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원은 외교팀에서 같이 일하던 동료에게 전화했다. 외국인이라 인맥이 매우 넓었기에 서씨 가문의 일을 조사하는 건 아주 쉬운 일이었다.서씨 가문이 밖에 새로운 회사를 설립했는지, 그리고 맏며느리가 임신했는지만 확인하면 아까 들은 내용이 사실인지 아닌지 알 수 있었다.소원은 사실 서현재가 기억을 잃은 게 어찌 보면 행운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적어도 서씨 가문에서 서현재를 해치지 않고 다리까지 고쳐줬으니 말이다.하지만 지금 그 모든 걸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만약 이 모든 게 진실이라면 서씨 가문은 제일 큰 악마 소굴이었기에 빨리 서씨 가문에서 도망쳐야 했다.불안한 마음을 안고 며칠이나 기다렸지만 조이는 소식을 전해오지 않았다. 한시름 놓고 그들이 술에 취해 헛소리한 거라고 생각하려는데 조이가 소식을 보내왔다.“소원, 전에 말했던 거 조사해 봤는데 확실히 새로운 회사를 설립했더라고요. 서씨 가문 맏며느리도 회사 관리에 참여했고 얼마 전에 쌍둥이를 낳았대요.”모든 게 들어맞았다. 소원은 머리를 세게 두들겨 맞은 것처럼 멍했다.서현재가 자신을 벗어나 원하던 삶을 살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더 큰 위험이 도사리고 있을 줄은 몰랐다. 서씨 가문이 서현재를 이용하려 한다면 서현재는 반드시 도망쳐야 한다.소원은 영숙에게 반차를 올리고 차를 잡아 서현재가 있는 회사로 향했다. 서현재의 번호가 없어 가는 내내 마음이 불안했다. 차가 서한 그룹에 도착하자 소원은 바로 데스크로 뛰어갔다.“안녕하세요. 서현재 씨를 만나려고 왔어요.”“안녕하세요. 예약은 하셨나요?”데스크 직원이 물었다.“아니요.”소원이 고개를 저었다.“죄송합니다. 예약하지 않고서는 만날 수 없습니다.”데스크 직원이 말했다.“저 서 대표님과 친구예요. 전화해서 소원이 급한 일로 찾아왔다고 잠깐 내려오라고 하면 돼요.”“죄송합니다. 예약한 손님만 접대하는 게 저희 원칙입니다. 더 도와줄 수 있는 건 없을 것 같네요.”데스크에서 바로 거절했다. 작은 회사에서 이런저런 방법을 찾아 서현재를
‘기억을 잃었다고 하면 과연 믿어줄까?’소원은 서현재가 기억을 잃었을 뿐이지 이성을 잃은 건 아니라고 생각했다. 의심이 든 순간 조사할 것이고 얼마 지나지 않아 서진태의 음모를 알아차릴 것이다.서진태가 무슨 꿍꿍이인지 알기만 해도 서진태를 경계할 수 있으니 너무 끌려다니진 않을 것이다.그때 뒤에서 한 여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소원 씨?”소원이 고개를 돌렸다.찰싹.소원은 여자가 날리는 귀싸대기를 제대로 맞아 귀가 제대로 들리지 않을 지경이었다.여자가 포기하지 않고 귀싸대기를 더 날리려는데 소원이 얼른 손을 낚아챘다. 그러자 여자가 오만하게 데스크 직원에게 명령했다.“서서 보고만 있을 거예요? 얼른 잡고 때려요.”데스크 직원이 넋을 잃었다.비서실에 전화를 넣을 때 미래의 사모님도 함께 있을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다. 비서가 사람을 일단 남겨두라고 하자 데스크 직원은 소원이 말한 것처럼 서현재와 아는 사이라고 생각했는데 지금 보니 그렇게 간단하지만은 않은 것 같았다. 아마도 전 여자 친구거나 떨어지지 않고 질척거리는 외간 여자 같았다.소원은 그제야 내려온 사람이 육연주임을 알아봤다.데스크 직원이 다가와 도와주려는데 육연주가 귀싸대기를 두 방 날렸다.“일을 왜 이따위로 해요? 회사에 누굴 들이고 누굴 들이지 말아야 할지 몰라요?”데스크 직원이 얼굴을 감싸 쥔 채 억울한 표정을 지었다. 위에서 지시한 대로 했을 뿐인데 이런 수모를 겪을 줄은 몰랐다.육연주는 그저 데스크 직원을 이용해 기선을 제압하여 미래의 서한 그룹 사모님이 누군지 알려주려 했다. 선제공격이 제일 타격감이 큰 편이다. 육연주는 오늘 모든 사람에게 서현재의 와이프가 얼마나 대단한 사람인지 보여주고 싶었다. 그래야 앞으로 감히 서현재를 넘볼 사람이 없을 것이다.“소원 씨, 도대체 뭐 하자는 거예요? 내가 그날 분명히 경고했죠. 현재 씨 유혹할 생각하지 말라고. 그런데 회사까지 찾아와요? 정말 너무 뻔뻔하네요.”육연주가 허리춤에 손을 올리고 퉁명스럽게 말했다.소원은 볼이
