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발 상황에 주훈은 우선 경호원들에게 멈추라는 신호를 보내며 이준혁을 바라봤다. 지금은 그의 지시를 기다릴 때였다. "나한테 어떻게 이럴 수가 있어! 내가 오빠 목숨도 구해줬는데!"임세희가 눈물을 짜내며 억지부리기 시작했다. ‘갚을 만큼 다 갚았다고? 누구 맘대로!’그녀는 인정할 수 없었다. 목숨을 구해준 순간부터, 이준혁은 그녀의 것이었다. 임세희는 그가 자신한테서 벗어나는 걸 용납할 수 없었다. 그리고 이준혁이라면 절대로 자신을 죽게 내버려두지 않을 거라는 확신이 있었다.아니나 다를까, 이준혁이 발걸음을 멈추며 그녀에게 다가오기 시작했다. 임세희의 표정이 환희로 가득 찼다. 목숨을 건 협박이 제대로 통한 것 같았다. 이준혁이 한쪽 무릎을 꿇은 채, 조용히 칼을 쥐고 있는 임세희의 손을 움켜쥐며 말했다."하지 마."임세희는 그동안의 설움이 해소되는 듯한 기분에 눈물이 왈칵하고 터져 나왔다.역시, 이준혁은 배신하지 않았다. 그는 차가워 보이는 것뿐, 속은 다정했던 것이다. 그렇지 않았다면 그 긴 세월 그녀를 돌봐줬을 리 없었다. 드디어 잃어버렸던 소중한 것을 다시 찾은 기분이었다.임세희가 감격스러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그렇지? 오빠가 날 그냥 내버려둘 리 없지...."하지만 환희가 절망으로 바뀌는 것은 한순간이었다. 임세희는 손에 들고 있던 칼을 버리려고 안간힘을 썼지만, 움직여지지 않았다. 이준혁이 으스러뜨릴 듯 그녀의 손을 움켜쥐고 있었기 때문이었다.임세희가 고통에 일그러진 얼굴로 말했다. "아, 아파... 왜, 왜 그러는 거야...?"이준혁은 들은 체도 하지 않았다. 그는 묵묵히 칼을 목 위쪽, 경동맥과 더 가까운 쪽으로 움직였다. "거기 아니야. 여기, 여기를 찔러야 확실히 죽을 수 있어."차가운 칼날의 감촉을 느낀 임세희는 그대로 굳어버렸다. 뼛속까지 공포가 파고들었다. 당장이라도 칼날이 그녀의 목을 뚫고 들어올 것 같았다. "죽겠다며? 어서 찔러 봐."이준혁이 무표정한 얼굴로 말했다."아니면, 내가 도와줘?"
간호사는 애쓰는 윤혜인의 모습이 안타까워 위로했다."회복하는 동안, 왼손 쓰는 연습도 하시는 편이 좋을 거예요."간호사가 떠나간 뒤에도 윤혜인은 손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그날 유리 조각을 잡으면서 손바닥 힘줄이 손상된 것 같았다. 한동안 오른손 쓰기는 어려워 보였다. 어쩐지 힘주면 손이 떨리더라니, 이 상태론 디자인 도안은커녕 일상생활도 어려울 터였다.윤혜인은 자기도 모르게 눈물이 흘러나왔다. ‘전생에 도대체 무슨 죄를 지었기에, 하늘이 내게 이런 벌을 내리는 걸까?’처음엔 외할머니였고, 그다음엔 아이였다. 이젠 손까지, 안 그래도 가진 것이 없는데 자꾸만 빼앗아 갔다.이때, 이준혁이 문을 열고 들어왔다. 윤혜인이 울고 있는 모습을 본 이준혁은 가슴이 찢어질 것 같았다. 좀 전까지 임세희한테 잔인하게 굴던 남자는 온데간데없었다.그동안 눈이 멀어 임세희의 악행을 깨닫지 못하고 윤혜인을 방치했던 대가는 참담했다. 이준혁은 위로의 말을 꺼내려 그녀의 옆으로 다가갔다. 하지만 윤혜인은 그에게 눈길 한번 주지 않고 공기 취급했다. 이준혁은 입을 달싹거리며 머뭇거렸다. 윤혜인은 며칠간 쉬었음에도 안색이 좋아지기는커녕 점점 더 창백해지고 야위어 갔다. 이준혁은 말로 위로하는 대신 손을 뻗어 그녀의 눈물을 닦아주려 했다. 하지만 손이 채 닿기도 전에 윤혜인이 매서운 눈빛으로 그를 째려보며 말했다. "뭐 하는 거예요?"윤혜인이 냉소를 지으며 갈라진 목소리로 말했다. "밥 먹었어?"이준혁의 질문에 윤혜인은 대꾸할 가치를 못 느꼈다."이준혁 씨, 우리한테 그런 일상적인 대화, 어울린다고 생각하세요?"날카로운 비수가 그의 가슴에 꽂혔다. 그래도 이준혁은 포기하지 않고 다시 입을 열었다. "임세희는 정신병원으로 보냈어."임세희의 이름이 나왔음에도 윤혜인의 표정은 매우 무덤덤했다. 임세희 따위, 그녀에겐 더 이상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그 모습을 본 이준혁은 가슴이 저렸다. 결국 참지 못하고 그가 윤혜인의 손을 잡으며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윤혜인은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이 기가 막힌 상황에 어떻게 대응해야 할지 몰랐다.