을 차에 태운 그 운전기사였다.남자는 안으로 들어오며 문을 닫더니 소원에게로 가까이 다가와 침을 내뱉었다.“빌어먹을 년. 내가 운반만 몇 년을 했는데 이렇게 당해본 건 처음이네. 이 화를 참을 수가 있어야지.”소원은 이 남자가 전문적으로 이런 거래를 하는 사람이라고 추측했다. 운반 작업만 몇 년을 했다고 토로하는 걸 봐서는 지금까지 쭉 이런 거래를 해왔고 많은 사람이 피해를 봤다는 뜻이기도 했다.“나는 당신이 누군지도 몰라요. 나한테 왜 이러는 건데요?”소원이 일부러 놀란 척 물었다. 지금은 강하게 나가면 오히려 매를 버는 걸 수도 있으니 차라리 그들이 원하는 대로 해주며 매라도 적게 맞아 체력을 보존하는 편이 더 좋을 것 같았다.“당연히 모르지. 당신이 나를 알았으면 내가 이 일을 할 수 있었겠어?”남자가 손을 비비며 가까이 다가오더니 냅다 소원을 걷어차며 이렇게 말했다.“내가 그날 말했지. 다리를 분질러 버리겠다고. 지금 그 약속을 지킬 때야.”다리뼈를 정통으로 맞은 소원은 하얗게 질린 얼굴로 애원했다.“미안해요. 일부러 그런 건 아니에요. 나도 그저 살고 싶어서...”남자가 그런 소원을
소원이 잠깐 망설이더니 결국 입을 열었다.“혹시 신고 좀 해주실 수 있나요?”안경을 쓴 여자는 꽤 통쾌했다.“당연하죠. 지금 바로 신고해 줄게요.”여자는 소원이 근심할까 봐 그러는지 바로 스피커폰으로 돌렸고 수화기 너머로 콜센터의 노련한 목소리가 들렸다.“여보세요. 여기는 서울 경찰서입니다. 뭘 도와드릴까요?”여자가 말했다.“안녕하세요. 길에서 많이 다친 여성분을 발견했는데 아마도 나쁜 사람을 만난 것 같아요. 지금 혼자 길에 버려졌는데 신고해달라고 해서요.”“그 여성분 이름이 어떻게 되시죠?”여자가 소원을 힐끔 쳐다보며 물었다.“이름이 뭐예요?”소원이 이름을 말했다.“안녕하세요. 누군가가 저를 납치했어요. 모르는 사람이고 차량번호는 XX...”“네, 지금 바로 경찰 인력을 그쪽에 보내겠습니다. 그 자리에서 기다려주세요.”통화가 끝나자 소원의 경계심도 점점 내려가기 시작했다. 그때 여자가 이렇게 말했다.“타요. 밖에 비가 이렇게 오는데 어깨에서 아직 피나잖아요. 그러다가 경찰 올 때까지 못 버틸 것 같아요...”소원은 아까 일을 겪으면서 여자에 대한 경계심이 낮아진 상태였다. 게다가 아까 콜센터와 통화하며 자기 이름을 진세연이라고 밝혔다.“네.”소원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소원이 차에 오르자 여자는 조수석 캐비닛에서 수건 하나를 꺼내서 건네며 말했다.“일단 좀 닦아요. 그러다 감기 걸리겠어요.”“고마워요.”소원이 수건을 받아 얼굴에 묻은 물기를 닦아내더니 흠뻑 젖은 머리카락을 닦았다.“콜록콜록...”소원은 끝내 참지 못하고 재채기를 했다.“진세연 씨, 오늘 정말 고마워요.”소원이 수건을 건네며 감사 인사를 전했다.“고맙긴요.”여자가 수건을 받아 가다니 조수석에 던지며 담배를 꺼내 입에 물더니 한쪽 팔을 차창에 기대고는 말했다.“어차피 기다리고 있었는데요 뭐.”빗소리가 너무 커서 소원은 여자가 무슨 말을 하는지 잘 듣지 못해 다시 한번 물었다.“진세연 씨, 뭐라고 하셨어요?”여자가 웃으며 말했다.“별거
