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로그램에 관련된 사실을 감독은 이미 반 개월 전부터 허 원장에게 말했었다. 당시에는 신은지가 경원에 없었던 데다가 허 원장은 신은지가 얼굴을 드러내는 걸 좋아하지 않는다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에 딱히 말을 꺼내지 않았었다. 지난번에 다큐멘터리에서 신은지는 손만 드러냈고 또 파트너인 이경수의 외모가 출중했기에 많은 네티즌들의 궁금증을 유발했었다. 감독은 신은지가 출연에 동의했다는 소식을 듣자 매우 기뻐하며 일주일 후부터 촬영을 시작할 것이라고 알려줬다. 촬영을 시작하기 전날 신은지는 촬영 팀에서 보낸 스케줄표와 출연진 리스트 같은 자료들을 받았다. 신은지는 방송에 출연하는 것이 목적이 아니었다. 그저 감독님의 명성을 빌어 모든 사람에게 자신이 바로 그 베일에 싸인 인물이라는 것을 알리고 싶을 뿐이었다. 그래서 신은지는 대체적인 촬영 스케줄을 파악한 후에는 단체 채팅방에서 나와 버렸다. 빼곡한 글자를 보자니 머리가 아팠다. 하지만 촬영 날 메이크업을 받을 때 전예은을 만나게 될 줄은 상상도 못 했다. 며칠 전 연예계로 진출할 생각이라고 하더니 이렇게 만나게 될 줄은 몰랐다. 신은지는 이마를 짚었다. 원수는 외나무다리에서 만난다더니 그 말이 딱 맞았다. 메이크업을 받는 방이 크지 않았기 때문에 서로를 볼 수가 있었다. 김청하가 전예은에게 촬영 스케줄에 대해 고지하면서 신은지를 쳐다봤다. 김청하가 고개를 돌리며 비웃었다.“촬영도 곧 시작할 텐데 그 실버인가 뭔가 하는 사람은 아직도 안 오네요. 첫날부터 모두를 기다리게 할 생각인 건가?”사실 어제 출연진 리스트에서 실버라는 이름을 보자마자 김청하는 전예은에게 불만을 토로했었다.“신비한 척은 혼자 다 하더니 역시 돈에 넘어가네요. 다른 사람 보다 복구 비용을 훨씬 더 많이 받는 것도 모자라 이젠 이런 프로그램까지 참가하다니.”김청하는 일찍 와서 이미 다른 출연진들을 다 확인했지만 낯선 얼굴은 한 명도 보이지 않았다. 신은지는 빈자리를 찾아 앉았다.“이미 왔는데요. 매니저님은 자신이 맡으신 분이나 잘 관리하
박태준은 눈썹을 찌푸리며 손에 있는 서류를 보고 있었다."무슨 정체?""신은지가 바로 그 실버야."전예은이 강조했다.“내 그림 복구해 준 사람.”그녀는 당시 그 그림으로 강혜정의 비위를 맞추고 싶었고 박태준에게도 놀라움을 주려고 했기 때문에 사전에 언급하지 않았었다. 하지만 후에 생일파티에서 그 소란이 있었기에 실버라는 사람이 공개될 수밖에 없었다.페이지를 넘기던 박태준이 서류에서 눈을 떼고 한참 후에야 대답했다.“어.”그의 태도가 이렇게 평온한 것을 보고 전예은이 믿을 수 없다는 듯 물었다.“이미 알고 있었어?"몰랐다. 그는 이경수가 신은지를 실버라고 부르는 것을 들은 적이 있지만 당시 그는 그냥 애칭이라고 여겼을 뿐이었다. 게다가 그는 이 일에 대해 딱히 개의치 않았었다. 그는 전예은의 질문에 더 이상 대답하지 하지 않았다. 그녀에게 설명할 필요도 없다고 생각했다. 전예은이 목소리를 높였다."신은지가 나를 속인 것도 알고 있어? 아니면 이 안에도 네 계획도 있니?"“뭘 속인 거지?"전예은이 침묵했다. 방금 그 말을 뱉자마자 그녀는 자신이 어리석었다는 것을 알았다. 실버는 비록 그녀에게 높은 가격을 받았지만 미리 가격을 제시했고 자신도 동의했다. 그래서 사기라고 말할 수는 없었다. 기껏해야 고의로 그녀를 괴롭힌 정도로밖에 해석할 수 없었다. 그러나 두 사람은 원래 별로 사이좋게 지내는 관계가 아니었으니 사실 실버가 복구 작업을 받지 않아도 할 말이 없다.박태준은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전예은은 그가 여전히 자신의 대답을 기다리고 있는지 확실하지 않았지만 한참 지나서 자기 자신도 믿지 못할 것 같은 이유를 댔다."돈, 비록 그 그림이 좀 심하게 훼손된 건 맞지만 시장가격으로 계산하면 그렇게 높은 가격을 받을 필요는 없었어.”"돈을 위해서라면 그냥 내 비위나 잘 맞추면 더 많이 벌지 않을까? 그럼 아침부터 저녁까지 바쁘게 일할 필요도 없을 텐데.”전예은은 박태준이 자신을 비꼬기 위해 이 말을 한 것이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다. 그는
