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은지는 속으로 역시 거짓 형제애라고 생각했다.그녀는 더 이상 말하지 않았고, 아직 봐야 할 서류가 많이 남은 박태준도 일을 봤다. 다만 30분 후 왕준서가 문을 두드리더니 배달 음식 봉지를 들고 들어왔다.“대표님, 유성 도련님이 보낸 물건입니다.”그는 책상 앞으로 성큼성큼 다가오더니 뭐가 들어 있는지 감히 말하지 못한 채 물건을 놓고 황급히 돌아섰다.봉지가 밀봉되지 않은 까닭에 안에 뭐가 들어 있는지 봤기 때문이다.박태준은 신은지가 지켜보는 가운데 물건을 봉지에서 꺼냈다. 예쁘게 포장된 찻잎이었고, 검은색 선물 상자에 차 이름이 적혀 있었다.“...”차 이름을 본 신은지가 참지 못하고 웃으면서 박태준을 향해 엄지손가락을 내밀었다.“잘 어울려. 고급... 차야.”“...”‘내가 욕하는 말인 걸 모를 줄 알아?’그는 찻잎을 한쪽에 내팽개치고 퇴근할 때까지 다시 건드리지 않았다....박태준이 회사로 복귀했고 건강에도 큰 문제가 없으니 신은지도 자기 일을 보기 시작했다. 이튿날 그녀는 박물관에 나가 휴가를 취소했다.그녀는 동료들을 위해 커피를 주문했고, 또 청소 담당 아주머니를 포함한 모든 동료에게 기념품을 선물했다. 조용하던 작업실이 갑자기 떠들썩해졌고, 동료들은 그녀에게 다가와 반년 동안 여행을 실컷 했냐고, 박태준과는 언제 결혼식을 올릴 거냐고 물었다.박태준이 아프다는 사실은 숨겼고, 신혼여행을 간다는 이유로 휴가를 냈다.“혼인신고는 했고 결혼식 날짜는 아직 미정이에요. 확정되면 알려드릴게요.”어떤 사람들은 부러워하면서도 질투했다.“나는 언제면 이렇게 운 좋게 재벌집 귀공자와 결혼할 수 있을까? 그때는 전 세계를 여행할 거야. 더 이상 할인 티켓을 위해 수많은 앱을 비교할 필요도 없겠지.”“은지가 시집을 잘 갈 수 있었던 게 단지 운이 좋아서만은 아니야. 능력이 있어서 박 대표님의 마음에 든 거지.”“...”휴가를 취소했지만 정식 출근은 다음 주 월요일부터다. 진유라가 밖에서 기다리고 있기 때문에 신은지는 동료들과 잠깐 얘
신은지는 진유라가 무슨 말을 하는지 듣지 않았지만 결국 그녀가 패배할 것임을 알기에 주문할 때 직접 4인분을 시켰다.곽동건이 재경그룹에서 온다면 박태준과 함께 올 가능성이 높다.예상한 바와 같이 진유라가 전화를 끊기도 전에 박태준에게서 문자가 왔다.“나랑 동건이 함께 갈 거니까 음식을 많이 시켜.”“알았어.”진유라가 두 손으로 턱을 괴고 축 처진 모습으로 한숨만 연달아 쉬었다.“곽동건이 오겠대.”“응, 주문했어.”“왜 전혀 놀라지 않아?”“곽 변호사 앞에서 언제 한 번 이겨본 적이 있어?”“...”진유라는 변명하려 했지만 입을 벌린 채 말을 내뱉지 못했다. 곰곰이 되짚어보니 그녀는 확실히 곽동건 앞에서 한 번도 당당했던 적이 없었다.그녀가 좀 떠벌리는 성격이긴 하지만 매번 그녀의 잘못은 아닐 것이다. 그녀가 법을 모른다고 곽동건이 일부러 법률 조항으로 그녀를 단속하는 게 분명하다.두 사람이 30분 넘게 얘기를 나눈 후에야 박태준과 곽동건이 도착했다. 그녀들이 왔을 때 이미 늦었는데, 또 30분 지체되니 식당에는 몇 테이블만 남았다.진유라가 투덜거렸다.“직원들이 청소하고 있어요. 퇴근이 늦어질까 봐 이쪽을 흘끔거리면서. 둘이 아무 데서나 먹으면 안 되나요?”박태준이 신은지 옆에 앉았다.“은지는 내 아내니까 당연히 나랑 같이 먹어야죠. 동건이 왜 왔는지는 직접 물어보세요.”곽동건은 말을 아꼈다.“네.”“...”진유라가 쏘아붙였다.“당신에게 물어봤어요? 왜 대답해요? 빨리 밥이나 먹어요. 배고파요.”샤부샤부를 먹길 잘했다. 한식이었으면 이때쯤 다 식었을 것이다.그들에게 관심이 없는 박태준은 고개를 돌려 신은지에게 물었다.“쇼핑했어?”아까 밖에 있을 때 그녀의 옆에 있는 쇼핑백 더미가 보였다.“응, 쇼핑한 지 오래돼서 오늘 박물관에 휴가를 취소하러 나갔다가 오후에 마침 시간이 있어서 유라랑 쇼핑했어.”그녀가 출근한다는 말에 앞으로 낮에는 볼 수 없다고 생각하니 박태준은 기분이 즉시 가라앉았다.“벌써 출근해야 해?
