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에는 그녀가 걱정할까 봐 일부러 이렇게 말하는 줄 알았다. 그러나 잠시 지켜보니 정말 다리가 나른해진 것 같았다.“...”그녀는 웃음을 참으며 그의 안전 벨트를 풀어주었다.“내가 부축해 줄게. 할 수 있겠어?”‘할 수 있겠냐’는 말은 박태준의 마음속에서 가장 취약한 부분을 찔렀다. 입술을 깨물며 그녀를 바라보는 그의 눈빛이 다소 애처로워 보였다. 그는 목젖이 오르락내리락 하더니 한참 후에야 외마디 대답을 했다.“응.”신은지는 민망해서 쥐구멍에라도 들어가고 싶었지만 박태준은 사람들의 시선을 전혀 신경 쓰지 않고 태연하고 담담한 표정을 유지했다.직원이 이미 출구를 열어놓았다. 박태준은 계단을 내려가다가 두 발을 엇디뎌 하마터면 넘어질 뻔했다.“하하하...”신은지는 한 손으로 난간을 잡고 다른 한 손으로 그를 부축하며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렸다.그녀는 박태준이 롤러코스터를 탄 후유증이 이렇게 클 줄은 정말 몰랐다.그녀가 환하게 웃는 것을 보고 저도 모르게 입꼬리가 올라간 그는 그녀를 품에 끌어안고 어이없는 듯 물었다.“웃겨?”“아니.”신은지는 웃음을 멈추고 정색하며 그와 시선을 맞추었다.“허!”하지만 딱 봐도 웃음을 참는 모습이다. 그는 그런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다른 거 타러 갈래? 아니면 먼저 뭘 좀 먹을래?”점심쯤에 와서 두 개 놀이기구를 타고 내려오니 벌써 4시가 넘었다.“이 놀이공원에는 대형 롤러코스터만 네 가지가 있대. 방금 우리가 탄 것은 내뿜는 형식이라 속도는 빠르지만 경사는 크지 않았어. 그 외에도 매달리거나 하늘을 날거나 음악이 나오거나 가족끼리 타는 등등 여러 가지가 있대...”박태준은 괜찮아졌던 다리가 또다시 나른해졌다. 아까 너무 심하게 흔들려 지금도 머리가 어지럽고 토할 것 같다.그는 신은지의 말을 끊고 아래위로 흔들리는 작은 비행기를 가리켰다.“아니면 저거 타러 갈래? 줄 선 사람이 적네.”신은지는 그의 팔을 잡은 채 더 이상 참지 못하고 포복절도했다.“좋아.”작은 비행기를 탄 후 그
차에 오를 때까지도 신은지는 불꽃쇼의 분위기에 빠져 있었다.“우리 둘의 이름을 다 넣지 그랬어?”놀이공원 폐장 시간이라 주차장 출구에 차가 많이 밀렸다. 박태준은 온통 브레이크 등이 켜진 앞 차들을 바라보면서 대답했다.“네가 그렇게 이목을 끄는 방식을 싫어할 줄 알았지.”“성씨 이니셜만 쓰면 되잖아. 아무도 우리라는 걸 몰라.”“...”맨 처음 설계할 때 그도 그렇게 하려 했었다. 하지만 은지의 성씨 뒤에 자기 성씨를 넣고 보니 너무 이상한 단어가 되어 그 생각은 철저히 접었다.그는 얼굴에 살짝 어색한 기색이 감돌았지만 사실대로 말하지 않았다.“미안해. 미처 생각 못 했어.”신은지에게는 이름이 있고 없고가 그리 중요하지 않았다. 그냥 해본 소리일 뿐이다.집에 돌아온 신은지는 가방을 탁자 위에 던지고는 소파에 축 늘어졌다. 오늘 아침 일찍 일어난 데다 놀이공원에 가서 오후 내내 놀았더니 온몸이 나른해서 꼼짝도 하기 싫었다.박태준은 전화를 받더니 2층 서재로 올라갔다.“여 형사님.”그에게 전화한 건 공예지 사건을 담당한 형사였다. 여 형사는 사건 해결에 진전이 있는 듯 흥분한 말투였다.“박태준 씨, 사람을 찾았고 공예지 사건도 타살로 확정됐습니다. 우리가 이미 그 사람과 기도윤 사이의 관계를 파악했으니 조만간 결과가 있을 겁니다.”“수고하셨습니다.”“별말씀을요. 저희가 해야 할 일인데요. 오히려 저희가 감사를 드려야죠. 박태준 씨가 초아 씨를 통해 후반부 동영상을 확보하고 그분이 경찰서에 와서 다시 진술하도록 설득하지 않았다면 우리는 이 사건 때문에 언제까지 골머리를 썩여야 했을지 모릅니다.”참고인 조사를 받던 날 열이 나는 상태로, 파김치가 되어 축 처져 있던 초아는 경찰관을 보고 벌벌 떨며 이내 동영상을 내놓았다. 경찰은 동영상에 편집 흔적이 없다는 분석 결과가 나오자, 그녀가 너무 놀라서 그렇게 떠는 줄 알았다. 신은지가 사람을 물에 빠뜨리는 장면을 목격했는데 이튿날 그 사람이 죽었다고 하니 그럴 만도 했다. 그래서 중요한 정황
