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전기사가 백미러로 소원을 보며 사과했다.“손님, 죄송해요. 감기 걸렸는데 손님에게 전염될까 봐 걱정돼서요.”소원은 별생각 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더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앱으로 차를 불렀기에 가는 내내 차 안에서 하는 대화가 녹음되었고 버튼 하나만 누르면 신고할 수 있었기에 소원은 시름 놓고 뒷좌석에서 눈을 붙였다.얼마나 지났을까, 소원이 눈을 번쩍 떴다. 아까 운전기사가 통화를 하는 것 같았는데 소원이 깨어났을 땐 다시 마스크를 끼고 운전하고 있었다.소원은 꿈이라도 꾼 줄 알고 창밖을 내다봤다. 날씨가 우중충한 게 비가 내릴 것 같았다. 도로를 유심히 살피던 소원은 이상한 낌새를 눈치채고 얼른 핸드폰을 꺼내며 물었다.“기사님, 혹시 길 잘못 드신 거 아니에요?”앱을 확인해 보니 차는 이미 경로를 한참 이탈했고 아예 다른 길로 가고 있었다.“아니에요. 이 길이 더 가깝고 비용도 적게 나와요.”방금 전까지만 해도 코가 막힌 듯한 목소리던 운전기사는 지금 꽤 깔끔하고 상쾌한 목소리로 말하고 있었다.소원은 점점 한산해지는 주변 풍경을 보며 불안함이 엄습했다.“아니에요. 기사님. 지금 당장 원래 경로로 돌아가서 내비게이션 따라 운전해 주세요. 비용은 앱에 나온 대로 드릴게요.”“손님, 그러면 아까 말했어야지. 그 길 진작에 지나쳐서 다시 돌아가려면 너무 멀어요. 걱정하지 마요. 곧 도착할 거예요.”운전기사는 소원의 요구를 들어주지 않고 계속 엑셀을 밟았고 시속 120까지 올라갔다. 국도라 제한속도가 80인데 말이다.소원은 점점 마음이 불안해져 신고 버튼을 누르려는데 배터리가 닳은 핸드폰이 소리를 내며 꺼졌다. 정말 되는 일이 없는 하루였다.핸드폰이 먹통이니 소원은 다른 방법을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어딘가 이상했다. 자세히 돌이켜보니 차에 오르기 전 차량 색깔과 번호를 확인했는데 아무 문제가 없었기 때문이다.‘근데 왜 이렇게 불안한 거지?’소원은 옆에 있는 기사 카드를 발견했다. 카드에 찍힌 운전기사는 네모난 얼굴에 눈썹이 짙
”축하해요. 임신하셨습니다!”멍 때리고 있던 윤혜인 머릿속에는 오후에 의사 선생님이 했던 말만 계속 떠올랐다.그때, 조용하게 다가온 이준혁이 그녀의 볼을 살짝 꼬집으면서 물었다.“무슨 생각하는 거야?”그녀가 대답을 하기도 전에 이준혁이 그녀의 머리를 가볍게 잡으며 그녀의 입술에 키스를 퍼부었다.한참 뒤, 이준혁은 씻으러 욕실로 들어갔고 윤혜인은 온몸에 힘이 풀린 채 침대에 누워 있었다. 땀으로 젖은 머리와 글썽이는 눈망울은 조금 전에 많이 힘들었음을 설명해 주었다.겨우 숨을 고른 그녀는 서랍을 열어 임신 검사 보고서를 꺼냈다.요즘따라 계속 위에 통증을 느꼈던 윤혜인은 오늘 오후 병원에 찾아갔고 피검사를 한 결과, 의사는 그녀에게 임신 5주 차라고 얘기했다. 그 말을 들은 윤혜인은 도무지 믿어지지가 않았다. 분명 매번 안전 조치를 확실하게 취했는데.다시 돌이켜보니 저번 달에 딱 한 번, 술자리를 마친 이준혁은 그녀를 집까지 바래다준 뒤, 집 앞에서 갑자기 그녀에게 한마디 물었었다.“지금 안전하지?”그런데 안전기에도 임신할 수 있는 거구나…욕실 안에는 물소리로 가득했다. 안에 있는 남자는 2년 전에 윤혜인과 아무도 몰래 결혼한 그녀의 남편이자 그녀의 상사이기도 한 이산 그룹 대표 이준혁이다.그때 당시 술이 많이 취한 윤혜인은 뜻하지 않게 그녀의 상사와 잠자리를 가지게 되었고 마침 이준혁의 할아버지가 갑자기 병으로 쓰러지시는 바람에 이준혁은 그녀에게 가짜 결혼을 제안한 것이다. 이준혁 할아버지의 최대 소원이 손자가 하루 빨리 가정을 이루는 모습을 보는 것이었기 때문이다.두 사람은 그렇게 결혼 계약서에 사인하게 되었다. 대외적 비밀 결혼으로 언제든 종료할 수 있는 가짜 결혼이었다.그때 당시 윤혜인은 그저 너무 행복했다. 그녀는 자신이 8년 동안이나 짝사랑해온 남자와 결혼할 수 있다는 말에 고민없이 동의했던 것이다.결혼한 뒤에도 이준혁은 매일 너무 바빴다. 한달 동안 그를 볼 수 있는 시간은 일주일도 채 되지 않았다.하지만 2년 동안
