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지윤은 상황을 정리하며 술에 취한 남자의 친구가 계속해서 사과하는 걸 들었다.“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저희가 정말 실수했어요. 형님과 여자친구분께 이렇게 사과드립니다. 부디 넓은 아량으로 제 친구 좀 봐주세요.”‘여자친구'라는 말을 듣고 곽경천은 의외로 표정을 풀었다. 이내 차가운 얼굴에서 조금은 온화한 빛이 감돌았다.그는 담담하게 말했다.“친구가 술에 취했으면 그냥 집에 데려가서 쉬게 하세요. 나중에 후회할 일 만들지 말고.”이 말에 상대방은 연신 고개를 숙이며 감사 인사를 하고 친구를 급히 끌고 갔다.곽경천은 고개를 돌려 자신의 코트 끝자락을 붙잡고 있는 구지윤의 손을 보았다. 복잡한 감정이 담긴 눈빛이었지만 이내 평정심을 되찾은듯했다. 구지윤은 잠시 멍하니 있다가 곧바로 손을 놓고 머뭇거리며 말했다.“여기까지 와서 뭐 하시는 거예요?”“너 집에 데려다주려고.”곽경천은 간결하게 말하며 구지윤의 손에서 차 키를 가져가더니 자연스럽게 차 앞으로 걸어갔다.“하지만...”그러나 구지윤이 거절할 틈도 없이 곽경천이 이미 조수석 문을 열어주었기에 그녀는 어쩔 수 없이 조수석에 앉았다.구지윤은 차에 타면서 물었다.“그럼 도련님 차는요?”“운전기사가 가져갔어.”구지윤은 마음속으로 여러 가지 생각을 하며 말했다.“정말로 데려다주지 않아도 돼요. 저 아직 회사에 가야 할 일이 있어요.”“늦었잖아. 할 일 있으면 내일 해.”구지윤은 곽경천과 함께 차를 타고 가는 게 불편했는지라 서둘러 변명을 생각해냈다.“안 돼요. 아직 마무리 못 한 서류가 있어요...”그때 곽경천이 갑자기 핸드폰을 꺼내더니 윤혜인에게 전화를 걸기 시작했다.“뭐 하는 거예요!”놀란 구지윤은 다급하게 몸을 기울여 그의 핸드폰을 끄려 했다.그러자 곽경천은 전화를 끊는 대신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혜인이한테 물어보려고. 정말로 네가 없으면 회사가 안 돌아가기라도 하는지.”“절대 물어보지 마요!”목청을 높이며 구지윤은 절박하게 말했다.예전에 구지윤은 곽경천 앞에서
윤혜인은 배남준이 미간을 찌푸린 것도 모른 채 그의 손목을 움켜쥐며 말했다.“맞아요, 바로 이 사람! 이 눈 기억해요. 그 사람은 이색안을 가진 사람이었어요!”그녀가 이토록 확실하게 기억하는 이유는 그날, 구조대가 도착하기 직전 그 사람이 윤혜인을 차와 함께 다리 아래로 밀어버렸기 때문이다.당시 그 남자는 모자와 마스크로 얼굴을 가리고 있었지만 빛의 굴절로 인해 눈동자가 푸른색과 붉은색으로 변하는 것을 분명히 보았다.그리고 이 사진 속 인물은 그때 그 남자와 똑같은 이색안이었다.윤혜인은 그 남자의 눈을 보자마자 온몸의 털이 곤두섰다.그 눈은 마치 독을 품은 방울뱀의 눈처럼 악의에 찬 기운이 느껴졌고 한 번 마주친 사람은 평생 그 악몽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 같은 공포를 불러일으켰다.윤혜인은 떨리는 손으로 배남준의 팔을 잡았다.“남준 오빠, 이 사람이 누군지 알아요?”배남준은 잠시 고민하더니 말했다.“이 사람은 찰스 가문 소속이야. 최근에 임무를 수행하러 나갔다는 정보는 있지만 어디로 갔는지는 아직 조사되지 않았어. 내가 이 사진을 배씨 가문의 사무 그룹에 올려서 주시하도록 할게. 이 사람이 북안도로 돌아오는 순간 바로 잡으면 그때의 일을 물을 수 있을 거야.”