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혜인은 고개를 끄덕이었다.“걱정하지 마세요. 제가 잘 가르칠게요.”“공부뿐만 아니라 인성까지 좀 신경 써주세요.”“네. 알겠어요. 지난번에 외할머니 일은 아직 감사드리지 못했는데. 제가 하진이를 열심히 가르쳐서 보답하겠어요.”신호등에 걸리자 차는 다시 멈춰 섰다.이신우는 고개를 돌려 그녀를 뚫어져라 보다가 웃으면서 말했다.“저한테 그렇게 예의를 차릴 필요는 없어요. 그러시면 오히려 멀게 느껴져요.”윤혜인은 그래도 진지한 표정으로 인사를 했다.“아니에요. 병원의 일은 정말 고마웠어요. 항상 기억하고 있죠.”이신우는 그녀에게 감사의 인사를 받으려고 한 게 아니었기에 그는 화제를 돌렸다.“게다가 저는 지금 혜인 씨의 작은 삼촌이 아니니 편하게 말을 놓으셔도 돼요.”“네?”윤혜인은 그가 그런 걸 신경 쓸 줄은 몰랐다.하지만 다시 생각해 보니 너무 예의 바르게 대하면 마치 늙은 사람과 대화하는 느낌이 들었다.이신우는 그녀를 힐끗 쳐다보더니 말했다.“설마 혜인 씨가 준혁이와...”이준혁의 얘기가 나오자 윤혜인은 어깨를 들썩이며 다급하게 말했다.“아니에요. 전 준혁 씨와 아무런 관계도 없어요.”그녀의 모습을 본 이신우는 대략 짐작이 갔다. 분명히 아직 그를 마음에 두고 있는 것 같았다.그는 담담하게 대답했다.“그런 뜻이 아니에요.”그 후로 두 사람은 내내 말을 하지 않았다.윤혜인은 창밖의 별을 바라보았다. 달빛에 반쯤 비친 그녀의 얼굴은 더 하얗고 젤리처럼 부드러웠고 아름다웠다.이신우는 그녀의 옆모습을 바라보았다. 정말 그림처럼 아름다웠다.그녀는 그 사람과 너무 닮았다.그는 내색을 내지 않고 천천히 시선을 돌렸다.목적지에 도착하자 윤혜인은 차에서 내려 인사했다.원래 가는 길이 같은 방향이었기에 그녀도 큰 부담이 없었다.제자리에서 기다렸다가 이신우가 아직 가지 않자 그녀도 그가 바라보는 방향을 따라 앞을 보았다.그러자 그녀는 보자마자 멍해졌다.검은색의 마이바흐가 아파트 단지 길목에 마치 잠복해 있는 맹수처럼 조용히 멈춰
다음 순간 그는 몸을 굽혀 그녀를 뒷좌석에 앉혔고 차 문을 닫을 겨를도 없이 허리를 굽혀 그녀의 턱을 받들고 입술에 키스했다.윤혜인은 손을 뻗어 그의 셔츠를 잡아당겼다. 그러자 셔츠 단추가 하나 터졌는데도 그는 전혀 개의치 않았다. 오히려 그녀가 화가 나서 입을 벌릴 때 그는 그녀의 혀끝을 물고 온몸이 짜릿하게 느껴질 정도로 힘껏 빨아들였다.마침내 그는 만족스러운 듯 손을 놓았고 윤혜인은 화가 나서 손을 치켜들었지만, 그는 그녀의 손을 잡고 그윽한 눈빛으로 바라보았다.“다시 내 여자가 되어줄래?”그의 말을 들은 그녀는 너무 어이가 없고 화가 났다.그는 마치 그녀의 약점이 어디에 있는지 알고 매번 주도권을 차지했다.그녀는 분명히 화가 났지만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다. 얽힐 대로 얽힌 지금 상황이 싫었다.그녀는 이준혁이 빛과 같다고 생각했다.예전에 그녀는 그에게 다가가 빛을 안은 듯 그를 안았다.하지만 그 빛은 그녀에게 무자비한 상처를 주었다.지금 그녀는 무의식적으로 그와 얽히기 싫어서 피하려고 했다. 아직도 그와 엮인다면 또 어떤 희망이 생겨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그런 희망 때문에 또 한 번 상처를 받을 것을 생각하니 질식할 것 같았다.아무도 그녀가 왜 피하고 있고 무엇을 두려워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그녀는 거의 살려달라고 비는 말투로 말했다.“이준혁 씨, 도대체 어떻게 해야 저를 놓아줄 수 있어요? 저랑 자고 싶어요? 자고 나면 저를 바로 놓아줄 수 있는 건가요?”그러자 이준혁의 눈빛은 차갑게 변했다.“무슨 뜻이야?”“제가 무슨 뜻이겠어요? 지금 저한테 매달리는 게 저랑 자고 싶어 그러시는 거잖아요.”윤혜인은 이슬이 맺힌 눈으로 똑바로 그를 쳐다보았다.“뭐라고?”“준혁 씨와 자고 나면 저를 더 이상 괴롭히지 않을 수 있어요? 그렇다면 제가...”이준혁은 경멸에 찬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공짜로 나랑 자주는 거야?”그의 말에는 모욕과 굴욕이 가득했다.윤혜인은 주먹을 쥐고 몸을 떨며 괴로워했다. 자신의 미