박태준의 태도를 보아하니 모든 걸 알게 된 것 같았다. 어쩐지 전예은이 밖에 나갔다 오더니 표정이 많이 나아진 것 같더라니 이제 보니 박태준이 애인을 대신해 복수를 하러 온 것 같았다. 신은지는 오늘 하루 종일 바삐 돌아다니느라 이미 충분히 피곤한 상태였다. 근데 또 박태준의 시비까지 받아주려 하니 표정이 순식간에 굳어졌다. 신은지는 휴대폰을 테이블에 탁 내려놓고는 팔짱을 꼈다.“전예은이 어떻게 하고 싶대? 돈을 돌려달래? 그건 안 되지.”“실버에 대한 얘기를 하고 있는 거니까 쓸데없는 사람은 끼여들이지 마.”“쓸데없는 사람이라니? 전예은이 오전에 전화해서 나에 대해 다 말한 거 아니야? 그래서 일부러 지금 나한테 시비 거는 거고.”“전예은이 나한테 말했다는 건 네가 확실히 나한테 숨기는 일이 있었다는 거야.”박태준이 신은지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순식간에 분위기가 얼어붙었다.“네가 실버라는 걸 왜 안 알려줬어?”“너한테 알려줄 필요가 있어? 뭐 나한테 맡길 골동품이라도 있니?”“내가 무슨 말하는지 알 텐데.”신은지는 갑자기 지난 기억들이 떠올라 기분이 우울해졌다. 신은지가 씁쓸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그럼 나한테 물어본 적은 있어? 내 작업실 바로 네 서재 옆인 데다가 한 번도 문을 잠근 적이 없는데 방안에 그렇게 많은 도구들이 있었는데도 3년 동안 넌 본 척도 안 했어.”이혼을 결심한 다음부터 신은지는 이런 일로 그를 원망하지 않기로 했다. 원망해 봤자 소용이 없었다. 하지만 떠올릴 때마다 마음이 씁쓸해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박태준의 표정이 변하는 것을 보고 신은지는 말을 이어 나갔다.“넌 그냥 내가 매달 월급이나 받아먹는 매니저인 줄 알지? 그리고 이 직업도 우리 엄마 덕분에 얻었다고 생각하고. 그러니까 넌 내가 널 떠나면 아무것도 아닌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거잖아.”레스토랑의 불빛이 조금 어두웠기에 박태준의 표정이 어떤지 읽을 수가 없었다.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미안한 마음이 들어서인지 아니면 신은지가 왜 지금 이렇게
신은지는 싸움 구경을 하다가 화제가 그쪽으로 넘어가게 될 줄은 몰랐다.“아니에요.”“날 속이려고 하지 마. 만약 그 자식이 정말 그런 짓을 했다면 용서할 수 없어.”강혜정은 만약 신은지가 고개를 끄덕이기라도 한다면 바로 박태준에게 달려갈 기세를 취했다. 신은지는 고개를 저었다.“그런 적 없어요, 어머님. 결혼 한지 3년이나 됐지만 애초에 저한테 손을 댄 적이 없으니까요.”강혜정에게 이혼할 거라고 밝힌 후부터 신은지는 이제 그녀에게 숨길 것이 없었다. “뭐라고?”믿을 수 없는 말에 강혜정이 눈을 크게 떴다.“결혼하고 한 번도 해 본 적 없어?”강혜정은 민망해서 직접적으로 얘기를 하지 못했다.“태준이가 혹시... 아니면 저번에 그 약을 좀 더 사 올까? 더 먹으면 할 수도 있잖아.”신은지는 민망했다. 더 가다가는 강혜정이 정말 박태준에게 각종 약을 다 먹일 것만 같았다. 신은지는 얼른 해명했다.“아니에요. 아무 문제도 없어요. 그냥 저랑 하기 싫은 것 같아요. 그러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좋아하는 사람이 생기면 손주는 바로 생기실 거예요.”“그럴 리가 없어. 분명히 걔가 먼저...”강혜정이 말을 멈췄다. 함부로 말했다가는 오해가 깊어질 수도 있으니 일단 박태준에게 물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강혜정은 이제 쇼핑을 하고 싶은 마음까지 사라졌다.“일단 오늘은 그만 가자. 우리 집에 와서 밥 먹고 가.”신은지는 가기 싫었지만 강혜정이 기분이 별로 안 좋은 것을 보고 그냥 조용히 따라갈 수밖에 없었다. 집에 도착하자마자 강혜정은 2층 서재로 올라갔다. 아주머니가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물었다.“아가씨, 사모님한테 무슨 일이라도 생긴 건가요? 왜 쇼핑하고 돌아오셔서 오히려 기분이 더 안 좋아지신 것 같죠?”신은지는 고개를 저을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1시간 후 박태준이 돌아왔다. 그는 신은지를 한번 쳐다보고는 위층으로 올라갔다. 박태준이 서재의 문을 두드렸다. “어머니, 부르셨어요?”“은지랑은 어떻게 된 일이니? 분명 네가 먼저 원