그런데 이때, 갑자기 병실 문이 쾅 하고 열렸다. 그리고 이준혁이 채 반응하기도 전에 무언가가 그를 향해 날아왔다. 그것은 검은색 핸드백이었다. 핸드백이 정통으로 그의 등을 가격한 것이었다. 이어서 흰 블라우스에 검은색 바지를 입은 문현미가 살기 어린 표정으로 그의 등을 때렸다. 하지만 그래도 분이 안 풀리는지 문현미가 씩씩거리며 이준혁에게 말했다. "잘 보살피랬더니, 이게 도대체 무슨 일이야!"같은 엄마로서 아이를 잃었다는 소식에 문현미는 이루 말할 수 없는 슬픔을 느꼈다. 그동안 손주를 기다리면서 야금야금 사두었던 아기용품들도 이제 쓸모없게 되었다. 원래 윤혜인이 임신 7, 8개월에 접어들면 이태수에게도 말할 참이었다. 이 부분은 그나마 불행 중 다행이었다. 만약 미리 말했더라면, 겨우 회복한 이태수가 다시 드러누웠을 지도 몰랐다.문현미가 눈물을 흘리며 윤혜인을 끌어안았다."혜인아, 그동안 고생 많았지...."그러나 윤혜인은 눈물이 메말라 함께 울어줄 수가 없었다. 그녀가 공허한 눈빛으로 문현미에게 말했다."어머님, 저 이혼할래요."옆에 있던 이준혁이 움찔하고 몸을 떨었다. 안 그래도 윤혜인이 자꾸 이혼하자는 바람에, 그는 문현미에게 윤혜인의 입원 사실을 말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런데 문현미가 이곳에 왔다는 건, 답이 하나밖에 없었다. 윤혜인이 이혼하기 위해 지원군을 부른 것이다."혜인아, 일단 몸부터 추스르면... 나머지는 내가 해결할게.""안돼!"이준혁이 차갑게 끼어들었다. 여태껏 그가 입을 닫고 있던 터라, 문현미는 그가 옆에 있던 것을 까맣게 잊어버리고 있었다. 문현미가 화난 목소리로 그에게 외쳤다."넌 나가 있어!"하지만 이준혁은 도리어 문현미를 끌고 병실 밖으로 향했다. 그는 문현미가 뭐라 대꾸할 틈도 주지 않은 채 곧바로 주훈에게 명령을 내렸다."어머니 집까지 배웅해 드려."문현미가 이를 갈며 따졌다."너 이 녀석, 나 네 엄마
이준혁은 주훈과 함께 서둘러 병원으로 갔다. 주훈은 도착하자마자 바로 CCTV부터 확인했다. 새벽 한 시쯤, 간호사가 졸고 있는 틈을 타, 윤혜인이 흰 원피스를 입은 채 병실을 나오는 모습이 보였다. 그리고는 곧바로 엘리베이터를 탔는데, 병원을 나가는 모습이 없었다. 주훈은 엘리베이터가 멈춘 층수를 다시 확인했다. 윤혜인은 밑으로 내려간 것이 아닌, 병원 제일 꼭대기 층, 18층으로 올라간 것 같았다.그의 안색이 하얗게 질렸다."대표님, 옥상이에요."이 말을 들은 이준혁은 심장이 쿵쾅쿵쾅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그는 곧바로 옥상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한편, 윤혜인은 아주 아슬아슬하게 옥상 난간에 앉아 있었다. 하얀 원피스가 휘날리며 안 그래도 깡마른 몸매를 더 위태롭게 만들었다.옥상 문을 연 이준혁의 안색이 파랗게 질렸다. 처음으로 공포라는 감정이 그의 몸을 뒤엎었다."윤혜인!"혹시라도 그녀가 놀랄까, 이준혁이 조심스레 이름을 불렀다. 하지만 윤혜인은 듣지 못한 듯, 고개를 젖힌 채 하늘만 바라보고 있었다."너, 어딜 보고 있는 거야?"이준혁은 최대한 인기척을 죽인 채 천천히 그녀에게 다가갔다. 이때, 윤혜인이 정신 나간 사람처럼 멍하니 답했다."아기...."그녀가 가느다란 팔을 위로 뻗으며 허공을 가리켰다. "아기랑 작별 인사를 나누고 있었어요."이준혁은 망치에 머리를 맞은 사람처럼 자리에 굳어버렸다. 저절로 손발이 떨려왔다. 하지만 위태로운 윤혜인의 모습에 곧바로 다시 정신을 차리며 힘겹게 말했다. "일단 내려와, 응?"그제야 윤혜인이 고개를 돌리며 담담히 그에게 물었다. "그러면 절 놓아줄 수 있어요?"이준혁은 안된다고 불같이 화내고 싶었지만, 애써 분노를 내리누르며 말했다. "내려와서 얘기하면 안 될까?"그의 표정을 본 윤혜인은 자신의 작전이 절반은 성공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조금만 더 밀어붙이면, 원하는 답을 얻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물론 할머니한테 잘살겠다고 약속한 마당에, 목숨을 가지고 모험할 생각은 없었다.