박태준은 뒤에서 손을 뻗어 휴대폰을 넘겨받았다.“내가 해줄 테니 좀 더 자.”신은지의 알람이 울리는 소리에 잠에서 깨니 그녀가 끄덕끄덕 졸며 임 관장에게 메시지를 보내고 있었다.“아니야.”그가 소란을 피우는 바람에 그녀는 잠기가 싹 사라졌다. 특히 그의 손이 부잡스럽게 움직이기 시작하자, 신은지는 용수철 튕기듯 벌떡 일어나 앉은 후 뒹굴다시피 해서 침대에서 내려갔다.“이제 졸리지 않아. 휴가는 남겼다가 신혼여행 때 쓸 거야.”박태준은 손에 힘을 쓰지도 못한 채 그녀가 허겁지겁 욕실로 뛰어 들어가는 뒷모습을 바라보며 어이없는 듯 가볍게 웃었다.“허리가 아프다고 해서 주물러 주려는 것뿐인데, 무슨 생각한 거야?”“...”그녀가 씻고 나오니 이미 옷을 갈아입은 박태준이 거울을 보며 커프스단추를 채우고 있었다. 몸매가 좋고 잘생긴 남자가 이 동작을 하니 더 눈 호강이다.함께 계단을 내려온 후 신은지는 신발을 갈아 신고 말했다.“나는 오늘 유라랑 콘서트 보러 가야 해서 저녁에 늦게 돌아올 거야. 졸리면 기다리지 말고 일찍 자.”박태준이 미간을 찌푸렸다.“곽동건은? 여자친구랑 같이 안 간대?”“모든 자리에 남자친구랑 같이 갈 수 있는 게 아니잖아. 콘서트는 당연히 취미가 서로 맞는 사람끼리 가야지. 곽 변호사처럼 빈틈없는 사람과 콘서트에 같이 가면 고등학교 교감 선생님과 디스코 추러 가는 거랑 무슨 차이가 있어?”감히 움직이지도 못할 텐데, 미친 듯이 뛰고 소리 지르고 야광봉을 흔드는 것은 생각도 못 하겠지.박태준은 입술을 오므렸다. 신은지와 함께 보내는 시간을 진유라한테 빼앗겨서 못마땅했지만 여전히 관심을 보였다.“어느 구역 티켓을 예매했어?”“일반 구역.”진유라가 며칠 전 어떤 스타의 팬이 됐는데, 마침 경인시에서 콘서트를 한다고 급히 티켓을 예매했다. 하지만 너무 늦어서 일반 구역 티켓밖에 없었다.“어느 가수야? 진영웅한테 부탁해서 VIP 좌석을 구해줄게.”신은지가 가수 이름을 말하자, 휴대폰을 들고 진영웅에게 전화하려던 박태준
신은지가 박태준에게 좌석이 구석에 있다고 말했는데, 이건 거짓말이 아니었다. 자리에 앉기까지 ‘죄송합니다’, ‘좀 비켜주세요’를 몇 번이나 말했는지 모른다.무대에서 스태프가 마지막 점검을 하고 있었는데, 너무 멀리 떨어져 있어 머리, 몸, 팔다리를 구분할 수 있어 그게 사람이라는 걸 알 수 있을 뿐 더 자세한 것은 보이지 않았다.맥이 빠져 한숨을 쉬는 그녀의 모습은 마치 목숨을 반쯤 잃은 것 같았다.“다시는 콘서트 오지 않을 거야. 오빠는 역시 TV에서 보는 게 제맛이야. 롱샷, 클로즈업이 번갈아 바뀌고 고화질 버전이라 얼굴에 주름이 몇 개 있는지까지 똑똑히 보이거든.”“... 현장에서 복근을 보는 게 더 좋다며?”“너무 멀어서 그냥 살덩어리로밖에 보이지 않잖아. 복근, 흉근 심지어 맥주배도 분간이 안 되는데 뭐가 좋아?”“...”잠시 후 콘서트가 시작되고 주인공이 등장하자 객석에서는 지붕이 날아갈 것 같은 즐거운 비명이 터져 나왔다. 신은지는 초록색 불빛이 반짝이는 응원판을 안고 턱을 그 위에 얹어 하얀 피부가 시퍼렇게 물들었다.진유라는 조금 전까지도 풀이 죽어 다시는 보러 오지 않겠다더니 이내 분위기에 이끌려 비명을 질러댔다.신은지는 어이가 없다는 듯 그런 그녀를 쳐다보았다.콘서트가 진행된 두 시간 동안 진유라는 목이 쉬도록 소리를 질렀지만 기대했던 하이라이트는 없었다. 복근은 고사하고 오늘 밤은 아예 유교보이 컨셉으로 바꿨는지, 쇄골도 전혀 드러내지 않았다.하지만 춤을 추느라 땀을 너무 많이 흘려 공연복이 흠뻑 젖었고, 흰색 와이셔츠가 몸에 착 달라붙으면서 보일 듯 말 듯 살색이 드러나 금욕과 절제의 미를 보여주었다.그러자 비명이 더 커졌다.역시 여자들은 직접적인 노출보다는 이런 아련한 느낌을 더 좋아한다.신은지는 이 같은 고주파 소음 공해에 시달리며 간신히 콘서트가 끝날 때까지 견뎠고 마지막에는 귀까지 먹먹했다.그들이 맨 마지막에 나왔는데, 진유라는 말을 못 할 정도로 목이 쉬었지만 여전히 스스로 만든 수화로 신은지와 소통했다
하지만 그녀는 식당을 나서기도 전에 곽동건에게 붙잡혔다.“이렇게 급하게 어디 가는 거예요?”“...”진유라는 운명의 뒷덜미를 잡힌 듯 그 자리에 꼿꼿이 서 있다가 한참 뒤에야 돌아서서 입꼬리를 올리며 헛웃음을 지었다.“저는 다 먹었어요. 먼저 들어갈 테니 천천히 드세요.”“저도 다 먹었어요. 같이 가요.”“이렇게 가는 건 좀 그렇잖아요. 인사는 하고 가야죠?”그녀는 아직 곽동건과 얼굴을 마주하고 있지만 발을 천천히 뒤로 빼며 언제든지 도망갈 준비를 했다.“제가 가서 인사하면 좋아할 것 같아요?”진유라는 조금 떨어진 곳에서 소곤소곤 이야기를 나누는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생각해 볼 필요가 있는가? 