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처 주기 위해 한 말이 아니었다. 이준혁은 자신이 억지 부리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것 말고는 지금 그가 생각해 낼 수 있는 방법이 없었다. 그런데 윤혜인의 눈가가 빨개지며 울음을 참는 듯 일그러지자, 이준혁은 마음이 흔들렸다.그가 해명하려 한층 부드러워진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그게 아니라....""그게 아니면, 뭐?"생각하면 할수록 분했다. 윤혜인의 눈가에서 자기도 모르게 눈물이 주룩하고 떨어졌다. 느닷없이 차에 데려오더니, 또 허락도 없이 강제로 키스를 밀어붙였다. 그것도 부족한 이런 말도 안 되는 핑계로 잠자리까지 요구하다니, 윤혜인은 서러운 동시에 참을 수 없는 화가 치밀어 올랐다."그래, 어디 한번 해봐. 짓밟아보라고!"이준혁의 안색이 까맣게 죽었다.윤혜인이 차 문고리에 손을 가져다 대며 외쳤다."할 테면 해보라고! 당신이 무슨 짓 하든, 난 굴복하지 않을 테니까!"그 모습을 본 이준혁이 다급히 그녀를 뒤에서 끌어안으려 했지만, 거센 저항에 윤혜인을 놓치고 말았다."당신 정도면, 널린 게 여자일 텐데, 도대체 나한테 왜 이래? 싫다는 여자한테 도대체 왜 이러냐고!"그 말을 들은 이준혁의 얼굴에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그는 아무 여자나 원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가 원하는 건 윤혜인뿐이었다."정 여자가 없으면 차라리 그쪽을 오매불망 기다리는 임세희나 찾아가. 그 여자라면 아주 두 팔 벌리고 당신을 환영할 테니까!"이 말을 이준혁은 물론 윤혜인 자신에게도 상처 되는 말이었다. 하지만 이미 분노가 이성을 마비된 상태, 그녀는 거침이 없었다. 상대의 마음을 난도질하기 위해 스스로 상처 입는 것쯤이야 아무렇지 않았다.윤혜인은 기어이 문을 열어젖혔다. 밖엔 마침 처리 완료된 차용증 무더기를 들고 있는 주훈이 서 있었다.윤혜인이 창백하게 질린 안색으로 그에게 말했다."주 비서님, 혹시 펜 가지고 계세요?"주훈이 고개를 끄덕이며 서류 가방에서 펜 한 자루를 꺼내 그녀에게 건넸다. 윤혜인은 주훈의 손에서 펜과 종이를 얻어
이준혁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한구운은 그런 그의 표정에도 전혀 아무렇지도 않게 윤혜인만 바라보며 말했다."괜찮아?"윤혜인이 고개를 위아래로 살짝 끄덕였다. 이준혁은 그런 한구운의 태도에 화가 속에서 부글부글 끓어올랐다. 지난번에도 안 좋게 끝났는데, 이번에 또 이렇게 마주치니 기분이 좋을 수가 없었다.이준혁이 이를 갈며 말했다."정말 끈질기네”마주 보고 있던 둘의 눈빛에서 불꽃이 튀었다."그건 제가할 말 아닌가요?"한구운이 콧방귀를 뀌며 맞받아쳤다."분명 이혼했다고 들었는데, 이렇게 불쑥불쑥 찾아오는 건 예의가 아니죠. 행동가짐을 조심해야 할 건 제가 아니라 그쪽인 것 같네요."이준혁의 귀에 이혼했다는 말이 꽂혔다. 윤혜인과 그는 법적으로 이혼 도장을 찍긴 했지만, 끝난 사이는 아니었다. 적어도 이준혁한테는 여전히 진행 중이었다. 그런데 한구운이 사정도 모르고 자꾸 끼어들려 하자, 분통이 터졌다.이준혁이 한구운의 멱살을 잡으며 위험하게 말했다."그럼 그쪽은 무슨 자격으로 여기에 끼어드는 거지?"분위기가 점점 안 좋아지자, 윤혜인이 급히 이준혁의 손을 붙잡으며 말했다. 이대로 가다간 또 이준혁이 한구운을 향해 주먹을 휘두를지도 몰랐기 때문이다."이준혁 씨, 이거 놔요."그는 놓고 싶지 않았지만, 윤혜인의 눈빛에 담긴 긴장감에 어쩔 수 없이 한구운을 놔줬다.이준혁이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한구운은 안 되고, 질 안 좋다고 말했잖아. 이 남자랑 자꾸 엮이지 마."누구든 그의 눈에 거슬리면 다 나쁜 사람으로 둔갑하는 논리, 윤혜인은 이제 지긋지긋했다.이준혁이 계속해서 불쾌한 티를 내며 말을 이어갔다."다른 사람은 몰라도, 이 인간은 절대로 안 돼. 내가 분명히 말했어."윤혜인은 화가 나 물었다."당신이 무슨 자격으로 그런 말을 해요?""널 위해 하는 말이야.""참 고맙네요."두 사람은 분명 싸우고 있었다. 하지만 한구운은 왠지 모르게 연인 사이에 낀 병풍이 된 듯한 기분이 들었다. 결국 참다 못한 그가 윤혜인의 말을 끊고
