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태준이 나간 후, 신은지는 베개 위에 놓인 그의 휴대폰을 가져다 동영상을 보면서 시간을 보내려 했다. 잠금을 풀자마자 박태준과 고연우의 대화 기록이 보였다.“잘 아는 비뇨기과 의사가 없어?”“잘라버려. 한 번 고생하면 영원히 편해질 거야.”박태준은 화가 났는지 답장하지 않았다.30분 후, 박태준이 밥 먹으라고 부르러 올라왔을 때 신은지는 여전히 침대에 누워있었다. 그는 침대 옆에 서서 그녀를 내려다보면서 말했다.“일어나서 씻어. 내가 옷을 찾아줄까?”신은지는 얼굴을 이불 속에 반쯤 파묻고 말했다.“응.”박태준이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고 돌아서려는데 신은지가 갑자기 일어나 앉더니 그의 허리를 끌어안았다.“태준아, 검사받지 마. 우리 그냥 순리에 맡기는 게 어때?”“...”여인의 나른한 팔은 빨갛게 달아오른 쇠처럼 그의 허리에 밀착되어 옷을 사이에 두고도 뜨거움을 느낄 수 있었다.박태준은 들어 올렸던 손을 천천히 그녀의 등에 내려놓았고, 섹시한 목젖이 오르락내리락했다.“그래.”신은지는 기뻐하며 상을 주듯 그의 입술에 입을 맞추었다.“기특해.”그녀가 입술을 떼려는 순간 박태준은 그녀의 허리를 잡고 굶주린 호랑이처럼 그녀의 입술을 덮쳤다. 꼬르륵 소리가 날 정도로 배고픈 신은지는 그에게 밀려 다시 부드러운 침대로 돌아갔다.이튿날 박태준이 회사에 도착해서 차에서 내리기도 전에 몸이 비쩍 마르고 얼굴이 초췌한 남자가 모퉁이에서 뛰어나와 그의 차 옆에 서서 눈물 콧물 쥐어짜며 사과했다.“박 대표님, 부디 넓은 아량으로 한 번만 용서해 주십시오. 제가 잠깐 어떻게 되었었나 봐요. 이게 다 아내를 너무 사랑하기 때문이에요. 아내와 결혼한 지 몇 년 됐는데 계속 아이가 생기지 않아서 처가에서 최후통첩을 내렸거든요. 제 건강상의 문제로 임신이 되지 않는다면 이혼시키겠다고.”그가 오기 전에 조사한 결과, 박태준은 아내 바보라고 한다. 그래서 그는 이를 접점으로 두 사람의 관계를 가깝게 만들려 했다. 인간은 자신과 같은 경험을 가진 사람을 대할 때
박태준은 울지 않고 눈시울만 붉혔다. 그는 이글거리는 눈으로 신은지의 배를 바라보며 손을 뻗어 만지려 했다.신은지는 그의 눈길이 불편해 입술을 깨물었다.“아직 수정란 상태라 너랑 교감할 수 없어. 가자, 빨리 나가자. 의사 선생님이 아직 밖에 있어.”그녀는 박태준을 밀고 방에서 나왔다. 강혜정이 의사에게 임신 중에 뭘 주의해야 하는지 묻고 있었다. 의식주와 교통 등 사소한 것까지 캐묻는 모습은 전혀 경험이 없는 초보 같았다.적지 않은 월급과 두둑한 연말 보너스를 생각해서 의사는 아주 인내심 있게 자세히 대답했다.“사모님은 입덧이 아닙니다. 아침을 드시지 않은 데다 멀미가 나서 속이 안 좋았던 것입니다. 입덧은 보통 6주 정도에 시작되는데, 생리가 9일 늦춰졌을 뿐이라 당분간 임신 반응은 없을 것입니다.”박태준과 신은지가 나오자, 그는 또 몇 가지 주의사항을 말해주었는데, 특히 3개월까지 잠자리를 가지면 안 된다는 말을 강조했다.“...”의사를 보낸 후, 강혜정은 상의하는 어조로 그녀에게 물었다.“은지야, 아니면 우리 영양사를 고용할까? 태준이 평소에 일도 바쁘고 또 거칠어서 전문가처럼 세심하지 못할 거야. 넌 지금 혼자 먹어서 둘이 흡수하기 때문에 영양이 균형을 이루지 못하면 나중에 고생해. 영양사는 뒤채의 직원 방에 묵게 하면 돼. 어때?”“그렇게 해요.”“그럼, 지금 바로 친구들에게 믿음직한 영양사, 육아/산후 도우미를 소개해달라고 할게. 산후조리원도 예약해야겠어. 지금 좋은 산후조리원은 예약이 그렇게 어렵대.”박태준과 강혜정이 너무 호들갑을 떠는 바람에 임산부인 그녀가 오히려 가장 덤덤해 보였다.이튿날 그녀가 깨어나자마자 박태준이 작은 목소리로 그녀의 배에 대고 말했다.“너 얌전히 있어. 엄마를 괴롭히지 말고. 안 그러면 나중에 나한테 맞을 거야.”신은지는 울 수도 웃을 수도 없었다.“아직 아무것도 듣지 못해. 그리고 다른 사람들은 태교할 때 사랑한다고 말하는데, 너는 때리겠다고 말해? 앞으로 불효자가 나와서 너랑 싸웠으면 좋
