늦은 밤. 민희와 김설진은 호텔로 돌아왔다. 차를 멈추고 김설진은 고개를 돌려 아내를 바라보았다. 민희는 품에 쇼핑 주머니를 안고 멍하니 있었다. 그는 민희가 오늘 조진범을 만난 걸 알고 있었다. 김설진은 쇼핑 주머니를 가지고 와 안을 들여다보았다. "민희 씨가 오늘 나한테 어떤 셔츠를 샀는지 볼게요." 하나는 그레이 색상이었고 다른 하나는 블랙 색상이었다. 모두 고급스러운 색상이었다. 김설진은 그 두 셔츠를 한참이나 바라보다가 나지막이 입을 열었다. "내가 이 두 컬러 옷을 입었으면 좋겠어요?" 그제야 민희는 정신이 돌아왔다. 그녀는 셔츠를 만지작거리다가 부드럽게 답했다. "이 두 색상이 당신에게 잘 어울려요. 하지만 장롱엔 적더라고요. 그래서 사 왔어요." 김설진은 배시시 웃었다. "너무 마음에 들어요. 고마워요." 김설진은 차 문을 열며 내리려고 했지만 민희가 그런 그의 옷자락을 붙잡았다. "왜 외국으로 가서 살고 싶어요? 나 때문인 건가요?" 김설진은 민희를 바라보았다. 민희는 불안한 모습으로 그의 옷자락을 붙잡고 있었다. 그녀는 결코 다른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강하지 않았다. 민희는 사실 조씨 가문과 조진범을 신경 쓰고 있었다. 만약 10년 전이었다면 김설진은 그런 그녀를 받아들일 수 없었겠지만 지금은 가능했다. 그는 그녀를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었고 그런 그녀가 가슴 아팠다. 조진범은 그녀의 과거의 애인이였을 뿐만 아니라 그녀의 가족이었다. 피가 섞이지 않은 오빠였다. 그래서 김설진은 외국으로 가서 생활 하리라 마음먹었다. 둘이 모두 가정을 이루고 아이가 생긴다면 과거에 있었던 일들은 시간이 지나고 새로운 생명이 태어남에 따라 모두 흩어질 것이다. 김설진은 민희의 얼굴을 쓰다듬으며 부드럽게 말을 했다. "어느 정도는요. 하지만 당신이 B 시로 돌아가 살고 싶으면 언제든지 돌아와도 돼요."민희는 고개를 끄덕였다. 김설진이 다시 물어봤다. "지금 차에서 내려도 돼요? 나는 빨리 돌아가서 민희
조진범은 슈트를 입고 가만히 앉아 그 커플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마음속으로 이미 되돌릴 수 없다는 걸 알고 있었다. 심은하가 나나타나도 그들 사이를 갈라놓을 수 없었다. 그래서 진범도 포기했다. 하지만 그는 민희에게 하고 싶은 말이 남았다. 어쩌면 아직도 민희와 완전히 끝내기에는 미련이 남아 있는 것이다. ...민희가 화장실로 들어갔다가 나와 손을 씻었다.그리고 손을 다 씻고 고개를 들었을 그녀는 흠칫 놀랐다. 화장실의 거울에 진범의 얼굴이 비쳤다. 그는 문 앞에서 가만히 서 있었다. 민희는 그가 언제부터 서 있었는지 알 수 없었다. 그녀는 그가 다가오는 소리도 알아채지 못했다. "축하해, 결혼 축하해." 조진범이 민희를 바라보며 낮게 입을 열었다. 민희와 김설진의 결혼식은 크리스마스로 예약했다. 얼마 남지 않았다. 결혼식을 마친 후 그들을 이탈리아로 떠날 것이다. 민희는 낮게 고맙다고 인사를 했다. 그 모습에 조진범이 또다시 입을 열었다. "나랑 진안영도 곧 결혼할 거야. 크리스마스 전에 할 거야. 내가 조씨 가문 장자니까 먼저 결혼하는 게 정상이야." 그는 말을 뱉으며 거울 속으로 민희를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민희도 결코 눈을 피하지 않고 그를 바라보았다. 