윤혜인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등 뒤에서 느껴지는 차갑고 무서운 눈길은 마치 그녀의 가슴을 가르고 마음속을 훤히 들여다보는 것 같았다. 그녀는 몸이 떨려왔다.한구운은 그녀의 손을 잡고 남자의 흉악한 눈빛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고개만 끄덕이고는 그녀를 데리고 떠났다.정신을 차려보니 윤혜인은 어느새 집 앞에 도착해 있었다.한구운은 꽃다발을 그녀에게 건네주며 말했다.“일찍 들어가 쉬어. 무슨 일 있으면 전화해.”한구운은 몇 마디를 더 했지만 윤혜인의 귀에는 그의 말이 들어오지 않았다. 그는 대충 고개를 끄덕이는 그녀를 보며 자리를 떠났다.그녀는 언제 한구운이 건넨 꽃다발을 받았는지도 생각나지 않았다. 오랫동안 그녀는 이준혁 이외의 다른 사람들과 다정하게 지내본 적이 없었다.이준혁 앞에서 다른 사람과 손을 잡는 것도 죄책감이 들었다.그러나 그녀는 오늘 첫걸음을 내디뎠다. 이준혁의 눈빛이 두렵긴 했지만 그것 이외에는 그렇게 어렵지 않은 것 같았다.집안에 들어간 윤혜인은 꽃다발을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몰랐다.한구운이 왜 그녀에게 꽃다발을 줬을까?큰 꽃다발이 정말 예뻤다. 꽃을 싫어하는 여자는 없다.그녀는 꽃다발의 향기로움은 맡을 수 없었지만 꽃의 아름다움은 좋았다. 그녀는 꽃을 거실 탁자 위에 올려놨다.이때, 소원에게서 문자 한 통이 날라왔다.[나, 오늘 너희 집에 가서 잘래.]윤혜인은 알겠다고 문자를 보낸 뒤 샤워하러 갔다.샤워를 마친 그녀가 욕실에서 머리를 반쯤 말렸을 때 초인종이 울렸다.그녀는 아무런 경계도 없이 문을 열며 말했다.“비밀번호 까먹었어?”하지만 밖에 있는 사람은 소원이 아니라 이준혁이었다.윤혜인은 머리가 하얘졌다. 이내 정신이 돌아온 그녀는 손을 뻗어 문을 닫으려 했다.이준혁은 느긋하게 발을 뻗어 닫기는 문을 막으며 날카로운 눈동자로 그녀를 지긋이 바라봤다.“모두가 다 알길 바라는 거야?”그의 말에 윤혜인은 더 이상 그를 막지 않았다.어차피 이준혁에게는 들어올 방법이 있었다. 그는 문을 닫고 집안으로 들어왔
방에 들어가기 전에 그는 멈춰서서 차가운 눈빛으로 탁자 위에 놓여있는 흰 장미꽃을 바라봤다.“꽃 좋아해?”그는 다른 사람에게 꽃을 준 기억이 한 번도 없었다.윤혜인은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낮은 소리로 중얼거렸다.“누가 주냐에 따라서 달라요.”말을 마친 그녀는 자신의 혀를 깨물고 싶었다.아니나 다를까 이준혁은 침울한 표정을 지었다.사실 그녀는 그를 자극할 생각이 없었다. 대학생 때 그녀를 스토킹하던 한 남자가 그녀가 모르는 사이에 그녀의 책가방과 교과서에 붉은 장미를 넣은 적이 있었다.이 일로 그녀는 한동안 정말 무서움에 떨며 지냈었고 장미만 보면 나쁜 생각이 들곤 했었다. 그래서 주는 사람에 따라서 다르다고 말한 것이었지 한구운이 준 장미라서 좋아한다는 뜻이 아니었다.그러나 어떤 사람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이준혁은 방에 들어가지 않고 그녀를 탁자 위의 장미 위에 눕혔다.장미꽃 위의 이슬 때문에 등이 축축해진 탓에 윤혜인은 몸을 파르르 떨며 이준혁의 셔츠를 꽉 잡았다. 등 뒤에 눌린 장미 때문에 온전히 힘을 쓸 수가 없었다. 많은 곳 중에서 왜 여기인지 그녀는 이해할 수 없었다.“여기는 싫어요.”그녀는 긴장했을 때 눈동자가 촉촉해지곤 했다. 어쩔 수 없이 꽃잎 위에 누워 있는 그녀를 보며 덮치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이준혁은 눈을 내리깔고 그녀의 말에 거절하며 다가갔다.“여기서 하자.”딱딱한 포장지가 깔리며 소리가 나자 이준혁은 그녀의 등 뒤로 손을 뻗어 장미의 포장을 풀었다.포장이 풀리며 장미들이 여기저기 흩어졌다. 어떤 꽃들은 탁자 위에 있었고 어떤 꽃들은 탁자 양쪽에 떨어졌다.윤혜인은 탁자가 두 사람의 무게를 견딜 수 있을지 몰라 긴장된 마음이 튀어나올 것만 같았다.그녀는 저항하며 그를 밀어냈다.“난 여기가 싫어요. 하고 싶지 않아요...”이준혁은 그녀를 흘겨보며 말했다.“그럼 넌 내가 계속 이러기를 바라는 거야?”그도 망설이지 않고 일어서며 그만하려 했다.만약 이곳이 아닌 다른 곳이었다면 윤혜인도 그의
