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혜인은 화장실에서 정신없이 구토하고 나서 얼굴을 씻고 휴대용 가글을 꺼내 입을 헹궜다.이제 나가려는데 세면대 쪽에 한 여자가 서 있는 것이 보였다.그 여자의 몸은 술 냄새와 함께 바비큐 냄새가 섞여 있었고 느끼하면서도 매운 향이 풍겨왔다.윤혜인은 순간적으로 입과 코를 막았다. 다시 구토가 밀려왔기 때문이다. 화장실로 돌아가 다시 토를 하고 나서야 겨우 나왔다.그런데 그 여자는 아직도 원 자리에 있었다.“아가씨, 괜찮아요?”그 여자는 방금 물로 몸을 닦았는지 이전보다 훨씬 깨끗해졌고 냄새도 거의 나지 않았다.윤혜인은 살짝 코를 막으며 말했다. “괜찮아요. 괜찮습니다.”그 여자는 미안한 듯 말했다.“죄송해요. 아까 웨이터랑 부딪혀서 음식이랑 술이 제 몸에 다 쏟아졌거든요. 냄새가 너무 심하죠?”그러자 윤혜인은 손을 흔들며 말했다.“아니에요. 제 문제예요. 요즘 제가 냄새에 좀 민감해서요.”이 말에 여자는 밝게 웃으며 말했다.“아가씨, 보니까 상태가 제가 임신했을 때랑 똑같은데요? 혹시 임신하신 거 아니에요?”잠시 멈칫하며 윤혜인은 대답하지 않았다.낯선 사람의 지나친 친절에는 항상 경계심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그 여자는 윤혜인에게 알코올이 함유되지 않은, 자극 없는 물티슈를 건넸다.“이거요. 임산부도 쓸 수 있는 거예요.”윤혜인은 상대의 호의를 거절할 수 없어 물티슈를 받으며 말했다.“감사합니다. 근데 전 그냥 위가 안 좋아서 그렇지 임신은 아니에요.”상대는 친절해 보였지만 윤혜인은 그 여자가 질문하는 방식이 꽤 무례하다고 느꼈다. 자신이 임신했다고 한 적도 없는데 계속 임신을 암시하는 질문을 하니 뭔가 불편했다.더군다나 오늘 윤혜인은 검은색 하이웨이스트 트렌치코트를 입고 있었는데 허리선이 위로 올라가 있어 외투를 벗지 않는 이상 배가 전혀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도 왜 그 여자가 자꾸 임신 이야기를 하는지 알 수 없었다.여자는 웃으며 말했다.“미안해요. 제가 착각했나 봐요.”윤혜인은 웃으며 대답했다.“괜찮아요.”
원지민은 점점 더 확신이 들었다.‘그래, 윤혜인은 다른 남자의 아이를 가진 게 틀림없어. 준혁이를 정말 사랑하는 줄 알았는데 헤어진 지 얼마 되지도 않아 다른 남자와 엮어 아이까지 가지다니... 수년간의 정이 참 가볍기도 하네. 역시 천박한 여자는 변하지 않지,’원지민은 속으로 비웃었다.이 상황을 이준혁에게 빨리 말하고 그의 표정을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남자들은 대개 자기 전 여자가 다른 남자와 엮이는 일을 싫어할 테고 특히 그것도 헤어진 지 얼마 되지 않았으니 말이다.이준혁의 태도를 생각하니 원지민은 당장 전화를 걸어 이 소식을 직접 알리고 싶었다.윤혜인의 진짜 모습을 그가 알 수 있도록 말이다.그러나 혹시 잘못된 정보일까 봐 조심스럽게 다시 물어보았다.“정말 확실해? 임신한 게 맞아?”그러자 비서는 의자를 끌어와 원지민 옆에 앉으려 했다.하지만 원지민은 코를 막고 손을 휘저으며 조금 떨어져 앉으라고 지시했다.그 비린내는 도저히 참을 수 없는 것이었다. 임신한 사람으로서는 더더욱 그 냄새를 참을 수 없었다.비서는 쑥스러운 듯 웃으며 의자를 멀찍이 끌어가며 말했다.“제가 들어갔을 때 또 구토를 하더라고요. 그래서 물어봤는데 임신은 아니라고 부정하더라고요. 그래서 다시 한번 시도해봤죠. 일부러 부딪칠 듯이 다가갔는데 첫 반응이 배를 감싸는 거였어요. 그러니 임신이 아니면 뭐겠어요?”원지민은 임신 후 육감이 예민해져서 그런지 한눈에 보고 윤혜인이 임신했을 가능성을 의심했었다. 그런데 그게 사실로 밝혀진 것이다.비서는 경험이 많은 듯 덧붙였다.“제 생각엔 아직 초기인 것 같아요. 보통 임신 5개월 이전에는 배가 잘 드러나지 않거든요. 5개월 이후부터 조금씩 배가 불러오고 7,8개월쯤 되면 크게 부풀어요. 제 짐작으로는 3,4개월 정도 된 것 같아요.”“3,4개월...”그 말을 듣고 멍해진 원지민은 얼굴에 당혹스러운 듯한 기색이 스쳐 갔다.‘이 시기는... 혹시 아이가 준혁이의 아이일 수도 있지 않을까?’원지민의 눈빛이 어두워
