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지민은 자신이 계획한 대로 이준혁이 남은 인생 동안 자신을 위해 재부를 창출해줄 것이라고 확신했다.어차피 그는 자신이 어떻게 변해갈지 모를 테니 말이다.그러나 지금 윤혜인의 임신으로 인해 일이 꼬일 가능성이 생겼다.그리고 원지민은 절대 그런 변수가 생기는 것을 용납할 수 없었다.그녀의 손은 점점 더 꽉 쥐어져 거의 젓가락을 휘게 만들 정도였다.모든 것이 완벽하게 계획되었지만 윤혜인의 임신이 모든 것을 예측 불가로 만들고 있었다.그렇다면 그 아이를 정말 무사히 낳을 수 있을지 두고 보자는 심정이었다.한편, 윤혜인은 식사를 마치고 염료 공장 사장 부인과 잠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식사를 마치고 두 사람은 내려갈 준비를 하고 있었다.마침 그때 아름이가 영상 통화를 걸어와 윤혜인은 잠시 걸음을 멈추고 아름이와 대화를 나눴다.약 5분 정도 이야기한 후, 윤혜인은 아름이에게 말했다.“아름아, 엄마 이제 차로 갈 거니까 차에 타면 다시 이야기하자. 알겠지?”“네, 엄마! 바이바이!”아름이는 화면을 향해 공중에 키스를 날리며 인사했다.윤혜인은 미소 지으며 아쉬운 마음으로 통화를 끊었다. 곧 딸을 만날 수 있다는 생각에 윤혜인의 눈빛은 따뜻해졌다.몇 걸음 걷다가 지나가던 직원이 그녀에게 말했다.“앞에 바닥에 기름이 흘러서 미끄러워요. 가게에서 청소 중이니까 뒤쪽 문으로 나가세요.”앞을 보니 확실히 기름이 잔뜩 흘러 있었다. 하여 윤혜인은 혹여라도 미끄러질까 봐 겁이 나 뒤쪽 문으로 향했다.그런데 후문에 도착하자마자 마주치고 싶지 않은 사람과 눈이 마주쳤다. 예상치 못한 곳에서 원지민을 만나게 된 것이다.윤혜인은 속으로 오늘 운이 정말 없다고 생각했다. 굳이 그녀에게 시선을 줄 필요도 없다고 느끼며 피하려고 했지만 원지민이 먼저 말을 걸어왔다.“혜인 씨, 여기서 우연히 만나네요?”그러나 윤혜인은 눈길 한번 없이 원지민과 대화할 마음이 없다는 듯이 몸을 비켜 지나가려고 했다.그런데 원지민이 그녀의 팔을 잡으며 말했다.“왜 이렇게 그냥
윤혜인은 고개를 돌려 물었다.“곽씨 가문의 여자들이라뇨?”순간 당황하며 원지민은 자신이 말실수를 했다는 것을 깨달았다.자칫하면 윤아름에 대한 소식을 말해버릴 뻔했다.이건 자신이 최근 아버지 원정호의 심복으로부터 들은 이야기였다. 정확하지는 않았지만 윤아름이 원진우에게 숨겨져 있을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었다.‘천재 소설가라더니... 결국 남편도 버리고 이름도 없이 우리 삼촌이랑 지내고 있는 거야?’원지민은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혜인 씨 말이에요. 혜인 씨도 곽씨 가문이 여자잖아요.”하지만 윤혜인은 그 말을 똑똑히 들었고 쉽게 넘어가지 않았다.“방금 곽씨 가문의 여자들이라고 했잖아요. 여자들이라는 게 누구를 말하는 거죠?”원지민은 잠시 표정이 굳어졌지만 곧 태연한 척 말했다.“말실수였어요. 근데 가족들을 그렇게 챙기고 싶어요? 곽씨 가문에는 애인들을 많이 두나 보죠?”윤혜인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저희 곽씨 가문에는 그런 사람 없습니다. 근데 제 앞에 있네요. 진짜 불륜녀.”그러자 원지민은 이를 악물더니 윤혜인을 쏘아보았다.“지금 무슨 헛소리 하는 거예요?”“헛소리라뇨?”윤혜인은 미소를 유지하며 말했다.“예전에 제가 준혁 씨랑 아직 부부일 때 원지민 씨가 직접 나서서 저한테 자기가 준혁 씨의 약혼녀라고 말하지 않았었나요? 심지어 내가 알았으면 그만이지 언론을 통해 자신이 약혼녀라고 홍보까지 했었잖아요.”“너!”원지민은 얼굴이 빨갛게 달아오르고 목에 핏줄이 선명하게 드러난 채 소리쳤다.“닥쳐!”그러자 윤혜인은 미소를 지으며 입꼬리를 올렸다.“원지민 씨, 나 건드리지 마요. 어차피 난 그쪽 신경쓰지 않거든요. 하지만 계속 이렇게 날 도발하고 싸움을 걸면 원지민 씨의 치부를 모두 드러낼 수도 있어요. 다시 한번 말하지만 난 이준혁 씨한테 관심 없습니다. 그리고 전 도덕을 어기는 일은 절대 하지 않을 거예요. 정말 이선 그룹 대표 아내가 되고 싶으면 그 자리를 확실히 지키고 나서 얘기해요.”이 말에 원지민의 얼굴은 창백해졌다.
