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준혁은 안색이 너무 어두웠다. 이마에 맺혀있는 땀을 보니 억지로 버티고 있었던 것 같았다.주훈은 지켜보는 눈을 피해 차 문을 여는 척하며 힘껏 이준혁의 팔을 부축했다.이준혁은 그제야 뻣뻣하게 굳은 다리를 뻗어 차에 올랐다.하지만 차에 오르자마자 의자에 앉지도 못한 채 그대로 쓰러져 버렸다.화들짝 놀란 주훈이 혹시나 뒤에서 지켜보는 사람에게 들킬까 봐 두려워 황급히 문을 닫았다.운전석에 탄 주훈은 이준혁이 힘겹게 몸을 일으키려 하자 손을 보태려는데 이준혁이 호통쳤다.“운전해.”주훈이 멈칫하더니 이를 악물고 차에 시동을 걸었다.풉.뒷좌석에 앉은 이준혁이 억지로 일어나려다 피를 토하고 말았다.“대표님.”주훈이 자기도 모르게 브레이크를 밟고 차를 세우려 했다.“멈... 멈추지 마.”이준혁이 주먹을 불끈 움켜쥐더니 힘겹게 말했다.“운전해... 스카이로 가.”이준혁은 다시 스카이 별장으로 들어갔다.주훈은 이준혁의 허락 없이 차를 세울 엄두가 나지 않았지만 이준혁이 너무 걱정되어 눈시울이 붉혀졌다.“대표님, 일단 병원으로 가요. 제발 부탁이에요...”“아니, 그럴 필요 없어.”이준혁은 얼굴이 하얗게 질렸지만 냉정하게 거절했다.병원에 가도 방법이 없다는 걸 알고 있었다. 고작 진통제만 놓아주고 말 것이다.이준혁 체내에 있는 독은 으뜸이라고 소문난 병원에서도 무슨 독인지 알아내지 못했다. 그러니 해독은 어림도 없었다.얼마 지나지 않아 이준혁은 휠체어를 타야 하는 지경이 될 것이다.몸이 하루하루 무너져가는데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게 참으로 사람을 무기력하고 절망스럽게 했다.이준혁은 이런 고통은 혼자 이겨내면 된다고 생각했다. 목숨처럼 아끼는 사람이 안전하게 여생을 보낼 수만 있다면 그걸로 만족했다.스카이 별장.주훈이 이준혁을 대문까지 데려다주자 이준혁이 이렇게 말했다.“인제 그만 들어가 봐.”주훈은 문틀을 잡고 간신히 서 있는 이준혁을 보며 발길이 떨어지지 않았다. 정말 속이 바질바질 타들어 가는 것 같았다.몸에 문제가 생
그러다 이준혁도 한 줌의 재가 될 수 있지만 전혀 개의치 않았다.이준혁을 담배를 한 대 피우고 넓은 침대로 향했다. 아무것도 덮지 않은 채 쪼그리고 누웠다.눈을 감으면 머릿속에 반복적으로 그 말만 재생되었다.‘혜인은 이미 포기했어.’그 말이 재생될 때마다 이준혁은 심장이 더 크게 찢어지는 것 같아 너무 아팠다.“이준혁 씨.”거리감이 느껴지는 호칭에 이준혁은 마음에 구멍이 뻥 뚫린 것 같았다....서호 별장.곽경천은 정장을 들고 문 앞에 서 있었다. 어딘가 나가려는 것 같았다.늦은 시간인데 윤혜인이 아직 돌아오지 않아 걱정되어 마중 나갈 생각이었다.하지만 문을 나서자마자 돌아오는 윤혜인과 마주쳤다.“왔어?”곽경천은 윤혜인을 힐끔 쳐다봤다. 차에서 내릴 때 정리하긴 했지만 그래도 곽경천은 단번에 윤혜인의 옷이 찢어진 걸 발견했다. 그리고 턱에 약간의 멍이 들어있었다. 손자국 같았다.순간 곽경천은 흥분하기 시작했다.“누가 이런 거야?”곽경천이 앞으로 다가가 윤혜인의 손을 잡았지만 무서울 정도로 차가웠다.얼른 손에 들었던 정장을 윤혜인에게 걸쳐주고 소파로 데려가 앉혔다.지금 윤혜인에게 제일 필요한 게 뭔지 곽경천도 잘 알고 있었다.윤혜인이 다치지 않았다는 것만 확인하면 바로 추궁할 생각이었다.감히 곽경천의 동생을 건드렸으니 무슨 수를 쓰든 죽여버릴 생각이었다.곽경천은 바닥에 쪼그리고 앉아 윤혜인에게 물었다.“어디 아픈 데는 없어?”윤혜인의 눈동자는 초점이 없었고 생기를 완전히 잃었다.“오빠. 나를 위해 목숨도 기꺼이 바치던 사람이 왜 갑자기 나를 버리는 걸까...”곽경천이 마른침을 삼키더니 갈라진 목소리로 말했다.“이준혁이 멍청해서 그래...”윤혜인은 가슴이 정말 너무 아팠다.그냥 내려놓았을 뿐이지 잊은 건 아니었다. 교양과 자존심이 있는 사람으로서 더는 이어가면 안 된다고 생각해서 내려놓은 것뿐이었다.“오빠...”윤혜인은 머리를 곽경천의 어깨에 기대더니 소리 내어 울기 시작했다.“전에 나만 바라보고 나만 잘해주
