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혜인은 가만히 앉아있을 수가 없어 계속해서 문 쪽을 바라보며 이준혁이 언제 올지 기다리고 있었다.그러나 이 기다림은 밤새도록 계속되었고 결국 이준혁은 끝내 나타나지 않았다.다른 사람들의 말을 통해 윤혜인은 오늘 이준혁은 연회에 참석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대신 이선 그룹에서는 다른 한 고위 임원을 보냈다고 한다.그리고 그 고위 임원을 연회장까지 바래다준 사람은 주훈이었다.윤혜인은 주훈을 보자마자 곧바로 다가가 그를 불러 세웠다.“주 비서님, 준혁 씨 어디 있어요?”주훈은 갑작스러운 질문에 당황하며 바로 대답했다.“회사에 계십니다.”“그럼 별일 없는 거예요?”그러자 주훈은 머리를 긁적였다.“꼭 별일이 없는 건 아니고 회사에도 일이 있어서요.”“준혁 씨가 안 온 이유가 설마 제가 여기 있는 걸 알아서 그런 거예요?”갑작스러운 윤혜인의 물음에 주훈의 눈빛이 잠시 흔들리더니 곧 그는 직업적인 태도로 말했다.“설마요...”그 말에 윤혜인은 눈치챘다. 그녀는 바보가 아니었으니 말이다.‘정말 내가 온다는 걸 알고 일부러 안 왔다는 거야? 나를 이렇게까지 피하는 이유가 뭐지?’윤혜인의 가슴이 아릿하게 아파왔다. 하지만 그녀는 힘겹게 그 감정을 억누르며 주훈을 곤란하게 하지 않기로 했다.“가서 일 보세요.”그러자 주훈은 마치 사면이라도 받은 것처럼 즉시 자리를 떠났다.윤혜인은 더 이상 만찬 자리에 있을 수 없었는지라 풀이 죽은 채 차로 돌아왔다.마음도 아프고 발도 아프고 모든 것이 아프게 느껴졌다.그리고 생각할수록 오늘은 무슨 일이 있어도 그 남자를 만나야겠다는 결심이 들었다.‘죽는 한이 있더라도 꼭 그 이유를 알아봐야겠어.’그래서 그녀는 곧바로 행동에 나섰다.가기 전에, 윤혜인은 운전 기사에게 술 한 잔을 받아 자신의 몸에 뿌리고 볼에 약간의 홍조를 더했다.마치 약간 취한 듯한 모습을 연출하기 위해서였다.이선 그룹 건물 앞에 도착했을 때, 그녀는 자신의 퇴로를 끊기 위해 운전 기사에게 돌아가라고 지시했다.그러자 운
남자는 윤혜인의 손길에 순간 멈칫했지만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윤혜인은 스스로 머리를 그의 가슴 쪽으로 파고들었고 익숙한 삼나무 향기가 마음을 편안하게 해주었다.하지만 뒤이어 그녀의 귓가에는 이준혁의 차가운 목소리가 들려왔다.“일어나.”그 순간, 윤혜인은 깜짝 놀라며 잠에서 깨어났다.‘현실을 꿈으로 착각한 걸까...’몸이 순간적으로 경직되었지만 윤혜인은 곧 자신이 이곳에 온 목적을 떠올렸다.바로 이준혁과의 관계를 예전으로 되돌리기 위해서였다.게다가 지금 그녀는 취한 척하고 있으니 이 기회를 그냥 흘려보내고 싶지 않았다.모든 생각을 끝마치자 윤혜인의 행동은 더욱 대담해졌다.윤혜인은 이준혁의 목을 더욱 꽉 끌어안고 반쯤 취한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안 일어날래요. 싫어요. 당신이...”그녀는 더욱 도발적으로 행동하며 하얀 다리로 이준혁의 다리를 감싸며 유혹하듯 말했다.“당신이 날 안아 일으켜주면 모를까.”이준혁은 입술을 꽉 다물고 오랫동안 그녀를 바라보았다. 깊은 눈동자 속에서 마치 폭풍이 치는 듯한 격정이 느껴졌다.술이 주는 독특한 분위기 때문이었을까, 윤혜인은 가슴이 두근거리기 시작했고 점점 더 진짜로 취한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그렇지 않았다면 어떻게 이준혁이 꿈속에 나타나 윤혜인을 이토록 혼란스럽게 만들 수 있었을까?”그녀는 얼마나 오랜 시간 동안 이 단단한 가슴을 느껴본 적이 없었던가, 또 얼마나 오랜만에 이준혁을 제대로 안아본 것인가. 그 순간, 윤혜인은 자신의 꿈을 이루게 해준 하늘에 무한한 감사함을 느꼈다.이준혁이 다시 돌아와 줬다는 것만으로도 비록 시련이 있더라도 모두가 감사할 일이었다. 그는 여전히 살아 있었으니 말이다.“준혁 씨, 돌아와 줘서 고마워요.”윤혜인은 지금 당장이라도 이준혁을 껴안고 펑펑 울고 싶었다. 그에게 얼마나 그리웠는지, 얼마나 보고 싶었는지 다 털어놓고 싶었다.그러나 남자는 냉정하고 날카로운 목소리로 말했다.“연기 그만하고 일어나.”마치 얼음물을 얼굴에 끼얹은 것처럼 윤혜인의