원지민의 눈빛은 잔인했고 그 깊고 어두운 눈동자는 마치 독을 품은 전갈처럼 끔찍한 악의로 가득 차 있었다.그 장면을 놓칠 리 없었던 윤혜인은 마음속에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즉시 자리를 피하려 했으나 그때 원지민이 갑자기 외쳤다.“살려줘요. 혜인 씨, 나... 나도 임신한 몸이라고요...”처음엔 그 말이 이해되지 않았지만 원지민이 쓰러지는 방향을 보고 윤혜인의 눈이 커졌다.원지민의 허리가 탁자 모서리를 향하고 있었다.지금처럼 배가 불러 있는 상태에서 그렇게 부딪치면 태아에게 치명적인 위험이 닥칠 것이 분명했다.순간적인 본능으로 윤혜인은 망설임 없이 손을 뻗었다.그러자 원지민의 눈에 순간적으로 한 줄기 사악한 빛이 번졌고 입가에 미소가 슬며시 번졌다.그녀는 이 모든 상황을 예상이라도 한 듯했다.윤혜인은 이미 원지민의 손바닥 안에 있었다.원지민 또한 손을 뻗으며 이를 악물었다. 그녀는 윤혜인을 잡아채서 문 옆에 있는 선반에 세게 부딪치게 만들 생각이었다.하지만 두 사람의 손끝이 닿는 순간, 윤혜인은 갑자기 멈췄다.원지민의 목적이 담긴 눈빛을 뚫어지게 보던 윤혜인은 단호하게 손을 거둬들였다.그 순간, 원지민의 얼굴이 순식간에 창백해졌다.그녀는 이 순간만큼은 윤혜인이 반드시 손을 내밀 거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그동안 착하고 쉽게 마음을 주는 그녀가 이렇게 중요한 순간에 손을 뻗지 않을 거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아아아!!!”원지민의 비명이 실내를 가득 채웠다.허리가 탁자 모서리에 세게 부딪치며 그녀는 고통스러운 표정으로 바닥에 주저앉았다. 곧 다리 밑에서 대량의 붉은 피가 흘러나와 현장은 마치 끔찍한 재난 현장 같았다.윤혜인은 아무런 감정도 없는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았고 원지민은 믿을 수 없다는 듯 윤혜인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목소리를 쥐어짜냈다.“너... 너... 너...”몇 번이나 ‘너’라고 말했지만 그 이상의 말은 하지 못했다.언제부터 윤혜인이 이렇게까지 냉정하고 잔인해졌는지 원지민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윤혜
윤혜인은 조금 전 상황을 명확하게 읽어냈다.음모로 가득 찬 원지민이 단순히 넘어진 것으로 도움을 요청하려는 것이 아님을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이건 분명 윤혜인을 함정에 빠뜨리려는 술책이었다.원지민은 분노에 찬 표정으로 고통을 견디며 하마터면 기절할 지경이었다. 만약 몸이 따라줬다면 이미 윤혜인의 배를 손으로 찢어버렸을지도 모른다.“천하의 나쁜 년!”그녀는 이를 갈며 숨을 헐떡이고는 몇 번이나 욕을 퍼부었다.윤혜인은 분노에 찬 원지민이 수치심을 느끼는 것을 보고 조금 전의 행동이 잘한 선택임을 더욱 확신했다.선의는 자신을 지킬 수 있을 때 만 가치가 있는 것이다.그렇지 않으면 결국 악인의 손에 놀아나게 되어 자신이 피해자가 될 뿐이다.윤혜인은 더 이상 원지민과 엮일 생각이 없었는지라 앞쪽으로 걸어가 직원에게 경찰을 부르라고 할 생각이었다.그것만으로도 윤혜인은 충분히 자비를 베푼 것이었다.그러나 윤혜인이 돌아서려는 순간, 원지민의 음침한 목소리가 그녀를 붙잡았다.“네가 이렇게 한다고 안전할 것 같아?”그러자 윤혜인은 도대체 무슨 속임수를 준비했는지 궁금해져 잠시 뒤를 돌아보았다.이때, 원지민이 크게 소리쳤다.“살려줘요! 날 죽이려고 해요! 누군가 날 죽이려고 해요!”윤혜인은 순간 당황했다.원지민은 바닥을 기는 연기를 하며 손에 묻은 피를 윤혜인의 손에 묻히고 그녀를 꽉 붙잡았다.“도망갈 생각 하지 마!”원지민의 눈빛은 증오로 가득 차 있었다.다음 순간, 어디선가 원지민의 비서가 달려와 윤혜인을 붙잡고 외쳤다.“살인자! 도망가기만 해봐!”윤혜인은 그들을 떨쳐내려고 했지만 바닥이 피와 물로 젖어 매우 미끄러웠기 때문에 크게 움직일 수가 없었다.결국 원지민의 비서에게서 벗어날 수 없었다.주변에 있던 사람들이 몰려들면서 상황은 더욱 심각해졌다. 사람들은 윤혜인에게 비난의 눈길을 보냈고 속삭이는 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렸다.“저 여자 참 착해 보이는데 살인을 하려 하다니... 사람은 겉모습만 보고는 모른다니까.”“맞아. 남의