원지민은 자신이 계획한 대로 이준혁이 남은 인생 동안 자신을 위해 재부를 창출해줄 것이라고 확신했다.어차피 그는 자신이 어떻게 변해갈지 모를 테니 말이다.그러나 지금 윤혜인의 임신으로 인해 일이 꼬일 가능성이 생겼다.그리고 원지민은 절대 그런 변수가 생기는 것을 용납할 수 없었다.그녀의 손은 점점 더 꽉 쥐어져 거의 젓가락을 휘게 만들 정도였다.모든 것이 완벽하게 계획되었지만 윤혜인의 임신이 모든 것을 예측 불가로 만들고 있었다.그렇다면 그 아이를 정말 무사히 낳을 수 있을지 두고 보자는 심정이었다.한편, 윤혜인은 식사를 마치고 염료 공장 사장 부인과 잠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식사를 마치고 두 사람은 내려갈 준비를 하고 있었다.마침 그때 아름이가 영상 통화를 걸어와 윤혜인은 잠시 걸음을 멈추고 아름이와 대화를 나눴다.약 5분 정도 이야기한 후, 윤혜인은 아름이에게 말했다.“아름아, 엄마 이제 차로 갈 거니까 차에 타면 다시 이야기하자. 알겠지?”“네, 엄마! 바이바이!”아름이는 화면을 향해 공중에 키스를 날리며 인사했다.윤혜인은 미소 지으며 아쉬운 마음으로 통화를 끊었다. 곧 딸을 만날 수 있다는 생각에 윤혜인의 눈빛은 따뜻해졌다.몇 걸음 걷다가 지나가던 직원이 그녀에게 말했다.“앞에 바닥에 기름이 흘러서 미끄러워요. 가게에서 청소 중이니까 뒤쪽 문으로 나가세요.”앞을 보니 확실히 기름이 잔뜩 흘러 있었다. 하여 윤혜인은 혹여라도 미끄러질까 봐 겁이 나 뒤쪽 문으로 향했다.그런데 후문에 도착하자마자 마주치고 싶지 않은 사람과 눈이 마주쳤다. 예상치 못한 곳에서 원지민을 만나게 된 것이다.윤혜인은 속으로 오늘 운이 정말 없다고 생각했다. 굳이 그녀에게 시선을 줄 필요도 없다고 느끼며 피하려고 했지만 원지민이 먼저 말을 걸어왔다.“혜인 씨, 여기서 우연히 만나네요?”그러나 윤혜인은 눈길 한번 없이 원지민과 대화할 마음이 없다는 듯이 몸을 비켜 지나가려고 했다.그런데 원지민이 그녀의 팔을 잡으며 말했다.“왜 이렇게 그냥
윤혜인은 고개를 돌려 물었다.“곽씨 가문의 여자들이라뇨?”순간 당황하며 원지민은 자신이 말실수를 했다는 것을 깨달았다.자칫하면 윤아름에 대한 소식을 말해버릴 뻔했다.이건 자신이 최근 아버지 원정호의 심복으로부터 들은 이야기였다. 정확하지는 않았지만 윤아름이 원진우에게 숨겨져 있을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었다.‘천재 소설가라더니... 결국 남편도 버리고 이름도 없이 우리 삼촌이랑 지내고 있는 거야?’원지민은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혜인 씨 말이에요. 혜인 씨도 곽씨 가문이 여자잖아요.”하지만 윤혜인은 그 말을 똑똑히 들었고 쉽게 넘어가지 않았다.“방금 곽씨 가문의 여자들이라고 했잖아요. 여자들이라는 게 누구를 말하는 거죠?”원지민은 잠시 표정이 굳어졌지만 곧 태연한 척 말했다.“말실수였어요. 근데 가족들을 그렇게 챙기고 싶어요? 곽씨 가문에는 애인들을 많이 두나 보죠?”윤혜인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저희 곽씨 가문에는 그런 사람 없습니다. 근데 제 앞에 있네요. 진짜 불륜녀.”그러자 원지민은 이를 악물더니 윤혜인을 쏘아보았다.“지금 무슨 헛소리 하는 거예요?”“헛소리라뇨?”윤혜인은 미소를 유지하며 말했다.“예전에 제가 준혁 씨랑 아직 부부일 때 원지민 씨가 직접 나서서 저한테 자기가 준혁 씨의 약혼녀라고 말하지 않았었나요? 심지어 내가 알았으면 그만이지 언론을 통해 자신이 약혼녀라고 홍보까지 했었잖아요.”“너!”원지민은 얼굴이 빨갛게 달아오르고 목에 핏줄이 선명하게 드러난 채 소리쳤다.“닥쳐!”그러자 윤혜인은 미소를 지으며 입꼬리를 올렸다.“원지민 씨, 나 건드리지 마요. 어차피 난 그쪽 신경쓰지 않거든요. 하지만 계속 이렇게 날 도발하고 싸움을 걸면 원지민 씨의 치부를 모두 드러낼 수도 있어요. 다시 한번 말하지만 난 이준혁 씨한테 관심 없습니다. 그리고 전 도덕을 어기는 일은 절대 하지 않을 거예요. 정말 이선 그룹 대표 아내가 되고 싶으면 그 자리를 확실히 지키고 나서 얘기해요.”이 말에 원지민의 얼굴은 창백해졌다.
