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원은 눈물로 얼룩진 얼굴로 무릎을 꿇은 채 힘없이 유리창에 몸을 기댔다. 육경한의 아파트는 8층, 순찰 도는 보안요원이나 지나가는 사람이라면 누구든 고개를 들면 쉽게 노출되는 위치에 있었다.소원은 모든 것이 끝났다고 생각했으나, 육경한은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그는 남은 샴페인을 긴 유리잔에 채운 뒤, 소원의 입가에 가져다 대었다. 그리고는 눈썹을 치켜올리며 마시라는 듯 눈짓했다."흘리지 말고 다 마셔."소원은 피부가 알코올에 젖어 따끔거리는 고통을 참으며 욕설을 내뱉었다."육경한, 너 정말 제 정신 아니야!"말이 떨어지게 무섭게, 소원은 육경한에게 잡혀 강제로 술을 들이켜야만 했다."커, 쿨럭...."소원은 사레에 걸려 기침을 멈출 수 없었다. 삼키지 못한 샴페인이 입가를 타고 흐르며 턱을 적셨다. 온몸에서 샴페인 냄새가 진동했다. 곧 컵이 바닥에 떨어지며, 유리 파편이 사방으로 퍼져 나갔다. 그 과정에서 소원의 팔뚝에 생채기가 생겼다. 그가 한쪽 무릎을 꿇더니, 소원의 턱을 거칠게 잡아 비틀었다."그래, 나 미쳤어."소원은 기침하느라 제대로 그의 말에 대꾸하지 못했다."그럼 넌 뭐야?"육경한이 소원의 뺨을 툭툭 건드리며 비웃었다. 그녀는 샴페인이 눈에 들어가 쓰라린 와중에도 그의 모욕적인 언사에 분노가 치밀었다. 소원은 자신의 기분을 참지 않고 있는 그대로 내뱉었다. "이 짐승만도 못한 놈!"그러자 육경한도 화난 표정으로 그녀의 턱을 더 억세게 잡아 올렸다. "다시 말해봐."소원이 차갑게 그를 응시하며 다시 말했다."넌 여자 괴롭힐 줄만 알지? 이 더러운 놈!"결국 분노를 참지 못한 육경한이 그녀를 유리창에 밀치며 목을 졸랐다."이 정도로는 교훈이 안 됐나 보네."그렇게 그의 분풀이가 시작되었다. 소원은 반항했지만, 남자의 힘에 밀려 결국 그에게 유린당했다. 얼마나 지났을까, 육경한이 멀끔히 씻은 모습으로 다시 방으로 돌아왔다. 그가 나른한 표정으로 침대에 기댄 채 담배를 피기 시작했다. 희뿌연 연기 사이로 소원이 지
육경한이 비웃으며 그녀의 손을 결박하고 있던 쇠사슬을 풀었다. "그래, 어디 한번 해봐."다음 순간, 육경한은 자기도 모르게 경계심이 풀려 그녀가 움직이는 대로 뒤로 넘어졌다. 위치가 바뀌자, 육경한은 당황했으나, 반격할 틈도 없이 소원이 키스를 밀어붙였다. 평범한 연인이었다면 사이가 깊어지면서 자연스럽게 하게 되는 스킨십이었겠지만, 둘의 상황은 그게 아니었다. 관계는 여러 번 했으나, 키스 나눈 적은 여태까지 거의 없었다. 하지만 이 생소함이 오히려 그의 욕망을 자극했다. 육경한은 그녀의 혀를 받아들이며 능숙하게 반응했다.반대로 소원은 그가 너무나도 혐오스러웠다. 이 키스는 그를 원해서가 아닌, 다른 의도가 있어 시작한 것이었다. 밖에서는 성공한 기업가로 보였을지 몰라도, 육경한은 그녀에게 있어서 파괴자였다. 그는 소원의 일상을 파괴하고 가족을 괴롭혔다. 그녀는 생존을 위해, 어떤 선택이든 해야만 했다. 어느새 육경한도 상황에 익숙해져 손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것을 느낀 소원이 재빨리 그를 붙잡으며 매혹적인 미소와 함께 말했다."어때? 나쁘진 않지?”그 말을 들은 육경한은 욕망이 더 활활 타올랐다.그 모습을 본 소원은 속으로 비웃으며 겉으론 요염하게 그의 귓불을 쓰다듬었다. "정말 내가 왜 그 사람들을 찾아갔는지 몰라? 다 그쪽 때문이잖아. 그쪽이 우리 회사를 막다른 골목으로 밀어 넣었잖아. 내가 발품 팔아 회사 주가 좀 높여보겠다는 게 그렇게 잘못이야? 이대로 가다가는 한이그룹, 진짜 망해."그 말을 들은 육경한이 하던 것을 멈추고 그녀의 손을 떼어냈다."그게 왜 내 탓이야? 그리고 너희 회사가 망하던 말던, 내 알바야?"소원의 가문이 몰락하는 것은 그가 오랫동안 바라던 일이었다. 하지만 그들이 단번에 무너지는 것은 원치 않았다. 그는 천천히 그들이 몰락하는 것을 지켜보고 싶었다. 이제 모든 준비가 끝나가고 있었다. 계획이 실행될 날이 오면 그들은 죽음보다 더한 비참함을 맞이하게 될 것이다. 그때 되면 소원이 어떤 표정을 지을지 기
