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원은 ‘사랑’이라는 말을 듣자마자 속이 울렁거렸다.과거에 그런 사람을 좋아했던 자신에 대한 부끄러움과 역겨움이 몰려왔다.그녀의 몸조차도 그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 같았다.서현재는 소원의 창백한 얼굴을 보며 핸들을 살짝 움켜쥐고 말했다.“됐어요. 그건 중요하지 않아요.”서현재는 속으로 생각했다.그녀가 육경한을 사랑하든 사랑하지 않든 그것은 정말 중요하지 않은 문제였다.진정한 사랑은 포용하고 받아들이는 것이기에 소원이 서현재를 좋아하지 않는다고 해서 그의 짝사랑은 멈추지는 않을 것이었다.그래서 서현재는 그다지 신경 쓰지 않았다.침을 꿀꺽 삼키며 서현재가 한마디 했다.“들어가요. 바람이 차요.”말을 마치고 그는 곧장 시동을 걸었다. 하지만 윙윙거리는 소리 속에서 소원이 조용히 말했다.“사랑하지 않아.”주변은 엔진 소리 외에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밤바람이 살며시 불어와 은은한 조명이 소원의 얼굴에 쏟아졌다.그녀의 눈동자는 슬픔을 품고 있지만 겉으로 보기에 소원은 여전히 젊고 아름다웠다.서현재는 붉은 입술을 살짝 다물고 말했다.“재판이 잘 되길 바랄게요.”몇 초가 흐른 뒤, 소원은 다시 입을 열었다.“현재야, 난 이생에서 더 이상... 사랑하지 않을 거야.”크지는 않았지만 명확하게 들리는 목소리였다. 그 부드러운 음색 속에는 깊은 절망과 슬픔이 담겨 있었다.한때 소원도 사랑을 꿈꾸던 소녀였지만 그 끔찍한 수치와 고통을 겪은 후, 그녀는 사랑하고 사랑받을 능력을 잃어버렸다.심지어 그녀는 한때 자신을 의심하기도 했다. 이런 고통을 겪는 것이 자신이 뭘 잘못해서 그런 것일까 하며 말이다.소원과 육경한은 서로에게 상처를 내는 미친 사람들처럼, 누가 더 깊이 찌를 수 있을지 내기를 하는 것 같았다.육경한은 소원을 놔줄 생각이 없었고 소원 역시 육경한을 용서할 생각이 없었다. 그래서 그들의 끝은 비극으로 마무리될 수밖에 없었다.“괜찮아요.”서현재는 소원을 바라보며 부드럽게 말했다.“소원 누나, 누나가 사랑할 수 없다고
소원은 육경한이 법정에 앉자마자 자신을 바라보며 의미심장한 미소를 짓는 것을 보았다.그 미소를 보는 순간, 소원의 몸은 마치 자연스럽게 반응한 듯 소름이 돋았다.옆에 앉아 있던 한 아주머니가 그녀의 표정을 보고 걱정스럽게 물었다.“아가씨, 괜찮아요?”그러자 소원은 억지로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괜찮아요. 저 괜찮아요.”그 아주머니는 친근하게 말을 이어갔다.“아가씨는 저분과 친구 사이인 거예요?”소원은 고개를 저었다.“아니요.”“아, 그럼 저랑 같은 이유로 여기 오신 거예요?”아주머니가 물었다.소원은 아주머니의 의도를 이해하지 못했는지라 고개를 들어 그녀를 바라보았다.아주머니는 소원이 참 예쁘다고 생각했지만 창백한 얼굴에 슬픔이 묻어 있어 안쓰러운 마음이 들었다.“아가씨도 저랑 마찬가지로 저분께 도움을 받은 사람들 중 한 명인 거군요.”아주머니가 설명했다.이 말을 듣자마자 얼굴에 억지로 지은 미소가 사라지며 소원의 표정이 굳어버렸다. 하지만 아주머니는 이를 눈치채지 못하고 말을 이어갔다.“저는 법기사 앞에서 면을 파는 작은 가게를 운영해요. 몇 년 전 사고로 다리가 부러졌는데 육경한 선생님께서 그걸 알고 저에게 의족을 연결해 줄 사람을 찾아주셨어요. 이후로도 제 가게를 계속 도와주셨죠. 매년 절에 네 번씩 찾아와 제게 선물도 가져다주시곤 했어요.”소원의 얼굴은 점점 더 창백해졌다.“법기사요? 그곳에서 장사하셨나요?”소진용과 전미영의 위패가 모셔져 있는 곳이 바로 법기사였다.“네. 남편이 일찍 세상을 떠났고 몸이 안 좋아서 자식을 낳지도 못했어요.”아주머니는 두 손을 모아 합장하며 말을 이었다.“행운스럽게도 법기사의 장로님이 저를 거두어 주셔서 절 앞에서 장수면을 팔면서 지내고 있죠.”소원은 아주머니의 얼굴이 점점 더 익숙하게 느껴졌다. 바로 그 법기사 앞에서 면을 팔던 아주머니였다.아주머니는 말을 이어갔다.“육경한 선생님께서는 항상 절에 와서 고인을 위해 제사를 지내셨어요. 몇 년 동안 한 번도 빠지지 않고 네
