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태준이 나간 후, 신은지는 베개 위에 놓인 그의 휴대폰을 가져다 동영상을 보면서 시간을 보내려 했다. 잠금을 풀자마자 박태준과 고연우의 대화 기록이 보였다.“잘 아는 비뇨기과 의사가 없어?”“잘라버려. 한 번 고생하면 영원히 편해질 거야.”박태준은 화가 났는지 답장하지 않았다.30분 후, 박태준이 밥 먹으라고 부르러 올라왔을 때 신은지는 여전히 침대에 누워있었다. 그는 침대 옆에 서서 그녀를 내려다보면서 말했다.“일어나서 씻어. 내가 옷을 찾아줄까?”신은지는 얼굴을 이불 속에 반쯤 파묻고 말했다.“응.”박태준이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고 돌아서려는데 신은지가 갑자기 일어나 앉더니 그의 허리를 끌어안았다.“태준아, 검사받지 마. 우리 그냥 순리에 맡기는 게 어때?”“...”여인의 나른한 팔은 빨갛게 달아오른 쇠처럼 그의 허리에 밀착되어 옷을 사이에 두고도 뜨거움을 느낄 수 있었다.박태준은 들어 올렸던 손을 천천히 그녀의 등에 내려놓았고, 섹시한 목젖이 오르락내리락했다.“그래.”신은지는 기뻐하며 상을 주듯 그의 입술에 입을 맞추었다.“기특해.”그녀가 입술을 떼려는 순간 박태준은 그녀의 허리를 잡고 굶주린 호랑이처럼 그녀의 입술을 덮쳤다. 꼬르륵 소리가 날 정도로 배고픈 신은지는 그에게 밀려 다시 부드러운 침대로 돌아갔다.이튿날 박태준이 회사에 도착해서 차에서 내리기도 전에 몸이 비쩍 마르고 얼굴이 초췌한 남자가 모퉁이에서 뛰어나와 그의 차 옆에 서서 눈물 콧물 쥐어짜며 사과했다.“박 대표님, 부디 넓은 아량으로 한 번만 용서해 주십시오. 제가 잠깐 어떻게 되었었나 봐요. 이게 다 아내를 너무 사랑하기 때문이에요. 아내와 결혼한 지 몇 년 됐는데 계속 아이가 생기지 않아서 처가에서 최후통첩을 내렸거든요. 제 건강상의 문제로 임신이 되지 않는다면 이혼시키겠다고.”그가 오기 전에 조사한 결과, 박태준은 아내 바보라고 한다. 그래서 그는 이를 접점으로 두 사람의 관계를 가깝게 만들려 했다. 인간은 자신과 같은 경험을 가진 사람을 대할 때
박태준은 울지 않고 눈시울만 붉혔다. 그는 이글거리는 눈으로 신은지의 배를 바라보며 손을 뻗어 만지려 했다.신은지는 그의 눈길이 불편해 입술을 깨물었다.“아직 수정란 상태라 너랑 교감할 수 없어. 가자, 빨리 나가자. 의사 선생님이 아직 밖에 있어.”그녀는 박태준을 밀고 방에서 나왔다. 강혜정이 의사에게 임신 중에 뭘 주의해야 하는지 묻고 있었다. 의식주와 교통 등 사소한 것까지 캐묻는 모습은 전혀 경험이 없는 초보 같았다.적지 않은 월급과 두둑한 연말 보너스를 생각해서 의사는 아주 인내심 있게 자세히 대답했다.“사모님은 입덧이 아닙니다. 아침을 드시지 않은 데다 멀미가 나서 속이 안 좋았던 것입니다. 입덧은 보통 6주 정도에 시작되는데, 생리가 9일 늦춰졌을 뿐이라 당분간 임신 반응은 없을 것입니다.”박태준과 신은지가 나오자, 그는 또 몇 가지 주의사항을 말해주었는데, 특히 3개월까지 잠자리를 가지면 안 된다는 말을 강조했다.“...”의사를 보낸 후, 강혜정은 상의하는 어조로 그녀에게 물었다.“은지야, 아니면 우리 영양사를 고용할까? 태준이 평소에 일도 바쁘고 또 거칠어서 전문가처럼 세심하지 못할 거야. 넌 지금 혼자 먹어서 둘이 흡수하기 때문에 영양이 균형을 이루지 못하면 나중에 고생해. 영양사는 뒤채의 직원 방에 묵게 하면 돼. 