이준혁의 입술에는 약간의 피가 맺혀 있었고 아까처럼 차갑지는 않지만 오히려 더 사람을 끌어당기는 느낌이 들었다.윤혜인은 주저하지 않고 그와 눈을 마주쳤다. 한 발짝도 물러서지 않고 말이다.“삼십 초.”“준혁 씨는 내게 삼십초를 줬지만 날 밀어내지 않았어요.”윤혜인은 계속해서 말을 이어갔다.“가슴에 손을 얹고 생각해봐요. 정말 그 마음속에 내가 없어요? 날 싫어해요? 정말 나를 싫어한다면 어떻게 그렇게 오랫동안 참았겠어요? 싫어하는 사람은 삼 초도 길다고 생각할 텐데 어떻게 상대의 숨결조차 받아들일 수 있겠어요?”이준혁은 입술을 꽉 다문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윤혜인은 주먹을 꽉 쥐며 스스로에게 용기를 북돋아 주었다.“준혁 씨가 지금 무슨 어려움을 겪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나를 밀어내는 건 너무 성급한 판단 아닐까요? 내가 반드시 당신의 보호가 필요한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거예요? 우리는 너무나도 많은 일을 겪었고 보통 사람들은 평생 겪지 못할 시련을 겪었어요. 우리의 의지는 그 누구보다도 강해야 하는 거 아닌가요? 나 대신 스스로 판단하지 말아요. 나는 어떤 일이든 감당할 수 있어요.”윤혜인은 이준혁의 차가운 표정을 무시하고 그의 손을 꼭 붙잡았다.“준혁 씨, 우리 생사를 함께 넘었잖아요. 더 이상 못 넘을 일이 뭐가 있겠어요?”이 말을 듣고 이준혁의 무표정했던 얼굴에 잠시 미세한 변화가 일어났지만 그 표정은 여전히 냉소적이고 차가웠다.눈썹을 살짝 찌푸리며 그가 말했다.“혜인아, 너도 나름 위치가 있는 사람인데 체면이라는 걸 좀 지켜야 하지 않겠어? 도대체 자존심은 어디다 두고 온 거야?”그 말은 윤혜인에게 너무나도 가혹했다.윤혜인을 잘 아는 사람이라면 그녀가 외모와는 달리 자존심이 강하고 체면을 가장 중요시 여긴다는 것을 알고 있을 것이다.만약 이준혁이 아니었다면 윤혜인은 벌써 등을 돌리고 떠났을 것이다. 하지만 이준혁이 폭탄을 가득 실은 차를 운전하며 목숨을 걸었던 그 모습을 떠올리면 그녀는 도저히 떠날 수 없었다.그녀는 자
윤혜인은 벌떡 일어나며 물었다.“왜 산에서 나 대신 칼을 막았죠? 왜 산사태가 일어났을 때 절벽 아래로 뛰어들어 나와 함께 죽으려고 했던 거예요?”그녀는 이준혁의 뒷모습을 향해 절규하듯 소리쳤다.“그게 사랑이 아니면 도대체 뭐예요! 도대체 뭐냐고요!”윤혜인은 마치 이성을 잃은 듯 필사적으로 외쳤다. 하지만 그녀는 개의치 않았다.이준혁이 여러 번 목숨을 걸고 윤혜인을 구하지 않았다면 그녀가 어떻게 다시 여기 설 수 있는 용기를 얻을 수 있었을까? 주변은 죽은 듯이 고요했다.오랜 시간이 지난 후, 이준혁은 마침내 입을 열었다.“널 사랑할 때는 당연히 너를 감동시키고 싶었지. 하지만 이제는...”앞에 서 있는 윤혜인의 창백해지는 얼굴을 아랑곳하지 않은 채 그는 무자비하게 말했다.“이제는 사랑하지 않아...”가벼운 몇 글자가 모든 것을 부정했다.복잡한 이유는 없었다. 단지 더 이상 사랑하지 않아서였다.“지나친 집착은 사람을 질리게 할 뿐이야. 스스로 잘 판단하길 바라.”그 말을 남기고 이준혁은 더 이상 주저하지 않고 휴게실을 떠났다.문이 ‘쿵’ 하는 소리와 함께 다시 닫혔다.공허한 방안은 조명마저도 차갑게 느껴졌고 윤혜인은 소파의 한구석에 몸을 웅크렸지만 이미 차갑게 식어버린 마음은 도무지 따뜻해지지 않았다.이준혁은 윤혜인을 그냥 두고 떠나버렸다. 심지어 그녀가 어떻게 집에 돌아갈지조차 신경 쓰지 않았다.‘정말 내게 관심이 없어진 거야?’반 시간 후, 윤혜인은 계단을 내려갔다.그녀는 지하 주차장에서 들어왔기 때문에 원래대로 그곳을 통해 나갈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지하 주차장에는 더 이상 윤혜인을 기다리고 있는 차가 없었고 결국 그녀는 혼자 터벅터벅 주차장 출구까지 걸어갔다.밤공기는 물처럼 차가웠고 설상가상으로 비까지 내리고 있었다.윤혜인은 우산도 쓰지 않고 차를 부르는 것도 잊어버린 채, 그저 무작정 빗속을 걸었다.차가운 습기가 발끝에서부터 머리끝까지 스며들어 그녀를 오싹하게 만들었다.그때 갑자기 귀를 찢는 듯한 ‘빵빵’