윤혜인이 다급히 둘을 말리며 외쳤다."싸우지 마요! 그만들 하라고요!"그녀의 목소리를 들은 이준혁이 잠시 멈칫한 순간, 한구운이 또다시 도발해왔다."그쪽은 끝났겠지만, 나랑 혜인 씨는 이제 시작이야. 두고 봐, 혜인 씬 반드시 나랑 결혼하게 될 테니까."이 말을 들은 이준혁은 또다시 도발에 넘어가 주먹을 높이 치켜들었지만, 이내 윤혜인이 달려오는 모습에 팔을 내렸다.그 틈을 타, 윤혜인은 얼른 이준혁을 밀치고 한구운을 부축했다."괜찮아요?"한구운은 마지막엔 공격을 멈췄지만, 이준혁은 멈추지 않고 계속 그를 향해 주먹을 날렸었다. 누가 봐도 한구운이 더 많이 다친 상황이었다. 그녀가 이준혁이 아닌 한구운을 걱정한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거였다.한구운이 고개를 저으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답했다."괜찮아."그 모습을 본 이준혁은 분노에 몸이 부들부들 떨렸다. 그가 빨갛게 충혈된 눈으로 윤혜인의 팔을 끌어당기며 말했다."정말 저 인간 선택할 거야?"선택의 문제가 아니었다. 윤혜인은 빚지는 걸 유독 싫어하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안 그래도 차까지 얻어 탔는데, 한구운이 그녀 때문에 이준혁한테 맞기까지 하자 윤혜인은 그저 화가 치밀어 올랐다.그녀가 매우 불쾌한 말투로 말했다."이준혁 씨, 왜 이렇게 사람 말귀를 못 알아들어요? 저희 이혼한 사이잖아요. 함부로 제 사람한테 손대지 마세요."그 말을 마지막으로 윤혜인은 한구운을 부축해 차로 향했다.이준혁은 자신이 마치 외부인이 된 것 같은 기분이었다. 손톱이 손바닥을 파고들며 주먹에서 피가 흘러나왔다. 좌절과 무력감, 온갖 감정들이 그의 속에서 소용돌이쳤다. 윤혜인이 떠나가는 뒷모습을 바라보면 이준혁이 차갑게 말했다."윤혜인, 저놈 따라가면 우린 정말로 끝이야."이걸로 협박이 되지 않을 거란 걸 알고 있었지만, 가만히 멀어지는 윤혜인을 바라보고만 있을 수는 없었다. 그녀를 붙잡기 위한 이준혁의 발버둥이었다.윤혜인의 발걸음이 잠시 멈칫했다. 둘의 관계는 이미 오래전, 아이를 잃은 순간 끝난 거나
잘생긴 이준혁의 뺨에 빨간 손자국이 났다. 분노가 화산이 폭발하듯 터져 나왔다."윤혜인!"한 번은 봐줬는데, 두 번이나 뺨을 때리다니, 이준혁은 용납할 수 없었다. 그런데 이것으로 부족했는지 윤혜인이 다시 한번 손을 그를 향해 휘둘렀다. 하지만 이번엔 이준혁의 반응이 빨라 손바닥이 그의 뺨이 아닌 그의 손등을 내리쳤다.손등에 전해지는 얼얼한 아픔을 느끼며 이준혁이 외쳤다."너 미쳤어?"태어나서 이런 취급받은 적이 없었다. 분노한 이준혁이 그녀의 손목을 움켜쥐며 따끔하게 혼내려던 순간이었다. 그의 눈에 덜덜 떨리고 있는 윤혜인의 손이 들어왔다. 아무리 그의 뺨을 때렸더라도 이 떨림은 정상적이지 않았다.그의 머릿속에 과거 손에 붕대를 감고 있던 윤혜인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가 흔들리는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너 손이...."하지만 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윤혜인의 눈에서 눈물이 후드득 떨어졌다. 이준혁은 머리에 둔기를 맞은 듯 사고가 멈추었다. 더 이상 어떠한 말도 내뱉을 수 없었다.윤혜인이 잡힌 손목을 비틀며 그의 손아귀에서 자신의 손목을 빼내었다. 그런 다음 떨리는 손을 다른 손으로 움켜쥐며 증오에 가득 찬 눈빛으로 그에게 말했다."난 당신이랑 달라. 적어도 결혼생활 동안 내가 당신한테 미안할 짓을 한 적 없어. 그러니까 함부로 추측하고 제멋대로 날 판단하지 마."윤혜인은 그가 적절한 선만 지켜준다면, 이혼하더라도 굳이 원수처럼 지낼 생각이 없었다. 하지만 오늘 모습을 보니, 다시는 그와 엮이지 말아야겠다고 다시 마음먹었다. 쓰레기보다 못한 이준혁과 다시는 상종하고 싶지 않았다.윤혜인이 떨리는 손을 세게 붙잡으며 말했다."당신이 날 한 번도 사랑한 적 없다는 거, 나도 잘 알고 있어. 이런 식으로 일일이 날 일깨워줄 필요 없어. 당신이랑 이혼한다고 해서 내 인생이 달라질 건 없어. 난 내 방식대로 잘 살아갈 테니까, 앞으론 나한테 신경 끄고 본인 인생이나 잘 살아."생각 없이 내뱉었던 말이 부메랑이 되어 돌아왔다. 이준
