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준혁이 눈을 뜨고는 윤혜인을 바라봤다. 눈시울은 어느새 빨개 있었고 열이 심하게 나는지라 눈이 충혈된 상태였다.하지만 이준혁의 또렷한 눈빛에 윤혜인은 이준혁의 정신이 말짱한 게 아닌지 의심할 정도였다.이준혁은 윤혜인의 머릿결에 살포시 키스하더니 매혹적인 목소리로 말했다.“꿈이 너무 좋아서 영영 깨고 싶지 않네…”순간 코끝이 찡해 난 윤혜인은 더는 견딜 수가 없었다. 눈물이 줄 끊어진 구슬처럼 두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이준혁이 손을 내밀어 윤혜인의 눈가를 닦아주더니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울지 마. 네가 울면 내 마음이 너무 아파…”윤혜인은 울음을 그치고 싶었지만 좀처럼 그게 되지 않았다. 그녀는 눈물을 잔뜩 머금은 채 울먹이는 목소리로 말했다.“조금만… 조금만 더 버텨요…”“우리… 우리 곧 병원에 도착할 거예요. 준혁 씨 다 나으면 가족끼리 모여서 단란하게…”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띵 하는 소리와 함께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윤혜인의 표정은 기쁨에 가득 차 있었다. 드디어 희망이 보이는 것 같았다.엘리베이터에서 300미터도 떨어지지 않은 대문 쪽에 특수 부대 알파팀 사람들이 전격 무장하고 안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그리고 그 뒤로 경찰차와 앰뷸런스 소리가 들렸다.단조롭기만 한 선율이 지금 이 순간만큼은 세상에서 제일 아름다운 하모니로 들렸다. 드디어 안전해졌다는 의미기도 했다.윤혜인은 몸이 불덩이 같은 이준혁을 부축해 나오며 울먹였다.“준혁 씨, 봐요. 알파팀 사람들이에요. 조금만 더 버티면 바로 병원에 도착할 수 있어요. 도착하면 우리 가족 셋이… 아니다…”윤혜인이 눈물을 훔치며 말을 바꿨다.“우리 가족 다섯이 행복하게 살 수 있어요...”“조심해요.”그때 문밖에서 누군가 낮은 소리로 경고했다.윤혜인이 고개를 들어보니 위아래로 까만 옷을 입은 남자가 총으로 윤혜인을 겨누고 있었다.경고와 함께 남자는 방아쇠를 당겼다. 총구가 향한 곳은 다름 아닌 윤혜인의 머리였다.바깥은 빛이 밝았기에 윤혜인은 남자의 파란 눈동자에 차오른
윤혜인은 심장을 날카로운 물건에 찔린 것처럼 저릿한 게 너무 아팠다. 바닥에 무릎을 꿇은 채 이준혁을 품에 안고는 슬픔에 목 놓아 울기 시작했다.“준혁 씨…”이준혁이 눈을 뜨더니 손을 들고 싶었지만 좀처럼 들리지가 않았다. 조금만 움직여도 총을 맞은 가슴에서 피가 분수처럼 솟구쳐 올랐다.윤혜인이 얼른 손으로 막았지만 손가락 틈으로 피가 멈추지 않고 끊임없이 흘러나왔다.이준혁은 눈꺼풀이 너무 무거웠고 말도 나가지 않았다. 누군가 풀로 눈꺼풀을 붙여놓기라도 한 듯 좀처럼 떠지지 않았다.윤혜인은 어쩔 바를 몰라 하며 절규했다.“안 돼… 준혁 씨… 제발 눈 좀 떠요… 제발 정신 차리라고요…”하지만 아무리 불러도 이준혁은 눈을 꼭 감은 채 반응이 없었다. 윤혜인의 착각인지 몰라도 아까까지만 해도 불덩이처럼 뜨겁던 이준혁의 몸이 점점 차갑게 식어가는 것 같았다.이렇게 무서운 건 처음이었다. 마치 온 세상을 잃은 듯한 기분이었다.두 번째로 겪는 아픔이었다. 다시는 찾아오지 않을 거라 생각했는데 고작 얼마나 지났다고 또 예고도 없이 들이닥쳤다.그리고 이번엔 저번보다 더 가슴이 미어졌다. 누군가 손으로 장기를 억지로 밖으로 끄집어내는 것처럼 갈기갈기 찢어질 듯이 아팠다.윤혜인은 뭍에서 메말라가는 생선처럼 퀭한 눈으로 앞을 멍하니 내다봤다.‘왜… 행복이 코앞으로 다가왔는데 왜 이런 생이별이 들이닥친 걸까… 왜 하늘을 늘 이렇게 잔인하기만 한 걸까…’구급 대원이 들것을 들고 달려와 윤혜인을 타일렀다.“일단 부상자부터 치료하게 해주세요…”이 말에 윤혜인은 마지막 동아줄이라도 잡은 듯 구급대원의 팔을 붙잡고 애원했다.“제발 이 사람 좀 살려주세요. 저는 이 사람 없으면 못 살아요. 제 아이도 마찬가지예요…”윤혜인의 절규에 사람들의 마음도 찢어질 것만 같았다.구급대원이 꿋꿋하게 말했다.“최선을 다하겠습니다.”윤혜인은 응급 처치를 방해할까 봐 옆으로 물러나면서도 연신 이렇게 말했다.“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별말씀을요. 사람을
