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은 멈춰버린 듯했다. 진은영은 조용히 유이준을 바라보았다. 빗방울이 그가 받쳐 든 검은 우산 위로 한 방울씩 떨어지며 천 위에서 미세한 찢어지는 소리를 냈다. 작지만 날카롭게 귓가를 파고들었다.그 빗방울들은 마치 그녀의 얼굴로, 눈가로 옮겨진 것 같았다. 그렇지 않고서야 그녀의 얼굴이 이렇게 차가울 리가 없었다.유이준은 손을 뻗어 그녀의 눈가에 맺힌 눈물을 부드럽게 닦아주며 다정하면서도 애처로운 목소리로 말했다.“버림받아서 불쌍한 것.”이 말에 진은영은 저도 모르게 온몸이 떨렸고 가슴이 쿵쾅거렸다.그녀는 고개를 돌리고 싶었지만 남자는 손바닥을 펴서 그녀의 얼굴을 완전히 감쌌다.도망칠 곳이 없어진 그녀는 억지로 말했다.“난 버림받지 않았거든요.”유이준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아니라고?”진은영은 그를 노려보았지만, 자신의 눈에 고인 물기가 얼마나 애처로워 보이는지 그녀는 알지 못했다. 그 모습에 유이준은 가슴이 아려와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내 곁으로 돌아와 줄래요? 다른 사람은 은영 씨를 원하지 않아도, 나는 원해요. 은영 씨, 난 당신을 원한다고요!”...진은영의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차올랐다.그녀는 온몸을 떨었지만 있는 힘을 다해 말했다.“하지만 난 이준 씨가 싫어요.”유이준은 조금도 화내지 않고 우산을 진은영의 손에 쥐여주고 자신의 손바닥으로 그녀의 손을 덮었다. 차가운 이른 봄비 속에서 그의 손은 너무나 따뜻했고 목소리는 더없이 부드러웠다.“괜찮아요. 기다릴 수 있어요.”그 한마디에 진은영은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보았다.시간은 빗물처럼 흘러갔다...유이준은 그녀가 걱정되어 집까지 바래다주려 했다. 처음에 진은영은 거절했지만, 유이준이 부드럽게 말했다.“어쩌겠어요. 전 여자친구가 실연당했는데 내가 전 남자 친구로서 좀 챙겨 줘야죠.”진은영은 화가 나서 욕을 하고 싶었지만, 순간 강한 팔이 그녀의 허리를 감싸 안으며 남자의 품에 안기고 말았다.촉촉한 빗속, 온 세상이 젖어 있었다. 두 사람의 몸이 닿자 그녀
유이준은 거의 주저하지 않고 말했다.“감사합니다, 아줌마.”진은영은 그의 뻔뻔함에 속으로 혀를 찼지만, 그는 그녀에게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안 돼요? 아줌마께서 친히 초대해 주셨는데... 맞죠?”하연은 자세한 상황을 몰랐지만, 딸과 박준식의 결혼이 깨진 것은 짐작할 수 있었다. 게다가 유이준의 태도가 이렇게 적극적이니 어머니로서 딸이 좋은 남자와 맺어지기를 바라는 마음에 은근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당연하지.”말을 마친 하연은 딸을 흘끗 쳐다보며 덧붙였다.“이준이도 널 데려다주느라 고생했잖니.”효녀인 진은영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식사실에 들어가서는 유이준과 거리를 두고 앉아 말도 걸지 않고 그저 티슈로 옷에 묻은 물방울만 닦아냈다.유이준은 진은영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마치 예술 작품을 감상하는 듯한 모습이었다.