할머니도 안 계시는 마당에, 그녀에게 그나마 위안이 되어주었던 아기가 떠났다. 하늘도 무심하시지, 어떻게 아이마저 빼앗아 가는가?그동안의 모든 울분을 토해내듯, 윤혜인은 울고 또 울었다."그렇게 애원했는데...."그 절망적인 순간, 오지 못할 거면 최소한 신고라도 해줬으면 이렇게 되지 않았다. 그가 한 선택은 정말 최악 중 최악이었다. 조금만 더 일찍 구조가 되었더라면, 아이가 살았을지도 몰랐다. 정말 힘겹게 몸을 웅크리며 아이를 지키고 있었는데, 그의 선택으로 모든 것이 물거품이 되었다. 이준혁도 그때를 떠올리면 후회돼 미칠 것 같았다. 그가 무릎을 꿇으며 사죄했다."미안해, 정말 미안해...."아무리 사과해도 그녀에게 닿지는 않겠지만, 그가 할 수 있는 건 지금 이거밖에 없었다. 죽음 앞에선 인간은 너무나도 무력한 존재였다. 마음 같아선 아이 대신 자신의 수명이라도 주고 싶었다. 윤혜인의 고통과 비교할 바는 안 되겠지만, 그도 아이만 생각하면 바늘이 가슴을 수천 번 찌르듯 아팠다. 윤혜인이 떨리는 목소리로 쥐어짜듯 그에게 애원했다. "제발 부탁이야. 더 이상 당신을 미워하고 싶지 않아...."이 말을 들은 이준혁은 심장이 갈기갈기 찢어지는 것 같았다. 온몸에 힘이 빠지며, 입안에서 신맛이 올라왔다. 얼마나 지났을까? 이준혁이 단념한 듯 잠긴 목소리로 고개를 끄덕였다."알겠어."다음 날 오후.퇴원 절차를 마친 뒤, 두 사람은 함께 이준혁이 운전하는 차를 타고 가정법원으로 향했다. 그는 조금이라도 시기를 늦추기 위해 40분 되는 거리를 돌고 돌아 한 시간을 더 돌았다. 두 사람 사이엔 오직 침묵뿐이었지만, 최근 들어 가장 평온한 순간이었다. 윤혜인도 마지막인 마당에 굳이 재촉하지 않고 차에 몸을 맡겼다. 잠시 후, 마침내 목적지에 도착했다. 그런데 안으로 들어가 보니, 법원 직원이 다짜고짜 사과부터 건넸다."죄송해요. 인터넷이 불안정해서 수리하는 데 조금 걸릴 것 같아요. 괜찮다면 내일 다시 오실래요?"이준혁의 마음에 희망의 불
기다린 보람이 있었다. 윤혜인은 홀가분한 표정으로 이준혁의 손에서 서류를 빼앗아 직원에게 당당히 내밀었다."네, 지금 처리해 주세요."이준혁의 몸이 딱딱하게 굳었다. 기어이 빨간 인장이 서류 위로 찍혔다. 윤혜인은 망설임 없이 이혼 증명 서류를 가방 안에 넣었다. 하지만 이준혁은 도장도 찍고 사인이 끝났음에도, 도무지 서류 받을 용기가 서지 않아 한참 자리에 서 있었다. 빨간 인장이 이토록 미웠던 적은 처음이었다. 그가 미적거리고 있자, 참다못한 윤혜인이 서류를 챙겨 그의 품에 안겨주었다."얼른 안 가고 뭐 해요? 여기 퇴근 시간 다 됐어요."고작 종이 한 장인데, 이준혁은 그 무계가 감당되지 않았다. 그 사이, 윤혜인은 진작에 법원을 나서고 있었다. 하지만 택시에 올라타기 직전, 뒤늦게 정신을 차린 이준혁이 뒤따라와 그녀를 막아 세웠다. 그것도 하필이면 그녀가 제대로 힘을 쓸 수 없는 오른손을 붙잡은 탓에 뿌리치지도 못했다. "이거 놔요!"윤혜인이 싸늘한 표정으로 그를 째려보며 말했다. 하지만 이준혁은 꿋꿋이 자신의 의사를 굽히지 않았다. "데려다줄게.""필요 없어요!"두 사람이 다투는 사이, 택시는 벌써 다른 손님을 발견하고 떠나버렸다. 윤혜인은 분노했지만, 이준혁은 끝까지 놓아주지 않았다. 그는 오히려 그녀가 심하게 반항하지 않자, 자신이 잡은 손이 오른손이라는 것도 잊고 오히려 희망을 품었다. "나랑 같이 갈래, 아니면 내가 안고 탈까?"윤혜인은 결국 그에게 질질 끌려 강제로 차에 탑승하게 되었다. 이준혁은 아주 물 흐르듯 그녀에게 안전벨트까지 채워주며 문을 잠갔다.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던 윤혜인이 분노하며 말했다."문 열어.""데려다줄게.""문 열어달라고 했잖아!"하지만 그가 들은 체도 하지 않자, 윤혜인은 곧바로 경찰에 신고하려 들었다. "윤혜인!"그 모습을 본 이준혁이 충격받은 표정으로 그녀의 손을 붙잡았다. 그도 윤혜인이 이렇게까지 할 줄은 전혀 예상치 못했다. 그렇게 한참, 겨우 윤혜인이 조금 진정된 것을
