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발 상황에 주훈은 우선 경호원들에게 멈추라는 신호를 보내며 이준혁을 바라봤다. 지금은 그의 지시를 기다릴 때였다. "나한테 어떻게 이럴 수가 있어! 내가 오빠 목숨도 구해줬는데!"임세희가 눈물을 짜내며 억지부리기 시작했다. ‘갚을 만큼 다 갚았다고? 누구 맘대로!’그녀는 인정할 수 없었다. 목숨을 구해준 순간부터, 이준혁은 그녀의 것이었다. 임세희는 그가 자신한테서 벗어나는 걸 용납할 수 없었다. 그리고 이준혁이라면 절대로 자신을 죽게 내버려두지 않을 거라는 확신이 있었다.아니나 다를까, 이준혁이 발걸음을 멈추며 그녀에게 다가오기 시작했다. 임세희의 표정이 환희로 가득 찼다. 목숨을 건 협박이 제대로 통한 것 같았다. 이준혁이 한쪽 무릎을 꿇은 채, 조용히 칼을 쥐고 있는 임세희의 손을 움켜쥐며 말했다."하지 마."임세희는 그동안의 설움이 해소되는 듯한 기분에 눈물이 왈칵하고 터져 나왔다.역시, 이준혁은 배신하지 않았다. 그는 차가워 보이는 것뿐, 속은 다정했던 것이다. 그렇지 않았다면 그 긴 세월 그녀를 돌봐줬을 리 없었다. 드디어 잃어버렸던 소중한 것을 다시 찾은 기분이었다.임세희가 감격스러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그렇지? 오빠가 날 그냥 내버려둘 리 없지...."하지만 환희가 절망으로 바뀌는 것은 한순간이었다. 임세희는 손에 들고 있던 칼을 버리려고 안간힘을 썼지만, 움직여지지 않았다. 이준혁이 으스러뜨릴 듯 그녀의 손을 움켜쥐고 있었기 때문이었다.임세희가 고통에 일그러진 얼굴로 말했다. "아, 아파... 왜, 왜 그러는 거야...?"이준혁은 들은 체도 하지 않았다. 그는 묵묵히 칼을 목 위쪽, 경동맥과 더 가까운 쪽으로 움직였다. "거기 아니야. 여기, 여기를 찔러야 확실히 죽을 수 있어."차가운 칼날의 감촉을 느낀 임세희는 그대로 굳어버렸다. 뼛속까지 공포가 파고들었다. 당장이라도 칼날이 그녀의 목을 뚫고 들어올 것 같았다. "죽겠다며? 어서 찔러 봐."이준혁이 무표정한 얼굴로 말했다."아니면, 내가 도와줘?"
간호사는 애쓰는 윤혜인의 모습이 안타까워 위로했다."회복하는 동안, 왼손 쓰는 연습도 하시는 편이 좋을 거예요."간호사가 떠나간 뒤에도 윤혜인은 손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그날 유리 조각을 잡으면서 손바닥 힘줄이 손상된 것 같았다. 한동안 오른손 쓰기는 어려워 보였다. 어쩐지 힘주면 손이 떨리더라니, 이 상태론 디자인 도안은커녕 일상생활도 어려울 터였다.윤혜인은 자기도 모르게 눈물이 흘러나왔다. ‘전생에 도대체 무슨 죄를 지었기에, 하늘이 내게 이런 벌을 내리는 걸까?’처음엔 외할머니였고, 그다음엔 아이였다. 이젠 손까지, 안 그래도 가진 것이 없는데 자꾸만 빼앗아 갔다.이때, 이준혁이 문을 열고 들어왔다. 윤혜인이 울고 있는 모습을 본 이준혁은 가슴이 찢어질 것 같았다. 좀 전까지 임세희한테 잔인하게 굴던 남자는 온데간데없었다.그동안 눈이 멀어 임세희의 악행을 깨닫지 못하고 윤혜인을 방치했던 대가는 참담했다. 이준혁은 위로의 말을 꺼내려 그녀의 옆으로 다가갔다. 하지만 윤혜인은 그에게 눈길 한번 주지 않고 공기 취급했다. 이준혁은 입을 달싹거리며 머뭇거렸다. 윤혜인은 며칠간 쉬었음에도 안색이 좋아지기는커녕 점점 더 창백해지고 야위어 갔다. 이준혁은 말로 위로하는 대신 손을 뻗어 그녀의 눈물을 닦아주려 했다. 