깜짝 놀란 알파 팀 사람들이 그 남자를 반듯하게 눕히더니 얼굴을 여러 번 내리쳤다.“저기요. 일어나봐요. 빨리 구급차로 옮겨…”윤혜인은 남자의 입가로 흘러내린 검붉은 피를 보며 남자가 음독했음을 알아챘다. 아까까지만 해도 멀쩡하던 사람이 이렇게 빨리 중독되었다는 건 한 가지 경우밖에 없었다.그것은 바로 스스로 음독했다는 것이다.의사가 달려와 동공과 입 안쪽을 확인하더니 말했다.“스스로 음독했어요. 이빨에 독을 숨긴 것 같아요.”윤혜인은 머리가 윙 했다. 그녀의 추측이 그대로 들어맞았던 것이다.어떤 사람인지 생각해 보려 했지만 머리가 너무 복잡해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았다.구급차로 실려 가는 이준혁을 보며 윤혜인은 마음이 갈기갈기 찢어졌다. 윤혜인은 싸늘한 주검으로 변한 남자를 뛰어넘어 구급차를 따라가려 했지만 너무 마음을 졸인 탓인지 눈앞이 까매졌고 아무 예고도 없이 그대로 바닥에 쓰러졌다.“사모님…”깜짝 놀란 주훈이 윤혜인을 부르더니 번쩍 안아 들어 다른 구급차에 실었다.…윤혜인은 길고 긴 꿈속에서 헤매고 있었다.예정일이 코앞으로 다가온 윤혜인을 이준혁이 살뜰히 보살펴주고 있었다. 의사가 윤혜인을 분만실로 데려가는데 윤혜인이 이준혁의 손을 꼭 잡고 긴장한 표정으로 말했다.“어디 가지 말고 여기서 내가 나올 때까지 기다려요. 어디 가면 안 돼요…”이준혁이 윤혜인의 손을 꼭 맞잡더니 약속했다.“걱정하지 마. 내가 어딜 가. 여기서 너랑 아이가 나오길 기다릴게.”윤혜인은 이 말을 듣고도 너무 불안해 이준혁의 손을 놓으려고 하지 않았다. 마음이 너무 먹먹하고 답답해 이 말만 반복했다.“거짓말하면 안 돼요. 어디도 가지 말고 꼭 나 기다려야 해요…”이준혁의 입가에 부드러운 미소가 걸렸다.“안 간다고 했잖아. 왜 점점 어린이가 되어가는 것 같지?”이준혁이 윤혜인의 코끝을 손으로 쓸어내리며 달콤하게 말했다.“아이가 태어나면 아이에게도 이렇게 애교 부리려고?”이쯤 되면 한시름 놓아야 맞는데 이상하게도 불안함은 좀처럼 가시지 않고 머릿
“…”동심이 잔뜩 묻어나는 말에 사람들이 웃음을 터트렸다.윤혜인은 꿀이 떨어지는 눈빛으로 화기애애한 이 모습을 지켜보다 순간 이상한 낌새를 눈치채고는 곽아름에게 물었다.“아름아, 아빠는?”곽아름이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물었다.“엄마, 아빠가 뭐예요?”“…”순간 말문이 막힌 윤혜인이 다시 물었다.“아름이 아빠 말이야. 아까 밖에 서 있지 않았어? 얼른 아빠 들어오라고 해.”사실 눈을 뜨자마자 본 사람이 이준혁이 아니라는 생각에 윤혜인은 살짝 서운하기도 했다. 이준혁이 제일 처음으로 두 사람의 아이를 봤으면 했는데 말이다.하지만 곽아름은 여전히 못 알아들은 듯한 눈치였다.“엄마, 아빠가 어딨어요? 아름이는 아빠가 있은 적이 없는데?”윤혜인이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아빠가 있은 적이 없다니, 그럴 리가 없었다.윤혜인이 얼른 곽진명에게 물었다.“아빠, 준혁 씨 못 봤어요? 아까까지 밖에 서 있었는데? 안으로 들어오라고 해줘요. 네?”곽진명이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혜인아, 우리 아이들 앞에서는 얘기 안 하기로 했잖아.”“왜 얘기하면 안 되는데요?”윤혜인은 왜 갑자기 이준혁을 꺼내면 안 되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아이의 친부이자 윤혜인의 남편인데 안 되는 이유가 뭔지 도무지 납득이 되지 않았다.윤혜인이 혼자 낳은 아이도 아닌데 말이다.방금 전까지만 해도 부드럽게 그녀를 다독이던 사람이 갑자기 사라졌다는 게 이상했다.“오빠…”윤혜인이 곽경천에게 도움을 청했다.“준혁 씨 좀 불러줘.”“…”곽경천이 잠깐 고민하더니 이렇게 말했다.“혜인아, 내가 어디 가서 찾아줄까?”윤혜인이 말했다.“멀리 안 가겠다고 했으니까 복도에 있을 거야.”곽경천이 한참 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혜인아.”곽진명이 입을 열었다.“이준혁은 진작에…”“아빠.”곽경천이 곽진명을 말리더니 이렇게 말했다.“아이들 데리고 먼저 나가 있어요. 아름이도 잠깐 나가 있어.”곽진명이 윤혜인을 힐끔 쳐다보더니 슬픈 눈빛으로 고개를 끄덕였다.병실은 이