다시는 누군가에게 짓밟히지 않을 것이다. 윤혜인은 속으로 결심했다.서울에 도착하자마자 윤혜인은 한구운과 함께 바로 병원을 찾았다. 치료를 끝내고 병원을 나오니 어느새 밤이 되어 있었다."뭐 좀 먹을까?""식사하실래요?"동시에 나온 질문, 두 사람은 서로를 마주 보며 웃음을 터트렸다.윤혜인이 먼저 말을 꺼냈다."이번엔 제가 사게 해주세요."전에 몇 번은 한구운이 샀기 때문에, 이번에는 무슨 일이 있던 그녀가 사고 싶었다.한구운이 미소 지으며 말했다."좋아. 그럼, 오늘은 얻어먹을게."그렇게 두 사람이 향한 곳은 삼계탕집이었다.음식을 주문하고 기다리는 동안 어색한 분위기가 흘렀다. 이때, 한구운이 분위기를 풀기 위해 먼저 말을 걸었다."아까 내 고백 때문에 많이 당황했지?"그 말을 들은 윤혜인은 잠시 머리가 멍하니 굳었다."전남편이랑 더 이상 엮이고 싶지 않아 하는 것 같아서 그렇게 말한 것뿐이야. 네가 싫다면 다시 이준혁 대표한테 사정을 설명해 줄 수도 있어."아까 그 일은 확실히 충동이었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때 당시엔 윤혜인한테서 이준혁을 떼어내야겠다는 생각으로 무작정 질렀는데, 돌아보면 조금 확실히 조금 무모한 감이 없지 않았다.실제로 윤혜인은 그것 때문에 지금 한구운이 조금 어색하게 느껴졌다. 그녀는 한 번도 그를 이성적으로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지금은 그쪽으로 마음을 쏟을 여유가 전혀 없기도 했다.그 말을 들은 윤혜인은 속으로 안도감을 느꼈다. 그제야 조금 편안한 표정을 짓게 된 윤혜인이 입을 열었다."굳이 해명은 안 해줘도 돼요. 덕분에 난감한 상황을 무사히 잘 넘길 수 있었어요."윤혜인은 차라리 이준혁이 오해하도록 내버려두기로 했다. 오만한 이준혁의 성격상 그런 말을 듣고도 또 매달려 오지는 않을 테니까.그녀는 이준혁과 다시는 마주치고 싶지 않았다. 만나봐야 서로에게 상처 주는 것밖에 더 되지 않았다. 이렇게라도 끝낼 수 있다면, 차라리 다행이었다.윤혜인의 표정을 본 한구운은 자신의 판단이
그 말을 들은 윤혜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괜찮아요."한구운을 소파까지 부축한 그녀가 자리에서 일어나려 할 때였다. 갑자기 그가 떠나려는 윤혜인의 손을 덥석 잡았다. 예상치 못한 행동에 놀란 그녀가 고개를 돌려 한구운을 바라보았지만, 그가 고개를 숙이고 있어 표정을 볼 수 없었다.한편 한구운은 속에서 끓어오르는 욕망과 싸우고 있었다. 사적인 공간에서 자꾸 몸이 닿으니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겨우 감정을 추스른 그가 말했다. "미안한데, 따뜻한 물 한 잔만 더 가져다줄래?"윤혜인은 따뜻한 물을 떠 와 그에게 건넨 뒤, 담요를 가져와 그의 어깨에 둘러주었다. 그런 다음 그를 부축해 소파에 편하게 눕히고 업무 처리를 위해 자료들이 쌓여 있는 책상으로 다갔다. 어차피 옆에 자리를 지키고 있어봤자, 해줄 수 있는 일이 없었기 때문이다.약 20분쯤 지났을까, 한구운이 자리에서 일어나는 것이 보였다.윤혜인은 그를 차까지 배웅한 뒤, 그가 떠나는 모습을 지켜보다가 다시 자신의 집으로 돌아왔다.한편, 한구운은 천천히 차를 몰며 윤혜인이 시야에서 사라지는 모습을 지켜봤다. 역시나 그의 예상대로, 모퉁이에서 기다렸다는 듯이 검은 차량이 모습을 드러냈다.한구운은 차를 세운 뒤, 창문을 내리며 습관적인 미소를 지은 채 입을 열었다."여기서 또 보다니, 참 공교롭네요."이준혁이 싸늘한 눈빛으로 도발하는 한구운을 바라봤다."날 이렇게 도발하고, 후환이 두렵지 않은가 보지? 죽고 싶어 환장했어?""대표님, 농담도 참. 제가 어떻게 감히 이선그룹 대표님을 도발하겠어요?"한구운이 끼고 있던 안경을 벗으며 말했다. 안경에 가려져 있던 날카로운 눈빛이 드러났다. 이것이야말로 그의 본모습이라고 할 수 있었다.가식을 벗어던진 한구운의 모습에 이준혁이 코웃음치며 말했다."상대가 안 된다는 걸 알면, 알아서 꼬리 내리고 꺼져. 자꾸 혜인이 앞에 알짱거리지 말고."한구운이 웃으며 말했다."그건 좀 어려울 것 같네요. 저뿐만 아니라 혜인이도 저한테 관심이 있는 것 같아서요
