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준혁은 더 이상 이천수와 대화를 나누고 싶지 않았다. 그가 서재를 나서려던 순간, 갑자기 뒤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다 회사 발전을 위해서 이러는 거잖아. 이번만큼은 그냥 좀 따라.”그 말에 이준혁이 발걸음을 멈추며 무심하게 답했다.“알겠어요.”그제야 이천수는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그런데 이때, 이준혁이 덧붙였다.“앞으로 함부로 본가에 돌아오는 일 없었으면 좋겠어요.”그 말에 이천수는 다시 기분이 상했다. 비록 지금은 해외에 머물고 있으나, 엄연히 이곳도 그의 집이었다. 그런데 마음대로 돌아오지 말라니, 화가 치밀어 올랐다. 하지만 일단 이준혁이 맞선에 동의했기 때문에, 오늘만큼은 이 건방진 태도를 그냥 넘어가기로 했다.“그래, 알겠어.”이 에너지 프로젝트는 정말 대형 프로젝트였지만, 그동안 이태수의 손에 있어 건드리지 못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태수의 건강이 악화한 만큼 그에게도 기회가 돌아갔다. 이번에 성공만 하게 한다면 회사의 권력 구도가 바뀔 지도 몰랐다. 이천수는 다시 권력의 최상위층 자리를 되찾고 싶었다. 그래야 이준혁은 물론 자신과 대립하는 인원들을 배제할 수 있기 때문이다.다음 날.윤혜인은 열심히 청소하고 있었다. 잠시 머물러 들어왔던 집이었지만, 소원의 고집으로 아예 이곳에 눌러앉게 되었다. 물론 공짜는 아니었다. 그건 윤혜인 자신이 용납할 수 없는 문제였다. 그래서 이곳에 머무는 대신 소원에게 일정한 집세를 지불하기로 약속했다. 그리고 이 집은 소원의 소유이긴 했지만, 자주 머무는 곳은 아니었다. 그녀는 평소 본가에 머물다가, 혼자만의 시간이 필요할 때만 이곳에 왔다. 이 집은 소원에게 있어 비상금, 또는 아지트 같은 개념이었다.윤혜인이 매물로 올려놓은 그 집은 아직 팔리기 전이었다. 부동산 두 곳에서 연락해 오긴 했으나, 시세가 마음에 들지 않아 못 팔고 있었다. 고생해서 마련한 첫 집을 헐값에 팔 순 없었다.오후, 갑자기 한구운한테서 연락이 왔다. 그는 도움이 필요한 일이 있으니, 잠시 만나달라고 부탁해 왔다.
윤혜인은 어쩌면 이태수가 둘의 이혼을 눈치채고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도 그럴 것이 이준혁과 함께 병문안 온지도 한참 되었었다. 어쩌면 지금이 말할 기회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할아버지, 사실….”하지만 그녀가 말을 채 잇기도 전에 이준혁이 문을 열고 들어왔다.마침 중요한 회의를 마치고 왔는지 평소보다 더 꾸민 모습이었다. 지금 상황만 아니었다면, 윤혜인은 그의 멋짐에 설레었을지도 몰랐다. 이준혁이 자연스레 그녀에게 다가와 어깨를 꼭 감쌌다. 윤혜인은 안 그래도 예상치 못한 등장에 매우 당황하고 있었는데, 스킨십까지 해 오자 무척 불편했다.“기다리지, 왜 먼저 왔어?”그가 마치 행복했던 그 시절로 돌아간 것처럼, 부드러운 목소리로 물었다.윤혜인은 차마 이태수가 보는 앞에서 그를 밀어낼 수 없어 조용히 답했다.“바쁜 것 같아 보여서요.”이준혁이 가볍게 그녀의 등을 쓰다듬으며 말했다.“아무리 바빠도 할아버지 뵈러 가는데 빠질 수는 없지.”잠깐 전날 밤에 있었던 일이 헷갈릴 정도로 다정한 목소리였다. 이준혁이 마음먹고 꼬신다면 넘어오지 않을 여자가 있을까? 윤혜인은 문득 그런 생각마저 들었다. 전에 겪은 아픈 기억들만 아니었다면, 다시 그에게 빠졌을지도 몰랐다. 그 뒤로 둘은 30분 더 다정한 척 연기하며 병실에 머물렀다. 정말 유난히도 길게 느껴지는 시간이었다. 이준혁은 얘기를 나누는 동안 끊임없이 그녀를 쓰다듬거나 꽉 끌어안기를 반복했다. 그 때문에 윤혜인은 한시도 긴장을 풀지 못한 채 얼굴을 붉힐 수밖에 없었다.그녀의 안색을 본 이태수가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혜인아, 너 괜찮아? 왜 얼굴이 이렇게 빨개?”그러자 이준혁도 고개를 숙여 그녀를 바라봤다. 그의 눈빛은 마치 태양을 담은 것처럼 뜨거웠다.윤혜인이 시선을 옮기며 얼버무렸다.“더워서요, 할아버지.”이태수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그렇겠네. 내가 늙어서 추위에 많이 약해. 에어컨을 좀 세게 틀었나봐.”잠시 뒤, 드디어 병실을 빠져나온
