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원아, 당분간 너의 집에 머물러도 될까?""당연하지."소원은 아주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그러다 문득 윤혜인의 목소리가 이상하다는 것을 깨달았다."그런데 무슨 일 있어, 혜인아?""별일 아니야. 너 혹시 믿을만한 공인 중개사 알아? 내가 지금 사는 아파트 팔아야 할 것 같아서. 빠르면 빠를수록 좋아. 좀 급하게 돈이 필요하네."소원은 직감적으로 윤혜인한테 뭔가 일어났음을 눈치챘다. 하지만 전화상 얘기하고 싶어 하지 않은 것 같아, 이따가 다시 물어보기로 마음먹었다.윤혜인은 전화를 끊은 다음 곧바로 짐을 챙기기 시작했다. 사람 일이 마음처럼 되지 않는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이렇게 안 풀릴 줄 몰랐다. 이혼하면 이제 평온한 삶을 살게 될 줄 알았는데, 온갖 일들이 들이닥쳤다. 특히 이준혁이 가장 골치였다. 그의 행동은 사랑이라고 볼 수 없었다. 그는 윤혜인을 마치 소유물처럼 대하고 있었다. 그녀는 이준혁의 태도에 병적인 집착을 느꼈다. 하지만 윤혜인은 두 번 다시 같은 실수를 반복할 생각이 없었다. 그가 아무리 강하게 밀어붙여도 절대로 다시는 그와 이런 일로 엮이고 싶지 않았다. 아이를 잃는 슬픔은 한 번으로 족했다. 윤혜인은 당장은 그에게 벗어날 좋은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지만, 일단 최대한 그가 찾을 수 없는 곳으로 도망치고 싶었다. 다음날, 그녀는 곧바로 소원의 아파트로 짐을 옮겼다. 다행히 소원의 아파트는 그녀의 직장과도 매우 가까웠다. 윤혜인은 소원한테 집을 팔게 된 이유를 설명했지만, 이준혁한테 빚지게 된 사실까지는 말하지 않았다. 안 그래도 소원의 상황도 좋지 않은데, 괜히 말했다가 부담을 지울 것 같았기 때문이다. 소원의 성격상 친구의 어려움을 절대로 그냥 두고만 보지 않을 게 뻔했다. 윤혜인은 마음을 추스른 다음 바고 문백교육센터로 출근했다. 이 직업의 가장 좋은 점은 과외가 중점이라 하루 종일 사무실에 있을 필요가 없었다. 교육자료만 잘 준비한다면 회사에 나오지 않아도 되었다. 그래도 첫 시작이 중요했기 때문에
고객의 자료는 절대적 보안 사항이었다. 윤혜인은 이신우가 고용주라는 사실을 알 수 없었지만, 반대로 고용주에겐 고용인의 정보가 전달되어 윤혜인이 선생님으로 올 거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이신우와 눈을 마주친 윤혜인은 놀라 후다닥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머, 죄송해요. 본의 아니게 잠들었네요."이신우가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말했다."이런 자리에서 졸음이 와요?"그 말을 들은 윤혜인은 순간 말문이 막혔다. 그녀의 멍한 표정을 본 이신우가 눈썹을 찌푸리며 말을 정정했다."농담이에요."윤혜인이 입꼬리를 억지로 끌어올리며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확실히 면접 보러 와서 존 그녀의 잘못이 컸기 때문에 이 정도로 지나가는 것을 감사해야 했다. "앉으세요."이신우가 말했다.윤혜인은 그의 말에 따라 자리에 앉았다. 이때 그가 다시 물었다."하진이 자료 보셨어요?"윤혜인이 고개를 저으며 못 봤다고 말했다. 학생의 자료는 선발된 선생님만 볼 수 있었다. 즉, 정식으로 고용돼야지만 볼 수 있다는 것을 의미했다. 대답을 들은 이신우는 곧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너무 오냐오냐 키워서 애가 성격이 좋지 않아요. 남 괴롭히는 것도 잘하고요. 올해만 해도 벌써 선생님이 8번 바뀌었어요. 선생님께서 여기서 일하시려면 하진이를 잘 길들여야 할 거예요."길들인다는 말이 나오다니, 윤혜인은 학생의 상태가 심상치 않음을 느꼈다. 거기에 전에 팀장이 그녀에게 건넨 말까지, 다루기 쉽지 않을 것 같았다. 잠시 고민하던 윤혜인이 물었다."사람을 때리기도 하나요?"이신우가 눈썹을 치켜 올리며 그녀의 질문에 답했다."여자는 안 때려요."윤혜인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그러면 됐어요."이신우가 차갑게 말을 덧붙였다."일단 만나보세요."그런 다음 사용인을 불러 지시했다."하진이보고 내려오라고 해."사용인이 그의 말에 따라 이층으로 올라갔다. 하지만 잠시 뒤, 창백하게 질린 얼굴로 홀로 돌아왔다."도련님께서 선생님보고 직접 올라오시랍니다."이신우의 미간이 구겨졌다