한구운은 귀국하고 나서 이준혁과 윤혜인이 결혼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일부러 윤혜인에게 접근하기 위해 계획을 세웠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자 점차 그녀를 욕망하는 마음이 커졌다. 원래 내 떡보다는 항상 남의 떡이 더 커 보이는 법, 윤혜인이 이준혁의 여자라는 사실만으로 상당히 구미가 당겼다.한편, 윤혜인은 샤워를 하기 위해 화장실로 들어갔는데, 세면대 위에 한구운의 손목시계가 놓여 있는 것을 발견했다.그녀가 그 손목시계를 집으려던 찰나, 밖에서 갑자기 초인종 소리가 들렸다.윤혜인은 한구운이 시계를 되찾으러 돌아온 줄 알고, 최대한 노출이 적은 잠옷으로 갈아입고 문을 열었다. "시계 때문에 왔죠?"하지만 막상 문을 열자, 이준혁의 얼굴이 보였다. 윤혜인은 자리에 굳어버리고 말았다.아까 그런 일까지 있었는데, 그가 설마 여기까지 찾아올 줄은 예상하지 못했다. 그녀는 지금 완전히 무방비한 상태에 노출된 기분이었다.굳어있기도 잠시, 윤혜인은 반사적으로 문을 닫기 위해 있는 힘껏 손잡이를 잡아당겼다.쾅 하고 요란한 소리가 나며, 문이 부딪히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하지만 이건 절대로 일반적으로 문이 닫히면서 나는 소리가 아니었다. 고개를 들어보니 이준혁이 그 사이로 손을 집어넣은 것이 보였다. 그의 손등은 빨갛다 못해 퍼렇게 변해가고 있었다. 윤혜인은 경악한 표정을 지었다. "당신, 미쳤어요?"벗겨진 그의 살갗을 보며 윤혜인의 눈은 하염없이 흔들렸다. 이준혁이 이렇게까지 하는 이유를 그녀는 이해할 수 없었다.그가 분노에 찬 눈빛으로 그녀의 턱을 부여잡으며 차갑게 말했다. "잤어?"윤혜인은 그 단어가 이해되지 않아 잠시 멍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곧 그의 말뜻을 알아듣고 불쾌한 표정으로 대꾸했다. "설마... 날 계속 따라다닌 거예요?"이준혁은 분노로 얼룩진 얼굴로 이를 악문 채 말했다. "대답해."윤혜인은 너무 화가 나서 욕이 절로 나왔다. "당신, 미쳤어요? 오늘 분명히 말했잖아요! 그걸로는 부족해요? 우린 이혼한 사이라고요
윤혜인은 샤워를 마치고 최대한 노출이 적은 잠옷으로 갈아입었지만, 그래도 원피스였다. 이준혁이 그녀를 침대에 던지자, 순식간에 치맛자락이 올라가며 하얗게 뻗은 다리가 노출되었다.이준혁은 자기도 모르게 눈빛이 탁해지더니, 가랑이 사이가 팽팽하게 부풀어 올랐다. 동시에 타이트한 정장 바지가 빳빳하게 조여 왔다.그의 상태를 눈치챈 윤혜인이 다급히 그를 밀치며 말했다. “이준혁, 이게 뭐 하는 짓이야! 우리 이혼했잖아! 이건 강간이야..."하지만 말을 끝마치기도 전에 이준혁이 그녀의 양쪽 손목을 잡고 머리 위로 올렸다. "그래, 나 미쳤어." 그는 요즘 유독 감정이 기복이 심하고 충동을 잘 참지 못했다. 지난 2년간 생활이 만족스럽고 일도 잘 되었기 때문에 증상이 거의 나타나지 않았으나, 최근 감정적 스트레스가 너무 잦아 조울증이 다시 심해지고 있었다. 이제는 약으로도 바로 효과를 보기 어려웠다.그가 차가운 목소리로 윤혜인을 압박했다. "너 내가 왜 이러는지 잘 알잖아. 그러니까 어서 솔직하게 말해." 윤혜인은 두려움에 머릿속이 하얗게 변했다. 여기서 더 대답을 미루면 최악의 상황이 닥칠 것 같았다. "안 잤어...! 나 건드리지 마... 건드리지 말라고!"하지만 때는 이미 늦은 상황이었다. 이준혁은 이미 의심에 몸과 마음이 잠식된 상태였다. 이성적으로 해서는 안 될 일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몸이 통제를 벗어나 제멋대로 움직였다. 이준혁이 손을 뻗으며 말했다."다른 짓은 안 할 테니, 안심해. 진짜 확인만 할 거야."윤혜인은 불길했던 예감이 현실이 될지도 모른다는 공포에 휩싸였다. 그녀는 본능적으로 그의 손을 깨물었다. 얼마나 세게 깨물었는지 입안에 피 맛이 날 정도였다. 하지만 그럼에도 이준혁은 멈추지 않았다.온갖 기억들이 그녀의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몸이 덜덜 떨리며 눈물샘이 고장 난 듯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이대로는 정말 당할지도 몰랐다. 너무나도 굴욕적인 상황이었다. 윤혜인은 마지막 힘을 쥐어짜 내며 그에게 외쳤다. "난 당
