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다 이준혁도 한 줌의 재가 될 수 있지만 전혀 개의치 않았다.이준혁을 담배를 한 대 피우고 넓은 침대로 향했다. 아무것도 덮지 않은 채 쪼그리고 누웠다.눈을 감으면 머릿속에 반복적으로 그 말만 재생되었다.‘혜인은 이미 포기했어.’그 말이 재생될 때마다 이준혁은 심장이 더 크게 찢어지는 것 같아 너무 아팠다.“이준혁 씨.”거리감이 느껴지는 호칭에 이준혁은 마음에 구멍이 뻥 뚫린 것 같았다....서호 별장.곽경천은 정장을 들고 문 앞에 서 있었다. 어딘가 나가려는 것 같았다.늦은 시간인데 윤혜인이 아직 돌아오지 않아 걱정되어 마중 나갈 생각이었다.하지만 문을 나서자마자 돌아오는 윤혜인과 마주쳤다.“왔어?”곽경천은 윤혜인을 힐끔 쳐다봤다. 차에서 내릴 때 정리하긴 했지만 그래도 곽경천은 단번에 윤혜인의 옷이 찢어진 걸 발견했다. 그리고 턱에 약간의 멍이 들어있었다. 손자국 같았다.순간 곽경천은 흥분하기 시작했다.“누가 이런 거야?”곽경천이 앞으로 다가가 윤혜인의 손을 잡았지만 무서울 정도로 차가웠다.얼른 손에 들었던 정장을 윤혜인에게 걸쳐주고 소파로 데려가 앉혔다.지금 윤혜인에게 제일 필요한 게 뭔지 곽경천도 잘 알고 있었다.윤혜인이 다치지 않았다는 것만 확인하면 바로 추궁할 생각이었다.감히 곽경천의 동생을 건드렸으니 무슨 수를 쓰든 죽여버릴 생각이었다.곽경천은 바닥에 쪼그리고 앉아 윤혜인에게 물었다.“어디 아픈 데는 없어?”윤혜인의 눈동자는 초점이 없었고 생기를 완전히 잃었다.“오빠. 나를 위해 목숨도 기꺼이 바치던 사람이 왜 갑자기 나를 버리는 걸까...”곽경천이 마른침을 삼키더니 갈라진 목소리로 말했다.“이준혁이 멍청해서 그래...”윤혜인은 가슴이 정말 너무 아팠다.그냥 내려놓았을 뿐이지 잊은 건 아니었다. 교양과 자존심이 있는 사람으로서 더는 이어가면 안 된다고 생각해서 내려놓은 것뿐이었다.“오빠...”윤혜인은 머리를 곽경천의 어깨에 기대더니 소리 내어 울기 시작했다.“전에 나만 바라보고 나만 잘해주
“뭔데?”윤혜인이 멈칫하더니 아랫배에 손을 올려놓으며 느긋하게 말했다.“이 아이 낳을 생각이야. 다섯 달 후에 외국으로 나가서 순산할 수 있게 몸조리할 거야.”윤혜인은 생각을 마친 상태였다. 작업실 업무를 바짝 끝내고 뒤에는 이쪽 책임자에게 다 넘겨줄 계획이었다.윤혜은은 원래도 배가 많이 나오지 않았다. 게다가 날씨가 추워진 덕분에 옷도 여름보다 많이 두꺼워졌다.5개월을 넘겨도 옷으로 살짝 가려주면 임신한 티가 전혀 나지 않았다.외국 가서 몸조리하겠다고 한 건 아이를 낳기도 전에 이씨 가문과 엮이는 게 싫었기 때문이다.윤혜인의 능력과 집안으로 아이에게 좋은 생활 환경을 마련해줄 자신이 있었다.그러니 이런 쪽으로는 전혀 문제 될 게 없었다.아이를 남기고 싶은 이유를 묻는다면 첫째는 곽아름을 위해서였고 둘째는 어머니를 아직 찾지 못했기에 생명을 저버리고 싶지 않았다. 더 중요한 건 윤혜인도 이 아이를 남기고 싶었기 때문이다.곽경천이 동의했다.“네가 낳고 싶으면 낳는 거지. 우리 가문에서 아이 하나쯤이야 얼마든지 기를 수 있어.”곽경천은 동생 일이라면 발 벗고 나섰다. 윤혜인이 내린 결정은 두손 두발 다 들고 찬성했다.게다가 곽경천도 윤혜인이 중절 수술하는 건 별로였다. 중절 수술하면 몸이 상할뿐더러 음기에 영향 줄 수도 있었다. 그럴 바엔 아이를 낳아 북적거리면서 지내는 것도 좋다고 생각했다.곽경천이 윤혜인의 손을 톡톡 두드리며 위로했다.“네가 너무 수고할까 봐 걱정이야.”윤혜인이 잠깐 고민하더니 이렇게 당부했다.“아빠가 몸이 좋지 않으니 이 일은 일단 비밀로 할 생각이야. 두 달 뒤에 내가 건너가면 직접 얼굴 보고 얘기할게.”곽경천이 고개를 끄덕였다.“그래. 네 말대로 하자.”곽경천은 윤혜인이 정신을 차리고 차분해지자 자리에서 일어났다.“일단 며칠 쉬고 다시 작업실 나가. 구지윤에게 잘 지키라고 할게. 그러니까 걱정하지 마. 나는 이만 간다.”윤혜인이 자리에서 일어나 그를 불러세웠다.“오빠.”곽경천이 걸음을 멈추더니 고