“뭔데?”윤혜인이 멈칫하더니 아랫배에 손을 올려놓으며 느긋하게 말했다.“이 아이 낳을 생각이야. 다섯 달 후에 외국으로 나가서 순산할 수 있게 몸조리할 거야.”윤혜인은 생각을 마친 상태였다. 작업실 업무를 바짝 끝내고 뒤에는 이쪽 책임자에게 다 넘겨줄 계획이었다.윤혜은은 원래도 배가 많이 나오지 않았다. 게다가 날씨가 추워진 덕분에 옷도 여름보다 많이 두꺼워졌다.5개월을 넘겨도 옷으로 살짝 가려주면 임신한 티가 전혀 나지 않았다.외국 가서 몸조리하겠다고 한 건 아이를 낳기도 전에 이씨 가문과 엮이는 게 싫었기 때문이다.윤혜인의 능력과 집안으로 아이에게 좋은 생활 환경을 마련해줄 자신이 있었다.그러니 이런 쪽으로는 전혀 문제 될 게 없었다.아이를 남기고 싶은 이유를 묻는다면 첫째는 곽아름을 위해서였고 둘째는 어머니를 아직 찾지 못했기에 생명을 저버리고 싶지 않았다. 더 중요한 건 윤혜인도 이 아이를 남기고 싶었기 때문이다.곽경천이 동의했다.“네가 낳고 싶으면 낳는 거지. 우리 가문에서 아이 하나쯤이야 얼마든지 기를 수 있어.”곽경천은 동생 일이라면 발 벗고 나섰다. 윤혜인이 내린 결정은 두손 두발 다 들고 찬성했다.게다가 곽경천도 윤혜인이 중절 수술하는 건 별로였다. 중절 수술하면 몸이 상할뿐더러 음기에 영향 줄 수도 있었다. 그럴 바엔 아이를 낳아 북적거리면서 지내는 것도 좋다고 생각했다.곽경천이 윤혜인의 손을 톡톡 두드리며 위로했다.“네가 너무 수고할까 봐 걱정이야.”윤혜인이 잠깐 고민하더니 이렇게 당부했다.“아빠가 몸이 좋지 않으니 이 일은 일단 비밀로 할 생각이야. 두 달 뒤에 내가 건너가면 직접 얼굴 보고 얘기할게.”곽경천이 고개를 끄덕였다.“그래. 네 말대로 하자.”곽경천은 윤혜인이 정신을 차리고 차분해지자 자리에서 일어났다.“일단 며칠 쉬고 다시 작업실 나가. 구지윤에게 잘 지키라고 할게. 그러니까 걱정하지 마. 나는 이만 간다.”윤혜인이 자리에서 일어나 그를 불러세웠다.“오빠.”곽경천이 걸음을 멈추더니 고
그녀는 씻고 나서 홍 아줌마와 함께 아름이를 유치원에 데려다주었다.오늘은 아름이가 유치원에서 보내는 마지막 반나절이라 스스로 친구들에게 작별 인사를 하고 싶다고 말했다.지난번 사건 이후 윤혜인은 마음이 편치 않아 아름이를 일찍 해외로 보내기로 결정했다.그녀는 현재 임신 중이라 체력이 부족한 데다가 스튜디오 일까지 처리해야 해서 자칫 방심하면 아름이의 생명에 위협이 닥칠까 두려웠다.그래서 그녀는 홍 아줌마와 함께 아름이를 외할아버지에게 먼저 보내기로 했고 어차피 두 달 후면 자신도 해외에 가서 태교를 할 예정이었기에 금방 다시 만날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공항에 도착했을 때, 아름이는 눈이 빨개져서 윤혜인에게서 떨어지기 싫어했다.윤혜인의 마음도 쓰라렸다. 가능하다면 단 1초도 아름이를 자신 곁에서 떼어놓고 싶지 않았으니 말이다.그러나 스튜디오의 여러 일이 아직 자리 잡지 못해 그 일을 다 마무리한 후에나 갈 수 있었다.그녀는 아름이의 눈높이에 맞춰 몸을 낮추고 아름이를 안으며 약간 쉰 목소리로 말했다.“아름아, 착하게 지내고 먼저 외할아버지랑 함께 있어 줘. 외할아버지도 항상 아름이가 보고 싶다고 하시잖아.”아름이도 서울에 온 지 한동안 되어서 외할아버지가 보고 싶었다. 그래서 작은 눈을 한껏 붉힌 채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엄마, 엄마도 몸 잘 챙겨야 해요. 밥도 제때 먹고 잠도 제때 자고... 네?”이별의 순간, 윤혜인은 깊은 아쉬움에 아름이를 한 번 더 꼭 안았다.“착하게 지내고 가는 길에 홍 할머니랑 여은 이모 말 잘 들어야 해, 알았지?”그러자 아름이는 귀엽게 고개를 끄덕이며 엄마가 걱정하지 않도록 밝은 미소를 지어 보인 후, 깡충깡충 뛰면서 홍 아줌마를 따라갔다.윤혜인은 다시 여은에게 당부했다.“여은 씨, 그럼 아름이랑 홍 아줌마 잘 부탁할게요. 아빠가 보낸 경호원이 이미 공항에 도착해 있으니까 아름이를 별장에 데려다주고 다시 돌아와요.”“걱정 마세요. 아름이를 무사히 별장까지 데려다주고 올테니까요.”곧 여은은 걱정스러
주훈은 네 개의 큰 박스를 이준혁의 사무실로 옮겼다. 그의 의아한 시선을 마주하자 주훈은 머뭇거리며 말했다.“혜인 씨 쪽에 두고 가신 물건들이에요. 오늘 퀵 서비스로 보내셨습니다.”“응. 안에 넣어 둬.”이준혁은 손에 든 서류를 내려다보며 아무런 감정의 동요도 보이지 않았다.하루의 업무가 끝나고 도시의 네온사인이 켜지면서 밤하늘이 화려하고 매혹적으로 변했다. 회사 사람들은 거의 모두 퇴근한 상태였다.이준혁은 조용히 휴게실로 들어가 박스를 하나하나 열었다.그 안에는 생활용품, 옷, 신발 등이 종류별로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었다.잘 정돈된 물건들을 하나하나 만지자 그 위에 아직도 윤혜인의 손길이 남아있는 것처럼 느껴졌다.