"이하진!"이신우가 목소리를 내리깔며 이하진의 이름을 불렀다. 평소에 감정을 잘 드러내지 않던 그가 분노를 표출하자 이하진도 살짝 무서웠는지 말없이 자리에 앉았다.이신우가 한쪽에 조용히 서 있던 윤혜인을 바라보며 말했다."우선 내려가요.""저 잠깐만 하진 학생이랑 단둘이 대화 좀 해도 될까요?"윤혜인이 물었다.이신우는 잠시 그녀를 빤히 바라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나가자, 이하진의 표정이 즉시 다시 원래대로 돌아왔다."앞선 선생님들이 어떻게 그만두게 됐는지 못 들었나 보죠? 그렇다면 한번 알아보는 게 좋을 거예요. 그중 한 명은 평생 교육 업계에서 퇴출당할 정도로 개망신당했으니까. 돈 많은 남자 한번 꼬셔서 한탕 하러 오신 거면, 일찌감치 포기하는 게 좋을 거예요."윤혜인이 침착하게 질문했다."왜 그렇게 선생님을 싫어해?"이하진이 코웃음치며 말했다. "선생님다워야 선생 취급해 주죠. 지금까지 왔던 선생 중에 저한테 수업만 하러 온 사람은 한 명도 없었어요. 다 아버지한테 꼬리치기 바빴지.""난 학부모한테 관심 없어."윤혜인이 솔직하게 말했다. 하지만 이하진은 전혀 신뢰하지 않는 표정이었다."누가 믿어요.""네가 믿던 말던 상환 없어. 난 그냥 이 직업이 필요할 뿐이야."윤혜인이 담담히 말했다."귀찮게 구는 게 싫으면, 수업 태도부터 바꿔야 할 거야. 아니면 큰코다치게 되는 건 너일 테니까."이하진이 비웃으며 말했다."대단한 분 납시셨네."그리고는 갑자기 몸을 일으키며 윤혜인에게 말했다."주스라도 드릴까요?"그 말과 함께 이하진이 옆에 놓여 있던 주스를 윤혜인에게 건네주는 척하며 컵을 기울였다. 빨간색 주스가 윤혜인의 베이지색 코트 위로 후드득 떨어졌다."아, 이런. 죄송해요."이하진이 가증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손이 미끄러졌어요."하지만 윤혜인은 예상했다는 듯, 전혀 개의치 않으며 침착하게 휴지로 코트를 닦았다."괜찮아. 어차피 돈 많은 집안이니, 누군가는 배상해 주겠지."그런 다음 자리에서 일
윤혜인은 그의 존재를 무시하기로 마음먹고 성큼성큼 아파트 안으로 향했다. 그러나 이준혁이 그녀를 내버려둘 리가 없었다. "누가 널 데려다준 거야?"이준혁이 어두운 표정으로 물었다."당신이 신경 쓸 문제 아니에요."윤혜인이 냉담하게 답했다. 이준혁은 잠시 말문이 막혔지만, 포기하지 않고 다시 말을 이었다. "왜 이사했어?"윤혜인은 계속해서 아파트 단지 안으로 걸어갔다. 하지만 이준혁이 그녀의 손목을 잡는 바람에 걸음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우리 얘기 좀 할까?"그의 행동에 윤혜인은 어젯밤 악몽 같은 순간이 떠올라 몸이 뻣뻣하게 굳어버렸다. 그녀가 거리를 두며 말했다. "이거 놔요."하지만 이번엔 이준혁이 손목을 놓아주며 앞을 가로막았다.그가 가득 깔린 목소리로 말했다."이사하는 건 상관없는데 왜 나한테 말하지 않았어?""제가 왜 당신한테 그런 것까지 말해야 하죠?"일부러 그에게 멀어지려고 한 이사였는데, 또 찾아올 줄이야, 정말 화가 치밀어 올랐다. 윤혜인이 핸드폰 앨범에서 이혼 서류 증명서가 찍힌 사진을 그의 앞으로 들이밀며 말했다."이혼 증명서 보이시죠?"이준혁은 철두철미한 윤혜인의 태도에 안색이 어두워졌다."혜인아, 이러지 마.""그쪽이나 정신 차리세요."그녀는 이준혁이 어떤 표정을 짓던 전혀 동요하지 않았다."이혼까지 했는데, 도대체 왜 이러시는지 모르겠네요. 이러는 거, 즐거워요? 아니면 회사가 망해서 한가한가요?"이준혁은 그녀의 독설에 할말을 잃었다. 윤혜인은 그 틈을 타 엘리베이터 쪽으로 걸어갔다. 그런데 이번에도 이준혁이 따라오는 것이 아닌가? 참다못한 그녀가 걸음을 멈추고 그를 쏘아보았다."따라오지 마세요."이때, 엘리베이터가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윤혜인은 망설임 없이 안으로 들어가면서 경고하듯 그를 노려보며 말했다."따라오면 경찰에 신고할 거예요."그녀는 주저하지 않고 엘리베이터 닫힘 버튼을 눌렀다. 그런데 이때, 갑자기 닫히던 엘리베이터 문이 다시 열렸다. 이준혁이 문틈 사이로 손을 집어넣은
