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태준이 롤러코스터를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어서 신은지가 그의 표정을 정확히 확인할 수는 없었지만, 잡은 그의 손이 계속 떨리고 있는 것을 느끼고 걱정이 가득한 눈빛으로 물었다.“무서워?”박태준은 애써 담담하게 답했다.“아니, 괜찮아.”신은지는 까치발을 들고 목을 길게 빼면서 그에게로 가까이 다가갔다.“진짜로 괜찮겠어?”박태준은 신은지가 넘어질까 봐 한 손으로 그녀의 허리를 잡으면서 말했다.“정말로 괜찮아.”앞 팀의 순서가 끝났는지 사람들이 하나둘씩 앞으로 이동했고 박태준도 그녀의 허리를 껴안은 채 앞으로 움직이면서 말했다.“똑바로 서, 넘어지겠어!”롤러코스터는 한 번에 20여 명밖에 탈 수 없었고 아무리 VIP 표를 산 두 사람이라고 해도 길게 늘어선 대기 줄 때문에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박태준은 긴 대기 줄을 보면서 겉으로 내색은 하지 않았지만, 이렇게 위험한 놀이기구에 열광하는 사람들이 이해되지 않았고 속으로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여전히 박태준의 품에 안겨있는 신은지는 롤러코스터를 탈 생각에 흥분해서 가만히 서 있지 못했다.“무서워? 왜 한숨을 계속 쉬는 것 같지?”박태준은 신은지의 앞에서 약한 모습을 보이기 싫었기에 얼른 고개를 돌리고 가까이 들이미는 그녀의 얼굴을 손으로 가리면서 말했다.“그럴 리가, 네 생각이 틀렸어.”신은지도 평소 하늘이 무너진다고 해도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을 냉혈인이 놀이기구 하나를 무서워할 리 없다고 생각하고 더 이상 묻지 않았다.두 사람 뒤에 서 있는 몇 명의 대학생들은 졸업하면 무엇을 할지에 대해 열정적으로 토론하고 있었고 신은지는 사회초년생들의 패기 넘치는 포부들을 엿들으면서 자기의 열정도 되살아나는 기분이 들었다.하지만 찜통더위로 인해 그들의 열띤 토론도 20분을 넘기지 못했다.그도 그럴 것이 뜨거운 여름날, 대기 줄에는 햇빛 가림막이 설치되어 있었지만 사람들이 너무 붐비는 탓에 현기증이 날 정도로 더웠기 때문이었다.신은지도 손을 들어 연신 부채질하면서 투덜댔다.“더워 죽겠네!”박태
처음에는 그녀가 걱정할까 봐 일부러 이렇게 말하는 줄 알았다. 그러나 잠시 지켜보니 정말 다리가 나른해진 것 같았다.“...”그녀는 웃음을 참으며 그의 안전 벨트를 풀어주었다.“내가 부축해 줄게. 할 수 있겠어?”‘할 수 있겠냐’는 말은 박태준의 마음속에서 가장 취약한 부분을 찔렀다. 입술을 깨물며 그녀를 바라보는 그의 눈빛이 다소 애처로워 보였다. 그는 목젖이 오르락내리락 하더니 한참 후에야 외마디 대답을 했다.“응.”신은지는 민망해서 쥐구멍에라도 들어가고 싶었지만 박태준은 사람들의 시선을 전혀 신경 쓰지 않고 태연하고 담담한 표정을 유지했다.직원이 이미 출구를 열어놓았다. 박태준은 계단을 내려가다가 두 발을 엇디뎌 하마터면 넘어질 뻔했다.“하하하...”신은지는 한 손으로 난간을 잡고 다른 한 손으로 그를 부축하며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렸다.