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천우 그룹을 나선 후 회사로 가지 않고 이미연을 찾아갔다.이미연도 진짜 며칠째 보지 못했다. 서로 바쁘게 지내서 아침 일찍 출근하고 저녁 늦게 퇴근하다 보니 마주칠 일도 거의 없었다.이미연은 나를 보더니 깜짝 놀라며 물었다. “무슨 일 있어?”나는 그녀를 한번 째려보고는 심드렁하게 말했다. “꼭 일 있어야 찾아와야 해?”“그렇지!” 그녀는 괴상야릇한 말투로 말했다. “지금 뭐 즐거워 죽겠지?”“뭐래, 할 말 있으면 빨리 말해.” 나는 이미연의 이 표정을 알고 있었다. 분명 내 어떤 트집 잡을 껀더기라도 건진 거겠지.역시, 이미연은 웃으며 내 옆에 찰싹 붙어 앉았다. “너 먼저 해명해 봐!”나는 얼굴이 뜨거워지며 그녀의 시선을 필사적으로 피하며 말했다. “헛소리하지 마! 뭐라는 거야!”“지금 내가 헛소리하는 거로 보여? 그날 걔가 널 데려다주는 걸 다 봤어. 헤어지기 어찌 아쉬워하던지! 빨리 해명해. 날 아직도 네 자매로 여긴다면!”“진짜 짜증 나게 무슨 소리야! 이건 그만 말하자. 아니, 그건 그렇고 너도 소문이 많던데?”“내가 소문이 많다고? 어떤 소문? 이 이혼녀보다 많을까? 어? 특히 너! 내가 널 안 알려줬다고 탓하지나 마.” 그녀는 진지하게 말했다. “지아야, 지금 무슨 스캔이 나거든 큰일 나는 건 너야! 나는 지금 걱정해서 말하는 거라고!”나는 잠시 침묵을 지켰다. 이미연 말이 맞았다. 그녀는 분명 나를 위해 이렇게 생각하고 있을 것이었다.내가 아무 말도 안 하자 그녀는 말을 이었다. “이게 다 네가 전에 이혼 소송을 할 때 소문이 너무 퍼져서 지금도 널 지켜보는 사람이 아주 많을 거란 말이야. 내가 이 업계에 발을 오래 담가서 아는 건데 너희를 반대하는 게 절대 아니고 그냥 조심하라고 알려주는 거야!”나는 ‘응’하고 짧게 대답하자 그녀가 또 말했다. “그래서, 무슨 일로 왔는데?”“아, 혹시 형원 그룹 고객 리스트 좀 보여줄 수 있어? 좋기는 시 중심 쪽이랑 가까운 곳의 고객들부터 보여줘!”이미연은 내 말을 듣고는
여기까지 생각하자 나는 또 웃음을 참을 수 없었다. 내가 다른 사람은 상대하지 못해도 신연아는 손쉽게 이길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나는 이미 계약을 체결한 상태였기에 누구라도 이 사실을 알게 되면 눈이 벌게서 나를 헐뜯을 게 분명하기에 조금 겸손하게 행동하는 게 맞았다.신연아는 조금 후에 이용해 버려야지.이번 주 화요일은 내 생일이었다.아침에 엄마가 나에게 미역국을 끓여주지 않았더라면 정말 깜박 잊을뻔했다.콩이는 아침 일찍 일어나 나에게 생일 축하 노래를 불러주고 애교를 부리며 내 생일을 축하해 줬다. 작년의 오늘, 신호연은 원래 출장에 간다고 하고는 오후에 갑자기 목걸이 세트와 화장품 세트를 사 들고 오며 영원히 이렇게 아름다운 미모를 유지하라면서 선물해 주던 게 생각났다.그러고는 해산물을 잔뜩 먹었던 거 같다.지금 생각해 보면 그때 출장 간다고 했던 것도 정말 출장을 간 건지 신연아랑 놀러 간 건지 모르는 일이었다.나는 씁쓸한 미소를 짓고는 코끝이 찡해져 얼른 고개를 숙이고 미역국을 먹었다. “어머니! 오늘은 사실 어머니가 수고한 날이잖아요. 저녁에 다 같이 외식이나 할까요?”아버지도 허허 웃으며 찬성했는데 엄마는 반대하며 말했다. “그냥 채들을 사서 집에서 먹을까?”아버지는 웃으며 어머니를 가리키며 말했다. “애가 오늘은 자기가 고생한 날이라는데 집에서 먹자는 말이나 하고! 정말 며느릿감으로 딱 맞지 뭐! 즐기지도 않고.”“그니까 말이에요, 어머니! 집에서 먹지 말아요, 어머니 힘들게. 이따가 제가 위치를 보낼게요. 오늘 이미연이랑 장영식이랑 그리고 또 새친구가 있고요... 아마 다 부르면 시끌벅적할 거예요! 오늘 하루 푹 쉽시다!”콩이는 내 팔을 꼭 잡으며 큰 눈을 깜박거리며 물었다. “엄마, 저녁에 밥 먹으러 가?”“맞아! 콩이도 가고 싶어?” 나는 이쁜 콩이를 보니 마음이 아파 그 앵두 같은 오동통한 입술에 뽀뽀했다. “우리 딸, 식당 가는 거 젤 좋아하지! 그래, 가자!”콩이도 기뻐하며 폴짝폴짝 뛰다가 말했다. “그
