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발 상황에 주훈은 우선 경호원들에게 멈추라는 신호를 보내며 이준혁을 바라봤다. 지금은 그의 지시를 기다릴 때였다. "나한테 어떻게 이럴 수가 있어! 내가 오빠 목숨도 구해줬는데!"임세희가 눈물을 짜내며 억지부리기 시작했다. ‘갚을 만큼 다 갚았다고? 누구 맘대로!’그녀는 인정할 수 없었다. 목숨을 구해준 순간부터, 이준혁은 그녀의 것이었다. 임세희는 그가 자신한테서 벗어나는 걸 용납할 수 없었다. 그리고 이준혁이라면 절대로 자신을 죽게 내버려두지 않을 거라는 확신이 있었다.아니나 다를까, 이준혁이 발걸음을 멈추며 그녀에게 다가오기 시작했다. 임세희의 표정이 환희로 가득 찼다. 목숨을 건 협박이 제대로 통한 것 같았다. 이준혁이 한쪽 무릎을 꿇은 채, 조용히 칼을 쥐고 있는 임세희의 손을 움켜쥐며 말했다."하지 마."임세희는 그동안의 설움이 해소되는 듯한 기분에 눈물이 왈칵하고 터져 나왔다.역시, 이준혁은 배신하지 않았다. 그는 차가워 보이는 것뿐, 속은 다정했던 것이다. 그렇지 않았다면 그 긴 세월 그녀를 돌봐줬을 리 없었다. 드디어 잃어버렸던 소중한 것을 다시 찾은 기분이었다.임세희가 감격스러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그렇지? 오빠가 날 그냥 내버려둘 리 없지...."하지만 환희가 절망으로 바뀌는 것은 한순간이었다. 임세희는 손에 들고 있던 칼을 버리려고 안간힘을 썼지만, 움직여지지 않았다. 이준혁이 으스러뜨릴 듯 그녀의 손을 움켜쥐고 있었기 때문이었다.임세희가 고통에 일그러진 얼굴로 말했다. "아, 아파... 왜, 왜 그러는 거야...?"이준혁은 들은 체도 하지 않았다. 그는 묵묵히 칼을 목 위쪽, 경동맥과 더 가까운 쪽으로 움직였다. "거기 아니야. 여기, 여기를 찔러야 확실히 죽을 수 있어."차가운 칼날의 감촉을 느낀 임세희는 그대로 굳어버렸다. 뼛속까지 공포가 파고들었다. 당장이라도 칼날이 그녀의 목을 뚫고 들어올 것 같았다. "죽겠다며? 어서 찔러 봐."이준혁이 무표정한 얼굴로 말했다."아니면, 내가 도와줘?"
간호사는 애쓰는 윤혜인의 모습이 안타까워 위로했다."회복하는 동안, 왼손 쓰는 연습도 하시는 편이 좋을 거예요."간호사가 떠나간 뒤에도 윤혜인은 손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그날 유리 조각을 잡으면서 손바닥 힘줄이 손상된 것 같았다. 한동안 오른손 쓰기는 어려워 보였다. 어쩐지 힘주면 손이 떨리더라니, 이 상태론 디자인 도안은커녕 일상생활도 어려울 터였다.윤혜인은 자기도 모르게 눈물이 흘러나왔다. ‘전생에 도대체 무슨 죄를 지었기에, 하늘이 내게 이런 벌을 내리는 걸까?’처음엔 외할머니였고, 그다음엔 아이였다. 이젠 손까지, 안 그래도 가진 것이 없는데 자꾸만 빼앗아 갔다.이때, 이준혁이 문을 열고 들어왔다. 윤혜인이 울고 있는 모습을 본 이준혁은 가슴이 찢어질 것 같았다. 좀 전까지 임세희한테 잔인하게 굴던 남자는 온데간데없었다.그동안 눈이 멀어 임세희의 악행을 깨닫지 못하고 윤혜인을 방치했던 대가는 참담했다. 이준혁은 위로의 말을 꺼내려 그녀의 옆으로 다가갔다. 하지만 윤혜인은 그에게 눈길 한번 주지 않고 공기 취급했다. 이준혁은 입을 달싹거리며 머뭇거렸다. 윤혜인은 며칠간 쉬었음에도 안색이 좋아지기는커녕 점점 더 창백해지고 야위어 갔다. 이준혁은 말로 위로하는 대신 손을 뻗어 그녀의 눈물을 닦아주려 했다. 하지만 손이 채 닿기도 전에 윤혜인이 매서운 눈빛으로 그를 째려보며 말했다. "뭐 하는 거예요?"윤혜인이 냉소를 지으며 갈라진 목소리로 말했다. "밥 먹었어?"이준혁의 질문에 윤혜인은 대꾸할 가치를 못 느꼈다."이준혁 씨, 우리한테 그런 일상적인 대화, 어울린다고 생각하세요?"날카로운 비수가 그의 가슴에 꽂혔다. 그래도 이준혁은 포기하지 않고 다시 입을 열었다. "임세희는 정신병원으로 보냈어."임세희의 이름이 나왔음에도 윤혜인의 표정은 매우 무덤덤했다. 임세희 따위, 그녀에겐 더 이상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그 모습을 본 이준혁은 가슴이 저렸다. 결국 참지 못하고 그가 윤혜인의 손을 잡으며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윤혜인은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이 기가 막힌 상황에 어떻게 대응해야 할지 몰랐다.