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말을 들은 윤혜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괜찮아요."한구운을 소파까지 부축한 그녀가 자리에서 일어나려 할 때였다. 갑자기 그가 떠나려는 윤혜인의 손을 덥석 잡았다. 예상치 못한 행동에 놀란 그녀가 고개를 돌려 한구운을 바라보았지만, 그가 고개를 숙이고 있어 표정을 볼 수 없었다.한편 한구운은 속에서 끓어오르는 욕망과 싸우고 있었다. 사적인 공간에서 자꾸 몸이 닿으니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겨우 감정을 추스른 그가 말했다. "미안한데, 따뜻한 물 한 잔만 더 가져다줄래?"윤혜인은 따뜻한 물을 떠 와 그에게 건넨 뒤, 담요를 가져와 그의 어깨에 둘러주었다. 그런 다음 그를 부축해 소파에 편하게 눕히고 업무 처리를 위해 자료들이 쌓여 있는 책상으로 다갔다. 어차피 옆에 자리를 지키고 있어봤자, 해줄 수 있는 일이 없었기 때문이다.약 20분쯤 지났을까, 한구운이 자리에서 일어나는 것이 보였다.윤혜인은 그를 차까지 배웅한 뒤, 그가 떠나는 모습을 지켜보다가 다시 자신의 집으로 돌아왔다.한편, 한구운은 천천히 차를 몰며 윤혜인이 시야에서 사라지는 모습을 지켜봤다. 역시나 그의 예상대로, 모퉁이에서 기다렸다는 듯이 검은 차량이 모습을 드러냈다.한구운은 차를 세운 뒤, 창문을 내리며 습관적인 미소를 지은 채 입을 열었다."여기서 또 보다니, 참 공교롭네요."이준혁이 싸늘한 눈빛으로 도발하는 한구운을 바라봤다."날 이렇게 도발하고, 후환이 두렵지 않은가 보지? 죽고 싶어 환장했어?""대표님, 농담도 참. 제가 어떻게 감히 이선그룹 대표님을 도발하겠어요?"한구운이 끼고 있던 안경을 벗으며 말했다. 안경에 가려져 있던 날카로운 눈빛이 드러났다. 이것이야말로 그의 본모습이라고 할 수 있었다.가식을 벗어던진 한구운의 모습에 이준혁이 코웃음치며 말했다."상대가 안 된다는 걸 알면, 알아서 꼬리 내리고 꺼져. 자꾸 혜인이 앞에 알짱거리지 말고."한구운이 웃으며 말했다."그건 좀 어려울 것 같네요. 저뿐만 아니라 혜인이도 저한테 관심이 있는 것 같아서요
한구운은 귀국하고 나서 이준혁과 윤혜인이 결혼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일부러 윤혜인에게 접근하기 위해 계획을 세웠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자 점차 그녀를 욕망하는 마음이 커졌다. 원래 내 떡보다는 항상 남의 떡이 더 커 보이는 법, 윤혜인이 이준혁의 여자라는 사실만으로 상당히 구미가 당겼다.한편, 윤혜인은 샤워를 하기 위해 화장실로 들어갔는데, 세면대 위에 한구운의 손목시계가 놓여 있는 것을 발견했다.그녀가 그 손목시계를 집으려던 찰나, 밖에서 갑자기 초인종 소리가 들렸다.윤혜인은 한구운이 시계를 되찾으러 돌아온 줄 알고, 최대한 노출이 적은 잠옷으로 갈아입고 문을 열었다. "시계 때문에 왔죠?"하지만 막상 문을 열자, 이준혁의 얼굴이 보였다. 윤혜인은 자리에 굳어버리고 말았다.아까 그런 일까지 있었는데, 그가 설마 여기까지 찾아올 줄은 예상하지 못했다. 그녀는 지금 완전히 무방비한 상태에 노출된 기분이었다.굳어있기도 잠시, 윤혜인은 반사적으로 문을 닫기 위해 있는 힘껏 손잡이를 잡아당겼다.쾅 하고 요란한 소리가 나며, 문이 부딪히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하지만 이건 절대로 일반적으로 문이 닫히면서 나는 소리가 아니었다. 