어때?”“그렇게 해요.”“그럼, 지금 바로 친구들에게 믿음직한 영양사, 육아/산후 도우미를 소개해달라고 할게. 산후조리원도 예약해야겠어. 지금 좋은 산후조리원은 예약이 그렇게 어렵대.”박태준과 강혜정이 너무 호들갑을 떠는 바람에 임산부인 그녀가 오히려 가장 덤덤해 보였다.이튿날 그녀가 깨어나자마자 박태준이 작은 목소리로 그녀의 배에 대고 말했다.“너 얌전히 있어. 엄마를 괴롭히지 말고. 안 그러면 나중에 나한테 맞을 거야.”신은지는 울 수도 웃을 수도 없었다.“아직 아무것도 듣지 못해. 그리고 다른 사람들은 태교할 때 사랑한다고 말하는데, 너는 때리겠다고 말해? 앞으로 불효자가 나와서 너랑 싸웠으면 좋
어둑어둑한 방에서 남자의 거친 손바닥이 여자의 살갗을 천천히 누볐다. 그는 몸을 구부리고 그녀의 머리, 눈, 입술, 귀에 입맞춤했고 가늘고 긴 목덜미를 따라 아래로 내려갔다.“음...”여자는 목을 치켜들고 몸을 남자 쪽으로 바짝 붙였다. 두 사람의 거리가 이렇게 가까운데도 그녀는 왠지 허전해 좀 더 가까이 다가가고 싶었다.눈을 뜨니 어둠에 가려진 천장이 눈에 들어왔다. 정민아는 아직도 방금의 그다지 시원치 않았던 정사에서 빠져나오지 못해 순간적으로 꿈과 현실을 분간할 수 없었다.새벽 4-5시의 방은 바늘이 떨어지는 소리가 들릴 정도로 조용했고, 창가의 흰색 커튼은 바람에 날려 흔들거렸다.그녀는 고개를 돌려 옆에 있는 고연우를 힐끗 보고는 그의 몸 위에 올라가 잠옷 단추를 풀기 시작했다.시끄러워 잠에서 깬 고연우가 눈을 반쯤 뜨니 절세미인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여인은 검은 캐미솔 원피스를 입고 있었고, 약간 웨이브가 들어간 긴 머리가 아래로 늘어져 흐트러진 옷깃을 가렸는데, 머리카락 사이로 살갗이 보일 듯 말 듯 드러났다.이 얼굴을 보고 정신이 번쩍 든 고연우는 분주한 정민아의 손을 붙잡고 차가운 목소리로 물었다.“한밤중에 미쳤어?”정민아는 예쁜 눈에 실웃음을 지었다. 웃고 있었지만 아무것도 안중에 없는 듯한 차가운 거리감이 느껴졌다.“모르겠어?”고연우가 이를 악물었다.“... 내려와.”여자는 몸을 구부리고 아래서부터 위로 미끄러지듯 그의 몸을 쓸었다.“이건 남편으로서 네가 마땅히 이행해야 할 의무야. 몸이 허약하면 입을 다물고 누워 있어.”여자에게 이렇게 도발 당하고 참을 수 있는 남자는 많지 않을 것이다.한바탕 뒹굴다가 고연우가 정민아의 몸 위에 올라탔다. 그는 그녀의 눈을 보며 낮은 소리로 욕을 내뱉더니 이어서 당해낼 수 없는...끝나고 고연우는 곧바로 욕실로 갔다. 샤워하고 나오니 정민아가 단정하게 차려입고 소파에 앉아 있었고, 탁자 위에는 서류가 놓여 있었다.고연우는 정민아를 곁눈으로도 눈길 한 번 주지 않은 채 완전히
정선아는 얻어맞아 퉁퉁 부은 얼굴을 부여잡고 눈물을 뚝뚝 떨구었다.“연우 오빠, 그날 놓고 간 옷을 돌려주러 왔는데, 언니가 오해했나 봐요...”고씨 집안과 정씨 집안은 같은 마을에 살아서 가깝게 지냈다. 정선아보다 다섯 살 많은 고연우는 그녀가 크는 과정을 지켜봤다고 말할 수 있을 정도였고, 중도에 데려온 정민아보다 훨씬 가까운 사이였다.고연우는 정선아가 손에 들고 있는 양복을 힐끗 보더니 정민아가 반박하지 않자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이건 그날 엔조이클럽에 갔을 때 실수로 놓고 온 거야. 기분 나쁘면 그냥 버리면 되지 애는 왜 때려?”