”바빠요?” 나는 넌지시 물었다.“말해요!” 전화기 너머 살짝 쉰 듯한 목소리가 들려왔고 심장이 쿵쿵 뛰었다.“어디예요?” 나는 살짝 불안했다.“홍콩!” 그는 짧게 대답했고 회의하는 것 같았고 목소리를 굉장히 낮게 깔고 있었다.나는 급하게 말을 이었다. “아 저는 그냥 뭐하나 궁금해서 전화건거예요... 아무 일 없으니까 할 일 계속 해요! 시간 있으면 그때 다시 전화해요!”말을 마치고 얼른 끊었다. 그리고 실망감을 감출 수 없었다.사실 ‘보고 싶어!’라고 하고 싶었는데 그걸 입 밖으로 낼 조건도 없었으니 더욱 말할수 없었다.그도 바쁜데 언제나 매일 내 곁에 딱 붙어있을 수는 없었다. 만약 내가 배현우를 선택한다면 평범한 삶은 지낼 수 없을 것이었다.그러다 나는 순간 웃음이 새어 나왔다. 고작 생일 가지고 뭘 이렇게 생각하는지...나는 얼른 내 감정을 추스르고 일을 시작했다. 이렇게 해결 못 한 일들이 많은데 혼자 궁상이나 떨 시간이 어딨어. 현실을 마주해야지.오후에 나는 도혜선과 이미연에게 저녁에 같이 밥 먹자고 연락했다.이미연은 내 생일을 알고 있었고 매년 기억하고 있었다.퇴근 전에 나는 장영식의 사무실로 가 보니 그는 머리를 박고 열중한 상태였다.내가 들어오는 걸 봐도 장영식은 계속 집중해서 일을 마무리 지으며 말했다. “10분만 줘봐!”나는 웃으며 그의 사무실 걸상에 앉아서 바쁘게 일을 마무리하는 그를 보았다.10분 정도 후에 그는 나를 보며 말했다. “말해!”나는 순간 불쾌해졌다. 이 남자들은 왜 다 이렇게 말하는 거야! 말을 아껴서 뭘 하려고!“같이 밥 먹자.” 나는 덤덤하게 말했다.그는 웃으며 일어서서는 말했다. “잠시만 기다려 줘!”그는 전화가 걸려 올 때까지 또 나와 일에 관한 말을 했다. 그러고는 전화를 받고는 나에게 말했다. “됐어, 이제 가자!”우린 같이 내려왔고 그는 카운터에 가서 물건을 가지고는 나왔다.우린 차를 몰고 식당으로 향했다. 이미연이 우리 부모님과 콩이를 데리고 갔는데 우리가 도착할때는 이
커다란 그림자가 내 차 옆에 있었다. 그러고는 우리 가족을 보고는 내 쪽으로 걸어오는 것이었다. “왔어요?”아버지는 그를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아버지가 입원했을 때 배현우가 2번은 왔었으니까.어머니는 보고는 말했다. “어머, 빨리 들어오세요! 죄송해요, 오래 기다렸죠.”“아니요, 이제 금방 왔어요!” 그는 웃으며 대답하고는 힘겹게 애를 안고 있는 나를 보더니 다가와 말했다. “제가... 도와드려도 될까요?”나는 순간 어쩔 줄 몰라 멍해졌다. 뭐라고 대답해야 하는지 생각 정리도 채 안 끝났는데 그는 이미 내 앞에 서 있었다. “제가 안을게요!”나는 그의 행동을 보고는 코가 시큰 해지면서 큰 감동을 먹었다.그는 말하며 팔을 내밀었지만 어떻게 안아야 하는지는 모르는 모양이었다.“제가 안... 안아도 괜찮아요!” 나는 말을 더듬으면서 대답했다.“주세요. 보니까 힘들어 하는 거 같은데.” 그가 꿋꿋이 자기가 안겠다고 하니 나도 할 수 없이 콩이를 넘겼는데 정말 단 한 번도 애를 안아본 적 없는 솜씨였다.그는 매우 진지하게 안으며 혹시라도 콩이를 놓아버릴까 혹시라도 너무 세게 안아서 콩이가 깨어버릴까, 굉장히 조심스럽게 안았다. 하지만 손은 머리를 물건 잡듯이 잡고 있었고 동작이 너무 웃겨서 하마터면 크게 웃을뻔했다.나는 얼른 그의 자세를 교정해 주었고 그는 그제야 한숨을 뱉으며 안심하며 입을 꾹 깨문 채 나를 쳐다보았다.그러고는 나의 안내를 받으며 콩이를 방에 눕혔다.나는 급하게 콩이의 옷을 갈아입히고 이불을 덮어주었다. 배현우는 내 뒤에 서서는 능숙한 나를 쭉 지켜보았다.나는 콩이를 제대로 눕히고는 그제야 그를 보았다. 배현우는 갑자기 나의 이마도 가볍게 뽀뽀하길래 깜짝 놀라서 서둘러 거실로 나갔다. 배현우도 같이 나와서는 아버지와 얘기하기 시작했다.그리고 나는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바로 물었다. “근데 배현우 씨 홍콩이라고 하지 않았어요? 어떻게 온 거예요?”“오늘 지아 씨 생일인 거 알고 바로 달려왔는데... 그래도 조금 늦은 거 같
신광 국제 꼭대기 층 객실에 도착하니 2인분의 양식 코스와 와인이 세팅되어 있었다.그는 나를 그의 품에 안았다."생일 축하해!" "너무 바빠서 간단하게 밖에 준비하지 못했지만 중요한 건 우리가 같이 있다는 사실이니까, 당신 생일을 같이 보낼 수 있게 되어서 너무 다행이야!"나도 그의 품에 더 파고들며 대답하였다."당신과 같이 있다는 사실이 가장 중요해요. 당신과 함께 한다면 난 생일을 어떻게 보내든 다 좋아요!"그는 마술을 부리듯이 어딘가에서 상자 하나를 들고나와 내게 건네 주었다. 궁금한 표정으로 그를 쳐다보니, 열어보라는 듯한 눈짓을 주었다.정교하게 포장되어 있는 상자를 설레는 맘으로 천천히 열어보니, 상자 안에 있는 것은 목걸이 같은 흔한 선물이 아닌 펜 한 자루였다. 그것도 다이아가 박힌 만년필, 몸통에는 루비로 'MY' 민영이라는 두 글자의 이니셜이 박혀 있었다."와, 정말 너무 예뻐!" 내 눈은 순간 반짝였다. 그가 어떻게 이리도 내 취향을 잘 파악하고 있는 걸까? 너무도 신기했다.언제부터인지 모르게 만년필에 꽂혀서 여러 종류의 펜을 수집하기 시작하니 본가에 모아둔 만년필이 벌써 한 박스가 됐다.