박태준과 개 ……이건 머리 아픈 과제이다. 어떻게 대답하든지 모두 함정이다.다행히 박태준은 이런 일에 시시콜콜 따질 나이가 지났기에 신은지가 이 화제를 더 토론할 생각이 없자 더는 끈질기게 조르지 않았다.그는 차 문을 닫고 차 머리로 에돌아 운전 좌석에 앉았다.차 안의 분위기는 이상해졌다. 남자는 무표정으로 앞을 보고 아무도 나를 건드리지 말라는 모습이었고 신은지도 벙어리 식으로 데려다주지 않아도 된다는 말을 안하고 더이상 남자를 자극하지 않았다.그녀는 금방 본가에서 꿀물을 먹어서 좀 목이 말랐다. 그래서 차 수납함에서 캡을 열지 않은 광천수를 꺼냈다. 금방 병뚜껑을 열려다가 박태준이 그녀를 향한 눈빛을 알아차렸다.신은지는 동작을 멈추고 광천수 병을 들고 머리를 돌리며 물었다.“마실래?”‘허’ 박태준은 확실치 않은 대답을 했다.신은지는 사양 없이 어이없다는 듯이 박태준을 힐끗 보고는 병뚜껑을 열고 입가로 물병을 보냈다. 그러나 옆에 있는 누군가의 눈빛이 너무 강하여 무시할 수 없었다.그녀는 물병을 건네주었다.“마셔.”박태준은 건네주는 물병을 피하면서 말했다.“나의 수준이 별로라고 하면서 지금은 왜 나에게 잘 보이려고 하는 거지?”???그녀는 이 남자의 사고방식에 탄복했다. 그러나 이해는 갔다. 박씨 가문은 명성이 혁혁한 가문이고 박태준은 독자로 옆에 목적을 갖고 다가가는 사람도 많았다.신은지는 그를 아랑곳하지 않고 머리를 젖히고 크게 한 모금 마셨다. 차디찬 물은 목구멍을 통해 위로 들어갔다. 신은지는 찬물에 추워서 으스스 몸을 떨었다.“그래. 내가 틀렸지. 아마추어가 동정을 받을 자격이 없지. 그러니 훼멸하자.”박태준 ……아파트 아래에서 차가 멈춰 서자마자 신은지는 차에서 내려 아파트 단지 안으로 뒤에 맹수가 쫓는 듯이 재빠르게 달려 들어갔다.겨울의 밤은 정적에 젖었고 쌩쌩 부는 찬 바람에 나무 잎은 윙윙 소리를 내고 가로등은 안개에 싸여 어둡던 불빛이 더 어두워졌다.눈에 보이는 건 당직 서는 경비 외에 급급히 지나가
그 후 며칠이 지나 심은지는 아파트 구역에서 그 몇 사람을 보지 못했다. 그냥 그날 저녁 너무 생각이 많았구나 하고 곧 그 일을 잊어버렸다.필경 이번 프로그램은 금방 녹화를 마치고 아직 방영되지 않은 상태라서 누군가가 본인에게 불리한 일을 벌여도 지금은 아니라고 생각했다.이날 심은지는 잔업을 마치고 진선호의 전화를 받았다. 진선호는 원망하면서 불평했다.“심은지 씨는 제가 연락하지 않으면 저에게 연락 안 주네요. 제가 없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죠?”그날 병원에서 작별 후 두 사람은 연락이 없었다. 그동안 진선호도 많이 바빠서 연락할 겨를이 없었다. 그러나 한가하고 보니까 의리 없는 이 여자가 자기에게 문자 하나도 보내지 않았었다.진선호가 여자처럼 불평을 하니 심은지는 저도 모르게 웃으며 말했다.“상처는 다 나았나요? 의사선생님한테 약 바꾸러 갔었나요?”진선호는 하하 웃으며 말했다.“심은지 씨가 물어보길 기다렸다가는 무덤위의 풀이 한참 자랐겠네요.”심은지는 물건을 정리하고 있었고 진선호 말을 이어 대답 하지 않았다.진선호는 십몇초를 기다리다가 불만의 목소리로 말했다.“학창 시절에 심은지는 말수가 적지만 의리가 있고 마음이 착한 열혈 청년이었는데 몇 년만인데 생기가 없어지고 과묵한 표주박으로 변했네요.”“나를 원망하려고 전화했어요?”“당연히 아니죠. 저녁 같이 먹어요.”진선호는 느슨한 목소리로 말했다.“내려와요. 심은지씨 집 아래에 있어요.”“전 지금 사무실에 있어요. 집에 없어요.”“.....이미 늦었는데 ” 진선호는 손목시계를 들여다보니 8시였다. 진선호는 손의 일을 끝내자마자 저녁 식사를 같이하려고 심은지 아파트에 왔다. “진유라 씨한테서 심은지 씨는 자택 근무한다고 들었는데요. 사무실이 어딘데요. 데리러 갈게요.”심은지는 멍했다가 음..경원작업실에 다시 돌아온 일을 진유라한테 미처 알려주지 않았었다.“아뇨, 자가 운전해 갈게요. 여기 좀 외따진 곳이라 도착한 후에 위치를 문자로 찍어 줘요. 바로 갈게요.”“그래요.”전화