소원은 그 순간, 몸서리가 쳐지는 기분을 느꼈다.자신에게는 끔찍한 악마였던 육경한이 다른 사람들에게는 대단한 선인으로 여겨지고 있다는 사실이 너무나도 황당하고 터무니없었다.그렇게 소원은 자리에서 일어나려다 발이 걸려 소리가 났고 그 소리에 육경한의 눈빛이 그녀에게로 향했다.소원은 본능적으로 주먹을 꽉 쥐었고 귀에는 윙윙거리는 소리만 들려왔다. 심지어 재판장이 무슨 말을 하는지조차 들리지 않았다.그녀는 비틀거리며 법정 안을 빠져나와 복도에 있는 기둥을 붙잡고 천천히 주저앉았다.가슴이 쿵쾅거리고 심장이 터져 나갈 것만 같았다.마치 모든 것이 뒤집혀 버린 듯한 충격을 느꼈다.‘육경한이 다른 사람들 눈에 착한 사람으로 비친다고? 말도 안 돼! 이렇게 터무니없는 일이 어딨어!’육경한이 자신에게 한 짓들을 생각할수록 소원의 분노와 공포는 극에 달했다.그는 소원을 모욕했고 그녀를 불러다 배가 나온 사업가들과 함께하도록 강요했으며 때로는 여러 명과 함께하도록 했다.그뿐만 아니라 육경한은 소원의 뺨을 때리고 바다로 뛰어들어 고기밥이 되라고 협박했으며 그녀가 병으로 몸이 망가졌을 때조차도 가혹하게 대했다.너무나도 많은 끔찍한 기억들이 떠올랐다.다른 사람들에게는 ‘좋은 사람'이었던 그가 소원에게는 악마였고 지옥이었다.그녀에게 있어 육경한이 다른 사람들에게 좋은 일을 했다는 사실은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그저 어둠에 물든 이 세상에서 소원은 육경한이 더더욱 잔혹하게 보일 뿐이었다.소원은 몰랐지만 그녀가 떠난 그 5년 동안 육경한은 다른 사람들 눈에 좋은 사람이 되기 위해 노력했고 그렇게 살아보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하지만 그의 집착은 뼛속 깊이 박혀 있었고 소원과 관련된 일에서는 결코 정상적이지 못했다.육경한은 소원이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 것도, 소원이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것도 참을 수 없었다.그래서 소원이 그런 기미를 보일 때마다 육경한은 세상을 파괴하고 자신과 그녀를 함께 묻어버리고 싶은 충동에 사로잡혔다.결국, 세상에는 진정한 의미의
소원은 예상보다 너무나도 빨리, 그리고 완전히 멀쩡한 모습으로 육경한이 풀려난 사실에 큰 충격을 받았다.이 모든 일이 너무 빨리 일어났고 육경한이 그 짧은 시간 안에 아무런 피해도 없이 나왔다는 것은 상상조차 하지 못했던 일이었다.아주머니는 소원이 자신과 같은 이유로 기뻐하고 있다고 생각하며 환하게 미소를 지었다.“아가씨도 기쁘죠? 육경한 선생님을 만나고 싶어요? 저기 사람들이 많이 모여서 축하하고 있어요. 제가 데려다줄게요!”아주머니는 소원의 손을 잡고 사람들 사이를 헤쳐나가며 육경한에게 다가갔다.소원은 마치 좀비처럼 경직된 상태로 움직였고 아주머니는 그녀가 얼마나 무기력한 상태인지 알아차리지 못했다.사람들 사이를 뚫고 들어간 아주머니는 웃으며 육경한에게 인사했다.“선생님, 여기 예쁜 아가씨가 선생님께 감사 인사를 드리러 왔어요.”육경한은 침착하고 날카로운 눈빛으로 소원을 바라보며 아무렇지도 않은 듯 미소를 지었다.“네? 저한테 무슨 감사 인사를 하시려고?”아주머니는 갑작스런 질문에 잠시 당황하며 소원을 바라보았다.“아가씨, 선생님께 감사 인사를 뭐라고 드릴지 말해보세요. 지금 여기 계시잖아요...”법정 밖의 차가운 흰 빛이 소원의 얼굴에 비춰 그녀의 혈관과 푸른 핏줄이 선명하게 드러났다.그녀의 얼굴은 너무나도 창백해 마치 죽은 사람처럼 보였다. 그 모습을 본 아주머니도 그녀의 상태가 이상하다는 것을 감지했다.아주머니는 소원의 손을 꽉 잡으며 걱정스럽게 말했다.“아가씨, 왜 이렇게 손이 차가워요? 병원에 가야 하는 거 아니에요?”소원은 온몸에 무기력함을 느끼며 스스로에게 차분해지라고 다그쳤다. 육경한이 방금 풀려난 이 순간, 그녀가 무너져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무슨 일 있나요? 몸이 안 좋아요?”육경한은 아주머니의 손에서 소원의 손을 넘겨받으며 차분하면서도 이질적으로 온화한 목소리로 물었다.“날 건드리지 마!”소원은 마치 덫에 걸린 새처럼 갑자기 뒤로 물러나며 두려움 가득한 눈으로 육경한을 바라보았다.그 눈빛에는 증오