원지민의 눈빛은 잔인했고 그 깊고 어두운 눈동자는 마치 독을 품은 전갈처럼 끔찍한 악의로 가득 차 있었다.그 장면을 놓칠 리 없었던 윤혜인은 마음속에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즉시 자리를 피하려 했으나 그때 원지민이 갑자기 외쳤다.“살려줘요. 혜인 씨, 나... 나도 임신한 몸이라고요...”처음엔 그 말이 이해되지 않았지만 원지민이 쓰러지는 방향을 보고 윤혜인의 눈이 커졌다.원지민의 허리가 탁자 모서리를 향하고 있었다.지금처럼 배가 불러 있는 상태에서 그렇게 부딪치면 태아에게 치명적인 위험이 닥칠 것이 분명했다.순간적인 본능으로 윤혜인은 망설임 없이 손을 뻗었다.그러자 원지민의 눈에 순간적으로 한 줄기 사악한 빛이 번졌고 입가에 미소가 슬며시 번졌다.그녀는 이 모든 상황을 예상이라도 한 듯했다.윤혜인은 이미 원지민의 손바닥 안에 있었다.원지민 또한 손을 뻗으며 이를 악물었다. 그녀는 윤혜인을 잡아채서 문 옆에 있는 선반에 세게 부딪치게 만들 생각이었다.하지만 두 사람의 손끝이 닿는 순간, 윤혜인은 갑자기 멈췄다.원지민의 목적이 담긴 눈빛을 뚫어지게 보던 윤혜인은 단호하게 손을 거둬들였다.그 순간, 원지민의 얼굴이 순식간에 창백해졌다.그녀는 이 순간만큼은 윤혜인이 반드시 손을 내밀 거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그동안 착하고 쉽게 마음을 주는 그녀가 이렇게 중요한 순간에 손을 뻗지 않을 거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아아아!!!”원지민의 비명이 실내를 가득 채웠다.허리가 탁자 모서리에 세게 부딪치며 그녀는 고통스러운 표정으로 바닥에 주저앉았다. 곧 다리 밑에서 대량의 붉은 피가 흘러나와 현장은 마치 끔찍한 재난 현장 같았다.윤혜인은 아무런 감정도 없는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았고 원지민은 믿을 수 없다는 듯 윤혜인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목소리를 쥐어짜냈다.“너... 너... 너...”몇 번이나 ‘너’라고 말했지만 그 이상의 말은 하지 못했다.언제부터 윤혜인이 이렇게까지 냉정하고 잔인해졌는지 원지민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윤혜
윤혜인은 조금 전 상황을 명확하게 읽어냈다.음모로 가득 찬 원지민이 단순히 넘어진 것으로 도움을 요청하려는 것이 아님을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이건 분명 윤혜인을 함정에 빠뜨리려는 술책이었다.원지민은 분노에 찬 표정으로 고통을 견디며 하마터면 기절할 지경이었다. 만약 몸이 따라줬다면 이미 윤혜인의 배를 손으로 찢어버렸을지도 모른다.“천하의 나쁜 년!”그녀는 이를 갈며 숨을 헐떡이고는 몇 번이나 욕을 퍼부었다.윤혜인은 분노에 찬 원지민이 수치심을 느끼는 것을 보고 조금 전의 행동이 잘한 선택임을 더욱 확신했다.선의는 자신을 지킬 수 있을 때 만 가치가 있는 것이다.그렇지 않으면 결국 악인의 손에 놀아나게 되어 자신이 피해자가 될 뿐이다.윤혜인은 더 이상 원지민과 엮일 생각이 없었는지라 앞쪽으로 걸어가 직원에게 경찰을 부르라고 할 생각이었다.그것만으로도 윤혜인은 충분히 자비를 베푼 것이었다.그러나 윤혜인이 돌아서려는 순간, 원지민의 음침한 목소리가 그녀를 붙잡았다.“네가 이렇게 한다고 안전할 것 같아?”그러자 윤혜인은 도대체 무슨 속임수를 준비했는지 궁금해져 잠시 뒤를 돌아보았다.이때, 원지민이 크게 소리쳤다.“살려줘요! 날 죽이려고 해요! 누군가 날 죽이려고 해요!”윤혜인은 순간 당황했다.원지민은 바닥을 기는 연기를 하며 손에 묻은 피를 윤혜인의 손에 묻히고 그녀를 꽉 붙잡았다.“도망갈 생각 하지 마!”원지민의 눈빛은 증오로 가득 차 있었다.다음 순간, 어디선가 원지민의 비서가 달려와 윤혜인을 붙잡고 외쳤다.“살인자! 도망가기만 해봐!”윤혜인은 그들을 떨쳐내려고 했지만 바닥이 피와 물로 젖어 매우 미끄러웠기 때문에 크게 움직일 수가 없었다.결국 원지민의 비서에게서 벗어날 수 없었다.주변에 있던 사람들이 몰려들면서 상황은 더욱 심각해졌다. 사람들은 윤혜인에게 비난의 눈길을 보냈고 속삭이는 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렸다.“저 여자 참 착해 보이는데 살인을 하려 하다니... 사람은 겉모습만 보고는 모른다니까.”“맞아. 남의