말릴 틈도 없이 전화가 끊겨버렸다. 그가 차가운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말했다. “마침 나도 그쪽에 약속이 있었어.”그리고는 예고도 없이 윤혜인을 들어 올렸다. 그녀는 깜짝 놀라 자기도 모르게 이준혁의 목에 팔을 두르고 말았다. 사람들도 많이 지나는 곳에 이런 자세로 있으려니 윤혜인은 부끄러움이 밀려왔다. 그녀가 고개를 이준혁의 품에 파묻으며 나지막이 말했다.“일단 좀 내려줘요.”“시간 없어. 네가 걷는 것보단 이게 빨라.”윤혜인이 짜증스레 말했다.“바쁘면 갈 길 가요. 내가 언제 데려다 달라고 했나요?”하지만 이준혁은 전혀 그녀의 말을 들어주지 않았다. 결국 윤혜인은 그대로 조수석까지 옮겨질 수밖에 없었다. 그녀는 곧바로 안전벨트를 풀고 차 손잡이를 잡아당겼다. 그러나 문이 잠겨 있어 열리지 않았다.윤혜인이 운전석 쪽을 돌아보며 말했다.“문 좀 열어요.”그러자 이준혁이 덤덤한 목소리로 답했다.“약속 있다며?”그녀가 다시 입을 열려던 찰나, 이준혁이 딱딱하게 굳은 목소리로 덧붙였다.“내 차 타고 가는 게 더 빠를 거야.”그의 차가운 눈빛과 위험한 분위기에, 윤혜인은 자기도 모르게 몸이 굳어버렸다. 이준혁이 한 손을 핸들에 올려놓은 채 물었다. “오늘 내가 오지 않았으면, 할아버지한테 우리가 이혼한 거 말할 생각이었지?”윤혜인은 침묵했다. 실패하긴 했지만, 그의 말 대로 오늘 밝힐 생각이었다. 이준혁이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참 대단하네. 할아버지 건강보다는 딴 남자와 새 출발하는 게 더 중요하다, 이거야?”오늘 그녀가 본 이태수는 컨디션이 그리 나빠 보이지 않았었다. 윤혜인은 이준혁이 왜 화를 내는지 이해되지 않았다.“당신이야말로 언제까지 숨길 생각이에요? 오늘 얘기 나눠봤는데, 못 받아들이실 정도는 아닌 것 같았어요.”그 말을 들은 이준혁의 표정이 더 안 좋아졌다. 그가 좌석 사이에 끼워져 있던 종이 뭉치를 세차게 던지며 화난 목소리로 말했다. “뭐라고 적혀 있는지, 네가 직접 읽어!”종이가 날리면서 윤혜인의
‘하. 나랑은 마주치기도 싫다는 건가?’이준혁은 답답한 마음에 차 악셀을 힘껏 밟았다. 차가 요란한 소리를 내며 빠르게 주차장을 떠났다.윤혜인은 갑작스러운 상황에 다급히 안전벨트를 매며 손잡이를 찾았다. 눈물로 빨개졌던 뺨이 순식간에 하얗게 질렸다. 제대로 숨조차 쉴 수 없을 정도로 빠른 속도였다.“제발 좀 천천히 가면 안 돼요?”하지만 이준혁은 찬 바람이 쌩쌩 부는 얼굴로 앞만 바라볼 뿐이었다. 그렇지만, 막상 계기판을 들여다보면 속도는 줄고 있었다. 그러나 윤혜인은 여전히 속이 울렁거렸다. 이준혁은 속도만 줄였을 뿐, 이리저리 사람이 없는 골목을 찾아 차 방향을 바꿨다. 그녀는 조금이라도 속을 진정시키기 위해 최대한 몸을 등받이에 붙이며 눈을 감았다.그러는 와중에 한구운한테서 또 연락이 왔다. 윤혜인은 힘겹게 전화를 받았다. 전화 너머 한구운의 걱정스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혜인아, 지금 어디야?”그녀가 지친 목소리로 말했다.“곧 도착해요.”그러자 한구운도 뭔가 눈치챘는지, 긴말 없이 깔끔히 답했다.“알겠어. 그럼 문 앞에서 기다릴게.”그 순간, 또 차의 속도가 올라가는 것이 느껴졌다. 윤혜인은 놀란 나머지 핸드폰을 떨어뜨리고 말았다. 하지만 그녀는 주우려 몸을 숙이지 않았다. 앞으로 숙였다가 사고라도 난다면 크게 다칠 것 같았다.잠시 뒤, 마침내 약속장소가 보이기 시작했다. 이미 앞에 한구운이 나와 있었다. 그 모습을 발견한 윤혜인이 다급히 외쳤다.“차 좀 세워요!”하지만 이번에도 이준혁은 못 들은 척했다.윤혜인이 협박하듯 말했다.“안 세우면, 저 진짜 여기에 토할 거예요!”끼익하는 소리와 함께, 차가 겨우 1센치 간격을 두고 한구운 앞에 멈춰 섰다. 윤혜인은 간신히 후들거리는 다리를 지탱하며 차에서 내렸다. 하지만 첫발을 내딛자마자 무릎이 풀려 휘청거렸다. 한구운이 제때 부축해 주지 않았다면, 그녀는 그대로 넘어졌을지도 몰랐다. 윤혜인은 본인 아니게 한구운에게 몸을 기댈 수밖에 없었다. “괜찮아?”한구운이 부드러운