그런데 이때, 갑자기 병실 문이 쾅 하고 열렸다. 그리고 이준혁이 채 반응하기도 전에 무언가가 그를 향해 날아왔다. 그것은 검은색 핸드백이었다. 핸드백이 정통으로 그의 등을 가격한 것이었다. 이어서 흰 블라우스에 검은색 바지를 입은 문현미가 살기 어린 표정으로 그의 등을 때렸다. 하지만 그래도 분이 안 풀리는지 문현미가 씩씩거리며 이준혁에게 말했다. "잘 보살피랬더니, 이게 도대체 무슨 일이야!"같은 엄마로서 아이를 잃었다는 소식에 문현미는 이루 말할 수 없는 슬픔을 느꼈다. 그동안 손주를 기다리면서 야금야금 사두었던 아기용품들도 이제 쓸모없게 되었다. 원래 윤혜인이 임신 7, 8개월에 접어들면 이태수에게도 말할 참이었다. 이 부분은 그나마 불행 중 다행이었다. 만약 미리 말했더라면, 겨우 회복한 이태수가 다시 드러누웠을 지도 몰랐다.문현미가 눈물을 흘리며 윤혜인을 끌어안았다."혜인아, 그동안 고생 많았지...."그러나 윤혜인은 눈물이 메말라 함께 울어줄 수가 없었다. 그녀가 공허한 눈빛으로 문현미에게 말했다."어머님, 저 이혼할래요."옆에 있던 이준혁이 움찔하고 몸을 떨었다. 안 그래도 윤혜인이 자꾸 이혼하자는 바람에, 그는 문현미에게 윤혜인의 입원 사실을 말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런데 문현미가 이곳에 왔다는 건, 답이 하나밖에 없었다. 윤혜인이 이혼하기 위해 지원군을 부른 것이다."혜인아, 일단 몸부터 추스르면... 나머지는 내가 해결할게.""안돼!"이준혁이 차갑게 끼어들었다. 여태껏 그가 입을 닫고 있던 터라, 문현미는 그가 옆에 있던 것을 까맣게 잊어버리고 있었다. 문현미가 화난 목소리로 그에게 외쳤다."넌 나가 있어!"하지만 이준혁은 도리어 문현미를 끌고 병실 밖으로 향했다. 그는 문현미가 뭐라 대꾸할 틈도 주지 않은 채 곧바로 주훈에게 명령을 내렸다."어머니 집까지 배웅해 드려."문현미가 이를 갈며 따졌다."너 이 녀석, 나 네 엄마
이준혁은 주훈과 함께 서둘러 병원으로 갔다. 주훈은 도착하자마자 바로 CCTV부터 확인했다. 새벽 한 시쯤, 간호사가 졸고 있는 틈을 타, 윤혜인이 흰 원피스를 입은 채 병실을 나오는 모습이 보였다. 그리고는 곧바로 엘리베이터를 탔는데, 병원을 나가는 모습이 없었다. 주훈은 엘리베이터가 멈춘 층수를 다시 확인했다. 윤혜인은 밑으로 내려간 것이 아닌, 병원 제일 꼭대기 층, 18층으로 올라간 것 같았다.그의 안색이 하얗게 질렸다."대표님, 옥상이에요."이 말을 들은 이준혁은 심장이 쿵쾅쿵쾅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그는 곧바로 옥상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한편, 윤혜인은 아주 아슬아슬하게 옥상 난간에 앉아 있었다. 하얀 원피스가 휘날리며 안 그래도 깡마른 몸매를 더 위태롭게 만들었다.옥상 문을 연 이준혁의 안색이 파랗게 질렸다. 처음으로 공포라는 감정이 그의 몸을 뒤엎었다."윤혜인!"혹시라도 그녀가 놀랄까, 이준혁이 조심스레 이름을 불렀다. 하지만 윤혜인은 듣지 못한 듯, 고개를 젖힌 채 하늘만 바라보고 있었다."너, 어딜 보고 있는 거야?"이준혁은 최대한 인기척을 죽인 채 천천히 그녀에게 다가갔다. 이때, 윤혜인이 정신 나간 사람처럼 멍하니 답했다."아기...."그녀가 가느다란 팔을 위로 뻗으며 허공을 가리켰다. "아기랑 작별 인사를 나누고 있었어요."이준혁은 망치에 머리를 맞은 사람처럼 자리에 굳어버렸다. 저절로 손발이 떨려왔다. 하지만 위태로운 윤혜인의 모습에 곧바로 다시 정신을 차리며 힘겹게 말했다. "일단 내려와, 응?"그제야 윤혜인이 고개를 돌리며 담담히 그에게 물었다. "그러면 절 놓아줄 수 있어요?"이준혁은 안된다고 불같이 화내고 싶었지만, 애써 분노를 내리누르며 말했다. "내려와서 얘기하면 안 될까?"그의 표정을 본 윤혜인은 자신의 작전이 절반은 성공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조금만 더 밀어붙이면, 원하는 답을 얻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물론 할머니한테 잘살겠다고 약속한 마당에, 목숨을 가지고 모험할 생각은 없었다.