이준혁의 눈빛은 깊은 연못처럼 무엇을 생각하는지 알 수 없었고 그 안에는 약간의 잔혹함마저 섞여 있었다.그 차가운 눈빛에 윤혜인은 본능적으로 몸이 움츠러들었다.“같이 병원으로 데려가.”이준혁은 무정하게 말했다.하지만 윤혜인은 그와 함께 가고 싶지 않았다. 차라리 경찰이 오면 자신이 결백하다는 것을 증명할 수 있을 것이라 믿었다.“저는 안 가요. 경찰이 오면 제 결백을 증명해줄 겁니다.”윤혜인은 단호하게 말했다.이준혁은 말없이 그녀를 쳐다보더니 입술을 살짝 비틀며 차갑게 말했다.“데려가.”윤혜인은 그가 무슨 의도로 이러는지 알 수 없었기에 마음속에서 불안이 커져갔다. 곧 비서가 억지로 그녀를 차에 태웠고 윤혜인은 저항할 힘이 없었다.그 순간, 윤혜인을 오랫동안 기다리던 염료 공장 사장 부인이 그녀가 끌려가는 모습을 보고 다급하게 달려와 소리쳤다.“지금 뭐 하는 거예요? 대낮에 사람을 납치하다니... 법은 안중에도 없어요?”하지만 비서는 사장 부인의 말을 무시한 채 그녀의 손을 떼어내고 차창을 닫았다.윤혜인은 차창이 닫히기 직전 손에 있던 핸드폰을 사장 부인에게 몰래 넘기며 말했다.“걱정 마세요. 공장 일은 오빠에게 맡기면 돼요.”사장 부인은 잠시 멍하니 서 있었고 그녀는 따라가지 않았다.앞차에 타고 있던 이준혁은 백미러로 그 상황을 지켜보며 냉정하게 말했다.“저 여자도 잡아서 조사해.”병원에 도착하자 원지민은 즉시 응급실로 옮겨졌다.이준혁은 수술실 문을 뚫어져라 바라보며 불안한 표정을 지었다.반면, 윤혜인은 피로한 몸을 벽에 기대고 있었다. 그녀의 다리는 이제 지탱하기조차 힘겨웠다.갑자기 수술실 문이 열리고 간호사가 엄숙한 표정을 한 채 나왔다.“환자의 상태가 매우 위급합니다. 만약 아이를 계속 살리려면 산모의 생명이 위험해질 수 있습니다. 가족분께서 아이를 계속 지킬지에 대해 의견을 주셔야 합니다.”그러자 이준혁은 눈썹을 찡그리며 한동안 말이 없었다. 깊은 고민 끝에 그는 간신히 입을 열었다.“산모를 살려요.”“알겠
연기 속에서 이준혁의 날카로운 옆모습은 더욱 선명하게 보였다.윤혜인은 몇 초간 멍해졌다.예전엔 그가 거의 담배를 피우지 않았고 피울 때도 그녀 앞에서 절대 피우지 않았던 기억이 났다.다행히도 이준혁은 오랫동안 담배를 피우지 않았고 윤혜인이 들어오자 담배를 끄고는 손짓으로 자리에 앉으라고 했다.“앉아.”다리가 너무 아팠던 윤혜인은 자리에 앉을 수 있는 상황에서 굳이 서 있을 이유가 없다고 생각해 바로 앉았다.그러고는 차가운 표정으로 말했다.“대표님, 전 할 일이 많습니다. 이렇게 저를 억류할 자격은 없어요. 만약 진짜로 제가 대표님의...”그녀는 잠시 망설였지만 결국 말을 이었다.“대표님의 약혼녀를 밀쳤다고 생각한다면 저를 경찰에 넘기세요. 제 자유를 마음대로 제한할 권리는 없습니다.”곧 이준혁은 차갑게 그녀를 바라보며 물었다.“경찰이 너를 믿어준다고 어떻게 그렇게 확신하지?”윤혜인은 씁쓸하게 웃으며 말했다.“그건 대표님이 신경 쓸 일이 아니에요. 제가 한 일이 아니라면 하늘이 증명해 줄 겁니다.”그러나 이준혁은 여전히 무표정했다.“순진하군.”그의 말에 윤혜인은 속에서 오싹함이 느껴졌다. 바로 그때 누군가 문을 두드렸다.“들어와.”들어온 사람은 아까 그 비서였고 그는 공손하게 두 손으로 핸드폰을 이준혁에게 건넸다.“대표님, 보시죠.”이준혁은 천천히 핸드폰을 받아들었고 윤혜인은 그제야 그 하얀색 핸드폰이 자신의 것임을 알아차렸다.그녀는 온몸이 굳었다. 이준혁은 그 핸드폰을 윤혜인의 얼굴 가까이에 들이밀며 아까 몰래 녹음했던 음성을 틀었다.두 사람의 대화가 다시 재생되었다.“비켜줄래요?”“윤혜인, 왜 너는 그냥 사라지지 않는 거야? 왜 자꾸 내 눈앞에서 거슬리게 구는 거냐고.”“분명 놓으라고 했습니다. 당장 손 떼요!”“...”공포스러운 비명이 들린 후 녹음은 끊겼다.윤혜인은 원지민을 보자마자 경계심을 갖고 대화를 녹음해두었다.누구를 해치려는 의도는 없었지만 항상 자신이 피해자가 되는 상황을 더 이상 참을 수 없었
이지애는 말도 안 되는 소리로 생트집을 잡았다.그러나 사건의 경과를 모르는 동네 사람들은 무작정 소원을 내연녀라고 생각했다.하필 동네 아주머니들이 모여서 수다를 떠는 시간이라 하나둘씩 밖으로 나와 수군거리기 시작하더니 소원을 향해 손가락질을 했다.이를 본 이지애는 흥분을 감추지 못했고 오늘 기필코 소원을 짓밟으리라 다짐했다.그녀는 계속하여 소리쳤다.“빈말이 아니라 여러분은 남편 간수 잘해요. 한동네 살다가는 이 여자한테 홀랑 넘어갈 수도 있다니까요?”소원은 분노로 얼굴이 파랗게 질렸다.“말조심하세요. 계속 이런 허위 사실을 퍼뜨리면 고소할 겁니다.”소원이 경찰에게 신고하려고 핸드폰을 꺼내자 이지애는 단번에 핸드폰을 쳐냈다. 소원을 모욕하려고 찾아온 만큼 절대 경찰에 신고하게 내버려둘 수 없었다.핸드폰이 쿵 하고 바닥에 떨어졌다. 