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망스러운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윤혜인의 표정을 본 임세희는 마음이 편안해졌다. 이번에도 송소미가 완벽하게 일 처리를 하지 못했으나, 적어도 아이를 없애는 데까진 성공했기 때문에, 충분히 만족스러웠다. 아이까지 잃었는데, 이준혁과 윤혜인이 이혼하지 않을 수 없을 거라 생각했다.자신과 대비되는, 환한 표정을 짓고 있는 임세희를 본 윤혜인은 이번에도 모든 것이 연기였음을 깨달았다. 하지만 지금은 쓸데없는 곳에 감정을 허비하고 싶은 기분이 아니었다. 윤혜인이 싸늘한 표정으로 임세희에게 말했다."꺼지라고 했어.""어머, 무서워라. 나한테 화낼 거 뭐 있어? 내가 그랬어?"임세희는 가면을 지우고 대놓고 윤혜인을 비웃기 시작했다."처음부터 준혁 오빠가 날 구하러 오지 않았다면 일어나지 않았을 일 아니야? 그랬더라면 너랑 아이도 지금쯤 무사했겠지. 하지만 어떡해? 오빠는 날 선택했는걸? 그런데 많이 아팠어? 아이가 죽어가는 게 느껴졌어?"모두 정곡을 찌르는 말이었다. 윤혜인은 임세희의 말에 절망적이었던 기억이 되살아나는 것을 느꼈다. 그녀의 안색이 점점 어두워지는 것을 본 임세희는 더욱 신이 나 말을 이어갔다."그러니까, 몇 번을 말해야 알아들어? 오빠가 그 아이를 원하지 않는다니까?"임세희가 도도하게 머리카락을 넘기며, 윤혜인의 절망스러운 표정을 음미했다."오빠도 속으론 잘 죽었다고 생각하고 있을 걸? 하하!"윤혜인은 분노에 몸이 부들부들 떨렸다. 자신의 아이를 이렇게 함부로 말하다니, 그녀는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다."왜 그렇게 화났어? 어차피 아무도 원하지 않는 아이, 괜히 세상에 태어나 고통받느니, 죽는 게 낫잖아? 일찍 죽은 걸 축하해야지...."말이 끝나기도 전에 짝하고 임세희의 고개가 돌아갔다. 결국 듣다 못한 윤혜인이 임세희의 뺨을 후려친 것이었다. 얼마나 세게 쳤는지, 입술이 이빨과 부딪쳐 피가 베어 나왔다."이 빌어먹을 년이! 감히 날 때려? 죽고 싶어 환장했어?"화난 임세희가 따지려던 순간, 짝하고 또다시 한번 윤혜인의
임세희의 입꼬리가 기괴하게 비틀렸다. "처음엔 몰랐어도, 오빠가 과연 끝까지 몰랐을까?"그 말을 들은 윤혜인은 온몸이 뻣뻣하게 굳어버렸다. "무슨 뜻이야?"윤혜인의 표정을 본 임세희가 득의양양한 표정을 지었다. 역시나 이준혁이 아직 말을 하지 않은 것 같았다. "내가 한 짓이라는 걸 알고도 추궁하지 않았다는 생각은 안 들어?"누군가가 뒤통수를 후려갈긴 것 같았다. 진작에 알아차렸어야 했다. 윤혜인은 과거에 어리석었던 자신을 비웃었다. 노력하면 언젠가는 이준혁이 그녀를 바라봐줄 거라는 착각을 하며 살았던 자신이 너무나도 증오스러웠다. 그가 임세희를 끔찍이 여긴다는 것은 알았지만, 자기 자식까지 외면할 정도였을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애당초 그녀는 임세희의 상대도 되지 않았던 것이다. 임세희를 위해서라면 그에게 진실 따위 언제든지 묻을 수 있는 것이었다. 윤혜인은 이 기막힌 상황에 눈물조차 나오지 않았다. 완벽한 패배였다. 아주 참혹한 패배였다. "꼴 좋다. 그러게, 처음부터 내 말을 듣고 빨리 준혁 오빠를 떠났어야지. 그랬으면 네 아이도 죽지 않았을 거 아니야?"이 말을 들은 윤혜인은 순간 눈이 번쩍 띄었다. "뭐라고? 설마 이번 납치 사건도 네가 꾸민 짓이야?""어디서 엄한 사람한테 죄를 뒤집어씌우려고! 그건 나 아니야!"임세희는 아니라고 주장하지만, 윤혜인은 이미 눈치챘다. 역시 이번에도 임세희의 계략이었던 것이다. "난 그저 애가 죽었다길래, 축하해주러 온 것뿐이야!"윤혜인은 점점 손이 떨려왔다. 임세희의 입에서 아이를 모욕하는 소리가 나올 때마다 점점 숨이 가빠졌다. 도저히 참을 수 없는 분노가 속에서 끓어 나왔다. "임세희, 넌 하늘이 무섭지도 않아?""하늘이 무섭지 않냐고?"임세희가 웃음을 터트리며 말했다. "하! 네 꼴을 보고 말해. 처음엔 너희 할머니, 다음엔 네 아이, 그리고 단명한 너의 아버지까지, 너의 주변엔 온통 죽음뿐이잖아. 하늘이 무섭지 않냐고? 이렇게 된 것도 결국 다 너의 업보야!"순간 윤
