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태준은 그럴 필요 없다고 말하고 싶었다. 이미 여러 의사를 찾아봤고 치료 방안을 제시한 의사도 있었지만 그는 줄곧 결심을 내리지 못하고 망설였다.그 방안의 동의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어렵게 신은지와 결실을 보게 된 시점에 어떤 이유로든 더 이상 사달이 나는 것을 원치 않았다.하지만 그녀의 걱정스러운 눈빛을 마주한 박태준은 고개를 끄덕였다.“그래. 병원 가자.”신은지는 그제야 만족했다.“아직도 아파?”남자는 고개를 저었다.“아니.”자세히 살펴보니 안색은 여전히 안 좋았지만 확실히 아프지는 않은 것 같았다.“어떤 의사들을 찾아봤어?”박태준은 인상 깊은 몇몇 의사 이름을 말하고, 방안을 제시한 의사는 일부러 생략했다.의학 전공자가 아닌 신은지는 이들 의사 이름을 들어본 적이 없지만 박태준이 찾은 의사라면 틀림없이 업계에서 능력을 인정받은 사람일 것이다.“이렇게 많은 의사가 다 방법이 없대?”“...응.”박태준은 피곤한 듯 관자놀이를 문지르며 눈을 감았다.그의 이런 모습에 신은지는 또 마음을 졸였다.“왜? 아직도 아파? 아니면 휴게실에 가서 좀 누울래? 내가 마사지해 줄게.”“그래.”박태준은 이제 머리가 아프지 않았지만 신은지와 더 가까이 있고 싶어 그녀가 말하자마자 동의했다. 하지만 그가 일어나기도 전에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리고 진영웅의 목소리가 문틈으로 새어 들어왔다.“대표님, 유성 도련님이 오셨어요.”“...”박태준은 미간을 찌푸렸고, 얼굴에 갑자기 튀어나온 이 방해꾼에 대한 싫은 기색이 역력했다.“안 만나.”말이 끝나자마자 나유성이 직접 문을 밀고 들어왔다. 그는 신은지를 향해 미소를 지으며 인사했다.“오늘 출근하지 않았어요?”“출근했다가 진 비서님이 태준이 아프다고 해서 휴가를 내고 왔어요.”박태준은 입술을 오므리고 시큰둥한 얼굴로 물었다.“넌 뭐 하러 왔어?”신은지가 오자 나유성이 뒤따라왔고, 그를 찾아왔다면서 들어오자마자 은지와 이야기를 나누었다. 박태준은 심지어 이 앞잡이 같은 자식이 자기를 방패
박태준은 그녀가 아까처럼 화를 내지 않고 태도가 누그러든 것을 보고 급히 약속했다.“다른 의사를 찾아서 다른 치료 방법이 없는지 알아볼 거야. 평생 아프지 않을 거야.”신은지는 화가 가라앉은 것이 아니라 생각에 잠겨 정신을 딴 데 팔았을 뿐이다. 정말 그의 말처럼 간단한 일이라면 나유성이 직접 달려오지도 않았을 것이다.“유성아, 이 병을 계속 치료하지 않고 놔두면 앞으로 어떻게 돼?”“그럼 아마 밧줄을 찾아서 묶어놓아야 할걸. 그렇지 않으면 나갔다가 돌아오는 길을 찾지 못할 거야. 기억력이 감퇴해 계산을 못하고, 말을 더듬고, 걸을 때 비틀거리고, 한마디로 치매 환자와 같은 모습일 가능성이 높아.”신은지는 할 말을 잃었고 박태준은 미간을 찌푸렸다.“무슨 헛소리하는 거야?”치매는 그가 반올림해서 얼떨결에 얼버무린 것이다.“은지야, 그렇게까지 심하지 않아. 저 자식이 헛소리하는 거 듣지 마.”“치매라고 말한 사람은 너잖아? 어떻게 내가 헛소리하는 게 됐지?”박태준은 지금 그가 너무 눈에 거슬린다.“넌 왜 아직도 안 가니?”“나는 뭐 화난 네 얼굴을 보기 좋아서 여기 있는 줄 아니?”