순간 소년은 얼굴이 붉어지더니 더듬거리며 말했다.“제... 제 돈은 모두 카드에 있는데, 카드를 카카오페이에 등록하지 않아서...”곽동건은 전혀 동요하지 않고 냉담하게 말했다.“아래층에 현금인출기가 있고, 내 차에 POS기가 있는데, 어떤 것이 편리할까요?”“...”소년은 몇 초 동안 멍해 있다가 도와달라는 눈빛으로 진유라를 바라보았다.“진유라 씨...”잘생기고 어린 데다 몸매는 날씬하고 근육질이라 연예계에 진출하면 비주얼만으로도 수많은 누나 팬을 끌 것 같은 소년이 그런 눈빛으로 바라보자 진유라도 마음이 안 좋았다.그녀는 곽동건을 쳐다보았다. 그녀의 시선을 느꼈는지 곽동건이 그녀에게 싸늘한 눈빛을 보내왔다.“할 말이 있어요?”그녀가 아까워하는 게 무슨 소용이겠는가? 잘생긴 남사친을 위해 화를 낼 만한 배짱이 없는데. 하물며 이 사람은 그녀의 남사친도 아니다. 얼굴 하나 때문에 곽동건에게 대드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다. 그래서 그녀는 단호하게 머리를 흔들었다.곽동건은 다시 소년에게로 시선을 돌렸다.“갚을 거예요?”20대 청년은 한창 혈기가 왕성할 때다.“진유라 씨에게 빚진 돈인데,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당신이 뭔데 여기서 이래라저래라 합니까?”경인시에서 곽동건의 신분을 아는 사람이라면 감히 이렇게 말하지 못한다. 박태준을 건드리면 기껏해야 파산하겠지만 곽동건을 건드리면 감옥 가서 전과자가 되니까.진유라는 속으로 엄지손가락을 내들었다. 살아생전에 곽동건이 당하는 것을 보다니. 이렇게 통쾌할 수가. 그녀가 강 건너 불구경하듯 흥미진진하게 보고 있을 때, 불똥이 그녀에게로 튕겼다.소년과 곽동건의 시선이 자기에게 쏠리자 진유라는 깜짝 놀랐다.“왜 다들 나를 쳐다봐요?”곽동건이 웃는 듯 마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우리가 무슨 사이냐고 묻잖아요?”“당신에게...”물은 거 아니었어요?곽동건은 빛을 등지고 있어서 눈빛이 약간 차갑고 매서워 보였다. 그녀는 줏대 없이 침을 삼키고 말을 끝맺지 못한 채 답을 기다리는 소년에게 말했
아까 박태준이 그가 그녀를 차버릴 것이라고 말했을 때 그녀의 눈에 갑자기 밝은 빛이 감도는 것을 보았다. 분명 그렇게 되기를 바라는 눈빛이었다.“...”아무리 고급 차라도 차 안의 공간은 제한적이다. 가뜩이나 좁은데, 무거운 얘기까지 나누면 더욱 숨이 막힌다.그녀는 허구한 날 곽동건과 헤어지기를 고대했지만 정말 이 질문을 받았을 때 왠지 모르게 긴장됐다.곽동건은 그녀를 지켜보았다. 그녀가 대답하지 않으면 줄곧 그러고 있을 것처럼.그녀를 바라보는 남자의 눈빛은 엄숙하고 진지했다.진유라는 긴장한 듯 침을 삼키고 사실대로 말했다.“그렇게까지... 하지만 저는 따뜻한 남자친구를 찾고 싶어요. 입만 열면 원칙을 말하고 항상 저에게 법을 보급하는... 아버지가 아니라.”마지막 한 마디를 그녀는 잠깐 멈췄다가 아주 작은 소리로 말했지만 곽동건은 들었다.“...”후! 속마음을 털어놓고 나니 더 이상 겁낼 것 없는 진유라는 한꺼번에 쏟아냈다.“저는 스무 살까지 집에서 늦게 일어나면 아버지한테 혼나고...”