이것이 오히려 소원에게는 기회가 되었다. 소원은 아무렇지 않은 듯 앞쪽을 주시하며 속도를 확인했다. 속도가 70대까지 내려가자 기회를 잡은 소원은 천천히 옆으로 움직이다 기회를 잡고 운전기사가 방심한 틈을 타 손잡이에 손을 넣고 차 문을 열었다.탈칵.그렇게 운전기사가 미처 반응하기도 전에 소원은 차 문을 열고 바깥으로 뛰었다.“어, 저 빌어먹을...”화들짝 놀란 운전기사의 목소리가 빗속을 뚫고 소원의 귀로 들어왔다가 차와 함께 사라졌다.쿵.소원이 바닥에 떨어지며 여러 번 뒹굴었다. 오른쪽 어깨가 빠졌는지 이루 말할 수 없는 고통이 밀려왔다. 소원은 이를 악문 채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걸음을 옮길 때마다 마치 칼로 팔을 자르는 것처럼 너무 아팠다.앞으로 질주하던 차는 이내 방향을 틀고 뒤쫓아오기 시작했다. 큰비로 시야가 가려진 덕분에 소원은 옆에 있던 풀밭으로 도망갈 수 있었지만 바닥이 물컹해 발자국까지 숨길 수는 없었다.이내 운전기사가 뒤따라왔다. 건장한 남자였기에 달리는 게 소원보다 빠를 수밖에 없었다. 소원은 걸음을 멈추더니 몽둥이 하나를 줍고 풀숲에 숨어 소리 낼 엄두를 내지 못했다. 운전기사가 한걸음 다가올 때마다 자박자박하는 물소리가 들렸다.“아가씨, 좋은 말로 할 때 그냥 나와. 내가 찾아내면 다리부터 분질러 버릴 테니까. 헤헤. 그러면 좋은 값에 팔 수가 없잖아. 그러면 장기를 뜯어내 팔고 사지를 잘라서 인형으로 만드는 수밖에 .:소원은 온몸에 소름이 끼쳤다.‘도대체 누가 나한테 이렇게 끔찍한 일을 저지르려는 거지?’순간 머릿속에 여러 이름이 떠올랐다.‘방민아, 육연주, 그리고 서씨 가문...’“아가씨, 말 들어. 다리라도 온전하면 아가씨도 덜 아프지 않겠어?”“숨어도 소용없어. 여기 내 친구들 많아. 어딜 가든 쉽게 도망치진 못할 거야.”소원은 마음이 강한 편이었기에 상대가 어떻게 말하든 그 자리에 숨어 꼼짝달싹하지 않았다. 운전기사가 2미터도 남지 않은 곳까지 가까이 다가오자 소원이 벌떡 일어나더니 손에 쥔 나
운전기사가 백미러로 소원을 보며 사과했다.“손님, 죄송해요. 감기 걸렸는데 손님에게 전염될까 봐 걱정돼서요.”소원은 별생각 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더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앱으로 차를 불렀기에 가는 내내 차 안에서 하는 대화가 녹음되었고 버튼 하나만 누르면 신고할 수 있었기에 소원은 시름 놓고 뒷좌석에서 눈을 붙였다.얼마나 지났을까, 소원이 눈을 번쩍 떴다. 아까 운전기사가 통화를 하는 것 같았는데 소원이 깨어났을 땐 다시 마스크를 끼고 운전하고 있었다.소원은 꿈이라도 꾼 줄 알고 창밖을 내다봤다. 날씨가 우중충한 게 비가 내릴 것 같았다. 도로를 유심히 살피던 소원은 이상한 낌새를 눈치채고 얼른 핸드폰을 꺼내며 물었다.“기사님, 혹시 길 잘못 드신 거 아니에요?”앱을 확인해 보니 차는 이미 경로를 한참 이탈했고 아예 다른 길로 가고 있었다.“아니에요. 이 길이 더 가깝고 비용도 적게 나와요.”방금 전까지만 해도 코가 막힌 듯한 목소리던 운전기사는 지금 꽤 깔끔하고 상쾌한 목소리로 말하고 있었다.