윤혜인은 우유를 마시면서 핸드폰을 보고 있었다. 포털 사이트 메인 화면에는 연예 뉴스로 가득했지만 윤혜인은 이런 쪽에 관심이 없었던 터라 핸드폰을 내려놓으려 했다.그러던 중 갑자기 익숙한 이름이 보여서 그 기사를 클릭하게 되었다.기사와 함께 기재된 사진 속에서 임세희는 모자를 푹 눌러쓰고 있었고 함께 걷고 있는 남자는 흐릿한 실루엣밖에 보이지 않았지만, 한 눈에 봐도 몸매 비율은 완벽했다.사진을 확대한 윤혜인은 순간 머릿속이 하얗게 질려버렸다.사진 속 실루엣의 주인공은 다름아닌 이준혁이다!그럼 오후에 갑자기 회의를 취소하고 외출을 했던 게, 그의 전 여자친구인 임세희를 데리러 공항에 간 거란 말인가?그 순간, 윤혜인의 가슴에는 큰 돌멩이 박힌 듯 답답했고 숨도 잘 쉬어지지 않았다. 그녀는 떨리는 손으로 핸드폰을 만지다가 의도치 않게 이준혁에게 전화를 걸게 되었고 다급하게 끊으려고 했지만 상대방은 이미 전화를 받았다.“여보세요.”유난히 다정하고 부드러운 여자의 목소리였다.너무나도 깜짝 놀란 윤혜인은 바로 핸드폰을 던져버렸고 속이 울렁거리기 시작하더니 이내 참지 못하고 화장실로 달려가 구토를 했다.한참 뒤, 날이 밝아오자 윤혜인은 시간에 맞춰 회사로 출근했다.이준혁과 가짜 결혼을 한 뒤, 이준혁은 그녀가 집에 있길 원했지만 그녀는 자신의 능력으로 돈을 벌고 싶다고 했다.이준혁도 그녀의 말에 동의하긴 했지만 다른 회사가 아닌 이산 그룹에 취직해야 한다고 했고 그렇게 윤혜인은 이준혁 곁에 비서로 남아 물을 따르거나 간단한 심부름을 하는 등 소일거리 역할을 맡게 되었다.그리고 중요하고 핵심적인 비서 일은 이준혁의 수행 비서인 주훈이 도맡아 하고 있었다.회사에 윤혜인의 진짜 신분을 알고 있는 사람은 주훈밖에 없었다. 더군다나 이산 그룹의 이준혁 대표는 지금까지 계속 남자 비서만 채용했고 2년 동안 여자 비서는 윤혜인 한 명밖에 없었기에 다들 윤혜인과 회사 대표가 특
사무실 문을 열고 나온 사람은 김성훈이었다. 그는 사무실을 떠나려는 듯했다.윤혜인은 주먹을 꽉 쥐고 감정을 숨긴 뒤, 고개를 숙여 인사를 했다.“김 대표님, 안녕하세요.”그러고는 김성훈을 지나 대표 사무실로 들어갔다.고급스러운 책상 앞에 앉아있는 이준혁은 고가의 정장을 입고 있었고, 윤혜인은 단번에 이 옷이 어젯밤 그가 입고 나갔던 옷이 아니라는 것을 눈치챘다.윤혜인은 고개를 숙인 채 입을 열었다.“이 대표님, 마케팅 보고서입니다. 결재해 주세요.”이준혁은 아무런 표정의 변화도 없이 서류에 사인한 뒤 윤혜인에게 건넸고 서류를 받은 윤혜인이 사무실 밖으로 나와보니 김성훈이 여전히 사무실 입구에 서있었다.그녀의 모습이 엘리베이터 입구에서 완전히 사라지고 나서야 김성훈이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젠장, 혜인 씨가 우리 대화를 들은 거 아니야?”이준혁의 눈빛에는 그 어떤 미동도 없었다. 그는 김성훈의 말에 크게 신경 쓰지도 않았다.성격이 온순하고 착한 윤혜인은 질투 같은 걸 절대 안 한다. 그녀가 계속 지금처럼 조용하게 살아준다면 이준혁은 앞으로도 그녀에게 많은 걸 해줄 것이다.한편, 엘리베이터 안에서.윤혜인은 최대한 눈물이 흐르지 않게 고개를 높이 들었지만 어느새 눈물이 볼을 타고 흘러내리고 있었다.그녀는 2년이라는 시간이 충분할 줄 알았다. 그녀가 그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그녀가 얼마나 괜찮은 사람인지 충분히 보여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하지만 이 모든 건 그저 그녀 혼자만의 착각일 뿐이였다. 그녀가 아무리 노력해도 전 여자친구의 복귀에는 역부족이었다.엘리베이터의 문이 열리자 윤혜인이 평소와 같은 표정을 지으려고 노력했지만 얼굴은 하얗게 질려 있었다. 그녀는 비틀거리는 몸을 가까스로 가눈 채, 탕비실로 향했다.커피로 정신을 좀 맑게 하고 싶었다. 탕비실 안에서 수다를 떨고 있는 직원들의 목소리가 들렸다.“기사 봤어? 임세희 귀국했대.”“응? 그게 누군데?”“너 몰라? 임세희는 임씨 가문의 아가씨잖아. 본인도 유명한 탑급
”뭐가 그렇게 잘나서 맨날 머리 치켜들고 다니는 거야? 다들 네가 어떤 사람인지 잘 알고 있거든. 부모도 없는 잡종 주제에…”팍!송소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윤혜인이 그녀의 뺨을 강하게 내리쳤다. 송소미는 평소에 고분고분하던 윤혜인이 감히 그녀에게 손찌검을 할 줄은 상상도 못해서 순간 멍한 표정이었다.한참 뒤, 송소미가 이를 꽉 깨물며 소리를 질렀다.“너, 너 지금 감히 날 때린 거야?!”“당신에게 예의를 가르친 겁니다.”윤혜인이 싸늘한 눈빛으로 송소미를 보며 대답했다. 윤혜인은 아주 어릴 때 부모님을 잃었지만 그렇다고 절대 아무나 그녀의 부모님을 모욕하는 걸 용납할 수 없었다.