옆에 있던 사람이 좋다고 손뼉을 쳤다.“그래. 그래. 욕을 바가지로 먹어야 정신을 차리지. 인플루언서가 된 느낌이 어떤 건지 알려주자.”순간 구경하던 직원들이 일제히 핸드폰을 꺼내 소원의 얼굴을 찍으며 욕설을 퍼부었다.육연주는 이런 상황이 참 마음에 들었다. 꼬리 치길 좋아하는 소원을 인터넷에 폭로해 얼마나 뻔뻔한 사람인지 세간에 알리는 것도 좋을 것 같았다.소원은 어떻게 해명해야 할지 몰랐다. 사람들 눈에 육연주는 서현재의 와이프였고 서씨 가에서 인정한 며느릿감이었지만 소원은 아무 명분이 없었다. 그런 소원이 서한 그룹까지 찾아왔으니 이상하게 생각할 만도 했다.하지만 소원은 서현재가 소용돌이에 휘말리는 걸 두고 볼 수 없었다. 게다가 서씨 가문에서 육연주를 고른 건 다 이유가 있었다. 육연주는 공부라곤 해본 적이 없는 여자라 금융은 일절 몰랐기에 서한 그룹의 경영에 간섭할 일이 없었다. 그리고 육연주는 육씨 가문 사람이라 무슨 일이 있어도 언제든 발을 뺄 수 있었다.“육연주 씨, 서현재와 얘기 나누러 온 것뿐인데 뭐가 방해된다고 그래요.”소원은 여전히 포기할 생각이 없어 보였다. 육연주는 화가 치밀어오른 나머지 가방을 들어 소원에게 던졌다.“정말 여간 뻔뻔한 게 아니네요. 이런 수모를 겪어도 그런 말이 나와요?”소원이 옆으로 쓱 비키며 공격을 피했지만 육연주는 소원을 놓아줄 생각이 없었고 보디가드를 불러 소원을 끌어냈다.“빌어먹을 년.”육연주는 소원이 끌려 나가는 걸 보고도 여전히 분이 풀리지 않았다.벌건 대낮만 아니었으면 정말 소원을 때려죽이고 싶었지만 결혼이 코앞이라 손에 피를 묻힐 수 없으니 여기서 멈췄지 아니면 정말 때려죽였을지도 모른다.“거기.”육연주가 데스크 직원들을 매섭게 쏘아보더니 경고했다.“오늘 일 현재 씨 귀에 들어가는 날엔 당신들부터 해고할 거야.”육연주는 이미 서한 그룹의 사모님이라도 된 것처럼 행동했다. 데스크 직원들은 육연주가 언젠간 서씨 가문 안주인이 될 거라는 걸 알고 있었기에 그저 눈치만 볼 뿐 대꾸
“요즘 바빠?”윤혜인이 물었다.“음... 조금.”소원의 대답은 거짓말이기도, 거짓말이 아니기도 했다. 클럽 일은 확실히 바빴다. 낮에는 잠을 보충하고 저녁에 나가서 새벽까지 일해야 하니 개인 시간이 별로 없었다. 어머니 전미영을 보러 갈 때도 퇴근하고 바로 가야 했기에 약간 피곤하기도 했다.그리고 이 일에 윤혜인을 끌어들이고 싶지 않았다. 세 아이를 케어해야 하니 생각보다 많이 힘들 것이다. 게다가 육경한은 유진의 친부니 이준혁이 개입한다 해도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고 결국 혼자 힘으로 이겨내야 했다.“그래. 나도 요즘 애가 어려서 모임을 줄였어. 애들이 조금 더 크면 아름이까지 데리고 너랑 유진이 보러 갈게.”“그래.”소원은 딱히 다른 설명을 붙이지 않고 웃으며 대답했다.“유진이랑 잘 지내고 있어.”윤혜인이 말했다.“그래. 꼭 그럴게.”전화를 끊고 나서도 소원은 윤혜인이 했던 말을 떠올렸다. 잘 지내라는데 유진이 육경한과 과연 잘 지낼 수 있을지 의문이었다.육경한 혼자라면 소원도 포기했을지 모른다. 소원의 몸 상태로는 유진의 곁을 오래 지키지 못할 수도 있다. 육경한 옆에 있으면 어느 날 소원이 바람처럼 사라진다 해도 부모님이 없는 것보다는 나을 것이다.하지만 소원은 방민아를 믿을 수가 없었다. 방민아는 사악한 속내를 숨기는데 능했기에 결혼해서 아이라도 가지면 유진을 눈엣가시로 생각하고 제거하려 할지도 모른다. 하여 소원은 더 포기할 수 없었다. 유진이 표적이 되는 건 절대 두고 볼 수 없었다.얼마 지나지 않아 윤혜인이 서현재의 개인 번호를 보내왔다. 소원이 얼른 전화를 걸었지만 받는 사람이 없었다. 다시 한번 걸어도 받지 않자 소원은 어쩔 수 없이 메시지를 보냈다.[서현재 씨, 나 소원이에요. 보면 회신해요. 긴히 해야 할 말이 있어요.]메시지를 보냈지만 한참 동안 지나도 답장이 없었다. 소원은 마음이 점점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3일 뒤면 결혼인데 그때 가서 서씨 가문의 통제를 벗어나려면 더 힘들어지게 된다. 게다가 서씨 가문은