윤혜인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예전일 뿐만 아니라 최근의 폭발 사건도 이 사람이 관련이 있어요.”그녀는 그 남자의 변조된 목소리를 기억했다. 그 목소리는 다리에서 윤혜인을 밀어버렸던 남자의 말투와 너무나도 비슷했다.따라서 윤혜인은 다리 추락 사건과 최근 임세희의 납치 사건에서 그 남자가 동일 인물이라는 확신이 들었다.배남준도 임세희 납치 사건에 대해 곽경천에게서 들은 바가 있었다.당시 차량 시스템에 해커가 침입해 위성을 통해 신호를 추적한 후, 그 신호를 해커를 통해 분석한 결과 신호가 서울에서 발송된 것이었다.이색안 남자의 정체를 확인하자 배남준의 얼굴은 더욱 심각해졌다.그러나 그는 윤혜인이 더 걱정하지 않도록 차분하게 말했다.“알겠어. 걱정하지 마. 내가 사람들을 시
윤혜인이 본 남자가 에단 찰스라면 그 말은 90% 이상 사실일 가능성이 컸다.에단은 그의 어머니 북안도의 유명한 ‘미친 미녀’ 스테파니 브룩스의 유전자를 물려받았기 때문이다.스테파니는 원래 찰스 가문의 운송업에 종사하는 인부의 딸이었는데 아버지를 찾으러 찰스 가문을 방문했을 때, 그 자리에서 가문의 수장에게 눈에 띄어 그와 관계를 맺게 되었다.결국 그녀는 찰스 가문의 열 번째 아내가 되었다.북안도에서는 일부다처제가 합법이었기에 스테파니는 찰스 가문 수장의 큰 사랑을 받았다.하지만 그녀는 정상적인 사람이 아니었다. 늘 이상한 행동을 일삼았고 정신이 불안정했다.스테파니는 한밤중에 하녀의 머리를 밀고 옷을 벗긴 뒤, 영하 40도의 혹한 속으로 내보내 그녀가 서서히 얼어 죽는 모습을 즐겼다.때문에 그녀를 모시던 하녀들은 대부분 3개월을 넘기지 못하고 끔찍한 죽음을 맞았고 죽은 이들의 상태는 하나같이 기괴하고 비참했다. 그러나 스테파니를 너무 아끼던 찰스는 이 모든 사건을 은폐하고 그녀를 계속 보호했다.하지만 스테파니는 점점 더 미쳐갔고 결국 아이를 낳은 후 어느 날 밤 스스로 몸에 불을 붙여 자살했다.찰스는 스테파니의 죽음에 깊은 슬픔을 느끼며 그녀를 기리기 위해 비석을 세우고 ‘평생의 사랑’이라고 적었다.그리고 에단은 스테파니의 아들로 가문의 큰 사랑을 받으며 자랐다.하지만 그는 6살 때부터 폭력적이고 잔인한 성향을 보이기 시작했다.음식을 제대로 하지 못한 요리사의 머리를 뜨거운 철판에 눌러대며 지글지글 타는 소리와 함께 그의 고통을 즐겼다고 한다.하지만 에단은 스테파니와 달리 사람을 즉시 죽이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그는 사람을 서서히 고문하며 괴롭히는 것을 즐겼고 그 과정에서 쾌락을 느끼는 성향을 가졌다.에단에게 한 번 찍힌 사람은 절대로 그의 손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현재로서는 서울이 윤혜인에게 가장 안전한 장소였다.에단도 이를 잘 알고 있었기에 서울에서는 법을 어기며 대놓고 행동하지 않았다.더구나 출입국 기록에 따르면 에단
