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희은은 방금 이준혁 때문에 친구와 싸웠다. 친구는 이준혁이 명함을 주는 걸 봤다고 했지만 진희은은 받은 적이 없다고 잡아뗐다.진희은의 말을 믿지 않은 친구가 귀싸대기를 두 방 날리며 명함을 내놓으라고 했다. 하지만 진희은이 그걸 줄 리가 없었다.신분 상승할 유일한 기회였다.말로는 친구였지만 사실 진희은은 개처럼 부림을 받고 있었다.친구는 집안이 부유했기에 진희은보다 우월감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니 KB 클럽을 데리고 들어올 수 있는 사람도 쉽게 찾았다.진희은은 돈이 없었기에 친구의 시다바리를 들 수밖에 없었다. 잘생긴 남자를 만나면 진희은이 가서 연락처를 얻어내 친구에게 알려줬다. 거의 오작교나 다름없었다.늙고 못생긴 남자여야 진희은에게 기회가 주어졌다.진희은은 이 남자만 잡으면 그런 삶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만 같았다.지금 KB 클럽 회원 카드도 생겼으니 앞으로 이 카드로 재벌 행세를 하고 다녀도 되겠다고 생각했다.카드 하나도 못 구하는 친구는 이제 진희은에게 같은 급이 될 수 없었다.하여 친구와 싸훈 후 바로 클럽 측에 친구를 고발했다. 카드도 없는데 아는 사람을 찾아서 들어온 거라고 말이다. 그렇게 클럽 측은 친구의 사진을 찍었고 보디가드에게 끌어내라고 했다.친구는 영원히 KB 클럽과 산하의 기타 장소에 드나들지 못할 것이다.진희은은 친구가 일그러진 표정으로 저주를 퍼붓던 모습이 떠올랐다. 십 년 묵은 체증이 한순간 내려가는 듯한 느낌이었다.“오빠 때문에 친구한테 이렇게 맞은 거예요...”진희은은 얼굴을 감싸 쥔 채 마치 피해자라도 되는 것처럼 이야기를 꾸며 남자에게 들려줬다. 앞에서 걷고 있는 남자는 이 말을 들었는지 말았는지 걸음도 멈추지 않고 고개도 돌리지 않았다.진희은은 남자의 떡 벌어진 어깨를 바라보며 가슴이 쿵쾅거렸다. 정말 너무 설렜다.이렇게 잘생긴 남자와 대화를 나눠본 건 처음이었다. 그리고 오늘 밤 함께 보낸 기묘한 밤이 영영 잊히지 않을 것 같았다. 어떻게든 이 남자를 꽉 잡고 싶었다.“오빠...”진희은
이준혁은 성큼성큼 주차장으로 향했다. 몸이 아파지기 시작했다.오늘 여기 너무 오래 앉아 있은 탓에 약욕 시간을 놓치고 말았다.차에서 기다리던 주훈은 문자 한 통을 받았다. 모르는 번호였다.[주훈 오빠. 진희은이에요. 오늘 너무 즐거웠어요. 이 번호가 내 번호에요. 오늘 정말 너무 고마웠어요. 기회 되면 내가 밥 살게요.]주훈이 미간을 찌푸리더니 바로 그 번호를 차단했다. 곁눈질로 이준혁이 오는 걸 보고 얼른 차에서 내려 문을 열어줬다.손끝이 문고리에 닿는 순간 주훈이 들릴까 말까 한 목소리로 말했다.“누군가 미행하고 있습니다.이준혁은 표정이 굳어지더니 아무 말 없이 차에 올라타려 했다.그때 뒤에서 누군가 그를 불러세웠다.“이준혁 씨.”몸을 돌리자마자 누군가 품속에 폭 안겼다.윤혜인이 머리를 이준혁의 품에 파묻은 채 셔츠의 옷감과 은은한 약 냄새, 그리고 차가운 몸을 느꼈다.모든 게 다 들어맞았다. 아까 클럽에서 그녀를 안은 건 이준혁이었다.윤혜인이 고개를 들어보니 이준혁이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눈동자는 아무런 정서도 읽어낼 수 없었다.알아내고 싶은 걸 알아낸 윤혜인은 심장이 쿵쾅거렸고 너무 흥분한 나머지 눈시울도 빨개졌다.“준혁 씨.”윤혜인이 가볍게 불렀다. 팔은 여전히 이준혁을 감싸안은 채 놓아주지 않았다.“맞죠? 아까 클럽에서 나 안은 거 준혁 씨 맞잖아요.”주훈은 자기가 투명 인간이라도 된 것 같았다. 그는 조용히 보이지 않는 구석으로 뒷걸음질 쳤다.이준혁의 얼굴은 여전히 차가웠고 아무런 표정이 없었다. 하지만 윤혜인은 더는 참을 수 없었다.이준혁의 가시 돋친 말을 더는 듣고 싶지 않았다. 눈물이 눈 앞을 가려 이준혁의 차가운 얼굴은 보이지 않았지만 몸에서 전해지는 느낌만은 확실했다.여러 가지 단서가 모이자 윤혜인은 이준혁이 자기를 버렸다는 걸 더는 믿을 수 없었다.윤혜인은 이준혁의 셔츠를 꼭 잡고 울먹였다.“아름이가 그러더라고요. 그날 아름이를 민 건 혹시나 테이블 모서리에 부딪힐까 봐 그랬다고. 오해해서
