곽경천은 사건을 마무리하며 그날 저녁 식당에서 목격자를 찾아내 고객이 술에 약을 탔다는 증거를 확보했다.그리고 오후에 경찰서에 증거를 제출해 그 고객을 구치소에 보내버렸다.윤혜인은 이 이야기를 듣고 깜짝 놀라며 말했다.“지윤아, 이런 큰일이 있었는데 왜 나한테 말도 안 했어?”그녀는 구지윤을 이리저리 살펴보며 다행히도 눈에 띄는 외상은 없다는 것을 확인했다.분노가 치밀어 올라서 윤혜인은 말했다.“그 나쁜 자식이 널 괴롭혔다고? 어디 다친 데는 없고? 내가 변호사 불러서 그 자식 끝장내줄 거야!”이러한 윤혜인의 반응에 구지윤은 마음이 따뜻해졌다.“괜찮아. 나한테 손가락 하나 대지도 못했어. 도련님께서 다 해결해주셨거든.” 윤혜인도 최근 여러 일로 심란한 상황이었기 때문에 구지윤은 그녀에게 이런 골치 아픈 일을 말하지 않고 숨겼던 것이다.곽경천이 나서서 해결한 일이라는 것을 알게 되자 윤혜인은 더 이상 걱정하지 않으며 말했다.“그래. 그럼 오빠가 널 찾는 게 그 이유 때문이 맞겠다. 얼른 가서 전화해봐. 나는 남준 오빠가 데려다줄 테니 걱정 말고.”구지윤은 속으로 생각했다. 사실 곽경천이 전화하라는 이유는 단순히 그 때문이 아니었다.그는 메시지로 그녀에게 빨리 집에 오라는 말까지 보냈다.모든 이익을 차지한 것도 모자라 또 이런 태도로 나오는 곽경천이 구지윤은 어이가 없었다.정말 그는 자기만 고귀한 몸이라 여기는 모양인 것 같았다.구지윤은 속으로 이런 생각을 하며 차 앞으로 천천히 걸어갔다.차라리 작업실에 가서 일을 조금 더 하고 돌아가는 게 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럼 곽경천도 기다리다 포기할 테니 말이다.그녀가 막 차 문을 열려고 했을 때, 갑자기 뒤에서 누군가가 문손잡이를 누르며 구지윤의 손을 막았다.어젯밤의 불쾌한 경험 때문에 구지윤은 즉각 반응하며 본능적으로 전에 배운 방어술을 사용해 팔꿈치를 들어 뒤에 있는 사람의 턱을 치려고 했다.하지만 상대방은 구지윤의 동작을 예상한 듯 쉽게 그녀의 손목을 잡고 제압했다.
구지윤은 상황을 정리하며 술에 취한 남자의 친구가 계속해서 사과하는 걸 들었다.“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저희가 정말 실수했어요. 형님과 여자친구분께 이렇게 사과드립니다. 부디 넓은 아량으로 제 친구 좀 봐주세요.”‘여자친구'라는 말을 듣고 곽경천은 의외로 표정을 풀었다. 이내 차가운 얼굴에서 조금은 온화한 빛이 감돌았다.그는 담담하게 말했다.“친구가 술에 취했으면 그냥 집에 데려가서 쉬게 하세요. 나중에 후회할 일 만들지 말고.”이 말에 상대방은 연신 고개를 숙이며 감사 인사를 하고 친구를 급히 끌고 갔다.곽경천은 고개를 돌려 자신의 코트 끝자락을 붙잡고 있는 구지윤의 손을 보았다. 복잡한 감정이 담긴 눈빛이었지만 이내 평정심을 되찾은듯했다. 구지윤은 잠시 멍하니 있다가 곧바로 손을 놓고 머뭇거리며 말했다.“여기까지 와서 뭐 하시는 거예요?”“너 집에 데려다주려고.”곽경천은 간결하게 말하며 구지윤의 손에서 차 키를 가져가더니 자연스럽게 차 앞으로 걸어갔다.“하지만...”그러나 구지윤이 거절할 틈도 없이 곽경천이 이미 조수석 문을 열어주었기에 그녀는 어쩔 수 없이 조수석에 앉았다.구지윤은 차에 타면서 물었다.“그럼 도련님 차는요?”“운전기사가 가져갔어.”구지윤은 마음속으로 여러 가지 생각을 하며 말했다.“정말로 데려다주지 않아도 돼요. 저 아직 회사에 가야 할 일이 있어요.”“늦었잖아. 할 일 있으면 내일 해.”구지윤은 곽경천과 함께 차를 타고 가는 게 불편했는지라 서둘러 변명을 생각해냈다.“안 돼요. 아직 마무리 못 한 서류가 있어요...”그때 곽경천이 갑자기 핸드폰을 꺼내더니 윤혜인에게 전화를 걸기 시작했다.“뭐 하는 거예요!”놀란 구지윤은 다급하게 몸을 기울여 그의 핸드폰을 끄려 했다.그러자 곽경천은 전화를 끊는 대신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혜인이한테 물어보려고. 정말로 네가 없으면 회사가 안 돌아가기라도 하는지.”“절대 물어보지 마요!”목청을 높이며 구지윤은 절박하게 말했다.예전에 구지윤은 곽경천 앞에서