고개를 들어보니 이준혁이 그 사이로 손을 집어넣은 것이 보였다. 그의 손등은 빨갛다 못해 퍼렇게 변해가고 있었다. 윤혜인은 경악한 표정을 지었다. "당신, 미쳤어요?"벗겨진 그의 살갗을 보며 윤혜인의 눈은 하염없이 흔들렸다. 이준혁이 이렇게까지 하는 이유를 그녀는 이해할 수 없었다.그가 분노에 찬 눈빛으로 그녀의 턱을 부여잡으며 차갑게 말했다. "잤어?"윤혜인은 그 단어가 이해되지 않아 잠시 멍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곧 그의 말뜻을 알아듣고 불쾌한 표정으로 대꾸했다. "설마... 날 계속 따라다닌 거예요?"이준혁은 분노로 얼룩진 얼굴로 이를 악문 채 말했다. "대답해."윤혜인은 너무 화가 나서 욕이 절로 나왔다. "당신, 미쳤어요? 오늘 분명히 말했잖아요! 그걸로는 부족해요? 우린 이혼한 사이라고요
윤혜인은 샤워를 마치고 최대한 노출이 적은 잠옷으로 갈아입었지만, 그래도 원피스였다. 이준혁이 그녀를 침대에 던지자, 순식간에 치맛자락이 올라가며 하얗게 뻗은 다리가 노출되었다.이준혁은 자기도 모르게 눈빛이 탁해지더니, 가랑이 사이가 팽팽하게 부풀어 올랐다. 동시에 타이트한 정장 바지가 빳빳하게 조여 왔다.그의 상태를 눈치챈 윤혜인이 다급히 그를 밀치며 말했다. “이준혁, 이게 뭐 하는 짓이야! 우리 이혼했잖아! 이건 강간이야..."하지만 말을 끝마치기도 전에 이준혁이 그녀의 양쪽 손목을 잡고 머리 위로 올렸다. "그래, 나 미쳤어." 그는 요즘 유독 감정이 기복이 심하고 충동을 잘 참지 못했다. 지난 2년간 생활이 만족스럽고 일도 잘 되었기 때문에 증상이 거의 나타나지 않았으나, 최근 감정적 스트레스가 너무 잦아 조울증이 다시 심해지고 있었다. 이제는 약으로도 바로 효과를 보기 어려웠다.그가 차가운 목소리로 윤혜인을 압박했다. "너 내가 왜 이러는지 잘 알잖아. 그러니까 어서 솔직하게 말해." 윤혜인은 두려움에 머릿속이 하얗게 변했다. 여기서 더 대답을 미루면 최악의 상황이 닥칠 것 같았다. "안 잤어...! 나 건드리지 마... 건드리지 말라고!"하지만 때는 이미 늦은 상황이었다. 이준혁은 이미 의심에 몸과 마음이 잠식된 상태였다. 이성적으로 해서는 안 될 일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몸이 통제를 벗어나 제멋대로 움직였다. 이준혁이 손을 뻗으며 말했다."다른 짓은 안 할 테니, 안심해. 진짜 확인만 할 거야."윤혜인은 불길했던 예감이 현실이 될지도 모른다는 공포에 휩싸였다. 그녀는 본능적으로 그의 손을 깨물었다. 얼마나 세게 깨물었는지 입안에 피 맛이 날 정도였다. 하지만 그럼에도 이준혁은 멈추지 않았다.온갖 기억들이 그녀의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몸이 덜덜 떨리며 눈물샘이 고장 난 듯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이대로는 정말 당할지도 몰랐다. 너무나도 굴욕적인 상황이었다. 윤혜인은 마지막 힘을 쥐어짜 내며 그에게 외쳤다. "난 당