관심하는 듯 보일 수도 있지만 사실 윤혜인의 머리에 문제가 생겨 환각이 보인다는 말이었다.이준혁은 그의 허리에 올려진 윤혜인의 손을 힘껏 뜯어냈다. 윤혜인이 아프지 않을지는 전혀 개의치 않는 것 같았다.그러더니 한 글자 한 글자 또박또박 말했다.“윤혜인. 감정에도 유통기한이 있어. 헤어질 때 알아듣게 잘 말했잖아. 그러면 그대로 물러나는 게 예의야. 내 말이 어려워?”그가 내뱉은 말은 윤혜인에게 고문이나 다름없었다.윤혜인의 손은 이준혁이 억지로 뜯어내는 바람에 너무 아팠다. 머릿속에서 두 가지 생각이 싸우고 있었다.긍정적인 생각은 꿋꿋이 버티라고, 초심을 잃지 말고 이해하는 법을 배우라고 했다. 이준혁이 겪고 있는 고통이 윤혜인이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클 수도 있다고 말이다.부정적인 생각은 윤혜인을 끊임없이 흔들었다. 이제 더는 사랑하지 않으니 오해하지 말라고, 아니면 결국 꼴이 우스워질뿐더러 다른 사람에게 폐를 끼칠 수도 있다고 말했다.하지만 결국 긍정적인 생각이 이겼다. 다시 한번 용기를 내볼 생각이었다. 물에 빠져 허우적대던 사람이 쉽게 삶의 희망을 버리지 않은 것처럼 쉽게 포기하지 않을 생각이었다.윤혜인은 이준혁의 팔을 덥석 잡더니 꿋꿋하게 말했다.“준혁 씨, 약속해요. 자기 자신에게, 그리고 신께 맹세해요.”이준혁의 눈빛이 어딘가 언짢아 보였다. 그런 윤혜인을 유치하다고 생각한 것 같았다.윤혜인은 이 방법이 유치한 걸 알지만 이게 제일 효과 있는 방법이기도 했다.“맹세해요. 정말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고. 아니면...”윤혜인이 이준혁의 차가운 얼굴을 바라보며 우렁차게 말했다.“나 윤혜인은 온몸이 찢기는 듯한 고통을 느끼며 죽을 거라고요.”저주는 악독하기 그지없었다. 스스로 이런 저주를 퍼붓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하지만 윤혜인은 이준혁을 잘 알았다. 이런 방법을 써야만 이준혁의 진심을 알아낼 수 있었다.윤혜인은 이준혁의 표정을 놓치지 않기 위해 눈도 깜빡이지 않고 이준혁을 뚫어져라 쳐다봤다.“맹세하면 다시는 질척이지 않
부드러움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행동이었다.이준혁이 물었다.“아가씨, 이제 정신이 좀 드나? 꿈 깼어?”윤혜인이 넋을 잃고 이준혁을 바라봤다.이준혁의 눈동자는 차갑기 그지없었다. 입가에는 조롱의 미소가 걸려 있었다.“이런 황당한 생각을 하고 있었던 거야? 더 말해보지 그래? 들어나 보게.”이준혁은 여전히 잘생겼지만 얼음처럼 차갑기 그지없었다.입가에 걸린 미소가 사라지자 무서운 위압감만 남았다.윤혜인이 어렵게 용기를 냈지만 결국 처참히 무너지고 말았다.심장에 큰 구멍을 뚫어놓고 바람구멍에 내놓은 것처럼 너무 시리고 아팠다.‘이래도 안 되는 걸까?’강한 의지를 보여주던 윤혜인의 손이 힘없이 차가운 차로 미끄러졌다.한기가 뼛속까지 스며든 것처럼 너무 추웠다.이준혁은 창백해진 윤혜인의 입술과 초췌한 얼굴을 보며 순간 언어기능을 잃어버린 것 같았다.그녀를 따라가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았지만 두 다리가 그 자리에 얼어붙은 듯 말을 듣지 않았다.머리를 누군가 침으로 마구 찌르는 것처럼 깨질 듯이 아팠다.이준혁은 발버둥 치는 걸 포기하고 주먹을 꽉 움켜쥔 채 차갑게 쏘아붙였다.“내가 그쪽 스킬이 좋았나 보네. 네가 이렇게 목매다는 거 보면. 나를 대체할 사람이 없나 보지?”윤혜인은 온몸에 힘이 쫙 빠져나가는 것 같았다.“준혁 씨, 나를 모욕하면 기분이 좀 좋아져요?”이준혁은 까만 차 한 대가 멀지 않은 곳에 세워져 있는 걸 발견했다. 하지만 전혀 티 내지 않고 차갑게 웃었다.“이것도 모욕인가?”이준혁이 손가락이 아름다운 윤혜인의 목을 따라 쇄골까지 내려갔다.쫙.그렇게 윤혜인의 얇은 스웨터가 찢어지고 말았다.갑자기 스며드는 한기에 윤혜인은 두 눈을 부릅뜨더니 난감하면서도 두려운 표정을 지었다.윤혜인은 자기도 모르게 손을 들어 찢어진 옷을 정리하려 했지만 이준혁이 기회를 주지 않았다.이준혁의 목소리는 매혹적이면서도 위험했다. 마치 독약을 잔뜩 바른 사탕 같았다.“윤혜인. 기억해. 이게 모욕이야.”이준혁이 이렇게 말하더니 가벼운
