범인들이 죽은 탓에 단서가 끊겨버렸다. 이준혁이 굳은 표정으로 물었다. "또 다른 건?""송소미 씨는 아직 소재 파악이 안 됐어요. 하지만 사모님을 납치했던 두 남자는 찾았어요. 지금 바로 만나보실래요?"이준혁의 몸에서 순식간에 싸늘한 기운이 뿜어져 나왔다. "지금 가자."교외에 있는 한 지하 차고에서.무거운 철문이 열리고 코를 찌르는 악취가 뿜어져 나왔다. 한 발짝, 한 발짝 희미한 불빛 속에 발을 내딛자, 아래에 물컹한 것이 밟혔다. 놀란 주훈이 뒤로 몇 발짝 물러서며 몸을 굽혔다. 아래에 두 남자가 검은 두건을 쓴 채 바닥에 널브러져 있었다. 그는 두 남자의 머리에 씌워진 두건을 더 깊숙이 잡아당긴 뒤, 함께 들어온 덩치의 남자들에게 손짓했다. 그렇게 한참, 어둠 속에서 고통에 찬 비명과 발길질 소리만 울려 퍼졌다. "아이고, 사람 죽네! 제발 살려주세요! 가진 건 별로 없지만, 있는 건 다 드릴게요!"두 남자 중 한 명이 바닥에 머리를 박으며 싹싹 빌었다. 그런데 이때, 쾅 하고 야구방망이가 휘둘리는 소리와 순식간에 두 남자의 무릎이 박살 났다. "으악!"남자들의 입에서 고통에 찬 비명이 터져 나왔다. 그 순간, 어둠 속에 서서히 한 인영이 걸어들어오는 모습이 보였다. 다름 아닌 이준혁이었다. 그가 둘을 보며 나지막이 말했다. "이제 좀 말할 생각 들어?"더 맞기 싫었던 두 남자 중 한 명이 다급히 질문했다. "설마 며칠 전에 있었던 일 때문에 이러시는 건가요?"이준혁이 침묵하자 남자가 덧붙였다. "저희가 얼마 전에 주차장에서 여자 한 명을 납치하긴 했는데...."싸늘하게 얼굴을 굳힌 이준혁이 말했다. "그날 있었던 일, 하나도 빠짐없이 다 불어!"처음 질문했던 남자가 미친 듯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제발 때리지 마세요. 다 말할게요! 다 말할게요!"뒤늦게 옆에 있던 남자도 덧붙였다. "저도요! 저도 다 말할게요!"처음 말을 꺼냈던 남자가 먼저 말을 꺼냈다. "저희는 그 악독한 계집의 지시에 따랐을
원망스러운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윤혜인의 표정을 본 임세희는 마음이 편안해졌다. 이번에도 송소미가 완벽하게 일 처리를 하지 못했으나, 적어도 아이를 없애는 데까진 성공했기 때문에, 충분히 만족스러웠다. 아이까지 잃었는데, 이준혁과 윤혜인이 이혼하지 않을 수 없을 거라 생각했다.자신과 대비되는, 환한 표정을 짓고 있는 임세희를 본 윤혜인은 이번에도 모든 것이 연기였음을 깨달았다. 하지만 지금은 쓸데없는 곳에 감정을 허비하고 싶은 기분이 아니었다. 윤혜인이 싸늘한 표정으로 임세희에게 말했다."꺼지라고 했어.""어머, 무서워라. 나한테 화낼 거 뭐 있어? 내가 그랬어?"임세희는 가면을 지우고 대놓고 윤혜인을 비웃기 시작했다."처음부터 준혁 오빠가 날 구하러 오지 않았다면 일어나지 않았을 일 아니야? 그랬더라면 너랑 아이도 지금쯤 무사했겠지. 하지만 어떡해? 오빠는 날 선택했는걸? 그런데 많이 아팠어? 아이가 죽어가는 게 느껴졌어?"모두 정곡을 찌르는 말이었다. 윤혜인은 임세희의 말에 절망적이었던 기억이 되살아나는 것을 느꼈다. 그녀의 안색이 점점 어두워지는 것을 본 임세희는 더욱 신이 나 말을 이어갔다."그러니까, 몇 번을 말해야 알아들어? 오빠가 그 아이를 원하지 않는다니까?"임세희가 도도하게 머리카락을 넘기며, 윤혜인의 절망스러운 표정을 음미했다."오빠도 속으론 잘 죽었다고 생각하고 있을 걸? 하하!"윤혜인은 분노에 몸이 부들부들 떨렸다. 자신의 아이를 이렇게 함부로 말하다니, 그녀는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다."왜 그렇게 화났어? 어차피 아무도 원하지 않는 아이, 괜히 세상에 태어나 고통받느니, 죽는 게 낫잖아? 일찍 죽은 걸 축하해야지...."말이 끝나기도 전에 짝하고 임세희의 고개가 돌아갔다. 결국 듣다 못한 윤혜인이 임세희의 뺨을 후려친 것이었다. 얼마나 세게 쳤는지, 입술이 이빨과 부딪쳐 피가 베어 나왔다."이 빌어먹을 년이! 감히 날 때려? 죽고 싶어 환장했어?"화난 임세희가 따지려던 순간, 짝하고 또다시 한번 윤혜인의
