늦은 밤, 깜깜하게 드리워진 어둠이 현관의 쓸쓸함을 한층 더해주었다.아파트로 돌아온 조은서는 현관문에 기대 천천히 숨을 골랐다.조은서의 다리는 아직도 저도 모르게 후들거렸다...B시로 돌아오면 유선우와 마주치게 될 거라는 건 진즉 예상했던 일이지만 이렇게 빠를 줄은 상상하지 못했다.유선우가 진이 정원에서 했던 모든 행동은 조은서를 더욱 물러서게 하였다.여자의 직감이 지금의 유선우는 매우 위험하다고 알려주고 있다. 애초에 B시로 돌아오지 말았어야 했다. 하지만 그러기에는 이준이의 비염이 너무 심각해 하와이에 계속하여 머물기에도 적합하지 않았다.오랫동안 넋을 놓고 있던 조은서가 손을 뻗어 등불을 켰다.이윽고 환한 등불이 그녀의 작고 예쁜 얼굴을 밝게 비춰주었다. 참으로 희고 부드러운 얼굴이다. 비록 두 아이를 낳은 엄마이지만 세월의 우대라도 받은 것인지 조은서의 용모는 예전과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다.조은서는 한참 후에야 몸을 곧게 펴고 와인셀러로 다가가 문을 열고 샴페인 하나를 꺼냈다.술 한잔하기 딱 좋은 밤이다.잔에 따라 부은 지 얼마 되지도 않아 갑자기 임도영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그는 매우 부드러운 목소리로 이따가 접대가 있어 호텔에 늦게 돌아올 수도 있으니 조은서더러 먼저 자라고 알렸다.그래도 애인 사이인지라 조은서는 간단히 응하고는 너무 많이 마시지는 말라며 자연스럽고도 다정하게 답했다.이윽고 전화 너머로 임도영의 가벼운 웃음소리가 들려왔다.“알아요.”하지만 남자들 사이에 술을 적게 마실 수 있는 접대 자리가 어디 있겠는가? 임도영도 이젠 술을 마시는 것이 적응되었는지 술고래라 말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술에 취해 실수하는 일은 거의 없었다.조은서는 통화를 마친 뒤, 와인잔을 들고 테라스의 작은 바로 가 자리에 앉았다.이렇게 한가한 날도 조은서에겐 흔한 게 아니었다.평소에는 아이를 돌보랴 THEONE의 경영을 돌보랴 바삐 돌아쳤지만 그래도 매일매일 충실하게 보냈기에 조은서는 이러한 바쁜 생활에 감사함을 느꼈다. 덕분에 유선우
이윽고 차에 시동이 걸렸다...유선우는 줄곧 말없이 자리에 앉아 있었다. 그러고는 가끔 자신의 오른팔을 바라보며 다시 생각에 잠겼다. 만약 이 팔만 멀쩡했다면 아무리 두 다리를 움직일 수 없다 하더라도 유선우는 아마 많은 용기를 끌어모아... 조은서에게 다시 그의 곁에 돌아와달라고 빌었을 것이다.하지만 안타깝게도 인생에는 만일이라는 가능성이 없었다....이튿날, 조은서는 차준호와 만나기로 약속했다.원래는 커피만 조금 마시며 몇 마디만 나누다가 갈 예정이었지만 차준호는 통화 중에 기어코 함께 식사하자며 고집을 부렸다.“오랫동안 만나지도 못했는데 이젠 제 체면도 생각해주지 않는 거예요?”결국, 그들은 고급 클럽에서 함께 식사하기로 했다.하지만 식사를 할 마음이 없었던 차준호는 대부분의 시간 동안 오직 조은서에게 집중했다.조은서도 차준호가 자신을 바라보며 감탄하고 있으리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그녀를 통해 임지혜를 그리워하고 있을 뿐이었다.조은서는 식전 술을 가볍게 내려놓으며 담담히 입을 열었다.“준호 씨, 저와 만나려 했던 이유는 저도 알아요. 