집사는 일 처리를 마치고 서현재의 핸드폰을 서진태에게 바쳤다.“도련님 핸드폰 아까부터 계속 울리고 있습니다. 소원이라는 여자가 계속 찾는 것 같은데 뭘 알고 있는 게 아닌지 의심됩니다. 처리할까요?”집사는 피도 눈물도 없는 사람이었고 일 처리가 깔끔한 편이라 서진태의 신임을 받고 있었다. 서진태는 쉴 새 없이 날아드는 부재중 전화와 메시지에 하얗게 센 눈썹을 찡그렸다.“이 여자가 정말...”서진태가 수염을 만지작거리며 말했다“육경한 그 자식이 무슨 뜻인지 모르겠네. 이 여자를 죽이든 풀어주든 일단 육경한의 생각부터 파악해야 해.”서진태는 겉으로만 육경한에게 공손했지 속으로는 죽일 듯이 미워했다. 서현재를 빌미로 서씨 가문을 여러 번이나 물고 늘어졌지만 목숨 따위 아까워하지 않을 정도로 실력이 강했고 외국에서 레전드로 남을만한 경험을 쌓은 덕분에 이 바닥에서 명성을 널리 날린 터라 서씨 가문도 함부로 건드릴 엄두를 내지 못했다. 서씨 가문은 아직 지켜야 할 사람이 있었다.하지만 집사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들이 세운 계획에 위협이 되는 사람이라면 백 명의 억울한 사람을 만들더라도 상관없다고 생각했다.“어르신, 이 여자는 폭탄이나 마찬가지예요. 그러다 결혼식에 차질이라도 생기면 그땐 육씨 가문과 원수를 질뿐더러 도련님을 휘두를 핑계가 없어지는 거잖아요. 모든 일이 난장판이 될 거라고요.”충성심이 하늘을 찌르는 집사는 사실 서진태가 동의하든 하지 않든 소원을 제거해 서씨 가문 후계자 자리에 위협이 되는 사람은 모조리 제거할 생각이었다. 당연히 집사가 생각하는 후계자는 서현재가 아니었다.선동당한 서진태는 집사의 말이 맞다고 생각했다. 이 여자는 정말 폭탄과도 같은 존재였다. 서현재도 이 여자를 위해 여러 번 서진태의 뜻을 거스른 적이 있기에 미래를 대비해 소원을 제거하는 편이 나을 것 같다고 생각했다.서진태가 집사에게 귀띔했다.“사람 보내서 쥐도 새도 모르게 처리해. 인신매매 업자에게 팔아도 좋으니까 최대한 깔끔하게 처리해야 할 거야. 절대
소원은 이번 달에 두 번이나 반차를 냈다. 다른 직원도 한 달에 겨우 2날 반 정도만 반차를 낼 수 있었기에 소원도 민망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다행히 영숙은 어머니의 상황이 좋지 않다는 소원의 말을 듣고 조심해서 다녀오라는 말만 덧붙였다. 소원은 얼른 기사에게 방향을 돌려 요양원으로 향하라고 했다.요양원에 도착한 소원을 보고 간병인 아줌마가 무척 놀라며 물었다.“소원 씨, 어쩐 일이에요?”소원은 침대에 조용히 누워있는 전미영을 보고 한시름 놓더니 이렇게 말했다.“요양원에서 상태가 좋지 않다고 연락이 와서요.”“괜찮아요. 사모님 오후에 약간의 경련이 있긴 했지만 오래 지속되진 않았어요. 주사를 맞고 지금까지 쭉 안정적이에요.”간병인 아줌마가 소원을 다독였다.“소원 씨, 너무 걱정하지 마요.”“다행이네요.”소원이 침대맡으로 다가가 앉았다. 중도에 잠깐 깨긴 했지만 전미영은 여전히 소원을 보고도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매주 보러 와도 전미영은 소원을 알아보는 법이 없었기에 소원도 이제 적응했다. 언젠가 육경한이 전미영을 보러 온 적이 있는데 육경한을 보고는 매우 즐겁게 반겨줬다. 소원을 대할 때 느껴지는 거리감만 보면 오히려 육경한이 친자식 같기도 했다.소원도 이 일에 관해 의사에게 물어본 적이 있지만 의사는 전미영이 깨어나자마자 본 사람이 육경한이라 육경한에게 익숙함과 신뢰감을 느낀다고 했고 별다른 방법이 없는 상황에서는 거부감을 느끼지 않는 사람을 만나는 게 몸 상태를 완화하는 데 도움이 될 거라고 말해줬다.게다가 애초에 전미영을 보살피는 일은 육경한이 전부 책임졌기에 무턱대고 육경한을 쫓아낼 수도 없었다. 그저 육경한이 문병 오는 시간을 피해 오는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육경한은 일이 바빴기에 소원을 보러 오는 일이 드물어 그렇게 걱정할 필요는 없었다.간병인 아줌마는 소원이 어딘가 피곤해 보이자 이렇게 말했다.“소원 씨, 얼른 들어가 쉬어요. 출근하느라 피곤해서 그런 거 아니에요? 멀리서 사는 걸로 알고 있는데 문병 온지 얼마나 됐다고