한참 시간이 흘렀지만 진범에게 축하한다는 말 외에 다른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녀가 진범의 마음을 꿰뚫고 그가 버려지고 싶지 않아하는 생각을 까발릴 필요는 없었다. 민희의 눈에 눈물이 맺혔다. 6년이란 시간은 누구에게나 짧은 시간은 아니었다. 조진범은 그녀의 눈물을 본 순간 민희가 아직 그를 사랑하고 그런 그녀를 빼앗아 오고 싶다는 충동이 일렁거렸다. 하지만 그런 생각도 잠시, 이성이 그를 붙잡았다."너를 난처하게 하고 싶지 않아. 우리가 결혼하면 모든 건 깨끗이 지워지는 거야. 우리 과거도 다 사라지는 거야. 앞으로 너도 나를 피할 필요 없이 집에 돌아오고 싶으면 돌아와." ...민희는 코끝이 찡해졌다. 그녀는 코맹맹이 소리로 그를
세 사람은 모두 침묵했다. 한참 후 민희가 먼저 입을 열고 평온하게 진안영을 바라보며 부드럽게 말했다. "오빠는 많이 마셨으니 잘 부탁해요." 진안영도 사람이 착했기에 민희를 더 이상 난처하게 하지 않았다. 그녀는 자신이 조진범의 마음에서의 위치를 잘 알았기에 고개를 끄덕이며 민희를 스쳐 지나갔다. 진안용은 연애를 해본 적이 없었지만 6년 동안의 연애가 얼마나 큰 상처를 남길지 이해할 수 있었다. ... 기다란 복도에 화려한 불빛이 일렁거렸다. 민희의 뒷모습도 보였다. 민희는 조용히 앞으로 걸어갔고 그녀의 뒤에는 민희가 사랑했었던 사람이 남겨졌다. 그는 그녀를 더 이상 난처하게 하고 싶지 않다고 했다. 그는 그녀에게 하와이를 꺼냈고 그들이 함께했던 기억을 얘기했다. 아무리 찬란했던 기억이라도 마음속에 담아두어야 하고 평생 꺼내지 말아야 한다고 민희는 생각했다. 가끔씩 꺼내 보아야 좋은 기억들도 있다. 사람은 항상 앞으로 나아가야만 한다. 복도는 아주 길었고 민희는 이 복도가 마치 그녀의 긴 인생과도 같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 복도의 한끝엔 김설진이 서 있었다. 그는 민희의 남은 인생의 남편이다. 김설진이 부드럽게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눈빛은 포용과 따뜻함으로 가득했다. 민희는 천천히 그를 향해 앞으로 나아갔다. 민희는 고개를 살짝 들었다. 그녀의 눈엔 아직도 눈물이 맺혀 있었다. 하지만 그 민희는 그 눈물을 감추지 않았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이 정도면 된 것 같으니 어른들에게 인사를 하고 그만 가죠."말을 마치고 김설진이 민희의 손을 붙잡았다. 그녀는 고개를 수그리며 마주 잡은 손을 바라보며 낮게 입을 열었다. "설진 씨." 김설진이 그녀를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그는 그녀의 눈을 쳐다보았다. 그녀의 눈엔 바다가 들어 있었고 드넓은 우주가 들어 있었고 김설진의 모든 세계가 남겨져 있었다. 김설진의 세상은 민희였다. ...조진범은 한 쌍의 부부가 떠나가는 모습을 바라보았다.민희가