이준혁이 이를 악문 채 그녀의 어깨를 부여잡았다."그런 말 하지 마."윤혜인은 그가 이혼 때문에 이렇게까지 망가질 줄은 전혀 예상치 못했다. 물론 윤혜인도 완전히 옛날의 그림자에서 벗어나지는 못했다. 하지만 그래도 그녀는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 모든 것을 내려놓으려 노력하고 있었다. 새로운 삶을 시작하기 위해선 과거를 청산하는 것이 먼저였으니까. 그래서 윤혜인은 이준혁을 덤덤히 대하려 노력하고 있었다. "당신이 원하던, 원치 않던 우리는 끝났어요. 각자 자기 인생 시작할 때라고요. 전남편으로서 당신이 해줄 수 있는 건, 저의 새로운 시작을 축복하는 것밖에 없어요. 하지만 그게 어렵다면, 최소한 방해는 하지 말아요."새로운 시작이라는 말을 들은 순간 이준혁은 그녀가 다른 남자와 결혼하는 모습이 떠올랐다. 그의 눈빛이 싸늘해졌다."설마 재혼할 생각이야?"윤혜인은 그를 바라보며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아니, 그러면 평생 독신으로 살란 말인가? 가족을 꾸리고 싶은 마음은 언제나 있었다. 하지만 아직 과거의 어두운 기억에서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에, 연애에 관심을 두지 않고 있었다.언젠간 스스로 충분히 단단해졌다고 느꼈을 때, 윤혜인은 다시 사랑을 찾아 떠날 생각이었다. 그녀는 자신의 생각을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저 이제 22살이에요. 지금은 없더라도 앞으로 얼마든지 새로 생길 수 있죠."그 말을 들은 순간 이준혁은 그녀를 가두고 싶은 깊은 열망에 휩싸였다. 이대로 그녀를 내버려두면, 진짜로 영원히 볼 수 없는 곳으로 날아갈 것 같았기 때문이다. 이준혁이 서슬 퍼런 눈빛으로 경고했다."그러면 어디 한 번 해봐."그러나 윤혜인은 전혀 겁먹지 않았다. 오히려 더 당당히 눈을 마주 보며 그를 밀친 다음, 엘리베이터를 나섰다.이준혁은 멀어져가는 윤혜인의 뒷모습을 보며 싸늘하게 외쳤다."윤혜인, 넌 반드시 내 곁으로 돌아오게 될 거야."마치 윤혜인이 이혼을 요구할 때 보여줬던 모습을 연상시키는 듯했다. 왠지 모를 불안이 속에서 싹텄다.이준혁은 한다면
이준혁은 더 이상 이천수와 대화를 나누고 싶지 않았다. 그가 서재를 나서려던 순간, 갑자기 뒤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다 회사 발전을 위해서 이러는 거잖아. 이번만큼은 그냥 좀 따라.”그 말에 이준혁이 발걸음을 멈추며 무심하게 답했다.“알겠어요.”그제야 이천수는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그런데 이때, 이준혁이 덧붙였다.“앞으로 함부로 본가에 돌아오는 일 없었으면 좋겠어요.”그 말에 이천수는 다시 기분이 상했다. 비록 지금은 해외에 머물고 있으나, 엄연히 이곳도 그의 집이었다. 그런데 마음대로 돌아오지 말라니, 화가 치밀어 올랐다. 하지만 일단 이준혁이 맞선에 동의했기 때문에, 오늘만큼은 이 건방진 태도를 그냥 넘어가기로 했다.“그래, 알겠어.”이 에너지 프로젝트는 정말 대형 프로젝트였지만, 그동안 이태수의 손에 있어 건드리지 못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태수의 건강이 악화한 만큼 그에게도 기회가 돌아갔다. 이번에 성공만 하게 한다면 회사의 권력 구도가 바뀔 지도 몰랐다. 이천수는 다시 권력의 최상위층 자리를 되찾고 싶었다. 그래야 이준혁은 물론 자신과 대립하는 인원들을 배제할 수 있기 때문이다.다음 날.윤혜인은 열심히 청소하고 있었다. 잠시 머물러 들어왔던 집이었지만, 소원의 고집으로 아예 이곳에 눌러앉게 되었다. 물론 공짜는 아니었다. 그건 윤혜인 자신이 용납할 수 없는 문제였다. 그래서 이곳에 머무는 대신 소원에게 일정한 집세를 지불하기로 약속했다. 그리고 이 집은 소원의 소유이긴 했지만, 자주 머무는 곳은 아니었다. 그녀는 평소 본가에 머물다가, 혼자만의 시간이 필요할 때만 이곳에 왔다. 이 집은 소원에게 있어 비상금, 또는 아지트 같은 개념이었다.윤혜인이 매물로 올려놓은 그 집은 아직 팔리기 전이었다. 부동산 두 곳에서 연락해 오긴 했으나, 시세가 마음에 들지 않아 못 팔고 있었다. 고생해서 마련한 첫 집을 헐값에 팔 순 없었다.오후, 갑자기 한구운한테서 연락이 왔다. 그는 도움이 필요한 일이 있으니, 잠시 만나달라고 부탁해 왔다.