지혜가 잘 지내고 있는지 궁금했던 거죠? ... 네, 반성훈 씨가 떠난 건 맞아요. 하지만 준호 씨와 지혜는 이미 지나간 인연이에요. 오랜 시간이 흘러 지혜에게도 새로운 연인이 생기겠지만 그 사람이 준호 씨가 될 일은 이제 없을 거예요.”“이건 제가 준호 씨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에요.”...차준호는 여전히 임지혜와 한번 만나고 싶었다.조은서는 와인잔을 쥐고 이리저리 돌려보더니 한참이 지나서야 나지막이 입을 열었다.“이제 그럴 필요가 있나요? 차준호 씨... 당신이 지혜한테 가져다준 상처를 제외하고도 당신은 유부남이라는 것을 잊지 마세요. 이제 지혜 좀 그만 괴롭혀요. 지혜는 이미 당신 때문에 많은 고통을 겪었어요.”조은서는 한숨에 해야 할 말을 전부 털어놓았다. 그러고는 화장실에 다녀오겠다며 사과하고 자리를 떴다.차준호도 마음속으로는 조은서가 더 이상 그와 얘기를 나누고 싶지 않아 한다는 것
핸드폰을 만지작거리던 차준호는 정우연의 말을 듣고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난 그렇다고 바깥 여자를 집안에 들이지는 않아.”정우연이 그의 말에 반박하려 하자 차준호는 갑자기 옷 주머니 안에서 십여 장의 사진을 꺼내더니 한 장 한 장 침대 위에, 정우연의 눈앞에 던져주었다.차준호는 정우연을 바라보며 냉소를 터뜨렸다.“네 이 요염한 사진들 잘 감상해 봐. 사진마다 남자가 다른데? 난 이 사진들 아니었으면 우리 사모님 몸매가 이렇게 섹시하고 잠자리에서 이렇게 뜨거운 줄은 몰랐네.”정우연은 침대 위에 던져진 그 사진들을 주워 하나하나 살펴보았다.그리고 그 자리에서 넋을 잃고 말았다...다시 정신을 차렸을 때 정우연은 본능적으로 용서를 빌기 시작했다.“준호 씨, 전 정말 너무 외로워서 그랬어요. 제발 저희 아버지한테는 보여주지 마세요. 저희 아버지께서 알게 되시면 절 죽이려 할거예요.”차준호가 가장 독한 사람이라는 것은 정우연이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기에 그녀는 차준호가 정말 자신을 내칠까 두려웠다.요 몇 년 동안 차준호는 정우연을 형편없이 괴롭히며 지금까지 단 한 번도 마음이 약해진 적이 없었다.정우연은 차준호와의 관계를 다시 돌려놓기 위해 침대 끝까지 기어가 차준호의 다리를 부여잡고 몸을 드러내며 그를 유혹했다.그녀는 얼굴을 차준호의 허벅지에 찰싹 붙인 채 부드러운 목소리로 나지막이 입을 열었다.“준호 씨, 우리 이제 화해해요, 네? 과거의 일은 이제 언급하지 말고 다시 시작해요. 저도 반드시 본분을 지키고 좋은 부인이 될 수 있도록 노력할게요. 절대 다른 남자와 연락하지 않을게요. 당신만 절 사랑해준다면... 당신만 절 사랑해준다면 뭐든 할게요!”“난 널 사랑하지 않아.”차준호는 정우연을 밀어내며 싸늘하게 말했다.“이혼하자.”정우연은 그 자리에 얼어붙고 말았다.오랜 세월 동안 그들의 관계가 아무리 나쁘고 정우연이 무슨 짓을 저질러도, 심지어 다른 남자의 애를 가져도 차준호는 단 한 번도 이혼이라는 소리를 입에 담지 않았다. 하지만 지