진유라의 아버지는 원래 군인이었고, 진씨 가문에 돈도 많아서 일반 집안보다 규율이 엄했다.“이불을 개지 않으면 혼나고 일을 그르치면 혼나고 늦게 귀가해도 혼났어요. 어른이 된 후 겨우 독립해서 마음대로 할 수 있게 됐는데, 앞으로 40년 또 아버지 같은 사람과 살면서 매일 혼나고 싶지 않아요.”진유라는 멈추지 않고 불만을 늘어놓았다. 곽동건은 그녀의 말솜씨가 이렇게 좋은 줄 몰랐다. 그리고 그녀가 말하는 내용을 듣고 기가 막혔다.“그리고 우리가 정말 결혼해서 나중에 아이가 생긴다면 더 끔찍해요. 성격이 나 같으면 나처럼 매일 혼날 건데, 많이 혼난 아이는 우울증에 걸린대요. 성격이 당신 같으면 더 비참하죠. 저 혼자서 두 사람한테 혼날 거니까. 제가 오래 살아서 죽고 싶은 것도 아니고, 왜 그렇게 살겠어요?”불구덩이인 줄 뻔히 알면서도 눈을 가리고 뛰어드는 것은 연애에 올인하는 사람들이나 하는 짓이다. 그녀 같은 정교한 이기주의자는 절대 평생 그런
이렇게 급하고 격식을 갖추지 않은 것으로 볼 때 결혼 축하연일 가능성은 없다. 박태준이 반년 동안 경인시에 없었고, 또 급하게 떠났던 터라 상류층에서 여러 가지 추측이 난무했다. 이제 돌아왔으니 강혜정이 루머를 잠재우려고 연회를 마련했다. 이 기회를 빌려 박태준이 사람들의 얼굴을 익히게 하려는 목적도 있다.연회 장소는 신당동이었고, 신은지가 박태준 아내의 신분으로 그와 함께 사람들을 접대했다.그녀와 팔짱을 끼고 여유롭게 사람들과 인사하고 접대하는 모습에서 전혀 이상한 점이 보이지 않았다.연회가 시작되기 전까지만 해도 신은지는 어떻게 사람들 앞에서 감쪽같이 박태준에게 상대방의 신분을 알려줄지 고민했다. 그의 기억을 잃은 것에 대해 몇몇 가까운 사람들만 알고 있다. 오늘 온 사람들은 모두 지인들이라 알아보지 못하면 너무 난처할 것이다. 그런데 전혀 그녀가 필요하지 않았다.박태준은 사람들의 호칭을 알 뿐만 아니라 능숙하게 이야기를 나누었고 상대방이 무슨 말을 해도 잘 받았다.“기억이 돌아온 거야?”신은지가 고개를 옆으로 젖히고 술잔으로 옆얼굴을 가린 후 목소리를 낮추어 물었다.“아니.”박태준이 고개를 약간 숙이고 그녀의 모습을 흉내 내더니 둘만 들을 수 있는 목소리로 말했다.“미리 공부 좀 했어.”그는 진영웅한테 상류층 사람들의 자료를 사진, 배경, 취미, 인간관계까지 상세히 나열해 달라고 했다.두 사람의 혼인신고 소식을 공식 발표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 광경을 보고 사람들이 소곤거렸다.“박 대표님과 신은지 씨가 곧 좋은 일이 있을 것 같군요.”“그럴 때도 됐죠. 열애 사실을 공개한 지 언젠데요. 얼마나 잘 어울리는 한 쌍이에요?”시샘하는 사람도 있었다.“아직 혼인신고도 하지 않았는데, 어떻게 될지 모르죠. 내일 헤어질지도 몰라요. 그걸 누가 장담할 수 있겠어요? 게다가 전에 한 번 이혼했었잖아요. 혼인신고해도 확실하지 않은데, 신고도 하지 않은 지금이야 더 말할 것도 없죠.”축복, 부러움, 질투 등 여러 가지 감정이 담긴 이런 말들을 사
