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하진!"이신우가 목소리를 내리깔며 이하진의 이름을 불렀다. 평소에 감정을 잘 드러내지 않던 그가 분노를 표출하자 이하진도 살짝 무서웠는지 말없이 자리에 앉았다.이신우가 한쪽에 조용히 서 있던 윤혜인을 바라보며 말했다."우선 내려가요.""저 잠깐만 하진 학생이랑 단둘이 대화 좀 해도 될까요?"윤혜인이 물었다.이신우는 잠시 그녀를 빤히 바라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나가자, 이하진의 표정이 즉시 다시 원래대로 돌아왔다."앞선 선생님들이 어떻게 그만두게 됐는지 못 들었나 보죠? 그렇다면 한번 알아보는 게 좋을 거예요. 그중 한 명은 평생 교육 업계에서 퇴출당할 정도로 개망신당했으니까. 돈 많은 남자 한번 꼬셔서 한탕 하러 오신 거면, 일찌감치 포기하는 게 좋을 거예요."윤혜인이 침착하게 질문했다."왜 그렇게 선생님을 싫어해?"이하진이 코웃음치며 말했다. "선생님다워야 선생 취급해 주죠. 지금까지 왔던 선생 중에 저한테 수업만 하러 온 사람은 한 명도 없었어요. 다 아버지한테 꼬리치기 바빴지.""난 학부모한테 관심 없어."윤혜인이 솔직하게 말했다. 하지만 이하진은 전혀 신뢰하지 않는 표정이었다."누가 믿어요.""네가 믿던 말던 상환 없어. 난 그냥 이 직업이 필요할 뿐이야."윤혜인이 담담히 말했다."귀찮게 구는 게 싫으면, 수업 태도부터 바꿔야 할 거야. 아니면 큰코다치게 되는 건 너일 테니까."이하진이 비웃으며 말했다."대단한 분 납시셨네."그리고는 갑자기 몸을 일으키며 윤혜인에게 말했다."주스라도 드릴까요?"그 말과 함께 이하진이 옆에 놓여 있던 주스를 윤혜인에게 건네주는 척하며 컵을 기울였다. 빨간색 주스가 윤혜인의 베이지색 코트 위로 후드득 떨어졌다."아, 이런. 죄송해요."이하진이 가증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손이 미끄러졌어요."하지만 윤혜인은 예상했다는 듯, 전혀 개의치 않으며 침착하게 휴지로 코트를 닦았다."괜찮아. 어차피 돈 많은 집안이니, 누군가는 배상해 주겠지."그런 다음 자리에서 일
윤혜인은 그의 존재를 무시하기로 마음먹고 성큼성큼 아파트 안으로 향했다. 그러나 이준혁이 그녀를 내버려둘 리가 없었다. "누가 널 데려다준 거야?"이준혁이 어두운 표정으로 물었다."당신이 신경 쓸 문제 아니에요."윤혜인이 냉담하게 답했다. 이준혁은 잠시 말문이 막혔지만, 포기하지 않고 다시 말을 이었다. "왜 이사했어?"윤혜인은 계속해서 아파트 단지 안으로 걸어갔다. 하지만 이준혁이 그녀의 손목을 잡는 바람에 걸음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우리 얘기 좀 할까?"그의 행동에 윤혜인은 어젯밤 악몽 같은 순간이 떠올라 몸이 뻣뻣하게 굳어버렸다. 그녀가 거리를 두며 말했다. "이거 놔요."하지만 이번엔 이준혁이 손목을 놓아주며 앞을 가로막았다.그가 가득 깔린 목소리로 말했다."이사하는 건 상관없는데 왜 나한테 말하지 않았어?""제가 왜 당신한테 그런 것까지 말해야 하죠?"일부러 그에게 멀어지려고 한 이사였는데, 또 찾아올 줄이야, 정말 화가 치밀어 올랐다. 윤혜인이 핸드폰 앨범에서 이혼 서류 증명서가 찍힌 사진을 그의 앞으로 들이밀며 말했다."이혼 증명서 보이시죠?"이준혁은 철두철미한 윤혜인의 태도에 안색이 어두워졌다."혜인아, 이러지 마.""그쪽이나 정신 차리세요."그녀는 이준혁이 어떤 표정을 짓던 전혀 동요하지 않았다."이혼까지 했는데, 도대체 왜 이러시는지 모르겠네요. 이러는 거, 즐거워요? 아니면 회사가 망해서 한가한가요?"이준혁은 그녀의 독설에 할말을 잃었다. 윤혜인은 그 틈을 타 엘리베이터 쪽으로 걸어갔다. 그런데 이번에도 이준혁이 따라오는 것이 아닌가? 참다못한 그녀가 걸음을 멈추고 그를 쏘아보았다."따라오지 마세요."이때, 엘리베이터가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윤혜인은 망설임 없이 안으로 들어가면서 경고하듯 그를 노려보며 말했다."따라오면 경찰에 신고할 거예요."그녀는 주저하지 않고 엘리베이터 닫힘 버튼을 눌렀다. 그런데 이때, 갑자기 닫히던 엘리베이터 문이 다시 열렸다. 이준혁이 문틈 사이로 손을 집어넣은