그녀는 씻고 나서 홍 아줌마와 함께 아름이를 유치원에 데려다주었다.오늘은 아름이가 유치원에서 보내는 마지막 반나절이라 스스로 친구들에게 작별 인사를 하고 싶다고 말했다.지난번 사건 이후 윤혜인은 마음이 편치 않아 아름이를 일찍 해외로 보내기로 결정했다.그녀는 현재 임신 중이라 체력이 부족한 데다가 스튜디오 일까지 처리해야 해서 자칫 방심하면 아름이의 생명에 위협이 닥칠까 두려웠다.그래서 그녀는 홍 아줌마와 함께 아름이를 외할아버지에게 먼저 보내기로 했고 어차피 두 달 후면 자신도 해외에 가서 태교를 할 예정이었기에 금방 다시 만날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공항에 도착했을 때, 아름이는 눈이 빨개져서 윤혜인에게서 떨어지기 싫어했다.윤혜인의 마음도 쓰라렸다. 가능하다면 단 1초도 아름이를 자신 곁에서 떼어놓고 싶지 않았으니 말이다.그러나 스튜디오의 여러 일이 아직 자리 잡지 못해 그 일을 다 마무리한 후에나 갈 수 있었다.그녀는 아름이의 눈높이에 맞춰 몸을 낮추고 아름이를 안으며 약간 쉰 목소리로 말했다.“아름아, 착하게 지내고 먼저 외할아버지랑 함께 있어 줘. 외할아버지도 항상 아름이가 보고 싶다고 하시잖아.”아름이도 서울에 온 지 한동안 되어서 외할아버지가 보고 싶었다. 그래서 작은 눈을 한껏 붉힌 채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엄마, 엄마도 몸 잘 챙겨야 해요. 밥도 제때 먹고 잠도 제때 자고... 네?”이별의 순간, 윤혜인은 깊은 아쉬움에 아름이를 한 번 더 꼭 안았다.“착하게 지내고 가는 길에 홍 할머니랑 여은 이모 말 잘 들어야 해, 알았지?”그러자 아름이는 귀엽게 고개를 끄덕이며 엄마가 걱정하지 않도록 밝은 미소를 지어 보인 후, 깡충깡충 뛰면서 홍 아줌마를 따라갔다.윤혜인은 다시 여은에게 당부했다.“여은 씨, 그럼 아름이랑 홍 아줌마 잘 부탁할게요. 아빠가 보낸 경호원이 이미 공항에 도착해 있으니까 아름이를 별장에 데려다주고 다시 돌아와요.”“걱정 마세요. 아름이를 무사히 별장까지 데려다주고 올테니까요.”곧 여은은 걱정스러
주훈은 네 개의 큰 박스를 이준혁의 사무실로 옮겼다. 그의 의아한 시선을 마주하자 주훈은 머뭇거리며 말했다.“혜인 씨 쪽에 두고 가신 물건들이에요. 오늘 퀵 서비스로 보내셨습니다.”“응. 안에 넣어 둬.”이준혁은 손에 든 서류를 내려다보며 아무런 감정의 동요도 보이지 않았다.하루의 업무가 끝나고 도시의 네온사인이 켜지면서 밤하늘이 화려하고 매혹적으로 변했다. 회사 사람들은 거의 모두 퇴근한 상태였다.이준혁은 조용히 휴게실로 들어가 박스를 하나하나 열었다.그 안에는 생활용품, 옷, 신발 등이 종류별로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었다.잘 정돈된 물건들을 하나하나 만지자 그 위에 아직도 윤혜인의 손길이 남아있는 것처럼 느껴졌다.이준혁은 그녀가 이 물건들을 하나하나 정리할 때 어떤 모습이었을지 상상할 수 있었다.예전처럼, 그가 퇴근하고 집에 돌아오면 항상 다음 날 입을 다림질된 옷이 방에 걸려 있던 것이 떠올랐다.갑작스레 마음이 아파오자 이준혁은 긴 손가락으로 깔끔하게 다려진 옷을 단단히 움켜잡았다.결국 그는 옷에 주름을 남기고 말았다.그러자 이준혁은 얇은 입꼬리를 씩 올리며 소리 없이 웃음을 지었다. 그 웃음은 쓰라렸지만 어지러워진 옷은 오히려 눈에 더 익숙해졌다.이것이야말로 그의 인생이었다. 결코 평탄할 리 없는....윤혜인의 일상은 다시 자리를 잡았고 매일 바쁘게 보내며 다른 생각을 할 틈도 없이 더욱 충실하게 지냈다.점심시간에 그녀는 구지윤에게 고객 관련 사항을 물어보러 갔다. 사무실에 들어가자 구지윤이 집중해서 컴퓨터를 보고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컴퓨터에서 흘러나오는 소리에서 낯익은 이름이 들렸다.“원지민 씨, 최근에 자주 이선 그룹에 출입하시던데 혹시 이준혁 대표님과의 좋은 소식이 곧 있을까요?”화면을 본 윤혜인의 눈에는 베이지색 코트에 헐렁한 원피스를 입은, 배가 상당히 부른 원지민의 모습이 들어왔다.구지윤은 윤혜인이 들어오자 당황한 나머지 급히 웹페이지를 닫으려고 했지만 실수로 화면을 전체로 키워버렸다.화면 속 원지민
윤혜인은 담담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괜찮아.”말을 짧게 끝내고는 자료를 펼치며 물었다.“여기, 고객한테 연락해서 이렇게 수정해도 되는지 확인해 줄래?”일 얘기를 한참 했지만 윤혜인의 표정은 여전히 평온했다.구지윤은 찌푸렸던 미간을 조금이나마 풀었다.윤혜인이 정말로 모든 걸 내려놓은 것인지 아니면 억지로 웃고 있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하지만 감정 문제는 타인의 위로로는 전혀 해결되지 않는 법, 결국 스스로 극복해야 할 일이었다.윤혜인은 사무실로 돌아와 무언가를 하려고 했지만 아무 일도 손에 잡히지 않았다.사실 이준혁과 관련된 일은 아직까지 그녀에게 영향을 주고 있었다.곧 윤혜인은 일어나 창가로 다가가 초록 식물을 바라보며 마음을 가라앉히려 했다.그러나 이미 흔들린 마음이 쉽게 진정될 리 없었다....이선 그룹 대표 사무실.