하지만 손이 채 닿기도 전에 윤혜인이 매서운 눈빛으로 그를 째려보며 말했다. "뭐 하는 거예요?"윤혜인이 냉소를 지으며 갈라진 목소리로 말했다. "밥 먹었어?"이준혁의 질문에 윤혜인은 대꾸할 가치를 못 느꼈다."이준혁 씨, 우리한테 그런 일상적인 대화, 어울린다고 생각하세요?"날카로운 비수가 그의 가슴에 꽂혔다. 그래도 이준혁은 포기하지 않고 다시 입을 열었다. "임세희는 정신병원으로 보냈어."임세희의 이름이 나왔음에도 윤혜인의 표정은 매우 무덤덤했다. 임세희 따위, 그녀에겐 더 이상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그 모습을 본 이준혁은 가슴이 저렸다. 결국 참지 못하고 그가 윤혜인의 손을 잡으며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윤혜인은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이 기가 막힌 상황에 어떻게 대응해야 할지 몰랐다.그런데 이때, 갑자기 병실 문이 쾅 하고 열렸다. 그리고 이준혁이 채 반응하기도 전에 무언가가 그를 향해 날아왔다. 그것은 검은색 핸드백이었다. 핸드백이 정통으로 그의 등을 가격한 것이었다. 이어서 흰 블라우스에 검은색 바지를 입은 문현미가 살기 어린 표정으로 그의 등을 때렸다. 하지만 그래도 분이 안 풀리는지 문현미가 씩씩거리며 이준혁에게 말했다. "잘 보살피랬더니, 이게 도대체 무슨 일이야!"같은 엄마로서 아이를 잃었다는 소식에 문현미는 이루 말할 수 없는 슬픔을 느꼈다. 그동안 손주를 기다리면서 야금야금 사두었던 아기용품들도 이제 쓸모없게 되었다. 원래 윤혜인이 임신 7, 8개월에 접어들면 이태수에게도 말할 참이었다. 이 부분은 그나마 불행 중 다행이었다. 만약 미리 말했더라면, 겨우 회복한 이태수가 다시 드러누웠을 지도 몰랐다.문현미가 눈물을 흘리며 윤혜인을 끌어안았다."혜인아, 그동안 고생 많았지...."그러나 윤혜인은 눈물이 메말라 함께 울어줄 수가 없었다. 그녀가 공허한 눈빛으로 문현미에게 말했다."어머님, 저 이혼할래요."옆에 있던 이준혁이 움찔하고 몸을 떨었다. 안 그래도 윤혜인이 자꾸 이혼하자는 바람에, 그는 문현미에게 윤혜인의 입원 사실을 말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런데 문현미가 이곳에 왔다는 건, 답이 하나밖에 없었다. 윤혜인이 이혼하기 위해 지원군을 부른 것이다."혜인아, 일단 몸부터 추스르면... 나머지는 내가 해결할게.""안돼!"이준혁이 차갑게 끼어들었다. 여태껏 그가 입을 닫고 있던 터라, 문현미는 그가 옆에 있던 것을 까맣게 잊어버리고 있었다. 문현미가 화난 목소리로 그에게 외쳤다."넌 나가 있어!"하지만 이준혁은 도리어 문현미를 끌고 병실 밖으로 향했다. 그는 문현미가 뭐라 대꾸할 틈도 주지 않은 채 곧바로 주훈에게 명령을 내렸다."어머니 집까지 배웅해 드려."문현미가 이를 갈며 따졌다."너 이 녀석, 나 네 엄마