소원이 여유롭게 웃으며 육경한의 신경을 긁었다. "이 사진, 진아연한테 보내면 어떤 반응을 보일까? 울려나?"육경한이 살기를 드러내며 소리쳤다."네가 감히!"그러나 그녀는 겁먹기는커녕 더 그를 조롱했다."댁도 무서운 게 있었네? 그러면 처음부터 다른 여자랑 자지 말았어야지. 지난번 옷장에서 들어보니까, 진아연의 소리 꽤 요란하던데? 그쪽이 진아연을 만족시키지 못한 거야, 아니면 네가 만족하지 못한 거야?"잠시 뜸을 들이던 소원이 말을 이었다."설마 내가 그쪽 취향이었어?"선을 넘는 말이었다. 이건 육경한뿐만 아니라 진아연까지 싸잡아서 욕하는 것과 다를 바가 없었다.그가 이를 바득바득 갈며 말했다."닥쳐! 넌 아연이와 비교할 자격도 없어!"어차피 맨날 듣던 소리였다. 소원은 전혀 아무렇지도 않았다. "참 대단해. 하루에 그렇게 많이 할 수 있다니, 오래 살겠어."둘이 함께 있던 모습을 떠올린 소원은 역겨움이 치솟아 올랐다. 하지만 둘뿐만 아니라, 그녀는 이러고 있을 수밖에 없는 자기 자신도 역겨웠다. 이 모든 것의 원흉이 바로 이 남자였다.그동안 소원은 육경한한테서 벗어나기 위해 별의별 생각을 다 해봤다. 오늘은 그 결실을 볼 때였다. 소원이 그를 일으켜 앉히며 물었다."그런데 정말 진아연을 사랑하긴 해?"자연스레 육경한은 재판을 기다리는 죄수처럼 무릎을 꿇게 되었다. 이건 그가 가장 싫어하는 자세였다. 전에 해외에서 사건이 터졌을 때, 협박에 못 이겨 무릎을 꿇었던 것이 떠오르기 때문이었다. 그때 부상을 입으면서 척추를 다쳤는데, 지금도 안에 철심이 박혀 있었다. 그는 너무나도 치욕스러웠다. "너 죽고 싶어?""내 질문에 대답해."소원이 물러서지 않고 대답을 요구했다. "당연한 거 묻지 마."육경한이 조금도 주저함이 없이 답했다. 그러자 소원이 비웃듯 웃음을 터트렸다."그런데도 나랑 잔 가야? 당신한텐 사랑이 별거 아닌가 봐?"육경한이 차갑게 웃으며 말했다."나한텐 넌 업소 여자랑 별 다를 거 없으니까."표정은 볼
창문 너머 주훈의 모습이 드러났다. 그가 윤혜인에게 공손한 말투로 물었다. "사모님, 어디로 가세요?'그 호칭을 들은 윤혜인은 잠시 멍한 표정을 지었다. 이어서 며칠 전 술집에서 이준혁이 지었던 냉담한 표정이 떠올랐다. 잠시 머뭇거리던 그녀가 입을 열었다. "주 비서님, 저 이제 그 집 사람 아니에요. 호칭 그냥 이름으로 해주세요."이준혁이 들었다면, 분명 달가워하지 않았을 것이다. 주훈이 난감한 표정을 지은 채 얼른 화제를 바꾸었다."어디로 가세요? 제가 모셔다드릴까요?"핸드폰을 보니, 여전히 차는 잡히지 않았다. 기차역까지 가면 장거리 운행을 하는 택시를 찾을 수 있을지도 몰랐다. 윤혜인은 데려다 달라고 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망설였다. "그럼....""넌 왜 이렇게 오지랖이야?"이때, 갑자기 차 안쪽에서 불쾌감이 담긴 목소리가 들려왔다. 차가 어둡게 선팅되어 있어 윤혜인은 이준혁도 안에 있을 거라 생각하지 못했다. 순식간에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이준혁이 말을 이었다."그렇게 한가하면, 서울 신축 현장으로 보내줄까?""...."윤혜인을 발견하고 먼저 세우라고 했던 건 이준혁이었다. 그런데 다짜고짜 혼을 내다니, 주훈은 억울했지만 참고 넘어갈 수밖에 없었다. 상사는 상사였으니까. 짜증이 가득한 말투에 윤혜인은 그의 표정이 보이는 것 같았다. 그녀는 괜히 자기 때문에 주훈이 혼나는 것 같아 마음이 안 좋았다. 윤혜인이 억지로 미소를 지으며 주훈에게 거짓말했다."데리러 오기로 한 사람 있어요. 어서 가세요."그 말에 주훈은 얼른 백미러를 들여다보았다. 이준혁의 얼굴이 까맣게 죽은 것이 보였다. 그의 시선을 느낀 이준혁이 미간을 찌푸리며 명령 내렸다. "얼른 안 가고 뭐 해?""네."주훈은 가볍게 윤혜인에게 목례한 뒤 창문을 올렸다. 순식간에 검은색 벤틀리가 시야에서 사라졌다. 윤혜인은 괜히 눈가가 시큰거렸다. 서로 모르던 때로 돌아가는 건 바라던 바였지만, 그래도 10년 된 사랑이었다. 윤혜인은 하루아침에 칼처럼 마음