이준혁이 이를 악문 채 그녀의 어깨를 부여잡았다."그런 말 하지 마."윤혜인은 그가 이혼 때문에 이렇게까지 망가질 줄은 전혀 예상치 못했다. 물론 윤혜인도 완전히 옛날의 그림자에서 벗어나지는 못했다. 하지만 그래도 그녀는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 모든 것을 내려놓으려 노력하고 있었다. 새로운 삶을 시작하기 위해선 과거를 청산하는 것이 먼저였으니까. 그래서 윤혜인은 이준혁을 덤덤히 대하려 노력하고 있었다. "당신이 원하던, 원치 않던 우리는 끝났어요. 각자 자기 인생 시작할 때라고요. 전남편으로서 당신이 해줄 수 있는 건, 저의 새로운 시작을 축복하는 것밖에 없어요. 하지만 그게 어렵다면, 최소한 방해는 하지 말아요."새로운 시작이라는 말을 들은 순간 이준혁은 그녀가 다른 남자와 결혼하는 모습이 떠올랐다. 그의 눈빛이 싸늘해졌다."설마 재혼할 생각이야?"윤혜인은 그를 바라보며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아니, 그러면 평생 독신으로 살란 말인가? 가족을 꾸리고 싶은 마음은 언제나 있었다. 하지만 아직 과거의 어두운 기억에서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에, 연애에 관심을 두지 않고 있었다.언젠간 스스로 충분히 단단해졌다고 느꼈을 때, 윤혜인은 다시 사랑을 찾아 떠날 생각이었다. 그녀는 자신의 생각을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저 이제 22살이에요. 지금은 없더라도 앞으로 얼마든지 새로 생길 수 있죠."그 말을 들은 순간 이준혁은 그녀를 가두고 싶은 깊은 열망에 휩싸였다. 이대로 그녀를 내버려두면, 진짜로 영원히 볼 수 없는 곳으로 날아갈 것 같았기 때문이다. 이준혁이 서슬 퍼런 눈빛으로 경고했다."그러면 어디 한 번 해봐."그러나 윤혜인은 전혀 겁먹지 않았다. 오히려 더 당당히 눈을 마주 보며 그를 밀친 다음, 엘리베이터를 나섰다.이준혁은 멀어져가는 윤혜인의 뒷모습을 보며 싸늘하게 외쳤다."윤혜인, 넌 반드시 내 곁으로 돌아오게 될 거야."마치 윤혜인이 이혼을 요구할 때 보여줬던 모습을 연상시키는 듯했다. 왠지 모를 불안이 속에서 싹텄다.이준혁은 한다면
이준혁은 더 이상 이천수와 대화를 나누고 싶지 않았다. 그가 서재를 나서려던 순간, 갑자기 뒤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다 회사 발전을 위해서 이러는 거잖아. 이번만큼은 그냥 좀 따라.”그 말에 이준혁이 발걸음을 멈추며 무심하게 답했다.“알겠어요.”그제야 이천수는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그런데 이때, 이준혁이 덧붙였다.“앞으로 함부로 본가에 돌아오는 일 없었으면 좋겠어요.”그 말에 이천수는 다시 기분이 상했다. 비록 지금은 해외에 머물고 있으나, 엄연히 이곳도 그의 집이었다. 그런데 마음대로 돌아오지 말라니, 화가 치밀어 올랐다. 하지만 일단 이준혁이 맞선에 동의했기 때문에, 오늘만큼은 이 건방진 태도를 그냥 넘어가기로 했다.“그래, 알겠어.”이 에너지 프로젝트는 정말 대형 프로젝트였지만, 그동안 이태수의 손에 있어 건드리지 못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태수의 건강이 악화한 만큼 그에게도 기회가 돌아갔다. 이번에 성공만 하게 한다면 회사의 권력 구도가 바뀔 지도 몰랐다. 이천수는 다시 권력의 최상위층 자리를 되찾고 싶었다. 그래야 이준혁은 물론 자신과 대립하는 인원들을 배제할 수 있기 때문이다.다음 날.윤혜인은 열심히 청소하고 있었다. 잠시 머물러 들어왔던 집이었지만, 소원의 고집으로 아예 이곳에 눌러앉게 되었다. 물론 공짜는 아니었다. 그건 윤혜인 자신이 용납할 수 없는 문제였다. 그래서 이곳에 머무는 대신 소원에게 일정한 집세를 지불하기로 약속했다. 그리고 이 집은 소원의 소유이긴 했지만, 자주 머무는 곳은 아니었다. 그녀는 평소 본가에 머물다가, 혼자만의 시간이 필요할 때만 이곳에 왔다. 이 집은 소원에게 있어 비상금, 또는 아지트 같은 개념이었다.윤혜인이 매물로 올려놓은 그 집은 아직 팔리기 전이었다. 부동산 두 곳에서 연락해 오긴 했으나, 시세가 마음에 들지 않아 못 팔고 있었다. 고생해서 마련한 첫 집을 헐값에 팔 순 없었다.오후, 갑자기 한구운한테서 연락이 왔다. 그는 도움이 필요한 일이 있으니, 잠시 만나달라고 부탁해 왔다.
