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멈추라고?’이건 그녀가 번복한다는 뜻이었기에 오늘 발생했던 모든 일이 의미를 잃게 된다.윤혜인은 괴로움을 참으며 입을 열었다.“한 시간 반 남았어요.”이준혁은 자신을 쳐다보지 않는 윤혜인의 고개를 잡고 돌리며 언짢은 목소리로 말했다.“확실해?”윤혜인은 입술을 달싹거렸다. 눈물이 흘러나왔지만 물러서지 않았다.이준혁은 빨개진 그녀의 볼을 쳐다보며 애매하게 웃었다.그 웃음은 결코 즐거워서 웃는 웃음이 아녔다.윤혜인은 좋지 않은 느낌에 바짝 긴장했다. 그녀의 허리에 올려놓은 손도 차가워지고 있었다.이준혁은 웃음을 멈추고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그래. 네가 원하는 대로 해줄게.”곧이어 그는 두 손으로 그녀를 세게 눌렀고 윤혜인은 소리도 지르지 못하고 한 손으로 난간을 꽉 잡았다.이준혁은 반드시 말한 대로 하는 사람이었다. 그는 정말 마지막 1분까지 조금도 낭비하지 않았다.이준혁은 그녀를 안아 욕조로 데려갔다. 그녀도 다른 것을 상관할 새가 없었다. 씻고 방으로 돌아와 보니 이준혁은 보이지 않았다.그는 약속을 지킨 것 같았다.그녀도 피곤한 나머지 더는 생각할 기력이 없어 침대에 엎드려 바로 잠이 들었다.윤혜인은 점심때가 되어서야 어렴풋이 방문을 두드리는 소리를 들었다. 방문을 여니 소원이 그녀를 와락 안았다.“혜인아, 배고파.”윤혜인은 그녀를 앉히며 말했다.“잠깐만, 내가 맛있는 거 해줄게.”소원을 자리에 앉힌 뒤 윤혜인은 일어나서 창문을 열었다. 뜨거웠던 어젯밤의 흔적이 은은하게 남아 있었다. 그녀는 소원이 눈치챌까 봐 두려워 방안을 다시 한번 둘러봤다.어젯밤에 이준혁이 베란다에서부터 침대까지 방을 어지럽혀 놓은 줄 알았는데 지금 보니 아주 깨끗했다. 심지어 쓰레기통도 깨끗하게 비어있었다.두 시간 안에 두 번의 관계가 있었지만 이준혁은 만족을 못 했을 것이다.소원이 옆방에서 자고 있었기에 긴장한 윤혜인은 소리도 내지 못했다.나중에 이준혁이 너무 괴롭힌 탓에 그의 뜻에 따라 소리를 내긴 했었다.다행히 술에 취한 소원이 깊
매주 4개의 수업밖에 없었다. 이하진은 배우려 하지 않았지만 지나친 행동은 하지 않았다.윤혜인은 그에게서 금요일에 자신에게 못된 짓을 할거라는 나쁜 의도를 느꼈다.목요일에 윤혜인은 수업이 없었기에 소원과 만나기로 했다.두 사람은 디저트 가게에서 아이스크림을 먹고 있었다. 소원은 핸드폰을 보다가 깜짝 놀라며 소리를 질렀다.“이준혁 이 개자식이 이렇게 빨리 혼인을 한다고?”‘이준혁이 혼인...?’“켁켁...”아이스크림을 먹다가 사레가 들린 윤혜인은 기침을 멈추지 않았다.소원은 재빨리 그녀의 등을 두드려주며 불평했다.“이준혁 이 개자식, 이혼한 지 얼마나 됐다고 정씨 집안 정유미와 매일 출퇴근을 같이해? 정말 접착제로 붙여놓은 것처럼 한시도 떨어지지 않네. 네가 빨리 이혼하길 잘했어. 임세희가 떨어져 나가니 또 정유미가 오고, 후보들이 줄 서서 대기하고 있는 거 같아.”윤혜인은 처음 들었을 때는 마음이 불편하고 기분이 좋지 않았지만 이내 평온을 되찾았다.일주일밖에 지나지 않았는데 다른 사람과 결혼한다는 얘기가 나오는 걸 보니 이번에는 정말 약속을 지키고 그녀를 귀찮게 하지 않으려는 것 같았다.소원은 윤혜인의 기분이 가라앉은 걸 느끼고 얼굴이 하얗게 질려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혜인아, 괜찮아?”“괜찮아. 방금 사레가 들린 거야.”윤혜인은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평소 모습으로 돌아갔다.소원은 입을 삐죽거렸다.‘아이스크림을 먹다가 사레가 들리는 사람이 어딨어.’그녀는 윤혜인의 팔을 잡고 말했다.“우리 기분도 낼 겸 예쁜 옷 사러 가자.”말하면서 두 사람은 한 브랜드숍에 들어갔다.소원은 가운데 걸어놓은 옷이 한눈에 들어왔다. 짙은 녹색 캐시미어 코트에 흰색 원피스였다.그녀는 직원에게 치마를 가져오라고 한 뒤 윤혜인에게 건네주었다.“들어가서 입어 봐.”윤혜인은 옷의 원단을 만져보고는 가격이 만만치 않을 거라는 걸 알아차렸다. 그녀는 옷을 입어볼 마음이 사라졌다.그녀에게는 지금 빚이 있었고 외국에 나가 대학을 다니는데에도 돈이