전혀 좋아하지 않을 게 뻔하다.그녀는 문 앞에 주차된 자기 차를 가리켰다.“제 차는 바로 앞에 있으니 기껏해야 같이 문을 나서게 되겠네요.”이번 판은 이겼다고 생각한 진유라는 턱을 살짝 쳐들며 살짝 득의양양한 표정을 지었다. 이런 작은 표정들 때문에 유달리 생동감 있는 그녀의 얼굴은 꼬집고 싶은 충동을 자극했다.곽동건은 무의식적으로 손가락을 비비며 갑자기 떠오른 이 생각을 내리눌렀다. 아직 식당 안인데, 그녀를 잘못 건드렸다가 달아나 버리면 얻는 것보다 잃는 것이 더 많을 것이다. 그는 매너 있게 문을 열고 옆으로 비켜서서 먼저 나가라고 했다.“제가 차를 가지고 오지 않아서 그러는데, 성가신 대로 좀 태워주세요.”“누굴 속여요? 방금 식당에 올 때 차를 운전하고 왔잖아요?”“그건 태준 씨 차예요.”진유라는 잠시 말을 잇지 못하다가 딱딱하게 말했다.“너무 늦어서 졸려요. 멀리 돌아서 가고 싶지 않으니까 택시 타세요.”“그 스타에 대해 물어볼까 봐 이렇게 피하는 거예요?”“콘서트를 보러 갔을 뿐이고 처음부터 끝까지 무대 아래에 앉아 있었는데, 문제 될 게 뭐가 있어요?”그녀가 한 말은 모두 사실이기 때문에 조금도 켕기는 게 없었다. 오늘 콘서트 때문에 곽동건을 차단했었는데, 그가 이걸 따질까 봐 단둘이 있지 않으려 하는 것이다.진유라
다음날 박태준은 공예함이 말한 주소로 갔다. 일부러 거기서 기다리고 있었는지, 노크하자마자 문이 열렸다. 소녀는 문 뒤에 서서 황급히 편지 한 통을 그에게 건네준 후 문을 닫았다.지금 여름인데, 공예함은 긴팔을 입고 있었다. 얼핏 봤지만 더러운 소매 밑에 상처가 살짝 보였다. 꽤 큰 그 상처는 빨갛게 부어오르고 물집까지 생긴 것으로 보아 화상 같았다.박태준은 차에 오른 후 기사에게 출발 지시를 내리지 않고 공예지가 남긴 편지부터 뜯었다.성씨 저택에서 공예지를 죽인 그 미스터리한 남자는 이미 잡혔고, 납치 사건도 해결됐다. 경찰에 의하면, 그 남자가 납치를 사주했고, 그 외에도 몇 개 범죄 사건과 연관이 있다. 아직 기도윤을 불지 않았지만 조만간 끝날 것이다.경찰은 이미 두 사람이 서로 알고 연락도 했었다는 사실을 알아냈다.실형을 받는 건 확정된 일이지만, 박태준의 목표는 기도윤이 사형을 선고받거나 그게 아니더라도 영원히 못 나오게 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의 범죄 증거를 많이 확보할수록 좋다.봉투를 뜯으니, 안에 USB가 들어 있었다. 컴퓨터에 연결해서 열어보니 공예지와 기도윤이 그동안 주고받은 모든 메시지와 얼마 전에 만난 동영상이었다. 이런 건 다 쓸모없다. 문자를 보낸 번호는 가상번호였고, 동영상에도 기도윤의 얼굴이 나오지 않았다. 스스로 신분을 밝히는 말은 더더욱 없었다. 유일하게 유용한 것은 몰래 찍은 동영상이었다.동영상에서 기도윤은 어떤 남자에게 음료수 몇 박스를 선물하고 있었는데, 매우 큰 병에 담긴 무명 브랜드 음료수였다. 그 남자는 박태준이 아는 사람인데, 경인시 정치계에서 지위가 높고 권력이 큰 사람이었다.그런 사람에게 무명 브랜드 음료수를 선물하는 것은 정말 괴상한 일이다. 하지만 그는 이내 이유를 알았다. 병에 담긴 것이 음료수가 아니라 전부 돈이었던 것이다.공예지가 이 동영상을 어디서 구했는지 모르지만 이것이 그녀가 죽은 원인일 것이다. 기도윤의 죄목이 하나 더 추가됐다. 그 관료를 파헤쳐서 기도윤과 어떤 거래를 했는지 조
박태준은 그럴 필요 없다고 말하고 싶었다. 이미 여러 의사를 찾아봤고 치료 방안을 제시한 의사도 있었지만 그는 줄곧 결심을 내리지 못하고 망설였다.그 방안의 동의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어렵게 신은지와 결실을 보게 된 시점에 어떤 이유로든 더 이상 사달이 나는 것을 원치 않았다.하지만 그녀의 걱정스러운 눈빛을 마주한 박태준은 고개를 끄덕였다.“그래. 병원 가자.”신은지는 그제야 만족했다.“아직도 아파?”남자는 고개를 저었다.“아니.”자세히 살펴보니 안색은 여전히 안 좋았지만 확실히 아프지는 않은 것 같았다.“어떤 의사들을 찾아봤어?”박태준은 인상 깊은 몇몇 의사 이름을 말하고, 방안을 제시한 의사는 일부러 생략했다.의학 전공자가 아닌 신은지는 이들 의사 이름을 들어본 적이 없지만 박태준이 찾은 의사라면 틀림없이 업계에서 능력을 인정받은 사람일 것이다.“이렇게 많은 의사가 다 방법이 없대?”“...응.”박태준은 피곤한 듯 관자놀이를 문지르며 눈을 감았다.