윤혜인은 배남준이 미간을 찌푸린 것도 모른 채 그의 손목을 움켜쥐며 말했다.“맞아요, 바로 이 사람! 이 눈 기억해요. 그 사람은 이색안을 가진 사람이었어요!”그녀가 이토록 확실하게 기억하는 이유는 그날, 구조대가 도착하기 직전 그 사람이 윤혜인을 차와 함께 다리 아래로 밀어버렸기 때문이다.당시 그 남자는 모자와 마스크로 얼굴을 가리고 있었지만 빛의 굴절로 인해 눈동자가 푸른색과 붉은색으로 변하는 것을 분명히 보았다.그리고 이 사진 속 인물은 그때 그 남자와 똑같은 이색안이었다.윤혜인은 그 남자의 눈을 보자마자 온몸의 털이 곤두섰다.그 눈은 마치 독을 품은 방울뱀의 눈처럼 악의에 찬 기운이 느껴졌고 한 번 마주친 사람은 평생 그 악몽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 같은 공포를 불러일으켰다.윤혜인은 떨리는 손으로 배남준의 팔을 잡았다.“남준 오빠, 이 사람이 누군지 알아요?”배남준은 잠시 고민하더니 말했다.“이 사람은 찰스 가문 소속이야. 최근에 임무를 수행하러 나갔다는 정보는 있지만 어디로 갔는지는 아직 조사되지 않았어. 내가 이 사진을 배씨 가문의 사무 그룹에 올려서 주시하도록 할게. 이 사람이 북안도로 돌아오는 순간 바로 잡으면 그때의 일을 물을 수 있을 거야.”윤혜인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예전일 뿐만 아니라 최근의 폭발 사건도 이 사람이 관련이 있어요.”그녀는 그 남자의 변조된 목소리를 기억했다. 그 목소리는 다리에서 윤혜인을 밀어버렸던 남자의 말투와 너무나도 비슷했다.따라서 윤혜인은 다리 추락 사건과 최근 임세희의 납치 사건에서 그 남자가 동일 인물이라는 확신이 들었다.배남준도 임세희 납치 사건에 대해 곽경천에게서 들은 바가 있었다.당시 차량 시스템에 해커가 침입해 위성을 통해 신호를 추적한 후, 그 신호를 해커를 통해 분석한 결과 신호가 서울에서 발송된 것이었다.이색안 남자의 정체를 확인하자 배남준의 얼굴은 더욱 심각해졌다.그러나 그는 윤혜인이 더 걱정하지 않도록 차분하게 말했다.“알겠어. 걱정하지 마. 내가 사람들을 시
윤혜인이 본 남자가 에단 찰스라면 그 말은 90% 이상 사실일 가능성이 컸다.에단은 그의 어머니 북안도의 유명한 ‘미친 미녀’ 스테파니 브룩스의 유전자를 물려받았기 때문이다.스테파니는 원래 찰스 가문의 운송업에 종사하는 인부의 딸이었는데 아버지를 찾으러 찰스 가문을 방문했을 때, 그 자리에서 가문의 수장에게 눈에 띄어 그와 관계를 맺게 되었다.결국 그녀는 찰스 가문의 열 번째 아내가 되었다.북안도에서는 일부다처제가 합법이었기에 스테파니는 찰스 가문 수장의 큰 사랑을 받았다.하지만 그녀는 정상적인 사람이 아니었다. 늘 이상한 행동을 일삼았고 정신이 불안정했다.스테파니는 한밤중에 하녀의 머리를 밀고 옷을 벗긴 뒤, 영하 40도의 혹한 속으로 내보내 그녀가 서서히 얼어 죽는 모습을 즐겼다.때문에 그녀를 모시던 하녀들은 대부분 3개월을 넘기지 못하고 끔찍한 죽음을 맞았고 죽은 이들의 상태는 하나같이 기괴하고 비참했다. 그러나 스테파니를 너무 아끼던 찰스는 이 모든 사건을 은폐하고 그녀를 계속 보호했다.하지만 스테파니는 점점 더 미쳐갔고 결국 아이를 낳은 후 어느 날 밤 스스로 몸에 불을 붙여 자살했다.찰스는 스테파니의 죽음에 깊은 슬픔을 느끼며 그녀를 기리기 위해 비석을 세우고 ‘평생의 사랑’이라고 적었다.그리고 에단은 스테파니의 아들로 가문의 큰 사랑을 받으며 자랐다.하지만 그는 6살 때부터 폭력적이고 잔인한 성향을 보이기 시작했다.음식을 제대로 하지 못한 요리사의 머리를 뜨거운 철판에 눌러대며 지글지글 타는 소리와 함께 그의 고통을 즐겼다고 한다.하지만 에단은 스테파니와 달리 사람을 즉시 죽이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그는 사람을 서서히 고문하며 괴롭히는 것을 즐겼고 그 과정에서 쾌락을 느끼는 성향을 가졌다.에단에게 한 번 찍힌 사람은 절대로 그의 손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현재로서는 서울이 윤혜인에게 가장 안전한 장소였다.에단도 이를 잘 알고 있었기에 서울에서는 법을 어기며 대놓고 행동하지 않았다.더구나 출입국 기록에 따르면 에단
돌아오는 길에 주훈은 전화를 받았다. 그는 심각한 표정으로 말했다.“대표님, 그분들 서로 만났습니다.”그러자 이준혁이 냉랭한 목소리로 답했다.“연결해.”주훈은 곧바로 라디오로 보이는 검은색의 소형 금속 상자를 꺼냈고 이준혁의 블루투스 이어폰에서는 여자의 불만 가득한 목소리가 또렷하게 들려왔다.“왜 날 찾아온 거예요?” 원씨 가문 저택.원지민은 온몸에 긴장감이 감돌며 경계하는 눈빛으로 정장을 차려입은 남자를 바라보았다. 누군가 창문을 넘어 들어오리라고는 상상도 못 했다.“난 그쪽이랑 할 말 없으니까 이만 가요. 신고는 안 할 테니까.”말을 마치고 원지민은 문을 열어 남자를 내보내려 했다.그러나 남자는 가지 않고 쿠션 소파에 느긋하게 앉으며 말했다.“뭐가 그리 급해요.”“한구운 씨!”