이준혁의 존재를 눈치챈 한구운이 윤혜인에게 물었다.“자리 옮길까?”윤혜인은 고개를 저었다.“괜찮아요.”언제까지 피할 수는 없었다. 게다가 이곳은 공공장소, 전처럼 이준혁이 무모한 짓을 벌일 것 같지 않았다. 하지만 막상 이준혁이 다가오는 모습을 보자, 윤혜인은 마음이 심란해졌다. 특히 뚫어져라 보는 그의 시선이 너무나도 소름이 돋았다.이준혁이 그녀가 앉아 있던 옆 테이블로 향하는 걸 본 순간, 윤혜인은 참지 못하고 소리쳤다.“언제까지 따라올 거예요!”그리고 찾아온 정적, 윤혜인은 살짝 민망한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최근 그에게 시달린 데다가, 좀 전의 그 질주까지, 예민할 대로 예민해진 상태였다. 하지만 그녀와 반대로 이준혁의 얼굴엔 어떠한 동요도 보이지 않았다. 윤혜인은 왠지 모르게 불안한 마음이 들었다. 그런데 이때, 한 여자가 그의 팔에 매달리며 애교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준혁 오빠.”윤혜인은 잠시 멍하니 자리에 굳어버렸다. 너무나도 당연히 이준혁이 자신을 따라왔을 거라 추측한 실수였다. 이준혁은 정말로 다른 약속이 있어 그녀를 데려다준 것이었다. 그제야 그의 옷차림도 다르게 보였다. 좀 전에 나타난 여자 때문에 꾸민 것 같았다. 윤혜인을 발견한 여자가 눈을 흘기며 입을 열었다.“좀 전에 뭐라고 했어요?”하지만 윤혜인이 망설이며 대답하지 않자, 정유미가 짜증이 담긴 목소리로 다시 물었다.“제 말 안 들려요?”여자의 정체는 다름 아닌 정씨 집안의 금지옥엽 정유미였다. 항상 주변의 떠받음을 받으며 살아온 그녀였기에, 자신의 물음에 대답도 하지 않은 윤혜인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이때, 한구운이 윤혜인을 보호하듯 뒤로 잡아당기며 답했다.“죄송해요. 저한테 한 말이었어요.”그제야 정유미도 납득하고 윤혜인에게 관심을 껐다. 그런데 이때, 윤혜인의 손목을 잡고 있는 한구운을 본 이준혁이 싸늘하게 말했다. “오지랖은.”앞뒤 잘린 말이었지만, 누구에게 한 말인지 모를 수 없었다.순식간에 주변의 시선이 다시 그들에게로 쏠렸다. 모
정유미는 자라온 환경 때문에 남의 눈치를 볼 줄 몰랐다. 좋던 나쁘던 자신의 감정에 항상 솔직했다.이준혁이 고개를 돌려 그녀를 쳐다보았다. 정유미는 그의 무미건조한 시선에 순간 말문이 막혔다.“우리가 무슨 사이죠?”이준혁이 물었다.“네?”정유미는 이 상황이 매우 당혹스러웠다.“오빠? 전 그쪽 같은 동생 둔 적 없어요.”누가 봐도 비꼬는 말투였다. 다른 사람이었다면 그가 기분이 좋지 않음을 눈치챘을 테지만, 정유미는 그의 잘생긴 얼굴에 정신이 팔려 전혀 알아차리지 못했다. 그녀가 발그레한 얼굴로 작게 말했다. “호칭을 오빠라고 한 것뿐이잖아요. 전 오빠의 동생이 아니라 미래 아내의 자격으로 이곳에 온 거예요.”정유미는 그를 전에 사진으로 본 적이 있었지만, 그때까지만 해도 당연히 어느 정도 보정이 들어간 모습이라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이준혁의 실물은 사진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눈부셨다. 거기에 카리스마까지 더해, 정유미는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연예계에 내놓아도 꿀리지 않을 외모였다. 그녀가 결심한 듯 고개를 들었다.“오빠는 어떤 타입의….”하지만 정유미는 말을 이을 수 없었다. 언제 떠났는지, 이준혁이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놀란 그녀가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그러자 입구 쪽에 그가 걸어가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분명 정유미를 무시하는 태도였지만, 그녀는 오히려 이 부분이 더 마음에 들었다. 그는 차도남의 정석 같았다. 정유미는 다시 한번 그에게 빠져들었다.한구운 차에 탑승한 윤혜인은 생각에 잠겼다. 아까 그 여자의 말대로, 이준혁은 확실히 그녀와 다른 세계 사람이었다. 그를 좋아하는 것 자체가 어쩌면 분수에 넘친 짓이었을지도 몰랐다. 임세희가 없어지니, 다른 여자가 또 튀어나왔다. 이준혁의 옆엔 여자가 끊이질 않았다. 앞으로 그의 옆에 있으면 또 같은 일이 벌어질 것 같았다. 진작에 이 사실을 깨달았더라면 인생이 좀 덜 고달팠을 것이다. 윤혜인은 후회됐다. 매번 이준혁을 잊으려 노력했지만, 그가 나타날 때마다 그