문을 두드리고 들어온 주훈의 눈에 의자에 등을 기댄 채 피곤한 얼굴을 하고 있는 이준혁이 보였다.“곽경천 씨가 찾아오셨는데 만나시겠습니까?”이준혁은 살짝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곽경천이?”“네. 대표님이 계신다고는 말씀드리지 않았습니다.”주훈은 들어올 때부터 분노에 가득 찬 표정을 한 곽경천을 보고 이대로 두었다간 싸움이라도 벌어질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그리고 또 둘의 현재 관계와 이준혁의 상태를 봐서라도 맞서 싸우기는 어려울 것 같았다.하지만 이준혁은 단호하게 말했다.“접견실로 안내해. 곧 갈테니까.”주훈은 말리고 싶었으나 결국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고개를 끄덕였다.“네.”이윽고 이준혁은 접견실에 들어갔다. 곽경천은 이선 그룹의 기업 연감을 들고 훤칠한 기럭지를 뽐내며 창가에 서 있었다.“형님.”입을 열자 이준혁은 자연스레 예전에 불렀던 호칭이 나왔다. 그러자 곽경천은 고개를 돌리며 멋진 얼굴에 차가운 표정을 띤 채 말했다.“대표님, 호칭을 잘못 부른 것 아닌가요? 이제 우리 사이가 그런 관계는 아니잖아요.”이준혁이 대답할 틈도 주지 않고 곽경천은 냉소적으로 말했다.“앞으로 형
이준혁은 아무 말 없이 곽경천의 말을 듣고 있었고 곽경천은 입가에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이렇게 된 것도 나쁘진 않네요. 차라리 빨리 끝나는 게 나을지도 모릅니다.”곽경천은 속으로 윤혜인과 같은 의문을 품고 있었다.자신의 여동생을 위해 목숨까지 내놓을 수 있었던 남자가, 돌아오고 나서는 아무렇지도 않게 그녀를 놓아버리겠다고 말하는 것이 이상하게 느껴졌다.그래서 그는 잠시 생각한 후 물었다.“혹시 무슨 꿍꿍이가 있는 건 아니죠?”이준혁은 한동안 침묵하다가 천천히 대답했다.“아닙니다.”곽경천은 이준혁이 그런 식으로 답할 것이라는 걸 예상하고 있었기에 그리 놀랍지 않았다.곧 그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혜인이를 너무 약하게 본 것 같습니다. 혜인이는 딱히 누군가가 보호해주는 것을 필요로 하는 아이가 아니에요. 지금 대표님이 선택한 방법은 혜인이가 절대 받아들일 수 없는 방식입니다. 축하합니다. 이제 혜인이를 완전히 잃어버리셨네요. 영원히 혜인이는 절대 돌아오지 않을 겁니다.”곽경천은 이 말을 끝으로 뒤돌아보지도 않은 채 문을 열고 나갔다.문이 쿵 하는 소리와 함께 닫혔다.이준혁은 굳게 닫힌 문을 바라보며 무언가를 생각하고 있었다.곧이어 거대한 와르르 소리가 나더니 문이 또다시 벌컥 열렸다.급히 안으로 들어온 주훈의 눈에는 난장판이 된 사방이 보였다.전시대에 놓여 있던 모든 상장과 트로피가 바닥에 떨어져 산산조각이 나 있었다.주훈은 방금 들린 소리에 놀라 허겁지겁 달려왔지만 이준혁에게 다가가며 상처가 없는지 살펴보았다. 하지만 외상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대표님, 괜찮으십니까?”주훈은 혹시 옷 안에 숨겨진 상처라도 있는 건 아닌지 의심했다.하지만 이내 이준혁이 차가운 표정으로 말했다.“공지를 내.”무슨 말을 하는 것인지 몰라 주훈은 잠시 멍하니 있었다.“...공지요?”“응. 9월 20일로 확정 지어.”“그건...” 주훈은 말문이 막혔으나 이준혁의 냉랭한 눈빛에 얼른 말을 바꿨다.“알겠습니다.”“국내외 언론사들도 더 많
하지만 손가락이 떨려 세 번이나 시도했음에도 노트북을 끌 수 없었다.결국 탁하는 소리와 함께 그녀는 노트북을 닫아버렸다.회사 사람들은 이미 다 퇴근한 상태였다. 그때 구지윤이 조심스럽게 문을 두드리며 말했다.“혜인아, 집에 가? 내가 데려다줄게.”말을 하는 사이 구지윤의 핸드폰이 울렸지만 그녀는 전화를 받지 않고 꺼버렸다. 뭔가 급한 일이 있는 듯했다.그 모습에 윤혜인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할 일 봐. 나는 아래에 운전 기사님이 기다리고 있어.”집에 돌아온 후, 윤혜인은 욕조에 몸을 담갔지만 따뜻한 물이 식어버린 그녀의 마음을 전혀 데워주지 못했다.그 후 며칠 동안 윤혜인은 아무리 신경 쓰지 않으려 해도 이준혁과 원지민의 열애 기사를 계속 보게 되었다.[이선 그룹 대표, 약혼녀와 함께 가구 쇼핑...][이선 그룹 대표, 약혼녀와 함께 야식 먹으며 데이트...][이선 그룹 대표, 약혼녀와 함께 미용실 방문...]언론은 이준혁을 신세대 모범 남성으로 만들어냈고 많은 젊은 여성들이 이를 부러워하며 뉴스 아래에 자기 남자친구를 태그했다.