차준호는 눈을 지그시 감았다. 임지혜가 곧 돌아온다......레스토랑 화장실.차준호에게 반성훈의 얘기를 꺼낸 뒤 한참이 지나도 조은서의 마음은 여전히 속상하기 그지없었다.임지혜뿐만 아니라 사실 조은서에게도 반성훈은 매우 좋은 친구였다. 반성훈은 관대하고 너그러운 성격에 친구로서도 매우 좋은 사람이었다... 당시 그의 비행기 추락 사고 소식을 듣고 조은서는 매우 오랫동안 그 소식을 믿지 못했다.반성훈의 비보를 다시 떠올린 조은서는 속상한 마음에 코끝이 찡해나고 눈가에는 눈물이 어렴풋이 맺혔다.그때, 마침 임도영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데리러 왔으니 문 앞 주차장에서 기다리고 있겠다는 말이었다.그러고는 겸사겸사 차준호와의 만남에 대해서도 물었다.그러자 조은서는 낮은 목소리로 답했다.“그냥 몇 마디 나눴어요. 보아하니 아직 지혜를 놓아주지 못한 것 같아서 명확히 말씀드렸어요... 자세한 이야기는 만나서 해요.”이윽고 그들은 몇 마디 더 나누고는 전화를 끊었다.조은서는 화장실에서 세수하고 티슈로 얼굴을 닦다가 무심코 거울에 비친 사람의 얼굴을 보았다.백서윤!명품 슈트를 차려입은 백서윤의 모습은 직급이 낮지 않은 모양이었다. 당시 유선우에게 해고된 후, 그녀는 YS 그룹의 경쟁회사에 들어가 홍보 매니저의 직급을 달게 되었다. 2, 3년의 단련과 시련을 거쳐... 백서윤은 이제 예전의 청순한 소녀가 아니었다.거울 속, 조은서를 바라보는 백서윤의 눈빛이 달갑지 않았다.그리고 조은서에게 말을 건네는 그녀의 목소리에는 더욱 조롱이 섞여 있었다.“사모님... 아니... 유선우 대표님과는 이미 이혼을 했으니 이제 사모님이라 부르면 안 되겠군요. 방금 통화한 분은 새 남자친구인가요? 대표님 전 사모님은 참으로 능력이 좋으시네요. 항상 훌륭한 남자들이 물불을 가리지 않고 당신에게 매달리고 당신도 마음 편히 그 사람들의 보살핌을 받으시니 말이에요.”조은서는 백서윤을 좋아하지 않는다.사실 조은서는 백씨 가문의 모든 사람을 싫어한다.백서윤의 조롱에 조은서
백서윤이 입을 열려던 순간, 그녀는 문득 복도 저 너머에서 휠체어에 앉은 채 묵묵히 그녀를 바라보고 있는 유선우를 발견하게 되었다. 유선우의 검은 동공은 마치 모든 것을 삼켜버릴 듯 깊고 난해한 기운을 내뿜고 있었다...백서윤은 더 이상 말할 용기도 없었고 말하고 싶지도 않았다.하나는 유선우가 보복할까 두려웠기 때문이고 다른 하나는 여전히 유선우를 마음속에 품고 있었기 때문에 유선우와 조은서의 재결합을 원하지 않았기 때문이다.마음이 복잡해진 백서윤은 그저 조은서를 향해 차갑게 웃어 보이며 다급히 마무리를 지었다.“전에 당신이 선우 씨를 매우 사랑한다고 사촌 언니에게서 들은 적이 있는데 난 그것을 사실이라고 굳게 믿고 있었어요. 그런데 인제 보니 당신은 선우 씨에 대해서 아무것도 몰라요... 당신이 말하는 사랑은 결국 그 당시의 내 사랑과 다를 바 없이 똑같이 천박하기 그지없네요.”“다른 남자와 사랑하면서 당신이 말하던 그 새로운 삶이나 마음껏 살아가세요. 난 당신이 뼈저리게 후회할 날만을 기다릴 테니까.”...백서윤의 말이 끝나고 조은서는 한참이 지나서야 무뚝뚝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백서윤 씨, 당신은 나와 유선우의 과거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는데?”말을 마친 조은서는 곧바로 몸을 돌려 자리를 떴다.그녀가 몸을 돌린 순간, 복도 저 너머에서 휠체어에 앉아 있던 그 사람의 모습도 더 이상 보이지 않았다.일단 자세히 캐묻지 않고 자리를 뜨긴 했지만, 조은서의 마음 깊은 곳에는 이미 의심의 씨앗이 심어졌다.