하지만 언제부터인가 취미는 사치가 되고 사는 게 바쁘다는 핑계로 점점 생활에서 멀어졌었다. 정확히는 모르지만 아주 오랫동안 모으지 못했었다.근데 이게 웬걸 지금 내 눈앞에 있는 펜은, 아니 이 공예품은 그저 비싼 사치품이 아니라 너무 정교하고 내가 갖고 싶었던 하지만 가질 수 없었던 그런 오로라 다이아 만년필이었다.지금 생각해 보니 전에 신호연에게 말을 한번 했던 것 같긴 하다. 나중에 내가 돈을 많이 벌게 되면, 그때는 꼭 오로라 다이아가 박힌 만년필 한 자루를 꼭 사고 말 거라고.그때 그는 내 머리를 쿡 찔렀다."너는 참 현실 적이지 않아. 돈 벌어서 펜 한 자루 사려는 사람이 어디 있어?""너는 아무것도 몰라!"그때 나는 너무 실망해서 삐쳤던 기억이 있다.아무것도 모른다는 말이 실망했단 뜻이었단 걸 나만 아는 것 같았긴 했
그의 눈빛은 어두워졌다.“무슨 일이에요?”“아무것도 아니에요. 설계원에서 나한테 설계도를 요구했을 뿐이에요!”나는 담담하게 말했다.“그날 조 대표님을 만났어요! 그래서 대표님께도 말씀드려서 아실 거예요.”“설계원이요?”그는 의심하는 듯한 말투로 다시 한번 묻고는 나에게 당부했다.“앞으로 지아 씨가 프로젝트팀에 넘긴 일은 그 사람들이 직접 조 대표를 찾아가라고 해요! 지아 씨가 그걸 다시 줄 필요 없어요!”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원래는 그 여자가 너무 못되다고 말하고 싶었지만 나는 그 말을 도로 삼켰다. 어쨌든 그 사람도 천우 그룹 설계원의 사람이었기 때문에 앞에서 대놓고 뭐라고 하기가 좀 그랬다.내가 말하지 않자 그도 더 이상 묻지 않았다.항상 이럴 땐 시간이 빨리 지나갔다. 우리는 고작 네 시간 밖에 같이 있지 못했다.그가 나를 집으로 데려다줄 때 이미 늦은 밤이었고, 나는 그가 피곤한 것 같아서 마음속으로 미안했다. 나의 생일이라고 오늘 급하게 달려왔는데, 내일 아침 또다시 서둘러서 돌아가야 했다.문 앞에서 그는 나를 끌어당겨 품에 껴안았다.“들어가요!”나는 그를 올려다보며 말했다.“그럼 이제 들어가서 조금 쉬어요!”“알았어요! 걱정하지 마요!”그는 그곳에 서서 내가 들어가는 것을 지켜보았다. 나는 정말 문을 닫고 싶지 않았지만 내가 마음먹고 문을 닫지 않으면 그가 돌아가지 않을 것을 알고 있었다. 그에게는 휴식이 필요했다.나는 마음먹고 문을 닫았고 거실의 희미한 불빛에 재빨리 위층으로 올라갔다. 방으로 들어간 후 나는 창가로 달려갔다. 그는 고개를 들어 창문 쪽을 살피더니 돌아서서 차를 타고 갔다.그 순간 내 마음은 텅 빈 것 같았다. 나는 사랑에 빠진 어린 소녀처럼 좋아하는 사람을 위해 뭐든지 할 수 있었다. 내 마음은 이미 그에게 빼앗겼다.나는 그가 나에게 선물한 펜을 움켜쥐고 침대에 누웠다. 그 상자를 품에 안고 잠들지 못해 뒤척였다.다음 날 아침 일찍, 나는 주체하지 못하고 그를 만나기 위해 차를 운전해서 스
이세림의 말을 들어보니, 천우 그룹 내부의 혼란이 아직 끝나지 않은 것 같았다. 나는 그들이 내부에서 도대체 뭐 때문에 다투는지 궁금했다.신호등이 파란 등으로 바뀌자 나는 다시 앞으로 달렸다. 나는 이세림에게 물었다.“그래서 어쩌자는 거예요? 나 거의 집에 도착해요!”“언니 혹시 급한 일이 없으면... 나와서 나랑 얘기 좀 해요! 난 여기서 친구가 한 명도 없어요. 요즘 일이 너무 많아서 힘들어요!”이세림은 기분이 좋아 보이지 않았다.“그럼 회사 맞은편에 있는 스타벅스에서 기다리고 있어요!”나는 그녀에게 이렇게 말한 후 눈앞에 있는 어린이집을 훑어보았다. 그리고 다시 방향을 돌려 회사로 갔다.나는 스타벅스로 들어가서 쭉 훑어보았지만 이세림을 보지 못했다. 그래서 그녀에게 전화를 걸어 물어보려고 했는데 그제야 그녀는 웃으면서 걸어 들어왔다. 그녀는 여전히 예뻤다.그녀는 손에 들고 있던 작은 종이봉투를 내 앞에 놓았다.“선물이에요!”“뭐예요?”나는 혼란스러운 표정으로 이세림을 보고 다시 종이봉투를 보았다.“입생로랑 신제품이에요! 방금 받았어요. 언니한테 줄게요!”그녀는 당당하게 말했다.나는 이 립스틱의 가격이 엄청 비싼 것을 알고 있다.“전 별로 화장하지 않아요! 세림 씨가 써요!”“언니를 위해 특별히 주문한 거예요!”그녀는 나를 흘끗 쳐다봤다.“왜 저한테 예의를 차려요? 언니가 저한테 밥 사주는 건 되고, 제가 선물 주는 건 안 돼요? 어려운 일도 아닌데요 뭐, 전 이 브랜드만 써서 언니 주려고 두 개 챙겨왔어요.”“고마워요!”나는 손을 뻗어 그것을 받았다. 또 거절하면 가식적으로 보일 것 같았다.이세림은 자리에 앉고 갑자기 나를 바라보더니 오버하면서 말했다.“어제 잠을 못 잤어요? 다크서클이 왜 이렇게 심해요?”나는 눈을 비비며 어색하게 웃었다.“네! 잘 못 잤어요. 친구들이랑 술을 마셨거든요! 집에 늦게 들어갔어요. 그렇게 심각해요?”“이게 안 심각해요?”그녀는 매우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여자는 절대 밤
