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겠어, 준혁아. 앞으로 절대 다시는 이런 실수 안 할게.”원지민은 더 이상 이준혁을 화나게 하고 싶지 않아 적당히 멈추기로 했다.왜 원지민은 이씨 가문이 이 아이를 받아들이게 하려는 집착을 가졌을까?그 이유는 이미 오래전부터 공을 들여온 일이었고,자기 스스로의 체면을 구기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이 아이가 누구의 아이든지 상관없이 원지민은 이씨 가문의 이름만 붙일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충분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했다.이준혁이 원지민은 이용하는 것도 그녀 눈에는 서로 이용하는 것뿐이었다.그리고 왜 원지민이 그동안 수많은 일들을 겪고도 무사히 빠져나갈 수 있었을까?그 이유는 바로 그녀가 일을 처리함에 있어 깔끔하고 흔적을 남기지 않았기 때문이다.임세희의 일이든 문현미의 일이든, 남들이 그녀를 의심하든 말든, 원지민이 그랬다는 확실한 증거를 가진 사람은 없었다.설사 문현미가 지금 깨어난다고 해도 그녀가 이 일과 관련이 있다는 증거는 전혀 없다.증거를 잡지 못하는 한, 원지민은 무죄다.아무도 그녀를 어찌할 수 없었다.이준혁이 떠난 후, 원지민은 여유 있게 손에 묻은 먼지를 털어내며 다시 당당한 태도를 되찾았다.하지만 걸음을 옮길 때마다 발가락에서 찌르는 듯한 고통이 느껴져 그녀는 하마터면 욕이 튀어나올 뻔했다....그 후 이틀 동안, 윤혜인은 업무상의 일을 거의 다 처리했다.이준혁이 돌아왔기 때문에 많은 난제들이 쉽게 해결되었다.또 다른 좋은 소식은 문현미가 깨어났다는 소식이었다.비록 아직 말을 할 수는 없지만 깨어난 것만으로도 첫 번째 고비를 넘은 셈이었다.윤혜인은 문현미를 찾아가고 싶었지만 이준혁 쪽에서 누구도 면회를 허락하지 않는다는 금지령이 내려진 상태였다.이 일에 대해 윤혜인은 이준혁에게 더 이상 부담을 주지 않기로 했다.그가 이렇게 하는 데에는 분명 이유가 있을 것이니 말이다.하지만 그날 식당에서 만난 이후로 윤혜인은 이준혁으로부터 아무런 소식도 받지 못했다.‘이제 좀 더 적극적으로 행동할 필요가 있는 것 같아.
윤혜인은 가만히 앉아있을 수가 없어 계속해서 문 쪽을 바라보며 이준혁이 언제 올지 기다리고 있었다.그러나 이 기다림은 밤새도록 계속되었고 결국 이준혁은 끝내 나타나지 않았다.다른 사람들의 말을 통해 윤혜인은 오늘 이준혁은 연회에 참석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대신 이선 그룹에서는 다른 한 고위 임원을 보냈다고 한다.그리고 그 고위 임원을 연회장까지 바래다준 사람은 주훈이었다.윤혜인은 주훈을 보자마자 곧바로 다가가 그를 불러 세웠다.“주 비서님, 준혁 씨 어디 있어요?”주훈은 갑작스러운 질문에 당황하며 바로 대답했다.“회사에 계십니다.”“그럼 별일 없는 거예요?”그러자 주훈은 머리를 긁적였다.“꼭 별일이 없는 건 아니고 회사에도 일이 있어서요.”“준혁 씨가 안 온 이유가 설마 제가 여기 있는 걸 알아서 그런 거예요?”갑작스러운 윤혜인의 물음에 주훈의 눈빛이 잠시 흔들리더니 곧 그는 직업적인 태도로 말했다.“설마요...”그 말에 윤혜인은 눈치챘다. 그녀는 바보가 아니었으니 말이다.‘정말 내가 온다는 걸 알고 일부러 안 왔다는 거야? 나를 이렇게까지 피하는 이유가 뭐지?’윤혜인의 가슴이 아릿하게 아파왔다. 하지만 그녀는 힘겹게 그 감정을 억누르며 주훈을 곤란하게 하지 않기로 했다.“가서 일 보세요.”그러자 주훈은 마치 사면이라도 받은 것처럼 즉시 자리를 떠났다.윤혜인은 더 이상 만찬 자리에 있을 수 없었는지라 풀이 죽은 채 차로 돌아왔다.마음도 아프고 발도 아프고 모든 것이 아프게 느껴졌다.그리고 생각할수록 오늘은 무슨 일이 있어도 그 남자를 만나야겠다는 결심이 들었다.‘죽는 한이 있더라도 꼭 그 이유를 알아봐야겠어.’그래서 그녀는 곧바로 행동에 나섰다.가기 전에, 윤혜인은 운전 기사에게 술 한 잔을 받아 자신의 몸에 뿌리고 볼에 약간의 홍조를 더했다.마치 약간 취한 듯한 모습을 연출하기 위해서였다.이선 그룹 건물 앞에 도착했을 때, 그녀는 자신의 퇴로를 끊기 위해 운전 기사에게 돌아가라고 지시했다.그러자 운