소원이 서둘러 문밖으로 나갔지만 육경한의 은색 스포츠카는 이미 방민아를 태우고 출발했다.소원은 차를 향해 소리쳤다.“육경한!”그러나 은색 차는 전혀 멈추지 않고 그저 도로 위에 남은 연기만이 소원의 눈앞에 남았다.소원은 주먹을 꽉 쥐었다.‘분명히 날 봤으면서...’하지만 육경한은 멈추지 않았고 모든 것을 장악하고 있다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떠나버렸다.이 모습은 소원을 더욱 불안하게 만들었다. 그가 서현재에게 해를 끼치려는 것은 아닌지 걱정되었다.소원은 손이 떨려 운전을 할 수 없었고 결국 택시를 불러 서현재가 일하는 곳으로 향했다.택시 안에서 소원은 계속해서 이번 사건을 되돌아보았다.‘내가 왜 방민아의 존재를 잊고 있었지...’그녀는 방민아가 육경한을 좋아해서 가족들에게 그를 도와달라고 요청했을 가능성을 전혀 생각하지 못했다. 조금 전 육경한과 방민아의 대화에서 그 사실을 알아챘고 말이다.육경한은 마음이 매우 좁은 사람이었기에 소원은 그가 이미 자신에게 어떤 식으로 보복할지 생각해 두었을 거라 짐작했다.자신에 대한 육경한의 생각이 어떠한지 소원은 잘 알고 있었다.‘나에게 마치 고양이가 쥐를 가지고 노는 것처럼 천천히 고통을 주고 마지막에 치명적인 한 방을 날릴 생각이겠지. 하지만 현재에게는 그럴 인내심이 없을 거야.’소원은 차창 밖으로 멀어져 가는 풍경을 보며 결심했다.‘현재를 반드시 지켜야 해.’서현재는 너무나 좋은 사람이고 소원에게 많은 도움을 주었기에 그가 자신 때문에 위험에 처하게 된다면 그녀는 정말로 지옥에서조차 평온하지 않을 것이다.곧 택시는 서현재가 근무하는 회사 앞에 도착했다.소원은 내려서 곧바로 회사로 들어가려 했지만 안내 데스크에서 막히고 말았다.“죄송하지만 예약이 있으신가요?”안내 데스크 직원이 물었다.“아니요. 저는...”소원은 잠시 멈칫하다가 말했다.“서현재, 아니, 서 대표님을 찾아왔어요.”“죄송하지만 오늘 대표님께서는 회사에 나오지 않으셨어요.”안내 데스크 직원의 말에 소원의 심장은 덜컥
경비원에게 물어보니 그는 서현재가 아직 돌아오지 않았다고 했다.소원은 서현재가 회사에서 퇴근한 후 행방불명되었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얼굴이 창백해졌다.서현재가 회사에서 나온 후 어디로 사라졌는지 알 수 없었다.‘그때 육경한은 감옥에 있었을 텐데... 도대체 누가 육경한을 대신해 이런 일을 벌인 거지?’곧 소원의 머릿속에 떠오른 이름은 바로 소종이였다. 그가 가장 유력한 인물이었다.소원은 서둘러 육경한의 회사로 향했지만 예상대로 그곳에 육경한은 없었다.그는 방민아와 함께 식사를 하고 있을 터였다.소원은 소종을 만나기 위해 그의 이름을 말하며 면담을 요청했지만 안내 데스크에서는 그가 바쁘다는 답변을 줄 뿐이었다. 그래서 소원은 로비에 앉아 그를 기다리기로 했다.마침내, 소종이 내려와서 외출하려는 것을 본 소원은 그를 따라가려고 했지만 이내 잠시 고민하다가 다시 발걸음을 옮겨 조용히 뒤를 밟았다.그렇게 소종이 차를 타고 나가자 소원은 택시를 불러 그를 따라갔다.소종은 한 차분한 찻집에 도착해 여유롭게 차를 마시기 시작했다.소원은 택시를 돌려보내고 그를 계속 지켜보았다.잠시 후, 소종은 다시 차를 타고 떠났고 소원도 모자와 마스크를 착용한 채 검은색 차를 타고 뒤따랐다.택시는 눈에 띄기 쉬웠기에 그녀는 회사의 도움을 받아 눈에 잘 띄지 않는 차를 마련했다.곧 소종은 한 유흥 시설에 도착했다. 그가 들어간 후, 소원도 한 방을 예약하고 들어갔다.소원은 소종이 있는 방을 찾아 헤매며 그가 들어갔을 만한 방들을 하나하나 열어보았다.그리고 마침내 마지막으로 문을 열었을 때, 소종이 옆에 두 명의 여자를 둔 채 술을 마시고 있는 모습을 소원은 목격했다.문이 열리자, 소종은 마치 예견이라도 한 듯 크게 말했다.“소원 씨, 들어와서 한잔하지 그래요?”손을 잠시 멈칫했지만 소원은 이미 들켜버린 이상 더 이상 숨을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그래서 그녀는 방으로 들어와 테이블 앞에 서서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서현재를 납치한 게 당신 맞죠?”소종은
소원은 입술을 앙다문 채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소종은 일부러 한숨을 내쉬더니 느긋하게 말했다.“참으로 아쉽네요...”소원이 주먹을 움켜쥐며 차가운 목소리로 물었다.“뭐가 아쉽다고 그래?”“그게...”소종은 한참 뜸을 들이더니 약이라도 올리려는 듯 덧붙였다.“아니에요.”“뭐 하자는 거예요?”소원이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소종이 다리를 꼬고는 코웃음 쳤다.“질문하는 입장인데 태도가 이렇게 딱딱해도 돼요? 성의라고는 찾아볼 수가 없네요.”소원은 소종의 테이블에 놓인 양주를 번쩍 들어 단숨에 반 병을 마셔버렸다.“됐어요?”뜨거운 양주가 목구멍을 타고 위까지 흘러 들어가자 소원은 얼굴이 일그러졌다. 