할머니도 안 계시는 마당에, 그녀에게 그나마 위안이 되어주었던 아기가 떠났다. 하늘도 무심하시지, 어떻게 아이마저 빼앗아 가는가?그동안의 모든 울분을 토해내듯, 윤혜인은 울고 또 울었다."그렇게 애원했는데...."그 절망적인 순간, 오지 못할 거면 최소한 신고라도 해줬으면 이렇게 되지 않았다. 그가 한 선택은 정말 최악 중 최악이었다. 조금만 더 일찍 구조가 되었더라면, 아이가 살았을지도 몰랐다. 정말 힘겹게 몸을 웅크리며 아이를 지키고 있었는데, 그의 선택으로 모든 것이 물거품이 되었다. 이준혁도 그때를 떠올리면 후회돼 미칠 것 같았다. 그가 무릎을 꿇으며 사죄했다."미안해, 정말 미안해...."아무리 사과해도 그녀에게 닿지는 않겠지만, 그가 할 수 있는 건 지금 이거밖에 없었다. 죽음 앞에선 인간은 너무나도 무력한 존재였다. 마음 같아선 아이 대신 자신의 수명이라도 주고 싶었다. 윤혜인의 고통과 비교할 바는 안 되겠지만, 그도 아이만 생각하면 바늘이 가슴을 수천 번 찌르듯 아팠다. 윤혜인이 떨리는 목소리로 쥐어짜듯 그에게 애원했다. "제발 부탁이야. 더 이상 당신을 미워하고 싶지 않아...."이 말을 들은 이준혁은 심장이 갈기갈기 찢어지는 것 같았다. 온몸에 힘이 빠지며, 입안에서 신맛이 올라왔다. 얼마나 지났을까? 이준혁이 단념한 듯 잠긴 목소리로 고개를 끄덕였다."알겠어."다음 날 오후.퇴원 절차를 마친 뒤, 두 사람은 함께 이준혁이 운전하는 차를 타고 가정법원으로 향했다. 그는 조금이라도 시기를 늦추기 위해 40분 되는 거리를 돌고 돌아 한 시간을 더 돌았다. 두 사람 사이엔 오직 침묵뿐이었지만, 최근 들어 가장 평온한 순간이었다. 윤혜인도 마지막인 마당에 굳이 재촉하지 않고 차에 몸을 맡겼다. 잠시 후, 마침내 목적지에 도착했다. 그런데 안으로 들어가 보니, 법원 직원이 다짜고짜 사과부터 건넸다."죄송해요. 인터넷이 불안정해서 수리하는 데 조금 걸릴 것 같아요. 괜찮다면 내일 다시 오실래요?"이준혁의 마음에 희망의 불
기다린 보람이 있었다. 윤혜인은 홀가분한 표정으로 이준혁의 손에서 서류를 빼앗아 직원에게 당당히 내밀었다."네, 지금 처리해 주세요."이준혁의 몸이 딱딱하게 굳었다. 기어이 빨간 인장이 서류 위로 찍혔다. 윤혜인은 망설임 없이 이혼 증명 서류를 가방 안에 넣었다. 하지만 이준혁은 도장도 찍고 사인이 끝났음에도, 도무지 서류 받을 용기가 서지 않아 한참 자리에 서 있었다. 빨간 인장이 이토록 미웠던 적은 처음이었다. 그가 미적거리고 있자, 참다못한 윤혜인이 서류를 챙겨 그의 품에 안겨주었다."얼른 안 가고 뭐 해요? 여기 퇴근 시간 다 됐어요."고작 종이 한 장인데, 이준혁은 그 무계가 감당되지 않았다. 그 사이, 윤혜인은 진작에 법원을 나서고 있었다. 하지만 택시에 올라타기 직전, 뒤늦게 정신을 차린 이준혁이 뒤따라와 그녀를 막아 세웠다. 그것도 하필이면 그녀가 제대로 힘을 쓸 수 없는 오른손을 붙잡은 탓에 뿌리치지도 못했다. "이거 놔요!"윤혜인이 싸늘한 표정으로 그를 째려보며 말했다. 하지만 이준혁은 꿋꿋이 자신의 의사를 굽히지 않았다. "데려다줄게.""필요 없어요!"두 사람이 다투는 사이, 택시는 벌써 다른 손님을 발견하고 떠나버렸다. 윤혜인은 분노했지만, 이준혁은 끝까지 놓아주지 않았다. 그는 오히려 그녀가 심하게 반항하지 않자, 자신이 잡은 손이 오른손이라는 것도 잊고 오히려 희망을 품었다. "나랑 같이 갈래, 아니면 내가 안고 탈까?"윤혜인은 결국 그에게 질질 끌려 강제로 차에 탑승하게 되었다. 이준혁은 아주 물 흐르듯 그녀에게 안전벨트까지 채워주며 문을 잠갔다.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던 윤혜인이 분노하며 말했다."문 열어.""데려다줄게.""문 열어달라고 했잖아!"하지만 그가 들은 체도 하지 않자, 윤혜인은 곧바로 경찰에 신고하려 들었다. "윤혜인!"그 모습을 본 이준혁이 충격받은 표정으로 그녀의 손을 붙잡았다. 그도 윤혜인이 이렇게까지 할 줄은 전혀 예상치 못했다. 그렇게 한참, 겨우 윤혜인이 조금 진정된 것을