윤혜인은 온몸이 굳어버렸다. 곧이어 눈물이 줄 끊어진 구슬처럼 두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어떻게 이럴 수가…”윤혜인은 믿을 수가 없었고 믿기도 싫었다.“그럴 리가 없잖아. 방금 전까지 나랑 얘기도 나누고 기다리겠다고 한 사람인데…”“혜인아, 진짜야.”곽경천이 그런 윤혜인을 안고 같이 눈물을 흘렸다.꿈을 꾸고 있는 윤혜인의 눈에도 눈물이 가득 차올랐고 시간은 예전으로 돌아갔다.아무런 온도 없는 철문에 영안실이라고 적혀 있었다. 문을 열고 들어간 순간 중간에 놓인 침대에 하얀 천에 가려진 누군가가 누워 있는 게 보였다.윤혜인은 뻣뻣하게 굳은 그 몸을 보자마자 온몸이 파르르 떨렸다.“준혁 씨…”윤혜인이 이준혁의 이름을 부르며 절규했다. 온몸이 갈기갈기 찢기는 듯한 고통이었다.‘왜… 도대체 왜…’하늘은 늘 그랬듯 무심했고 이준혁에게만 매정했다. 순간 운명의 장난처럼 원지민의 목소리가 윤혜인의 귓가에 다시 맴돌았다.‘넌 준혁이를 죽이려고 태어났어. 두 사람이 만난 것부터 잘못이야. 넌 언제가 준혁이를 죽이고 말 거야…’머릿속에 울려 퍼지는 원지민의 말은 지독한 저주와도 같았다.“아니야… 안 돼…”윤혜인이 갑자기 대성통곡했다.“다시 돌려내. 하느님, 저 사람 좀 다시 돌려주세요.”“다시 돌려만 준다면 사랑하지 않아도 돼요…”“그러니 제발 돌려만 주세요…”두 사람의 만남이 잘못이라면 만나지 않아도 된다. 영원히 만나지 못할지라도 말이다.“일어나. 혜인아. 일어나봐…”꿈결에 누군가 부르는 소리가 들려 애써 눈을 떠보니 어렴풋했던 그림자가 점점 선명해졌다. 곽경천이었다.“혜인아, 깼어?”곽경천이 흥분을 감추지 못하며 파르르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아까 윤혜인이 가냘픈 목소리로 아니야, 안 돼라고 외칠 때 곽경천의 마음도 찢어지는 것만 같았다.윤혜인은 멍한 표정으로 앞만 바라보다가 갈라진 목소리로 물었다.“오빠, 그 이…”곽경천이 윤혜인의 생각을 읽어내고는 손을 꼭 잡아주며 말했다.“걱정하지 마. 이준혁은 아직도 수술 중이야.
“그 약에 들어있는 성분에 마침 이 약재가 있어서 제련해 냈는데 이준혁이 깨면 바로 먹을 수 있을 것 같아.”윤혜인은 이 말을 들으면서도 꿈을 꾸는 게 아닌지 의심했다. 아까 꿨던 꿈이 너무 생생해 꿈인지 현실인지 헷갈릴 정도였다.차가운 흰 천에 감싸진 뻣뻣한 시체를 보고 느꼈던 찢어질 듯한 고통이 아직도 뚜렷했지만 이 모든 게 갑자기 큰 전환점을 가져온 것이다.‘설마 하늘이 내 마음의 소리를 들은 건가? 다시 한번 기회를 주는 걸까?’윤혜인이 눈을 감았다가 다시 떴다. 눈앞에 보이는 것이 현실이라는 걸 깨닫고 나서야 윤혜인은 곽경천을 보며 자기 배를 가리켰다.곽경천이 바로 알아채고는 말했다.“아이는 큰 문제 없어. 그냥 네가 많이 놀라기도 했고 영양실조도 있어서 누워서 일주일 정도 몸조리하래.”곽경천은 이미 살짝 불러온 윤혜인의 배를 보며 부드럽게 말했다.“아이들이 참 장난기 가득하면서도 튼튼한 거 같아. 언니를 잘 보호해 줄 수 있겠어.”윤혜인은 시선을 아래로 축 늘어트린 채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었다.곽경천이 그런 윤혜인을 관심하며 말했다.“피곤하면 더 쉬어. 밖에서 기다리고 있을게. 필요하면 부르고.”윤혜인이 고개를 끄덕였다.곽경천이 나가고 윤혜인은 아까 들은 것들을 소화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아까 꿨던 꿈을 그냥 꿈으로 흘려보내려 했다.하지만 이준혁이 죽었다는 걸 안 순간 느꼈던 고통은 정말 너무 생생했다. 도대체 어떤 게 현실이고 어떤 게 꿈인지 잘 구별할 수가 없었다.이튿날.곽경천은 윤혜인에게 물을 따라주며 윤혜인이 하는 손짓과 말을 유심히 보고 들었다.“그 범인…?”윤혜인이 범인의 정보를 묻는다는 걸 알아채고 곽경천이 입을 열었다.“지금까지 나온 조사결과로 보면 찰스 쪽 사람은 아니고 다른 팀 소속인 것 같아. 아직 의문점이 많은 사건이라 나도 조사하고 있어. 여기도 사람 보내서 지키고 있으니까 걱정하지 마.”윤혜인이 종이에 하고 싶은 말을 적었다.“그 사람이 원하는 게 나야?”곽경천이 고개를 끄덕였