윤혜인은 어쩌면 이태수가 둘의 이혼을 눈치채고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도 그럴 것이 이준혁과 함께 병문안 온지도 한참 되었었다. 어쩌면 지금이 말할 기회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할아버지, 사실….”하지만 그녀가 말을 채 잇기도 전에 이준혁이 문을 열고 들어왔다.마침 중요한 회의를 마치고 왔는지 평소보다 더 꾸민 모습이었다. 지금 상황만 아니었다면, 윤혜인은 그의 멋짐에 설레었을지도 몰랐다. 이준혁이 자연스레 그녀에게 다가와 어깨를 꼭 감쌌다. 윤혜인은 안 그래도 예상치 못한 등장에 매우 당황하고 있었는데, 스킨십까지 해 오자 무척 불편했다.“기다리지, 왜 먼저 왔어?”그가 마치 행복했던 그 시절로 돌아간 것처럼, 부드러운 목소리로 물었다.윤혜인은 차마 이태수가 보는 앞에서 그를 밀어낼 수 없어 조용히 답했다.“바쁜 것 같아 보여서요.”이준혁이 가볍게 그녀의 등을 쓰다듬으며 말했다.“아무리 바빠도 할아버지 뵈러 가는데 빠질 수는 없지.”잠깐 전날 밤에 있었던 일이 헷갈릴 정도로 다정한 목소리였다. 이준혁이 마음먹고 꼬신다면 넘어오지 않을 여자가 있을까? 윤혜인은 문득 그런 생각마저 들었다. 전에 겪은 아픈 기억들만 아니었다면, 다시 그에게 빠졌을지도 몰랐다. 그 뒤로 둘은 30분 더 다정한 척 연기하며 병실에 머물렀다. 정말 유난히도 길게 느껴지는 시간이었다. 이준혁은 얘기를 나누는 동안 끊임없이 그녀를 쓰다듬거나 꽉 끌어안기를 반복했다. 그 때문에 윤혜인은 한시도 긴장을 풀지 못한 채 얼굴을 붉힐 수밖에 없었다.그녀의 안색을 본 이태수가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혜인아, 너 괜찮아? 왜 얼굴이 이렇게 빨개?”그러자 이준혁도 고개를 숙여 그녀를 바라봤다. 그의 눈빛은 마치 태양을 담은 것처럼 뜨거웠다.윤혜인이 시선을 옮기며 얼버무렸다.“더워서요, 할아버지.”이태수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그렇겠네. 내가 늙어서 추위에 많이 약해. 에어컨을 좀 세게 틀었나봐.”잠시 뒤, 드디어 병실을 빠져나온
말릴 틈도 없이 전화가 끊겨버렸다. 그가 차가운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말했다. “마침 나도 그쪽에 약속이 있었어.”그리고는 예고도 없이 윤혜인을 들어 올렸다. 그녀는 깜짝 놀라 자기도 모르게 이준혁의 목에 팔을 두르고 말았다. 사람들도 많이 지나는 곳에 이런 자세로 있으려니 윤혜인은 부끄러움이 밀려왔다. 그녀가 고개를 이준혁의 품에 파묻으며 나지막이 말했다.“일단 좀 내려줘요.”“시간 없어. 네가 걷는 것보단 이게 빨라.”윤혜인이 짜증스레 말했다.“바쁘면 갈 길 가요. 내가 언제 데려다 달라고 했나요?”하지만 이준혁은 전혀 그녀의 말을 들어주지 않았다. 결국 윤혜인은 그대로 조수석까지 옮겨질 수밖에 없었다. 그녀는 곧바로 안전벨트를 풀고 차 손잡이를 잡아당겼다. 그러나 문이 잠겨 있어 열리지 않았다.윤혜인이 운전석 쪽을 돌아보며 말했다.“문 좀 열어요.”그러자 이준혁이 덤덤한 목소리로 답했다.“약속 있다며?”그녀가 다시 입을 열려던 찰나, 이준혁이 딱딱하게 굳은 목소리로 덧붙였다.“내 차 타고 가는 게 더 빠를 거야.”그의 차가운 눈빛과 위험한 분위기에, 윤혜인은 자기도 모르게 몸이 굳어버렸다. 이준혁이 한 손을 핸들에 올려놓은 채 물었다. “오늘 내가 오지 않았으면, 할아버지한테 우리가 이혼한 거 말할 생각이었지?”윤혜인은 침묵했다. 실패하긴 했지만, 그의 말 대로 오늘 밝힐 생각이었다. 이준혁이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참 대단하네. 할아버지 건강보다는 딴 남자와 새 출발하는 게 더 중요하다, 이거야?”오늘 그녀가 본 이태수는 컨디션이 그리 나빠 보이지 않았었다. 윤혜인은 이준혁이 왜 화를 내는지 이해되지 않았다.“당신이야말로 언제까지 숨길 생각이에요? 오늘 얘기 나눠봤는데, 못 받아들이실 정도는 아닌 것 같았어요.”그 말을 들은 이준혁의 표정이 더 안 좋아졌다. 그가 좌석 사이에 끼워져 있던 종이 뭉치를 세차게 던지며 화난 목소리로 말했다. “뭐라고 적혀 있는지, 네가 직접 읽어!”종이가 날리면서 윤혜인의