정민아는 느긋하게 고연우에게 다가가더니 그와 눈을 마주치며 미소를 지었다.“쟤가 똥이 맛있다고 하면 그것도 맛보겠네?”이렇게 거칠고 속된 말을 해도 정민아는 여전히 우아했다. 한복을 차려입었다면 영락없는 양반집 규수였을 것이다. 동작부터 표정까지 흠을 잡을 것이 하나도 없었다.그녀는 고연우의 셔츠 옷자락을 바지에서 빼내더니 정선아를 때렸던 손을 문질렀다. 손가락부터 손바닥까지, 심지어 손가락 틈새도 놓치지 않고 구석구석 꼼꼼히 닦은 후 도우미에게 소리쳤다.“아주머니, 제가 방금 둘째 아가씨에게 선물로 주겠다고 한 물건을 가져와요. 여자들이 좋아할 만한 거로 잘 고르세요.”일반 직장인의 1년 월급에 맞먹는 고연우의 셔츠가 그녀의 손길에 의해 쭈글쭈글 구겨졌다.고연우는 엉망이 된 셔츠를 보며 없던 강박증도 생길 것 같았다.“또 무슨 수작을 부리는 거야?”정선아가 눈물을 글썽이며 괴롭힘을 당한 척했다.“언니...”송씨 아주머니는 이내 내려왔지만, 정민아와 고연우를 번갈아 보면서 손에 든 물건을 건네주지 않고 우물쭈물했다.고연우는 아래층에 내려온 뒤로 미간이 펴진 적이 없었다. 그는 아주머니의 표정을 보고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뭐예요?”그는 말하면서 물건을 받아서 들었고, 쇼핑백 안을 딱 한 번 들여다보더니 화를 냈다.“정민아...”그는 이를 악물고 화를 억누르며 겨우 한마디 내뱉었다. 목덜미에
“나는 좋게 만나서 좋게 헤어지고 싶은데 네가 동의하지 않으니 나가게 할 수밖에 없잖아. 나는 기다릴 수 있어.”장기간의 별거도 이혼 사유로 재판에 이롭게 작용할 수 있다.정민아의 치켜뜬 눈에서 고약하고 매정한 성격이 그대로 드러났다.고연우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조용히 그녀를 지켜보았다.욕실에서 피어오르는 김과 흐르는 물소리는 졸음을 불러왔다. 정민아는 미간을 찌푸리며 귀찮다는 듯 남자를 쫓아내려 했다. 남자는 갑자기 웃더니 그녀의 지나치게 흰 얼굴을 주시하며 장난치는 말투로 물었다.“정민아, 겨우 2년이 지났는데, 너는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해?”옛 추억이 생각난 고연우는 얼굴에 비아냥대는 기색이 가득했다.“좋게 만나? 무슨 낯으로 이런 말을 하지? 그때 나와 결혼하려고 온갖 궁리를 짜내고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았잖아. 그래 놓고 지금 이혼하고 싶다고 하면 내가 꼭 들어줘야 해?”정민아는 그의 눈에서 타오르는 불꽃을 보았다. 결혼한 후 고연우는 그녀를 거들떠보지도 않았고 침대 위에서 하는 그 일도 대부분 정민아가 주도했다. 그가 이렇게 많은 말을 한 것도 처음이다.정민아는 일부러 그를 자극했다. 그녀는 젖은 손가락으로 그의 가슴을 쿡쿡 찌르며 극히 유혹적이고 애매한 말투로 말했다.“그렇게 내 곁을 떠나기 싫어?”남자는 차가운 얼굴로 그녀의 손을 자기 몸에서 떼냈다.“내가 너를 얼마나 싫어하는지 누구나 다 알아.”쾅! 고연우가 나가고 욕실 문이 닫혔다. 목욕할 기분이 없는 정민아는 허공을 바라보며 잠시 멍하니 있다가 대충 씻고 나왔다.고연우는 침대 머리에 기대어 앉아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자욱한 연기 속에서 그의 이목구비가 희미해졌다. 공기 중에 가득한 담배 냄새를 맡으며 정민아는 미간을 잔뜩 찌푸렸다.“고연우, 방에서 담배를 피우지 말라고 했잖아.”남자는 웃을 듯 말 듯한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이 여자가 끝내 요정과 같은 예쁜 껍질을 벗어버리고 가장 진실한 모습을 드러내니 훨씬 보기 좋다.고연우는 그녀의 얼굴에 대고 천