성격이 털털한 진유라는 신은지의 놀림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당당하게 말했다.“지금 동건 씨랑 만나는 중이니까 결혼 상대라면 당연히 그 사람밖에 생각나야 하는 거 아니야? 은지야, 나 생각보다 도덕을 지키는 사람이라고! 설마 날 바람둥이라고 생각했던 거야?”“됐어, 됐어. 너 한결같은 사람이란 거 나도 알아. 너 언제 결혼할 거야? 우리 이참에 같이 할래?”“우리는 아직 결혼 생각 없어. 네가 나랑 동반 결혼식을 하겠다고 계속 기다리면 태준 씨가 날 가만히 놔두지 않을걸?”형광등 아래 비친 진유라의 얼굴은 흠잡을 데 없이 빛났고 그녀는 애꿎은 케이크를 포크로 계속 찔러대면서 말을 이어 나갔다.“은지야, 넌 이미 혼인신고도 다 했잖아! 그래서 결혼식은 언제 올릴 거야? 지금 다들 너희 두 사람이 부부가 되었다는 걸 모르니까 여자들이 태준 씨를 꾀어서 박씨 가문에 들어오겠다고 난리잖아. 내가 방금 들어왔을 때도 많은 여자가 태준 씨를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어.”신은지는 곰곰이 생각하다가 입을 열었다.“경인에 돌아온 지 얼마 안 돼서 둘 다 너무 바쁘고 정신없어서 아직 정하지 않았어. 결혼식 날짜가 정해지면 너한테 첫 번째로 알려줄게.”“너 전혀 조급해하지 않는 것 같은데 내 착각이야?”“나 사실 별로 하고 싶지 않아.”진유라는 생각지도 못한 신은지의 말에 언성을 높였다.“돈이 모자란 것도 아닌데 왜 안 해! 평생 한 번뿐인 결혼식인데 안 하면 너 이후에 후회할 거야! 전에는 네가 태준 씨한테 마음이 없어서 결혼식을 안 올려도 상관없었지만, 지금은 서로 죽고 못 사는 사이인데 당연히 해야지. 게다가 태준 씨는 지금 주머니에 널 넣고 다니고 싶어 할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한테 너와의 관계를 알리고 싶어서 안달 났는데 결혼식을 올리지 않겠다는 네 말에 동의할 거로 생각해?”신은지의 시선은 무의식적으로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있는 박태준에게로 향했고, 그도 그녀의 시선을 느꼈는지 뚫어져라 쳐다봤다.이어 박태준은 아랫입술을 깨물더니 옆 사람과 몇 마디 하고
화장실 안 여자들의 대화는 끝날 줄 몰랐고 신은지는 어쩔 바를 몰라 고연우를 몇 번이고 힐끔힐끔 쳐다봤지만, 그는 예상외로 담담한 표정으로 대화를 듣고 있었다.신은지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떠나려는 순간, 그녀의 발걸음 소리에 고연우의 시선이 그녀에게로 향했다.“...”신은지가 뭐라 말하려고 할 때, 화장실 문이 벌컥 열렸고 곧이어 세 여자가 깔깔거리며 나왔다.그녀들은 험상궂은 표정의 고연우를 발견하고 얼굴이 굳어지면서 말까지 더듬거렸다.“연... 연우 도련님, 당신이 왜 여기에...”고연우는 섬뜩할 정도로 무서운 미소를 지으면서 나지막한 목소리로 물었다.“누가 무섭고 지독하다고요?”“...”그의 단도직입적인 물음에 세 여자는 어안이 벙벙해져서는 입을 꾹 다물었다.거실의 시끄러운 소리마저 배경음으로 바뀔 정도로 그들 사이에는 팽팽한 긴장감이 돌았고, 신은지도 남의 입에 오르내린 것이 자기가 아니었기에 마음 놓고 흥미진진한 이 상황을 지켜보았다.한편, 박태준은 신은지가 한참 동안 보이지 않자, 여기저기 그녀의 이름을 부르면서 찾아다녔다.