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연히...”박태준은 칭찬을 바라는 눈빛으로 신은지를 바라보다가 그녀의 안색이 어두워진 것을 눈치채고 급하게 화제를 돌렸다.“은지야, 너무 보고 싶었어.”별장 외벽은 베란다의 보호난간 외에 지탱할 만한 곳이 없었기에 힘들게 높이 뛰기로 벽을 타야만 했다. 만약 한 치의 오차라도 나면 바닥에 떨어져 발을 삐끗하거나 다리가 부러질 수 있었고 운이 더 나쁘면 큰 사고를 초래할 수도 있었다.신은지는 위험한 일을 하고 오히려 칭찬을 바라는 그를 보면서 화가 나지 않을 수 없어 따져 물었다.“어떻게 올라왔냐고!”박태준은 기가 죽어서 나지막한 목소리로 답했다.“외벽을 타고 올라왔어...”신은지는 자기 때문에 그가 무모한 짓을 했다는 걸 알기에 간신히 화를 억누르면서 말했다.“다음부터는 이렇게 위험한 일 하지 마!”“알겠어.”신은지의 화가 수그러들자, 그는 기쁜 마음에 그녀를 꼭 껴안았다.날이 저물어 가는데도 돌아갈 기미가 보이지 않는 박태준에게 그녀가 무뚝뚝한 표정으로 물었다.“오늘 밤 여기서 잘 생각이야?”“조금만 더 있다가 갈게.”“?”신은지는 평소 자기와 한시라도 떨어지지 않으려던 박태준이 자발적으로 돌아가겠다고 하니까 조금 놀랐고, 박태준은 손을 뻗어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은지야, 내가 가지 말았으면 좋겠어? 조금만 참아, 우리 결혼식만 끝나면 매일 붙어 있을 수 있어.”“평소답지 않게 왜 갑자기 점잖게 굴어?”“아버님께서 원래도 날 마땅치 않아 하시는데 내가 몰래 네 방에 들어온 걸 알면 더 싫어할 거야.”별장 주변 곳곳에 감시 카메라가 설치되어 있었기에 강태민이 그가 들어온 걸 모를 리가 없었다.“아빠가 정말 모른다고 생각해?”그러나 박태준은 강태민이 노발대발하며 찾아오지 않은 것으로 보아 그가 모른다고 판단하고 자신 있게 답했다.“절대 모르실 거야!”신은지는 위험하게 또 베란다 쪽으로 내려가려는 그를 붙잡으면서 말했다.“아빠가 잠들었을 시간이니까 안전하게 정문으로 가.”말이 끝나기 무섭게 그녀는 방문을 열었
결혼식 뒤풀이가 끝난 후, 술에 흠뻑 취한 진유라는 신은지의 손을 잡고 쉴 새 없이 재잘댔다.“은지야, 너 꼭 행복해야 해! 만약 태준 씨가 널 괴롭히면 망설이지 말고 나한테 말해, 내가 너 대신 복수해 줄게.”“알겠어.”진유라는 신은지가 그동안 겪었던 아픔을 생각하면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다들 지난 일에 연연하지 말라고 하는데 넌 왜 계속 같은 구덩이에 빠지려고 해.”곽동건은 진유라가 예전 일을 들추려고 하자, 황급히 자기 품으로 끌어당겼다.“유라 씨가 술에 취해서 제정신이 아닌 것 같아요, 우리 먼저 들어가 볼게요.”진유라는 자기가 취했다는 말을 듣자마자 노여운 감정이 북받쳐 올랐다.“내가 어딜 봐서 취했다는 거예요? 나 지금 한 병 더 마실 수 있을 정도로 엄청 멀쩡하다고요, 못 믿겠으면 봐봐요!”곽동건은 술에 취한 그녀한테 도리를 따져봐야 소용없다는 생각에 순응했다.“유라 씨 말이 맞아요, 당신이 아니라 내가 취했어요. 우리 이제 들어갈까요?”