숨을 몇 번 들이마시고 나서야 조금 나아진 소원이 물었다.“소 비서님, 성의를 이만큼 보이면 되겠냐고요?”몇십 도가 훌쩍 넘는 양주를 저렇게 들이붓다니, 소종은 소원이 미친 게 틀림없다고 생각했다.소원을 괴롭히고 싶긴 했지만 한꺼번에 한 병을 거의 마실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다.소종이 아무 말도 하지 않자 소원은 얼마 남지 않은 양주를 그대로 원샷해 버렸다.“그만 마셔요.”소정은 화가 치밀어 올라 미간을 찌푸렸다.아직 육경한은 소원을 어떻게 처리할지 지시하지 않은 상태였다. 위도 좋지 않는데 이렇게 들이부었다가 죽기라도 하면 소종은 책임을 피할 수 없게 된다.소원은 허약한 몸을 주체하지 못하고 비틀거리다가 테이블에 부딪히더니 소종의 발치에 털썩 주저앉았다.눈앞이 캄캄해진 소종이 연신 이렇게 말했다.“아니, 죽어도 내 앞에서 죽으면 안 되죠...”“닥쳐요.”소원이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테이블에 놓인 포크를 소종의 목에 갖다 댔다. 당장이라도 소종의 목을 그어버릴 기세였다.아가씨들이 혼비백산해서는 비명을 질렀다. 소원이 그 두 여자를 노려보며 말했다.“핸드폰 내려놓고 화장실로 들어가 있어요.”이 바닥에 몸을 담은 여자들은 낄끼빠빠를 잘 알고 있었다. 하여 얼른 전화를 내려놓고 화장실로 들어가 문을 잠갔다.소종은 화를 주체
“겨우 이런 포크로 누굴 겁주려고.”소종이 소원의 손을 밀어내며 하찮다는 듯 말했다.“그렇게 대단하면 찔러보든지요.”소원이 손에 힘을 풀자 포크가 바닥에 떨어졌다.육경한을 제외하고 서현재를 데려갈 사람이 없다고 생각했다.“얼른 나가요. 여기서 성가시게 하지 말고.”소종이 뻣뻣해진 목을 이리저리 비틀며 차갑게 쏘아붙였다.“걱정하지 마요. 대표님이 지시하기 전에 내가 손댈 일은 없을 테니까요.”소원이 화장실 문을 여는 순간 아가씨들이 혼비백산하며 뛰어나왔다. 소원은 무거운 몸을 이끌고 손을 목구멍에 넣어 아까 마셨던 술을 전부 토해냈다. 그러자 몸에 힘이 풀려 벽에 겨우 기대 있었다.이때 소종의 핸드폰이 울렸다.수화기 너머로 무슨 말이 들렸는지는 모르지만 소종은 연신 알겠다고 대답했다.통화가 끝나고 소종은 화장실로 들어가 핏기 없는 소원의 얼굴을 힐끔 쳐다보더니 차갑게 말했다.“소원 씨, 대표님이 보자고 하십니다.”소원의 눈동자에는 초점이 없었고 그저 멍한 표정으로 앞만 내다볼 뿐 대꾸하지 않았다.소종이 말을 이어갔다.“서현재 씨의 행방을 궁금해한다는 걸 아시고 서현재 씨에게 데려다주겠다고 하셨어요.”소원이 몸을 벌떡 일으켰다. 이에 위가 다시 뒤틀렸는지 칼이라도 맞은 듯 아파서 몸을 파르르 떨었다.소종이 웃었다.“급할 건 없어요. 곧 애타게 찾던 사람을 만날 수 있을 거예요.”소원은 소종과 함께 프라이빗 클럽으로 향했다. 바깥 인테리어만 봐도 어마어마했다.안으로 들어가자 느긋하게 차를 마시고 있는 육경한이 보였다.육경한은 이미 수염을 말끔하게 민 상태였다. 안에서 살이 빠졌는지 얼굴이 더 각져 보였다. 그는 금테 안경을 쓴 채 재무제표를 보고 있었다. 소원은 점잖아 보이는 육경한의 모습에서 이상한 괴리감을 느꼈다.육경한은 소원을 보고 온화하게 웃었다.“왔어?”소원은 그와 태연하게 인사를 나눌 마음이 없었기에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육경한, 현재 어디 있어?”“밥은 먹었어?”뜬금없는 질문에 소원은 말문이 막혔다. 정
남자는 재밌다는 듯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럼 만약 제가 당신에게 기회를 준다면요?”“무슨 기회요?”진아연은 자신이 누구와 거래하는지 잊지 않고 전전긍긍하며 물었다.남자의 두 눈은 마치 별을 숨긴듯 하였다. 그는 반혹적인 어조로 말했다.“육경한을 죽일 기회를 줄게요. 만약 그 사람을 죽일 수 있으면 저는 당신의 잘못을 추궁하지 않고 평안히 출국할 수 있게 해줄 수 있어요. 진아연 씨, 어떻게 생각해요?”“정말이에요?”진아연은 그의 말을 정말 믿기 어려웠다.제트를 마주할 떄 진아련은 항상 착각에 빠졌다. 사실은 육경한을 죽이는 것보다 제트를 마주하는게 더 어려웠다. 이 두 문제를 함께 놓으면 비교가 될 것이다.왜냐하면 그는 아주 신비하기에 누구도 그의 배경과 내력을 알 수 없어 그와 상대할수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육경한의 약점은 아주 많다. 소원이와 그녀 뱃속에 있는 아이, 그리고 망할 놈 유진이... 