이준혁은 그녀가 이 물건들을 하나하나 정리할 때 어떤 모습이었을지 상상할 수 있었다.예전처럼, 그가 퇴근하고 집에 돌아오면 항상 다음 날 입을 다림질된 옷이 방에 걸려 있던 것이 떠올랐다.갑작스레 마음이 아파오자 이준혁은 긴 손가락으로 깔끔하게 다려진 옷을 단단히 움켜잡았다.결국 그는 옷에 주름을 남기고 말았다.그러자 이준혁은 얇은 입꼬리를 씩 올리며 소리 없이 웃음을 지었다. 그 웃음은 쓰라렸지만 어지러워진 옷은 오히려 눈에 더 익숙해졌다.이것이야말로 그의 인생이었다. 결코 평탄할 리 없는....윤혜인의 일상은 다시 자리를 잡았고 매일 바쁘게 보내며 다른 생각을 할 틈도 없이 더욱 충실하게 지냈다.점심시간에 그녀는 구지윤에게 고객 관련 사항을 물어보러 갔다. 사무실에 들어가자 구지윤이 집중해서 컴퓨터를 보고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컴퓨터에서 흘러나오는 소리에서 낯익은 이름이 들렸다.“원지민 씨, 최근에 자주 이선 그룹에 출입하시던데 혹시 이준혁 대표님과의 좋은 소식이 곧 있을까요?”화면을 본 윤혜인의 눈에는 베이지색 코트에 헐렁한 원피스를 입은, 배가 상당히 부른 원지민의 모습이 들어왔다.구지윤은 윤혜인이 들어오자 당황한 나머지 급히 웹페이지를 닫으려고 했지만 실수로 화면을 전체로 키워버렸다.화면 속 원지민
윤혜인은 담담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괜찮아.”말을 짧게 끝내고는 자료를 펼치며 물었다.“여기, 고객한테 연락해서 이렇게 수정해도 되는지 확인해 줄래?”일 얘기를 한참 했지만 윤혜인의 표정은 여전히 평온했다.구지윤은 찌푸렸던 미간을 조금이나마 풀었다.윤혜인이 정말로 모든 걸 내려놓은 것인지 아니면 억지로 웃고 있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하지만 감정 문제는 타인의 위로로는 전혀 해결되지 않는 법, 결국 스스로 극복해야 할 일이었다.윤혜인은 사무실로 돌아와 무언가를 하려고 했지만 아무 일도 손에 잡히지 않았다.사실 이준혁과 관련된 일은 아직까지 그녀에게 영향을 주고 있었다.곧 윤혜인은 일어나 창가로 다가가 초록 식물을 바라보며 마음을 가라앉히려 했다.그러나 이미 흔들린 마음이 쉽게 진정될 리 없었다....이선 그룹 대표 사무실.문을 두드리고 들어온 주훈의 눈에 의자에 등을 기댄 채 피곤한 얼굴을 하고 있는 이준혁이 보였다.“곽경천 씨가 찾아오셨는데 만나시겠습니까?”이준혁은 살짝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곽경천이?”“네. 대표님이 계신다고는 말씀드리지 않았습니다.”주훈은 들어올 때부터 분노에 가득 찬 표정을 한 곽경천을 보고 이대로 두었다간 싸움이라도 벌어질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그리고 또 둘의 현재 관계와 이준혁의 상태를 봐서라도 맞서 싸우기는 어려울 것 같았다.하지만 이준혁은 단호하게 말했다.“접견실로 안내해. 곧 갈테니까.”주훈은 말리고 싶었으나 결국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고개를 끄덕였다.“네.”이윽고 이준혁은 접견실에 들어갔다. 곽경천은 이선 그룹의 기업 연감을 들고 훤칠한 기럭지를 뽐내며 창가에 서 있었다.“형님.”입을 열자 이준혁은 자연스레 예전에 불렀던 호칭이 나왔다. 그러자 곽경천은 고개를 돌리며 멋진 얼굴에 차가운 표정을 띤 채 말했다.“대표님, 호칭을 잘못 부른 것 아닌가요? 이제 우리 사이가 그런 관계는 아니잖아요.”이준혁이 대답할 틈도 주지 않고 곽경천은 냉소적으로 말했다.“앞으로 형
이준혁은 아무 말 없이 곽경천의 말을 듣고 있었고 곽경천은 입가에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이렇게 된 것도 나쁘진 않네요. 차라리 빨리 끝나는 게 나을지도 모릅니다.”곽경천은 속으로 윤혜인과 같은 의문을 품고 있었다.자신의 여동생을 위해 목숨까지 내놓을 수 있었던 남자가, 돌아오고 나서는 아무렇지도 않게 그녀를 놓아버리겠다고 말하는 것이 이상하게 느껴졌다.그래서 그는 잠시 생각한 후 물었다.“혹시 무슨 꿍꿍이가 있는 건 아니죠?”이준혁은 한동안 침묵하다가 천천히 대답했다.“아닙니다.”곽경천은 이준혁이 그런 식으로 답할 것이라는 걸 예상하고 있었기에 그리 놀랍지 않았다.곧 그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혜인이를 너무 약하게 본 것 같습니다. 