농담이라는 걸 알면서도, 윤혜인은 왠지 모르게 얼굴이 빨개졌다."고마워요, 선배.""지난번에 말했듯이, 선배라 부르지 말고 오빠라고 불러줘."한구운은 의사가 확실했지만, 자연스럽게 분위기를 이끌어 갈 줄 아는 사람이었다. 잠시 망설이던 윤혜인이 호칭을 정정해 다시 고마운 마음을 전했다."…오빠, 고마워요."한구운이 차를 출발시키려던 찰나, 코너에 익숙한 검은색 벤틀리가 주차된 것이 보였다. 윤혜인이 지금 고개를 돌린다면 바로 볼 수 있는 위치였다. 그는 시선이 그쪽으로 향하지 않도록 일부러 윤혜인을 불렀다."혜인아."윤혜인의 시선이 다시 한구운에게 고정되었다. "왜요?"그 사이, 벤틀리의 모습이 사라졌다. 그제야 한구운은 긴장을 풀고 본격적으로 운전하기 시작했다."이혼했다는 소식은 들었어."“네….”윤혜인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화를 회피했다. 그녀가 이 주제를 꺼린다는 것을 눈치챈 한구운은 더 캐묻지 않았다. 그가 부드럽게 미소지으며 말했다."좀 돌아갈 순 있어도, 결국엔 다 잘될 거야."윤혜인은 그의 말에 공감했다. 이준혁을 쫓아다니느라 많이 방황하고 상처도 입었다. 하지만 이제 다시 본래의 삶으로 돌아왔으니, 좋아질 일만 남았다.반면, 검은색 벤틀리 안은 분위기가 살얼음판이었다. 주훈은 백미러를 통해 이준혁의 표정을 살폈다. 그의 얼굴은 야차처럼 일그러져 있었다. 주훈은 눈치 없는 자신을 탓하고 또 탓했다. 괜히 쓸데없이 사모님이라고 말을 꺼내, 이준혁에게 이혼한 사실을 다시 상기시키게 했다. 물론 윤혜인 입장에선 당연한 요구였겠지만, 이준혁이 그걸 달가워할 리 없었다. 윤혜인과 달리 이준혁은 억지로 한 이혼이었으니까. 주훈은 좀 전에 난감해하던 윤혜인의 표정을 떠올리며, 그녀가 이준혁의 태도 때문에 일부러 거짓말했음을 눈치챘다. 주훈은 잠시 도로변에서 상황을 지켜보다가, 아무도 안 오면 이준혁에게 다시 윤혜인을 데리러 가자고 말을 꺼내려 했다. 이준혁은 체면 때문에 절대로 말을 못 꺼낼 테니, 이럴 때는 그가 눈치 빠르게
더 거절하기 미안했던 윤혜인은 고개를 끄덕이며 그의 말을 수락했다. 한구운이 떠난 뒤, 윤혜인은 근처에서 택시를 불러 곧장 묘지로 향했다. 큰 도시와 달리 시골 묘지는 바닥이 고르지 않았다. 할머니의 비석도 꽤 힘겹게 사람을 불러 세운 것이었다. 그런 외할머니의 비석이 붉은 페인트로 뒤덮인 모습을 보자, 윤혜인은 화가 치밀어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그녀는 곧장 묘지 근처에 있는 집을 찾아가 자초지종을 물었다. 빨간 페인트를 묘비에 뿌린 사람은 동네 건달이었는데, 외할머니가 진 빚 때문에 그런 짓을 한 것이라 했다. 윤혜인은 처음 듣는 얘기에 어리둥절했지만, 지금은 비석 청소가 우선이었다. 그녀는 간단한 청소도구를 빌린 뒤, 비석을 정성스레 원상복구시켰다. 청소하는 내내 몇 번이고 눈물이 터질 뻔했으나, 속으로 복수를 다짐하며 꿋꿋이 감정을 내리눌렀다. '외할머니, 제가 꼭 복수해 드릴게요.'정리를 마친 뒤, 윤혜인은 좀 전에 자초지종을 알려줬던 사람한테 50만 원을 주며 비석을 잘 돌봐달라고 부탁했다. 그리고 만에 하나 일이 생길 때를 대비해 연락처도 남겨놨다.그들은 흔쾌히 윤혜인의 부탁을 받아들였다. 인하 마을 자체가 그리 부유한 마을도 아니었고, 돈을 싫어할 사람은 없었으니까. 그다음, 그녀는 곧바로 사람을 수소문해 건달의 집 주소를 알아냈다. 그런데 찾아가기도 전에 일이 터졌다. 사람들이 그녀의 집을 부수려 한다며, 하인숙이 다급히 연락해 온 것이었다. 심지어 집주인까지 나타나, 그들과 함께 실랑이를 벌이는 중이라고 했다. 윤혜인은 놀라 헐레벌떡 그 집으로 달려갔다. 도착하니, 사람들은 물론 경찰까지 출동했는지, 사건 현장 같은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었다.그녀의 모습을 본 집주인이 안도한 표정으로 다가왔다."내가 너의 집을 강제로 빼앗았니? 너희 외삼촌이 먼저 팔겠다고 한 거잖아. 그리고 세 들어 살고 싶다고 해서, 세도 줬는데 너의 외삼촌이랑 같이 이런 사기를 쳐? 나는 이제 이 집 세 못 준다. 얼른 짐 빼고, 사람들한테 이 집이 너
차용증을 모두 종합해 보니, 총 4억, 20가구 정도 되었다. 윤혜인은 어렸을 적부터 도시로 나갔기 때문에, 이들의 얼굴을 다 알진 못했다. 하지만 대부분 소박한 옷차림을 한 걸 봐서, 모두 성실히 일하면서 노후 자금을 모았을 게 예상됐다. "이번에 주산응이 사기 친 돈은 제가 갚도록 할게요. 하지만 앞으로 또 이런 일 있으면, 저도 어쩔 수 없어요."경찰관이 옆에서 말했다. "이미 마을에 소문이 파다하니, 같은 피해는 없을 것 같아요."그제야 사람들의 얼굴이 환해졌다."아이고, 다행이네. 처자, 그럼 얼른 우리 돈 내주게나."윤혜인이 난처한 얼굴로 말했다."지금 당장은 못 드려요. 저도 서울에 있는 집을 팔아야 현금 나와요."지금 그녀가 살고 있는 집도 대출이 걸려 있었다. 그걸 다 갚고 팔면 약 3억 5천 정도 남을 게 예상됐다. 