심지어 하나하나의 나쁜 계획은 이미 진아연의 마음속에서 형태를 갖추게 되며 단단히 벼르고 있었다.제트는 고개를 끄덕이였다. “물론 정말이에요, 당신이 성공하면 저는 말한 대로 다시는 따지지 않을 것이에요. ”말하는 사이에 남자는 뒤에 쫓아오는 세 대의 차를 가볍게 따돌렸다.이 제트는 마치 세상의 모든 것을 꿰뚫어 보는 사람마냥 무섭기 그지없었다.하지만 진아연의 마음속에 있는 제트는 탁월한 능력이 있어서 그녀가 아무리 숨기려 해도 그의 눈을 피할 수 없어 놀라지 않았다.진아연은 눈앞의 남자를 보면서 자신의 충성심을 알려 주었다.“제트 씨, 안심해요, 저는 반드시 임무를 완수할 거니까. 당신은 저를 죽이지만 않으면 됩니다.”“음, 기대가 되네요.”“...”뒤따라오던 세 대의 차가 앞차를 잃어버린 후, 경비원들은 실시간 정보를 병실의 VIP 라운지에 전달했다.유진의 휴식을 방해하지 않기 위해 남자는 황수진보고 유진이의 휴식에 방해 안 되는 대기실에 오라고 했다.지금 육경한의 안색은 매우 안 좋았다.경호원들이 전송해 오는 화면
남자는 짜증을 내며 말했다.“잡히면 안 된다는 것을 알면서 또 오다니 정말 바보 중의 바보예요! ”“제가 어떻게 알았겠어요, 이곳 경비원은 다른 동네 분들과 다를 줄은, 이곳 경비원은 정말 최고급 경호원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거예요. ”여자가 원망하자 옆에 있던 남자가 말했다. “진아연, 당신은 내가 본 것 중 가장 멍청한 사람인 것 같아요. ”진아연은 순간 자신의 이름을 듣고도 반응하지 못하였다. 하지만, 이 사람은 어떻게 자신의 이름을 알고 있을가 라는 생각에 그녀는 그를 경계하면서 물어봤다.“누구세요? “남자는 침묵하고 대답하지 않았다. 얼굴 가리려고 마스크를 썼지만, 눈빛에 드러나는 냉랭함은 숨길 수 없었다. 진아연은 그의 눈을 바라보다가 문득 무슨 생각이 나서 남자를 바라보며 말했다. “당신... 당신이 바로 제트 씨이세요? ”남자는 그녀를 상대하지도 않고 부인하지 않았지만, 모든 것을 다 설명했다. 진아연은 너무 놀라서 하마터면 바지에 실수까지 할 뻔했다. 누가 알았겠는가, 늑대 무리에서 도망쳐 나와 호랑이 굴에 들어갈 줄을... "제트 씨... 아주 죄송해요, 제가 일부러 여기에 나타난 건 아니예요. 지금 당장 꺼질게요. ”놀라움은 하여금 진아연의 이성을 잃게 만들어 고속도로에서 차 문을 열고 뛰어내릴 생각까지 하였다.제트와 비교했을 때, 지금 뒤에서 자신을 쫓아오는 경비원들이 구세주라고 생각되었다. 진아연은 제트가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사람이라고 느꼈다. 필경 지난번에 그의 손에서 죽을 뻔했으니까... 진아연의 손이 차 문손잡이에 닿았을 때, 차 문이 열리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다.진아연은 절망 속에서 두 손을 비비며 용서를 비는 자세를 취했다. “죄송해요... 제트 씨... 저 진짜 멀리 떠나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거니까 저를 놓아주세요. ”안장이 좁아서 진아연은 무릎을 꿇을 수 없어 두 손을 끊임없이 비비며 아주 작은 희망을 찾고 있었다.남자는 역시 수단과 방법을 숨기고 있었다. 뒤차의 추격을 피하는 동시에
여자가 작은 골목에 들어섰을 때, 경비원이 말했다. “아가씨, 길을 잘못 들었어요. 13동은 저쪽에 있어요.”여자는 할 수 없이 돌아섰는데 경비원이 다시 말했다. “아가씨, 친구 보러 처음 오셨어요?”여자는 이곳의 경비원이 왜 범인을 검문하는 것처럼 자신을 물어보는지 이해 안 가 속으로 욕했다.여자는 대충 대답했다.“네네, 처음 왔어요.”13동 문 앞에 오자 경비원이 직접 603의 초인종을 눌렀고 방울 소리가 울리자, 안에서 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렸다.“여보세요?”경비원은 여자보고 말하라고 고개를 돌렸다.“...”정말 어쩔 수 없어 여자는 갑자기 고개를 숙이며 배를 움켜쥐며 말했다.“아이고, 배가 너무 아파요.”여자가 고통스러운 표정으로 말하자 경비원은 즉시 구급차를 불러주었다. 그리고 경비원이 구급차를 부르는 사이에 여자는 작은 틈을 놓치지 않고 도망쳤다.“거기서요!”경비원은 일반인보다 더 빠르게 반응해 무전기에 대고 빨리 저 검은 옷 입은 여자를 잡으라는 말을 했다.여자는 자신의 눈앞에서 점점 닫혀 가는 문을 보며 당황해 어리둥절했다.“닫지 말아요.”안에서 경비원이 소리를 듣고 여자 쪽으로 돌진해 왔다. 