임세희의 입꼬리가 기괴하게 비틀렸다. "처음엔 몰랐어도, 오빠가 과연 끝까지 몰랐을까?"그 말을 들은 윤혜인은 온몸이 뻣뻣하게 굳어버렸다. "무슨 뜻이야?"윤혜인의 표정을 본 임세희가 득의양양한 표정을 지었다. 역시나 이준혁이 아직 말을 하지 않은 것 같았다. "내가 한 짓이라는 걸 알고도 추궁하지 않았다는 생각은 안 들어?"누군가가 뒤통수를 후려갈긴 것 같았다. 진작에 알아차렸어야 했다. 윤혜인은 과거에 어리석었던 자신을 비웃었다. 노력하면 언젠가는 이준혁이 그녀를 바라봐줄 거라는 착각을 하며 살았던 자신이 너무나도 증오스러웠다. 그가 임세희를 끔찍이 여긴다는 것은 알았지만, 자기 자식까지 외면할 정도였을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애당초 그녀는 임세희의 상대도 되지 않았던 것이다. 임세희를 위해서라면 그에게 진실 따위 언제든지 묻을 수 있는 것이었다. 윤혜인은 이 기막힌 상황에 눈물조차 나오지 않았다. 완벽한 패배였다. 아주 참혹한 패배였다. "꼴 좋다. 그러게, 처음부터 내 말을 듣고 빨리 준혁 오빠를 떠났어야지. 그랬으면 네 아이도 죽지 않았을 거 아니야?"이 말을 들은 윤혜인은 순간 눈이 번쩍 띄었다. "뭐라고? 설마 이번 납치 사건도 네가 꾸민 짓이야?""어디서 엄한 사람한테 죄를 뒤집어씌우려고! 그건 나 아니야!"임세희는 아니라고 주장하지만, 윤혜인은 이미 눈치챘다. 역시 이번에도 임세희의 계략이었던 것이다. "난 그저 애가 죽었다길래, 축하해주러 온 것뿐이야!"윤혜인은 점점 손이 떨려왔다. 임세희의 입에서 아이를 모욕하는 소리가 나올 때마다 점점 숨이 가빠졌다. 도저히 참을 수 없는 분노가 속에서 끓어 나왔다. "임세희, 넌 하늘이 무섭지도 않아?""하늘이 무섭지 않냐고?"임세희가 웃음을 터트리며 말했다. "하! 네 꼴을 보고 말해. 처음엔 너희 할머니, 다음엔 네 아이, 그리고 단명한 너의 아버지까지, 너의 주변엔 온통 죽음뿐이잖아. 하늘이 무섭지 않냐고? 이렇게 된 것도 결국 다 너의 업보야!"순간 윤
윤혜인이 냉소를 지으며 말했다. "임세희, 잘 들어! 이준혁이 날 원하지 않는 게 아니라, 내가 이준혁을 버리는 거야! 넌 내가 버린 쓰레기를 주운 것뿐이라고! 알아?"임세희는 반박하지 않고 속으로 윤혜인을 응원했다. 그녀가 더 독하게 자신을 욕할 수록 이준혁의 마음을 돌리기에 더 쉬워질 테니까!이번에야말로 이준혁이 먼저 이혼하자고 나올지도 몰랐다!윤혜인이 입꼬리를 비틀며 계속 말을 이어갔다. "그렇게 내 쓰레기가 탐난다면, 줄게. 어디 쓰레기들끼리 잘 붙어먹어봐! 얼마나 오래 가는지 내가 두고 볼 거야!"뒤에서 그 말을 들은 이준혁이 걸음을 멈추고 얼굴을 딱딱하게 굳혔다. 온화했던 윤혜인의 입에서 어제부터 계속 그의 예상을 뒤엎는 말들이 튀어나오고 있었다. 임세희도 더 이상 듣고 있기 힘들었는지, 반박하기 시작했다. "누가 쓰레기라는 거야!""너 같은 년이 쓰레기가 아니면, 뭐가 쓰레기인데?"그 말을 들은 임세희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해졌다.윤혜인이 입술에 냉소를 머금으며 말했다. "어디 둘이 한번 붙어먹어봐. 앞으로 평생 남의 남자를 탐한 년이라는 낙인을 가지고 살게 만들 테니까! 남을 이 꼴로 만들어놓고, 너만 행복할 순 없지!"임세희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하지만 이준혁이 뒤에 있어 차마 반박하지 못하고 입술을 꽉 깨물었다. 이것은 이준혁의 마음이 윤혜인한테서 떨어져 나가도록 만들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기 때문이다. 임세희가 불쌍한 척 울먹이며 물었다. "그게 무슨 뜻이야? 지금 나 협박해?"윤혜인이 차갑게 웃으며 말했다. "그래, 이제야 알았어? 남의 것을 탐한 죄, 평생 갚아야지."임세희는 속으로 환한 미소를 지었다. 드디어 윤혜인의 흉악한 모습을 이준혁에게 보여줄 수 있게 되었다. 속이 이렇게 시원할 수가 없었다. 이준혁이 서서히 다가오는 모습이 보였다. 임세희는 드디어 때가 이르렀음을 느꼈다. 그녀가 눈물을 글썽이며 이제야 그를 발견한 것처럼 애타게 외쳤다. "준혁 오빠, 제발 도와줘...."임세희의 얼
"비켜!"윤혜인이 혐오감이 가득 담긴 얼굴로 그를 바라보며 말했다. 이준혁은 상처받은 표정으로 허공에 뿌리쳐진 자신의 손을 바라봤다. 그런데 이때 갑자기 등 뒤에서 누군가가 그를 끌어안는 것이 느껴졌다. 임세희가 구세주를 찾은 듯 바짝 그의 등에 매달린 것이었다. 그녀가 공포에 질린 채 두서없이 말을 내뱉었다. "준혁 오빠, 이 여자 미쳤나 봐! 내 무릎을... 내 무릎을 이렇게 만들어놨어. 나 너무 아파. 오빠, 제발 도와줘... 이 여자가 날 죽이려 해...."소란스러움에 병원 보안요원들이 출동했다. 그들은 엉망이 된 병실의 모습을 보고, 얼른 바닥에 주저앉아 있는 윤혜인부터 부축해 침대로 옮겼다. 좀 전에 임세희한테 머리채를 잡힌 탓에, 겨우 아물어가던 머리의 상처가 다시 터지고 말았다. 