그의 이런 모습에 신은지는 또 마음을 졸였다.“왜? 아직도 아파? 아니면 휴게실에 가서 좀 누울래? 내가 마사지해 줄게.”“그래.”박태준은 이제 머리가 아프지 않았지만 신은지와 더 가까이 있고 싶어 그녀가 말하자마자 동의했다. 하지만 그가 일어나기도 전에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리고 진영웅의 목소리가 문틈으로 새어 들어왔다.“대표님, 유성 도련님이 오셨어요.”“...”박태준은 미간을 찌푸렸고, 얼굴에 갑자기 튀어나온 이 방해꾼에 대한 싫은 기색이 역력했다.“안 만나.”말이 끝나자마자 나유성이 직접 문을 밀고 들어왔다. 그는 신은지를 향해 미소를 지으며 인사했다.“오늘 출근하지 않았어요?”“출근했다가 진 비서님이 태준이 아프다고 해서 휴가를 내고 왔어요.”박태준은 입술을 오므리고 시큰둥한 얼굴로 물었다.“넌 뭐 하러 왔어?”신은지가 오자 나유성이 뒤따라왔고, 그를 찾아왔다면서 들어오자마자 은지와 이야기를 나누었다. 박태준은 심지어 이 앞잡이 같은 자식이 자기를 방패
박태준은 그녀가 아까처럼 화를 내지 않고 태도가 누그러든 것을 보고 급히 약속했다.“다른 의사를 찾아서 다른 치료 방법이 없는지 알아볼 거야. 평생 아프지 않을 거야.”신은지는 화가 가라앉은 것이 아니라 생각에 잠겨 정신을 딴 데 팔았을 뿐이다. 정말 그의 말처럼 간단한 일이라면 나유성이 직접 달려오지도 않았을 것이다.“유성아, 이 병을 계속 치료하지 않고 놔두면 앞으로 어떻게 돼?”“그럼 아마 밧줄을 찾아서 묶어놓아야 할걸. 그렇지 않으면 나갔다가 돌아오는 길을 찾지 못할 거야. 기억력이 감퇴해 계산을 못하고, 말을 더듬고, 걸을 때 비틀거리고, 한마디로 치매 환자와 같은 모습일 가능성이 높아.”신은지는 할 말을 잃었고 박태준은 미간을 찌푸렸다.“무슨 헛소리하는 거야?”치매는 그가 반올림해서 얼떨결에 얼버무린 것이다.“은지야, 그렇게까지 심하지 않아. 저 자식이 헛소리하는 거 듣지 마.”“치매라고 말한 사람은 너잖아? 어떻게 내가 헛소리하는 게 됐지?”박태준은 지금 그가 너무 눈에 거슬린다.“넌 왜 아직도 안 가니?”“나는 뭐 화난 네 얼굴을 보기 좋아서 여기 있는 줄 아니?”신은지는 아까 들어오면서 책상 위에 내려놓은 가방을 들었다.“머리가 아프지 않다면 난 박물관에 일하러 갈게.”말하고 나서 박태준이 잡기도 전에 그냥 가버렸다.박태준은 눈살을 찌푸리며 나유성을 노려보았다. 그가 오기 전에 신은지는 휴게실에 가서 마사지까지 해주겠다고 했는데, 그가 오니 마사지는커녕 말도 쌀쌀맞게 했다.나유성이 굳은 표정으로 말했다.“의사가 이게 현재 유일하게 실행 가능한 치료 방안이라고 하던데, 정말 해보지 않을 거야?”박태준은 담배에 불을 붙이고 다시 의자에 앉았다. 연기 뒤 그의 표정은 쓸쓸해 보였다.“성공률이 얼마인지는 너한테 말했어?”나유성이 아무 말도 하지 않자, 박태준은 그가 알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40%야.”이 말을 할 때 그는 오묘한 표정을 지었다.“유성아, 난 결혼했어. 치료하다가 실패하면 죽어. 하지만 치료받
정민아는 팔짱을 끼고는 고연우가 들고 있는 꽃을 무심하게 훑어보았다.“연우 도련님, 이건 또 무슨 의미야?”“공 비서가 오늘이 여성의 명절이라고 했어.”“그래서?”주위는 조용하고 잔잔한 음악 소리가 문을 통해 희미하게 들려왔다.고연우는 잠시 침묵하다가 말했다.“정민아, 우리 이혼하지 말자.”너무 진부한 이야기였다. 정민아는 더 이상 이 주제를 논의할 의욕조차 없었다. 그녀는 고개를 돌려 책상 위 담뱃갑을 더듬었다. 옆의 재떨이엔 얇은 층으로 쌓인 담배꽁초가 있었고 그 중 절반 이상이 정민아가 피운 것임을 립스틱 자국이 말해주고 있었다.고연우는 미간을 찌푸렸다. 그는 정민아가 담배를 피우는 걸 싫어하면서도 막지 않았다.얇게 피어오르는 연기가 정민아의 입술 사이로 흘러나왔다. 담뱃불은 희미하게 밝아졌다가 사라지며 그녀의 눈을 비췄다. 그 순간, 눈 속의 차가운 무관심이 한층 누그러져 보였다. 은빛 실처럼 가늘게 펴지는 연기 너머로 정민아는 당당하고 제멋대로 미소 지었다. 그리고 정민아가 그렇게 웃을 때마다 고연우는 어김없이 불길한 예감을 느꼈다.다음 순간 정민아가 말했다.“고연우, 너 이상한 거 아니야?”“그렇지. 이상하지 않았다면 여기 서 있지도 않았을 거야.”고연우는 소매를 걷어 올리며 손목시계를 가리켰다.“시간 됐어. 레스토랑으로 가자. 예약해 놨어.”정민아는 이미 샘플 수정으로 지쳐 있었는데 고연우의 집요함이 정민아를 더욱 짜증 나게 했다. 고연우의 고급스러운 코트가 눈에 들어오자 정민아의 머릿속에 문득 나쁜 생각이 스쳤다. 그녀는 손에 들고 있던 담배꽁초를 그의 코트에 대고 눌렀다.‘치...’불꽃이 꺼지면서 연기가 피어오르자 타는 냄새가 코트에서 퍼져 나왔다.정민아는 차가운 얼굴로 꺼진 담배꽁초를 옆의 쓰레기통에 던졌다.“꺼져.”고연우는 자신이 입고 있는 코트의 타는 자국은 아랑곳하지 않고 정민아의 손을 잡았다.“이 코트는 가격이 6자리 숫자야. 디자인에서 완성까지 3개월이 걸렸어. 나와 저녁 정도는 함께 먹어줘야 하