모르는 사람일지라도 한번 잘못 보이면 사소한 일로 인생이 망가질 수 있다.보행자에게 양보하지 않은 죄로 감옥에 갈 수도 있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남은 인생을 후회해도 소용없을 것이다.잠시 침묵이 흘렀다가 이준혁은 다시 입을 열었다.“가서 우산 건네줘.”비서가 잠시 멈칫했다.‘비 맞으면서 그렇게 오랫동안 서 있었는데 인제 와서 우산을 주라고? 고생할 거 다 시키고 나서 이제야 구해주는 셈 아닌가...’하지만 상사의 결정에 대해 왈가왈부할 수 없는 일이기에 그는 고개를 끄덕이고 서둘러 우산을 챙기러 갔다.이준혁은 여전히 비 내리는 밤하늘 아래서 꼿꼿이 서 있었다.그가 움직이지 않은 이유는 단순히 움직이기 싫어서가 아니었다. 오랫동안 서 있으면 몸이 점점 굳어가며 마치 기계처럼 멈춰버리기 때문이다.하지만 이 순간도 그는 오로지 의지로 버티고 있었다.그에게는 해야 할 일이 너무나 많았다.시간이 부족했고 이것이 윤혜인에게 줄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이라고 생각했다.비도 맞고 고생도 해봤으니 이제 더 이상 어리석은 행동은 하지 말길 바랄 뿐이었다.윤혜인은 한 친절한 행인에게서 우산을 건네받고 나서야 비로소 몸이 조금씩 따뜻해지기 시작했다.그녀는 자신의 몸을 해치려는 어리석은 짓을 하지 않을 정도로 충분히 현명했다.분풀이는 충분히 했고 이제는 더 이상 혼자만이 아니기에 윤혜인은 자신을 지켜야 한다는 책임감을 느끼고 있었다.곧 윤혜인은 운전 기사에게 전화를 걸었지만 그녀를 데리러 온 사람은 뜻밖에도 곽경천이었다. 윤혜인을 기다리다 그녀가 나타나지 않자 걱정이 된 곽경천이 연락을 하려던 찰나, 운전기사가 윤혜인에게서 전화를 받았다.온몸이 젖어 있는 윤혜인의 모습을 본 곽경천은 마음이 아파 서둘러 자신의 재킷을 벗어 그녀에게 둘러주었다.“혜인아, 왜 비를 맞고 있었어? 운전기사는 왜 데려오지 않았고?”그 말에 코끝이 찡해진 윤혜인은 차에 앉아 몸이 조금씩 따뜻해지자 조용히 말했다. “오빠, 운전 기사님 탓하지 마. 내가 먼저 돌려보냈어.”곽
“엄마에 대한 소식이 있다고?”“응. 외국 출신의 한 아주머니가 7~8년 전에 한 가정집에서 임시 가정부로 일할 때 어머니를 본 적이 있다고 해. 그 아주머니가 말한 집을 확인해 봤는데 그 집 사람들은 이미 이사를 갔더라. 시간이 너무 오래돼서 어디로 이사 갔는지도 알 수 없었지만 다른 나라로 간 것 같다고들 해.”아직 어머니를 찾지는 못했지만 이 정도로도 큰 진전이었다.이전에는 윤아름이 살아 있는지조차 확신하지 못했으니 말이다.그 아주머니는 윤아름이 ‘잠자는 미녀' 같았다고 말했지만 곽경천은 윤혜인이 걱정할까 봐 그 부분은 말하지 않고 좋은 소식만 전했다.“정말 다행이야, 오빠.”눈가는 여전히 빨갰지만 윤혜인의 기분은 어느 정도 나아진 듯했다.‘확실히... 엄마는 아직 세상에 살아 계신 거야.’곽경천은 윤혜인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안심시켰다.“걱정하지 마. 꼭 어머니 찾을 거야.”30분쯤 지나서야 윤혜인은 집에 도착했다. 따뜻한 물로 목욕을 한 후, 그녀는 피곤한 몸을 이끌고 잠에 들었다.잠을 자고 나면 내일은 또 새로운 하루가 될 것이다....소원은 육경한이 구속된 사이에 회사의 주도권을 다시 손에 넣고 있었다.회사는 원래부터 한이 그룹과 깊은 연관이 있는 사업을 하고 있었고 이전에 소진용이 맡았던 에너지 프로젝트는 실패로 끝났지만 이제 소원은 새로운 방식으로 그 프로젝트를 되살리고 있었다.소진용이 받았던 오명을 씻으려면 육경한이 직접 인정하지 않는 한 어려울 것이었다. 하지만 오명을 씻어낸다 해도 과거의 한이 그룹은 다시 돌아올 수 없었다.소원도 더 이상 그런 집착을 갖지 않았다. 소진용의 본래 목적은 에너지 산업을 성공적으로 이끌어 많은 사람들에게 이익을 주는 것이었기 때문이다.그녀는 그저 에너지 산업을 잘 이끌어 나가는 것이 아버지의 유언을 이루는 일이라고 생각했다.오늘, 소원은 회사에서 늦게까지 일했고 퇴근하려고 문을 나서던 중 오랫동안 기다리고 있던 서현재를 마주쳤다.그는 카키색 트렌치코트를 입고 있었고 잘생긴 외
길을 가던 중, 서현재가 물었다.“소원 누나, 저녁에 뭐 먹을까요?”“난 아무거나 괜찮아.”소원은 뉴스를 스크롤 하며 무심코 대답했다.그렇게 차는 조용한 한식당 주차장에 들어섰고 그곳은 꽤 아늑해 보였다.자리 잡고 앉자마자 음식이 빠르게 나왔다. 모두 속을 편안하게 해주는 담백한 음식들이었다.서현재가 입을 열었다.“소원 누나, 육경한 건에 대해 알아봤어요. 방씨 가문은 이미 두 번이나 큰 타격을 입었고 이번에 방민기의 일까지 겹치는 바람에 그쪽에서는 자구책으로 육경한을 무너뜨릴 수밖에 없었어요. 이번에는 증거도 충분해서 실수가 없을 거예요.”겉으로 보기에는 그렇게 보일 수도 있지만 육경한이 아직 법적으로 판결을 받지 않은 이상, 소원은 안심할 수 없었다.육경한은 유민 그룹을 거의 3년 만에 모두가 주목하는 위치로 끌어올렸고 위기를 기회로 바꾸는 데 아주 능숙했다.