진은영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이준 씨, 여자를 처음 봐요?”그러자 그는 능글맞게 웃으며 대답했다.“네. 처음 봐요. 특히 옷을 입지 않은 모습은.”그가 염치없어도 진은영은 체면이 있었다.진은영은 그를 꾸짖으려 했지만 이미 늦었다. 하연이가 삼계탕을 들고 들어왔던 것이다. 그녀는 들어오자마자 그 민망한 대화를 듣고 말았다. 여자를 본 적이 없다느니, 옷을 입지 않았다느니.예전에 귀부인이었던 하연은 늘 품위 있는 곳에만 드나들었기에 저런 노골적인 말은 들어본 적도 없었다. 그녀는 얼굴이 화끈거렸지만 나갈 수도 없어서 애써 태연한 척 삼계탕을 들고 들어와 유이준에게 권했다.“비 오는 날은 습하니까 따뜻한 걸 좀 먹어줘야 해.”유이준은 여전히 진은영을 바라보았고 그녀는 어색하게 가볍게 기침을 했다. 그제야 유이준은 시선을 거두고 하연에게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진작에 삼계탕이 먹고 싶었는데 일이 너무 바빠서 외식만 하느라 집밥을 먹을 기회가 거의 없었어요... 아줌마의 삼계탕 한번 먹어봐야겠네요.”하연은 그와 살갑게 대화하며 얼른 두 그릇을 떠서 각각 앞에 놓아주었다.진은영은 말없이
하지만 식사실 안 분위기는 화기애애했다....원래 유이준은 식사를 마치면 예의상 돌아가야 했다. 하지만 몇 걸음 걷기도 전에 위쪽 천장에서 물방울 떨어지는 소리가 들려오더니 이어서 두 방울의 물이 그의 높은 콧등에 떨어졌다.유이준이 위를 올려다보니 하얀 벽에 물 얼룩이 번져 있었다.별장 지붕에서 물이 새고 있었던 것이다.진은영과 하연도 위를 쳐다보다가 하연이가 멍하니 말했다.“이 집 지은 지 몇 년 됐다고 벌써 물이 새? 부실공사잖아! 어떤 사기꾼이 지었는지, 정말 신고해야겠어.”유이준은 진은영의 얼굴을 바라보며 나지막이 말했다.“JH 그룹 계열사에서 지은 건데 아줌마, 제가 한 가지 제안할게요. JH 그룹 회장 조진범을 찾아가세요. 제 외삼촌 아들이니까 아줌마도 아실 거예요.”하연은 멍해졌다. 조진범이면 그녀의 사위가 아닌가!진은영은 유이준이 일부러 그 이야기를 꺼냈다는 것을 눈치챘다. 그가 아직도 과거 일을 마음에 두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기에 진은영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유이준은 외투를 벗으며 말했다.“지하실에 가서 보수할 재료가 있는지 볼게요. 있으면 제가 수리해 드릴게요.”하연은 기뻐하며 말했다. “이준은 집수리도 할 줄 알아?”유이준은 다시 진은영을 그윽한 눈빛으로 흘끗 바라보며 말했다.“사기꾼에게서 배웠죠.”진은영은 정말 그의 입을 찢어 버리고 싶었다.부슬부슬 비가 내리는 가운데, 유이준은 지하실로 가는 길에 담배를 꺼내 물었다. 그의 뒷모습은 꽤 멋있었다.유이준의 뒷모습을 보던 하연이 걱정스럽게 물었다.“아준은 항상 저렇게 담배를 피워? 혹시 아이를 갖는 데 문제라도 생기면 어쩌려고?”진은영은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이때 하연이가 다시 입을 열었다.“다행히 별이는 건강하네.”진은영: “...”이때 유이준이 갑자기 돌아왔다. 그는 담배꽁초를 한 모금 빨고 쓰레기통에 버린 후 말했다.“아줌마, 안심하세요. 다음에 은영 씨와 아이를 가질 때는 먼저 담배를 끊을 테니까.”하연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