그가 자리를 잡고 앉아 원지민은 안색이 변하며 분노를 터뜨렸다.“나 곧 준혁이랑 결혼할 거예요. 당당하게 이선 그룹 대표의 부인이 될 사람이라고요. 그런데 한밤중에 미래 형수님 방에 들어오는 게 맞는 행동이라 생각해요?” “하...”한구운은 입을 열어 조롱이 섞인 가벼운 웃음을 흘렸다.“정말 이선 그룹 대표 부인이 될 수 있다고 확신해요?”“당연하죠.”원지민은 단호하게 말했다.이준혁에겐 지금 자신이 필요했기에 원지민은 반드시 이선 그룹 사모님이 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그쪽 아버지가 계속 혼수상태라는 소식 들었죠?”한구운이 갑자기 예상치 못한 말을 꺼내자 순간 마음이 흔들린 원지민의 두 눈이 커졌다.“무슨 뜻이에요?”한구운은 두 손을 깍지 낀 채, 엄지로 가볍게 박자를 맞추며 말했다.“원지민 씨는 똑똑하니까... 내가 더 말할 필요 없지 않겠어요?’한구운의 냉랭한 눈빛에 원지민은 온몸에 소름이 돋았지만 굳건히 말했다.“지금 무슨 말씀을 하는 건지 모르겠네요.” 원정호의 상태를 아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혼수상태라는 사실이 대외에 공개되지 않았지만 한구운이 알아내는 건 놀랍지 않았다.하지만 다른 것들에 대해 원지민은 한구운이
“신고요?”한구운은 웃으며 말했다.“경찰이 오면 아마도 그쪽을 잡겠죠. 저 말고.”그는 분석 보고서를 내밀며 차갑게 말했다.“원지민 아버지의 약물 리스트에 미데식스는 없어요. 이건 금지 약물이죠. 세포탁심과 함께 복용하면 치명적인 반응을 일으킵니다. 가벼우면 혼수상태에 빠지고 심하면 혼수상태에서 사망할 수도 있죠. 그런데 당신 아버지의 체내에서 미데식스가 검출됐어요.”그 보고서를 보고 원지민은 공포에 휩싸였다.한구운이 자신도 모르게 병원에 사람을 심어 원정호를 검사하게 만들 줄은 상상도 못 했다.‘내 사람들은 뭐 하는 거야? 왜 항상 문제만 일으키는 거냐고. 하여간 쓸모가 없어...’이 순간, 원지민은 임호가 그리워졌다. 그가 있었다면 이런 일은 절대 벌어지지 않았을 테니 말이다.한구운은 미소를 머금고 말했다.“이 우연에 대해 나에게 설명해줄 수 있나요?”원지민은 한구운에게 다른 의도가 있다는 걸 알았기 때문에 그가 자신을 바로 폭로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다.그래서 그를 똑바로 바라보며 물었다.“도대체 뭘 하려는 거예요?”그러자 한구운은 느긋하게 대답했다.“당연히 나의 모든 것을 되찾으려는 거죠.”원지민은 한구운에게 그럴 능력이 있다고 믿지 않았지만 그가 워낙 위험한 인물이기 때문에 자극하지 않기로 했다.그녀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이씨 가문에 당신의 것이 있다고 해도 그곳엔 준혁이가 있어요. 준혁이가 당신보다 더 자격이 있죠.”하지만 한구운은 그 말을 듣고 더욱 음침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원지민 씨, 우리가 같은 부류의 사람이라는 점을 감안해서 비밀 하나를 공유해 드릴게요.”그러고는 그녀의 귀에 속삭였다.곧 원지민은 입을 크게 벌리고 말을 잇지 못했다.‘말도 안 돼. 한구운의 말이 사실이라면 준혁이의 정체는...’둘의 관계는 완전히 뒤바뀌게 되는 것이었다.한구운은 그녀가 멍해 있는 모습을 보더니 웃으며 말했다.“그날이 오면 내가 당신을 돕고 있었다는 걸 알게 될 거예요. 왜냐하면...”순간 그의 눈빛이
원지민은 살짝 입을 벌렸지만 반박할 수 없었다.이 말은 그녀의 마음을 정확히 꿰뚫었다.그녀와 한구운의 공통점이 이 순간 완벽하게 드러났다.이런 사람 앞에서는 굳이 꾸밀 필요가 없을 것 같았다.하여 원지민은 이제 자신의 이익을 생각하기 시작했다.“그쪽 말은 혼자만의 주장일 뿐이잖아요. 진짜인지 아닌지 어떻게 알겠어요? 날 속이는 걸지도 모르죠.”두 사람은 같은 부류의 인간이었다. 서로가 하는 말은 믿을 수 없고 언제든 말을 바꿀 수 있었다.그때, 한구운은 준비한 것이 있었는지 주머니에서 증명서를 꺼내 들었다.“똑똑히 봐요.”그 증명서를 보던 원지민은 점점 믿기지 않는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어떻게 이런 일이... 어떻게...’그러나 모든 것이 아무런 흔적도 없이 일어난 건 아니었다. 이천수가 그런 태도를 보인 것도 이해가 됐다. 이 증명서가 있으니 모든 일들이 말이 맞아떨어졌다.“그러니까 나보고 뭘 하라는 거죠?”원지민은 자신이 할 수 있는 게 무엇인지 이해되지 않았지만 그래도 톤을 바꾸었다.