혜인이는 딱히 누군가가 보호해주는 것을 필요로 하는 아이가 아니에요. 지금 대표님이 선택한 방법은 혜인이가 절대 받아들일 수 없는 방식입니다. 축하합니다. 이제 혜인이를 완전히 잃어버리셨네요. 영원히 혜인이는 절대 돌아오지 않을 겁니다.”곽경천은 이 말을 끝으로 뒤돌아보지도 않은 채 문을 열고 나갔다.문이 쿵 하는 소리와 함께 닫혔다.이준혁은 굳게 닫힌 문을 바라보며 무언가를 생각하고 있었다.곧이어 거대한 와르르 소리가 나더니 문이 또다시 벌컥 열렸다.급히 안으로 들어온 주훈의 눈에는 난장판이 된 사방이 보였다.전시대에 놓여 있던 모든 상장과 트로피가 바닥에 떨어져 산산조각이 나 있었다.주훈은 방금 들린 소리에 놀라 허겁지겁 달려왔지만 이준혁에게 다가가며 상처가 없는지 살펴보았다. 하지만 외상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대표님, 괜찮으십니까?”주훈은 혹시 옷 안에 숨겨진 상처라도 있는 건 아닌지 의심했다.하지만 이내 이준혁이 차가운 표정으로 말했다.“공지를 내.”무슨 말을 하는 것인지 몰라 주훈은 잠시 멍하니 있었다.“...공지요?”“응. 9월 20일로 확정 지어.”“그건...” 주훈은 말문이 막혔으나 이준혁의 냉랭한 눈빛에 얼른 말을 바꿨다.“알겠습니다.”“국내외 언론사들도 더 많
하지만 손가락이 떨려 세 번이나 시도했음에도 노트북을 끌 수 없었다.결국 탁하는 소리와 함께 그녀는 노트북을 닫아버렸다.회사 사람들은 이미 다 퇴근한 상태였다. 그때 구지윤이 조심스럽게 문을 두드리며 말했다.“혜인아, 집에 가? 내가 데려다줄게.”말을 하는 사이 구지윤의 핸드폰이 울렸지만 그녀는 전화를 받지 않고 꺼버렸다. 뭔가 급한 일이 있는 듯했다.그 모습에 윤혜인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할 일 봐. 나는 아래에 운전 기사님이 기다리고 있어.”집에 돌아온 후, 윤혜인은 욕조에 몸을 담갔지만 따뜻한 물이 식어버린 그녀의 마음을 전혀 데워주지 못했다.그 후 며칠 동안 윤혜인은 아무리 신경 쓰지 않으려 해도 이준혁과 원지민의 열애 기사를 계속 보게 되었다.[이선 그룹 대표, 약혼녀와 함께 가구 쇼핑...][이선 그룹 대표, 약혼녀와 함께 야식 먹으며 데이트...][이선 그룹 대표, 약혼녀와 함께 미용실 방문...]언론은 이준혁을 신세대 모범 남성으로 만들어냈고 많은 젊은 여성들이 이를 부러워하며 뉴스 아래에 자기 남자친구를 태그했다.[아무리 바빠도 약혼녀랑 쇼핑 가주는데... 넌 뭐야?][분 단위로 수십억을 벌어도 약혼녀랑 야식 먹을 시간이 있으시다는데... 넌 왜 안 돼?] 처음에는 이 모든 것이 불편하게 느껴졌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점차 무뎌졌다.결국 윤혜인도 언론이 말하는 대로 이준혁이 원지민을 아주 많이 사랑하고 있다고 믿게 되었다.어찌 됐든 그가 지금 원지민과 함께 하는 일들은 믿기 힘들 정도로 놀라운 일이었으니 말이다.이제 이준혁에 대한 윤혜인의 인식은 점점 더 혼란스러워졌다.그녀가 알던 사람은 목숨을 걸고 바다로 차를 몰아넣었던 이준혁인지 아니면 지금 사랑을 위해 변한 이준혁인지, 무엇이 진짜인지 더 이상 구분할 수 없게 되었다.그날 퇴근 후, 구지윤이 문을 두드리며 말했다.“혜인아, 우리 같이 가서 샤브샤브 먹을래?”구지윤은 윤혜인이 요즘 내내 우울한 모습을 보였기에 기분 전환을 위해 샤브샤브를 먹자고 제안한
시터도 사실 그저 보여주기식으로 박으려 했다. 부잣집은 체면을 중요시했기에 증거가 없는 상황에서 일을 크게 만들지는 않을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아니나 다를까 보디가드가 시터를 잡고 함부로 행동하지 못하게 하자 시터가 펑펑 울며 억울하다고 아우성쳤다.그때 유진이 갑자기 입을 열었다.“증거 있어요.”이 말에 모든 사람이 놀라고 말았다. 몇 살짜리 애가 증거를 확보했다고 큰 소리로 외치니 그게 뭔지 다들 의문이었다.유진은 목에 건 호루라기를 벗으며 말했다.“이 호루라기 사진 찍을 수 있는 호루라기에요. 시터가 두유에 약 타는 장면을 찍어서 남겼고 쓰레기통에 버린 약병에 적힌 진료소 이름도 찍어놨어요. 그리고 이모랑 둘이서 작은 방에 모여 있는 사진까지 전부 모아뒀어요.”이 호루라기는 서현재가 유진에게 준 생일 선물이었다. 유진은 그 호루라기가 퍽 마음에 드는지 늘 목에 걸고 다녔고 소원마저 그 호루라기가 사실 작은 카메라라는 걸 알고 있었다. 