살얼음판 같은 분위기를 깨는 박태준의 목소리가 들리자, 신은지는 그에게로 황급히 달려가면서 얼른 입을 막았다.“조용히 해! 여자들이 민아 씨의 뒷담화하는 걸 연우 씨가 들었어. 지금 분위기가 심상치 않아.”박태준은 고개를 한 번 끄덕이고는 한마디 했다.“우리는 이만 가지.”신은지는 한참이 지나도 세 명의 여자가 연회장에 나타나지 않자, 연신 복도 쪽으로 시선을 옮기면서 걱정이 가득한 목소리로 박태준에게 물었다.“연우 씨가 그 여자들한테 무슨 짓을 한 건 아니겠지?”신은지는 고연우와 정민아의 부부 사이가 얼마나 돈독한지는 몰랐지만, 박태준의 말에 따르면 그는 누군가가 아내를 죽이려고 달려든다면 1초의 망설임도 없이 대신 칼을 맞아줄 정도로 아내를 사랑하는 순애보라고 했다.그녀는 문득 고연우가 감정을 추스르지 못하고 세 여자에게 무슨 짓이라도 저지르기라도 한다면 연회의 주최자인 박씨 가문에서 책임을
신은지는 문득 박태준의 병세를 안 지 얼마 되지 않아 슬픔과 걱정스러운 마음이 뒤섞여 있는 와중에 그가 쓴 일기장을 보고 가슴이 뭉클해져서는 소파에 웅크리고 앉아 펜을 들고 그가 까먹었던 추억들을 보충해 주던 모습이 떠올랐다.그녀는 박태준이 지금은 두 사람의 과거에 대해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하더라도 자기의 곁에 있는 것만으로도 더없이 행복하고 고마웠다.신은지의 글씨체를 본 적 있는 박태준은 그녀가 쓴 내용이 맞다고 확신했지만, 그녀가 한참을 아무 말도 하지 않자, 확신이 불확신으로 변하면서 다시 물었다.“설마... 네가 쓴 게 아니야?”신은지는 자기의 글씨체를 뻔히 알고 있는 박태준이 계속 묻자, 답하고 싶은 마음이 점점 사라졌고 그녀가 대답하지 않을수록 그는 더욱 집요하게 물었다.“은지야, 이 내용들은 네가 쓴 거 맞아?”그녀는 집요하게 대답을 요구하는 박태준을 옆으로 밀쳐내며 퉁명스럽게 답했다.“아니, 귀신이 쓴 거야.”“네가 귀신이야?”“...”박태준은 원하던 답을 얻어내자, 표정이 눈에 띄게 밝아졌고 해맑은 미소와 함께 발걸음도 가벼워졌다.침실에 들어서자마자 그는 뒤에서 신은지를 끌어안고 그녀의 얇은 어깨에 턱을 기대면서 일기장의 한 구절을 가리키면서 진지하게 물었다.“은지야, 이때 너 나한테 조금이라도 마음이 있었어?”박태준은 신은지의 귓볼에 대고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하자, 순간 짜릿한 느낌이 그녀의 혈관을 타고 온몸으로 퍼졌다.신은지는 정신을 차리고 그가 손가락으로 가리키고 있는 내용을 내려다보았다.박태준이 가리키는 곳에는 신은지가 나유성을 따라 부자들의 등산 활동에 참여하러 갔다가 도련님들의 저질 체력을 사전에 고려하지 못한 주최자의 실수로 하산 시간이 원래 계획보다 4시간이나 늦어져 물과 음식이 부족한 상황이었던 날에 벌어졌던 일이 적혀있었다.그날 산 중턱까지 내려왔을 때, 다들 목마른 데다가 지쳐서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틈을 타 박태준은 마지막으로 남아있던 반병 정도의 물을 그녀에게 건네주었었다.그때의 신은지의 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