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지유는 어머니로서 아이의 몸에 칼이 닿는 걸 보고 있을 수 없었다. 그녀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수술실 못 들어가. 나... 이현 씨, 나 진짜 무서워...”“알아. 이해해. 하지만 지유야, 별이는 이미 충분히 고통을 겪었어. 만분의 일 확률이 별이한테 일어나지는 않을 거야. 아버지의 기술을 믿어보자, 응?”“그래, 율아. 나도 있잖아. 내가 곁에서 도울게.”인명진은 그들이 서로 껴안고 있는 모습을 보며 마음이 아팠지만, 그래도 온지유가 신경 쓰였다. 그는 별이의 수술이 무사히 진행되도록 지켜줄 것이다.온지유의 눈가가 뜨거워졌다. 중독 사건 이후부터 지금까지 인명진은 그녀 곁에 늘 있어 주었다. 그건 정말로 감사하게 생각했다.온지유는 여이현의 품에서 벗어나며 말했다.“나 잠깐 명진 씨랑 얘기하고 싶어.”“그럼 난 별이를 보러 갈게.”여이현은 온지유의 머리를 다정하게 쓰다듬었다. 원래는 온지유에게 입맞춤을 하고 싶었지만, 인명진이 있기에 그러지 않았다.그와 온지유에게는 앞으로 많은 시간이 남아있었다. 그들은 앞으로 얼마든지 가까이할 수 있었다.인명진이 그들의 친구라는 것을 고려해, 여이현은 친구 앞에서 굳이 그들이 연인임을 과시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여이현이 자리를 뜨자, 온지유는 인명진을 바라봤다. 인명진은 온지유를 따라 함께 걸었다. 잠시 침묵을 지키던 온지유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명진 씨, 이렇게 오랜 시간 동안 제 곁에 있어 줘서 정말 고마워요. 명진 씨는 참 좋은 사람이에요. 그리고 명진 씨 마음 이해해요. 하지만 말해주고 싶은 게 있어요. 자만하는 건 아니고, 명진 씨를 위해서 하는 말이에요. 명진 씨는 아직 젊잖아요. 혜주 언니조차도 짝을 찾았는데, 명진 씨가 평생 혼자일 수는 없지 않겠어요?”인명진은 온지유가 자신을 붙잡은 이유가 설득하기 위해서일 줄은 전혀 생각지 못했다.그의 생각은 이랬다. 만약 남은 인생을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할 수 없다면, 차라리 혼자 사는 것이 나았다. 사랑하지 않는 사람과 함께하는
나아가 사랑하는 사람이 해준 소개팅이라면 도무지 받아들일 수 없었다. 지옥에 떨어지는 것도 이것처럼 고통스럽지 않을 것이다.“미안해요. 저는 명진 씨가 잘 살길 바라는 마음에...”“알아.”인명진은 부드럽게 웃으며 온지유의 말을 끊었다. 그의 부드러운 눈빛은 조용히 온지유에게 향해 있었다.“율아, 내가 한 번 안아봐도 될까?”이건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하는 말일 것이다.별이의 골수 이식이 성공적으로 끝나고 회복하면, 신무열과 법로는 온지유를 위해 가족 상봉 파티를 준비할 예정이다. 온지유는 Y국에 오래 머무르지 않고 여이현과 함께 경성에 돌아갈 계획이었다.인명진은 이미 S국에 자리 잡고 있었다. 만약 의원을 닫고 경성에 돌아간다면 그가 온지유에 대한 마음이 모두에게 드러날 게 뻔했다.온지유와 여이현은 그런 것에 개의치 않았지만, 다른 사람들은 달리 생각할 수 있었다. 그는 자신의 평판이 나빠지는 것은 상관없었지만, 온지유가 그런 오해를 받는 건 원치 않았다.온지유는 말없이 인명진을 껴안았다. 인명진은 조심스럽게 그녀를 안아주며 말했다.“너랑 여이현 씨가 결혼식을 올리면 내가 축의금 많이 줄게. 여이현 씨는 친구가 많아서 내가 굳이 필요 없고, 너도 혜주랑 친구들이 있으니...”“명진 씨는 제 가족이에요.”온지유의 이 한마디는 인명진의 위치를 인정해 주는 말이었다.인명진은 온지유의 행복한 결말을 기쁘게 여겼다. 하지만 동시에 마음속 깊은 곳에는 쓸쓸함이 자리 잡았다. 온지유와의 관계는 이제 여기까지였다....별이의 수술은 오전 9시로 예정되었다.그날은 날씨가 좋았다. 법로와 인명진은 함께 수술실로 들어갔다. 온지유, 여이현, 신무열, 강서현, 그리고 요한까지 모두 그 자리에 있었다. 심지어 하 장로까지 찾아왔다.하 장로는 온지유가 잘 기억하고 있는 인물이었다. 예전에 노승아가 온지유를 해치려 했을 때 그녀를 구해준 사람이 바로 하 장로였다. 온지유와 여이현이 이곳에 머무는 동안 하 장로가 모습을 드러낸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하 장