윤혜인이 냉소를 지으며 말했다. "임세희, 잘 들어! 이준혁이 날 원하지 않는 게 아니라, 내가 이준혁을 버리는 거야! 넌 내가 버린 쓰레기를 주운 것뿐이라고! 알아?"임세희는 반박하지 않고 속으로 윤혜인을 응원했다. 그녀가 더 독하게 자신을 욕할 수록 이준혁의 마음을 돌리기에 더 쉬워질 테니까!이번에야말로 이준혁이 먼저 이혼하자고 나올지도 몰랐다!윤혜인이 입꼬리를 비틀며 계속 말을 이어갔다. "그렇게 내 쓰레기가 탐난다면, 줄게. 어디 쓰레기들끼리 잘 붙어먹어봐! 얼마나 오래 가는지 내가 두고 볼 거야!"뒤에서 그 말을 들은 이준혁이 걸음을 멈추고 얼굴을 딱딱하게 굳혔다. 온화했던 윤혜인의 입에서 어제부터 계속 그의 예상을 뒤엎는 말들이 튀어나오고 있었다. 임세희도 더 이상 듣고 있기 힘들었는지, 반박하기 시작했다. "누가 쓰레기라는 거야!""너 같은 년이 쓰레기가 아니면, 뭐가 쓰레기인데?"그 말을 들은 임세희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해졌다.윤혜인이 입술에 냉소를 머금으며 말했다. "어디 둘이 한번 붙어먹어봐. 앞으로 평생 남의 남자를 탐한 년이라는 낙인을 가지고 살게 만들 테니까! 남을 이 꼴로 만들어놓고, 너만 행복할 순 없지!"임세희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하지만 이준혁이 뒤에 있어 차마 반박하지 못하고 입술을 꽉 깨물었다. 이것은 이준혁의 마음이 윤혜인한테서 떨어져 나가도록 만들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기 때문이다. 임세희가 불쌍한 척 울먹이며 물었다. "그게 무슨 뜻이야? 지금 나 협박해?"윤혜인이 차갑게 웃으며 말했다. "그래, 이제야 알았어? 남의 것을 탐한 죄, 평생 갚아야지."임세희는 속으로 환한 미소를 지었다. 드디어 윤혜인의 흉악한 모습을 이준혁에게 보여줄 수 있게 되었다. 속이 이렇게 시원할 수가 없었다. 이준혁이 서서히 다가오는 모습이 보였다. 임세희는 드디어 때가 이르렀음을 느꼈다. 그녀가 눈물을 글썽이며 이제야 그를 발견한 것처럼 애타게 외쳤다. "준혁 오빠, 제발 도와줘...."임세희의 얼
"비켜!"윤혜인이 혐오감이 가득 담긴 얼굴로 그를 바라보며 말했다. 이준혁은 상처받은 표정으로 허공에 뿌리쳐진 자신의 손을 바라봤다. 그런데 이때 갑자기 등 뒤에서 누군가가 그를 끌어안는 것이 느껴졌다. 임세희가 구세주를 찾은 듯 바짝 그의 등에 매달린 것이었다. 그녀가 공포에 질린 채 두서없이 말을 내뱉었다. "준혁 오빠, 이 여자 미쳤나 봐! 내 무릎을... 내 무릎을 이렇게 만들어놨어. 나 너무 아파. 오빠, 제발 도와줘... 이 여자가 날 죽이려 해...."소란스러움에 병원 보안요원들이 출동했다. 그들은 엉망이 된 병실의 모습을 보고, 얼른 바닥에 주저앉아 있는 윤혜인부터 부축해 침대로 옮겼다. 좀 전에 임세희한테 머리채를 잡힌 탓에, 겨우 아물어가던 머리의 상처가 다시 터지고 말았다. 윤혜인의 머리에 감겨 있던 붕대에 다시 피가 흥건히 묻어나왔다. 한편, 임세희는 이준혁의 부축을 받아 다시 휄체어에 몸을 싣는 것에 성공했다. 그녀가 이준혁의 손을 부여잡은 채 엉엉 울기 시작했다. 윤혜인은 임세희의 연기력에 감탄했다. 예전의 그녀였다면 이런 상황에 오해받을까 두려움에 떨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의 윤혜인은 전혀 아무렇지도 않았다. 그녀는 오로지 이혼과 이 둘에게서 멀어지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이준혁이 그녀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던 알 바가 아니었다.이준혁은 임세희한테 붙잡혀 있었지만, 시선은 온통 윤혜인한테 가 있었다. 그가 보안요원을 바라보며 말했다."얼른 의사 좀 불러주세요!"임세희는 자신 때문에 이준혁이 의사를 부른 줄 알고 더 그에게 매달리기 시작했다. "준혁 오빠, 나 여기 있기 싫어. 저 여자 미쳤나 봐. 너무 무서워. 나 여기서 나가고 싶어...."윤혜인은 냉소를 지으며 말했다. "얼른 가세요, 이준혁 씨. 당신이 사랑하는 여자가 애타게 부르고 있잖아요. 얼른 데리고 치료하러 가셔야죠. 계속 여기 있다가는 제가 또 무슨 짓 할지 몰라요."그 말을 들은 이준혁이 임세희의 손을 뿌리치며 윤혜인에게 다가갔다. "