이준혁의 눈빛은 깊은 연못처럼 무엇을 생각하는지 알 수 없었고 그 안에는 약간의 잔혹함마저 섞여 있었다.그 차가운 눈빛에 윤혜인은 본능적으로 몸이 움츠러들었다.“같이 병원으로 데려가.”이준혁은 무정하게 말했다.하지만 윤혜인은 그와 함께 가고 싶지 않았다. 차라리 경찰이 오면 자신이 결백하다는 것을 증명할 수 있을 것이라 믿었다.“저는 안 가요. 경찰이 오면 제 결백을 증명해줄 겁니다.”윤혜인은 단호하게 말했다.이준혁은 말없이 그녀를 쳐다보더니 입술을 살짝 비틀며 차갑게 말했다.“데려가.”윤혜인은 그가 무슨 의도로 이러는지 알 수 없었기에 마음속에서 불안이 커져갔다. 곧 비서가 억지로 그녀를 차에 태웠고 윤혜인은 저항할 힘이 없었다.그 순간, 윤혜인을 오랫동안 기다리던 염료 공장 사장 부인이 그녀가 끌려가는 모습을 보고 다급하게 달려와 소리쳤다.“지금 뭐 하는 거예요? 대낮에 사람을 납치하다니... 법은 안중에도 없어요?”하지만 비서는 사장 부인의 말을 무시한 채 그녀의 손을 떼어내고 차창을 닫았다.윤혜인은 차창이 닫히기 직전 손에 있던 핸드폰을 사장 부인에게 몰래 넘기며 말했다.“걱정 마세요. 공장 일은 오빠에게 맡기면 돼요.”사장 부인은 잠시 멍하니 서 있었고 그녀는 따라가지 않았다.앞차에 타고 있던 이준혁은 백미러로 그 상황을 지켜보며 냉정하게 말했다.“저 여자도 잡아서 조사해.”병원에 도착하자 원지민은 즉시 응급실로 옮겨졌다.이준혁은 수술실 문을 뚫어져라 바라보며 불안한 표정을 지었다.반면, 윤혜인은 피로한 몸을 벽에 기대고 있었다. 그녀의 다리는 이제 지탱하기조차 힘겨웠다.갑자기 수술실 문이 열리고 간호사가 엄숙한 표정을 한 채 나왔다.“환자의 상태가 매우 위급합니다. 만약 아이를 계속 살리려면 산모의 생명이 위험해질 수 있습니다. 가족분께서 아이를 계속 지킬지에 대해 의견을 주셔야 합니다.”그러자 이준혁은 눈썹을 찡그리며 한동안 말이 없었다. 깊은 고민 끝에 그는 간신히 입을 열었다.“산모를 살려요.”“알겠
연기 속에서 이준혁의 날카로운 옆모습은 더욱 선명하게 보였다.윤혜인은 몇 초간 멍해졌다.예전엔 그가 거의 담배를 피우지 않았고 피울 때도 그녀 앞에서 절대 피우지 않았던 기억이 났다.다행히도 이준혁은 오랫동안 담배를 피우지 않았고 윤혜인이 들어오자 담배를 끄고는 손짓으로 자리에 앉으라고 했다.“앉아.”다리가 너무 아팠던 윤혜인은 자리에 앉을 수 있는 상황에서 굳이 서 있을 이유가 없다고 생각해 바로 앉았다.그러고는 차가운 표정으로 말했다.“대표님, 전 할 일이 많습니다. 이렇게 저를 억류할 자격은 없어요. 만약 진짜로 제가 대표님의...”그녀는 잠시 망설였지만 결국 말을 이었다.“대표님의 약혼녀를 밀쳤다고 생각한다면 저를 경찰에 넘기세요. 제 자유를 마음대로 제한할 권리는 없습니다.”곧 이준혁은 차갑게 그녀를 바라보며 물었다.“경찰이 너를 믿어준다고 어떻게 그렇게 확신하지?”윤혜인은 씁쓸하게 웃으며 말했다.“그건 대표님이 신경 쓸 일이 아니에요. 제가 한 일이 아니라면 하늘이 증명해 줄 겁니다.”그러나 이준혁은 여전히 무표정했다.“순진하군.”그의 말에 윤혜인은 속에서 오싹함이 느껴졌다. 바로 그때 누군가 문을 두드렸다.“들어와.”들어온 사람은 아까 그 비서였고 그는 공손하게 두 손으로 핸드폰을 이준혁에게 건넸다.“대표님, 보시죠.”이준혁은 천천히 핸드폰을 받아들었고 윤혜인은 그제야 그 하얀색 핸드폰이 자신의 것임을 알아차렸다.그녀는 온몸이 굳었다. 이준혁은 그 핸드폰을 윤혜인의 얼굴 가까이에 들이밀며 아까 몰래 녹음했던 음성을 틀었다.두 사람의 대화가 다시 재생되었다.“비켜줄래요?”“윤혜인, 왜 너는 그냥 사라지지 않는 거야? 왜 자꾸 내 눈앞에서 거슬리게 구는 거냐고.”“분명 놓으라고 했습니다. 당장 손 떼요!”“...”공포스러운 비명이 들린 후 녹음은 끊겼다.윤혜인은 원지민을 보자마자 경계심을 갖고 대화를 녹음해두었다.누구를 해치려는 의도는 없었지만 항상 자신이 피해자가 되는 상황을 더 이상 참을 수 없었