하지만 그것은 그의 착각이었다. 윤혜인은 뒤돌아본 적이 없었다. 깨어나 보니 어느새 그는 병원에 누워 있었다. 윤혜인이 아닌, 주훈이 그를 발견하여 병원으로 옮긴 것이었다. 며칠간 스트레스와 불면이 가져다준 결과였다. 그런데 의식을 차린 이준혁이 가장 먼저 꺼낸 말은 윤혜인의 존재를 확인하는 것이었다."병문안 왔었어?"앞뒤가 잘린 물음이었지만, 주훈은 단번에 그의 말을 알아들었다."아니요."이준혁이 단념하지 못하고 다시 물었다."내가 병원에 있다는 거 얘기했는데도?""전화드렸어요."주훈이 솔직하게 털어놓았다."뭐라고 했어?"주훈이 윤혜인과 했던 통화를 떠올리며 말했다."이미 병원에 입원하지 않았느냐고, 의사가 아니니 와도 별로 도움이 안 될 거라고 하셨어요. 그리고 이혼했으니, 앞으로 대표님 일로 연락하지 말라고도 하셨어요."그는 있는 그대로, 숨김없이 이준혁에게 알렸다. 다 듣고 난 이준혁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나가!"주훈은 망설임 없이 병실을 나섰다. 병실 문이 닫히자마자 안에서 물건들이 날아다니며 부서지는 소리가 났다. 이준혁이 분풀이로 물건들을 집어 던지고 있는 것 같았다. 주훈은 그 모습을 보며 결혼에 대한 모든 환상이 깨졌다. 한편, 윤혜인은 사흘 내내 집에 있으면서 생각 정리할 시간을 가졌다. 그리고 나흘째 되는 날, 본격적으로 그동안 미뤄뒀던 일들을 처리해 나갔다. 윤혜인은 우선 임수향에게 앞으로 작업실을 못 나가게 될 것 같다고 알려주었다. 임향수는 무척 아쉬워하며 붙잡았지만, 지금 상태론 도저히 작업할 수 없었기 때문에 끝까지 거절했다. 그다음 그녀가 한 것은 새로운 직장을 구하기 위해 이력서를 넣는 것이었다. 그녀는 총 두 곳에 지원서를 넣었는데, 하나는 번역일이었고 또 하나는 교육 기관이었다. 모두 바로 시작할 수 있는 일들이었다. 그러는 와중에 소원하고도 꾸준히 연락을 주고받았다. 그리고 드디어 오늘, 모든 정리가 끝나 함께 축하하러 외식하기로 했다.둘은 자연스레 단골 바로 향했다. 소원은 평소
이준혁의 얼굴색이 어두워졌다. 그의 표정을 본 윤혜인은 당황했다. 그가 거짓말을 얼마나 싫어하는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녀가 이혼을 위해 그런 연기까지 한 것을 알게 되었으니, 이준혁은 아마 크게 실망했을 것이다. 그럼에도 윤혜인은 차라리 잘됐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편이 서로의 관계를 정리하는 데 도움이 될 거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때, 소원이 나타나 윤혜인을 보호하며 이준혁을 경계하는 눈빛으로 바라보았다."어이없네. 먼저 잘못한 사람이 누군데, 이제 와서 피해자 코스프레이야? 그쪽이 잘했으면, 이럴 일도 없었잖아. 혜인이니까 이 정도로 끝냈지, 나였으면 그쪽은 진작에 무덤에 들어갔어."소원은 친구인 윤혜인을 보호하려 했다. 이준혁은 이런 취급을 당해도 쌌기 때문이다.일주일 만에 마주친 이준혁은 그림자가 조금 가신 듯했지만, 여전히 창백했다. 윤혜인은 얼마 전에 주훈으로부터 그가 아프다는 연락을 받았던 것이 떠올랐다. 쇠약한 이준혁의 모습을 보며, 윤혜인은 자신도 모르게 마음이 약해지는 것을 느꼈다. 역시 한때 사랑했던 사람을 무정하게 대하기란 쉽지 않았다. 그녀는 연민은 많지만, 쉽게 매정해지지 못하는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윤혜인은 이번에도 그가 말을 걸어올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이준혁은 한참 그녀를 바라볼 뿐, 곧 싸늘한 분위기를 풍기며 자리를 떠났다. 이것이 다시는 보지 말자던 그녀의 말에 대한 대답일지도 몰랐다. 원하던 바였으나, 윤혜인은 그의 냉정함에 마음 한쪽이 쓰라렸다.시간이 흘러도 사람의 마음속 깊이 박힌 감정은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그래도 윤혜인은 이렇게 서로를 완전히 잊는 것이 최선이라고 생각했다.그런데 이때, 옆에서 상황을 지켜보던 육경한이 차가운 눈빛으로 소원을 바라보며 말했다. "좀 이따가, 나 좀 보자. 우리 아직 못다 한 얘기가 있잖아, 그렇지?"술집에서 나온 후, 둘 다 술 마신 상태였기 때문에 소원은 대리운전을 불렀다. 그녀는 윤혜인을 먼저 데려다준 뒤, 육경한의 아파트로 향했다. 두려움이