운전기사가 백미러로 소원을 보며 사과했다.“손님, 죄송해요. 감기 걸렸는데 손님에게 전염될까 봐 걱정돼서요.”소원은 별생각 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더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앱으로 차를 불렀기에 가는 내내 차 안에서 하는 대화가 녹음되었고 버튼 하나만 누르면 신고할 수 있었기에 소원은 시름 놓고 뒷좌석에서 눈을 붙였다.얼마나 지났을까, 소원이 눈을 번쩍 떴다. 아까 운전기사가 통화를 하는 것 같았는데 소원이 깨어났을 땐 다시 마스크를 끼고 운전하고 있었다.소원은 꿈이라도 꾼 줄 알고 창밖을 내다봤다. 날씨가 우중충한 게 비가 내릴 것 같았다. 도로를 유심히 살피던 소원은 이상한 낌새를 눈치채고 얼른 핸드폰을 꺼내며 물었다.“기사님, 혹시 길 잘못 드신 거 아니에요?”앱을 확인해 보니 차는 이미 경로를 한참 이탈했고 아예 다른 길로 가고 있었다.“아니에요. 이 길이 더 가깝고 비용도 적게 나와요.”방금 전까지만 해도 코가 막힌 듯한 목소리던 운전기사는 지금 꽤 깔끔하고 상쾌한 목소리로 말하고 있었다.소원은 점점 한산해지는 주변 풍경을 보며 불안함이 엄습했다.“아니에요. 기사님. 지금 당장 원래 경로로 돌아가서 내비게이션 따라 운전해 주세요. 비용은 앱에 나온 대로 드릴게요.”“손님, 그러면 아까 말했어야지. 그 길 진작에 지나쳐서 다시 돌아가려면 너무 멀어요. 걱정하지 마요. 곧 도착할 거예요.”운전기사는 소원의 요구를 들어주지 않고 계속 엑셀을 밟았고 시속 120까지 올라갔다. 국도라 제한속도가 80인데 말이다.소원은 점점 마음이 불안해져 신고 버튼을 누르려는데 배터리가 닳은 핸드폰이 소리를 내며 꺼졌다. 정말 되는 일이 없는 하루였다.핸드폰이 먹통이니 소원은 다른 방법을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어딘가 이상했다. 자세히 돌이켜보니 차에 오르기 전 차량 색깔과 번호를 확인했는데 아무 문제가 없었기 때문이다.‘근데 왜 이렇게 불안한 거지?’소원은 옆에 있는 기사 카드를 발견했다. 카드에 찍힌 운전기사는 네모난 얼굴에 눈썹이 짙
이것이 오히려 소원에게는 기회가 되었다. 소원은 아무렇지 않은 듯 앞쪽을 주시하며 속도를 확인했다. 속도가 70대까지 내려가자 기회를 잡은 소원은 천천히 옆으로 움직이다 기회를 잡고 운전기사가 방심한 틈을 타 손잡이에 손을 넣고 차 문을 열었다.탈칵.그렇게 운전기사가 미처 반응하기도 전에 소원은 차 문을 열고 바깥으로 뛰었다.“어, 저 빌어먹을...”화들짝 놀란 운전기사의 목소리가 빗속을 뚫고 소원의 귀로 들어왔다가 차와 함께 사라졌다.쿵.소원이 바닥에 떨어지며 여러 번 뒹굴었다. 오른쪽 어깨가 빠졌는지 이루 말할 수 없는 고통이 밀려왔다. 소원은 이를 악문 채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걸음을 옮길 때마다 마치 칼로 팔을 자르는 것처럼 너무 아팠다.앞으로 질주하던 차는 이내 방향을 틀고 뒤쫓아오기 시작했다. 큰비로 시야가 가려진 덕분에 소원은 옆에 있던 풀밭으로 도망갈 수 있었지만 바닥이 물컹해 발자국까지 숨길 수는 없었다.이내 운전기사가 뒤따라왔다. 건장한 남자였기에 달리는 게 소원보다 빠를 수밖에 없었다. 소원은 걸음을 멈추더니 몽둥이 하나를 줍고 풀숲에 숨어 소리 낼 엄두를 내지 못했다. 운전기사가 한걸음 다가올 때마다 자박자박하는 물소리가 들렸다.“아가씨, 좋은 말로 할 때 그냥 나와. 내가 찾아내면 다리부터 분질러 버릴 테니까. 헤헤. 그러면 좋은 값에 팔 수가 없잖아. 그러면 장기를 뜯어내 팔고 사지를 잘라서 인형으로 만드는 수밖에 .:소원은 온몸에 소름이 끼쳤다.‘도대체 누가 나한테 이렇게 끔찍한 일을 저지르려는 거지?’순간 머릿속에 여러 이름이 떠올랐다.‘방민아, 육연주, 그리고 서씨 가문...’“아가씨, 말 들어. 다리라도 온전하면 아가씨도 덜 아프지 않겠어?”“숨어도 소용없어. 여기 내 친구들 많아. 어딜 가든 쉽게 도망치진 못할 거야.”소원은 마음이 강한 편이었기에 상대가 어떻게 말하든 그 자리에 숨어 꼼짝달싹하지 않았다. 운전기사가 2미터도 남지 않은 곳까지 가까이 다가오자 소원이 벌떡 일어나더니 손에 쥔 나
컵을 받아 물을 마신 육경한은 이내 몸이 편안해지는 것을 느꼈다.컵을 내려놓자 소원이 말했다.“그럼 밥 먹어. 난 갈게.”육경한이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소원은 그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나가려 했다.문 앞까지 왔을 때 뒤에서 ‘쿵’ 하는 소리가 났다. 뒤돌아보니 육경한이 침대에서 떨어졌다.키가 188cm인 남자가 얼굴이 하얗게 질린 채 바닥에 넘어져 있으니 매우 허약해 보였다.소원은 급히 가서 육경한을 부축했다.“일어날 수 있겠어?”소원은 갑자기 허약해진 육경한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침대에 있던 사람이 왜 갑자기 바닥에 떨어지냐 말이다.이내 육경한이 입술을 깨물며 말했다.“아파.”