“제가 할 수 있는 게 뭐죠?”그러자 한구운은 무심한 듯 대답했다.“결혼식에서 나랑 협조만 하면 됩니다.”그 후, 그는 두 장의 보고서를 겹쳐놓았다. 곧 방풍 라이터의 파란 불꽃으로 순식간에 종이를 태워 쓰레기통 안에서 완전히 꺼버렸다.남자가 나간 후에야 원지민은 침대에 털썩 주저앉았다. 등에는 얇은 식은땀이 흐르고 있었다.그녀는 자신의 집착을 의심하기 시작했다.‘만약 준혁이가 더 이상 이준혁이 아니라면 난 여전히 준혁이를 사랑할 수 있을까?’원지민은 과연 자신이 이준혁이라는 사람을 사랑하는 것인지, 아니면 이선 그룹이라는 큰 배경에 의해 얻어진 그의 지위와 권력을 사랑하는 것인지 헷갈렸다.쓰레기통 안에서 타다 남은 재를 바라보며 원지민은 결정을 내렸다.그리고 그녀는 한구운에게 메시지를 보냈다.[한구운 씨를 도울게요. 하지만 이선 그룹의 20% 지분을 요구합니다.]분명 20%의 지분은 단순히 이선 그룹 사모님이 되는 것보다 더
원진우는 부하에게 윤혜인의 영상을 가져오라고 지시했다. 그렇게 무심히 한 번 본 뒤 그의 눈이 갑자기 커졌다.영상 속 생동감 넘치는 소녀는 사진과는 전혀 다른 느낌이었다.그 젊고 아름다운 얼굴은 윤아름과 비교해도 청출어람이라 할 만했다.아름다움 외에도 윤혜인의 눈동자가 미세하게 움직일 때 느껴지는 익숙한 감정은 마치 전생의 인연처럼 원진우의 영혼을 관통했다.그의 차가운 마음이 한순간에 부드러워졌다.하지만 그것도 잠시뿐이었다.윤아름과 다른 남자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란 사실을 생각하자 그는 이 존재를 지워버리고 싶었다.그때, 뒤에서 들리는 윤아름의 발소리가 그를 깨웠다.원진우가 영상을 채 끄지도 못했는데 윤아름이 물었다.“진우 씨, 이 아이는 누구야?”윤아름이 이렇게 묻자 원진우는 급하게 영상을 끄기는커녕 되레 윤아름 앞에 보여주며 말했다.“내 친구 딸이야.”그러자 윤아름은 놀란 듯 손으로 입을 가리며 말했다.“진우 씨 친구 딸이 벌써 이렇게 컸어?”아쉬움과 감탄을 담은듯한 그녀의 눈빛은 영상 속 소녀에게 머물러 있었다.“정말 예쁘네. 저 눈동자는 마치 달을 담은 것 같아. 정말 아름다워.”원진우는 윤아름의 표정을 주의 깊게 살폈지만 특별한 반응을 읽을 수 없었다.윤아름이 한 말은 그저 미에 대한 칭찬일 뿐이었다.그러자 원진우는 핸드폰을 옆으로 던지며 무심하게 웃었다.“이 눈이 마음에 들어?”“응. 정말 예뻐.”순간, 원진우는 그녀의 허리를 감싸며 무릎 위로 끌어올렸다.“그렇게 마음에 들면 이 눈을 파서 장난감으로 줄까?”“뭐... 뭐라고?”얼굴이 새하얗게 질린 채 윤아름은 눈을 크게 뜨며 겁먹은 표정을 지었다.그리고 원진우는 그 모습이 너무나 사랑스러워 오히려 더 괴롭히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소름이 돋은 윤아름의 팔을 보고 원진우는 그녀가 진심으로 겁먹었다는 것을 눈치챘다.하여 더 이상 놀리지 않고 담담하게 말했다.“놀랐나 보네. 그냥 농담한 거야.”그러더니 윤아름의 턱을 손가락으로 살짝 들어 올려 가볍게 입을
택시의 이동 동선만 봐도 육경한은 소원이 어디로 향하는지 알아챘다.그는 소원이 발견하지 못하도록 거리를 앞차와의 거리를 넓혔다.역시나 택시는 소원의 어머니가 계신 요양원 앞에 멈췄고 소원은 택시에서 내리자마자 안으로 들어갔다.자주 온 덕분에 간병인들은 소원을 알아봤다.“소원 씨, 오셨어요?”소원은 예의 바르게 인사를 건네며 고개를 끄덕였다.“우리 엄마 요즘 달라진 건 없죠?”이건 소원이 매번 묻는 말인데, 그녀는 자신이 오지 않은 2, 3일 동안 엄마한테 일어난 일들을 놓칠까 봐 조마조마했다.하지만 다른 일을 전부 다 제쳐두고 요양원에서 매일 엄마를 지킬 수는 없는 노릇이니 참 답답했다.엄마를 집으로 모셔가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지만 육경한이 절대 동의할 리가 없다. 게다가 요양원은 의료기기가 잘 갖춰져 있어 치료에 굉장히 도움이 됐기에 집에 이런 걸 놓지 않는 한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간병인이 입을 열었다.“전이랑 비슷해요. 달라진 건 없어요.”매번 똑같은 답이 돌아왔지만 소원은 듣고도 실망하지 않았다. 사실 변화가 없다는 게 좋은 소식일지도 모른다.차라리 지금처럼 아무것도 모른 채 살고 있는 게 행복일 수도 있다. 만약 깨어난다면 무너져가는 이 현실을 직면할 수 있을까?가능하다면 그녀는 혼자서 이 고통을 감당하고 싶었다.소원은 간병인에게 물었다.“엄마랑 단둘이 시간을 보내고 싶은데 가능할까요?”“당연하죠. 전 밖에 있을 테니까 무슨 일 있으면 벨 눌러요.”“알겠습니다.”간병인이 나간 후 소원은 침대에 앉아 창틀에 놓인 꽃들을 바라봤다. 그러다가 꼼짝도 하지 않고 가만히 있는 엄마를 보고선 나지막이 입을 열었다.“엄마...”전미영은 아무런 반응 없이 그저 눈을 깜빡이며 꽃들을 바라봤다.소원은 더 가까이 다가가 앉아 전미영을 껴안았다.“엄마...”하고 싶은 말이 수천 개가 있었지만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이곳에서 모든 감정과 스트레스를 쏟아내는 게 소원에게는 일종의 해방이었다.“엄마... 엄마...”소원은 결국