그래서 소원은 여전히 유진이를 공공연히 데리고 다니지 않았다. 육경한이 어떤 반격을 준비하고 있을지 몰랐기 때문이다.첫 번째 재판 날짜가 다가올수록 소원의 불안감도 점점 커져갔다.“이 기간 동안 방씨 가문을 계속 주시해야 해.”소원은 서현재에게 신중하게 당부했다.원래 그녀는 서현재를 이 복잡한 상황에 끌어들이고 싶지 않았지만 그가 이미 서씨 가문과 육씨 가문의 불법적인 거래를 증거로 제출한 상황이었기 때문에 이제는 물러설 수 없었다.이제 그들이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은 자신들을 지키는 것이었다.“네. 사람들을 붙여서 주시하고 있어요.”특별한 날인만큼 소원은 오늘 무거운 이야기는 그만하려고 했다.그래서 그녀는 가벼운 목소리로 물었다.“요즘 어르신께서 너한테 선자리 보러 다니라고 안 하셔?”“몇 번 봤어요.”서현재가 대답했다.“안 그러면 아버지가 화를 내셔서요.”소원은 그의 표정을 보고 상황을 이해했다.“다 잘 안됐구나?”그녀는 그를 위로하며 말했다.“너도 이제 적당한 사람을 찾아보는 게 좋을 것 같아. 나처럼 되지 말고.”소원은 한 번 사랑에 깊이 상처를
소원은 ‘사랑’이라는 말을 듣자마자 속이 울렁거렸다.과거에 그런 사람을 좋아했던 자신에 대한 부끄러움과 역겨움이 몰려왔다.그녀의 몸조차도 그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 같았다.서현재는 소원의 창백한 얼굴을 보며 핸들을 살짝 움켜쥐고 말했다.“됐어요. 그건 중요하지 않아요.”서현재는 속으로 생각했다.그녀가 육경한을 사랑하든 사랑하지 않든 그것은 정말 중요하지 않은 문제였다.진정한 사랑은 포용하고 받아들이는 것이기에 소원이 서현재를 좋아하지 않는다고 해서 그의 짝사랑은 멈추지는 않을 것이었다.그래서 서현재는 그다지 신경 쓰지 않았다.침을 꿀꺽 삼키며 서현재가 한마디 했다.“들어가요. 바람이 차요.”말을 마치고 그는 곧장 시동을 걸었다. 하지만 윙윙거리는 소리 속에서 소원이 조용히 말했다.“사랑하지 않아.”주변은 엔진 소리 외에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밤바람이 살며시 불어와 은은한 조명이 소원의 얼굴에 쏟아졌다.그녀의 눈동자는 슬픔을 품고 있지만 겉으로 보기에 소원은 여전히 젊고 아름다웠다.서현재는 붉은 입술을 살짝 다물고 말했다.“재판이 잘 되길 바랄게요.”몇 초가 흐른 뒤, 소원은 다시 입을 열었다.“현재야, 난 이생에서 더 이상... 사랑하지 않을 거야.”크지는 않았지만 명확하게 들리는 목소리였다. 그 부드러운 음색 속에는 깊은 절망과 슬픔이 담겨 있었다.한때 소원도 사랑을 꿈꾸던 소녀였지만 그 끔찍한 수치와 고통을 겪은 후, 그녀는 사랑하고 사랑받을 능력을 잃어버렸다.심지어 그녀는 한때 자신을 의심하기도 했다. 이런 고통을 겪는 것이 자신이 뭘 잘못해서 그런 것일까 하며 말이다.소원과 육경한은 서로에게 상처를 내는 미친 사람들처럼, 누가 더 깊이 찌를 수 있을지 내기를 하는 것 같았다.육경한은 소원을 놔줄 생각이 없었고 소원 역시 육경한을 용서할 생각이 없었다. 그래서 그들의 끝은 비극으로 마무리될 수밖에 없었다.“괜찮아요.”서현재는 소원을 바라보며 부드럽게 말했다.“소원 누나, 누나가 사랑할 수 없다고
남자는 재밌다는 듯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럼 만약 제가 당신에게 기회를 준다면요?”“무슨 기회요?”진아연은 자신이 누구와 거래하는지 잊지 않고 전전긍긍하며 물었다.남자의 두 눈은 마치 별을 숨긴듯 하였다. 그는 반혹적인 어조로 말했다.“육경한을 죽일 기회를 줄게요. 만약 그 사람을 죽일 수 있으면 저는 당신의 잘못을 추궁하지 않고 평안히 출국할 수 있게 해줄 수 있어요. 진아연 씨, 어떻게 생각해요?”“정말이에요?”진아연은 그의 말을 정말 믿기 어려웠다.제트를 마주할 떄 진아련은 항상 착각에 빠졌다. 사실은 육경한을 죽이는 것보다 제트를 마주하는게 더 어려웠다. 이 두 문제를 함께 놓으면 비교가 될 것이다.왜냐하면 그는 아주 신비하기에 누구도 그의 배경과 내력을 알 수 없어 그와 상대할수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육경한의 약점은 아주 많다. 소원이와 그녀 뱃속에 있는 아이, 그리고 망할 놈 유진이... 심지어 하나하나의 나쁜 계획은 이미 진아연의 마음속에서 형태를 갖추게 되며 단단히 벼르고 있었다.