윤혜인은 우선 이걸로 급한 불부터 끄고, 남은 5천은 돈 버는 대로 갚겠다고 사람들에게 알렸다.그러자 여기저기에서 볼멘소리가 터졌다."그게 무슨 말이야! 돈 갚겠다며! 그런데 이제 와서 집 팔아 주겠다고? 또 거짓말하는 거 아니야?"이때, 아까 그 건달이 다시 입을 열었다."다 같은 집 핏줄인데, 이 여자도 사기꾼 아니라는 법 있어?"그러자 사람들이 흥분하며 밀고 들어오기 시작했다. 경찰도 막을 수 없었다. 정리할 필요를 느낀 윤혜인이 주변에 있던 한 판자 위로 올라서며 외쳤다."자, 싸우지 마세요."그러자 웅성거리던 것이 조금 잠잠해졌다."싸운다고 돈이 나오나요?"윤혜인이 그들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제가 주산응을 대신해 돈 갚겠다고 약속했으면, 무조건 지켜요."딱 봐도 시골 사람과는 다른, 고급스러운 분위기를 풍기는 그녀가 발언하자, 왠지 모르게 신뢰가 갔다.이때, 한 주민이 외쳤다."그러면 정확히 언제 얼마를 갚을지 알려주세요."윤혜인이 미안한 표정으로 답했다. "정확한 시간은 말씀 못 드려요. 어쨌든 최대한 빨리 갚도록 할게요."집이라는 것이 내놨다고 해서 당장 팔릴 거라는 보
열심히 따라왔더니, 상대는 자신을 모르는 사람 취급하고 있었다. 이준혁은 자존심이 상했다. 게다가 윤혜인은 이제 주훈에게 사모님이라고도 부르지 못하게 했다. 그것도 모자라 다른 남자의 차에 올라타기까지 하다니, 이준혁은 윤혜인에게 미움받고 있다는 사실을 실감했다.경찰관이 둘을 보며 물었다. "그래서 도대체 누구 말을 들어야 하는 거예요? 아는 사이에요, 모르는 사이에요?"이준혁은 끈질긴 경찰관이 상당히 거슬렀지만, 일단 짜증을 억눌렀다. 그는 윤혜인의 허리를 팔로 감싸 안은 채, 당당하게 대답했다."남편이에요."그 말을 들은 윤혜인은 순간 사고가 정지됐다. 그녀는 이준혁의 품에서 벗어나려 애썼지만, 그가 더 세게 끌어안는 바람에 소용없었다."헛소리 좀 하지 마세요."양쪽에서 계속 상반된 대답이 들려오자, 경찰관이 또다시 물었다."이분 남편 맞나요?"윤혜인은 이준혁의 변덕이 이해되지 않았다. 아까는 물론이고, 전에 술집에서 마주쳤을 때도 이준혁은 매우 냉랭한 태도였다. 그런데 이제 와서 남편이라고 주장하다니, 정말 황당했다. 하지만 제대로 된 대답을 듣기 전까지 경찰관이 떠날 것 같지 않아, 얼른 설명했다. "지금은 아니에요. 전남편이에요."이준혁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그가 애써 화를 참으며 경찰관에게 말했다. "여기 일은 제가 알아서 처리할게요."하지만 경찰관은 믿음이 안 가는지 계속 머뭇거렸다. 결국 참다 못한 이준혁이 자신의 신분증 번호를 불러주며 상황이 일단락 되었다. "앞으로 이쪽에 문제 생기면 저한테 연락 주세요."그제야 경찰관은 안심한 듯 아까 윤혜인을 공격했던 남자를 데리고 자리를 떠났다. 이제 남은 건 마을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이준혁을 마치 구세주처럼 붙잡고 비켜주지 않았다. 좀 전에 그가 윤혜인의 남편이라고 자청했던 것을 그들도 들었기 때문이었다.윤혜인이 안 된다면, 돈 있어 보이는 남편한테라도 매달리자는 심산이었다. 이때, 주훈이 미리 인출한 현금다발을 가지고 외쳤다."받을 돈 있으신 분들, 다 이쪽으로
소원의 설명을 들은 육경한이 미간을 찌푸렸다.“아직 명확해진 게 아니니까 너도 너무 걱정하지 마. 그래도 안전에는 조심해야 되니까 사람 4명 붙여줄게. 유진이는 내가 알아서 보안 강화하고.”육경한은 소원이 거절할 것 같아 그러는지 얼른 한마디 덧붙였다.“너는 지금 홀몸이 아니야. 내가 이러는 것도 다 아이를 보호하기 위해서고.”육경한의 말이 맞았기에 소원도 거절하지 않았다. 이제 홀몸이 아니었고 유진도 엄마가 없어서는 안 되기에 일이 마무리될 때까지 어떻게든 조심하면서 안전에 심혈을 기울여야 했다.육경한이 골라준 보디가드는 의심할 여지 없는 안전한 사람들이었기에 소원도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 안상철도 소진용이 제일 믿고 맡긴 사람이었지만 결국 아버지를 배신한 걸 보면 이 세상에 영원히 믿을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지금 갈 거지? 내가 데려다줄게.”육경한은 소원이 반대하지 않자 경찰이 지정한 병원으로 데려다주겠다고 말했다. 