마치 이준혁을 전혀 관심하지 않는 사람 같았다. 하지만 그럴 리가 없었다.윤혜인은 모르지만 곽경천은 알았다. 윤혜인은 여러 번 꿈결에 울면서 안 된다고 연신 외쳐댔다. 그 외침이 얼마나 처절한지 듣는 사람의 마음을 갈기갈기 찢어지게 했다.깨어나면 곽경천에게 들키지 않게 간병인에게 젖은 베개 수건을 바꿔 달라고 했다. 곽경천은 그런 윤혜인의 노력을 알고 있었기에 일부러 모른 척했다.그러다 언젠가 윤혜인의 태도를 슬쩍 떠봤다.“이준혁이 깨어나서 두 사람이 다시 만난다 해도 뭐라 하지는 않을게.”이준혁은 윤혜인을 보호하기 위해서라면 목숨도 마다하지 않았다. 바로 이점이 곽경천의 마음을 흔들었다. 이 남자라면 윤혜인이 진심을 다해도 괜찮을 것 같았다.그리고 전에 가져갔던 유서도 이준혁이 가짜 결혼을 하면서 다시 보내왔다.혹시나 자기가 안 좋은 일을 당할까 봐 최대한 윤혜인에게 유리하게 유서 내용을 바꿔서 곽경천의 사무실로 보내왔다.그 결혼식을 올린 것도 윤혜인을 위협하는 찰스를 상대하기 위해서 올린 가짜 결혼식이었다. 모든 진실을 알아버린 곽경천은 더는 이준혁의 흠을 잡을 수가 없었다.이준혁은 애초에 윤혜인과 만날 때 곽경천에게 했던 약속을 하나도 빠짐없이 다 지켰다.이번 기회에 이준혁이 자리를 털고 일어난다면 곽경천도 더는 두 사람 사이를 막을 생각이 없었다.하지만 윤혜인은 이 문제에 대해 침묵했다. 곽경천은 윤혜인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었다.…이준혁은 열흘 넘게 혼수 상태에 빠져 있었다. 처음 며칠이 제일 위험했고 몇 시간에 한 번씩 의사가 상태가 위중하다고 마음의 준비를 하라고 할 정도였다.윤혜인은 겉으로는 덤덤해 보였고 이준혁 얘기를 꺼내지 않았지만 셋째 날 밤 휠체어를 끌고 몰래 이준혁이 있는 병실로 향했다.하지만 중환자실이라 들어갈 수가 없었다.주훈이 분주하게 돌아치다 의사가 위중한 상태를 알릴 때마다 고통스러운 표정을 짓는 걸 보고 가슴이 점점 더 아팠다.윤혜인은 지금 졸병이나 다름없었다. 이준혁의 그 어떤 소식도
이진숙은 원지민에게 아예 관심이 없었고 원씨 가문에 있으면서도 원지민의 괴롭힘을 수도 없이 받았던 터라 원지민이 무슨 짓을 했는지 알고 천만다행이라고 생각했다.그나마 총명했던 이진숙이 빨리 원씨 가문에서 도망 나와서 망정이지 아니면 원지민에게 당했을지도 모른다. 이진숙은 원지민의 유골조차 받으러 가고 싶지 않아 보디가드에게 아무렇게나 처리하라고 시켰다. 얼마나 미웠으면 묫자리 하나도 사주기 싫어했다.원지민의 결말이 아무리 비참해도 윤혜인은 전혀 동정이 가지 않았다. 그런 짓을 저지를 때부터 이런 결말을 가져올 거라는 걸 알아야 했다.원지민이 정말 미래를 내다봤다면, 그래서 결국 이런 결말을 맞을 거라는 걸 알았다면 과연 이런 짓을 저지르지 않았을까…윤혜인을 죽이려고 한 남자에 관해 여은이 조금 알아냈다. 그 남자도 북안도에서 온 사람이었다.북안도, 윤혜인은 그 지명을 들을 때마다 이상했다. 가본 적도 없는 섬인데 도대체 무슨 원한이 있길래 죽이지 못해 안달 난 건지 궁금했다.하지만 윤혜인은 아직 힘이 부족했기에 섣불리 조사할 엄두가 나지 않았다.곽경천은 이에 관해 자기가 조사할 테니 걱정하지 말라고 했다.그렇게 병원에서 보름 정도 더 입원해 있는데 좋은 소식이 날아왔다.이준혁이 깨어났다는 소식이었다.아직 눈만 깜빡일 뿐 침대에서 일어나지도, 말할 수도 없어 아무 의사 전달도 하지 못했다.게다가 약물 중독에 무릎 골절, 그리고 총상 합병증까지 더해져 아직 시름 놓기는 어려웠다.김성훈은 심사숙고 후 이준혁이 깨어난 지 3일째가 되는 날 수술로 이준혁의 몸에 해독제를 심어 넣기로 했다.독액이 이준혁의 체내에 남아있으면 자체의 치유 능력이 떨어져 아무리 치료해도 결국 눈만 깜빡일 수 있는 정도로 회복하고 다른 건 아무것도 못 할 것이다.수술 전날 김성훈이 윤혜인을 찾아왔다.김성훈은 여전히 친화력 있고 유머러스했다. 마음속으로 친구의 건강을 걱정했지만 그 초조함을 다른 사람에게 전파하지는 않았다.특히 윤혜인처럼 조용히 몸조리해야 하는 경우
“네.”주석훈은 전화를 끊고 직원증의 사진을 꺼내 그 위에 있는 예쁜 여자를 깊게 바라보았다.그러고는 사진을 얼굴에 대고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수정아, 봤지? 하늘도 나를 도와주는 것 같아. 아니면 네가 나를 돕는 거야?”사진 속의 여자를 보는 주석훈의 눈가에 어느새 눈물이 흘러내렸고 눈에는 그리움이 가득했다.이때 주석훈의 가방 안에 있던 또 다른 전화기가 울렸다.번호를 확인한 주석훈은 눈을 가늘게 뜨며 잠깐 머뭇거리다가 전화를 받았다.전화기 너머로 공포에 질린 여자 목소리가 들렸다.“제트 님, 제발 도와주세요...”주석훈이 물었다.“내가 어떻게 도와주면 되지?”상대방이 잠시 망설이다가 말했다.“저... 외국으로 보내 주세요.”“하하...”주석훈의 웃음소리가 갑자기 사악해졌다.“아직도 정신을 못 차렸네.”“저... 저는 제트 님의 비밀을 알고 있어요. 많은 사람들이 제트 님의 뒷조사를 하고 있다는 걸 알잖아요. 내가 잡히면 이 비밀을 지킬 수 없을 거예요.”상대방의 떨리는 목소리에 주석훈이 한마디 했다..