이준혁은 정갈한 수제양복에 검은색 외투를 걸치고 있었다. 그의 고상한 분위기는 타고난 것처럼 느껴졌다. 옆에 있는 여자는 그의 팔을 꽉 껴안고 매우 친밀한 모습을 보였다. 두 사람은 흡사 한 쌍의 남녀커플 같았다. 두 눈이 서로 마주쳤지만, 이준혁은 이내 윤혜인에게서 시선을 돌려 정유미를 바라보았다.“골라볼래요?”정유미도 윤혜인을 보고 이전 두 번의 만남이 떠올라 마음이 조금 불편했지만, 이준혁의 부드러운 목소리를 듣고 또 금세 즐거워졌다.들어가서 이리저리 둘러보았지만, 마음에 드는 것이 없었다. 그러다 그녀의 시선이 윤혜인이 입은 옷에 한참 머물렀다.“저 옷 또 있나요?”정유미가 직원에게 물었다. 그러자 직원이 웃으며 말했다.“저희 매장은 맞춤형이라, 각 디자인마다 한 벌 뿐입니다.”정유미의 표정은 실망한 기색이 역력했다. 사실 그녀는 줄곧 환하고 선명한 색깔을 좋아했지 이런 짙은 녹색 같은 색깔에는 별로 관심이 없었다. 그런데 막상 윤혜인이 입은 걸 보니 짙은 녹색 옷도 아주 잘 어울리고 눈길을 끄는 것 같았다. 그녀는 곁눈질로 이준혁을 힐끗 바라보았다. 그의 시선이 윤혜인에게로 향하는 것을 눈치채고는 마음이 좀 아팠다.그렇다고 남과 옷을 뺏고 싶지는 않았기에 정유미는 이준혁의 팔을 잡고 고개를 돌리며 떠나려고 했다.하지만 눈치 빠른 직원이 눈동자를 굴리며 정유미와 윤혜인을 번갈아 바라보았다.비록 화려하게 입긴 했지만, 정유미의 신발이며 가방은 모두 맞춤 제작이었고 한눈에 봐도 재벌 집 딸 같아 보였다.게다가 옆에 있는 남자의 몸에서 풍기는 아우라는 10여 년을 이 업종에 종사해온 직원이 보기에 틀림없이 부자 같았다.그러나 윤혜인은 그 옷이 자신에게 아주 잘 어울림에도 사지 않겠다는 의향을 내비치는 것으로 보아 직원은 그녀의 주머니 사정이 좋지 않은 것이라고 생각했다.그럴 만도 한 것이 외투만 해도 몇천만 원 상당이기에 아무나 쉽게 살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실적을 올릴 좋은 기회야.’곧 직원이 정유미를 불렀다.“손님, 잠시만
윤혜인은 현실적인 사람이라 이런 따분한 일에 흥미가 없었다.말을 끝마치자마자 그녀는 빠르게 옷을 갈아입고 나와 직원에게 건네주었다.소원은 화가 치밀어올라 가슴이 답답했지만 확고한 윤혜인의 태도에 그녀도 더 다투기 어려웠다.두 사람이 가게를 나서기도 전에 정유미가 벽을 가리키며 입어보지도 않은 채 말했다.“준혁 씨, 나 이거 다 사도 돼요?”그러자 이준혁이 덤덤하게 대답했다.“네.”정유미도 달콤한 웃음으로 화답했다.“고마워요, 준혁 씨. 정말 나한테 친절하다니까.”“유미 씨가 기쁘면 됐어요.”유난히 부드러운 이준혁의 말투를 들은 윤혜인은 순간 혼란스러워졌다.윤혜인의 기억에는 이준혁이 그녀의 허리를 잡고 목소리를 내도록 강요할 때의 사나운 말투가 남아있었기 때문이다.지금은 그때와는 완전히 다른 사람처럼 보였다.그녀는 소리 없이 쓴웃음을 지었다.‘자기가 원하는 사람한테는 얼마든지 따뜻한 사람이었네.’정유미는 소원이 자신의 옆으로 다가오는 것을 보고 거만하게 그녀를 힐끔 바라보았다.뒤이어 그녀는 갑자기 발끝을 세우더니 이준혁의 볼에 입을 맞췄다.“당연히 기쁘죠.”갑작스러운 그녀의 행동에 윤혜인은 발걸음을 멈췄다. 하지만 이내 고개를 휙 돌리고 담담하게 시선을 거두었다.소원의 분노가 또다시 들끓었다.그렇게 정유미에게 ‘훈계’를 해주려는데 윤혜인이 그녀를 끌어당기며 고개를 가볍게 흔들었다. 충동적으로 행동하지 말라는 의미였다.겨우 화를 참은 소원은 지나가며 매서운 눈길로 이준혁을 힐끔 바라보았다.‘쓰레기!’매장에서 나온 후 소원은 한참 동안 이준혁을 비난했다.“이준혁 씨 저 새 여자가 아주 마음에 드는 모양이지? 직접 쇼핑도 다 오고 말이야. 아마 저 여자 신분 때문일 확률이 커. 정씨 집안 요즘 대체 에너지 사업으로 돈 많이 벌고 있잖아.”윤혜인은 그들의 일에 흥미를 느끼지 못했다.소원은 단번에 그녀의 기분이 좋지 않다는 것을 알아채고 물었다.“쇼핑하고 싶지 않으면 우리 이만 집에 돌아갈까?”그러자 윤혜인이 빙긋 미소를
순간 정유미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누군가에게 뺨을 얻어맞은 듯 얼굴이 유난히 아팠다.사실 조금 전 그녀는 정말 이준혁의 볼에 입을 맞춘 것이 아니었다. 거의 닿을 뻔할 때 이준혁이 빠르게 피했다. 그녀는 체면이 구겨질까 봐 일부러 크게 소리를 내었는데 뜻밖에도 그것이 남자의 심기를 건드리게 될 거라고는 생각지 못했다.이준혁은 그녀를 기다리지 않고 앞으로 성큼성큼 걸어갔다.정유미는 마음을 가다듬고 작은 보폭으로 뛰며 그를 따라갔다.‘아저씨가 어떻게 만들어준 기회인데, 절대 망치고 싶지 않아.’한편 1층.윤혜인과 소원이 화장품 매장을 구경하고 있다.