임세희는 뜨끔했지만, 애써 담담한 척 그에게 말했다. "몇 마디 안 했어. 그냥 괜찮은지 보러 간 것뿐이야. 그런데 갑자기 미친 것처럼 달려들었어."어쨌든 조금 전에 피해를 본 것은 그녀이고, 당연히 이준혁이 그녀의 편을 들어줄 거라 생각했다."그 몇 마디가 뭔데?"하지만 그녀의 예상과는 달리 이준혁은 쉽사리 납득한 듯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상대는 임세희였다. 그녀는 전혀 아무렇지 않은 듯 모든 잘못을 윤혜인에게 돌렸다. "그냥 안색이 왜 이렇게 안 좋은지 물어봤더니, 갑자기 달려들어서 날 때리더라고."그녀가 억울하고 불쌍한 표정으로 그에게 호소했다. "자극하는 말 진짜 안 했어?"임세희는 쉽사리 그가 넘어오지 않자 필살기인 울먹이는 목소리로 그의 옷자락을 잡으며 말했다. "안 했어. 내가 왜 그러겠어. 자기 입으로 우리가 애를 죽였다고 계속 중얼거렸단 말이야."그 말을 들은 이준혁의 표정이 살짝 흔들렸다. 임세희는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더 적극적으로 자신을 변호하기 시작했다. "준혁 오빠, 나 진짜 무서웠어. 좀 전에 주전자로 내리치고 막 발로 밟고, 얼마나 무서웠는지 몰라. 여기 내 무릎 봐. 이거 다 그 여자가 한 짓이야."그녀는 옷깃을 걷어 올리며 팔과 다리에 난 상처를 보여준 뒤, 얼굴을 들이밀며 윤혜인한테 맞아서 부은 뺨을 보여줬다. 이준혁은 자신도 모르게 미간을 찌푸렸다. 실제로 윤혜인이 그녀를 때리던 현장에 그도 있었기 때문이다. 모든 정황이 임세희를 피해자처럼 만들어주고 있었다. 딱딱했던 이준혁의 표정이 서서히 풀리는 것을 본 임세희가 슬슬 본론을 꺼내기 시작했다."오빠, 정말 저 여자 정신 병원 안 보내도 돼? 머리가 좀 이상해진 것 같은데....""네가 신경 쓸 일 아니야." 하지만 이준혁은 쉽사리 그녀의 의도대로 넘어오지 않았다. "며칠 전에 널 납치했던 그놈들...."이때, 이준혁이 떠오른 듯 말을 꺼냈다. "오빠, 그 사람들 잡았어? 잡으면 절대로 가만히 두면 안 돼! 나 대신해서 죽도록 패줘야 해
놀란 임세희가 이준혁 뒤에 숨으며 말했다."왜 남의 병실에 함부로 들어오고 그래요?"그녀는 단번에 소원의 정체를 알아차렸다. 직접 얘기를 나눈 적은 거의 없지만, 몇 번 윤혜인과 함께 있는 모습을 봤기 때문에 둘이 친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신경 쓰지 마시고, 하던 거 마저 하세요."소원이 기세등등한 모습으로 말했다. 그녀는 문을 열기 전, 일부러 더 당당하게 보이기 위해 빨간 립스틱까지 바른 상태였다. "소원 씨, 여긴 제 병실이에요. 어서 나가주세요!"하지만 임세희는 전혀 주눅이 들지 않았다. 일 년 전이었으면 모를까, 소원의 가문은 육경한의 압박으로 가세가 기울어진 상태였다. 게다가 소원이 회사를 살리기 위해 몸을 팔고 다닌다는 소문까지 번진 상태였다. 임세희는 그녀를 얕잡아 볼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소원은 윤혜인의 친구였다. 보나 마나 좀 전의 일 때문에 따지러 온 것일 텐데, 좋게 대할 이유가 없었다. 소원이 두 남녀를 째려보며 말했다. "왜? 그러면 또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남의 남편한테 들러붙어 있으려고?""무슨 말을 그렇게 해요!"그 말을 들은 임세희는 화가 치밀어 올랐다. 윤혜인이 중간에 끼어들지만 않았어도, 진작에 이준혁은 그녀와 연결되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내가 뭐 틀린 말 했어?"소원이 입술을 비틀며 임세희를 비웃었다. "상간녀 주제에, 혜인이한테 또 뭔 소리를 지껄인 거야? 어디 남자 못 만나 죽은 처녀 귀신이라도 붙었나, 낯짝이 왜 이렇게 두꺼워?"임세희의 분노에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해졌다. "누가 상간녀예요! 입조심해요!""남에 남편 품에 안겨 아양 떨 때는 언제고? 그게 상간녀지, 아님 뭐야? 이렇게 사람이 많이 드나드는 곳에서 뻔뻔하게 남의 남편한테 안겨 있을 정도면, 둘 있을 땐 더 얼마나 더러운 짓을 했겠어? 넌 뭔데 이렇게 당당해!"그렇게 말하며, 소원은 아주 더러운 것을 보는 듯 둘을 흘겼다. 임세희의 뻔뻔함이야 진작에 알고 있었지만, 그녀는 이준혁이 이번에도 이렇게 나올 줄은