남자는 윤혜인의 손길에 순간 멈칫했지만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윤혜인은 스스로 머리를 그의 가슴 쪽으로 파고들었고 익숙한 삼나무 향기가 마음을 편안하게 해주었다.하지만 뒤이어 그녀의 귓가에는 이준혁의 차가운 목소리가 들려왔다.“일어나.”그 순간, 윤혜인은 깜짝 놀라며 잠에서 깨어났다.‘현실을 꿈으로 착각한 걸까...’몸이 순간적으로 경직되었지만 윤혜인은 곧 자신이 이곳에 온 목적을 떠올렸다.바로 이준혁과의 관계를 예전으로 되돌리기 위해서였다.게다가 지금 그녀는 취한 척하고 있으니 이 기회를 그냥 흘려보내고 싶지 않았다.모든 생각을 끝마치자 윤혜인의 행동은 더욱 대담해졌다.윤혜인은 이준혁의 목을 더욱 꽉 끌어안고 반쯤 취한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안 일어날래요. 싫어요. 당신이...”그녀는 더욱 도발적으로 행동하며 하얀 다리로 이준혁의 다리를 감싸며 유혹하듯 말했다.“당신이 날 안아 일으켜주면 모를까.”이준혁은 입술을 꽉 다물고 오랫동안 그녀를 바라보았다. 깊은 눈동자 속에서 마치 폭풍이 치는 듯한 격정이 느껴졌다.술이 주는 독특한 분위기 때문이었을까, 윤혜인은 가슴이 두근거리기 시작했고 점점 더 진짜로 취한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그렇지 않았다면 어떻게 이준혁이 꿈속에 나타나 윤혜인을 이토록 혼란스럽게 만들 수 있었을까?”그녀는 얼마나 오랜 시간 동안 이 단단한 가슴을 느껴본 적이 없었던가, 또 얼마나 오랜만에 이준혁을 제대로 안아본 것인가. 그 순간, 윤혜인은 자신의 꿈을 이루게 해준 하늘에 무한한 감사함을 느꼈다.이준혁이 다시 돌아와 줬다는 것만으로도 비록 시련이 있더라도 모두가 감사할 일이었다. 그는 여전히 살아 있었으니 말이다.“준혁 씨, 돌아와 줘서 고마워요.”윤혜인은 지금 당장이라도 이준혁을 껴안고 펑펑 울고 싶었다. 그에게 얼마나 그리웠는지, 얼마나 보고 싶었는지 다 털어놓고 싶었다.그러나 남자는 냉정하고 날카로운 목소리로 말했다.“연기 그만하고 일어나.”마치 얼음물을 얼굴에 끼얹은 것처럼 윤혜인의
이준혁의 입술에는 약간의 피가 맺혀 있었고 아까처럼 차갑지는 않지만 오히려 더 사람을 끌어당기는 느낌이 들었다.윤혜인은 주저하지 않고 그와 눈을 마주쳤다. 한 발짝도 물러서지 않고 말이다.“삼십 초.”“준혁 씨는 내게 삼십초를 줬지만 날 밀어내지 않았어요.”윤혜인은 계속해서 말을 이어갔다.“가슴에 손을 얹고 생각해봐요. 정말 그 마음속에 내가 없어요? 날 싫어해요? 정말 나를 싫어한다면 어떻게 그렇게 오랫동안 참았겠어요? 싫어하는 사람은 삼 초도 길다고 생각할 텐데 어떻게 상대의 숨결조차 받아들일 수 있겠어요?”이준혁은 입술을 꽉 다문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윤혜인은 주먹을 꽉 쥐며 스스로에게 용기를 북돋아 주었다.“준혁 씨가 지금 무슨 어려움을 겪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나를 밀어내는 건 너무 성급한 판단 아닐까요? 내가 반드시 당신의 보호가 필요한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거예요? 우리는 너무나도 많은 일을 겪었고 보통 사람들은 평생 겪지 못할 시련을 겪었어요. 우리의 의지는 그 누구보다도 강해야 하는 거 아닌가요? 나 대신 스스로 판단하지 말아요. 나는 어떤 일이든 감당할 수 있어요.”윤혜인은 이준혁의 차가운 표정을 무시하고 그의 손을 꼭 붙잡았다.“준혁 씨, 우리 생사를 함께 넘었잖아요. 더 이상 못 넘을 일이 뭐가 있겠어요?”이 말을 듣고 이준혁의 무표정했던 얼굴에 잠시 미세한 변화가 일어났지만 그 표정은 여전히 냉소적이고 차가웠다.눈썹을 살짝 찌푸리며 그가 말했다.“혜인아, 너도 나름 위치가 있는 사람인데 체면이라는 걸 좀 지켜야 하지 않겠어? 도대체 자존심은 어디다 두고 온 거야?”그 말은 윤혜인에게 너무나도 가혹했다.윤혜인을 잘 아는 사람이라면 그녀가 외모와는 달리 자존심이 강하고 체면을 가장 중요시 여긴다는 것을 알고 있을 것이다.만약 이준혁이 아니었다면 윤혜인은 벌써 등을 돌리고 떠났을 것이다. 하지만 이준혁이 폭탄을 가득 실은 차를 운전하며 목숨을 걸었던 그 모습을 떠올리면 그녀는 도저히 떠날 수 없었다.그녀는 자
윤혜인은 벌떡 일어나며 물었다.“왜 산에서 나 대신 칼을 막았죠? 왜 산사태가 일어났을 때 절벽 아래로 뛰어들어 나와 함께 죽으려고 했던 거예요?”그녀는 이준혁의 뒷모습을 향해 절규하듯 소리쳤다.“그게 사랑이 아니면 도대체 뭐예요! 도대체 뭐냐고요!”윤혜인은 마치 이성을 잃은 듯 필사적으로 외쳤다. 하지만 그녀는 개의치 않았다.이준혁이 여러 번 목숨을 걸고 윤혜인을 구하지 않았다면 그녀가 어떻게 다시 여기 설 수 있는 용기를 얻을 수 있었을까? 주변은 죽은 듯이 고요했다.오랜 시간이 지난 후, 이준혁은 마침내 입을 열었다.“널 사랑할 때는 당연히 너를 감동시키고 싶었지. 하지만 이제는...”앞에 서 있는 윤혜인의 창백해지는 얼굴을 아랑곳하지 않은 채 그는 무자비하게 말했다.