그녀는 박태준이 롤러코스터를 탄 후유증이 이렇게 클 줄은 정말 몰랐다.그녀가 환하게 웃는 것을 보고 저도 모르게 입꼬리가 올라간 그는 그녀를 품에 끌어안고 어이없는 듯 물었다.“웃겨?”“아니.”신은지는 웃음을 멈추고 정색하며 그와 시선을 맞추었다.“허!”하지만 딱 봐도 웃음을 참는 모습이다. 그는 그런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다른 거 타러 갈래? 아니면 먼저 뭘 좀 먹을래?”점심쯤에 와서 두 개 놀이기구를 타고 내려오니 벌써 4시가 넘었다.“이 놀이공원에는 대형 롤러코스터만 네 가지가 있대. 방금 우리가 탄 것은 내뿜는 형식이라 속도는 빠르지만 경사는 크지 않았어. 그 외에도 매달리거나 하늘을 날거나 음악이 나오거나 가족끼리 타는 등등 여러 가지가 있대...”박태준은 괜찮아졌던 다리가 또다시 나른해졌다. 아까 너무 심하게 흔들려 지금도 머리가 어지럽고 토할 것 같다.그는 신은지의 말을 끊고 아래위로 흔들리는 작은 비행기를 가리켰다.“아니면 저거 타러 갈래? 줄 선 사람이 적네.”신은지는 그의 팔을 잡은 채 더 이상 참지 못하고 포복절도했다.“좋아.”작은 비행기를 탄 후 그
차에 오를 때까지도 신은지는 불꽃쇼의 분위기에 빠져 있었다.“우리 둘의 이름을 다 넣지 그랬어?”놀이공원 폐장 시간이라 주차장 출구에 차가 많이 밀렸다. 박태준은 온통 브레이크 등이 켜진 앞 차들을 바라보면서 대답했다.“네가 그렇게 이목을 끄는 방식을 싫어할 줄 알았지.”“성씨 이니셜만 쓰면 되잖아. 아무도 우리라는 걸 몰라.”“...”맨 처음 설계할 때 그도 그렇게 하려 했었다. 하지만 은지의 성씨 뒤에 자기 성씨를 넣고 보니 너무 이상한 단어가 되어 그 생각은 철저히 접었다.그는 얼굴에 살짝 어색한 기색이 감돌았지만 사실대로 말하지 않았다.“미안해. 미처 생각 못 했어.”신은지에게는 이름이 있고 없고가 그리 중요하지 않았다. 그냥 해본 소리일 뿐이다.집에 돌아온 신은지는 가방을 탁자 위에 던지고는 소파에 축 늘어졌다. 오늘 아침 일찍 일어난 데다 놀이공원에 가서 오후 내내 놀았더니 온몸이 나른해서 꼼짝도 하기 싫었다.박태준은 전화를 받더니 2층 서재로 올라갔다.“여 형사님.”그에게 전화한 건 공예지 사건을 담당한 형사였다. 여 형사는 사건 해결에 진전이 있는 듯 흥분한 말투였다.“박태준 씨, 사람을 찾았고 공예지 사건도 타살로 확정됐습니다. 우리가 이미 그 사람과 기도윤 사이의 관계를 파악했으니 조만간 결과가 있을 겁니다.”“수고하셨습니다.”“별말씀을요. 저희가 해야 할 일인데요. 오히려 저희가 감사를 드려야죠. 박태준 씨가 초아 씨를 통해 후반부 동영상을 확보하고 그분이 경찰서에 와서 다시 진술하도록 설득하지 않았다면 우리는 이 사건 때문에 언제까지 골머리를 썩여야 했을지 모릅니다.”참고인 조사를 받던 날 열이 나는 상태로, 파김치가 되어 축 처져 있던 초아는 경찰관을 보고 벌벌 떨며 이내 동영상을 내놓았다. 경찰은 동영상에 편집 흔적이 없다는 분석 결과가 나오자, 그녀가 너무 놀라서 그렇게 떠는 줄 알았다. 신은지가 사람을 물에 빠뜨리는 장면을 목격했는데 이튿날 그 사람이 죽었다고 하니 그럴 만도 했다. 그래서 중요한 정황