윤혜인의 머리에 감겨 있던 붕대에 다시 피가 흥건히 묻어나왔다. 한편, 임세희는 이준혁의 부축을 받아 다시 휄체어에 몸을 싣는 것에 성공했다. 그녀가 이준혁의 손을 부여잡은 채 엉엉 울기 시작했다. 윤혜인은 임세희의 연기력에 감탄했다. 예전의 그녀였다면 이런 상황에 오해받을까 두려움에 떨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의 윤혜인은 전혀 아무렇지도 않았다. 그녀는 오로지 이혼과 이 둘에게서 멀어지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이준혁이 그녀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던 알 바가 아니었다.이준혁은 임세희한테 붙잡혀 있었지만, 시선은 온통 윤혜인한테 가 있었다. 그가 보안요원을 바라보며 말했다."얼른 의사 좀 불러주세요!"임세희는 자신 때문에 이준혁이 의사를 부른 줄 알고 더 그에게 매달리기 시작했다. "준혁 오빠, 나 여기 있기 싫어. 저 여자 미쳤나 봐. 너무 무서워. 나 여기서 나가고 싶어...."윤혜인은 냉소를 지으며 말했다. "얼른 가세요, 이준혁 씨. 당신이 사랑하는 여자가 애타게 부르고 있잖아요. 얼른 데리고 치료하러 가셔야죠. 계속 여기 있다가는 제가 또 무슨 짓 할지 몰라요."그 말을 들은 이준혁이 임세희의 손을 뿌리치며 윤혜인에게 다가갔다. "
임세희는 뜨끔했지만, 애써 담담한 척 그에게 말했다. "몇 마디 안 했어. 그냥 괜찮은지 보러 간 것뿐이야. 그런데 갑자기 미친 것처럼 달려들었어."어쨌든 조금 전에 피해를 본 것은 그녀이고, 당연히 이준혁이 그녀의 편을 들어줄 거라 생각했다."그 몇 마디가 뭔데?"하지만 그녀의 예상과는 달리 이준혁은 쉽사리 납득한 듯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상대는 임세희였다. 그녀는 전혀 아무렇지 않은 듯 모든 잘못을 윤혜인에게 돌렸다. "그냥 안색이 왜 이렇게 안 좋은지 물어봤더니, 갑자기 달려들어서 날 때리더라고."그녀가 억울하고 불쌍한 표정으로 그에게 호소했다. "자극하는 말 진짜 안 했어?"임세희는 쉽사리 그가 넘어오지 않자 필살기인 울먹이는 목소리로 그의 옷자락을 잡으며 말했다. "안 했어. 내가 왜 그러겠어. 자기 입으로 우리가 애를 죽였다고 계속 중얼거렸단 말이야."그 말을 들은 이준혁의 표정이 살짝 흔들렸다. 임세희는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더 적극적으로 자신을 변호하기 시작했다. "준혁 오빠, 나 진짜 무서웠어. 좀 전에 주전자로 내리치고 막 발로 밟고, 얼마나 무서웠는지 몰라. 여기 내 무릎 봐. 이거 다 그 여자가 한 짓이야."그녀는 옷깃을 걷어 올리며 팔과 다리에 난 상처를 보여준 뒤, 얼굴을 들이밀며 윤혜인한테 맞아서 부은 뺨을 보여줬다. 이준혁은 자신도 모르게 미간을 찌푸렸다. 실제로 윤혜인이 그녀를 때리던 현장에 그도 있었기 때문이다. 모든 정황이 임세희를 피해자처럼 만들어주고 있었다. 딱딱했던 이준혁의 표정이 서서히 풀리는 것을 본 임세희가 슬슬 본론을 꺼내기 시작했다."오빠, 정말 저 여자 정신 병원 안 보내도 돼? 머리가 좀 이상해진 것 같은데....""네가 신경 쓸 일 아니야." 하지만 이준혁은 쉽사리 그녀의 의도대로 넘어오지 않았다. "며칠 전에 널 납치했던 그놈들...."이때, 이준혁이 떠오른 듯 말을 꺼냈다. "오빠, 그 사람들 잡았어? 잡으면 절대로 가만히 두면 안 돼! 나 대신해서 죽도록 패줘야 해
놀란 임세희가 이준혁 뒤에 숨으며 말했다."왜 남의 병실에 함부로 들어오고 그래요?"그녀는 단번에 소원의 정체를 알아차렸다. 직접 얘기를 나눈 적은 거의 없지만, 몇 번 윤혜인과 함께 있는 모습을 봤기 때문에 둘이 친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신경 쓰지 마시고, 하던 거 마저 하세요."소원이 기세등등한 모습으로 말했다. 그녀는 문을 열기 전, 일부러 더 당당하게 보이기 위해 빨간 립스틱까지 바른 상태였다. "소원 씨, 여긴 제 병실이에요. 어서 나가주세요!"하지만 임세희는 전혀 주눅이 들지 않았다. 일 년 전이었으면 모를까, 소원의 가문은 육경한의 압박으로 가세가 기울어진 상태였다. 게다가 소원이 회사를 살리기 위해 몸을 팔고 다닌다는 소문까지 번진 상태였다. 임세희는 그녀를 얕잡아 볼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소원은 윤혜인의 친구였다. 