돌아오는 길에 주훈은 전화를 받았다. 그는 심각한 표정으로 말했다.“대표님, 그분들 서로 만났습니다.”그러자 이준혁이 냉랭한 목소리로 답했다.“연결해.”주훈은 곧바로 라디오로 보이는 검은색의 소형 금속 상자를 꺼냈고 이준혁의 블루투스 이어폰에서는 여자의 불만 가득한 목소리가 또렷하게 들려왔다.“왜 날 찾아온 거예요?” 원씨 가문 저택.원지민은 온몸에 긴장감이 감돌며 경계하는 눈빛으로 정장을 차려입은 남자를 바라보았다. 누군가 창문을 넘어 들어오리라고는 상상도 못 했다.“난 그쪽이랑 할 말 없으니까 이만 가요. 신고는 안 할 테니까.”말을 마치고 원지민은 문을 열어 남자를 내보내려 했다.그러나 남자는 가지 않고 쿠션 소파에 느긋하게 앉으며 말했다.“뭐가 그리 급해요.”“한구운 씨!”그가 자리를 잡고 앉아 원지민은 안색이 변하며 분노를 터뜨렸다.“나 곧 준혁이랑 결혼할 거예요. 당당하게 이선 그룹 대표의 부인이 될 사람이라고요. 그런데 한밤중에 미래 형수님 방에 들어오는 게 맞는 행동이라 생각해요?” “하...”한구운은 입을 열어 조롱이 섞인 가벼운 웃음을 흘렸다.“정말 이선 그룹 대표 부인이 될 수 있다고 확신해요?”“당연하죠.”원지민은 단호하게 말했다.이준혁에겐 지금 자신이 필요했기에 원지민은 반드시 이선 그룹 사모님이 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그쪽 아버지가 계속 혼수상태라는 소식 들었죠?”한구운이 갑자기 예상치 못한 말을 꺼내자 순간 마음이 흔들린 원지민의 두 눈이 커졌다.“무슨 뜻이에요?”한구운은 두 손을 깍지 낀 채, 엄지로 가볍게 박자를 맞추며 말했다.“원지민 씨는 똑똑하니까... 내가 더 말할 필요 없지 않겠어요?’한구운의 냉랭한 눈빛에 원지민은 온몸에 소름이 돋았지만 굳건히 말했다.“지금 무슨 말씀을 하는 건지 모르겠네요.” 원정호의 상태를 아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혼수상태라는 사실이 대외에 공개되지 않았지만 한구운이 알아내는 건 놀랍지 않았다.하지만 다른 것들에 대해 원지민은 한구운이
“신고요?”한구운은 웃으며 말했다.“경찰이 오면 아마도 그쪽을 잡겠죠. 저 말고.”그는 분석 보고서를 내밀며 차갑게 말했다.“원지민 아버지의 약물 리스트에 미데식스는 없어요. 이건 금지 약물이죠. 세포탁심과 함께 복용하면 치명적인 반응을 일으킵니다. 가벼우면 혼수상태에 빠지고 심하면 혼수상태에서 사망할 수도 있죠. 그런데 당신 아버지의 체내에서 미데식스가 검출됐어요.”그 보고서를 보고 원지민은 공포에 휩싸였다.한구운이 자신도 모르게 병원에 사람을 심어 원정호를 검사하게 만들 줄은 상상도 못 했다.‘내 사람들은 뭐 하는 거야? 왜 항상 문제만 일으키는 거냐고. 하여간 쓸모가 없어...’이 순간, 원지민은 임호가 그리워졌다. 그가 있었다면 이런 일은 절대 벌어지지 않았을 테니 말이다.한구운은 미소를 머금고 말했다.“이 우연에 대해 나에게 설명해줄 수 있나요?”원지민은 한구운에게 다른 의도가 있다는 걸 알았기 때문에 그가 자신을 바로 폭로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다.그래서 그를 똑바로 바라보며 물었다.“도대체 뭘 하려는 거예요?”그러자 한구운은 느긋하게 대답했다.“당연히 나의 모든 것을 되찾으려는 거죠.”원지민은 한구운에게 그럴 능력이 있다고 믿지 않았지만 그가 워낙 위험한 인물이기 때문에 자극하지 않기로 했다.그녀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이씨 가문에 당신의 것이 있다고 해도 그곳엔 준혁이가 있어요. 준혁이가 당신보다 더 자격이 있죠.”하지만 한구운은 그 말을 듣고 더욱 음침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원지민 씨, 우리가 같은 부류의 사람이라는 점을 감안해서 비밀 하나를 공유해 드릴게요.”그러고는 그녀의 귀에 속삭였다.곧 원지민은 입을 크게 벌리고 말을 잇지 못했다.‘말도 안 돼. 한구운의 말이 사실이라면 준혁이의 정체는...’둘의 관계는 완전히 뒤바뀌게 되는 것이었다.한구운은 그녀가 멍해 있는 모습을 보더니 웃으며 말했다.“그날이 오면 내가 당신을 돕고 있었다는 걸 알게 될 거예요. 왜냐하면...”순간 그의 눈빛이