그렇게 병원에 도착한 두 사람은 강민혜의 안내를 받아 안지영의 병실에 도착했다.문을 열어보니 안지영이 자그마한 몸집으로 무릎을 꽉 끌어안은 채 머리를 파묻고 있었다. 며칠 사이에 종이 인형처럼 삐쩍 마른 안지영을 보니 너무 마음이 아팠다.가까이 다가간 소원이 나지막한 목소리로 불렀다.“지영 씨...”안지영이 소원의 목소리를 듣지 못한 것처럼 고개를 들지도, 다른 반응도 보이지 않자 소원이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지영 씨, 지금 어떤 기분인지 알아요. 하지만 경찰에게 단서를 줘야만 아버지를 죽인 범인을 잡을 수 있어요...”가족을 잃은 슬픔은 소원도 겪어봐서 잘 알았다. 마지막 인사도 형체를 알아볼 수 없는 시신을 보며 했으니 그 아쉬움과 후회는 사람을 통째로 집어삼킬 만큼 컸다. 소원은 그때 왜 아버지와 더 많은 시간을 보내지 않았는지, 왜 같이 밥을 먹고 얘기를 나누지 않았는지 후회했지만 그땐 이미 너무 늦어버렸다.안지영을 다독이던 소원이 더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안지영을 꼭 끌어안았다. 얼마나 지났을까, 안지
소원이 육경한을 불러세우더니 따라서 나오며 병실 문을 닫았다.“현재 일은 내가 오해했어. 미안해. 그리고 고마워.”소원이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소원은 옳고 그름에 명확한 사람이었기에 잘못된 부분이 있다면 바로 인정하는 편이었다. 허심탄회한 모습은 쉽게 가질 수 없는 좋은 태도였다.육경한은 기분이 좋아졌는지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지만 티가 나지는 않았다.“도와준 거 아니야.”육경한은 연적을 도와줬다는 사실을 인정하기 싫은 것 같았다. 소원도 더는 이 문제에 집착하지 않고 본론으로 돌아왔다.“진아연을 찾고 있다고 들었는데 나도 찾고 있어. 찾으면 바로 나한테 알려줄래?”진아연이 잡혀들어가기 전에 물어봐야 알 수 있는 것들이 있었다. 만약 교활한 진아연을 그대로 들여보낸다면 사실을 말하지 않을 게 뻔했고 베일에 싸인 배후의 지도를 받을 수도 있었다. 아무튼 직접 물어봐야 마음이 놓일 것 같았다.“응. 알겠어. 너는 일단 가만히 있어. 내가 찾고 있으니까.”진아연의 배후에 누가 있는지 아무도 몰랐기에 진아연을 찾는 일은 매우 위험한 일이었다. 그 배후는 신비로울 뿐만 아니라 수단도 만만치 않았다.소원은 일단 고개를 끄덕였지만 의견을 수용하지 않을 생각이었다. 아버지의 죽음과 관련된 일인데 무슨 일이 있든 직접 헤쳐나가고 싶었다.그때 소원의 핸드폰이 울렸다. 강민혜가 걸어온 전화였다.“소원 씨, 안상철이 죽었어요.”전화를 받자마자 강민혜의 무거운 목소리가 들려왔다.쿵.머릿속에서 뭔가 터져버린 것 같았다.‘삼촌이 왜?’소원의 계획대로라면 안상철은 지금쯤 안지영과 외국에 나가 있어야 하는데 왜 갑자기 죽어버린 건지 의문이었다.‘지영 씨는...’소원이 얼른 물었다.“그러면 지영 씨는요? 딸은 어떻게 됐어요?”강민혜가 말했다.“딸은 안전한 상태지만 충격을 많이 받아서 병원에서 치료받고 있어요. 입을 열려 하지 않아서 경찰이 무슨 질문을 하든 침묵으로 일관하고 있어요.”“어... 어떻게 이런 일이...”소원은 믿을 수가 없었다. 안
그때 문 뒤에서 누군가 걸어 나왔다. 소원이었다.소원도 두 사람의 대화를 들었다. 이해하기 어려운 내용은 아니었지만 육경한이 이 정도로 양보했다는 것에 놀랐을 뿐이었다.“현재야...”“누나...”두 사람이 동시에 입을 열었다.“네가 먼저 말해.”소원이 양보하자 서현재가 다시 말을 이어 나갔다.“누나, 그거 알아요? 내가 지금까지 이렇게 노력한 건 다 안정된 삶을 되찾고 누나랑 행복해지기 위해서였어요. 하지만 지금은...”서현재가 뜸을 들이더니 씁쓸하게 말했다.“지금은 그저 누나가 잘 있기만 하면 다른 건 바라지 않을게요. 하지만 이것만 기억해요. 언제든 누나가 고개만 돌리면 보이는 그 자리에 있을게요.”순간 서현재는 능력이든 다른 부분이든 육경한과 비길 자격이 없다는 걸 알아챘다. 앞으로 몇 년간 피타는 노력을 거쳐 원하던 자리까지 올라갈 수는 있지만 육경한처럼 해탈의 경지까지는 오르지 못할 것 같았다. 사람은 일단 사랑에 빠지면 이기적이고 쪼잔해지고 질투에 휩싸이기 마련인데 유진도 아이를 받아들였으니 소원이 이 모든 걸 받아들이는 건 시간 문제라는 생각만 하면 마음이 자꾸만 벼랑 끝으로 떨어졌지만 소원만 행복하다면 서현재로 그것으로 만족하기로 했다.