윤혜인은 어쩌면 이태수가 둘의 이혼을 눈치채고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도 그럴 것이 이준혁과 함께 병문안 온지도 한참 되었었다. 어쩌면 지금이 말할 기회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할아버지, 사실….”하지만 그녀가 말을 채 잇기도 전에 이준혁이 문을 열고 들어왔다.마침 중요한 회의를 마치고 왔는지 평소보다 더 꾸민 모습이었다. 지금 상황만 아니었다면, 윤혜인은 그의 멋짐에 설레었을지도 몰랐다. 이준혁이 자연스레 그녀에게 다가와 어깨를 꼭 감쌌다. 윤혜인은 안 그래도 예상치 못한 등장에 매우 당황하고 있었는데, 스킨십까지 해 오자 무척 불편했다.“기다리지, 왜 먼저 왔어?”그가 마치 행복했던 그 시절로 돌아간 것처럼, 부드러운 목소리로 물었다.윤혜인은 차마 이태수가 보는 앞에서 그를 밀어낼 수 없어 조용히 답했다.“바쁜 것 같아 보여서요.”이준혁이 가볍게 그녀의 등을 쓰다듬으며 말했다.“아무리 바빠도 할아버지 뵈러 가는데 빠질 수는 없지.”잠깐 전날 밤에 있었던 일이 헷갈릴 정도로 다정한 목소리였다. 이준혁이 마음먹고 꼬신다면 넘어오지 않을 여자가 있을까? 윤혜인은 문득 그런 생각마저 들었다. 전에 겪은 아픈 기억들만 아니었다면, 다시 그에게 빠졌을지도 몰랐다. 그 뒤로 둘은 30분 더 다정한 척 연기하며 병실에 머물렀다. 정말 유난히도 길게 느껴지는 시간이었다. 이준혁은 얘기를 나누는 동안 끊임없이 그녀를 쓰다듬거나 꽉 끌어안기를 반복했다. 그 때문에 윤혜인은 한시도 긴장을 풀지 못한 채 얼굴을 붉힐 수밖에 없었다.그녀의 안색을 본 이태수가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혜인아, 너 괜찮아? 왜 얼굴이 이렇게 빨개?”그러자 이준혁도 고개를 숙여 그녀를 바라봤다. 그의 눈빛은 마치 태양을 담은 것처럼 뜨거웠다.윤혜인이 시선을 옮기며 얼버무렸다.“더워서요, 할아버지.”이태수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그렇겠네. 내가 늙어서 추위에 많이 약해. 에어컨을 좀 세게 틀었나봐.”잠시 뒤, 드디어 병실을 빠져나온
말릴 틈도 없이 전화가 끊겨버렸다. 그가 차가운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말했다. “마침 나도 그쪽에 약속이 있었어.”그리고는 예고도 없이 윤혜인을 들어 올렸다. 그녀는 깜짝 놀라 자기도 모르게 이준혁의 목에 팔을 두르고 말았다. 사람들도 많이 지나는 곳에 이런 자세로 있으려니 윤혜인은 부끄러움이 밀려왔다. 그녀가 고개를 이준혁의 품에 파묻으며 나지막이 말했다.“일단 좀 내려줘요.”“시간 없어. 네가 걷는 것보단 이게 빨라.”윤혜인이 짜증스레 말했다.“바쁘면 갈 길 가요. 내가 언제 데려다 달라고 했나요?”하지만 이준혁은 전혀 그녀의 말을 들어주지 않았다. 결국 윤혜인은 그대로 조수석까지 옮겨질 수밖에 없었다. 그녀는 곧바로 안전벨트를 풀고 차 손잡이를 잡아당겼다. 그러나 문이 잠겨 있어 열리지 않았다.윤혜인이 운전석 쪽을 돌아보며 말했다.“문 좀 열어요.”그러자 이준혁이 덤덤한 목소리로 답했다.“약속 있다며?”그녀가 다시 입을 열려던 찰나, 이준혁이 딱딱하게 굳은 목소리로 덧붙였다.“내 차 타고 가는 게 더 빠를 거야.”그의 차가운 눈빛과 위험한 분위기에, 윤혜인은 자기도 모르게 몸이 굳어버렸다. 이준혁이 한 손을 핸들에 올려놓은 채 물었다. “오늘 내가 오지 않았으면, 할아버지한테 우리가 이혼한 거 말할 생각이었지?”윤혜인은 침묵했다. 실패하긴 했지만, 그의 말 대로 오늘 밝힐 생각이었다. 이준혁이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참 대단하네. 할아버지 건강보다는 딴 남자와 새 출발하는 게 더 중요하다, 이거야?”오늘 그녀가 본 이태수는 컨디션이 그리 나빠 보이지 않았었다. 윤혜인은 이준혁이 왜 화를 내는지 이해되지 않았다.“당신이야말로 언제까지 숨길 생각이에요? 오늘 얘기 나눠봤는데, 못 받아들이실 정도는 아닌 것 같았어요.”그 말을 들은 이준혁의 표정이 더 안 좋아졌다. 그가 좌석 사이에 끼워져 있던 종이 뭉치를 세차게 던지며 화난 목소리로 말했다. “뭐라고 적혀 있는지, 네가 직접 읽어!”종이가 날리면서 윤혜인의