비록 이 순간 나는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무력감을 느꼈지만, 애써 차분하게 보이려고 노력했다.나는 이제 이세림이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알 것 같았다.하지만 나는 그녀 앞에서 내 마음을 조금도 드러내서는 안 된다. 이 순간 나는 잘 알고 있었다. 이세림을 상대하기 쉽지는 않다. 우리가 처음 만난 날부터 그녀는 나를 시험하고 있었다.내가 무심한 듯 그녀를 바라보자 그녀는 약간 놀란 듯했다.“지아 언니, 설마 이게 정상이라고 생각하는 건 아니죠?”나는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맛이 너무 써서 토할 것 같았다. 나는 잔을 내려놓았다.“제가 그걸 정상이라고 생각하는 게 아니라, 저는 아예 당신들의 삶이 이해되지 않아요. 저는 어릴 때부터 길거리 음식을 먹었고 그게 아주 맛있다고 생각한 것처럼, 난 재벌들의 삶을 이해할 수 없어요! 그래서 세림 씨가 말한 묶여있다는 거, 전 왜 그렇게 해야 하는지 모르겠네요?”나의 말투는 차분했고, 나는 무심한 척, 아무것도 모르는 척하면서 계속 말했다.“저도 사업을 하고 있기 때문에 당연히 수단을 쓰죠. 그런데 저는 제 가족을 속이지는 않아요. 다른 사람에게 강요하지도 않고요. 절대 제 가족을 난감하게 하지는 않죠.”내가 한 말은 허울이 좋았다. 또 그녀가 듣게 의도적으로 한 말이기도 했다.이세림은 놀란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고, 진정되지 않은 듯했다.“왜 억지로 묶어놓죠? 두 사람이 서로 원하면 결혼도 할 수 있잖아요? 피가 섞인 친남매도 아닌데 뭐 어때요!”나는 이세림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나도 그녀를 떠보려 그 말을 내뱉었다.그녀가 먼저 나를 찾아와서 ‘전쟁’을 선포한 것이다. 그녀는 나와 현우 씨가 도대체 무슨 사이인지 알아내려고 했고, 내 앞에서 자신이 먼저 그 자리를 차지했다고 말하고 있다.그래서 나는 그녀에게 되물었다. 만약 현우 씨가 그녀를 진심으로 좋아했으면 바로 결혼하지, 왜 굳이 억지로 묶어두겠는가?앞뒤가 맞지 않는다!“어휴! 그만 말해요! 어쩌다가 화제가 이렇게 됐는지!”이세림은
나는 한참 동안 침묵을 지키다 마지못해 고개를 들어 서강민을 바라보며 나지막이 말했다.“서강민 씨, 먼저 들어가시죠. 언니가 깨서 서강민 씨를 보면 또 흥분할 것 같은데... 지금 같은 상황에 언니가 회복하는 게 제일 중요하잖아요.”그에게 상처를 주고 싶지는 않았지만, 나는 한마디 더 보탰다.“어떤 일들은 천천히 해야 해요. 언니한테 시간을 좀 주세요. 서로 생각을 정리해 봐요.”서강민은 여전히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도 않고 깊은 잠에 빠진 도혜선을 한참이나 지켜보았다. 발길을 돌리기 전에도 아쉬움에 한 번 더 뒤돌아보며 나한테 말했다.“고생해 줘요.”나도 담담히 답했다.“제가 해야 할 일인걸요. 언니에게 시간을 좀 줘요. 언니도 회복할 시간이 필요할 수 있잖아요.”내가 말하는 회복이 뭔지는 서강민도 당연히 알고 있었다. 그건 도혜선이 마음에 입은 상처였다. 오늘 도혜선의 행동에서도 알 수 있다시피 그녀의 상처는 아물 수 없을 것이다. 언급만 해도 피가 흘러내릴 만한 상처였다.잠시 후, 서강민은 한발 물러섰지만, 눈길은 여전히 도혜선에게 머물러 있었다. 평온해 보이는 모습 아래에서 어떠한 파도가 휘몰아치는지 나는 몰랐다.한참 전 도혜선이 했던 말들은 마디마디가 주옥이었다. 모두 그녀가 마음속으로만 담아두었던 것들이었고 또한 서강민의 약점이었다. 얼마나 아플지는 서강민 본인만 알고 있을 것이었다. 하지만 쓰디쓴 독주도 그는 혼자 삼켜내야만 했다.도혜선의 눈가가 파르르 떨려와 깨어나려는 낌새가 보이고 나서야 서강민은 조용히 병실을 나갔다.나는 마음이 아파와 한숨을 내쉬며 손을 뻗어 도혜선의 손을 맞잡았다.인제야 하루 종일 배현우에게서 연락이 없었다는 것이 생각났다. 그쪽에는 어떤 상황인지, 김우연에게서는 소식이 없는지 아무것도 알 수 없었다.도혜선을 보니 아직 깨어나지 않은 것 같아 살며시 그녀의 손을 놓고 일어서려 했을때, 그녀는 다시 나를 잡으며 미약한 목소리로 말했다.“가지 마...”나는 너무 놀라 얼른 그녀를 향해 몸을 돌렸다.
