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수호가 뭐라고 말하려는 순간, 인턴이 신은지에게 궁금한 점을 물어보려고 찾아와서 결국 두 사람의 유쾌하지 않은 대화는 무산되고 말았고 그는 황급히 자리를 떴다.신은지에게 궁금한 점이 있어서 찾아왔던 인턴은 초롱초롱한 눈빛으로 물었다.“수호 씨가 하루 종일 선생님 주변만 맴도는데 설마 좋아하는 건 아니겠죠?”직원들은 지수호의 아버지가 정계에서 활약한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기에 그가 평범한 가정에서 자랐다고만 생각하고 있었다. 게다가 그들은 박물관과 관련된 전공을 졸업한 것도 아닌 데다가 직업에 대한 애정도 딱히 없는 것 같은 지수호가 박물관에 생각보다 오래 머무는 것을 보고 다른 목적이 있지 않을까 하는 의심까지 하고 있었다.“장난치지 마세요. 그리고 저 이미 결혼했어요! 제 남편이 소심해서 이런 말 들으면 엄청나게 질투해요.”“은지 선생님, 미안해요! 제가 생각이 짧았어요. 박 대표님한테는 절대 말씀드리지 마세요.”지수호가 하루 종일 업무 보고 외에는 신은지의 앞에 나타나지 않자, 그녀는 자기의 단호한 거절이 먹혔다고 생각했다.그러나 잠시 후, 지수호는 박물관 입구에서 퇴근하려는 신은지를 막아섰다.“은지 씨...”신은지의 떨떠름한 표정에 지수호는 밝게 웃으면서 말을 이어 나갔다.“은지 선생님, 그동안 당신의 가르침 덕분에 많은 것을 배우게 되어서 정말 고마워요. 그런 의미에서 제가 오늘 저녁을 대접하고 싶은데 괜찮으세요?”“사양할게요. 전 그동안 수호 씨에게 아무것도 가르친 게 없고 모든 건 당신의 노력으로 얻은 것이니까 그동안 고생한 자신을 위해 밥을 사는 게 맞는 것 같네요.”“...”그녀의 단호한 한마디에 지수호가 오후 내내 생각해 낸 핑계가 수포가 되었다.신은지는 지수호를 향해 가벼운 인사를 하고는 발걸음을 옮겼고, 몇 초 동안 멍하니 서 있던 그가 정신을 차리고 급히 쫓아갔다.“은지 씨, 당신한테 꼭 하고 싶은 말이 있어서 그래요. 여기서 할 말은 아닌 것 같으니, 장소를 옮겨도 될까요? 식사가 부담스럽다면 커피 한 잔
박태준이 눈살을 찌푸리며 기억을 더듬으려고 노력했지만, 애석하게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았다.“방금 지수호에 관한 자료를 훑어보다가 꽤 낯익은 이름을 봤어. 내 생각에는... 그 여자를 아는 것 같아.”신은지는 박태준이 지수호를 조사할 거라는 걸 짐작하고 있었기에 놀라지 않았다.“누구?”“공예지, 이름이 너무 익숙해.”신은지는 순식간에 온몸이 뻣뻣하게 굳어졌고 당황한 모습을 들키지 않으려고 메뉴판만 뚫어져라 보면서 말했다.“난 너한테 그 이름을 들어본 적이 없는데? 너무 흔한 이름이라서 네가 착각한 거 아니야?”박태준은 반신반의하는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면서 답했다.“그럴 수도 있겠네.”두 사람은 더 이상 그 이름을 언급하지 않았지만, 신은지는 복잡한 마음에 밥도 제대로 먹지 못했다.‘수호 씨가 어떻게 예지 씨를 알지? 두 사람이 나와 태준이 앞에 나타난 시기가 비슷한 건 정말 우연일까?’결국 신은지는 젓가락을 테이블에 내려놓고 휴대폰을 집어 들면서 말했다.“태준아, 그 자료 나한테 보내줘.”박태준은 신은지가 지수호의 자료에 관심을 보이자, 자기한테 무언가를 속이고 있다는 확신이 들어 입꼬리가 축 처졌다.