그의 말이 사실이 아니라면 미친개한테 물렸다고 생각하면 되고 만약 사실이라면 남은 인생을 평화롭게 보낼 수 있었다.이렇게 비교해 보니 망설임이 사라졌다.그녀는 입술을 달싹이며 자신의 결정을 말했다.“앞으로 나를 속이지 않는다는 준혁 씨의 말을 믿어볼게요.”그녀는 잔머리를 굴려 예전에 그가 했던 말을 내뱉으며 믿어보겠다고 했다.그가 번복하려 할 때 이 말을 떠올리면 예전에 자신이 그녀에게 했던 약속이 생각날 것이다.윤혜인의 착각인지 아닌지 그녀는 이준혁이 자신의 말을 듣고 기뻐하지 않는다는 걸 느꼈다. 심지어 화도 난 것 같았다.그녀의 느낌은 사실이었다.키스하기 전 이준혁이 그녀에게 말했다.“이젠 네가 후회해도 소용없어.”그의 촉촉한 입술이 강압적으로 그녀의 입술에 키스를 퍼부으며 그녀의 매끄러운 작은 혀를 탐했다.그녀를 부술 것 같은 힘이었다.윤혜인은 그의 키스에 혀가 마비가 된 것 같았고 손가락도 떨려왔다.몸 아래 있던 장미꽃에서 매혹적인 향기를 머금은 즙이 흘러나와 탁자를 따라 땅바닥에 떨어졌다.뜨거운 열기가 그녀를 엄습해왔고 이준혁도 고의로 그녀를 괴롭혔다.그의 키스는 입술에서부터 아래로 서서히 내려갔다.정교한 턱을 지나 예쁜 쇄골로 넘어갔고 마지막으로 그녀의 부드러운 목덜미를 가볍게 빨아들이며 키스를 퍼부었다.윤혜인은 떨림이 멈추지 않았다. 조금 후회가 됐지만 그녀는 지금 번복할 수 없었다. 앞으로를 생각하면 참을 수 있었다.이때 문소리가 들려왔고 윤혜인은 깜짝 놀라며 긴장했다.이준혁은 밖에서 나는 소리가 아닌 윤혜인의 행동에 미간을 찌푸렸다. 윤혜인은 그제야 소원이 오늘 저녁에 와서 자겠다고 한 사실이 생각났다.그들은 거실의 탁자에 있는 상태였기에 지금 피하려고 해도 이미 늦은 상태였다.윤혜인은 심장이 세게 뛰었다. 그녀는 반항하는 것도 잊고 있었다.“띠띠... 잘못된 비밀번호입니다.”기계음 소리에 그녀는 잠시 마음이 놓였다. 곧이어 비밀번호를 누르는 소리가 들려왔다.“띠띠... 잘못된 비밀번호입니다.”슬
문이 열리는 동시에 불도 꺼졌다.술에 취한 소원이 습관적으로 불을 켜려다 원래 켜져 있던 불을 끈 것이었다.실내는 어둠에 빠졌다. 이준혁은 일어나지 않고 차가운 손가락으로 그녀의 턱을 잡고 그녀의 입술에 키스를 퍼부었다.그의 키스에 정신이 혼미해진 윤혜인은 미칠 지경이었다.소원이 비틀거리며 소리를 질렀다.“혜인아, 혜인아. 우리 혜인이. 뭐야, 고래 뱃속에 들어왔나 왜 이렇게 어두워? 흑흑... 무서워. 혜인아 어디 있어?”소원이 눈앞까지 다가온 것을 본 윤혜인은 어쩔 수 없이 그의 혀를 힘껏 깨물었다. 그가 아파하는 틈을 타 그를 밀어낸 그녀는 탁자에서 뛰어 내려왔고 마침 다리가 풀렸던 소원에게 안기게 됐다.그녀는 게슴츠레한 눈으로 땅바닥에 널브러진 장미꽃을 보면서 꼬인 혀로 말했다.“올해 눈이 이렇게 일찍 왔어? 혜인아, 우리 눈사람 만들자... 남자들은 믿을 놈이 없어. 기다려, 기다려봐. 내가 너에게 남자친구를 소개해 줄게. 너 어떤 스타일 좋아해? 어린애? 아니면 나이가 좀 있는 아저씨? 비행기 기장?”소원은 술을 많이 마신 탓인지 말실수를 많이 했다.윤혜인은 그녀의 입을 막았다.“그만해.”“읍... 말할래... 사실 선배도 괜찮은 사람이야. 너희 가짜...”이준혁이 사실을 알게 될까 봐 두려웠던 윤혜인은 그녀를 끌고 욕실로 들어가서 쾅 하고 문을 닫았다.‘어떻게 이준혁을 속였는데. 더 이상 문제가 생기면 안 돼.’소원은 술을 많이 마셨는지 얼굴이 새빨갰다.윤혜인은 그녀의 옷을 벗긴 뒤 물을 받아놓은 욕조에 그녀를 밀어 넣었다. 그제야 소원의 몸 곳곳이 눈에 들어왔다.목부터 발가락까지 곳곳에 빨린 것 같은 검붉은 자국이 있었고 어떤 곳은 물렸는지 껍질이 벗겨져 딱지가 앉아 있었다.윤혜인은 그녀의 등과 엉덩이도 자세히 봤다. 마치 무엇에 맞은 것 같은 은은한 붉은 흔적들이 보였다.그녀도 미숙한 소녀가 아니었기에 이런 흔적들의 왜 생긴 것인지 알 것 같았다.이준혁도 예전에 그녀를 이렇게 괴롭혔던 적이 있었지만 이 정도는