서울국제호텔.도착해보니, 이미 한구운의 부모가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은 윤혜인을 보자마자 매우 반갑게 맞이하며 선물로 쇼핑백 하나를 건네주었다.아들의 여자친구에 매우 만족한 모습이었다.윤혜인은 거절하고 싶었지만, 한구운의 눈짓에 어쩔 수 없이 받아들였다. 그녀는 일단 이 만남을 끝낸 뒤 그에게 돌려줘야겠다고 생각했다.한구운은 잠시 통화할 데가 있다면서 그들에게 먼저 올라가라는 신호를 보냈다.윤혜인은 한구운 엄마의 손에 이끌려 엘리베이터 쪽으로 향했다. 하지만 가는 길에 익숙한 뒷모습이 보여 자기도 모르게 멈춰 섰다.그 사람은 다름 아닌 이준혁이었다. 그는 많은 인파에 둘러싸인 채 엘리베이터 쪽으로 향하고 있었다. 잠시 두 사람의 시선이 서로 교차했다. 하지만 그는 마치 아무것도 보지 못한 듯, 무심히 고개를 돌렸다. 원수는 외나무다리에서 만난다고, 운명의 장난 같은 상황에 윤혜인은 한숨이 나왔다.잠시 후, 그가 엘리베이터 안으로 들어가는 모습이 보였다. 그녀는 저절로 걸음이 느려졌다. 어떻게든 그와 함께 엘리베이터 타는 것을 피하고 싶었다. 엘리베이터 문이 서서히 닫혀갔다. 그를 피하는 것에 성공했나 싶은 순간, 갑자기 문이 다시 열렸다.“안 타세요?”이준혁이 무심한 표정으로 물었다.그러자 한구운의 엄마가 기다렸다는 듯이 그녀를 이끌고 안으로 들어가면서 말했다. “고마워요.”엘리베이터 안에 어색한 정적이 흘렀다. 이때, 한구운의 엄마가 그녀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혜인아, 난 네가 처음부터 마음에 들었어. 얼른 구운이랑 상의해서 결혼 날짜 잡았으면 좋겠어. 우리도 이제 늙었는데, 하루라도 빨리 손주가 보고 싶어.”윤혜인은 뒤에서 따가운 시선을 느꼈지만, 아무렇지도 않은 듯 공손히 답했다.“어머님, 저희 아직 거기까진 생각 안 해봤어요.”그러자 한구운의 엄마가 말을 이었다.“물론 아직 나이가 어리니, 둘만의 시간을 보내고 싶은 것도 이해해. 그래도 애는 일찍 가져야 여자한테 좋아. 애 태어나도 넌 신경 쓸 거 하나 없
윤혜인은 옆으로 물러서 그가 지나가길 기다렸다. 하지만 이준혁은 지나치지 않고 그녀의 앞에 발걸음을 멈춘 채, 싸늘한 눈빛으로 뚫어져라 쳐다보기 시작했다. 왠지 모를 불안이 몸을 감쌌지만, 윤혜인은 티 내기 싫어 애써 침착한 척 말했다.“좀 지나갈게요. 비켜주세요.”“어디로 가려고?”그의 말에 윤혜인은 당황했지만, 곧 다시 정신을 차리고 담담하게 답했다.“당신과 상관없잖아요.”그녀는 이준혁이 애당초 이 길을 비켜줄 생각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하지만 이런 곳에서 언쟁 벌이고 싶지 않았다.윤혜인이 옆에 난 작은 공간을 향해 발을 뻗은 순간이었다. 갑자기 이준혁이 다리를 턱하고 앞으로 내밀었다. 그녀는 하마터면 이준혁의 발에 걸려 넘어질 뻔했다. 하지만 이게 끝이 아니었다. 그가 갑자기 윤혜인의 허리를 잡아채더니, 강제로 남자 화장실로 끌고 들어갔다. 당황한 그녀가 발버둥 쳤지만, 그의 힘을 이기기엔 역부족이었다. 결국 윤혜인은 강제로 빈 칸막이 속으로 던져졌다. 동시에 문이 철컥하고 잠기는 소리와 함께 벽에 밀쳐졌다.다행히 칠성 호텔인 만큼 화장실은 깨끗하고 또 향기로웠다. 그래서인지 윤혜인은 더 자신의 모습이 초라하게 느껴졌다. 아까 약속 자리에 오기 전 단정했던 옷차림도, 헤어도 모두 엉망진창으로 흐트러져 있었다.그녀가 빨갛게 달아오른 눈으로 그를 향해 외쳤다.“당장 이거 놓지 못해요?”그러자 이준혁이 그녀의 턱을 세게 부여잡으며 자신의 쪽으로 향하게 만들었다.“왜? 한구운이랑 한시도 떨어져 있기 싫어? 그놈이 도대체 너한테 뭘 어떻게 했길래, 이렇게 급속도로 사이가 발전했을까?”그의 목소리엔 혐오가 가득한 걸 이준혁 본인도 알고 있었다. 질투를 숨기기 위해 내뱉은 독한 말이라는 것을. 요 며칠, 이준혁은 온갖 방법으로 윤혜인과 화해하려 시도했다. 하지만 윤혜인은 조금도 동요하는 모습을 보여주지 않았다. 그런데 그에 반해 한구운은 너무나도 쉽게 그녀의 마음을 얻어버렸다. 그것도 부족해 상견례에 결혼과 아이까지, 이준혁은 화가 나