‘서강민은 본인이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알고 있기나 하는 걸까?’“당시의 사고는 내가 저지른 거야. 그녀도 나 때문에 다쳐서 지금처럼 된 거고… 나는 좋은 남편이 아니야. 아내가 식물인간이 되었는데 나는 다른 여자를 사랑하게 되었으니 말이야...”서강민은 여기까지 말하며 후회하는 기색을 내비쳤다.“그녀를 마주할 때마다 너무 죄책감이 들고 고민스러워. 나 또한 발버둥 쳐봤지. 하지만 그녀는 여전히 나의 일탈을 받아들일 수 있어 해. 그녀한테 정말 미안한 일이지만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은 내가 널 사랑하고 있다는 거야...”“강민 씨!”도혜선은 꾸짖는 듯한 말투로 그의 말을 잘랐다.“낮말은 새가 듣고 밤말은 쥐가 듣는다고 당신 아내가 듣고 있을 거예요. 저를 끌어들여서 같이 속죄할 생각하지 마세요. 저는 당신의 구세주가 아니에요. 저는 그냥 사람답게 살고 싶은 평범한 여자라고요. 저 좀 그냥 내버려둘 순 없어요?”도혜선은 말하면 할수록 화가 치밀어 올라 침대에서 벌떡 일어났다. 하지만 하얗게 질린 얼굴이 일그러지며 그녀는 한 손으로 본능적으로 가슴을 움켜쥐었다. 나는 깜짝 놀라 그녀 앞으로 갔다.“혜선 언니, 움직이지 마! 위험해...”늑골 골절과 뇌진탕이 있는 환자다 보니 이러한 행동은 그녀에게 너무나도 위험했다.도혜선은 손을 들어 그녀를 안으려고 하는 한지아를 제지했다.“제가 오늘 한 말이 아직도 이해가 안 되나요? 서강민 씨, 저의 인생은 아무런 이유도 없이 당신한테 묶여 당신의 부속품이 되었었는데 저도 자존심이 있어요. 더 이상 당신처럼 지난날의 죄책감을 짊어지며 답답하게 살아가지 않을 거예요.”도혜선은 여전히 분노에 차 외치고 있었다.“매일 제 앞으로 와 지난날의 행동에 대해 속죄하라고 일깨워 주실 필요 없어요! 당신을 보면 저는 지난날 모든 서울 사람의 웃음거리가 되었던 치욕적인 과거가 떠올라요. 당신은 마음 가는 대로 해요. 당신은 아내와 했던 약속을 지켜야 해요.”말을 마친 도혜선은 숨이 차올랐다. 너무나 고통스러워 보였다.