소원은 그런 서현재를 보며 하고 싶은 말이 많았지만 내뱉은 건 결국 한마디였다.“현재 너는 나의 영원한 가족이야. 유진도 그렇고.”서로에게 위안이 되던 나날들, 그리고 그 시간 동안 서현재가 유진을 돌봐준 것도 소원은 잊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이든 앞으로든 서현재가 원하는 바를 이뤄줄 수가 없었기에 차라리 가족이라는 자리로 남는 편이 제일 나을 것 같았다. 게다가 소원은 이미 서현재에게 다시는 재혼하지 않겠다고 약속한 상태였다. 아이가 태어나고 나면 소원의 중점은 아이를 돌보는 것과 아버지가 만든 회사를 다시 일궈내는 것, 그 외에 다른 건 없었다.“누나, 나도 잊지 않을게요.”서현재는 이 말만 남기고 자리를 떠났다.병실로 돌아오는데 육경한이 침대맡에 앉아 깊은 눈동자로 유진을 바
서현재는 육경한이 그를 내쫓는다는 걸 알고 덤덤한 표정으로 말했다.“걱정해 줘서 고마워요. 아직 망하진 않았어요.”육경한은 그를 관심해 주는 게 아니라 그가 쫄딱 망해서 서울에서 더는 살 수 없기를 바랐지만 서현재도 유진의 아빠라는 말이 떠올라 톡 까놓고 얘기할 수는 없었다.육경한도 유진의 아빠인 서현재가 너무 궁색해지는 건 싫었다.“서한 가문의 제일 큰 라이벌이 요즘 해성으로 실사하러 갔다고 들었는데.”육경한이 밑도 끝도 없이 이렇게 말하자 서현재가 미간을 찌푸렸다. 서현재는 아직 모르는 소식이었다. 해성에서 새로 거론하고 있는 프로젝트는 거의 마무리 단계에 접어들었는데 이때 라이벌 회사가 해성으로 간다는 같은 프로젝트를 노린다는 의미였다. 라이벌 회사라 같은 영업 범위였기에 경쟁하는 건 정상이지만 토론이 끝나가는 프로젝트를 뺏는 건 예의가 아니었다.서현재가 잠깐 침묵하더니 말했다.“고마워요.”육경한이 콧방귀를 뀌었다.“약육강식인 세상에서는 승자가 왕이 되는 법이야. 능력이 부족한 건 다른 사람 탓해도 쓸모없어.”이 말은 서현재가 육경한이 했던 탄압을 복수라고 생각한다면 어리석다는 말이었다. 육경한이 없었다면 서한 그룹이 흔들릴 때 다른 회사에서 서한 그룹을 노렸을지도 모른다. 아무리 무너져가는 회사라도 떨어질 부스러기는 남아있었다. 게다가 서한 그룹은 완전히 가치를 잃은것도 아니었기에 기회를 노려 서한 그룹의 주문을 앗아간다면 체급을 늘이고 있는 회사엔 큰 이익이 될 수도 있었지만 육경한이 손쓴 덕분에 기회를 노리던 일부 회사들이 떨어져 나갔다. 그 회사들에게 육경한과 경쟁한다는 건 어리석은 일이었으니 말이다.물론 육경한의 실력도 서울을 제패할 만큼의 실력은 아니었지만 그가 사용하는 방식과 수단은 일반인이 감당하기에 매우 힘든 것들이었다. 완전히 이성을 잃은 상태에서는 3시간 만에 한 상장 회사를 파산하게 만든 적도 있으니 육경한을 건드린다는 건 목숨이 아깝지 않다는 말이나 마찬가지였다.육경한이 손쓴 덕분에 서현재도 숨 돌릴 시간이 있
상황이 매우 긴급했기에 육경한은 몸이 채 낫지도 않았는데 병원으로 나와 곁을 지켰고 소원도 마찬가지였다. 이제 결정을 내릴 때가 된 것 같았다. 장기 이식을 기다리는 일은 운이 좋으면 빨리 되겠지만 그렇지 못할 경우 10년을 기다려도 힘들었다. 게다가 유진의 몸 상태는 그렇게 오래 기다릴 수 없었다.소원은 리스크를 감수하고 유진에게 그 알약을 먹이려고 했고 육경한도 동의했다. 소원도 잘 회복하고 있었고 임신까지 했다는 건 약효가 정말 신기하다는 의미였다.약을 먹기 전에 소원과 육경한이 유진의 손을 잡고 격려했다. 유진은 두 사람이 생각했던 것보다 더 용감했고 오히려 웃으며 두 사람을 위로했다.“아빠, 엄마 걱정하지 마세요. 유진이 꼭 나아서 더 좋은 유진이가 될게요.”유진은 그 알약을 먹은 후로 고열에 시달리는 등 이상 반응이 나타났다. 몸이 작기도 했고 체질이 약해서 감당 능력이 어른과는 비길 수 없었다.소원은 속이 바질바질 타들어 갔고 서현재도 소식을 받고 달려왔다. 유진이 커가는 걸 옆에서 지켜본 사람이라 그 감정이 여간 두터운 게 아니었기에 유진이 아프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바로 달려온 것이다. 육경한은 서현재를 보고도 드물게 화를 내지 않았고 쫓아내지도 않았다. 아마도 서현재의 눈빛에서 유진에 대한 걱정을 보아내서 그런 것 같았다.서현재는 정말 유진을 끔찍이 아꼈고 유진도 서현재를 좋아했기에 육경한은 유진이 깨어났을 때 기분이 조금이라도 더 좋아지길 바랐다. 아버지가 된 후로 육경한은 무슨 결정을 내릴 때 그렇게 차갑지 않았고 감정이라는 게 들어갔다. 아버지가 되면서 얻은 제일 큰 변화였다.지금 이 세 사람에겐 같은 목표가 생겼다. 그것은 바로 유진의 건강이었다.세 사람이 이렇게 화목하게 병원 복도에 앉아 있은 건 처음이었다. 유진이 여기 있으니 병원의 모든 전문가가 대기하고 있었고 조금만 이상을 보여도 바로 응급조치에 들어갔다. 알약을 복용한 이튿날 밤, 유진이 잠에서 깼고 얼굴에 윤기가 감도는 게 상태가 매우 좋아 보였다. 검사 결과