박태준은 뒤에서 손을 뻗어 휴대폰을 넘겨받았다.“내가 해줄 테니 좀 더 자.”신은지의 알람이 울리는 소리에 잠에서 깨니 그녀가 끄덕끄덕 졸며 임 관장에게 메시지를 보내고 있었다.“아니야.”그가 소란을 피우는 바람에 그녀는 잠기가 싹 사라졌다. 특히 그의 손이 부잡스럽게 움직이기 시작하자, 신은지는 용수철 튕기듯 벌떡 일어나 앉은 후 뒹굴다시피 해서 침대에서 내려갔다.“이제 졸리지 않아. 휴가는 남겼다가 신혼여행 때 쓸 거야.”박태준은 손에 힘을 쓰지도 못한 채 그녀가 허겁지겁 욕실로 뛰어 들어가는 뒷모습을 바라보며 어이없는 듯 가볍게 웃었다.“허리가 아프다고 해서 주물러 주려는 것뿐인데, 무슨 생각한 거야?”“...”그녀가 씻고 나오니 이미 옷을 갈아입은 박태준이 거울을 보며 커프스단추를 채우고 있었다. 몸매가 좋고 잘생긴 남자가 이 동작을 하니 더 눈 호강이다.함께 계단을 내려온 후 신은지는 신발을 갈아 신고 말했다.“나는 오늘 유라랑 콘서트 보러 가야 해서 저녁에 늦게 돌아올 거야. 졸리면 기다리지 말고 일찍 자.”박태준이 미간을 찌푸렸다.“곽동건은? 여자친구랑 같이 안 간대?”“모든 자리에 남자친구랑 같이 갈 수 있는 게 아니잖아. 콘서트는 당연히 취미가 서로 맞는 사람끼리 가야지. 곽 변호사처럼 빈틈없는 사람과 콘서트에 같이 가면 고등학교 교감 선생님과 디스코 추러 가는 거랑 무슨 차이가 있어?”감히 움직이지도 못할 텐데, 미친 듯이 뛰고 소리 지르고 야광봉을 흔드는 것은 생각도 못 하겠지.박태준은 입술을 오므렸다. 신은지와 함께 보내는 시간을 진유라한테 빼앗겨서 못마땅했지만 여전히 관심을 보였다.“어느 구역 티켓을 예매했어?”“일반 구역.”진유라가 며칠 전 어떤 스타의 팬이 됐는데, 마침 경인시에서 콘서트를 한다고 급히 티켓을 예매했다. 하지만 너무 늦어서 일반 구역 티켓밖에 없었다.“어느 가수야? 진영웅한테 부탁해서 VIP 좌석을 구해줄게.”신은지가 가수 이름을 말하자, 휴대폰을 들고 진영웅에게 전화하려던 박태준
신은지가 박태준에게 좌석이 구석에 있다고 말했는데, 이건 거짓말이 아니었다. 자리에 앉기까지 ‘죄송합니다’, ‘좀 비켜주세요’를 몇 번이나 말했는지 모른다.무대에서 스태프가 마지막 점검을 하고 있었는데, 너무 멀리 떨어져 있어 머리, 몸, 팔다리를 구분할 수 있어 그게 사람이라는 걸 알 수 있을 뿐 더 자세한 것은 보이지 않았다.맥이 빠져 한숨을 쉬는 그녀의 모습은 마치 목숨을 반쯤 잃은 것 같았다.“다시는 콘서트 오지 않을 거야. 오빠는 역시 TV에서 보는 게 제맛이야. 롱샷, 클로즈업이 번갈아 바뀌고 고화질 버전이라 얼굴에 주름이 몇 개 있는지까지 똑똑히 보이거든.”“... 현장에서 복근을 보는 게 더 좋다며?”“너무 멀어서 그냥 살덩어리로밖에 보이지 않잖아. 복근, 흉근 심지어 맥주배도 분간이 안 되는데 뭐가 좋아?”“...”잠시 후 콘서트가 시작되고 주인공이 등장하자 객석에서는 지붕이 날아갈 것 같은 즐거운 비명이 터져 나왔다. 신은지는 초록색 불빛이 반짝이는 응원판을 안고 턱을 그 위에 얹어 하얀 피부가 시퍼렇게 물들었다.진유라는 조금 전까지도 풀이 죽어 다시는 보러 오지 않겠다더니 이내 분위기에 이끌려 비명을 질러댔다.신은지는 어이가 없다는 듯 그런 그녀를 쳐다보았다.콘서트가 진행된 두 시간 동안 진유라는 목이 쉬도록 소리를 질렀지만 기대했던 하이라이트는 없었다. 복근은 고사하고 오늘 밤은 아예 유교보이 컨셉으로 바꿨는지, 쇄골도 전혀 드러내지 않았다.하지만 춤을 추느라 땀을 너무 많이 흘려 공연복이 흠뻑 젖었고, 흰색 와이셔츠가 몸에 착 달라붙으면서 보일 듯 말 듯 살색이 드러나 금욕과 절제의 미를 보여주었다.그러자 비명이 더 커졌다.역시 여자들은 직접적인 노출보다는 이런 아련한 느낌을 더 좋아한다.신은지는 이 같은 고주파 소음 공해에 시달리며 간신히 콘서트가 끝날 때까지 견뎠고 마지막에는 귀까지 먹먹했다.그들이 맨 마지막에 나왔는데, 진유라는 말을 못 할 정도로 목이 쉬었지만 여전히 스스로 만든 수화로 신은지와 소통했다