육경한은 소원이라는 독에 중독되어 이미 구제 불능의 상태였다.게다가 무곡산의 일은 소원이 그에게 아무 사랑이 없다는 걸 깨닫게 해주었다. 어쩌면 생사가 달린 일이라도 다시 육경한에게 사랑이라는 감정을 느낄 수는 없을 것이다.소원의 눈빛은 이미 사랑하지 않는다고 말해줬고 다시는 예전으로 돌아갈 수 없다고 알려줬다.육경한은 처음으로 삶에 대한 절망감을 처절하게 느꼈다. 그래서 소원에게 자유를 돌려주고 싶었는데 하느님은 장난이라도 치는 듯 아이를 선물해 줬다.육경한은 소원의 변호사에게도 감사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 사진이 없었다면 아마 평생 알지 못했을 수도 있으니까.진실을 알게 된 순간 죽어있던 심장이 다시 불타오르기 시작했다. 형용할 수 없는 뜨거움이 마음 깊은 곳에서 밀려왔고 어쩌면 이 기회를 기다리고 있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하지만 기쁨 뒤에는 늘 그렇듯 두려움이 찾아온다.육경한은 아이를 놓칠까 봐 두려웠고 그 아이가 유진과 같은 고통을 겪을까 봐 무서웠다. 그는 너무나 많은 것을 두려워했다.손에 넣기도 전에 잃을 수도 있다는 생각은 그를 고통의 늪으로 밀어 넣었다.소원이 죽었다고 생각하던 그때의 경험한 두려움이 다시 나타날 줄은 예상하지 못했다.차마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두려움과 공포가 그의 마음 깊은 곳에 숨겨져 있었다.육경한은 간절히 기도했다.‘소원아, 제발 잔인한 선택은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아이한테 기회를 줘. 나한테도...’저녁.퇴근한 육경한은 소원이네 집 아래에 머물며 위층에 켜져 있는 불빛을 오랫동안 바라봤다.밤새 잠을 못 잤고 낮에 눈을 붙였는지조차 모를 정도로 피곤했다.3일 연속으로 육경한은 감시를 붙여놓은 사람을 찾아와 교대했다. 지금껏 보고받은 행적을 보면 지난 3일 동안 소원은 유난히 조용했고 누굴 만나기는커녕 외출조차 하지 않았다.아무도 모르겠지만 지난 3일간의 육경한의 삶은 그저 고문이었다. 마치 칼이 머리 위에 걸려있는 듯 언제 떨어져 죽을지 몰랐고 매 순간 목숨을 걸고 답을 기다리고 있
생각할 것도 없다. 소원은 아이를 낳고 싶지 않으니까..하지만 육경한이 제안한 조건은 너무 유혹적이었다. 자유를 되찾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유진을 만날 수도 있고 아이와 함께 살 수도 있다.거절하려는 말이 목구멍까지 차올랐으나 조건을 생각해 보면 삼킬 수밖에 없었다.“약속을 어길 일은 절대 없으니까 걱정하지 마. 아이를 안전하게 낳을 수만 있다면 임신 중에 자유롭게 행동해도 좋아. 내가 한번 내뱉은 말은 반드시 지키는 사람인 건 알지? 네가 원하는 거라면 뭐든지 해줄 수 있지만...”육경한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말을 이었다.“아이를 지우겠다고 고집한다면 우리에게 협상의 여지는 없어. 너도 알다시피 소송을 진행하면 아이랑 보내는 시간이 더 많이 줄어들 거야.”소원은 마음이 어느 정도 가라앉았다. 육경한은 그의 스타일대로 이런 결정을 내렸고 의외는 아니었다.“육경한, 아이를 꼭 낳으라고 하는 이유는 뭐야?”육경한은 그녀를 말없이 바라보다가 담담하게 말했다.“너랑 나 사이의 아이니까.”이 정도면 충분했다. 자신이 뭘 원하는지조차 잘 모르는 육경한이 이번에는 명확하게 의견을 표현했으니 다른 말은 필요 없었다.그는 임신한 소원의 곁을 지키고 싶었다. 이러면 예전에 유진을 임신했을 때 그녀의 곁을 지키지 못한 아쉬움이 달래질 것만 같았다.그러니 무슨 수단을 써서라도 꼭 이 아이를 지키고 싶었다.자리에서 일어난 소원은 피곤한 기색을 드러내며 말했다.“생각해 보고 연락할게.”그 말에 조금이나마 안도감이 밀려왔지만 마음을 완전히 놓을 수는 없었다.“황 비서가 데려다 줄거야.”육경한은 소원이 자기를 싫어한다는 걸 알고 아무리 걱정되어도 직접 배웅해 주지 않았다. 하지만 매 순간 그녀와 함께 있고 싶은 마음은 변함없었다.물론 거절한다는 것도 이미 알고 있다.지금 이 순간 소원은 혼자 있고 싶었다.“괜찮아. 혼자 가면 돼.”육경한은 하고 싶은 말이 많았지만 결국 강요하지 않고 그녀의 뜻을 따랐다.“그래.”소원이 문에 다다르자 육경한도 그녀를