신은지는 아까 들어오면서 책상 위에 내려놓은 가방을 들었다.“머리가 아프지 않다면 난 박물관에 일하러 갈게.”말하고 나서 박태준이 잡기도 전에 그냥 가버렸다.박태준은 눈살을 찌푸리며 나유성을 노려보았다. 그가 오기 전에 신은지는 휴게실에 가서 마사지까지 해주겠다고 했는데, 그가 오니 마사지는커녕 말도 쌀쌀맞게 했다.나유성이 굳은 표정으로 말했다.“의사가 이게 현재 유일하게 실행 가능한 치료 방안이라고 하던데, 정말 해보지 않을 거야?”박태준은 담배에 불을 붙이고 다시 의자에 앉았다. 연기 뒤 그의 표정은 쓸쓸해 보였다.“성공률이 얼마인지는 너한테 말했어?”나유성이 아무 말도 하지 않자, 박태준은 그가 알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40%야.”이 말을 할 때 그는 오묘한 표정을 지었다.“유성아, 난 결혼했어. 치료하다가 실패하면 죽어. 하지만 치료받
메시지를 보낸 지 2초 만에 강태민이 영상통화를 걸어왔다.“아버지...”연결되자마자 건너편에서 반백 살 넘은 남자가 그녀를 훑어보며 다급하게 물었다.“은지야, 어떻게 된 거야? 왜 갑자기 의사를 찾아? 어디 아파? 정신과 의사를 찾는 거야? 신경과 의사를 찾는 거야? 이름은 비슷하지만 치료하는 병은 달라.”말이 너무 빨라서 신은지는 겨우 중간에 끼어들 틈을 찾았다.“저 말고 태준이 아파요.”“오.”강태민의 격앙된 감정은 이내 가라앉았고, 얼굴에 글자만 쓰지 않았지 ‘그럼 괜찮아’라는 뜻이 뚜렷했다.“어디가 아픈데 의사를 둘이나 찾아? 돈이 너무 많아서 아픈 것도 다른 사람들과 다르대?”신은지가 박태준의 상황을 대충 얘기하자, 강태민은 잠시 머뭇거렸다.“내가 알아볼게.”“고마워요, 아버지.”그녀는 또 걱정되는 듯 강태민에게 몸은 괜찮은지 물었다. 전화를 끊기 전에 강태민이 갑자기 말했다.“내가 전에 보낸 사진 속 사람들을 좀 고려해 볼래? 많이 보고 다른 기회도 열어둬. 기민욱이 죽은 지 언젠데 이제야 후유증이 나타났어. 만약 이후에 또 다른 증상이 나타나면...”강태민이 사진 얘기를 꺼내자, 박태준은 즉시 귀를 기울여 들었고 머릿속에 신은지의 앨범에 저장돼 있던 눈꼴사나운 사진들이 떠올랐다.‘장인어른은 감상 수준이 왜 이 모양인지? 끔찍해.’‘그중에 은지와 어울릴 만한 사람이 어디 하나라도 있는가?’이런 생각을 하며 자세히 듣던 박태준은 안색이 점점 안 좋아졌다. 그가 시퍼렇게 살아 있는데도 다른 남자를 찾으라고 꼬드기는데, 그가 죽으면 장례식이 끝나기 바쁘게 그녀의 재혼 결혼식을 치르는 게 아닌가?신은지는 울 수도 웃을 수도 없었다.“아버지, 그 사람을 자극하지 마세요. 우리는...”그녀는 둘이 이미 결혼했다고 말하려 했지만 강태민이 말을 가로챘다.“자극하는 것이 아니라 사실이잖아. 아직 결혼 전인데 병이 났으니 신중하게 고려해야지. 만약 그 사람이 이후에 바보가 되면...”박태준이 벌떡 일어나 신은지 쪽으로 성큼성큼