칠흑 같은 밤과 뼈저린 추위, 그리고 아까 맞은 얼음장처럼 차가운 비까지, 모든 상황이 똑같이 맞아떨어졌다. 양아버지가 어린 윤혜인을 안고 끝이 보이지 않는 길에서 달리다가 바닥에 철퍼덕 넘어졌다. 작고 연약한 어린 윤혜인은 포물선을 그리다 옆에 있던 구덩이에 빠지고 말았다. 어린 윤혜인의 몸과 얼굴은 흙이 잔뜩 묻었고 무성한 갈대에 가려져 시커먼 진흙과 한 몸이 되고 말았다. 어린 윤혜인이 겨우 몸을 일으켜 양아버지에게 도움을 청하려는데 양아버지가 어린 윤혜인을 향해 힘껏 고개를 저었다. 넘어져서 몸을 다친 양아버지는 몸이 찢어질 듯이 아팠지만 아랑곳하지 않고 어린 윤혜인을 안았던 그 자세 그대로 앞으로 내달리기 시작했다.어린 윤혜인은 그런 양아버지를 이해할 수 없었다. 그녀가 구덩이에 빠져있는 걸 양아버지도 분명히 봤는데 양아버지가 왜 그 자세 그대로 앞으로 내달리는지 말이다. 어린 윤혜인은 그렇게 넋을 놓고 한참 동안 바라봤다. 하지만 이내 빨간 스포츠카가 하늘이 떠나갈 것 같은 엔진소리와 함께 양아버지 뒤를 쫓았다. 앞에서 달리던 양아버지는 그렇게 차에 치여 허공으로 떠올랐다가 쿵 하는 소리와 함께 바닥에 떨어지고 말았다. 어린 윤혜인은 양아버지의 다리가 몸에서 완전히 분리되더니 다른 곳으로 날아가는 걸 목격했다. 심지어 그중 한쪽이 어린 윤혜인 앞에 떨어졌다. 형태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짓뭉개진 다리였다. 바닥에 쓰러진 양아버지의 얼굴도 어린 윤혜인을 향해 있었다. 눈을 부릅뜬 모습이 마치 절대 소리를 내면 안 된다고 경고하는 것 같았다. 어린 윤혜인은 초점을 잃고 퀭한 양아버지의 두 눈을 보며 소리를 지르고 싶었지만 목구멍에 뭐가 걸린 것처럼 정말 아무 소리도 나오지 않았다. 덕분에 어린 윤혜인은 죽을 고비를 넘길 수 있었다.범퍼가 깨진 스포츠카에서 빨간 벨벳 슈틀 입은 남자가 내려왔다. 어린 윤혜인은 얼굴은 매혹적이고 잘생긴 남자가 얼마나 극악무도한 짓을 저지르는지 똑똑히 보았다. 남자는 몸통이 절반 뜯어져 나간 양아버지를 이리저리 돌려보며
하지만 아무리 찾아도 윤혜인의 행방을 찾을 수 없었다. 배남준은 바로 사람을 데리고 원진우를 가둬둔 곳으로 향해 굳게 닫힌 문을 열었지만 안에 누워있는 사람은 원진우를 데리고 옷을 갈아입으러 간 도우미였다. 원진우가 입고 있던 하얀 슈트를 입고 있는 도우미는 이미 숨이 끊어진 지 오래였다.CCTV를 확인한 배남준은 사각지대에서 나온 두 사람이 어딘가 이상하다는 걸 발견했다. ‘원진우’의 걸음걸이가 어딘가 이상했다. 원진우와 도우미는 체격이 달랐다. 이미 숨이 끊어진 도우미의 신발을 벗겨보니 안에서 진흙이 가득 나왔다. 다시 영상을 확인해 보니 뒤에서 걸어가는 도우미는 몸을 잔뜩 움츠리고 있었고 얼굴이 잘 보이지 않았다. 사실 그때 이미 도우미가 바뀌었으니 가둔 사람은 원진우가 아닌 도우미였다. 도우미의 시신 상태를 보면 아마 원진우가 준 독을 먹고 문을 닫자마자 바로 독이 온몸으로 퍼져 숨을 끊은 것 같았다.이준혁은 영상에서 원진우가 입은 옷을 관찰했다. 전에 조사한 것과 다른 착장이었다. 이준혁이 조사한 데 의하면 원진우는 계절을 막론하고 구두를 신는다고 나왔지만 오늘 신은 건 긴 부츠였다. 이준혁은 바로 원진우가 처음부터 모든 걸 알고 있었다는 사실을 눈치챘다. 그렇다면 곽경천도 위험을 피치는 못할 것이다. 이를 깨달은 순간 이준혁은 곽경천에게 전화를 걸었다.현재 북안도를 떠날 수 있는 구멍은 다 막힌 상태였다. 이준혁이 미리 상부에 연락해 모든 루트를 봉쇄하고 원진우를 수배했다. 이준혁은 원진우가 힘들게 윤혜인을 납치해 갔으니 절대 죽이지는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필요 없는 사람은 바로 죽이는 게 원진우 스타일이지만 윤혜인을 데려갔다는 건 쓸모가 있다는 말이었다. 구체적으로 어떤 쓸모일지는 윤혜인도 알 수 없었다.원진우의 별장으로 향하는 길에 이준혁은 굉음을 듣게 되었다. 원진우의 별장이 있는 방향에서 하늘을 찌를 듯한 연기가 솟아 올라오더니 버섯 모양의 구름을 만들었다.화들짝 놀란 배남준이 체면을 차릴 겨를 없이 큰 소리로 말했다.“경천아.”