‘하. 나랑은 마주치기도 싫다는 건가?’이준혁은 답답한 마음에 차 악셀을 힘껏 밟았다. 차가 요란한 소리를 내며 빠르게 주차장을 떠났다.윤혜인은 갑작스러운 상황에 다급히 안전벨트를 매며 손잡이를 찾았다. 눈물로 빨개졌던 뺨이 순식간에 하얗게 질렸다. 제대로 숨조차 쉴 수 없을 정도로 빠른 속도였다.“제발 좀 천천히 가면 안 돼요?”하지만 이준혁은 찬 바람이 쌩쌩 부는 얼굴로 앞만 바라볼 뿐이었다. 그렇지만, 막상 계기판을 들여다보면 속도는 줄고 있었다. 그러나 윤혜인은 여전히 속이 울렁거렸다. 이준혁은 속도만 줄였을 뿐, 이리저리 사람이 없는 골목을 찾아 차 방향을 바꿨다. 그녀는 조금이라도 속을 진정시키기 위해 최대한 몸을 등받이에 붙이며 눈을 감았다.그러는 와중에 한구운한테서 또 연락이 왔다. 윤혜인은 힘겹게 전화를 받았다. 전화 너머 한구운의 걱정스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혜인아, 지금 어디야?”그녀가 지친 목소리로 말했다.“곧 도착해요.”그러자 한구운도 뭔가 눈치챘는지, 긴말 없이 깔끔히 답했다.“알겠어. 그럼 문 앞에서 기다릴게.”그 순간, 또 차의 속도가 올라가는 것이 느껴졌다. 윤혜인은 놀란 나머지 핸드폰을 떨어뜨리고 말았다. 하지만 그녀는 주우려 몸을 숙이지 않았다. 앞으로 숙였다가 사고라도 난다면 크게 다칠 것 같았다.잠시 뒤, 마침내 약속장소가 보이기 시작했다. 이미 앞에 한구운이 나와 있었다. 그 모습을 발견한 윤혜인이 다급히 외쳤다.“차 좀 세워요!”하지만 이번에도 이준혁은 못 들은 척했다.윤혜인이 협박하듯 말했다.“안 세우면, 저 진짜 여기에 토할 거예요!”끼익하는 소리와 함께, 차가 겨우 1센치 간격을 두고 한구운 앞에 멈춰 섰다. 윤혜인은 간신히 후들거리는 다리를 지탱하며 차에서 내렸다. 하지만 첫발을 내딛자마자 무릎이 풀려 휘청거렸다. 한구운이 제때 부축해 주지 않았다면, 그녀는 그대로 넘어졌을지도 몰랐다. 윤혜인은 본인 아니게 한구운에게 몸을 기댈 수밖에 없었다. “괜찮아?”한구운이 부드러운
이준혁의 존재를 눈치챈 한구운이 윤혜인에게 물었다.“자리 옮길까?”윤혜인은 고개를 저었다.“괜찮아요.”언제까지 피할 수는 없었다. 게다가 이곳은 공공장소, 전처럼 이준혁이 무모한 짓을 벌일 것 같지 않았다. 하지만 막상 이준혁이 다가오는 모습을 보자, 윤혜인은 마음이 심란해졌다. 특히 뚫어져라 보는 그의 시선이 너무나도 소름이 돋았다.이준혁이 그녀가 앉아 있던 옆 테이블로 향하는 걸 본 순간, 윤혜인은 참지 못하고 소리쳤다.“언제까지 따라올 거예요!”그리고 찾아온 정적, 윤혜인은 살짝 민망한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최근 그에게 시달린 데다가, 좀 전의 그 질주까지, 예민할 대로 예민해진 상태였다. 하지만 그녀와 반대로 이준혁의 얼굴엔 어떠한 동요도 보이지 않았다. 윤혜인은 왠지 모르게 불안한 마음이 들었다. 그런데 이때, 한 여자가 그의 팔에 매달리며 애교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준혁 오빠.”윤혜인은 잠시 멍하니 자리에 굳어버렸다. 너무나도 당연히 이준혁이 자신을 따라왔을 거라 추측한 실수였다. 이준혁은 정말로 다른 약속이 있어 그녀를 데려다준 것이었다. 그제야 그의 옷차림도 다르게 보였다. 좀 전에 나타난 여자 때문에 꾸민 것 같았다. 윤혜인을 발견한 여자가 눈을 흘기며 입을 열었다.“좀 전에 뭐라고 했어요?”하지만 윤혜인이 망설이며 대답하지 않자, 정유미가 짜증이 담긴 목소리로 다시 물었다.“제 말 안 들려요?”여자의 정체는 다름 아닌 정씨 집안의 금지옥엽 정유미였다. 항상 주변의 떠받음을 받으며 살아온 그녀였기에, 자신의 물음에 대답도 하지 않은 윤혜인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이때, 한구운이 윤혜인을 보호하듯 뒤로 잡아당기며 답했다.“죄송해요. 저한테 한 말이었어요.”그제야 정유미도 납득하고 윤혜인에게 관심을 껐다. 그런데 이때, 윤혜인의 손목을 잡고 있는 한구운을 본 이준혁이 싸늘하게 말했다. “오지랖은.”앞뒤 잘린 말이었지만, 누구에게 한 말인지 모를 수 없었다.순식간에 주변의 시선이 다시 그들에게로 쏠렸다. 모