“육경한, 네가 무슨 자격으로 안 된다고 하는 거야? 잘 들어, 난 반드시 아이를 지울 거야. 날 막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 24시간 동안 잠도 안 자고 날 감시할 수 있어? 내가 화장실에 갈 때는 어떻게 할 건데? 난 아이를 지울 방법이 백 가지나 있어. 아이로 날 통제할 생각은 꿈도 꾸지 마.”소원은 싸늘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봤다.“제발 현실을 직시해. 아이를 낳으라고? 네가 내 아이의 아빠가 될 자격이 있다고 생각해?”육경한은 얼굴에 붉은 손바닥 자국이 있었지만 화를 내기는커녕 오히려 매우 차분했다.“소원아, 네가 내 곁을 떠나고 싶은 건 알지만 아이가 태어나기 전까지는 이혼하지 않을 거야. 이혼하고 나서도 유진을 보고 싶으면 뱃속에 있는 아이를 낳으면 돼.”차분한 표정과 달리 육경한의 마음속에는 이미 거센 파도가 일었다.원래는 정말 놓아주려고 했다. 이준혁의 말대로 사랑하는 감정이 남아있지 않는 여자를 억지로 묶어두는 건 두 사람에게 모두 상처가 되니까.아이를 위해서라도 이런 충동적인 결정을 해서는 안 된다.하지만... 소원이 아이를 임신한 이상 절대 지우도록 내버려둘 수는 없었다.육경한은 알고 있다. 이 아이가 그들의 관계를 잡을 수 있는 마지막 기회라는 것을.소원은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꿈 깨라고.”다만 절대로 이 아이를 낳지 않을 거란 확신은 변함없었다.육경한은 더 이상 다투지 않고 비서에게 계약서를 가져오라고 시켰다.“흥분하지 말고 진정해. 일단 이것 좀 보고 결정해도 늦지 않아.”소원은 위에 적힌 조항을 주의 깊게 읽어봤다.아이를 낳으면 두 사람은 혼인 관계를 끊을 수 있다. 그 후에도 양측 모두 아이를 만날 수 있으며 누구랑 함께 살지는 아이의 결정에 맡긴다고 되어 있었다.생각해 보면 꽤 괜찮은 조건이다. 육경한은 강제로 아이를 데려가는 것이 아닌 함께 키우는 것을 택했다.그러나 상대는 교활함이 몸에 배인 육경한이니 소원은 마음을 놓을 수가 없었다. ‘왜 아이를 낳으라고 하는 거지? 협박하려고 이러는
이건 소원에 대한 시험이다. 육경한은 성인군자가 아니기에 아이를 볼 수 있게 허락한 것도 이미 큰 양보를 한 거나 다름없다.잔인하다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만약 소원이 결혼할 계획이 있다면 아이를 못 보게 할 생각이었다.그는 절대 다른 남자에게 자신의 아이를 맡기고 싶지 않았다.그리고...육경한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미간을 잔뜩 찌푸렸고 소원은 전혀 예상하지 못한 조건에 약간 어리둥절했다. 그러나 이내 쿨하게 고개를 끄덕였다.“알았어. 그렇게 할게.”어차피 처음부터 재혼할 생각이 없었다. 육경한이 어떤 사람인지 잘 알고 있으니 결혼에 대한 마음은 진작에 접었다.육경한은 흔쾌히 승낙하는 소원을 보고선 마음속의 불편한 감정이 많이 사라졌다.이때 소원이 물었다.“또 있어?”“응.”육경한은 잠시 멈칫하다가 천천히 말했다.“아이를 낳았으면 좋겠어.”청천벽력 같은 그의 말에 소원은 자리에 얼어붙은 채 오랫동안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한참이 지나서야 고개를 들었는데 그녀의 눈빛은 초점이 약간 흐려져 있었다.“그게... 무슨 말이야?”육경한은 천천히 다가가더니 소원의 아랫배를 내려다보며 조용히 입을 열었다.“이 아이를 낳으라고.”“나... 임신 안 했어.”누군가가 가슴을 움켜쥐는 것처럼 숨이 막혀왔던 소원은 힘겹게 답했다.유진은 처음부터 우연이었다. 아이를 지킬 수 없을 거라고 체념했는데 기적처럼 꿋꿋하게 살아남았다.하지만 그 뒤로 육경한과 얽혔고 그들의 관계는 소원을 극도로 고통스럽게 만들었다. 아이가 그녀의 약점이라는 걸 육경한은 분명히 알고 있다.그러므로 소원은 임신했다는 사실을 인정해서는 안 된다.육경한은 진료 기록을 꺼내 테이블에 올려놓고선 소원에게 다가가 두 눈을 쳐다보며 말했다.“소원아, 난 아무런 조사 없이 막연한 추측으로 단정 짓는 사람이 아니야.”그 위에는 소원의 검사 기록과 약 처방 기록이 명확하게 쓰여있었다.육경한은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아이를 지우는 건 절대 안 돼.”그는 진료 기록을 받