[아무리 바빠도 약혼녀랑 쇼핑 가주는데... 넌 뭐야?][분 단위로 수십억을 벌어도 약혼녀랑 야식 먹을 시간이 있으시다는데... 넌 왜 안 돼?] 처음에는 이 모든 것이 불편하게 느껴졌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점차 무뎌졌다.결국 윤혜인도 언론이 말하는 대로 이준혁이 원지민을 아주 많이 사랑하고 있다고 믿게 되었다.어찌 됐든 그가 지금 원지민과 함께 하는 일들은 믿기 힘들 정도로 놀라운 일이었으니 말이다.이제 이준혁에 대한 윤혜인의 인식은 점점 더 혼란스러워졌다.그녀가 알던 사람은 목숨을 걸고 바다로 차를 몰아넣었던 이준혁인지 아니면 지금 사랑을 위해 변한 이준혁인지, 무엇이 진짜인지 더 이상 구분할 수 없게 되었다.그날 퇴근 후, 구지윤이 문을 두드리며 말했다.“혜인아, 우리 같이 가서 샤브샤브 먹을래?”구지윤은 윤혜인이 요즘 내내 우울한 모습을 보였기에 기분 전환을 위해 샤브샤브를 먹자고 제안한
윤혜인은 차 안에서 들리는 소리는 들을 수 없었지만 구지윤의 표정을 보며 이상한 기분이 더욱 세게 들었다.‘지윤이랑 오빠가? 언제부터였지? 왜 나는 전혀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던 거야?’하지만 일단 의심이 들자 작은 단서들이 하나둘 떠오르며 그동안 눈치채지 못한 부분들이 윤혜인의 머릿속에 떠올랐다.‘만약 그게 사실이라면 오빠의 성격과 우리 아빠의 태도는... 지윤이가 많이 힘들어질 텐데.’윤혜인은 가만히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소원을 떠올렸다.‘왜 우리 셋의 연애는 모두 이렇게나 복잡한 거야.’윤혜인은 구지윤과 기회가 되면 이야기를 나눠봐야겠다고 생각했다. 만약 그녀가 진지하게 고민하고 있다면 당연히 자신은 전력을 다해 도울 생각이었다.한편 차 안.곽경천이 자신의 집에 있다는 말을 듣고 구지윤은 입술을 깨물었다. 화를 내고 싶었지만 되레 참으려고 애쓰며 말했다.“설마 저희 집 자물쇠 따고 들어갔어요?”그러자 곽경천은 소파에 다리를 길게 뻗은 채, 느긋한 목소리로 대답했다.“굳이 자물쇠까지 따야 하나?”“그럼 어떻게 들어갔는데요?”“어젯밤 취한 사람이 비밀번호를 알려줬거든.”구지윤의 얼굴이 빨개졌다.그가 말한 ‘취한 사람’은 다름 아닌 그녀 자신이었으니 말이다.구지윤은 술에 취해 비밀번호까지 알려준 자신을 자책하며 속으로 혀를 찼다. 집에 돌아가면 비밀번호부터 당장 바꿔야겠다 다짐도 하고 말이다.마음을 가다듬은 뒤, 구지윤은 이렇게 말했다.“그렇다고 저희 집에 함부로 들어오면 안 되죠.”하지만 곽경천은 당연하다는 듯이 말했다. “옷 가지러 왔다니까.”구지윤은 그의 당당함에 어이가 없었다.“옷이 그렇게 모자라요?”“응.”구지윤은 할 말을 잃었고 곽경천은 장난스럽게 물었다.“구지윤, 왜 요즘 나를 도련님이라고 부르지 않아?”그 말을 듣자마자 구지윤은 어젯밤 일이 떠올라 얼굴부터 목까지 전부 빨개졌다.“어젯밤 침대에서 너는 나를 58번이나 도련님이라고 불렀잖아. 처음엔 목소리가 컸고 나중엔 울면서 불렀지. 특
택시의 이동 동선만 봐도 육경한은 소원이 어디로 향하는지 알아챘다.그는 소원이 발견하지 못하도록 거리를 앞차와의 거리를 넓혔다.역시나 택시는 소원의 어머니가 계신 요양원 앞에 멈췄고 소원은 택시에서 내리자마자 안으로 들어갔다.자주 온 덕분에 간병인들은 소원을 알아봤다.“소원 씨, 오셨어요?”소원은 예의 바르게 인사를 건네며 고개를 끄덕였다.“우리 엄마 요즘 달라진 건 없죠?”이건 소원이 매번 묻는 말인데, 그녀는 자신이 오지 않은 2, 3일 동안 엄마한테 일어난 일들을 놓칠까 봐 조마조마했다.하지만 다른 일을 전부 다 제쳐두고 요양원에서 매일 엄마를 지킬 수는 없는 노릇이니 참 답답했다.엄마를 집으로 모셔가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지만 육경한이 절대 동의할 리가 없다. 게다가 요양원은 의료기기가 잘 갖춰져 있어 치료에 굉장히 도움이 됐기에 집에 이런 걸 놓지 않는 한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간병인이 입을 열었다.“전이랑 비슷해요. 달라진 건 없어요.”매번 똑같은 답이 돌아왔지만 소원은 듣고도 실망하지 않았다. 사실 변화가 없다는 게 좋은 소식일지도 모른다.차라리 지금처럼 아무것도 모른 채 살고 있는 게 행복일 수도 있다. 만약 깨어난다면 무너져가는 이 현실을 직면할 수 있을까?가능하다면 그녀는 혼자서 이 고통을 감당하고 싶었다.소원은 간병인에게 물었다.