그들은 마치 여기서 여자를 기다리고 있는 듯 일반 경비원보다 속도가 더욱 빨랐다.바로 얼마 전 육씨 그룹이 이곳의 부동산을 사서 전문적인 경호원으로 바꾸어 수상한 인물을 주시하여 남자와 여자를 막론하고 의심이 가는 사람들을 모두 붙잡아 파출소로 보냈다. 여자는 온몸에 힘이 빠진 채 어디로 도망갈지 몰랐다. “저 여자 잡아요.”전에 여자와 얘기하던 경비원이 소리쳤다. 여자가 잡힐 것만 같았는데 갑자기...펑!큰 소리가 나 그곳을 보자 검은색의 지프차 한 대가 돌진해 들어와 난간에 부딪혀 부서지는 것이 보였다.대중들은 모두 이 갑작스러운 변고에 어리둥절하여 반응하지 못했지만, 지프차가 무서운 기세로 달려오자, 경비원들은 모두 재빨리 몸을 피했다.유독 여자만 제자리에서 자신한테 향해 오는 것을 멍하니 보며 어찌할 바
소원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말했다. “마음이 놓이지 않아. 유진이를 보러 갈래”“필요 없어”육경한은 단호히 거절하다 멈칫했다. 그러다 소원이 자신이 아이를 못 본다고 오해 할가봐 천천히 입을 열었다“내가 보고 있을 거니까 걱정하지 마. 일도 다 병원에 가지고 갈 거니까. 넌 휴식이 필요해. 알았어? “유진이 병으로 쓰러진 후 소원은 며칠 동안 거의 밤새 자지 못해 눈 밑에는 이미 짙은 다크써클이 생겼지만 그녀는 억지로 버티는 중이었다.소원은 유진이 자신을 찾지 못할까 봐 걱정되어 여전히 망설이고 있었다. 육경한은 무슨 일이든 다 알고 있는 것처럼 직접 휴대폰 음성 메시지를 소원이에게 들려주었다.“아빠, 엄마 보고 잠자고 있으래요. 만약 성공하지 못하면 저는 삼촌이라고 부를 거예요. ”“엄마보고 많이 휴식하고 있으래요. 그렇지 않으면 뱃속의 아기가 천천히 자랄 거예요. 저는 아기를 빨리 만나고 싶어요. 아기한테 오빠가 지금 힘이 세니까 아기를 업을 수 있다고 알려주고 싶어요. ”캐톡에서 유진이의 까랑까랑한 목소리로 협박한 것을 보니 두 사람의 사이가 아주 좋은 것 같았다. 유진이의 소리는 듣기에도 정신이 맑고 괜찮아 보였다.소원은 그제야 마음이 조금 놓였다. 생각해 보니 자기가 쉬지 않은 것을 아이도 알아차릴 수 있었다. 지금 내가 자신의 건강에 대한 책임은 즉 유진에게 책임을 지고 있는 것이기에 소원이는 말 듣고 차에서 내려서 휴식을 취하러 갔다.네 명의 경호원은 육경한의 분부에 따라 두 명은 아파트 입구에 두 명은 계단 입구를 엄중히 지켜 사수의 파리 한 마리조차 날아 들어갈 수 없었다.육경한의 차가 떠나자 멀지 않은 곳에서 한 여인이 사방을 둘러보며 나타났다.그녀는 벙거지 모자를 쓰고 얼굴을 절반 이상 가린 채 마스크를 쓰고 수상한 모습으로 나타나 동네 경비원의 주의를 불러일으켰다.“저기요, 당신은 어느 건물로 가나요? 여기에서 뭘 하고 있습니까? “여인은 경비원한테 놀라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말했다. “저요... 사람을 찾고
주석훈이 웃으며 말했다.“허허. 몰랐죠? 저 평소엔 되게 허당이에요.”“변호사님 은근히 유머가 넘친다니까요.”주석훈은 언변에 능했기에 단 몇 마디에 간호사가 함박꽃 같은 웃음을 지었다.“저기는 왜 저런 거래요? 아까 길을 잘못 들었는데 막더라고요.”주석훈이 물었다.“아, 저기요.”간호사가 고개도 들지 않고 대답했다.“어떤 여자애 한 명 들어왔는데 가족이 살해당했다나 뭐라나. 실어증에 걸려서 한마디도 못 했는데 평소 믿고 따르던 언니가 와서 입을 열었다고 들었어요.”주석훈이 물었다.“여자애요? 많이 놀랐나 보네요.”“그러게요.”간호사가 대답했다.“가족이 칼 맞고 죽었는데 누가 견딜 수 있겠어요.”“억울한 사건이 얼마나 많은데 범인만 잡아도 다행 아니겠어요?”주석훈이 말했다.“어려울 것 같던데요?”간호사가 말했다.“뭐 유용한 단서가 안 나왔나 보더라고요. 아빠가 여자애를 지키겠다고 같이 들어가지 않아서 아무것도 못 봤대요. 진술한 상황이 경찰이 알고 있는 상황과 별반 다를 게 없어서 경찰도 어떻게 풀어나가야 할지 모르겠다고 한숨만 내쉬더라고요.”간호사가 이렇게 많은 내용을 알 수 있었던 건 안지영의 간호를 책임진 간호사가 바로 그녀였기 때문이다.주석훈이 더 물으려는데 다른 간호사가 들어왔다.“어? 이 간호사 있었네? 저쪽 눈코 뜰 새 없이 바쁘니까 빨리 가봐.”이 간호사가 말했다.“알겠어요. 이것만 마무리하고 갈게요.”치료를 받은 주석훈이 이 간호사에게 고맙다고 말하자 이 간호사가 얼굴을 붉히며 괜찮다고 말했다.주석훈이 멀리 가고 나서야 다른 간호사가 이렇게 말했다.“이 간호사, 아까 저 사람이랑 무슨 얘기 했어? 저 병실에서 나온 얘기는 함부로 하면 안 돼.”“저 별말 안 했어요. 다들 아는 내용 얘기해준 거예요.”이 상황에 자기가 무슨 말을 했는지 인정하면 바보나 다름없었다.“그래. 앞으로 조심해. 자칫하다간 징계 먹을 수도 있어.”나이 많은 간호사가 귀띔했다.“알아요.”이 간호사가 얼른 대답했다.“아