진유라는 곽동건의 손을 매정하게 뿌리치면서 말했다.“난 은지랑 할 얘기가 많이 남았으니까 상관하지 말고 혼자 들어가요!”“내가 술에 취해 앞이 잘 안 보여서 유라 씨의 부축이 필요해요.”“천천히 걸어가면 되잖아요. 더 이상 나랑 은지의 시간을 방해하지 말아요.”진유라는 신은지의 팔을 꼭 껴안으며 곽동건을 경계하는 눈빛으로 노려보았다.“당신 누구예요? 왜 나한테 부축해달라고 하는 거죠?”곽동건은 남자 친구조차 기억하지 못할 정도로 취한 진유라를 보면서도 화를 내지 않고 침착하게 말했다.“유라 씨, 시간도 늦었는데 오늘은 이만하고 내일 다시 얘기하는 건 어때요?”“싫어요!”“내일 은지 씨도 아침 일찍 출근해야 하는데, 당신 때문에 잠을 못 자서 힘들어하면 어떡해요!”“생각해 보니 맞는 말이네요. 은지가 피곤하면 안 되죠, 우리 들어가요!”진유라는 곽동건의 타이름에 쉽게 수그러들었고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가면서 신은지를 향해 힘껏 손을 흔들었다.신은지도 웃으면서 그녀를 향해
곽동건은 편의를 위해 진유라를 안아서 세면대 위에 올려놓았고 클렌징 오일을 그녀의 얼굴에 펴 바르기 시작했다.진유라는 그의 거친 손길에 얼굴이 따끔거렸지만, 심기를 건드리면 안 되겠다는 생각에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조용하게 있었다.얼마 뒤, 얼굴을 닦아주기 위해 그가 몸을 돌려 수건을 가지려는 순간, 진유라는 결국 참지 못하고 불만을 털어놓았다.“동건 씨, 화장을 지울 줄 몰라요? 미지근한 물로 씻어야 말끔하게 지워지죠.”“무슨 요구 사항이 이렇게도 많아요! 어떻게 지워야 한다고요?”진유라는 그에게 화장을 지우는 법을 차근차근 가르쳐주면서 계속 투덜댔다.“미지근한 물로... 잘 배워둬요, 그렇지 않으면 어느 여자가 당신한테 시집을 오려고 하겠어요!”“누구한테 배워요? 케빈 아니면 찰스?”“찰스는 너무 무뚝뚝해서 안 돼요.”농담으로 건넨 말에 진유라가 진지하게 받아치자, 그의 표정이 순식간에 어둡게 변하면서 상처받은 듯한 목소리로 물었다.“그럼, 누가 무뚝뚝하지 않고 자상해요?”진유라는 눈치 없이 흥분해서 여러 명의 이름을 말하다가 금세 풀이 죽어서는 몸을 축 늘어뜨렸다.“안 간 지 오래돼서 그 사람들이 아직 있는지 모르겠네요.”“너무 아쉬워하는 것 같은데요?”곽동건은 진유라가 머리를 푹 숙인 채 한참 동안 반응이 없자, 그녀의 턱을 잡아 머리를 들어 올렸고 화장기 하나 없는 얼굴이 불빛에 비쳐서 엷은 진홍빛을 띠었다.그녀는 정말로 잠든 것인지 아니면 잠든 척하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때마침 욕조의 물이 가득 찼고, 곽동건은 허스키한 목소리로 진유라를 깨우면서 안아 들었다.“유라 씨, 정신 차려봐요...”사귄 지 1년이 넘은 두 사람은 분위기에 취해서 선을 넘을 뻔한 적은 있었지만, 실제로 잔 적은 한 번도 없었다.진유라는 시끄러운 쇠에 눈썹을 찡그리며 천천히 눈을 떴고 초첨 없이 그의 얼굴을 쳐다봤고, 곽동건은 만취한 그녀가 혼자 샤워하도록 내버려둘 수 없어 한마디 했다.“유라 씨, 혼자 벗을 수 있어요? 내가 벗겨줄까요?”