“엄마랑 단둘이 시간을 보내고 싶은데 가능할까요?”“당연하죠. 전 밖에 있을 테니까 무슨 일 있으면 벨 눌러요.”“알겠습니다.”간병인이 나간 후 소원은 침대에 앉아 창틀에 놓인 꽃들을 바라봤다. 그러다가 꼼짝도 하지 않고 가만히 있는 엄마를 보고선 나지막이 입을 열었다.“엄마...”전미영은 아무런 반응 없이 그저 눈을 깜빡이며 꽃들을 바라봤다.소원은 더 가까이 다가가 앉아 전미영을 껴안았다.“엄마...”하고 싶은 말이 수천 개가 있었지만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이곳에서 모든 감정과 스트레스를 쏟아내는 게 소원에게는 일종의 해방이었다.“엄마... 엄마...”소원은 결국
육경한은 소원이라는 독에 중독되어 이미 구제 불능의 상태였다.게다가 무곡산의 일은 소원이 그에게 아무 사랑이 없다는 걸 깨닫게 해주었다. 어쩌면 생사가 달린 일이라도 다시 육경한에게 사랑이라는 감정을 느낄 수는 없을 것이다.소원의 눈빛은 이미 사랑하지 않는다고 말해줬고 다시는 예전으로 돌아갈 수 없다고 알려줬다.육경한은 처음으로 삶에 대한 절망감을 처절하게 느꼈다. 그래서 소원에게 자유를 돌려주고 싶었는데 하느님은 장난이라도 치는 듯 아이를 선물해 줬다.육경한은 소원의 변호사에게도 감사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 사진이 없었다면 아마 평생 알지 못했을 수도 있으니까.진실을 알게 된 순간 죽어있던 심장이 다시 불타오르기 시작했다. 형용할 수 없는 뜨거움이 마음 깊은 곳에서 밀려왔고 어쩌면 이 기회를 기다리고 있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하지만 기쁨 뒤에는 늘 그렇듯 두려움이 찾아온다.육경한은 아이를 놓칠까 봐 두려웠고 그 아이가 유진과 같은 고통을 겪을까 봐 무서웠다. 그는 너무나 많은 것을 두려워했다.손에 넣기도 전에 잃을 수도 있다는 생각은 그를 고통의 늪으로 밀어 넣었다.소원이 죽었다고 생각하던 그때의 경험한 두려움이 다시 나타날 줄은 예상하지 못했다.차마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두려움과 공포가 그의 마음 깊은 곳에 숨겨져 있었다.육경한은 간절히 기도했다.‘소원아, 제발 잔인한 선택은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아이한테 기회를 줘. 나한테도...’저녁.퇴근한 육경한은 소원이네 집 아래에 머물며 위층에 켜져 있는 불빛을 오랫동안 바라봤다.밤새 잠을 못 잤고 낮에 눈을 붙였는지조차 모를 정도로 피곤했다.3일 연속으로 육경한은 감시를 붙여놓은 사람을 찾아와 교대했다. 지금껏 보고받은 행적을 보면 지난 3일 동안 소원은 유난히 조용했고 누굴 만나기는커녕 외출조차 하지 않았다.아무도 모르겠지만 지난 3일간의 육경한의 삶은 그저 고문이었다. 마치 칼이 머리 위에 걸려있는 듯 언제 떨어져 죽을지 몰랐고 매 순간 목숨을 걸고 답을 기다리고 있
생각할 것도 없다. 소원은 아이를 낳고 싶지 않으니까..하지만 육경한이 제안한 조건은 너무 유혹적이었다. 자유를 되찾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유진을 만날 수도 있고 아이와 함께 살 수도 있다.거절하려는 말이 목구멍까지 차올랐으나 조건을 생각해 보면 삼킬 수밖에 없었다.“약속을 어길 일은 절대 없으니까 걱정하지 마. 아이를 안전하게 낳을 수만 있다면 임신 중에 자유롭게 행동해도 좋아. 내가 한번 내뱉은 말은 반드시 지키는 사람인 건 알지? 네가 원하는 거라면 뭐든지 해줄 수 있지만...”육경한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말을 이었다.“아이를 지우겠다고 고집한다면 우리에게 협상의 여지는 없어. 너도 알다시피 소송을 진행하면 아이랑 보내는 시간이 더 많이 줄어들 거야.”소원은 마음이 어느 정도 가라앉았다. 육경한은 그의 스타일대로 이런 결정을 내렸고 의외는 아니었다.“육경한, 아이를 꼭 낳으라고 하는 이유는 뭐야?”육경한은 그녀를 말없이 바라보다가 담담하게 말했다.“너랑 나 사이의 아이니까.”이 정도면 충분했다. 자신이 뭘 원하는지조차 잘 모르는 육경한이 이번에는 명확하게 의견을 표현했으니 다른 말은 필요 없었다.그는 임신한 소원의 곁을 지키고 싶었다. 이러면 예전에 유진을 임신했을 때 그녀의 곁을 지키지 못한 아쉬움이 달래질 것만 같았다.그러니 무슨 수단을 써서라도 꼭 이 아이를 지키고 싶었다.자리에서 일어난 소원은 피곤한 기색을 드러내며 말했다.“생각해 보고 연락할게.”그 말에 조금이나마 안도감이 밀려왔지만 마음을 완전히 놓을 수는 없었다.“황 비서가 데려다 줄거야.”육경한은 소원이 자기를 싫어한다는 걸 알고 아무리 걱정되어도 직접 배웅해 주지 않았다. 하지만 매 순간 그녀와 함께 있고 싶은 마음은 변함없었다.물론 거절한다는 것도 이미 알고 있다.지금 이 순간 소원은 혼자 있고 싶었다.“괜찮아. 혼자 가면 돼.”육경한은 하고 싶은 말이 많았지만 결국 강요하지 않고 그녀의 뜻을 따랐다.“그래.”소원이 문에 다다르자 육경한도 그녀를