“이제는 사랑하지 않아...”가벼운 몇 글자가 모든 것을 부정했다.복잡한 이유는 없었다. 단지 더 이상 사랑하지 않아서였다.“지나친 집착은 사람을 질리게 할 뿐이야. 스스로 잘 판단하길 바라.”그 말을 남기고 이준혁은 더 이상 주저하지 않고 휴게실을 떠났다.문이 ‘쿵’ 하는 소리와 함께 다시 닫혔다.공허한 방안은 조명마저도 차갑게 느껴졌고 윤혜인은 소파의 한구석에 몸을 웅크렸지만 이미 차갑게 식어버린 마음은 도무지 따뜻해지지 않았다.이준혁은 윤혜인을 그냥 두고 떠나버렸다. 심지어 그녀가 어떻게 집에 돌아갈지조차 신경 쓰지 않았다.‘정말 내게 관심이 없어진 거야?’반 시간 후, 윤혜인은 계단을 내려갔다.그녀는 지하 주차장에서 들어왔기 때문에 원래대로 그곳을 통해 나갈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지하 주차장에는 더 이상 윤혜인을 기다리고 있는 차가 없었고 결국 그녀는 혼자 터벅터벅 주차장 출구까지 걸어갔다.밤공기는 물처럼 차가웠고 설상가상으로 비까지 내리고 있었다.윤혜인은 우산도 쓰지 않고 차를 부르는 것도 잊어버린 채, 그저 무작정 빗속을 걸었다.차가운 습기가 발끝에서부터 머리끝까지 스며들어 그녀를 오싹하게 만들었다.그때 갑자기 귀를 찢는 듯한 ‘빵빵’
모르는 사람일지라도 한번 잘못 보이면 사소한 일로 인생이 망가질 수 있다.보행자에게 양보하지 않은 죄로 감옥에 갈 수도 있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남은 인생을 후회해도 소용없을 것이다.잠시 침묵이 흘렀다가 이준혁은 다시 입을 열었다.“가서 우산 건네줘.”비서가 잠시 멈칫했다.‘비 맞으면서 그렇게 오랫동안 서 있었는데 인제 와서 우산을 주라고? 고생할 거 다 시키고 나서 이제야 구해주는 셈 아닌가...’하지만 상사의 결정에 대해 왈가왈부할 수 없는 일이기에 그는 고개를 끄덕이고 서둘러 우산을 챙기러 갔다.이준혁은 여전히 비 내리는 밤하늘 아래서 꼿꼿이 서 있었다.그가 움직이지 않은 이유는 단순히 움직이기 싫어서가 아니었다. 오랫동안 서 있으면 몸이 점점 굳어가며 마치 기계처럼 멈춰버리기 때문이다.하지만 이 순간도 그는 오로지 의지로 버티고 있었다.그에게는 해야 할 일이 너무나 많았다.시간이 부족했고 이것이 윤혜인에게 줄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이라고 생각했다.비도 맞고 고생도 해봤으니 이제 더 이상 어리석은 행동은 하지 말길 바랄 뿐이었다.윤혜인은 한 친절한 행인에게서 우산을 건네받고 나서야 비로소 몸이 조금씩 따뜻해지기 시작했다.그녀는 자신의 몸을 해치려는 어리석은 짓을 하지 않을 정도로 충분히 현명했다.분풀이는 충분히 했고 이제는 더 이상 혼자만이 아니기에 윤혜인은 자신을 지켜야 한다는 책임감을 느끼고 있었다.곧 윤혜인은 운전 기사에게 전화를 걸었지만 그녀를 데리러 온 사람은 뜻밖에도 곽경천이었다. 윤혜인을 기다리다 그녀가 나타나지 않자 걱정이 된 곽경천이 연락을 하려던 찰나, 운전기사가 윤혜인에게서 전화를 받았다.온몸이 젖어 있는 윤혜인의 모습을 본 곽경천은 마음이 아파 서둘러 자신의 재킷을 벗어 그녀에게 둘러주었다.“혜인아, 왜 비를 맞고 있었어? 운전기사는 왜 데려오지 않았고?”그 말에 코끝이 찡해진 윤혜인은 차에 앉아 몸이 조금씩 따뜻해지자 조용히 말했다. “오빠, 운전 기사님 탓하지 마. 내가 먼저 돌려보냈어.”곽
“엄마에 대한 소식이 있다고?”“응. 외국 출신의 한 아주머니가 7~8년 전에 한 가정집에서 임시 가정부로 일할 때 어머니를 본 적이 있다고 해. 그 아주머니가 말한 집을 확인해 봤는데 그 집 사람들은 이미 이사를 갔더라. 시간이 너무 오래돼서 어디로 이사 갔는지도 알 수 없었지만 다른 나라로 간 것 같다고들 해.”아직 어머니를 찾지는 못했지만 이 정도로도 큰 진전이었다.이전에는 윤아름이 살아 있는지조차 확신하지 못했으니 말이다.그 아주머니는 윤아름이 ‘잠자는 미녀' 같았다고 말했지만 곽경천은 윤혜인이 걱정할까 봐 그 부분은 말하지 않고 좋은 소식만 전했다.“정말 다행이야, 오빠.”눈가는 여전히 빨갰지만 윤혜인의 기분은 어느 정도 나아진 듯했다.‘확실히... 엄마는 아직 세상에 살아 계신 거야.’곽경천은 윤혜인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안심시켰다.“걱정하지 마. 꼭 어머니 찾을 거야.”30분쯤 지나서야 윤혜인은 집에 도착했다. 따뜻한 물로 목욕을 한 후, 그녀는 피곤한 몸을 이끌고 잠에 들었다.잠을 자고 나면 내일은 또 새로운 하루가 될 것이다....소원은 육경한이 구속된 사이에 회사의 주도권을 다시 손에 넣고 있었다.회사는 원래부터 한이 그룹과 깊은 연관이 있는 사업을 하고 있었고 이전에 소진용이 맡았던 에너지 프로젝트는 실패로 끝났지만 이제 소원은 새로운 방식으로 그 프로젝트를 되살리고 있었다.소진용이 받았던 오명을 씻으려면 육경한이 직접 인정하지 않는 한 어려울 것이었다. 하지만 오명을 씻어낸다 해도 과거의 한이 그룹은 다시 돌아올 수 없었다.소원도 더 이상 그런 집착을 갖지 않았다. 소진용의 본래 목적은 에너지 산업을 성공적으로 이끌어 많은 사람들에게 이익을 주는 것이었기 때문이다.그녀는 그저 에너지 산업을 잘 이끌어 나가는 것이 아버지의 유언을 이루는 일이라고 생각했다.오늘, 소원은 회사에서 늦게까지 일했고 퇴근하려고 문을 나서던 중 오랫동안 기다리고 있던 서현재를 마주쳤다.그는 카키색 트렌치코트를 입고 있었고 잘생긴 외