얼마 지나지 않아 소원이 화장실에 가겠다고 하자 윤혜인은 근처를 돌아다니며 그녀를 기다렸다.그런데 두 걸음 정도 걸었을까 그녀의 눈에 바닥에 떨어진 지갑이 보였다.검은색 소가죽 재질의 지갑 위에는 이니셜이 새겨져 있었다. 그래서 윤혜인은 그것이 누구의 지갑인지 한눈에 알 수 있었다.그녀는 줍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문득 지간 안에 신분증 같은 물건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이 떠올랐다.‘준혁 씨 같은 사람은 신분증 잃어버리면 꽤 위험할 텐데.’결국 그녀는 지갑을 주웠고 안내 데스크에 맡겨 그에게 알려줄 생각을 했다.하지만 얼마 못 가 그녀는 이준혁이 난간에 서서 전화를 걸고 있는 모습을 발견했다. 곁에는 정유미도 보이지 않았다.번거로운 일을 하고 싶지 않았기에 그녀는 바로 앞으로 다가갔다. 어쩌면 습관이었을지도 모른다. 곧 윤혜인은 이준혁의 소매를 끌어당겼다.그리고 그녀가 입을 열기도 전에 남자가 휙 팔을 뿌리치며 짜증 난 말투로 말했다.“나 건드리지 말라니까요.”예상치 못한 그의 행동에 조금의 방비 태세도 갖추지 못한 윤혜인은 충격을 견디지 못한 채 바닥에 털썩 쓰러졌고 지갑도 날아가 버렸다.손바닥이 쓰라려 윤혜인은 미간을 찌푸렸다. 아마도 피부 껍질이 벗겨진 모양이었다. 발목도 삐었는지 찌릿찌릿 아파왔다.성가신 듯 여전히 찡그린 얼굴을 하고 그제야 이준혁이 고개를 돌렸다. 하지만 이내 바
말을 끝마친 뒤, 그녀는 소원을 끌고 갔다. 이준혁에게는 눈길 한번 주지 않은 채 말이다.발목이 아픈 탓에 걸음걸이가 조금 어색했지만, 그녀는 남에게 들키지 않기 위해 정상적으로 걸으려고 애썼다.성큼성큼 걸어가는 그녀와 달리 뒤에 있는 이준혁의 안색은 어두웠다.정유미는 지갑을 건네받으며 중얼거렸다.“준혁 씨 전처 친구라는 사람 진짜 무섭네요. 전처도 선한 사람은 아닌 것 같은데... 다행이에요. 이미 이혼해서.”이와 동시에 정유미는 어딘가에서 느껴지는 차가운 기운을 느꼈다. 이윽고 고개를 들자마자 그녀는 이준혁의 차갑고 어두운 눈동자와 마주했다.“정유미 씨, 누가 당신 말이 다 맞는 거라고 가르쳤죠?”얼음같이 차가운 그의 목소리에 정유미는 저도 모르게 몸을 떨었다.그녀가 우물쭈물하며 말했다.“준혁 씨, 나는...”정유미의 말을 듣고 싶지 않았는지라 이준혁은 그저 차가운 눈동자로 그녀를 바라볼 뿐이었다.“그 사람은 나한테 매달린 적 없어요. 내가 매달렸지.”정유미는 표정이 일그러졌고 마음도 상했다. 그녀가 울먹이는 목소리로 말했다.“어떻게 나한테 이럴 수 있어요, 준혁 씨. 삼촌께서 분명히 앞으로 내가 준혁 씨 아내가 될 거라고 했단 말이에요...”“내 아내 될 사람은 아버지가 정할 수 있는 게 아닙니다.”이준혁은 더이상 그녀를 상대하지 않고 자신의 지갑을 도로 주머니에 넣으며 차갑게 말했다.“이만 가보세요. 다시는 보고 싶지 않네요.”...IFC몰 입구.윤혜인의 발목이 빨갛게 부어오른 것을 보고 소원은 화가 치밀어올랐다.‘이준혁 이 개자식!’걸으면 걸을수록 심해진다는 것을 알고 소원은 윤혜인을 부축해 입구에 도착해서 말했다.“내가 차 몰고 올 테니까 넌 여기서 나 기다려.”하늘은 점점 어두워지고 거리에는 가로등이 하나둘 불을 밝혔다.입구에 앉아있던 윤혜인은 갑자기 코끝이 시큰거렸다.그러다 얼굴에 웬 차가운 감각이 느껴졌고, 손을 뻗어 만져보고 나서야 그녀는 눈물이라는 것을 깨달았다.하지만 더 생각할 겨를도 없이 소
한구운은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애가 아니었다. 그는 여자의 집에서 샤워한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알고 있었다.그는 그윽한 눈빛으로 윤혜인을 바라보았다. 화장기 없는 작은 얼굴은 유난히 하얗고 매력적인 분홍빛이 감돌았다.따스한 불빛 아래, 한구운은 심지어 그녀의 하얀 볼에 있는 작은 솜털까지 보아냈다. 입을 맞추고 싶은 얼굴이었다.한구운 역시 정상적인 보통 남자인지라 잠시 쳐다보고 있으니 곧바로 느낌이 전해졌다.그가 윤혜인에게 물었다.“그래도 괜찮겠어?”윤혜인은 미안한 마음이 드는 동시에 후회스러웠다.“미안해요, 오빠.”그녀는 한구운을 이용할 생각을 조금 갖고 있었지만, 상대방이 원하지 않을 수도 있으니 바로 순순히 잘못을 인정했다.‘내 일을 나 스스로 해결해야지.’윤혜인은 자리에서 일어났다.“수건 줄 테니 좀 닦아요.”그때, 한구운이 그녀의 손목을 붙잡았다. 의아해하며 돌아보는 윤혜인의 시선에는 반짝이는 한구운의 그윽한 눈동자가 들어왔다.