검사 결과가 나오기 전, 그리고 법로가 수술을 끝내기 전, 아무도 하 장로를 건드릴 수 없었다.여이현은 온지유의 손을 잡고 말했다.“걱정하지 마. 내가 네 곁에 함께 있을게.”“응.”여이현이 이런 말을 하지 않는다고 해도 온지유는 함께 있어 주리라는 것을 알았다.장장 3시간이 지난 후 실험실의 문이 열렸다. 법로가 먼저 나오고 인명진이 별이와 함께 뒤따랐다. 침대에 누워 있는 별이의 안색은 아주 창백했다.“어떻게 됐어요?”온지유는 풀린 다리로 성큼성큼 걸어가서 물었다.“수술은 성공적이야. 별이도 마취가 풀리면 곧 깨어날 거야. 당분간 관찰이 필요하기는 하지만 나쁜 건 아니니 걱정하지 마. 특별한 이상이 없으면 이후에는 정상적인 생활을 할 수 있어.”온지유는 기쁨을 참지 못하고 눈물을 흘렸다.“정말 다행이에요!”별이도 드디어 정상적인 삶을 살 수 있게 되었다. 이 순간 온지유의 눈에는 오직 별이만 보였다.그러나 신무열은 여전히 하 장로의 일에 신경 쓰고 있었다. 바로 이때 요한이 검사 결과를 보고했다.“도련님, 평안 부적에 들어 있던 가루의 검사 결과가 나왔습니다. 위급할 때 생명을 구할 수 있는 약이었고, 복용하지 않고 장기간 몸에 지니고 있으면 심신을 안정시키고 기력을 보충하는 효과가 있습니다.”그제야 하 장로가 선의로 부적을 준 것이 분명해졌다.신무열은 즉시 요한에게 지시했다.“빨리 장로님 주변에 배치된 사람들을 철수시켜.”“알겠습니다.”요한은 곧바로 명령을 따랐다.법로는 이 짧은 대화에서 모든 상황을 파악했다. 하 장로는 그에게 충성을 다한 인물이었지만, 그도 이제 온지유와 별이의 안전을 최우선으로 생각했다.그는 만족스러운 듯 말했다.“신중하게 대응하는 게 맞지. 난 너무 지쳤어. 앞으로 Y국은 네게 맡기마.”그는 벽에 기대어 긴 한숨을 내쉬었다. 별이를 구하기 위해 그는 실험실에만 매달려서 바쁘게 움직였다. 약을 시험하고 밤새 잠을 이루지 않은 날이 수두룩했다. 이제야 비로소 그는 마음 편히 쉴 수 있게 되었다.
온지유가 도착했을 때 법로는 침대에 누워 있었다. 인명진은 빠르게 검사를 진행하는 중이었다.사실 인명진이 오기 전부터 신무열이 부른 사람이 검사하고 있었다. 법로는 과로로 쓰러졌다. 자신의 몸으로 약 반응을 실험한 탓에 많이 약해진 것이 문제였다.수많은 사람 중에서도 신무열은 인명진을 가장 믿었다. 인명진은 단번에 법로가 별이를 치료하느라 과로한 것을 알아챘다. 그래서인지 약간의 존경심이 생겨났다.법로가 온지유의 아이를 위해 이토록 헌신할 수 있다는 사실은, 그가 진심으로 온지유를 아끼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또한 진심으로 과거의 잘못을 보상하려고 한다는 증거였다.인명진은 즉시 약을 조제하려고 했지만, 온지유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그를 붙잡으며 물었다.“명진 씨. 아버지, 우리 아버지 상태는 어떤가요?”온지유의 입에서 나온 아버지라는 단어는 마치 마법처럼 병상에 누워 있던 법로의 귀에 닿았다. 그는 천천히 눈을 뜨며 온지유가 바로 앞에 서 있는 것을 보고 눈시울을 붉혔다.“율아, 너 방금 날 아버지라고 부른 거야?”법로의 목소리는 느리고 걸걸했다. 말을 마친 그는 감정에 휩싸여 울음을 터트렸다.“네.”온지유는 더 이상 부정할 이유가 없었다.그 순간 신무열이 인명진에게 신호를 보냈다. 인명진은 그 뜻을 알아차리고 말했다.“법로 님은 과로로 몸이 많이 쇠약해진 상태입니다. 약물 실험 때문에 신체가 많이 약해져서, 당분간은 안정이 필요합니다.”온지유는 더 이상 눈물을 참을 수 없었다. 참아왔던 눈물이 홍수처럼 쏟아져 내렸다. 법로가 그녀를 위해 이 정도까지 희생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아버지라고 부르지조차 않았던 것이다.신무열의 말대로 법로는 과거에 잔혹하고 무자비한 사람이었다. 하지만 온지유에게는 항상 좋은 아버지였다. 그리고 지난 5년 동안, Y국은 많은 변화를 겪고 있었다. 법로 역시도 변했다.“아버지.”온지유는 소리 내어 울음을 터트렸다.법로는 온지유를 품에 안으며 말했다. 이 순간, 모든 고생이 보상받는 것 같았고,