제트는 고개를 끄덕이였다. “물론 정말이에요, 당신이 성공하면 저는 말한 대로 다시는 따지지 않을 것이에요. ”말하는 사이에 남자는 뒤에 쫓아오는 세 대의 차를 가볍게 따돌렸다.이 제트는 마치 세상의 모든 것을 꿰뚫어 보는 사람마냥 무섭기 그지없었다.하지만 진아연의 마음속에 있는 제트는 탁월한 능력이 있어서 그녀가 아무리 숨기려 해도 그의 눈을 피할 수 없어 놀라지 않았다.진아연은 눈앞의 남자를 보면서 자신의 충성심을 알려 주었다.“제트 씨, 안심해요, 저는 반드시 임무를 완수할 거니까. 당신은 저를 죽이지만 않으면 됩니다.”“음, 기대가 되네요.”“...”뒤따라오던 세 대의 차가 앞차를 잃어버린 후, 경비원들은 실시간 정보를 병실의 VIP 라운지에 전달했다.유진의 휴식을 방해하지 않기 위해 남자는 황수진보고 유진이의 휴식에 방해 안 되는 대기실에 오라고 했다.지금 육경한의 안색은 매우 안 좋았다.경호원들이 전송해 오는 화면
남자는 짜증을 내며 말했다.“잡히면 안 된다는 것을 알면서 또 오다니 정말 바보 중의 바보예요! ”“제가 어떻게 알았겠어요, 이곳 경비원은 다른 동네 분들과 다를 줄은, 이곳 경비원은 정말 최고급 경호원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거예요. ”여자가 원망하자 옆에 있던 남자가 말했다. “진아연, 당신은 내가 본 것 중 가장 멍청한 사람인 것 같아요. ”진아연은 순간 자신의 이름을 듣고도 반응하지 못하였다. 하지만, 이 사람은 어떻게 자신의 이름을 알고 있을가 라는 생각에 그녀는 그를 경계하면서 물어봤다.“누구세요? “남자는 침묵하고 대답하지 않았다. 얼굴 가리려고 마스크를 썼지만, 눈빛에 드러나는 냉랭함은 숨길 수 없었다. 진아연은 그의 눈을 바라보다가 문득 무슨 생각이 나서 남자를 바라보며 말했다. “당신... 당신이 바로 제트 씨이세요? ”남자는 그녀를 상대하지도 않고 부인하지 않았지만, 모든 것을 다 설명했다. 진아연은 너무 놀라서 하마터면 바지에 실수까지 할 뻔했다. 누가 알았겠는가, 늑대 무리에서 도망쳐 나와 호랑이 굴에 들어갈 줄을... "제트 씨... 아주 죄송해요, 제가 일부러 여기에 나타난 건 아니예요. 지금 당장 꺼질게요. ”놀라움은 하여금 진아연의 이성을 잃게 만들어 고속도로에서 차 문을 열고 뛰어내릴 생각까지 하였다.제트와 비교했을 때, 지금 뒤에서 자신을 쫓아오는 경비원들이 구세주라고 생각되었다. 진아연은 제트가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사람이라고 느꼈다. 필경 지난번에 그의 손에서 죽을 뻔했으니까... 진아연의 손이 차 문손잡이에 닿았을 때, 차 문이 열리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다.진아연은 절망 속에서 두 손을 비비며 용서를 비는 자세를 취했다. “죄송해요... 제트 씨... 저 진짜 멀리 떠나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거니까 저를 놓아주세요. ”안장이 좁아서 진아연은 무릎을 꿇을 수 없어 두 손을 끊임없이 비비며 아주 작은 희망을 찾고 있었다.남자는 역시 수단과 방법을 숨기고 있었다. 뒤차의 추격을 피하는 동시에
여자가 작은 골목에 들어섰을 때, 경비원이 말했다. “아가씨, 길을 잘못 들었어요. 13동은 저쪽에 있어요.”여자는 할 수 없이 돌아섰는데 경비원이 다시 말했다. “아가씨, 친구 보러 처음 오셨어요?”여자는 이곳의 경비원이 왜 범인을 검문하는 것처럼 자신을 물어보는지 이해 안 가 속으로 욕했다.여자는 대충 대답했다.“네네, 처음 왔어요.”13동 문 앞에 오자 경비원이 직접 603의 초인종을 눌렀고 방울 소리가 울리자, 안에서 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렸다.“여보세요?”경비원은 여자보고 말하라고 고개를 돌렸다.“...”정말 어쩔 수 없어 여자는 갑자기 고개를 숙이며 배를 움켜쥐며 말했다.“아이고, 배가 너무 아파요.”여자가 고통스러운 표정으로 말하자 경비원은 즉시 구급차를 불러주었다. 그리고 경비원이 구급차를 부르는 사이에 여자는 작은 틈을 놓치지 않고 도망쳤다.“거기서요!”경비원은 일반인보다 더 빠르게 반응해 무전기에 대고 빨리 저 검은 옷 입은 여자를 잡으라는 말을 했다.여자는 자신의 눈앞에서 점점 닫혀 가는 문을 보며 당황해 어리둥절했다.“닫지 말아요.”안에서 경비원이 소리를 듣고 여자 쪽으로 돌진해 왔다. 그들은 마치 여기서 여자를 기다리고 있는 듯 일반 경비원보다 속도가 더욱 빨랐다.