결혼식 다음 날, 신은지는 정오가 되어서야 잠에서 깨어났고 눈이 부신 햇살 때문에 눈이 따가웠지만 온몸이 시큰거려서 움직일 수 없었다.박태준은 언제 일어났는지 이미 방에 없었고, 그녀는 나른하게 기지개를 켜고는 커다란 침대에서 뒹굴었다.이때 방문을 두드리는 소리와 함께 가사 도우미의 나지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사모님, 진씨 성을 가진 아가씨가 지금 아래층 거실에서 기다리고 있어요.”신은지는 진유라가 왔다는 말에 급하게 침대에서 일어나 옷을 주섬주섬 입었다.“태준이는요?”“대표님도 아래층에 계십니다.”세수를 마치고 내려온 신은지는 진유라가 피곤한 얼굴과 화장으로도 가릴 수 없을 정도의 짙은 다크써클로 소파에 앉아 있는 것을 보고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너무 피곤해 보이는데 어젯밤 뭐 했어?”가사 도우미는 따뜻한 꿀 대추차와 간식 몇 접시를 가져다주면서 말했다.“대표님께서 점심을 먹으려면 아직 20분을 더 기다려야 한다고 먼저 간식을 드시라고 하시네요.”진유라는 기운이 없는 듯 나른하게 소파 등받이에 기대고 앉아 있다가 신은지의 귀에 대고 나지막한 소리로 몇 마디 했다.“그게...”때마침 차를 마시고 있던 신은지는 진유라의 말에 충격을 받아 사레에 걸려서 연신 기침까지 했다.“너 정말 대단해! 그래서 우리 집에 피신 온 거야?”진유라는 이를 드러내면서 환하게 웃었다.“은지야, 나 며칠만 여기 있게 해줘. 안방이랑 가장 멀리 떨어진 방에서 너희 두 사람을 방해하지 않도록 조용히 있을게.”어젯밤 진유라는 여기저기서 들은 팁으로 자기가 잠자리를 리드할 수 있을 거라고 자신만만했지만, 결국 곽동건의 뜨거운 욕망에 짓눌려 속수무책으로 끌려가야만 했다.밤새도록 곽동건의 거친 움직임을 받아들여야 했던 진유라는 온몸이 욱신거렸고 자기의 집과 호텔보다는 신당동이 안전할 것 같아 눈 뜨자마자 여기로 온 거였다.진유라는 어젯밤 일이 또다시 떠올라 얼굴을 붉히면서 신은지에게 불만을 털어놨다.“은지야, 어젯밤 동건 씨가 얼마나 날 거칠게
진유라는 곽동건이 너무 빨리 자기의 위치를 알아낸 것으로 보아 누군가가 그에게 알려줬다고 생각했다.“은지가 알려줬을 리는 없고, 설마 태준 씨가 당신한테 연락했어요?”“네.”곽동건의 너무 빠른 인정에 당황한 진유라가 비꼬는 말투로 다시 물었다.“당신이 이렇게 빨리 태준 씨를 팔았다는 걸 알면 얼마나 후회하겠어요!”“각자 필요한 것만 이용하는 거지, 팔아넘긴 건 아니죠.”진유라는 눈까지 희번덕거리며 침대에 가만히 앉아 있었다.“...”대화를 나누는 동안, 밖은 이미 어둑어둑해졌고 희미한 가로등 불빛이 방안을 비추고 있어 두 사람의 표정이 흐릿하게 보였다.곽동건은 눈썹을 치켜올리며 신은지에게 물었다.“내가 바지까지 입혀 줄까요?”진유라는 어젯밤 아픔을 참지 못하고 곽동건에게 베개를 내던진 것이 생각났다.“당장 나가요!”“그러니까 얼른 옷 입어요, 내가 집까지 데려다줄게요.”진유라가 당장이라도 폭발할 것처럼 눈을 동그랗게 뜨자, 그는 더 이상 그녀를 놀렸다가는 큰일이 날 것 같아 급히 자리에서 일어나 방을 나가면서 한마디 했다.“유라 씨, 나 며칠 동안 지방 출장이 잡혔어요.”환한 조명 아래의 곽동건은 청춘 드라마의 남자 주인공을 할 수 있을 정도로 늘씬한 자태와 잘생긴 외모를 뽐내고 있었다.