“육경한, 네가 무슨 자격으로 안 된다고 하는 거야? 잘 들어, 난 반드시 아이를 지울 거야. 날 막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 24시간 동안 잠도 안 자고 날 감시할 수 있어? 내가 화장실에 갈 때는 어떻게 할 건데? 난 아이를 지울 방법이 백 가지나 있어. 아이로 날 통제할 생각은 꿈도 꾸지 마.”소원은 싸늘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봤다.“제발 현실을 직시해. 아이를 낳으라고? 네가 내 아이의 아빠가 될 자격이 있다고 생각해?”육경한은 얼굴에 붉은 손바닥 자국이 있었지만 화를 내기는커녕 오히려 매우 차분했다.“소원아, 네가 내 곁을 떠나고 싶은 건 알지만 아이가 태어나기 전까지는 이혼하지 않을 거야. 이혼하고 나서도 유진을 보고 싶으면 뱃속에 있는 아이를 낳으면 돼.”차분한 표정과 달리 육경한의 마음속에는 이미 거센 파도가 일었다.원래는 정말 놓아주려고 했다. 이준혁의 말대로 사랑하는 감정이 남아있지 않는 여자를 억지로 묶어두는 건 두 사람에게 모두 상처가 되니까.아이를 위해서라도 이런 충동적인 결정을 해서는 안 된다.하지만... 소원이 아이를 임신한 이상 절대 지우도록 내버려둘 수는 없었다.육경한은 알고 있다. 이 아이가 그들의 관계를 잡을 수 있는 마지막 기회라는 것을.소원은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꿈 깨라고.”다만 절대로 이 아이를 낳지 않을 거란 확신은 변함없었다.육경한은 더 이상 다투지 않고 비서에게 계약서를 가져오라고 시켰다.“흥분하지 말고 진정해. 일단 이것 좀 보고 결정해도 늦지 않아.”소원은 위에 적힌 조항을 주의 깊게 읽어봤다.아이를 낳으면 두 사람은 혼인 관계를 끊을 수 있다. 그 후에도 양측 모두 아이를 만날 수 있으며 누구랑 함께 살지는 아이의 결정에 맡긴다고 되어 있었다.생각해 보면 꽤 괜찮은 조건이다. 육경한은 강제로 아이를 데려가는 것이 아닌 함께 키우는 것을 택했다.그러나 상대는 교활함이 몸에 배인 육경한이니 소원은 마음을 놓을 수가 없었다. ‘왜 아이를 낳으라고 하는 거지? 협박하려고 이러는
이건 소원에 대한 시험이다. 육경한은 성인군자가 아니기에 아이를 볼 수 있게 허락한 것도 이미 큰 양보를 한 거나 다름없다.잔인하다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만약 소원이 결혼할 계획이 있다면 아이를 못 보게 할 생각이었다.그는 절대 다른 남자에게 자신의 아이를 맡기고 싶지 않았다.그리고...육경한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미간을 잔뜩 찌푸렸고 소원은 전혀 예상하지 못한 조건에 약간 어리둥절했다. 그러나 이내 쿨하게 고개를 끄덕였다.“알았어. 그렇게 할게.”어차피 처음부터 재혼할 생각이 없었다. 육경한이 어떤 사람인지 잘 알고 있으니 결혼에 대한 마음은 진작에 접었다.육경한은 흔쾌히 승낙하는 소원을 보고선 마음속의 불편한 감정이 많이 사라졌다.이때 소원이 물었다.“또 있어?”“응.”육경한은 잠시 멈칫하다가 천천히 말했다.“아이를 낳았으면 좋겠어.”청천벽력 같은 그의 말에 소원은 자리에 얼어붙은 채 오랫동안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한참이 지나서야 고개를 들었는데 그녀의 눈빛은 초점이 약간 흐려져 있었다.“그게... 무슨 말이야?”육경한은 천천히 다가가더니 소원의 아랫배를 내려다보며 조용히 입을 열었다.“이 아이를 낳으라고.”“나... 임신 안 했어.”누군가가 가슴을 움켜쥐는 것처럼 숨이 막혀왔던 소원은 힘겹게 답했다.유진은 처음부터 우연이었다. 아이를 지킬 수 없을 거라고 체념했는데 기적처럼 꿋꿋하게 살아남았다.하지만 그 뒤로 육경한과 얽혔고 그들의 관계는 소원을 극도로 고통스럽게 만들었다. 아이가 그녀의 약점이라는 걸 육경한은 분명히 알고 있다.그러므로 소원은 임신했다는 사실을 인정해서는 안 된다.육경한은 진료 기록을 꺼내 테이블에 올려놓고선 소원에게 다가가 두 눈을 쳐다보며 말했다.“소원아, 난 아무런 조사 없이 막연한 추측으로 단정 짓는 사람이 아니야.”그 위에는 소원의 검사 기록과 약 처방 기록이 명확하게 쓰여있었다.육경한은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아이를 지우는 건 절대 안 돼.”그는 진료 기록을 받