보나 마나 좀 전의 일 때문에 따지러 온 것일 텐데, 좋게 대할 이유가 없었다. 소원이 두 남녀를 째려보며 말했다. "왜? 그러면 또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남의 남편한테 들러붙어 있으려고?""무슨 말을 그렇게 해요!"그 말을 들은 임세희는 화가 치밀어 올랐다. 윤혜인이 중간에 끼어들지만 않았어도, 진작에 이준혁은 그녀와 연결되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내가 뭐 틀린 말 했어?"소원이 입술을 비틀며 임세희를 비웃었다. "상간녀 주제에, 혜인이한테 또 뭔 소리를 지껄인 거야? 어디 남자 못 만나 죽은 처녀 귀신이라도 붙었나, 낯짝이 왜 이렇게 두꺼워?"임세희의 분노에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해졌다. "누가 상간녀예요! 입조심해요!""남에 남편 품에 안겨 아양 떨 때는 언제고? 그게 상간녀지, 아님 뭐야? 이렇게 사람이 많이 드나드는 곳에서 뻔뻔하게 남의 남편한테 안겨 있을 정도면, 둘 있을 땐 더 얼마나 더러운 짓을 했겠어? 넌 뭔데 이렇게 당당해!"그렇게 말하며, 소원은 아주 더러운 것을 보는 듯 둘을 흘겼다. 임세희의 뻔뻔함이야 진작에 알고 있었지만, 그녀는 이준혁이 이번에도 이렇게 나올 줄은
임세희가 반응하기도 전에 소원이 질문을 던졌다."네 입으로 말해. 혜인한테 맞은 이유.”왠지 모를 불안감이 갑자기 덮쳐왔다. 임세희가 다급히 말했다. "정신이 온전치 않은 사람이 왜 그랬는지 제가 어떻게 알아요...."소원이 웃음기를 완전히 지운 채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네가 먼저 그랬잖아! 처음부터 이준혁이 아이를 원하지 않았다고! 이준혁한테 버림받아 꼴좋다고 먼저 자극한 건 너잖아!"소원의 입에서 좀 전에 자신이 했던 말이 튀어나오자, 임세희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내가 언제 그런 말 했다고!"하지만 임세희는 개의치 않았다. 누군가가 이 대화를 알고 있다하더라도 증거가 있지 않은 이상 잡아떼면 그만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이때, 소원이 입꼬리를 비틀며 결정타를 날렸다. "진정해, 아직 끝나지 않았어. 너 아까 임신 진단서랑 친자 확인서도 네가 조작했다고 했지? 그걸 이준혁이 알고도 일부러 추궁하지 않은 거라고 당당히 말한 걸 내가 다 들었어!"소원의 말을 들은 이준혁의 얼굴에서 순식간에 살벌한 기운이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세희야, 진짜야?""난 그런 말 한 적 없어."역시나 임세희는 인정하지 않았다. 오히려 억울한 표정으로 그에게 호소하기 시작했다. "준혁 오빠, 나 진짜 그런 말 한 적 없어. 소원 씨가 날 모함하고 있는 거야."임세희가 소원을 가리키며 말했다. “소원 씨, 친구를 생각하는 마음은 알겠지만, 있지도 않은 일을 진짜인 것처럼 말하는 것은 명예 훼손에 해당할 수 있어요. 윤혜인 씨한테 어떤 말을 들었는지 몰라도, 제발 사리 분간은 해주세요. 이번 일은 그냥 잠시 이성을 잃어 그런 거라고 생각하고 넘어가 줄 테니, 다음번엔 같은 실수 저지르는 일이 없도록 조심하세요.”소원은 역겨움에 구토가 나올 것 같았다. 겉으론 대인배인 것처럼 굴지만, 저 말은 다른 의미로 윤혜인을 모욕하는 것이었다. 겉과 속이 달라도 이렇게까지 다를 수 있다니, 소원은 임세희의 연기에 소름이 끼쳤다. 그녀는 더 이상 임세희와
운전기사가 백미러로 소원을 보며 사과했다.“손님, 죄송해요. 감기 걸렸는데 손님에게 전염될까 봐 걱정돼서요.”소원은 별생각 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더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앱으로 차를 불렀기에 가는 내내 차 안에서 하는 대화가 녹음되었고 버튼 하나만 누르면 신고할 수 있었기에 소원은 시름 놓고 뒷좌석에서 눈을 붙였다.얼마나 지났을까, 소원이 눈을 번쩍 떴다. 아까 운전기사가 통화를 하는 것 같았는데 소원이 깨어났을 땐 다시 마스크를 끼고 운전하고 있었다.소원은 꿈이라도 꾼 줄 알고 창밖을 내다봤다. 날씨가 우중충한 게 비가 내릴 것 같았다. 도로를 유심히 살피던 소원은 이상한 낌새를 눈치채고 얼른 핸드폰을 꺼내며 물었다.“기사님, 혹시 길 잘못 드신 거 아니에요?”