소원의 목소리는 아주 작았다. 얼마나 작았냐면 마치 유리처럼 다치기만 해도 부서질 것만 같았다.“혜인이가 날 우습게 볼까 봐 무서워.”윤혜인은 소원을 품에 꼭 안았다. 눈에서는 눈물이 방울방울 흘러내렸다.그녀는 울음을 참으며 말했다.“안 그래. 난 영원히 널 우습게 보지 않을 거야. 소원아, 무슨 일 있으면 반드시 나에게 알려줘야 해. 내가 네 뒤에서 든든한 버팀목이 돼줄게.”소원은 비록 술에 취했지만 무언갈 느낀 듯이 그녀를 안고 엉엉 울었다.목욕하면서 둘다 흠뻑 젖었다.윤혜인은 깨끗이 닦은 후 소원을 끌고 나와 소원에게 잠옷을 입히고 그녀를 부축해 방으로 갔다.소원은 우느라 지쳤는지 베개를 안고 곤히 잠들었다.윤혜인도 샤워를 시키면서 힘이 빠진 상태라 움직이고 싶지 않아 방으로 돌아가 잠을 자려 했다.문을 열고 들어가니 베란다 난간에 비스듬히 기댄 채 담배를 피우고 있는 이준혁이 보였다.그녀는 멈칫했다.이준혁은 고개를 돌려 그녀를 힐끗 쳐다봤다. 남의 집이라는 느낌이 들지 않을 정도로 그는 느릿하게 담배를 피웠다.그는 몸에 샤워 타올 한 장을 대충 걸치고 있었는데 그 모습이 이상하게 보이지 않고 멋있고 섹시해보였다.그의 얼굴은 몸매와 잘 어울렸다. 아무것도 입지 않아도 멋있었다.윤혜인은 그가 아무것도 입지 않은 모습을 생각하고 얼굴이 빨개졌다.지금 그의 몸에 걸친 수건 한 장도 없는 것과 같았다.그녀는 헐렁하게 허리에 걸친 샤워 수건을 달려가서 꽉 조여주고 싶었다.혹시라도 소원이 들을까 봐 그녀는 들어간 뒤 방문을 닫았다.“아직도 안 갔어요?”“시간이 아직 안됐잖아.”윤혜인은 눈을 깜박거리며 물었다.“무슨 시간이요?”이준혁은 돌아서서 그녀를 향해 천천히 다가갔다. 그는 인내심을 가지고 설명했다.“내가 오늘 밤이 지나면 끝내겠다고 말했잖아. 아직 시간 남았어.”그는 침대 옆에 놓인 알람시계를 보며 말했다.“네가 샤워를 하는 데 35분이나 낭비했어. 지금 10시야.”윤혜인은 그의 말이 무슨 뜻인지 알아들을 수가
‘멈추라고?’이건 그녀가 번복한다는 뜻이었기에 오늘 발생했던 모든 일이 의미를 잃게 된다.윤혜인은 괴로움을 참으며 입을 열었다.“한 시간 반 남았어요.”이준혁은 자신을 쳐다보지 않는 윤혜인의 고개를 잡고 돌리며 언짢은 목소리로 말했다.“확실해?”윤혜인은 입술을 달싹거렸다. 눈물이 흘러나왔지만 물러서지 않았다.이준혁은 빨개진 그녀의 볼을 쳐다보며 애매하게 웃었다.그 웃음은 결코 즐거워서 웃는 웃음이 아녔다.윤혜인은 좋지 않은 느낌에 바짝 긴장했다. 그녀의 허리에 올려놓은 손도 차가워지고 있었다.이준혁은 웃음을 멈추고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그래. 네가 원하는 대로 해줄게.”곧이어 그는 두 손으로 그녀를 세게 눌렀고 윤혜인은 소리도 지르지 못하고 한 손으로 난간을 꽉 잡았다.이준혁은 반드시 말한 대로 하는 사람이었다. 그는 정말 마지막 1분까지 조금도 낭비하지 않았다.이준혁은 그녀를 안아 욕조로 데려갔다. 그녀도 다른 것을 상관할 새가 없었다. 씻고 방으로 돌아와 보니 이준혁은 보이지 않았다.그는 약속을 지킨 것 같았다.그녀도 피곤한 나머지 더는 생각할 기력이 없어 침대에 엎드려 바로 잠이 들었다.윤혜인은 점심때가 되어서야 어렴풋이 방문을 두드리는 소리를 들었다. 방문을 여니 소원이 그녀를 와락 안았다.“혜인아, 배고파.”윤혜인은 그녀를 앉히며 말했다.“잠깐만, 내가 맛있는 거 해줄게.”소원을 자리에 앉힌 뒤 윤혜인은 일어나서 창문을 열었다. 뜨거웠던 어젯밤의 흔적이 은은하게 남아 있었다. 그녀는 소원이 눈치챌까 봐 두려워 방안을 다시 한번 둘러봤다.어젯밤에 이준혁이 베란다에서부터 침대까지 방을 어지럽혀 놓은 줄 알았는데 지금 보니 아주 깨끗했다. 심지어 쓰레기통도 깨끗하게 비어있었다.두 시간 안에 두 번의 관계가 있었지만 이준혁은 만족을 못 했을 것이다.소원이 옆방에서 자고 있었기에 긴장한 윤혜인은 소리도 내지 못했다.나중에 이준혁이 너무 괴롭힌 탓에 그의 뜻에 따라 소리를 내긴 했었다.다행히 술에 취한 소원이 깊