곽경천은 갑자기 손으로 내밀 엄두가 나지 않았다. 오랫동안 어머니의 실종은 마음에 박힌 가시와도 같았다. 비록 윤아름이 친엄마가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고 짧은 만남이었지만 윤아름에게서 받은 사랑은 적지 않았다. 윤아름은 곽경천을 친자처럼 아끼며 보살펴줬다. 그때부터 곽경천은 앞으로 엄마와 동생을 잘 보호해야겠다고 다짐했지만 크면서 하나도 지키지 못했다. 윤혜인도 옆에 있고 어머니와도 곧 만날 수 있다는 생각에 심장이 터질 것 같았다. 그래도 꾹 참고 손을 뻗는데 급박한 전화 소리가 울렸다. 곽경천이 들고 온 건 위성 전화라 배남준만 알고 있었다. 곽경천은 전화를 받으면서도 여자의 머리만 뚫어져라 쳐다봤다.“여보세요?”“30초, 30초밖에 안 남았어요. 얼른 나와요.”수화기 너머로 들린 건 배남준의 목소리가 아니라 이준혁이었다. 이준혁이 다급한 목소리로 말했다.“형님, 그 지하실에 폭탄이 가득 설치되어 있어요. 얼른 사람들 데리고 나와요.”곽경천이 넋을 놓고 있는데 이준혁이 급박하게 말했다.“형님, 함정이에요. 원진우는 이미 도망갔어요. 처음부터 형님이 세운 계획을 알고 있었더라고요. 지금 당장 나와요.”곽경천은 이준혁이 장난으로 하는 말이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포기하기는 싫었다.“폭탄이 설치되어 있으니까 얼른 나가요. 얼른.”같이 들어온 사람들이 서로 눈치를 보기 시작했다. 다들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지만 그래도 곽경천이 같이 떠나길 기다렸다.“먼저 나가요. 명령이에요. 나도 곧 따라 나갈게요.”곽경천이 이렇게 말했다. 팀원들이 어쩔 수 없이 명령에 따라 밖으로 나가고 곽경천이 손을 내밀어 ‘여자’의 어깨를 잡고 돌렸다.데굴데굴.여자의 머리가 곽경천의 발치로 굴러떨어졌다. 깜짝 놀란 곽경천은 순간 목구멍에서 단내가 느껴졌다.‘설... 설마 엄마?’한 번 더 자세히 보다 보니 이상한 점을 발견했다. 죽은 지 꽤 오래된 시신인지 목 부분에 부패가 시작되었지만 얼굴은 아직 보존이 잘 되어 있었다. 북안도의 날씨가 유독 추웠기에
원진우를 기다리고 있는 건 한번 들어가면 굳게 닫히는 문이었다. 이게 곽경천이 세운 2번째 방안이었다. 첫 번째 방안인 술이 실패하면 원진우를 무력으로 제압하기 어려운 데다가 무슨 꿍꿍이가 있는지 모르기에 일단은 특정한 방으로 유인하는 게 제일 좋은 방법이었다. 윤아름을 차질 없이 구해내면서 다른 사상자를 내지 않는 제일 좋은 방법은 바로 원진우를 안에 가둬놓는 것이었다.윤혜인은 원진우가 사라진 방향을 보며 마음이 불안해져 다른 사람이 와서 술을 권하는 것도 보지 못했다. 배남준은 현장에 원진우가 보낸 사람이 있을 수도 있다는 생각에 얼른 윤혜인에게 귀띔했다. 잘못하면 원진우가 이상한 낌새를 눈치채고 경계하면 계획이 틀어질 수도 있다.그렇게 10분쯤 지났을까, 윤혜인의 이어폰에서 비서 도지훈의 목소리가 들렸다.“누나, 원진우 안에 가뒀어요.”윤혜인은 그제야 길게 한숨을 내쉬며 긴장을 풀었다. 악당을 가뒀으니 곽경천도 일단 한시름 놓고 윤아름을 구해낼 일만 남았다. 윤혜인이 배남준을 향해 고개를 끄덕이자 배남준은 바로 무슨 뜻인지 알아채고는 다른 사람에게 윤혜인이 몸이 좋지 않아 먼저 일어난다고 하고는 현장을 빠져나갔다. 잠깐 얼굴을 비췄던 아이들은 너무 칭얼대서 다시 데리고 들어갔다.사실 두 아이는 곽경천이 주문 제작한 인형이었다. 실제와 다를 것 없이 잘 만들기도 했고 미리 녹음한 아이의 녹음 소리를 안에 넣어뒀다. 곽경천은 처음에 밖에서 다른 아이 둘을 찾아 대체하는 게 어떻겠냐고 했지만 윤혜인이 거절했다. 엄마가 되고 나서 아이가 곧 엄마에겐 목숨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 이심전심으로 자기 아이가 다치는 게 싫다면 다른 사람의 아이를 위험에 빠트리는 것도 하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다행히 오늘 날씨가 추워 아이는 인큐베이터에 누워 있었기에 멀리서 볼 수밖에 없었고 칭얼대는 소리로 퍽 리얼해 사람들의 눈을 속일 수 있었다.윤혜인은 방으로 돌아와 초조하게 곽경천의 소식을 기다렸다. 마음이 불안해서 그런지 가만히 앉아 있을 수가 없어 방안을 계속
윤혜인은 손에 들고 있던 잔을 들어 원진우를 향해 가볍게 흔들며 말했다.“삼촌, 제가 존경하는 마음을 담아 한 잔 먼저 마시겠습니다.”그러더니 금세 잔을 비웠다.그녀의 심장이 쿵쾅거리기 시작했다. 잔에 들어 있던 술에는 몇 시간 동안 상대를 잠들게 하는 특수 성분이 들어 있었다.그러나 윤혜인은 미리 해독제를 복용해둔 상태였고 원진우의 경계를 풀게 하려고 같은 술을 마신 것처럼 보이게 했다.원진우 같은 교활한 상대에게는 대화나 교섭보다는 이런 방법이 가장 안전했기 때문이다.그러나 윤혜인이 잔을 비워도 원진우는 여전히 미동조차 없이 술잔을 들지 않았다.초조해진 윤혜인은 도우미를 다시 불러 그의 잔을 채우게 했다.“앞으로도 저 잘 봐주셨으면 하니까 또 한잔 올리겠습니다.”한국인 사이에서 ‘두 잔’은 최고의 예우를 의미하기 때문에 원진우도 어른으로서 이를 거절할 수는 없었다.만약 거절한다면 그의 인품에 오점이 생길 수 있었기 때문이다.