조은서가 자리를 뜨고 백서윤은 벽에 몸을 기대 애써 요동치는 마음을 진정시켰다. 그리고 한참 뒤, 갑자기 생각난 것이 있는지 백서윤은 빠른 걸음으로 복도 끝을 향해 달려갔다...아니나 다를까 백서윤은 그곳에 있는 유선우를 발견하게 되었다.유선우는 휠체어에 앉은 채 창을 사이에 두고 1층이 있는 방향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유선우가 조은서를 바라보고 있다는 것은 알고 있다. 오랜 시간이 지나도 여전히 마음을 다해 사랑하고 있는 그 여
그들의 사이에는 거리감이 없다.하여 임도영은 길목을 지나 길가에 차를 세운 뒤, 몸을 돌려 조은서를 물끄러미 바라보더니 직설적으로 물었다.“그 사람 생각해요?”조은서는 인정하고 싶지 않았기에 곧바로 답했다.“그런 거 아니에요.”그때, 딸칵하는 소리와 함께 임도영은 안전벨트를 풀고 조은서에게 키스하려는 듯 천천히 그녀를 향해 몸을 기울였다. 인간의 본능은 아무도 속일 수 없다고, 임도영의 입술이 그녀의 입술에 닿으려는 순간 조은서는 손을 들어 그를 가로막았다.그 순간의 움직임에 조은서도 그만 넋을 잃고 말았다. 사실 사귀는 연인 사이에 키스는 매우 정상적인 스킨쉽이었지만 그녀는 본능적으로 임도영과의 스킨쉽을 피한 것이다...이윽고 조은서는 고개를 젖히고 자신의 행동에 어찌할 줄 몰랐다.임도영과 조은서의 거리는 당장이라도 닿을 듯 매우 가까웠고 서로의 뜨거운 숨결마저 느껴질 수 있는 거리였다. 일반적이라면 마음이 요동쳐야 하는 것이지만 조은서의 마음은 이상하리만치 잠잠했다...임도영은 여전히 그윽한 눈빛으로 조은서를 바라보았다.“이래도 그 사람 생각하는 거 아니에요?”조은서는 반박하고 싶었지만, 곧바로 임도영의 입술에 의해 가로막히고 말았다. 조은서를 대하는 임도영의 표정은 너무나도 부드러웠는데 이는 연인 같지만 연인을 초과한 애정이 담겨있기도 했다--왜냐하면, 임도영은 조은서가 청순한 소녀에서 성숙한 여인이 되기까지의 모든 과정을 그의 두 눈으로 직접 지켜봐 왔다.조은서에 대한 임도영의 감정은 매우 복잡했다.그는 여전히 조은서가 입을 열지 못하도록 그녀의 붉은 입술을 조심스럽게 어루만져주었고 그의 목소리는 부드러우면서도 황홀하기 그지없었다. 이게 연인의 신분으로서 그녀에게 말할 수 있는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기에 그는 더욱이 지금, 이 순간이 소중했다.조은서를 사랑하고 아지만, 그녀를 곁에 묶어두는 것은 더욱 싫었다.어젯밤, 임도영은 접대 자리에서 여러 소문을 들으며 유선우가 왜 휠체어에 앉게 된 것인지 대충 짐작할 수 있었다. 조은서
[조은서 씨, 그 계약서는 그저 장난이었을 뿐이야. 난 널 사랑하지 않아.]...한꺼번에 몰려든 기억들에 조은서는 숨을 쉴 수가 없었다.조은서는 고개를 살짝 젖히고 눈물을 참았다.하늘에서는 가랑비가 보슬보슬 내리기 시작하더니 가느다란 빗줄기가 조은서의 몸에 떨어지며 그녀의 옷을 조금씩 적셨다. 하지만 조은서는 조금도 개의치 않았다. 지금, 이 순간, 그녀는 마음의 초조함을 씻겨줄 차가운 빗물이 필요했다.조은서는 말없이 빗속을 걸으며 머릿속으로 끊임없이 백서윤의 말을 반복했다.[정말 선우 씨가 다른 사람을 사랑할 거라 생각해요? 정말 선우 씨가 당신과 아이들을 버리고 다른 사람과 새로운 가정을 차릴 거라 생각해요?]그 순간, 조은서는 우뚝 자리에 멈춰 섰다.