소원이 길게 한숨을 내쉬더니 말했다.“잘됐다. 정말 너무 잘됐어요. 이번엔 하느님이 제 소원을 들어주셨네요.”소원이 주석훈을 바라보며 말했다.“그래도 제가 신세를 졌으니 제 도움이 필요하면 언제든 말해줘요.”감염되지 않았다고 해서 그냥 넘어갈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다. 확률이 반반이라 주석훈도 엄청난 스트레스를 받았을 텐데 주석훈의 마음이 그만큼 단단하니 망정이지 다른 사람 같으면 진작 멘탈이 무너졌을 것이다.소원은 다시 한번 주석훈이 대단하다고 생각했다.“별거 아니니까 마음에 담아두지 마요.”주석훈이 활짝 웃으며 말했다.“소원 씨가 여기 있다는 건 유진도 여기 입원해 있는 건가요?”소원이 고개를 저었다.“유진은 여기 없어요. 아는 동생 좀 보려고 여기 온 거예요.”“동생이요?”주석훈이 물었다.“소원 씨에게 동생이 있는 줄은 몰랐네요. 혹시 괜찮으면 같이 보러 갈까요?”뜬금없는 초대였지만 원래도 열정적인 주석훈이 말하니 뭔가 자연스러워 보이기도 했다. 소원이 별다른 생각 없이 이렇게 말했다.“괜찮아요. 이미 만나고 나오는 길에요. 전에 알고 지내던 동생인데 지금쯤 이미 쉬려고 누웠을 거예요.”“아.”주석훈이 말했다.“그러면 데려다줄까요?”“아니요. 아니요.”소원이 얼른 대답했다.“데려다줄 사람이 있어요.”말이 끝나기 바쁘게 육경한이 다가왔다. 까만 트렌치코트가 육경한의 키를 더 커 보이게 했는데 강압적인 아우라를 뿜어내며 소원에게로 걸어왔다.“가자.”육경한은 옆에 선 주석훈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았지만 육경한과 구면인 주석훈이 먼저 입을 열었다.“대표님.”육경한은 작은 변호사 따윈 상대할 가치가 없다는 것처럼 여전히 대꾸하지 않았다. 이에 난감해진 소원이 분위기를 만회하려고 이렇게 말했다.“나오다가 마침 주 변호사님을 만났어.”육경한이 그제야 옆에 선 주석훈을 보며 ‘응’이라고 대답했다.주석훈은 전혀 난감해하지 않고 웃으며 말했다.“두 분 사이가 좋아 보이네요. 변호사로서 의뢰인과 피고가 잘 지내고 있으니 뿌
제일 의심 가는 사람은 진아연이었다. 안상철은 여자관계가 간단한 편이었고 오랫동안 여자 친구 하나 사귀지 않고 싱글을 유지하면서 모든 심혈을 딸과 어른을 모시는 데 썼다.박혜순도 안상철을 여러 번 타일렀지만 그럴 때마다 안상철은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기 싫다며 거절했다. 그렇다면 싱글인 안상철이 이렇게 격렬하게 다툴 수 있는 사람은 진아연일 가능성이 컸다.경찰 조사가 끝나고 안지영도 검사를 받고 쉬어야 했기에 강민혜는 소원과 함께 병실을 나섰다. 밖으로 나와서야 소원은 자신의 추측을 털어놓았다.소원은 진아연의 힘으로 안상철을 죽이기엔 턱없이 부족하다고 생각했다. 한 방도 아닌 60방이라면 더더욱 말이다. 안상철은 180은 되는 큰 키를 가졌기에 큰 부상을 입어 몸이 허약해 툭하면 쓰러지는 진아연을 이기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게다가 진아연은 얼마 전에 손목을 그으면서 피를 많이 흘렸던 터라 짧은 시간 내에 회복하긴 어려웠다. 그렇다면 이 사건에 진아연 말고도 다른 사람이 개입했다는 의미였다.멀쩡히 살아움직이는 사람을 60번이나 찔렀다는 건 웬만한 정신상태로 저지를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이런 사이코패스가 잡히지 않고 사회에 섞여 들어간다면 악영향이 만만치 않을 것이다.강민혜의 생각도 소원과 별반 다를 게 없었다. 진아연이 입원했을 때 강민혜도 만나본 적이 있어서 알고 있었다. 진아연은 절대 안상철을 쓰러트릴 만큼 강한 사람이 아니었다. 부검 결과를 보면 약물을 사용한 흔적이 없는데 그렇다는 건 안상철을 그렇게 만든 사람이 진아연이 아니라는 의미였다. 다른 건 몰라도 진아연 같은 몸집이라면 3, 4명이 더 와도 절대 안상철을 이기지 못했을 것이다.그래도 일단 진아연을 잡는 게 우선이었다. 진아연을 잡아야만 다음 단계로 넘어갈 수 있지만 문제는 진아연이 어디로 숨었는지 모른다는 것이다.소원은 의문만 가득 품은 채 병원 밖으로 나가다가 주석훈과 마주쳤다.“소원 씨, 여기서 마주치네요.”주석훈이 소원을 향해 헤벌쭉 웃자 소원이 멍한 표정으로 물었