하지만 그것은 그의 착각이었다. 윤혜인은 뒤돌아본 적이 없었다. 깨어나 보니 어느새 그는 병원에 누워 있었다. 윤혜인이 아닌, 주훈이 그를 발견하여 병원으로 옮긴 것이었다. 며칠간 스트레스와 불면이 가져다준 결과였다. 그런데 의식을 차린 이준혁이 가장 먼저 꺼낸 말은 윤혜인의 존재를 확인하는 것이었다."병문안 왔었어?"앞뒤가 잘린 물음이었지만, 주훈은 단번에 그의 말을 알아들었다."아니요."이준혁이 단념하지 못하고 다시 물었다."내가 병원에 있다는 거 얘기했는데도?""전화드렸어요."주훈이 솔직하게 털어놓았다."뭐라고 했어?"주훈이 윤혜인과 했던 통화를 떠올리며 말했다."이미 병원에 입원하지 않았느냐고, 의사가 아니니 와도 별로 도움이 안 될 거라고 하셨어요. 그리고 이혼했으니, 앞으로 대표님 일로 연락하지 말라고도 하셨어요."그는 있는 그대로, 숨김없이 이준혁에게 알렸다. 다 듣고 난 이준혁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나가!"주훈은 망설임 없이 병실을 나섰다. 병실 문이 닫히자마자 안에서 물건들이 날아다니며 부서지는 소리가 났다. 이준혁이 분풀이로 물건들을 집어 던지고 있는 것 같았다. 주훈은 그 모습을 보며 결혼에 대한 모든 환상이 깨졌다. 한편, 윤혜인은 사흘 내내 집에 있으면서 생각 정리할 시간을 가졌다. 그리고 나흘째 되는 날, 본격적으로 그동안 미뤄뒀던 일들을 처리해 나갔다. 윤혜인은 우선 임수향에게 앞으로 작업실을 못 나가게 될 것 같다고 알려주었다. 임향수는 무척 아쉬워하며 붙잡았지만, 지금 상태론 도저히 작업할 수 없었기 때문에 끝까지 거절했다. 그다음 그녀가 한 것은 새로운 직장을 구하기 위해 이력서를 넣는 것이었다. 그녀는 총 두 곳에 지원서를 넣었는데, 하나는 번역일이었고 또 하나는 교육 기관이었다. 모두 바로 시작할 수 있는 일들이었다. 그러는 와중에 소원하고도 꾸준히 연락을 주고받았다. 그리고 드디어 오늘, 모든 정리가 끝나 함께 축하하러 외식하기로 했다.둘은 자연스레 단골 바로 향했다. 소원은 평소
이준혁의 얼굴색이 어두워졌다. 그의 표정을 본 윤혜인은 당황했다. 그가 거짓말을 얼마나 싫어하는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녀가 이혼을 위해 그런 연기까지 한 것을 알게 되었으니, 이준혁은 아마 크게 실망했을 것이다. 그럼에도 윤혜인은 차라리 잘됐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편이 서로의 관계를 정리하는 데 도움이 될 거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때, 소원이 나타나 윤혜인을 보호하며 이준혁을 경계하는 눈빛으로 바라보았다."어이없네. 먼저 잘못한 사람이 누군데, 이제 와서 피해자 코스프레이야? 그쪽이 잘했으면, 이럴 일도 없었잖아. 혜인이니까 이 정도로 끝냈지, 나였으면 그쪽은 진작에 무덤에 들어갔어."소원은 친구인 윤혜인을 보호하려 했다. 이준혁은 이런 취급을 당해도 쌌기 때문이다.일주일 만에 마주친 이준혁은 그림자가 조금 가신 듯했지만, 여전히 창백했다. 윤혜인은 얼마 전에 주훈으로부터 그가 아프다는 연락을 받았던 것이 떠올랐다. 쇠약한 이준혁의 모습을 보며, 윤혜인은 자신도 모르게 마음이 약해지는 것을 느꼈다. 역시 한때 사랑했던 사람을 무정하게 대하기란 쉽지 않았다. 그녀는 연민은 많지만, 쉽게 매정해지지 못하는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윤혜인은 이번에도 그가 말을 걸어올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이준혁은 한참 그녀를 바라볼 뿐, 곧 싸늘한 분위기를 풍기며 자리를 떠났다. 이것이 다시는 보지 말자던 그녀의 말에 대한 대답일지도 몰랐다. 원하던 바였으나, 윤혜인은 그의 냉정함에 마음 한쪽이 쓰라렸다.시간이 흘러도 사람의 마음속 깊이 박힌 감정은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그래도 윤혜인은 이렇게 서로를 완전히 잊는 것이 최선이라고 생각했다.그런데 이때, 옆에서 상황을 지켜보던 육경한이 차가운 눈빛으로 소원을 바라보며 말했다. "좀 이따가, 나 좀 보자. 우리 아직 못다 한 얘기가 있잖아, 그렇지?"술집에서 나온 후, 둘 다 술 마신 상태였기 때문에 소원은 대리운전을 불렀다. 그녀는 윤혜인을 먼저 데려다준 뒤, 육경한의 아파트로 향했다. 두려움이