“너 왜 갑자기 그놈한테 관심을 가지는 거야?”신은지는 잠시 박태준이 엄청난 소유욕과 질투심을 가진 남자라는 걸 잊고 있었다.그녀는 박태준의 질투심을 잠재우려고 말도 안 되는 변명을 늘어놓기 시작했다.“내 조수인 그의 흑역사에 대해 더 자세히 알면 일하는 데 도움 되지 않겠어?” 흑역사 얘기가 나오자, 박태준의 머릿속에는 과거 자신의 어리석었던 애정사가 떠올라 안색이 더욱 어두워졌다.“곧 아니게 될 거야.”“...”다음날 신은지는 지수호가 박물관 일을 그만뒀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정계에서 활동하는 아버지 밑에서 남 부러울 것 없이 부모님의 사랑을 독차지하던 외동아들이 그런 수모를 당했으니 그만둔 것도 당연했다.평소에도 자주 결석하는 지수호였기에 어젯밤 일을 있는 몇 명을 제외하고 대부분의 사람은 그가 출근하지 않았다는 것도
박태준은 순식간에 저력이 다시 솟아올랐고 눈살을 찌푸리며 강혜정을 바라봤다.“어머니, 저와 은지는 그 어떠한 어려움이 닥쳐도 포기하지 않을 거니까 우리 사이를 이간질하려고 하지 마세요!”강혜정도 어이없다는 눈빛으로 박태준을 노려보았다.“너 정말 누구 닮았니? 네가 은지를 만났으니 망정이지, 아니었다면 진작에 다른 사람에게 속아 넘어가 빈털터리가 됐을 거야!”이어 강혜정은 신은지 곁으로 더욱 가까이 가면서 말했다.“은지야, 태준이가 하는 말은 신경 쓰지 말고 우리 청첩장이나 고르자.”“좋아요, 어머님!”신은지는 며칠 동안 일에 집중하느라고 피곤이 쌓였는지 손으로 뒷덜미를 주물렀다.그 광경을 본 박태준은 급히 손을 뻗어 신은지의 목덜미를 주물러 줬고 그 덕에 피곤이 풀리면서 어지러운 증상도 완화되었다.강혜정은 청첩장을 고르는데 정신이 팔려 다른 건 신경 쓸 새도 없었다.“난 이 몇 개가 마음에 드는데 은지는 뭐가 좋아?”강혜정은 신은지가 박태준이 화해한 이후로 이날만을 기다려왔기 때문에 신은지의 취향에 따라 모든 것이 진행되길 바랐다.신은지는 강혜정이 고심 끝에 고른 몇 개의 청첩장을 유심히 들여다보면서 말했다.“다 예쁘지만 저는 이게 더 좋아요.”“그러면 은지가 선택한 걸로 내일 주문할게. 웨딩드레스랑 이브닝드레스는 생각해둔디자이너가 있어? 날짜를 맞추려면 조금 서둘러야 할 것 같아.”청첩장, 웨딩드레스, 예식장 스타일과 사회자까지 두 여자의 토론은 갈수록 뜨거워졌지만, 박태준은 한마디도 끼지 못했다.피로연이 끝나고 하객들에게 줄 답례품에 관한 이야기가 오고 갈 때, 박태준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한마디 했다.“어머니, 아무리 그래도 제 결혼식인데 저도 대화에 참여해야 하지 않을까요?”“넌 돈만 내면 돼. 지인들에게 청첩장을 돌리고 결혼식 당일에 턱시도를 입고 무대에 오르는 거로는 부족해?”“그래도...”박태준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강혜정이 단칼에 그의 말을 끊어버렸다.“내 말에 토 달지 마! 게다가 미적 감각도 없는 네가