임세희가 반응하기도 전에 소원이 질문을 던졌다."네 입으로 말해. 혜인한테 맞은 이유.”왠지 모를 불안감이 갑자기 덮쳐왔다. 임세희가 다급히 말했다. "정신이 온전치 않은 사람이 왜 그랬는지 제가 어떻게 알아요...."소원이 웃음기를 완전히 지운 채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네가 먼저 그랬잖아! 처음부터 이준혁이 아이를 원하지 않았다고! 이준혁한테 버림받아 꼴좋다고 먼저 자극한 건 너잖아!"소원의 입에서 좀 전에 자신이 했던 말이 튀어나오자, 임세희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내가 언제 그런 말 했다고!"하지만 임세희는 개의치 않았다. 누군가가 이 대화를 알고 있다하더라도 증거가 있지 않은 이상 잡아떼면 그만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이때, 소원이 입꼬리를 비틀며 결정타를 날렸다. "진정해, 아직 끝나지 않았어. 너 아까 임신 진단서랑 친자 확인서도 네가 조작했다고 했지? 그걸 이준혁이 알고도 일부러 추궁하지 않은 거라고 당당히 말한 걸 내가 다 들었어!"소원의 말을 들은 이준혁의 얼굴에서 순식간에 살벌한 기운이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세희야, 진짜야?""난 그런 말 한 적 없어."역시나 임세희는 인정하지 않았다. 오히려 억울한 표정으로 그에게 호소하기 시작했다. "준혁 오빠, 나 진짜 그런 말 한 적 없어. 소원 씨가 날 모함하고 있는 거야."임세희가 소원을 가리키며 말했다. “소원 씨, 친구를 생각하는 마음은 알겠지만, 있지도 않은 일을 진짜인 것처럼 말하는 것은 명예 훼손에 해당할 수 있어요. 윤혜인 씨한테 어떤 말을 들었는지 몰라도, 제발 사리 분간은 해주세요. 이번 일은 그냥 잠시 이성을 잃어 그런 거라고 생각하고 넘어가 줄 테니, 다음번엔 같은 실수 저지르는 일이 없도록 조심하세요.”소원은 역겨움에 구토가 나올 것 같았다. 겉으론 대인배인 것처럼 굴지만, 저 말은 다른 의미로 윤혜인을 모욕하는 것이었다. 겉과 속이 달라도 이렇게까지 다를 수 있다니, 소원은 임세희의 연기에 소름이 끼쳤다. 그녀는 더 이상 임세희와
소원은 임세희의 말에 입꼬리를 올리며 기막히다는 듯 말했다. "와, 내가 살다 살다 별소리 다 듣는다. 넌 거울도 안 보고 살아? 혜인이가 뭐가 부족하다고 널 질투해? 보톡스 과다 주입으로 사람 얼굴 같지도 않은 네 면상? 아니면 유부남만 골라 꼬시는 그 능력? 그것도 아니면 뭐든 징징거리면 다 해결될 거라 착각하는 너의 멍청한 두뇌? 어디 하나 잘난 구석도 없으면서, 용케 그딴 소리 지껄이네."모든 말이 마치 비수처럼 임세희의 가슴에 꽂혔다. 이준혁만 없었다면, 그녀는 당장이라도 소원의 입을 찢어버렸을 것이다. 이때, 이준혁이 임세희가 잡고 있던 옷자락을 빼내며 침착한 목소리로 말했다. "세희야, 저번에 내가 한 경고, 농담 같았어?"임세희의 머릿속에 지난번 이준혁이 임향숙을 경찰에 넘기면서 했던 경고가 떠올랐다. 등골이 오싹해지며,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임세희는 두려움에 자기도 모르게 딸꾹질하기 시작했다. "준혁 오빠, 그게 아니라. 저거 다 거짓말이야. 윤혜인이랑 짜고 날 모함하려고 꾸민 짓일 거야....""하하!"소원은 어이없어 웃음을 터트렸다. "못 믿겠으면, 전문 기관에 의뢰해도 좋아. 누구의 말이 맞는지 어디 한번 보자고.""닥쳐!"임세희가 이를 갈며 소원을 노려봤다. "친구라고 둘이 합세해서 지금 나를 모함하는 거잖아!"임세희가 이렇게 나오리라는 것을 소원도 예상하고 있었다. 어차피 임세희가 인정하던 인정하지 않던 중요하지 않았다. 명백한 증거가 손에 있었으니까. 오늘 굳이 이 자리에서 이 사실을 밝힌 것은, 경고하기 위함이었다. 볼일을 마친 소원은 주머니에 녹음기를 다시 걷어 넣고 임세희를 바라봤다. "너랑 시간 낭비할 시간 없으니까, 잘 들어. 앞으로 다시 한번 내 친구를 건드리면, 이 녹음된 거 그대로 인터넷에 퍼트릴 거야. 그렇게 되면 넌 평생 불륜녀 꼬리표를 달고 살아가야겠지. 그러니까 부디 처신 잘 하길 바라. 내가 이거 쓰는 일이 없도록!""네가 감히!"임세희는 분노에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이대로