송소미는 화가 나서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이준혁의 사촌 여동생인 그녀는 늘 타인의 아부를 받아왔기에 이렇게 대놓고 그녀와 맞서 싸우는 사람은 윤혜인이 처음이었다.“이 나쁜 계집애!”송소미가 미친 듯이 소리를 지르며 윤혜인에게 달려들었고 손을 뻗어 그녀의 얼굴을 할퀴려고 했지만 반응 속도가 빠른 윤혜인이 그녀의 손목을 덥석 잡은 채 송소미를 꿈쩍도 못하게 만들었다.윤혜인보다 체구가 작은 송소미는 어떻게든 윤혜인을 때리려고 발버둥을 쳤고 그 모습은 매우 추했다.화가 잔뜩 난 송소미가 욕설을 퍼붓기 시작했다.“네가 뭐라도 되는것 같아? 넌 단지 우리 준혁 오빠가 침대에서 가지고 노는 장난감일 뿐이라고! 넌 몸 파는 여자보다 더 천박해!”송소미는 갈수록 심한 욕을 입 밖에 꺼냈고 모여드는 직원도 점점 많아졌다.“지금 뭐 하는 거야!”낮게 깔린 이준혁의 목소리가 뒤에서 들렸다. 그는 사무실에서 나오자마자 난동을 부리고 있는 송소미를 발견했던 것이다.그의 등장에 순식간에 탕비실은 쥐 죽은 듯이 조용해졌다.“준혁 오빠?”송소미는 평소에도 이준혁을 조금 무서워했다. 이 사촌 오빠는 가차없는 성격이라 그녀의 어머니도 그녀에게 이준혁 앞에서는 까불지 말라고 경고했었다.하지만 조금 전에 뺨을 맞은 게 생각나자 송소미는 허리를 꼿꼿하게 펴고 벌겋게 부어오른 얼굴을
송소미는 지금 이 순간, 윤혜인을 갈기갈기 찢어버리고 싶은 마음뿐이었다.“준혁 오빠, 저 나쁜 계집애가 하는 말 좀 들어봐요. 내 얼굴을 이렇게 만들어 놓고 감히 계속 건방을 떨다니. 준혁 오빠, 저 여자 다시 불러와요! 난 오늘 화가 풀릴 때까지 저 여자를 때려야겠어요!”이준혁은 가녀린 윤혜인의 뒷모습을 보며 표정이 점점 어두워졌다.“적당히 해.”이준혁이 차갑게 대꾸했다.평소에도 독하기로 소문난 송소미는 이준혁이 조금 전에도 윤혜인의 편을 들지 않았기에 이준혁에게 별로 중요하지 않은 사람이라고 확신했다.그녀는 이를 악물며 윤혜인의 뒷모습을 죽일 듯이 노려보았다.“다음에는 사람 불러서 저 여자 얼굴을 갈기갈기 찢어버릴 거예요!”“송소미!”이준혁이 실눈을 살짝 뜬 채 송소미를 쳐다보았고 송소미는 그 눈빛에 순간 소름이 쫙 돋았다.“딱 한 번만 얘기할게. 네 머릿속에 있는 꿍꿍이를 접어. 저 여자 건드리지 마.”송소미는 어마어마한 압박감에 숨조차 제대로 쉴 수가 없었기에 마음속에서 들끓던 복수심을 도로 삼킬 수 밖에 없었다.“알, 알겠어요…”이준혁이 싸늘한 표정으로 송소미를 힐끗 쳐다보다가 탕비실을 떠나면서 곁에 있던 주훈에게 명령을 내렸다.“앞으로 연관 없는 외부인은 회사에 들이지 못하게 해.”이준혁의 말 뜻을 이해하지 못한 송소미는 그의 뒤에서 계속 아부를 떨었다.“준혁 오빠 이렇게 큰 회사에 그런 명확한 규칙은 있어야 돼요.” 하지만 잠시뒤, 주훈이 그녀에게 다가가 손을 뻗으며 말했다.“송소미 씨, 이만 나가주세요.”송소미는 그제야 그녀가 바로 그 연관 없는 외부인이었다는 걸 깨닫게 되었고 단호하게 떠나는 이준혁을 쫓아가고 싶었지만 주훈이 부른 경호원에게 잡혀 밖으로 질질 끌려 나갔다.송소미가 아무리 발악을 하고 발버둥을 쳐도 경호원들은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한편, 자리로 돌아온 윤혜인은 깨끗한 옷으로 갈아 입었고 차가운 이준혁의 얼굴이 생각나자 마음이 아팠다.어느새 퇴근 시간이 되었고, 회사를 나서려던 윤혜인 앞에
이준혁의 건장한 실루엣이 점점 가까워지다가 한 치의 머뭇거림도 없이 윤혜인을 그대로 스쳐갔다.그녀를 보지 못한 건지 아니면 못 본 척하는 건지는 알 수 없지만 윤혜인은 이준혁 품에 안겨 있던 여자의 얼굴을 정확하게 보았다. 그녀는 바로 얼마 전에 기사가 났던 임세희였다.윤혜인은 무거운 걸음으로 병원을 떠났다.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택시에 탄 윤혜인은 여전히 멍한 표정이었고 목적지를 묻는 택시 기사의 말에 그녀는 순간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몰랐다.그녀는 스카이 별장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어쩌면 거긴 이제 곧 그녀의 집이 아니게 될지도 모르니까.한참 고민하던 윤혜인이 택시 기사에게 말했다.“기사님, 청월 아파트로 가주세요.”청월 아파트는 윤혜인이 이준혁과 결혼하고 나서 구매한 집이었다. 