주차장내 신은지의 핸드폰은 날아가 바닥에 떨어져 스크린이 눈송이 모양으로 부서졌다.그중의 한사람이 거침없이 발을 들어 여러 번 밟았다.“씨발. 이렇게까지 일을 만들어? 사진 몇 장 찍으려 했을 뿐이야. 협조를 해줘.그렇잖으면 오빠들이 예의고 뭐고 안 지킨다.”말을 마치고 그 사람이 신은지를 노려보다가 방자한 눈으로 훑어보았다. 그리고 이빨을 드러내고 음란하게 웃으며 말했다.“몸매는 괜찮은데. 남자 한테 한두번....”여러가지 음란의 말을 쏟아 냈다. 말하는 와중에 그들의 눈길마저 점점 변해 갔다.신은지 오늘의 복장은 캐주얼 스타일에 숄더백을 메고 있었다. 그녀는 침착하게 그들에게 물었다.“당신들이 어떤 사진을 찍으려고 하는 거예요?”“신은지 씨가 평소에 보는 AV처럼 그런 거예요.”“좋아요. 그러나 차에 가서 찍어요. 다른 사람이 보는 것이 싫어요.”그녀는 가방을 취하여 손에 들고 말했다.“난 다른 사람하고 저녁 식사가 있어요. 빨리 찍어요. 친구가 제가 이런 사진을 찍은 걸 알면 안 돼요.”그 사람들은 ‘허허’ 소리를 냈다. 찍은 사진이 온 인테넷에서 돌아다닐 건데 다른 사람이 보면 안 된다고?그들의 원계획은 차 안에서 찍기로 했고 이런 깜깜한 속에서 찍으면 뭐가 보인다고! “그래. 차 열쇠를 우리한테 줘요.”신은지는 입을 깨물고 차 열쇠를 주고 싶지 않았다. 근데 앞장서 있던 사람이 바로 열쇠를 빼앗으려고 했다.신은지는 갑자기 손을 들고 가방끈으로 그 사람의 목덜미를 감고 부리나케 한 바퀴 더 감아서 꽉 조였다.그리고 다른 사람들이 무방비한 틈을 타서 그 사람을 견제하며 방향을 바꾸어 등을 보닛에 기댔다. .신은지가 명문 가문의 숙녀이고 손에 공구도 없으니까 이 무리의 사람들은 그녀가 공격력이 없다고 생각하여 무방비 상태였다.생각밖에 죽을지언정 굽히지 않는 독한 사람이었다!“당신들 이러는 건 돈 때문이야?”“돈으로 우리를 매수하려고? 우리가 이 판에서 일하면 규정을 지켜야 해. 끈 하나로 우리를 위협할 수 있다고 생각
박태준은 바로 신은지 쪽으로 걸어갔다.진선호에게 맞아 쓰러진 무리들은 아직도 몸을 웅크리고 그 자리에 누워 있었다. 상처가 심하여 일어나지 않는 게 아니라 감히 움직이지 못하고 있었다. 금방 진선호에게 한 발로 차서 뿌려 나간 사람의 상태가 그들에게 무서운 심리적인 그늘이 되었다.보통 사람은 장애물을 부딪히면 에둘러 가는 것이 정상인데 박태준은 그런 자각이 없이 고개도 숙이지 않고 발밑에 부딪히는 장애물은 바로 발로 걷어찼다.또 한 명의 비참한 신음 소리가 울렸다.박태준은 무표정이었고 온몸을 감싸고 있는 분위기는 지옥에서 나온 사람 같아 보였다.다른 사람들은 스스로 잇달아 피하여 박태준에게 넓은 길을 남겨주었다. 2미터 8센티 되는 다리를 가진 사람일지라도 다리를 쫙 벌려 걸어도 장애물이 없을 정도로 넓은 길을 보장해 줬다.박태준은 발걸음을 멈추고 땅의 두 갈래 그림자를 굽어보았다. 하나는 신은지,하나는 진선호의 그림자였다. 분명히 서로 다른 두 갈래 그림자인데 지금 딱 붙어 뒤의 어둠하고 하나를 이루었다.박태준은 마음속 꿈틀거리고 있는 조바심을 누르고 시선을 여자의 창백한 얼굴에 돌리며 그녀에게 손을 내밀었다.“일어나.”박태준이 내미는 손을 보고 진선호는 신은지가 대답하기 전에 먼저 말했다.“박사장님은 사람 구하려 오셨나요? 마침 저도 마찬가지예요. 근데 이 시간에 오는 건 시신 수습하러 왔다고 과언이 아니에요.”진선호는 아래턱을 쳐들면서 박태준이 늦게 왔다는 의미로 비꼬아 말했다.박태준은 차겁게 진선호를 바라보고 잠깐 멈추었다가 말했다.“고마워요.”주권을 의미하는 고맙다는 얘기는 칼처럼 진선호의 마음에 박혔고 그의 얼굴에 건들건들하던 웃음기가 사라지고 불쾌한 분노의 소리로 말했다. “내가 구한 건 박사장님이 아니예요. 고맙다는 말은 박사장이 할 말이 아니예요.”“진선호 씨가 구한 건 나의 아내로서 내가 당연히 고맙다고 얘기를 해야죠. 의료비도 내가 낼게요.”박태준은 입술을 양쪽으로 올리며 담담한 어투로 보충하여 말했다.“만약
정민아는 팔짱을 끼고는 고연우가 들고 있는 꽃을 무심하게 훑어보았다.“연우 도련님, 이건 또 무슨 의미야?”“공 비서가 오늘이 여성의 명절이라고 했어.”“그래서?”주위는 조용하고 잔잔한 음악 소리가 문을 통해 희미하게 들려왔다.고연우는 잠시 침묵하다가 말했다.“정민아, 우리 이혼하지 말자.”너무 진부한 이야기였다. 정민아는 더 이상 이 주제를 논의할 의욕조차 없었다. 그녀는 고개를 돌려 책상 위 담뱃갑을 더듬었다. 옆의 재떨이엔 얇은 층으로 쌓인 담배꽁초가 있었고 그 중 절반 이상이 정민아가 피운 것임을 립스틱 자국이 말해주고 있었다.고연우는 미간을 찌푸렸다. 그는 정민아가 담배를 피우는 걸 싫어하면서도 막지 않았다.얇게 피어오르는 연기가 정민아의 입술 사이로 흘러나왔다. 담뱃불은 희미하게 밝아졌다가 사라지며 그녀의 눈을 비췄다. 그 순간, 눈 속의 차가운 무관심이 한층 누그러져 보였다. 은빛 실처럼 가늘게 펴지는 연기 너머로 정민아는 당당하고 제멋대로 미소 지었다. 그리고 정민아가 그렇게 웃을 때마다 고연우는 어김없이 불길한 예감을 느꼈다.