상황이 매우 긴급했기에 육경한은 몸이 채 낫지도 않았는데 병원으로 나와 곁을 지켰고 소원도 마찬가지였다. 이제 결정을 내릴 때가 된 것 같았다. 장기 이식을 기다리는 일은 운이 좋으면 빨리 되겠지만 그렇지 못할 경우 10년을 기다려도 힘들었다. 게다가 유진의 몸 상태는 그렇게 오래 기다릴 수 없었다.소원은 리스크를 감수하고 유진에게 그 알약을 먹이려고 했고 육경한도 동의했다. 소원도 잘 회복하고 있었고 임신까지 했다는 건 약효가 정말 신기하다는 의미였다.약을 먹기 전에 소원과 육경한이 유진의 손을 잡고 격려했다. 유진은 두 사람이 생각했던 것보다 더 용감했고 오히려 웃으며 두 사람을 위로했다.“아빠, 엄마 걱정하지 마세요. 유진이 꼭 나아서 더 좋은 유진이가 될게요.”유진은 그 알약을 먹은 후로 고열에 시달리는 등 이상 반응이 나타났다. 몸이 작기도 했고 체질이 약해서 감당 능력이 어른과는 비길 수 없었다.소원은 속이 바질바질 타들어 갔고 서현재도 소식을 받고 달려왔다. 유진이 커가는 걸 옆에서 지켜본 사람이라 그 감정이 여간 두터운 게 아니었기에 유진이 아프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바로 달려온 것이다. 육경한은 서현재를 보고도 드물게 화를 내지 않았고 쫓아내지도 않았다. 아마도 서현재의 눈빛에서 유진에 대한 걱정을 보아내서 그런 것 같았다.서현재는 정말 유진을 끔찍이 아꼈고 유진도 서현재를 좋아했기에 육경한은 유진이 깨어났을 때 기분이 조금이라도 더 좋아지길 바랐다. 아버지가 된 후로 육경한은 무슨 결정을 내릴 때 그렇게 차갑지 않았고 감정이라는 게 들어갔다. 아버지가 되면서 얻은 제일 큰 변화였다.지금 이 세 사람에겐 같은 목표가 생겼다. 그것은 바로 유진의 건강이었다.세 사람이 이렇게 화목하게 병원 복도에 앉아 있은 건 처음이었다. 유진이 여기 있으니 병원의 모든 전문가가 대기하고 있었고 조금만 이상을 보여도 바로 응급조치에 들어갔다. 알약을 복용한 이튿날 밤, 유진이 잠에서 깼고 얼굴에 윤기가 감도는 게 상태가 매우 좋아 보였다. 검사 결과
진아연의 죄는 이루 말하기도 힘들 정도였다. 그런 사람이 아직도 벌을 받지 않고 멀쩡하게 사는 건 용납할 수 없었다.소원은 진아연을 꼭 찾아내 벌받게 하고 진아연 뒤에 숨어있는 사람이 누군지 잡아내겠다고 다짐했다.‘그 배후가 무슨 목적을 가지고 이런 짓을 벌였는지도 알아내야 해.’소원의 말이 끝나기 바쁘게 안지영이 불안한 표정으로 옆방에서 건너오더니 소원에게 말했다.“언니, 우리 아빠... 아무 잘못 없는 거 맞아요?”소원이 고개를 끄덕였다.“그래요. 지영 씨 아빠 살인범 아니에요. 지영 씨가 있으니까 삼촌이 무슨 결정을 하기 전에 늘 지영 씨를 생각하더라고요. 지영 씨 실망하게 하지 않으려고 삼촌이 엄청 노력한 건 사실이에요.”안지영이 그제야 한시름 놓으며 아버지가 살인범이 아니라는 사실에 기뻐했다.“언니, 언니도 하루빨리 아저씨 죽인 범인 찾아내길 바라요.”소원이 고개를 끄덕였다.“그래요. 나도 그러길 바라고 있어요.”소원에게 남은 유일한 목표는 그 사람을 찾아내어 응당한 벌을 내리는 것이었다. 소원은 미리 친구에게 연락해 지금 당장 두 사람을 데리고 나가게 했다. 안상철의 힘을 빌리면서 소원에게 피해가 가지 않게 하려면 어떻게든 두 사람을 보호해야 했고 최대한 비밀스럽게 움직여야 했다. 이런 상황에서는 외국으로 잠깐 피신해 있는 게 제일 좋은 방법이었다.소원은 그 자리에서 나오며 강민혜에게 소식을 알렸다. 강민혜는 소원이 안상철을 믿은 것에 놀란 듯 보였다. 다만 오래전 일이라 별다른 증거가 없는 게 문제였다. 예를 들면 안상철이 소진용을 아래로 밀어버리는 장면에 대한 증거가 없었기에 안상철의 말만으로는 죄를 물을 수가 없었다.소원이 말했다.“나는 삼촌 믿어요. 오래 알고 지내기도 했고 오늘 얘기를 나누면서 느꼈는데 내가 예전에 알던 그 삼촌이 맞았어요.”소원이 안상철을 믿기로 한 원인 중 하나였다. 안상철은 소원을 해치려는 생각이 없었고 결국 손을 대지 않았다. 딸을 끔찍이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소진용처럼 마음이 약한 사람일 것
진아연이 소진용을 죽이려 한 이유는 사실 간단했다. 소진용의 죽음으로 육경한과 소원 사이에 돌이킬 수 없는 오해를 만들고 소원이 아버지의 투신을 육경한이 건넨 파일때문이라고 생각해 육경한을 죽도록 원망하게 만들기 위해서였다. 그러면 소원은 육경한을 죽이려고 죽기 살기로 달려들 테고 진아연은 어부지리로 육경한이 제일 사랑하는 여자가 되어 결국엔 육경한과 결혼할 수 있다고 생각한 것 같았다. 자신의 사리사욕을 채우려고 다른 사람의 목숨을 해치다니, 진아연은 정말 뱀보다 더 잔인하고 독한 여자였다.사실 소원은 소진용의 죽음을 계속 의심하고 있었다. 사업을 하면서 이런저런 일을 다 겪었을 텐데 딱 봐도 흠집이 많은 계약서 때문에 옥살이할까 봐 투신자살할 사람은 아니었기 때문이다.