소원의 설명을 들은 육경한이 미간을 찌푸렸다.“아직 명확해진 게 아니니까 너도 너무 걱정하지 마. 그래도 안전에는 조심해야 되니까 사람 4명 붙여줄게. 유진이는 내가 알아서 보안 강화하고.”육경한은 소원이 거절할 것 같아 그러는지 얼른 한마디 덧붙였다.“너는 지금 홀몸이 아니야. 내가 이러는 것도 다 아이를 보호하기 위해서고.”육경한의 말이 맞았기에 소원도 거절하지 않았다. 이제 홀몸이 아니었고 유진도 엄마가 없어서는 안 되기에 일이 마무리될 때까지 어떻게든 조심하면서 안전에 심혈을 기울여야 했다.육경한이 골라준 보디가드는 의심할 여지 없는 안전한 사람들이었기에 소원도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 안상철도 소진용이 제일 믿고 맡긴 사람이었지만 결국 아버지를 배신한 걸 보면 이 세상에 영원히 믿을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지금 갈 거지? 내가 데려다줄게.”육경한은 소원이 반대하지 않자 경찰이 지정한 병원으로 데려다주겠다고 말했다. 그렇게 병원에 도착한 두 사람은 강민혜의 안내를 받아 안지영의 병실에 도착했다.문을 열어보니 안지영이 자그마한 몸집으로 무릎을 꽉 끌어안은 채 머리를 파묻고 있었다. 며칠 사이에 종이 인형처럼 삐쩍 마른 안지영을 보니 너무 마음이 아팠다.가까이 다가간 소원이 나지막한 목소리로 불렀다.“지영 씨...”안지영이 소원의 목소리를 듣지 못한 것처럼 고개를 들지도, 다른 반응도 보이지 않자 소원이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지영 씨, 지금 어떤 기분인지 알아요. 하지만 경찰에게 단서를 줘야만 아버지를 죽인 범인을 잡을 수 있어요...”가족을 잃은 슬픔은 소원도 겪어봐서 잘 알았다. 마지막 인사도 형체를 알아볼 수 없는 시신을 보며 했으니 그 아쉬움과 후회는 사람을 통째로 집어삼킬 만큼 컸다. 소원은 그때 왜 아버지와 더 많은 시간을 보내지 않았는지, 왜 같이 밥을 먹고 얘기를 나누지 않았는지 후회했지만 그땐 이미 너무 늦어버렸다.안지영을 다독이던 소원이 더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안지영을 꼭 끌어안았다. 얼마나 지났을까, 안지
소원이 육경한을 불러세우더니 따라서 나오며 병실 문을 닫았다.“현재 일은 내가 오해했어. 미안해. 그리고 고마워.”소원이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소원은 옳고 그름에 명확한 사람이었기에 잘못된 부분이 있다면 바로 인정하는 편이었다. 허심탄회한 모습은 쉽게 가질 수 없는 좋은 태도였다.육경한은 기분이 좋아졌는지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지만 티가 나지는 않았다.“도와준 거 아니야.”육경한은 연적을 도와줬다는 사실을 인정하기 싫은 것 같았다. 소원도 더는 이 문제에 집착하지 않고 본론으로 돌아왔다.“진아연을 찾고 있다고 들었는데 나도 찾고 있어. 찾으면 바로 나한테 알려줄래?”진아연이 잡혀들어가기 전에 물어봐야 알 수 있는 것들이 있었다. 만약 교활한 진아연을 그대로 들여보낸다면 사실을 말하지 않을 게 뻔했고 베일에 싸인 배후의 지도를 받을 수도 있었다. 아무튼 직접 물어봐야 마음이 놓일 것 같았다.“응. 알겠어. 너는 일단 가만히 있어. 내가 찾고 있으니까.”진아연의 배후에 누가 있는지 아무도 몰랐기에 진아연을 찾는 일은 매우 위험한 일이었다. 그 배후는 신비로울 뿐만 아니라 수단도 만만치 않았다.소원은 일단 고개를 끄덕였지만 의견을 수용하지 않을 생각이었다. 아버지의 죽음과 관련된 일인데 무슨 일이 있든 직접 헤쳐나가고 싶었다.그때 소원의 핸드폰이 울렸다. 강민혜가 걸어온 전화였다.“소원 씨, 안상철이 죽었어요.”전화를 받자마자 강민혜의 무거운 목소리가 들려왔다.쿵.머릿속에서 뭔가 터져버린 것 같았다.‘삼촌이 왜?’소원의 계획대로라면 안상철은 지금쯤 안지영과 외국에 나가 있어야 하는데 왜 갑자기 죽어버린 건지 의문이었다.‘지영 씨는...’소원이 얼른 물었다.“그러면 지영 씨는요? 딸은 어떻게 됐어요?”강민혜가 말했다.“딸은 안전한 상태지만 충격을 많이 받아서 병원에서 치료받고 있어요. 입을 열려 하지 않아서 경찰이 무슨 질문을 하든 침묵으로 일관하고 있어요.”“어... 어떻게 이런 일이...”소원은 믿을 수가 없었다. 안