도혜선의 나지막한 목소리가 계속하여 들려왔다.“당신은 아무런 부담 가질 필요 없어요. 저 같은 여자 마음속에 담아두지 않아도 돼요.”그녀는 자기비하적인 말을 내뱉었다.”선아...”“설사 강민 씨가 와이프와의 약속을 안 지킨다 해도 당신의 신분과 지위로 당신에게 더 어울릴만한 사람 충분히 찾을 수 있을 거예요. 저는 당신에게 어울리는 사람이 아니에요. 하물며 당신네 부부 눈에는 저는 그냥 염치없고 미천한 사람일 뿐이죠. 저 같은 사람은 본처가 되기에 적합하지 않아요. 사모님이라는 호칭도 어울리지 않죠.”“나는 그렇게 생각한 적 없어. 오해하지 마.”서강민은 조급함에 한 발 앞으로 나서며 해명하려 했다.하지만 도혜선은 손을 들어 그를 막아섰다.“강민 씨... 해명하지 않아도 돼요. 당신의 행동이 모든 걸 설명해 주고 있어요! 장담하건대 아직 당신들이 어떤 의도로 얘기하고 있는지도 모를 정도로 바보가 된 건 아니에요. 그녀는 정말 대단하네요. 죽을 때까지도 제가 이길 수 없는 사람이었어요. 그녀는 아무리 병상에 누워있어도 고상한 사람이고 저는 그냥 미천한 사람일 뿐이니 말이에요.”도혜선은 말을 내뱉으며 입가에 처량한 미소를 비췄다. 누가 봐도 가슴 아픈 미소였다.“이전의 저는 확실히 허례허식에 차 있는 사람이었지만 저도 성장했어요. 정신 차렸어요. 당신 앞에 있는 저의 진정한 가치가 어떤 것인지 깨달았어요. 저는 하나의 도구, 들러리뿐이었지만 원망하지 않았어요.”그녀는 여기까지 말하고 한숨 돌렸다. 얼굴빛은 아까보다 더 창백해져 있었다.“하지만 이제 저는 자존감을 챙기며 살고 싶어요. 누군가에게 의탁하지 않고 쓰레기같은 취급을 받더라도 최소한의 존엄을 지키며 살고 싶어졌어요.”점점 더 차가워지는 도혜선을 바라보며 서강민은 답했다.“혜선아, 나는 널 한 번도 무시한 적 없어. 나는 그냥 내가 뭘 하든지 네가 다 이해해 줄 줄 알았어.”도혜선의 서강민의 말을 듣고 갑자기 웃음을 터트렸다. 안색은 더 창백해져 있었다.“이해? 당신이 어떤 말을
방금 허투루 한 말이 어머니의 진실인가 싶다. 보아하니 어머니가 나를 속이는 일이 있는 것 같았다. 마음속의 의문점이 점점 많아졌다. 나는 아무렇지 않게 식사를 마치고 차씨 가문의 할머니께 말씀을 드린 후, 위층으로 돌아가 옷을 갈아입고 도혜선을 보러 가려고 준비했다.그리고 팔도 겸사겸사 검사하려고 했다. 차에 앉고 나서 배현우한테 전화를 걸었는데 받지 않았다. 이 이른 아침에 뭐 하러 갔는지 궁금하기도 하고 김우연 쪽에 무슨 소식이 있는 건 아닌지 걱정했다.'생각해 보니 이렇게 빠르진 않겠지? 몇 시간밖에 안 됐는데.'병실에 도착하자마자 도혜선이 노발대발하는 장면을 포착했다. 병실에는 도혜선과 서강민 두 사람만 보이고 이미연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내가 들어서자 분위기가 좀 이상하고 심상치 않는 것을 느꼈다.침대 옆 머릿장에는 보온병이 놓여있다. 서강민은 오늘도 도혜선에게 먹을 것을 가져다주러 온 것 같다.서강민은 침대 앞에 떡 하니 서있었고 침대에 있던 도혜선은 차가운 표정을 하고 있었다. 도혜선은 내가 들어오는 것을 보고 나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것 같았다.상황을 정리하려고 다가가서 서강민에게 인사를 하고 도혜선에게 다가갔다. "오늘은 좀 어때?""별로야."도혜선은 차갑게 대답하더니 또 말을 건넸다. "지아야, 손님 좀 배웅해 줄래?"난감했다, 도혜선은 서강민을 내쫓으라고 하는 거였다. 난 당연히 그 뜻을 알고 있다. 조심스럽게 서강민을 쳐다보았다. "혜선아, 꼭 이래야 하니?"서강민은 씁쓸한 표정으로 도혜선을 바라보며 물었다."네! 서강민씨, 저는 이미 분명히 말했고 두 번 다시 말하고 싶지 않습니다!"도혜선은 내가 그 자리에 있다고 해서 서강민의 체면을 세워주지 않았다.참지 못하고 웃어 버렸다. "언니, 화 그만 내고 진정 좀 해. 초조해하는 거 알아, 점차 좋아질 거야. 강민씨랑 얘기 좀 하고 있어. 나는 팔 검사해야 돼서, 금방 돌아올 거야!"나는 핑계를 대고 떠나서 그들에게 자리를 비워주었다.
배현우는 나의 우울한 모습을 보고 말했다. "그리고 내가 없는 동안에 회사 일도, 한심로얄의 마지막 한방도 둘 다 포기할 수 없잖아요. 신예 쪽 일도 있고, 전희가 다시 살아날 기회를 얻지 않도록 조심해야 돼요. 지금 모든 게 중요한 시기이니까요.""지금 그 누구도 아버지보다 중요하지 않아요! 수십년간 도망치면서만 살았는데 죄책감도 가지고 있었을 거예요, 분명 아주 괴로워하고 있을 거예요. 그리고 지금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아무도 모르고 있는데, 내가... 내가 딸로서, 난..."배현우는 내 말을 듣고 나서 침대에 누워 나를 꼭 껴안고 말했다. "일단 내일 소식을 기다려 봅시다. 