소원은 점점 한산해지는 주변 풍경을 보며 불안함이 엄습했다.“아니에요. 기사님. 지금 당장 원래 경로로 돌아가서 내비게이션 따라 운전해 주세요. 비용은 앱에 나온 대로 드릴게요.”“손님, 그러면 아까 말했어야지. 그 길 진작에 지나쳐서 다시 돌아가려면 너무 멀어요. 걱정하지 마요. 곧 도착할 거예요.”운전기사는 소원의 요구를 들어주지 않고 계속 엑셀을 밟았고 시속 120까지 올라갔다. 국도라 제한속도가 80인데 말이다.소원은 점점 마음이 불안해져 신고 버튼을 누르려는데 배터리가 닳은 핸드폰이 소리를 내며 꺼졌다. 정말 되는 일이 없는 하루였다.핸드폰이 먹통이니 소원은 다른 방법을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어딘가 이상했다. 자세히 돌이켜보니 차에 오르기 전 차량 색깔과 번호를 확인했는데 아무 문제가 없었기 때문이다.‘근데 왜 이렇게 불안한 거지?’소원은 옆에 있는 기사 카드를 발견했다. 카드에 찍힌 운전기사는 네모난 얼굴에 눈썹이 짙
소원은 이번 달에 두 번이나 반차를 냈다. 다른 직원도 한 달에 겨우 2날 반 정도만 반차를 낼 수 있었기에 소원도 민망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다행히 영숙은 어머니의 상황이 좋지 않다는 소원의 말을 듣고 조심해서 다녀오라는 말만 덧붙였다. 소원은 얼른 기사에게 방향을 돌려 요양원으로 향하라고 했다.요양원에 도착한 소원을 보고 간병인 아줌마가 무척 놀라며 물었다.“소원 씨, 어쩐 일이에요?”소원은 침대에 조용히 누워있는 전미영을 보고 한시름 놓더니 이렇게 말했다.“요양원에서 상태가 좋지 않다고 연락이 와서요.”“괜찮아요. 사모님 오후에 약간의 경련이 있긴 했지만 오래 지속되진 않았어요. 주사를 맞고 지금까지 쭉 안정적이에요.”간병인 아줌마가 소원을 다독였다.“소원 씨, 너무 걱정하지 마요.”“다행이네요.”소원이 침대맡으로 다가가 앉았다. 중도에 잠깐 깨긴 했지만 전미영은 여전히 소원을 보고도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매주 보러 와도 전미영은 소원을 알아보는 법이 없었기에 소원도 이제 적응했다. 언젠가 육경한이 전미영을 보러 온 적이 있는데 육경한을 보고는 매우 즐겁게 반겨줬다. 소원을 대할 때 느껴지는 거리감만 보면 오히려 육경한이 친자식 같기도 했다.소원도 이 일에 관해 의사에게 물어본 적이 있지만 의사는 전미영이 깨어나자마자 본 사람이 육경한이라 육경한에게 익숙함과 신뢰감을 느낀다고 했고 별다른 방법이 없는 상황에서는 거부감을 느끼지 않는 사람을 만나는 게 몸 상태를 완화하는 데 도움이 될 거라고 말해줬다.게다가 애초에 전미영을 보살피는 일은 육경한이 전부 책임졌기에 무턱대고 육경한을 쫓아낼 수도 없었다. 그저 육경한이 문병 오는 시간을 피해 오는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육경한은 일이 바빴기에 소원을 보러 오는 일이 드물어 그렇게 걱정할 필요는 없었다.간병인 아줌마는 소원이 어딘가 피곤해 보이자 이렇게 말했다.“소원 씨, 얼른 들어가 쉬어요. 출근하느라 피곤해서 그런 거 아니에요? 멀리서 사는 걸로 알고 있는데 문병 온지 얼마나 됐다고