진유라는 어젯밤 자기가 술에 취해 주정을 부려서 곽동건의 욕구를 불러일으켰기에 다른 사람을 원망할 수도 없었고 자꾸만 야한 생각과 생동감 넘치는 야릇한 장면이 떠올라 얼굴이 붉어졌다.그녀는 일부러 곽동건을 골탕 먹이려고 방에서 늦게 나온 것보다 움직일 때마다 온몸이 쑤셔서 빨리 행동할 수 없었다.게다가 곽동건을 피하고자 신당동을 온 거였는데, 그가 출장을 간다고 하니 더 이상 신은지와 박태준의 알콩달콩한 신혼 생활을 방해하면서까지 이곳에 머물 이유가 없었다.“가요.”곽동건은 그녀가 다리를 절뚝거리며 힘들어하는 모습을 보고 얼굴까지 찡그리며 걱정되는 말투로 물었다.“아직도 아파요?”“동건 씨가 이런 걸 물어볼 자격이 있어요? 당신이 조금만
5월, 신은지는 한 프로그램의 녹화를 한 적이 있었다.강혜정은 지인들과 집에 모여 수다를 떨고 있었고, 그중 한 명이 리모컨을 들고 채널을 돌리다가 신은지가 프로그램에 출연한 것을 보고 흥분해서 언성을 높였다.“빨리 이거 봐봐요! 방송에 나오는 사람이 혜정 씨 며느리가 맞죠?”다른 사람과 대화를 나누던 강혜정은 고개를 돌려 TV를 응시했고, 지인의 말대로 신은지가 문화재 복구에 몰두하고 있는 모습이 방송되고 있었다.“평범한 사람은 출연도 못 하는 프로그램에 나온 걸 보면 너무 대단하지 않아요?”강혜정은 사실 신은지가 방송 출연에 대해 언급한 적이 없어서 무슨 프로그램인지 전혀 몰랐지만, 과장된 표현까지 써가면서 자랑하기에 바빴다.그중 한 명의 지인이 조심스럽게 화제를 전환했다.“태준이랑 은지가 결혼한 지도 꽤 됐는데 아이는 언제 가질 생각이래요?”강혜정도 두 사람이 아이를 빨리 가졌으면 하는 마음이었지만, 스트레스를 주고 싶지 않아 먼저 말을 꺼내지 않고 있었다.“맞아요, 여자는 나이가 들수록 아이를 가지기도 힘들고 출산 후유증도 많은 데다가 회복도 느리잖아요.”“내 친정 조카딸은 올해 둘째를 낳자마자 셋째를 계획하고 있대요. 아직 어려서인지 임신과 출산을 연달아 해도 회복이 빠르고 힘든 기색이 하나도 없더라고요.”“맞아요! 여자는 한 살이라도 젊을 때 아이를 낳아야 해요. 내 남편의 동료는 젊었을 때 사업에 몰두하느라고 아이를 가지는 시기를 놓쳤는데 30대가 되어서 낳으려고 하니까 뱃속 태아를 지키는 데만 몇십만 원이나 들었대요.”강혜정은 그녀들의 얘기를 들으면 들을수록 마음이 더 복잡하고 불안해졌지만 애써 태연한 척했다.“두 사람은 아직 둘만의 시간이 좋대요. 그리고 은지가 올해 겨우 26살이니까 적어도 2년은 더 놀아도 괜찮아요.”그녀의 말에 한 여자가 고개를 끄덕이며 맞장구쳤다.“요즘 젊은이들은 우리랑 다르게 자기주장이 센 편이죠. 부모님이 아무리 잔소리해도 들으려고 하지 않잖아요!”“월명사가 용하다고 하던데 우리 오늘 다른
그 이후로 박태준과 신은지는 아이에 관한 이야기를 하지 않았지만, 그는 불안한 눈빛으로 신은지의 배를 힐끔힐끔 쳐다봤다.시간이 조금 흐른 뒤, 신은지도 그의 시선을 알아채고 대뜸 물었다.“아이를 갖고 싶어?”박태준은 고개를 끄덕이다가 이내 좌우로 가로저었다.사실 그에게 있어서 아이를 가지는 것보다는 자기가 불임인지 아닌지가 더 중요했고 신은지가 자기한테 실망할까 봐 더욱 걱정되었다.이런 불안한 나날들이 두 달 동안 계속되었고, 박태준은 결국 남몰래 비뇨기과 검진을 예약했고 모자와 마스크로 중무장을 한 후, 병원에 가서 검사를 받았다.그는 샘플을 채취한 용기를 실험실에 맡겼고, 담당 간호사는 바쁜 나머지 고개도 들지 않고 말했다.