하지만 그녀는 식당을 나서기도 전에 곽동건에게 붙잡혔다.“이렇게 급하게 어디 가는 거예요?”“...”진유라는 운명의 뒷덜미를 잡힌 듯 그 자리에 꼿꼿이 서 있다가 한참 뒤에야 돌아서서 입꼬리를 올리며 헛웃음을 지었다.“저는 다 먹었어요. 먼저 들어갈 테니 천천히 드세요.”“저도 다 먹었어요. 같이 가요.”“이렇게 가는 건 좀 그렇잖아요. 인사는 하고 가야죠?”그녀는 아직 곽동건과 얼굴을 마주하고 있지만 발을 천천히 뒤로 빼며 언제든지 도망갈 준비를 했다.“제가 가서 인사하면 좋아할 것 같아요?”진유라는 조금 떨어진 곳에서 소곤소곤 이야기를 나누는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생각해 볼 필요가 있는가? 전혀 좋아하지 않을 게 뻔하다.그녀는 문 앞에 주차된 자기 차를 가리켰다.“제 차는 바로 앞에 있으니 기껏해야 같이 문을 나서게 되겠네요.”이번 판은 이겼다고 생각한 진유라는 턱을 살짝 쳐들며 살짝 득의양양한 표정을 지었다. 이런 작은 표정들 때문에 유달리 생동감 있는 그녀의 얼굴은 꼬집고 싶은 충동을 자극했다.곽동건은 무의식적으로 손가락을 비비며 갑자기 떠오른 이 생각을 내리눌렀다. 아직 식당 안인데, 그녀를 잘못 건드렸다가 달아나 버리면 얻는 것보다 잃는 것이 더 많을 것이다. 그는 매너 있게 문을 열고 옆으로 비켜서서 먼저 나가라고 했다.“제가 차를 가지고 오지 않아서 그러는데, 성가신 대로 좀 태워주세요.”“누굴 속여요? 방금 식당에 올 때 차를 운전하고 왔잖아요?”“그건 태준 씨 차예요.”진유라는 잠시 말을 잇지 못하다가 딱딱하게 말했다.“너무 늦어서 졸려요. 멀리 돌아서 가고 싶지 않으니까 택시 타세요.”“그 스타에 대해 물어볼까 봐 이렇게 피하는 거예요?”“콘서트를 보러 갔을 뿐이고 처음부터 끝까지 무대 아래에 앉아 있었는데, 문제 될 게 뭐가 있어요?”그녀가 한 말은 모두 사실이기 때문에 조금도 켕기는 게 없었다. 오늘 콘서트 때문에 곽동건을 차단했었는데, 그가 이걸 따질까 봐 단둘이 있지 않으려 하는 것이다.진유라
다음날 박태준은 공예함이 말한 주소로 갔다. 일부러 거기서 기다리고 있었는지, 노크하자마자 문이 열렸다. 소녀는 문 뒤에 서서 황급히 편지 한 통을 그에게 건네준 후 문을 닫았다.지금 여름인데, 공예함은 긴팔을 입고 있었다. 얼핏 봤지만 더러운 소매 밑에 상처가 살짝 보였다. 꽤 큰 그 상처는 빨갛게 부어오르고 물집까지 생긴 것으로 보아 화상 같았다.박태준은 차에 오른 후 기사에게 출발 지시를 내리지 않고 공예지가 남긴 편지부터 뜯었다.성씨 저택에서 공예지를 죽인 그 미스터리한 남자는 이미 잡혔고, 납치 사건도 해결됐다. 경찰에 의하면, 그 남자가 납치를 사주했고, 그 외에도 몇 개 범죄 사건과 연관이 있다. 아직 기도윤을 불지 않았지만 조만간 끝날 것이다.경찰은 이미 두 사람이 서로 알고 연락도 했었다는 사실을 알아냈다.