칠흑 같은 밤과 뼈저린 추위, 그리고 아까 맞은 얼음장처럼 차가운 비까지, 모든 상황이 똑같이 맞아떨어졌다. 양아버지가 어린 윤혜인을 안고 끝이 보이지 않는 길에서 달리다가 바닥에 철퍼덕 넘어졌다. 작고 연약한 어린 윤혜인은 포물선을 그리다 옆에 있던 구덩이에 빠지고 말았다. 어린 윤혜인의 몸과 얼굴은 흙이 잔뜩 묻었고 무성한 갈대에 가려져 시커먼 진흙과 한 몸이 되고 말았다. 어린 윤혜인이 겨우 몸을 일으켜 양아버지에게 도움을 청하려는데 양아버지가 어린 윤혜인을 향해 힘껏 고개를 저었다. 넘어져서 몸을 다친 양아버지는 몸이 찢어질 듯이 아팠지만 아랑곳하지 않고 어린 윤혜인을 안았던 그 자세 그대로 앞으로 내달리기 시작했다.어린 윤혜인은 그런 양아버지를 이해할 수 없었다. 그녀가 구덩이에 빠져있는 걸 양아버지도 분명히 봤는데 양아버지가 왜 그 자세 그대로 앞으로 내달리는지 말이다. 어린 윤혜인은 그렇게 넋을 놓고 한참 동안 바라봤다. 하지만 이내 빨간 스포츠카가 하늘이 떠나갈 것 같은 엔진소리와 함께 양아버지 뒤를 쫓았다. 앞에서 달리던 양아버지는 그렇게 차에 치여 허공으로 떠올랐다가 쿵 하는 소리와 함께 바닥에 떨어지고 말았다. 어린 윤혜인은 양아버지의 다리가 몸에서 완전히 분리되더니 다른 곳으로 날아가는 걸 목격했다. 심지어 그중 한쪽이 어린 윤혜인 앞에 떨어졌다. 형태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짓뭉개진 다리였다. 바닥에 쓰러진 양아버지의 얼굴도 어린 윤혜인을 향해 있었다. 눈을 부릅뜬 모습이 마치 절대 소리를 내면 안 된다고 경고하는 것 같았다. 어린 윤혜인은 초점을 잃고 퀭한 양아버지의 두 눈을 보며 소리를 지르고 싶었지만 목구멍에 뭐가 걸린 것처럼 정말 아무 소리도 나오지 않았다. 덕분에 어린 윤혜인은 죽을 고비를 넘길 수 있었다.범퍼가 깨진 스포츠카에서 빨간 벨벳 슈틀 입은 남자가 내려왔다. 어린 윤혜인은 얼굴은 매혹적이고 잘생긴 남자가 얼마나 극악무도한 짓을 저지르는지 똑똑히 보았다. 남자는 몸통이 절반 뜯어져 나간 양아버지를 이리저리 돌려보며
하지만 아무리 찾아도 윤혜인의 행방을 찾을 수 없었다. 배남준은 바로 사람을 데리고 원진우를 가둬둔 곳으로 향해 굳게 닫힌 문을 열었지만 안에 누워있는 사람은 원진우를 데리고 옷을 갈아입으러 간 도우미였다. 원진우가 입고 있던 하얀 슈트를 입고 있는 도우미는 이미 숨이 끊어진 지 오래였다.CCTV를 확인한 배남준은 사각지대에서 나온 두 사람이 어딘가 이상하다는 걸 발견했다. ‘원진우’의 걸음걸이가 어딘가 이상했다. 원진우와 도우미는 체격이 달랐다. 이미 숨이 끊어진 도우미의 신발을 벗겨보니 안에서 진흙이 가득 나왔다. 다시 영상을 확인해 보니 뒤에서 걸어가는 도우미는 몸을 잔뜩 움츠리고 있었고 얼굴이 잘 보이지 않았다. 사실 그때 이미 도우미가 바뀌었으니 가둔 사람은 원진우가 아닌 도우미였다. 도우미의 시신 상태를 보면 아마 원진우가 준 독을 먹고 문을 닫자마자 바로 독이 온몸으로 퍼져 숨을 끊은 것 같았다.이준혁은 영상에서 원진우가 입은 옷을 관찰했다. 전에 조사한 것과 다른 착장이었다. 이준혁이 조사한 데 의하면 원진우는 계절을 막론하고 구두를 신는다고 나왔지만 오늘 신은 건 긴 부츠였다. 이준혁은 바로 원진우가 처음부터 모든 걸 알고 있었다는 사실을 눈치챘다. 그렇다면 곽경천도 위험을 피치는 못할 것이다. 이를 깨달은 순간 이준혁은 곽경천에게 전화를 걸었다.현재 북안도를 떠날 수 있는 구멍은 다 막힌 상태였다. 이준혁이 미리 상부에 연락해 모든 루트를 봉쇄하고 원진우를 수배했다. 이준혁은 원진우가 힘들게 윤혜인을 납치해 갔으니 절대 죽이지는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필요 없는 사람은 바로 죽이는 게 원진우 스타일이지만 윤혜인을 데려갔다는 건 쓸모가 있다는 말이었다. 구체적으로 어떤 쓸모일지는 윤혜인도 알 수 없었다.원진우의 별장으로 향하는 길에 이준혁은 굉음을 듣게 되었다. 원진우의 별장이 있는 방향에서 하늘을 찌를 듯한 연기가 솟아 올라오더니 버섯 모양의 구름을 만들었다.화들짝 놀란 배남준이 체면을 차릴 겨를 없이 큰 소리로 말했다.“경천아.”