고연우는 벨트를 풀며 말했다. 남자는 원래 이런 상황에서 승부욕이 강해지기 마련인데 특히 좋아하는 여자 앞에서는 그 감정이 더욱 크게 드러났다.“그런 암흑 같은 분위기는 우리 상황과 맞지 않아.”정민아는 원래 고연우에게 특별한 감정은 없었다. 어둠 속에서 고연우는 마치 사나운 짐승처럼 보였을 것이니 고연우에게 흥미를 느끼는 것 자체가 이상한 일이었다.정민아는 그를 뚫어지게 바라봤다. 고연우는 옷을 반쯤 벗었고 단단한 근육이 팽팽히 긴장되었으며 술기운에 물든 피부는 은은한 붉은빛으로 물들어 있었다.공기 중에는 얼굴을 붉히게 만드는 묘한 긴장감이 감돌았고 마치 곧 무언가가 터질 듯한 기운이 흐르고 있었다. 가끔 고연우의 거친 숨소리가 들려오기도 했다.정민아가 말했다.“요즘 운동 안 했어?”고연우는 어이없었다.“?”정민아는 손바닥을 고연우의 가슴 아래쪽에 대고 살짝 눌러보았다. 그러고는 평가하듯 말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근육이 좀 줄었네.”“...”정민아는 마치 중대한 결정을 앞둔 사람처럼 진지한 표정으로 확신에 찬 눈빛으로 고연우를 응시했다. 고연우는 모른 척하려 했지만, 결국 그녀의 말을 무시할 수 없었다. 그는 옷을 다시 입고 정민아의 손을 자기 몸에서 조심스레 떼어내더니 문을 향해 나가며 화가 난 듯 정민아를 한번 매섭게 쳐다보았다.“네가 이겼어.”완전히 흥미가 사라졌다....며칠 동안 고산그룹 대표실이 있는 층은 숨조차 크게 쉴 수 없을 만큼 무거운 분위기에 짓눌려 있었다.공민찬이 급한 서류 묶음을 들고 고연우에게 사인을 받으려 일어서던 순간, 엘리베이터에서 소리가 났다. 그때 최민영이 가방을 들고나와 미소를 지으며 공민찬에게 인사를 건넸다.“공 비서님.”공민찬은 다가서며 말했다.“최민영 씨.”최민영은 사무실 쪽을 가리키며 물었다.“연우 씨 사무실에 있나요?”“최민영 씨, 잠시만요”공민찬은 그녀를 막아섰다.“대표님께서 지금 바쁘십니다. 우선 접대 실에서 잠시 기다리시는 게 어떨까요?” “...”최민영은 눈썹
고연우는 짜증 내며 핸드폰을 테이블에 던지더니 미간을 꾹꾹 눌렀다. “나가세요. 나중에 송씨 아주머니한테 작업복 하나 달라고 하세요.”“도련님, 혹시 어디 불편하세요?”하린은 우유를 들고 테이블 앞으로 다가갔다. “저 예전에 마사지도 배운 적 있는데, 제가...”“그만 나가.” 고연우는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그녀의 손을 피하다가 우유를 엎지르고 말았다. 우유가 쏟아지며 더럽혀진 셔츠를 내려다보며 그는 얼굴은 굳어진 채 입술을 오므렸다. 한참 후에야 한 마디 내뱉었다. “사모님께서 보낸 겁니까?”그는 이를 악물고 한 글자 한 글자 뱉어냈다.하린은 고연우의 차가운 눈빛에 그 자리에 굳어진 채 말을 더듬었다. “도련님, 정말로 사모님께 저를 보내셨습니다.”“나가세요. 앞으로 제 허락 없이는 서재에 들어오지 마세요.” 하린은 금수저 남편을 찾기 위해 가사 도우미로 취직했다. 이를 위해 매니저에게 봉투까지 건넸지만 고연우의 사늘한 태도에 더 이상 다른 생각을 품지 못했다. 서재를 나오자마자 난간에 기댄 채 그녀를 쳐다보는 정민아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사모님...”하린은 갑자기 발걸음 멈추더니 애써 태연하게 말했다. 아무래도 불순한 의도를 품었던 그녀는 사모님을 보면 본능적으로 불안했다. “도련님께서 드시지 않았어요...”비록 정민아의 표정은 아무런 변화도 없었지만 하린은 괜히 자신을 평가하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녀가 더 이상 감당할 수 없을 것 같을 때 마침 정민아가 입을 열었다. “그럼 몇 번 더 가져다주세요.”하린은 정민아의 말에 담긴 뜻을 단번에 눈치챘다.그녀는 자신이 잘못 이해한 게 아닐까 의심이 들 정도였다. ‘도대체 어떤 재벌 부인이 자신의 남편에게 여자를 찾아주는 걸까? 설사 남편이 마음에 들지 않더라도 돈이면 충분할 텐데, 그러다 사생아라도 생겨 상속 분배에서 더 많은 문제를 일으키면 어쩔 생각인지.’그녀는 다시 한번 확인했다. “도련님께서 송씨 아주머니한테 익숙해졌는지 저를 좀 꺼리시는 것 같아요. 아