총명한 유진이 시터가 약 타는 장면을 찍었을 줄은 꿈에도 몰랐지만 말이다.유진은 줄곧 얌전하고 말이 별로 없어 누구든 쉽게 휘두를 수 있다는 착각을 줬지만 사실 총명함을 숨긴 채 위협이 되지 않는다는 걸 보여주기 위해 연기한 것이었다.사실 유진은 그 누구보다 이성적이고 그 누구보다 총명했다. 반항하면 육경한은 오히려 화만 냈고 반항하면 할수록 방민아가 나쁜 짓을 저질렀다고 말할 때 그 말에 대한 신뢰도가 떨어진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그럴 바엔 차라리 순종하며 겁이 많은 척 연기해 적절한 시기를 기다렸다가 나쁜 여자의 민낯을 드러내기로 마음먹었다.시터는 이제 완전히 넋이 나간 상태였다. 작은 몸집에 이렇게 많은 꿍꿍이가 들어있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 그들의 일거수일투족을 찍을 생각을 다 하다니, 유진을 너무 얕잡아봤다는 생각이 들었다.입이 떡 벌어진 시터는 너무 놀라 아무 말도 하지 못했고 이제 벽에 머리를 박겠다고 난동을 부리지도 않았다.육경한은 넋을 잃은 시터를 보며 힘껏 발로 걷어찼다.“감히 내
방민아는 부들부들 떨며 얼른 앞으로 나아가 육경한을 당겼지만 육경한이 매몰차게 뿌리쳤다.쿵.그 힘이 어찌나 센지 방민아는 그대로 바닥에 주저앉고 말았다.“경한 씨...”방민아는 육경한이 이렇게 세게 밀칠 줄은 몰랐기에 너무 억울했다.“잘 생각해 보고 얘기하는 게 좋을 거예요. 내 아들이 거짓말하는 건지 아니면 방민아 씨가 거짓말하는지 말이에요.”육경한의 눈빛은 얼음장처럼 차가웠고 내뱉은 말도 하나같이 온도가 없어 가슴이 떨리게 했다. 그러더니 이미 혼비백산한 시터 앞으로 다가가 서늘하게 말했다.“누가 시켰어요?”시터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육경한을 본 순간 다리에 힘이 풀렸고 혀에 쥐가 나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방민아도 너무 긴장해 심장이 목구멍까지 올라왔다. 시터는 진실을 말할 엄두가 나지 않았지만 되돌릴 수 있는 게 없어 이마에 맺힌 땀을 닦아내며 이렇게 말했다.“대표님, 전 아무것도...”“다시 말할 기회 줄게요.”그러더니 한 걸음 한 걸음 시터에게로 다가가 오만하게 내려다보며 경고했다.“그래도 거짓말한다면 가족 모두 힘들어질 거예요.”깜짝 놀란 시터는 눈물, 콧물이 쏟아져 나왔다. 나이도 들 만큼 들었던 터라 이 일만 마치면 은퇴할 생각이었지만 돈에 눈이 멀어 육경한이 얼마나 무서운 사람인지 간과한 것이다.밉보여서는 안 될 사람에게 밉보였으니 이제 모든 게 늦어버렸다.방민아는 시터가 주저하자 얼른 입을 열었다.“맞아요. 얼른 얘기해요. 누군가의 사주를 받았는지 아니면 모함을 받았는지 얘기하라고요. 나이도 들었는데 아이 얼굴에 먹칠하고 싶지는 않을 거 아니에요. 잘 얘기해야 할 거예요. 잘못하면 벌받아야겠지만 잘못하지 않은 사람을 핍박하지는 않을 거예요...”“방민아 씨, 그 입 다물어요.”육경한의 차가운 경고에 방민아가 화들짝 놀라더니 이내 다시 진정하고는 뜨거운 눈물을 흘리며 해명했다.“경한 씨, 나도 혐의 벗고 싶어요. 경한 씨보다 더 진실을 원하는 사람은 나라고요. 그래야 나도 누명을 벗을 수 있을 테니까
방민아가 설득했다.“유진아. 이모랑 했던 약속 잊었어? 말 잘 듣고 거짓말하면 안 된다고 했잖아.”사실 방민아는 유진에게 두 사람이 한 약속을 잊지 말라고 귀띔하고 있었다. 만약 유진이 말을 듣지 않으면 더는 엄마를 만나지 못할 거라는 약속 말이다.‘어린아이가 알면 뭘 안다고. 겁만 줘도 고분고분해질 텐데.’방민아가 말했다.“거짓말하면 코 길어지는 거 알지? 그러니까 얼른 이모한테 와.”하지만 유진은 들으려 하지 않을뿐더러 겁에 질린 표정으로 점점 더 거세게 울었다.“왜 또 째려봐요...”유진이 소원의 품에 파고들며 온몸을 파르르 떨었다.“엄마, 저 여자 나 째려보기만 한 게 아니라 꼬집기도 하면서... 시켜준 대로 아빠한테 말하지 않으면 영원히 엄마 못 만날 거라고 했어요...”유진이 육경한을 바라보며 물었다.“아빠, 이모가 한 말 사실이에요? 엄마 못 만날까 봐 하라는 대로 하긴 했는데 정말 너무 무서워요... 저 나쁜 아줌마가 그러는데 두유에 약 타라고 한 것도 이모가 시킨 거래요. 나 죽이려 드는데 고분고분 말 들어야죠...”이 말에 분위기가 얼음장처럼 차가워졌다.