어딘가 이상하긴 했지만 몸이 이성을 앞서 통제할 수가 없었다. 순간 사악한 생각에 사로잡힌 남자는 소원의 머리채를 확 잡아당겨 고개를 쳐들게 하더니 욕설을 퍼부었다.“젠장. 발랑 까졌네. 남자 꼬시는 건 어디서 배웠어?”소원은 강직한 성격이었지만 이런저런 일을 겪으면서 가끔은 성격을 앞세우기보다 머리를 써야 한다는 걸 알게 되었다. 특히 지금처럼 불리한 상황에서는 머리를 쓰는 것만이 유일한 살길이었다.“오빠, 도... 도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거예요...”소원은 몸을 파르르 떨고 있었지만 손바닥엔 어느새 튼실한 나뭇가지가 들려 있었다. 아까 남자가 잠깐 방심한 틈을 타 바닥에서 주운 것이었다.남자가 소원을 확 끌어당겨 품에 껴안자 소원은 깜짝 놀랐지만 여전히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오빠, 지금 이 상태로는 너무 불편한데 손이라도 좀 풀어줄래요?”남자는 소원에게 당한 적이 있었기에 바로 경각심을 세웠다.“무슨 꿍꿍이야?”“아니. 이러면 뭘 하기도 불편하잖아요.”소원이 제안했다.“혹시 걱정되면 한쪽만 풀어주고 다른 한쪽은 창문에 묶어두면 되잖아요. 안 그래요?”남자는 제법 소원의 아이디어가 제법 마음에 들었다. 알아서 결박해달라고 하니 정말 땡큐였다.“정말 다른 꿍꿍이 없는 거지? 경고하는데 다른 수작 부리면 당장 그 모가지를 비틀어 버릴 거야.”남자가 소원에게 경고했다.소원은 너무 무서워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하겠다는 듯 연기했다.“오빠, 그게 도대체 무슨 소리예요? 내가 어떻게 감히 그런 생각을 하겠어요. 사람 하나 죽여도 모를 곳에 버려졌는데 오빠 말이라도 잘 들어야 고통이라도 덜 받을 거 아니에요.”“그래, 총명하긴 하네.”남자가 만족스럽게 말했다.“당연하죠. 오빠, 나 지금 클럽에서 도우미로 일하고 있어서 돈 많은 사람들이 어떻게 노는지 다 알고 있어요. 내가 오빠 잘 모실 테니까 제발 때리지만 말아줘요.”어차피 소원이 아가씨라고 신분을 속여도 남자는 그게 진실인지 아닌지 판단할 방법이 없었다. 아니나 다를까 소원의 말
여자는 소원이 쓰러지는 걸 보고 웃음을 터트렸다.“그래도 꽤 오래 버티네. 다른 사람보다 몇분 더 버텼어.”여자는 이렇게 말하더니 계속 앞으로 질주했다....얼마나 잤을까, 어렴풋이 잠에서 깨보니 작은 판잣집에 누워 있었다. 크지 않은 걸 봐서는 아마 임시 피난처 같아 보였다.손발이 묶인 소원은 약물 때문인지 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밧줄을 풀고 도망가는 건 거의 불가능해 보여 아예 포기하고 체력을 보존하며 주변을 살피며 소리를 유심히 들었다.소원의 판단에 의하면 바깥엔 두 사람이 돌아가며 지키는 것 같았다. 10분 전까지만 해도 두 사람의 대화 소리가 들렸는데 이내 대화 소리가 사라지고 한 사람이 걸어 다니는 소리밖에 들리지 않았다.얼마 지나지 않아 나무문이 끼익하고 열리더니 머리에 붕대를 감은 남자가 들어왔다. 그는 바로 어젯밤 소원을 차에 태운 그 운전기사였다.남자는 안으로 들어오며 문을 닫더니 소원에게로 가까이 다가와 침을 내뱉었다.“빌어먹을 년. 내가 운반만 몇 년을 했는데 이렇게 당해본 건 처음이네. 이 화를 참을 수가 있어야지.”소원은 이 남자가 전문적으로 이런 거래를 하는 사람이라고 추측했다. 운반 작업만 몇 년을 했다고 토로하는 걸 봐서는 지금까지 쭉 이런 거래를 해왔고 많은 사람이 피해를 봤다는 뜻이기도 했다.“나는 당신이 누군지도 몰라요. 나한테 왜 이러는 건데요?”소원이 일부러 놀란 척 물었다. 지금은 강하게 나가면 오히려 매를 버는 걸 수도 있으니 차라리 그들이 원하는 대로 해주며 매라도 적게 맞아 체력을 보존하는 편이 더 좋을 것 같았다.“당연히 모르지. 당신이 나를 알았으면 내가 이 일을 할 수 있었겠어?”남자가 손을 비비며 가까이 다가오더니 냅다 소원을 걷어차며 이렇게 말했다.“내가 그날 말했지. 다리를 분질러 버리겠다고. 지금 그 약속을 지킬 때야.”다리뼈를 정통으로 맞은 소원은 하얗게 질린 얼굴로 애원했다.“미안해요. 일부러 그런 건 아니에요. 나도 그저 살고 싶어서...”남자가 그런 소원을
소원이 잠깐 망설이더니 결국 입을 열었다.“혹시 신고 좀 해주실 수 있나요?”안경을 쓴 여자는 꽤 통쾌했다.“당연하죠. 지금 바로 신고해 줄게요.”여자는 소원이 근심할까 봐 그러는지 바로 스피커폰으로 돌렸고 수화기 너머로 콜센터의 노련한 목소리가 들렸다.“여보세요. 여기는 서울 경찰서입니다. 뭘 도와드릴까요?”여자가 말했다.“안녕하세요. 길에서 많이 다친 여성분을 발견했는데 아마도 나쁜 사람을 만난 것 같아요. 지금 혼자 길에 버려졌는데 신고해달라고 해서요.”“그 여성분 이름이 어떻게 되시죠?”여자가 소원을 힐끔 쳐다보며 물었다.“이름이 뭐예요?”소원이 이름을 말했다.“안녕하세요. 누군가가 저를 납치했어요. 모르는 사람이고 차량번호는 XX...”“네, 지금 바로 경찰 인력을 그쪽에 보내겠습니다. 그 자리에서 기다려주세요.”통화가 끝나자 소원의 경계심도 점점 내려가기 시작했다. 그때 여자가 이렇게 말했다.“타요. 밖에 비가 이렇게 오는데 어깨에서 아직 피나잖아요. 