앱을 확인해 보니 차는 이미 경로를 한참 이탈했고 아예 다른 길로 가고 있었다.“아니에요. 이 길이 더 가깝고 비용도 적게 나와요.”방금 전까지만 해도 코가 막힌 듯한 목소리던 운전기사는 지금 꽤 깔끔하고 상쾌한 목소리로 말하고 있었다.소원은 점점 한산해지는 주변 풍경을 보며 불안함이 엄습했다.“아니에요. 기사님. 지금 당장 원래 경로로 돌아가서 내비게이션 따라 운전해 주세요. 비용은 앱에 나온 대로 드릴게요.”“손님, 그러면 아까 말했어야지. 그 길 진작에 지나쳐서 다시 돌아가려면 너무 멀어요. 걱정하지 마요. 곧 도착할 거예요.”운전기사는 소원의 요구를 들어주지 않고 계속 엑셀을 밟았고 시속 120까지 올라갔다. 국도라 제한속도가 80인데 말이다.소원은 점점 마음이 불안해져 신고 버튼을 누르려는데 배터리가 닳은 핸드폰이 소리를 내며 꺼졌다. 정말 되는 일이 없는 하루였다.핸드폰이 먹통이니 소원은 다른 방법을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어딘가 이상했다. 자세히 돌이켜보니 차에 오르기 전 차량 색깔과 번호를 확인했는데 아무 문제가 없었기 때문이다.‘근데 왜 이렇게 불안한 거지?’소원은 옆에 있는 기사 카드를 발견했다. 카드에 찍힌 운전기사는 네모난 얼굴에 눈썹이 짙
소원은 이번 달에 두 번이나 반차를 냈다. 다른 직원도 한 달에 겨우 2날 반 정도만 반차를 낼 수 있었기에 소원도 민망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다행히 영숙은 어머니의 상황이 좋지 않다는 소원의 말을 듣고 조심해서 다녀오라는 말만 덧붙였다. 소원은 얼른 기사에게 방향을 돌려 요양원으로 향하라고 했다.요양원에 도착한 소원을 보고 간병인 아줌마가 무척 놀라며 물었다.“소원 씨, 어쩐 일이에요?”소원은 침대에 조용히 누워있는 전미영을 보고 한시름 놓더니 이렇게 말했다.“요양원에서 상태가 좋지 않다고 연락이 와서요.”“괜찮아요. 사모님 오후에 약간의 경련이 있긴 했지만 오래 지속되진 않았어요. 주사를 맞고 지금까지 쭉 안정적이에요.”간병인 아줌마가 소원을 다독였다.“소원 씨, 너무 걱정하지 마요.”“다행이네요.”소원이 침대맡으로 다가가 앉았다. 중도에 잠깐 깨긴 했지만 전미영은 여전히 소원을 보고도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매주 보러 와도 전미영은 소원을 알아보는 법이 없었기에 소원도 이제 적응했다. 언젠가 육경한이 전미영을 보러 온 적이 있는데 육경한을 보고는 매우 즐겁게 반겨줬다. 소원을 대할 때 느껴지는 거리감만 보면 오히려 육경한이 친자식 같기도 했다.소원도 이 일에 관해 의사에게 물어본 적이 있지만 의사는 전미영이 깨어나자마자 본 사람이 육경한이라 육경한에게 익숙함과 신뢰감을 느낀다고 했고 별다른 방법이 없는 상황에서는 거부감을 느끼지 않는 사람을 만나는 게 몸 상태를 완화하는 데 도움이 될 거라고 말해줬다.게다가 애초에 전미영을 보살피는 일은 육경한이 전부 책임졌기에 무턱대고 육경한을 쫓아낼 수도 없었다. 그저 육경한이 문병 오는 시간을 피해 오는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육경한은 일이 바빴기에 소원을 보러 오는 일이 드물어 그렇게 걱정할 필요는 없었다.간병인 아줌마는 소원이 어딘가 피곤해 보이자 이렇게 말했다.“소원 씨, 얼른 들어가 쉬어요. 출근하느라 피곤해서 그런 거 아니에요? 멀리서 사는 걸로 알고 있는데 문병 온지 얼마나 됐다고
집사는 일 처리를 마치고 서현재의 핸드폰을 서진태에게 바쳤다.“도련님 핸드폰 아까부터 계속 울리고 있습니다. 소원이라는 여자가 계속 찾는 것 같은데 뭘 알고 있는 게 아닌지 의심됩니다. 처리할까요?”집사는 피도 눈물도 없는 사람이었고 일 처리가 깔끔한 편이라 서진태의 신임을 받고 있었다. 서진태는 쉴 새 없이 날아드는 부재중 전화와 메시지에 하얗게 센 눈썹을 찡그렸다.“이 여자가 정말...”서진태가 수염을 만지작거리며 말했다“육경한 그 자식이 무슨 뜻인지 모르겠네. 이 여자를 죽이든 풀어주든 일단 육경한의 생각부터 파악해야 해.”서진태는 겉으로만 육경한에게 공손했지 속으로는 죽일 듯이 미워했다. 서현재를 빌미로 서씨 가문을 여러 번이나 물고 늘어졌지만 목숨 따위 아까워하지 않을 정도로 실력이 강했고 외국에서 레전드로 남을만한 경험을 쌓은 덕분에 이 바닥에서 명성을 널리 날린 터라 서씨 가문도 함부로 건드릴 엄두를 내지 못했다. 서씨 가문은 아직 지켜야 할 사람이 있었다.