칠흑 같은 밤과 뼈저린 추위, 그리고 아까 맞은 얼음장처럼 차가운 비까지, 모든 상황이 똑같이 맞아떨어졌다. 양아버지가 어린 윤혜인을 안고 끝이 보이지 않는 길에서 달리다가 바닥에 철퍼덕 넘어졌다. 작고 연약한 어린 윤혜인은 포물선을 그리다 옆에 있던 구덩이에 빠지고 말았다. 어린 윤혜인의 몸과 얼굴은 흙이 잔뜩 묻었고 무성한 갈대에 가려져 시커먼 진흙과 한 몸이 되고 말았다. 어린 윤혜인이 겨우 몸을 일으켜 양아버지에게 도움을 청하려는데 양아버지가 어린 윤혜인을 향해 힘껏 고개를 저었다. 넘어져서 몸을 다친 양아버지는 몸이 찢어질 듯이 아팠지만 아랑곳하지 않고 어린 윤혜인을 안았던 그 자세 그대로 앞으로 내달리기 시작했다.어린 윤혜인은 그런 양아버지를 이해할 수 없었다. 그녀가 구덩이에 빠져있는 걸 양아버지도 분명히 봤는데 양아버지가 왜 그 자세 그대로 앞으로 내달리는지 말이다. 어린 윤혜인은 그렇게 넋을 놓고 한참 동안 바라봤다. 하지만 이내 빨간 스포츠카가 하늘이 떠나갈 것 같은 엔진소리와 함께 양아버지 뒤를 쫓았다. 앞에서 달리던 양아버지는 그렇게 차에 치여 허공으로 떠올랐다가 쿵 하는 소리와 함께 바닥에 떨어지고 말았다. 어린 윤혜인은 양아버지의 다리가 몸에서 완전히 분리되더니 다른 곳으로 날아가는 걸 목격했다. 심지어 그중 한쪽이 어린 윤혜인 앞에 떨어졌다. 형태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짓뭉개진 다리였다. 바닥에 쓰러진 양아버지의 얼굴도 어린 윤혜인을 향해 있었다. 눈을 부릅뜬 모습이 마치 절대 소리를 내면 안 된다고 경고하는 것 같았다. 어린 윤혜인은 초점을 잃고 퀭한 양아버지의 두 눈을 보며 소리를 지르고 싶었지만 목구멍에 뭐가 걸린 것처럼 정말 아무 소리도 나오지 않았다. 덕분에 어린 윤혜인은 죽을 고비를 넘길 수 있었다.범퍼가 깨진 스포츠카에서 빨간 벨벳 슈틀 입은 남자가 내려왔다. 어린 윤혜인은 얼굴은 매혹적이고 잘생긴 남자가 얼마나 극악무도한 짓을 저지르는지 똑똑히 보았다. 남자는 몸통이 절반 뜯어져 나간 양아버지를 이리저리 돌려보며
하지만 아무리 찾아도 윤혜인의 행방을 찾을 수 없었다. 배남준은 바로 사람을 데리고 원진우를 가둬둔 곳으로 향해 굳게 닫힌 문을 열었지만 안에 누워있는 사람은 원진우를 데리고 옷을 갈아입으러 간 도우미였다. 원진우가 입고 있던 하얀 슈트를 입고 있는 도우미는 이미 숨이 끊어진 지 오래였다.CCTV를 확인한 배남준은 사각지대에서 나온 두 사람이 어딘가 이상하다는 걸 발견했다. ‘원진우’의 걸음걸이가 어딘가 이상했다. 원진우와 도우미는 체격이 달랐다. 이미 숨이 끊어진 도우미의 신발을 벗겨보니 안에서 진흙이 가득 나왔다. 다시 영상을 확인해 보니 뒤에서 걸어가는 도우미는 몸을 잔뜩 움츠리고 있었고 얼굴이 잘 보이지 않았다. 사실 그때 이미 도우미가 바뀌었으니 가둔 사람은 원진우가 아닌 도우미였다. 도우미의 시신 상태를 보면 아마 원진우가 준 독을 먹고 문을 닫자마자 바로 독이 온몸으로 퍼져 숨을 끊은 것 같았다.이준혁은 영상에서 원진우가 입은 옷을 관찰했다. 전에 조사한 것과 다른 착장이었다. 이준혁이 조사한 데 의하면 원진우는 계절을 막론하고 구두를 신는다고 나왔지만 오늘 신은 건 긴 부츠였다. 이준혁은 바로 원진우가 처음부터 모든 걸 알고 있었다는 사실을 눈치챘다. 그렇다면 곽경천도 위험을 피치는 못할 것이다. 이를 깨달은 순간 이준혁은 곽경천에게 전화를 걸었다.현재 북안도를 떠날 수 있는 구멍은 다 막힌 상태였다. 이준혁이 미리 상부에 연락해 모든 루트를 봉쇄하고 원진우를 수배했다. 이준혁은 원진우가 힘들게 윤혜인을 납치해 갔으니 절대 죽이지는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필요 없는 사람은 바로 죽이는 게 원진우 스타일이지만 윤혜인을 데려갔다는 건 쓸모가 있다는 말이었다. 구체적으로 어떤 쓸모일지는 윤혜인도 알 수 없었다.원진우의 별장으로 향하는 길에 이준혁은 굉음을 듣게 되었다. 원진우의 별장이 있는 방향에서 하늘을 찌를 듯한 연기가 솟아 올라오더니 버섯 모양의 구름을 만들었다.화들짝 놀란 배남준이 체면을 차릴 겨를 없이 큰 소리로 말했다.“경천아.”