칠흑 같은 밤과 뼈저린 추위, 그리고 아까 맞은 얼음장처럼 차가운 비까지, 모든 상황이 똑같이 맞아떨어졌다. 양아버지가 어린 윤혜인을 안고 끝이 보이지 않는 길에서 달리다가 바닥에 철퍼덕 넘어졌다. 작고 연약한 어린 윤혜인은 포물선을 그리다 옆에 있던 구덩이에 빠지고 말았다. 어린 윤혜인의 몸과 얼굴은 흙이 잔뜩 묻었고 무성한 갈대에 가려져 시커먼 진흙과 한 몸이 되고 말았다. 어린 윤혜인이 겨우 몸을 일으켜 양아버지에게 도움을 청하려는데 양아버지가 어린 윤혜인을 향해 힘껏 고개를 저었다. 넘어져서 몸을 다친 양아버지는 몸이 찢어질 듯이 아팠지만 아랑곳하지 않고 어린 윤혜인을 안았던 그 자세 그대로 앞으로 내달리기 시작했다.어린 윤혜인은 그런 양아버지를 이해할 수 없었다. 그녀가 구덩이에 빠져있는 걸 양아버지도 분명히 봤는데 양아버지가 왜 그 자세 그대로 앞으로 내달리는지 말이다. 어린 윤혜인은 그렇게 넋을 놓고 한참 동안 바라봤다. 하지만 이내 빨간 스포츠카가 하늘이 떠나갈 것 같은 엔진소리와 함께 양아버지 뒤를 쫓았다. 앞에서 달리던 양아버지는 그렇게 차에 치여 허공으로 떠올랐다가 쿵 하는 소리와 함께 바닥에 떨어지고 말았다. 어린 윤혜인은 양아버지의 다리가 몸에서 완전히 분리되더니 다른 곳으로 날아가는 걸 목격했다. 심지어 그중 한쪽이 어린 윤혜인 앞에 떨어졌다. 형태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짓뭉개진 다리였다. 바닥에 쓰러진 양아버지의 얼굴도 어린 윤혜인을 향해 있었다. 눈을 부릅뜬 모습이 마치 절대 소리를 내면 안 된다고 경고하는 것 같았다. 어린 윤혜인은 초점을 잃고 퀭한 양아버지의 두 눈을 보며 소리를 지르고 싶었지만 목구멍에 뭐가 걸린 것처럼 정말 아무 소리도 나오지 않았다. 덕분에 어린 윤혜인은 죽을 고비를 넘길 수 있었다.범퍼가 깨진 스포츠카에서 빨간 벨벳 슈틀 입은 남자가 내려왔다. 어린 윤혜인은 얼굴은 매혹적이고 잘생긴 남자가 얼마나 극악무도한 짓을 저지르는지 똑똑히 보았다. 남자는 몸통이 절반 뜯어져 나간 양아버지를 이리저리 돌려보며
하지만 아무리 찾아도 윤혜인의 행방을 찾을 수 없었다. 배남준은 바로 사람을 데리고 원진우를 가둬둔 곳으로 향해 굳게 닫힌 문을 열었지만 안에 누워있는 사람은 원진우를 데리고 옷을 갈아입으러 간 도우미였다. 원진우가 입고 있던 하얀 슈트를 입고 있는 도우미는 이미 숨이 끊어진 지 오래였다.CCTV를 확인한 배남준은 사각지대에서 나온 두 사람이 어딘가 이상하다는 걸 발견했다. ‘원진우’의 걸음걸이가 어딘가 이상했다. 원진우와 도우미는 체격이 달랐다. 이미 숨이 끊어진 도우미의 신발을 벗겨보니 안에서 진흙이 가득 나왔다. 다시 영상을 확인해 보니 뒤에서 걸어가는 도우미는 몸을 잔뜩 움츠리고 있었고 얼굴이 잘 보이지 않았다. 사실 그때 이미 도우미가 바뀌었으니 가둔 사람은 원진우가 아닌 도우미였다. 도우미의 시신 상태를 보면 아마 원진우가 준 독을 먹고 문을 닫자마자 바로 독이 온몸으로 퍼져 숨을 끊은 것 같았다.이준혁은 영상에서 원진우가 입은 옷을 관찰했다. 전에 조사한 것과 다른 착장이었다. 이준혁이 조사한 데 의하면 원진우는 계절을 막론하고 구두를 신는다고 나왔지만 오늘 신은 건 긴 부츠였다. 이준혁은 바로 원진우가 처음부터 모든 걸 알고 있었다는 사실을 눈치챘다. 그렇다면 곽경천도 위험을 피치는 못할 것이다. 이를 깨달은 순간 이준혁은 곽경천에게 전화를 걸었다.현재 북안도를 떠날 수 있는 구멍은 다 막힌 상태였다. 이준혁이 미리 상부에 연락해 모든 루트를 봉쇄하고 원진우를 수배했다. 이준혁은 원진우가 힘들게 윤혜인을 납치해 갔으니 절대 죽이지는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필요 없는 사람은 바로 죽이는 게 원진우 스타일이지만 윤혜인을 데려갔다는 건 쓸모가 있다는 말이었다. 구체적으로 어떤 쓸모일지는 윤혜인도 알 수 없었다.원진우의 별장으로 향하는 길에 이준혁은 굉음을 듣게 되었다. 원진우의 별장이 있는 방향에서 하늘을 찌를 듯한 연기가 솟아 올라오더니 버섯 모양의 구름을 만들었다.화들짝 놀란 배남준이 체면을 차릴 겨를 없이 큰 소리로 말했다.“경천아.”