하지만 집사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들이 세운 계획에 위협이 되는 사람이라면 백 명의 억울한 사람을 만들더라도 상관없다고 생각했다.“어르신, 이 여자는 폭탄이나 마찬가지예요. 그러다 결혼식에 차질이라도 생기면 그땐 육씨 가문과 원수를 질뿐더러 도련님을 휘두를 핑계가 없어지는 거잖아요. 모든 일이 난장판이 될 거라고요.”충성심이 하늘을 찌르는 집사는 사실 서진태가 동의하든 하지 않든 소원을 제거해 서씨 가문 후계자 자리에 위협이 되는 사람은 모조리 제거할 생각이었다. 당연히 집사가 생각하는 후계자는 서현재가 아니었다.선동당한 서진태는 집사의 말이 맞다고 생각했다. 이 여자는 정말 폭탄과도 같은 존재였다. 서현재도 이 여자를 위해 여러 번 서진태의 뜻을 거스른 적이 있기에 미래를 대비해 소원을 제거하는 편이 나을 것 같다고 생각했다.서진태가 집사에게 귀띔했다.“사람 보내서 쥐도 새도 모르게 처리해. 인신매매 업자에게 팔아도 좋으니까 최대한 깔끔하게 처리해야 할 거야. 절대
“요즘 바빠?”윤혜인이 물었다.“음... 조금.”소원의 대답은 거짓말이기도, 거짓말이 아니기도 했다. 클럽 일은 확실히 바빴다. 낮에는 잠을 보충하고 저녁에 나가서 새벽까지 일해야 하니 개인 시간이 별로 없었다. 어머니 전미영을 보러 갈 때도 퇴근하고 바로 가야 했기에 약간 피곤하기도 했다.그리고 이 일에 윤혜인을 끌어들이고 싶지 않았다. 세 아이를 케어해야 하니 생각보다 많이 힘들 것이다. 게다가 육경한은 유진의 친부니 이준혁이 개입한다 해도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고 결국 혼자 힘으로 이겨내야 했다.“그래. 나도 요즘 애가 어려서 모임을 줄였어. 애들이 조금 더 크면 아름이까지 데리고 너랑 유진이 보러 갈게.”“그래.”소원은 딱히 다른 설명을 붙이지 않고 웃으며 대답했다.“유진이랑 잘 지내고 있어.”윤혜인이 말했다.“그래. 꼭 그럴게.”전화를 끊고 나서도 소원은 윤혜인이 했던 말을 떠올렸다. 잘 지내라는데 유진이 육경한과 과연 잘 지낼 수 있을지 의문이었다.육경한 혼자라면 소원도 포기했을지 모른다. 소원의 몸 상태로는 유진의 곁을 오래 지키지 못할 수도 있다. 육경한 옆에 있으면 어느 날 소원이 바람처럼 사라진다 해도 부모님이 없는 것보다는 나을 것이다.하지만 소원은 방민아를 믿을 수가 없었다. 방민아는 사악한 속내를 숨기는데 능했기에 결혼해서 아이라도 가지면 유진을 눈엣가시로 생각하고 제거하려 할지도 모른다. 하여 소원은 더 포기할 수 없었다. 유진이 표적이 되는 건 절대 두고 볼 수 없었다.얼마 지나지 않아 윤혜인이 서현재의 개인 번호를 보내왔다. 소원이 얼른 전화를 걸었지만 받는 사람이 없었다. 다시 한번 걸어도 받지 않자 소원은 어쩔 수 없이 메시지를 보냈다.[서현재 씨, 나 소원이에요. 보면 회신해요. 긴히 해야 할 말이 있어요.]메시지를 보냈지만 한참 동안 지나도 답장이 없었다. 소원은 마음이 점점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3일 뒤면 결혼인데 그때 가서 서씨 가문의 통제를 벗어나려면 더 힘들어지게 된다. 게다가 서씨 가문은
옆에 있던 사람이 좋다고 손뼉을 쳤다.“그래. 그래. 욕을 바가지로 먹어야 정신을 차리지. 인플루언서가 된 느낌이 어떤 건지 알려주자.”순간 구경하던 직원들이 일제히 핸드폰을 꺼내 소원의 얼굴을 찍으며 욕설을 퍼부었다.육연주는 이런 상황이 참 마음에 들었다. 꼬리 치길 좋아하는 소원을 인터넷에 폭로해 얼마나 뻔뻔한 사람인지 세간에 알리는 것도 좋을 것 같았다.소원은 어떻게 해명해야 할지 몰랐다. 사람들 눈에 육연주는 서현재의 와이프였고 서씨 가에서 인정한 며느릿감이었지만 소원은 아무 명분이 없었다. 그런 소원이 서한 그룹까지 찾아왔으니 이상하게 생각할 만도 했다.하지만 소원은 서현재가 소용돌이에 휘말리는 걸 두고 볼 수 없었다. 게다가 서씨 가문에서 육연주를 고른 건 다 이유가 있었다. 육연주는 공부라곤 해본 적이 없는 여자라 금융은 일절 몰랐기에 서한 그룹의 경영에 간섭할 일이 없었다. 그리고 육연주는 육씨 가문 사람이라 무슨 일이 있어도 언제든 발을 뺄 수 있었다.“육연주 씨, 서현재와 얘기 나누러 온 것뿐인데 뭐가 방해된다고 그래요.”소원은 여전히 포기할 생각이 없어 보였다. 육연주는 화가 치밀어오른 나머지 가방을 들어 소원에게 던졌다.“정말 여간 뻔뻔한 게 아니네요. 이런 수모를 겪어도 그런 말이 나와요?”소원이 옆으로 쓱 비키며 공격을 피했지만 육연주는 소원을 놓아줄 생각이 없었고 보디가드를 불러 소원을 끌어냈다.“빌어먹을 년.”육연주는 소원이 끌려 나가는 걸 보고도 여전히 분이 풀리지 않았다.벌건 대낮만 아니었으면 정말 소원을 때려죽이고 싶었지만 결혼이 코앞이라 손에 피를 묻힐 수 없으니 여기서 멈췄지 아니면 정말 때려죽였을지도 모른다.“거기.”육연주가 데스크 직원들을 매섭게 쏘아보더니 경고했다.“오늘 일 현재 씨 귀에 들어가는 날엔 당신들부터 해고할 거야.”육연주는 이미 서한 그룹의 사모님이라도 된 것처럼 행동했다. 데스크 직원들은 육연주가 언젠간 서씨 가문 안주인이 될 거라는 걸 알고 있었기에 그저 눈치만 볼 뿐 대꾸