조은서는 확신할 수 없었다. 바람을 피우는 남자는 두 개의 핸드폰을 갖고 다니는 건가?유선우가 샤워를 하고 있을 때, 그의 애인이 셀카 한 장을 보냈다.아주 젊은 여자였는데 뚜렷한 이목구비를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나이와는 어울리지 않는 비싼 옷들을 입고 있으니 어딘가 부자연스러워 보였다.「선우 씨, 생일 선물 고마워요.」조은서는 눈이 아플 때까지 핸드폰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그녀는 유선우 곁에 여자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다만 이런 여자일 줄은 몰랐다. 마음이 아픈 외에, 남편의 취향을 알게 되어 놀랐다.그녀는 미안하다고 생각했다. 우연히 유선우의 비밀을 알게 되었으니까 말이다.등 뒤에서 욕실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얼마 지나지 않아 유선우가 물기에 살짝 젖은 채로 나왔다. 새하얀 샤워 가운은 선이 분명한 복근과 가슴을 가려주고 있었는데 더욱 섹시해 보였다.“언제까지 볼 거야.”그는 조은서 손에서 핸드폰을 뺏고 그녀를 힐긋 보더니 옷을 입기 시작했다.유선우는 아내에게 불륜을 들켜서 미안하다거나, 마음이 찔린다는 기색이 전혀 없었다. 조은서는 그런 유선우의 태도가 그의 경제 수입에서 온다는 것을 알았다. 조은서는 결혼 전에는 유명한 바이올리니스트였지만 지금은 그저 유선우가 벌어다 주는 돈으로 사는 가정주부니까.조은서는 그 사진으로 따지고 들지 않았다. 따지고 들 수 없었다.나가려는 유선우를 본 조은서가 갑자기 입을 열었다.“선우 씨, 나 하고 싶은 말이 있어요.”유선우는 천천히 벨트를 매고 조은서를 보며 작게 웃었다. 아마도 아까 침대에서 가냘픈 목소리로 반응하며 어쩔 줄 몰라 하던 그녀의 모습이 떠오른 모양이었다.“또 하려고?”이건 사랑이 아닌 그저 관계일 뿐이다.유선우는 조은서를 아내로 생각하지 않았다. 그저 실수였을 뿐이고, 어쩔 수 없이 한 결혼이니까.시선을 거둔 유선우는 침대맡에 놓인 파테크 필리프 시계를 손에 차며 담담한 말투로 얘기했다.“오 분 정도밖에 없어. 운전기사가 밑에서 날 기다리고 있고.”조은
6년이다. 조은서는 유선우를 6년 동안 좋아했다.힘이 빠진 조은서는 그냥 그대로 눈을 감았다....유선우가 아직 돌아오지 않은 금요일 저녁, 조은서의 친정에는 큰일이 생겼다.조씨 가문의 장남인 조은혁이 JH 그룹의 경제 범죄 사건 때문에 징역 10년 형을 선고받을 수 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10년은 한 사람의 인생을 망치기 충분한 시간이다.그날 밤, 조은서의 아버지는 급성 뇌출혈로 병원에 실려 갔고 상황이 긴급해 수술이 필요했다.조은서는 병원 복도에 서서 계속 유선우에게 전화를 걸었다. 몇 번이나 전화를 걸었지만 유선우는 전화를 받지 않았다. 조은서가 포기하려고 할 때, 유선우가 문자를 보냈다.여전히 짧은 문자였다.「H시에 있어. 일이 있으면 진 비서에게 연락해.」조은서가 또 전화를 걸자 유선우는 전화를 받았다. 조은서는 급하게 입을 열었다.“선우 씨, 지금 우리 아빠가...”유선우는 그런 조은서의 말을 끊었다. 귀찮아하는 기색을 드러내며 얘기했다.“돈이 필요한 거잖아? 몇 번을 말해. 돈이 급한 거면 진 비서를 찾아가라고. 조은서, 듣고 있어?”...조은서는 고개를 들어 무표정으로 스크린을 쳐다보았다. 스크린에서는 뉴스가 나오고 있었다.