빨간 옷을 입은 무녀는 한 폐공장에 도착해 차에서 내리더니 주변을 경계하며 안으로 들어갔다.사람이 없는 걸 확인한 소원이 모자를 쓰고 잔뜩 긴장한 채로 조심스럽게 대문 쪽으로 향했다. 안으로 들어가 보니 공장은 텅 비어 있었고 방금 들어간 무녀도 보이지 않았다. 불길한 예감이 드는데 갑자기 뒤에서 누군가 수건으로 소원의 입과 코를 막았다.이상한 향기와 함께 소원은 발버둥 칠 겨를도 없이 정신을 잃었다.바닥에 쓰러진 소원을 보고 빨간 옷을 입은 여자가 바닥에 쪼그리고 앉더니 그릇을 살피듯 소원의 얼굴을 이리저리 뒤집으며 살폈다.그렇게 한참 살피던 무녀가 옆에 선 남자에게 말했다.“그래. 이 여자로 하지.”무녀가 자리에서 일어나 손을 탈탈 털었다.“담아서 옮겨.”체격 좋은 남자가 소원을 포댓자루에 담더니 병아리 잡듯 잡아서 차에 던져넣고는 차 문을 닫고 출발했다.무녀는 밖에 세워진 차를 가리키며 다른 남자에게 지시했다.“조용한 곳 찾아서 태워버려.”남자가 즉각 움직이더니 차를 끌고 어디론가 사라졌다. 무녀가 소원을 실은 차를 따라가려는데 핸드폰이 울렸다. 전화를 받은 무녀는 상대와 대화를 나누더니 방향을 틀었다....저녁.별장으로 돌아온 육경한은 불이 환히 켜진 걸 보고 도우미에게 물었다.“사모님은 밥 먹었어요?”도우미가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대표님 모르세요? 사모님 어머니 보러 간다고 했는데.”“어머니요?”육경한이 미간을 찌푸렸다.“네. 사모님이 그러셨어요. 아직 돌아오시진 않았고요.”도우미가 대답했다.시간을 확인해 보니 이미 저녁 8시 반이었다. 요양원은 이곳에서 멀지 않았기에 이 시간에는 돌아와야 맞았다. 소원이 걱정된 육경한은 올라가서 유진을 한번 보고는 차를 끌고 요양원으로 향했다.요양원에 도착해 전미영이 있는 병실로 가보니 전미영은 침대에 누워 잠을 자고 있었다. 간병인이 육경한을 발견하고 얼른 자리에서 일어나 공손하게 인사했다.“대표님.”육경한은 쓸데없는 말을 생략하고 바로 이렇게 물었다.“소원은 병원
소종이 뜸을 들이더니 병원 보고서를 꺼냈다.“이것도 한번 보세요. 병원 진단서인데 진아연의 상처가 일반적인 상처가 아니라 인위적인 상처일 수도 있다고 나와 있어요. 하지만 진아연이 자살이라고 잡아떼는 바람에 다른 사람도 달리 방법이 없었죠.”육경한이 진단서를 훑어보더니 말했다.“진아연이 쓸모가 없어지니까 버림을 받은 거야. 쓸모없는 사람을 왜 살려둬.”“지금으로써는 그렇게 봐야 할 것 같아요.”소종이 말했다.“계속 지켜봐. 배후가 누군지 반드시 알아내야 해.”육경한이 명령했다. 잠재적 위험 요소라 반드시 제거해야 했다. 소종이 고개를 끄덕이고 나가려는데 육경한이 소종을 불러세웠다.“서현재는 조사해 봤어?”“서씨 가문 도련님이요? 확실히 이상하긴 했어요. 조사하기 전에는 몰랐는데 조사해 보니까 정말 놀랍더라고요.”소종이 말했다.“서씨 가문 어르신이 무녀를 하나 데려왔는데 독벌레 주술을 내리는 바람에 그렇게 됐대요. 사람도 못 알아보고 생각도, 행동도 극단적으로 변하고 있다고 하던데요.”육경한이 입술을 앙다문 채 잠깐 고민했다.“변호사한테 서현재랑 연주의 결혼을 해결할 방법이 있는지 알아봐. 더 이어갈 필요 없을 것 같아.”딱 봐도 서현재는 서씨 가문, 그리고 서진태에 의해 버려졌지만 사악한 서진태의 성격에 마지막까지 서현재를 이용해 먹으려 할 것이다. 육경한이 알아버린 이상 한시라도 빨리 육연주를 그 소용돌이에서 빼내야 했다.“지금 바로 지시하겠습니다.”소종이 고개를 끄덕였다.“아, 그리고.”소종이 잠깐 망설였다.“연주 아가씨 어머님이 회사로 찾아왔는데 제가 대표님 회사에 안 계신다고 해서 다시 돌아갔습니다.”“그래, 알았어.”육경한은 별로 신경 쓰지 않았다. 아무래도 육연주를 단단히 혼내주려는 것 같았다.소종은 육연주가 혼나도 싸다고 생각했다. 요물 같은 소원이 밉긴 하지만 제멋대로 날뛰는 육연주도 나을 건 없다고 생각했다. 육경한이 육연주의 뒤처리를 해준 것만 해도 한두 번이 아니니 차라리 이번 기회에 육연주의 성질머리
소원이 육경한이 든 컵을 앗아가더니 이렇게 말했다.“두유도 너무 많이 마시면 안 좋아.”이에 육경한의 표정이 살짝 변했다. 소원은 영문이 뭔지 몰랐지만 아랑곳하지 않고 찐빵을 가리켰다.“찐빵도 좀 먹어. 갓 찐 거라 따듯할 거야.”“그래.”육경한이 찐빵을 가져다 입에 넣더니 천천히 음미했다. 유진은 소원이 챙겨준 식단을 말끔히 먹어 치우고 나서야 자리를 비웠다.소원은 입맛이 없어 별로 먹지 못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난 다 먹었어.”그렇게 식탁엔 육경한 한 사람만 남았다.도우미가 정리하려고 와보니 식탁에 놓인 음식은 이미 다 먹어 치운 뒤였다. 육경한은 평소 관리가 철저한 사람이었기에 아침은 커피 한 잔에 빵 한 조각, 스테이크 반 덩이면 끝이었는데 오늘은 정말 놀랄 정도로 많이 먹었다.역시 소원이 한 아침은 달라도 다르다는 생각에 도우미들은 기분이 좋아져 얼른 식탁을 정리했다.육경한은 출근 전 먼저 위층으로 올라가 소원이 유진에게 책을 읽어주는 걸 한참 동안 지켜보다가 집을 나섰다.