아이가 왜 이렇게 사람을 괴롭히는지 모르겠지만 소원의 임신 증상은 유독 선명했다.그녀는 최대한 자신이 이상하게 보이지 않도록 화장실에서 여러 번 심호흡하며 차분하게 마음을 추슬렀다.마침내 심장 박동이 진정되자 입을 헹구고 천천히 밖으로 나갔다.그런데 뜻밖에도 문을 열자마자 앞에 서 있는 남자가 보였다.육경한은 180cm는 넘는 키에 건장한 체구를 가지고 있어 존재만으로도 상당한 압박감을 조성한다.그는 소원을 바라보며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왜 그래?”심장이 철렁 내려앉은 소원은 가까스로 당황함을 감추며 침착하게 말했다.“아침에 따뜻한 죽을 먹자마자 차가운 걸 마셨거든. 그래서 그런지 속이 안 좋네.”하지만 그녀가 말을 마친 후에도 육경한은 여전히 앞을 가로막고 있었다. 이에 소원은 불안함이 밀려와 재빨리 말을 덧붙였다.“내가 원래 위가 안 좋잖아.”육경한은 또 한참을 뚫어져라 쳐다보다가 걸음을 옮겼다.“많이 아프면 병원 가봐.”그의 말투는 무덤덤했다.소원은 그의 말을 관심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주석훈의 설득이 효과가 된 건 모르겠지만 뭐가 됐든 두 사람 사이에는 아이가 있으니 아이를 위해서라도 예의를 지키는 건 당연했다.소원은 고개를 끄덕였다.“그럴게.”그녀는 말을 이었다.“하고 싶은 얘기가 뭐야?”“아이를 만나도 돼.”육경한은 빙빙 돌리는 게 아닌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소원은 너무도 기뻤지만 그것도 잠깐일 뿐 곧바로 걱정이 밀려왔다.“원하는 게 뭐야?”그녀는 의아해하며 물었다.육경한은 갑자기 아이를 만나게 해줄 만큼 친절한 사람이 아니기에 걱정이 되는 건 당연하다.어제 주석훈이 육경한을 설득하겠다고 말한 건 말지만 육경한은 결코 말이 쉽게 통하는 사람이 아니다.그러니 단 한 번의 대화만으로 육경한의 마음을 돌리는 건 불가능하다.육경한은 경계에 찬 소원의 눈빛을 보고선 피식 웃었다.“맞아. 조건이 있어.”소원은 육경한의 조건을 받아들일 수 있을지 확신이 없었다. 비록 유진을 위해 모든 걸 바칠 수 있지만,
“하여튼 잔머리는 인정해 줘야 한다니까.”윤혜인은 응석 부리며 말했다.기분이 좋아진 이준혁은 그녀를 꼭 껴안고 다정하게 머리를 쓰다듬으며 키스했다.윤혜인은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그만해요... 아기가 자고 있잖아요.”이준혁은 매력적이고 허스키한 목소리로 답했다.“알아. 그냥 안고 싶어서.”이제 딸도 컸으니 두 사람은 애정 행각을 벌일 때마다 아이가 없는 곳으로 피했다.아이가 잠든 방에서 관계를 갖는 건 불가능했으니 가끔 지금처럼 같이 자고 싶어 하면 이준혁은 욕구를 참아야만 한다.따뜻한 포옹에 안정감을 느낀 윤혜인은 긴장을 풀고 그의 팔을 베며 자연스럽게 안겼다.졸음이 밀려온 듯한 윤혜인의 모습에 이준혁은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입을 맞췄고 애정 어린 어조로 말했다.“혜인아, 난 너무 행복해. 너랑 아이가 곁에 있으니까...”운혜인은 이미 졸음에 취했다.“우린 영원히 함께 할 거예요.”“응. 영원히. 우리 가족은 영원히 함께할 거야.”이준혁은 애틋했다.“고마워. 여보.”...다음날.소원은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약을 멍하니 바라봤다.이제 결단을 내려야 한다. 육경한과 소송을 진행하기로 결정한 이상 불가피한 접촉은 분명히 발생할 것이고 소성 전 조정 기간까지 더하면 오랜 시간이 걸릴지도 모른다.두 사람의 만남은 피할 수 없는 일이니 최악의 상황을 만들지 않기 위해서라도 빨리 해결하는 게 최선이다.비록 마음이 심란했지만 소원은 약을 꺼내 삼키려고 했다.그런데 갑자기 울린 핸드폰 진동 소리가 그녀를 방해했다.처음 보는 낯선 번호였기에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전화를 끊었으나 차를 마시려던 찰나 핸드폰이 다시 울렸다. 잘못건 전화라면 다시 걸어오는 경우가 극히 적었으니 소원은 어쩔 수 없이 전화를 받았다. 알고 보니 육경한의 비서였다.“소원 씨 맞으시죠?”소원은 그렇다고 답했다.“저는 육 대표님의 비서인 황진수라고 합니다. 대표님께서 아이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는데 혹시 지금 시간 괜찮으신가요?”소원은 어리둥절해하