김우연 쪽에서 어떤 정보를 얻었는지 보고 결정합시다."배현우는 나의 어깨를 툭툭 쳤다. "제 말 듣고 일단 자세요, 내일 일어나서 먼저 할 일들을 처리하고 준비하고 있으세요, 만약에 상황이 좋으면 내일 같이 데리고 갈게요, 당신 마음 충분히 이해해요."배현우가 지금 나를 위로하고 있다는 건 알고 있다. 내가 기분 나빠하는 모습을 보지를 못한다. 그 말을 들으니 마음이 좀 편해지는 것 같았다. 배현우의 따뜻한 품에 안기며 눈을 감고 내일 먼저 무엇을 처리해야 할지 생각했다.근데... 눈을 떠서 배현우를 쳐다보는데 배현우도 잠에 들지 않았다. "현우씨... 할머니가 보존하고 있는 CCTV를 보여주시겠어요?"'그 영상을 꼭 보고 싶었다, 알고 싶었다. 어머니가 어떻게...'"알았어요, 하지만 지금은 자세요, 나중에 보여 드릴게요. " 팔짱을 끼더니 분명히 나를 얼버무리고 있는 것이다. 배현우가 그 장면을 내게 보여주고 싶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밤이 깊었고, 비까지 부슬부슬 내리기 시작했다. 나는 꼼짝도 하지 않은 채 배현우의품에 안겨 점점 잠이 들었다. 아침이 밝았다. 날씨는 여전히 흐렸다. 배현우는 이미 곁에 없었고, 손을 뻗어 그가 누워 있던 곳을 만졌다. 이미 차가운 걸 보니 배현우는 일찍 침대에서 일어났나 보다.'무슨 소식이라도 왔나?'이
"할머니가 이번 사건을 피할 수 있었던 건 당시 큰 병을 앓은 것에 대해 감사해야 했어요. 제 생각에는 반은 꽤병인것 같아요. 직접 사표를 쓰고 나서도 서둘러 호주를 떠나지 않았다는 게 참 슬기로운 선택이었어요.""네?"너무 놀라서 몸 둘바를 몰랐다.배현우는 인정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할머니는 호주를 떠나지 않으셨어요. 그곳에 머물면서 배씨 저택의 인기척을 살피다가 배씨 저택의 요상한 소문들이 완전히 자취를 감춘 뒤에야 조용히 호주를 떠나셨어요."나도 모르게 할머니의 메커니즘에 감탄했다."저도 그때 상황을 잘 몰라서, 할머니도 몸이 허약했고 내 행방을 알아 볼 길이 없어 그 비밀을 계속 지켜왔었나봐요. 부하들이 할머니를 찾고 나서도 여전히 어리석은 척을 하고 있었지 뭐에요."배현우는 그제야 미소를 지었다."할머니께서 저를 두눈으로 직접 보고서야 그걸 꺼냈어요."배현우의 말을 듣고 나니 할머니를 존경하지 않을 수 없었다.그러던 중 배현우가 나를 쳐다보더니 나의 지친 모습을 보고서야 손을 들어 대문을 열어 장벽들이 천천히 열리는 걸 볼 수 있었다.차는 왔던 길을 따라 경원으로 다시 돌아갔다. 벌써 자정이 되어 우리 둘은 차를 세우고 엘리베이터를 타고 위층으로 올라가 방에 돌아왔다.'우리를 배신한 소인이 두 집안을 풍비박산 시켰다니. 오늘 밤 일어난 모든 일들은 듣고도 믿기지 않았다.'간단히 씻고 걱정 가득채로 침대에 누워 있었다. 태어나서 얼굴도 한번 못 본 아버지가 어디 있는지, 밥은 먹고 다니는지를 걱정해 발 뻗고 자지 못했다. '한강인이랑 한걸은 이미 잡혔는데, 우리 아버지는? 그의 처지는 어떤지.''한씨 부자가 그저 아버지를 인질로 삼아 그들의 안전을 확보하려 했다면 왜 배현우는 그곳의 환경이 복잡하다고 했을가.''이유는 간단하다. 누군가 아버지를 미끼로 삼으려 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누구를 보고 싶으려는 걸가?''배현우? 아니면 배유정?'생각할수록 더욱 걱정이 됬다.아버지의 이번생은 이미 충분히 힘들다.어머니랑 서로
나는 걱정스레 배현우의 얼굴을 바라보았다.배현우는 미간을 살짝 찌푸리더니 계속 말했다.“후에 목격자 어르신을 찾고서 한강인을 자세히 조사하니 한강인은 이 모든 것이 일어난 뒤에야 천우 그룹을 떠난 거였어요. 지아 씨도 알잖아요. 그때 당시 천우 그룹은 아직 배유정 손에 있었어요.”“현우 씨의 말은 한강인은 배유정 과도 사이가 틀어졌단 말인가요?”나는 추측하며 물었다.“우리가 조사할 때 이상한 단서 하나가 나왔어요. 한동안 배유정도 한강인을 찾았고 심지어 한강인에 대한 추살령도 내렸어요! 참 이상해요. 배유정은 왜 한강인을 죽이라고 지령을 내린 걸까요?”“이유는 하나뿐이죠. 즉 한강인이 분명 무엇을 알아냈거나? 아니면 어떤 일에 참여하였거나?”나는 대답했다.배현우는 고개를 끄덕이었다.“진백이 죽임을 당했듯이 이 안에는 분명 남들한테 들키면 안 되는 비밀이 있는 거겠죠. 우리는 이 단서를 따라 계속 추적해 보니 한강인의 혐의가 점점 더 드러나더군요. 그리고 그의 아들 한결도 같이 도망쳤어요.”“그러고 보니 이 안에는 분명히 또 다른 요소가 있겠네요!”나는 사색에 잠겼다.“그래서 우리는 추측했죠. 한강인은 확실히 이 사건이랑 연관이 있고 둘이 도주하는 과정에 서로 연락하는 빈도를 보아서 부자 둘은 서로 다른 곳에 있는 것으로 판단했어요.”“그리고 한강인이 도망 다니는 그 시기에 그의 모친이랑 누나 모두 영문도 모른 채 실종되었어요. 지금 보니 그분들은 아마 이미 이 세상을 떠난 것 같네요. 이 때문에 한강인은 고두리에 놀란 새가 돼서 끊임없이 도망치며, 이 또한 한강인이 지금의 상태로 되게 한 원인인 것 같아요. 사실 한강인은 원래 지금의 모양이 아니거든요.”배현우의 말을 듣자 나는 저도 모르게 아까 보았던 한강인의 모습이 떠올랐다. 한강인은 극도의 공포 속에서 엄청 정신적 괴롭힘을 당하고 있는 게 분명했다. 아니면 다른 기타 방식으로 정신을 잃지 않게 버티고 있거나. 그렇지 않으면 사람이 저렇게 말라죽을 정도일 리가 없다.“그리고 한 가