늦은 시간 주사를 맞고 병원에서 나오자, 진유라는 피곤한지 하품하면서 말했다.“동건 씨, 혼자 택시를 타고 갈래요? 나 너무 졸려서 먼저 들어갈래요.”그녀가 차 문을 당기고 허리를 굽혀 타려는 순간, 곽동건이 따라와서 붙잡았다.“유라 씨, 저 방금 주사 맞았다고요. 택시도 잘 잡히지 않는 한밤중에 날 매정하게 버리고 갈 거예요?”진유라는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그를 노려보았다.“다 큰 남자가 납치라도 당할까 봐요?”“...”곽동건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진유라를 뚫어져라 쳐다봤고 결국 그녀는 짜증이 가득 섞인 얼굴로 차에 타면서 말했다.“데려다줄 테니까 빨리 타요. 내가 정말 동건 씨 때문에 못 살겠어요!”진유라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투덜거렸지만, 곽동건은 그녀의 말에 입까지 삐죽 내밀면서 조수석에 탔다.열심히 운전하던 진유라는 차를 유턴하다가 눈을 지그시 감고 있는 곽동건을 발견하고는 걱정스러운 말투로 말했다.“불편한 거 있으면 말해요.”절차대로라면 주사를 맞고 30분 정도 병원에서 경과를 지켜봐야지만, 기어코 집에 가겠다는 곽동건의 고집을 꺾지 못하고 두 사람을 병원을 나와버렸기에 그녀는 곽동건이 혹시라도 불편할까 봐 불안했다.“알겠어요.”그 이후로 두 사람은 그 어떤 대화도 나누지 않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녀의 차는 곽동건이 사는 아파트 밑에 도착했다. 그녀는 주차하자마자 휴대폰을 들어 신은지에게 못 했던 답장을 마저 보냈고, 곽동건은 내릴 생각 없이 여전히 조수석에 앉아 있었다.“왜 아직도 차에서 안 내려요?”“나 아직 불편해요. 기운도 없어서 걸을 수가 없어요.”진유라는 눈을 천천히 깜빡이더니 이내 곽동건에게로 가까이 다가가면서 물었다.“어디가 불편해요? 방금 의사 선생님의 말씀대로 병원에서 30분 동안 관찰해야 했어요. 지금이라도 다시 병원에 갈래요?”“그 정도는 아니에요. 집에 올라가서 좀 쉬면 괜찮아질 것 같은데 지금 설 기운이 없네요. 나 좀 부축해 줄래요?”“알겠어요.”진유라는 손을 반쯤 뻗다가 다시 멈추고
곽동건은 진유라의 어리둥절해하는 표정을 보고 자기의 말뜻을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는 생각에 한숨을 내쉬며 그녀의 손을 잡고 집으로 향했다.곽동건의 따뜻한 손은 추운 겨울 날씨에 차갑게 얼어있던 신은지의 손을 녹여줬고, 그녀는 참지 못하고 나머지 한 손도 그에게 내밀면서 잡아달라는 신호를 보냈다.그는 진유라의 한 치 앞도 알 수 없는 귀여운 모습에 저도 모르게 입꼬리가 올라갔고 자연스럽게 그녀가 내민 손도 잡아줬다.하지만 이내 얼음장 같은 그녀의 손 때문에 눈살을 찌푸리며 물었다.“유라 씨, 손이 왜 이렇게 차가워요?”“겨울이니까요.”여자들에게는 겨울에 손발이 차가워지는 증상이 흔한 일이라고 생각한 진유라는 그가 왜 눈살까지 찌푸리며 심각한 표정인지 이해되지 않았다.“내가 아는 유명한 한의사가 있는데 시간 내서 진료를 한번 받아볼래요?”한약의 효과를 보려면 적어도 보름 정도 먹어야 했기에 쓰디쓴 한약을 먹기가 아주 싫었던 그녀는 단칼에 거절했다.“싫어요, 안 갈래요!”“한의학에서는 혈액순환이 원활하지 않거나, 신장이 허하면 손발이 차가운 증상이 생긴다고 해요. 아무리 흔한 증상이라고 해도 초반에 관리하지 않으면 큰 병을 초래할 수 있어요.”진유라는 곽동건이 자기한테 부축을 받으면서 이런 말을 하는 게 어이가 없었다.“나랑 동건 씨 중에 누가 더 허약한지 모르겠네요!”두 사람이 티격태격하는 사이 엘리베이터 입구에 도착했고, 그녀는 천천히 열리는 엘리베이터 문을 바라보면서 차분하게 말했다.“자, 엘리베이터 입구까지 데려다주었으니까 이제 혼자 올라가요.”진유라는 말이 끝나기 무섭게 황급히 몸을 돌려 도망갈 준비를 했고, 곽동건은 그녀가 이 말을 할 줄 알았다는 듯 그녀가 발을 떼자마자 단숨에 손을 잡아서 엘리베이터 안으로 끌어당겼고 순식간에 층별 버튼을 눌렀다.“엘리베이터 앞까지 데려다주는 법이 어딨어요! 당연히 집까지 바래다줘야죠.”그녀가 엘리베이터 문을 열려고 했지만, 이미 문이 닫히고 한 층씩 올라가고 있었다.진유라는 닫힌 엘리베이