“나 너 도와줄 수 있어.”여전히 의심스러워하는 윤혜인의 표정을 보고 그가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말했다.“내가 네 남자친구가 되어주면 되잖아, 맞지?”윤혜인의 착각인지 모르겠지만 한구운의 목소리가 조금은 유혹적으로 들렸다.그녀가 대답하기도 전에 한구운은 일어나 외투를 벗고 손가락으로 셔츠 단추를 풀기 시작했다.“샤워하러 갈게.”역시 한구운이 욕실에 들어간 지 얼마 되지 않아 윤혜인은 ‘딩동’하는 초인종 소리를 들었다.현관문 방범 렌즈를 통해 이준혁이 문밖에 서 있는 것을 보고 윤혜인은 문을 열지 말지 망설였다.뒤이어 이준혁은 벨도 누르지 않고 바로 문을 ‘쾅쾅’ 두드리기 시작했다.윤혜인은 이웃들에게 피해를 끼칠까 봐 급히 문을 열었다.문이 열리자 이준혁의 시선은 바로 윤혜인의 얼굴에 떨어졌다.원피스 잠옷 차림에 머리카락은 촉촉하고 부드러운 피부가 분홍빛을 띠는 것을 보아, 그녀는 막 목욕을 마치고 나온 것 같았다.며칠밖에 지나지 않았지만, 이준혁은 몇 달 동안 그녀를 보지 못한 것처럼
윤혜인은 평소처럼 침착하게 몸을 돌려 수건을 가져와 화장실 안에 넣어주었다.“이 대표님, 이렇게 늦은 시간에 웬일이세요?”이준혁은 어리둥절했다. 더욱이는 이 상황을 믿기 어려웠다.한구운은 윤혜인의 머리를 어루만지며 사랑스러운 말투로 말했다.“대표님을 안으로 모셔야지, 왜 입구에 그냥 서 있으시게 만들어?”“시간이 너무 늦었잖아요.”윤혜인이 무표정하게 말했다.두 사람은 마치 이 공간에 이준혁이 없는 것처럼 친밀하게 행동했다.그는 얇은 입술을 꼭 다물고 새빨개진 눈으로 윤혜인을 바라보았다.“두 사람, 잤어?”상처받은 그의 검은 눈동자가 보이자 윤혜인은 잠시 혼란스러워졌다.이준혁은 손을 뻗어 그녀를 끌어당기며 버럭 화를 냈다.“너한테 묻잖아, 두 사람 잤냐고?!”한구운도 손을 뻗어 이준혁을 떼어놓으려고 했지만, 그에게 세게 밀리고 말았다. 뒤이어 이준혁은 주먹을 높이 들고 한구운을 때리려고 했다.그러자 이번에는 윤혜인이 그를 단번에 그를 밀어내고 차갑게 말하는 것이었다.“이준혁 씨, 구운 오빠를 다치게 한다면 그냥 안 넘어갈 줄 알아요!”이준혁의 주먹은 공중에서 멈췄다. 그러고는 두 사람을 힐끔 쳐다보더니 갑자기 입꼬리를 씩 올렸다.‘웃겨, 너무 웃겨.’전에 그는 윤혜인과 한구운이 정말 사귄다는 것을 믿지 않았다.게다가 이준혁의 조사에 따르면 그들 두 사람은 부모님들에게 보여주기식으로 연인 행세를 하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그래서 이준혁은 윤혜인이 한구운의 여자친구 행세를 하는 것을 별로 개의치 않고 천천히 그녀를 빼앗으려고 했다.하지만 지금 그 모든 계획이 무너졌다.두 사람이 이미 잔 사이라니!다른 사람도 아닌 한구운이다. 그들의 결혼 기간 동안 줄곧 윤혜인에게 매달린 남자 말이다.한구운은 그들의 결혼에 여러 차례 도발을 행한 남자였다.‘누가 되든 다 괜찮은데, 왜 하필 한구운인 거야.’이준혁은 더럽다는 느낌이 드는 것은 물론 심지어 조금 역겹기까지 했다.그는 손도 쓰고 싶지 않아 천천히 주먹을 내려놓았다. 그러고
그 누구든 오랫동안 보지 못한 아이를 본다면 차분함을 유지하기 힘들 것이다. 게다가 윤아름처럼 아이를 끔찍이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더더욱 그럴 것이다. 하지만 윤아름은 평소와 다를 바 없이 멍한 표정이었다.원진우는 마음이 복잡했다. 이번에는 정말 연기가 아닌 진짜였다. 윤혜인의 쓸모도 이제 끝났기에 원진우는 윤혜인의 손에 올렸던 발을 뗐고는 입을 열었다.“온도 영하 80도로 내려.”“!”윤혜인이 화들짝 놀랐다. 이건 윤혜인을 산채로 냉동시켜 저번에 해내지 못한 일을 해내겠다는 뜻이었다. 원진우가 시야에서 점점 멀어지자 윤혜인은 이번 기회를 놓치고 원진우가 문밖으로 나서는 날에는 죽음밖에 없다는 걸 깨달았다.‘어떻게 해야만 살 수 있을까...’윤혜인은 죽기 싫었다. 살아서 엄마를 구하고 오빠가 오기를 기다리고 싶었다. 윤혜인은 윤아름의 얼굴을 떠올리다 갑자기 자지러지게 소리를 질렀다.“원진우!”윤혜인이 성까지 붙여서 부르자 아니나 다를까 원진우가 걸음을 멈추더니 윤혜인을 돌아봤다. 윤혜인은 혀끝을 꽉 깨물었다. 피비린내가 혀끝에서 느껴져서야 윤혜인은 정신을 조금 차릴 수 있었다. 윤혜인의 목은 마르고 갈라져 있었다.“내가 누구 딸인지 생각해 본 적 없어요?”윤혜인을 보는 원진우의 눈빛에서 보기 드물게 두려움이 묻어났다. 