그러다가 경찰 올 때까지 못 버틸 것 같아요...”소원은 아까 일을 겪으면서 여자에 대한 경계심이 낮아진 상태였다. 게다가 아까 콜센터와 통화하며 자기 이름을 진세연이라고 밝혔다.“네.”소원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소원이 차에 오르자 여자는 조수석 캐비닛에서 수건 하나를 꺼내서 건네며 말했다.“일단 좀 닦아요. 그러다 감기 걸리겠어요.”“고마워요.”소원이 수건을 받아 얼굴에 묻은 물기를 닦아내더니 흠뻑 젖은 머리카락을 닦았다.“콜록콜록...”소원은 끝내 참지 못하고 재채기를 했다.“진세연 씨, 오늘 정말 고마워요.”소원이 수건을 건네며 감사 인사를 전했다.“고맙긴요.”여자가 수건을 받아 가다니 조수석에 던지며 담배를 꺼내 입에 물더니 한쪽 팔을 차창에 기대고는 말했다.“어차피 기다리고 있었는데요 뭐.”빗소리가 너무 커서 소원은 여자가 무슨 말을 하는지 잘 듣지 못해 다시 한번 물었다.“진세연 씨, 뭐라고 하셨어요?”여자가 웃으며 말했다.“별거
이것이 오히려 소원에게는 기회가 되었다. 소원은 아무렇지 않은 듯 앞쪽을 주시하며 속도를 확인했다. 속도가 70대까지 내려가자 기회를 잡은 소원은 천천히 옆으로 움직이다 기회를 잡고 운전기사가 방심한 틈을 타 손잡이에 손을 넣고 차 문을 열었다.탈칵.그렇게 운전기사가 미처 반응하기도 전에 소원은 차 문을 열고 바깥으로 뛰었다.“어, 저 빌어먹을...”화들짝 놀란 운전기사의 목소리가 빗속을 뚫고 소원의 귀로 들어왔다가 차와 함께 사라졌다.쿵.소원이 바닥에 떨어지며 여러 번 뒹굴었다. 오른쪽 어깨가 빠졌는지 이루 말할 수 없는 고통이 밀려왔다. 소원은 이를 악문 채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걸음을 옮길 때마다 마치 칼로 팔을 자르는 것처럼 너무 아팠다.앞으로 질주하던 차는 이내 방향을 틀고 뒤쫓아오기 시작했다. 큰비로 시야가 가려진 덕분에 소원은 옆에 있던 풀밭으로 도망갈 수 있었지만 바닥이 물컹해 발자국까지 숨길 수는 없었다.이내 운전기사가 뒤따라왔다. 건장한 남자였기에 달리는 게 소원보다 빠를 수밖에 없었다. 소원은 걸음을 멈추더니 몽둥이 하나를 줍고 풀숲에 숨어 소리 낼 엄두를 내지 못했다. 운전기사가 한걸음 다가올 때마다 자박자박하는 물소리가 들렸다.“아가씨, 좋은 말로 할 때 그냥 나와. 내가 찾아내면 다리부터 분질러 버릴 테니까. 헤헤. 그러면 좋은 값에 팔 수가 없잖아. 그러면 장기를 뜯어내 팔고 사지를 잘라서 인형으로 만드는 수밖에 .:소원은 온몸에 소름이 끼쳤다.‘도대체 누가 나한테 이렇게 끔찍한 일을 저지르려는 거지?’순간 머릿속에 여러 이름이 떠올랐다.‘방민아, 육연주, 그리고 서씨 가문...’“아가씨, 말 들어. 다리라도 온전하면 아가씨도 덜 아프지 않겠어?”“숨어도 소용없어. 여기 내 친구들 많아. 어딜 가든 쉽게 도망치진 못할 거야.”소원은 마음이 강한 편이었기에 상대가 어떻게 말하든 그 자리에 숨어 꼼짝달싹하지 않았다. 운전기사가 2미터도 남지 않은 곳까지 가까이 다가오자 소원이 벌떡 일어나더니 손에 쥔 나
운전기사가 백미러로 소원을 보며 사과했다.“손님, 죄송해요. 감기 걸렸는데 손님에게 전염될까 봐 걱정돼서요.”소원은 별생각 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더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앱으로 차를 불렀기에 가는 내내 차 안에서 하는 대화가 녹음되었고 버튼 하나만 누르면 신고할 수 있었기에 소원은 시름 놓고 뒷좌석에서 눈을 붙였다.얼마나 지났을까, 소원이 눈을 번쩍 떴다. 아까 운전기사가 통화를 하는 것 같았는데 소원이 깨어났을 땐 다시 마스크를 끼고 운전하고 있었다.소원은 꿈이라도 꾼 줄 알고 창밖을 내다봤다. 날씨가 우중충한 게 비가 내릴 것 같았다. 도로를 유심히 살피던 소원은 이상한 낌새를 눈치채고 얼른 핸드폰을 꺼내며 물었다.“기사님, 혹시 길 잘못 드신 거 아니에요?”앱을 확인해 보니 차는 이미 경로를 한참 이탈했고 아예 다른 길로 가고 있었다.“아니에요. 이 길이 더 가깝고 비용도 적게 나와요.”방금 전까지만 해도 코가 막힌 듯한 목소리던 운전기사는 지금 꽤 깔끔하고 상쾌한 목소리로 말하고 있었다.소원은 점점 한산해지는 주변 풍경을 보며 불안함이 엄습했다.“아니에요. 기사님. 지금 당장 원래 경로로 돌아가서 내비게이션 따라 운전해 주세요. 비용은 앱에 나온 대로 드릴게요.”“손님, 그러면 아까 말했어야지. 그 길 진작에 지나쳐서 다시 돌아가려면 너무 멀어요. 걱정하지 마요. 