너무 화가 났던 소원은 맞서 싸우려고 했지만 그 타이밍에 이지애가 손을 들어 그녀를 밀었다.계단에 서 있던 소원은 이지애가 손을 뻗는 걸 보고 무의식적으로 뒤로 물러서며 허리를 짚었다.그러고선 자신의 본능적인 행동에 깜짝 놀랐다,‘내가 왜... 이 아이를 신경 쓰는 거지...’그녀의 몸은 이미 아이를 지켜야 한다고 스스로 결정한 것 같다.비록 소원은 결정을 내린 상태가 아니지만 본능이 이렇게 행동하게끔 그녀를 이끌었다.이런 제스처를 취하는 건 타고난 모성애일까?이지애는 죄책감을 느낀 소원이 겁을 먹고 그런 행동을 했다고 착각했다.아니나 다를까 더욱 뻔뻔하고 오만한 태도로 욕설을 퍼부었다.“다들 봤죠? 겁먹었잖아요. 잘못한 게 있으니까 죄책감을 느끼는 거예요. 끝까지 아니라고 잡아뗄 수 있겠어요?”“이 여우 같은 계집애 얼굴을 똑똑히 기억하세요. 남자에 환장한 X이에요. 천박한 것.”주변 사람들은 이지애의 말을 듣고 수군거리기 시작했다.“우리 동네에 이런 여자가 살고 있었다니. 정말 몰랐네요.”“이래서 사람은 겉모습으로 판단하면 안 되는 거야. 저 예쁜 얼굴로 이런 짓을 할 줄 누가 알았겠어? 남의
“우리 연주를 그렇게 괴롭혀놓고 뻔뻔스럽게 무슨 일로 왔냐는 말이 나와요?”이지애의 눈에는 원망이 담겨 있었다.밝은 미래를 가진 그녀의 딸은 구타 사건으로 인해 30일간의 구속 처분을 받았고 석방된 후에는 정신 상태에 큰 타격을 입었다.소문에 의하면 구치소 동기에게 괴롭힘을 당했다고 한다.늘 부잣집 아가씨로만 살아왔던 육연주는 구치소에 들어가도 모든 사람이 자기의 말을 들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거만한 태도로 구치소에 수감됐던 사람들을 무시했고 그러다가 집단 괴롭힘을 당하고 말았다.머리카락이 한 움큼 뽑혔다는 소문도 있다. 밖에서는 경호원들이 지켜주니 제멋대로 행동해도 아무 일 없었지만 그 버릇을 구치소에서 똑같이 하는 건 죽자고 덤비는 거나 다름없다.게다가 이미 구치소에 갇힌 사람들인데 누굴 무서워하겠는가?육경한은 이것만으로도 부족한지 기어코 육연주를 해외로 보내 다시는 돌아오지 못하게 만들었다.이지애는 모든 자원이 국내에 있다. 해외로 나간다해서 돈이 부족한 건 아니지만 적응하지 못할 수도 있다. 가장 현실적인 문제는 세상에 그녀보다 잘나가고 부유한 사람이 수두룩하다는 것이다.해외로 나가면 횡포를 부릴 수 없을 텐데, 엄마와 딸이 억울함을 당하고만 있겠는가?하지만 육경한은 그녀의 하소연을 듣지 않았고 이혼도 혼자서 처리했다. 서한 그룹에 문제가 생겼을 때 적어도 양심의 가책을 느꼈는지 곧바로 두 사람의 이혼을 결정지었다.게다가 이혼했음에도 육연주를 해외로 보냈기에 이지애는 분노와 원망은 걷잡을 수 없이 커졌다.모든 걸 알게 된 소원은 그저 이 상황이 우스웠다.그녀는 차갑고 단호하게 말했다.“말은 똑바로 하세요. 그쪽 따님이 저를 때렸습니다. 제가 괴롭혔다면 구치소에 들어간 사람은 저였겠죠.”이지애는 버럭 소리를 질렀다.“뻔뻔한 것도 유분수지. 우리 사위한테 치근덕거리지 않았다면 연주가 때렸겠어요? 당신 같은 인간은 맞아도 싸죠. 얌치도 모르는 천박한 주제에.”소원은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다.“증거 있으세요? 제가 서현재
소원이 이야기하려는 의지가 있다는 건 모든 가능성이 열려있다는 뜻이기도 하다.육경한은 요양원에 전화를 걸어 방금 무슨 일이 있었는지 물었고 요양원 사람들은 하나도 빠짐없이 그에게 자세히 말해줬다.전화를 끊은 그는 잠시 말이 없더니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지난 며칠 동안 얼마나 지옥 같은 시간을 보냈는지 아무도 모를 것이다.임신중절 약은 소원의 손에 있었기에 그녀가 약을 먹는 순간 정말 돌이킬 수 없게 될까 봐 걱정하고 불안했다.비록 위협을 한 거나 다름없지만 그 속에 섞인 두려움을 소원이 알아채지 못할 리가 없고 고작 이런 협박으로 겁을 먹을 사람이 아니다.어쩌면 더욱 고집을 부리며 자신의 의견을 굽히지 않을 수 있다.이러한 끈기가 보통 사람에게 나타난다면 분명 빛날 테지만, 소원은 육경한에 의해 거듭 억압당해 모든 자존심이 닳아 없어졌다.평범한 사람이었다면 오래전에 시들었을 텐데도 소원은 여전히 끝없는 황야에서 스스로 꽃을 피우기 위해 애를 썼다.육경한에게 과거의 일에 대해 후회하냐고 물으면 당연하다고 대답할 것이다.그러니 지금 그가 해야 할 일은 아이를 지키는것 뿐이다.한편으로는 전미영이 빨리 호전되길 원했다. 어머님의 호전이 소원에게 긍정적인 영향을 미쳐 마음을 약하게 하고 이로부터 순진한 아이를 지켜내길 바랐다....소원은 집에 돌아오자마자 전화 한 통을 받았다.지난번 진찰받았던 의사였다.“선생님, 안녕하세요.”“소원 씨, 오늘 병원에 안 오셔서 연락드린 거예요. 3일 동안 약 다 먹으면 병원에 검사받으러 오셔야 해요. 안 그러면 위험할 거예요.”의사의 말은 걱정으로 가득 차 있었다.병원에서 일하다 보면 수많은 환자를 마주하는데 약을 먹은 후에도 대수롭지 않게 여겨 집에서 출혈이 발생하고서야 병원으로 찾아온 환자들이 많았다.“아직 약을 안 먹었어요.”소원이 말했다.“안 먹었다면 다행이네요. 아이를 지키기로 결정하셨나요?”의사가 물었다.“아직 고민 중이에요. 걱정해 주셔서 감사합니다.”“고민 중이라면 검사를 받는