박태준은 웨딩 업체 관계자와 미리 주말 예약을 잡았고 이른 아침 신은지와 함께 예식장 스타일을 고르러 갔다.두 사람이 도착하자, 스태프들은 먼저 다양한 콘셉트의 예식장 참고 사진들을 보여주면서 말했다.“고객님, 마음에 드는 게 있는지 먼저 보세요.”화려한 꽃들로 꾸며진 예식장 영상을 보던 박태준의 머릿속에 문득 자기가 눈부신 꽃들이 가득한 식당에서 검은 정장을 입고 짙은 색의 반지 케이스를 들고 프러포즈를 반복해서 연습하는 장면이 떠올랐다.그는 한쪽 무릎을 서툴게 꿇은 채 몇 번이고 준비한 대사를 되풀이하고 있었다.‘내가 수술에서 깨어났을 때, 이미 은지랑 혼인신고를 한 상태였으니까 이 기억은 더 이전의 기억인 걸까?’신은지는 박태준이 멍하니 같은 화면을 응시하는 것을 보고 걱정이 가득한 목소리로 물었다.“태준아, 왜 그래? 무슨 일이야?”박태준은 신은지의 목소리에 정신을 차리고 고개를 가로저으며 들고 있던 태블릿을 그녀에게 건네주었다.“은지야, 네가 봐봐! 어떤 스타일이 제일 마음에 들어?”신은지는 만물이 소생하는 봄을 연상케 하는 흰색 위주에 연한 초록색이 섞여 있는 가장 심플하면서도 우아하고 고급스러운 느낌의 스타일을 골랐고 스태프들도 너도나도 그녀의 안목을 칭찬했다.견적을 들은 그녀는 스태프들이 칭찬한 이유를 알 수 있었다.가격에 놀란 신은지와 달리 그녀의 취향이 고스란히 담긴 최고의 결혼식을 올리고 싶었던 박태준은 단번에 동의했다.“그럼 이걸로 하죠.”예식장에 필요한 세부 사항들을 일일이 협의한 후에야 두 사람은 웨딩 업체에서 나올 수 있었다.아무리 맑은 하늘에 햇살이 눈부시게 비춘다고 해도 매서운 겨울 날씨였기에 신은지는 밖에 나오자마자 추위에 몸을 부르르 떨었다.박태준은 얼른 외투를 벗어 그녀에게 걸쳐주고 단추까지 꼼꼼하게 채워주었다.워낙에 두껍게 껴입은 데다가 박태준의 외투까지 걸친 신은지는 중심을 잡기 위해 펭귄처럼 뒤뚱뒤뚱 걸으면서 물었다.“네 생각에는 이게 예뻐?”그녀가 손을 들어 외투 단추를 풀려고 하자,
부대 생활에 익숙한 진선호는 신은지를 부대 하사로 간주하고 습관적으로 팔을 그녀의 어깨에 걸치면서 말했다.“내 말 명심해서 들어... 윽!”다음 순간, 그의 손가락 마디가 부러지는 듯한 극심한 통증이 몰려왔고, 진선호는 일그러진 얼굴로 호흡을 가다듬었다.박태준이 신은지의 어깨에 올린 그의 팔이 거슬려서 손가락을 꺾은 거였다.“경고하는데 은지한테 집적거리지 마시죠!”사실 대낮에 남녀가 어깨동무하는 것은 그렇게 이상한 일도 아니었고 진선호의 평소 습관이기도 했기에 그는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그러나 소유욕이 강한 박태준에게는 자기 외에 다른 남자가 신은지의 몸에 손을 대는 것은 두고 볼 수 없는 일이었다.“내 여동생한테 어깨동무하면 안 되는 이유가 뭐죠?”진선호는 아픈 내색을 하지 않으면서 박태준을 노려보다가 고개를 돌려 신은지에게 물었다.“여기는 무슨 일이에요? 밥 먹으러 왔어요?”“웨딩 업체를 방문하러 왔어요.”진선호는 잠시 어리둥절해하다가 놀란 눈으로 물었다.