곧 도착할 거예요.”운전기사는 소원의 요구를 들어주지 않고 계속 엑셀을 밟았고 시속 120까지 올라갔다. 국도라 제한속도가 80인데 말이다.소원은 점점 마음이 불안해져 신고 버튼을 누르려는데 배터리가 닳은 핸드폰이 소리를 내며 꺼졌다. 정말 되는 일이 없는 하루였다.핸드폰이 먹통이니 소원은 다른 방법을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어딘가 이상했다. 자세히 돌이켜보니 차에 오르기 전 차량 색깔과 번호를 확인했는데 아무 문제가 없었기 때문이다.‘근데 왜 이렇게 불안한 거지?’소원은 옆에 있는 기사 카드를 발견했다. 카드에 찍힌 운전기사는 네모난 얼굴에 눈썹이 짙
소원은 이번 달에 두 번이나 반차를 냈다. 다른 직원도 한 달에 겨우 2날 반 정도만 반차를 낼 수 있었기에 소원도 민망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다행히 영숙은 어머니의 상황이 좋지 않다는 소원의 말을 듣고 조심해서 다녀오라는 말만 덧붙였다. 소원은 얼른 기사에게 방향을 돌려 요양원으로 향하라고 했다.요양원에 도착한 소원을 보고 간병인 아줌마가 무척 놀라며 물었다.“소원 씨, 어쩐 일이에요?”소원은 침대에 조용히 누워있는 전미영을 보고 한시름 놓더니 이렇게 말했다.“요양원에서 상태가 좋지 않다고 연락이 와서요.”“괜찮아요. 사모님 오후에 약간의 경련이 있긴 했지만 오래 지속되진 않았어요. 주사를 맞고 지금까지 쭉 안정적이에요.”간병인 아줌마가 소원을 다독였다.“소원 씨, 너무 걱정하지 마요.”“다행이네요.”소원이 침대맡으로 다가가 앉았다. 중도에 잠깐 깨긴 했지만 전미영은 여전히 소원을 보고도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매주 보러 와도 전미영은 소원을 알아보는 법이 없었기에 소원도 이제 적응했다. 언젠가 육경한이 전미영을 보러 온 적이 있는데 육경한을 보고는 매우 즐겁게 반겨줬다. 소원을 대할 때 느껴지는 거리감만 보면 오히려 육경한이 친자식 같기도 했다.소원도 이 일에 관해 의사에게 물어본 적이 있지만 의사는 전미영이 깨어나자마자 본 사람이 육경한이라 육경한에게 익숙함과 신뢰감을 느낀다고 했고 별다른 방법이 없는 상황에서는 거부감을 느끼지 않는 사람을 만나는 게 몸 상태를 완화하는 데 도움이 될 거라고 말해줬다.게다가 애초에 전미영을 보살피는 일은 육경한이 전부 책임졌기에 무턱대고 육경한을 쫓아낼 수도 없었다. 그저 육경한이 문병 오는 시간을 피해 오는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육경한은 일이 바빴기에 소원을 보러 오는 일이 드물어 그렇게 걱정할 필요는 없었다.간병인 아줌마는 소원이 어딘가 피곤해 보이자 이렇게 말했다.“소원 씨, 얼른 들어가 쉬어요. 출근하느라 피곤해서 그런 거 아니에요? 멀리서 사는 걸로 알고 있는데 문병 온지 얼마나 됐다고
집사는 일 처리를 마치고 서현재의 핸드폰을 서진태에게 바쳤다.“도련님 핸드폰 아까부터 계속 울리고 있습니다. 소원이라는 여자가 계속 찾는 것 같은데 뭘 알고 있는 게 아닌지 의심됩니다. 처리할까요?”집사는 피도 눈물도 없는 사람이었고 일 처리가 깔끔한 편이라 서진태의 신임을 받고 있었다. 서진태는 쉴 새 없이 날아드는 부재중 전화와 메시지에 하얗게 센 눈썹을 찡그렸다.“이 여자가 정말...”서진태가 수염을 만지작거리며 말했다“육경한 그 자식이 무슨 뜻인지 모르겠네. 이 여자를 죽이든 풀어주든 일단 육경한의 생각부터 파악해야 해.”서진태는 겉으로만 육경한에게 공손했지 속으로는 죽일 듯이 미워했다. 서현재를 빌미로 서씨 가문을 여러 번이나 물고 늘어졌지만 목숨 따위 아까워하지 않을 정도로 실력이 강했고 외국에서 레전드로 남을만한 경험을 쌓은 덕분에 이 바닥에서 명성을 널리 날린 터라 서씨 가문도 함부로 건드릴 엄두를 내지 못했다. 서씨 가문은 아직 지켜야 할 사람이 있었다.하지만 집사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들이 세운 계획에 위협이 되는 사람이라면 백 명의 억울한 사람을 만들더라도 상관없다고 생각했다.“어르신, 이 여자는 폭탄이나 마찬가지예요. 그러다 결혼식에 차질이라도 생기면 그땐 육씨 가문과 원수를 질뿐더러 도련님을 휘두를 핑계가 없어지는 거잖아요. 모든 일이 난장판이 될 거라고요.”충성심이 하늘을 찌르는 집사는 사실 서진태가 동의하든 하지 않든 소원을 제거해 서씨 가문 후계자 자리에 위협이 되는 사람은 모조리 제거할 생각이었다. 당연히 집사가 생각하는 후계자는 서현재가 아니었다.선동당한 서진태는 집사의 말이 맞다고 생각했다. 이 여자는 정말 폭탄과도 같은 존재였다. 서현재도 이 여자를 위해 여러 번 서진태의 뜻을 거스른 적이 있기에 미래를 대비해 소원을 제거하는 편이 나을 것 같다고 생각했다.서진태가 집사에게 귀띔했다.“사람 보내서 쥐도 새도 모르게 처리해. 인신매매 업자에게 팔아도 좋으니까 최대한 깔끔하게 처리해야 할 거야. 절대