“미안해. 나를 희생하면서까지 너를 달래줄 수는 없어. 하지만...”이준혁이 잠깐 뜸을 들이더니 다시 비아냥댔다.“네가 원한다면 다른 사람을 소개해 줄 수는 있어. 아는 것도 많고 스킬도 좋은 모델들 말이야...”윤혜인이 잡고 있던 문고리를 놓더니 더는 참지 못하고 이준혁의 따귀를 내리쳤다.찰싹.주변은 정적이 흘렀다.이준혁의 표정은 곧 세계 종말이라도 올 것처럼 음침했다. 입가에 피가 새어 나왔지만 여전히 조롱은 멈추지 않았다.“네가 체면 따위는 신경도 안 쓰는 사람인 줄 알았지.”이 말은 윤혜인의 인격을 모욕하는 거나 다름없었다.윤혜인의 안색이 또 한 번 변했다. 손을 들려는데 이준혁이 이를 막았다.“부부였던 적이 있으니까 아까 그 따귀는 문제 삼지 않을게. 근데...”이준혁이 윤혜인의 손목을 부러트릴 것처럼 손에 힘을 주며 경고했다.“작업실이 서울에서 망하는 걸 보고 싶지 않으면 이 손 함부로 놀리지 않는 게 좋을 거야.”그러더니 윤혜인의 손을 매몰차게 뿌리쳤다. 손으로 차 문을 짚었으니 망정이지 아니면 그대로 넘어졌을 것이다.모욕에 경고도 모자라 이젠 협박까지 하고 있다.이게 오늘 밤 그녀가 얻는 전부였다. 평생 기억에 남을만한 수확이었다.윤혜인은 가쁜 숨을 몰아쉬던 데로부터 숨소리가 거의 들리지 않을 만큼 차분해졌다.밤은 쌀쌀했고 달빛은 우울했다.윤혜인의 얼굴을 적신 눈물이 채 마르기도 전에 마음은 이미 차갑게 식어버린 상태였다. 그녀는 눈앞에 서 있는 남자를 보며 창백한 입술로 억지웃음을 짓더니 낮은 소리로 말했다.“축하해요. 원하던 걸 이뤘네요.”불과 보름밖에 지나지 않았는데 윤혜인은 모든 용기를 잃어버리고 말았다.전에는 굳게 믿었던 것들이 화살처럼 그녀에게로 날아와 가슴에 구멍을 숭숭 뚫었다. 보름 동안 우스갯거리가 된 것 같은 느낌이었다.이준혁은 좀비 같은 윤혜인의 모습에 목구멍에 뭐가 걸린 것처럼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윤혜인은 한마디만 더 하면 그대로 쓰러질 것만 같았다.“준혁 씨...”윤혜인이
이준혁은 안색이 너무 어두웠다. 이마에 맺혀있는 땀을 보니 억지로 버티고 있었던 것 같았다.주훈은 지켜보는 눈을 피해 차 문을 여는 척하며 힘껏 이준혁의 팔을 부축했다.이준혁은 그제야 뻣뻣하게 굳은 다리를 뻗어 차에 올랐다.하지만 차에 오르자마자 의자에 앉지도 못한 채 그대로 쓰러져 버렸다.화들짝 놀란 주훈이 혹시나 뒤에서 지켜보는 사람에게 들킬까 봐 두려워 황급히 문을 닫았다.운전석에 탄 주훈은 이준혁이 힘겹게 몸을 일으키려 하자 손을 보태려는데 이준혁이 호통쳤다.“운전해.”주훈이 멈칫하더니 이를 악물고 차에 시동을 걸었다.풉.뒷좌석에 앉은 이준혁이 억지로 일어나려다 피를 토하고 말았다.“대표님.”주훈이 자기도 모르게 브레이크를 밟고 차를 세우려 했다.“멈... 멈추지 마.”이준혁이 주먹을 불끈 움켜쥐더니 힘겹게 말했다.“운전해... 스카이로 가.”이준혁은 다시 스카이 별장으로 들어갔다.주훈은 이준혁의 허락 없이 차를 세울 엄두가 나지 않았지만 이준혁이 너무 걱정되어 눈시울이 붉혀졌다.“대표님, 일단 병원으로 가요. 제발 부탁이에요...”“아니, 그럴 필요 없어.”이준혁은 얼굴이 하얗게 질렸지만 냉정하게 거절했다.병원에 가도 방법이 없다는 걸 알고 있었다. 고작 진통제만 놓아주고 말 것이다.이준혁 체내에 있는 독은 으뜸이라고 소문난 병원에서도 무슨 독인지 알아내지 못했다. 그러니 해독은 어림도 없었다.얼마 지나지 않아 이준혁은 휠체어를 타야 하는 지경이 될 것이다.몸이 하루하루 무너져가는데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게 참으로 사람을 무기력하고 절망스럽게 했다.이준혁은 이런 고통은 혼자 이겨내면 된다고 생각했다. 목숨처럼 아끼는 사람이 안전하게 여생을 보낼 수만 있다면 그걸로 만족했다.스카이 별장.주훈이 이준혁을 대문까지 데려다주자 이준혁이 이렇게 말했다.“인제 그만 들어가 봐.”주훈은 문틀을 잡고 간신히 서 있는 이준혁을 보며 발길이 떨어지지 않았다. 정말 속이 바질바질 타들어 가는 것 같았다.몸에 문제가 생