아이가 왜 이렇게 사람을 괴롭히는지 모르겠지만 소원의 임신 증상은 유독 선명했다.그녀는 최대한 자신이 이상하게 보이지 않도록 화장실에서 여러 번 심호흡하며 차분하게 마음을 추슬렀다.마침내 심장 박동이 진정되자 입을 헹구고 천천히 밖으로 나갔다.그런데 뜻밖에도 문을 열자마자 앞에 서 있는 남자가 보였다.육경한은 180cm는 넘는 키에 건장한 체구를 가지고 있어 존재만으로도 상당한 압박감을 조성한다.그는 소원을 바라보며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왜 그래?”심장이 철렁 내려앉은 소원은 가까스로 당황함을 감추며 침착하게 말했다.“아침에 따뜻한 죽을 먹자마자 차가운 걸 마셨거든. 그래서 그런지 속이 안 좋네.”하지만 그녀가 말을 마친 후에도 육경한은 여전히 앞을 가로막고 있었다. 이에 소원은 불안함이 밀려와 재빨리 말을 덧붙였다.“내가 원래 위가 안 좋잖아.”육경한은 또 한참을 뚫어져라 쳐다보다가 걸음을 옮겼다.“많이 아프면 병원 가봐.”그의 말투는 무덤덤했다.소원은 그의 말을 관심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주석훈의 설득이 효과가 된 건 모르겠지만 뭐가 됐든 두 사람 사이에는 아이가 있으니 아이를 위해서라도 예의를 지키는 건 당연했다.소원은 고개를 끄덕였다.“그럴게.”그녀는 말을 이었다.“하고 싶은 얘기가 뭐야?”“아이를 만나도 돼.”육경한은 빙빙 돌리는 게 아닌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소원은 너무도 기뻤지만 그것도 잠깐일 뿐 곧바로 걱정이 밀려왔다.“원하는 게 뭐야?”그녀는 의아해하며 물었다.육경한은 갑자기 아이를 만나게 해줄 만큼 친절한 사람이 아니기에 걱정이 되는 건 당연하다.어제 주석훈이 육경한을 설득하겠다고 말한 건 말지만 육경한은 결코 말이 쉽게 통하는 사람이 아니다.그러니 단 한 번의 대화만으로 육경한의 마음을 돌리는 건 불가능하다.육경한은 경계에 찬 소원의 눈빛을 보고선 피식 웃었다.“맞아. 조건이 있어.”소원은 육경한의 조건을 받아들일 수 있을지 확신이 없었다. 비록 유진을 위해 모든 걸 바칠 수 있지만,
“하여튼 잔머리는 인정해 줘야 한다니까.”윤혜인은 응석 부리며 말했다.기분이 좋아진 이준혁은 그녀를 꼭 껴안고 다정하게 머리를 쓰다듬으며 키스했다.윤혜인은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그만해요... 아기가 자고 있잖아요.”이준혁은 매력적이고 허스키한 목소리로 답했다.“알아. 그냥 안고 싶어서.”이제 딸도 컸으니 두 사람은 애정 행각을 벌일 때마다 아이가 없는 곳으로 피했다.아이가 잠든 방에서 관계를 갖는 건 불가능했으니 가끔 지금처럼 같이 자고 싶어 하면 이준혁은 욕구를 참아야만 한다.따뜻한 포옹에 안정감을 느낀 윤혜인은 긴장을 풀고 그의 팔을 베며 자연스럽게 안겼다.졸음이 밀려온 듯한 윤혜인의 모습에 이준혁은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입을 맞췄고 애정 어린 어조로 말했다.“혜인아, 난 너무 행복해. 너랑 아이가 곁에 있으니까...”운혜인은 이미 졸음에 취했다.“우린 영원히 함께 할 거예요.”“응. 영원히. 우리 가족은 영원히 함께할 거야.”이준혁은 애틋했다.“고마워. 여보.”...다음날.소원은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약을 멍하니 바라봤다.이제 결단을 내려야 한다. 육경한과 소송을 진행하기로 결정한 이상 불가피한 접촉은 분명히 발생할 것이고 소성 전 조정 기간까지 더하면 오랜 시간이 걸릴지도 모른다.두 사람의 만남은 피할 수 없는 일이니 최악의 상황을 만들지 않기 위해서라도 빨리 해결하는 게 최선이다.비록 마음이 심란했지만 소원은 약을 꺼내 삼키려고 했다.그런데 갑자기 울린 핸드폰 진동 소리가 그녀를 방해했다.처음 보는 낯선 번호였기에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전화를 끊었으나 차를 마시려던 찰나 핸드폰이 다시 울렸다. 잘못건 전화라면 다시 걸어오는 경우가 극히 적었으니 소원은 어쩔 수 없이 전화를 받았다. 알고 보니 육경한의 비서였다.“소원 씨 맞으시죠?”소원은 그렇다고 답했다.“저는 육 대표님의 비서인 황진수라고 합니다. 대표님께서 아이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는데 혹시 지금 시간 괜찮으신가요?”소원은 어리둥절해하