하지만 윤혜인은 아직 손등의 통증을 느낄 틈도 없었다.그 순간, 눈앞에 충격적인 광경이 펼쳐졌다.고급스러웠던 하얀색 강철 티타늄 핸드폰이 화학 용액에 잠기면서 겉이 벗겨지고 부식되기 시작한 것이다.이 물은 분명 평범한 물이 아니라 강력한 부식성을 가진 화학 용액이었다.만약 윤혜인이 조금만 더 빨리 손을 뻗었더라면 지금 부식되고 있을 것은 핸드폰이 아니라 그녀의 손가락이었을 것이다.그 끔찍한 상상을 하자마자 윤혜인의 마음은 공포로 가득 찼고 손가락은 미세하게 떨렸다.그녀는 부식된 핸드폰의 뼈대만 남은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 모습은 소름 끼치게 섬뜩했다.오랫동안 멍하니 있던 윤혜인은 이내 정신을 차리고 격분하며 소리쳤다.“제 핸드폰을 무슨 권리로 파괴한 거죠?”이준혁은 차갑게 대답했다.“네 핸드폰이 멀쩡하다고 경찰서에서 무사히 빠져나올 수 있다 생각하나?”그는 계속해서 말했다.“정말 그렇게 생각해? 원씨 가문과 이씨 가문이 널 그냥 놔줄 거라고?”원씨 가문은 당연히 윤혜인을 놓아주지 않을 것이고 이씨 가문에는 이천수라는 문제 인물이 있어 이준혁에게 더 많은 골칫거리를 안겨줄 것이 분명했다.게다가 윤혜인의 전 부인이라는 위치는 이천수가 상황을 더 크게 부풀리게 할 수 있는 약점이었다.지금 이준혁이 가장 원하지 않는 것은, 윤혜인이 그 문제에 더 깊이 휘말리는 것이었다.윤혜인은 얼굴이 순식간에 격분에서 평온으로 바뀌었다.그녀는 이준혁이 던진 말 속의 위협을 명확히 들을 수 있었다.이준혁의 말은 원지민이 아이를 잃으면 그 책임은 윤혜인에게 돌아갈 것이며 원씨 가문과 이씨 가문이 그녀를 놓아주지 않겠다는 뜻이었다.윤혜인은 한때 사랑했던 남자를 바라보며 가슴이 찢어질 듯한 고통을 느꼈다.이제 그녀는 처음처럼 확신할 수 없었다. 원지민이 임신한 아이가 이준혁의 아이가 아니라고 생각했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다는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이준혁이 다른 사람의 아이를 위해 이토록 극단적인 행동을 할 리 없었으니 말이다.가슴에 몰려오는 고통
윤혜인은 마치 발밑에 짓밟힌 듯한 굴욕감에 휩싸였다.분노를 억누르지 못한 채 테이블 위에 있던 찻잔을 집어 들고 이준혁의 얼굴에 그대로 물을 끼얹었다.이준혁은 재빠르게 얼굴을 손으로 가렸지만 팔과 머리카락은 차마 피하지 못해 찻물이 튀고 찻잎이 걸렸다.그의 얼굴에는 뚜렷한 분노가 가득했지만 윤혜인의 절망을 보고는 순간 말문이 막혔다.“미쳤구나?”그가 차갑게 말했고 윤혜인은 이를 악물며 소리쳤다.“그래요. 미쳤어요. 그쪽이랑 다시 시작한 내가 미쳤던 거예요. 다시 그쪽을 사랑한 내가 더 미친 거라고요.”“이준혁 씨, 당신은 정말 하나도 가치가 없는 사람이에요.”윤혜인의 창백한 입술은 피 한 방울 없이 말라 있었고 얼굴에는 멈추지 않는 눈물이 흘렀으며 목소리에는 자조 섞인 웃음이 가득했다.마음속 가득했던 분노가 이준혁은 그녀의 눈빛 속 절망을 보자마자 사라졌고 할 말을 잃은 듯했다.윤혜인의 가슴은 찢어질 듯 아팠고 숨을 쉴 수조차 없었다.그녀는 눈앞의 남자를 낯선 사람처럼 바라보았다.‘대체 어떻게 이렇게까지 변했을까? 정말 이렇게까지 차가운 사람이었나?’알고 보니 이 관계를 중히 여긴 건 오직 윤혜인 자신뿐이었던 것 같았다.이준혁에게 그녀는 그저 필요할 때만 찾는 가벼운 존재였다. 이준혁은 자신의 이익에 위협이 되면 망설임 없이 그녀를 버릴 수 있는 사람이었다. 마치 지금처럼 말이다.울다가도 윤혜인은 갑자기 쓴웃음을 지었다.다행히 자신이 그의 아이를 임신한 사실을 이준혁이 아직 모른다는 점에서 말이다.‘만약 지금 그걸 알았다면 분명 직접 이 아이를 없애려고 했을 거야... 나와 내 아이는 반드시 내가 지켜낼 거야. 이 아이는 내 아이이지 그 누구의 아이도 아니니까.’이 일로 인해 윤혜인은 앞으로 쉬이 감정에 얽매이지 않기로 다짐했다.남은 인생은 오직 아기들과 함께하는 삶으로 채우며 말이다.아름이가 혼자 외롭지 않게 동생을 만들어 주려는 이유에서 윤혜인은 아이를 낳기로 결심했다.나중에 자신이 나이가 들면 아이들은 혈연의 유대감으
소종은 육경한이 아이들을 얼마나 그리워하는지 잘 알고 있었다.교도소 안에 있을 때 육경한은 모든 사람들의 면회를 거절했지만 마음속으로는 늘 두 아이를 그리워했다.그는 아이들에게 자신의 안 좋은 모습을 보여주고 싶어 하지 않았다.“타세요, 대표님.”소종이 침묵을 깨며 한마디 했다.육경한이 차에 타자 소종은 그동안 일어난 일들을 이야기하기 시작했다.“이 대표님 가족이 소 대표님을 잘 돌봐주셨어요. 아이들끼리도 친하게 지내고... 그리고 김 대표님도 하정이와 유진이를 돌봐주셨어요... 그리고 윤혜인 사모님의 오빠가 8년 전에 결혼했어요. 집 가정부의 딸 구지윤 씨와 결혼했어요. 처음에 할아버지가 많이 반대했지만 지금은 행복하게 잘살고 있어요. 딸을 낳으면서 할아버지도 받아들이셨고요... 아, 참. 예전에 소 대표님과 친하게 지냈던 여경 강민혜 씨, 기억하시죠? 소 대표님의 친동생이었더라고요. 