점점 더 많은 사람이 의견을 발표했다. 법로는 말없이 침묵할 뿐이었다.이때 신무열이 나서서 말했다.“Y국 수령은 태초부터 세습제였습니다. 수령이 되고 싶다면 그에 해당하는 능력을 보여주세요.”신무열은 차가운 눈빛으로 사람들을 훑어봤다. 이런 상황에서 나설 수 있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그럼 저 아가씨는 무슨 능력이 있는데요?”“제 기억이 맞다면 곁에 있는 분은 화국의 군인이었죠? S국에서 찾으러 오는 사람도 있었죠. 지금은 그냥 S국 사람 아닌가요?”“이런 사람들을 우리나라에 남겨둔다면 나라를 멸망으로 이끌게 될 것이에요!”“맞아요! 이곳에 남는 걸 허락할 수 없어요!”신무열은 분노에 찬 목소리로 외쳤다.“지금 제가 Y국의 수장이에요. 쫓아내고자 하는 사람은 쫓아낼 수도 있다는 말이죠. 불만이 있는 사람은 나가도 좋아요”Y국에는 많은 사람들이 있었다. 이들이 떠난다고 해도 대신할 사람을 충분히 길러낼 수 있었다. 어떤 일이 있어도 그는 온지유에 대한 모욕을 용납할 수 없었다. 온지유의 위치는 누구도 범할 수 없는 것이다.그때 법로가 별이의 손을 잡고 무대 앞으로 나섰다.“지유는 내 딸이자, 나의 율이다. 이전에 노 장로가 데려온 가짜를 받아들일 수 있었다면, 내 친딸을 받아들이지 않는 이유는 무엇인가?”법로는 냉정하게 말을 이어갔다.“무열의 말대로 우리를 모욕하는 사람을 남겨두고 싶지는 않다. 떠나지 않겠다면, 쓸데없는 소리를 하지 마라. 별이는 내 외손자고, 지유는 내 딸이며, 여이현은 내 사위다. 만약 그들이 Y국 안에서 조금이라도 해를 입는다면, 그 사람을 반드시 찾아내어 천벌을 내릴 것이다!”법로의 단어 하나하나에는 차가운 위엄이 담겨 있었고 얼굴에는 엄숙함이 서려 있었다. 그는 온지유와 그녀의 가족을 인정하고 지키겠다는 의지를 분명히 했다. 특히 여이현에 대해서도 말이다.그가 이전에 여이현과 이야기를 나눈 이유는 그의 현재 신분 때문에 온지유가 상처받을까 염려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온지유가 그렇게도 확고하게 여이현 곁에
이 모든 건 그녀와 여이현의 결정이었다.신무열은 온지유의 자신감과 굳건함에 결코 말리지 못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하지만 언제나 늘 그랬듯이 온지유의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주기로 했다.“지유야, 여긴 언제든지 와도 돼. 전체 마을을 관리하고 싶다면 우두머리 자리까지 너한테 줄 수 있어. 그리고 도움이 필요하면 언제든지 나한테 전화해. 내가 최선을 다해 도와줄게.”재력을 따져보자면 여이현도 부족하지 않았고, 온지유도 어느정도 모아둔 재산이 있었다.권력이라면... 여씨 집안의 권력은 굳이 말하지 않아도 알았다. 떠나기 전 모든 지분을 여희영에게 넘겨준 것 같아도 사실 여희영의 것도 아니었다.지금은 여희영 명의인 지분을 돌아가서 다시 받아 여이현의 장사 머리까지 더하면 충분히 비즈니스 제국을 만들수 있었다.물질적으로든 환경 면으로든 부족한 것이 없었다.“너...”신무열은 결국 깊은 한숨을 내쉬고 말았다.온지유한테는 꼼짝하지 못했지만 여이현한테는 할 말을 해야겠다고 생각했다.“전에 있었던 일은 저도 다 들었어요. 제 동생이 이현 씨 곁을 7년이나 지킨 것도 모자라 5년이나 더 기다렸더라고요. Y 국에 남아있을 생각이 없다면 경성으로 돌아가자마자 결혼식부터 올리세요. 제 동생을 슬프게 하는 날엔 절대 가만두지 않을 거예요!”신무열의 눈빛은 순간 예리해졌다.여이현이 정말 잘못을 저지른다면 그 어떠한 대가를 치러서라도 그에게 본때를 보여주리라 다짐했다.“당연히 결혼식을 올려야죠.”여이현은 그윽한 눈빛으로 온지유를 쳐다보았다.정말 온지유한테 미안한 일들이 많았다. 전에는 자기감정을 헤아리지 못했고, 나중에는 죽은 지 5년이나 되었다고 오해하게 했으니 죽어도 쌌다.“그러면 돌아가는 대로 준비해 봐. 날짜가 정해지면 알려주고. 아버지랑 함께 참석할 거니까.”“알았어요.”여이현과 온지유가 동시에 대답했다.이 둘은 내일 경성으로 돌아가기로 했다.옷 몇벌 빼고는 별로 챙길 물건도 없었다.이때, 법로가 오면서 온지유에게 은행카드 한장을 건넸다.“