어둑어둑한 방에서 남자의 거친 손바닥이 여자의 살갗을 천천히 누볐다. 그는 몸을 구부리고 그녀의 머리, 눈, 입술, 귀에 입맞춤했고 가늘고 긴 목덜미를 따라 아래로 내려갔다.“음...”여자는 목을 치켜들고 몸을 남자 쪽으로 바짝 붙였다. 두 사람의 거리가 이렇게 가까운데도 그녀는 왠지 허전해 좀 더 가까이 다가가고 싶었다.눈을 뜨니 어둠에 가려진 천장이 눈에 들어왔다. 정민아는 아직도 방금의 그다지 시원치 않았던 정사에서 빠져나오지 못해 순간적으로 꿈과 현실을 분간할 수 없었다.새벽 4-5시의 방은 바늘이 떨어지는 소리가 들릴 정도로 조용했고, 창가의 흰색 커튼은 바람에 날려 흔들거렸다.그녀는 고개를 돌려 옆에 있는 고연우를 힐끗 보고는 그의 몸 위에 올라가 잠옷 단추를 풀기 시작했다.시끄러워 잠에서 깬 고연우가 눈을 반쯤 뜨니 절세미인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여인은 검은 캐미솔 원피스를 입고 있었고, 약간 웨이브가 들어간 긴 머리가 아래로 늘어져 흐트러진 옷깃을 가렸는데, 머리카락 사이로 살갗이 보일 듯 말 듯 드러났다.이 얼굴을 보고 정신이 번쩍 든 고연우는 분주한 정민아의 손을 붙잡고 차가운 목소리로 물었다.“한밤중에 미쳤어?”정민아는 예쁜 눈에 실웃음을 지었다. 웃고 있었지만 아무것도 안중에 없는 듯한 차가운 거리감이 느껴졌다.“모르겠어?”고연우가 이를 악물었다.“... 내려와.”여자는 몸을 구부리고 아래서부터 위로 미끄러지듯 그의 몸을 쓸었다.“이건 남편으로서 네가 마땅히 이행해야 할 의무야. 몸이 허약하면 입을 다물고 누워 있어.”여자에게 이렇게 도발 당하고 참을 수 있는 남자는 많지 않을 것이다.한바탕 뒹굴다가 고연우가 정민아의 몸 위에 올라탔다. 그는 그녀의 눈을 보며 낮은 소리로 욕을 내뱉더니 이어서 당해낼 수 없는...끝나고 고연우는 곧바로 욕실로 갔다. 샤워하고 나오니 정민아가 단정하게 차려입고 소파에 앉아 있었고, 탁자 위에는 서류가 놓여 있었다.고연우는 정민아를 곁눈으로도 눈길 한 번 주지 않은 채 완전히
정선아는 얻어맞아 퉁퉁 부은 얼굴을 부여잡고 눈물을 뚝뚝 떨구었다.“연우 오빠, 그날 놓고 간 옷을 돌려주러 왔는데, 언니가 오해했나 봐요...”고씨 집안과 정씨 집안은 같은 마을에 살아서 가깝게 지냈다. 정선아보다 다섯 살 많은 고연우는 그녀가 크는 과정을 지켜봤다고 말할 수 있을 정도였고, 중도에 데려온 정민아보다 훨씬 가까운 사이였다.고연우는 정선아가 손에 들고 있는 양복을 힐끗 보더니 정민아가 반박하지 않자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이건 그날 엔조이클럽에 갔을 때 실수로 놓고 온 거야. 기분 나쁘면 그냥 버리면 되지 애는 왜 때려?”정민아는 느긋하게 고연우에게 다가가더니 그와 눈을 마주치며 미소를 지었다.“쟤가 똥이 맛있다고 하면 그것도 맛보겠네?”이렇게 거칠고 속된 말을 해도 정민아는 여전히 우아했다. 한복을 차려입었다면 영락없는 양반집 규수였을 것이다. 동작부터 표정까지 흠을 잡을 것이 하나도 없었다.그녀는 고연우의 셔츠 옷자락을 바지에서 빼내더니 정선아를 때렸던 손을 문질렀다. 손가락부터 손바닥까지, 심지어 손가락 틈새도 놓치지 않고 구석구석 꼼꼼히 닦은 후 도우미에게 소리쳤다.“아주머니, 제가 방금 둘째 아가씨에게 선물로 주겠다고 한 물건을 가져와요. 여자들이 좋아할 만한 거로 잘 고르세요.”일반 직장인의 1년 월급에 맞먹는 고연우의 셔츠가 그녀의 손길에 의해 쭈글쭈글 구겨졌다.고연우는 엉망이 된 셔츠를 보며 없던 강박증도 생길 것 같았다.“또 무슨 수작을 부리는 거야?”정선아가 눈물을 글썽이며 괴롭힘을 당한 척했다.“언니...”송씨 아주머니는 이내 내려왔지만, 정민아와 고연우를 번갈아 보면서 손에 든 물건을 건네주지 않고 우물쭈물했다.고연우는 아래층에 내려온 뒤로 미간이 펴진 적이 없었다. 그는 아주머니의 표정을 보고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뭐예요?”그는 말하면서 물건을 받아서 들었고, 쇼핑백 안을 딱 한 번 들여다보더니 화를 냈다.“정민아...”그는 이를 악물고 화를 억누르며 겨우 한마디 내뱉었다. 목덜미에
“나는 좋게 만나서 좋게 헤어지고 싶은데 네가 동의하지 않으니 나가게 할 수밖에 없잖아. 나는 기다릴 수 있어.”장기간의 별거도 이혼 사유로 재판에 이롭게 작용할 수 있다.정민아의 치켜뜬 눈에서 고약하고 매정한 성격이 그대로 드러났다.고연우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조용히 그녀를 지켜보았다.욕실에서 피어오르는 김과 흐르는 물소리는 졸음을 불러왔다. 정민아는 미간을 찌푸리며 귀찮다는 듯 남자를 쫓아내려 했다. 남자는 갑자기 웃더니 그녀의 지나치게 흰 얼굴을 주시하며 장난치는 말투로 물었다.“정민아, 겨우 2년이 지났는데, 너는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해?”