그때 당시 그녀는 할머니를 서울로 모셔오기 위해 할부로 산 20평 남짓한 아파트였다. 집이 크지는 않았지만 할머니와 둘이서 살기에는 충분했다.그녀를 이해할 수 없었던 이준혁이 큰 별장을 하나 사주겠다고 했지만 윤혜인이 거절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때 그 결정이 그녀가 지금까지 한 일들 중에서 가장 잘한 일이다.아파트 단지에 도착한 윤혜인은 택시에서 내린 뒤, 바로 올라가지 않고 아파트 공원에 앉아 정신이 맑아질 수 있도록 잠시 바람을 쐬었다.지난 2년의 시간을 돌이켜보면, 달콤했던 순간도 있었고 서럽고 마음이 아팠던 때도 있었다.2년, 700일이 넘는 낮과 밤들, 그 마음이 아무리 얼음으로 만들었다고 해도 이 시간이면 충분히 녹았을 텐데, 지금 그녀의 귓가에는 비웃음 소리만 들렸다.그 소리들은 그녀에게 이 모든 게 그녀 혼자만의 착각이라고 비웃고 있었다.어둠이 깃들고 나서야 윤혜인이 아파트 안으로 들어갔고 엘리베이터에서 나오자마자 문 앞에 기대고 서있는 이준혁을 발견했다.옷소매를 거둔 이준혁은 넥타이를 느슨하게 풀어서, 기다란 목과 섹시한 쇄골을 보일 듯 말 듯하게 드러냈다. 윤혜인은 흠칫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는 지금쯤 병원에서 임세희와 함께 하고
윤혜인이 가까스로 억지웃음을 보였지만 마음은 너무 아팠다. 누군가가 그녀의 심장을 갈기갈기 찢고 있는 것 같았다.“관계? 윤혜인, 네가 보기엔 우리가 어떤 관계 같은데?”이준혁이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차갑게 웃었고 이 남자의 질문에 윤혜인은 심장이 멎는 듯했다. 그렇다, 처음부터 이준혁의 태도는 확실했다. 두 사람은 계약 결혼으로 절대 사사로운 감정을 나누지 않기로 했다. 그리고 다른 사람 눈에 그들은 단지 직원과 상사의 관계였다.이준혁은 여전히 서울에서 가장 핫한 골든 싱글이었고, 그와 결혼하고 싶은 규수들은 줄을 설 정도였다.이준혁이 이렇게 묻는 건 그녀에게 절대 달라붙지 말라고 얘기인가?아랫입술을 꽉 깨문 윤혜인이 씁쓸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죄송합니다, 이 대표님. 제가 괜한 걱정을 했네요. 이만 돌아가세요. 그리고 앞으로 다시는 청월 아파트에 오지 마세요.”말을 끝낸 윤혜인은 끝내 참지 못하고 눈시울을 붉히고 말았다.10년 동안이나 사랑한 남자인데 슬프지 않을 수가 없지만 아무리 마음이 아파도 그녀는 손을 놓을 준비를 해야 했다.계속 사람들의 웃음거리로 살 수는 없었다.복도의 센서등이 꺼지고 켜졌다를 반복했고 이준혁은 실눈을 뜬 채 입술을 살짝 오므렸다.온몸에서는 위험하다는 시그널을 뿜어내고 있었다. 이준혁은 윤혜인의 투정을 받아줄 수가 있지만 이번에는 실로 선을 넘은 것이다!타오르던 분노는 윤혜성의 글썽거리는 눈망울을 본 순간, 사르르 녹아버렸고 낮게 깔린 목소리로 말을 건넸다.“혹시 송소미 때문이라면…”“그 여자랑 상관없어요. 이 대표님, 그만 돌아가세요.”두 사람 사이를 막고 있는 건 송소미 한 사람뿐만은 아니다.하루 종일 너무 힘들었던 윤혜인은 이준혁을 지나쳐서 문을 열고 집안으로 들어가려고 했다.억지를 부리는 윤혜인 때문에 기분이 언짢아진 이준혁은 넥타이를 거칠게 풀어헤치더니 앞으로 한 걸음 다가가 윤혜인의 손을 덥석 잡았다.“억지 그만 부려.”이준혁이 눈살을 확 찌푸리더니 윤혜인을 돌려세운 뒤, 그
운전기사가 백미러로 소원을 보며 사과했다.“손님, 죄송해요. 감기 걸렸는데 손님에게 전염될까 봐 걱정돼서요.”소원은 별생각 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더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앱으로 차를 불렀기에 가는 내내 차 안에서 하는 대화가 녹음되었고 버튼 하나만 누르면 신고할 수 있었기에 소원은 시름 놓고 뒷좌석에서 눈을 붙였다.얼마나 지났을까, 소원이 눈을 번쩍 떴다. 아까 운전기사가 통화를 하는 것 같았는데 소원이 깨어났을 땐 다시 마스크를 끼고 운전하고 있었다.소원은 꿈이라도 꾼 줄 알고 창밖을 내다봤다. 날씨가 우중충한 게 비가 내릴 것 같았다. 도로를 유심히 살피던 소원은 이상한 낌새를 눈치채고 얼른 핸드폰을 꺼내며 물었다.“기사님, 혹시 길 잘못 드신 거 아니에요?”앱을 확인해 보니 차는 이미 경로를 한참 이탈했고 아예 다른 길로 가고 있었다.“아니에요. 이 길이 더 가깝고 비용도 적게 나와요.”