별이는 이곳에 있으면 좋은 일만 있었지 나쁜 일은 없을 것이 뻔했다.“네가 무슨 생각을 하고있는지 알아. 별이를 곁에 두면 브람이 너희가 정말 방심하고 있다고 생각할 수 있겠지. 그런데 뛰는 놈 위에 나는 놈이 있는 거야.”법로가 잠시 후 나지막하게 말했다.“절대 잊지 마. 브람은 S 국 대통령인 거. 만약 능력이 없다면 그 위치까지 올라갈수 있었겠어?”온지유는 잊고 있었던 사실에 결국 침묵하고 말았다.“그러면 별이를 여기에 남겨두고 저랑 이현 씨만 먼저 가볼게요.”“안전해지면 다시 데려가. 지유야, 난 너한테 못 해준 거 보상해 주고 싶어. 걱정하지 마. 내가 죽는 한이 있더라도 별이 안전은 꼭 책임질 거니까.”법로는 중저음의 목소리로 엄숙하게 말했다.이에 온지유는 한숨을 크게 들이마셨다.그녀는 법로가 별이를 위해 한 노력을 잘 알고 있었다.“아버지...”온지유가 법로를 안았고, 법로는 그녀의 등을 토닥토닥해 주었다.“지유야, 사실 Y 국에 남아있는 것이 가장 좋은 선택일 수도 있어. 그런데 네가 가겠다고 하는데 억지로 잡지도 못하겠어. 꼭 무사해야 해. 난 너한테 무슨 일이 일어나면 감당할 자신이 없어...”법로는 울먹거리기 시작했다.전에 온지유가 종군 기자를 하겠다고 했을 때도 극구 반대했지만 결국 신무열의 설득에 넘어가고 말았다.온지유는 가시가 돋친 장미처럼 결정한 일은 아무도 말리지 못했다. 무엇을 하기로 했으면 무조건 행동으로 옮겨야 했다.법로는 그래도 마음이 안 놓이는지 온지유를 보호하라고 옆에 많은 사람을 붙여놓았다. 화국 부대에 있을 때는 신무열이 있어서 잠깐 방심한 적이 있었다. 화국 범위 내에만 있으면 절대적으로 안전하다고 생각했는데 브람의 팔이 그렇게 많이 뻗어있을 줄 몰랐다.노석명이 온지유를 데려왔을 때 진짜 딸인 줄 알고 저격술, 호신술을 가르쳐주면서 그동안 해주지 못했던 것을 보상해 주고 싶어 더없이 사랑을 쏟아주기도 하고, 엄격하게 대하기도 했다.그런데 나중에 가짜라는 사실을 알았을 때 첫 반응은 화
“그리고... 아빠!”이별은 원래 슬픈 것이었다. 그런데 별이의 이런 모습을 보고 있자니 온지유와 여이현은 가슴에 비수가 날아와 꽂힌 듯이 아파져 왔다.“별이 데리러 꼭 올 거야.”온지유와 여이현은 바로 이구동성으로 대답했다. 목이 메어와 고통스럽기 그지없었지만 어쩔 수가 없었다.그저 뒤를 돌아보지 않고 앞으로 나아갈 수밖에 없었다.별이는 떠나가는 이 둘의 모습을 보면서 울지도 않았다.이때 법로가 자상하게 물었다.“별이는 뭘 갖고 싶어? 할아버지가 뭐든지 사줄게. 나가서 놀고 싶어? 아니면 학교에 다니고 싶어?”Y 국에서는 다섯 살 된 별이 또래 아이들은 유치원을 마치고 곧 초등학생이 될 나이였다. 별이는 신체적 문제로 학교에 다닐 수 없었다.그런데 친구와 함께 노는 것을 한창 좋아할 나이였다.별이도 역시나 후자를 택했다.그는 고개를 쳐들고 기대가 가득찬 눈빛으로 법로를 쳐다보았다.“할아버지, 저... 학교 다니고 싶어요.”별이는 학교라는 두 글자를 유난히 느리게 말했다.별이가 학교 다니고 싶다는데 법로는 무조건 그의 소원을 들어주고 싶었다. 신무열은 전에 Y 국 북부지역에서 선생님을 했던 적이 있어 별이를 그에게 맡기는 것이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법로는 이참에 바로 실천에 옮기기로 했다.신무열은 별이가 학교 다니고 싶어 한다는 발에 더없이 기분이 좋았다. 일대일로 별이를 가르쳐주겠다고 하자 법로는 반대표를 던졌다.“별이가 학교 다니고 싶다잖아. 그러면 진짜로 학교에 가야지. 아니면 내가 왜 여기까지 데려왔겠어.”신무열이 전에 선생님을 해봤기 때문에 아는 사람이 많겠다 싶어 데려왔는데 일대일로 가르쳐주겠다고 할 줄 몰랐다.“저도 알아요. 그래도 미리 적응시키고 나중에...”“나중에 뭐? 별이가 얼마나 똑똑한데. 배우면 바로 알 텐데 미리 배워둘 필요가 뭐가 있겠어.”신무열이 아직 말을 끝내지도 않았는데 법로가 버럭 화를 냈다.신무열 역시 법로와 같은 생각이긴 했지만 문제는 별이가 다른 아이와는 달랐다.큰 수술을 받아
하지만 감동보다는 오히려 속이 울렁거렸다. 속이 울렁거리는 느낌에 문지원은 당장 얼굴이 일그러지며 화장실로 달려갔다. 지석훈도 뒤따라 들어오며 물었다.“속이 안 좋아?”“그렇진 않은 것 같아요. 요즘 세 끼 식사도 꽤 규칙적으로 하고 날것 이거나 차갑거나 매운 음식도 먹지 않았는데...”문지원은 배를 움켜쥐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다 문득 한 가지 가능성이 떠올랐다.지석훈도 그녀와 같은 생각을 한 듯 방으로 가서 임신 테스트기를 가져왔다.문지원은 놀라며 물었다.“언제 산 거예요?”지석훈은 당연하다는 듯이 말했다.“만일의 사태에 대비해서.”문지원은 아무 말이 없었다.5분 후, 그녀는 복잡한 얼굴로 다시 나왔다. 한 손은 여전히 배 위에 올려져 있었고 눈에는 믿을 수 없다는 기색이 역력했다.