옛 추억이 생각난 고연우는 얼굴에 비아냥대는 기색이 가득했다.“좋게 만나? 무슨 낯으로 이런 말을 하지? 그때 나와 결혼하려고 온갖 궁리를 짜내고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았잖아. 그래 놓고 지금 이혼하고 싶다고 하면 내가 꼭 들어줘야 해?”정민아는 그의 눈에서 타오르는 불꽃을 보았다. 결혼한 후 고연우는 그녀를 거들떠보지도 않았고 침대 위에서 하는 그 일도 대부분 정민아가 주도했다. 그가 이렇게 많은 말을 한 것도 처음이다.정민아는 일부러 그를 자극했다. 그녀는 젖은 손가락으로 그의 가슴을 쿡쿡 찌르며 극히 유혹적이고 애매한 말투로 말했다.“그렇게 내 곁을 떠나기 싫어?”남자는 차가운 얼굴로 그녀의 손을 자기 몸에서 떼냈다.“내가 너를 얼마나 싫어하는지 누구나 다 알아.”쾅! 고연우가 나가고 욕실 문이 닫혔다. 목욕할 기분이 없는 정민아는 허공을 바라보며 잠시 멍하니 있다가 대충 씻고 나왔다.고연우는 침대 머리에 기대어 앉아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자욱한 연기 속에서 그의 이목구비가 희미해졌다. 공기 중에 가득한 담배 냄새를 맡으며 정민아는 미간을 잔뜩 찌푸렸다.“고연우, 방에서 담배를 피우지 말라고 했잖아.”남자는 웃을 듯 말 듯한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이 여자가 끝내 요정과 같은 예쁜 껍질을 벗어버리고 가장 진실한 모습을 드러내니 훨씬 보기 좋다.고연우는 그녀의 얼굴에 대고 천
정민아가 억울한 표정을 지었다.“그게 어떻게 헛소문이야? 네 입으로 말한 거 아니었어? 나는 그대로 옮겼을 뿐인데.”“언니가 나를 거들떠보지도 않아서 홧김에 그냥 아무 말이나 한 거야. 어떻게 그런 오해를 할 수 있어?”가련한 척하는 것이 정선아의 특기다. 어쨌든 어릴 때부터 수련한 기술이라 아주 대단하다. 10대의 정민아는 그것 때문에 몇 번 손해를 봤는지 모른다.비참하고 어두웠던 과거를 다시 떠올린 정민아는 마음속에 걷잡을 수 없는 악한 기운이 솟구쳤다. 그녀는 정선아에게 다가가 섬뜩하게 웃었다.“그래, 난 네가 싫어. 그러니까 동생아, 조심해. 언제 기분이 안 좋으면 너를 죽여 흥을 돋우고 싶을지도 몰라.”그녀는 고개를 갸우뚱하며 순진한 표정으로 악담을 퍼부었다.“그리고 한 가지 더 말해주자면, 내가 사람을 죽여도 법적으로 문제 되지 않아.”그녀의 미친 듯한 모습에 놀라서 벌벌 떨던 정선아는 이 말을 듣고 갑자기 조롱하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그녀와 눈을 마주쳤다.“말도 안 되는 사이다극을 보고 독이 올랐네. 사람을 죽이고 법적으로 문제 되지 않는 사람이 어디 있어? 그것만 아니면...”그녀는 갑자기 말을 멈추었고, 눈에 점차 질겁하고 믿을 수 없다는 기색이 감돌았다.정민아가 유쾌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그녀의 추측을 확인시켜 주었다.“맞아. 네가 생각하는 그거.”정선아는 뒤로 한 발짝 물러서며 그녀와 거리를 유지했다.“연우 오빠는 알아?”“몰라. 하지만 네가 알려줘도 돼. 화내지 않을게.”정선아는 즉시 가려고 했다. 한시라도 빨리 고자질하러 가려는 모양이다. 정민아가 그녀를 불러세웠다.“물건 놓고 가.”“무슨 물건?”“녹음펜.”정선아는 표정이 살짝 부자연스러웠다.“무슨 말 하는지 모르겠어.”“아까 그 울먹이는 표정이 설마 나한테 보여준 건 아니겠지.”정민아는 순식간에 얼굴에 웃음기가 싹 사라졌다.“백아영 씨, 옷을 벗겨봐.”백아영은 가게의 유일한 직원이다. 주로 방문자 정보 등록, 후기 의견 수렴, 조수 역
고연우는 정민아의 부드러운 목소리에 깜짝 놀랐고 이내 미간을 찌푸리며 차가운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봤다.옆에서 두 사람의 대화를 듣던 여인의 시선은 점점 적의로 가득 찼고 정민아를 연신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그 여인은 평소 자기가 연예계에 진출해도 손색이 없는 얼굴과 몸매를 가졌다고 자부했지만, 정민아의 예쁜 얼굴과 군더더기 없는 몸매를 보고 자신감이 조금 떨어졌다.이때 고연우가 대답 대신 눈살을 찌푸리는 것을 본 그 여인은 안심한 듯 가슴을 쓸어내렸고 그의 팔짱을 끼면서 정민아에게 따졌다.“너 누구야? 미쳤어? 왜 남의 남자한테 남편이라고 해!”