“많이 똑똑해졌네?”“나도 어쩔 수 없으니까요. 제트 님, 돈만 주시면 멀리 외국으로 떠나서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게요.”몇 초 동안 생각에 잠긴 주석훈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얼마면 되는데?”“5천만 원이요.”전화기 너머로 금액을 말한 여자는 혹시라도 주석훈이 화낼까 봐 설명을 덧붙였다.“적어도 5천만 원은 있어야 외국에서 살 수 있어요.”주석훈이 싸늘한 목소리로 말했다.“이틀 동안은 시간이 없어. 모레 밤에 항구에서 보자.”“아니요, 제트 님!”상대방은 경계하며 말했다.“우린 만날 필요는 없을 것 같아요. 제트 님이 돈을 그곳에 두시면 제가 가서 가져갈게요.”주석훈이 코웃음을 친 뒤 말했다.“알았어. 항구에 둘게, 시간은 다시 알려주지.”“지금은 안 될까요...”전화기 너머의 여자는 매우 급한 듯했다.“나와 흥정할 생각하지 마!”주석훈이 싸늘한 목소리로 경고했다.“알겠어요...”전화가 끊
황진수가 엘리베이터를 타고 들어간 후 소원은 한동안 제자리에 서 있다가 병실로 돌아왔다.주석훈이 죽을 다 먹고 소원에게 말했다.“소원 씨, 이만 돌아가세요. 여기는 의사와 간호사가 많으니까 나 혼자 있어도 괜찮아요. 소원 씨에게 폐 끼치고 싶지 않아요.”소원은 밤에 유진을 보러 갈 예정이었기에 진짜로 돌아가야 했다.주석훈을 위해 간병인을 구하려고 했지만 지금 상태로는 간병인을 찾기 어려웠다. 감염 여부가 확실하지 않았기 때문에 아무도 이런 환자를 돌보려 하지 않았다.이제 막 열이 내린 주석훈은 소원의 고민을 알아채고 농담을 던졌다.“소원 씨, 걱정하지 마요. 이렇게 큰 병원에 있는데 설마 죽기라도 하겠어요?”소원은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물었다.“이번 일, 여자친구에게 말씀하셨나요?”“여자친구요?”주석훈이 멍해 있자 소원이 급히 말했다.“방금 물컵을 들다가 변호사님의 직원증을 떨어뜨렸어요. 죄송해요, 일부러 본 건 아니에요. 여자친구 사진인 것 같아서...”소원의 말을 들은 주석훈은 별다른 표정변화가 없었지만 소원이 보기엔 약간 어두워진 것 같았다.평소 밝고 남을 잘 돕는 그의 얼굴과 조금 달랐지만 이내 평소와 같은 차분한 얼굴로 돌아왔다.“여자친구 맞아요. 하지만 이미 이 세상에 없어요.”몇 초 동안 충격에 빠졌던 소원이 말을 이었다.“죄송해요. 몰랐어요.”“괜찮아요. 이미 오래된 일이니까.”주석훈의 말에 소원이 한마디 했다.“정말 예쁘더라고요.”그러자 주석훈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맞아요. 잘 웃고 또 성격도 좋았어요. 그리고 동물들도 정말 좋아했죠.”소원은 왠지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 온화해 보이던 여자가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니...두 사람이 몇 마디 더 나눈 후, 주석훈이 소원에게 얼른 돌아가라고 재촉했다.주석훈의 말에 소원도 내일 다시 오겠다고 말하며 자리를 떴다. 그리고 밤에 무슨 일이 생기면 꼭 연락하라고 당부했다.주석훈이 고개를 끄덕였다.소원이 떠난 지 얼마 되지 않아 주석훈의 전화벨 소리가
황진수가 잠깐 뜸을 들이더니 말했다.“미우 그룹에서 진행하는 프로젝트가 많은데 하나같이 대표님의 권한을 기다리고 있어요. 게다가 회의도 많아서 시시각각 대표님 곁을 지킬 수가 없어요. 많은 사람들이 대표님 복귀를 기다리고 있는데 저도 속이 바질바질 타요. 대표님이 빨리 업무 복귀하셨으면 좋겠어요.”황진수은 소원에게 왜 육경한을 보러 오지 않냐고 대놓고 질책하지 않고 월급쟁이로서 얼마나 난처한 상황인지만 얘기했다. 이렇게 되면 가스라이팅까지는 아니지만 누구든 부담 없이 받아들이고 수락하게 될 것이다.하지만 소원은 바로 고개를 돌리지 않고 이렇게 말했다.“비서님, 수고하셨어요. 시간 되면 그때 찾아갈게요.”가겠다고 명확히 말하지 않고 시간 될 때 찾아간다고 말했다. 지금 바로 병원인데 시간이 안 될 것도 없다고 생각했지만 황진수도 이 말까지 할 엄두는 나지 않았다.“그러면 소원 씨, 일 보세요. 일 끝나면 대표님 좀 꼭 보러 오시고요.”소원이 고개를 끄덕이더니 컵을 들고 자리를 떠났다. 수액실로 돌아와 보니 주석훈은 자리에 누워 잠들어 있었다.소원은 딱히 깨우지 않고 옆에서 조용히 기다렸다. 주석훈 눈에 난 다크서클만 봐도 밤에 잠을 잘 자지 못했다는 걸 알 수 있었다.