정말 임신한 것이다!그녀와 지석훈이 결혼한 지 겨우 3개월밖에 안 되었는데 이렇게 빨리 임신하다니.지석훈은 오히려 태연해 보였다. 하지만 입가에 감출 수 없는 미소를 보면 그 역시 겉모습처럼 평온하지 않고 흥분을 억누르고 있는 게 분명했다.“정말 임신한 거예요?”문지원은 아직 믿기지 않는 듯 물었다. 왜냐하면, 그녀는 이번 달 초에 생리가 끝났기 때문이다.“아마 생리가 끝난 후 며칠 사이일 거야.”지석훈의 목소리는 문지원에게 그날의 기억을 떠올리게 했다. 당시의 기억을 떠올리니 그녀의 귀는 뜨겁게 달아올랐다. 결국, 그녀는 병원에 가보기로 했다. 임신 테스트기는 가끔 틀릴 수도 있으니 이런 일은 직접 검사를 받아보고 확인해야 마음을 놓을 수 있을 것이다.그리고 그녀는 손에 든 검사지를 보고 완전히 할 말을 잃었다.의사는 마침 지석훈과 알고 지내던 사람이었다.“축하합니다, 지 원장님. 부인께서 임신 2주 차입니다.”“감사합니다.”지석훈은 침착하게 그녀를 부축하며 밖으로 나갔다.병원 진료실을 막 나오자마자 지석훈은 문지원을 품에 안았다.“너무 좋아. 우리 아이가 생겼어.”문지원은 남자가 미세하게 떨리는 모습을 보며 멍하
물론 손에 있는 일을 무턱대고 모두 남에게 맡기는 것은 너무 과한 부담을 주는 일이다.문지원은 비서를 사무실로 불렀다.“올해 25살이죠?”비서는 잠시 멍한 표정을 지었다.그녀의 나이는 모두가 다 아는데 문지원 회장이 갑자기 이 얘기를 꺼낸다는 것은 혹시 소개팅을 시켜주려는 건가 싶은 생각이 들었다.비서는 고마웠지만 거절하며 말했다.“문 사장님, 저는 아직 젊어서 당장은 결혼할 생각이 없습니다.”“전 당신더러 결혼하라고 하는게 아니에요.”문지원은 펜으로 탁자를 두드리며 말했다.“그냥 평소에 잡다한 일들을 맡기고 싶어서요. 확인이 필요한 문서들은 평소에 굳이 내게 제출하지 않아도 돼요.”비서는 그 뜻을 이해했다.이건 곧 그녀에게 승진과 급여 인상을 주려는 것이다. 문지원이 그녀의 의견을 확인한 후 급여를 조금 올려줬고 비서에게 몇 명의 적합한 인재를 추가로 모집해서 예비 인력으로 두라고 지시했다.“평소에 내가 처리하지 못한 일들을 대신 처리해주고 만약 문제가 생기면 그때마다 보고하면 돼요.”비서는 한숨을 쉬며 안도의 표정을 지었다. 그녀 혼자서 이렇게 많은 일을 하지 않아도 되어 다행이었다.일정이 정리되자 문지원은 업무에서 상당 부분 해방되었다.예전에는 아침부터 저녁까지 바쁘게 일하다 보면 퇴근 시간이 되어도 일이 끝나지 않고 긴급 통지가 오면 또 회의를 위해 야근을 해야 했다.이제는 오후 4시 반쯤이면 일을 마치고 퇴근할 수 있게 된 것이다.비서가 몇 명을 더 찾아서 양성해 두었기에 업무가 적절히 분배되어 모두 바빠 죽을 정도가 아니라 적당히 딱 맞는 분량을 처리할 수 있었다.그 덕에 문지원은 지석훈과 함께 결혼 후의 삶을 더욱 즐길 수 있게 되었다.지석훈도 이에 매우 만족해했다.“널 주려고 선물을 챙겨왔어. 들어가서 한번 봐.”그가 집 문 앞에 다가서더니 걸음을 멈췄다.문지원은 열쇠로 문을 열고 들어가 보니 안은 어두컴컴했다.“뭐 숨겨놨어요? 아직 불도 켜지 않았네요, 수상하게.”탁! 하며 불이 켜지자 거실의 모든
문지원은 이 주제가 다소 위험하다고 느꼈다. 비록 그녀의 아버지가 그녀에게 물어본 적은 없지만 그렇다고 자신과 배석훈이 결혼한 후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에 대해 말할 필요도 없다고 생각했다. 돼지고기를 먹어보지 않았다고 해도 돼지가 뛰어다니 것을 본 적은 있을 것이다. 문지원은 그러면서도 반쯤 빚어놓은 만두를 내려놓으며 말했다. “저, 화장실 좀 다녀올게요.”이에 지석훈의 어머니가 그녀의 손을 잡았다. “너희들도 이제 나이가 들었으니 아이를 가져야지. 평소에 좀 더 노력해야 한단다.”문지원은 잔소리를 듣고 나서 나오니 기운이 다 빠져있었다.시어머니는 문지원에게 정말 잘해주었다. 거의 마음을 쏟아붓는 수준이었다. 비록 문지원의 집안 사정이 좋은 것을 알면서도 혼수 때 오랜 세월 모은 돈으로 집 한 채를 사서 선물해 주었다. 사실 지석훈도 자기 집이 있었지만, 시어머니는 선물하고 싶다고 하셨다. “너희 집도 너희의 것이지만, 이건 내가 어른으로서 선물하는 거란다.”게다가 그 집에는 문지원의 이름도 함께 올려져 있었다.그래서 시어머니의 출산 독촉에도 문지원은 어쩔 수 없이 버텨야만 했다. 다행히도 시어머니는 어린 이들에게 엄격하게 구는 편은 아니었다. 