이 말을 들은 소원은 순간 육경한이 꾀병을 부리는 것은 아닌지 의심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안색을 보면 연기하는 것처럼 보이지 않았다.얼굴은 하얗게 질려 있었고 관자놀이에는 땀이 맺혀 있었다.상처 난 등이 촉촉한 것을 보니 아마도 상처가 다시 터진 것 같았다.황산에 의한 상처는 피가 아니라 고름이 나오기에 소원은 상처가 터졌는지 확신할 수 없었다.하지만 그날 육경한이 망설임 없이 뛰어든 것을 생각하니 차마 모른 척할 수는 없었기에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힘주지 마. 날 잡아. 조심하고.”소원의 팔에 기댄 육경한은 숨조차 제대로 쉬지 못했다.오랜만에 가까워진 두 사람의 거리에 육경한은 심장이 졸깃했다. 소원의 몸에서는 여전히 은은한 향기가 났다. 그 냄새는 마치 약처럼 아픔을 잊게 했다.육경한을 다시 침대에 눕힌 소원은 침대 높이를 조절해 그가 더 편안하게 앉을 수 있게 했다.모든 것을 마친 후 소원이 돌아서자 육경한은 그녀가 또 떠날까 봐 급히 말했다.“소원아, 나 배고파.”순간 소원은 조금 전 넘어진 것이 진짜로 고의는 아니었는지 의심하게 되었다. 조금 전 넘어지면서 손을 다쳐 밥을 먹을 수 없게 되었다.“간병인은 어디 갔어?”“간병인 없어. 평소에 황진수가 도와줘.”육경한의 말에 소원이 짜증 내며 한마디 했다.“왜 간병인을 안
연기가 제법인 황진수는 진짜로 배가 아픈 척했고 심지어 자신의 혀를 깨물어 얼굴이 하얗게 질렸으며 이마에 땀까지 흘렸다.순간 멍해진 소원이 한마디 물었다.“왜 그래요? 의사를 부를까요?”황진수가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아니요. 화장실 갔다 오면 될 것 같아요. 이것 좀...”그는 손에 들고 있던 죽을 높이 들었다. 혹시라도 소원이 받지 않을까 봐 일부러 그녀의 손에 쥐여 주기까지 했다.“소원 씨, 이것 좀 부탁드릴게요. 육 대표님에게 전해주세요. 의사가 염증이 생길 수 있으니 지금 차가운 걸 먹으면 안 된다고 했어요.”황진수는 말을 마친 뒤 재빨리 사라졌다.죽을 들고 좌우를 둘러보던 소원은 결국 어쩔 수 없이 육경한이 있는 VIP층으로 향했다.문 앞에 도착한 소원은 죽을 경호원에게 넘겨주려고 했지만 육경한 병실 앞에는 아무도 없었다.사실 조금 전 황진수는 그녀와 육 대표를 만나게 하기 위해 경호원들에게 전화를 걸어 바로 철수하라고 했다.소원이 문을 두드리자 방안에서 남자의 낮은 목소리가 들렸다.“들어와.”소원이 문을 열고 들어갔을 때 보고서를 보고 있는 육경한은 소원이 들어온 것을 알아차리지 못했다.그는 황진수인 줄 알고 고개도 들지 않은 채 말했다.“그냥 거기에 둬.”테이블 위에 놓여진 손도 대지 않은 음식과 손에 든 죽을 번갈아 본 소원은 육경한이 갑자기 죽을 먹고 싶어서 이런 것이라고 생각했다.다만 이 죽 가게가... 왠지 모르게 익숙했다. 어제 샀던 죽 가게와 이름이 비슷한 것 같았다.하지만 별다른 생각 없이 손에 든 죽을 놓은 소원은 육경한이 여전히 그녀를 알아채지 못하자 방에서 나가려고 했다.그런데 이때 육경한이 고개를 들더니 의아한 목소리로 그녀를 불렀다.“소원?”소원이 걸음을 멈추고 그를 돌아보며 말했다.“황 비서가 갑자기 배가 아프다고 나더러 대신 갖다 주라고 했어.”육경한이 잠시 침묵하다가 말했다.“나를 보러 온 줄 알았네.”약간 서운함이 담긴 말투에 소원은 이왕 온 김에 몇 마디 안부는 주고받아야
사생아가 많은 방현수는 여자아이인 방민아 하나쯤은 포기할 수 있었다.그리고 방민기는 이미 판결이 났고 방씨 가문이 아무리 인맥이 넓다고 해도 여론이 너무 떠들썩했기에 도움이 되지 못했다.그 일 이후, 방현수의 정신력도 예전 같지 않았다. 가장 기대하던 두 아이가 동시에 문제를 일으켰으니 무기력해질 수밖에 없었다.방민아는 아마도 방현수의 비밀을 쥐고 있기 때문에 방현수가 돈과 힘을 들여 그녀를 빼내려고 하는 것이다.자신의 추측을 말한 황진수가 한마디 보탰다.“방민아 씨가 역시 보통내기는 아닌 것 같습니다. 방현수의 마음도 바꾸고요.”육경한도 비슷한 생각을 했다.방민아가 나오면 소원은 그녀의 첫 번째 타겟이 될 것이다. 여자들 사이의 질투가 얼마나 무서운지 욱경한은 잘 알고 있었다.육경한이 황진수에게 말했다.“방씨 가문의 움직임을 주시해 봐. 그리고 방민아가 나오면 반드시 24시간 내내 감시하여 소원에게 접근하지 못하게 해.”황진수가 말했다.“알겠습니다.”육경한이 또 물었다.“진아연 쪽은 어때, 소식이 있어?”