길가에는 매우 호화로운 웨딩살롱이 세워져 있었는데 통유리를 사이에 두고 안에는 매우 아름다운 여인이 웨딩드레스를 입어보고 있었다. 그리고 그 여인의 옆에는 한 남성이 함께하고 있었는데 행동거지가 친밀하고 애틋한 것을 보아하니 딱 봐도 예비부부였다.하지만 조은서는 그 자리에 얼어붙고 말았다.그녀는 마에 씌기라도 한 듯 그 남녀를 뚫어지라 바라보았다. 왜냐하면, 그 여인은 다름 아닌... 이지우였기 때문이다.이지우라면 당시 여주인의 행세를 하고 진이 정원에 나타났던 사람 아닌가. 유선우와 사귄다면서 왜 지금은 다른 남자와 결혼한단 말인가?조은서는 멍하니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사실 진실은 이미 수면밖에 올라왔다.하지만 조은서가 무슨 수로 그토록 잔인한 진실을 받아들인단 말인가. 그녀는 심지어 유선우가 대체 무엇을 희생했는지, 그동안 어떻게 지내왔는지 감히 상상할 수조차 없었다... 심지어 유선우는 대체 무슨 심정으로 그녀의 앞에 나타났는지조차 감히 생각할 수 없었다.그날 밤, 서미연의 연회에서 갑작스럽게 나타난 유선우에게 조은서는 오히려 청천벽력과도 같은 말을 했었다.[선우 씨, 저 애인 있어요.]...빗줄기는 점점 거세졌고 조은서의 얼굴은 어느새 비에 흠뻑 젖어있어 그녀의 볼을
이윽고 웨딩살롱 직원이 그들에게 따뜻한 커피 두 잔을 내왔다.하지만 조은서는 커피에 손도 대지 않은 채 계속하여 이지우만을 뚫어지라 바라보았다.한편, 이지우의 눈빛은 어느새 과거의 추억에 잠긴듯했고 곧바로 마음을 가다듬고 천천히 입을 열었다.“그때는 선우 오빠가 나와 거래를 하고 싶어 한다고 진 비서한테서 연락 왔어요.”말을 하며 그녀는 커피를 들어 한 모금 들이마셨다.침착한 말투에 비해 그녀의 가늘고 긴 손가락은 미세하게 떨고 있었다.다시 입을 열 때 이지우의 얼굴에는 쓰디쓴 미소가 걸려 있었다.“그때 전 마음속에서 유선우 씨를 원망하고 있었는데 어떻게 그 제안을 받아들이겠어요? 하지만 진 비서가 내세운 건 제가 절대 거절할 수 없는 숫자였어요. 그건 2조가 달하는 프로젝트였거든요. 전 결국 그 유혹을 거절하지 못하고 제안을 받아들였고 그 뒤에 진 비서를 따라 병원에 가 서류에 사인하는데 그때 봤던 유선우 씨는... 그 모습은... 그때 유선우 씨의 모습은 지금 당신이 알고 있는 그 모습보다 얼마나 끔찍할지 감히 가늠할 수도 없어요. 조용히 침대 위에 누워 거의 움직일 수도 없었는데 조은서 씨, 그거 알아요? 그때 그의 눈빛은 너무나도 평온하고 태연하게 이 모든 것을 받아들이고 있었어요.”말을 이어가는 이지우의 목소리에는 암울한 감정이 배어 있었다.반면 조은서의 눈은 이미 촉촉하게 젖어 있었지만, 그녀는 뚫고 나오려는 눈물을 꾹 참고 계속하여 이야기를 들었다.잠깐 숨을 들이켜던 이지우는 다시금 마음을 가다듬고 입을 열었다.“당시 전 계약서를 작성하고 약조대로 2조를 받은 뒤, 그 사람의 요구대로 선우 씨의 여자친구 행세를 했죠. 당시 진이 정원에서 막대한 모욕감을 느끼셨을 텐데 그거 알아요? 그때 유선우 씨는 휠체어에도 제대로 앉지 못해 침실에 누워 모든 소리를 가만히 듣고 있었어요.”“당신이 오고 당신이 떠나는 것까지!”“은서 씨, 당신도 아마 유선우 씨가 왜 이렇게 된 것인지 짐작하셨을 거예요. 맞아요. 유선우 씨는 그 수술에 직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