"소원아, 당분간 너의 집에 머물러도 될까?""당연하지."소원은 아주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그러다 문득 윤혜인의 목소리가 이상하다는 것을 깨달았다."그런데 무슨 일 있어, 혜인아?""별일 아니야. 너 혹시 믿을만한 공인 중개사 알아? 내가 지금 사는 아파트 팔아야 할 것 같아서. 빠르면 빠를수록 좋아. 좀 급하게 돈이 필요하네."소원은 직감적으로 윤혜인한테 뭔가 일어났음을 눈치챘다. 하지만 전화상 얘기하고 싶어 하지 않은 것 같아, 이따가 다시 물어보기로 마음먹었다.윤혜인은 전화를 끊은 다음 곧바로 짐을 챙기기 시작했다. 사람 일이 마음처럼 되지 않는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이렇게 안 풀릴 줄 몰랐다. 이혼하면 이제 평온한 삶을 살게 될 줄 알았는데, 온갖 일들이 들이닥쳤다. 특히 이준혁이 가장 골치였다. 그의 행동은 사랑이라고 볼 수 없었다. 그는 윤혜인을 마치 소유물처럼 대하고 있었다. 그녀는 이준혁의 태도에 병적인 집착을 느꼈다. 하지만 윤혜인은 두 번 다시 같은 실수를 반복할 생각이 없었다. 그가 아무리 강하게 밀어붙여도 절대로 다시는 그와 이런 일로 엮이고 싶지 않았다. 아이를 잃는 슬픔은 한 번으로 족했다. 윤혜인은 당장은 그에게 벗어날 좋은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지만, 일단 최대한 그가 찾을 수 없는 곳으로 도망치고 싶었다. 다음날, 그녀는 곧바로 소원의 아파트로 짐을 옮겼다. 다행히 소원의 아파트는 그녀의 직장과도 매우 가까웠다. 윤혜인은 소원한테 집을 팔게 된 이유를 설명했지만, 이준혁한테 빚지게 된 사실까지는 말하지 않았다. 안 그래도 소원의 상황도 좋지 않은데, 괜히 말했다가 부담을 지울 것 같았기 때문이다. 소원의 성격상 친구의 어려움을 절대로 그냥 두고만 보지 않을 게 뻔했다. 윤혜인은 마음을 추스른 다음 바고 문백교육센터로 출근했다. 이 직업의 가장 좋은 점은 과외가 중점이라 하루 종일 사무실에 있을 필요가 없었다. 교육자료만 잘 준비한다면 회사에 나오지 않아도 되었다. 그래도 첫 시작이 중요했기 때문에
고객의 자료는 절대적 보안 사항이었다. 윤혜인은 이신우가 고용주라는 사실을 알 수 없었지만, 반대로 고용주에겐 고용인의 정보가 전달되어 윤혜인이 선생님으로 올 거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이신우와 눈을 마주친 윤혜인은 놀라 후다닥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머, 죄송해요. 본의 아니게 잠들었네요."이신우가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말했다."이런 자리에서 졸음이 와요?"그 말을 들은 윤혜인은 순간 말문이 막혔다. 그녀의 멍한 표정을 본 이신우가 눈썹을 찌푸리며 말을 정정했다."농담이에요."윤혜인이 입꼬리를 억지로 끌어올리며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확실히 면접 보러 와서 존 그녀의 잘못이 컸기 때문에 이 정도로 지나가는 것을 감사해야 했다. "앉으세요."이신우가 말했다.윤혜인은 그의 말에 따라 자리에 앉았다. 이때 그가 다시 물었다."하진이 자료 보셨어요?"윤혜인이 고개를 저으며 못 봤다고 말했다. 학생의 자료는 선발된 선생님만 볼 수 있었다. 즉, 정식으로 고용돼야지만 볼 수 있다는 것을 의미했다. 대답을 들은 이신우는 곧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너무 오냐오냐 키워서 애가 성격이 좋지 않아요. 남 괴롭히는 것도 잘하고요. 올해만 해도 벌써 선생님이 8번 바뀌었어요. 선생님께서 여기서 일하시려면 하진이를 잘 길들여야 할 거예요."길들인다는 말이 나오다니, 윤혜인은 학생의 상태가 심상치 않음을 느꼈다. 거기에 전에 팀장이 그녀에게 건넨 말까지, 다루기 쉽지 않을 것 같았다. 