진아연이 또 도망쳤다. 지난번 병원에서 목숨을 건진 후 몸이 나아지자 간호사가 한눈을 판 사이 몰래 빠져나갔다.아마도 육경한이 자신의 정체를 알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 것 같았다.그래서 육경한이 자신을 놓아주지 않을까 걱정되어 기회를 잡아 도망친 것이다.하지만 소원의 아버지 일도 그녀와 관련이 있기 때문에 육경한은 그녀에게 확실히 물어봐야 했다.이때 황진수가 말했다.“아직 조사 중입니다. 하지만 현재로서는 서울을 벗어나지 않은 것 같습니다. 각 출입국 사무소에 다 물어봤지만 아직 다른 데로 갔다는 소식은 없습니다.”육경한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긴장을 놓치면 안 돼. 진아연이 분명 무언가를 알고 있을 거야.”황진수가 알겠다고 하자 육경한도 조금 지쳤는지 한마디 했다.“이만 나가 봐.”황진수는 집사가 정성스럽게 준비한 요리를 육경한이 한 입도 먹지 않은 것을 보고 한마디 말했다.“육 대표님, 입에 맞지 않아서 안
병실 밖에 있던 황진수는 두 사람의 대화를 전부 들었다.감정적 가치라니? 대체 무슨 말인가! 이지애는 가스라이팅에 정말 능숙했다.육경한에게서 아무런 이익을 얻지 못한다면 그녀가 과연 육경한을 걱정하는 척하며 그런 감정적 가치를 제공할 수 있었을까?그렇게 많은 돈을 벌어들이고도 만족하지 못하고 오히려 더 탐욕스러워지다니...솔직히 말해서 먼 친척이 가까운 이웃만 못 한다는 게 틀린 말은 아니다.황진수가 소리 지르는 이지애를 끌어내어 경호원들에게 넘기자 이지애가 크게 화를 내며 말했다.“감히 나를 이렇게 대하다니! 내가 육경한의 누나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아. 오늘 나를 무례하게 대한 일, 나중에 분명 후회할 때가 있을 거야.”황진수는 냉정하게 말했다.“여사님, 더 이상 자신을 육 대표의 누나라고 말하지 마세요. 그저 사촌 누나일 뿐인데 왜 항상 ‘사촌’이라는 말을 잊으시는 건가요? 밖에서 본인을 육 대표의 친누나라고 말하며 사기를 치다 보니 입에 붙어서 못 고치는 건가요?”황진수는 이지애를 너무 잘 알고 있었다.자신이 육경한의 누나라는 명목으로 많은 회사 대표들에게서 이익을 취했다. 또 육경한과도 자주 만났기에 모르는 사람들은 그녀를 진짜로 육 대표의 누나라고 생각했다.하지만 사람의 욕심이란 끝이 없는 법, 이지애는 결국 자업자득의 꼴이 되었다.이지애가 분노하며 말했다.“너 같은 놈은 평생 이 꼴로 살 거야. 개는 사람을 구분하지 못해. 잘 들어, 경한이는 마음이 진정되면 다시 나를 누나로 생각할 거야. 그때면 널 첫 번째로 해고할 테니 두고 봐!”“그래요. 기다리고 있을게요.”황진수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너 정말!”이제 육경한이 그녀의 뒤를 봐주지 않으니 황진수도 당당하게 억지를 부리는 이지애를 무시하며 바로 경호원들에게 말했다.“데려가세요. 앞으로 육 대표 주위에는 얼씬도 하지 못하게 하세요.”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오른 이지애는 욕을 하면서 문을 잡고 떠나려고 하지 않았다.그런데 이때 누군가가 찾아와 이지애를 보더니 통
하지만 쉽게 인정할 이지애가 아니었다. 그녀는 도리어 육경한을 비난하며 말했다.“경한아, 우리 모녀를 돕지 않는 것까지는 뭐라고 하지 않겠지만 나를 모함하면 안 되지. 나는 너희 집에 빚진 게 없어. 네가 그 여자를 좋아하는 것을 알아. 그래서 그 여자를 위해 무슨 일이든 할 수 있지만 그렇다고 그 여자를 위해 우리 연주를 희생시키면 안 돼. 너도 어릴 때부터 연주를 봐왔었잖니? 그런데 진짜로 감옥에 들어가 고통받는 것을 지켜볼 거야?”이지애는 말을 빙빙 돌리며 돈을 빌린 것을 일절 말하지 않았다. 다시 육경한의 탓을 하는 이지애는 교활하기 짝이 없었다.육경한이 말했다.“누나, 사실 이 돈은 조사하려고 마음 먹으면 얼마든지 조사할 수 있어요. 그때 개업한 미용원도 처음부터 끝까지 다 우리 엄마 돈으로 한 거잖아요. 누나, 내가 정말로 모를 거라고 생각해요?”육경한의 말에 이지애는 더 이상 모른 척할 수 없어 일부러 불쌍한 척하며 말했다.“경한아, 그때 미용원을 연 것은 네 엄마의 뜻이었어. 나는 단지 네 엄마를 도운 것뿐이야. 나중에 네 엄마가 돌아가시고 너도 큰 충격을 받았잖아. 그때 미용원도 파산 직전이었어. 그때는 네가 이 난장판을 처리할 겨를이 없어서 내가 대신 맡은 거야. 