길을 가던 중, 서현재가 물었다.“소원 누나, 저녁에 뭐 먹을까요?”“난 아무거나 괜찮아.”소원은 뉴스를 스크롤 하며 무심코 대답했다.그렇게 차는 조용한 한식당 주차장에 들어섰고 그곳은 꽤 아늑해 보였다.자리 잡고 앉자마자 음식이 빠르게 나왔다. 모두 속을 편안하게 해주는 담백한 음식들이었다.서현재가 입을 열었다.“소원 누나, 육경한 건에 대해 알아봤어요. 방씨 가문은 이미 두 번이나 큰 타격을 입었고 이번에 방민기의 일까지 겹치는 바람에 그쪽에서는 자구책으로 육경한을 무너뜨릴 수밖에 없었어요. 이번에는 증거도 충분해서 실수가 없을 거예요.”겉으로 보기에는 그렇게 보일 수도 있지만 육경한이 아직 법적으로 판결을 받지 않은 이상, 소원은 안심할 수 없었다.육경한은 유민 그룹을 거의 3년 만에 모두가 주목하는 위치로 끌어올렸고 위기를 기회로 바꾸는 데 아주 능숙했다.그래서 소원은 여전히 유진이를 공공연히 데리고 다니지 않았다. 육경한이 어떤 반격을 준비하고 있을지 몰랐기 때문이다.첫 번째 재판 날짜가 다가올수록 소원의 불안감도 점점 커져갔다.“이 기간 동안 방씨 가문을 계속 주시해야 해.”소원은 서현재에게 신중하게 당부했다.원래 그녀는 서현재를 이 복잡한 상황에 끌어들이고 싶지 않았지만 그가 이미 서씨 가문과 육씨 가문의 불법적인 거래를 증거로 제출한 상황이었기 때문에 이제는 물러설 수 없었다.이제 그들이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은 자신들을 지키는 것이었다.“네. 사람들을 붙여서 주시하고 있어요.”특별한 날인만큼 소원은 오늘 무거운 이야기는 그만하려고 했다.그래서 그녀는 가벼운 목소리로 물었다.“요즘 어르신께서 너한테 선자리 보러 다니라고 안 하셔?”“몇 번 봤어요.”서현재가 대답했다.“안 그러면 아버지가 화를 내셔서요.”소원은 그의 표정을 보고 상황을 이해했다.“다 잘 안됐구나?”그녀는 그를 위로하며 말했다.“너도 이제 적당한 사람을 찾아보는 게 좋을 것 같아. 나처럼 되지 말고.”소원은 한 번 사랑에 깊이 상처를
방민아의 안색이 변했다.‘어젯밤이랑 오늘이랑 어떻게 같아?’여긴 육경한의 집이라 곳곳에 CCTV와 보이지 않는 눈들도 가득했기에 방민아의 말투도 다소 딱딱했고 무슨 말을 하든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었다.“무슨 헛소리에요? 나 유진이 친자식처럼 대했는데. 모함할 생각하지 마요.”“허허...”소원이 차갑게 웃으며 대꾸도 하지 않고 안으로 들어가려 했다.“아니. 어딜 들어가요.”방민아가 계속 질척거리는데 잠금장치까지 걸어간 소원이 띡 하는 소리와 함께 잠금장치를 열더니 자동문이 스륵 열렸다.“소원 씨가 어떻게... 어떻게 여길 들어갈 수 있지?”방만아가 넋을 잃고 묻자 소원이 고개를 돌렸다.“이제 세상이 변했거든요. 방민아 씨.”“그게... 무슨 말이에요?”방민아의 마음속에 무수히 많은 무서운 생각이 스쳤지만 지금으로서는 애써 그 생각들을 꾹꾹 눌러 담을 수밖에 없었다.‘그럴 리가... 그럴 리가 없어...’방민아는 철저한 사람이라 흔적을 남긴 적이 없었다.“내 뜻은 이따 유진이랑 아주머니가 괴롭힘을 받았다는 게 밝혀지면 내가 당신 절대 가만두지 않을 거라는 뜻이에요.”소원이 한 글자 한 글자 또박또박 말했다. 아이와 노인에게 손댈 정도로 극악무도한 사람이었기에 먼저 공격하지 않으면 되레 당하기 일쑤였다. 이런 사람에게 도망과 인내는 아무런 소용이 없었고 맞서서 싸우는 게 제일 빠른 효과적이었다.방민아는 소원이 뭘 믿고 설치는지 몰라 넋을 잃었다.‘뭔데 이렇게 당당해? 여기 경한 씨 집 앞인데. 내 미래 남편 집 앞이잖아. 어떻게 감히.’방민아는 소원을 얕잡아보며 이렇게 말했다.“당신이 무슨 수로 나를 처단해요? 자기 몸 하나 지키기도 힘들 텐데?”방민아가 콧방귀를 뀌었다.“그렇게 허세 부리다가 혀가 쥐 날까 무섭지도 않아요?”“두고 봐요.”“뭘 두고 본다는 거예요...”소원의 말은 너무 의미심장해서 방민아는 무슨 뜻인지 알아차리기 힘들었다.“방민아 씨, 곧 후회한다에 한표 걸려는데 믿어볼래요?”소원이 웃으며 말했다.