다음 날.정민아와 사연희는 쇼에 대해 논의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뒤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민아야...”주소월이었다. 사연희는 정민아의 과거에 대해 완전히 알지는 못했지만 주소월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세상에 자식을 챙기지 않는 엄마가 어디 있겠는가? 그러나 설령 절친이라도 남의 가정사에 깊이 개입하기는 어려웠다. 그녀는 노트북을 들고 일어나 말했다. “초대장 몇 개 빼놓고 못 보낸 것 같은데, 금방 보내고 올게. 쇼에 관한 건 나중에 다시 얘기해.”그녀는 주소월을 흘끗 쳐다보고는 인사도 하지 않은 채 돌아섰다. 정민아도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주소월에게 대충 고개를 끄덕이고 물었다. “무슨 일이에요?” 그녀는 어젯밤에 충분히 더 이상 정씨 가문과 연관되고 싶지 않다는 의사를 전달했다고 생각했지만 주소월이 여전히 찾아올 줄은 몰랐다. “오늘 밤에 연회가 있는데, 같이 가겠니?” 정민아가 거절할까 봐 주소월은 서둘러 한 마디 덧붙였다. “너희가 쇼를 열잖아? 오늘 밤 연회에 너와 같은 나이의 사람들이 많이 올 거야. 잠재 고객을 몇 명 발전시킬 기회가 될 수도 있어.”“지금 그 무리에서 잠재 고객을 발전시키라는 말씀이세요?”그녀와 최민영의 갈등은 모두가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집안이 최씨 가문보다 못한 사람은 그녀에게 다가가는 것을 꺼렸고 반면 집안이 최씨 가문보다 좋은 사람은 고아 때문에 굳이 적을 만들 필요도 없었다. 주소월은 정민아가 당했던 일을 떠올리며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 “민아야, 미안해. 엄마가 너를 데려오긴 했지만 제대로 돌보지도 못하고 너한테 이렇게 상처만 줬네...”“미안해할 필요 없어요. 오히려 제가 고맙죠. 저를 정씨 가문으로 데려와 줘서 고마워요. 그 마을에서 벗어날 수 있게 해줘서, 그리고 또... 그 미친놈으로부터 구해줘서 고마워요.”마치 세월의 흔적을 덮은 한 자루의 칼처럼 서서히 그녀의 심장을 파고들었다. “민아야...” 주소월은 울먹거리며 더 이상 눈물을 참을 수 없었다. 그녀는 처음 그
정민아는 문을 열고 지친 몸으로 가방을 내려놓았다. 신발을 갈아신던 중 슬쩍 식탁 위에 차려진 음식을 보았다.“아주머니, 제가 전화드렸잖아요. 저녁 먹고 온다고, 왜 이렇게 음식을 많이 차렸어요?”송씨 아주머니는 2층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도련님께서 아직 저녁을 드시지 않으셨습니다.”고연우라는 말을 듣자 정민아는 더 이상 묻지 않고 뻐근한 목을 주무르며 2층으로 올라갔다. “아, 그렇군요.”“아가씨...”송씨 아주머니가 망설이며 그녀를 불렀다. “도련님께서 아가씨가 돌아오시면 같이 식사하자고 불러달라고 하셨습니다.”“제가요?” 정민아는 걸음을 멈추고 의아해하며 돌아봤다. “왜요?”“도련님께서 기분이 별로 안 좋아 보이셨는데... 두 분 혹시 싸우신 거 아닌가요?”“그 사람이 기분이 안 좋다고 제가 달래줘야 하나요? 그럼 왕자님, 저녁 드세요라고 말이라도 해야겠네요?” 정민아는 피식 웃더니 입가에 맴돌던 웃음이 갑자기 사라졌다. “먹든 안 먹든 마음대로 하라고 하세요. 먹기 싫으면 굶으면 되죠.”송씨 아주머니는 시선을 정민아 뒤쪽으로 옮기더니 표정이 조금 일그러진 채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도... 도련님...”정민아가 뒤돌아보자 고연우는 난간에 기댄 채 냉랭한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방금 샤워를 끝냈는지 머리가 약간 젖어 있었고 외출복을 입고 있었다. 