비록 몇초 안 되는 시간이었지만 윤혜인이 그 눈빛을 캐치하고는 반은 성공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나머지 반이야말로 윤혜인이 살 수 있는지 없는지를 결정하는 핵심이었다. 윤혜인은 원진우에게 고민할 기회도 주지 않고 꿋꿋하게 말했다.“삼촌, 그렇게 총명하신 분이 이미 눈치채고 계신 거 아니에요? 경천 오빠랑 나랑 친 남매가 아닌 건 알고 있잖아요. 아버지가 왜 직접 낳지 않고 남자아이를 입양했는지 생각해 본 적 없어요?”원진우가 윤혜인을 보더니 웃음을 터트렸다.“혹시 지금 내 딸이라고 하고 싶은 거예요?”“머리는 썼는데 나도 나이를 먹을 만큼 먹어서 그렇게 쉽게 속지 않아요.”원진우가 이렇게 말하더니 뒤도 돌아보지 않고 밖으
턱에서 전해진 고통에 윤혜인은 호흡이 가빠졌지만 여전히 고집스럽게 말했다.“엄마 좀 만나게 해줘요... 딱 한 번만요... 그다음에는 어떻게 하든 다 좋아요...”“꿈도 꾸지 마요.”원진우가 윤혜인을 바닥으로 내팽개치더니 얼음장처럼 차가운 눈빛으로 말했다.“태어나지 말았어야 하는 건데.”원진우가 여신으로 받드는 사람이 다른 남자와 결혼해 아이를 낳았다니, 이런 오점은 반드시 지워야 했다.윤혜인은 턱이 빠질 것처럼 아팠지만 여전히 울면서 애원했다.“딱 한 번만요. 한 번만 엄마를 만나게 해줘요. 제발 부탁이에요... 죽어도 눈은 감고 죽어야죠...”원진우는 윤혜인이 죽음을 앞두고 자기 걱정보다는 엄마를 만나고 싶다는 말에 흥미를 느꼈다.“혜인 씨는 만나고 싶어도 아름이는 생각이 다를 수도 있죠.”이 말에 윤혜인이 고개를 저었다.“거짓말하지 마요. 엄마가 왜 나를 만나려 하지 않겠어요? 엄마가 나를 얼마나 사랑하는데. 당신이 납치하면서 나를 버리지만 않았어도 우리는 행복하게 살았을 거라고요.”“명을 재촉하는 꼴이라니.”원진우가 매서운 눈빛으로 쏘아붙였다.“그렇다면 만족시켜 줄게요.”원진우가 손뼉을 치자 대문 하나가 열렸다. 불빛이 들어와서야 윤혜인은 지금 있는 곳이 냉동창고라는 걸 알아챘다. 하지만 원진우는 전혀 추위를 타지 않았다. 특수 제작한 옷을 입고 있어 냉동창고에 있어도 추위를 막을 수 있었다. 까만 옷을 입은 사람이 휠체어를 밀고 들어왔다. 하지만 반사 때문에 휠체어에 앉은 사람이 누군지 잘 보이지 않았다. 원진우가 그쪽으로 다가가 휠체어를 받아와 가까이 밀고 와서야 휠체어에 앉은 사람이 누군지 알 수 있었다.윤혜인은 너무 놀라서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 어릴 적 기억들이 물밀듯 밀려왔다. 여자가 자장가를 부르며 아이를 달래는 장면, 여자가 어린 윤혜인의 손을 잡고 아이스크림을 사러 가는 장면이 떠올랐다. 시간이 흘러도 여자의 얼굴은 세월이 지나도 여전히 변함없이 아름다웠다. 윤혜인과 자매라고 해도 믿을 사람이 적지 않을
“당신...”윤혜인이 이를 악물었다. 너무 흥분해서 그런지 이 말을 빼고는 다른 말이 나가지 않았다.“급해할 거 없어요. 천천히 해요.”원진우가 오히려 웃으며 윤혜인을 다독였다. 윤혜인은 손에 칼만 있었다면 앞에 앉아 있는 이 남자를 죽이고 싶었지만 그런 기회가 주어지지 않을 거라는 걸 알고 있었다. 아니, 칼이 있다고 해도 절대 이 남자를 이길 수는 없을 것이다. 경계가 삼엄한 배씨 정원에서 윤혜인을 납치했다는 건 실력이 만만치 않다는 말이었다. 윤혜인은 속으로 원망해도 흥분해도 쓸데없다고 자기 자신을 타일렀다. 이런 남자를 상대하려면 최대한 차분함을 유지하며 기회를 찾아야 했다. 윤혜인은 주먹을 꽉 움켜쥐는 것으로 최대한 차분해지려 애썼다.“왜 나를 죽이려는 거예요?”윤혜인이 물었다. 이 문제가 약간은 바보 같아 보일 수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원진우가 윤혜인을 죽이고 싶어 하는 이유라면 아마도 윤혜인이 윤아름의 아이여서일 것이다. 그리고 윤혜인이 관찰한 데 의하면 원진우는 총명한 사람을 싫어했다. 그럴 바에는 차라리 멍청한 척, 무서운 척하며 상대의 경계심을 푸는 게 좋을 것 같았다. 사실 윤혜인도 원진우가 어떻게 윤혜인이 어릴 때 찾아온 건지 알고 싶었다.원진우는 순진해 보이는 윤혜인의 얼굴을 보며 온화하게 웃었다.“내가 사랑하는 사람에게 오점이 생기는 걸 두고 볼 수는 없죠. 윤혜인 씨의 존재가 딱 그 오점이거든요.”“...”윤혜인은 할 말을 잃었다. 원진우는 미친 게 틀림없었다. 윤혜인이 입술을 앙다물더니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내가 어릴 때는 어떻게 찾아온 거예요?”“그때는 우연히 마주친 거예요.”원진우가 웃으며 말했다.“양아버지가 혜인 씨를 그렇게 보호할 줄은 몰랐는데. 명이 질기네요.”원진우가 잠깐 뜸을 들이더니 웃음이 점점 음침해졌다.“춥디추운 그날 밤에도 죽지 않고 살았고, 쓰레기 봉지에 담아놔도 안 죽고 살아있으니...”윤혜인이 화들짝 놀라 눈을 부릅떴다.“당신이었어요...?”저 정도면 답을 준 거나 마