“당연하죠. 잘만 하면 꼭 만나게 해줄게요.”방민아가 말했다.소원이 망가질 거라는 희열에 잠겨있는 방민아가 느긋하게 보충했다.“어차피 망가질 몸 차리리 우리 오빠에게 망가지는 게 낫지 않아요? 남자구실을 못 하니 사실 잤다고 해도 실질적인 관계가 이루어진 건 아니니까.”‘허...’방민기는 남자구실을 못 하긴 했지만 변태 성욕이 강한 사람이라 몸을 쓰지 못할수록 사람을 더 집요하게 괴롭혔다. 일반인도 견뎌내지 못하는 걸 소원이 버텨낸다는 건 말도 안 되었기에 채 보름도 지나지 않아 목숨을 잃을지도 모른다. 방민아가 바라는 것도 딱 그거였다.“방민아 씨는 언제 보나 말을 참 잘해요.”소원이 촘촘한 치아를 들어내고 웃었다.“하지만... 애석하게도 전혀 믿기지 않는데요? 어떡하죠?”“못 믿을 게 뭐가 있어요.”방민아는 그런 소원이 그저 우습다고 생각했다.“내 말 듣는 거 말고 다른 방법 있어요?”소원이 미간을 찌푸렸다.“지금 바로 아이를 볼 수 있는 방법은요?”“지금은 안 돼요.”방민아가 단칼에 거절했다.“일단 오빠 달래주고 3달 뒤에 다시 보여줄게요.”“3달이요?”소원이 잠깐 고민하는 듯싶더니 진지한 표정으로 물었다.“내가 그 석 달을 버틸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요?”방민아를 속내를 들켜도 전혀 난감한 기색이 없었고 그저 귀를 만지작거리며 이렇게 말했다.“왜 못 버텨요? 버텨야죠.”“사실 남자는 달래기 쉬워요. 오빠는 조금만 잘해주고 약한 모습을 보이면 난폭하게 구는 일 없을 거예요.”소원이 고개를 저었다.“됐어요. 방민기 씨든 방민아 씨든 더는 못 믿겠어요. 꿍꿍이가 좀 많아야 믿죠.”“당신 정말...”방민아는가 욕설을 퍼부으려다 매서운 눈빛으로 이렇게 말했다.“평생 아이 볼 생각하지 마요.”“오늘 꼭 아이를 봐야겠다면요?”소원이 말했다.“웃겨라. 무슨 자격으로요?”방민아는 소원이 주제도 모르고 설치는 그게 그저 우스울 뿐이었다. 여기서 아이를 만나고 싶다고 아우성이라니, 꿈꾸는 게 아닌지 의심 갈 정도였다.