“쯧쯧쯧. 의젓한 척하는 꼴 좀 봐. 너 정말 조진범을 좋아하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어? 좋아하던 사람이 매제가 돼서... 사실 죽는 것보다 마음이 더 아프지?”...진은영의 얼굴은 여전히 한 치의 변화도 없이 차가웠다.그녀는 고승아를 내려다보면서 입가에 차가운 미소를 머금었다.“고승아, 미치고 싶으면 조씨 가문에 찾아가서 곱게 미쳐. 너와 결혼하지 않는 사람은 조진범이지 우리 진씨 집안이 아니야. 그러니까 죽더라도 우리 진씨 집 문 앞에서는 죽지 마.”말을 마치고 진은영은 곧바로 경비원에게 문을 닫으라고 분부했다.붉은 칠을 한 대문이 천천히 닫혔다.그러자 고승아는 화를 참지 못하고 달려가 굳게 닫혀버린 대문을 힘껏 두들겨 패며 입으로는 진은영에게 험한 욕설을 내뱉었다.“진은영 이 가식적인 여자야, 넌 애초에 조진범을 사랑하는 걸 인정할 용기조차 없잖아. 그리고 너 또한 조진범 반품의 여자라는 걸 인정할 용기는 더욱이 없겠지.”경비원의 얼굴이 불쾌하게 일그러졌다.진은영은 고운 얼굴을 홱 돌리며 낮게 욕지거리를 내뱉었다.“미친년.”그녀는 정원을 지나 본가로 돌아온 뒤, 천천히 계단을 올라 2층 서쪽에 있는 침실로 향했다. 그곳은 진안영이 살고 있는 방이다.문을 열자 지난날의 베이지색 인테리어는 축제 분위기로 가득 찼다. 거실에는 모두 조씨 집안에서 보내온 예물 장신구와 옷들이 가득 쌓여 있었다.이 정도 예물이면 충분히 체면을 세워주었다.객관적으로 봐도 조씨 집안은 처음부터 끝까지 진씨 집안을 조금도 홀대하지 않았고 혼례도 매우 훌륭하게 준비해주어 진씨 집안의 체면을 제대로 세워줬다고 할 수 있다. 진안영이 시집가면 조씨 집안 식구들도 분명 그녀를 잘 대해줄 것이다. 전에 그녀도 조은혁 부부와 두 번 정도 식사를 한 적이 있는데 그녀가 봐도 그들이 진안영을 매우 잘 대해주고 있다는 걸 알 수가 있었다.내일이면 진안영은 집을 떠나 시집을 간다.모든 계산을 끝내고 그녀는 달빛 가운을 몸에 두른 채, 우아하게 자리에 앉아 한 쌍의 용봉 베
그때, 진안영의 손이 갑자기 조진범에게 잡혀버렸다.아직 몽롱한 술기운에 정신을 차리지 못했지만 앞에 있는 여인이 누구인지는 알 수 있었다. 눈앞에 있는 여인은 그녀의 아내 진안영이다.진안영은 오늘따라 더욱 아름다웠다.그려진 듯 갸름한 눈썹과 오뚝한 코, 그리고 커다란 눈매까지.사실 진안영의 외모는 매우 뛰어난 편이었고 몸매도 슬림하지만 필요한 곳에는 전부 볼륨이 있었다.그리고 진안영은 평생을 함께할 그의 아내이다.조진범은 진안영의 손목을 잡고는 그녀를 조금씩 자기 곁으로 끌어당겼다. 그렇게 두 사람은 뜨거운 공기 속에서 서로를 맞대고 앉았다...당장이라도 닿을 것 같은 거리에 이르니 정말 불타오르듯 뜨거웠다.진안영은 심지어 고동치는 자신의 심장박동까지 느껴지는 것 같았다. 한번 그리고 또 한 번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뛰어오르며 점점 벅차올랐다. 부드러운 손바닥이 닿자 거의 도망가고 싶을 정도로 뜨거웠다... 그녀는 남자를 만나본 적이 없기에 가장 친밀했던 스킨쉽도 조진범과의 키스였다.“진범 씨.”그녀는 작은 소리로 흐느끼며 어찌할 바를 몰랐다.그러자 남자는 여자의 잘록한 허리를 끌어안고는 천천히 조여오며 천천히 그녀에게 키스를 퍼부었다... 진안영의 몸에 걸쳐져 있던 가운은 진작에 벗겨졌고 몸에는 하얀 속치마가 달려 있었다. 푸른 실오리가 허리춤에 늘어져 말로 이룰 수 없는 청순함이 참 매력적이었다.진안영은 조진범의 몸 위에 축 늘어져 힘없이 그의 키스를 받아냈다.잠시 후 그들은 또 방향을 바꾸었다.남자는 몸을 뒤로 젖히고 진안영과 깍지를 낀 채, 천천히 자세를 취했다. 술에 취했지만 거칠지는 않았고 곧이어 침실 전체가 남자의 자제할 수 없는 움직임과 여자의 수증기 섞인 애원으로 가득 찼다.늦은 밤, 한 공간에서의 운명 같은 만남이 이루어지고 그들의 첫 관계는 세상의 무수히 많은 것을 이겨냈다.조진범은 어쨌든 술에 취했기에 한 번 만에 끝냈다.폭풍우가 지나간 후, 그는 아내를 껴안고 잠시 쉬었다가 깊은 잠에 빠졌다.그리고 진안영