“여기 샘플 보관함에 두시고 오후 3시에 검진 보고서를 찾으러 오시면 됩니다.”수상쩍은 남자가 창가 구석에서 주위를 살피다가 박태준이 떠나자마자 박태준의 샘플을 자기의 샘플 용기에 부은 다음 빈 용기를 가지고 태연하게 화장실로 향했다.사실 그 수상쩍은 남자는 결혼 6년이 지나도 임신 소식이 없자, 1년 안에 임신하지 못하면 이혼하라는 처가의 최후통첩에 자기가 불임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아내와 함께 검사를 받으러 온 거였다.그러나 그 남자는 자기가 불임이라는 직감이 강하게 들었고 편안한 데릴사위 생활을 유지하기 위해 샘플을 바꿔치기하기로 마음먹고 오전 내내 건장한 남자를 물색했다. 결국 박태준이 그의 타깃이 되었고, 모두를 철두철미하게 속이기 위해 미리 경비실까지 매수한 상황이었다....박태준이 차에 올라타자마자 신은지에게서 전화가 걸려 왔지만, 그는 마음이 복잡한 나머지 화면을 한참 동안 뚫어져라 쳐다보다가 목소리를 가다듬고 전화를 받았다.“은지야...”“뭐해?”“나...”박태준의 시선은 무의식적으로 병원을 향하면서 여러 가지 변명을 생각했지만, 막상 입을 열었을 때는 머릿속이 하얘져서 대충 둘러댔다.“일이 있어서 밖에 나왔어, 왜 그래?”“그럼, 점심에 회사로 들어와? 너랑 점심을 먹으려고 지
“저도 검사받으러 왔는데 결과가 아직 안 나와서 좀 긴장돼요.”말하고 나서 그는 떨리는 손을 박태준에게 보여주었다.“미리 공부하려고 그래요. 많이 보면 제 차례가 됐을 때 긴장되지 않을 것 같아서요. 다 남자니까 이해해요.”그는 박태준의 어깨를 두드리며 따뜻한 인사를 건네려고 손을 뻗었지만 박태준이 피했다. 남자는 민망해하지도 않고 가까이 다가와 나지막이 말했다.“이런 일은 남자들이 알지 여자들은 비웃기만 해요. 우리는 낯선 사람이니 문을 나서면 다시 볼일도 없잖아요. 정말 뭐가 있으면 제가 당신의 감정 쓰레기통이 되어줄게요.”그는 티 나지 않게 신은지를 훑어보았다. 옷부터 가방, 신발까지 명품 아니면 슈퍼 VIP만이 받을 수 있는 신상품이었다. 마지막에 그녀의 얼굴에 시선이 닿자 그는 눈이 번쩍 뜨였다.아내의 몸매와 외모가 그녀의 10분의 1이라도 된다면 그는 밥만 축내는 등처가가 되지 않았을 것이다. 아무리 못해도 자기 힘으로 노력해서 양말 한 켤레라도 사 주었을 것이다.손에 들고 있는 휴대폰이 윙윙 진동했다. 그의 부자 아내에게서 걸려 온 전화다. 마음이 급한 그는 박태준을 향해 눈을 찡긋했다. 무슨 뜻인지는 말하지 않아도 안다.“제가 한의사를 아는데 위로 3대를 거슬러 올라가면 궁중의 어의...”박태준은 그에게 현혹되지 않았다. 박씨 집안에서 자란 그는 어릴 때부터 사기 식별 공부를 얼마나 많이 했는지 모른다. 이 사람이 친절하게 굴수록 문제가 있다고 생각한 그는 미간을 찌푸리며 신은지 앞을 막아섰다.“가세요. 계속 이러면 경비원을 부를 거예요.”남자는 표정이 굳어지더니 달갑지 않은 듯 욕지거리를 하면서 혹시라도 박태준이 마음을 바꾸지는 않을까 싶어 계속 뒤를 돌아보았다.이 소동이 있고 나서 박태준은 더 답답했고 심지어 불길한 예감까지 들었다. 그 남자가 계단을 내려가는 것을 보고 그는 검사결과지를 들고 의사를 찾아갔다.의사는 검사결과지를 훑어본 후 박태준을 쳐다보면서 콧등의 안경을 쓸어올리고 입을 열었다.“사정자증이에요. 살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