“결혼식 날짜가 정해졌어요?”“3월 27일이에요.”“그럼, 신랑 들러리는 정했어요?”박태준은 순간 불길한 예감이 들어 두 사람의 대화에 끼어들었다.“이미 정했어요.”진선호는 박태준의 속내를 파악하고 환하게 웃으면서 말했다.“한 명 더 추가해도 괜찮죠?”박태준은 생각도 거치지 않고 단호하게 거절했다.“사양할게요.”절친인 나유성도 신랑 들러리로 세우기 싫어하는 그가 진선호의 제안을 동의한다는 건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결혼식에 들러리가 많으면 많을수록 좋은 거 아닌가요? 어려서부터 애지중지하던 여동생이 시집을 간다는데 적어도 12명의 들러리가 있어야 체면이 구겨지지는 않죠. 소박하게 준비했다가 사람들의 입방아에 오르는 것은 내가 참을 수 없어요!"“16명의 들러리를 준비했으니까 쓸데없는 걱정하지 마세요!”사실 두 사람이 정한 들러리는 진유라와 곽동건 두 명밖에 없었다.“16명이요?”진선호는 박태준이 거짓말하는 것을 단번에 알아채고 꼬치꼬치 따졌다.“은지한테는
그때까지도 신은지가 왜 대답을 피했는지 생각하고 있던 박태준은 담담하게 대답했다.“몰라. 잊어버렸어.”그러고는 고연우에 관한 자료에서 봤던 내용이 생각나서 한마디 덧붙였다.“너무 가깝게 지내지 마.”“왜?”그가 이렇게 말할수록 정민아에 대한 호기심은 커졌다. 이렇게 당부한 것이 처음이 아니기 때문이다.“...”박태준은 미간을 찌푸리더니 한참 후에야 적당한 표현을 생각해 냈다.“성질이 더럽고 사람을 때려.”“...”돌아가는 길에 박태준은 줄곧 기분이 가라앉아 있었다. 신은지가 묻는 말에만 대답하고 그녀가 말하지 않으면 입을 다물고 있었다. 신당동에 돌아온 후에는 바로 2층 서재로 올라갔다. 말 없는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신은지는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성격이 왜 이렇게 변덕스러울까? 여자라면 모르겠는데. 설마 남자도 매달 며칠씩 그런 날이 있는 건가?서재에서 박태준은 신은지와의 추억이 담긴 일기장을 들춰냈다. 하지만 일기는 기억이 아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다 읽었지만, 끊어졌다 이어졌다 하는 일기 내용에서 자기가 이전에 어떤 면에서 은지한테 못되게 굴었는지 생각나지 않았다. 그는 잠시 생각하다가 고연우에게 전화를 걸어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내가 이전에 은지한테 잘했어?”어릴 때부터 함께 자란 친구라면, 자주 만났을 것이고 서로의 연애사도 잘 알고 있을 것이다.고연우는 정민아와 며칠째 연락이 끊겨서 기분이 안 좋았다. 다른 사람에게서 그녀가 사고 나거나 아프지 않다는 것을 확인했으니 망정이지, 안 그랬으면 직접 외국으로 날아갔을 것이다. 마침 이때 박태준이 전화를 걸어와 이렇게 바보 같은 질문을 했으니 총부리에 달려든 셈이다.“내가 너네 집에 카메라를 설치한 것도 아닌데, 네가 잘해줬는지 못해줬는지 어떻게 알아?”“... 우리가 오랜 친구라며. 내가 한 번도 은지를 데리고 너희랑 같이 식사한 적이 없었어?”박태준이 이렇게까지 비굴하게 나오자, 고연우는 끝내 조금이나마 형제애를 보였다.“왜 과거에 얽매여 있어? 잘했든 못했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