정민아가 억울한 표정을 지었다.“그게 어떻게 헛소문이야? 네 입으로 말한 거 아니었어? 나는 그대로 옮겼을 뿐인데.”“언니가 나를 거들떠보지도 않아서 홧김에 그냥 아무 말이나 한 거야. 어떻게 그런 오해를 할 수 있어?”가련한 척하는 것이 정선아의 특기다. 어쨌든 어릴 때부터 수련한 기술이라 아주 대단하다. 10대의 정민아는 그것 때문에 몇 번 손해를 봤는지 모른다.비참하고 어두웠던 과거를 다시 떠올린 정민아는 마음속에 걷잡을 수 없는 악한 기운이 솟구쳤다. 그녀는 정선아에게 다가가 섬뜩하게 웃었다.“그래, 난 네가 싫어. 그러니까 동생아, 조심해. 언제 기분이 안 좋으면 너를 죽여 흥을 돋우고 싶을지도 몰라.”그녀는 고개를 갸우뚱하며 순진한 표정으로 악담을 퍼부었다.“그리고 한 가지 더 말해주자면, 내가 사람을 죽여도 법적으로 문제 되지 않아.”그녀의 미친 듯한 모습에 놀라서 벌벌 떨던 정선아는 이 말을 듣고 갑자기 조롱하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그녀와 눈을 마주쳤다.“말도 안 되는 사이다극을 보고 독이 올랐네. 사람을 죽이고 법적으로 문제 되지 않는 사람이 어디 있어? 그것만 아니면...”그녀는 갑자기 말을 멈추었고, 눈에 점차 질겁하고 믿을 수 없다는 기색이 감돌았다.정민아가 유쾌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그녀의 추측을 확인시켜 주었다.“맞아. 네가 생각하는 그거.”정선아는 뒤로 한 발짝 물러서며 그녀와 거리를 유지했다.“연우 오빠는 알아?”“몰라. 하지만 네가 알려줘도 돼. 화내지 않을게.”정선아는 즉시 가려고 했다. 한시라도 빨리 고자질하러 가려는 모양이다. 정민아가 그녀를 불러세웠다.“물건 놓고 가.”“무슨 물건?”“녹음펜.”정선아는 표정이 살짝 부자연스러웠다.“무슨 말 하는지 모르겠어.”“아까 그 울먹이는 표정이 설마 나한테 보여준 건 아니겠지.”정민아는 순식간에 얼굴에 웃음기가 싹 사라졌다.“백아영 씨, 옷을 벗겨봐.”백아영은 가게의 유일한 직원이다. 주로 방문자 정보 등록, 후기 의견 수렴, 조수 역
고연우는 정민아의 부드러운 목소리에 깜짝 놀랐고 이내 미간을 찌푸리며 차가운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봤다.옆에서 두 사람의 대화를 듣던 여인의 시선은 점점 적의로 가득 찼고 정민아를 연신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그 여인은 평소 자기가 연예계에 진출해도 손색이 없는 얼굴과 몸매를 가졌다고 자부했지만, 정민아의 예쁜 얼굴과 군더더기 없는 몸매를 보고 자신감이 조금 떨어졌다.이때 고연우가 대답 대신 눈살을 찌푸리는 것을 본 그 여인은 안심한 듯 가슴을 쓸어내렸고 그의 팔짱을 끼면서 정민아에게 따졌다.“너 누구야? 미쳤어? 왜 남의 남자한테 남편이라고 해!”정민아는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상황에 맞지 않는 말을 내뱉었다.“내가 제일 좋아하는 옷이니까 더럽히지 마.”