육경한이 듣고 행동할지 안 할지는 또 다른 문제지만 친구로서 조언을 해주는 건 당연하다고 생각했다.이준혁이 말을 이었다.“내가 서현재에게 투자할 의향이 있는 건 그 사람이 갖고 있는 신념이 우리가 가고자 하는 방향과 일치하기 때문이야. 그리고 난 네가 같은 실수를 반복하는 걸 보고 싶지 않아. 만약 서현재가 이번 일로 인해 감옥에 간다면 소원 씨가 평생 널 용서하지 않을 거야. 신중하게 생각해 봐. 적어도 후회하는 일은 만들지 말자.”이준혁은 의리와 우정을 중요시하는 사람이다. 친한 친구가 늪에 빠지는 걸 지켜보고 있을 수만은 없기에 손을 뻗었다. 앞으로 어떤 행동을 취할지는 당사자의 몫이지만 그럼에도 최선을 다해 건져내고 싶었다.파티가 끝난 후 저마다 걸음을 옮겼다. 김성훈은 계속 술집에 머물렀고 이준혁은 곧바로 집으로 돌아갔다.그는 집에 도착하자마자 욕실로 들어가 샤워를 했고 몸에 남아있던 술 냄새를 깨끗하게 씻었다.곧이어 아기방으로 향한 그는 잠든 아기를 보며 깊은 행복감을 느꼈고 두 아기의 볼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안방으로 들어가자 윤혜인은 이미 침대에서 자고 있었다. 옆에는 새끼 고양이 같은 아이가 자고 있었는데 보아하니 아름이가 엄마, 아빠랑 함께 자겠다고 고집을 부린듯하다.침대는 아이와 아내의 향기로 가득했다.조심스럽게 누웠지만 가벼운 동작에도 불구하고 윤혜인은 눈을 떴다.그녀는 비몽사몽한 채로 나지막이 물었다.“왔어요?”“응. 깨워서 미안해.”이준혁은 미안한 마음을 담아 윤혜인의 이마에 입을 맞췄다.“괜찮아요. 낮에 잠을 많이 자서 그런지 깊게 잠들지는 못했어요.”윤혜인이 말을 이었다.“오늘 밤에 경한 씨랑 같이 있었던 거예요?”“응. 맞아.”술집에 가기 전, 이준혁은 윤혜인에게 누굴 만나는지 알려줬다.이내 윤혜인은 미간을 잔뜩 찌푸렸다.“괜찮아졌어요?”“최대한 설득했는데 그래도 똑같으면 더 이상 내가 할 수 있는 게 없네.”이준혁이 답했다.“정말 못된 사람이에요.”윤혜인은 불평을 늘어놓았다.“소원이가
이준혁은 육경한이 뭐라 반박하지 않는 것을 보고 아직 희망이 있다고 생각했다.그는 진심 어린 목소리로 말했다.“그렇게 되면 원래대로 돌아갈 수 없다고 해도 다른 방식으로 관계를 유지할 수 있어. 소원 씨가 아이의 엄마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으니까. 하지만 넌 지금 뭐 하는데? 아이를 만나지 못하게 하는 게 소원 씨에게 얼마나 큰 상처일지 생각해 본 적 있어? 네 아이도 그럴 거야. 아이한테 엄마를 만나고 싶은지 직접 물어본 적은 있어?”이준혁의 말은 한 마디 한 마디가 모두 육경한의 마음에 와닿았다.유진이는 비록 겉으로 아빠에게 불만을 드러내지 않았지만 그와 아무 말도 하지 않으려 했다. 매일 집에서 침울한 모습으로 조용히 지낼 뿐이었다.유진이는 그를 두려워했다. 어차피 무슨 말을 해도 소용없다는 걸 알기에 그냥 아무 말도 하지 않기로 한 것이다. 그러다 보니 말수도 점점 줄어들었다. 하루 종일 한마디도 하지 않는 날도 많았기에 이를 지켜보는 집사들조차 걱정할 정도였다.이준혁은 그의 표정만 봐도 자신의 말이 정곡을 찔렀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이런 감정은 그도 아버지가 된 후에야 깨닫게 된 것들이었다. 아이의 입장에서 생각하는 법을 알게 된 것이었다.“경한아, 후회할 일 만들지 마.”그는 진심 어린 조언을 건넸다. 친구로서 육경한이 잘못된 길로 나아가는 걸 막고 싶었다. 그렇게 계속 가다가는 사랑하는 사람을 잃을 뿐만 아니라 아이에게 원망을 사게 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러면 결국 남는 것은 그뿐이었다.이준혁은 지금 너무도 행복했다. 그래서 그는 이 행복이 얼마나 소중하고 얻기 어려운 것인지 잘 알고 있었고 절친인 육경한 또한 행복하길 바랐다.옆에서 듣고 있던 김성훈이 분위기를 풀려는 듯 웃으며 말했다.“준혁아, 고민 상담 왜 이렇게 잘해?”이준혁은 김성훈의 농담을 신경 쓰지 않고 옆에 있던 차를 한 모금 마셨다.‘결혼도 안 한 사람이 이 행복을 어떻게 이해하겠어...’김성훈은 웃으면서 육경한의 어깨를 두드렸다.“난 네게 특별히 해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