진아연의 죄는 이루 말하기도 힘들 정도였다. 그런 사람이 아직도 벌을 받지 않고 멀쩡하게 사는 건 용납할 수 없었다.소원은 진아연을 꼭 찾아내 벌받게 하고 진아연 뒤에 숨어있는 사람이 누군지 잡아내겠다고 다짐했다.‘그 배후가 무슨 목적을 가지고 이런 짓을 벌였는지도 알아내야 해.’소원의 말이 끝나기 바쁘게 안지영이 불안한 표정으로 옆방에서 건너오더니 소원에게 말했다.“언니, 우리 아빠... 아무 잘못 없는 거 맞아요?”소원이 고개를 끄덕였다.“그래요. 지영 씨 아빠 살인범 아니에요. 지영 씨가 있으니까 삼촌이 무슨 결정을 하기 전에 늘 지영 씨를 생각하더라고요. 지영 씨 실망하게 하지 않으려고 삼촌이 엄청 노력한 건 사실이에요.”안지영이 그제야 한시름 놓으며 아버지가 살인범이 아니라는 사실에 기뻐했다.“언니, 언니도 하루빨리 아저씨 죽인 범인 찾아내길 바라요.”소원이 고개를 끄덕였다.“그래요. 나도 그러길 바라고 있어요.”소원에게 남은 유일한 목표는 그 사람을 찾아내어 응당한 벌을 내리는 것이었다. 소원은 미리 친구에게 연락해 지금 당장 두 사람을 데리고 나가게 했다. 안상철의 힘을 빌리면서 소원에게 피해가 가지 않게 하려면 어떻게든 두 사람을 보호해야 했고 최대한 비밀스럽게 움직여야 했다. 이런 상황에서는 외국으로 잠깐 피신해 있는 게 제일 좋은 방법이었다.소원은 그 자리에서 나오며 강민혜에게 소식을 알렸다. 강민혜는 소원이 안상철을 믿은 것에 놀란 듯 보였다. 다만 오래전 일이라 별다른 증거가 없는 게 문제였다. 예를 들면 안상철이 소진용을 아래로 밀어버리는 장면에 대한 증거가 없었기에 안상철의 말만으로는 죄를 물을 수가 없었다.소원이 말했다.“나는 삼촌 믿어요. 오래 알고 지내기도 했고 오늘 얘기를 나누면서 느꼈는데 내가 예전에 알던 그 삼촌이 맞았어요.”소원이 안상철을 믿기로 한 원인 중 하나였다. 안상철은 소원을 해치려는 생각이 없었고 결국 손을 대지 않았다. 딸을 끔찍이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소진용처럼 마음이 약한 사람일 것
진아연이 소진용을 죽이려 한 이유는 사실 간단했다. 소진용의 죽음으로 육경한과 소원 사이에 돌이킬 수 없는 오해를 만들고 소원이 아버지의 투신을 육경한이 건넨 파일때문이라고 생각해 육경한을 죽도록 원망하게 만들기 위해서였다. 그러면 소원은 육경한을 죽이려고 죽기 살기로 달려들 테고 진아연은 어부지리로 육경한이 제일 사랑하는 여자가 되어 결국엔 육경한과 결혼할 수 있다고 생각한 것 같았다. 자신의 사리사욕을 채우려고 다른 사람의 목숨을 해치다니, 진아연은 정말 뱀보다 더 잔인하고 독한 여자였다.사실 소원은 소진용의 죽음을 계속 의심하고 있었다. 사업을 하면서 이런저런 일을 다 겪었을 텐데 딱 봐도 흠집이 많은 계약서 때문에 옥살이할까 봐 투신자살할 사람은 아니었기 때문이다.소진용은 절대 그렇게 나약한 사람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때는 소원도 아버지의 죽음에 큰 충격을 받고 정신이 반쯤 나간 상태였기에 깊이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게다가 어머니 전미영까지 쓰러졌으니 타격이 이만저만이 아니었기에 마음이 잿더미가 된 소원은 좀비처럼 살면서 차분하게 정리할 힘을 완전히 잃어버렸고 숨을 쉬는 것조차 죄라고 생각했다.모든 걸 털어놓은 안상철은 그제야 홀가분해졌다. 마음의 짐을 떠안고 살면서 털어놓을 엄두를 내지 못한 건 결국 복수가 두려워서였다. 범인이 살인도 마다하지 않았다면 계획을 알고 있는 안상철을 가만둘 리가 없었기 때문이다.범인이 안상철만 노린다면 안상철도 두려울 게 없었지만 돌봐야 할 딸도 있고 모셔야 할 어른도 있었기에 그들까지 위험한 처지에 놓이게 할 수는 없었다. 이제 와서 묵혀뒀던 사실을 털어놓은 건 소진용에 대한 죄책감이 커서였지만 다 털어놓음으로써 안상철의 마음도 많이 편해졌다.소원은 이제 안상철의 처지를 알았고 안상철이 왜 진실을 말해주려 하지 않았는지 이해했다.“삼촌, 지금 이대로 출국해서는 안 돼요. 너무 위험할뿐더러 지영 씨도 힘들 거예요. 내가 전화번호 하나 줄 테니까 그 사람한테 연락하면 무사히 출국할 수 있게 도와줄 거예요. 내