그때 문 뒤에서 누군가 걸어 나왔다. 소원이었다.소원도 두 사람의 대화를 들었다. 이해하기 어려운 내용은 아니었지만 육경한이 이 정도로 양보했다는 것에 놀랐을 뿐이었다.“현재야...”“누나...”두 사람이 동시에 입을 열었다.“네가 먼저 말해.”소원이 양보하자 서현재가 다시 말을 이어 나갔다.“누나, 그거 알아요? 내가 지금까지 이렇게 노력한 건 다 안정된 삶을 되찾고 누나랑 행복해지기 위해서였어요. 하지만 지금은...”서현재가 뜸을 들이더니 씁쓸하게 말했다.“지금은 그저 누나가 잘 있기만 하면 다른 건 바라지 않을게요. 하지만 이것만 기억해요. 언제든 누나가 고개만 돌리면 보이는 그 자리에 있을게요.”순간 서현재는 능력이든 다른 부분이든 육경한과 비길 자격이 없다는 걸 알아챘다. 앞으로 몇 년간 피타는 노력을 거쳐 원하던 자리까지 올라갈 수는 있지만 육경한처럼 해탈의 경지까지는 오르지 못할 것 같았다. 사람은 일단 사랑에 빠지면 이기적이고 쪼잔해지고 질투에 휩싸이기 마련인데 유진도 아이를 받아들였으니 소원이 이 모든 걸 받아들이는 건 시간 문제라는 생각만 하면 마음이 자꾸만 벼랑 끝으로 떨어졌지만 소원만 행복하다면 서현재로 그것으로 만족하기로 했다.소원은 그런 서현재를 보며 하고 싶은 말이 많았지만 내뱉은 건 결국 한마디였다.“현재 너는 나의 영원한 가족이야. 유진도 그렇고.”서로에게 위안이 되던 나날들, 그리고 그 시간 동안 서현재가 유진을 돌봐준 것도 소원은 잊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이든 앞으로든 서현재가 원하는 바를 이뤄줄 수가 없었기에 차라리 가족이라는 자리로 남는 편이 제일 나을 것 같았다. 게다가 소원은 이미 서현재에게 다시는 재혼하지 않겠다고 약속한 상태였다. 아이가 태어나고 나면 소원의 중점은 아이를 돌보는 것과 아버지가 만든 회사를 다시 일궈내는 것, 그 외에 다른 건 없었다.“누나, 나도 잊지 않을게요.”서현재는 이 말만 남기고 자리를 떠났다.병실로 돌아오는데 육경한이 침대맡에 앉아 깊은 눈동자로 유진을 바
서현재는 육경한이 그를 내쫓는다는 걸 알고 덤덤한 표정으로 말했다.“걱정해 줘서 고마워요. 아직 망하진 않았어요.”육경한은 그를 관심해 주는 게 아니라 그가 쫄딱 망해서 서울에서 더는 살 수 없기를 바랐지만 서현재도 유진의 아빠라는 말이 떠올라 톡 까놓고 얘기할 수는 없었다.육경한도 유진의 아빠인 서현재가 너무 궁색해지는 건 싫었다.“서한 가문의 제일 큰 라이벌이 요즘 해성으로 실사하러 갔다고 들었는데.”육경한이 밑도 끝도 없이 이렇게 말하자 서현재가 미간을 찌푸렸다. 서현재는 아직 모르는 소식이었다. 해성에서 새로 거론하고 있는 프로젝트는 거의 마무리 단계에 접어들었는데 이때 라이벌 회사가 해성으로 간다는 같은 프로젝트를 노린다는 의미였다. 라이벌 회사라 같은 영업 범위였기에 경쟁하는 건 정상이지만 토론이 끝나가는 프로젝트를 뺏는 건 예의가 아니었다.서현재가 잠깐 침묵하더니 말했다.“고마워요.”육경한이 콧방귀를 뀌었다.“약육강식인 세상에서는 승자가 왕이 되는 법이야. 능력이 부족한 건 다른 사람 탓해도 쓸모없어.”이 말은 서현재가 육경한이 했던 탄압을 복수라고 생각한다면 어리석다는 말이었다. 육경한이 없었다면 서한 그룹이 흔들릴 때 다른 회사에서 서한 그룹을 노렸을지도 모른다. 아무리 무너져가는 회사라도 떨어질 부스러기는 남아있었다. 게다가 서한 그룹은 완전히 가치를 잃은것도 아니었기에 기회를 노려 서한 그룹의 주문을 앗아간다면 체급을 늘이고 있는 회사엔 큰 이익이 될 수도 있었지만 육경한이 손쓴 덕분에 기회를 노리던 일부 회사들이 떨어져 나갔다. 그 회사들에게 육경한과 경쟁한다는 건 어리석은 일이었으니 말이다.물론 육경한의 실력도 서울을 제패할 만큼의 실력은 아니었지만 그가 사용하는 방식과 수단은 일반인이 감당하기에 매우 힘든 것들이었다. 완전히 이성을 잃은 상태에서는 3시간 만에 한 상장 회사를 파산하게 만든 적도 있으니 육경한을 건드린다는 건 목숨이 아깝지 않다는 말이나 마찬가지였다.육경한이 손쓴 덕분에 서현재도 숨 돌릴 시간이 있
상황이 매우 긴급했기에 육경한은 몸이 채 낫지도 않았는데 병원으로 나와 곁을 지켰고 소원도 마찬가지였다. 이제 결정을 내릴 때가 된 것 같았다. 장기 이식을 기다리는 일은 운이 좋으면 빨리 되겠지만 그렇지 못할 경우 10년을 기다려도 힘들었다. 게다가 유진의 몸 상태는 그렇게 오래 기다릴 수 없었다.소원은 리스크를 감수하고 유진에게 그 알약을 먹이려고 했고 육경한도 동의했다. 소원도 잘 회복하고 있었고 임신까지 했다는 건 약효가 정말 신기하다는 의미였다.약을 먹기 전에 소원과 육경한이 유진의 손을 잡고 격려했다. 유진은 두 사람이 생각했던 것보다 더 용감했고 오히려 웃으며 두 사람을 위로했다.“아빠, 엄마 걱정하지 마세요. 유진이 꼭 나아서 더 좋은 유진이가 될게요.”유진은 그 알약을 먹은 후로 고열에 시달리는 등 이상 반응이 나타났다. 몸이 작기도 했고 체질이 약해서 감당 능력이 어른과는 비길 수 없었다.소원은 속이 바질바질 타들어 갔고 서현재도 소식을 받고 달려왔다. 