당시 소 대표님의 어머니가 과다 출혈로 위독하셨을 때 그 여경이 수혈해 줬거든요. 소 대표님이 두 사람의 혈액형이 같은 것을 알고 친자 확인을 했더니 강민혜 씨가 정말 친동생이었어요. 예전에 도둑맞아 죽었다고 알려졌던 아이가 사실은 살아 있었던 거죠...”소종이 이야기를 하는 사이 차는 어느새 호화로운 호텔 앞에 도착했다.그들이 육경한을 위해 환영회를 준비한 듯했다.육경한이 말했다.“이런 거 필요 없어. 어떤 모임에도 참석하고 싶지 않아. 그냥 쉬고 싶어.”그러자 소종이 바로 말했다.“안 돼요. 오늘 식사 자리에는 꼭 가야 해요.”황진수도 말했다.“맞아요, 육경한 씨. 소소하게 준비한 것이니 우리 마음을 봐서라도 꼭 참석해 주세요.”마지못해 차에서 내린 육경한은 호텔 룸에 들어간 순간 방 안에 익숙한 얼굴들이 가득한 것을 보았다.예쁜 소녀가 육경한에게 다가오더니 큰 눈을 깜빡이며 그를 보고 말했다.“그쪽이 우리 아빠예요?”자신과 닮은 소녀의 눈매에 육경한은 순간 말을 잇지 못했다.육하정이 계속 말했다.“엄마가 말했어요. 아빠가 잘못을 저질러
법정 안, 판사가 선고했다.“피고인 육경한, 살인죄로... 그러나 피해자와의 갈등 관계를 고려하고 증인의 증언을 종합하여 본 법정은 다음과 같이 판결합니다. 육경한에게 징역 20년을 선고합니다...”“대표님...”방금 깨어나서 법정에 나와 주석훈의 살인을 증언한 소종은 울며 육경한을 불렀다.뒤에 서서 두 달 된 아기를 안고 있는 소원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눈시울은 이미 붉어져 있었다.아기의 얼굴과 핑크색 이불을 본 육경한은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다.그는 더 이상 소원에게 할 말이 없었다. 대신 소종을 보며 한마디 했다.“잘 돌봐줘.”육경한이 누구를 말하는지 바로 캐치한 소종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대표님, 걱정하지 마세요. 대표님이 나올 때까지 기다릴게요.”...15년 후, 구치소 대문 앞.15년 전 입소할 때 입었던 옷을 입고 나온 육경한은 여전히 가슴을 펴고 당당하게 걸었다.교도소에 있는 동안 좋은 표현 덕분에 감형을 받아 조기 출소했다.10여 년의 세월이 흐른 지금, 육경한의 얼굴에 시간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었지만 왠지 모르게 더 깊고 온화한 매력을 내뿜었다.구치소 밖에서는 황진수와 소종이 육경한을 기다리고 있었다. 소종이 가장 먼저 달려와 그를 붙잡고 울었다.“대표님, 고생 많으셨어요!”키가 185cm나 되는 팔이 하나뿐인 남자가 눈물을 흘리며 울부짖고 있었다.“대표님...”옆에 있던 황진수가 육경한에게 담배를 건네자 담배를 받은 육경한은 깊게 빨아들인 뒤 말했다.“내 재봉 솜씨가 얼마나 좋은지 알아? 나중에 너희들에게 옷 한 벌 만들어 줄게.”소종은 정말 어이가 없었다.슬픈 분위기가 육경한의 한 마디에 완전히 뒤바뀌었다.소종이 울다가 웃으며 말했다.“대표님, 기대하고 있을게요.”육경한이 코웃음을 쳤다.“꺼져.”먼 곳을 바라본 육경한은 소종과 황진수 외에 그를 맞이하러 온 사람이 없는 것을 보고 왠지 실망감이 들면서도 한편으로는 안도감도 들었다.그녀가 오지 않아도... 괜찮았다.결코 좋은
“두 번째 것을 선택할게.”죽어도 소원을 구하겠다는 결심을 하고 온 육경한이었기에 고민할 필요 없이 바로 대답했다.“허허, 육 대표가 소원을 정말 많이 아끼나 봐.”주석훈이 비꼬는 듯한 말투로 한마디 했다.“그럼 시작하지. 육 대표, 6년 전 교통사고를 당했을 때 죽은 소녀의 이름이 뭔지 기억나?”자리에 얼어붙은 육경한은 주석훈이 혹시라도 소원을 해칠까 봐 바로 앞으로 두 걸음 걸었다. 덫이 ‘탁탁’ 소리를 내며 그의 두 다리를 집었고 이내 피가 철철 흘렀지만 육경한은 극심한 고통을 참으며 말했다.“몰라.”손에 칼을 움켜쥔 주석훈은 이를 갈며 말했다.“그 소녀의 이름은 수정이야. 육 대표처럼 모든 지원을 다 받아 치료받은 사람은 기억하지 못하겠지.”큰 고통 속에도 맑은 정신을 유지하고 있던 육경한이 입을 열었다.“그 교통사고에서 소녀가 죽은 것은 알고 있었어. 하지만 나는 우리 미우 그룹의 병원에서 치료를 받았어. 그 사람들이 나를 먼저 치료한 이유는 대동맥이 눌러져 위급한 상황이었기 때문이야. 하지만 그 소녀도 나와 똑같이 심각한 상태라는 것은 예상하지 못했어. 그래서 그 후에 소녀의 가족에게 위로금도 보냈어.”