마침내 원진우는 천천히 잔을 들고 그녀를 바라보며 빙긋 웃었다.그러나 눈은 웃고 있지 않았다.잔이 입술에 가까워지려는 순간, 그는 갑자기 잔을 내려놓으며 말했다.“아, 깜빡했군. 오기 전에 집에서 의사에게 받은 약을 먹었는데 술을 마시면 안 된다고 하더라고요. 세 시간 동안은 물도 마실 수 없다고 했어요.”그는 이렇게 말하고는 잔을 테이블에 내려놓았다.윤혜인은 분노로 속이 끓어올랐지만 원진우가 댄 이유가 합리적이었기에 반박할 수 없었다. 첫 번째 계획은 명백히 실패한 셈이었다.곧 원진우가 자리를 뜨려 하자 윤혜인은 재빨리 다음 계획으로 전환했다.원진우의 움직임을 막기 위해 그녀는 손을 들어 그를 제지하며 말했다.“들은 바에 의하면 해외 무역에 아주 조예가 깊으시다고 하던데 저희 집도 국제 해운업에 종사하고 있어서 몇 가지 여쭤보고 싶은 게 있어요. 시간 괜찮으신가요?”그러자 원진우는 잠시 멈춰서서 따뜻하게 미소 지으며 말했다.“물어봐요.”이윽고 윤혜인은 몇 가지 질문을 던졌는데 모두 해외 무역의 어
곽경천은 곧 다가올 파티에 계획에 이준혁도 포함시키기로 했다.자신은 원진우의 별장에 인원들과 함께 잡입할 예정이고 파티장에는 배남준 혼자였는데 그에게 온전히 윤혜인을 맡기기가 불안하다고 느꼈기 때문이었다.파티장에서 잠재적인 위험인물인 원진우를 감시하고 윤혜인을 보호하기 위해서라도 추가 인원이 필요하다고 판단했다.그러나 윤혜인은 이준혁이 다리가 좋지 않다는 이유로 반대했다.그가 파티에 등장하면 원진우가 의심할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곽경천의 우려가 틀린 말은 아니었지만 이 계획이 완벽하지 않다는 점은 윤혜인도 잘 알고 있었다.파티장에 있는 사람들과 별장으로 잠입하는 사람 모두 위험이 따르는 임무였다. 게다가 시간이 촉박해 추가 인원을 조정할 여유도 없었다.윤아름의 행방을 찾을 기회가 얼마 남지 않았다.원진우가 모레 회사 양도 계약서에 서명할 예정이었기 때문이다. 그가 떠나게 되면 윤아름의 소식을 알아낼 마지막 기회를 놓치게 된다.이준혁은 이번 파티가 배남준을 돕기 위한 행사라는 곽경천의 설명을 듣고 이를 납득했다.배씨 가문에는 생후 첫 파티 후 배남준이 독립적인 가장이 되어 호적을 옮길 수 있는 전통이 있었다.질투가 나긴 했지만 이준혁은 배남준이 윤혜인을 향한 마음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공정하게 행동해왔다는 점을 존중하고 있었다.배남준은 숨겨진 음모 없이 정정당당하게 경쟁하는 상대였다.다음 날, 드디어 생후 한 달 기념 파티가 열렸다.윤혜인은 밝은 빨간색 원피스에 회색 모피 외투를 입고 고귀하고 아름다운 모습으로 행사에 나타났다.그동안 모습을 드러내지 않던 원진우도 파티장 정문에 나타나 눈길을 끌었다.북안도에서 배씨 가문과 찰스 가문이 보내는 초대장에는 반드시 참석해야 하는 무언의 룰이 있었다.그렇지 않으면 관계를 단절하겠다는 것으로 간주될 수 있었다.오랜만에 모습을 드러낸 원진우는 크림색 벨벳 수트를 입고 문학적이고 온화한 인상으로 나타나 눈길을 사로잡았다.그러나 윤혜인은 그의 겉모습이 실제와 다르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그의
이준혁의 낮고 부드러운 목소리에서 그가 자격지심을 느껴 한다는 것을 깨닫고 윤혜인은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자존심 강하고 남들한테 존경만 받는 사람이 언제부터 저렇게 불안해하는 감정을 품게 됐을까?’그녀는 순간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모르겠었다.하지만 윤혜인에게 역시 억울한 감정이 있었다.이준혁을 기다리다 사무실에서 잠들었고, 깨어나니 주변은 새까맸고 홀로 추위 속에 거의 얼어붙을 뻔했으니 말이다.“왜 날 찾으러 오지 않았어요?”그녀는 작게 말했다.그 어둠과 추위를 떠올릴 때마다 서운함이 다시 피어올랐다.만약 이준혁에게 자신의 마음을 전하려는 의도가 없었다면 윤혜인은 사무실에서 잠들어 문이 잠기는 일도 없었을 것이다.“내 잘못이야.”남자는 말했다.“모두 내 잘못이야. 맹세할게. 앞으로 절대 너를 혼자 두지 않을 거야.”이준혁은 한때 그녀를 놓아주려는 생각을 했었지만 곽경천이 그녀와 거리를 두라고 말하자 그의 가슴은 한순간에 무너져 내리는 듯했다.순간 그는 깨달았다. 자신은 결코 윤혜인을 놓고 싶어 하지 않는다는 것을.윤혜인이 그를 싫어하지 않는다면 불편한 몸일지라도 이준혁은 그녀를 지키겠다고 결심했다.결혼 이야기가 거짓임을 알았을 때, 그는 더 이상 방관자가 되지 않기로 마음먹었다.그녀와 아이들이 이준혁의 세상에서는 가장 소중한 존재였기에 그들의 삶에 함께하고 싶었다.윤혜인의 얼굴은 살짝 붉어졌다.‘언제 이렇게 빨리 마음을 바꾼 거지?’얼마 전까지 차갑기만 했던 이준혁이 이제는 윤혜인이 듣고 싶었던 말을 서슴없이 하고 있었다.하지만 그녀는 그가 자신을 두고 돌아가지 않았던 일에 여전히 화가 나 있었다.약간의 원망을 풀고자 윤혜인은 일부러 장난스럽게 말했다.“날 혼자 두지 않겠다니... 무슨 뜻이에요? 나 유부녀인 거 알잖아요. 설마 남편 자리를 뺏으려고요?”그러자 이준혁은 살짝 미소 지으며 그녀가 아직 진실을 모른다는 걸 알아챘다.하여 윤혜인의 장단에 맞춰주고자 이준혁이 말했다.“상대가 너라면... 기꺼이 감수하지.”