하기 그렇게 큰일이 일어났는데 그 누구든 잠이 오지 않을 것이다. 주석훈의 정서도 다른 사람에 비하면 이미 너무 안정적인 편이었다.침을 뺄 때가 되자 주석훈이 잠에서 깨 간호사를 불렀다. 안으로 들어온 간호사는 역시나 중무장하고 들어왔다. 병원 측은 주석훈의 상황을 대비해 수액실도 단독으로 만들어놓은 상태였다. 바늘을 뽑은 간호사들은 주석훈에게 오늘 밤 다시 열이 나는지 체크해야 하므로 밖에는 나가지 말라고 당부했다.주석훈은 아직도 병실에 남아있는 소원을 보며 멋쩍게 말했다.“소원 씨, 정말 너무 고마워요. 이렇게 옆에서 있어 주기 힘든데.”“괜찮아요.”소원이 말했다.“마땅히 해야 할 일인데요.”소원이 물을 주석훈에게 건네주는데 핸드폰이 올렸다. 배달 기사가 걸어온 전
소원은 즉시 병원으로 향했다. 주석훈은 이번에 병원을 바꿔 제일 대학병원으로 향했다. 이곳에 있는 전문가들이 이런 유형의 감염류 질병에 더욱 풍부한 경험을 가지고 있었다.소원이 도착하자 수액을 맞던 주석훈이 놀란 표정으로 물었다.“소원 씨, 여긴 어쩐 일이에요?”소원이 말했다.“마침 근처로 왔다가 얼굴이나 보려고 왔죠.”소원은 주석훈이 신세 지기 싫어한다는 걸 알고 있었기에 주석훈을 보기 위해 찾아왔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주석훈의 창백해진 얼굴이 상태가 별로 좋지 않음을 말해주고 있었다.“목마르죠? 물 좀 마실래요?”주석훈은 목이 마르지 않았지만 목이 불편해 이렇게 말했다.“괜찮으면 소원 씨가 뜨거운 물 좀 따라줄래요?”“그래요. 지금 바로 다녀올게요.”소원이 말했다.“컵은 내 가방에 있어요. 움직이기 불편하니까 소원 씨가 좀 가져다줘요.”소원이 주석훈의 가방에서 컵을 꺼내다 주석훈의 사원증이 딸려 나왔다. 사원증 뒷면에 사진 한 장이 들어 있었는데 보관 상태가 아주 양호했다. 사진에 보이는 여자는 밝고 수수하고 웃음이 참 예쁜 사람이었다.소원은 그 사람이 주석훈의 여자 친구라고 생각했다. 본적도, 그렇다고 들어본 적도 없는 여자였지만 그래도 사진을 사원증 뒷면에 넣어두고 다닌다는 건 무척 사랑한다는 의미였다.주석훈은 머리가 흐리멍덩한 상태라 무슨 상황이 벌어졌는지 알지 못했다. 소원이 사원증을 다시 집어넣고는 뜨거운 물 받으러 갔다.뜨거운 물을 받고 왔던 길로 돌아가는데 마침 육경한의 비서 황진수가 보였다. 황진수는 소원을 보고 헤벌쭉 웃으며 물었다.“소원 씨, 혹시 대표님 보러 오셨어요?”소원은 황진수의 열정에 살짝 난감한 기색을 보였다.“아니요.”황진수는 소원이 들고 있는 남성용 컵을 보며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친구가 홍콩에 있어서요.소원이 설명했다.“아 그래요?”황진수의 말투에서 실망이 묻어났다. 소원이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고 자리를 떠나려는데 황진수가 입을 열었다.“소원 씨, 우리 대표님 좀 보러 가주실
소원은 지금 이 상황이 너무 어이가 없었다.“이 사람 도대체 어떻게 된 거예요?”소원이 언짢은 표정으로 취객과 함께 온 사람을 바라봤다. 동행한 사람은 주석훈 손에 난 상처를 보고 깜짝 놀라더니 연신 이렇게 말했다.“미안합니다. 미안합니다. 술에 취해서 그렇지 일부러 그런 건 아니에요. 미안합니다. 내가 대신 사과할게요...”주석훈은 동행자의 태도가 좋자 손을 휘휘 저으며 말했다.“됐어요. 얼른 데리고 올라가요.”취객이 여전히 중얼거리며 말했다.“음냐... 맛있다. 음냐...”엘리베이터 문이 닫히는데 주석훈이 여전히 앞에 서서 그들이 떠나가길 기다렸다. 소원은 주석훈 손에 난 상처가 걱정되어 이렇게 말했다.“주 변호사님, 상처 아무래도 소독해야 될 것 같은데요.”주석훈이 말했다.“괜찮아요. 그렇게 성가실 필요는 없어요.”소원은 그래도 시름이 놓이지 않아 이렇게 말했다.“치료해요. 어차피 지금 병원이잖아요. 상처 처리하는데 뭐 얼마나 걸린다고.”주석훈은 소원의 권고에 치료하러 향했다. 간호사가 바쁘다 보니 한참 기다려서야 소독할 수 있었고 치료를 마쳤을 땐 이미 30분이 훌쩍 지나 있었다. 주석훈이 다시 휠체어를 밀어주려는데 소원이 이미 자리에서 일어났다.“주 변호사님, 저는 괜찮아요. 이제 휠체어 안 타도 돼요. 다 나았는데 앉아 있으려니까 낯 간지럽네요.”주석훈은 소원의 상태가 확실히 괜찮아 보이자 휠체어에 앉으라고 강요하지 않고 다시 원래 자리로 가져다 놓더니 나란히 엘리베이터로 향했다. 입구에 도착하자마자 당황한 기색의 간호사 두 명이 토론하는 게 들렸다.“너 그거 알아? 