업무 처리 속도가 빠른 진영웅은 박태준이 지시해서 5일 만에 공예함을 폭력남의 손에서 넘겨받았다.그리고 공예함의 의견을 물은 후 지난 한 달 보육원에 다녀간, 입양 의향이 있는 가정 리스트를 정리해 냈다.그 남자는 진작부터 이 애물단지를 버리려 했다. 전에는 공예지와 함께 살아 만나는 일이 없었고, 그의 돈도 쓰지 않았기에 아무 탈 없이 사이좋게 지냈다. 공예지가 죽은 후 그는 공예함을 버리려 했지만 매번 경찰이 돌려보냈다.그런데 공예함을 데려가겠다고 하자, 폭력남이 2억을 내놓으라는 터무니없는 요구를 제기할 줄이야.이 일을 어떻게 해결했는지 신은지는 모른다. 돈은 분명히 주지 않았다. 심지어 폭력남이 마지막에는 애를 데려가 달라고 진영웅에게 사정했다고 한다.진영웅은 입양 의향이 있는 가정 명단을 신은지에게 보냈다.“사모님이 정하라고 하십니다.”신은지는 그때 근무 중이었는데, 대충 훑어보니 모든 가정이 흠잡을 데가 없는 것 같았다.“알아서 정하라고 하세요.”“대표님께서 의심받을 만한 일은 피하겠다고 하셨습니다.”“...”신은지는 이 대답을 듣고 웃었다.“태준이 직접 한 말이에요?”“맹세할 수 있습니다. 거짓말을 보탰다면 평생 대표님의 머슴으로 살겠습니다.”이러면 잘릴 염려가 없다.신은지는 몸을 뒤로 젖히고 의자 등받이에 기댔다.“그럼 그 사람한테 물어봐요. 그때 나 몰래 그 아이 언니랑 약혼식에 갈 때는 왜 그런 생각을 하지 않았는지? 그때는 무식해서 그런 걸 몰랐대요?”그녀는 웃으면서 장난쳤지만 이내 올라갔던 입꼬리가 내려왔다. 박태준은 요즘 상태가 더 안 좋고, 심지어 급속도로 악화되고 있다.“...”여자는 역시 지난 일을 들추어내기 좋아하는 동물이다. 그는 감히 말을 잇지 못했다.“사모님, 제발 살려주세요. 지금 회의가 없으니 무슨 일이 있으면 직접 대표님께 전화해서 물어보실래요?”그래서 결국 신은지가 결정하게 됐다. 선택한 후, 그녀는 직접 공예함을 데리고 입양 가족과 하루를 함께 보낸 후 공예함이 원하는지 확인하고
“유성아… 날 가져.”“신연지, 날 똑바로 봐. 내가 누구야?”전등이 켜지고 신연지는 그제야 남자의 얼굴을 알아보고 화들짝 놀랐다.“박태준? 당신이 왜 여기 있어?”남자는 여자의 턱을 우악스럽게 잡고 싸늘하게 말했다.“이건 당신이 자초한 거야. 겁도 없이 내 침대로 뛰어들다니.”“그런 거 아니야. 방을 잘못….”신연지는 그의 손아귀를 벗어나려고 몸부림쳤지만 그러기엔 이미 늦어버렸다. 사지가 찢어지는 것 같은 고통과 함께 그녀는 이날 밤 순결을 잃었다.모든 게 끝난 뒤, 박태준은 싸늘하게 그녀에게 카드를 던졌고 분노한 신연지는 남자의 귀뺨을 후려쳤다.그는 손으로 입가를 쓱 문지르고는 비릿한 미소를 지으며 그녀에게 물었다.“원하는 게 이런 거 아니었나?”그 말은 신연지를 미치게 만들었지만 후회해도 이미 늦어버렸다.“박태준, 돈은 필요 없어. 내 순결을 망쳤으니 결혼으로 갚아!”3년 후, 신당동의 한 호화저택.신연지는 따분한 얼굴로 TV에 나오는 뉴스를 보고 있었다. 유명 발레리나 전예은이 무대에서 추락하며 아수라장이 된 현장.한 정장을 입은 남자가 사람들을 비집고 달려가서 부상을 입은 여자를 안고 현장을 벗어나는 모습이 각종 채널에서 보도되고 있었다.잠깐 비친 옆모습이었지만 그와 3년을 동거한 신연지는 한눈에 박태준을 알아보았다.어젯밤 침대에 누워 오늘 일찍 돌아오겠으니 기다리라고 했던 남자였다.그녀는 식어버린 음식들을 허망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직접 만드느라 오후 시간을 다 썼건만, 같이 먹어줄 사람은 오지 않았다.신연지는 다가가서 반찬들을 전부 쓰레기통에 쏟아버렸다.물집이 잡힌 손으로 정성들여 만든 반찬을 쓰레기통에 붓는 모습은 처량하면서도 이질적이었다.설거지를 끝낸 그녀는 위층으로 올라가서 집을 싸기 시작했다.그녀와 박태준은 계약결혼한 사이였다. 그리고 계약한 3년이 드디어 끝났다. 전예은이 해외 연수를 마치고 돌아온 시간과 정확히 맞물렸다.비록 아직 정확한 계약기간까지는 3개월이 남았지만 전예은이 돌아왔으니 계약을