배남준은 아버지가 원진우와 비밀리에 대화하는 것을 엿들었다.대화의 내용은 원진우가 북안도의 회사를 팔고 다시 떠날 준비를 하고 있다는 것이었다.과거에 원진우가 떠날 때마다 그의 행방을 찾는 것은 거의 불가능할 정도로 어려웠다. 심지어 이번에는 원진우가 주의를 기울이고 있는 상황이니 다시 그의 흔적을 찾는 것은 하늘의 별 따기만큼 어려울 것이다.곽경천은 미간을 잔뜩 찌푸린 채 생각에 잠겼다.이번 계획은 절대 실패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만약 이번 기회를 놓치게 된다면 윤아름을 찾을 마지막 희망마저 잃게 될 것이니 말이다.곽경천은 고민스러웠다.‘하필 이런 중요한 시기에 혜인이가 병에 걸리다니... 앞으로 3일 후면 파티가 열릴 예정인데 그때 무대에 설 수 있으려나?’만약 불가능하다면 그녀를 대신해 위장할 사람을 빨리 찾는 것도 필요했다....의식을 되찾은 윤혜인은 자신이 병원 침대에 누워 있는 것을 발견했다.머리는 무겁고 여러 혼란스러운 꿈을 꾸었다. 꿈속에서 이준혁은 그녀와 등을 돌린 채 멀어져 갔고 아무리 그를 불러도 그가 남긴 것은 차가운 뒷모습뿐이었다.“어때, 괜찮아?”남자의 낮고 깊은 목소리가 귓가에 울렸다.윤혜인은 눈을 깜빡이며 꿈속의 그 남자가 지금 자신의 침대 옆에 앉아 있는 것을 보았다. 순간 꿈에서 느꼈던 그 서운함이 현실로 밀려들어 왔다.“왜 나 무시했어요?”윤혜인은 불만스럽게 물었다.그러자 그녀의 말에 당황한 이준혁은 준비했던 설명조차 단숨에 잊어버렸다.눈가가 붉어진 채 윤혜인은 점점 더 억울해했다.“나... 꿈에서 계속 불렀는데... 준혁 씨는 나 무시하고...”그녀의 말을 들은 이준혁은 그것이 꿈 이야기라는 것을 깨닫고 멋쩍은 미소를 지었다.하지만 그 후에는 깊은 안도감을 느꼈다.자신이 어떤 감정이든 상관없다는 결론에 다다른 것이 다행스럽게 느껴졌다.동정이냐 아니냐가 정말 그렇게 중요한 문제일까? 중요한 것은 윤혜인이 이준혁의 곁에 있고 그녀의 꿈과 시선에 그가 있다는 것뿐이었다.“응. 내 잘못이야
“죄송합니다.”이준혁은 진심으로 사과했다. 이번 일은 분명히 그의 책임이었다.만약 그의 부주의가 아니었다면 윤혜인이 이런 고생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이준혁은 자책하며 곽경천이 자신을 때려줬으면 싶을 정도로 후회하고 있었다.그때 주훈이 갑자기 ‘퍽’ 소리를 내며 무릎을 꿇었다. 그러더니 곽경천을 향해 말했다.“모든 게 제 잘못입니다. 제가 혜인 씨에게 대표님을 보러 오라고 부탁했거든요.”그는 깊이 자책하고 있었다.만약 자신이 쓸데없는 말을 하지 않았다면 윤혜인이 사무실에 갇혀 얼어붙는 일이 없었을 테니 말이다.주훈은 제대로 확인도 하지 않은 채 그녀가 떠났는지 관심을 두지 않은 자신의 큰 실책이라 여겼다.이번 일로 이준혁이 자신을 탄페니아에 10년간 가 있으라 해도 감수할 각오였다.하지만 곽경천은 사건의 전말을 이미 알고 있었다.사실 윤혜인이 먼저 주훈에게 전화를 걸어 이준혁의 상황을 물어봤고 주훈은 그저 그녀에게 와보라고 덧붙였을 뿐이었다.주훈이 권하지 않아도 윤혜인은 이준혁을 찾아갔을 것이다.이준혁을 찾으러 가고 싶은 마음이 있는 전제하에 주훈의 말은 그저 핑곗거리에 지나지 않았다.곽경천은 합리적인 사람이었다. 잘못한 사람이 있다면 책망하겠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에게는 불필요한 비난을 하지 않았다.그는 주훈을 일으키며 침착한 목소리로 말했다.“일어나요. 이 일은 주 비서님 잘못이 아니니까요. 혜인이는 스스로가 원해서 간 거예요.”이 말을 듣고 이준혁의 얼굴이 창백해졌다.곧이어 곽경천은 이준혁을 바라보며 말했다.“혜인이는 다른 사람의 말 한마디로 흔들리는 사람이 아닙니다. 혜인이가 준혁 씨를 찾아간 것은 마음속에서 준혁 씨를 지우지 못해서였을 거예요.”그는 잠시 말을 멈추었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이준혁 씨, 이준혁 씨도 혜인이가 어떤 사람인지 모를 리 없잖아요.”“이번 일을 계기로 혜인이에게서 조금 떨어져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준혁 씨가 진정으로 마음을 정리할 때까지 기다리는 게 좋겠어요.”사실 곽경천은 이준혁에게 크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