잠시 고민하던 윤혜인이 물었다."사람을 때리기도 하나요?"이신우가 눈썹을 치켜 올리며 그녀의 질문에 답했다."여자는 안 때려요."윤혜인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그러면 됐어요."이신우가 차갑게 말을 덧붙였다."일단 만나보세요."그런 다음 사용인을 불러 지시했다."하진이보고 내려오라고 해."사용인이 그의 말에 따라 이층으로 올라갔다. 하지만 잠시 뒤, 창백하게 질린 얼굴로 홀로 돌아왔다."도련님께서 선생님보고 직접 올라오시랍니다."이신우의 미간이 구겨졌다
"이하진!"이신우가 목소리를 내리깔며 이하진의 이름을 불렀다. 평소에 감정을 잘 드러내지 않던 그가 분노를 표출하자 이하진도 살짝 무서웠는지 말없이 자리에 앉았다.이신우가 한쪽에 조용히 서 있던 윤혜인을 바라보며 말했다."우선 내려가요.""저 잠깐만 하진 학생이랑 단둘이 대화 좀 해도 될까요?"윤혜인이 물었다.이신우는 잠시 그녀를 빤히 바라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나가자, 이하진의 표정이 즉시 다시 원래대로 돌아왔다."앞선 선생님들이 어떻게 그만두게 됐는지 못 들었나 보죠? 그렇다면 한번 알아보는 게 좋을 거예요. 그중 한 명은 평생 교육 업계에서 퇴출당할 정도로 개망신당했으니까. 돈 많은 남자 한번 꼬셔서 한탕 하러 오신 거면, 일찌감치 포기하는 게 좋을 거예요."윤혜인이 침착하게 질문했다."왜 그렇게 선생님을 싫어해?"이하진이 코웃음치며 말했다. "선생님다워야 선생 취급해 주죠. 지금까지 왔던 선생 중에 저한테 수업만 하러 온 사람은 한 명도 없었어요. 다 아버지한테 꼬리치기 바빴지.""난 학부모한테 관심 없어."윤혜인이 솔직하게 말했다. 하지만 이하진은 전혀 신뢰하지 않는 표정이었다."누가 믿어요.""네가 믿던 말던 상환 없어. 난 그냥 이 직업이 필요할 뿐이야."윤혜인이 담담히 말했다."귀찮게 구는 게 싫으면, 수업 태도부터 바꿔야 할 거야. 아니면 큰코다치게 되는 건 너일 테니까."이하진이 비웃으며 말했다."대단한 분 납시셨네."그리고는 갑자기 몸을 일으키며 윤혜인에게 말했다."주스라도 드릴까요?"그 말과 함께 이하진이 옆에 놓여 있던 주스를 윤혜인에게 건네주는 척하며 컵을 기울였다. 빨간색 주스가 윤혜인의 베이지색 코트 위로 후드득 떨어졌다."아, 이런. 죄송해요."이하진이 가증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손이 미끄러졌어요."하지만 윤혜인은 예상했다는 듯, 전혀 개의치 않으며 침착하게 휴지로 코트를 닦았다."괜찮아. 어차피 돈 많은 집안이니, 누군가는 배상해 주겠지."그런 다음 자리에서 일
윤혜인은 그의 존재를 무시하기로 마음먹고 성큼성큼 아파트 안으로 향했다. 그러나 이준혁이 그녀를 내버려둘 리가 없었다. "누가 널 데려다준 거야?"이준혁이 어두운 표정으로 물었다."당신이 신경 쓸 문제 아니에요."윤혜인이 냉담하게 답했다. 이준혁은 잠시 말문이 막혔지만, 포기하지 않고 다시 말을 이었다. "왜 이사했어?"윤혜인은 계속해서 아파트 단지 안으로 걸어갔다. 하지만 이준혁이 그녀의 손목을 잡는 바람에 걸음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우리 얘기 좀 할까?"그의 행동에 윤혜인은 어젯밤 악몽 같은 순간이 떠올라 몸이 뻣뻣하게 굳어버렸다. 그녀가 거리를 두며 말했다. "이거 놔요."하지만 이번엔 이준혁이 손목을 놓아주며 앞을 가로막았다.그가 가득 깔린 목소리로 말했다."이사하는 건 상관없는데 왜 나한테 말하지 않았어?""