만두를 빚을 때 한 번 그런 말을 했고 또 떠나면서도 지석훈을 불러 몇 마디 잔소리했다. 문지원은 그 모자간의 대화를 듣지 못했다.돌아가는 길에 문지원은 약간 궁금해져 지석훈에게 물었다.“나갈 때 어머니께서 뭐라고 하셨어요?”“정말 알고 싶어?”“네.”그러자 지석훈은 문지원의 머리를 숙이게 한 후 그녀의 흩어진 머리칼을 살며시 넘겨주며 귀 옆에서 낮게 속삭였다.“우리 아이를 빨리 낳으라고 하셨어.”남자의 낮고 진한 목소리는 얼굴을 붉히고 심장을 뛰게 만드는 약보다도 중독성이 강해 문지원의 귀가 금세 붉어지고 말았다.저녁이 되자 지석훈은 몸소 행동으로 보여주기 시작했다. 한 손으로 문지원의 머리를 받치고 이마를 맞대며 낮은 숨소리를 내쉬었다. 문지원은 마치 파도 속에 잠긴 것
그 눈빛 속에서 조용히 터져 나오는 그 소유욕. 마치 옛 시대의 군벌과 그의 부인 같았다. 그리고 사진작가는 우연히 그 장면을 목격한 운 없는 사람이 되어 몰래 촬영을 하고 있었다. 사진작가는 자신의 상상에 자극받아 목소리가 떨렸다.“지석훈 씨, 고개를 들어 카메라를 봐주세요.”지석훈은 날카로운 눈빛으로 사진작가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사진작가는 재빨리 셔터를 눌렀다. 그 후에도 그들은 여러 세트의 사진을 찍었고 찍은 사진들은 모두 문지원에게 하나하나 보여주었다. 문지원은 모든 사진에 다 만족했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마음에 든 것은 민국 시대 주제의 사진이었다.“대략 며칠 안에 나오나요?” 그녀가 물었다.사진작가는 답했다.“빠르면 이삼 일정도 걸릴 겁니다. 그때 완성된 사진들을 택배로 보내드리겠습니다. 그런데 제가 개인적인 부탁이 하나 있는데 혹시 두 분께서 응해주실 수 있을지 모르겠네요.”“바로 아까 찍은 사진 중 몇 장이 제가 개인적으로 아주 마음에 들어서 사진관 벽에 걸어두고 싶습니다.”문지원은 사진관에 들어올 때 봤던 사진 벽이 생각났다.“그 벽에 걸어두시겠다는 건가요?”“네.”사진작가는 그 벽은 사진관의 특별한 기념 및 홍보 방법의 하나라고 설명했다. 잘 나온 사진들은 사진 주인에게 동의를 구한 뒤 동의하면 벽에 전시한다고 한다..문지원은 옆에 있던 지석훈을 바라봤다. “저는 괜찮은데, 당신은요?” 지석훈도 아무 문제 없다고 했다.“마음대로 하도록 해.”며칠 후 문지원은 사진작가가 보내온 사진을 받아 소중히 간직했다. 하지만 그녀는 몰랐다. 그 사진관 벽에 전시된 사진들이 곧 사람들의 눈에 띄어 사진이 찍혀 인터넷에 올라간 것이다.잘생긴 남성과 아름다운 여인의 조합과 최상의 촬영 기술 덕분에 순식간에 인터넷에서 화제가 되었다.네티즌들은 저마다 아아 소리를 냈고 많은 사람이 댓글을 달았다. “마치 옛 시대의 군벌 부인 같다.”“완전 대박이다.”“3분 안에 그들의 모든 정보를 알고 싶다.” 하지만 이 모
문지원은 약간 마음이 움직였다.하지만 웨딩 촬영은 이미 여러 번 한 적이 있었다. 그때 섬에서 몇 세트 찍었고 그 후 결혼식 현장에서 또 몇 세트 찍어 셀 수 없을 정도였다.게다가 이번 촬영은 개인 예약으로 진행되었는데 이 사진관이 꽤 유명하다고 들었다.물론 사진관 이름에 걸맞게 예약은 거의 하늘의 별 따기라고 한다..이 정도면 지석훈이 얼마나 큰 노력을 들여 예약을 잡았는지 알 수 있었다. 단순히 웨딩사진만 찍는 데 사용하기에는 너무 아까웠다.하지만 문지원 역시 이런 곳에 한 번도 와본 적이 없었기에 무엇을 찍어야 할지 몰랐다.“한번 보세요. 이건 저희가 예전부터 선보였던 스타일들이에요.”사진작가는 친절하게 앨범 한 권을 꺼내 보였다.앨범에는 이전 고객들이 이곳에서 찍은 사진들이 담겨 있었는데 정말 다양한 스타일이 있었고 모두 아름다웠다.이 사진관이 만들어낸 결과물은 정말 최고였다.문지원은 그중에서도 민국 시대 주제의 사진이 눈에 들어왔다.“이렇게 찍을 수 있을까요?”사진작가는 그녀가 가리키는 사진을 한 번 살펴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네, 됩니다. 먼저 메이크업하고 옷을 갈아입으세요. 직원들이 촬영 스튜디오를 설치할게요.”옷은 사진관에서 준비한 것으로 하고 지석훈의 요구에 따라 전부 새 옷이었다.사실 문지원은 소품용 옷을 입는 것에 크게 개의치 않았다. 어쨌든 한 번 입었다가 나중에 벗으면 되는 거고 몸에 달라붙지 않아서 안에 옷을 받쳐 입을 수도 있었다.하지만 지석훈은 직업병이 발동했고 그런 건 용납할 수 없었다.결국, 문지원은 어쩔 수 없이 그의 의견을 따를 수밖에 없었다.급히 새 옷을 가져와야 했기 때문에 원래 걸리던 시간에서 15분이 더 추가되었고 메이크업 등 기타 과정도 진행해야 했다.문지원이 모든 준비를 마치고 나왔을 때는 이미 2시간이 지난 후였다.그러나 결과는 확실했다.곧은 치파오가 그녀의 아름다운 몸매를 감쌌고 문지원은 옷자락을 살짝 들어 올렸다. 마치 지난 옛 시대의 그림 속에서 걸어 나온 듯한