정민아는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상황에 맞지 않는 말을 내뱉었다.“내가 제일 좋아하는 옷이니까 더럽히지 마.”고연우가 입은 슬림핏 블랙 셔츠는 그의 넓은 어깨와 좁은 허리의 장점을 두드러지게 보여주었다.그 여인이 또다시 빈정거리려는 순간, 고연우는 팔짱을 낀 그녀의 손을 풀고 정민아를 지나 식당 안으로 들어가면서 말했다.“가자.”그로 인해 여인의 손이 허공에 무안하게 떠 있게 되었고, 몇 초 동안 멍하니 서 있던 그 여인은 금방 정신을 차리고 종종걸음으로 고연우의 뒤를 따르면서 물었다.“연우 도련님, 저... 여자가 정말 당신 아내예요?”고연우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담담하게 답했다.“응.”백아영은 상황을 가만히 지켜보다가 두 사람이 앞장서서 들어가는 걸 보고 나서야 마침내 큰 소리로 화를 냈다.“민아 언니, 형부가 지금 언니를 버리고 다른 여자랑 식당 안으로 들어간 거예요?”“응.”백아영은 입에 담지도 못할 심한 말을 내뱉으려고 해도 머릿속이 하얘져서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고 결국 얼굴을 붉히면서 구시렁댔다.“언니를 어떻게 이 정도로 모질게 대할 수 있어요...”그러나 정민아는 아무렇지 않은 듯 태연하게 식당 안으로 들어갔고 고연우의 옆 테이블에 앉아 아무렇지 않은 듯 메뉴판을 뒤적였다.“아영아, 오늘은 내가 쏘는 거니까 먹고 싶은 거 마음껏 시켜.”그녀의 말에 말없이 메뉴판을 펼쳐보
정민아는 평소 고고하던 모습은 온데간데없었고, 창백해진 얼굴이 보는 사람이 안쓰러울 정도였다.그녀도 고개를 돌려 고연우를 바라보다가 길게 늘어뜨린 머리카락으로 얼굴을 가린 채 다시 창밖을 쳐다보면서 쉰 목소리로 답했다.“응.”“내가 그렇게 싫어?”신경이 곤두서 있던 정민아는 고연우의 단도직입적인 질문을 회피했다.“나 더 잘래, 도착하면 깨워줘.”그녀의 아이러니한 태도가 고연우의 심기를 더 건드렸고, 그는 한 손으로 그녀의 턱을 잡아 자기 쪽으로 돌렸다.“네가 무슨 자격으로 날 싫어해? 네가 애초에 갖은 수단과 방법을 이용해 나와 결혼을 강요하지 않았더라면 이런 결과가 없었을 거잖아.”고연우는 정민아가 2년 동안의 결혼 생활에서 보인 무관심 때문에 그녀가 자기를 원망하고 있다고 생각했다.마음속에 억눌려 있던 감정이 다시 소용돌이치면서 그의 잘생긴 얼굴이 평소보다 더 어둡게 변했다.잠시 후, 정민아는 경멸의 시선으로 고연우를 보면서 까칠한 태도로 반문했다,“네가 날 차갑게 대한 걸로 내가 상처받았다고 생각해? 고연우...”차가 집 앞에 멈추자, 정민아의 언성이 전보다 더 높아졌다.“그래, 2년의 결혼 생활 동안 넌 나한테 항상 무관심했고, 남편을 여의고 혼자 살아가는 여자들보다 더 비참하게 만들었어. 이런데도 내가 널 미워하면 안 돼?”“정민아, 네가 얼마나 사람을 귀찮게 하는지 알아? 다시 말하지만, 난 그 누구보다도 널 증오해.”그러나 이 정도의 언어 폭력으로 마음에 상처를 받을 정민아가 아니었다. 그녀는 오히려 태연하게 섬섬옥수 같은 자기 손가락을, 예술품을 감상하는 것처럼 이리저리 살피면서 살기 어린 말을 내뱉었다.“삶의 의지를 놓아버리고 죽을 때, 날 저주하거나 싫어하는 사람들을 함께 데려갈 테니까, 내가 행복하게 오래 살기를 하느님이나 부처님께 기도하는 게 좋을 거야.”고연우는 그녀의 말을 무시하고 주차를 마저 끝낸 다음 무덤덤하게 말했다.“다 왔어, 내려.”정민아는 가로등 불빛에 비친 가늘고 촘촘하게 흩날리는 빗줄기
정민아는 팔짱을 끼고는 고연우가 들고 있는 꽃을 무심하게 훑어보았다.“연우 도련님, 이건 또 무슨 의미야?”“공 비서가 오늘이 여성의 명절이라고 했어.”“그래서?”주위는 조용하고 잔잔한 음악 소리가 문을 통해 희미하게 들려왔다.고연우는 잠시 침묵하다가 말했다.“정민아, 우리 이혼하지 말자.”너무 진부한 이야기였다. 정민아는 더 이상 이 주제를 논의할 의욕조차 없었다. 그녀는 고개를 돌려 책상 위 담뱃갑을 더듬었다. 옆의 재떨이엔 얇은 층으로 쌓인 담배꽁초가 있었고 그 중 절반 이상이 정민아가 피운 것임을 립스틱 자국이 말해주고 있었다.고연우는 미간을 찌푸렸다. 그는 정민아가 담배를 피우는 걸 싫어하면서도 막지 않았다.얇게 피어오르는 연기가 정민아의 입술 사이로 흘러나왔다. 담뱃불은 희미하게 밝아졌다가 사라지며 그녀의 눈을 비췄다. 그 순간, 눈 속의 차가운 무관심이 한층 누그러져 보였다. 