고연우가 입은 슬림핏 블랙 셔츠는 그의 넓은 어깨와 좁은 허리의 장점을 두드러지게 보여주었다.그 여인이 또다시 빈정거리려는 순간, 고연우는 팔짱을 낀 그녀의 손을 풀고 정민아를 지나 식당 안으로 들어가면서 말했다.“가자.”그로 인해 여인의 손이 허공에 무안하게 떠 있게 되었고, 몇 초 동안 멍하니 서 있던 그 여인은 금방 정신을 차리고 종종걸음으로 고연우의 뒤를 따르면서 물었다.“연우 도련님, 저... 여자가 정말 당신 아내예요?”고연우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담담하게 답했다.“응.”백아영은 상황을 가만히 지켜보다가 두 사람이 앞장서서 들어가는 걸 보고 나서야 마침내 큰 소리로 화를 냈다.“민아 언니, 형부가 지금 언니를 버리고 다른 여자랑 식당 안으로 들어간 거예요?”“응.”백아영은 입에 담지도 못할 심한 말을 내뱉으려고 해도 머릿속이 하얘져서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고 결국 얼굴을 붉히면서 구시렁댔다.“언니를 어떻게 이 정도로 모질게 대할 수 있어요...”그러나 정민아는 아무렇지 않은 듯 태연하게 식당 안으로 들어갔고 고연우의 옆 테이블에 앉아 아무렇지 않은 듯 메뉴판을 뒤적였다.“아영아, 오늘은 내가 쏘는 거니까 먹고 싶은 거 마음껏 시켜.”그녀의 말에 말없이 메뉴판을 펼쳐보
정민아는 평소 고고하던 모습은 온데간데없었고, 창백해진 얼굴이 보는 사람이 안쓰러울 정도였다.그녀도 고개를 돌려 고연우를 바라보다가 길게 늘어뜨린 머리카락으로 얼굴을 가린 채 다시 창밖을 쳐다보면서 쉰 목소리로 답했다.“응.”“내가 그렇게 싫어?”신경이 곤두서 있던 정민아는 고연우의 단도직입적인 질문을 회피했다.“나 더 잘래, 도착하면 깨워줘.”그녀의 아이러니한 태도가 고연우의 심기를 더 건드렸고, 그는 한 손으로 그녀의 턱을 잡아 자기 쪽으로 돌렸다.“네가 무슨 자격으로 날 싫어해? 네가 애초에 갖은 수단과 방법을 이용해 나와 결혼을 강요하지 않았더라면 이런 결과가 없었을 거잖아.”고연우는 정민아가 2년 동안의 결혼 생활에서 보인 무관심 때문에 그녀가 자기를 원망하고 있다고 생각했다.마음속에 억눌려 있던 감정이 다시 소용돌이치면서 그의 잘생긴 얼굴이 평소보다 더 어둡게 변했다.잠시 후, 정민아는 경멸의 시선으로 고연우를 보면서 까칠한 태도로 반문했다,“네가 날 차갑게 대한 걸로 내가 상처받았다고 생각해? 고연우...”차가 집 앞에 멈추자, 정민아의 언성이 전보다 더 높아졌다.“그래, 2년의 결혼 생활 동안 넌 나한테 항상 무관심했고, 남편을 여의고 혼자 살아가는 여자들보다 더 비참하게 만들었어. 이런데도 내가 널 미워하면 안 돼?”“정민아, 네가 얼마나 사람을 귀찮게 하는지 알아? 다시 말하지만, 난 그 누구보다도 널 증오해.”그러나 이 정도의 언어 폭력으로 마음에 상처를 받을 정민아가 아니었다. 그녀는 오히려 태연하게 섬섬옥수 같은 자기 손가락을, 예술품을 감상하는 것처럼 이리저리 살피면서 살기 어린 말을 내뱉었다.“삶의 의지를 놓아버리고 죽을 때, 날 저주하거나 싫어하는 사람들을 함께 데려갈 테니까, 내가 행복하게 오래 살기를 하느님이나 부처님께 기도하는 게 좋을 거야.”고연우는 그녀의 말을 무시하고 주차를 마저 끝낸 다음 무덤덤하게 말했다.“다 왔어, 내려.”정민아는 가로등 불빛에 비친 가늘고 촘촘하게 흩날리는 빗줄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