소진용은 절대 그렇게 나약한 사람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때는 소원도 아버지의 죽음에 큰 충격을 받고 정신이 반쯤 나간 상태였기에 깊이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게다가 어머니 전미영까지 쓰러졌으니 타격이 이만저만이 아니었기에 마음이 잿더미가 된 소원은 좀비처럼 살면서 차분하게 정리할 힘을 완전히 잃어버렸고 숨을 쉬는 것조차 죄라고 생각했다.모든 걸 털어놓은 안상철은 그제야 홀가분해졌다. 마음의 짐을 떠안고 살면서 털어놓을 엄두를 내지 못한 건 결국 복수가 두려워서였다. 범인이 살인도 마다하지 않았다면 계획을 알고 있는 안상철을 가만둘 리가 없었기 때문이다.범인이 안상철만 노린다면 안상철도 두려울 게 없었지만 돌봐야 할 딸도 있고 모셔야 할 어른도 있었기에 그들까지 위험한 처지에 놓이게 할 수는 없었다. 이제 와서 묵혀뒀던 사실을 털어놓은 건 소진용에 대한 죄책감이 커서였지만 다 털어놓음으로써 안상철의 마음도 많이 편해졌다.소원은 이제 안상철의 처지를 알았고 안상철이 왜 진실을 말해주려 하지 않았는지 이해했다.“삼촌, 지금 이대로 출국해서는 안 돼요. 너무 위험할뿐더러 지영 씨도 힘들 거예요. 내가 전화번호 하나 줄 테니까 그 사람한테 연락하면 무사히 출국할 수 있게 도와줄 거예요. 내
안상철은 아직도 그날을 떠올리면 살이 떨렸다.“아래서 울부짖는 소리가 들리길래 대표님께 무슨 일이 생겼구나 싶었어요. 하지만 아까만 해도 도움이 필요하면 언제든지 말하라고 했던 분이 왜 갑자기 뛰어내린 건지 의문이었죠.”안상철의 머릿속에 그 남자가 떠올랐다. 낯선 사람이었고 다급하게 현장을 벗어난 걸 봐서는 회사 직원은 아닌 것 같았다. 하지만 안상철이 소진용의 죽음을 의심한 건 이것 때문만은 아니었다. 사무실에 들어갔을 때 소진용의 컴퓨터가 켜져 있었는데 차마 눈뜨고 보기 힘든 영상이 아직도 재생되고 있었기 때문이다.소진용이 얼마나 딸을 사랑하는 데 자살할 마음을 먹었다 해도 딸에게 불리한 동영상은 무조건 지우지 켜두고 갔을 리 만무했다. 적어도 다른 사람이 올라와 조사할 것을 대비해 딸의 이미지를 생각해서라도 조치했을 텐데 그럴 겨를조차 없었다는 것이다.하지만 안상철은 이내 여기 있다가 발견되면 무조건 연루된다는 생각에 바로 그 자리를 벗어나려 했다. 딸이 집에서 기다리고 있다는 게 떠올라 더 생각할 겨를도 없이 허둥지둥 USB를 빼서 사무실에서 나왔다.그 뒤로 시골에 숨어 나올 엄두를 내지 못했고 소진용의 장례식에도 참석하지 않았다. 그렇게 며칠 숨어있다가 소식을 알아보러 나왔는데 신문 기사에 소진용이 자살했다고 적혀있는 걸 보고 이 사실이 이대로 묻혔음을 알게 되었다. 안상철은 기회를 노리고 여자에게 전화를 걸었다. 여자는 잘했다고 칭찬하며 안상철에게 외국 의사의 연락처를 보내줬다.소식이 잠잠해지자 안상철은 안지영을 데리고 수술하러 나갔지만 약간의 휴양 시간만 가지고 다시 귀국했다. 외국은 적응하기 힘들뿐더러 누구든 총을 소지할 수 있었기에 늘 안지영이 괴롭힘을 위험해질까 봐 전전긍긍하다가 고민 끝에 그래도 국내가 안전할 것 같아 안지영을 데리고 귀국한 것이다.그렇게 5년간 안정된 삶을 살면서 모든 게 지나갔다고 생각했는데 소원이 찾아오면서 더는 숨길 수 없다는 걸 알아챘다.안상철이 하는 말을 듣고 있던 소원이 한참 동안 아무 말도 하지
하지만 그때는 딸을 구하는 데 급급해 다른 생각을 할 겨를도, 눈에 뵈는 것도 없었다.“그러다 결국 그 여자의 요구를 들어주게 됐어요. 해산 회의를 하는 날 모든 사람이 아래층에 모여있을 때 대표님 사무실로 향했죠. 어디로 가면 CCTV를 피할 수 있는지 알고 있어서 나를 발견한 사람은 없었어요. 하지만 사모님은 그날 사무실에 함께 계셔서 그날 마지막으로 대표님을 만난 사람이 나라는 걸 알고 있었어요.”소원은 전미영도 이 일을 알고 있을 줄은 몰랐다. 다만 전미영은 뒤에 큰 충격을 이겨내지 못하고 그대로 혼수상태에 빠졌고 그렇게 진실은 오랫동안 묻히고 말았다.안상철이 계속 말을 이어갔다.“그 영상을 대표님께 보여주면서 가끔은 어른이 살아있는 게 자식들에겐 짐이 될 수도 있다고 말했죠. 딸이 힘든 거 보기 싫으면 이제 결정할 때가 되었다고 말이에요.”“내 말을 들은 대표님이 한참 동안 말을 아끼셨어요. 그리고 내 예상과는 달리 딸에게 짐이 되지 말아야 한다면서도 딸 혼자서 이 모든 걸 짊어지게 하는 건 아니라면서 딸이 받아들이기 힘든 일은 하지 않겠다고 했어요. 대표님은 자살하면 소원 씨가 충격을 받을까 봐, 모든 걸 자기 잘못으로 돌릴까 봐 걱정했어요. 대표님은 참 좋은 아버지였고 소원 씨를 참 잘 알았죠.”소원의 눈동자에 눈물이 가득 차오르더니 이내 두 볼을 타고 주르륵 흘러내렸다. 마음이 너무 아파 숨 쉬는 것조차 너무 힘들었다.안상철이 말했다.“그때는 나도 너무 감동해서 내가 사람도 아니라고 생각했어요. 자기 딸을 구하겠다고 똑같이 딸을 사랑하는 아버지를 해치려 한 내가 너무 미워서 그 자리에서 바로 모든 걸 털어놓았어요. 대표님이 너그럽게 용서해 주면서 하시던 말씀은 아직도 잊을 수가 없어요.”“안 비서, 이번만큼은 내가 용서할게요. 같은 아빠니까 용서하겠지만 앞으로 절대 이런 실수는 하지 마요. 무슨 일 있으면 언제든 말하고요.”안상철이 눈시울을 붉혔다. 같은 아빠로서 똑같이 지켜야 하는 사람이 있는데 하마터면 아빠의 자격을 잃은 뻔