방민아는 소원을 보고 화들짝 놀랐다.“당신이 왜 여기에.”어젯밤 방민기에게 호되게 당했을 사람이 멀쩡하게 이곳에 서 있는 게 이상했다.방민아가 상황을 전해 듣지 못한 건 방민기가 아직 깨어나지 못해 방민아의 꼬투리를 잡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소원이 아무리 모자와 마스크로 가려도 어젯밤 방민기에게 당한 흔적은 지울 수 없었다.멍이 든 걸 봐서는 당해도 호되게 당했을 거라는 생각에 방민아의 마음이 조금 편해졌다.“방민아 씨.”소원이 덤덤하게 말했다. 방민아를 또 만나고 싶지는 않기에 또 만났네요 같은 인사말은 생략하고 안으로 들어가려는데 방민아가 소원의 팔목을 덥석 잡았다.“어딜 들어가요.”방민아도 온 지 얼마 되지 않았지만 대문을 여는 카드가 먹통이라 들어가지 못하고 서 있었다. 육경한에게 전화하려는데 미처 전화하기도 전에 소원을 발견한 방민아는 마치 이곳의 여주인이라도 된 것처럼 기세등등해서 말했다.“들어가서 유진이 좀 보고 올게요.”소원이 미간을 찌푸리며 방민아의 손을 뿌리쳤다.“누가 보여준대요?”방민아가 언짢은 표정으로 말했지만 한편으로는 오늘따라 갑자기 이상하게 나오는 소원이 신기했다.‘여기가 언제 소원이 들어가고 싶으면 들어가는 곳이 됐지?’소원이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어제 하라는 대로 하면 유진이 보여준다면서요.”방민아가 그런 소원을 째려보며 말했다.“내가 그런 말을 했다고요?”소원이 말했다.“네. 했어요. 그 어떤 일을 당해도 가만히만 있으면 유진이 보여준다고요.”방민아가 입을 가리고 웃었다.“소원 씨, 어디 아픈 거 아니죠? 왜 갑자기 헛소리하고 그래요?”소원이 대꾸했다.“열은 안 나는데? 정말 모르겠어요?”방민아의 태도는 소원이 예상했던 것과 똑같았다. 방민아는 애초부터 아이를 보여줄 생각이 없었고 그저 소원을 모욕하고 망가트리기 위해 유진을 앞세웠을 뿐이다.분명 방민아에게 피해 가는 일이 없었고 육경한을 보면 멀리 피해 다녔지만 방민아는 그래도 소원을 놓아주려 하지 않았다. 애초부터 단순
통화를 마친 여자가 갑자기 남자를 끌어안고 뽀뽀하더니 흥분하며 말했다.“여보, 아까 어떤 사람이 전화해서 우리가 대상에 당첨됐다며 세계 일주 비용을 협찬해 주겠대.”“정말?”“정말이야. 미우 그룹에서 나왔다고 하는데 검색해 봤더니 정규적인 대기업이더라고.”소원이 놀란 표정으로 옆에 선 육경한을 바라보자 육경한은 그런 소원을 힐끔 쳐다보며 이렇게 말했다.“잘생겼다고 칭찬해 주는데 어떡해.”소원은 할 말을 잃었다. 서늘하던 아까와는 달리 딴사람이 된 육경한은 어딘가 오만해 보이기도 했다.운전기사가 시동을 걸자 소원은 이 차가 어디로 가는지 몰라 대뜸 이렇게 물었다.“이제 유진이 보러 가도 돼요?”육경한이 고개를 끄덕였다.“응. 앞으로 거기가 우리 집이 될 거야.”말 한마디에 육경한은 소원의 향후 생활을 결정해 버렸다. 그는 여전히 다른 사람을 조종하기 좋아했고 아까 봤던 모습은 그저 착각이었다.소원은 곧 유진을 만날 수 있다는 생각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아줌마가 왜 병에 들었는지도 알아내야 했다.차 안.육경한이 입을 열었다.“백업 동영상은 내게 맡겨.”육경한이 토론이 아닌 명령을 내리자 소원이 멈칫했다.“왜 너한테 맡겨야 하는데?”소원은 꿍꿍이 많은 방민아가 아줌마에게 무슨 짓을 했는지 알아내지도 못했는데 이렇게 쉽게 빠져나가게 둘 리가 없었다. 일단 착한 척하기 좋아하는 방민아의 모든 이가 보는 앞에서 벗겨내 더는 착한 척할 수 없게 만들어줄 생각이었다.육경한이 말했다.“방씨 가문을 상대하는 데 영상을 쓸 필요는 없어. 아직 육씨 가문과 협력한 프로젝트도 있고. 이때 영상을 터트리면 다 같이 죽는 거나 마찬가지야. 그러니 그 동영상은 절대 유포할 수 없어.”육경한은 야심을 그대로 드러냈다. 그는 여전히 잇속만 챙기는 약삭빠른 장사꾼이었다.소원은 두 사람이 비록 거래했지만 그녀가 방씨 가문에 해를 입히는 건 육경한도 두고 보지 않을 거라는 걸 알고 있었다.방민아는 결국 육경한의 아내가 되지 못했지만 뼈는 끊어져