큰일 났대.”“무슨 일?”“아까 실려 온 환자가 있는데 혈액 검사를 해보니 에이즈래. 그 환자와 접촉한 사람은 전부 검사받아야 한다던데?”“뭐? 접촉한 사람은 다 받아야 한다고? 그런 병이 있다고 직접 밝히진 않았나 보지?”일반적으로 이런 유형의 환자는 병원에서도 매우 조심스러웠지만 소수의 환자가 병을 속여서 혈액으로 감염이 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소원이 얼른 말했다.“괜찮아요. 정말 괜찮아요. 그저 배가 좀 아파서 병원에 왔는데 친구 차 타고 왔어요.”원보경은 그제야 한시름 놓았지만 여전히 걱정스러운 말투로 말했다.“어느 병원에 있어요? 제가 지금 바로 갈게요.”“아니에요.”소원은 원보경도 술을 적지 않게 마셨다는 생각에 이렇게 말했다.“얼른 들어가서 쉬어요. 나는 정말 괜찮아요. 수액만 다 맞으면 집으로 갈 거예요.”“어떻게 그래요? 제가 그쪽으로 갈게요.”원보경은 여전히 시름을 놓지 못했다.“정말 그럴 필요 없어요.”소원이 말했다.“조금 이따 친구가 데려다줄 거예요. 여기 멀리 떨어져 있어서 보경 씨 도착할 때쯤이면 진작 수액 다 맞았을 거예요. 병원에서 기다릴 바엔 차라리 두 사람 다 집에 가서 쉬는 편이 나아요.”원보경은 그제야 포기하고 여러 번 당부하더니 전화를 끊었다. 전화를 끊은 소원은 아직도 남아있는 주석훈을 보며 이렇게 말했다.“주 변호사님도 얼른 들어가요. 많이 나아져서 이제 혼자 들어가도 돼요.”소원이 아까 그렇게 말한 건 수고한 원보경이 여기까지 오는 걸 막으려고 그랬다. 지금은 몸이 많이 좋아졌으니 이제 혼자서도 돌아갈 수 있을 것 같았다.주석훈이 말했다.“그럴 순 없죠. 친구한테 나라는 친구가 이따 태워다 준다고 말했는데 약속 지켜야죠. 이따 바래다줄게요.”소원은 주석훈의 농담에 웃음이 터졌다. 주석훈은 성격이 밝았기에 같이 있으면 꽤 편했다.“그래요.”소원도 이미 신세를 진 이상 끝까지 신세 지기로 마음먹고는 딱히 거절하지 않았다. 소원은 속으로 주석훈을 위해 좋은 선물을 하나 골라야겠다고 생각했다. 현금으로 주면 너무 속물 같아서 주석훈이 받지 않을 것 같았다.게다가 주석훈은 확실히 이미 협의한 비용 외에 다른 비용은 받지 않았다. 이렇게 많이 도와줬는데 소원도 그냥 넘어가긴 마음이 걸렸다.수액이 끝나자 주석훈이 간호사를 불러와 바늘을 빼고는 휠체어를 끌어왔다. 소원은 앞에 놓인 휠체어를 보고 이렇게 말했다.“이... 이건 필요 없지
소원은 운전기사의 성격이 이렇게 불같을 줄은 몰랐다. 이제 정말 운전기사를 하나 뽑아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임신한 관계로 차를 직접 운전할 수가 없어 맨날 차를 잡고 다녔는데 확실히 불편한 점이 많았다. 차를 다시 잡으려는데 어떤 차가 앞에 멈춰 섰다. 차창이 열리고 운전석에 앉은 남자가 소원을 보더니 놀란 듯 물었다.“소원 씨? 소원 씨가 왜 여기 있어요?”소원도 이런 난감한 상황에 주석훈을 만날 줄은 몰랐다. 쪽팔리지만 택시 기사가 길가에 내려주고 그냥 가버렸다는 얘기를 털어놓을 수밖에 없었다.주석훈이 씩씩거리며 말했다.“해도 해도 너무하네. 어떻게 소원 씨를 길가에 버려두고 가요. 위험한데.”주석훈이 운전석에서 내려 조수석 문을 열어줬다.“타요. 데려다줄게요. 시간이 늦어서 택시 잡아서 가는 건 위험해요.”맞는 말 같아 소원은 주석훈의 차에 올랐다.“근데 어떻게 이런 우연이 다 있어요. 마칠 퇴근하는데 길에서 소원 씨를 만나다니.”주석훈이 말했다.“그러게요. 기막힌 우연이네요. 아참, 저번 일은 고맙다는 인사도 못 드렸네요. 고마워요. 주 변호사님.”소원은 그날 현장에서 주석훈이 육연주를 제압한 일에 대해 정식으로 인사했다. 위급한 상황이었지만 주석훈도 주저하지 않고 바로 달려왔다. 다만 육경한이 더 가까이 서 있어서 소원을 구한 것이다. 그것 외에 재판에 관한 일도 성심성의껏 소원을 대신해 타이르고 있었다.“별말씀을. 소원 씨, 우리 안 지 꽤 오래 지났는데 친구라고 해도 되는 거 아니에요?”주석훈은 늘 성격이 서글서글하고 온화했다. 가끔 소원은 주석훈을 화나게 하는 일이 이 세상에 과연 있을까 생각해 본 적도 있었다.“아무튼 감사 인사는 꼭 전하고 싶었어요.”소원이 말했다.“그러면 소원 씨 시간 될 때 밥이나 한번 사줘요.”주석훈이 말했다.“당연하죠.”소원이 웃으며 대꾸했다.주석훈은 소원의 목적지가 병원인 줄 몰랐기에 집으로 가는 줄 알고 그쪽으로 차를 몰았다. 전에 가본 적이 있어서 주소가 어딘지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소원은 이상한 낌새를 눈치챘고 원보경을 해고할 마음이 생기기 시작했다.