그러다 이준혁도 한 줌의 재가 될 수 있지만 전혀 개의치 않았다.이준혁을 담배를 한 대 피우고 넓은 침대로 향했다. 아무것도 덮지 않은 채 쪼그리고 누웠다.눈을 감으면 머릿속에 반복적으로 그 말만 재생되었다.‘혜인은 이미 포기했어.’그 말이 재생될 때마다 이준혁은 심장이 더 크게 찢어지는 것 같아 너무 아팠다.“이준혁 씨.”거리감이 느껴지는 호칭에 이준혁은 마음에 구멍이 뻥 뚫린 것 같았다....서호 별장.곽경천은 정장을 들고 문 앞에 서 있었다. 어딘가 나가려는 것 같았다.늦은 시간인데 윤혜인이 아직 돌아오지 않아 걱정되어 마중 나갈 생각이었다.하지만 문을 나서자마자 돌아오는 윤혜인과 마주쳤다.“왔어?”곽경천은 윤혜인을 힐끔 쳐다봤다. 차에서 내릴 때 정리하긴 했지만 그래도 곽경천은 단번에 윤혜인의 옷이 찢어진 걸 발견했다. 그리고 턱에 약간의 멍이 들어있었다. 손자국 같았다.순간 곽경천은 흥분하기 시작했다.“누가 이런 거야?”곽경천이 앞으로 다가가 윤혜인의 손을 잡았지만 무서울 정도로 차가웠다.얼른 손에 들었던 정장을 윤혜인에게 걸쳐주고 소파로 데려가 앉혔다.지금 윤혜인에게 제일 필요한 게 뭔지 곽경천도 잘 알고 있었다.윤혜인이 다치지 않았다는 것만 확인하면 바로 추궁할 생각이었다.감히 곽경천의 동생을 건드렸으니 무슨 수를 쓰든 죽여버릴 생각이었다.곽경천은 바닥에 쪼그리고 앉아 윤혜인에게 물었다.“어디 아픈 데는 없어?”윤혜인의 눈동자는 초점이 없었고 생기를 완전히 잃었다.“오빠. 나를 위해 목숨도 기꺼이 바치던 사람이 왜 갑자기 나를 버리는 걸까...”곽경천이 마른침을 삼키더니 갈라진 목소리로 말했다.“이준혁이 멍청해서 그래...”윤혜인은 가슴이 정말 너무 아팠다.그냥 내려놓았을 뿐이지 잊은 건 아니었다. 교양과 자존심이 있는 사람으로서 더는 이어가면 안 된다고 생각해서 내려놓은 것뿐이었다.“오빠...”윤혜인은 머리를 곽경천의 어깨에 기대더니 소리 내어 울기 시작했다.“전에 나만 바라보고 나만 잘해주
“뭔데?”윤혜인이 멈칫하더니 아랫배에 손을 올려놓으며 느긋하게 말했다.“이 아이 낳을 생각이야. 다섯 달 후에 외국으로 나가서 순산할 수 있게 몸조리할 거야.”윤혜인은 생각을 마친 상태였다. 작업실 업무를 바짝 끝내고 뒤에는 이쪽 책임자에게 다 넘겨줄 계획이었다.윤혜은은 원래도 배가 많이 나오지 않았다. 게다가 날씨가 추워진 덕분에 옷도 여름보다 많이 두꺼워졌다.5개월을 넘겨도 옷으로 살짝 가려주면 임신한 티가 전혀 나지 않았다.외국 가서 몸조리하겠다고 한 건 아이를 낳기도 전에 이씨 가문과 엮이는 게 싫었기 때문이다.윤혜인의 능력과 집안으로 아이에게 좋은 생활 환경을 마련해줄 자신이 있었다.그러니 이런 쪽으로는 전혀 문제 될 게 없었다.아이를 남기고 싶은 이유를 묻는다면 첫째는 곽아름을 위해서였고 둘째는 어머니를 아직 찾지 못했기에 생명을 저버리고 싶지 않았다. 더 중요한 건 윤혜인도 이 아이를 남기고 싶었기 때문이다.곽경천이 동의했다.“네가 낳고 싶으면 낳는 거지. 우리 가문에서 아이 하나쯤이야 얼마든지 기를 수 있어.”곽경천은 동생 일이라면 발 벗고 나섰다. 윤혜인이 내린 결정은 두손 두발 다 들고 찬성했다.게다가 곽경천도 윤혜인이 중절 수술하는 건 별로였다. 중절 수술하면 몸이 상할뿐더러 음기에 영향 줄 수도 있었다. 그럴 바엔 아이를 낳아 북적거리면서 지내는 것도 좋다고 생각했다.곽경천이 윤혜인의 손을 톡톡 두드리며 위로했다.“네가 너무 수고할까 봐 걱정이야.”윤혜인이 잠깐 고민하더니 이렇게 당부했다.“아빠가 몸이 좋지 않으니 이 일은 일단 비밀로 할 생각이야. 두 달 뒤에 내가 건너가면 직접 얼굴 보고 얘기할게.”곽경천이 고개를 끄덕였다.“그래. 네 말대로 하자.”곽경천은 윤혜인이 정신을 차리고 차분해지자 자리에서 일어났다.“일단 며칠 쉬고 다시 작업실 나가. 구지윤에게 잘 지키라고 할게. 그러니까 걱정하지 마. 나는 이만 간다.”윤혜인이 자리에서 일어나 그를 불러세웠다.“오빠.”곽경천이 걸음을 멈추더니 고
시터도 사실 그저 보여주기식으로 박으려 했다. 부잣집은 체면을 중요시했기에 증거가 없는 상황에서 일을 크게 만들지는 않을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아니나 다를까 보디가드가 시터를 잡고 함부로 행동하지 못하게 하자 시터가 펑펑 울며 억울하다고 아우성쳤다.그때 유진이 갑자기 입을 열었다.“증거 있어요.”이 말에 모든 사람이 놀라고 말았다. 몇 살짜리 애가 증거를 확보했다고 큰 소리로 외치니 그게 뭔지 다들 의문이었다.유진은 목에 건 호루라기를 벗으며 말했다.“이 호루라기 사진 찍을 수 있는 호루라기에요. 시터가 두유에 약 타는 장면을 찍어서 남겼고 쓰레기통에 버린 약병에 적힌 진료소 이름도 찍어놨어요. 그리고 이모랑 둘이서 작은 방에 모여 있는 사진까지 전부 모아뒀어요.”이 호루라기는 서현재가 유진에게 준 생일 선물이었다. 유진은 그 호루라기가 퍽 마음에 드는지 늘 목에 걸고 다녔고 소원마저 그 호루라기가 사실 작은 카메라라는 걸 알고 있었다. 총명한 유진이 시터가 약 타는 장면을 찍었을 줄은 꿈에도 몰랐지만 말이다.