‘기억을 잃었다고 하면 과연 믿어줄까?’소원은 서현재가 기억을 잃었을 뿐이지 이성을 잃은 건 아니라고 생각했다. 의심이 든 순간 조사할 것이고 얼마 지나지 않아 서진태의 음모를 알아차릴 것이다.서진태가 무슨 꿍꿍이인지 알기만 해도 서진태를 경계할 수 있으니 너무 끌려다니진 않을 것이다.그때 뒤에서 한 여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소원 씨?”소원이 고개를 돌렸다.찰싹.소원은 여자가 날리는 귀싸대기를 제대로 맞아 귀가 제대로 들리지 않을 지경이었다.여자가 포기하지 않고 귀싸대기를 더 날리려는데 소원이 얼른 손을 낚아챘다. 그러자 여자가 오만하게 데스크 직원에게 명령했다.“서서 보고만 있을 거예요? 얼른 잡고 때려요.”데스크 직원이 넋을 잃었다.비서실에 전화를 넣을 때 미래의 사모님도 함께 있을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다. 비서가 사람을 일단 남겨두라고 하자 데스크 직원은 소원이 말한 것처럼 서현재와 아는 사이라고 생각했는데 지금 보니 그렇게 간단하지만은 않은 것 같았다. 아마도 전 여자 친구거나 떨어지지 않고 질척거리는 외간 여자 같았다.소원은 그제야 내려온 사람이 육연주임을 알아봤다.데스크 직원이 다가와 도와주려는데 육연주가 귀싸대기를 두 방 날렸다.“일을 왜 이따위로 해요? 회사에 누굴 들이고 누굴 들이지 말아야 할지 몰라요?”데스크 직원이 얼굴을 감싸 쥔 채 억울한 표정을 지었다. 위에서 지시한 대로 했을 뿐인데 이런 수모를 겪을 줄은 몰랐다.육연주는 그저 데스크 직원을 이용해 기선을 제압하여 미래의 서한 그룹 사모님이 누군지 알려주려 했다. 선제공격이 제일 타격감이 큰 편이다. 육연주는 오늘 모든 사람에게 서현재의 와이프가 얼마나 대단한 사람인지 보여주고 싶었다. 그래야 앞으로 감히 서현재를 넘볼 사람이 없을 것이다.“소원 씨, 도대체 뭐 하자는 거예요? 내가 그날 분명히 경고했죠. 현재 씨 유혹할 생각하지 말라고. 그런데 회사까지 찾아와요? 정말 너무 뻔뻔하네요.”육연주가 허리춤에 손을 올리고 퉁명스럽게 말했다.소원은 볼이
소원은 외교팀에서 같이 일하던 동료에게 전화했다. 외국인이라 인맥이 매우 넓었기에 서씨 가문의 일을 조사하는 건 아주 쉬운 일이었다.서씨 가문이 밖에 새로운 회사를 설립했는지, 그리고 맏며느리가 임신했는지만 확인하면 아까 들은 내용이 사실인지 아닌지 알 수 있었다.소원은 사실 서현재가 기억을 잃은 게 어찌 보면 행운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적어도 서씨 가문에서 서현재를 해치지 않고 다리까지 고쳐줬으니 말이다.하지만 지금 그 모든 걸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만약 이 모든 게 진실이라면 서씨 가문은 제일 큰 악마 소굴이었기에 빨리 서씨 가문에서 도망쳐야 했다.불안한 마음을 안고 며칠이나 기다렸지만 조이는 소식을 전해오지 않았다. 한시름 놓고 그들이 술에 취해 헛소리한 거라고 생각하려는데 조이가 소식을 보내왔다.“소원, 전에 말했던 거 조사해 봤는데 확실히 새로운 회사를 설립했더라고요. 서씨 가문 맏며느리도 회사 관리에 참여했고 얼마 전에 쌍둥이를 낳았대요.”모든 게 들어맞았다. 소원은 머리를 세게 두들겨 맞은 것처럼 멍했다.서현재가 자신을 벗어나 원하던 삶을 살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더 큰 위험이 도사리고 있을 줄은 몰랐다. 서씨 가문이 서현재를 이용하려 한다면 서현재는 반드시 도망쳐야 한다.소원은 영숙에게 반차를 올리고 차를 잡아 서현재가 있는 회사로 향했다. 서현재의 번호가 없어 가는 내내 마음이 불안했다. 차가 서한 그룹에 도착하자 소원은 바로 데스크로 뛰어갔다.“안녕하세요. 서현재 씨를 만나려고 왔어요.”“안녕하세요. 예약은 하셨나요?”데스크 직원이 물었다.“아니요.”소원이 고개를 저었다.“죄송합니다. 예약하지 않고서는 만날 수 없습니다.”데스크 직원이 말했다.“저 서 대표님과 친구예요. 전화해서 소원이 급한 일로 찾아왔다고 잠깐 내려오라고 하면 돼요.”“죄송합니다. 예약한 손님만 접대하는 게 저희 원칙입니다. 더 도와줄 수 있는 건 없을 것 같네요.”데스크에서 바로 거절했다. 작은 회사에서 이런저런 방법을 찾아 서현재를