유진이 커가는 걸 옆에서 지켜본 사람이라 그 감정이 여간 두터운 게 아니었기에 유진이 아프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바로 달려온 것이다. 육경한은 서현재를 보고도 드물게 화를 내지 않았고 쫓아내지도 않았다. 아마도 서현재의 눈빛에서 유진에 대한 걱정을 보아내서 그런 것 같았다.서현재는 정말 유진을 끔찍이 아꼈고 유진도 서현재를 좋아했기에 육경한은 유진이 깨어났을 때 기분이 조금이라도 더 좋아지길 바랐다. 아버지가 된 후로 육경한은 무슨 결정을 내릴 때 그렇게 차갑지 않았고 감정이라는 게 들어갔다. 아버지가 되면서 얻은 제일 큰 변화였다.지금 이 세 사람에겐 같은 목표가 생겼다. 그것은 바로 유진의 건강이었다.세 사람이 이렇게 화목하게 병원 복도에 앉아 있은 건 처음이었다. 유진이 여기 있으니 병원의 모든 전문가가 대기하고 있었고 조금만 이상을 보여도 바로 응급조치에 들어갔다. 알약을 복용한 이튿날 밤, 유진이 잠에서 깼고 얼굴에 윤기가 감도는 게 상태가 매우 좋아 보였다. 검사 결과
진아연의 죄는 이루 말하기도 힘들 정도였다. 그런 사람이 아직도 벌을 받지 않고 멀쩡하게 사는 건 용납할 수 없었다.소원은 진아연을 꼭 찾아내 벌받게 하고 진아연 뒤에 숨어있는 사람이 누군지 잡아내겠다고 다짐했다.‘그 배후가 무슨 목적을 가지고 이런 짓을 벌였는지도 알아내야 해.’소원의 말이 끝나기 바쁘게 안지영이 불안한 표정으로 옆방에서 건너오더니 소원에게 말했다.“언니, 우리 아빠... 아무 잘못 없는 거 맞아요?”소원이 고개를 끄덕였다.“그래요. 지영 씨 아빠 살인범 아니에요. 지영 씨가 있으니까 삼촌이 무슨 결정을 하기 전에 늘 지영 씨를 생각하더라고요. 지영 씨 실망하게 하지 않으려고 삼촌이 엄청 노력한 건 사실이에요.”안지영이 그제야 한시름 놓으며 아버지가 살인범이 아니라는 사실에 기뻐했다.“언니, 언니도 하루빨리 아저씨 죽인 범인 찾아내길 바라요.”소원이 고개를 끄덕였다.“그래요. 나도 그러길 바라고 있어요.”소원에게 남은 유일한 목표는 그 사람을 찾아내어 응당한 벌을 내리는 것이었다. 소원은 미리 친구에게 연락해 지금 당장 두 사람을 데리고 나가게 했다. 안상철의 힘을 빌리면서 소원에게 피해가 가지 않게 하려면 어떻게든 두 사람을 보호해야 했고 최대한 비밀스럽게 움직여야 했다. 이런 상황에서는 외국으로 잠깐 피신해 있는 게 제일 좋은 방법이었다.소원은 그 자리에서 나오며 강민혜에게 소식을 알렸다. 강민혜는 소원이 안상철을 믿은 것에 놀란 듯 보였다. 다만 오래전 일이라 별다른 증거가 없는 게 문제였다. 예를 들면 안상철이 소진용을 아래로 밀어버리는 장면에 대한 증거가 없었기에 안상철의 말만으로는 죄를 물을 수가 없었다.소원이 말했다.“나는 삼촌 믿어요. 오래 알고 지내기도 했고 오늘 얘기를 나누면서 느꼈는데 내가 예전에 알던 그 삼촌이 맞았어요.”소원이 안상철을 믿기로 한 원인 중 하나였다. 안상철은 소원을 해치려는 생각이 없었고 결국 손을 대지 않았다. 딸을 끔찍이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소진용처럼 마음이 약한 사람일 것
진아연이 소진용을 죽이려 한 이유는 사실 간단했다. 소진용의 죽음으로 육경한과 소원 사이에 돌이킬 수 없는 오해를 만들고 소원이 아버지의 투신을 육경한이 건넨 파일때문이라고 생각해 육경한을 죽도록 원망하게 만들기 위해서였다. 그러면 소원은 육경한을 죽이려고 죽기 살기로 달려들 테고 진아연은 어부지리로 육경한이 제일 사랑하는 여자가 되어 결국엔 육경한과 결혼할 수 있다고 생각한 것 같았다. 자신의 사리사욕을 채우려고 다른 사람의 목숨을 해치다니, 진아연은 정말 뱀보다 더 잔인하고 독한 여자였다.사실 소원은 소진용의 죽음을 계속 의심하고 있었다. 사업을 하면서 이런저런 일을 다 겪었을 텐데 딱 봐도 흠집이 많은 계약서 때문에 옥살이할까 봐 투신자살할 사람은 아니었기 때문이다.소진용은 절대 그렇게 나약한 사람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때는 소원도 아버지의 죽음에 큰 충격을 받고 정신이 반쯤 나간 상태였기에 깊이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게다가 어머니 전미영까지 쓰러졌으니 타격이 이만저만이 아니었기에 마음이 잿더미가 된 소원은 좀비처럼 살면서 차분하게 정리할 힘을 완전히 잃어버렸고 숨을 쉬는 것조차 죄라고 생각했다.모든 걸 털어놓은 안상철은 그제야 홀가분해졌다. 마음의 짐을 떠안고 살면서 털어놓을 엄두를 내지 못한 건 결국 복수가 두려워서였다. 범인이 살인도 마다하지 않았다면 계획을 알고 있는 안상철을 가만둘 리가 없었기 때문이다.범인이 안상철만 노린다면 안상철도 두려울 게 없었지만 돌봐야 할 딸도 있고 모셔야 할 어른도 있었기에 그들까지 위험한 처지에 놓이게 할 수는 없었다. 이제 와서 묵혀뒀던 사실을 털어놓은 건 소진용에 대한 죄책감이 커서였지만 다 털어놓음으로써 안상철의 마음도 많이 편해졌다.소원은 이제 안상철의 처지를 알았고 안상철이 왜 진실을 말해주려 하지 않았는지 이해했다.“삼촌, 지금 이대로 출국해서는 안 돼요. 너무 위험할뿐더러 지영 씨도 힘들 거예요. 내가 전화번호 하나 줄 테니까 그 사람한테 연락하면 무사히 출국할 수 있게 도와줄 거예요. 내