유진은 줄곧 얌전하고 말이 별로 없어 누구든 쉽게 휘두를 수 있다는 착각을 줬지만 사실 총명함을 숨긴 채 위협이 되지 않는다는 걸 보여주기 위해 연기한 것이었다.사실 유진은 그 누구보다 이성적이고 그 누구보다 총명했다. 반항하면 육경한은 오히려 화만 냈고 반항하면 할수록 방민아가 나쁜 짓을 저질렀다고 말할 때 그 말에 대한 신뢰도가 떨어진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그럴 바엔 차라리 순종하며 겁이 많은 척 연기해 적절한 시기를 기다렸다가 나쁜 여자의 민낯을 드러내기로 마음먹었다.시터는 이제 완전히 넋이 나간 상태였다. 작은 몸집에 이렇게 많은 꿍꿍이가 들어있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 그들의 일거수일투족을 찍을 생각을 다 하다니, 유진을 너무 얕잡아봤다는 생각이 들었다.입이 떡 벌어진 시터는 너무 놀라 아무 말도 하지 못했고 이제 벽에 머리를 박겠다고 난동을 부리지도 않았다.육경한은 넋을 잃은 시터를 보며 힘껏 발로 걷어찼다.“감히 내
방민아는 부들부들 떨며 얼른 앞으로 나아가 육경한을 당겼지만 육경한이 매몰차게 뿌리쳤다.쿵.그 힘이 어찌나 센지 방민아는 그대로 바닥에 주저앉고 말았다.“경한 씨...”방민아는 육경한이 이렇게 세게 밀칠 줄은 몰랐기에 너무 억울했다.“잘 생각해 보고 얘기하는 게 좋을 거예요. 내 아들이 거짓말하는 건지 아니면 방민아 씨가 거짓말하는지 말이에요.”육경한의 눈빛은 얼음장처럼 차가웠고 내뱉은 말도 하나같이 온도가 없어 가슴이 떨리게 했다. 그러더니 이미 혼비백산한 시터 앞으로 다가가 서늘하게 말했다.“누가 시켰어요?”시터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육경한을 본 순간 다리에 힘이 풀렸고 혀에 쥐가 나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방민아도 너무 긴장해 심장이 목구멍까지 올라왔다. 시터는 진실을 말할 엄두가 나지 않았지만 되돌릴 수 있는 게 없어 이마에 맺힌 땀을 닦아내며 이렇게 말했다.“대표님, 전 아무것도...”“다시 말할 기회 줄게요.”그러더니 한 걸음 한 걸음 시터에게로 다가가 오만하게 내려다보며 경고했다.“그래도 거짓말한다면 가족 모두 힘들어질 거예요.”깜짝 놀란 시터는 눈물, 콧물이 쏟아져 나왔다. 나이도 들 만큼 들었던 터라 이 일만 마치면 은퇴할 생각이었지만 돈에 눈이 멀어 육경한이 얼마나 무서운 사람인지 간과한 것이다.밉보여서는 안 될 사람에게 밉보였으니 이제 모든 게 늦어버렸다.방민아는 시터가 주저하자 얼른 입을 열었다.“맞아요. 얼른 얘기해요. 누군가의 사주를 받았는지 아니면 모함을 받았는지 얘기하라고요. 나이도 들었는데 아이 얼굴에 먹칠하고 싶지는 않을 거 아니에요. 잘 얘기해야 할 거예요. 잘못하면 벌받아야겠지만 잘못하지 않은 사람을 핍박하지는 않을 거예요...”“방민아 씨, 그 입 다물어요.”육경한의 차가운 경고에 방민아가 화들짝 놀라더니 이내 다시 진정하고는 뜨거운 눈물을 흘리며 해명했다.“경한 씨, 나도 혐의 벗고 싶어요. 경한 씨보다 더 진실을 원하는 사람은 나라고요. 그래야 나도 누명을 벗을 수 있을 테니까
방민아가 설득했다.“유진아. 이모랑 했던 약속 잊었어? 말 잘 듣고 거짓말하면 안 된다고 했잖아.”사실 방민아는 유진에게 두 사람이 한 약속을 잊지 말라고 귀띔하고 있었다. 만약 유진이 말을 듣지 않으면 더는 엄마를 만나지 못할 거라는 약속 말이다.‘어린아이가 알면 뭘 안다고. 겁만 줘도 고분고분해질 텐데.’방민아가 말했다.“거짓말하면 코 길어지는 거 알지? 그러니까 얼른 이모한테 와.”하지만 유진은 들으려 하지 않을뿐더러 겁에 질린 표정으로 점점 더 거세게 울었다.“왜 또 째려봐요...”유진이 소원의 품에 파고들며 온몸을 파르르 떨었다.“엄마, 저 여자 나 째려보기만 한 게 아니라 꼬집기도 하면서... 시켜준 대로 아빠한테 말하지 않으면 영원히 엄마 못 만날 거라고 했어요...”유진이 육경한을 바라보며 물었다.“아빠, 이모가 한 말 사실이에요? 엄마 못 만날까 봐 하라는 대로 하긴 했는데 정말 너무 무서워요... 저 나쁜 아줌마가 그러는데 두유에 약 타라고 한 것도 이모가 시킨 거래요. 나 죽이려 드는데 고분고분 말 들어야죠...”이 말에 분위기가 얼음장처럼 차가워졌다.방민아는 목덜미에 칼이라도 들어온 것처럼 온몸에 오한이 몰려왔다.‘짐승 같은 놈이 다 연기한 거야? 