“신연지, 이혼 서류 보냈던데 대체 뭐하자는 거야?”박태준의 목소리를 확인한 신연지는 순식간에 잠이 확 깨 대답했다. “거기 적힌 대로야.”박태준은 냉소를 지으며 단호하게 말했다.“이따가 출근하면 내 사무실로 와서 이 쓰레기들 도로 가져가. 저녁 여덟 시까지는 시간 줄 테니까 짐 싸들고 집에 돌아오고.”그의 말에 신연지도 지지 않고 반박했다.“박태준, 당신 미쳤어?”잠시 숨을 고른 그녀는 말투를 바꿔 차분하게 말했다.“전예은 씨가 불륜녀로 낙인 찍힐까 봐 그러는 거야? 어차피 우리가 결혼한 거 부모님하고 가까운 지인들만 알고 세상 사람들은 모르잖아. 사람들은 당신을 여자친구의 꿈을 응원하고 기다리는 순애보로 기억한다니까? 사랑하는 사람이 다시 귀국했으니 잘된 거 아니야?”하지만 박태준은 전혀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어제 전예은을 안고 병원으로 달려가는 모습이 뉴스에 났는데 오늘 이혼 서류에 도장을 찍고 이 서류가 외부에 노출이라도 된다면 전예은은 불륜녀로 낙인 찍히게 되는 것이다.그는 싸늘한 얼굴로 전화를 끊어 버렸다.한참 신나서 떠들던 신연지는 뒤늦게 전화가 끊어진 것을 확인하고 속으로 욕설을 퍼부었다.‘개 같은 자식.’호텔과 본사는 아주 가까운 거리에 있었기에 그녀는 느긋하게 씻고 조식을 챙겨 먹은 뒤, 지하철역으로 향했다.박태준과 결혼한 뒤, 그녀는 시어머니의 요구에 따라 박태준의 비서로 재경에 입사했다.하는 일로 따지면 사실 비서라기보다는 하녀에 가까웠다.평소에는 박태준의 삼시세끼와 옷 세탁 등 자질구레한 일을 책임지고 최저시급보다 조금 나은 수준의 월급을 받았다.회사에서는 그녀가 박태준의 아내이자 재경의 안주인이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참 서글픈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불륜녀로 불려야 할 여자는 모두의 주목을 받고 있고 정실 부인인 그녀는 매일 신분이 들킬까 봐 차를 타고 와도 몇 정거장 앞에서 내려 걸어서 출근하고 있었다.회사에 도착한 신연지는 곧장 자리로 가서 사직서를 작성했다. 어차피 이혼하기로
별거 얘기가 나오자 신연지의 가슴이 울렁거렸다. 이상하다? 왜 마음이 아프지?결혼한 뒤로 박태준이 저택으로 돌아와 밤을 보낸 횟수는 손에 꼽을 수준이었다. 사실 상 별거와 다를 바 없었다.“어차피 3개월밖에 남지 않았는데 굳이 그 집으로 들어가서 살 필요성을 못 느껴서 그래.”박태준은 그녀를 빤히 응시하다가 냉소를 지었다.“그건 내가 판단할 일이지. 오늘 반차 내줄 테니 짐부터 집으로 옮겨.”“아니….”거절의 말은 때 아니게 들려온 노크소리에 묻혀버렸다. 안으로 들어온 진영웅이 공손히 말했다.“대표님, 회의 들어갈 시간입니다.”박태준은 옷매무시를 정돈하고 그녀에게 싸늘하게 말했다.“이제 나가봐.”신연지는 이대로 물러나고 싶지 않았다.“박태준, 난 돌아가지 않을 거야.”박태준은 대수롭지 않게 대꾸했다.“지난번에도 비슷한 얘기를 했던 것 같은데?”신연지가 그와 싸우고 집을 나간 게 이번이 처음은 아니었다. 