전미영은 소원의 행동에 이끌려 고개를 돌려야만 했다. 그녀는 소원의 얼굴을 바라보더니 점점 멍한 시선을 아래로 옮겼다.그러고는 손을 들어 소원의 복부를 가리키며 여전히 더듬거리는 어조로 말했다.“꽃이야... 꽃이 피었어...”소원은 회색의 셔츠를 입고 있었고 셔츠 단추에는 하얀 데이지 한송이가 있었다.전미영은 복부 쪽 단추에 달린 작은 데이지 꽃을 가리키며 말했다.“꽃...”소원의 외침은 간병인의 주의를 끌었고, 부랴부랴 달려온 간병인은 말하는 진미영을 보고선 놀람을 감추지 못했다.그들은 재빨리 달려가 요양원의 의사를 모셔 왔다.소원은 의사가 살펴볼 수 있도록 잠시 자리를 피했고 진찰을 마친 의사가 다가와 소식을 전했다.“검사를 해보니 어머니는 여전히 과거의 일을 기억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방금 그런 반응은 우연일 수도 있지만 좋은 징조이기도 합니다. 만약 간단한 요구를 표현할 수 있을 정도로 말한다면 점점 더 좋아질 겁니다.”“다만 기억 회복에 대해서는 강요하지 않는 게 좋다고 생각합니다. 결국, 때때로 많은 기억이 환자의 뇌에 부담을 주어 과부하를 일으킬 수도 있거든요. 그러면 환자는 더욱 혼란스러워지겠죠?”의사는 전미영을 자신의 가족처럼 생각해 현실적인 조언을 건넸다.나이가 많은 사람에게는 남아있는 기억 또한 부담일 수 있으니 간단하게 사는 게 최고다.소원은 검사 결과에 실망하지 않았고 오히려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어쩌면 지금 이 상태가 만신창이된 그들에게는 최고의 결과일지도 모른다.전미영이 간단한 말을 할 수 있는 것만으로도 이미 만족했다.병실로 돌아온 소원은 전미영의 곁을 지켰지만 처음 몇 마디를 제외하고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곧 점심시간이 되었다. 소원은 전미영의 휴식을 방해하지 않고 병실에서 나왔다.밖으로 나온 그녀는 택시를 잡는 게 아니라 주차된 은색의 승용차로 향했다.창문을 두드리자 차장이 내려가며 잘생긴 얼굴이 드러났는데 다름 아닌 육경한이다.육경한은 놀라지 않은듯하다. 비서의 차를 타고 있다 한들 예민하
택시의 이동 동선만 봐도 육경한은 소원이 어디로 향하는지 알아챘다.그는 소원이 발견하지 못하도록 거리를 앞차와의 거리를 넓혔다.역시나 택시는 소원의 어머니가 계신 요양원 앞에 멈췄고 소원은 택시에서 내리자마자 안으로 들어갔다.자주 온 덕분에 간병인들은 소원을 알아봤다.“소원 씨, 오셨어요?”소원은 예의 바르게 인사를 건네며 고개를 끄덕였다.“우리 엄마 요즘 달라진 건 없죠?”이건 소원이 매번 묻는 말인데, 그녀는 자신이 오지 않은 2, 3일 동안 엄마한테 일어난 일들을 놓칠까 봐 조마조마했다.하지만 다른 일을 전부 다 제쳐두고 요양원에서 매일 엄마를 지킬 수는 없는 노릇이니 참 답답했다.엄마를 집으로 모셔가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지만 육경한이 절대 동의할 리가 없다. 게다가 요양원은 의료기기가 잘 갖춰져 있어 치료에 굉장히 도움이 됐기에 집에 이런 걸 놓지 않는 한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간병인이 입을 열었다.“전이랑 비슷해요. 달라진 건 없어요.”매번 똑같은 답이 돌아왔지만 소원은 듣고도 실망하지 않았다. 사실 변화가 없다는 게 좋은 소식일지도 모른다.차라리 지금처럼 아무것도 모른 채 살고 있는 게 행복일 수도 있다. 만약 깨어난다면 무너져가는 이 현실을 직면할 수 있을까?가능하다면 그녀는 혼자서 이 고통을 감당하고 싶었다.소원은 간병인에게 물었다.“엄마랑 단둘이 시간을 보내고 싶은데 가능할까요?”“당연하죠. 전 밖에 있을 테니까 무슨 일 있으면 벨 눌러요.”“알겠습니다.”간병인이 나간 후 소원은 침대에 앉아 창틀에 놓인 꽃들을 바라봤다. 그러다가 꼼짝도 하지 않고 가만히 있는 엄마를 보고선 나지막이 입을 열었다.“엄마...”전미영은 아무런 반응 없이 그저 눈을 깜빡이며 꽃들을 바라봤다.소원은 더 가까이 다가가 앉아 전미영을 껴안았다.“엄마...”하고 싶은 말이 수천 개가 있었지만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이곳에서 모든 감정과 스트레스를 쏟아내는 게 소원에게는 일종의 해방이었다.“엄마... 엄마...”소원은 결국