이렇게 큰 함정을 파놓고 기다리고 있었던 거야?’방민아는 이렇게 어린아이가 이런 꿍꿍이를 꾸몄다는 게 그저 무서울 뿐이었다.육경한은 싸늘하게 식은 얼굴로 앞으로 다가가 쪼그리고 앉더니 유진의 어깨에 손을 올리고는 이렇게 말했다.“아니야. 엄마 언제든지 만날 수 있어. 아빠가 있는데 감히 누가 엄마를 건드리겠어.”“아빤 절대 그 누구든 너에게 손대지 못하게 할 거야.”유진이 초롱초롱한 눈빛을 깜빡이며 물었다.“아빠, 정말 저 나쁜 이모가 유진이랑 엄마 해치지 못하게 지켜줄 거예요?”육경한이 대답했다.“너랑 엄마 다 무사할 거야. 아빠가 약속해.”유진은 그제야 한시름 놓았는지 다시 고개를 돌려 소원의 품에 머리를 파묻었다. 하지만 그 과정에 의미심장한 눈빛으
시터가 퉁명하게 쏘아붙이며 유진을 뺏어가려는데 갑자기 날아든 발차기에 그대로 나동그라지고 말았다.“아악.”힘이 잔뜩 들어간 발차기에 시터는 비명을 내지르며 그 자리에서 두 번 뒹굴더니 배를 부여잡고 곡소리를 냈다.“누가 나를...”원망하던 시터가 남자의 얼굴을 알아보고는 한마디도 꺼내지 못했다.‘대표님이 나를 왜.’켕기는 게 많은 시터는 너무 놀라 자리에서 일어나는 것도 까먹었다.“대표님...”육경한이 오만하게 내려다보며 매섭게 쏘아붙였다.“누가 도련님 쫓으라 했어. 도련님을 돌볼 때 어떤 수칙을 지켜야 하는지 잊었어?”유진은 체질이 별로 좋지 않아 노트에 명확하게 달리거나 흥분해서는 안 된다고 적혀 있으니 추격전을 벌이는 건 더더욱 있을 수도, 있어서도 안 되는 일이었다.“그게 아니라...”시터가 화들짝 놀라 온몸을 부들부들 떨며 자기도 모르게 옆에 선 방민아를 바라봤다. 해명을 들어줄 마음이 없었던 육경한이 매섭게 말했다.“물건 정리해서 꺼져요.”이 말에 시터는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 시급을 이렇게 많이 주는 일이 없었기에 자기도 모르게 방민아를 바라봤지만 방민아는 그저 화가 치밀어오를 뿐이었다.‘멍청하긴. 나는 왜 보는 거야. 내가 언제 사람들 앞에서 유진이 데리고 뛰라고 했나?’방민아는 시터의 눈알이라도 파내고 싶었지만 얼르 이렇게 암시했다.“경한 씨 더 화내기 전에 얼른 가요.방민아가 이렇게 말하며 시터에게 눈빛을 보내자 시터가 바로 알아들었다. 따로 두둑이 챙겨주겠다는 약속이었다.시터는 얼른 자리에서 일어나며 이렇게 말했다.“대표님, 죄송합니다. 아까는 너무 급해서 그랬어요 지금 당장 짐 싸서 갈게요...”그때 유진이 큰 소리로 말했다.“안 돼요. 아빠. 아줌마 이렇게 보내면 안 돼요.”육경한이 유진에게 물었다.“왜?”유진이 시터를 가리키며 말했다.“저 나쁜 아줌마가 두유에 뭘 섞었어요. 할머니한테 준 약이랑 같은 건데 두유에 섞어서 유진이 먹이려는 거 내가 몰래 토했어요.”이 말에 시터와 방민아
“누가 그만둔다는 거예요?”그때 남자 목소리 하나가 끼어들었다.고개를 돌린 방민아는 육경한을 발견하고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경한 씨, 소원 씨가 아이를 만나겠다고 난리인데 유진이 오늘 몸 상태가 별로라 거절했거든요. 그러니까 가지 않고 여기서 이렇게 버티면서 손찌검까지 하려 해요. 얼른 경비에게 끌어내라고 해요.”방민아가 억울한 표정으로 육경한의 팔을 잡으며 위안을 얻으려 했지만 육경한이 티 나지 않게 팔을 거두는 바람에 실패하고 말았다.넋을 잃은 방민아가 난감한 표정으로 손을 거두더니 원망스러운 눈빛을 지었지만 이내 정상으로 돌아왔다.‘내가 오늘 본때를 보여준다.’“멀쩡해 보이는 데 왜 때린대요?”육경한이 차가운 눈빛으로 물었지만 상황 파악이 안 된 방민아가 여전히 이간질했다.“맞아요. 나 때리려 들면서 아이는 보고 싶을 때 얼마든지 볼 수 있다고 당신이 뭔데 막아서냐고, 경한 씨가 있어도 막지 못할 거라고 하더라고요.”육경한은 소원에게 묻는 대신 경비에게 물었다.“소원이 방민아 씨 때리려 했다는데 너희들도 봤어?”방민아가 멈칫하더니 이내 고개를 들어 경비들에게 신호를 보냈다. 이곳의 여주인이 누군지 안다면 경비도 그렇게 눈치 없이 굴진 않을 것이다.게다가 방민아가 서 있는 곳은 육경한 뒤였기에 경비들도 바보가 아닌 이상 함부로 그런 적 없다고 말하기 어려웠다. 보안 팀장을 매수했으니 다른 경비들에게도 지시를 내렸을 거라고 생각한 방민아는 별로 걱정하지 않았다.“아니요. 사모님은 방민아 씨 때리려고 한 적 없습니다. 방민아 씨가 사모님 못 들어가게 막고 있었어요.”경비가 대답했다.방민아는 이 모든 게 환청이라고 생각했다.‘이 경비 머리가 어떻게 된 거 아니야? 호칭이 틀렸잖아. 소원 씨랑 사모님이어야지.’사모님이라고 부르기엔 살짝 이른 감이 있었지만 듣는 사람은 기분이 좋아질 수밖에 없는 호칭이었다. 정신 승리를 마친 방민아가 약간 멍한 표정의 경비를 바라봤다. 그래도 눈치는 있다는 생각에 마른기침하며 경비에게 당부했다.“