육경한의 책임은 아니었지만 소녀가 꽃다운 나이에 세상을 떠나 그녀의 부모님이 통곡하는 모습을 본 육경한은 소종을 시켜 소녀의 가족에게 2억 원의 위로금을 전달했다.“내가 네 말을 믿을 것 같아?!”주석훈이 매서운 눈빛을 내뿜으며 큰소리로 외쳤다.“어쨌든 넌 살아남았고 나의 수정이는 떠났어. 아무도 우리 수정이에게 신경을 쓰지 않았지!”주석훈은 더 이상 게임 따위 생각하지 않은 채 미친듯이 울부짖었다.“너희들은 모두 냉혈 인간들이야. 너희들은 죽어도 싸!”말을 마친 주석훈이 칼을 휘둘러 소원의 배를 찌르려 하자 육경한은 재빨리 몸을 날려 자신의 종아리로 칼을 막았다.소원을 밀어낸 육경한은 격렬한 고통을 참으며 주석훈과 맞붙었다.팔다리가 멀쩡한 주석훈은 이내 다리가 다친 육경한보다 우위를 점했다.도우려고 한 발 나선 소
이후 남자는 기분이 좋은 듯 소원의 입에 물린 천을 빼주며 말했다.“어떻게 여기에!”소원은 깜짝 놀랐다. 눈앞에 있는 사람은 바로 그녀를 계속 도와주던 주석훈이었다!자신에게 접근한 의도를 의심한 적은 있었지만 나중에 그의 여자친구가 병으로 사망했다는 얘기를 듣고 자신과는 원한이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그런데 이 모든 사건의 배후가 주석훈이라니...“소원, 많이 놀랐지?”가면을 벗어 던진 주석훈은 마치 조금 전까지 잔인했던 사람이 본인이 아닌 듯 아주 평온해 보였다.“왜... 이렇게까지?”소원은 처음에 이해할 수 없었지만 자연스럽게 왼손을 사용해 물건을 잡는 모습을 보고 바로 깨달았다.“너였어!”소원은 확신에 찬 얼굴로 말했다.“상철 삼촌과 진아연을 죽인 사람이 너! 맞지?!”주석훈은 부인하지 않았고 그의 표정 또한 모든 걸 말해주듯 가볍게 웃으며 한마디 했다.“소원, 그 사람들은 죽어도 싼 사람들이야. 그들이 죽었으니 네가 기뻐해야 하는 거 아니야? 그 사람들이 공모해서 네 아버지를 죽였잖아?”“아니야!”소원은 단호하게 부정했다.“그 사람들은 단순히 조종당한 희생양일 뿐이야. 내 아버지를 죽인 진짜 범인이 너였어?! 넌 그냥 증거 인멸을 한 거야!”“소원, 정말 똑똑하네?!”칭찬하듯 한마디 한 주석훈의 말에 소원은 분노로 가득 차올라 외쳤다.“왜! 아빠가 뭘 잘못했다고 죽인 건데?!”주석훈은 음흉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소원, 네가 모를 거라고 생각했어. 이유? 알고 싶어? 나와 육경한 사이에 깊은 원한이 있기 때문이야.”“그게 아빠와 무슨 상관인데!”소원은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되지 않았다.“이렇게 간단한 이치를 모른다고?”주석훈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소진용이 죽어야만 너와 육경한의 갈등을 최대로 끌어올릴 수 있으니까. 넌 내 손에 있는 최고의 무기야. 넌 육경한에게 끔찍한 고통을 안겨 줄 수 있는 존재지. 지난 5년 동안, 본인만의 원칙이 있는 사람이 그것을 깨고 괴로워하는 모습을 보는 게 얼마나 즐거운
소원이 두 손을 머리 위로 든 채 남자의 방향으로 걸어가자 남자는 다친 전미영을 바닥에 내던졌다.전미영은 이미 의식을 잃었기에 지금 상태가 어떤지 알 수 없었다.소원은 체념한 듯 보였지만 사실 남자에게 가까이 다가가면서 몰래 반지 속의 장치를 작동시켰다.이내 독이 묻은 바늘로 남자의 팔을 찌르자 팔이 곧바로 마비되기 시작한 남자는 저린 감각이 팔을 타고 온몸으로 퍼져 나가는 것을 느꼈다.“망할 년! 감히 날 속여?”남자는 분노하며 소원을 발로 걷어찼다.배를 보호하기 위해 몸을 돌린 소원은 엉덩이가 세게 걷어차인 바람에 비틀거리며 앞으로 두 걸음 나아갔다. 다행히 앞에 소파가 있었기에 소파를 붙잡고 간신히 몸의 균형을 잡은 뒤 있는 힘껏 소리쳤다.“살려 주세요! 도와주세요...!”그러나 남자가 바로 달려와 순식간에 손수건으로 그녀의 입을 틀어막았다.최면제의 효과가 서서히 올라옴과 동시에 문을 걷어차는 소리와 몇 발의 총성이 희미하게 울리는 것이 들렸다.소원은 속으로 간절히 기도했다.‘제발 엄마를 구해 주세요...’그러고는 있는 힘을 다해 목걸이를 바닥으로 내던진 뒤 점점 의식을 잃고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희미하게 정신을 차렸을 때는 운송 차 안인 듯한 밀폐된 공간에 갇혀 있었다.입안에는 천이 틀어막혀 있었고 팔도 밧줄에 단단히 묶여 있었다.