은빛 실처럼 가늘게 펴지는 연기 너머로 정민아는 당당하고 제멋대로 미소 지었다. 그리고 정민아가 그렇게 웃을 때마다 고연우는 어김없이 불길한 예감을 느꼈다.다음 순간 정민아가 말했다.“고연우, 너 이상한 거 아니야?”“그렇지. 이상하지 않았다면 여기 서 있지도 않았을 거야.”고연우는 소매를 걷어 올리며 손목시계를 가리켰다.“시간 됐어. 레스토랑으로 가자. 예약해 놨어.”정민아는 이미 샘플 수정으로 지쳐 있었는데 고연우의 집요함이 정민아를 더욱 짜증 나게 했다. 고연우의 고급스러운 코트가 눈에 들어오자 정민아의 머릿속에 문득 나쁜 생각이 스쳤다. 그녀는 손에 들고 있던 담배꽁초를 그의 코트에 대고 눌렀다.‘치...’불꽃이 꺼지면서 연기가 피어오르자 타는 냄새가 코트에서 퍼져 나왔다.정민아는 차가운 얼굴로 꺼진 담배꽁초를 옆의 쓰레기통에 던졌다.“꺼져.”고연우는 자신이 입고 있는 코트의 타는 자국은 아랑곳하지 않고 정민아의 손을 잡았다.“이 코트는 가격이 6자리 숫자야. 디자인에서 완성까지 3개월이 걸렸어. 나와 저녁 정도는 함께 먹어줘야 하
고연우는 벨트를 풀며 말했다. 남자는 원래 이런 상황에서 승부욕이 강해지기 마련인데 특히 좋아하는 여자 앞에서는 그 감정이 더욱 크게 드러났다.“그런 암흑 같은 분위기는 우리 상황과 맞지 않아.”정민아는 원래 고연우에게 특별한 감정은 없었다. 어둠 속에서 고연우는 마치 사나운 짐승처럼 보였을 것이니 고연우에게 흥미를 느끼는 것 자체가 이상한 일이었다.정민아는 그를 뚫어지게 바라봤다. 고연우는 옷을 반쯤 벗었고 단단한 근육이 팽팽히 긴장되었으며 술기운에 물든 피부는 은은한 붉은빛으로 물들어 있었다.공기 중에는 얼굴을 붉히게 만드는 묘한 긴장감이 감돌았고 마치 곧 무언가가 터질 듯한 기운이 흐르고 있었다. 가끔 고연우의 거친 숨소리가 들려오기도 했다.정민아가 말했다.“요즘 운동 안 했어?”고연우는 어이없었다.“?”정민아는 손바닥을 고연우의 가슴 아래쪽에 대고 살짝 눌러보았다. 그러고는 평가하듯 말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근육이 좀 줄었네.”“...”정민아는 마치 중대한 결정을 앞둔 사람처럼 진지한 표정으로 확신에 찬 눈빛으로 고연우를 응시했다. 고연우는 모른 척하려 했지만, 결국 그녀의 말을 무시할 수 없었다. 그는 옷을 다시 입고 정민아의 손을 자기 몸에서 조심스레 떼어내더니 문을 향해 나가며 화가 난 듯 정민아를 한번 매섭게 쳐다보았다.“네가 이겼어.”완전히 흥미가 사라졌다....며칠 동안 고산그룹 대표실이 있는 층은 숨조차 크게 쉴 수 없을 만큼 무거운 분위기에 짓눌려 있었다.공민찬이 급한 서류 묶음을 들고 고연우에게 사인을 받으려 일어서던 순간, 엘리베이터에서 소리가 났다. 그때 최민영이 가방을 들고나와 미소를 지으며 공민찬에게 인사를 건넸다.“공 비서님.”공민찬은 다가서며 말했다.“최민영 씨.”최민영은 사무실 쪽을 가리키며 물었다.“연우 씨 사무실에 있나요?”“최민영 씨, 잠시만요”공민찬은 그녀를 막아섰다.“대표님께서 지금 바쁘십니다. 우선 접대 실에서 잠시 기다리시는 게 어떨까요?” “...”최민영은 눈썹
고연우는 짜증 내며 핸드폰을 테이블에 던지더니 미간을 꾹꾹 눌렀다. “나가세요. 나중에 송씨 아주머니한테 작업복 하나 달라고 하세요.”“도련님, 혹시 어디 불편하세요?”하린은 우유를 들고 테이블 앞으로 다가갔다. “저 예전에 마사지도 배운 적 있는데, 제가...”“그만 나가.” 고연우는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그녀의 손을 피하다가 우유를 엎지르고 말았다. 우유가 쏟아지며 더럽혀진 셔츠를 내려다보며 그는 얼굴은 굳어진 채 입술을 오므렸다. 한참 후에야 한 마디 내뱉었다. “사모님께서 보낸 겁니까?”그는 이를 악물고 한 글자 한 글자 뱉어냈다.하린은 고연우의 차가운 눈빛에 그 자리에 굳어진 채 말을 더듬었다. “도련님, 정말로 사모님께 저를 보내셨습니다.”“나가세요. 앞으로 제 허락 없이는 서재에 들어오지 마세요.” 하린은 금수저 남편을 찾기 위해 가사 도우미로 취직했다. 이를 위해 매니저에게 봉투까지 건넸지만 고연우의 사늘한 태도에 더 이상 다른 생각을 품지 못했다. 서재를 나오자마자 난간에 기댄 채 그녀를 쳐다보는 정민아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사모님...”하린은 갑자기 발걸음 멈추더니 애써 태연하게 말했다. 아무래도 불순한 의도를 품었던 그녀는 사모님을 보면 본능적으로 불안했다. “도련님께서 드시지 않았어요...”