여자가 손바닥을 내밀며 말했다.“언니, 남자 친구 하나 골라줘 봐요.”소원은 성화에 못 이겨 아무거나 육경한에게 집어줬다. 육경한은 사탕을 받자마자 껍질을 까서 입에 넣었고 소원도 여자가 보는 앞에서 초콜릿을 까서 입에 넣었다.초콜릿은 그렇게 달지 않고 살짝 썼지만 천천히 달아지면서 고소해지는 게 맛있긴 했다.여자가 초롱초롱한 눈빛으로 소원을 바라봤다.“어때요? 맛있죠?”“네. 맛있어요.”소원이 말했다.“내 말이 맞죠?”여자가 웃으며 말했다.“맛을 몰라도 공부를 했으니 잘못 고르진 않았을 거예요.”소원은 여자의 말에 호기심이 생겼다.“미각에 무슨 문제가 있어요?”여자가 입을 열었다.“아파서 항암 치료를 여러 번 했더니 뭘 먹어도 맛이 안 느껴지네요.”이 말에 옆에서 지켜보던 남자의 얼굴이 살짝 어두워졌다.항암 치료를 한다는 건 불치병에 걸렸다는 말과 다름없었기에 소원이 멈칫하더니 말했다.“미안해요. 몰랐어요...”여자가 웃으며 말했다.“괜찮아요. 언니. 아픈지 너무 오래돼서 이미 적응했어요. 남편과 등기하고 세계 일주할 생각만 하면 너무 들뜨는데요?”남자도 한마디 거들었다.“말 잘 듣고 약 제때 챙겨 먹어야 데리고 갈 거야. 아니면 아무 데도 못 가.”여자가 입을 삐쭉거리며 말했다.“흥. 내가 언제 약 빼먹은 적 있어?”남자가 말했다.“전에 몰래 던지는 거 봤거든?”“그건 예전이잖아. 지금은 미각을 잃어서 매번 꼬박꼬박 먹어도 맛을 몰라서 딱히 쓰지도 않아.”여자의 말에 남자가 대꾸 대신 씁쓸한 표정을 짓자 여자가 웃으며 말했다.“벌써 깨갱이야? 말발 다 떨어졌네.”소원은 어려운 상황에서도 즐거움을 잃지 않는 여자의 성격에 깊이 끌렸다. 이렇게 낙관적인 사람은 처음이었다.두 사람은 고개를 숙인 채 이런저런 대화를 나눴다. 서로를 만난 게 제일 큰 행운인 두 사람은 앞으로 그 어떤 역경이 있든 꿋꿋이 헤쳐나갈 용기가 있어 보였다.그때 육경한이 자리에서 일어났다.“가자. 이제 우리 차례야.”소원은 그제야
“언니, 정말 너무 예쁘다. 연예인이에요?”여자가 초롱초롱한 눈빛으로 말했다.소원은 살짝 난감했다. 얼굴에 아직 상처가 있었지만 벙거지 모자와 마스크에 가려져 두눈만 보였다. 그래도 눈이 예쁘고 아우라가 남달랐기에 살짝만 꾸미자 연예인이 몰래 산부인과에 들른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나 연예인 아니야. 그저 일반인이야.”소원이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딱 봐도 일반인이 아닌데. 남편이 너무 잘생겼잖아요. 대박. 나 현실에서 이렇게 잘생긴 남자 본 건 처음이에요.”칭찬을 아끼지 않는 여자를 보며 얼음 같던 남자의 얼굴이 사르르 녹았다. 육경한은 보기 드물게 여자에게 먼저 인사했다.“안녕.”잘생겼다고 칭찬해서가 아니라 남편이라는 말이 너무 듣기 좋았기 때문이다. 여자가 잘생긴 남자를 보며 어쩔 바를 몰라 얼굴을 빨개지자 여자의 남편이 바로 질투했다.“작작 해. 외모지상주의야. 침 나오겠다.”하지만 청년은 여자를 욕하는 게 아니라 그저 비아냥댈 뿐이었다. 여자는 남자의 귀띔에 정신을 차리고 퉁명스럽게 말했다.“내가 잘생긴 남자만 보면 얼굴 빨개지는 거 알잖아.”여자가 고개를 돌려 소원에게 웃었다.“언니, 화내지 마요. 그저 남편이 너무 잘생겨서 그랬을 뿐이지 다른 뜻은 없어요.”여자의 남편도 따라서 해명했다.“맞아요. 신경 쓰지 마세요. 와이프가 외모지상주의인데 가끔 티브이에 잘생긴 남자가 나오면 침도 흘리고 그래요. 오랜만에 옆에서 이렇게 잘생긴 남자를 보니까 감정 조절을 잘못했네요.”“아니요. 화 안 났어요. 게다가 이 사람은 내 남편이 아니에요.”그러니 소원이 화날 것도 없었다. 소원은 원래도 다른 사람이 육경한을 보든지 말든지 상관없었지만 이 말에 분위기가 딱딱해지고 말았다.여기에 줄까지 섰으면서 남편인지 아닌지 다투는 건 별로 의미가 없었다. 아무튼 이따가 다 남편이 될 것이니 말이다. 다만 소원이 강조하자 어딘가 살짝 이상했다.육경한의 안색이 굳어졌지만 말이 많은 사람이 아니었기에 설명할 리도 없었다.“여자가 웃으며 말했
“내가 이미 준비해 뒀어.”육경한이 말했다.이내 그는 신분증을 꺼내 들었고 소원이 그것을 낚아채서 펼쳐 보았다.그 안에는 소원의 신분증 사본은 물론 그녀 어머니의 주민등록증 사본도 포함되어 있었다.육경한은 정말로 손이 닿지 않는 곳이 없는 사람이었다.‘엄마 주민등록증 사본 복원해 놓을 줄이야...’이쯤 되니 소원은 이해할 수 없었다.이 정도로 능력이 있다면 굳이 소원이 나설 필요도 없이 육경한은 두 사람의 혼인신고를 처리할 수 있었을 것이다.‘왜 꼭 같이 구청까지 와야 했지? 서로를 사랑하는 연인도 아닌데... 이런 곳에 와서 애정을 가장하는 게 정말 불편하지도 않나?’소원은 냉랭하게 말했다.“이 정도는 뭐든 할 수 있으면서... 여기 오는 건 쓸데없는 일이었잖아.”“쓸데없는 일이 아니지.”육경한은 그녀의 손을 꽉 잡으며 말했다.“이 일은 직접 해야 의미가 있잖아. 다른 사람한테 맡기고 싶지 않아.”그의 말에 소원은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그녀에게 이렇게 정상적으로 말을 걸고 날카롭게 대립하지 않는 육경한은 너무 낯설었다.게다가 그의 말투에는 어딘가 소원을 달래려는 뉘앙스까지 숨어 있었다.소원은 곧바로 경계심을 느끼며 구청 안으로 들어가는 동안 한 발짝이라도 더 떨어지려 애썼다.육경한은 이런 그녀의 작은 몸짓을 눈치챘지만 화를 내기는커녕 입가에 미소를 띠며 소원의 그런 모습마저 귀엽게 느껴졌다.이른 아침이라 구청은 막 문을 연 상태였다.소원은 육경한이 분명 미리 사람을 준비시켜 VIP 통로라도 열어놓았을 거라고 생각했다.그래야 그녀도 혼인신고를 빨리 끝내고 떠날 수 있을 테니 말이다.하지만 남자는 태연하게 뒤에서 걸어오며 손에 들린 번호표를 보여주었다.23번.소원은 말문이 막혔다.직접 하겠다던 육경한의 말이 허언은 아니었던 것이다.그는 정말로 줄을 서서 기다리려 하고 있었다.문이 열린 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도 벌써 23쌍의 커플이 앞서 대기하고 있었다.소원은 이해가 되지 않았다.‘오늘 무슨 특별한 날이라도 되나