곽경천은 갑자기 손으로 내밀 엄두가 나지 않았다. 오랫동안 어머니의 실종은 마음에 박힌 가시와도 같았다. 비록 윤아름이 친엄마가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고 짧은 만남이었지만 윤아름에게서 받은 사랑은 적지 않았다. 윤아름은 곽경천을 친자처럼 아끼며 보살펴줬다. 그때부터 곽경천은 앞으로 엄마와 동생을 잘 보호해야겠다고 다짐했지만 크면서 하나도 지키지 못했다. 윤혜인도 옆에 있고 어머니와도 곧 만날 수 있다는 생각에 심장이 터질 것 같았다. 그래도 꾹 참고 손을 뻗는데 급박한 전화 소리가 울렸다. 곽경천이 들고 온 건 위성 전화라 배남준만 알고 있었다. 곽경천은 전화를 받으면서도 여자의 머리만 뚫어져라 쳐다봤다.“여보세요?”“30초, 30초밖에 안 남았어요. 얼른 나와요.”수화기 너머로 들린 건 배남준의 목소리가 아니라 이준혁이었다. 이준혁이 다급한 목소리로 말했다.“형님, 그 지하실에 폭탄이 가득 설치되어 있어요. 얼른 사람들 데리고 나와요.”곽경천이 넋을 놓고 있는데 이준혁이 급박하게 말했다.“형님, 함정이에요. 원진우는 이미 도망갔어요. 처음부터 형님이 세운 계획을 알고 있었더라고요. 지금 당장 나와요.”곽경천은 이준혁이 장난으로 하는 말이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포기하기는 싫었다.“폭탄이 설치되어 있으니까 얼른 나가요. 얼른.”같이 들어온 사람들이 서로 눈치를 보기 시작했다. 다들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지만 그래도 곽경천이 같이 떠나길 기다렸다.“먼저 나가요. 명령이에요. 나도 곧 따라 나갈게요.”곽경천이 이렇게 말했다. 팀원들이 어쩔 수 없이 명령에 따라 밖으로 나가고 곽경천이 손을 내밀어 ‘여자’의 어깨를 잡고 돌렸다.데굴데굴.여자의 머리가 곽경천의 발치로 굴러떨어졌다. 깜짝 놀란 곽경천은 순간 목구멍에서 단내가 느껴졌다.‘설... 설마 엄마?’한 번 더 자세히 보다 보니 이상한 점을 발견했다. 죽은 지 꽤 오래된 시신인지 목 부분에 부패가 시작되었지만 얼굴은 아직 보존이 잘 되어 있었다. 북안도의 날씨가 유독 추웠기에
원진우를 기다리고 있는 건 한번 들어가면 굳게 닫히는 문이었다. 이게 곽경천이 세운 2번째 방안이었다. 첫 번째 방안인 술이 실패하면 원진우를 무력으로 제압하기 어려운 데다가 무슨 꿍꿍이가 있는지 모르기에 일단은 특정한 방으로 유인하는 게 제일 좋은 방법이었다. 윤아름을 차질 없이 구해내면서 다른 사상자를 내지 않는 제일 좋은 방법은 바로 원진우를 안에 가둬놓는 것이었다.윤혜인은 원진우가 사라진 방향을 보며 마음이 불안해져 다른 사람이 와서 술을 권하는 것도 보지 못했다. 배남준은 현장에 원진우가 보낸 사람이 있을 수도 있다는 생각에 얼른 윤혜인에게 귀띔했다. 잘못하면 원진우가 이상한 낌새를 눈치채고 경계하면 계획이 틀어질 수도 있다.그렇게 10분쯤 지났을까, 윤혜인의 이어폰에서 비서 도지훈의 목소리가 들렸다.“누나, 원진우 안에 가뒀어요.”윤혜인은 그제야 길게 한숨을 내쉬며 긴장을 풀었다. 악당을 가뒀으니 곽경천도 일단 한시름 놓고 윤아름을 구해낼 일만 남았다. 윤혜인이 배남준을 향해 고개를 끄덕이자 배남준은 바로 무슨 뜻인지 알아채고는 다른 사람에게 윤혜인이 몸이 좋지 않아 먼저 일어난다고 하고는 현장을 빠져나갔다. 잠깐 얼굴을 비췄던 아이들은 너무 칭얼대서 다시 데리고 들어갔다.사실 두 아이는 곽경천이 주문 제작한 인형이었다. 실제와 다를 것 없이 잘 만들기도 했고 미리 녹음한 아이의 녹음 소리를 안에 넣어뒀다. 곽경천은 처음에 밖에서 다른 아이 둘을 찾아 대체하는 게 어떻겠냐고 했지만 윤혜인이 거절했다. 엄마가 되고 나서 아이가 곧 엄마에겐 목숨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 이심전심으로 자기 아이가 다치는 게 싫다면 다른 사람의 아이를 위험에 빠트리는 것도 하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다행히 오늘 날씨가 추워 아이는 인큐베이터에 누워 있었기에 멀리서 볼 수밖에 없었고 칭얼대는 소리로 퍽 리얼해 사람들의 눈을 속일 수 있었다.윤혜인은 방으로 돌아와 초조하게 곽경천의 소식을 기다렸다. 마음이 불안해서 그런지 가만히 앉아 있을 수가 없어 방안을 계속
윤혜인은 손에 들고 있던 잔을 들어 원진우를 향해 가볍게 흔들며 말했다.“삼촌, 제가 존경하는 마음을 담아 한 잔 먼저 마시겠습니다.”그러더니 금세 잔을 비웠다.그녀의 심장이 쿵쾅거리기 시작했다. 잔에 들어 있던 술에는 몇 시간 동안 상대를 잠들게 하는 특수 성분이 들어 있었다.그러나 윤혜인은 미리 해독제를 복용해둔 상태였고 원진우의 경계를 풀게 하려고 같은 술을 마신 것처럼 보이게 했다.원진우 같은 교활한 상대에게는 대화나 교섭보다는 이런 방법이 가장 안전했기 때문이다.그러나 윤혜인이 잔을 비워도 원진우는 여전히 미동조차 없이 술잔을 들지 않았다.초조해진 윤혜인은 도우미를 다시 불러 그의 잔을 채우게 했다.“앞으로도 저 잘 봐주셨으면 하니까 또 한잔 올리겠습니다.”한국인 사이에서 ‘두 잔’은 최고의 예우를 의미하기 때문에 원진우도 어른으로서 이를 거절할 수는 없었다.만약 거절한다면 그의 인품에 오점이 생길 수 있었기 때문이다.