원지민은 살짝 입을 벌렸지만 반박할 수 없었다.이 말은 그녀의 마음을 정확히 꿰뚫었다.그녀와 한구운의 공통점이 이 순간 완벽하게 드러났다.이런 사람 앞에서는 굳이 꾸밀 필요가 없을 것 같았다.하여 원지민은 이제 자신의 이익을 생각하기 시작했다.“그쪽 말은 혼자만의 주장일 뿐이잖아요. 진짜인지 아닌지 어떻게 알겠어요? 날 속이는 걸지도 모르죠.”두 사람은 같은 부류의 인간이었다. 서로가 하는 말은 믿을 수 없고 언제든 말을 바꿀 수 있었다.그때, 한구운은 준비한 것이 있었는지 주머니에서 증명서를 꺼내 들었다.“똑똑히 봐요.”그 증명서를 보던 원지민은 점점 믿기지 않는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어떻게 이런 일이... 어떻게...’그러나 모든 것이 아무런 흔적도 없이 일어난 건 아니었다. 이천수가 그런 태도를 보인 것도 이해가 됐다. 이 증명서가 있으니 모든 일들이 말이 맞아떨어졌다.“그러니까 나보고 뭘 하라는 거죠?”원지민은 자신이 할 수 있는 게 무엇인지 이해되지 않았지만 그래도 톤을 바꾸었다.“제가 할 수 있는 게 뭐죠?”그러자 한구운은 무심한 듯 대답했다.“결혼식에서 나랑 협조만 하면 됩니다.”그 후, 그는 두 장의 보고서를 겹쳐놓았다. 곧 방풍 라이터의 파란 불꽃으로 순식간에 종이를 태워 쓰레기통 안에서 완전히 꺼버렸다.남자가 나간 후에야 원지민은 침대에 털썩 주저앉았다. 등에는 얇은 식은땀이 흐르고 있었다.그녀는 자신의 집착을 의심하기 시작했다.‘만약 준혁이가 더 이상 이준혁이 아니라면 난 여전히 준혁이를 사랑할 수 있을까?’원지민은 과연 자신이 이준혁이라는 사람을 사랑하는 것인지, 아니면 이선 그룹이라는 큰 배경에 의해 얻어진 그의 지위와 권력을 사랑하는 것인지 헷갈렸다.쓰레기통 안에서 타다 남은 재를 바라보며 원지민은 결정을 내렸다.그리고 그녀는 한구운에게 메시지를 보냈다.[한구운 씨를 도울게요. 하지만 이선 그룹의 20% 지분을 요구합니다.]분명 20%의 지분은 단순히 이선 그룹 사모님이 되는 것보다 더
원진우는 부하에게 윤혜인의 영상을 가져오라고 지시했다. 그렇게 무심히 한 번 본 뒤 그의 눈이 갑자기 커졌다.영상 속 생동감 넘치는 소녀는 사진과는 전혀 다른 느낌이었다.그 젊고 아름다운 얼굴은 윤아름과 비교해도 청출어람이라 할 만했다.아름다움 외에도 윤혜인의 눈동자가 미세하게 움직일 때 느껴지는 익숙한 감정은 마치 전생의 인연처럼 원진우의 영혼을 관통했다.그의 차가운 마음이 한순간에 부드러워졌다.하지만 그것도 잠시뿐이었다.윤아름과 다른 남자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란 사실을 생각하자 그는 이 존재를 지워버리고 싶었다.그때, 뒤에서 들리는 윤아름의 발소리가 그를 깨웠다.원진우가 영상을 채 끄지도 못했는데 윤아름이 물었다.“진우 씨, 이 아이는 누구야?”윤아름이 이렇게 묻자 원진우는 급하게 영상을 끄기는커녕 되레 윤아름 앞에 보여주며 말했다.“내 친구 딸이야.”그러자 윤아름은 놀란 듯 손으로 입을 가리며 말했다.“진우 씨 친구 딸이 벌써 이렇게 컸어?”