이준혁은 주훈과 함께 서둘러 병원으로 갔다. 주훈은 도착하자마자 바로 CCTV부터 확인했다. 새벽 한 시쯤, 간호사가 졸고 있는 틈을 타, 윤혜인이 흰 원피스를 입은 채 병실을 나오는 모습이 보였다. 그리고는 곧바로 엘리베이터를 탔는데, 병원을 나가는 모습이 없었다. 주훈은 엘리베이터가 멈춘 층수를 다시 확인했다. 윤혜인은 밑으로 내려간 것이 아닌, 병원 제일 꼭대기 층, 18층으로 올라간 것 같았다.그의 안색이 하얗게 질렸다."대표님, 옥상이에요."이 말을 들은 이준혁은 심장이 쿵쾅쿵쾅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그는 곧바로 옥상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한편, 윤혜인은 아주 아슬아슬하게 옥상 난간에 앉아 있었다. 하얀 원피스가 휘날리며 안 그래도 깡마른 몸매를 더 위태롭게 만들었다.옥상 문을 연 이준혁의 안색이 파랗게 질렸다. 처음으로 공포라는 감정이 그의 몸을 뒤엎었다."윤혜인!"혹시라도 그녀가 놀랄까, 이준혁이 조심스레 이름을 불렀다. 하지만 윤혜인은 듣지 못한 듯, 고개를 젖힌 채 하늘만 바라보고 있었다."너, 어딜 보고 있는 거야?"이준혁은 최대한 인기척을 죽인 채 천천히 그녀에게 다가갔다. 이때, 윤혜인이 정신 나간 사람처럼 멍하니 답했다."아기...."그녀가 가느다란 팔을 위로 뻗으며 허공을 가리켰다. "아기랑 작별 인사를 나누고 있었어요."이준혁은 망치에 머리를 맞은 사람처럼 자리에 굳어버렸다. 저절로 손발이 떨려왔다. 하지만 위태로운 윤혜인의 모습에 곧바로 다시 정신을 차리며 힘겹게 말했다. "일단 내려와, 응?"그제야 윤혜인이 고개를 돌리며 담담히 그에게 물었다. "그러면 절 놓아줄 수 있어요?"이준혁은 안된다고 불같이 화내고 싶었지만, 애써 분노를 내리누르며 말했다. "내려와서 얘기하면 안 될까?"그의 표정을 본 윤혜인은 자신의 작전이 절반은 성공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조금만 더 밀어붙이면, 원하는 답을 얻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물론 할머니한테 잘살겠다고 약속한 마당에, 목숨을 가지고 모험할 생각은 없었다.
할머니도 안 계시는 마당에, 그녀에게 그나마 위안이 되어주었던 아기가 떠났다. 하늘도 무심하시지, 어떻게 아이마저 빼앗아 가는가?그동안의 모든 울분을 토해내듯, 윤혜인은 울고 또 울었다."그렇게 애원했는데...."그 절망적인 순간, 오지 못할 거면 최소한 신고라도 해줬으면 이렇게 되지 않았다. 그가 한 선택은 정말 최악 중 최악이었다. 조금만 더 일찍 구조가 되었더라면, 아이가 살았을지도 몰랐다. 정말 힘겹게 몸을 웅크리며 아이를 지키고 있었는데, 그의 선택으로 모든 것이 물거품이 되었다. 이준혁도 그때를 떠올리면 후회돼 미칠 것 같았다. 그가 무릎을 꿇으며 사죄했다."미안해, 정말 미안해...."아무리 사과해도 그녀에게 닿지는 않겠지만, 그가 할 수 있는 건 지금 이거밖에 없었다. 죽음 앞에선 인간은 너무나도 무력한 존재였다. 마음 같아선 아이 대신 자신의 수명이라도 주고 싶었다. 윤혜인의 고통과 비교할 바는 안 되겠지만, 그도 아이만 생각하면 바늘이 가슴을 수천 번 찌르듯 아팠다. 윤혜인이 떨리는 목소리로 쥐어짜듯 그에게 애원했다. "제발 부탁이야. 더 이상 당신을 미워하고 싶지 않아...."이 말을 들은 이준혁은 심장이 갈기갈기 찢어지는 것 같았다. 온몸에 힘이 빠지며, 입안에서 신맛이 올라왔다. 얼마나 지났을까? 이준혁이 단념한 듯 잠긴 목소리로 고개를 끄덕였다."알겠어."다음 날 오후.퇴원 절차를 마친 뒤, 두 사람은 함께 이준혁이 운전하는 차를 타고 가정법원으로 향했다. 그는 조금이라도 시기를 늦추기 위해 40분 되는 거리를 돌고 돌아 한 시간을 더 돌았다. 두 사람 사이엔 오직 침묵뿐이었지만, 최근 들어 가장 평온한 순간이었다. 윤혜인도 마지막인 마당에 굳이 재촉하지 않고 차에 몸을 맡겼다. 잠시 후, 마침내 목적지에 도착했다. 그런데 안으로 들어가 보니, 법원 직원이 다짜고짜 사과부터 건넸다."죄송해요. 인터넷이 불안정해서 수리하는 데 조금 걸릴 것 같아요. 괜찮다면 내일 다시 오실래요?"이준혁의 마음에 희망의 불