방민아의 안색이 변했다.‘어젯밤이랑 오늘이랑 어떻게 같아?’여긴 육경한의 집이라 곳곳에 CCTV와 보이지 않는 눈들도 가득했기에 방민아의 말투도 다소 딱딱했고 무슨 말을 하든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었다.“무슨 헛소리에요? 나 유진이 친자식처럼 대했는데. 모함할 생각하지 마요.”“허허...”소원이 차갑게 웃으며 대꾸도 하지 않고 안으로 들어가려 했다.“아니. 어딜 들어가요.”방민아가 계속 질척거리는데 잠금장치까지 걸어간 소원이 띡 하는 소리와 함께 잠금장치를 열더니 자동문이 스륵 열렸다.“소원 씨가 어떻게... 어떻게 여길 들어갈 수 있지?”방만아가 넋을 잃고 묻자 소원이 고개를 돌렸다.“이제 세상이 변했거든요. 방민아 씨.”“그게... 무슨 말이에요?”방민아의 마음속에 무수히 많은 무서운 생각이 스쳤지만 지금으로서는 애써 그 생각들을 꾹꾹 눌러 담을 수밖에 없었다.‘그럴 리가... 그럴 리가 없어...’방민아는 철저한 사람이라 흔적을 남긴 적이 없었다.“내 뜻은 이따 유진이랑 아주머니가 괴롭힘을 받았다는 게 밝혀지면 내가 당신 절대 가만두지 않을 거라는 뜻이에요.”소원이 한 글자 한 글자 또박또박 말했다. 아이와 노인에게 손댈 정도로 극악무도한 사람이었기에 먼저 공격하지 않으면 되레 당하기 일쑤였다. 이런 사람에게 도망과 인내는 아무런 소용이 없었고 맞서서 싸우는 게 제일 빠른 효과적이었다.방민아는 소원이 뭘 믿고 설치는지 몰라 넋을 잃었다.‘뭔데 이렇게 당당해? 여기 경한 씨 집 앞인데. 내 미래 남편 집 앞이잖아. 어떻게 감히.’방민아는 소원을 얕잡아보며 이렇게 말했다.“당신이 무슨 수로 나를 처단해요? 자기 몸 하나 지키기도 힘들 텐데?”방민아가 콧방귀를 뀌었다.“그렇게 허세 부리다가 혀가 쥐 날까 무섭지도 않아요?”“두고 봐요.”“뭘 두고 본다는 거예요...”소원의 말은 너무 의미심장해서 방민아는 무슨 뜻인지 알아차리기 힘들었다.“방민아 씨, 곧 후회한다에 한표 걸려는데 믿어볼래요?”소원이 웃으며 말했다.
“당연하죠. 잘만 하면 꼭 만나게 해줄게요.”방민아가 말했다.소원이 망가질 거라는 희열에 잠겨있는 방민아가 느긋하게 보충했다.“어차피 망가질 몸 차리리 우리 오빠에게 망가지는 게 낫지 않아요? 남자구실을 못 하니 사실 잤다고 해도 실질적인 관계가 이루어진 건 아니니까.”‘허...’방민기는 남자구실을 못 하긴 했지만 변태 성욕이 강한 사람이라 몸을 쓰지 못할수록 사람을 더 집요하게 괴롭혔다. 일반인도 견뎌내지 못하는 걸 소원이 버텨낸다는 건 말도 안 되었기에 채 보름도 지나지 않아 목숨을 잃을지도 모른다. 방민아가 바라는 것도 딱 그거였다.“방민아 씨는 언제 보나 말을 참 잘해요.”소원이 촘촘한 치아를 들어내고 웃었다.“하지만... 애석하게도 전혀 믿기지 않는데요? 어떡하죠?”“못 믿을 게 뭐가 있어요.”방민아는 그런 소원이 그저 우습다고 생각했다.“내 말 듣는 거 말고 다른 방법 있어요?”소원이 미간을 찌푸렸다.“지금 바로 아이를 볼 수 있는 방법은요?”“지금은 안 돼요.”방민아가 단칼에 거절했다.“일단 오빠 달래주고 3달 뒤에 다시 보여줄게요.”“3달이요?”소원이 잠깐 고민하는 듯싶더니 진지한 표정으로 물었다.“내가 그 석 달을 버틸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요?”방민아를 속내를 들켜도 전혀 난감한 기색이 없었고 그저 귀를 만지작거리며 이렇게 말했다.“왜 못 버텨요? 버텨야죠.”“사실 남자는 달래기 쉬워요. 오빠는 조금만 잘해주고 약한 모습을 보이면 난폭하게 구는 일 없을 거예요.”소원이 고개를 저었다.“됐어요. 방민기 씨든 방민아 씨든 더는 못 믿겠어요. 꿍꿍이가 좀 많아야 믿죠.”“당신 정말...”방민아는가 욕설을 퍼부으려다 매서운 눈빛으로 이렇게 말했다.“평생 아이 볼 생각하지 마요.”“오늘 꼭 아이를 봐야겠다면요?”소원이 말했다.“웃겨라. 무슨 자격으로요?”방민아는 소원이 주제도 모르고 설치는 그게 그저 우스울 뿐이었다. 여기서 아이를 만나고 싶다고 아우성이라니, 꿈꾸는 게 아닌지 의심 갈 정도였다.