육경한은 소원이라는 독에 중독되어 이미 구제 불능의 상태였다.게다가 무곡산의 일은 소원이 그에게 아무 사랑이 없다는 걸 깨닫게 해주었다. 어쩌면 생사가 달린 일이라도 다시 육경한에게 사랑이라는 감정을 느낄 수는 없을 것이다.소원의 눈빛은 이미 사랑하지 않는다고 말해줬고 다시는 예전으로 돌아갈 수 없다고 알려줬다.육경한은 처음으로 삶에 대한 절망감을 처절하게 느꼈다. 그래서 소원에게 자유를 돌려주고 싶었는데 하느님은 장난이라도 치는 듯 아이를 선물해 줬다.육경한은 소원의 변호사에게도 감사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 사진이 없었다면 아마 평생 알지 못했을 수도 있으니까.진실을 알게 된 순간 죽어있던 심장이 다시 불타오르기 시작했다. 형용할 수 없는 뜨거움이 마음 깊은 곳에서 밀려왔고 어쩌면 이 기회를 기다리고 있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하지만 기쁨 뒤에는 늘 그렇듯 두려움이 찾아온다.육경한은 아이를 놓칠까 봐 두려웠고 그 아이가 유진과 같은 고통을 겪을까 봐 무서웠다. 그는 너무나 많은 것을 두려워했다.손에 넣기도 전에 잃을 수도 있다는 생각은 그를 고통의 늪으로 밀어 넣었다.소원이 죽었다고 생각하던 그때의 경험한 두려움이 다시 나타날 줄은 예상하지 못했다.차마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두려움과 공포가 그의 마음 깊은 곳에 숨겨져 있었다.육경한은 간절히 기도했다.‘소원아, 제발 잔인한 선택은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아이한테 기회를 줘. 나한테도...’저녁.퇴근한 육경한은 소원이네 집 아래에 머물며 위층에 켜져 있는 불빛을 오랫동안 바라봤다.밤새 잠을 못 잤고 낮에 눈을 붙였는지조차 모를 정도로 피곤했다.3일 연속으로 육경한은 감시를 붙여놓은 사람을 찾아와 교대했다. 지금껏 보고받은 행적을 보면 지난 3일 동안 소원은 유난히 조용했고 누굴 만나기는커녕 외출조차 하지 않았다.아무도 모르겠지만 지난 3일간의 육경한의 삶은 그저 고문이었다. 마치 칼이 머리 위에 걸려있는 듯 언제 떨어져 죽을지 몰랐고 매 순간 목숨을 걸고 답을 기다리고 있
생각할 것도 없다. 소원은 아이를 낳고 싶지 않으니까..하지만 육경한이 제안한 조건은 너무 유혹적이었다. 자유를 되찾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유진을 만날 수도 있고 아이와 함께 살 수도 있다.거절하려는 말이 목구멍까지 차올랐으나 조건을 생각해 보면 삼킬 수밖에 없었다.“약속을 어길 일은 절대 없으니까 걱정하지 마. 아이를 안전하게 낳을 수만 있다면 임신 중에 자유롭게 행동해도 좋아. 내가 한번 내뱉은 말은 반드시 지키는 사람인 건 알지? 네가 원하는 거라면 뭐든지 해줄 수 있지만...”육경한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말을 이었다.“아이를 지우겠다고 고집한다면 우리에게 협상의 여지는 없어. 너도 알다시피 소송을 진행하면 아이랑 보내는 시간이 더 많이 줄어들 거야.”소원은 마음이 어느 정도 가라앉았다. 육경한은 그의 스타일대로 이런 결정을 내렸고 의외는 아니었다.“육경한, 아이를 꼭 낳으라고 하는 이유는 뭐야?”육경한은 그녀를 말없이 바라보다가 담담하게 말했다.“너랑 나 사이의 아이니까.”이 정도면 충분했다. 자신이 뭘 원하는지조차 잘 모르는 육경한이 이번에는 명확하게 의견을 표현했으니 다른 말은 필요 없었다.그는 임신한 소원의 곁을 지키고 싶었다. 이러면 예전에 유진을 임신했을 때 그녀의 곁을 지키지 못한 아쉬움이 달래질 것만 같았다.그러니 무슨 수단을 써서라도 꼭 이 아이를 지키고 싶었다.자리에서 일어난 소원은 피곤한 기색을 드러내며 말했다.“생각해 보고 연락할게.”그 말에 조금이나마 안도감이 밀려왔지만 마음을 완전히 놓을 수는 없었다.“황 비서가 데려다 줄거야.”육경한은 소원이 자기를 싫어한다는 걸 알고 아무리 걱정되어도 직접 배웅해 주지 않았다. 하지만 매 순간 그녀와 함께 있고 싶은 마음은 변함없었다.물론 거절한다는 것도 이미 알고 있다.지금 이 순간 소원은 혼자 있고 싶었다.“괜찮아. 혼자 가면 돼.”육경한은 하고 싶은 말이 많았지만 결국 강요하지 않고 그녀의 뜻을 따랐다.“그래.”소원이 문에 다다르자 육경한도 그녀를