안상철은 아직도 그날을 떠올리면 살이 떨렸다.“아래서 울부짖는 소리가 들리길래 대표님께 무슨 일이 생겼구나 싶었어요. 하지만 아까만 해도 도움이 필요하면 언제든지 말하라고 했던 분이 왜 갑자기 뛰어내린 건지 의문이었죠.”안상철의 머릿속에 그 남자가 떠올랐다. 낯선 사람이었고 다급하게 현장을 벗어난 걸 봐서는 회사 직원은 아닌 것 같았다. 하지만 안상철이 소진용의 죽음을 의심한 건 이것 때문만은 아니었다. 사무실에 들어갔을 때 소진용의 컴퓨터가 켜져 있었는데 차마 눈뜨고 보기 힘든 영상이 아직도 재생되고 있었기 때문이다.소진용이 얼마나 딸을 사랑하는 데 자살할 마음을 먹었다 해도 딸에게 불리한 동영상은 무조건 지우지 켜두고 갔을 리 만무했다. 적어도 다른 사람이 올라와 조사할 것을 대비해 딸의 이미지를 생각해서라도 조치했을 텐데 그럴 겨를조차 없었다는 것이다.하지만 안상철은 이내 여기 있다가 발견되면 무조건 연루된다는 생각에 바로 그 자리를 벗어나려 했다. 딸이 집에서 기다리고 있다는 게 떠올라 더 생각할 겨를도 없이 허둥지둥 USB를 빼서 사무실에서 나왔다.그 뒤로 시골에 숨어 나올 엄두를 내지 못했고 소진용의 장례식에도 참석하지 않았다. 그렇게 며칠 숨어있다가 소식을 알아보러 나왔는데 신문 기사에 소진용이 자살했다고 적혀있는 걸 보고 이 사실이 이대로 묻혔음을 알게 되었다. 안상철은 기회를 노리고 여자에게 전화를 걸었다. 여자는 잘했다고 칭찬하며 안상철에게 외국 의사의 연락처를 보내줬다.소식이 잠잠해지자 안상철은 안지영을 데리고 수술하러 나갔지만 약간의 휴양 시간만 가지고 다시 귀국했다. 외국은 적응하기 힘들뿐더러 누구든 총을 소지할 수 있었기에 늘 안지영이 괴롭힘을 위험해질까 봐 전전긍긍하다가 고민 끝에 그래도 국내가 안전할 것 같아 안지영을 데리고 귀국한 것이다.그렇게 5년간 안정된 삶을 살면서 모든 게 지나갔다고 생각했는데 소원이 찾아오면서 더는 숨길 수 없다는 걸 알아챘다.안상철이 하는 말을 듣고 있던 소원이 한참 동안 아무 말도 하지
하지만 그때는 딸을 구하는 데 급급해 다른 생각을 할 겨를도, 눈에 뵈는 것도 없었다.“그러다 결국 그 여자의 요구를 들어주게 됐어요. 해산 회의를 하는 날 모든 사람이 아래층에 모여있을 때 대표님 사무실로 향했죠. 어디로 가면 CCTV를 피할 수 있는지 알고 있어서 나를 발견한 사람은 없었어요. 하지만 사모님은 그날 사무실에 함께 계셔서 그날 마지막으로 대표님을 만난 사람이 나라는 걸 알고 있었어요.”소원은 전미영도 이 일을 알고 있을 줄은 몰랐다. 다만 전미영은 뒤에 큰 충격을 이겨내지 못하고 그대로 혼수상태에 빠졌고 그렇게 진실은 오랫동안 묻히고 말았다.안상철이 계속 말을 이어갔다.“그 영상을 대표님께 보여주면서 가끔은 어른이 살아있는 게 자식들에겐 짐이 될 수도 있다고 말했죠. 딸이 힘든 거 보기 싫으면 이제 결정할 때가 되었다고 말이에요.”“내 말을 들은 대표님이 한참 동안 말을 아끼셨어요. 그리고 내 예상과는 달리 딸에게 짐이 되지 말아야 한다면서도 딸 혼자서 이 모든 걸 짊어지게 하는 건 아니라면서 딸이 받아들이기 힘든 일은 하지 않겠다고 했어요. 대표님은 자살하면 소원 씨가 충격을 받을까 봐, 모든 걸 자기 잘못으로 돌릴까 봐 걱정했어요. 대표님은 참 좋은 아버지였고 소원 씨를 참 잘 알았죠.”소원의 눈동자에 눈물이 가득 차오르더니 이내 두 볼을 타고 주르륵 흘러내렸다. 마음이 너무 아파 숨 쉬는 것조차 너무 힘들었다.안상철이 말했다.“그때는 나도 너무 감동해서 내가 사람도 아니라고 생각했어요. 자기 딸을 구하겠다고 똑같이 딸을 사랑하는 아버지를 해치려 한 내가 너무 미워서 그 자리에서 바로 모든 걸 털어놓았어요. 대표님이 너그럽게 용서해 주면서 하시던 말씀은 아직도 잊을 수가 없어요.”“안 비서, 이번만큼은 내가 용서할게요. 같은 아빠니까 용서하겠지만 앞으로 절대 이런 실수는 하지 마요. 무슨 일 있으면 언제든 말하고요.”안상철이 눈시울을 붉혔다. 같은 아빠로서 똑같이 지켜야 하는 사람이 있는데 하마터면 아빠의 자격을 잃은 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