안상철은 아직도 그날을 떠올리면 살이 떨렸다.“아래서 울부짖는 소리가 들리길래 대표님께 무슨 일이 생겼구나 싶었어요. 하지만 아까만 해도 도움이 필요하면 언제든지 말하라고 했던 분이 왜 갑자기 뛰어내린 건지 의문이었죠.”안상철의 머릿속에 그 남자가 떠올랐다. 낯선 사람이었고 다급하게 현장을 벗어난 걸 봐서는 회사 직원은 아닌 것 같았다. 하지만 안상철이 소진용의 죽음을 의심한 건 이것 때문만은 아니었다. 사무실에 들어갔을 때 소진용의 컴퓨터가 켜져 있었는데 차마 눈뜨고 보기 힘든 영상이 아직도 재생되고 있었기 때문이다.소진용이 얼마나 딸을 사랑하는 데 자살할 마음을 먹었다 해도 딸에게 불리한 동영상은 무조건 지우지 켜두고 갔을 리 만무했다. 적어도 다른 사람이 올라와 조사할 것을 대비해 딸의 이미지를 생각해서라도 조치했을 텐데 그럴 겨를조차 없었다는 것이다.하지만 안상철은 이내 여기 있다가 발견되면 무조건 연루된다는 생각에 바로 그 자리를 벗어나려 했다. 딸이 집에서 기다리고 있다는 게 떠올라 더 생각할 겨를도 없이 허둥지둥 USB를 빼서 사무실에서 나왔다.그 뒤로 시골에 숨어 나올 엄두를 내지 못했고 소진용의 장례식에도 참석하지 않았다. 그렇게 며칠 숨어있다가 소식을 알아보러 나왔는데 신문 기사에 소진용이 자살했다고 적혀있는 걸 보고 이 사실이 이대로 묻혔음을 알게 되었다. 안상철은 기회를 노리고 여자에게 전화를 걸었다. 여자는 잘했다고 칭찬하며 안상철에게 외국 의사의 연락처를 보내줬다.소식이 잠잠해지자 안상철은 안지영을 데리고 수술하러 나갔지만 약간의 휴양 시간만 가지고 다시 귀국했다. 외국은 적응하기 힘들뿐더러 누구든 총을 소지할 수 있었기에 늘 안지영이 괴롭힘을 위험해질까 봐 전전긍긍하다가 고민 끝에 그래도 국내가 안전할 것 같아 안지영을 데리고 귀국한 것이다.그렇게 5년간 안정된 삶을 살면서 모든 게 지나갔다고 생각했는데 소원이 찾아오면서 더는 숨길 수 없다는 걸 알아챘다.안상철이 하는 말을 듣고 있던 소원이 한참 동안 아무 말도 하지
하지만 그때는 딸을 구하는 데 급급해 다른 생각을 할 겨를도, 눈에 뵈는 것도 없었다.“그러다 결국 그 여자의 요구를 들어주게 됐어요. 해산 회의를 하는 날 모든 사람이 아래층에 모여있을 때 대표님 사무실로 향했죠. 어디로 가면 CCTV를 피할 수 있는지 알고 있어서 나를 발견한 사람은 없었어요. 하지만 사모님은 그날 사무실에 함께 계셔서 그날 마지막으로 대표님을 만난 사람이 나라는 걸 알고 있었어요.”소원은 전미영도 이 일을 알고 있을 줄은 몰랐다. 다만 전미영은 뒤에 큰 충격을 이겨내지 못하고 그대로 혼수상태에 빠졌고 그렇게 진실은 오랫동안 묻히고 말았다.안상철이 계속 말을 이어갔다.“그 영상을 대표님께 보여주면서 가끔은 어른이 살아있는 게 자식들에겐 짐이 될 수도 있다고 말했죠. 딸이 힘든 거 보기 싫으면 이제 결정할 때가 되었다고 말이에요.”“내 말을 들은 대표님이 한참 동안 말을 아끼셨어요. 그리고 내 예상과는 달리 딸에게 짐이 되지 말아야 한다면서도 딸 혼자서 이 모든 걸 짊어지게 하는 건 아니라면서 딸이 받아들이기 힘든 일은 하지 않겠다고 했어요. 대표님은 자살하면 소원 씨가 충격을 받을까 봐, 모든 걸 자기 잘못으로 돌릴까 봐 걱정했어요. 대표님은 참 좋은 아버지였고 소원 씨를 참 잘 알았죠.”소원의 눈동자에 눈물이 가득 차오르더니 이내 두 볼을 타고 주르륵 흘러내렸다. 마음이 너무 아파 숨 쉬는 것조차 너무 힘들었다.안상철이 말했다.“그때는 나도 너무 감동해서 내가 사람도 아니라고 생각했어요. 자기 딸을 구하겠다고 똑같이 딸을 사랑하는 아버지를 해치려 한 내가 너무 미워서 그 자리에서 바로 모든 걸 털어놓았어요. 대표님이 너그럽게 용서해 주면서 하시던 말씀은 아직도 잊을 수가 없어요.”“안 비서, 이번만큼은 내가 용서할게요. 같은 아빠니까 용서하겠지만 앞으로 절대 이런 실수는 하지 마요. 무슨 일 있으면 언제든 말하고요.”안상철이 눈시울을 붉혔다. 같은 아빠로서 똑같이 지켜야 하는 사람이 있는데 하마터면 아빠의 자격을 잃은 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