나는 좋은 마음으로 이렇게 한 것인데 너는 어떻게 나를 이렇게 생각할 수 있니?”이지애의 임기응변 능력은 진짜로 일반인들이 따라올 수 없는 것 같았다.하지만 보통 사람이라면 그녀의 이런 말에 속았을지 몰라도 많은 사람을 만나고 여러가지 일을 겪은 육경한은 이지애의 말이 어디까지가 진실이고 어디까지가 거짓인지 한눈에 알 수 있었다.사람은 역시 욕심에 눈이 먼 동물이었다.이지애의 현재 모습은 정말 탐욕스러웠다.하지만 이해관계를 잘 파악하고 있는 이지애는 육경한의 도움이 있어야만 육연주가 나올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억울한 얼굴로 계속 말했다.“경한아, 미용원을 돌려받고 싶으면 바로 줄게. 내가 여러 해 동안 운영해 왔지만 사실 다 네 엄마를 대신해서 한 거야
“경한아, 누나가 예전에 너에게 얼마나 잘해줬는지 잊은 것은 아니지? 그때 너에게 돈을 준 것 때문에 네 형부가 나를 어떻게 대했는지 너는 몰라. 그 자식이 죽을 때까지도 내가 친정에 돈을 준 일을 잊지 않고 있었어...”이지애가 끊임없이 과거의 일들을 들먹였지만 육경한은 그런 그녀가 단지 시끄럽다고 느껴졌다.원래부터 가족에 대한 정이 많은 사람이 아니었고 게다가 이지애가 그때 돈을 준 이유는 그가 불쌍해서가 아니었다.육경한이 냉정하게 말했다.“누나, 그동안 내가 말하지 않은 게 있는데요. 그때 나에게 몇십만 원을 준 이유가 우리 엄마에게서 4억원을 빌렸기 때문에 아니에요? 우리 엄마가 돌아가신 후 누나는 나를 위로한다는 핑계로 우리 집에 와서 차용증을 찾아내 파기했잖아요.”육경한이 이 사실을 알고 있을 줄 몰랐던 이지애는 눈이 휘둥그레졌다.마음속은 아주 불안했지만 절대 인정할 수 없었기에 급히 부인하며 말했다.“경한아, 무슨 농담을 그렇게 하는 거야? 내가 언제 네 엄마의 돈을 빌렸다고 그래? 네가 오해하고 있나 본데 내가 비록 잘 살지는 못하지만 그런 일을 할 사람은 절대 아니야!”이 말을 들은 육경한은 얼굴이 더욱 어두워졌다.육경한이 침묵하자 이지애는 육경한이 일부러 거짓말을 한 것이라고 생각해 웃으며 말했다.“경한아, 넌 생각이 너무 많아. 그런 말은 어디서 들은 거야? 보아하니 일부러 우리 사촌 사이를 이간질하려는 사람이 말한 것인가 본데 나는 너희 집 돈을 빌리고 안 갚은 적이 없어.”육경한이 말했다.“누나, 아직도 거짓말을 하는 거예요?”육경한은 이지애에 대한 좋은 감정이 완전히 사라졌다.얼마 전, 집안 하인이 청소를 하면서 다이어리를 하나 발견했다. 펼쳐보니 그 안에 육경한의 엄마가 쓴 채무 리스트가 있었고 그중에 이지애가 육씨 가문에서 4억원을 빌린 내역이 명확히 적혀 있었다. 그것은 육경한의 엄마가 겨우 모은 돈을 빌려준 것이었다.그리고 날짜도 기록되어 있었다. 날짜를 확인해 보니 이지애가 미용원에 투자하여 금방 개
이 말은 육경한의 마음을 더욱 아프게 했다. 차라리 묻지 말걸... 주석훈은 대체 무슨 친구란 말인가? 단지 몇 번 만난 사이지 않은가? 그런데 어느새 그녀에게 그렇게 중요한 사람이 되었단 말인가?육경한의 표정이 어두워진 것을 발견한 황진수는 급히 말했다.“병원 간호사에게 물어봤더니 소원 씨가 병문안을 잠깐 왔다가 저녁에 바로 갔대요.”무덤덤한 표정을 지은 육경한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황진수도 더 이상 이것과 관련해서는 얘기를 꺼내지 못하고 업무 보고를 계속했다. 그런데 보고를 하던 중 갑자기 불청객이 찾아왔다.육경한의 사촌 누나 이지애가 병문안을 온 것이다.“경한아, 우리 연주 좀 살려줘!”이지애는 육경한과 다툰 적이 없었던 것처럼 들어오자마자 울부짖었다.육경한이 미간을 찌푸렸지만 이지애는 육경한에게 말을 할 기회도 주지 않고 울부짖었다.“경한아, 오늘 아침에 연주를 보러 갔는데 애가 살이 쏙 빠졌어. 얼굴도 초췌해지고 말이야. 안에서도 괴롭힘을 당하고 있는지 몸에는 상처투성이야. 안 그래도 괴롭힘을 당한 애인데 또 그런 곳에 들어갔으니 버틸 수 있겠니...”이지애는 눈물을 닦으며 말했다. 딸에 대한 애틋함에서 나온 눈물은 진심인 것 같았다.이번에는 육연주의 잘못은 일절 언급하지 않은 채 육연주가 얼마나 고생하는지만 말하며 육경한의 동정을 얻으려고 했다.이 일로 육경한도 다쳤기 때문에 오늘 아침 이지애는 육연주를 욕하기도 했다. 건드려야 할 사람은 건드리지 않고 오히려 유일하게 의지할 수 있는 삼촌을 건드려 병원 신세 지게 만들었기 때문이다.가족에게 폐를 끼쳤을 뿐만 아니라 그 여자 때문에 경찰서까지 끌려갔다.실제 피해자가 육경한이라면 육경한이 합의서를 써주면 육연주는 집행유예를 받을 수 있었다.그렇게 되면 육연주는 감옥에 가지 않아도 된다.하지만 소원의 진술 때문에 육연주는 고의 상해죄로 기소되었다.이 죄는 아주 무거운 죄로 변호사와 상담 후 최소 감옥에 몇 년은 있어야 하며 길면 5년에서 10년까지도 있을 수 있