곽경천은 갑자기 손으로 내밀 엄두가 나지 않았다. 오랫동안 어머니의 실종은 마음에 박힌 가시와도 같았다. 비록 윤아름이 친엄마가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고 짧은 만남이었지만 윤아름에게서 받은 사랑은 적지 않았다. 윤아름은 곽경천을 친자처럼 아끼며 보살펴줬다. 그때부터 곽경천은 앞으로 엄마와 동생을 잘 보호해야겠다고 다짐했지만 크면서 하나도 지키지 못했다. 윤혜인도 옆에 있고 어머니와도 곧 만날 수 있다는 생각에 심장이 터질 것 같았다. 그래도 꾹 참고 손을 뻗는데 급박한 전화 소리가 울렸다. 곽경천이 들고 온 건 위성 전화라 배남준만 알고 있었다. 곽경천은 전화를 받으면서도 여자의 머리만 뚫어져라 쳐다봤다.“여보세요?”“30초, 30초밖에 안 남았어요. 얼른 나와요.”수화기 너머로 들린 건 배남준의 목소리가 아니라 이준혁이었다. 이준혁이 다급한 목소리로 말했다.“형님, 그 지하실에 폭탄이 가득 설치되어 있어요. 얼른 사람들 데리고 나와요.”곽경천이 넋을 놓고 있는데 이준혁이 급박하게 말했다.“형님, 함정이에요. 원진우는 이미 도망갔어요. 처음부터 형님이 세운 계획을 알고 있었더라고요. 지금 당장 나와요.”곽경천은 이준혁이 장난으로 하는 말이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포기하기는 싫었다.“폭탄이 설치되어 있으니까 얼른 나가요. 얼른.”같이 들어온 사람들이 서로 눈치를 보기 시작했다. 다들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지만 그래도 곽경천이 같이 떠나길 기다렸다.“먼저 나가요. 명령이에요. 나도 곧 따라 나갈게요.”곽경천이 이렇게 말했다. 팀원들이 어쩔 수 없이 명령에 따라 밖으로 나가고 곽경천이 손을 내밀어 ‘여자’의 어깨를 잡고 돌렸다.데굴데굴.여자의 머리가 곽경천의 발치로 굴러떨어졌다. 깜짝 놀란 곽경천은 순간 목구멍에서 단내가 느껴졌다.‘설... 설마 엄마?’한 번 더 자세히 보다 보니 이상한 점을 발견했다. 죽은 지 꽤 오래된 시신인지 목 부분에 부패가 시작되었지만 얼굴은 아직 보존이 잘 되어 있었다. 북안도의 날씨가 유독 추웠기에
원진우를 기다리고 있는 건 한번 들어가면 굳게 닫히는 문이었다. 이게 곽경천이 세운 2번째 방안이었다. 첫 번째 방안인 술이 실패하면 원진우를 무력으로 제압하기 어려운 데다가 무슨 꿍꿍이가 있는지 모르기에 일단은 특정한 방으로 유인하는 게 제일 좋은 방법이었다. 윤아름을 차질 없이 구해내면서 다른 사상자를 내지 않는 제일 좋은 방법은 바로 원진우를 안에 가둬놓는 것이었다.윤혜인은 원진우가 사라진 방향을 보며 마음이 불안해져 다른 사람이 와서 술을 권하는 것도 보지 못했다. 배남준은 현장에 원진우가 보낸 사람이 있을 수도 있다는 생각에 얼른 윤혜인에게 귀띔했다. 잘못하면 원진우가 이상한 낌새를 눈치채고 경계하면 계획이 틀어질 수도 있다.그렇게 10분쯤 지났을까, 윤혜인의 이어폰에서 비서 도지훈의 목소리가 들렸다.“누나, 원진우 안에 가뒀어요.”윤혜인은 그제야 길게 한숨을 내쉬며 긴장을 풀었다. 악당을 가뒀으니 곽경천도 일단 한시름 놓고 윤아름을 구해낼 일만 남았다. 윤혜인이 배남준을 향해 고개를 끄덕이자 배남준은 바로 무슨 뜻인지 알아채고는 다른 사람에게 윤혜인이 몸이 좋지 않아 먼저 일어난다고 하고는 현장을 빠져나갔다. 잠깐 얼굴을 비췄던 아이들은 너무 칭얼대서 다시 데리고 들어갔다.사실 두 아이는 곽경천이 주문 제작한 인형이었다. 실제와 다를 것 없이 잘 만들기도 했고 미리 녹음한 아이의 녹음 소리를 안에 넣어뒀다. 곽경천은 처음에 밖에서 다른 아이 둘을 찾아 대체하는 게 어떻겠냐고 했지만 윤혜인이 거절했다. 엄마가 되고 나서 아이가 곧 엄마에겐 목숨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 이심전심으로 자기 아이가 다치는 게 싫다면 다른 사람의 아이를 위험에 빠트리는 것도 하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다행히 오늘 날씨가 추워 아이는 인큐베이터에 누워 있었기에 멀리서 볼 수밖에 없었고 칭얼대는 소리로 퍽 리얼해 사람들의 눈을 속일 수 있었다.윤혜인은 방으로 돌아와 초조하게 곽경천의 소식을 기다렸다. 마음이 불안해서 그런지 가만히 앉아 있을 수가 없어 방안을 계속
윤혜인은 손에 들고 있던 잔을 들어 원진우를 향해 가볍게 흔들며 말했다.“삼촌, 제가 존경하는 마음을 담아 한 잔 먼저 마시겠습니다.”그러더니 금세 잔을 비웠다.그녀의 심장이 쿵쾅거리기 시작했다. 잔에 들어 있던 술에는 몇 시간 동안 상대를 잠들게 하는 특수 성분이 들어 있었다.그러나 윤혜인은 미리 해독제를 복용해둔 상태였고 원진우의 경계를 풀게 하려고 같은 술을 마신 것처럼 보이게 했다.원진우 같은 교활한 상대에게는 대화나 교섭보다는 이런 방법이 가장 안전했기 때문이다.그러나 윤혜인이 잔을 비워도 원진우는 여전히 미동조차 없이 술잔을 들지 않았다.초조해진 윤혜인은 도우미를 다시 불러 그의 잔을 채우게 했다.“앞으로도 저 잘 봐주셨으면 하니까 또 한잔 올리겠습니다.”한국인 사이에서 ‘두 잔’은 최고의 예우를 의미하기 때문에 원진우도 어른으로서 이를 거절할 수는 없었다.만약 거절한다면 그의 인품에 오점이 생길 수 있었기 때문이다.