방민아는 목덜미에 칼이라도 들어온 것처럼 온몸에 오한이 몰려왔다.‘짐승 같은 놈이 다 연기한 거야? 이렇게 큰 함정을 파놓고 기다리고 있었던 거야?’방민아는 이렇게 어린아이가 이런 꿍꿍이를 꾸몄다는 게 그저 무서울 뿐이었다.육경한은 싸늘하게 식은 얼굴로 앞으로 다가가 쪼그리고 앉더니 유진의 어깨에 손을 올리고는 이렇게 말했다.“아니야. 엄마 언제든지 만날 수 있어. 아빠가 있는데 감히 누가 엄마를 건드리겠어.”“아빤 절대 그 누구든 너에게 손대지 못하게 할 거야.”유진이 초롱초롱한 눈빛을 깜빡이며 물었다.“아빠, 정말 저 나쁜 이모가 유진이랑 엄마 해치지 못하게 지켜줄 거예요?”육경한이 대답했다.“너랑 엄마 다 무사할 거야. 아빠가 약속해.”유진은 그제야 한시름 놓았는지 다시 고개를 돌려 소원의 품에 머리를 파묻었다. 하지만 그 과정에 의미심장한 눈빛으
시터가 퉁명하게 쏘아붙이며 유진을 뺏어가려는데 갑자기 날아든 발차기에 그대로 나동그라지고 말았다.“아악.”힘이 잔뜩 들어간 발차기에 시터는 비명을 내지르며 그 자리에서 두 번 뒹굴더니 배를 부여잡고 곡소리를 냈다.“누가 나를...”원망하던 시터가 남자의 얼굴을 알아보고는 한마디도 꺼내지 못했다.‘대표님이 나를 왜.’켕기는 게 많은 시터는 너무 놀라 자리에서 일어나는 것도 까먹었다.“대표님...”육경한이 오만하게 내려다보며 매섭게 쏘아붙였다.“누가 도련님 쫓으라 했어. 도련님을 돌볼 때 어떤 수칙을 지켜야 하는지 잊었어?”유진은 체질이 별로 좋지 않아 노트에 명확하게 달리거나 흥분해서는 안 된다고 적혀 있으니 추격전을 벌이는 건 더더욱 있을 수도, 있어서도 안 되는 일이었다.“그게 아니라...”시터가 화들짝 놀라 온몸을 부들부들 떨며 자기도 모르게 옆에 선 방민아를 바라봤다. 해명을 들어줄 마음이 없었던 육경한이 매섭게 말했다.“물건 정리해서 꺼져요.”이 말에 시터는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 시급을 이렇게 많이 주는 일이 없었기에 자기도 모르게 방민아를 바라봤지만 방민아는 그저 화가 치밀어오를 뿐이었다.‘멍청하긴. 나는 왜 보는 거야. 내가 언제 사람들 앞에서 유진이 데리고 뛰라고 했나?’방민아는 시터의 눈알이라도 파내고 싶었지만 얼르 이렇게 암시했다.“경한 씨 더 화내기 전에 얼른 가요.방민아가 이렇게 말하며 시터에게 눈빛을 보내자 시터가 바로 알아들었다. 따로 두둑이 챙겨주겠다는 약속이었다.시터는 얼른 자리에서 일어나며 이렇게 말했다.“대표님, 죄송합니다. 아까는 너무 급해서 그랬어요 지금 당장 짐 싸서 갈게요...”그때 유진이 큰 소리로 말했다.“안 돼요. 아빠. 아줌마 이렇게 보내면 안 돼요.”육경한이 유진에게 물었다.“왜?”유진이 시터를 가리키며 말했다.“저 나쁜 아줌마가 두유에 뭘 섞었어요. 할머니한테 준 약이랑 같은 건데 두유에 섞어서 유진이 먹이려는 거 내가 몰래 토했어요.”이 말에 시터와 방민아
“누가 그만둔다는 거예요?”그때 남자 목소리 하나가 끼어들었다.고개를 돌린 방민아는 육경한을 발견하고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경한 씨, 소원 씨가 아이를 만나겠다고 난리인데 유진이 오늘 몸 상태가 별로라 거절했거든요. 그러니까 가지 않고 여기서 이렇게 버티면서 손찌검까지 하려 해요. 얼른 경비에게 끌어내라고 해요.”방민아가 억울한 표정으로 육경한의 팔을 잡으며 위안을 얻으려 했지만 육경한이 티 나지 않게 팔을 거두는 바람에 실패하고 말았다.넋을 잃은 방민아가 난감한 표정으로 손을 거두더니 원망스러운 눈빛을 지었지만 이내 정상으로 돌아왔다.‘내가 오늘 본때를 보여준다.’“멀쩡해 보이는 데 왜 때린대요?”육경한이 차가운 눈빛으로 물었지만 상황 파악이 안 된 방민아가 여전히 이간질했다.“맞아요. 나 때리려 들면서 아이는 보고 싶을 때 얼마든지 볼 수 있다고 당신이 뭔데 막아서냐고, 경한 씨가 있어도 막지 못할 거라고 하더라고요.”육경한은 소원에게 묻는 대신 경비에게 물었다.“소원이 방민아 씨 때리려 했다는데 너희들도 봤어?”방민아가 멈칫하더니 이내 고개를 들어 경비들에게 신호를 보냈다. 이곳의 여주인이 누군지 안다면 경비도 그렇게 눈치 없이 굴진 않을 것이다.게다가 방민아가 서 있는 곳은 육경한 뒤였기에 경비들도 바보가 아닌 이상 함부로 그런 적 없다고 말하기 어려웠다. 보안 팀장을 매수했으니 다른 경비들에게도 지시를 내렸을 거라고 생각한 방민아는 별로 걱정하지 않았다.“아니요. 사모님은 방민아 씨 때리려고 한 적 없습니다. 방민아 씨가 사모님 못 들어가게 막고 있었어요.”경비가 대답했다.방민아는 이 모든 게 환청이라고 생각했다.‘이 경비 머리가 어떻게 된 거 아니야? 호칭이 틀렸잖아. 소원 씨랑 사모님이어야지.’사모님이라고 부르기엔 살짝 이른 감이 있었지만 듣는 사람은 기분이 좋아질 수밖에 없는 호칭이었다. 정신 승리를 마친 방민아가 약간 멍한 표정의 경비를 바라봤다. 그래도 눈치는 있다는 생각에 마른기침하며 경비에게 당부했다.“