차에서 기다리던 소종은 육경한이 차에 오르자마자 얼른 가까이 다가갔다.“대표님, 그 여자가 준 음식 드신 거 아니죠?”소종은 육경한이 혹시나 소원에게 홀려 판단력이 흐려진 게 아닌지 걱정했다. 육경한이 말이 없자 소종의 표정이 어두워졌다.“드셨어요?”육경한이 소종을 차갑게 쏘아봤다.“신경 꺼.”소종은 너무 어이가 없었다.“대표님, 목숨이 아깝지 않으면 그냥 말씀하세요. 어차피 대표님도 오래 못 살 것 같은데 저도 빨리 나가서 죽게요.”육경한이 그런 소종을 힐끔 쏘아보더니 말했다.“무슨 헛소리야?”“제가 없는 말 했어요?”소종이 씩씩거리며 말했다.“그 여자가 독 탄 거 알면서도 드시는 걸 보면 목숨이 아깝지 않다는 말 아니에요?”“독을 탔다는 증거가 없잖아.”육경한이 차갑게 잘라버렸다.“증거가 없긴 왜 없어요. 제가 이 두 귀로 들었는데.”소종이 대뜸 화를 냈다.“그 요물 같은 여자가 대답했다니까요.”“말 가려서 해.”육경한이
그녀를 옆에 남기려면 그게 뭐든 마셔야만 했다.소종은 진아연이 준 약이 만성 독약이라고 했다. 만성 독약이라면 아직 그녀와 아이 곁을 지킬 시간이 많다는 건데 육경한은 그걸로 족했다....이튿날.날이 어슴푸레 밝자마자 잠에서 깬 육경한은 옆자리가 비어 있자 얼른 아래층으로 내려가 찾으며 도우미에게 물었다.“사모님 어디 갔어요?”도우미가 웃으며 말했다.“사모님 주방에서 아침 준비하고 있어요.”이를 들은 육경한이 살짝 넋을 잃었지만 도우미는 기분이 좋아 보였다.“대표님, 참 좋으시겠어요. 사모님 음식 솜씨가 좋던데요?”소원이 너무 차가워 집안 분위기가 늘 우중충한 데다 유진까지 몸이 좋지 않고 말수가 적어 별장은 화기애애한 날이 거의 없었다. 하여 집에서 일하는 도우미들도 큰소리로 대화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이제 소원이 직접 육경한에게 밥을 해주고 있으니 소원도 관계를 완화하려고 애쓴다는 의미 같았다. 도우미들은 대표님이 사모님을 사랑하니 이 장면을 보고 기뻐할 거라고 생각했지만 원래도 기분을 잘 드러내지 않는 그였기에 도우미들도 별다른 낌새를 눈치채지 못했고 그저 속으로 몰래 좋아한다고 생각했다.주방으로 들어간 육경한은 분주히 돌아치는 소원의 뒷모습을 보고 순간 꿈인 줄 알았다. 그 자리에 서서 소원이 준비하는 걸 보고 있는데 마침 뒤돌아선 소원이 그를 발견했다.소원은 얼굴이 발그스름하고 광이 도는 걸 봐서는 기분이 좋아 보였다. 육경한이 아직 잠옷을 입고 있자 부드럽게 말했다.“일단 씻어. 아침 먹자.”육경한이 알겠다고 대답했다. 씻고 깔끔한 옷으로 갈아입고 돌아왔을 때 소원과 유진은 이미 식탁을 마주하고 앉아 있었다. 메뉴는 예전처럼 가짓수가 많지 않았지만 보기만 해도 구미가 당겼다.두유, 찐빵, 호박죽과 만두까지, 직접 만든 아침이라 몸에 좋았다.유진은 두유와 찐빵은 좋아했지만 호박죽과 만두는 별로 당기지 않는지 나지막한 소리로 말했다.“엄마, 나 두유 마시고 싶어요.”이에 육경한이 두유를 한잔 따라주려 했지만 소원이 입을
차가운 연고가 손에 발라지니 너무 시원했다.소원은 잠깐 정신이 흐트러져 미처 반응하지 못하고 멍하니 손가락만 쳐다봤다.육경한은 아무 말 없이 약을 발라주고는 연고가 빨리 말라 끈적이지 않게 손으로 부채질해 줬다. 소원은 그런 육경한을 보며 부모님이 생각났다.부모님도 잉꼬부부였다. 엄마는 나이가 들어서도 자주 애교를 부렸고 어디 부딪히거나 하면 바로 아빠한테 달려가 투정을 부리곤 했다. 아빠는 엄마를 공주처럼 아껴줬고 소원도 그런 화목한 가정에서 활발한 성격으로 자라나게 되었다. 사람들도 소원의 부모님이 금실이 좋다고 칭찬을 아끼지 않을 정도였다.‘하느님도 참 매정하시지...’이런 생각이 들자 육경한이 열심히 부채질해 줘도 마치 칼바람과도 같아 소원은 홱 손을 거뒀다.“됐어. 이제 다 나았어.”순간 소원이 얼음장처럼 차가워지자 육경한도 딱히 뭐라 하지 않았다. 소원이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주방에 놓아둔 해장국을 가져오며 이렇게 말했다.“마셔. 뜨겁지 않아서 먹기 좋을 거야.”육경한은 색깔이 살짝 짙은 해장국을 보며 이렇게 물었다.“네가 끓인 거야?”“아니.”소원이 고개를 저었다.“아줌마가 끓인 거야. 난 마무리만 했고.”“사실 나 안 취했어.”육경한이 뜬금없이 이렇게 말했다.“그래도 먹을 수 있어. 안에 약재가 들어 있어서 몸에 좋아.”소원이 부드럽게 타이르자 육경한도 더는 뭐라 하지 않고 해장국을 들어 원샷했다. 육경한이 그릇을 비워서야 표정이 좋아진 소원이 그릇을 건네받았다.“설거지하고 올게.”“잠깐만.”육경한이 소원을 불러세웠다.소원이 멈칫하더니 고개를 돌려 덤덤하게 말했다.“왜 그래?”“그릇 이리 줘.”육경한이 가까이 다가오자 소원이 그릇을 꽉 쥔 채 놓으려 하지 않았다.“왜 그러는데?”“뭐가 왜야?”육경한이 미간을 찌푸렸다.“화상 입어서 물 닿으면 안 되는 거 몰라?”소원이 멍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나 괜찮아.”육경한이 그릇을 빼앗아 싱크대로 걸어가더니 아주 자연스럽게 그릇을 헹궈냈다. 설거지를