비록 정민아의 표정은 아무런 변화도 없었지만 하린은 괜히 자신을 평가하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녀가 더 이상 감당할 수 없을 것 같을 때 마침 정민아가 입을 열었다. “그럼 몇 번 더 가져다주세요.”하린은 정민아의 말에 담긴 뜻을 단번에 눈치챘다.그녀는 자신이 잘못 이해한 게 아닐까 의심이 들 정도였다. ‘도대체 어떤 재벌 부인이 자신의 남편에게 여자를 찾아주는 걸까? 설사 남편이 마음에 들지 않더라도 돈이면 충분할 텐데, 그러다 사생아라도 생겨 상속 분배에서 더 많은 문제를 일으키면 어쩔 생각인지.’그녀는 다시 한번 확인했다. “도련님께서 송씨 아주머니한테 익숙해졌는지 저를 좀 꺼리시는 것 같아요. 아
다음 날.정민아와 사연희는 쇼에 대해 논의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뒤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민아야...”주소월이었다. 사연희는 정민아의 과거에 대해 완전히 알지는 못했지만 주소월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세상에 자식을 챙기지 않는 엄마가 어디 있겠는가? 그러나 설령 절친이라도 남의 가정사에 깊이 개입하기는 어려웠다. 그녀는 노트북을 들고 일어나 말했다. “초대장 몇 개 빼놓고 못 보낸 것 같은데, 금방 보내고 올게. 쇼에 관한 건 나중에 다시 얘기해.”그녀는 주소월을 흘끗 쳐다보고는 인사도 하지 않은 채 돌아섰다. 정민아도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주소월에게 대충 고개를 끄덕이고 물었다. “무슨 일이에요?” 그녀는 어젯밤에 충분히 더 이상 정씨 가문과 연관되고 싶지 않다는 의사를 전달했다고 생각했지만 주소월이 여전히 찾아올 줄은 몰랐다. “오늘 밤에 연회가 있는데, 같이 가겠니?” 정민아가 거절할까 봐 주소월은 서둘러 한 마디 덧붙였다. “너희가 쇼를 열잖아? 오늘 밤 연회에 너와 같은 나이의 사람들이 많이 올 거야. 잠재 고객을 몇 명 발전시킬 기회가 될 수도 있어.”“지금 그 무리에서 잠재 고객을 발전시키라는 말씀이세요?”그녀와 최민영의 갈등은 모두가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집안이 최씨 가문보다 못한 사람은 그녀에게 다가가는 것을 꺼렸고 반면 집안이 최씨 가문보다 좋은 사람은 고아 때문에 굳이 적을 만들 필요도 없었다. 주소월은 정민아가 당했던 일을 떠올리며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 “민아야, 미안해. 엄마가 너를 데려오긴 했지만 제대로 돌보지도 못하고 너한테 이렇게 상처만 줬네...”“미안해할 필요 없어요. 오히려 제가 고맙죠. 저를 정씨 가문으로 데려와 줘서 고마워요. 그 마을에서 벗어날 수 있게 해줘서, 그리고 또... 그 미친놈으로부터 구해줘서 고마워요.”마치 세월의 흔적을 덮은 한 자루의 칼처럼 서서히 그녀의 심장을 파고들었다. “민아야...” 주소월은 울먹거리며 더 이상 눈물을 참을 수 없었다. 그녀는 처음 그
정민아는 문을 열고 지친 몸으로 가방을 내려놓았다. 신발을 갈아신던 중 슬쩍 식탁 위에 차려진 음식을 보았다.“아주머니, 제가 전화드렸잖아요. 저녁 먹고 온다고, 왜 이렇게 음식을 많이 차렸어요?”송씨 아주머니는 2층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도련님께서 아직 저녁을 드시지 않으셨습니다.”고연우라는 말을 듣자 정민아는 더 이상 묻지 않고 뻐근한 목을 주무르며 2층으로 올라갔다. “아, 그렇군요.”“아가씨...”송씨 아주머니가 망설이며 그녀를 불렀다. “도련님께서 아가씨가 돌아오시면 같이 식사하자고 불러달라고 하셨습니다.”“제가요?” 정민아는 걸음을 멈추고 의아해하며 돌아봤다. “왜요?”“도련님께서 기분이 별로 안 좋아 보이셨는데... 두 분 혹시 싸우신 거 아닌가요?”“그 사람이 기분이 안 좋다고 제가 달래줘야 하나요? 그럼 왕자님, 저녁 드세요라고 말이라도 해야겠네요?” 정민아는 피식 웃더니 입가에 맴돌던 웃음이 갑자기 사라졌다. “먹든 안 먹든 마음대로 하라고 하세요. 먹기 싫으면 굶으면 되죠.”송씨 아주머니는 시선을 정민아 뒤쪽으로 옮기더니 표정이 조금 일그러진 채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도... 도련님...”