실형을 받는 건 확정된 일이지만, 박태준의 목표는 기도윤이 사형을 선고받거나 그게 아니더라도 영원히 못 나오게 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의 범죄 증거를 많이 확보할수록 좋다.봉투를 뜯으니, 안에 USB가 들어 있었다. 컴퓨터에 연결해서 열어보니 공예지와 기도윤이 그동안 주고받은 모든 메시지와 얼마 전에 만난 동영상이었다. 이런 건 다 쓸모없다. 문자를 보낸 번호는 가상번호였고, 동영상에도 기도윤의 얼굴이 나오지 않았다. 스스로 신분을 밝히는 말은 더더욱 없었다. 유일하게 유용한 것은 몰래 찍은 동영상이었다.동영상에서 기도윤은 어떤 남자에게 음료수 몇 박스를 선물하고 있었는데, 매우 큰 병에 담긴 무명 브랜드 음료수였다. 그 남자는 박태준이 아는 사람인데, 경인시 정치계에서 지위가 높고 권력이 큰 사람이었다.그런 사람에게 무명 브랜드 음료수를 선물하는 것은 정말 괴상한 일이다. 하지만 그는 이내 이유를 알았다. 병에 담긴 것이 음료수가 아니라 전부 돈이었던 것이다.공예지가 이 동영상을 어디서 구했는지 모르지만 이것이 그녀가 죽은 원인일 것이다. 기도윤의 죄목이 하나 더 추가됐다. 그 관료를 파헤쳐서 기도윤과 어떤 거래를 했는지 조
“유성아… 날 가져.”“신연지, 날 똑바로 봐. 내가 누구야?”전등이 켜지고 신연지는 그제야 남자의 얼굴을 알아보고 화들짝 놀랐다.“박태준? 당신이 왜 여기 있어?”남자는 여자의 턱을 우악스럽게 잡고 싸늘하게 말했다.“이건 당신이 자초한 거야. 겁도 없이 내 침대로 뛰어들다니.”“그런 거 아니야. 방을 잘못….”신연지는 그의 손아귀를 벗어나려고 몸부림쳤지만 그러기엔 이미 늦어버렸다. 사지가 찢어지는 것 같은 고통과 함께 그녀는 이날 밤 순결을 잃었다.모든 게 끝난 뒤, 박태준은 싸늘하게 그녀에게 카드를 던졌고 분노한 신연지는 남자의 귀뺨을 후려쳤다.그는 손으로 입가를 쓱 문지르고는 비릿한 미소를 지으며 그녀에게 물었다.“원하는 게 이런 거 아니었나?”그 말은 신연지를 미치게 만들었지만 후회해도 이미 늦어버렸다.“박태준, 돈은 필요 없어. 내 순결을 망쳤으니 결혼으로 갚아!”3년 후, 신당동의 한 호화저택.신연지는 따분한 얼굴로 TV에 나오는 뉴스를 보고 있었다. 유명 발레리나 전예은이 무대에서 추락하며 아수라장이 된 현장.한 정장을 입은 남자가 사람들을 비집고 달려가서 부상을 입은 여자를 안고 현장을 벗어나는 모습이 각종 채널에서 보도되고 있었다.잠깐 비친 옆모습이었지만 그와 3년을 동거한 신연지는 한눈에 박태준을 알아보았다.어젯밤 침대에 누워 오늘 일찍 돌아오겠으니 기다리라고 했던 남자였다.그녀는 식어버린 음식들을 허망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직접 만드느라 오후 시간을 다 썼건만, 같이 먹어줄 사람은 오지 않았다.신연지는 다가가서 반찬들을 전부 쓰레기통에 쏟아버렸다.물집이 잡힌 손으로 정성들여 만든 반찬을 쓰레기통에 붓는 모습은 처량하면서도 이질적이었다.설거지를 끝낸 그녀는 위층으로 올라가서 집을 싸기 시작했다.그녀와 박태준은 계약결혼한 사이였다. 그리고 계약한 3년이 드디어 끝났다. 전예은이 해외 연수를 마치고 돌아온 시간과 정확히 맞물렸다.비록 아직 정확한 계약기간까지는 3개월이 남았지만 전예은이 돌아왔으니 계약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