방민아의 안색이 변했다.‘어젯밤이랑 오늘이랑 어떻게 같아?’여긴 육경한의 집이라 곳곳에 CCTV와 보이지 않는 눈들도 가득했기에 방민아의 말투도 다소 딱딱했고 무슨 말을 하든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었다.“무슨 헛소리에요? 나 유진이 친자식처럼 대했는데. 모함할 생각하지 마요.”“허허...”소원이 차갑게 웃으며 대꾸도 하지 않고 안으로 들어가려 했다.“아니. 어딜 들어가요.”방민아가 계속 질척거리는데 잠금장치까지 걸어간 소원이 띡 하는 소리와 함께 잠금장치를 열더니 자동문이 스륵 열렸다.“소원 씨가 어떻게... 어떻게 여길 들어갈 수 있지?”방만아가 넋을 잃고 묻자 소원이 고개를 돌렸다.“이제 세상이 변했거든요. 방민아 씨.”“그게... 무슨 말이에요?”방민아의 마음속에 무수히 많은 무서운 생각이 스쳤지만 지금으로서는 애써 그 생각들을 꾹꾹 눌러 담을 수밖에 없었다.‘그럴 리가... 그럴 리가 없어...’방민아는 철저한 사람이라 흔적을 남긴 적이 없었다.“내 뜻은 이따 유진이랑 아주머니가 괴롭힘을 받았다는 게 밝혀지면 내가 당신 절대 가만두지 않을 거라는 뜻이에요.”소원이 한 글자 한 글자 또박또박 말했다. 아이와 노인에게 손댈 정도로 극악무도한 사람이었기에 먼저 공격하지 않으면 되레 당하기 일쑤였다. 이런 사람에게 도망과 인내는 아무런 소용이 없었고 맞서서 싸우는 게 제일 빠른 효과적이었다.방민아는 소원이 뭘 믿고 설치는지 몰라 넋을 잃었다.‘뭔데 이렇게 당당해? 여기 경한 씨 집 앞인데. 내 미래 남편 집 앞이잖아. 어떻게 감히.’방민아는 소원을 얕잡아보며 이렇게 말했다.“당신이 무슨 수로 나를 처단해요? 자기 몸 하나 지키기도 힘들 텐데?”방민아가 콧방귀를 뀌었다.“그렇게 허세 부리다가 혀가 쥐 날까 무섭지도 않아요?”“두고 봐요.”“뭘 두고 본다는 거예요...”소원의 말은 너무 의미심장해서 방민아는 무슨 뜻인지 알아차리기 힘들었다.“방민아 씨, 곧 후회한다에 한표 걸려는데 믿어볼래요?”소원이 웃으며 말했다.
“당연하죠. 잘만 하면 꼭 만나게 해줄게요.”방민아가 말했다.소원이 망가질 거라는 희열에 잠겨있는 방민아가 느긋하게 보충했다.“어차피 망가질 몸 차리리 우리 오빠에게 망가지는 게 낫지 않아요? 남자구실을 못 하니 사실 잤다고 해도 실질적인 관계가 이루어진 건 아니니까.”‘허...’방민기는 남자구실을 못 하긴 했지만 변태 성욕이 강한 사람이라 몸을 쓰지 못할수록 사람을 더 집요하게 괴롭혔다. 일반인도 견뎌내지 못하는 걸 소원이 버텨낸다는 건 말도 안 되었기에 채 보름도 지나지 않아 목숨을 잃을지도 모른다. 방민아가 바라는 것도 딱 그거였다.“방민아 씨는 언제 보나 말을 참 잘해요.”소원이 촘촘한 치아를 들어내고 웃었다.“하지만... 애석하게도 전혀 믿기지 않는데요? 어떡하죠?”“못 믿을 게 뭐가 있어요.”방민아는 그런 소원이 그저 우습다고 생각했다.“내 말 듣는 거 말고 다른 방법 있어요?”소원이 미간을 찌푸렸다.“지금 바로 아이를 볼 수 있는 방법은요?”“지금은 안 돼요.”방민아가 단칼에 거절했다.“일단 오빠 달래주고 3달 뒤에 다시 보여줄게요.”“3달이요?”소원이 잠깐 고민하는 듯싶더니 진지한 표정으로 물었다.“내가 그 석 달을 버틸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요?”방민아를 속내를 들켜도 전혀 난감한 기색이 없었고 그저 귀를 만지작거리며 이렇게 말했다.“왜 못 버텨요? 버텨야죠.”“사실 남자는 달래기 쉬워요. 오빠는 조금만 잘해주고 약한 모습을 보이면 난폭하게 구는 일 없을 거예요.”소원이 고개를 저었다.“됐어요. 방민기 씨든 방민아 씨든 더는 못 믿겠어요. 꿍꿍이가 좀 많아야 믿죠.”“당신 정말...”방민아는가 욕설을 퍼부으려다 매서운 눈빛으로 이렇게 말했다.“평생 아이 볼 생각하지 마요.”“오늘 꼭 아이를 봐야겠다면요?”소원이 말했다.“웃겨라. 무슨 자격으로요?”방민아는 소원이 주제도 모르고 설치는 그게 그저 우스울 뿐이었다. 여기서 아이를 만나고 싶다고 아우성이라니, 꿈꾸는 게 아닌지 의심 갈 정도였다.