다음 순간 정민아가 말했다.“고연우, 너 이상한 거 아니야?”“그렇지. 이상하지 않았다면 여기 서 있지도 않았을 거야.”고연우는 소매를 걷어 올리며 손목시계를 가리켰다.“시간 됐어. 레스토랑으로 가자. 예약해 놨어.”정민아는 이미 샘플 수정으로 지쳐 있었는데 고연우의 집요함이 정민아를 더욱 짜증 나게 했다. 고연우의 고급스러운 코트가 눈에 들어오자 정민아의 머릿속에 문득 나쁜 생각이 스쳤다. 그녀는 손에 들고 있던 담배꽁초를 그의 코트에 대고 눌렀다.‘치...’불꽃이 꺼지면서 연기가 피어오르자 타는 냄새가 코트에서 퍼져 나왔다.정민아는 차가운 얼굴로 꺼진 담배꽁초를 옆의 쓰레기통에 던졌다.“꺼져.”고연우는 자신이 입고 있는 코트의 타는 자국은 아랑곳하지 않고 정민아의 손을 잡았다.“이 코트는 가격이 6자리 숫자야. 디자인에서 완성까지 3개월이 걸렸어. 나와 저녁 정도는 함께 먹어줘야 하
고연우는 벨트를 풀며 말했다. 남자는 원래 이런 상황에서 승부욕이 강해지기 마련인데 특히 좋아하는 여자 앞에서는 그 감정이 더욱 크게 드러났다.“그런 암흑 같은 분위기는 우리 상황과 맞지 않아.”정민아는 원래 고연우에게 특별한 감정은 없었다. 어둠 속에서 고연우는 마치 사나운 짐승처럼 보였을 것이니 고연우에게 흥미를 느끼는 것 자체가 이상한 일이었다.정민아는 그를 뚫어지게 바라봤다. 고연우는 옷을 반쯤 벗었고 단단한 근육이 팽팽히 긴장되었으며 술기운에 물든 피부는 은은한 붉은빛으로 물들어 있었다.공기 중에는 얼굴을 붉히게 만드는 묘한 긴장감이 감돌았고 마치 곧 무언가가 터질 듯한 기운이 흐르고 있었다. 가끔 고연우의 거친 숨소리가 들려오기도 했다.정민아가 말했다.“요즘 운동 안 했어?”고연우는 어이없었다.“?”정민아는 손바닥을 고연우의 가슴 아래쪽에 대고 살짝 눌러보았다. 그러고는 평가하듯 말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근육이 좀 줄었네.”“...”정민아는 마치 중대한 결정을 앞둔 사람처럼 진지한 표정으로 확신에 찬 눈빛으로 고연우를 응시했다. 고연우는 모른 척하려 했지만, 결국 그녀의 말을 무시할 수 없었다. 그는 옷을 다시 입고 정민아의 손을 자기 몸에서 조심스레 떼어내더니 문을 향해 나가며 화가 난 듯 정민아를 한번 매섭게 쳐다보았다.“네가 이겼어.”완전히 흥미가 사라졌다....며칠 동안 고산그룹 대표실이 있는 층은 숨조차 크게 쉴 수 없을 만큼 무거운 분위기에 짓눌려 있었다.공민찬이 급한 서류 묶음을 들고 고연우에게 사인을 받으려 일어서던 순간, 엘리베이터에서 소리가 났다. 그때 최민영이 가방을 들고나와 미소를 지으며 공민찬에게 인사를 건넸다.“공 비서님.”공민찬은 다가서며 말했다.“최민영 씨.”최민영은 사무실 쪽을 가리키며 물었다.“연우 씨 사무실에 있나요?”“최민영 씨, 잠시만요”공민찬은 그녀를 막아섰다.“대표님께서 지금 바쁘십니다. 우선 접대 실에서 잠시 기다리시는 게 어떨까요?” “...”최민영은 눈썹
고연우는 짜증 내며 핸드폰을 테이블에 던지더니 미간을 꾹꾹 눌렀다. “나가세요. 나중에 송씨 아주머니한테 작업복 하나 달라고 하세요.”“도련님, 혹시 어디 불편하세요?”하린은 우유를 들고 테이블 앞으로 다가갔다. “저 예전에 마사지도 배운 적 있는데, 제가...”“그만 나가.” 고연우는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그녀의 손을 피하다가 우유를 엎지르고 말았다. 우유가 쏟아지며 더럽혀진 셔츠를 내려다보며 그는 얼굴은 굳어진 채 입술을 오므렸다. 한참 후에야 한 마디 내뱉었다. “사모님께서 보낸 겁니까?”그는 이를 악물고 한 글자 한 글자 뱉어냈다.하린은 고연우의 차가운 눈빛에 그 자리에 굳어진 채 말을 더듬었다. “도련님, 정말로 사모님께 저를 보내셨습니다.”“나가세요. 앞으로 제 허락 없이는 서재에 들어오지 마세요.” 하린은 금수저 남편을 찾기 위해 가사 도우미로 취직했다. 이를 위해 매니저에게 봉투까지 건넸지만 고연우의 사늘한 태도에 더 이상 다른 생각을 품지 못했다. 서재를 나오자마자 난간에 기댄 채 그녀를 쳐다보는 정민아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사모님...”하린은 갑자기 발걸음 멈추더니 애써 태연하게 말했다. 아무래도 불순한 의도를 품었던 그녀는 사모님을 보면 본능적으로 불안했다. “도련님께서 드시지 않았어요...”비록 정민아의 표정은 아무런 변화도 없었지만 하린은 괜히 자신을 평가하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녀가 더 이상 감당할 수 없을 것 같을 때 마침 정민아가 입을 열었다. “그럼 몇 번 더 가져다주세요.”하린은 정민아의 말에 담긴 뜻을 단번에 눈치챘다.그녀는 자신이 잘못 이해한 게 아닐까 의심이 들 정도였다. ‘도대체 어떤 재벌 부인이 자신의 남편에게 여자를 찾아주는 걸까? 설사 남편이 마음에 들지 않더라도 돈이면 충분할 텐데, 그러다 사생아라도 생겨 상속 분배에서 더 많은 문제를 일으키면 어쩔 생각인지.’그녀는 다시 한번 확인했다. “도련님께서 송씨 아주머니한테 익숙해졌는지 저를 좀 꺼리시는 것 같아요. 아