곽경천은 갑자기 손으로 내밀 엄두가 나지 않았다. 오랫동안 어머니의 실종은 마음에 박힌 가시와도 같았다. 비록 윤아름이 친엄마가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고 짧은 만남이었지만 윤아름에게서 받은 사랑은 적지 않았다. 윤아름은 곽경천을 친자처럼 아끼며 보살펴줬다. 그때부터 곽경천은 앞으로 엄마와 동생을 잘 보호해야겠다고 다짐했지만 크면서 하나도 지키지 못했다. 윤혜인도 옆에 있고 어머니와도 곧 만날 수 있다는 생각에 심장이 터질 것 같았다. 그래도 꾹 참고 손을 뻗는데 급박한 전화 소리가 울렸다. 곽경천이 들고 온 건 위성 전화라 배남준만 알고 있었다. 곽경천은 전화를 받으면서도 여자의 머리만 뚫어져라 쳐다봤다.“여보세요?”“30초, 30초밖에 안 남았어요. 얼른 나와요.”수화기 너머로 들린 건 배남준의 목소리가 아니라 이준혁이었다. 이준혁이 다급한 목소리로 말했다.“형님, 그 지하실에 폭탄이 가득 설치되어 있어요. 얼른 사람들 데리고 나와요.”곽경천이 넋을 놓고 있는데 이준혁이 급박하게 말했다.“형님, 함정이에요. 원진우는 이미 도망갔어요. 처음부터 형님이 세운 계획을 알고 있었더라고요. 지금 당장 나와요.”곽경천은 이준혁이 장난으로 하는 말이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포기하기는 싫었다.“폭탄이 설치되어 있으니까 얼른 나가요. 얼른.”같이 들어온 사람들이 서로 눈치를 보기 시작했다. 다들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지만 그래도 곽경천이 같이 떠나길 기다렸다.“먼저 나가요. 명령이에요. 나도 곧 따라 나갈게요.”곽경천이 이렇게 말했다. 팀원들이 어쩔 수 없이 명령에 따라 밖으로 나가고 곽경천이 손을 내밀어 ‘여자’의 어깨를 잡고 돌렸다.데굴데굴.여자의 머리가 곽경천의 발치로 굴러떨어졌다. 깜짝 놀란 곽경천은 순간 목구멍에서 단내가 느껴졌다.‘설... 설마 엄마?’한 번 더 자세히 보다 보니 이상한 점을 발견했다. 죽은 지 꽤 오래된 시신인지 목 부분에 부패가 시작되었지만 얼굴은 아직 보존이 잘 되어 있었다. 북안도의 날씨가 유독 추웠기에
원진우를 기다리고 있는 건 한번 들어가면 굳게 닫히는 문이었다. 이게 곽경천이 세운 2번째 방안이었다. 첫 번째 방안인 술이 실패하면 원진우를 무력으로 제압하기 어려운 데다가 무슨 꿍꿍이가 있는지 모르기에 일단은 특정한 방으로 유인하는 게 제일 좋은 방법이었다. 윤아름을 차질 없이 구해내면서 다른 사상자를 내지 않는 제일 좋은 방법은 바로 원진우를 안에 가둬놓는 것이었다.윤혜인은 원진우가 사라진 방향을 보며 마음이 불안해져 다른 사람이 와서 술을 권하는 것도 보지 못했다. 배남준은 현장에 원진우가 보낸 사람이 있을 수도 있다는 생각에 얼른 윤혜인에게 귀띔했다. 잘못하면 원진우가 이상한 낌새를 눈치채고 경계하면 계획이 틀어질 수도 있다.그렇게 10분쯤 지났을까, 윤혜인의 이어폰에서 비서 도지훈의 목소리가 들렸다.“누나, 원진우 안에 가뒀어요.”윤혜인은 그제야 길게 한숨을 내쉬며 긴장을 풀었다. 악당을 가뒀으니 곽경천도 일단 한시름 놓고 윤아름을 구해낼 일만 남았다. 윤혜인이 배남준을 향해 고개를 끄덕이자 배남준은 바로 무슨 뜻인지 알아채고는 다른 사람에게 윤혜인이 몸이 좋지 않아 먼저 일어난다고 하고는 현장을 빠져나갔다. 잠깐 얼굴을 비췄던 아이들은 너무 칭얼대서 다시 데리고 들어갔다.사실 두 아이는 곽경천이 주문 제작한 인형이었다. 실제와 다를 것 없이 잘 만들기도 했고 미리 녹음한 아이의 녹음 소리를 안에 넣어뒀다. 곽경천은 처음에 밖에서 다른 아이 둘을 찾아 대체하는 게 어떻겠냐고 했지만 윤혜인이 거절했다. 엄마가 되고 나서 아이가 곧 엄마에겐 목숨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 이심전심으로 자기 아이가 다치는 게 싫다면 다른 사람의 아이를 위험에 빠트리는 것도 하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다행히 오늘 날씨가 추워 아이는 인큐베이터에 누워 있었기에 멀리서 볼 수밖에 없었고 칭얼대는 소리로 퍽 리얼해 사람들의 눈을 속일 수 있었다.윤혜인은 방으로 돌아와 초조하게 곽경천의 소식을 기다렸다. 마음이 불안해서 그런지 가만히 앉아 있을 수가 없어 방안을 계속
윤혜인은 손에 들고 있던 잔을 들어 원진우를 향해 가볍게 흔들며 말했다.“삼촌, 제가 존경하는 마음을 담아 한 잔 먼저 마시겠습니다.”그러더니 금세 잔을 비웠다.그녀의 심장이 쿵쾅거리기 시작했다. 잔에 들어 있던 술에는 몇 시간 동안 상대를 잠들게 하는 특수 성분이 들어 있었다.그러나 윤혜인은 미리 해독제를 복용해둔 상태였고 원진우의 경계를 풀게 하려고 같은 술을 마신 것처럼 보이게 했다.원진우 같은 교활한 상대에게는 대화나 교섭보다는 이런 방법이 가장 안전했기 때문이다.그러나 윤혜인이 잔을 비워도 원진우는 여전히 미동조차 없이 술잔을 들지 않았다.초조해진 윤혜인은 도우미를 다시 불러 그의 잔을 채우게 했다.“앞으로도 저 잘 봐주셨으면 하니까 또 한잔 올리겠습니다.”한국인 사이에서 ‘두 잔’은 최고의 예우를 의미하기 때문에 원진우도 어른으로서 이를 거절할 수는 없었다.만약 거절한다면 그의 인품에 오점이 생길 수 있었기 때문이다.