알고 보니 원보경은 한이 그룹으로 오기 전 미우 그룹에서 일한 적이 있었다. 사실 소원은 처음부터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원보경처럼 말도 잘하고 여러 방면으로 능력이 뛰어나려면 일개 영업팀 직원이 아닌 전문적인 훈련을 받은 사람이어야 했다.그러다 원보경이 미우 그룹에서 일하던 사원이라는 걸 알고 모든 퍼즐이 맞춰졌다. 그리고 이렇게 대단한 사람이 왜 한이 그룹처럼 작은 회사에 남으려 하는지도 알 것 같았다.소원은 육경한의 그 어떤 도움도 받고 싶지 않았기에 엄숙하게 원보경에게 사직을 권고했지만 원보경이 오히려 이렇게 말했다.“대표님, 제가 대표님 회사로 온 건 돈을 벌기 위해서 온 거지 시간 때우려고 온 게 아닙니다. 미우 그룹에서 일한 적이 있는 건 사실입니다. 여기로 오기 전에 여러 큰 기업에서 제 이력서를 통과했지만 결국엔 미우 그룹에서 나와 한이 그룹을 선택했습니다. 원인이라면 이곳에서는 제 능력을 인정받을 수 있지만 미우 그룹을 포함한 다른 회사는 워낙 인재가 많으므로 제가 알고 있는 방법은 써먹을 기회도 없을뿐더러 얄팍한 수단이라고 여겨지기도 했습니다.”“큰 기업에는 저보다 능력 좋은 사람이 수두룩합니다. 외모도 빼어난 게 없고 능력도 특출난 건 아닌데 동료들과 이익 다툼도 해야 하니 너무 힘들었어요. 그렇게 여러모로 생각하고 검토한 결과 한이 그룹으로 오는 걸 선택했습니다. 육 대표님이 보내서 온 게 아닙니다.”“사실 육 대표님이 황 비서님께 빠릿빠릿한 사원을 뽑으라고 해서 저는 선택받지 못했고 더 노련한 분이 선택받았는데 미우그룹을 떠나 전망도 모르는 작은 회사로 가지 않으려 했습니다.”“하지만 저는 한이 그룹 자료를 찾아보고 황 비서님께 먼저 지원한 사람입니다. 황 비서님도 제가 의향이 강하니까 결국 저를 선택해 주셨어요. 게다가 미우 그룹에서 이미 퇴사해서 제가 모실 분은 이제 육 대표님이 아닙니다. 제가 여기 남으려고 한 건 제 능력을 인
집으로 돌아간 소원은 일단 다른 건 제쳐두고 잠부터 잤다.사실 황산이 하늘에 흩뿌려졌을 때 소원도 마음속으로 너무 두려웠다. 여자라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건 더 말할 것도 없었다. 몸에 난 상처는 옷으로 가려본다 해도 얼굴은 어떻게 가려도 가려지지 않았다. 게다가 황산으로 인한 상처는 아무리 돈을 들여도 완전히 회복할 수 없는 상처였기에 영향이 매우 컸다.같은 여자로서 어떻게 그렇게 악독한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절체절명의 순간 육경한이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뛰어왔는데 소원도 사람인지라 고마움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소원이 육연주를 먼저 건드린 것도 아니고 육경한이 오냐오냐 키우지만 않았다면 육연주가 이렇게 무법천지가 될 일도 없었다. 이렇게 생각하면 소원의 마음속에 생겼던 감격도 많이 줄어들었다.육경한은 사람에게 잘해줄 때 적정선이라는 게 없었다. 그리고 이번에 자기가 심어놓은 화근에 걸려들고 말았다.한잠 자고 일어난 소원은 정신이 말짱해졌다. 그 뒤로도 병원은 가볼 시간이 없었다. 육경한이 입원해 있는 동안 소원은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낮에는 한이 그룹 일로 바빴다. 회사는 진작 등록해 아버지가 하던 사업을 이어가고 있지만 다시 일어서는 게 생가보다 너무 어려웠다.몇 년간 여러 기업이 생겨나고 바뀌면서 한이 그룹 같은 오래된 기업은 에너지 영역에서 우세를 차지할 수 없게 되었다.게다가 처음엔 능력 좋은 사람들을 채용하지 못해 혼자서 여러 사람의 업무를 도맡아 하느라 보고서도 만들고 회의도 하고 프로모션도 해야 했다.일이 너무 많기도 했고 임신 초기라 마침 피곤할 때였기에 거의 매일 휴식이 모자란다는 생각만 들었다. 게다가 저녁이 되면 유진도 봐야 했고 중간중간 짬을 내 요양원에 어머니 보러도 가야 했다. 그러니 자연스럽게 육경한이 입원해 있다는 사실은 뒷전이 되고 말았다.소원이 이렇게 미친 듯이 일하는 것도 돈을 조금이라도 더 벌어서 두 아이가 원하는 걸 선택할 권리를 가질 수 있도록, 누군가에게 잡혀 살지 않아도 되도록 해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