「YS의약 그룹 대표 타워랜드 대절, 이성 친구를 위한 불꽃 축제」화면 속에는 불꽃이 예쁘게 터지고 있었다.젊은 여자가 휠체어에 앉아 환하게 웃고 있었다. 그리고 조은서의 남편인 유선우는 바로 그 휠체어 뒤에서 핸드폰을 쥔 채 그녀와 통화하고 있었다.조은서는 눈을 깜빡였다.그러다가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선우 씨, 지금 어디예요?”유선우는 잠시 멈칫했다. 조사받는 기분이 좋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그저 대충 대답했다.“바빠. 별일 없으면 이만 끊을게. 진 비서한테 연락해.”유선우는 울먹이는 조은서의 말투를 눈치채지 못했다. 다만 고개를 숙여 옆의 사람을 바라보는 눈빛이 꽤 다정했다.조은서는 눈앞이 까매지는 기분이었다.아, 유선우에게도 부드러운 면이 있구나.등 뒤에서는 새엄마인 심
3일 후, 유선우는 B시로 돌아왔다.저녁, 어둠이 드리워진 별장에 검은색 차량이 들어와 시동을 껐다.운전기사가 내려서 차 문을 열었다.차에서 내린 유선우는 문을 닫았다. 물건을 들려고 하는 운전기사를 보며 담담하게 얘기했다.“내가 직접 올려갑니다.”거실에 들어서자 고용인들이 몰려왔다.“며칠 전, 장인어른께서 쓰러져서 사모님의 기분이 좋지 않습니다. 지금은 위층에 계십니다.”조씨 가문의 일은 유선우도 이미 알고 있었다.조금 무거운 심정으로 짐을 들고 올라와 침실 문을 여니 조은서는 화장대 앞에 앉아서 물건을 정리하고 있었다.짐을 내려놓은 유선우는 넥타이를 풀면서 침대 옆에 앉아 조은서를 쳐다보았다.결혼 후, 조은서는 항상 집안일을 도맡아 했다. 물건 정리라거나, 디저트 만들기라거나. 만약 그녀의 예쁜 외모와 몸매가 아니었다면 유선우에게는 진짜 가정부나 다름없는 사람이었다.한참이 지나도 조은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출장을 다녀온 유선우는 피곤했다. 조은서가 아무 말도 하지 않으니 그도 얘기를 하지 않았다. 그저 옷장에서 가운을 가진 후 샤워실로 들어갔다.샤워를 하면서 그는 생각했다. 조은서처럼 나약한 성격의 사람이라면 유선우가 샤워를 마치고 나올 때쯤이면 이미 그의 짐을 정리하고 있을 것이라고. 그리고 원래의 부드러운 아내로 돌아올 것이라고.유선우는 자신만만하게 생각했다.하지만 샤워실에서 나온 그가 원래 자리에 있는 캐리어를 봤을 때, 유선우는 조은서와 얘기를 나눠봐야겠다고 생각했다.유선우는 소파에 앉아서 아무 잡지나 들었다.한참 지나서야 시선을 들어 조은서에게 물었다.“아버님은 좀 어떠셔? 그날 밤은... 이미 진 비서를 혼냈어.”성의 한 톨 느껴지지 않는 건조한 말투였다.조은서는 하던 일을 멈추고 시선을 들어 거울 속의 유선우와 시선을 맞추었다.거울 속의 유선우는 선명한 이목구비에 우아한 자태를 가진 남자였다.한참을 보던 조은서는 눈이 뻐근해질 때야 입을 열었다.“선우 씨, 우리 이혼해요.”유선우는 놀라서 굳어버렸
“그래요, 우리 집이 어려우니까 매달 2천만 원씩 주고 있죠. 하지만 그 수표를 받을 때마다 나는 내가 싸구려 여자로 느껴져요. 당신 욕구나 받아주고 받는 돈 같다고요!”...유선우는 차갑게 그녀의 말을 끊어버렸다.“정말 그렇게 생각해?”유선우는 조은서의 턱을 잡고 물었다.“당신처럼 남자한테 못 맞춰주는 여자가, 신음도 낼 줄 몰라서 고양이처럼 소리 내는 여자가 본인을 그렇게 생각한다... 그리고, 이혼하고 싶다고? 당신이 날 떠나서 어떤 삶을 살 것 같아?”조은서는 그런 유선우의 손길이 아파서 그의 손을 뿌리치려고 했다.