방금 전까지만 해도 코가 막힌 듯한 목소리던 운전기사는 지금 꽤 깔끔하고 상쾌한 목소리로 말하고 있었다.소원은 점점 한산해지는 주변 풍경을 보며 불안함이 엄습했다.“아니에요. 기사님. 지금 당장 원래 경로로 돌아가서 내비게이션 따라 운전해 주세요. 비용은 앱에 나온 대로 드릴게요.”“손님, 그러면 아까 말했어야지. 그 길 진작에 지나쳐서 다시 돌아가려면 너무 멀어요. 걱정하지 마요. 곧 도착할 거예요.”운전기사는 소원의 요구를 들어주지 않고 계속 엑셀을 밟았고 시속 120까지 올라갔다. 국도라 제한속도가 80인데 말이다.소원은 점점 마음이 불안해져 신고 버튼을 누르려는데 배터리가 닳은 핸드폰이 소리를 내며 꺼졌다. 정말 되는 일이 없는 하루였다.핸드폰이 먹통이니 소원은 다른 방법을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어딘가 이상했다. 자세히 돌이켜보니 차에 오르기 전 차량 색깔과 번호를 확인했는데 아무 문제가 없었기 때문이다.‘근데 왜 이렇게 불안한 거지?’소원은 옆에 있는 기사 카드를 발견했다. 카드에 찍힌 운전기사는 네모난 얼굴에 눈썹이 짙
소원은 이번 달에 두 번이나 반차를 냈다. 다른 직원도 한 달에 겨우 2날 반 정도만 반차를 낼 수 있었기에 소원도 민망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다행히 영숙은 어머니의 상황이 좋지 않다는 소원의 말을 듣고 조심해서 다녀오라는 말만 덧붙였다. 소원은 얼른 기사에게 방향을 돌려 요양원으로 향하라고 했다.요양원에 도착한 소원을 보고 간병인 아줌마가 무척 놀라며 물었다.“소원 씨, 어쩐 일이에요?”소원은 침대에 조용히 누워있는 전미영을 보고 한시름 놓더니 이렇게 말했다.“요양원에서 상태가 좋지 않다고 연락이 와서요.”“괜찮아요. 사모님 오후에 약간의 경련이 있긴 했지만 오래 지속되진 않았어요. 주사를 맞고 지금까지 쭉 안정적이에요.”간병인 아줌마가 소원을 다독였다.“소원 씨, 너무 걱정하지 마요.”“다행이네요.”소원이 침대맡으로 다가가 앉았다. 중도에 잠깐 깨긴 했지만 전미영은 여전히 소원을 보고도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매주 보러 와도 전미영은 소원을 알아보는 법이 없었기에 소원도 이제 적응했다. 언젠가 육경한이 전미영을 보러 온 적이 있는데 육경한을 보고는 매우 즐겁게 반겨줬다. 소원을 대할 때 느껴지는 거리감만 보면 오히려 육경한이 친자식 같기도 했다.소원도 이 일에 관해 의사에게 물어본 적이 있지만 의사는 전미영이 깨어나자마자 본 사람이 육경한이라 육경한에게 익숙함과 신뢰감을 느낀다고 했고 별다른 방법이 없는 상황에서는 거부감을 느끼지 않는 사람을 만나는 게 몸 상태를 완화하는 데 도움이 될 거라고 말해줬다.게다가 애초에 전미영을 보살피는 일은 육경한이 전부 책임졌기에 무턱대고 육경한을 쫓아낼 수도 없었다. 그저 육경한이 문병 오는 시간을 피해 오는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육경한은 일이 바빴기에 소원을 보러 오는 일이 드물어 그렇게 걱정할 필요는 없었다.간병인 아줌마는 소원이 어딘가 피곤해 보이자 이렇게 말했다.“소원 씨, 얼른 들어가 쉬어요. 출근하느라 피곤해서 그런 거 아니에요? 멀리서 사는 걸로 알고 있는데 문병 온지 얼마나 됐다고
집사는 일 처리를 마치고 서현재의 핸드폰을 서진태에게 바쳤다.“도련님 핸드폰 아까부터 계속 울리고 있습니다. 소원이라는 여자가 계속 찾는 것 같은데 뭘 알고 있는 게 아닌지 의심됩니다. 처리할까요?”집사는 피도 눈물도 없는 사람이었고 일 처리가 깔끔한 편이라 서진태의 신임을 받고 있었다. 서진태는 쉴 새 없이 날아드는 부재중 전화와 메시지에 하얗게 센 눈썹을 찡그렸다.“이 여자가 정말...”서진태가 수염을 만지작거리며 말했다“육경한 그 자식이 무슨 뜻인지 모르겠네. 이 여자를 죽이든 풀어주든 일단 육경한의 생각부터 파악해야 해.”서진태는 겉으로만 육경한에게 공손했지 속으로는 죽일 듯이 미워했다. 서현재를 빌미로 서씨 가문을 여러 번이나 물고 늘어졌지만 목숨 따위 아까워하지 않을 정도로 실력이 강했고 외국에서 레전드로 남을만한 경험을 쌓은 덕분에 이 바닥에서 명성을 널리 날린 터라 서씨 가문도 함부로 건드릴 엄두를 내지 못했다. 서씨 가문은 아직 지켜야 할 사람이 있었다.하지만 집사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들이 세운 계획에 위협이 되는 사람이라면 백 명의 억울한 사람을 만들더라도 상관없다고 생각했다.