마침내 원진우는 천천히 잔을 들고 그녀를 바라보며 빙긋 웃었다.그러나 눈은 웃고 있지 않았다.잔이 입술에 가까워지려는 순간, 그는 갑자기 잔을 내려놓으며 말했다.“아, 깜빡했군. 오기 전에 집에서 의사에게 받은 약을 먹었는데 술을 마시면 안 된다고 하더라고요. 세 시간 동안은 물도 마실 수 없다고 했어요.”그는 이렇게 말하고는 잔을 테이블에 내려놓았다.윤혜인은 분노로 속이 끓어올랐지만 원진우가 댄 이유가 합리적이었기에 반박할 수 없었다. 첫 번째 계획은 명백히 실패한 셈이었다.곧 원진우가 자리를 뜨려 하자 윤혜인은 재빨리 다음 계획으로 전환했다.원진우의 움직임을 막기 위해 그녀는 손을 들어 그를 제지하며 말했다.“들은 바에 의하면 해외 무역에 아주 조예가 깊으시다고 하던데 저희 집도 국제 해운업에 종사하고 있어서 몇 가지 여쭤보고 싶은 게 있어요. 시간 괜찮으신가요?”그러자 원진우는 잠시 멈춰서서 따뜻하게 미소 지으며 말했다.“물어봐요.”이윽고 윤혜인은 몇 가지 질문을 던졌는데 모두 해외 무역의 어
곽경천은 곧 다가올 파티에 계획에 이준혁도 포함시키기로 했다.자신은 원진우의 별장에 인원들과 함께 잡입할 예정이고 파티장에는 배남준 혼자였는데 그에게 온전히 윤혜인을 맡기기가 불안하다고 느꼈기 때문이었다.파티장에서 잠재적인 위험인물인 원진우를 감시하고 윤혜인을 보호하기 위해서라도 추가 인원이 필요하다고 판단했다.그러나 윤혜인은 이준혁이 다리가 좋지 않다는 이유로 반대했다.그가 파티에 등장하면 원진우가 의심할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곽경천의 우려가 틀린 말은 아니었지만 이 계획이 완벽하지 않다는 점은 윤혜인도 잘 알고 있었다.파티장에 있는 사람들과 별장으로 잠입하는 사람 모두 위험이 따르는 임무였다. 게다가 시간이 촉박해 추가 인원을 조정할 여유도 없었다.윤아름의 행방을 찾을 기회가 얼마 남지 않았다.원진우가 모레 회사 양도 계약서에 서명할 예정이었기 때문이다. 그가 떠나게 되면 윤아름의 소식을 알아낼 마지막 기회를 놓치게 된다.이준혁은 이번 파티가 배남준을 돕기 위한 행사라는 곽경천의 설명을 듣고 이를 납득했다.배씨 가문에는 생후 첫 파티 후 배남준이 독립적인 가장이 되어 호적을 옮길 수 있는 전통이 있었다.질투가 나긴 했지만 이준혁은 배남준이 윤혜인을 향한 마음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공정하게 행동해왔다는 점을 존중하고 있었다.배남준은 숨겨진 음모 없이 정정당당하게 경쟁하는 상대였다.다음 날, 드디어 생후 한 달 기념 파티가 열렸다.윤혜인은 밝은 빨간색 원피스에 회색 모피 외투를 입고 고귀하고 아름다운 모습으로 행사에 나타났다.그동안 모습을 드러내지 않던 원진우도 파티장 정문에 나타나 눈길을 끌었다.북안도에서 배씨 가문과 찰스 가문이 보내는 초대장에는 반드시 참석해야 하는 무언의 룰이 있었다.그렇지 않으면 관계를 단절하겠다는 것으로 간주될 수 있었다.오랜만에 모습을 드러낸 원진우는 크림색 벨벳 수트를 입고 문학적이고 온화한 인상으로 나타나 눈길을 사로잡았다.그러나 윤혜인은 그의 겉모습이 실제와 다르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그의
이준혁의 낮고 부드러운 목소리에서 그가 자격지심을 느껴 한다는 것을 깨닫고 윤혜인은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자존심 강하고 남들한테 존경만 받는 사람이 언제부터 저렇게 불안해하는 감정을 품게 됐을까?’그녀는 순간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모르겠었다.하지만 윤혜인에게 역시 억울한 감정이 있었다.이준혁을 기다리다 사무실에서 잠들었고, 깨어나니 주변은 새까맸고 홀로 추위 속에 거의 얼어붙을 뻔했으니 말이다.“왜 날 찾으러 오지 않았어요?”그녀는 작게 말했다.그 어둠과 추위를 떠올릴 때마다 서운함이 다시 피어올랐다.만약 이준혁에게 자신의 마음을 전하려는 의도가 없었다면 윤혜인은 사무실에서 잠들어 문이 잠기는 일도 없었을 것이다.“내 잘못이야.”남자는 말했다.“모두 내 잘못이야. 맹세할게. 앞으로 절대 너를 혼자 두지 않을 거야.”이준혁은 한때 그녀를 놓아주려는 생각을 했었지만 곽경천이 그녀와 거리를 두라고 말하자 그의 가슴은 한순간에 무너져 내리는 듯했다.순간 그는 깨달았다. 자신은 결코 윤혜인을 놓고 싶어 하지 않는다는 것을.윤혜인이 그를 싫어하지 않는다면 불편한 몸일지라도 이준혁은 그녀를 지키겠다고 결심했다.결혼 이야기가 거짓임을 알았을 때, 그는 더 이상 방관자가 되지 않기로 마음먹었다.그녀와 아이들이 이준혁의 세상에서는 가장 소중한 존재였기에 그들의 삶에 함께하고 싶었다.윤혜인의 얼굴은 살짝 붉어졌다.‘언제 이렇게 빨리 마음을 바꾼 거지?’얼마 전까지 차갑기만 했던 이준혁이 이제는 윤혜인이 듣고 싶었던 말을 서슴없이 하고 있었다.하지만 그녀는 그가 자신을 두고 돌아가지 않았던 일에 여전히 화가 나 있었다.약간의 원망을 풀고자 윤혜인은 일부러 장난스럽게 말했다.“날 혼자 두지 않겠다니... 무슨 뜻이에요? 나 유부녀인 거 알잖아요. 설마 남편 자리를 뺏으려고요?”그러자 이준혁은 살짝 미소 지으며 그녀가 아직 진실을 모른다는 걸 알아챘다.하여 윤혜인의 장단에 맞춰주고자 이준혁이 말했다.“상대가 너라면... 기꺼이 감수하지.”