다음 날.정민아와 사연희는 쇼에 대해 논의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뒤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민아야...”주소월이었다. 사연희는 정민아의 과거에 대해 완전히 알지는 못했지만 주소월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세상에 자식을 챙기지 않는 엄마가 어디 있겠는가? 그러나 설령 절친이라도 남의 가정사에 깊이 개입하기는 어려웠다. 그녀는 노트북을 들고 일어나 말했다. “초대장 몇 개 빼놓고 못 보낸 것 같은데, 금방 보내고 올게. 쇼에 관한 건 나중에 다시 얘기해.”그녀는 주소월을 흘끗 쳐다보고는 인사도 하지 않은 채 돌아섰다. 정민아도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주소월에게 대충 고개를 끄덕이고 물었다. “무슨 일이에요?” 그녀는 어젯밤에 충분히 더 이상 정씨 가문과 연관되고 싶지 않다는 의사를 전달했다고 생각했지만 주소월이 여전히 찾아올 줄은 몰랐다. “오늘 밤에 연회가 있는데, 같이 가겠니?” 정민아가 거절할까 봐 주소월은 서둘러 한 마디 덧붙였다. “너희가 쇼를 열잖아? 오늘 밤 연회에 너와 같은 나이의 사람들이 많이 올 거야. 잠재 고객을 몇 명 발전시킬 기회가 될 수도 있어.”“지금 그 무리에서 잠재 고객을 발전시키라는 말씀이세요?”그녀와 최민영의 갈등은 모두가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집안이 최씨 가문보다 못한 사람은 그녀에게 다가가는 것을 꺼렸고 반면 집안이 최씨 가문보다 좋은 사람은 고아 때문에 굳이 적을 만들 필요도 없었다. 주소월은 정민아가 당했던 일을 떠올리며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 “민아야, 미안해. 엄마가 너를 데려오긴 했지만 제대로 돌보지도 못하고 너한테 이렇게 상처만 줬네...”“미안해할 필요 없어요. 오히려 제가 고맙죠. 저를 정씨 가문으로 데려와 줘서 고마워요. 그 마을에서 벗어날 수 있게 해줘서, 그리고 또... 그 미친놈으로부터 구해줘서 고마워요.”마치 세월의 흔적을 덮은 한 자루의 칼처럼 서서히 그녀의 심장을 파고들었다. “민아야...” 주소월은 울먹거리며 더 이상 눈물을 참을 수 없었다. 그녀는 처음 그
정민아는 문을 열고 지친 몸으로 가방을 내려놓았다. 신발을 갈아신던 중 슬쩍 식탁 위에 차려진 음식을 보았다.“아주머니, 제가 전화드렸잖아요. 저녁 먹고 온다고, 왜 이렇게 음식을 많이 차렸어요?”송씨 아주머니는 2층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도련님께서 아직 저녁을 드시지 않으셨습니다.”고연우라는 말을 듣자 정민아는 더 이상 묻지 않고 뻐근한 목을 주무르며 2층으로 올라갔다. “아, 그렇군요.”“아가씨...”송씨 아주머니가 망설이며 그녀를 불렀다. “도련님께서 아가씨가 돌아오시면 같이 식사하자고 불러달라고 하셨습니다.”“제가요?” 정민아는 걸음을 멈추고 의아해하며 돌아봤다. “왜요?”“도련님께서 기분이 별로 안 좋아 보이셨는데... 두 분 혹시 싸우신 거 아닌가요?”“그 사람이 기분이 안 좋다고 제가 달래줘야 하나요? 그럼 왕자님, 저녁 드세요라고 말이라도 해야겠네요?” 정민아는 피식 웃더니 입가에 맴돌던 웃음이 갑자기 사라졌다. “먹든 안 먹든 마음대로 하라고 하세요. 먹기 싫으면 굶으면 되죠.”송씨 아주머니는 시선을 정민아 뒤쪽으로 옮기더니 표정이 조금 일그러진 채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도... 도련님...”