이에 양아버지는 남자가 어린 윤혜인을 노린다는 걸 확신했다. 그 시절 화려한 옷을 입고 비싼 차를 끌고 다니는 남자를 유괴범이라 외친다면 믿을 사람도 없을뿐더러 성가신 일에 휘말릴 수도 있었다. 작은 동네에 사는 사람들은 돈이 많은 사람이라면 이런 짓을 절대 하지 않을 거라는 고정관념이 있었다. 그러니 이 남자도 대담하게 이런 일을 벌이고 있는 것이다.양아버지는 남자가 느긋하게 두 사람을 향해 걸어오자 얼른 어린 윤혜인을 안고 앞으로 뛰기 시작했다. 어린 윤혜인은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 길이 없었기에 케이크가 바닥에 떨어지자 큰 소리로 울기 시작했다.“아빠, 케이크... 케이크...”아이의 눈에 케이크는 그 무엇으로도 대체할 수 없는 유혹이었다. 어린 윤혜인이 눈시울을 붉히며 망가진 케이크를 뚫어져라 쳐다보더니 양아버지의 품에서 벗어나려 하자 양아버지가 숨을 헐떡이며 다독였다.“착하지. 아빠가 다시 사줄게.”어린 윤혜인은 너무 속상해 양아버지의 몸에 엎드린 채 양아버지의 등 뒤로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거리를 내다봤다. 어린 윤혜인은 양아버지가 왜 갑자기 이렇게 뛰는지 알 수 없었지만 양아버지의 당황한 모습을 보며 이내 얌전하게 양아버지의 목을 감싸더니 어깨에 기대어 북받치는 서러움을 꾹꾹 눌렀다. 어린 윤혜인은 나이가 어렸기에 양아버지처럼 곧 들이닥칠 위험을 감지하지는 못했다. 차갑고 끈적한 구덩이에 빠져있는 어린 윤혜인은 빨간 벨벳 슈트를 입은 남자가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걸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윤혜인은 너무 무서워 눈을 부릅뜬 채 소리를 지르고 싶었지만 두려움과 울분이 목에 걸려 아무 소리도 나오지 않았다. 다행히 남자는 5미터쯤 떨어진 곳에 멈추더니 형태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뭉개진 다리를 들더니 양아버지의 얼굴에 던져버렸다.“허허.”남자가 음침하게 웃더니 제 딴에는 재밌다고 생각하는 말을 내뱉었다.“그러게 누가 그렇게 빨리 달리래? 그러니까 다리까지 나가떨어지는 거 아니야.”남자는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봤다. 먹구름이 밀려오
칠흑 같은 밤과 뼈저린 추위, 그리고 아까 맞은 얼음장처럼 차가운 비까지, 모든 상황이 똑같이 맞아떨어졌다. 양아버지가 어린 윤혜인을 안고 끝이 보이지 않는 길에서 달리다가 바닥에 철퍼덕 넘어졌다. 작고 연약한 어린 윤혜인은 포물선을 그리다 옆에 있던 구덩이에 빠지고 말았다. 어린 윤혜인의 몸과 얼굴은 흙이 잔뜩 묻었고 무성한 갈대에 가려져 시커먼 진흙과 한 몸이 되고 말았다. 어린 윤혜인이 겨우 몸을 일으켜 양아버지에게 도움을 청하려는데 양아버지가 어린 윤혜인을 향해 힘껏 고개를 저었다. 넘어져서 몸을 다친 양아버지는 몸이 찢어질 듯이 아팠지만 아랑곳하지 않고 어린 윤혜인을 안았던 그 자세 그대로 앞으로 내달리기 시작했다.어린 윤혜인은 그런 양아버지를 이해할 수 없었다. 그녀가 구덩이에 빠져있는 걸 양아버지도 분명히 봤는데 양아버지가 왜 그 자세 그대로 앞으로 내달리는지 말이다. 어린 윤혜인은 그렇게 넋을 놓고 한참 동안 바라봤다. 하지만 이내 빨간 스포츠카가 하늘이 떠나갈 것 같은 엔진소리와 함께 양아버지 뒤를 쫓았다. 앞에서 달리던 양아버지는 그렇게 차에 치여 허공으로 떠올랐다가 쿵 하는 소리와 함께 바닥에 떨어지고 말았다. 어린 윤혜인은 양아버지의 다리가 몸에서 완전히 분리되더니 다른 곳으로 날아가는 걸 목격했다. 심지어 그중 한쪽이 어린 윤혜인 앞에 떨어졌다. 형태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짓뭉개진 다리였다. 바닥에 쓰러진 양아버지의 얼굴도 어린 윤혜인을 향해 있었다. 눈을 부릅뜬 모습이 마치 절대 소리를 내면 안 된다고 경고하는 것 같았다. 어린 윤혜인은 초점을 잃고 퀭한 양아버지의 두 눈을 보며 소리를 지르고 싶었지만 목구멍에 뭐가 걸린 것처럼 정말 아무 소리도 나오지 않았다. 덕분에 어린 윤혜인은 죽을 고비를 넘길 수 있었다.범퍼가 깨진 스포츠카에서 빨간 벨벳 슈틀 입은 남자가 내려왔다. 어린 윤혜인은 얼굴은 매혹적이고 잘생긴 남자가 얼마나 극악무도한 짓을 저지르는지 똑똑히 보았다. 남자는 몸통이 절반 뜯어져 나간 양아버지를 이리저리 돌려보며