“요즘 바빠?”윤혜인이 물었다.“음... 조금.”소원의 대답은 거짓말이기도, 거짓말이 아니기도 했다. 클럽 일은 확실히 바빴다. 낮에는 잠을 보충하고 저녁에 나가서 새벽까지 일해야 하니 개인 시간이 별로 없었다. 어머니 전미영을 보러 갈 때도 퇴근하고 바로 가야 했기에 약간 피곤하기도 했다.그리고 이 일에 윤혜인을 끌어들이고 싶지 않았다. 세 아이를 케어해야 하니 생각보다 많이 힘들 것이다. 게다가 육경한은 유진의 친부니 이준혁이 개입한다 해도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고 결국 혼자 힘으로 이겨내야 했다.“그래. 나도 요즘 애가 어려서 모임을 줄였어. 애들이 조금 더 크면 아름이까지 데리고 너랑 유진이 보러 갈게.”“그래.”소원은 딱히 다른 설명을 붙이지 않고 웃으며 대답했다.“유진이랑 잘 지내고 있어.”윤혜인이 말했다.“그래. 꼭 그럴게.”전화를 끊고 나서도 소원은 윤혜인이 했던 말을 떠올렸다. 잘 지내라는데 유진이 육경한과 과연 잘 지낼 수 있을지 의문이었다.육경한 혼자라면 소원도 포기했을지 모른다. 소원의 몸 상태로는 유진의 곁을 오래 지키지 못할 수도 있다. 육경한 옆에 있으면 어느 날 소원이 바람처럼 사라진다 해도 부모님이 없는 것보다는 나을 것이다.하지만 소원은 방민아를 믿을 수가 없었다. 방민아는 사악한 속내를 숨기는데 능했기에 결혼해서 아이라도 가지면 유진을 눈엣가시로 생각하고 제거하려 할지도 모른다. 하여 소원은 더 포기할 수 없었다. 유진이 표적이 되는 건 절대 두고 볼 수 없었다.얼마 지나지 않아 윤혜인이 서현재의 개인 번호를 보내왔다. 소원이 얼른 전화를 걸었지만 받는 사람이 없었다. 다시 한번 걸어도 받지 않자 소원은 어쩔 수 없이 메시지를 보냈다.[서현재 씨, 나 소원이에요. 보면 회신해요. 긴히 해야 할 말이 있어요.]메시지를 보냈지만 한참 동안 지나도 답장이 없었다. 소원은 마음이 점점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3일 뒤면 결혼인데 그때 가서 서씨 가문의 통제를 벗어나려면 더 힘들어지게 된다. 게다가 서씨 가문은
옆에 있던 사람이 좋다고 손뼉을 쳤다.“그래. 그래. 욕을 바가지로 먹어야 정신을 차리지. 인플루언서가 된 느낌이 어떤 건지 알려주자.”순간 구경하던 직원들이 일제히 핸드폰을 꺼내 소원의 얼굴을 찍으며 욕설을 퍼부었다.육연주는 이런 상황이 참 마음에 들었다. 꼬리 치길 좋아하는 소원을 인터넷에 폭로해 얼마나 뻔뻔한 사람인지 세간에 알리는 것도 좋을 것 같았다.소원은 어떻게 해명해야 할지 몰랐다. 사람들 눈에 육연주는 서현재의 와이프였고 서씨 가에서 인정한 며느릿감이었지만 소원은 아무 명분이 없었다. 그런 소원이 서한 그룹까지 찾아왔으니 이상하게 생각할 만도 했다.하지만 소원은 서현재가 소용돌이에 휘말리는 걸 두고 볼 수 없었다. 게다가 서씨 가문에서 육연주를 고른 건 다 이유가 있었다. 육연주는 공부라곤 해본 적이 없는 여자라 금융은 일절 몰랐기에 서한 그룹의 경영에 간섭할 일이 없었다. 그리고 육연주는 육씨 가문 사람이라 무슨 일이 있어도 언제든 발을 뺄 수 있었다.“육연주 씨, 서현재와 얘기 나누러 온 것뿐인데 뭐가 방해된다고 그래요.”소원은 여전히 포기할 생각이 없어 보였다. 육연주는 화가 치밀어오른 나머지 가방을 들어 소원에게 던졌다.“정말 여간 뻔뻔한 게 아니네요. 이런 수모를 겪어도 그런 말이 나와요?”소원이 옆으로 쓱 비키며 공격을 피했지만 육연주는 소원을 놓아줄 생각이 없었고 보디가드를 불러 소원을 끌어냈다.“빌어먹을 년.”육연주는 소원이 끌려 나가는 걸 보고도 여전히 분이 풀리지 않았다.벌건 대낮만 아니었으면 정말 소원을 때려죽이고 싶었지만 결혼이 코앞이라 손에 피를 묻힐 수 없으니 여기서 멈췄지 아니면 정말 때려죽였을지도 모른다.“거기.”육연주가 데스크 직원들을 매섭게 쏘아보더니 경고했다.“오늘 일 현재 씨 귀에 들어가는 날엔 당신들부터 해고할 거야.”육연주는 이미 서한 그룹의 사모님이라도 된 것처럼 행동했다. 데스크 직원들은 육연주가 언젠간 서씨 가문 안주인이 될 거라는 걸 알고 있었기에 그저 눈치만 볼 뿐 대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