배현우는 나를 한눈 보더니 고개를 끄덕이었다.“맞아요. 제 씨 어머니가 얼마나 총명한지 그 누구도 생각지 못했어요. 제 씨 어머니는 책 속에 카메라를 숨겨두고 만약 사고가 난다면 여기에 있는 이 물건을 숨겨두었다가 훗날 믿음직스러운 사람에게 주라고 할머니한테만 똑똑히 당부해 두셨어요!”나는 코가 찡긋거리더니 눈에는 눈물이 핑 돌았다.“보아하니 제 씨 어머니는 분명 위험이 닥칠 거라는 것을 미리 예감했던 거네요!”배현우는 안색이 조금 어두워지더니 한참 동안 침묵을 지키다가 갑자기 잠긴 목소리로 말했다.“제 씨 어머니는 만약 자신한테 무슨 일이 생기면 할머니더러 애들을 데리고 허씨 가문으로 가라고 할머니한테 당부하셨어요.”나는 끝내 참지 못하고 눈물을 흘렸고 코를 훌쩍이었다.배현우는 자기 손을 꽉 움켜쥐며 괴로운 표정을 지었다.“참 생각지도 못한 게 모든 것이 제 씨 어머니의 예상대로 일어났고 감춰둔 카메라에 모든 것이 담겼어요! 근데 할머니는 제 씨 어머니의 뜻대로 우리 둘을 순리롭게 허씨 가문으로 데려가지 못했어요.”“급한 나머지 할머니는 고씨 가문에만 소식을 전했고 그마저도 나쁜 놈들보다 동작이 빠르지 못해 그들이 지아 씨를 데려간 후였어요. 그래서 저만 고씨 가문에서 데려갔어요.”나는 눈물을 닦아내면서 그때 당시의 내가 얼마나 힘없고 무력했을지 상상조차 할 수가 없었다. 갑작스럽게 어머니가 돌아가신 데다가 배현우와 억지로 갈라지게 되었다.배현우는 내 손을 꽉 잡으며 손에 힘을 주었다.나도 배현우 지금의 심정을 완전히 이해할 수 있다. 그날 배현우는 눈앞에서 억지로 끌려 나가는 나를 보기만 하고 반항할 수도 없는 그런 무능력함은 아마 배현우한테 평생 잊지 못할 아픔이 되었을 것이다.차 안은 갑자기 조용해졌고 자동차가 앞으로 가는 소리밖에 안 들렸다.한참 뒤에야, 배현우의 잠긴 목소리가 다시 울려 퍼졌다.“이런 것들을 찾은 후에야 비행기 추락 사고가 떠올랐고 이로써 모든 것들이 비로소 한강인을 추측하게 했으며 그 이후에 우리는 한강인
이 소식은 그야말로 나를 입이 떡 벌어지게 했다. ‘나를 데려간 게 어떻게 그 사람이지?’“맞아요. 우리는 유일한 목격자를 찾았어요. 그 당시 그쪽 산에서 약재를 캐는 어르신이신데 그때는 중년인이셨어요. 하늘의 뜻인지, 우리가 수년을 찾아 헤맨 끝에야 비로소 이 참극의 전부를 직접 목격한 증인을 찾아냈어요.”“그 어르신 정말로 전체 과정을 모두 목격하셨나요?”나는 믿어지지가 않았다. 배현우 얘네가 얼마나 큰 공을 들여야 바다에서 바늘 건지는 것 같은 일을, 그것도 몇 년이 지났는데도 당시의 목격자를 찾아낸 걸까.“어르신의 말로는, 당시 자기는 산 위에서 내려오는 도중에 잠시 계단에서 쉬고 있었는데 그러다가 아래 도로에서 일어나는 광경을 목격했다고 해요. 알다시피 외국에서는 약재를 캐는 일은 엄청 드물어요.”배현우는 엄청 뿌듯한 말투로 말했다.“우리 형제들이 엄청나게 고생 많았어요. 십수 년을 하루같이 귀찮음을 마다하고 사건 지역을 탐방하러 다니면서 일말의 흔적도 소홀히 하지 않았어요.”나도 믿어지지 않아 입을 열었다.“정말 쉽지 않은 일이었어요. 참 노고가 많았어요.”“어르신이 말씀하기를 당시의 장면은 엄청 아슬아슬했대요. 부딪힌 차는 거의 굴러떨어지기에 일보 직전이었는데 후에 폭발했대요. 어르신은 우리의 차가 폭발한 뒤 키 크고 마른 한 남자가 차에서 내리는 걸 똑똑히 봤다고 해요. 그리고 그 남자는 길 왼쪽의 언덕 아래로 달려가 무언가를 찾았대요.”배현우는 그때 당시의 장면을 묘사하였다. 나는 머릿속으로 그때 당시의 상황을 필사적으로 상상해 내려고 하니 머리가 또 아파 났지만, 배현우가 말을 멈출까 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당시에 일어난 이 모든 것, 전부 나한테는 엄청난 매력이었다. 나는 지금 내가 찾아낸 산산조각 난 퍼즐들을 하루빨리 제 위치에 맞춰서 하나의 완전한 그림을 만들어 내고 싶었으며 그때 당시에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는지 기억을 되찾고 싶었다.그 뒤로 난 어떻게 Z 국의 만덕동에서 떠돌게 되었고 또 어떻게 지금의 한지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