“육경한, 네가 무슨 자격으로 안 된다고 하는 거야? 잘 들어, 난 반드시 아이를 지울 거야. 날 막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 24시간 동안 잠도 안 자고 날 감시할 수 있어? 내가 화장실에 갈 때는 어떻게 할 건데? 난 아이를 지울 방법이 백 가지나 있어. 아이로 날 통제할 생각은 꿈도 꾸지 마.”소원은 싸늘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봤다.“제발 현실을 직시해. 아이를 낳으라고? 네가 내 아이의 아빠가 될 자격이 있다고 생각해?”육경한은 얼굴에 붉은 손바닥 자국이 있었지만 화를 내기는커녕 오히려 매우 차분했다.“소원아, 네가 내 곁을 떠나고 싶은 건 알지만 아이가 태어나기 전까지는 이혼하지 않을 거야. 이혼하고 나서도 유진을 보고 싶으면 뱃속에 있는 아이를 낳으면 돼.”차분한 표정과 달리 육경한의 마음속에는 이미 거센 파도가 일었다.원래는 정말 놓아주려고 했다. 이준혁의 말대로 사랑하는 감정이 남아있지 않는 여자를 억지로 묶어두는 건 두 사람에게 모두 상처가 되니까.아이를 위해서라도 이런 충동적인 결정을 해서는 안 된다.하지만... 소원이 아이를 임신한 이상 절대 지우도록 내버려둘 수는 없었다.육경한은 알고 있다. 이 아이가 그들의 관계를 잡을 수 있는 마지막 기회라는 것을.소원은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꿈 깨라고.”다만 절대로 이 아이를 낳지 않을 거란 확신은 변함없었다.육경한은 더 이상 다투지 않고 비서에게 계약서를 가져오라고 시켰다.“흥분하지 말고 진정해. 일단 이것 좀 보고 결정해도 늦지 않아.”소원은 위에 적힌 조항을 주의 깊게 읽어봤다.아이를 낳으면 두 사람은 혼인 관계를 끊을 수 있다. 그 후에도 양측 모두 아이를 만날 수 있으며 누구랑 함께 살지는 아이의 결정에 맡긴다고 되어 있었다.생각해 보면 꽤 괜찮은 조건이다. 육경한은 강제로 아이를 데려가는 것이 아닌 함께 키우는 것을 택했다.그러나 상대는 교활함이 몸에 배인 육경한이니 소원은 마음을 놓을 수가 없었다. ‘왜 아이를 낳으라고 하는 거지? 협박하려고 이러는
이건 소원에 대한 시험이다. 육경한은 성인군자가 아니기에 아이를 볼 수 있게 허락한 것도 이미 큰 양보를 한 거나 다름없다.잔인하다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만약 소원이 결혼할 계획이 있다면 아이를 못 보게 할 생각이었다.그는 절대 다른 남자에게 자신의 아이를 맡기고 싶지 않았다.그리고...육경한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미간을 잔뜩 찌푸렸고 소원은 전혀 예상하지 못한 조건에 약간 어리둥절했다. 그러나 이내 쿨하게 고개를 끄덕였다.“알았어. 그렇게 할게.”어차피 처음부터 재혼할 생각이 없었다. 육경한이 어떤 사람인지 잘 알고 있으니 결혼에 대한 마음은 진작에 접었다.육경한은 흔쾌히 승낙하는 소원을 보고선 마음속의 불편한 감정이 많이 사라졌다.이때 소원이 물었다.“또 있어?”“응.”육경한은 잠시 멈칫하다가 천천히 말했다.“아이를 낳았으면 좋겠어.”청천벽력 같은 그의 말에 소원은 자리에 얼어붙은 채 오랫동안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한참이 지나서야 고개를 들었는데 그녀의 눈빛은 초점이 약간 흐려져 있었다.“그게... 무슨 말이야?”육경한은 천천히 다가가더니 소원의 아랫배를 내려다보며 조용히 입을 열었다.“이 아이를 낳으라고.”“나... 임신 안 했어.”누군가가 가슴을 움켜쥐는 것처럼 숨이 막혀왔던 소원은 힘겹게 답했다.유진은 처음부터 우연이었다. 아이를 지킬 수 없을 거라고 체념했는데 기적처럼 꿋꿋하게 살아남았다.하지만 그 뒤로 육경한과 얽혔고 그들의 관계는 소원을 극도로 고통스럽게 만들었다. 아이가 그녀의 약점이라는 걸 육경한은 분명히 알고 있다.그러므로 소원은 임신했다는 사실을 인정해서는 안 된다.육경한은 진료 기록을 꺼내 테이블에 올려놓고선 소원에게 다가가 두 눈을 쳐다보며 말했다.“소원아, 난 아무런 조사 없이 막연한 추측으로 단정 짓는 사람이 아니야.”그 위에는 소원의 검사 기록과 약 처방 기록이 명확하게 쓰여있었다.육경한은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아이를 지우는 건 절대 안 돼.”그는 진료 기록을 받