정민아가 뒤돌아보자 고연우는 난간에 기댄 채 냉랭한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방금 샤워를 끝냈는지 머리가 약간 젖어 있었고 외출복을 입고 있었다. 몸에 딱 맞는 셔츠에 검은색 정장 바지를 입은 채 단추는 몇 개 풀려 있었고 옷자락은 허리선에 맞춰 깔끔하게 넣었다. 넓은 어깨, 잘록한 허리에 긴 다리를 뽐내며 그 자리에 서 있는 것만으로도 주변을 배경처럼 흐릿해 보이게 만들었다.고연우는 냉랭한 목소리로 말했다. “같이 저녁 먹자.”사실 그는 조금 더 튕기고 싶었지만 계속 자존심을 부리다 이 무심한 여자는 그냥 가버릴 것 같았다.정민아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말했다. “난 이미 먹었어.”“네가 장소 문제를 해결하라고 해서 해결해 줬더니, 겨우 도시락 하나 사주는 거냐? 정민아, 너 정
“난 내가 좋은 사람이라고 한 적 없어.”정민아가 웃으며 고개를 옆으로 하자 덜 말려진 머리카락이 한쪽으로 치우치며 하얗고 맑은 어깨가 그대로 드러났는데 그 위에는 물방울까지 맺혀있어 고연우의 심장을 요동치게 만들었다.그 어떤 뜨거운 것이 가슴속에서 꿈틀거리고 있었고 방안에 가득 찬 정민아의 향기가 그림자마냥 고연우의 주변을 맴도는 탓에 고연우는 흐릿해져 가는 정신을 부여잡으려 주먹을 말아쥐었다.술기운이 뒤늦게 밀려오는 것인지 아니면 저 고혹적인 자세 때문인지 고연우는 머리가 점점 더 뜨거워지는 것 같았다.그에 정민아는 문을 열고는 손님을 배웅하는 듯한 자세를 취하며 말했다.“내가 불편해지면서까지 다른 사람한테 맞추긴 싫거든. 그러니까 일단 최민영부터 죽이고 와서 사랑 타령해.”“... 다른 건 안 될까?”“다른 거 뭐?”정민아의 산만한 시선이 고연우의 몸에 머물렀다. 사람이 아니라 상품을 보는 듯 곳곳을 훑어보고 있었다.“너한테 나의 흥미를 불러일으킬 만한 뭐 다른 게 있긴 해?”상처가 되는 말은 아니었지만 모욕적인 말임은 틀림없었다.하지만 웃긴 건 정민아의 말에 고연우가 고개를 숙여 제 몸을 보고 있다는 것이다.아무리 봐도 돈과 권력 외에는 정민아가 관심을 가질만한 게 없어 보이는 듯한 몸에 고연우는 고개를 들더니 그래도 억울하다는 듯 말했다.“그 기생오라비보다는 내가 더 잘생겼어.”정민아가 혹여 듣지 못할까 봐 고연우는 기생오라비라는 단어에 더 힘을 주며 말했다.어려서부터 따라다니는 사람들이 끊이질 않았던 고연우는 저에게도 이렇게 여자의 환심을 사기 위해 어필하는 날이 올 줄 꿈에도 몰랐었다.하지만 정민아는 관심 없다는 듯 입꼬리를 움직이며 말했다.“얼굴 자랑 말고 가서 약이나 좀 사지 그래? 내가 너에 대한 흥미는 약의 자극을 받아야만 생길 것 같거든.”머리에 누가 찬물이라도 끼얹은 듯이 아까의 설렘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도 입안에는 분노 가득한 험한 말들이 서러움과 함께 맴돌고 있었다.“넌 앞으로 그냥 말을 하지 마.”
고연우의 질문에 정민아는 사실대로 대답했다.“대학 때 후배.”그 말에 고연우는 아까 정민아를 보던 임우빈의 이상한 눈빛을 떠올리며 입술을 살짝 깨물고는 물었다.“쟤가 너 좋아해?”“응.”“...”너무 당연하다는 듯이 인정을 해버리는 정민아에 말문이 막혀버린 고연우는 한참 만에야 입을 열었다.“너 저렇게 기생오라비 같은 놈 좋아했었어?”정민아의 성격 때문에 좋아하는지 아닌지는 정확히 알 수 없었지만 임우빈한테 유난히 관대한 것만은 보아낼 수 있었다.인정하고 싶지는 않았지만 정민아 앞에서 주책맞게 떠들어 댄 게 자신이었다면 정민아는 진작에 제 머리를 비틀어 화분으로 삼겠다고 협박했을 것이다.정민아는 언짢아 보이는 고연우를 보며 말했다.“기생오라비 같은 게 아니라 어린 거야. 턱선이 당신처럼 뚜렷하진 못해 그래서. 그리고 뒤에서 다른 사람 험담하는 건 격 떨어지는 일이야, 고연우 도련님.”고연우 도련님이라는 단어에 올라가는 억양을 붙인 게 아무리 봐도 조롱 같았던 고연우는 냉소를 흘리며 말했다.“턱선이 나보다 뚜렷하지 못하고 어려서 그렇다고? 그럼 뭐 나는 늙었다는 소리야? 그리고 내 앞에서 내 아내를 탐내는 데 내가 얼마나 격을 차려야 한다는 거지? 난...”고연우는 간신히 튀어나오려는 험한 말을 참아냈다.“곧 이혼할 건데 뭘.”“꿈 깨.”혈관 속에서 불꽃이 튀기는 것 같은 느낌에 원래도 나빴던 기분이 더 완벽히 잡쳐버린 고연우는 정민아를 노려보며 말했다.“난 이혼에 합의 안 할 거니까 그런 생각은 안 하는 게 좋을 거야. 우리 사이에 사별은 있어도 이혼은 없어.”고연우의 말에 정민아가 문고리를 잡아 내리며 대꾸했다.“그럼 아직 살아있으니까 납골함이라도 직접 골라. 귀신 돼서도 네가 직접 고른 집에 있으면 기분이라도 좋겠지.”“정민아, 너...”고연우가 말을 채 마치기도 전에 눈앞에서 문이 “펑” 소리를 내며 닫혀버린 탓에 하마터면 거기에 얼굴을 맞을 뻔한 고연우는 문을 두드리며 소리쳤다.“누가 이딴 식으로 짜증을 내고 들