“내가 너무 욕심이 많았어요.”소원은 안지영이 하는 말을 조용히 들어줬다.“내가 바이올린 계속하겠다고 하지만 않았어도 아버지가 그 돈을 다시 찾으러 가지는 않았을 거예요. 그러면 이렇게 될 일도 없었을 텐데.”안지영이 갈라질 대로 갈라진 목소리로 말했다. 안상철이 소원에게 사건의 전말을 들려줄 때 진아연이 그 돈을 줬는지 말았는지는 말하지 않았다. 안상철의 말대로라면 진아연이 돈을 주려다가 결국 주지 않았으니 그 돈이 없어야 맞았지만 실제로 안상철은 그때 돈을 받은 것이다. 하긴 안상철이 바보도 아니고 아무런 보수 없이 그런 위험한 일을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아무리 상대가 딸의 병을 고쳐주겠다고 약속해도 외국으로 나가야 가능한 일이었기에 확실치도 않은 약속을 쉽게 믿지 못했을 테고 일단은 확실한 무언가, 즉 돈을 줘야만 안상철이 소진용을 찾아갈 결심을 내렸을 것이다.하지만 안상철은 결국 이 일을 소원에게 말하지 않았다. 사실대로 말했다면 소원은 안상철이 그 돈을 찾으러 가지 못하게 막았을 것이고 그 돈은 결국 경찰에게 빼앗길지도 모른다. 어떻게 보면 결국 안상철의 탐욕이 그를 죽음으로 내몬 것이다.소원이 안지영을 위로했다.“아니에요. 그게 왜 지영 씨 탓이에요. 나쁜 사람이 몹쓸 짓을 저지른 건데. 지영 씨도 아버지가 그렇게 될 줄은 몰랐잖아요. 지영 씨, 일단 그날 있었던 일을 경찰에게 알리는 게 좋겠어요. 최대한 자세하게 빠트린 것 없이 말해야 경찰도 빨리 범인을 찾을 수 있고 삼촌도 편히 눈 감을 수 있을 거예요. 내 말 무슨 말인지 알죠?”안지영이 고개를 끄덕였다. 안지영도 말하고 싶지 않은 게 아니라 그저 너무 무서울 뿐이었는데 소원이 곁에 있으니 무서움이 한결 가시는 것 같았다. 어릴 적부터 소원을 믿고 의지해왔는데 최근에는 소원 덕분에 살아날 수 있었다.안지영은 경찰 조사를 받을 때 두려움을 가시기 위해 소원에게 옆에 앉아 있어 달라고 제안했고 강민혜도 안지영의 제안을 받아들여 진술하는 내내 소원이 옆에 있을 수 있도록 했다.안지
소원의 설명을 들은 육경한이 미간을 찌푸렸다.“아직 명확해진 게 아니니까 너도 너무 걱정하지 마. 그래도 안전에는 조심해야 되니까 사람 4명 붙여줄게. 유진이는 내가 알아서 보안 강화하고.”육경한은 소원이 거절할 것 같아 그러는지 얼른 한마디 덧붙였다.“너는 지금 홀몸이 아니야. 내가 이러는 것도 다 아이를 보호하기 위해서고.”육경한의 말이 맞았기에 소원도 거절하지 않았다. 이제 홀몸이 아니었고 유진도 엄마가 없어서는 안 되기에 일이 마무리될 때까지 어떻게든 조심하면서 안전에 심혈을 기울여야 했다.육경한이 골라준 보디가드는 의심할 여지 없는 안전한 사람들이었기에 소원도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 안상철도 소진용이 제일 믿고 맡긴 사람이었지만 결국 아버지를 배신한 걸 보면 이 세상에 영원히 믿을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지금 갈 거지? 내가 데려다줄게.”육경한은 소원이 반대하지 않자 경찰이 지정한 병원으로 데려다주겠다고 말했다. 그렇게 병원에 도착한 두 사람은 강민혜의 안내를 받아 안지영의 병실에 도착했다.문을 열어보니 안지영이 자그마한 몸집으로 무릎을 꽉 끌어안은 채 머리를 파묻고 있었다. 며칠 사이에 종이 인형처럼 삐쩍 마른 안지영을 보니 너무 마음이 아팠다.가까이 다가간 소원이 나지막한 목소리로 불렀다.“지영 씨...”안지영이 소원의 목소리를 듣지 못한 것처럼 고개를 들지도, 다른 반응도 보이지 않자 소원이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지영 씨, 지금 어떤 기분인지 알아요. 하지만 경찰에게 단서를 줘야만 아버지를 죽인 범인을 잡을 수 있어요...”가족을 잃은 슬픔은 소원도 겪어봐서 잘 알았다. 마지막 인사도 형체를 알아볼 수 없는 시신을 보며 했으니 그 아쉬움과 후회는 사람을 통째로 집어삼킬 만큼 컸다. 소원은 그때 왜 아버지와 더 많은 시간을 보내지 않았는지, 왜 같이 밥을 먹고 얘기를 나누지 않았는지 후회했지만 그땐 이미 너무 늦어버렸다.안지영을 다독이던 소원이 더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안지영을 꼭 끌어안았다. 얼마나 지났을까, 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