배남준은 아버지가 원진우와 비밀리에 대화하는 것을 엿들었다.대화의 내용은 원진우가 북안도의 회사를 팔고 다시 떠날 준비를 하고 있다는 것이었다.과거에 원진우가 떠날 때마다 그의 행방을 찾는 것은 거의 불가능할 정도로 어려웠다. 심지어 이번에는 원진우가 주의를 기울이고 있는 상황이니 다시 그의 흔적을 찾는 것은 하늘의 별 따기만큼 어려울 것이다.곽경천은 미간을 잔뜩 찌푸린 채 생각에 잠겼다.이번 계획은 절대 실패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만약 이번 기회를 놓치게 된다면 윤아름을 찾을 마지막 희망마저 잃게 될 것이니 말이다.곽경천은 고민스러웠다.‘하필 이런 중요한 시기에 혜인이가 병에 걸리다니... 앞으로 3일 후면 파티가 열릴 예정인데 그때 무대에 설 수 있으려나?’만약 불가능하다면 그녀를 대신해 위장할 사람을 빨리 찾는 것도 필요했다....의식을 되찾은 윤혜인은 자신이 병원 침대에 누워 있는 것을 발견했다.머리는 무겁고 여러 혼란스러운 꿈을 꾸었다. 꿈속에서 이준혁은 그녀와 등을 돌린 채 멀어져 갔고 아무리 그를 불러도 그가 남긴 것은 차가운 뒷모습뿐이었다.“어때, 괜찮아?”남자의 낮고 깊은 목소리가 귓가에 울렸다.윤혜인은 눈을 깜빡이며 꿈속의 그 남자가 지금 자신의 침대 옆에 앉아 있는 것을 보았다. 순간 꿈에서 느꼈던 그 서운함이 현실로 밀려들어 왔다.“왜 나 무시했어요?”윤혜인은 불만스럽게 물었다.그러자 그녀의 말에 당황한 이준혁은 준비했던 설명조차 단숨에 잊어버렸다.눈가가 붉어진 채 윤혜인은 점점 더 억울해했다.“나... 꿈에서 계속 불렀는데... 준혁 씨는 나 무시하고...”그녀의 말을 들은 이준혁은 그것이 꿈 이야기라는 것을 깨닫고 멋쩍은 미소를 지었다.하지만 그 후에는 깊은 안도감을 느꼈다.자신이 어떤 감정이든 상관없다는 결론에 다다른 것이 다행스럽게 느껴졌다.동정이냐 아니냐가 정말 그렇게 중요한 문제일까? 중요한 것은 윤혜인이 이준혁의 곁에 있고 그녀의 꿈과 시선에 그가 있다는 것뿐이었다.“응. 내 잘못이야
“죄송합니다.”이준혁은 진심으로 사과했다. 이번 일은 분명히 그의 책임이었다.만약 그의 부주의가 아니었다면 윤혜인이 이런 고생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이준혁은 자책하며 곽경천이 자신을 때려줬으면 싶을 정도로 후회하고 있었다.그때 주훈이 갑자기 ‘퍽’ 소리를 내며 무릎을 꿇었다. 그러더니 곽경천을 향해 말했다.“모든 게 제 잘못입니다. 제가 혜인 씨에게 대표님을 보러 오라고 부탁했거든요.”그는 깊이 자책하고 있었다.만약 자신이 쓸데없는 말을 하지 않았다면 윤혜인이 사무실에 갇혀 얼어붙는 일이 없었을 테니 말이다.주훈은 제대로 확인도 하지 않은 채 그녀가 떠났는지 관심을 두지 않은 자신의 큰 실책이라 여겼다.이번 일로 이준혁이 자신을 탄페니아에 10년간 가 있으라 해도 감수할 각오였다.하지만 곽경천은 사건의 전말을 이미 알고 있었다.사실 윤혜인이 먼저 주훈에게 전화를 걸어 이준혁의 상황을 물어봤고 주훈은 그저 그녀에게 와보라고 덧붙였을 뿐이었다.주훈이 권하지 않아도 윤혜인은 이준혁을 찾아갔을 것이다.이준혁을 찾으러 가고 싶은 마음이 있는 전제하에 주훈의 말은 그저 핑곗거리에 지나지 않았다.곽경천은 합리적인 사람이었다. 잘못한 사람이 있다면 책망하겠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에게는 불필요한 비난을 하지 않았다.그는 주훈을 일으키며 침착한 목소리로 말했다.“일어나요. 이 일은 주 비서님 잘못이 아니니까요. 혜인이는 스스로가 원해서 간 거예요.”이 말을 듣고 이준혁의 얼굴이 창백해졌다.곧이어 곽경천은 이준혁을 바라보며 말했다.“혜인이는 다른 사람의 말 한마디로 흔들리는 사람이 아닙니다. 혜인이가 준혁 씨를 찾아간 것은 마음속에서 준혁 씨를 지우지 못해서였을 거예요.”그는 잠시 말을 멈추었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이준혁 씨, 이준혁 씨도 혜인이가 어떤 사람인지 모를 리 없잖아요.”“이번 일을 계기로 혜인이에게서 조금 떨어져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준혁 씨가 진정으로 마음을 정리할 때까지 기다리는 게 좋겠어요.”사실 곽경천은 이준혁에게 크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