소원이 무릎을 꿇자 충격을 받은 안상철이 입술을 뻐끔거리더니 이렇게 말했다.“지영아, 다른 방에서 나 기다려.”안지영이 가지 않고 이렇게 물었다.“아빠, 내가 알면 안 되는 일이라도 있어요?”“말 들어.”안상철이 말했다. 안지영이 알면 자책할 게 뻔했기에 절대 알게 해서는 안 된다. 죄책감이라는 족쇄는 안상철이 평생 지는 걸로 족했고 딸만큼은 여생을 아무 부담 없이 즐겁게 지내길 바랐다. 만약 아버지가 그녀를 위해 양심에 반하는 일을 했다는 걸 알면 안지영은 평생 행복하게 살 수 없을 것이다.안지영은 안상철이 걱정되어 이렇게 물었다.“설마 소원 언니한테 무슨 짓 하려는 거 아니죠?”안상철이 그런 안지영을 보며 말했다.“아빠 못 믿어? 걱정하지 마. 아빠 절대 사람 죽인 적 없어.”이 말에 안지영은 청심환이라도 먹은 것처럼 두 사람을 번갈아 보더니 옆방으로 향했다. 이제 방안에는 소원과 안상철만 남았다.안상철이 앞으로 다가가 소원을 부축하더니 말했다.“소원 씨, 일어나요.”소원이 자리에서 일어나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삼촌, 나 삼촌 믿어요. 하지만 진실이 뭔지 알려주시면 안 될까요?”잠깐의 침묵이 흐르고 안상철이 입을 열었다.“소원이 예상이 맞아요. 대표님은 누군가에 의해 살해당한 거예요.”소원의 마음은 마치 무수히 많은 화살에 맞은 것처럼 너무 아팠다.‘아빠가 자살한 게 아니라 누군가에 의해 죽임을 당한 거라니...’안상철이 그해 있었던 일을 떠올렸다.“그해 해산 회의를 하기 전에 어떤 여자가 저를 찾아왔어요. 돈은 섭섭지 않게 줄 테니 말하는 대로만 하면 된다고 말했죠. 무슨 일이냐 했더니 어떤 물건을 대표님께 보여드리면 된다고 했어요. 좋은 물건은 아니겠다 싶었는데 아니나 다를까 여자가 준 테이프 안에는...”안상철이 잠깐 뜸을 들이더니 이렇게 말했다.“소원 씨가... 누군가에게 괴롭힘을 당하는 영상이었어요. 남자가 많았던 걸로 기억하는데 소원 씨 얼굴이 아주 또렷하게 나왔더라고요. 나는 아무리 많은 돈을 준다
하지만 지금은...안상철이 들고 있던 막대기를 놓으며 말했다.“가요.”소원을 보내주는 건 안상철이 베풀 수 있는 마지막 자비였다. 아니면 정말 소원을 쓰러트리고 강에 던져버렸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안상철은 어릴 때부터 삼촌이라고 부르며 따라다니던 소원이 생각나 결국 실패하고 말았다.안상철이 말했다.“난 아무것도 모르니까 찾아오지 마요. 다치고 싶지 않으면 얼른 가요.”소원이 입을 열었다.“삼촌, 난 그저 사실을 알고 싶을 뿐이에요. 제발 부탁이에요. 우리 아빠... 도대체 어떻게 된 거예요.”과거 얘기가 나오자 안상철은 가슴이 철렁했고 이내 걷잡을 수 없는 죄책감에 사로잡혔지만 안상철도 결국 딸을 보호해야 하는 아버지였고 노인을 먹여 살려야 하는 아들이었기에 진실을 말할 수는 없었다.마음을 다잡은 안상철이 막대기로 소원을 가리켰다.“소원 씨, 5분 줄게요. 그래도 안 간다면...”안상철이 잠깐 뜸을 들이더니 매서운 눈빛으로 말했다.“나도 내가 무슨 짓을 할지 몰라요.”소원은 갈 생각이 없었다. 안상철이 이렇게 내쫓는다는 건 아직 양심을 완전히 말아먹은 건 아니라는 의미였다.그때도 딸을 살리기 위해 순간 이성을 잃은 것 같았다. 피해자의 딸인 소원은 안성철을 용서할 수 없지만 자식을 사랑하는 부모로서 느끼는 무력감을 이해할 수 있었다.그렇다고 해서 진실을 묵과할 수 있는 건 아니었다.“삼촌, 진실을 알기 전까지는 절대 가지 않을 거예요.”소원이 꿋꿋하게 말했다.“기회를 줘도 제 발로 걷어차네요.”안상철이 손에 든 막대기를 흔들며 소원에게 달려들었다.“아악...”옆에 있던 안지영이 놀라서 울음을 터트리며 안상철의 팔을 잡고 울먹였다.“아빠, 아빠... 제발 다른 사람 다치게 하지 마요...”안상철이 난감한 표정으로 딸을 바라봤다. 지금 마음을 모질게 먹지 않으면 앞으로 더는 그녀를 보호할 수 없다는 걸 모르는 것 같았다.안지영이 울면서 말했다.“소원 언니가 나 살려줬는데... 이러면 안 되죠.”안상철이 난감한 표정으로