마침내 원진우는 천천히 잔을 들고 그녀를 바라보며 빙긋 웃었다.그러나 눈은 웃고 있지 않았다.잔이 입술에 가까워지려는 순간, 그는 갑자기 잔을 내려놓으며 말했다.“아, 깜빡했군. 오기 전에 집에서 의사에게 받은 약을 먹었는데 술을 마시면 안 된다고 하더라고요. 세 시간 동안은 물도 마실 수 없다고 했어요.”그는 이렇게 말하고는 잔을 테이블에 내려놓았다.윤혜인은 분노로 속이 끓어올랐지만 원진우가 댄 이유가 합리적이었기에 반박할 수 없었다. 첫 번째 계획은 명백히 실패한 셈이었다.곧 원진우가 자리를 뜨려 하자 윤혜인은 재빨리 다음 계획으로 전환했다.원진우의 움직임을 막기 위해 그녀는 손을 들어 그를 제지하며 말했다.“들은 바에 의하면 해외 무역에 아주 조예가 깊으시다고 하던데 저희 집도 국제 해운업에 종사하고 있어서 몇 가지 여쭤보고 싶은 게 있어요. 시간 괜찮으신가요?”그러자 원진우는 잠시 멈춰서서 따뜻하게 미소 지으며 말했다.“물어봐요.”이윽고 윤혜인은 몇 가지 질문을 던졌는데 모두 해외 무역의 어
곽경천은 곧 다가올 파티에 계획에 이준혁도 포함시키기로 했다.자신은 원진우의 별장에 인원들과 함께 잡입할 예정이고 파티장에는 배남준 혼자였는데 그에게 온전히 윤혜인을 맡기기가 불안하다고 느꼈기 때문이었다.파티장에서 잠재적인 위험인물인 원진우를 감시하고 윤혜인을 보호하기 위해서라도 추가 인원이 필요하다고 판단했다.그러나 윤혜인은 이준혁이 다리가 좋지 않다는 이유로 반대했다.그가 파티에 등장하면 원진우가 의심할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곽경천의 우려가 틀린 말은 아니었지만 이 계획이 완벽하지 않다는 점은 윤혜인도 잘 알고 있었다.파티장에 있는 사람들과 별장으로 잠입하는 사람 모두 위험이 따르는 임무였다. 게다가 시간이 촉박해 추가 인원을 조정할 여유도 없었다.윤아름의 행방을 찾을 기회가 얼마 남지 않았다.원진우가 모레 회사 양도 계약서에 서명할 예정이었기 때문이다. 그가 떠나게 되면 윤아름의 소식을 알아낼 마지막 기회를 놓치게 된다.이준혁은 이번 파티가 배남준을 돕기 위한 행사라는 곽경천의 설명을 듣고 이를 납득했다.배씨 가문에는 생후 첫 파티 후 배남준이 독립적인 가장이 되어 호적을 옮길 수 있는 전통이 있었다.질투가 나긴 했지만 이준혁은 배남준이 윤혜인을 향한 마음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공정하게 행동해왔다는 점을 존중하고 있었다.배남준은 숨겨진 음모 없이 정정당당하게 경쟁하는 상대였다.다음 날, 드디어 생후 한 달 기념 파티가 열렸다.윤혜인은 밝은 빨간색 원피스에 회색 모피 외투를 입고 고귀하고 아름다운 모습으로 행사에 나타났다.그동안 모습을 드러내지 않던 원진우도 파티장 정문에 나타나 눈길을 끌었다.북안도에서 배씨 가문과 찰스 가문이 보내는 초대장에는 반드시 참석해야 하는 무언의 룰이 있었다.그렇지 않으면 관계를 단절하겠다는 것으로 간주될 수 있었다.오랜만에 모습을 드러낸 원진우는 크림색 벨벳 수트를 입고 문학적이고 온화한 인상으로 나타나 눈길을 사로잡았다.그러나 윤혜인은 그의 겉모습이 실제와 다르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그의
이준혁의 낮고 부드러운 목소리에서 그가 자격지심을 느껴 한다는 것을 깨닫고 윤혜인은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자존심 강하고 남들한테 존경만 받는 사람이 언제부터 저렇게 불안해하는 감정을 품게 됐을까?’그녀는 순간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모르겠었다.하지만 윤혜인에게 역시 억울한 감정이 있었다.이준혁을 기다리다 사무실에서 잠들었고, 깨어나니 주변은 새까맸고 홀로 추위 속에 거의 얼어붙을 뻔했으니 말이다.“왜 날 찾으러 오지 않았어요?”그녀는 작게 말했다.그 어둠과 추위를 떠올릴 때마다 서운함이 다시 피어올랐다.만약 이준혁에게 자신의 마음을 전하려는 의도가 없었다면 윤혜인은 사무실에서 잠들어 문이 잠기는 일도 없었을 것이다.“내 잘못이야.”남자는 말했다.“모두 내 잘못이야. 맹세할게. 앞으로 절대 너를 혼자 두지 않을 거야.”이준혁은 한때 그녀를 놓아주려는 생각을 했었지만 곽경천이 그녀와 거리를 두라고 말하자 그의 가슴은 한순간에 무너져 내리는 듯했다.순간 그는 깨달았다. 자신은 결코 윤혜인을 놓고 싶어 하지 않는다는 것을.윤혜인이 그를 싫어하지 않는다면 불편한 몸일지라도 이준혁은 그녀를 지키겠다고 결심했다.결혼 이야기가 거짓임을 알았을 때, 그는 더 이상 방관자가 되지 않기로 마음먹었다.그녀와 아이들이 이준혁의 세상에서는 가장 소중한 존재였기에 그들의 삶에 함께하고 싶었다.윤혜인의 얼굴은 살짝 붉어졌다.‘언제 이렇게 빨리 마음을 바꾼 거지?’얼마 전까지 차갑기만 했던 이준혁이 이제는 윤혜인이 듣고 싶었던 말을 서슴없이 하고 있었다.하지만 그녀는 그가 자신을 두고 돌아가지 않았던 일에 여전히 화가 나 있었다.약간의 원망을 풀고자 윤혜인은 일부러 장난스럽게 말했다.“날 혼자 두지 않겠다니... 무슨 뜻이에요? 나 유부녀인 거 알잖아요. 설마 남편 자리를 뺏으려고요?”그러자 이준혁은 살짝 미소 지으며 그녀가 아직 진실을 모른다는 걸 알아챘다.하여 윤혜인의 장단에 맞춰주고자 이준혁이 말했다.“상대가 너라면... 기꺼이 감수하지.”