정민아가 뒤돌아보자 고연우는 난간에 기댄 채 냉랭한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방금 샤워를 끝냈는지 머리가 약간 젖어 있었고 외출복을 입고 있었다. 몸에 딱 맞는 셔츠에 검은색 정장 바지를 입은 채 단추는 몇 개 풀려 있었고 옷자락은 허리선에 맞춰 깔끔하게 넣었다. 넓은 어깨, 잘록한 허리에 긴 다리를 뽐내며 그 자리에 서 있는 것만으로도 주변을 배경처럼 흐릿해 보이게 만들었다.고연우는 냉랭한 목소리로 말했다. “같이 저녁 먹자.”사실 그는 조금 더 튕기고 싶었지만 계속 자존심을 부리다 이 무심한 여자는 그냥 가버릴 것 같았다.정민아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말했다. “난 이미 먹었어.”“네가 장소 문제를 해결하라고 해서 해결해 줬더니, 겨우 도시락 하나 사주는 거냐? 정민아, 너 정
“난 내가 좋은 사람이라고 한 적 없어.”정민아가 웃으며 고개를 옆으로 하자 덜 말려진 머리카락이 한쪽으로 치우치며 하얗고 맑은 어깨가 그대로 드러났는데 그 위에는 물방울까지 맺혀있어 고연우의 심장을 요동치게 만들었다.그 어떤 뜨거운 것이 가슴속에서 꿈틀거리고 있었고 방안에 가득 찬 정민아의 향기가 그림자마냥 고연우의 주변을 맴도는 탓에 고연우는 흐릿해져 가는 정신을 부여잡으려 주먹을 말아쥐었다.술기운이 뒤늦게 밀려오는 것인지 아니면 저 고혹적인 자세 때문인지 고연우는 머리가 점점 더 뜨거워지는 것 같았다.그에 정민아는 문을 열고는 손님을 배웅하는 듯한 자세를 취하며 말했다.“내가 불편해지면서까지 다른 사람한테 맞추긴 싫거든. 그러니까 일단 최민영부터 죽이고 와서 사랑 타령해.”“... 다른 건 안 될까?”“다른 거 뭐?”정민아의 산만한 시선이 고연우의 몸에 머물렀다. 사람이 아니라 상품을 보는 듯 곳곳을 훑어보고 있었다.“너한테 나의 흥미를 불러일으킬 만한 뭐 다른 게 있긴 해?”상처가 되는 말은 아니었지만 모욕적인 말임은 틀림없었다.하지만 웃긴 건 정민아의 말에 고연우가 고개를 숙여 제 몸을 보고 있다는 것이다.아무리 봐도 돈과 권력 외에는 정민아가 관심을 가질만한 게 없어 보이는 듯한 몸에 고연우는 고개를 들더니 그래도 억울하다는 듯 말했다.“그 기생오라비보다는 내가 더 잘생겼어.”정민아가 혹여 듣지 못할까 봐 고연우는 기생오라비라는 단어에 더 힘을 주며 말했다.어려서부터 따라다니는 사람들이 끊이질 않았던 고연우는 저에게도 이렇게 여자의 환심을 사기 위해 어필하는 날이 올 줄 꿈에도 몰랐었다.하지만 정민아는 관심 없다는 듯 입꼬리를 움직이며 말했다.“얼굴 자랑 말고 가서 약이나 좀 사지 그래? 내가 너에 대한 흥미는 약의 자극을 받아야만 생길 것 같거든.”머리에 누가 찬물이라도 끼얹은 듯이 아까의 설렘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도 입안에는 분노 가득한 험한 말들이 서러움과 함께 맴돌고 있었다.“넌 앞으로 그냥 말을 하지 마.”
고연우의 질문에 정민아는 사실대로 대답했다.“대학 때 후배.”그 말에 고연우는 아까 정민아를 보던 임우빈의 이상한 눈빛을 떠올리며 입술을 살짝 깨물고는 물었다.“쟤가 너 좋아해?”“응.”“...”너무 당연하다는 듯이 인정을 해버리는 정민아에 말문이 막혀버린 고연우는 한참 만에야 입을 열었다.“너 저렇게 기생오라비 같은 놈 좋아했었어?”정민아의 성격 때문에 좋아하는지 아닌지는 정확히 알 수 없었지만 임우빈한테 유난히 관대한 것만은 보아낼 수 있었다.인정하고 싶지는 않았지만 정민아 앞에서 주책맞게 떠들어 댄 게 자신이었다면 정민아는 진작에 제 머리를 비틀어 화분으로 삼겠다고 협박했을 것이다.정민아는 언짢아 보이는 고연우를 보며 말했다.“기생오라비 같은 게 아니라 어린 거야. 턱선이 당신처럼 뚜렷하진 못해 그래서. 그리고 뒤에서 다른 사람 험담하는 건 격 떨어지는 일이야, 고연우 도련님.”고연우 도련님이라는 단어에 올라가는 억양을 붙인 게 아무리 봐도 조롱 같았던 고연우는 냉소를 흘리며 말했다.“턱선이 나보다 뚜렷하지 못하고 어려서 그렇다고? 그럼 뭐 나는 늙었다는 소리야? 그리고 내 앞에서 내 아내를 탐내는 데 내가 얼마나 격을 차려야 한다는 거지? 난...”고연우는 간신히 튀어나오려는 험한 말을 참아냈다.“곧 이혼할 건데 뭘.”“꿈 깨.”혈관 속에서 불꽃이 튀기는 것 같은 느낌에 원래도 나빴던 기분이 더 완벽히 잡쳐버린 고연우는 정민아를 노려보며 말했다.“난 이혼에 합의 안 할 거니까 그런 생각은 안 하는 게 좋을 거야. 우리 사이에 사별은 있어도 이혼은 없어.”고연우의 말에 정민아가 문고리를 잡아 내리며 대꾸했다.“그럼 아직 살아있으니까 납골함이라도 직접 골라. 귀신 돼서도 네가 직접 고른 집에 있으면 기분이라도 좋겠지.”“정민아, 너...”고연우가 말을 채 마치기도 전에 눈앞에서 문이 “펑” 소리를 내며 닫혀버린 탓에 하마터면 거기에 얼굴을 맞을 뻔한 고연우는 문을 두드리며 소리쳤다.“누가 이딴 식으로 짜증을 내고 들