몸에 딱 맞는 셔츠에 검은색 정장 바지를 입은 채 단추는 몇 개 풀려 있었고 옷자락은 허리선에 맞춰 깔끔하게 넣었다. 넓은 어깨, 잘록한 허리에 긴 다리를 뽐내며 그 자리에 서 있는 것만으로도 주변을 배경처럼 흐릿해 보이게 만들었다.고연우는 냉랭한 목소리로 말했다. “같이 저녁 먹자.”사실 그는 조금 더 튕기고 싶었지만 계속 자존심을 부리다 이 무심한 여자는 그냥 가버릴 것 같았다.정민아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말했다. “난 이미 먹었어.”“네가 장소 문제를 해결하라고 해서 해결해 줬더니, 겨우 도시락 하나 사주는 거냐? 정민아, 너 정
“난 내가 좋은 사람이라고 한 적 없어.”정민아가 웃으며 고개를 옆으로 하자 덜 말려진 머리카락이 한쪽으로 치우치며 하얗고 맑은 어깨가 그대로 드러났는데 그 위에는 물방울까지 맺혀있어 고연우의 심장을 요동치게 만들었다.그 어떤 뜨거운 것이 가슴속에서 꿈틀거리고 있었고 방안에 가득 찬 정민아의 향기가 그림자마냥 고연우의 주변을 맴도는 탓에 고연우는 흐릿해져 가는 정신을 부여잡으려 주먹을 말아쥐었다.술기운이 뒤늦게 밀려오는 것인지 아니면 저 고혹적인 자세 때문인지 고연우는 머리가 점점 더 뜨거워지는 것 같았다.그에 정민아는 문을 열고는 손님을 배웅하는 듯한 자세를 취하며 말했다.“내가 불편해지면서까지 다른 사람한테 맞추긴 싫거든. 그러니까 일단 최민영부터 죽이고 와서 사랑 타령해.”“... 다른 건 안 될까?”“다른 거 뭐?”정민아의 산만한 시선이 고연우의 몸에 머물렀다. 사람이 아니라 상품을 보는 듯 곳곳을 훑어보고 있었다.“너한테 나의 흥미를 불러일으킬 만한 뭐 다른 게 있긴 해?”상처가 되는 말은 아니었지만 모욕적인 말임은 틀림없었다.하지만 웃긴 건 정민아의 말에 고연우가 고개를 숙여 제 몸을 보고 있다는 것이다.아무리 봐도 돈과 권력 외에는 정민아가 관심을 가질만한 게 없어 보이는 듯한 몸에 고연우는 고개를 들더니 그래도 억울하다는 듯 말했다.“그 기생오라비보다는 내가 더 잘생겼어.”정민아가 혹여 듣지 못할까 봐 고연우는 기생오라비라는 단어에 더 힘을 주며 말했다.어려서부터 따라다니는 사람들이 끊이질 않았던 고연우는 저에게도 이렇게 여자의 환심을 사기 위해 어필하는 날이 올 줄 꿈에도 몰랐었다.하지만 정민아는 관심 없다는 듯 입꼬리를 움직이며 말했다.“얼굴 자랑 말고 가서 약이나 좀 사지 그래? 내가 너에 대한 흥미는 약의 자극을 받아야만 생길 것 같거든.”머리에 누가 찬물이라도 끼얹은 듯이 아까의 설렘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도 입안에는 분노 가득한 험한 말들이 서러움과 함께 맴돌고 있었다.“넌 앞으로 그냥 말을 하지 마.”
고연우의 질문에 정민아는 사실대로 대답했다.“대학 때 후배.”그 말에 고연우는 아까 정민아를 보던 임우빈의 이상한 눈빛을 떠올리며 입술을 살짝 깨물고는 물었다.“쟤가 너 좋아해?”“응.”“...”너무 당연하다는 듯이 인정을 해버리는 정민아에 말문이 막혀버린 고연우는 한참 만에야 입을 열었다.“너 저렇게 기생오라비 같은 놈 좋아했었어?”정민아의 성격 때문에 좋아하는지 아닌지는 정확히 알 수 없었지만 임우빈한테 유난히 관대한 것만은 보아낼 수 있었다.인정하고 싶지는 않았지만 정민아 앞에서 주책맞게 떠들어 댄 게 자신이었다면 정민아는 진작에 제 머리를 비틀어 화분으로 삼겠다고 협박했을 것이다.정민아는 언짢아 보이는 고연우를 보며 말했다.“기생오라비 같은 게 아니라 어린 거야. 턱선이 당신처럼 뚜렷하진 못해 그래서. 그리고 뒤에서 다른 사람 험담하는 건 격 떨어지는 일이야, 고연우 도련님.”고연우 도련님이라는 단어에 올라가는 억양을 붙인 게 아무리 봐도 조롱 같았던 고연우는 냉소를 흘리며 말했다.“턱선이 나보다 뚜렷하지 못하고 어려서 그렇다고? 그럼 뭐 나는 늙었다는 소리야? 그리고 내 앞에서 내 아내를 탐내는 데 내가 얼마나 격을 차려야 한다는 거지? 난...”고연우는 간신히 튀어나오려는 험한 말을 참아냈다.“곧 이혼할 건데 뭘.”“꿈 깨.”혈관 속에서 불꽃이 튀기는 것 같은 느낌에 원래도 나빴던 기분이 더 완벽히 잡쳐버린 고연우는 정민아를 노려보며 말했다.“난 이혼에 합의 안 할 거니까 그런 생각은 안 하는 게 좋을 거야. 우리 사이에 사별은 있어도 이혼은 없어.”고연우의 말에 정민아가 문고리를 잡아 내리며 대꾸했다.“그럼 아직 살아있으니까 납골함이라도 직접 골라. 귀신 돼서도 네가 직접 고른 집에 있으면 기분이라도 좋겠지.”“정민아, 너...”고연우가 말을 채 마치기도 전에 눈앞에서 문이 “펑” 소리를 내며 닫혀버린 탓에 하마터면 거기에 얼굴을 맞을 뻔한 고연우는 문을 두드리며 소리쳤다.“누가 이딴 식으로 짜증을 내고 들