방민아는 소원을 보고 화들짝 놀랐다.“당신이 왜 여기에.”어젯밤 방민기에게 호되게 당했을 사람이 멀쩡하게 이곳에 서 있는 게 이상했다.방민아가 상황을 전해 듣지 못한 건 방민기가 아직 깨어나지 못해 방민아의 꼬투리를 잡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소원이 아무리 모자와 마스크로 가려도 어젯밤 방민기에게 당한 흔적은 지울 수 없었다.멍이 든 걸 봐서는 당해도 호되게 당했을 거라는 생각에 방민아의 마음이 조금 편해졌다.“방민아 씨.”소원이 덤덤하게 말했다. 방민아를 또 만나고 싶지는 않기에 또 만났네요 같은 인사말은 생략하고 안으로 들어가려는데 방민아가 소원의 팔목을 덥석 잡았다.“어딜 들어가요.”방민아도 온 지 얼마 되지 않았지만 대문을 여는 카드가 먹통이라 들어가지 못하고 서 있었다. 육경한에게 전화하려는데 미처 전화하기도 전에 소원을 발견한 방민아는 마치 이곳의 여주인이라도 된 것처럼 기세등등해서 말했다.“들어가서 유진이 좀 보고 올게요.”소원이 미간을 찌푸리며 방민아의 손을 뿌리쳤다.“누가 보여준대요?”방민아가 언짢은 표정으로 말했지만 한편으로는 오늘따라 갑자기 이상하게 나오는 소원이 신기했다.‘여기가 언제 소원이 들어가고 싶으면 들어가는 곳이 됐지?’소원이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어제 하라는 대로 하면 유진이 보여준다면서요.”방민아가 그런 소원을 째려보며 말했다.“내가 그런 말을 했다고요?”소원이 말했다.“네. 했어요. 그 어떤 일을 당해도 가만히만 있으면 유진이 보여준다고요.”방민아가 입을 가리고 웃었다.“소원 씨, 어디 아픈 거 아니죠? 왜 갑자기 헛소리하고 그래요?”소원이 대꾸했다.“열은 안 나는데? 정말 모르겠어요?”방민아의 태도는 소원이 예상했던 것과 똑같았다. 방민아는 애초부터 아이를 보여줄 생각이 없었고 그저 소원을 모욕하고 망가트리기 위해 유진을 앞세웠을 뿐이다.분명 방민아에게 피해 가는 일이 없었고 육경한을 보면 멀리 피해 다녔지만 방민아는 그래도 소원을 놓아주려 하지 않았다. 애초부터 단순
통화를 마친 여자가 갑자기 남자를 끌어안고 뽀뽀하더니 흥분하며 말했다.“여보, 아까 어떤 사람이 전화해서 우리가 대상에 당첨됐다며 세계 일주 비용을 협찬해 주겠대.”“정말?”“정말이야. 미우 그룹에서 나왔다고 하는데 검색해 봤더니 정규적인 대기업이더라고.”소원이 놀란 표정으로 옆에 선 육경한을 바라보자 육경한은 그런 소원을 힐끔 쳐다보며 이렇게 말했다.“잘생겼다고 칭찬해 주는데 어떡해.”소원은 할 말을 잃었다. 서늘하던 아까와는 달리 딴사람이 된 육경한은 어딘가 오만해 보이기도 했다.운전기사가 시동을 걸자 소원은 이 차가 어디로 가는지 몰라 대뜸 이렇게 물었다.“이제 유진이 보러 가도 돼요?”육경한이 고개를 끄덕였다.“응. 앞으로 거기가 우리 집이 될 거야.”말 한마디에 육경한은 소원의 향후 생활을 결정해 버렸다. 그는 여전히 다른 사람을 조종하기 좋아했고 아까 봤던 모습은 그저 착각이었다.소원은 곧 유진을 만날 수 있다는 생각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아줌마가 왜 병에 들었는지도 알아내야 했다.차 안.육경한이 입을 열었다.“백업 동영상은 내게 맡겨.”육경한이 토론이 아닌 명령을 내리자 소원이 멈칫했다.“왜 너한테 맡겨야 하는데?”소원은 꿍꿍이 많은 방민아가 아줌마에게 무슨 짓을 했는지 알아내지도 못했는데 이렇게 쉽게 빠져나가게 둘 리가 없었다. 일단 착한 척하기 좋아하는 방민아의 모든 이가 보는 앞에서 벗겨내 더는 착한 척할 수 없게 만들어줄 생각이었다.육경한이 말했다.“방씨 가문을 상대하는 데 영상을 쓸 필요는 없어. 아직 육씨 가문과 협력한 프로젝트도 있고. 이때 영상을 터트리면 다 같이 죽는 거나 마찬가지야. 그러니 그 동영상은 절대 유포할 수 없어.”육경한은 야심을 그대로 드러냈다. 그는 여전히 잇속만 챙기는 약삭빠른 장사꾼이었다.소원은 두 사람이 비록 거래했지만 그녀가 방씨 가문에 해를 입히는 건 육경한도 두고 보지 않을 거라는 걸 알고 있었다.방민아는 결국 육경한의 아내가 되지 못했지만 뼈는 끊어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