순간 소원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결국 구출되지 못하고 가면을 쓴 남자에게 끌려온 것이다.주위에 전미영이 보이지 않자 소원은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엄마가 같이 끌려오지 않은 것만으로도 다행이야. 현장에 있던 사람들이 엄마를 병원으로 옮겼을 거야. 그러면 희망이 있어.’하지만 엄마의 상태가 어떤지 알 수 없었기에 속으로 행운을 빌며 기도할 수밖에 없었다.그리고 이 납치범에 대한 분노가 가슴 속 깊이 밀려왔다.‘이 사람은 대체 우리와 무슨 원한이 있길래 이런 짓을 하는 거지?’덜컹거리며 달리는 차 안에 있는 소원은 졸음이 밀려왔다.임신 후기라서 그런지 이런 상황에서도 극심한 피
육경한이 진지한 목소리로 말했다.“지금 바로 그 여경을 찾아서 같이 있도록 해. 이 사람이 아직도 쇼핑몰 안에 있을 가능성이 커. 나도 지금 돌아가는 중이야...”소원은 순간 숨을 죽인 채 눈도 깜빡이지 않고 앞을 응시했다.바로 앞에 하얀 여우 가면을 쓴 남자가 한 중년 여성을 붙잡고 있었다. 그 중년 여성이 바로 모두가 찾는 전미영이었다.육경한의 말대로 그녀의 엄마는 정말 여기에 있었다.육경한의 목소리가 전화기 너머로 계속 들렸지만 소원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전미영은 처음부터 끝까지 밖으로 나가지 않았다. 가면을 쓴 이 교활한 남자는 사람을 쇼핑몰 안에 붙잡아둔 채 밖으로 나가지 않았던 것이다.‘등잔 밑이 어둡다’라는 말이 괜히 있는 것이 아니었다.가짜 번호판 차량은 아마도 이 남자가 미리 파놓은 함정일 것이다.그녀가 상상한 것보다 훨씬 똑똑한 이 사람은 다른 사람의 심리를 읽을 줄 알았다.가면 쓴 남자는 손가락을 입에 대며 ‘쉿’ 하는 제스처를 취하더니 소원에게 말을 하지 말고 전화를 끊으라는 뜻을 내비쳤다.자기 엄마가 상대방의 손에 있기에 소원은 그의 말에 따를 수밖에 없었다.전화를 끊은 후 가면을 쓴 남자가 그녀에게 한마디 지시했다.“전화기를 꺼서 이쪽으로 던져.”소원은 남자의 말대로 순순히 전화기를 끄고 그의 앞에 던진 후 한마디 물었다.“누구세요? 지금 뭘 원하는 거예요? 제발 우리 엄마만 해치지 마세요!”간신히 마음을 진정시킨 소원은 남자를 향해 두 가지 질문을 던졌지만 그녀의 유일한 요구는 상대방이 엄마를 해치지 않는 것이었다.말을 하면서도 소원은 몰래 주변을 관찰했다. 가면 쓴 신비로운 남자는 정말 교묘한 장소를 선택했다.화장실은 휴게실 제일 안 쪽에 있었고 뒤쪽에 있는 창문과 거리가 가까웠다.남자는 전미영을 붙잡고 입구 쪽에서 소원과 정면으로 마주서 있었다. 이렇게 하면 좁은 포위망이 형성되어 소원을 한 구석에 가둘 수 있다.남자는 손에 흉기를 들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자체적으로 제작한 권총 비슷한 것
강민혜는 즉시 지시를 내려 이 수상한 차량을 중점적으로 조사하라고 했다. 육경한이 회사의 위기 대응팀과 협력해 조사하라고 지시하자 그들은 이내 차량의 이동 경로를 찾아냈다.육경한은 즉시 차량을 출동시켜 추적하도록 했지만 소원더러는 가만히 있으라고 했다. 현재 상대방의 목표가 소원의 엄마가 아니라 임신 중인 소원일 가능성이 컸기 때문이다.게다가 차량 추격은 너무 자극적이어서 소원 같은 임산부에게 위험할 수 있었다.소원은 육경한이 그녀를 배려하기 위해 이렇게 하는 것임을 알았다. 이런 상황에서 소원이 차량 추격에 참여해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큰일이다. 어머니를 찾지 못하고 본인까지 안 좋은 상황이 되면 두 마리 토끼를 다 놓친 셈이 된다.육경한의 부탁에 소원은 그의 말에 따라 자리에서 기다리기로 했다. 육경한은 회사 경호원 한 팀을 불러 상대방의 차량을 추적하도록 했다.쇼핑몰에 남아 있는 경호원들은 움직이지 않고 그 자리에서 소원을 경호했다. 소원의 걱정을 덜기 위해 육경한도 차량 추적에 나섰다.이렇게 되어 여러 대의 차량이 CCTV에 찍힌 그 검은 차를 추적하기 시작했다.소원은 쇼핑몰의 휴게실에서 초조하게 기다렸다. 불안감에 휩싸인 그녀는 심박 수가 빨라져 의사가 와서 경고하기도 했다. 이렇게 되면 그녀의 몸에도 해로울 뿐만 아니라 조산할 위험이 있기 때문이다.소원이 걱정된 강민혜는 현장에 남아 그녀를 달랬고 소원이 화장실에 갈 때도 한 발짝도 떨어지지 않고 함께했다.소원은 마음을 진정시키기 위해 화장실에 가서 찬물로 세수를 했고 강민혜도 옆에서 그녀를 위로했다.“소원 씨, 걱정하지 마세요. 어머님은 분명 괜찮을 거예요. 그렇게 큰 고비도 넘겼는데 별일 없을 거예요. 게다가 경찰과 육 대표님이 모두 추적하고 있잖아요. 그러니 마음 놓으세요.”본인이 아무리 불안해해도 소용없다는 것을 알고 있는 소원은 육경한이 좋은 소식을 전해주길 간절히 기다렸다. 하지만 불편한 몸 때문에 자꾸 구역질이 났다.이때 소원의 전화가 울렸다.육경한이었다.당황한