소원은 서현재와 진아연을 만난 사실을 숨겼다.서현재는 이제 육연주의 남편이다. 두 사람 사이가 어떤지 모르는데 존재가 신비로운 여자까지 나타났으니 서현재에게 무슨 일이 있으면 육경한은 무조건 육연주의 편을 들 게 뻔했다. 그는 이 세상에 남아있는 가족이 적기도 했고 육연주네 가족과 인연이 꽤 깊었다.게다가 소원이 관찰한 데 의하면 육경한은 매정한 성격임에도 불구하고 육연주만큼은 아주 잘 챙겼다 아마도 육연주와 육연주의 어머니를 가족으로 생각하는 것 같았다.육경한은 소원의 말에 잠깐 침묵했다. 소원은 이런 침묵이 불편하기도 했고 육경한에 의해 침대와 벽 사이에 갇혀 있어 그의 몸에서 풍기는 술 냄새까지 맡아야 했다.“술 마셨어?”육경한이 고개를 끄덕였다.“아줌마한테 해장국 좀 끓여달라고 할게.”소원이 이렇게 말한 건 불편한 상황에서 빨리 벗어나기 위해서였다. 육경한이 알겠다고 대답하며 자리를 비키자 소원은 얼른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육경한은 그런 소원의 뒷모습을 바라보다 낮에 소종이 해줬던 말이 떠올랐다. 소종이 모은 정보로 확정할 수 있는 건 소원이 선미를 진아연으로 불렀다는 것이다.그도 진아연이 이 정도로 얼굴을 갈아엎고 나타날 줄은 몰랐다. 사실 그녀가 소원과 닮은 모습으로 나타났을 때부터 경계해야 했지만 그때는 육경한도 머리가 복잡했고 죽은 여자가 자꾸만 떠오르는 바람에 사고 능력이 떨어진 상태였다.그리고 그 진아연이 용케 살아남아 소원을 해치려 들 줄은 꿈에도 몰랐다. 다만 진아연이 소원을 해친다 해도 놀라울 건 없었다. 육경한이 사정 따윈 봐주지 않고 사지로 내몰았으니 사랑이 원망으로 변해도 이해할 수는 있었다.하지만 소종이 병원에 잠복해 관찰한 데 의하면 그렇게 단순한 아니라 진아연의 배후에 다른 누군가가 있는 것 같다고 말했다.그 배후가 도대체 누구길래 진아연을 이용해 육경한을 해치려는 건지, 게다가 그 배후는 진아연을 소원의 모습으로 성형하게 하는 것도 서슴지 않았다.진아연은 도망갈 때 아무것도 가지고 가지 않았고 모습
그렇게 소원은 병원을 나섰다. 하늘은 아직 밝았다.그녀는 곧바로 전미영과 아주머니를 보러 갔다.요즘 아주머니의 상태는 많이 좋아졌다. 눈을 깜빡이며 간단한 질문에 반응을 보일 정도였다.비록 말을 할 수는 없었지만 현재 상황은 분명 나아지고 있었다. 이는 모두 육경한 덕분이었다.그가 국내외의 유명한 전문가들을 초빙해 아주머니를 위한 최적의 치료법을 찾아냈고 그 덕에 빠르게 회복할 수 있었다.전문가들을 한자리에 모으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돈만으로 해결할 수 없는 일이었다.그중 몇몇은 이미 은퇴한 사람들이었고 평생을 전문가로 살아온 이들에게 돈은 큰 유혹이 되지 않았다.그들을 움직일 수 있는 건 오직 인간관계와 신뢰였다.육경한이 이를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는 것을 소원은 알고 있었다.소종 역시 은근히 암시를 주며 육경한의 헌신을 그녀에게 알렸다.게다가 소원의 어머니 역시, 한때는 의사들로부터 뇌사 판정을 받았던 상태에서 지금은 기적적으로 깨어났다.비록 소원을 알아보지 못했지만 살아 있다는 것만으로도 소원에게는 큰 위안이었다.과거 소원이 바다에 몸을 던지려 했을 때는 모든 것을 잃었다고 생각했었다.가족도 의지도 모든 것이 무너졌다고 느꼈다.오직 배 속의 아이만이 그녀를 붙잡았다.그때, 혹시라도 자신과 아이가 함께 죽게 될까 봐 두려워하면서도 소원은 그 상황이 어쩌면 해방일지도 모른다고 여겼다.하지만 지금은 달랐다.전미영, 유진이, 아주머니, 서현재...이제 그녀는 결코 그 누구도 포기할 수 없었다.이들은 윤혜인과는 다른 존재였다.윤혜인은 그녀가 없더라도 이준혁이 그녀를 충분히 잘 돌볼 것이었다.하지만 이 사람들은 소원이 없으면 정말 아무도 신경 써주지 않을 사람들이었다.소원은 한숨을 쉬며 속으로 생각했다.‘이제 내가 해야 할 일을 함부로 결정할 수 없게 됐네.’그녀의 삶은 점점 더 무거워졌지만 그 무거움이야말로 일종의 행복이었다.소원은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들이 여전히 살아 있다는 것에 감사했다.그녀가 별장