결혼 후 문지원은 휴가를 내서 신혼여행을 갈까 고민해 본 적이 있었다.하지만 요즘 지석훈이 거의 계속 병원에 머무르며 집에 돌아오지 않는 것을 떠올리며 본의 아니게 한숨이 나왔다. 비록 이미 익숙해졌긴 했지만 실망을 감추기는 어려웠다.비서도 그녀에게 물었다.“문 사장님, 신혼여행 가고 싶지 않으세요? 제 동창 중 한 명이 며칠 전에 결혼했는데 요즘 여기저기서 신혼여행 정보를 알아보며 준비 중이에요. 신혼여행이 없는 결혼은 반은 실패한 거랑 마찬가지라고 하더라고요.”그 말을 들은 문지원은 손에 들고 있던 서류를 제대로 볼 생각조차 들지 않았고 비서는 무언가를 눈치챈 듯했다.“그렇지 않으면... 문 사장님, 지 의사님이 일하시는 곳에 한 번 가보시는 건 어떠세요?”그녀가 머뭇거리며 물었다. 어쨌든 문지원은 요즘 정신이 산만하여 업무에 집중할 기색도 없었다.문지원은 비서의 시선 속에서 정신을 차렸다. 요 며칠 동안 집에 돌아와도 지석훈을 보지 못해 한참 혼란스러워했던 자신을 깨달으며 약간 부끄러워졌다.“그건 나중에 얘기하고 기획서 한 부 복사해 가져다주세요.”점심 무렵, 문지원은 막 일을 끝내고 밥 먹으러 가려던 찰나, 핸드폰에 지석훈의 메시지가 떴다. 같이 밥을 먹자는 메시지에 문지원은 미소를 지었다. 멀리서 이 장면을 본 직원들은 서로 눈빛을 교환하며 웃음을 터뜨렸다.문지원은 재빨리 열쇠를 챙기고 회사를 떠났다. 지석훈은 그녀를 새로 오픈한 가게로 데려갔다.식사를 마친 후 문지원은 지석훈을 바라보며 머뭇거리다가 물었다.“병원에 다시 돌아갈 거예요?”“응?”지석훈은 눈썹을 치켜들며 고의적으로 물었다. “내가 돌아가길 바라는 거야?”그 말을 들은 문지원은 순간 당황했다. 사실 그녀는 지석훈이 자신과 좀 더 많은 시간을 함께 보내주길 바랐는데 이제 막 결혼한 신혼부부임에도 불구하고 각자 업무에만 매달려 밤에야 겨우 함께 잠자리에 들 수 있는 상황이었다.하지만 수줍음이 많은 그녀는 그 마음을 솔직하게 털어놓지 못했다.지석훈은
예전에는 이런 일이 있을 때면 지석훈은 항상 선을 지켰지만 오늘 밤엔 조금 달랐다. 그는 그녀를 침실에서 욕실로 다시 침대로 옮겨가며 몸 곳곳에 뜨거운 입맞춤을 했다.다음 날 아침에 일어났을 때도 문지원은 여전히 몸속 깊이 스며든 감각이 남아 있는 것만 같았다.그리고 그녀는 예상대로 휴가를 냈고 이틀이 지나서야 회사에 다시 나왔다.회사 사람들은 이미 예상이라도 한 듯 문지원이 출근하자 하나같이 말했다.“문 사장님, 결혼 축하드려요.’문지원은 무려 사흘이나 결근했지만 다들 그 사흘 동안 무얼 했는지는 굳이 말 안 해도 짐작이 갔다.분명 부부 생활이 아주 좋았겠지, 아니었으면 일까지 내팽개치고 안 나왔을 리가 없다.문지원은 직원들의 부담스러운 시선에 얼굴을 들 수도 없어 그저 아무렇지 않은 척할 수밖에 없었다.그래도 지난번에 당한 적이 있었던 터라 문지원은 이제 출근 전에 거울 앞에서 꼼꼼히 점검했다.몸에 키스 자국이 드러나지 않는 걸 확인하고 나서야 안심하고 회사를 향했다.그렇지 않았다면 그 흔적들을 들켰을 경우 정말 얼굴을 들고 다닐 수 없었을지도 모른다.문지원이 예상치 못했던 건 며칠 지나지 않아 결혼을 축하하는 선물이 회사로 배달됐다는 것이다.문지원은 처음에 여울이 보낸 거라고 생각했지만, 물어보니 아니었다.택배 상자의 외관을 살펴봐도 발신자가 적혀 있지 않아 더욱 수상했다.“이거 가져온 사람이 누가 보낸 건지 말했어요?”문지원이 로비 직원에게 물었다.로비 직원은 고개를 저었다. “아뇨, 그냥 두고 바로 가버렸어요.”문지원은 뭔가 직감적으로 찜찜한 마음이 들어 그 택배를 챙겼고 사무실에 들어와서야 상자를 열었다.그 안에는 브로치 하나와 축하 카드 한 장이 들어 있었다.문지원은 축하 카드를 집어 들어보니 카드 위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결혼 축하해요.”글씨체는 아주 정갈하고 예뻐 여성의 필체 같았다.그녀는 곧바로 짐작이 갔다.문지원은 그 브로치를 지석훈에게 보여주자 그는 눈빛이 살짝 흔들렸지만 아무 말 없이 브로치