아쉬움과 감탄을 담은듯한 그녀의 눈빛은 영상 속 소녀에게 머물러 있었다.“정말 예쁘네. 저 눈동자는 마치 달을 담은 것 같아. 정말 아름다워.”원진우는 윤아름의 표정을 주의 깊게 살폈지만 특별한 반응을 읽을 수 없었다.윤아름이 한 말은 그저 미에 대한 칭찬일 뿐이었다.그러자 원진우는 핸드폰을 옆으로 던지며 무심하게 웃었다.“이 눈이 마음에 들어?”“응. 정말 예뻐.”순간, 원진우는 그녀의 허리를 감싸며 무릎 위로 끌어올렸다.“그렇게 마음에 들면 이 눈을 파서 장난감으로 줄까?”“뭐... 뭐라고?”얼굴이 새하얗게 질린 채 윤아름은 눈을 크게 뜨며 겁먹은 표정을 지었다.그리고 원진우는 그 모습이 너무나 사랑스러워 오히려 더 괴롭히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소름이 돋은 윤아름의 팔을 보고 원진우는 그녀가 진심으로 겁먹었다는 것을 눈치챘다.하여 더 이상 놀리지 않고 담담하게 말했다.“놀랐나 보네. 그냥 농담한 거야.”그러더니 윤아름의 턱을 손가락으로 살짝 들어 올려 가볍게 입을
윤아름은 깜짝 놀라며 떨리는 손으로 옷깃을 움켜잡았다.“진우 씨, 제발... 우희, 우희 선생님께서 금방 올 거야...”하지만 원진우는 셔츠를 풀어헤쳐 바닥에 던졌고 곧 굴곡이 선명한 복근이 드러났다. 그 모습은 매우 강인해 보였다.“괜찮아.”그는 몸을 숙이며 날씬한 팔로 윤아름의 다리를 들어 올리고 낮고 거친 목소리로 말했다.“시간 충분해. 여기서 먼저 한번 해.”“...”주치의 진우희는 거실 밖에서 이미 한참을 기다리고 있었다.원래 약속된 시간은 오후 3시였지만 시간이 꽤 흘렀음에도 방 문은 열리지 않았다.희미하게 들려오는 여자의 낮은 신음 소리와 남자의 낮은 유혹의 목소리가 방 밖까지 퍼져 나왔다.그 은밀한 소리에 진우희의 귀 끝이 붉어졌다.소파 근처에는 남자의 셔츠와 벨트 그리고 여자의 실크 잠옷이 모두 구겨진 채 바닥에 던져져 있었다.그 ‘전투’가 얼마나 치열했는지 단번에 알 수 있었다.진우희 역시 남자친구가 있었던 적이 있었으니 지금 방 안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이 무엇인지 당연히 알고 있었다.하지만 원진우처럼 차가운 사람이 이런 말을 하는 것은 예상 밖이었다.“잘했어, 자기야, 한 번 더 하자, 응?”그렇게 한 시간이 더 지나서야 방 문이 천천히 열렸다.원진우는 머리를 갓 감은 듯 아직 젖은 상태로 나와 진우희를 보며 무심하게 말했다.“침 치료 끝나면 저 사람 밑도 한 번 봐줘. 자꾸 아프다고 하네.”진우희는 얼굴이 붉어졌다. 원진우는 정말 그녀를 외부인처럼 대하지 않았다.그녀는 고개를 끄덕이며 원진우에게 길을 내어주고 방 안으로 들어갔다.이미 정리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방안에는 아직 은밀한 향이 사라지지 않았다.부드러운 침대 중앙에는 아름다운 여자가 등을 보이며 누워 있었고 완벽한 곡선의 등이 드러나 있었다.그 등에는 손으로 집어낸 듯한 자국들이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진우희는 그 자국들이 심각해 보였지만 실제로는 괜찮은 수준이라는 걸 알았다. 금욕을 오래 한 남자라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이런 상태의 윤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