...JH그룹.이 비서는 조진범이 출근하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대표님, 지금 신혼 아닙니까?”30평이 넘는 사무실 안, 커다란 유리를 통해 겨울 햇살이 쏟아져 들어와 얼룩덜룩한 금빛을 흩뿌려놓았고 책상 뒤에 앉은 조진범은 햇빛에 비쳐 신처럼 황홀하게 드러났다.그리고 이 비서가 묻는 말에 그는 덤덤하게 답했다.“남아공 사건은 제가 직접 맡고 싶어서요. 준비하세요, 이따가 비즈니스 점심 약속이 있습니다.”이 비서는 일단 고개를 끄덕여 보였지만 마음속으로는 탄식을 금할 수가 없었다.하지만 그 사업에서 진안영의 큰언니를 만나게 될 줄은 조진범도 생각지 못했다.진은영.진은영은 이 바닥에서 여장부라고 불리며 세련된 옷차림에 서류 가방을 들고 새로 부임한 매부를 한참 동안 훑어보다가 비아냥거리는 말투로 입을 열었다.“제가 잘못 본 건 아니죠?”“조 대표님은 제 여동생과 신혼인데 어떻게 여기까지 오셨습니까? 혹시 젊은 아가씨를 찾으러 오셨나요?”“아이고, 대낮에 그런 계집애가 어디 있겠습니까?”...그 말 속에 담긴 뜻을 조진범이 어떻게 모르겠는가?그리고 지금은 조진범도 이미 공적인 이야기를 마쳤기에 이 비서더러 먼저 운전기사의 차를 타고 가라고 지시했다. 담뱃갑과 라이터를 차 안에 던지고 다시 진은영을 마주했을 때, 그녀는 여전히 상업 엘리트의 모습을 유지하고 있었다.“공적인 일이나 좀 얘기합시다. 왜요, 안영이가 당신에게 불평하던가요?”그러자 당황한 진은영이 쿨럭 헛기침했다.“제 여동생이 불평을 할 줄 아는 애였다면 당신이랑 결혼했을까요?”“조진범 씨, 너무 잘난 척하지 마세요.”“그래요, 다른 사람들의 눈에는 당신네 집안이 엄청난 명문 집안으로 보일 수 있어요. 하지만 정말 양심에 손을 얹고 생각해보세요. 제 여동생이 당신 등골이나 쪽쪽 빨아먹는 여자라고 생각하세요? 순결하고 선량하며 성품이 고상한 여인으로서 그 어느 집안이라도 충분히 사모님 자리에 앉을 수 있어요.”“그런데 조진범 당신은?”“당신 마음속에서 사람이 죽었잖
5분 정도 지나자 진안영이 뒷마당에서 돌아왔다.그녀는 옅은 회색으로 된 코트를 입은 채 품에는 꽃다발을 안고 있었다. 모두 집 정원에서 꺾어온 화사하고 생기 넘치는 꽃들이었다. 집안의 도우미들은 진안영을 위해 두꺼운 꽃병도 이미 준비해 두었다.“퇴근한 거예요?”진안영은 마치 신혼부부라도 된 듯 남편에게 말을 걸었다.그녀의 말투는 정중하면서도 부드러웠지만 조진범에게는 그 말투가 지나칠 정도로 정중하게 들렸다. 조진범은 진안영의 옆으로 다가가더니 그녀가 정원에서 따온 꽃들을 바라보았다. 진안영은 전체적으로 우아하고 따스한 분위기를 풍기는 여인이었다.조진범은 문득 지난밤이 떠올랐다.어젯밤은 신혼 첫날밤이었다.조진범은 술을 조금 마셨지만 취해 있지는 않았다. 신혼인 아내와 관계를 맺을 때 어떻게 해야 하는지 조진범은 모두 기억하고 있었다. 하지만 모든 게 첫 경험인 진안영은 모든 게 서툴렀고, 조진범이 처음 진안영을 범하던 그 순간, 그녀는 조진범의 어깨를 꽉 깨물고 있었다.