마침내 원진우는 천천히 잔을 들고 그녀를 바라보며 빙긋 웃었다.그러나 눈은 웃고 있지 않았다.잔이 입술에 가까워지려는 순간, 그는 갑자기 잔을 내려놓으며 말했다.“아, 깜빡했군. 오기 전에 집에서 의사에게 받은 약을 먹었는데 술을 마시면 안 된다고 하더라고요. 세 시간 동안은 물도 마실 수 없다고 했어요.”그는 이렇게 말하고는 잔을 테이블에 내려놓았다.윤혜인은 분노로 속이 끓어올랐지만 원진우가 댄 이유가 합리적이었기에 반박할 수 없었다. 첫 번째 계획은 명백히 실패한 셈이었다.곧 원진우가 자리를 뜨려 하자 윤혜인은 재빨리 다음 계획으로 전환했다.원진우의 움직임을 막기 위해 그녀는 손을 들어 그를 제지하며 말했다.“들은 바에 의하면 해외 무역에 아주 조예가 깊으시다고 하던데 저희 집도 국제 해운업에 종사하고 있어서 몇 가지 여쭤보고 싶은 게 있어요. 시간 괜찮으신가요?”그러자 원진우는 잠시 멈춰서서 따뜻하게 미소 지으며 말했다.“물어봐요.”이윽고 윤혜인은 몇 가지 질문을 던졌는데 모두 해외 무역의 어
곽경천은 곧 다가올 파티에 계획에 이준혁도 포함시키기로 했다.자신은 원진우의 별장에 인원들과 함께 잡입할 예정이고 파티장에는 배남준 혼자였는데 그에게 온전히 윤혜인을 맡기기가 불안하다고 느꼈기 때문이었다.파티장에서 잠재적인 위험인물인 원진우를 감시하고 윤혜인을 보호하기 위해서라도 추가 인원이 필요하다고 판단했다.그러나 윤혜인은 이준혁이 다리가 좋지 않다는 이유로 반대했다.그가 파티에 등장하면 원진우가 의심할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곽경천의 우려가 틀린 말은 아니었지만 이 계획이 완벽하지 않다는 점은 윤혜인도 잘 알고 있었다.파티장에 있는 사람들과 별장으로 잠입하는 사람 모두 위험이 따르는 임무였다. 게다가 시간이 촉박해 추가 인원을 조정할 여유도 없었다.윤아름의 행방을 찾을 기회가 얼마 남지 않았다.원진우가 모레 회사 양도 계약서에 서명할 예정이었기 때문이다. 그가 떠나게 되면 윤아름의 소식을 알아낼 마지막 기회를 놓치게 된다.이준혁은 이번 파티가 배남준을 돕기 위한 행사라는 곽경천의 설명을 듣고 이를 납득했다.배씨 가문에는 생후 첫 파티 후 배남준이 독립적인 가장이 되어 호적을 옮길 수 있는 전통이 있었다.질투가 나긴 했지만 이준혁은 배남준이 윤혜인을 향한 마음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공정하게 행동해왔다는 점을 존중하고 있었다.배남준은 숨겨진 음모 없이 정정당당하게 경쟁하는 상대였다.다음 날, 드디어 생후 한 달 기념 파티가 열렸다.윤혜인은 밝은 빨간색 원피스에 회색 모피 외투를 입고 고귀하고 아름다운 모습으로 행사에 나타났다.그동안 모습을 드러내지 않던 원진우도 파티장 정문에 나타나 눈길을 끌었다.북안도에서 배씨 가문과 찰스 가문이 보내는 초대장에는 반드시 참석해야 하는 무언의 룰이 있었다.그렇지 않으면 관계를 단절하겠다는 것으로 간주될 수 있었다.오랜만에 모습을 드러낸 원진우는 크림색 벨벳 수트를 입고 문학적이고 온화한 인상으로 나타나 눈길을 사로잡았다.그러나 윤혜인은 그의 겉모습이 실제와 다르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그의
이준혁의 낮고 부드러운 목소리에서 그가 자격지심을 느껴 한다는 것을 깨닫고 윤혜인은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자존심 강하고 남들한테 존경만 받는 사람이 언제부터 저렇게 불안해하는 감정을 품게 됐을까?’그녀는 순간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모르겠었다.하지만 윤혜인에게 역시 억울한 감정이 있었다.이준혁을 기다리다 사무실에서 잠들었고, 깨어나니 주변은 새까맸고 홀로 추위 속에 거의 얼어붙을 뻔했으니 말이다.“왜 날 찾으러 오지 않았어요?”그녀는 작게 말했다.그 어둠과 추위를 떠올릴 때마다 서운함이 다시 피어올랐다.만약 이준혁에게 자신의 마음을 전하려는 의도가 없었다면 윤혜인은 사무실에서 잠들어 문이 잠기는 일도 없었을 것이다.“내 잘못이야.”남자는 말했다.“모두 내 잘못이야. 맹세할게. 앞으로 절대 너를 혼자 두지 않을 거야.”이준혁은 한때 그녀를 놓아주려는 생각을 했었지만 곽경천이 그녀와 거리를 두라고 말하자 그의 가슴은 한순간에 무너져 내리는 듯했다.순간 그는 깨달았다. 자신은 결코 윤혜인을 놓고 싶어 하지 않는다는 것을.윤혜인이 그를 싫어하지 않는다면 불편한 몸일지라도 이준혁은 그녀를 지키겠다고 결심했다.결혼 이야기가 거짓임을 알았을 때, 그는 더 이상 방관자가 되지 않기로 마음먹었다.그녀와 아이들이 이준혁의 세상에서는 가장 소중한 존재였기에 그들의 삶에 함께하고 싶었다.윤혜인의 얼굴은 살짝 붉어졌다.‘언제 이렇게 빨리 마음을 바꾼 거지?’얼마 전까지 차갑기만 했던 이준혁이 이제는 윤혜인이 듣고 싶었던 말을 서슴없이 하고 있었다.하지만 그녀는 그가 자신을 두고 돌아가지 않았던 일에 여전히 화가 나 있었다.약간의 원망을 풀고자 윤혜인은 일부러 장난스럽게 말했다.“날 혼자 두지 않겠다니... 무슨 뜻이에요? 나 유부녀인 거 알잖아요. 설마 남편 자리를 뺏으려고요?”그러자 이준혁은 살짝 미소 지으며 그녀가 아직 진실을 모른다는 걸 알아챘다.하여 윤혜인의 장단에 맞춰주고자 이준혁이 말했다.“상대가 너라면... 기꺼이 감수하지.”