하지만 유선우는 그녀의 손을 꽉 잡고 차갑게 조은서의 약지를 봤다. 아무것도 없이 깨끗한 약지를 본 그가 물었다.“결혼반지는?”“팔았어요.”조은서는 슬픈 말투로 얘기했다.“그러니까 선우 씨, 우리 이혼해요.”그말을 마친 조은서는 온몸에 힘이 빠졌다. 유선우는 그녀가 6년 동안 사랑한 남자다. 만약 그날 밤이 없었다면, 그날 화려한 불꽃을 보지 못했다면, 이곳에 남아서 사랑도 없는 혼인 생활을 이어 나갔을 것이다.하지만 이미 모든 것을 봐버린 이상, 조은서는 더는 유선우와 함께 지낼 수 없었다.이혼하면 이것보다 더욱 힘들지도 몰랐다. 유선우의 말처럼 상사의 눈치를 보며 몇백만 원의 월급을 받을 수도 있다. 하지만 후회되지는 않았다.말을 마친 조은서는 천천히 자기 손을 빼냈다.그리고 캐리어를 꺼내 자기 물건을 정리하기 시작했다.유선우의 표정이 굳어버렸다. 조은서의 여린 몸을 뚫어져라 쳐다보던 그는 조은서가 이렇게 행동할 거라고 생각해본 적이 전혀 없었다. 갑자기 마른하늘에 날벼락처럼, 아무 예고도 없이 이혼하겠다니.유선우의 마음속에는 화가 피어올랐다.그리고 그는 바로 조은서를 안아 들어 침대로 던져버렸다.조은서 위에 유선우의 그림자가 드리워졌다.유선우는 조은서와 얼굴을 맞댔다. 눈과 눈, 코끝과 코끝이 닿았다. 뜨거운 기운이 둘 사이를 감쌌다.그러더니 유선우가 입술을 조은서의 귓가로 가져가더니 얘기했다.“
유선우의 이성의 끈은 끊어지기 직전이었다.게다가 유선우 밑에 깔린 조은서의 온기가 전해져 왔다. 유선우는 조은서를 사랑하지는 않지만 이 몸은 사랑한다고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그는 매우 당연하게 이 몸을 소유하고 싶었다.조은서는 유선우의 어깨를 밀며 흐트러진 호흡으로 얘기했다.“선우 씨, 저 요즘 약을 안 먹어서 임신할지도 몰라요.”그 말을 들은 유선우는 그대로 굳었다.아무리 생각해도 충동적으로 행동해서 두 사람의 아이를 만들고 싶지 않았다. 적어도 지금은 아니었다. 한참 지나서 그는 웃더니 얘기했다.“요근래 생각할 게 많았나 봐?”조은서의 반항은 유선우의 눈에 아무것도 아니었다. 유선우는 한 손으로 침대를 짚고, 다른 한 손으로 침대맡의 서랍에서 아직 포장지를 뜯지 않은 작은 상자를 꺼냈다. 그 작은 상자에는 영어 자모 세 개가 적혀있었다.포장을 뜯으려는데 핸드폰이 울렸다.유선우는 신경 쓰지 않고 한 손으로 포장을 뜯고 몸을 숙여 조은서에게 입을 맞췄다. 조은서는 여전히 반항하며 도망치려고 했다. 그리고 핸드폰은 계속 울렸다.결국 유선우는 짜증을 내며 핸드폰을 받았다.전화를 건 사람은 유선우의 어머니인 함은숙이었다.함은숙은 담담한 말투로 얘기했다.“선우야, 할머니께서 편찮으시다. 돌아와 봐야 할 것 같아. 맞아, 그 애도 데려와. 할머님이 그 애가 만든 영양 찰떡이 먹고 싶으시대.”함은숙도 조은서를 썩 좋아하지 않았기에 말투는 차가웠다.유선우는 진유진의 몸을 한 손으로 누르며 그녀를 내리깔아 보았다. 그리고 잠시 고민하더니 대답했다.“곧 데리고 갈게요.”조은서는 힘이 풀려 침대에 퍼질러 있다가, 한참이 지나서야 일어나서 옷을 입었다.유선우는 바지 지퍼를 올리고 조은서의 가녀린 뒷모습을 힐끔 보고 또 침대맡의 박스를 보더니 입술을 달싹이고는 먼저 나갔다.조은서가 내려갈 때, 유선우는 차에서 담배를 피고 있었다.이제 하늘은 완전히 어두워져서 불빛이 없이는 앞을 볼 수가 없었다.조은서는 흰 셔츠를 입고 긴 검은 치마까지 입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