집사는 일 처리를 마치고 서현재의 핸드폰을 서진태에게 바쳤다.“도련님 핸드폰 아까부터 계속 울리고 있습니다. 소원이라는 여자가 계속 찾는 것 같은데 뭘 알고 있는 게 아닌지 의심됩니다. 처리할까요?”집사는 피도 눈물도 없는 사람이었고 일 처리가 깔끔한 편이라 서진태의 신임을 받고 있었다. 서진태는 쉴 새 없이 날아드는 부재중 전화와 메시지에 하얗게 센 눈썹을 찡그렸다.“이 여자가 정말...”서진태가 수염을 만지작거리며 말했다“육경한 그 자식이 무슨 뜻인지 모르겠네. 이 여자를 죽이든 풀어주든 일단 육경한의 생각부터 파악해야 해.”서진태는 겉으로만 육경한에게 공손했지 속으로는 죽일 듯이 미워했다. 서현재를 빌미로 서씨 가문을 여러 번이나 물고 늘어졌지만 목숨 따위 아까워하지 않을 정도로 실력이 강했고 외국에서 레전드로 남을만한 경험을 쌓은 덕분에 이 바닥에서 명성을 널리 날린 터라 서씨 가문도 함부로 건드릴 엄두를 내지 못했다. 서씨 가문은 아직 지켜야 할 사람이 있었다.하지만 집사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들이 세운 계획에 위협이 되는 사람이라면 백 명의 억울한 사람을 만들더라도 상관없다고 생각했다.“어르신, 이 여자는 폭탄이나 마찬가지예요. 그러다 결혼식에 차질이라도 생기면 그땐 육씨 가문과 원수를 질뿐더러 도련님을 휘두를 핑계가 없어지는 거잖아요. 모든 일이 난장판이 될 거라고요.”충성심이 하늘을 찌르는 집사는 사실 서진태가 동의하든 하지 않든 소원을 제거해 서씨 가문 후계자 자리에 위협이 되는 사람은 모조리 제거할 생각이었다. 당연히 집사가 생각하는 후계자는 서현재가 아니었다.선동당한 서진태는 집사의 말이 맞다고 생각했다. 이 여자는 정말 폭탄과도 같은 존재였다. 서현재도 이 여자를 위해 여러 번 서진태의 뜻을 거스른 적이 있기에 미래를 대비해 소원을 제거하는 편이 나을 것 같다고 생각했다.서진태가 집사에게 귀띔했다.“사람 보내서 쥐도 새도 모르게 처리해. 인신매매 업자에게 팔아도 좋으니까 최대한 깔끔하게 처리해야 할 거야. 절대
“요즘 바빠?”윤혜인이 물었다.“음... 조금.”소원의 대답은 거짓말이기도, 거짓말이 아니기도 했다. 클럽 일은 확실히 바빴다. 낮에는 잠을 보충하고 저녁에 나가서 새벽까지 일해야 하니 개인 시간이 별로 없었다. 어머니 전미영을 보러 갈 때도 퇴근하고 바로 가야 했기에 약간 피곤하기도 했다.그리고 이 일에 윤혜인을 끌어들이고 싶지 않았다. 세 아이를 케어해야 하니 생각보다 많이 힘들 것이다. 게다가 육경한은 유진의 친부니 이준혁이 개입한다 해도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고 결국 혼자 힘으로 이겨내야 했다.“그래. 나도 요즘 애가 어려서 모임을 줄였어. 애들이 조금 더 크면 아름이까지 데리고 너랑 유진이 보러 갈게.”“그래.”소원은 딱히 다른 설명을 붙이지 않고 웃으며 대답했다.“유진이랑 잘 지내고 있어.”윤혜인이 말했다.“그래. 꼭 그럴게.”전화를 끊고 나서도 소원은 윤혜인이 했던 말을 떠올렸다. 잘 지내라는데 유진이 육경한과 과연 잘 지낼 수 있을지 의문이었다.