바로 얼마 전 육씨 그룹이 이곳의 부동산을 사서 전문적인 경호원으로 바꾸어 수상한 인물을 주시하여 남자와 여자를 막론하고 의심이 가는 사람들을 모두 붙잡아 파출소로 보냈다. 여자는 온몸에 힘이 빠진 채 어디로 도망갈지 몰랐다. “저 여자 잡아요.”전에 여자와 얘기하던 경비원이 소리쳤다. 여자가 잡힐 것만 같았는데 갑자기...펑!큰 소리가 나 그곳을 보자 검은색의 지프차 한 대가 돌진해 들어와 난간에 부딪혀 부서지는 것이 보였다.대중들은 모두 이 갑작스러운 변고에 어리둥절하여 반응하지 못했지만, 지프차가 무서운 기세로 달려오자, 경비원들은 모두 재빨리 몸을 피했다.유독 여자만 제자리에서 자신한테 향해 오는 것을 멍하니 보며 어찌할 바
소원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말했다. “마음이 놓이지 않아. 유진이를 보러 갈래”“필요 없어”육경한은 단호히 거절하다 멈칫했다. 그러다 소원이 자신이 아이를 못 본다고 오해 할가봐 천천히 입을 열었다“내가 보고 있을 거니까 걱정하지 마. 일도 다 병원에 가지고 갈 거니까. 넌 휴식이 필요해. 알았어? “유진이 병으로 쓰러진 후 소원은 며칠 동안 거의 밤새 자지 못해 눈 밑에는 이미 짙은 다크써클이 생겼지만 그녀는 억지로 버티는 중이었다.소원은 유진이 자신을 찾지 못할까 봐 걱정되어 여전히 망설이고 있었다. 육경한은 무슨 일이든 다 알고 있는 것처럼 직접 휴대폰 음성 메시지를 소원이에게 들려주었다.“아빠, 엄마 보고 잠자고 있으래요. 만약 성공하지 못하면 저는 삼촌이라고 부를 거예요. ”“엄마보고 많이 휴식하고 있으래요. 그렇지 않으면 뱃속의 아기가 천천히 자랄 거예요. 저는 아기를 빨리 만나고 싶어요. 아기한테 오빠가 지금 힘이 세니까 아기를 업을 수 있다고 알려주고 싶어요. ”캐톡에서 유진이의 까랑까랑한 목소리로 협박한 것을 보니 두 사람의 사이가 아주 좋은 것 같았다. 유진이의 소리는 듣기에도 정신이 맑고 괜찮아 보였다.소원은 그제야 마음이 조금 놓였다. 생각해 보니 자기가 쉬지 않은 것을 아이도 알아차릴 수 있었다. 지금 내가 자신의 건강에 대한 책임은 즉 유진에게 책임을 지고 있는 것이기에 소원이는 말 듣고 차에서 내려서 휴식을 취하러 갔다.네 명의 경호원은 육경한의 분부에 따라 두 명은 아파트 입구에 두 명은 계단 입구를 엄중히 지켜 사수의 파리 한 마리조차 날아 들어갈 수 없었다.육경한의 차가 떠나자 멀지 않은 곳에서 한 여인이 사방을 둘러보며 나타났다.그녀는 벙거지 모자를 쓰고 얼굴을 절반 이상 가린 채 마스크를 쓰고 수상한 모습으로 나타나 동네 경비원의 주의를 불러일으켰다.“저기요, 당신은 어느 건물로 가나요? 여기에서 뭘 하고 있습니까? “여인은 경비원한테 놀라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말했다. “저요... 사람을 찾고
주석훈이 웃으며 말했다.“허허. 몰랐죠? 저 평소엔 되게 허당이에요.”“변호사님 은근히 유머가 넘친다니까요.”주석훈은 언변에 능했기에 단 몇 마디에 간호사가 함박꽃 같은 웃음을 지었다.“저기는 왜 저런 거래요? 아까 길을 잘못 들었는데 막더라고요.”주석훈이 물었다.“아, 저기요.”간호사가 고개도 들지 않고 대답했다.“어떤 여자애 한 명 들어왔는데 가족이 살해당했다나 뭐라나. 실어증에 걸려서 한마디도 못 했는데 평소 믿고 따르던 언니가 와서 입을 열었다고 들었어요.”주석훈이 물었다.“여자애요? 많이 놀랐나 보네요.”“그러게요.”간호사가 대답했다.“가족이 칼 맞고 죽었는데 누가 견딜 수 있겠어요.”“억울한 사건이 얼마나 많은데 범인만 잡아도 다행 아니겠어요?”주석훈이 말했다.“어려울 것 같던데요?”간호사가 말했다.“뭐 유용한 단서가 안 나왔나 보더라고요. 아빠가 여자애를 지키겠다고 같이 들어가지 않아서 아무것도 못 봤대요. 진술한 상황이 경찰이 알고 있는 상황과 별반 다를 게 없어서 경찰도 어떻게 풀어나가야 할지 모르겠다고 한숨만 내쉬더라고요.”간호사가 이렇게 많은 내용을 알 수 있었던 건 안지영의 간호를 책임진 간호사가 바로 그녀였기 때문이다.주석훈이 더 물으려는데 다른 간호사가 들어왔다.“어? 이 간호사 있었네? 저쪽 눈코 뜰 새 없이 바쁘니까 빨리 가봐.”이 간호사가 말했다.“알겠어요. 이것만 마무리하고 갈게요.”치료를 받은 주석훈이 이 간호사에게 고맙다고 말하자 이 간호사가 얼굴을 붉히며 괜찮다고 말했다.주석훈이 멀리 가고 나서야 다른 간호사가 이렇게 말했다.“이 간호사, 아까 저 사람이랑 무슨 얘기 했어? 저 병실에서 나온 얘기는 함부로 하면 안 돼.”“저 별말 안 했어요. 다들 아는 내용 얘기해준 거예요.”이 상황에 자기가 무슨 말을 했는지 인정하면 바보나 다름없었다.“그래. 앞으로 조심해. 자칫하다간 징계 먹을 수도 있어.”나이 많은 간호사가 귀띔했다.“알아요.”이 간호사가 얼른 대답했다.“아