“어르신, 이 여자는 폭탄이나 마찬가지예요. 그러다 결혼식에 차질이라도 생기면 그땐 육씨 가문과 원수를 질뿐더러 도련님을 휘두를 핑계가 없어지는 거잖아요. 모든 일이 난장판이 될 거라고요.”충성심이 하늘을 찌르는 집사는 사실 서진태가 동의하든 하지 않든 소원을 제거해 서씨 가문 후계자 자리에 위협이 되는 사람은 모조리 제거할 생각이었다. 당연히 집사가 생각하는 후계자는 서현재가 아니었다.선동당한 서진태는 집사의 말이 맞다고 생각했다. 이 여자는 정말 폭탄과도 같은 존재였다. 서현재도 이 여자를 위해 여러 번 서진태의 뜻을 거스른 적이 있기에 미래를 대비해 소원을 제거하는 편이 나을 것 같다고 생각했다.서진태가 집사에게 귀띔했다.“사람 보내서 쥐도 새도 모르게 처리해. 인신매매 업자에게 팔아도 좋으니까 최대한 깔끔하게 처리해야 할 거야. 절대
“요즘 바빠?”윤혜인이 물었다.“음... 조금.”소원의 대답은 거짓말이기도, 거짓말이 아니기도 했다. 클럽 일은 확실히 바빴다. 낮에는 잠을 보충하고 저녁에 나가서 새벽까지 일해야 하니 개인 시간이 별로 없었다. 어머니 전미영을 보러 갈 때도 퇴근하고 바로 가야 했기에 약간 피곤하기도 했다.그리고 이 일에 윤혜인을 끌어들이고 싶지 않았다. 세 아이를 케어해야 하니 생각보다 많이 힘들 것이다. 게다가 육경한은 유진의 친부니 이준혁이 개입한다 해도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고 결국 혼자 힘으로 이겨내야 했다.“그래. 나도 요즘 애가 어려서 모임을 줄였어. 애들이 조금 더 크면 아름이까지 데리고 너랑 유진이 보러 갈게.”“그래.”소원은 딱히 다른 설명을 붙이지 않고 웃으며 대답했다.“유진이랑 잘 지내고 있어.”윤혜인이 말했다.“그래. 꼭 그럴게.”전화를 끊고 나서도 소원은 윤혜인이 했던 말을 떠올렸다. 잘 지내라는데 유진이 육경한과 과연 잘 지낼 수 있을지 의문이었다.육경한 혼자라면 소원도 포기했을지 모른다. 소원의 몸 상태로는 유진의 곁을 오래 지키지 못할 수도 있다. 육경한 옆에 있으면 어느 날 소원이 바람처럼 사라진다 해도 부모님이 없는 것보다는 나을 것이다.하지만 소원은 방민아를 믿을 수가 없었다. 방민아는 사악한 속내를 숨기는데 능했기에 결혼해서 아이라도 가지면 유진을 눈엣가시로 생각하고 제거하려 할지도 모른다. 하여 소원은 더 포기할 수 없었다. 유진이 표적이 되는 건 절대 두고 볼 수 없었다.얼마 지나지 않아 윤혜인이 서현재의 개인 번호를 보내왔다. 소원이 얼른 전화를 걸었지만 받는 사람이 없었다. 다시 한번 걸어도 받지 않자 소원은 어쩔 수 없이 메시지를 보냈다.[서현재 씨, 나 소원이에요. 보면 회신해요. 긴히 해야 할 말이 있어요.]메시지를 보냈지만 한참 동안 지나도 답장이 없었다. 소원은 마음이 점점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3일 뒤면 결혼인데 그때 가서 서씨 가문의 통제를 벗어나려면 더 힘들어지게 된다. 게다가 서씨 가문은
옆에 있던 사람이 좋다고 손뼉을 쳤다.“그래. 그래. 욕을 바가지로 먹어야 정신을 차리지. 인플루언서가 된 느낌이 어떤 건지 알려주자.”순간 구경하던 직원들이 일제히 핸드폰을 꺼내 소원의 얼굴을 찍으며 욕설을 퍼부었다.육연주는 이런 상황이 참 마음에 들었다. 꼬리 치길 좋아하는 소원을 인터넷에 폭로해 얼마나 뻔뻔한 사람인지 세간에 알리는 것도 좋을 것 같았다.소원은 어떻게 해명해야 할지 몰랐다. 사람들 눈에 육연주는 서현재의 와이프였고 서씨 가에서 인정한 며느릿감이었지만 소원은 아무 명분이 없었다. 그런 소원이 서한 그룹까지 찾아왔으니 이상하게 생각할 만도 했다.하지만 소원은 서현재가 소용돌이에 휘말리는 걸 두고 볼 수 없었다. 게다가 서씨 가문에서 육연주를 고른 건 다 이유가 있었다. 육연주는 공부라곤 해본 적이 없는 여자라 금융은 일절 몰랐기에 서한 그룹의 경영에 간섭할 일이 없었다. 그리고 육연주는 육씨 가문 사람이라 무슨 일이 있어도 언제든 발을 뺄 수 있었다.“육연주 씨, 서현재와 얘기 나누러 온 것뿐인데 뭐가 방해된다고 그래요.”소원은 여전히 포기할 생각이 없어 보였다. 육연주는 화가 치밀어오른 나머지 가방을 들어 소원에게 던졌다.“정말 여간 뻔뻔한 게 아니네요. 이런 수모를 겪어도 그런 말이 나와요?”소원이 옆으로 쓱 비키며 공격을 피했지만 육연주는 소원을 놓아줄 생각이 없었고 보디가드를 불러 소원을 끌어냈다.“빌어먹을 년.”육연주는 소원이 끌려 나가는 걸 보고도 여전히 분이 풀리지 않았다.벌건 대낮만 아니었으면 정말 소원을 때려죽이고 싶었지만 결혼이 코앞이라 손에 피를 묻힐 수 없으니 여기서 멈췄지 아니면 정말 때려죽였을지도 모른다.“거기.”육연주가 데스크 직원들을 매섭게 쏘아보더니 경고했다.“오늘 일 현재 씨 귀에 들어가는 날엔 당신들부터 해고할 거야.”육연주는 이미 서한 그룹의 사모님이라도 된 것처럼 행동했다. 데스크 직원들은 육연주가 언젠간 서씨 가문 안주인이 될 거라는 걸 알고 있었기에 그저 눈치만 볼 뿐 대꾸