배남준은 아버지가 원진우와 비밀리에 대화하는 것을 엿들었다.대화의 내용은 원진우가 북안도의 회사를 팔고 다시 떠날 준비를 하고 있다는 것이었다.과거에 원진우가 떠날 때마다 그의 행방을 찾는 것은 거의 불가능할 정도로 어려웠다. 심지어 이번에는 원진우가 주의를 기울이고 있는 상황이니 다시 그의 흔적을 찾는 것은 하늘의 별 따기만큼 어려울 것이다.곽경천은 미간을 잔뜩 찌푸린 채 생각에 잠겼다.이번 계획은 절대 실패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만약 이번 기회를 놓치게 된다면 윤아름을 찾을 마지막 희망마저 잃게 될 것이니 말이다.곽경천은 고민스러웠다.‘하필 이런 중요한 시기에 혜인이가 병에 걸리다니... 앞으로 3일 후면 파티가 열릴 예정인데 그때 무대에 설 수 있으려나?’만약 불가능하다면 그녀를 대신해 위장할 사람을 빨리 찾는 것도 필요했다....의식을 되찾은 윤혜인은 자신이 병원 침대에 누워 있는 것을 발견했다.머리는 무겁고 여러 혼란스러운 꿈을 꾸었다. 꿈속에서 이준혁은 그녀와 등을 돌린 채 멀어져 갔고 아무리 그를 불러도 그가 남긴 것은 차가운 뒷모습뿐이었다.“어때, 괜찮아?”남자의 낮고 깊은 목소리가 귓가에 울렸다.윤혜인은 눈을 깜빡이며 꿈속의 그 남자가 지금 자신의 침대 옆에 앉아 있는 것을 보았다. 순간 꿈에서 느꼈던 그 서운함이 현실로 밀려들어 왔다.“왜 나 무시했어요?”윤혜인은 불만스럽게 물었다.그러자 그녀의 말에 당황한 이준혁은 준비했던 설명조차 단숨에 잊어버렸다.눈가가 붉어진 채 윤혜인은 점점 더 억울해했다.“나... 꿈에서 계속 불렀는데... 준혁 씨는 나 무시하고...”그녀의 말을 들은 이준혁은 그것이 꿈 이야기라는 것을 깨닫고 멋쩍은 미소를 지었다.하지만 그 후에는 깊은 안도감을 느꼈다.자신이 어떤 감정이든 상관없다는 결론에 다다른 것이 다행스럽게 느껴졌다.동정이냐 아니냐가 정말 그렇게 중요한 문제일까? 중요한 것은 윤혜인이 이준혁의 곁에 있고 그녀의 꿈과 시선에 그가 있다는 것뿐이었다.“응. 내 잘못이야
“죄송합니다.”이준혁은 진심으로 사과했다. 이번 일은 분명히 그의 책임이었다.만약 그의 부주의가 아니었다면 윤혜인이 이런 고생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이준혁은 자책하며 곽경천이 자신을 때려줬으면 싶을 정도로 후회하고 있었다.그때 주훈이 갑자기 ‘퍽’ 소리를 내며 무릎을 꿇었다. 그러더니 곽경천을 향해 말했다.“모든 게 제 잘못입니다. 제가 혜인 씨에게 대표님을 보러 오라고 부탁했거든요.”그는 깊이 자책하고 있었다.만약 자신이 쓸데없는 말을 하지 않았다면 윤혜인이 사무실에 갇혀 얼어붙는 일이 없었을 테니 말이다.주훈은 제대로 확인도 하지 않은 채 그녀가 떠났는지 관심을 두지 않은 자신의 큰 실책이라 여겼다.이번 일로 이준혁이 자신을 탄페니아에 10년간 가 있으라 해도 감수할 각오였다.하지만 곽경천은 사건의 전말을 이미 알고 있었다.사실 윤혜인이 먼저 주훈에게 전화를 걸어 이준혁의 상황을 물어봤고 주훈은 그저 그녀에게 와보라고 덧붙였을 뿐이었다.주훈이 권하지 않아도 윤혜인은 이준혁을 찾아갔을 것이다.이준혁을 찾으러 가고 싶은 마음이 있는 전제하에 주훈의 말은 그저 핑곗거리에 지나지 않았다.곽경천은 합리적인 사람이었다. 잘못한 사람이 있다면 책망하겠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에게는 불필요한 비난을 하지 않았다.그는 주훈을 일으키며 침착한 목소리로 말했다.“일어나요. 이 일은 주 비서님 잘못이 아니니까요. 혜인이는 스스로가 원해서 간 거예요.”이 말을 듣고 이준혁의 얼굴이 창백해졌다.곧이어 곽경천은 이준혁을 바라보며 말했다.“혜인이는 다른 사람의 말 한마디로 흔들리는 사람이 아닙니다. 혜인이가 준혁 씨를 찾아간 것은 마음속에서 준혁 씨를 지우지 못해서였을 거예요.”그는 잠시 말을 멈추었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이준혁 씨, 이준혁 씨도 혜인이가 어떤 사람인지 모를 리 없잖아요.”“이번 일을 계기로 혜인이에게서 조금 떨어져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준혁 씨가 진정으로 마음을 정리할 때까지 기다리는 게 좋겠어요.”사실 곽경천은 이준혁에게 크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