여울은 아직 최주하를 받아들이지 않았지만 최주하도 쉽게 포기할 생각이 없었다.문지원이 알기로 여울은 마음이 여린 사람이었고 결국 받아들이게 되는 건 시간문제일지도 몰랐다.그녀는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친구 일에 깊이 관여하는 것도 괜히 어색하고 조심스러웠다.게다가 얼마 전 지석훈이 슬쩍 귀띔하듯 말했다.“며칠 전에 여울 씨가 병원에 재검진받으러 왔는데 주하가 데리고 왔었어.”그 말을 듣고 문지원은 혀를 끌끌 찼다.평소에 말도 없고 조용하던 여울이 은근히 비밀 많은 타입이었던 모양이었다.그렇게 시간은 순식간에 흘러 어느덧 다음 달 중순이 되었다.지석훈은 아예 와인 농장을 통째로 빌려 며칠에 걸쳐 그곳을 자신이 원하는 모습으로 꾸며놓았다.결혼식을 올릴 장소는 바로 거기였다.그 와인 농장은 웬만한 호텔 못지않게 컸고 내부에는 수년간 숙성된 고급 와인들이 그대로 보관되어 있었고 결혼식 날 손님들이 오면 바로 꺼내어 대접할 수 있을 정도였다.그들은 결혼 소식을 널리 알리진 않았다.이건 문지원이 원한 방식이었다.그녀는 온 세상에 떠들썩하게 알리는 그런 결혼식보다는 가까운 가족과 친구들만 초대해서 조용히 축하받는 걸 선호했다.행복은 굳이 남들에게 증명하지 않아도 되는 것이니까.그런데 결혼식이 한창일 때 지석훈이 무대 위에서 다시 한번 프러포즈했다.해변에서 했던 프러포즈보다 훨씬 더 진지하고 진중한 분위기였다.“하고 싶은 말이 정말 많지만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어서... 예전엔 내가 사랑인 줄도 모르고 놓쳐버렸던 순간이 많아. 이제는 더 이상 놓치고 싶지 않아. 이렇게 내 곁에 있어 줘서 고마워. 앞으로 남은 인생... 너랑 함께할 수 있어서 정말 행복해.”그의 말이 끝나자 하객들 사이에서 박수 소리가 터져 나왔다.문지원은 무대 위에서 입을 손으로 가리고 눈물을 흘렸다.식이 끝날 무렵, 문지원은 멀리서 검은색 카이엔 SUV가 그녀의 친구 여울을 데리러 오는 걸 보았다.차창이 천천히 내려가자 예상대로 그 안에 앉아 있는 사람은 최주하였다
문지원은 문득 자신이 계획에 철저히 걸려들었다는 생각에 의심의 눈길을 보냈다.“처음부터 계획한 거죠?”“응.”지석훈은 미소 지으며 그녀의 입술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 사실, 그는 그녀를 향한 마음을 오래전부터 숨겨온 것이었다....해변에서의 프러포즈 이후 문지원에게 찾아온 가장 큰 변화는 손가락에 반짝이는 반지가 생겼다는 점이었다.이 반지는 지석훈이 특별히 맞춤 제작한 것이었다. 그녀는 우연히 그의 휴대폰을 보다가 두 달 전에 이미 주문이 들어가 있었다는 구매 기록을 발견하고는 깜짝 놀랐다. 그렇게 오래전부터 준비해 왔다니 감동하지 않을 수 없었다.두 사람의 결혼 소식을 접한 지석훈의 부모님은 곧바로 혼인신고부터 하라고 재촉하기 시작했다. 어느 날 문지원은 우연히 지석훈의 어머니가 그를 붙잡고 타이르는 말을 듣게 되었다.“네 아빠랑 난 애초에 너한테 기대도 안 했어. 하루가 멀다고 병원에서 살다시피 하니 너 같은 애한테 누가 시집오겠나 싶었거든. 그런데 다행히 네가 능력 있어서 지원이 같은 좋은 아이를 데려왔으니 얼른 확실히 붙잡아야지. 빨리 혼인신고부터 해. 나중에 그 아이가 너 버리고 떠나버리면 그땐 어디 가서 울어도 소용없어!”문지원은 그 대화에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몰랐다.그런데 신기한 건 지석훈이 워낙 점잖고 진지한 사람이어서 집안 분위기도 매우 조용할 줄 알았는데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는 점이었다. 아버지는 이미 퇴직해 한가로운 성격으로 매일 독서나 산책을 즐기는 조용한 스타일이었다. 어머니는 젊었을 때는 커리어 우먼이었고 호탕한 성격으로 남편에게 엄격하면서도 친화력이 강한 사람이었다.두 분 모두 차분한 듯하면서도 내면에 장난기를 숨기고 있는 아들을 낳을 것 같진 않았는데 이게 바로 유전자의 신비인가 싶었다.하지만 어머니가 그렇게 그녀를 좋아해 주는 모습에 문지원도 안심했다. 확실히 시부모님의 사랑을 받고 있다는 증거였다.한편 문지원의 아버지는 지석훈과 따로 대화를 나눈 이후부터 정확히 무슨 얘기를 했는지는 몰라도 그에 대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