말을 안 하고 앉아있는 정민아에 기사는 정민아가 슬퍼하는 줄로 알았지만 그렇다고 한낱 외부인이 이래라저래라 할 수 있는 부분은 아니라 답답한지 기사는 의자에서 앞뒤로 움직이며 안절부절못하고 있었다.“진심으로 좋아하면 시험하는 게 아니라 마음을 솔직하게 알려줘야죠. 이런 식이면 남자는 점점 더 밀려날 수밖에 없어요. 모든 남자들이 저런 여자를 좋아하는 건 아니지만 저런 여자의 유혹을 당해낼 남자도 없어요.”“저도 남자예요, 믿어도 좋아요.”끊임없이 말하는 기사가 귀찮았는지 정민아는 고개를 돌리며 짧게 대꾸했다.“응, 믿으니까 출발해 빨리.”정민아가 고연우를 시험하는 건 그가 저를 사랑하는지 안 하는지를 알아보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과 주 씨 집안 간의 계약이 성사될 수 있는지를 알고 싶어서 그랬던 건데 지금 보니 이 길은 이미 글러 버린 것 같았다.임우빈은 한 손으로 좌석 등받이를 당기며 고개를 돌려 정민아를 바라보며 그 나이대 특유의 당찬 표정을 하고 말했다.“저렇게 양옆에 여자나 끼고 다니면서 여러 사람 홀려대는 남자는 믿음직스럽지 못하잖아요. 누나 관심을 받을 자격도 없죠. 저는 어때요?”임우빈은 제 이두근을 자랑하며 말했다.“젊고 잘생긴 데다가 체력도 좋고 무엇보다 일편단심이에요. 누나 말곤 아무도 안 봐요, 길가는 암컷 강아지한테 눈길 안 줄 자신 있는데.”“... 너희 엄마는 네가 자기보다 몇 살이나 많은 여자를 집안 며느리로 들이려 한다는 사실 아니?”정민아의 말에 임우빈은 툴툴대며 대답했다.“많이는 아니죠, 고작 세 살인데. 오버는 하지 말죠. 그리고 내가 정말 누나를 집에 데려가면 우리 엄마는 엄청 좋아할걸요. 적어도 앞으로 두 세대는 미모는 보장할 수 있으니까.”임우빈은 정민아의 대학교 후배였는데 1학년 때 운동장에서 정민아를 처음 본 순간 그녀에게 반해버려 결혼하겠다고 호언장담했는데 제대로 들이대 보지도 못하고 정민아가 퇴학을 해버리는 탓에 겨우겨우 수소문해서 정민아가 있다는 경인시까지 와서 대학원을 다니고 여기서 취직
사연희는 잔뜩 감동한 얼굴로 정민아를 바라보며 눈을 빛냈다.“우리 가게 때문에 민아 씨만 고생했네요.”안 그래도 하룻밤 사이에 노 대표님의 생각을 바꿀만한 둘레의 허벅지를 찾는 건 너무 힘든 일인 것 같아 시간이 촉박하진 않을까 걱정했는데 알고 보니 그 시간은 그저 노 대표님이 술을 깨기 위한 시간이었다.사연희가 오해한 걸 알아차린 정민아는 해명하기도 귀찮아져 그냥 사연희를 데리고 나가려 했는데 그때 공민찬이 나오면서 말했다.“고 대표님, 방금 룸까지 다 확인했습니다. 사모님의 머리카락 한 올도 발견하지 못했습니다.”“...”그 말이 끝나자 주위의 공기는 순식간에 어색해졌다.고연우는 공민찬을 흘겨보며 언짢은 듯 말했다.“너만 입 달렸어?”“죄송합니다, 제가 괜한 소릴 했네요.”공민찬은 사과 하나는 빨리하며 바로 다시 입을 열었다.“그런데 사모님께 말씀은 하셨어요?”“...”“대표님, 계속 이런 식으로 하시면 사모님 마음 못 돌려요. 사모님이 최민영 씨한테 괴롭힘 당할까 봐 문 앞에 사람까지 세워서 지키시면 뭐해요, 이런 건 대표님이 말씀 안 하시면 사모님은 영영 모르실 텐데요. 그럼 감동도 못 받으실 테고 사모님이 감동하지 못하시면...”그런 공민찬을 보던 사연희는 주먹을 말아쥐며 입술을 깨물더니 정민아에게 귓속말을 했다.“안 되겠어, 나 여기 더는 못 있겠어.”밖으로 나가기 전 사연희는 한 번 더 공민찬을 자세히 들여다보았다.사연희가 만약 공민찬처럼 말 많고 사실만 얘기하며 아픈 데를 콕콕 찌르는 비서를 뒀다면 얼마 참지 못하고 짜증을 냈을 텐데 무표정으로 듣기만 하는 고연우를 보니 허벅지 대표님의 성격은 꽤 차분해 보였다.“입 다물어.”그 차분한 고연우도 더는 듣기 싫었는지 미간을 잔뜩 찌푸린 채로 공민찬 손에 들려있던 차 키를 뺏어 들고는 정민아를 보며 말했다.“가자.”“응.”정민아의 대답을 들은 고연우의 발이 허공에 잠시 머물렀다가 한참 만에 땅에 닿았다.정민아의 조롱 섞인 거절이거나 분노는 너무나 익숙하고 오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