배남준은 아버지가 원진우와 비밀리에 대화하는 것을 엿들었다.대화의 내용은 원진우가 북안도의 회사를 팔고 다시 떠날 준비를 하고 있다는 것이었다.과거에 원진우가 떠날 때마다 그의 행방을 찾는 것은 거의 불가능할 정도로 어려웠다. 심지어 이번에는 원진우가 주의를 기울이고 있는 상황이니 다시 그의 흔적을 찾는 것은 하늘의 별 따기만큼 어려울 것이다.곽경천은 미간을 잔뜩 찌푸린 채 생각에 잠겼다.이번 계획은 절대 실패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만약 이번 기회를 놓치게 된다면 윤아름을 찾을 마지막 희망마저 잃게 될 것이니 말이다.곽경천은 고민스러웠다.‘하필 이런 중요한 시기에 혜인이가 병에 걸리다니... 앞으로 3일 후면 파티가 열릴 예정인데 그때 무대에 설 수 있으려나?’만약 불가능하다면 그녀를 대신해 위장할 사람을 빨리 찾는 것도 필요했다....의식을 되찾은 윤혜인은 자신이 병원 침대에 누워 있는 것을 발견했다.머리는 무겁고 여러 혼란스러운 꿈을 꾸었다. 꿈속에서 이준혁은 그녀와 등을 돌린 채 멀어져 갔고 아무리 그를 불러도 그가 남긴 것은 차가운 뒷모습뿐이었다.“어때, 괜찮아?”남자의 낮고 깊은 목소리가 귓가에 울렸다.윤혜인은 눈을 깜빡이며 꿈속의 그 남자가 지금 자신의 침대 옆에 앉아 있는 것을 보았다. 순간 꿈에서 느꼈던 그 서운함이 현실로 밀려들어 왔다.“왜 나 무시했어요?”윤혜인은 불만스럽게 물었다.그러자 그녀의 말에 당황한 이준혁은 준비했던 설명조차 단숨에 잊어버렸다.눈가가 붉어진 채 윤혜인은 점점 더 억울해했다.“나... 꿈에서 계속 불렀는데... 준혁 씨는 나 무시하고...”그녀의 말을 들은 이준혁은 그것이 꿈 이야기라는 것을 깨닫고 멋쩍은 미소를 지었다.하지만 그 후에는 깊은 안도감을 느꼈다.자신이 어떤 감정이든 상관없다는 결론에 다다른 것이 다행스럽게 느껴졌다.동정이냐 아니냐가 정말 그렇게 중요한 문제일까? 중요한 것은 윤혜인이 이준혁의 곁에 있고 그녀의 꿈과 시선에 그가 있다는 것뿐이었다.“응. 내 잘못이야
“죄송합니다.”이준혁은 진심으로 사과했다. 이번 일은 분명히 그의 책임이었다.만약 그의 부주의가 아니었다면 윤혜인이 이런 고생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이준혁은 자책하며 곽경천이 자신을 때려줬으면 싶을 정도로 후회하고 있었다.그때 주훈이 갑자기 ‘퍽’ 소리를 내며 무릎을 꿇었다. 그러더니 곽경천을 향해 말했다.“모든 게 제 잘못입니다. 제가 혜인 씨에게 대표님을 보러 오라고 부탁했거든요.”그는 깊이 자책하고 있었다.만약 자신이 쓸데없는 말을 하지 않았다면 윤혜인이 사무실에 갇혀 얼어붙는 일이 없었을 테니 말이다.주훈은 제대로 확인도 하지 않은 채 그녀가 떠났는지 관심을 두지 않은 자신의 큰 실책이라 여겼다.이번 일로 이준혁이 자신을 탄페니아에 10년간 가 있으라 해도 감수할 각오였다.하지만 곽경천은 사건의 전말을 이미 알고 있었다.사실 윤혜인이 먼저 주훈에게 전화를 걸어 이준혁의 상황을 물어봤고 주훈은 그저 그녀에게 와보라고 덧붙였을 뿐이었다.주훈이 권하지 않아도 윤혜인은 이준혁을 찾아갔을 것이다.이준혁을 찾으러 가고 싶은 마음이 있는 전제하에 주훈의 말은 그저 핑곗거리에 지나지 않았다.곽경천은 합리적인 사람이었다. 잘못한 사람이 있다면 책망하겠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에게는 불필요한 비난을 하지 않았다.그는 주훈을 일으키며 침착한 목소리로 말했다.“일어나요. 이 일은 주 비서님 잘못이 아니니까요. 혜인이는 스스로가 원해서 간 거예요.”이 말을 듣고 이준혁의 얼굴이 창백해졌다.곧이어 곽경천은 이준혁을 바라보며 말했다.“혜인이는 다른 사람의 말 한마디로 흔들리는 사람이 아닙니다. 혜인이가 준혁 씨를 찾아간 것은 마음속에서 준혁 씨를 지우지 못해서였을 거예요.”그는 잠시 말을 멈추었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이준혁 씨, 이준혁 씨도 혜인이가 어떤 사람인지 모를 리 없잖아요.”“이번 일을 계기로 혜인이에게서 조금 떨어져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준혁 씨가 진정으로 마음을 정리할 때까지 기다리는 게 좋겠어요.”사실 곽경천은 이준혁에게 크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