그 감정은 마치 황량한 사막에서 자라난 초록빛 잔디처럼 거칠고 끈질기게 뻗어 나갔다.그는 냉정하기 그지없는 그녀의 내면을 억지로 찢어놓으며 모습을 드러냈다.하지만 소원은 곧 그 감정을 냉정하게 끊어냈다.애초에 있어서는 안 될 감정이었다.소원과 육경한 사이에는 이미 어떤 가능성도 남아 있지 않았기에 더는 이런 부질없는 감정이 그녀를 흔들거나 방해해서는 안 되었다.오랜 침묵이 이어지면서 남자의 모든 희망은 서서히 사라졌다.그는 갑자기 웃음을 터뜨리며 말했다.“역겹다고 해도 평생 다시는 만나지 못하는 것보다는 낫겠지. 소원, 그 말 받아줄게.”소원은 그의 말뜻을 이해할 수 없었지만 육경한이 다시 말했다.“오늘 차에서 내리는 순간 난 서씨 가문을 상대로 모든 수단을 동원할 거야. 너 그 남자 놓지 못한다며?”그의 눈빛에는 진한 증오가 담겨 있었고 한 마디 한 마디가 얼음처럼 차가웠다.“내가 그 사람 없애버릴 거야.”“뭐라고?”화들짝 놀란 소원은 고개를 돌리며 손에 힘을 주었다. 어찌나 힘을 주었는지 손등이 하얗게 질릴 정도였다.“나한테는 그럴 능력이 있으니까.”육경한은 무표정하게 말했다.“그리고 너도 알잖아. 네가 어제 한 일은 이미 방씨 가문에 알려졌을 거야. 내 보호 없이는 방민아나 방민기 중 누구도 널 가만두지 않을걸.”그의 말은 소원의 속을 꿰뚫고 있었다.정확히 그녀가 약해질 수밖에 없는 부분을 찌르고 있는 것이었다.“지금 나와의 거래를 포기한다면 너뿐만 아니라 네 주변 사람들까지 위험해질 거야. 네 친구 영숙이라는 사람도 포함해서 말이야.”육경한의 말은 틀리지 않았다.소원이 차에서 내리는 순간, 방민아는 분명히 그녀를 죽도록 미워하게 될 것이다.그리고 영숙은 그녀의 분노를 가장 먼저 받을 대상이 될 것이다.소원은 단순히 자신만이 아닌 그녀를 도와준 영숙의 안전도 무시할 수 없었다.육경한은 고개를 숙이며 그녀를 바라보았다.“소원, 선택해야 해. 뭘 선택해야 할지 잘 알고 있을 거야.”소원은 침묵했다.그들의 내면이
차에서 내리려던 소원이 동작이 순간 멈췄다.육경한의 차가운 목소리가 얇은 입술을 통해 들려왔다.“소원, 이 차에서 내린다면 우리의 거래는 끝나는 거야. 내가 말한 대로 기회 없다고 했으면 진짜로 없는 거라고.”그는 이미 그녀의 심리를 꿰뚫어 본 듯 냉담하게 덧붙였다.“억지로 하라는 건 아니야. 잘 생각해 봐.”움직일 수도 없이 소원은 온몸이 굳어버렸다. 마치 돌로 변해버린 것 같았다.차에서 내린다는 게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 몰랐지만 육경한과 혼인신고서를 작성하겠다는 건 그야말로 터무니없는 농담이었다.‘내가 어떻게 육경한이랑 결혼을 해?’그들은 원수였다.비록 유진이라는 아이가 둘 사이를 연결해주고 있다 해도, 비록 그들이 지금 유진이의 혈연관계로 묶여 있다 해도, 그들 사이에 깊이 새겨진 사랑과 증오의 복잡한 감정은 사라지지 않았다.소원은 자신이 평생 이 남자와 부부가 되는 건 불가능하며 그래서는 안 된다고 확신했다.이 문제는 더 생각할 필요조차 없었다. 단 1초라도 더 고민하는 것은 돌아가신 아버지에 대한 불경이었다.아버지가 왜 스스로 목숨을 끊었는지, 그를 죽음으로 몰아넣은 사람이 누구인지, 그건 명백한 사실이었다. 변명할 여지조차 없는 일이었다.갑자기 숨이 가빠지더니 소원은 문손잡이에 손을 올려놓은 채 말했다.“난 이미 충분히 생각했어. 당신이랑 결혼하는 일은 절대 없을 거야, 육경한.”문이 열렸다.소원이 몸을 낮춰 차에서 내리려는 순간, 등 뒤에서 남자의 서늘한 목소리가 들려왔다.“그러니까 내 애인이 되어 내 침대에서 잘 수는 있지만 내 가족의 일원이 되는 건 못 받아들이겠다는 거야?”소원의 몸이 미세하게 떨렸다.이 남자는 그녀의 마음속 깊은 곳에 숨겨진 생각을 간파한 것이었다.이 거래는 어디까지나 임시방편이었다. 유진이와 서현재를 보호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선택한 타협이었다.지금 당장은 더 나은 방법이 없었고 유진이의 안전이 위협받고 있는 상황에서 그녀는 어쩔 수 없이 물러서야만 했다.하지만 이 긴급한 위기가 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