제가 왜 당신한테 그런 것까지 말해야 하죠?"일부러 그에게 멀어지려고 한 이사였는데, 또 찾아올 줄이야, 정말 화가 치밀어 올랐다. 윤혜인이 핸드폰 앨범에서 이혼 서류 증명서가 찍힌 사진을 그의 앞으로 들이밀며 말했다."이혼 증명서 보이시죠?"이준혁은 철두철미한 윤혜인의 태도에 안색이 어두워졌다."혜인아, 이러지 마.""그쪽이나 정신 차리세요."그녀는 이준혁이 어떤 표정을 짓던 전혀 동요하지 않았다."이혼까지 했는데, 도대체 왜 이러시는지 모르겠네요. 이러는 거, 즐거워요? 아니면 회사가 망해서 한가한가요?"이준혁은 그녀의 독설에 할말을 잃었다. 윤혜인은 그 틈을 타 엘리베이터 쪽으로 걸어갔다. 그런데 이번에도 이준혁이 따라오는 것이 아닌가? 참다못한 그녀가 걸음을 멈추고 그를 쏘아보았다."따라오지 마세요."이때, 엘리베이터가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윤혜인은 망설임 없이 안으로 들어가면서 경고하듯 그를 노려보며 말했다."따라오면 경찰에 신고할 거예요."그녀는 주저하지 않고 엘리베이터 닫힘 버튼을 눌렀다. 그런데 이때, 갑자기 닫히던 엘리베이터 문이 다시 열렸다. 이준혁이 문틈 사이로 손을 집어넣은
이준혁이 이를 악문 채 그녀의 어깨를 부여잡았다."그런 말 하지 마."윤혜인은 그가 이혼 때문에 이렇게까지 망가질 줄은 전혀 예상치 못했다. 물론 윤혜인도 완전히 옛날의 그림자에서 벗어나지는 못했다. 하지만 그래도 그녀는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 모든 것을 내려놓으려 노력하고 있었다. 새로운 삶을 시작하기 위해선 과거를 청산하는 것이 먼저였으니까. 그래서 윤혜인은 이준혁을 덤덤히 대하려 노력하고 있었다. "당신이 원하던, 원치 않던 우리는 끝났어요. 각자 자기 인생 시작할 때라고요. 전남편으로서 당신이 해줄 수 있는 건, 저의 새로운 시작을 축복하는 것밖에 없어요. 하지만 그게 어렵다면, 최소한 방해는 하지 말아요."새로운 시작이라는 말을 들은 순간 이준혁은 그녀가 다른 남자와 결혼하는 모습이 떠올랐다. 그의 눈빛이 싸늘해졌다."설마 재혼할 생각이야?"윤혜인은 그를 바라보며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아니, 그러면 평생 독신으로 살란 말인가? 가족을 꾸리고 싶은 마음은 언제나 있었다. 하지만 아직 과거의 어두운 기억에서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에, 연애에 관심을 두지 않고 있었다.언젠간 스스로 충분히 단단해졌다고 느꼈을 때, 윤혜인은 다시 사랑을 찾아 떠날 생각이었다. 그녀는 자신의 생각을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저 이제 22살이에요. 지금은 없더라도 앞으로 얼마든지 새로 생길 수 있죠."그 말을 들은 순간 이준혁은 그녀를 가두고 싶은 깊은 열망에 휩싸였다. 이대로 그녀를 내버려두면, 진짜로 영원히 볼 수 없는 곳으로 날아갈 것 같았기 때문이다. 이준혁이 서슬 퍼런 눈빛으로 경고했다."그러면 어디 한 번 해봐."그러나 윤혜인은 전혀 겁먹지 않았다. 오히려 더 당당히 눈을 마주 보며 그를 밀친 다음, 엘리베이터를 나섰다.이준혁은 멀어져가는 윤혜인의 뒷모습을 보며 싸늘하게 외쳤다."윤혜인, 넌 반드시 내 곁으로 돌아오게 될 거야."마치 윤혜인이 이혼을 요구할 때 보여줬던 모습을 연상시키는 듯했다. 왠지 모를 불안이 속에서 싹텄다.이준혁은 한다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