그 찰나, 조진범은 순간적으로 정신이 멍해졌다.하지만 몸은 여전히 뜨거웠고 그는 첫 경험인 진안영을 조금도 배려해주지 않았다. 처음부터 끝까지 고통만 느낀 진안영은 밤새 조진범의 어깨만 꽉 문 채 그의 목을 껴안고 있었다.너무 아파 더는 견딜 수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던 그때, 진안영이 흐느끼며 한 마디를 겨우 내뱉었다.“진범 씨.”...다시 정신을 차렸다.눈앞에 있는 자신의 아내는 그토록 따스하고 부드러웠다. 조진범과 함께 있는 모습이 마치 서로에 대한 존중으로 평화롭게 살아가는 부부처럼 보였다. 결국, 웃음을 터뜨린 조진범이 말했다.“왜 이제 온 거예요! 가서 꽃병에 꽃 꽂아놓고 와요. 손 씻고 저녁 먹어야죠.”그 말에 조진범이 작게 대답했다.그들의 대화는 정말 형식적이었다. 둘의 대화만 들어보면 신혼부부가 아니라 결혼한 지 오랜 시간이 지난 노부부 같았다. 시작의 설렘은 다 사라지고 그저 어쩔 수 없이 한집에서 살아가는 그런 부부 같아 보였다.조진범의 눈빛
욕실 안에는 수증기가 피워낸 안개로 자욱했다.진안영은 뜨거운 물에 몸을 담그며 방금 있었던 일들을 조용히 떠올렸다.조진범은 처음부터 끝까지 아주 다정했다.하지만 너무 다정했던 나머지 그의 완벽함이 마치 공식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조금 전의 조진범은 인간이 아닌 로봇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진안영은 너무 많은 것을 바랄 처지가 아니었다. 처음부터 불공평했던 결혼이었고, 처음부터 불공평했던 부부 관계에서 너무 많은 것을 요구하는 건 철없는 짓이었으니까.진안영은 몸을 오래 담그지 않았다.조진범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었던 그녀는 몸이 풀리자마자 자리에서 일어나 가느다란 몸에 하얀 가운을 걸치고 욕실을 나섰다.안방의 샹들리에 불빛이 꺼져 있었다.조진범은 무드등만 켜놓은 채 침대에 기대어 휴대폰을 들고 비서에게 몇 가지 지시사항을 전달하고 있었다. 욕실에서 나온 진안영이 침실 안으로 들어서는 것을 발견하자 그는 간단한 몇 마디만 전한 후 통화를 끝마쳤다.진안영은 연고 하나를 들고 침대 옆으로 다가와 앉더니 조심스럽게 자신의 몸에 바르기 시작했다. 그녀는 아직도 어딘가 부끄러웠지만 지금 바르지 않으면 다음 날 걷기가 너무 힘들었던 탓에 발라야만 했다. 조진범은 검은 눈빛으로 서투른 그녀의 손짓을 몇 초 동안 바라보다가 결국 그녀의 손에 있던 연고를 빼앗아 낮은 목소리로 말을 꺼냈다.“내가 해줄게. 많이 아파?”남자의 투박한 손길은 민감한 부분을 건드리기 마련이었다.진안영은 입술을 꽉 깨문 채 감히 조진범의 얼굴을 바라보지 못했다.잠시 후, 진안영은 낮은 목소리로 사적인 이야기를 꺼냈다.“진범 씨, 하고 싶은 얘기가 있는데요.”“응?”“내일이 제가 친정으로 돌아가는 날이잖아요. 아버지께서 오늘 저한테 전화를 주셨는데, 괜찮다면 진범 씨도 같이 가지 않을래요?”진안영이 조심스럽게 물었다.조진범이 고개를 들어 검은 눈동자로 그녀를 응시했다.사실 진안영의 아버지 진철수가 다른 속셈을 품고 있다는 사실을 조진범은 이미 알고 있었다. 분명 남아프리카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