“우리 아빠가 말해준 거야. 외국에서 장사할 때 서씨 가문과 접점이 있었는데 우연히 서씨 가문 사람을 만나서 물어본 거래. 그래도 함부로 외부에 알리지는 마. 나도 어르신에게 밉보이긴 싫거든. 무서운 사람 같아.”“나도 알아... 걱정하지 마. 나까지만 아는 걸로 하고 절대 외부로 얘기하지 않을게.”소원은 서씨 가문에 이런 비밀이 있을 줄 몰랐다. 역시 소원의 직감이 맞았다. 서진태는 서현재를 사랑하지 않을뿐더러 서현재가 죽든 말든 신경 쓰지 않는 것 같았다.저번에 직접 사람을 불러 서현재의 다리를 못 쓰게 만든 것만 봐도 서진태가 서씨 가문의 일원인 서현재를 전혀 관심하지 않는다는 걸 알 수 있었다.만약 위층에서 토론한 내용이 사실이라면 서진태가 그동안 행동과 어느 정도 맞았지만 희생양이 된 서현재가 너무 위험했다.소원이 이마를 부여잡았다. 저녁을 먹지 않아서 그런지 머리가 너무 어지러웠고 다리에 힘이 풀려 얼른 벽을 붙잡고 서는데 어쩔 수 없이 소리가 났다. 위층에 있던 사람들이 소리를 듣고 바로 신경을 곤두세웠다.“거기 누구예요?”소원은 심장이 목구멍까지 올라와 움직일 엄두를 내지 못했다. 한 걸음만 앞으로 나아가면 위에서 보일지도 모른다. 토론자 중 한 명이 아래로 머리를 내밀며 이렇게 말했다.“내가 여기서 보고 있을 테니까 빨리 아래 내려가서 봐봐.”소원은 정말 당장이라도 심장이 멎을 것 같았다. 계단을 내려오는 소리가 들리자 이제 납작 없이 잡힐 것이다. 도망간다고 해도 복도 CCTV만 조사하면 누가 엿들었는지 다 조사할 수 있을 것이다.야옹.그때 가냘픈 고양이의 울음소리가 들렸다. 어둠 속에서 온몸이 눈덩이처럼 하얀 고양이가 기어 나오더니 우아하게 앞으로 걸어가며 연신 야옹거리며 울부짖었다.위에서 내려다보던 사람이 고양이를 발견하고는 계단을 내려가는 사람을 불러세웠다.“됐어. 고양이가 낸 기척이었어.”계단을 내려오던 사람이 걸음을 멈추더니 다시 위로 올라가며 말했다.“내가 그랬잖아. 이 시간에 여기로 걷는 사람이 없다고.
영숙은 차갑게 말했다.“그 셋은 네가 감당할 수 있는 상대가 아니야. 참을 수 있으면 참아. 아니면 피하든가. 그렇지 않으면 무슨 일이 터져도 내가 대신 해결해줄 일은 없을 거야!”소원은 바보가 아니었는지라 영숙의 말 속에 담긴 선의를 금세 알아챘다.다음에 또 그 셋을 마주친다면 아프다고 핑계를 대고 결근하는 것도 방법이라는 생각이 들었다.이처럼 서로 계산만 가득한 곳에서 같은 여성이 보여주는 호의는 그녀에게 작지 않은 감동으로 다가왔다.소원은 영숙을 향해 미소 지으며 말했다.“알겠습니다, 언니. 절대 폐 끼치는 일 없을 거예요.”소원이 미소 짓는 것을 보고 영숙은 잠시 멍해 하더니 어딘가 어색한 듯 담배를 끄며 고개를 돌렸다.그러고는 자리를 떠나면서 넌지시 말했다.“미친 거 아니야? 너 도와주는 거 아니라니까.”소원은 영숙이 떠난 후에도 입가에 옅은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이제 그녀는 확신할 수 있었다. 영숙은 선한 사람이었다.그녀가 왜 자신을 돕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진심과 가식은 구분할 수 있었다.그렇게 씻고 나서 소원은 다시 밖으로 나왔다.걸어가던 중에도 머릿속은 온통 서현재에 대한 생각으로 가득 차 있었다.‘정말 현재가 행복해질 수 있을까? 이번 기억 상실이 현재에게 축복일까, 아니면 불행일까?’만약 기억을 잃지 않았다면 서현재는 분명 싸울 것이었다.서씨 가문의 결혼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고 그들의 통제에도 절대 굴복하지 않았을 것이다.그녀는 어두운 복도를 따라 걸으며 뒤편 문 근처에 도착했다.그 순간, 2층 창문 쪽에서 들려오는 두 사람의 대화가 들렸다.희미하게 들리던 대화 속에 ‘서씨 가문’이라는 단어가 언급되자 소원은 멈춰 서서 조용히 그들의 이야기를 엿듣기로 했다.“서씨 가문에서 요즘 그 사생아를 꽤 중시하는 것 같더라.”“사생아라니? 그 자식은 사생아보다도 더 낮은 존재야. 사생아조차도 못 되는 잡종이지.”“야, 그런 말 하면 큰일 난다. 서씨 가문 어르신이 그 사람을 중히 여긴다는데... 네가 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