말을 안 하고 앉아있는 정민아에 기사는 정민아가 슬퍼하는 줄로 알았지만 그렇다고 한낱 외부인이 이래라저래라 할 수 있는 부분은 아니라 답답한지 기사는 의자에서 앞뒤로 움직이며 안절부절못하고 있었다.“진심으로 좋아하면 시험하는 게 아니라 마음을 솔직하게 알려줘야죠. 이런 식이면 남자는 점점 더 밀려날 수밖에 없어요. 모든 남자들이 저런 여자를 좋아하는 건 아니지만 저런 여자의 유혹을 당해낼 남자도 없어요.”“저도 남자예요, 믿어도 좋아요.”끊임없이 말하는 기사가 귀찮았는지 정민아는 고개를 돌리며 짧게 대꾸했다.“응, 믿으니까 출발해 빨리.”정민아가 고연우를 시험하는 건 그가 저를 사랑하는지 안 하는지를 알아보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과 주 씨 집안 간의 계약이 성사될 수 있는지를 알고 싶어서 그랬던 건데 지금 보니 이 길은 이미 글러 버린 것 같았다.임우빈은 한 손으로 좌석 등받이를 당기며 고개를 돌려 정민아를 바라보며 그 나이대 특유의 당찬 표정을 하고 말했다.“저렇게 양옆에 여자나 끼고 다니면서 여러 사람 홀려대는 남자는 믿음직스럽지 못하잖아요. 누나 관심을 받을 자격도 없죠. 저는 어때요?”임우빈은 제 이두근을 자랑하며 말했다.“젊고 잘생긴 데다가 체력도 좋고 무엇보다 일편단심이에요. 누나 말곤 아무도 안 봐요, 길가는 암컷 강아지한테 눈길 안 줄 자신 있는데.”“... 너희 엄마는 네가 자기보다 몇 살이나 많은 여자를 집안 며느리로 들이려 한다는 사실 아니?”정민아의 말에 임우빈은 툴툴대며 대답했다.“많이는 아니죠, 고작 세 살인데. 오버는 하지 말죠. 그리고 내가 정말 누나를 집에 데려가면 우리 엄마는 엄청 좋아할걸요. 적어도 앞으로 두 세대는 미모는 보장할 수 있으니까.”임우빈은 정민아의 대학교 후배였는데 1학년 때 운동장에서 정민아를 처음 본 순간 그녀에게 반해버려 결혼하겠다고 호언장담했는데 제대로 들이대 보지도 못하고 정민아가 퇴학을 해버리는 탓에 겨우겨우 수소문해서 정민아가 있다는 경인시까지 와서 대학원을 다니고 여기서 취직
사연희는 잔뜩 감동한 얼굴로 정민아를 바라보며 눈을 빛냈다.“우리 가게 때문에 민아 씨만 고생했네요.”안 그래도 하룻밤 사이에 노 대표님의 생각을 바꿀만한 둘레의 허벅지를 찾는 건 너무 힘든 일인 것 같아 시간이 촉박하진 않을까 걱정했는데 알고 보니 그 시간은 그저 노 대표님이 술을 깨기 위한 시간이었다.사연희가 오해한 걸 알아차린 정민아는 해명하기도 귀찮아져 그냥 사연희를 데리고 나가려 했는데 그때 공민찬이 나오면서 말했다.“고 대표님, 방금 룸까지 다 확인했습니다. 사모님의 머리카락 한 올도 발견하지 못했습니다.”“...”그 말이 끝나자 주위의 공기는 순식간에 어색해졌다.고연우는 공민찬을 흘겨보며 언짢은 듯 말했다.“너만 입 달렸어?”“죄송합니다, 제가 괜한 소릴 했네요.”공민찬은 사과 하나는 빨리하며 바로 다시 입을 열었다.“그런데 사모님께 말씀은 하셨어요?”“...”“대표님, 계속 이런 식으로 하시면 사모님 마음 못 돌려요. 사모님이 최민영 씨한테 괴롭힘 당할까 봐 문 앞에 사람까지 세워서 지키시면 뭐해요, 이런 건 대표님이 말씀 안 하시면 사모님은 영영 모르실 텐데요. 그럼 감동도 못 받으실 테고 사모님이 감동하지 못하시면...”그런 공민찬을 보던 사연희는 주먹을 말아쥐며 입술을 깨물더니 정민아에게 귓속말을 했다.“안 되겠어, 나 여기 더는 못 있겠어.”밖으로 나가기 전 사연희는 한 번 더 공민찬을 자세히 들여다보았다.사연희가 만약 공민찬처럼 말 많고 사실만 얘기하며 아픈 데를 콕콕 찌르는 비서를 뒀다면 얼마 참지 못하고 짜증을 냈을 텐데 무표정으로 듣기만 하는 고연우를 보니 허벅지 대표님의 성격은 꽤 차분해 보였다.“입 다물어.”그 차분한 고연우도 더는 듣기 싫었는지 미간을 잔뜩 찌푸린 채로 공민찬 손에 들려있던 차 키를 뺏어 들고는 정민아를 보며 말했다.“가자.”“응.”정민아의 대답을 들은 고연우의 발이 허공에 잠시 머물렀다가 한참 만에 땅에 닿았다.정민아의 조롱 섞인 거절이거나 분노는 너무나 익숙하고 오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