기다린 보람이 있었다. 윤혜인은 홀가분한 표정으로 이준혁의 손에서 서류를 빼앗아 직원에게 당당히 내밀었다."네, 지금 처리해 주세요."이준혁의 몸이 딱딱하게 굳었다. 기어이 빨간 인장이 서류 위로 찍혔다. 윤혜인은 망설임 없이 이혼 증명 서류를 가방 안에 넣었다. 하지만 이준혁은 도장도 찍고 사인이 끝났음에도, 도무지 서류 받을 용기가 서지 않아 한참 자리에 서 있었다. 빨간 인장이 이토록 미웠던 적은 처음이었다. 그가 미적거리고 있자, 참다못한 윤혜인이 서류를 챙겨 그의 품에 안겨주었다."얼른 안 가고 뭐 해요? 여기 퇴근 시간 다 됐어요."고작 종이 한 장인데, 이준혁은 그 무계가 감당되지 않았다. 그 사이, 윤혜인은 진작에 법원을 나서고 있었다. 하지만 택시에 올라타기 직전, 뒤늦게 정신을 차린 이준혁이 뒤따라와 그녀를 막아 세웠다. 그것도 하필이면 그녀가 제대로 힘을 쓸 수 없는 오른손을 붙잡은 탓에 뿌리치지도 못했다. "이거 놔요!"윤혜인이 싸늘한 표정으로 그를 째려보며 말했다. 하지만 이준혁은 꿋꿋이 자신의 의사를 굽히지 않았다. "데려다줄게.""필요 없어요!"두 사람이 다투는 사이, 택시는 벌써 다른 손님을 발견하고 떠나버렸다. 윤혜인은 분노했지만, 이준혁은 끝까지 놓아주지 않았다. 그는 오히려 그녀가 심하게 반항하지 않자, 자신이 잡은 손이 오른손이라는 것도 잊고 오히려 희망을 품었다. "나랑 같이 갈래, 아니면 내가 안고 탈까?"윤혜인은 결국 그에게 질질 끌려 강제로 차에 탑승하게 되었다. 이준혁은 아주 물 흐르듯 그녀에게 안전벨트까지 채워주며 문을 잠갔다.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던 윤혜인이 분노하며 말했다."문 열어.""데려다줄게.""문 열어달라고 했잖아!"하지만 그가 들은 체도 하지 않자, 윤혜인은 곧바로 경찰에 신고하려 들었다. "윤혜인!"그 모습을 본 이준혁이 충격받은 표정으로 그녀의 손을 붙잡았다. 그도 윤혜인이 이렇게까지 할 줄은 전혀 예상치 못했다. 그렇게 한참, 겨우 윤혜인이 조금 진정된 것을
하지만 그것은 그의 착각이었다. 윤혜인은 뒤돌아본 적이 없었다. 깨어나 보니 어느새 그는 병원에 누워 있었다. 윤혜인이 아닌, 주훈이 그를 발견하여 병원으로 옮긴 것이었다. 며칠간 스트레스와 불면이 가져다준 결과였다. 그런데 의식을 차린 이준혁이 가장 먼저 꺼낸 말은 윤혜인의 존재를 확인하는 것이었다."병문안 왔었어?"앞뒤가 잘린 물음이었지만, 주훈은 단번에 그의 말을 알아들었다."아니요."이준혁이 단념하지 못하고 다시 물었다."내가 병원에 있다는 거 얘기했는데도?""전화드렸어요."주훈이 솔직하게 털어놓았다."뭐라고 했어?"주훈이 윤혜인과 했던 통화를 떠올리며 말했다."이미 병원에 입원하지 않았느냐고, 의사가 아니니 와도 별로 도움이 안 될 거라고 하셨어요. 그리고 이혼했으니, 앞으로 대표님 일로 연락하지 말라고도 하셨어요."그는 있는 그대로, 숨김없이 이준혁에게 알렸다. 다 듣고 난 이준혁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나가!"주훈은 망설임 없이 병실을 나섰다. 병실 문이 닫히자마자 안에서 물건들이 날아다니며 부서지는 소리가 났다. 