하지만 아무리 찾아도 윤혜인의 행방을 찾을 수 없었다. 배남준은 바로 사람을 데리고 원진우를 가둬둔 곳으로 향해 굳게 닫힌 문을 열었지만 안에 누워있는 사람은 원진우를 데리고 옷을 갈아입으러 간 도우미였다. 원진우가 입고 있던 하얀 슈트를 입고 있는 도우미는 이미 숨이 끊어진 지 오래였다.CCTV를 확인한 배남준은 사각지대에서 나온 두 사람이 어딘가 이상하다는 걸 발견했다. ‘원진우’의 걸음걸이가 어딘가 이상했다. 원진우와 도우미는 체격이 달랐다. 이미 숨이 끊어진 도우미의 신발을 벗겨보니 안에서 진흙이 가득 나왔다. 다시 영상을 확인해 보니 뒤에서 걸어가는 도우미는 몸을 잔뜩 움츠리고 있었고 얼굴이 잘 보이지 않았다. 사실 그때 이미 도우미가 바뀌었으니 가둔 사람은 원진우가 아닌 도우미였다. 도우미의 시신 상태를 보면 아마 원진우가 준 독을 먹고 문을 닫자마자 바로 독이 온몸으로 퍼져 숨을 끊은 것 같았다.이준혁은 영상에서 원진우가 입은 옷을 관찰했다. 전에 조사한 것과 다른 착장이었다. 이준혁이 조사한 데 의하면 원진우는 계절을 막론하고 구두를 신는다고 나왔지만 오늘 신은 건 긴 부츠였다. 이준혁은 바로 원진우가 처음부터 모든 걸 알고 있었다는 사실을 눈치챘다. 그렇다면 곽경천도 위험을 피치는 못할 것이다. 이를 깨달은 순간 이준혁은 곽경천에게 전화를 걸었다.현재 북안도를 떠날 수 있는 구멍은 다 막힌 상태였다. 이준혁이 미리 상부에 연락해 모든 루트를 봉쇄하고 원진우를 수배했다. 이준혁은 원진우가 힘들게 윤혜인을 납치해 갔으니 절대 죽이지는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필요 없는 사람은 바로 죽이는 게 원진우 스타일이지만 윤혜인을 데려갔다는 건 쓸모가 있다는 말이었다. 구체적으로 어떤 쓸모일지는 윤혜인도 알 수 없었다.원진우의 별장으로 향하는 길에 이준혁은 굉음을 듣게 되었다. 원진우의 별장이 있는 방향에서 하늘을 찌를 듯한 연기가 솟아 올라오더니 버섯 모양의 구름을 만들었다.화들짝 놀란 배남준이 체면을 차릴 겨를 없이 큰 소리로 말했다.“경천아.”
곽경천은 갑자기 손으로 내밀 엄두가 나지 않았다. 오랫동안 어머니의 실종은 마음에 박힌 가시와도 같았다. 비록 윤아름이 친엄마가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고 짧은 만남이었지만 윤아름에게서 받은 사랑은 적지 않았다. 윤아름은 곽경천을 친자처럼 아끼며 보살펴줬다. 그때부터 곽경천은 앞으로 엄마와 동생을 잘 보호해야겠다고 다짐했지만 크면서 하나도 지키지 못했다. 윤혜인도 옆에 있고 어머니와도 곧 만날 수 있다는 생각에 심장이 터질 것 같았다. 그래도 꾹 참고 손을 뻗는데 급박한 전화 소리가 울렸다. 곽경천이 들고 온 건 위성 전화라 배남준만 알고 있었다. 곽경천은 전화를 받으면서도 여자의 머리만 뚫어져라 쳐다봤다.“여보세요?”“30초, 30초밖에 안 남았어요. 얼른 나와요.”수화기 너머로 들린 건 배남준의 목소리가 아니라 이준혁이었다. 이준혁이 다급한 목소리로 말했다.“형님, 그 지하실에 폭탄이 가득 설치되어 있어요. 얼른 사람들 데리고 나와요.”곽경천이 넋을 놓고 있는데 이준혁이 급박하게 말했다.“형님, 함정이에요. 원진우는 이미 도망갔어요. 처음부터 형님이 세운 계획을 알고 있었더라고요. 지금 당장 나와요.”곽경천은 이준혁이 장난으로 하는 말이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포기하기는 싫었다.“폭탄이 설치되어 있으니까 얼른 나가요. 얼른.”같이 들어온 사람들이 서로 눈치를 보기 시작했다. 다들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지만 그래도 곽경천이 같이 떠나길 기다렸다.“먼저 나가요. 명령이에요. 나도 곧 따라 나갈게요.”곽경천이 이렇게 말했다. 팀원들이 어쩔 수 없이 명령에 따라 밖으로 나가고 곽경천이 손을 내밀어 ‘여자’의 어깨를 잡고 돌렸다.데굴데굴.여자의 머리가 곽경천의 발치로 굴러떨어졌다. 깜짝 놀란 곽경천은 순간 목구멍에서 단내가 느껴졌다.‘설... 설마 엄마?’한 번 더 자세히 보다 보니 이상한 점을 발견했다. 죽은 지 꽤 오래된 시신인지 목 부분에 부패가 시작되었지만 얼굴은 아직 보존이 잘 되어 있었다. 북안도의 날씨가 유독 추웠기에