소원은 순간 멍해졌다.이전까지 유진은 이 내용에 대해 한 번도 말한 적이 없었다. 몇 달 더 있다가 유진에게 말하려고 했는데 유진은 이미 알고 있었다.소원이 동화책을 내려놓고 물었다.“유진아, 엄마가 임신한 거 누가 말해줬어?”유진이 말했다.“아줌마가 말해줬어요. 엄마가 너무 보고 싶어서 엄마를 찾으러 가려고 했는데 엄마가 임신했으니 방해하면 안 된다고 아줌마가 그랬어요.”유진이 또 물었다.“임신했다는 것은 엄마 배 안에 또 아기가 생겼다는 거예요?”소원이 고개를 끄덕였다.“맞아. 엄마 배 안에 또 아기가 생긴 거야.”“너무 좋아요.”그녀의 임신을 바로 받아들인 유진은 얼굴에 기쁨이 가득했다.소원은 유진의 얼굴을 살짝 꼬집으며 말했다.“엄마는 3개월이 지난 후 너에게 말하려고 했어. 임신한 지 세 달이 되어야 말할 수 있다는 옛날 어르신들의 풍습이 있거든. 그래야 아기가 건강하게 태어날 수 있어.”유진이 말했다.“괜찮아요. 엄마, 아기는 분명히 건강하게 태어날 거예요.”소원이 미소를 지었다.“좋아?”“당연히 좋죠. 항상 같이 놀고 싶은 동생이 필요했는데... 동생이 있으면 외롭지 않을 거예요.”“엄마는 너만 행복하면 돼.”소원이 유진을 꼭 안아주자 유진이 말했다.“엄마, 남동생이든 여동생이든 상관없어요. 엄마가 낳은 아기라면 다 좋아요. 나중에 내가 없어도 동생이 엄마와 같이 있을 테니까 그러면 나도 안심할 수 있어요.”너무나 순수한 유진의 말에 마음이 아픈 소원은 눈시울이 붉어졌다.“유진아, 네가 왜 없어? 너는 항상 건강하게 있을 거야. 엄마 옆에서 이 아기를 지켜줘야지.”유진이 어른스럽게 말했다.“알겠어요. 엄마, 아기를 꼭 잘 돌볼게요.”유진에게 동화책을 읽어주던 소원은 녀석이 잠든 것을 확인한 후에야 옆에서 일어났다.그녀는 유진에게 약을 먹일 수 있지만 서현재의 연구 결과로 보면 그 약이 유진에게 얼마나 효과가 있을지는 확신할 수 없었다. 지금으로서는 그저 시도해볼 수밖에 없었다.소원은 유진에게 약을
“네.”주석훈은 전화를 끊고 직원증의 사진을 꺼내 그 위에 있는 예쁜 여자를 깊게 바라보았다.그러고는 사진을 얼굴에 대고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수정아, 봤지? 하늘도 나를 도와주는 것 같아. 아니면 네가 나를 돕는 거야?”사진 속의 여자를 보는 주석훈의 눈가에 어느새 눈물이 흘러내렸고 눈에는 그리움이 가득했다.이때 주석훈의 가방 안에 있던 또 다른 전화기가 울렸다.번호를 확인한 주석훈은 눈을 가늘게 뜨며 잠깐 머뭇거리다가 전화를 받았다.전화기 너머로 공포에 질린 여자 목소리가 들렸다.“제트 님, 제발 도와주세요...”주석훈이 물었다.“내가 어떻게 도와주면 되지?”상대방이 잠시 망설이다가 말했다.“저... 외국으로 보내 주세요.”“하하...”주석훈의 웃음소리가 갑자기 사악해졌다.“아직도 정신을 못 차렸네.”“저... 저는 제트 님의 비밀을 알고 있어요. 많은 사람들이 제트 님의 뒷조사를 하고 있다는 걸 알잖아요. 내가 잡히면 이 비밀을 지킬 수 없을 거예요.”상대방의 떨리는 목소리에 주석훈이 한마디 했다..“많이 똑똑해졌네?”“나도 어쩔 수 없으니까요. 제트 님, 돈만 주시면 멀리 외국으로 떠나서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게요.”몇 초 동안 생각에 잠긴 주석훈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얼마면 되는데?”“5천만 원이요.”전화기 너머로 금액을 말한 여자는 혹시라도 주석훈이 화낼까 봐 설명을 덧붙였다.“적어도 5천만 원은 있어야 외국에서 살 수 있어요.”주석훈이 싸늘한 목소리로 말했다.“이틀 동안은 시간이 없어. 모레 밤에 항구에서 보자.”“아니요, 제트 님!”상대방은 경계하며 말했다.“우린 만날 필요는 없을 것 같아요. 제트 님이 돈을 그곳에 두시면 제가 가서 가져갈게요.”주석훈이 코웃음을 친 뒤 말했다.“알았어. 항구에 둘게, 시간은 다시 알려주지.”“지금은 안 될까요...”전화기 너머의 여자는 매우 급한 듯했다.“나와 흥정할 생각하지 마!”주석훈이 싸늘한 목소리로 경고했다.“알겠어요...”전화가 끊