소원이 길게 한숨을 내쉬더니 말했다.“잘됐다. 정말 너무 잘됐어요. 이번엔 하느님이 제 소원을 들어주셨네요.”소원이 주석훈을 바라보며 말했다.“그래도 제가 신세를 졌으니 제 도움이 필요하면 언제든 말해줘요.”감염되지 않았다고 해서 그냥 넘어갈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다. 확률이 반반이라 주석훈도 엄청난 스트레스를 받았을 텐데 주석훈의 마음이 그만큼 단단하니 망정이지 다른 사람 같으면 진작 멘탈이 무너졌을 것이다.소원은 다시 한번 주석훈이 대단하다고 생각했다.“별거 아니니까 마음에 담아두지 마요.”주석훈이 활짝 웃으며 말했다.“소원 씨가 여기 있다는 건 유진도 여기 입원해 있는 건가요?”소원이 고개를 저었다.“유진은 여기 없어요. 아는 동생 좀 보려고 여기 온 거예요.”“동생이요?”주석훈이 물었다.“소원 씨에게 동생이 있는 줄은 몰랐네요. 혹시 괜찮으면 같이 보러 갈까요?”뜬금없는 초대였지만 원래도 열정적인 주석훈이 말하니 뭔가 자연스러워 보이기도 했다. 소원이 별다른 생각 없이 이렇게 말했다.“괜찮아요. 이미 만나고 나오는 길에요. 전에 알고 지내던 동생인데 지금쯤 이미 쉬려고 누웠을 거예요.”“아.”주석훈이 말했다.“그러면 데려다줄까요?”“아니요. 아니요.”소원이 얼른 대답했다.“데려다줄 사람이 있어요.”말이 끝나기 바쁘게 육경한이 다가왔다. 까만 트렌치코트가 육경한의 키를 더 커 보이게 했는데 강압적인 아우라를 뿜어내며 소원에게로 걸어왔다.“가자.”육경한은 옆에 선 주석훈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았지만 육경한과 구면인 주석훈이 먼저 입을 열었다.“대표님.”육경한은 작은 변호사 따윈 상대할 가치가 없다는 것처럼 여전히 대꾸하지 않았다. 이에 난감해진 소원이 분위기를 만회하려고 이렇게 말했다.“나오다가 마침 주 변호사님을 만났어.”육경한이 그제야 옆에 선 주석훈을 보며 ‘응’이라고 대답했다.주석훈은 전혀 난감해하지 않고 웃으며 말했다.“두 분 사이가 좋아 보이네요. 변호사로서 의뢰인과 피고가 잘 지내고 있으니 뿌
제일 의심 가는 사람은 진아연이었다. 안상철은 여자관계가 간단한 편이었고 오랫동안 여자 친구 하나 사귀지 않고 싱글을 유지하면서 모든 심혈을 딸과 어른을 모시는 데 썼다.박혜순도 안상철을 여러 번 타일렀지만 그럴 때마다 안상철은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기 싫다며 거절했다. 그렇다면 싱글인 안상철이 이렇게 격렬하게 다툴 수 있는 사람은 진아연일 가능성이 컸다.경찰 조사가 끝나고 안지영도 검사를 받고 쉬어야 했기에 강민혜는 소원과 함께 병실을 나섰다. 밖으로 나와서야 소원은 자신의 추측을 털어놓았다.소원은 진아연의 힘으로 안상철을 죽이기엔 턱없이 부족하다고 생각했다. 한 방도 아닌 60방이라면 더더욱 말이다. 안상철은 180은 되는 큰 키를 가졌기에 큰 부상을 입어 몸이 허약해 툭하면 쓰러지는 진아연을 이기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게다가 진아연은 얼마 전에 손목을 그으면서 피를 많이 흘렸던 터라 짧은 시간 내에 회복하긴 어려웠다. 그렇다면 이 사건에 진아연 말고도 다른 사람이 개입했다는 의미였다.멀쩡히 살아움직이는 사람을 60번이나 찔렀다는 건 웬만한 정신상태로 저지를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이런 사이코패스가 잡히지 않고 사회에 섞여 들어간다면 악영향이 만만치 않을 것이다.강민혜의 생각도 소원과 별반 다를 게 없었다. 진아연이 입원했을 때 강민혜도 만나본 적이 있어서 알고 있었다. 진아연은 절대 안상철을 쓰러트릴 만큼 강한 사람이 아니었다. 부검 결과를 보면 약물을 사용한 흔적이 없는데 그렇다는 건 안상철을 그렇게 만든 사람이 진아연이 아니라는 의미였다. 다른 건 몰라도 진아연 같은 몸집이라면 3, 4명이 더 와도 절대 안상철을 이기지 못했을 것이다.그래도 일단 진아연을 잡는 게 우선이었다. 진아연을 잡아야만 다음 단계로 넘어갈 수 있지만 문제는 진아연이 어디로 숨었는지 모른다는 것이다.소원은 의문만 가득 품은 채 병원 밖으로 나가다가 주석훈과 마주쳤다.“소원 씨, 여기서 마주치네요.”주석훈이 소원을 향해 헤벌쭉 웃자 소원이 멍한 표정으로 물었