소원은 더 이상 돌려 말하지 않고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우리 아빠가 돌아가시기 전에 네가 안상철에게 연락한 거 맞아?”진아연의 눈빛이 잠시 흔들렸다.소원이 이미 안상철의 존재를 알아냈다는 사실은 그녀에게 예상 밖의 충격이었다.만약 소원이 안상철을 찾아낸다면 자신 역시 그 일에서 자유로울 수 없을 것이 뻔했다.왜냐하면 그녀와 안상철은 같은 배에 탄 사람들이었기 때문이다.하지만 그보다 더 무서운 것은 육경한에게 접근하라고 명령했던 그 신비로운 인물이었다.진아연은 그 인물이 시킨 일을 제대로 해내지 못했고 육경한의 신뢰를 얻지 못했다.이로 인해 받았던 처벌은 너무나도 끔찍했다.그날의 기억은 생생했다.그 신비로운 인물이 그녀의 팔에서 피를 뽑아내며 했던 말 말이다.“네가 살 수 있을지는 하늘의 뜻에 달렸어.”그는 수도꼭지를 열어 물을 천천히 흘려보내며 그녀의 팔에서 피를 한 방울씩 뽑아냈다.그렇게 피와 물이 그녀의 몸을 천천히 잠식해 갔다.만약 그날 구조가 조금이라도 늦었다면 진아연은 이미 죽었을 것이다.하지만 그녀는 소원에게 전혀 감사하지 않았다.진아연 같은 사람은 자신 이외의 누구도 중요하지 않았다.그녀는 살아남기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그 신비로운 인물이 진아연을 쉽게 놓아줄 리 없었고 그녀는 반드시 그가 시킨 일을 완수해야만 했다.진아연은 입을 열었다.목소리가 쉰 듯 갈라져 있었지만 그 안에는 단호함이 담겨 있었다.“알고 싶으면 내 부탁을 하나 들어줘야 해.”소원은 눈을 가늘게 떴다“뭔데?”진아연은 떨리는 손으로 몸에서 작은 종이봉투를 꺼내며 말했다.“이걸 육경한의 음식이나 마실 것에 넣어.”소원의 미간이 살짝 찌푸려졌다.“죽이려는 거야?”“아니야. 천천히 약화시킬 거야.”진아연은 입술을 꽉 물고 대답했고 소원은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너 그 사람 사랑하지 않았어?”“...사랑? 그런 건 이미 끝났어.”진아연의 눈빛에는 분노와 미움이 서려 있었다.그녀는 육경한이 소원과 결혼했다는
여자는 의사를 데리고 진료실로 들어가면서 서현재까지 데리고 갔다.소원은 그들이 무슨 이야기를 나누는지 듣고 싶어 따라가려 했지만 문이 단단히 닫혀 있어 아무 소리도 들을 수 없었다.어쩔 수 없이 포기한 소원은 이전에 도움을 요청했던 친구에게 메시지를 보냈다.[저번에 부탁했던 일, 소식 있어?]친구는 곧바로 답장을 보냈다.[마침 너한테 말하려고 했어. 그 여자는 무녀 가문 사람이야.”‘무녀 가문?’소원은 이 이름이 생소했다. 들어본 적도 없었고 어떤 사람들인지도 몰랐다.친구는 계속해서 메시지를 보냈다.[무녀 가문은 아주 오래된 전통을 가진 원시 부족이야. 그 부족의 무녀들은 주술과 독을 다루는 데 능숙하고 수단이 잔인해. 게다가 돈을 위해서라면 뭐든지 할 수 있는 사람들이야.]그 말에 소원의 마음속엔 좋지 않은 예감이 떠올랐다.‘현재 곁에 왜 무녀 같은 사람이 있는 거지? 서씨 가문에서 현재에게 무슨 짓을 한 건가, 아니면 다른 누군가가 현재를 노리고 있는 건가?’소원은 최근 유진이와 아주머니 일로 정신이 없어서 서현재를 제대로 신경 쓰지 못했다.더군다나 서씨 가문의 감시가 너무 엄격해서 서현재를 만날 기회조차 잡기 힘들었다.뭔가 심상치 않았다.소원은 방금 녹음한 음성을 친구에게 보내며 메시지를 남겼다.[이 대화 내용 번역해 줄 수 있어?]친구가 답장을 보냈다.[배경 소음이 너무 심해서 지금은 잘 안 들려. 무녀 가문 언어라 내가 알아듣지 못해. 우선 음질을 정리한 뒤에 언어를 이해하는 사람에게 확인해 볼게.][그래, 부탁할게.][우린 서로 그런 말 필요 없어.]이 친구는 소원이 해외에서 알게 된 사람이었다. 친구가 경제적으로 어려워 어머니의 병원비를 감당하지 못할 때 소원이 그를 도운 적이 있었다.그 이후로 친구는 소원에게 깊이 감사하며 뭔가 도움이 되고 싶어 했다.그때 한 간호사가 다가와 소원을 불렀다.“저기, 병실에 있는 분 아는 분 맞죠? 방금 깨어나셨어요.”소원은 서둘러 핸드폰을 넣고 간호사를 따라 병실로 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