방민아는 소원을 보고 화들짝 놀랐다.“당신이 왜 여기에.”어젯밤 방민기에게 호되게 당했을 사람이 멀쩡하게 이곳에 서 있는 게 이상했다.방민아가 상황을 전해 듣지 못한 건 방민기가 아직 깨어나지 못해 방민아의 꼬투리를 잡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소원이 아무리 모자와 마스크로 가려도 어젯밤 방민기에게 당한 흔적은 지울 수 없었다.멍이 든 걸 봐서는 당해도 호되게 당했을 거라는 생각에 방민아의 마음이 조금 편해졌다.“방민아 씨.”소원이 덤덤하게 말했다. 방민아를 또 만나고 싶지는 않기에 또 만났네요 같은 인사말은 생략하고 안으로 들어가려는데 방민아가 소원의 팔목을 덥석 잡았다.“어딜 들어가요.”방민아도 온 지 얼마 되지 않았지만 대문을 여는 카드가 먹통이라 들어가지 못하고 서 있었다. 육경한에게 전화하려는데 미처 전화하기도 전에 소원을 발견한 방민아는 마치 이곳의 여주인이라도 된 것처럼 기세등등해서 말했다.“들어가서 유진이 좀 보고 올게요.”소원이 미간을 찌푸리며 방민아의 손을 뿌리쳤다.“누가 보여준대요?”방민아가 언짢은 표정으로 말했지만 한편으로는 오늘따라 갑자기 이상하게 나오는 소원이 신기했다.‘여기가 언제 소원이 들어가고 싶으면 들어가는 곳이 됐지?’소원이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어제 하라는 대로 하면 유진이 보여준다면서요.”방민아가 그런 소원을 째려보며 말했다.“내가 그런 말을 했다고요?”소원이 말했다.“네. 했어요. 그 어떤 일을 당해도 가만히만 있으면 유진이 보여준다고요.”방민아가 입을 가리고 웃었다.“소원 씨, 어디 아픈 거 아니죠? 왜 갑자기 헛소리하고 그래요?”소원이 대꾸했다.“열은 안 나는데? 정말 모르겠어요?”방민아의 태도는 소원이 예상했던 것과 똑같았다. 방민아는 애초부터 아이를 보여줄 생각이 없었고 그저 소원을 모욕하고 망가트리기 위해 유진을 앞세웠을 뿐이다.분명 방민아에게 피해 가는 일이 없었고 육경한을 보면 멀리 피해 다녔지만 방민아는 그래도 소원을 놓아주려 하지 않았다. 애초부터 단순
통화를 마친 여자가 갑자기 남자를 끌어안고 뽀뽀하더니 흥분하며 말했다.“여보, 아까 어떤 사람이 전화해서 우리가 대상에 당첨됐다며 세계 일주 비용을 협찬해 주겠대.”“정말?”“정말이야. 미우 그룹에서 나왔다고 하는데 검색해 봤더니 정규적인 대기업이더라고.”소원이 놀란 표정으로 옆에 선 육경한을 바라보자 육경한은 그런 소원을 힐끔 쳐다보며 이렇게 말했다.“잘생겼다고 칭찬해 주는데 어떡해.”소원은 할 말을 잃었다. 서늘하던 아까와는 달리 딴사람이 된 육경한은 어딘가 오만해 보이기도 했다.운전기사가 시동을 걸자 소원은 이 차가 어디로 가는지 몰라 대뜸 이렇게 물었다.“이제 유진이 보러 가도 돼요?”육경한이 고개를 끄덕였다.“응. 앞으로 거기가 우리 집이 될 거야.”말 한마디에 육경한은 소원의 향후 생활을 결정해 버렸다. 그는 여전히 다른 사람을 조종하기 좋아했고 아까 봤던 모습은 그저 착각이었다.소원은 곧 유진을 만날 수 있다는 생각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아줌마가 왜 병에 들었는지도 알아내야 했다.차 안.육경한이 입을 열었다.“백업 동영상은 내게 맡겨.”육경한이 토론이 아닌 명령을 내리자 소원이 멈칫했다.“왜 너한테 맡겨야 하는데?”소원은 꿍꿍이 많은 방민아가 아줌마에게 무슨 짓을 했는지 알아내지도 못했는데 이렇게 쉽게 빠져나가게 둘 리가 없었다. 일단 착한 척하기 좋아하는 방민아의 모든 이가 보는 앞에서 벗겨내 더는 착한 척할 수 없게 만들어줄 생각이었다.육경한이 말했다.“방씨 가문을 상대하는 데 영상을 쓸 필요는 없어. 아직 육씨 가문과 협력한 프로젝트도 있고. 이때 영상을 터트리면 다 같이 죽는 거나 마찬가지야. 그러니 그 동영상은 절대 유포할 수 없어.”육경한은 야심을 그대로 드러냈다. 그는 여전히 잇속만 챙기는 약삭빠른 장사꾼이었다.소원은 두 사람이 비록 거래했지만 그녀가 방씨 가문에 해를 입히는 건 육경한도 두고 보지 않을 거라는 걸 알고 있었다.방민아는 결국 육경한의 아내가 되지 못했지만 뼈는 끊어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