육경한이 성큼성큼 다가가 물었다.“왜 그래, 장모님은?”“엄마가 사라졌어...”소원이 흐느끼는 목소리로 말했다.방금 충돌이 일어났을 때만 해도 전미영은 그녀 곁에 서 있었다.어떻게 된 일일까... 눈 깜짝할 사이에 전미영이 사라졌다.전미영은 걸을 수는 있지만 말을 잘하지 못하고 지능도 두세 살 아이 수준인데 도대체 어디로 갔을까...소원이 급히 찾으러 가려 하자 육경한이 그녀의 손을 잡으며 달랬다.“너무 급해 하지 마. 우선 CCTV를 보자. 경호원들에게 찾으라고 했어. 네가 걷는 것보다 경호원들이 움직이는 게 빨라.”소원도 육경한의 생각이 맞다고 생각했다. 지금은 최대한 침착한 마음가짐으로 엄마를 찾아야 했다. 절대 당황하면 안 되었다.두 사람이 CCTV 실로 향했을 때 안에 있던 사람들은 이미 전미영이 사라지는 영상을 찾아냈다.영상을 보니 전미영은 처음에는 경호원의 뒤, 소원 곁에 서 있었다.하지만 조금 전 말싸움이 일어나면서 그 남자가 경호원과 몸싸움을 하려 하자 경호원들은 소원이 다칠까 봐 소원과 육경한 주변으로 몰렸다.그러면서 전미영은 자연스럽게 뒤에 갔다. 원래대로라면 전미영도 별일 없어야 했지만 무슨 일인지 전미영이 갑자기 혼자 모퉁이 쪽으로 걸어갔다. 마치 그곳에 그녀를 끌어당기는 뭔가가 있는 것처럼 말이다.그녀는 불과 7, 8걸음 되는 모퉁이까지 아주 빠른 속도로 걸어갔다. 한편 소원과 육경한에게 정신이 팔린 경호원들은 전미영을 발견하지 못했고 전미영이 뒤에서 사라질 때까지 아무도 눈치채지 못했다.다음 모퉁이의 CCTV에는 소원이 비상구로 들어가는 것이 찍었다. 계단에 CCTV가 없었고 출구에 CCTV가 한 대 있었지만 전미영의 모습은 어디에도 찍히지 않았다. 즉 전미영이 출구로 나가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했다.그렇다면 유일한 통로는 지하 주차장이었다. 하지만 지하 주차장 출구의 CCTV가 때마침 고장이 나 있어 전미영이 그 출구로 나갔는지 확인할 수 없었다.전미영이 실종된 지 불과 몇 분, 실종자를 한 시간 이내에
두 모자가 가식적으로 불쌍한 척하며 사람들의 동정을 구걸한 것을 안 사람들은 순간 말문이 막혔다.그 모자를 제일 먼저 도우려고 나섰던 남자는 고개를 숙이며 소원에게 사과했다.“죄송해요. 제가 눈이 어두웠네요. 이런 말썽꾸러기 아이는 정말 톡톡히 교육해야 해요. 얼마든지 책임을 물으세요.”주변 사람들도 같은 입장이었다.입장을 바꿔 생각해 봤을 때 본인이 이런 말썽꾸러기 아이를 만난다면 분명 화가 날 것이다.게다가 이 모자는 역할 분담이 명확했다. 아들은 말썽을 부리고 엄마는 말재주를 발휘해 변명했다. 누구나 이런 일이 생긴다면 진짜로 화가 날 것이다.구경꾼들이 흩어진 후 육경한은 두 모자의 앞으로 한 걸음 앞으로 나아가더니 아이를 내려다보며 싸늘한 목소리로 말했다.“누가 시킨 거야?”엄마가 아이를 뒤로 끌어당기며 말했다.“아무도 없어요! 아무도 없다고 했잖아요. 그냥 우리 애가 장난친 거예요.”여자는 눈물을 흘리며 흐느꼈다.“왜 이래요... 우리가 그냥... 사과할게요... 아이고, 내가 왜 이렇게 불행한지...”그들은 완전히 피해자 행세를 하고 있었다.이런 상황에서도 여전히 자신이 피해자인 척하고 있으니 말이다.하지만 그들의 눈빛은 이미 흔들리기 시작했고 주위 사람들과 눈을 마주치지 못하는 모습은 보기에도 이상해 보였다.조금 지친 소원이 육경한의 손을 잡아당기며 말했다.“됐어, 이만 가자.”“1분만 기다려.”뭔가 이상하다고 느낀 육경한은 아이를 뚫어지게 바라보더니 압박감이 넘치는 목소리로 물었다.“누가 너를 시켰는지 말해. 안 그러면 바로 고소할 테니까.”겁이 많은 아이는 바로 오줌을 지리더니 이내 ‘와’하고 울음을 터뜨리며 말했다.“아저씨가...”아이의 엄마는 아이의 입을 막으려 했지만 이미 늦었다. 육경한이 아이의 엄마를 밀어내고 차가운 눈빛으로 아이를 바라보며 말했다.“똑바로 말해!”“어떤 아저씨가... 아주머니와 부딪히면 엄마에게 100만 원을 준다고 했어요... 엄마가 그러면 게임기를 사주겠다고 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