‘기억을 잃었다고 하면 과연 믿어줄까?’소원은 서현재가 기억을 잃었을 뿐이지 이성을 잃은 건 아니라고 생각했다. 의심이 든 순간 조사할 것이고 얼마 지나지 않아 서진태의 음모를 알아차릴 것이다.서진태가 무슨 꿍꿍이인지 알기만 해도 서진태를 경계할 수 있으니 너무 끌려다니진 않을 것이다.그때 뒤에서 한 여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소원 씨?”소원이 고개를 돌렸다.찰싹.소원은 여자가 날리는 귀싸대기를 제대로 맞아 귀가 제대로 들리지 않을 지경이었다.여자가 포기하지 않고 귀싸대기를 더 날리려는데 소원이 얼른 손을 낚아챘다. 그러자 여자가 오만하게 데스크 직원에게 명령했다.“서서 보고만 있을 거예요? 얼른 잡고 때려요.”데스크 직원이 넋을 잃었다.비서실에 전화를 넣을 때 미래의 사모님도 함께 있을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다. 비서가 사람을 일단 남겨두라고 하자 데스크 직원은 소원이 말한 것처럼 서현재와 아는 사이라고 생각했는데 지금 보니 그렇게 간단하지만은 않은 것 같았다. 아마도 전 여자 친구거나 떨어지지 않고 질척거리는 외간 여자 같았다.소원은 그제야 내려온 사람이 육연주임을 알아봤다.데스크 직원이 다가와 도와주려는데 육연주가 귀싸대기를 두 방 날렸다.“일을 왜 이따위로 해요? 회사에 누굴 들이고 누굴 들이지 말아야 할지 몰라요?”데스크 직원이 얼굴을 감싸 쥔 채 억울한 표정을 지었다. 위에서 지시한 대로 했을 뿐인데 이런 수모를 겪을 줄은 몰랐다.육연주는 그저 데스크 직원을 이용해 기선을 제압하여 미래의 서한 그룹 사모님이 누군지 알려주려 했다. 선제공격이 제일 타격감이 큰 편이다. 육연주는 오늘 모든 사람에게 서현재의 와이프가 얼마나 대단한 사람인지 보여주고 싶었다. 그래야 앞으로 감히 서현재를 넘볼 사람이 없을 것이다.“소원 씨, 도대체 뭐 하자는 거예요? 내가 그날 분명히 경고했죠. 현재 씨 유혹할 생각하지 말라고. 그런데 회사까지 찾아와요? 정말 너무 뻔뻔하네요.”육연주가 허리춤에 손을 올리고 퉁명스럽게 말했다.소원은 볼이
소원은 외교팀에서 같이 일하던 동료에게 전화했다. 외국인이라 인맥이 매우 넓었기에 서씨 가문의 일을 조사하는 건 아주 쉬운 일이었다.서씨 가문이 밖에 새로운 회사를 설립했는지, 그리고 맏며느리가 임신했는지만 확인하면 아까 들은 내용이 사실인지 아닌지 알 수 있었다.소원은 사실 서현재가 기억을 잃은 게 어찌 보면 행운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적어도 서씨 가문에서 서현재를 해치지 않고 다리까지 고쳐줬으니 말이다.하지만 지금 그 모든 걸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만약 이 모든 게 진실이라면 서씨 가문은 제일 큰 악마 소굴이었기에 빨리 서씨 가문에서 도망쳐야 했다.불안한 마음을 안고 며칠이나 기다렸지만 조이는 소식을 전해오지 않았다. 한시름 놓고 그들이 술에 취해 헛소리한 거라고 생각하려는데 조이가 소식을 보내왔다.“소원, 전에 말했던 거 조사해 봤는데 확실히 새로운 회사를 설립했더라고요. 서씨 가문 맏며느리도 회사 관리에 참여했고 얼마 전에 쌍둥이를 낳았대요.”모든 게 들어맞았다. 소원은 머리를 세게 두들겨 맞은 것처럼 멍했다.서현재가 자신을 벗어나 원하던 삶을 살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더 큰 위험이 도사리고 있을 줄은 몰랐다. 서씨 가문이 서현재를 이용하려 한다면 서현재는 반드시 도망쳐야 한다.소원은 영숙에게 반차를 올리고 차를 잡아 서현재가 있는 회사로 향했다. 서현재의 번호가 없어 가는 내내 마음이 불안했다. 차가 서한 그룹에 도착하자 소원은 바로 데스크로 뛰어갔다.“안녕하세요. 서현재 씨를 만나려고 왔어요.”“안녕하세요. 예약은 하셨나요?”데스크 직원이 물었다.“아니요.”소원이 고개를 저었다.“죄송합니다. 예약하지 않고서는 만날 수 없습니다.”데스크 직원이 말했다.“저 서 대표님과 친구예요. 전화해서 소원이 급한 일로 찾아왔다고 잠깐 내려오라고 하면 돼요.”“죄송합니다. 예약한 손님만 접대하는 게 저희 원칙입니다. 더 도와줄 수 있는 건 없을 것 같네요.”데스크에서 바로 거절했다. 작은 회사에서 이런저런 방법을 찾아 서현재를