육경한이 듣고 행동할지 안 할지는 또 다른 문제지만 친구로서 조언을 해주는 건 당연하다고 생각했다.이준혁이 말을 이었다.“내가 서현재에게 투자할 의향이 있는 건 그 사람이 갖고 있는 신념이 우리가 가고자 하는 방향과 일치하기 때문이야. 그리고 난 네가 같은 실수를 반복하는 걸 보고 싶지 않아. 만약 서현재가 이번 일로 인해 감옥에 간다면 소원 씨가 평생 널 용서하지 않을 거야. 신중하게 생각해 봐. 적어도 후회하는 일은 만들지 말자.”이준혁은 의리와 우정을 중요시하는 사람이다. 친한 친구가 늪에 빠지는 걸 지켜보고 있을 수만은 없기에 손을 뻗었다. 앞으로 어떤 행동을 취할지는 당사자의 몫이지만 그럼에도 최선을 다해 건져내고 싶었다.파티가 끝난 후 저마다 걸음을 옮겼다. 김성훈은 계속 술집에 머물렀고 이준혁은 곧바로 집으로 돌아갔다.그는 집에 도착하자마자 욕실로 들어가 샤워를 했고 몸에 남아있던 술 냄새를 깨끗하게 씻었다.곧이어 아기방으로 향한 그는 잠든 아기를 보며 깊은 행복감을 느꼈고 두 아기의 볼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안방으로 들어가자 윤혜인은 이미 침대에서 자고 있었다. 옆에는 새끼 고양이 같은 아이가 자고 있었는데 보아하니 아름이가 엄마, 아빠랑 함께 자겠다고 고집을 부린듯하다.침대는 아이와 아내의 향기로 가득했다.조심스럽게 누웠지만 가벼운 동작에도 불구하고 윤혜인은 눈을 떴다.그녀는 비몽사몽한 채로 나지막이 물었다.“왔어요?”“응. 깨워서 미안해.”이준혁은 미안한 마음을 담아 윤혜인의 이마에 입을 맞췄다.“괜찮아요. 낮에 잠을 많이 자서 그런지 깊게 잠들지는 못했어요.”윤혜인이 말을 이었다.“오늘 밤에 경한 씨랑 같이 있었던 거예요?”“응. 맞아.”술집에 가기 전, 이준혁은 윤혜인에게 누굴 만나는지 알려줬다.이내 윤혜인은 미간을 잔뜩 찌푸렸다.“괜찮아졌어요?”“최대한 설득했는데 그래도 똑같으면 더 이상 내가 할 수 있는 게 없네.”이준혁이 답했다.“정말 못된 사람이에요.”윤혜인은 불평을 늘어놓았다.“소원이가
이준혁은 육경한이 뭐라 반박하지 않는 것을 보고 아직 희망이 있다고 생각했다.그는 진심 어린 목소리로 말했다.“그렇게 되면 원래대로 돌아갈 수 없다고 해도 다른 방식으로 관계를 유지할 수 있어. 소원 씨가 아이의 엄마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으니까. 하지만 넌 지금 뭐 하는데? 아이를 만나지 못하게 하는 게 소원 씨에게 얼마나 큰 상처일지 생각해 본 적 있어? 네 아이도 그럴 거야. 아이한테 엄마를 만나고 싶은지 직접 물어본 적은 있어?”이준혁의 말은 한 마디 한 마디가 모두 육경한의 마음에 와닿았다.유진이는 비록 겉으로 아빠에게 불만을 드러내지 않았지만 그와 아무 말도 하지 않으려 했다. 매일 집에서 침울한 모습으로 조용히 지낼 뿐이었다.유진이는 그를 두려워했다. 어차피 무슨 말을 해도 소용없다는 걸 알기에 그냥 아무 말도 하지 않기로 한 것이다. 그러다 보니 말수도 점점 줄어들었다. 하루 종일 한마디도 하지 않는 날도 많았기에 이를 지켜보는 집사들조차 걱정할 정도였다.이준혁은 그의 표정만 봐도 자신의 말이 정곡을 찔렀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이런 감정은 그도 아버지가 된 후에야 깨닫게 된 것들이었다. 아이의 입장에서 생각하는 법을 알게 된 것이었다.“경한아, 후회할 일 만들지 마.”그는 진심 어린 조언을 건넸다. 친구로서 육경한이 잘못된 길로 나아가는 걸 막고 싶었다. 그렇게 계속 가다가는 사랑하는 사람을 잃을 뿐만 아니라 아이에게 원망을 사게 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러면 결국 남는 것은 그뿐이었다.이준혁은 지금 너무도 행복했다. 그래서 그는 이 행복이 얼마나 소중하고 얻기 어려운 것인지 잘 알고 있었고 절친인 육경한 또한 행복하길 바랐다.옆에서 듣고 있던 김성훈이 분위기를 풀려는 듯 웃으며 말했다.“준혁아, 고민 상담 왜 이렇게 잘해?”이준혁은 김성훈의 농담을 신경 쓰지 않고 옆에 있던 차를 한 모금 마셨다.‘결혼도 안 한 사람이 이 행복을 어떻게 이해하겠어...’김성훈은 웃으면서 육경한의 어깨를 두드렸다.“난 네게 특별히 해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