이준혁이 분풀이로 물건들을 집어 던지고 있는 것 같았다. 주훈은 그 모습을 보며 결혼에 대한 모든 환상이 깨졌다. 한편, 윤혜인은 사흘 내내 집에 있으면서 생각 정리할 시간을 가졌다. 그리고 나흘째 되는 날, 본격적으로 그동안 미뤄뒀던 일들을 처리해 나갔다. 윤혜인은 우선 임수향에게 앞으로 작업실을 못 나가게 될 것 같다고 알려주었다. 임향수는 무척 아쉬워하며 붙잡았지만, 지금 상태론 도저히 작업할 수 없었기 때문에 끝까지 거절했다. 그다음 그녀가 한 것은 새로운 직장을 구하기 위해 이력서를 넣는 것이었다. 그녀는 총 두 곳에 지원서를 넣었는데, 하나는 번역일이었고 또 하나는 교육 기관이었다. 모두 바로 시작할 수 있는 일들이었다. 그러는 와중에 소원하고도 꾸준히 연락을 주고받았다. 그리고 드디어 오늘, 모든 정리가 끝나 함께 축하하러 외식하기로 했다.둘은 자연스레 단골 바로 향했다. 소원은 평소
이준혁의 얼굴색이 어두워졌다. 그의 표정을 본 윤혜인은 당황했다. 그가 거짓말을 얼마나 싫어하는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녀가 이혼을 위해 그런 연기까지 한 것을 알게 되었으니, 이준혁은 아마 크게 실망했을 것이다. 그럼에도 윤혜인은 차라리 잘됐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편이 서로의 관계를 정리하는 데 도움이 될 거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때, 소원이 나타나 윤혜인을 보호하며 이준혁을 경계하는 눈빛으로 바라보았다."어이없네. 먼저 잘못한 사람이 누군데, 이제 와서 피해자 코스프레이야? 그쪽이 잘했으면, 이럴 일도 없었잖아. 혜인이니까 이 정도로 끝냈지, 나였으면 그쪽은 진작에 무덤에 들어갔어."소원은 친구인 윤혜인을 보호하려 했다. 이준혁은 이런 취급을 당해도 쌌기 때문이다.일주일 만에 마주친 이준혁은 그림자가 조금 가신 듯했지만, 여전히 창백했다. 윤혜인은 얼마 전에 주훈으로부터 그가 아프다는 연락을 받았던 것이 떠올랐다. 쇠약한 이준혁의 모습을 보며, 윤혜인은 자신도 모르게 마음이 약해지는 것을 느꼈다. 역시 한때 사랑했던 사람을 무정하게 대하기란 쉽지 않았다. 그녀는 연민은 많지만, 쉽게 매정해지지 못하는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윤혜인은 이번에도 그가 말을 걸어올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이준혁은 한참 그녀를 바라볼 뿐, 곧 싸늘한 분위기를 풍기며 자리를 떠났다. 이것이 다시는 보지 말자던 그녀의 말에 대한 대답일지도 몰랐다. 원하던 바였으나, 윤혜인은 그의 냉정함에 마음 한쪽이 쓰라렸다.시간이 흘러도 사람의 마음속 깊이 박힌 감정은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그래도 윤혜인은 이렇게 서로를 완전히 잊는 것이 최선이라고 생각했다.그런데 이때, 옆에서 상황을 지켜보던 육경한이 차가운 눈빛으로 소원을 바라보며 말했다. "좀 이따가, 나 좀 보자. 우리 아직 못다 한 얘기가 있잖아, 그렇지?"술집에서 나온 후, 둘 다 술 마신 상태였기 때문에 소원은 대리운전을 불렀다. 그녀는 윤혜인을 먼저 데려다준 뒤, 육경한의 아파트로 향했다. 두려움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