소원은 안지영이 말한 주소로 향했다.지난번의 교훈을 바탕으로 이번에는 소원 혼자 갔다. 괜히 안상철을 놀라게 하면 안 되기 때문이다. 혼자 가야 무언가라도 물어볼 수 있을 것이다.안지영이 보내준 장소는 꽤 멀리 있는 교외였다.안지영의 말로는 안상철이 안지영을 데리고 외국으로 나가려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서울에서 차를 타고 외진 변두리 작은 마을로 간 뒤 거기서 출발하려는 모양이었다. 물론 떠날 방법은 아주 많았다.소원이 장소에 도착했을 때 날은 이미 어두워져 있었다.교외에도 집이 몇 채 있었다. 안상철은 안지영을 데리고 폐교가 된 학교 안에 숨어 떠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소원은 문 앞에 도착한 뒤 안지영이 말한 대로 뒤쪽 담장의 구멍으로 기어들어 갔다.학교가 오랫동안 방치되어 있어 곳곳에 잡초가 무성한 것이 그야말로 숨기 좋은 장소였다.소원은 교실 하나하나를 돌아다니며 확인했고 마침내 세 번째 교실을 찾았다.교실 안에는 키가 크지만 몸이 약간 구부정한 사람이 서 있었다. 소원은 그 사람이 안상철임을 한눈에 알아보았다.오랜 시간이 지났지만 안상철의 모습은 거의 변하지 않았다. 다만 등이 살짝 구부러져 있는 것이 삶에 많이 짓눌린 듯했다.소원이 흥분한 마음을 가라앉히고 천천히 문을 두드리자 안상철이 즉시 경계 태세를 취하며 몸을 돌렸다. 손에 두꺼운 몽둥이를 쥔 채 문을 뚫어져라 쳐다보는 안상철은 소원을 본 순간 표정이 확 바뀌었다. 그는 소원이 어떻게 여기에 왔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어떻게...”소원이 먼저 말했다.“상철 삼촌, 오랜만이에요.”안상철이 깜짝 놀란 얼굴로 말했다.“여기에 어떻게 온 거예요?”소원이 대답하기도 전에 안지영이 먼저 말했다.“내가 말했어요. 아빠, 내가 소원 언니를 불렀어요.”“지영아, 너 미쳤니?”안상철이 화를 내며 말했다.“내가 한 말 다 잊었니?”“안 잊었어요.”안지영이 흥분한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안 잊었기 때문에 소원 언니를 부른 거예요. 아빠가 나를 데리고 외국으로 가
주석훈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지금은 미열이 나는 것뿐이에요.”소원은 그나마 마음이 조금 놓였지만 그렇다고 완전히 놓은 것은 아니었다.일단 미열이 있다는 것은 매우 좋지 않은 상황이었다.주석훈은 소원의 걱정스러운 표정을 보고 웃으며 말했다.“소원 씨, 걱정하지 마세요. 말했잖아요. 생사는 운명에 달려 있다고. 어떤 결과든 받아들일 거예요. 소원 씨와는 상관이 없어요. 다 내 운명이니까 자책하지 마세요.”주석훈이 이렇게 말할수록 소원은 더욱 미안해져 조용히 한마디 했다.“주 변호사님, 그렇게 위로하지 않아도 돼요. 저도 제 책임이 크다는 거 알아요. 내가 갑자기 아프지만 않았어도 주 변호사님이 저를 병원에 데려가는 일은 없었겠죠. 그러면 그 취객에게 물리지도 않았을 것이고요. 이미 일어난 일, 우리 같이 좋은 결과가 나오길 기도해요. 어떤 결과가 나오든 주 변호사님에게 큰 빚을 졌으니 제가 도울 수 있는 일이 있으면 말씀하세요. 반드시 도울게요.”주석훈이 말했다.“내가 어떻게 말해도 소원 씨는 본인 책임이라고 생각하겠군요. 하하, 그럼 진짜로 문제가 생기면 소원 씨에게 부탁할게요.”농담 반 진담 반으로 한마디 한 주석훈에 그나마 마음이 놓인 소원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꼭이요!”이때 소원의 전화에 낯선 번호가 걸려왔다.문밖으로 나가 전화를 받았지만 전화기 너머로 아무 말도 들리지 않았다.소원이 물었다.“여보세요, 누구세요?”“...”“계속 말하지 않으면 끊을게요.”소원이 장난 전화인 줄 알고 전화를 끊으려던 순간 상대방이 말했다.“소원 언니...”소원은 깜짝 놀랐다.목소리만으로도 안지영임을 바로 알아챌 수 있었다.지난 며칠 동안 안지영의 집에 아무런 움직임이 없다고 강민혜가 말했다. 가족들이 집에만 틀어박힌 채 밖으로 나가지 않는다고 했다.그리고 안상철도 한 번도 나타나지 않았다.아무래도 그들이 경계하고 있는 모양이었다.안상철이 눈치를 챈 것이다.소원이 아무리 초조해해도 나타나지 않으면 그를 찾을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