육경한 혼자라면 소원도 포기했을지 모른다. 소원의 몸 상태로는 유진의 곁을 오래 지키지 못할 수도 있다. 육경한 옆에 있으면 어느 날 소원이 바람처럼 사라진다 해도 부모님이 없는 것보다는 나을 것이다.하지만 소원은 방민아를 믿을 수가 없었다. 방민아는 사악한 속내를 숨기는데 능했기에 결혼해서 아이라도 가지면 유진을 눈엣가시로 생각하고 제거하려 할지도 모른다. 하여 소원은 더 포기할 수 없었다. 유진이 표적이 되는 건 절대 두고 볼 수 없었다.얼마 지나지 않아 윤혜인이 서현재의 개인 번호를 보내왔다. 소원이 얼른 전화를 걸었지만 받는 사람이 없었다. 다시 한번 걸어도 받지 않자 소원은 어쩔 수 없이 메시지를 보냈다.[서현재 씨, 나 소원이에요. 보면 회신해요. 긴히 해야 할 말이 있어요.]메시지를 보냈지만 한참 동안 지나도 답장이 없었다. 소원은 마음이 점점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3일 뒤면 결혼인데 그때 가서 서씨 가문의 통제를 벗어나려면 더 힘들어지게 된다. 게다가 서씨 가문은
옆에 있던 사람이 좋다고 손뼉을 쳤다.“그래. 그래. 욕을 바가지로 먹어야 정신을 차리지. 인플루언서가 된 느낌이 어떤 건지 알려주자.”순간 구경하던 직원들이 일제히 핸드폰을 꺼내 소원의 얼굴을 찍으며 욕설을 퍼부었다.육연주는 이런 상황이 참 마음에 들었다. 꼬리 치길 좋아하는 소원을 인터넷에 폭로해 얼마나 뻔뻔한 사람인지 세간에 알리는 것도 좋을 것 같았다.소원은 어떻게 해명해야 할지 몰랐다. 사람들 눈에 육연주는 서현재의 와이프였고 서씨 가에서 인정한 며느릿감이었지만 소원은 아무 명분이 없었다. 그런 소원이 서한 그룹까지 찾아왔으니 이상하게 생각할 만도 했다.하지만 소원은 서현재가 소용돌이에 휘말리는 걸 두고 볼 수 없었다. 게다가 서씨 가문에서 육연주를 고른 건 다 이유가 있었다. 육연주는 공부라곤 해본 적이 없는 여자라 금융은 일절 몰랐기에 서한 그룹의 경영에 간섭할 일이 없었다. 그리고 육연주는 육씨 가문 사람이라 무슨 일이 있어도 언제든 발을 뺄 수 있었다.“육연주 씨, 서현재와 얘기 나누러 온 것뿐인데 뭐가 방해된다고 그래요.”소원은 여전히 포기할 생각이 없어 보였다. 육연주는 화가 치밀어오른 나머지 가방을 들어 소원에게 던졌다.“정말 여간 뻔뻔한 게 아니네요. 이런 수모를 겪어도 그런 말이 나와요?”소원이 옆으로 쓱 비키며 공격을 피했지만 육연주는 소원을 놓아줄 생각이 없었고 보디가드를 불러 소원을 끌어냈다.“빌어먹을 년.”육연주는 소원이 끌려 나가는 걸 보고도 여전히 분이 풀리지 않았다.벌건 대낮만 아니었으면 정말 소원을 때려죽이고 싶었지만 결혼이 코앞이라 손에 피를 묻힐 수 없으니 여기서 멈췄지 아니면 정말 때려죽였을지도 모른다.“거기.”육연주가 데스크 직원들을 매섭게 쏘아보더니 경고했다.“오늘 일 현재 씨 귀에 들어가는 날엔 당신들부터 해고할 거야.”육연주는 이미 서한 그룹의 사모님이라도 된 것처럼 행동했다. 데스크 직원들은 육연주가 언젠간 서씨 가문 안주인이 될 거라는 걸 알고 있었기에 그저 눈치만 볼 뿐 대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