“내가 너무 욕심이 많았어요.”소원은 안지영이 하는 말을 조용히 들어줬다.“내가 바이올린 계속하겠다고 하지만 않았어도 아버지가 그 돈을 다시 찾으러 가지는 않았을 거예요. 그러면 이렇게 될 일도 없었을 텐데.”안지영이 갈라질 대로 갈라진 목소리로 말했다. 안상철이 소원에게 사건의 전말을 들려줄 때 진아연이 그 돈을 줬는지 말았는지는 말하지 않았다. 안상철의 말대로라면 진아연이 돈을 주려다가 결국 주지 않았으니 그 돈이 없어야 맞았지만 실제로 안상철은 그때 돈을 받은 것이다. 하긴 안상철이 바보도 아니고 아무런 보수 없이 그런 위험한 일을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아무리 상대가 딸의 병을 고쳐주겠다고 약속해도 외국으로 나가야 가능한 일이었기에 확실치도 않은 약속을 쉽게 믿지 못했을 테고 일단은 확실한 무언가, 즉 돈을 줘야만 안상철이 소진용을 찾아갈 결심을 내렸을 것이다.하지만 안상철은 결국 이 일을 소원에게 말하지 않았다. 사실대로 말했다면 소원은 안상철이 그 돈을 찾으러 가지 못하게 막았을 것이고 그 돈은 결국 경찰에게 빼앗길지도 모른다. 어떻게 보면 결국 안상철의 탐욕이 그를 죽음으로 내몬 것이다.소원이 안지영을 위로했다.“아니에요. 그게 왜 지영 씨 탓이에요. 나쁜 사람이 몹쓸 짓을 저지른 건데. 지영 씨도 아버지가 그렇게 될 줄은 몰랐잖아요. 지영 씨, 일단 그날 있었던 일을 경찰에게 알리는 게 좋겠어요. 최대한 자세하게 빠트린 것 없이 말해야 경찰도 빨리 범인을 찾을 수 있고 삼촌도 편히 눈 감을 수 있을 거예요. 내 말 무슨 말인지 알죠?”안지영이 고개를 끄덕였다. 안지영도 말하고 싶지 않은 게 아니라 그저 너무 무서울 뿐이었는데 소원이 곁에 있으니 무서움이 한결 가시는 것 같았다. 어릴 적부터 소원을 믿고 의지해왔는데 최근에는 소원 덕분에 살아날 수 있었다.안지영은 경찰 조사를 받을 때 두려움을 가시기 위해 소원에게 옆에 앉아 있어 달라고 제안했고 강민혜도 안지영의 제안을 받아들여 진술하는 내내 소원이 옆에 있을 수 있도록 했다.안지
소원의 설명을 들은 육경한이 미간을 찌푸렸다.“아직 명확해진 게 아니니까 너도 너무 걱정하지 마. 그래도 안전에는 조심해야 되니까 사람 4명 붙여줄게. 유진이는 내가 알아서 보안 강화하고.”육경한은 소원이 거절할 것 같아 그러는지 얼른 한마디 덧붙였다.“너는 지금 홀몸이 아니야. 내가 이러는 것도 다 아이를 보호하기 위해서고.”육경한의 말이 맞았기에 소원도 거절하지 않았다. 이제 홀몸이 아니었고 유진도 엄마가 없어서는 안 되기에 일이 마무리될 때까지 어떻게든 조심하면서 안전에 심혈을 기울여야 했다.육경한이 골라준 보디가드는 의심할 여지 없는 안전한 사람들이었기에 소원도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 안상철도 소진용이 제일 믿고 맡긴 사람이었지만 결국 아버지를 배신한 걸 보면 이 세상에 영원히 믿을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지금 갈 거지? 내가 데려다줄게.”육경한은 소원이 반대하지 않자 경찰이 지정한 병원으로 데려다주겠다고 말했다. 그렇게 병원에 도착한 두 사람은 강민혜의 안내를 받아 안지영의 병실에 도착했다.문을 열어보니 안지영이 자그마한 몸집으로 무릎을 꽉 끌어안은 채 머리를 파묻고 있었다. 며칠 사이에 종이 인형처럼 삐쩍 마른 안지영을 보니 너무 마음이 아팠다.가까이 다가간 소원이 나지막한 목소리로 불렀다.“지영 씨...”안지영이 소원의 목소리를 듣지 못한 것처럼 고개를 들지도, 다른 반응도 보이지 않자 소원이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지영 씨, 지금 어떤 기분인지 알아요. 하지만 경찰에게 단서를 줘야만 아버지를 죽인 범인을 잡을 수 있어요...”가족을 잃은 슬픔은 소원도 겪어봐서 잘 알았다. 마지막 인사도 형체를 알아볼 수 없는 시신을 보며 했으니 그 아쉬움과 후회는 사람을 통째로 집어삼킬 만큼 컸다. 소원은 그때 왜 아버지와 더 많은 시간을 보내지 않았는지, 왜 같이 밥을 먹고 얘기를 나누지 않았는지 후회했지만 그땐 이미 너무 늦어버렸다.안지영을 다독이던 소원이 더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안지영을 꼭 끌어안았다. 얼마나 지났을까, 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