하지만 매번 며칠 지나지 않아 그녀는 스스로 집으로 돌아갔다.할 말이 없게 된 신연지는 말없이 사무실을 나갔다. 여기서 그와 입씨름하는 건 시간낭비였다.사무실을 나온 그녀는 일단 화장실로 가서 화장을 수정했다. 그에게 잡혔던 턱에 퍼런 멍이 나 있었다.두꺼운 컨실러로 자국을 가린 뒤, 그녀가 사직서를 제출하러 인사과로 향하는데 뒤에서 누가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연지 씨, 프린터에 잉크가 다 떨어졌어. 좀 갈아줘.”하루에도 몇번씩 듣는 잔심부름이었다. 박태준의 개인 비서로써 그의 일과만 관리하면 된다고 했지만 그녀를 쌀쌀맞게 대하는 박태준의 태도에 점차 같은 비서실 직원들도 그녀를 막내처럼 부려먹기 시작했다.“연지 씨, 잉크 좀 갈아달라니까?”평소에도 신연지와 사이가 별로 좋지 않던 도 비서가 싸늘한 목소리로 재차 강조했다. “퇴사하더라도 마지막 날까지 최선을 다해야 하지 않겠어? 아직 사직서 제출하기 전이잖아?”“제 업무 내용은 박 대표님의 일과를 책임지는 겁니다. 도 비서님이 박 대표님 대신이라도 된다는 말씀인가요?
신연지가 건넨 카드는 박태준이 준 카드였다. 그녀는 개인돈을 숙박료로 전부 탕진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그가 준 카드를 썼다. 그녀는 진유라에게 전화를 걸어 간단히 상황을 설명하고 바로 택시를 잡았다.강태산의 차가 뒤를 따르고 있었지만 신연지는 그냥 무시하기로 했다.차에서 내려 캐리어를 챙기다가 모서리에 손등을 부딪혀 버렸다.피부가 긁혀서 피가 났지만 그리 심각하지는 않아 보였다.진유라는 17층에 살고 있었다. 미리 연락을 했기에 문은 열려 있엇다.신연지가 캐리어를 끌고 나타나자 진유라는 살짝 놀란 반응을 보였다.전화 상으로는 집을 나왔다는 얘기를 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진유라가 다급히 다가와서 그녀의 손에서 캐리어를 받았다.“짐 있다고 얘기했으면 내가 내려갔지. 너 손은 왜 이래? 다쳤어?”신연지는 다급히 의약품 상자를 찾으러 가는 친구의 손목을 잡으며 고개를 저었다.“괜찮아. 내버려두면 알아서 나을 거야.”“손으로 벌어먹고 살 사람이 손을 이렇게 막 대하면 어떡해?”신연지는 과장된 친구의 표정을 보자 며칠간 쌓였던 피로가 다 사라지는 것을 느꼈다.“이 정도 다쳤다고 영향이 있진 않아.”잠시 고민하던 진유라가 조심스럽게 물었다.“지난번에 내가 얘기했던 거 고민해 봤어?”신연지는 그 말에 시선을 회피했다. 아직은 마음의 준비가 되지 않았다.“허 원장님 나를 몇번이나 찾아오셨어. 그분이 운영하는 작업실은 국내 최고 골동품 복원사만 모였잖아. 그런 인물이 직접 너를 지명하셨다는 건 대단한 기회야! 네가 신분이 들통날까 봐 거절만 안 했어도 당장 네 연락처를 줬을 텐데!”신연지는 뛰어난 골동품 복원 전문가였다.그녀는 어릴 때부터 복원사인 엄마를 따라 기술을 배웠고 대학도 같은 과를 나왔다. 졸업하고 바로 박물관에 취직하기로 되어 있었는데 그 사고가 나면서 박태준과 결혼하고 잠적했다.최근 몇 년 사이, 그녀는 친구인 진유라를 통해 일감을 받아 민간 복원사로 일하고 있었다.하지만 현재는 상황이 달라졌으니 유명 작업실에 취직하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