“우리 아빠가 말해준 거야. 외국에서 장사할 때 서씨 가문과 접점이 있었는데 우연히 서씨 가문 사람을 만나서 물어본 거래. 그래도 함부로 외부에 알리지는 마. 나도 어르신에게 밉보이긴 싫거든. 무서운 사람 같아.”“나도 알아... 걱정하지 마. 나까지만 아는 걸로 하고 절대 외부로 얘기하지 않을게.”소원은 서씨 가문에 이런 비밀이 있을 줄 몰랐다. 역시 소원의 직감이 맞았다. 서진태는 서현재를 사랑하지 않을뿐더러 서현재가 죽든 말든 신경 쓰지 않는 것 같았다.저번에 직접 사람을 불러 서현재의 다리를 못 쓰게 만든 것만 봐도 서진태가 서씨 가문의 일원인 서현재를 전혀 관심하지 않는다는 걸 알 수 있었다.만약 위층에서 토론한 내용이 사실이라면 서진태가 그동안 행동과 어느 정도 맞았지만 희생양이 된 서현재가 너무 위험했다.소원이 이마를 부여잡았다. 저녁을 먹지 않아서 그런지 머리가 너무 어지러웠고 다리에 힘이 풀려 얼른 벽을 붙잡고 서는데 어쩔 수 없이 소리가 났다. 위층에 있던 사람들이 소리를 듣고 바로 신경을 곤두세웠다.“거기 누구예요?”소원은 심장이 목구멍까지 올라와 움직일 엄두를 내지 못했다. 한 걸음만 앞으로 나아가면 위에서 보일지도 모른다. 토론자 중 한 명이 아래로 머리를 내밀며 이렇게 말했다.“내가 여기서 보고 있을 테니까 빨리 아래 내려가서 봐봐.”소원은 정말 당장이라도 심장이 멎을 것 같았다. 계단을 내려오는 소리가 들리자 이제 납작 없이 잡힐 것이다. 도망간다고 해도 복도 CCTV만 조사하면 누가 엿들었는지 다 조사할 수 있을 것이다.야옹.그때 가냘픈 고양이의 울음소리가 들렸다. 어둠 속에서 온몸이 눈덩이처럼 하얀 고양이가 기어 나오더니 우아하게 앞으로 걸어가며 연신 야옹거리며 울부짖었다.위에서 내려다보던 사람이 고양이를 발견하고는 계단을 내려가는 사람을 불러세웠다.“됐어. 고양이가 낸 기척이었어.”계단을 내려오던 사람이 걸음을 멈추더니 다시 위로 올라가며 말했다.“내가 그랬잖아. 이 시간에 여기로 걷는 사람이 없다고.
영숙은 차갑게 말했다.“그 셋은 네가 감당할 수 있는 상대가 아니야. 참을 수 있으면 참아. 아니면 피하든가. 그렇지 않으면 무슨 일이 터져도 내가 대신 해결해줄 일은 없을 거야!”소원은 바보가 아니었는지라 영숙의 말 속에 담긴 선의를 금세 알아챘다.다음에 또 그 셋을 마주친다면 아프다고 핑계를 대고 결근하는 것도 방법이라는 생각이 들었다.이처럼 서로 계산만 가득한 곳에서 같은 여성이 보여주는 호의는 그녀에게 작지 않은 감동으로 다가왔다.소원은 영숙을 향해 미소 지으며 말했다.“알겠습니다, 언니. 절대 폐 끼치는 일 없을 거예요.”소원이 미소 짓는 것을 보고 영숙은 잠시 멍해 하더니 어딘가 어색한 듯 담배를 끄며 고개를 돌렸다.그러고는 자리를 떠나면서 넌지시 말했다.“미친 거 아니야? 너 도와주는 거 아니라니까.”소원은 영숙이 떠난 후에도 입가에 옅은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이제 그녀는 확신할 수 있었다. 영숙은 선한 사람이었다.그녀가 왜 자신을 돕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진심과 가식은 구분할 수 있었다.그렇게 씻고 나서 소원은 다시 밖으로 나왔다.걸어가던 중에도 머릿속은 온통 서현재에 대한 생각으로 가득 차 있었다.‘정말 현재가 행복해질 수 있을까? 이번 기억 상실이 현재에게 축복일까, 아니면 불행일까?’만약 기억을 잃지 않았다면 서현재는 분명 싸울 것이었다.서씨 가문의 결혼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고 그들의 통제에도 절대 굴복하지 않았을 것이다.그녀는 어두운 복도를 따라 걸으며 뒤편 문 근처에 도착했다.그 순간, 2층 창문 쪽에서 들려오는 두 사람의 대화가 들렸다.희미하게 들리던 대화 속에 ‘서씨 가문’이라는 단어가 언급되자 소원은 멈춰 서서 조용히 그들의 이야기를 엿듣기로 했다.“서씨 가문에서 요즘 그 사생아를 꽤 중시하는 것 같더라.”“사생아라니? 그 자식은 사생아보다도 더 낮은 존재야. 사생아조차도 못 되는 잡종이지.”“야, 그런 말 하면 큰일 난다. 서씨 가문 어르신이 그 사람을 중히 여긴다는데... 네가 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