말을 안 하고 앉아있는 정민아에 기사는 정민아가 슬퍼하는 줄로 알았지만 그렇다고 한낱 외부인이 이래라저래라 할 수 있는 부분은 아니라 답답한지 기사는 의자에서 앞뒤로 움직이며 안절부절못하고 있었다.“진심으로 좋아하면 시험하는 게 아니라 마음을 솔직하게 알려줘야죠. 이런 식이면 남자는 점점 더 밀려날 수밖에 없어요. 모든 남자들이 저런 여자를 좋아하는 건 아니지만 저런 여자의 유혹을 당해낼 남자도 없어요.”“저도 남자예요, 믿어도 좋아요.”끊임없이 말하는 기사가 귀찮았는지 정민아는 고개를 돌리며 짧게 대꾸했다.“응, 믿으니까 출발해 빨리.”정민아가 고연우를 시험하는 건 그가 저를 사랑하는지 안 하는지를 알아보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과 주 씨 집안 간의 계약이 성사될 수 있는지를 알고 싶어서 그랬던 건데 지금 보니 이 길은 이미 글러 버린 것 같았다.임우빈은 한 손으로 좌석 등받이를 당기며 고개를 돌려 정민아를 바라보며 그 나이대 특유의 당찬 표정을 하고 말했다.“저렇게 양옆에 여자나 끼고 다니면서 여러 사람 홀려대는 남자는 믿음직스럽지 못하잖아요. 누나 관심을 받을 자격도 없죠. 저는 어때요?”임우빈은 제 이두근을 자랑하며 말했다.“젊고 잘생긴 데다가 체력도 좋고 무엇보다 일편단심이에요. 누나 말곤 아무도 안 봐요, 길가는 암컷 강아지한테 눈길 안 줄 자신 있는데.”“... 너희 엄마는 네가 자기보다 몇 살이나 많은 여자를 집안 며느리로 들이려 한다는 사실 아니?”정민아의 말에 임우빈은 툴툴대며 대답했다.“많이는 아니죠, 고작 세 살인데. 오버는 하지 말죠. 그리고 내가 정말 누나를 집에 데려가면 우리 엄마는 엄청 좋아할걸요. 적어도 앞으로 두 세대는 미모는 보장할 수 있으니까.”임우빈은 정민아의 대학교 후배였는데 1학년 때 운동장에서 정민아를 처음 본 순간 그녀에게 반해버려 결혼하겠다고 호언장담했는데 제대로 들이대 보지도 못하고 정민아가 퇴학을 해버리는 탓에 겨우겨우 수소문해서 정민아가 있다는 경인시까지 와서 대학원을 다니고 여기서 취직
사연희는 잔뜩 감동한 얼굴로 정민아를 바라보며 눈을 빛냈다.“우리 가게 때문에 민아 씨만 고생했네요.”안 그래도 하룻밤 사이에 노 대표님의 생각을 바꿀만한 둘레의 허벅지를 찾는 건 너무 힘든 일인 것 같아 시간이 촉박하진 않을까 걱정했는데 알고 보니 그 시간은 그저 노 대표님이 술을 깨기 위한 시간이었다.사연희가 오해한 걸 알아차린 정민아는 해명하기도 귀찮아져 그냥 사연희를 데리고 나가려 했는데 그때 공민찬이 나오면서 말했다.“고 대표님, 방금 룸까지 다 확인했습니다. 사모님의 머리카락 한 올도 발견하지 못했습니다.”“...”그 말이 끝나자 주위의 공기는 순식간에 어색해졌다.고연우는 공민찬을 흘겨보며 언짢은 듯 말했다.“너만 입 달렸어?”“죄송합니다, 제가 괜한 소릴 했네요.”공민찬은 사과 하나는 빨리하며 바로 다시 입을 열었다.“그런데 사모님께 말씀은 하셨어요?”“...”“대표님, 계속 이런 식으로 하시면 사모님 마음 못 돌려요. 사모님이 최민영 씨한테 괴롭힘 당할까 봐 문 앞에 사람까지 세워서 지키시면 뭐해요, 이런 건 대표님이 말씀 안 하시면 사모님은 영영 모르실 텐데요. 그럼 감동도 못 받으실 테고 사모님이 감동하지 못하시면...”그런 공민찬을 보던 사연희는 주먹을 말아쥐며 입술을 깨물더니 정민아에게 귓속말을 했다.“안 되겠어, 나 여기 더는 못 있겠어.”밖으로 나가기 전 사연희는 한 번 더 공민찬을 자세히 들여다보았다.사연희가 만약 공민찬처럼 말 많고 사실만 얘기하며 아픈 데를 콕콕 찌르는 비서를 뒀다면 얼마 참지 못하고 짜증을 냈을 텐데 무표정으로 듣기만 하는 고연우를 보니 허벅지 대표님의 성격은 꽤 차분해 보였다.“입 다물어.”그 차분한 고연우도 더는 듣기 싫었는지 미간을 잔뜩 찌푸린 채로 공민찬 손에 들려있던 차 키를 뺏어 들고는 정민아를 보며 말했다.“가자.”“응.”정민아의 대답을 들은 고연우의 발이 허공에 잠시 머물렀다가 한참 만에 땅에 닿았다.정민아의 조롱 섞인 거절이거나 분노는 너무나 익숙하고 오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