원진우를 기다리고 있는 건 한번 들어가면 굳게 닫히는 문이었다. 이게 곽경천이 세운 2번째 방안이었다. 첫 번째 방안인 술이 실패하면 원진우를 무력으로 제압하기 어려운 데다가 무슨 꿍꿍이가 있는지 모르기에 일단은 특정한 방으로 유인하는 게 제일 좋은 방법이었다. 윤아름을 차질 없이 구해내면서 다른 사상자를 내지 않는 제일 좋은 방법은 바로 원진우를 안에 가둬놓는 것이었다.윤혜인은 원진우가 사라진 방향을 보며 마음이 불안해져 다른 사람이 와서 술을 권하는 것도 보지 못했다. 배남준은 현장에 원진우가 보낸 사람이 있을 수도 있다는 생각에 얼른 윤혜인에게 귀띔했다. 잘못하면 원진우가 이상한 낌새를 눈치채고 경계하면 계획이 틀어질 수도 있다.그렇게 10분쯤 지났을까, 윤혜인의 이어폰에서 비서 도지훈의 목소리가 들렸다.“누나, 원진우 안에 가뒀어요.”윤혜인은 그제야 길게 한숨을 내쉬며 긴장을 풀었다. 악당을 가뒀으니 곽경천도 일단 한시름 놓고 윤아름을 구해낼 일만 남았다. 윤혜인이 배남준을 향해 고개를 끄덕이자 배남준은 바로 무슨 뜻인지 알아채고는 다른 사람에게 윤혜인이 몸이 좋지 않아 먼저 일어난다고 하고는 현장을 빠져나갔다. 잠깐 얼굴을 비췄던 아이들은 너무 칭얼대서 다시 데리고 들어갔다.사실 두 아이는 곽경천이 주문 제작한 인형이었다. 실제와 다를 것 없이 잘 만들기도 했고 미리 녹음한 아이의 녹음 소리를 안에 넣어뒀다. 곽경천은 처음에 밖에서 다른 아이 둘을 찾아 대체하는 게 어떻겠냐고 했지만 윤혜인이 거절했다. 엄마가 되고 나서 아이가 곧 엄마에겐 목숨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 이심전심으로 자기 아이가 다치는 게 싫다면 다른 사람의 아이를 위험에 빠트리는 것도 하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다행히 오늘 날씨가 추워 아이는 인큐베이터에 누워 있었기에 멀리서 볼 수밖에 없었고 칭얼대는 소리로 퍽 리얼해 사람들의 눈을 속일 수 있었다.윤혜인은 방으로 돌아와 초조하게 곽경천의 소식을 기다렸다. 마음이 불안해서 그런지 가만히 앉아 있을 수가 없어 방안을 계속
윤혜인은 손에 들고 있던 잔을 들어 원진우를 향해 가볍게 흔들며 말했다.“삼촌, 제가 존경하는 마음을 담아 한 잔 먼저 마시겠습니다.”그러더니 금세 잔을 비웠다.그녀의 심장이 쿵쾅거리기 시작했다. 잔에 들어 있던 술에는 몇 시간 동안 상대를 잠들게 하는 특수 성분이 들어 있었다.그러나 윤혜인은 미리 해독제를 복용해둔 상태였고 원진우의 경계를 풀게 하려고 같은 술을 마신 것처럼 보이게 했다.원진우 같은 교활한 상대에게는 대화나 교섭보다는 이런 방법이 가장 안전했기 때문이다.그러나 윤혜인이 잔을 비워도 원진우는 여전히 미동조차 없이 술잔을 들지 않았다.초조해진 윤혜인은 도우미를 다시 불러 그의 잔을 채우게 했다.“앞으로도 저 잘 봐주셨으면 하니까 또 한잔 올리겠습니다.”한국인 사이에서 ‘두 잔’은 최고의 예우를 의미하기 때문에 원진우도 어른으로서 이를 거절할 수는 없었다.만약 거절한다면 그의 인품에 오점이 생길 수 있었기 때문이다.마침내 원진우는 천천히 잔을 들고 그녀를 바라보며 빙긋 웃었다.그러나 눈은 웃고 있지 않았다.잔이 입술에 가까워지려는 순간, 그는 갑자기 잔을 내려놓으며 말했다.“아, 깜빡했군. 오기 전에 집에서 의사에게 받은 약을 먹었는데 술을 마시면 안 된다고 하더라고요. 세 시간 동안은 물도 마실 수 없다고 했어요.”그는 이렇게 말하고는 잔을 테이블에 내려놓았다.윤혜인은 분노로 속이 끓어올랐지만 원진우가 댄 이유가 합리적이었기에 반박할 수 없었다. 첫 번째 계획은 명백히 실패한 셈이었다.곧 원진우가 자리를 뜨려 하자 윤혜인은 재빨리 다음 계획으로 전환했다.원진우의 움직임을 막기 위해 그녀는 손을 들어 그를 제지하며 말했다.“들은 바에 의하면 해외 무역에 아주 조예가 깊으시다고 하던데 저희 집도 국제 해운업에 종사하고 있어서 몇 가지 여쭤보고 싶은 게 있어요. 시간 괜찮으신가요?”그러자 원진우는 잠시 멈춰서서 따뜻하게 미소 지으며 말했다.“물어봐요.”이윽고 윤혜인은 몇 가지 질문을 던졌는데 모두 해외 무역의 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