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사 결과가 나오기 전, 그리고 법로가 수술을 끝내기 전, 아무도 하 장로를 건드릴 수 없었다.여이현은 온지유의 손을 잡고 말했다.“걱정하지 마. 내가 네 곁에 함께 있을게.”“응.”여이현이 이런 말을 하지 않는다고 해도 온지유는 함께 있어 주리라는 것을 알았다.장장 3시간이 지난 후 실험실의 문이 열렸다. 법로가 먼저 나오고 인명진이 별이와 함께 뒤따랐다. 침대에 누워 있는 별이의 안색은 아주 창백했다.“어떻게 됐어요?”온지유는 풀린 다리로 성큼성큼 걸어가서 물었다.“수술은 성공적이야. 별이도 마취가 풀리면 곧 깨어날 거야. 당분간 관찰이 필요하기는 하지만 나쁜 건 아니니 걱정하지 마. 특별한 이상이 없으면 이후에는 정상적인 생활을 할 수 있어.”온지유는 기쁨을 참지 못하고 눈물을 흘렸다.“정말 다행이에요!”별이도 드디어 정상적인 삶을 살 수 있게 되었다. 이 순간 온지유의 눈에는 오직 별이만 보였다.그러나 신무열은 여전히 하 장로의 일에 신경 쓰고 있었다. 바로 이때 요한이 검사 결과를 보고했다.“도련님, 평안 부적에 들어 있던 가루의 검사 결과가 나왔습니다. 위급할 때 생명을 구할 수 있는 약이었고, 복용하지 않고 장기간 몸에 지니고 있으면 심신을 안정시키고 기력을 보충하는 효과가 있습니다.”그제야 하 장로가 선의로 부적을 준 것이 분명해졌다.신무열은 즉시 요한에게 지시했다.“빨리 장로님 주변에 배치된 사람들을 철수시켜.”“알겠습니다.”요한은 곧바로 명령을 따랐다.법로는 이 짧은 대화에서 모든 상황을 파악했다. 하 장로는 그에게 충성을 다한 인물이었지만, 그도 이제 온지유와 별이의 안전을 최우선으로 생각했다.그는 만족스러운 듯 말했다.“신중하게 대응하는 게 맞지. 난 너무 지쳤어. 앞으로 Y국은 네게 맡기마.”그는 벽에 기대어 긴 한숨을 내쉬었다. 별이를 구하기 위해 그는 실험실에만 매달려서 바쁘게 움직였다. 약을 시험하고 밤새 잠을 이루지 않은 날이 수두룩했다. 이제야 비로소 그는 마음 편히 쉴 수 있게 되었다.
온지유가 도착했을 때 법로는 침대에 누워 있었다. 인명진은 빠르게 검사를 진행하는 중이었다.사실 인명진이 오기 전부터 신무열이 부른 사람이 검사하고 있었다. 법로는 과로로 쓰러졌다. 자신의 몸으로 약 반응을 실험한 탓에 많이 약해진 것이 문제였다.수많은 사람 중에서도 신무열은 인명진을 가장 믿었다. 인명진은 단번에 법로가 별이를 치료하느라 과로한 것을 알아챘다. 그래서인지 약간의 존경심이 생겨났다.법로가 온지유의 아이를 위해 이토록 헌신할 수 있다는 사실은, 그가 진심으로 온지유를 아끼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또한 진심으로 과거의 잘못을 보상하려고 한다는 증거였다.인명진은 즉시 약을 조제하려고 했지만, 온지유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그를 붙잡으며 물었다.“명진 씨. 아버지, 우리 아버지 상태는 어떤가요?”온지유의 입에서 나온 아버지라는 단어는 마치 마법처럼 병상에 누워 있던 법로의 귀에 닿았다. 그는 천천히 눈을 뜨며 온지유가 바로 앞에 서 있는 것을 보고 눈시울을 붉혔다.“율아, 너 방금 날 아버지라고 부른 거야?”법로의 목소리는 느리고 걸걸했다. 말을 마친 그는 감정에 휩싸여 울음을 터트렸다.“네.”온지유는 더 이상 부정할 이유가 없었다.그 순간 신무열이 인명진에게 신호를 보냈다. 인명진은 그 뜻을 알아차리고 말했다.“법로 님은 과로로 몸이 많이 쇠약해진 상태입니다. 약물 실험 때문에 신체가 많이 약해져서, 당분간은 안정이 필요합니다.”온지유는 더 이상 눈물을 참을 수 없었다. 참아왔던 눈물이 홍수처럼 쏟아져 내렸다. 법로가 그녀를 위해 이 정도까지 희생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아버지라고 부르지조차 않았던 것이다.신무열의 말대로 법로는 과거에 잔혹하고 무자비한 사람이었다. 하지만 온지유에게는 항상 좋은 아버지였다. 그리고 지난 5년 동안, Y국은 많은 변화를 겪고 있었다. 법로 역시도 변했다.“아버지.”온지유는 소리 내어 울음을 터트렸다.법로는 온지유를 품에 안으며 말했다. 이 순간, 모든 고생이 보상받는 것 같았고,
점점 더 많은 사람이 의견을 발표했다. 법로는 말없이 침묵할 뿐이었다.이때 신무열이 나서서 말했다.“Y국 수령은 태초부터 세습제였습니다. 수령이 되고 싶다면 그에 해당하는 능력을 보여주세요.”신무열은 차가운 눈빛으로 사람들을 훑어봤다. 이런 상황에서 나설 수 있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그럼 저 아가씨는 무슨 능력이 있는데요?”“제 기억이 맞다면 곁에 있는 분은 화국의 군인이었죠? S국에서 찾으러 오는 사람도 있었죠. 지금은 그냥 S국 사람 아닌가요?”“이런 사람들을 우리나라에 남겨둔다면 나라를 멸망으로 이끌게 될 것이에요!”“맞아요! 이곳에 남는 걸 허락할 수 없어요!”신무열은 분노에 찬 목소리로 외쳤다.“지금 제가 Y국의 수장이에요. 쫓아내고자 하는 사람은 쫓아낼 수도 있다는 말이죠. 불만이 있는 사람은 나가도 좋아요”Y국에는 많은 사람들이 있었다. 이들이 떠난다고 해도 대신할 사람을 충분히 길러낼 수 있었다. 어떤 일이 있어도 그는 온지유에 대한 모욕을 용납할 수 없었다. 온지유의 위치는 누구도 범할 수 없는 것이다.그때 법로가 별이의 손을 잡고 무대 앞으로 나섰다.“지유는 내 딸이자, 나의 율이다. 이전에 노 장로가 데려온 가짜를 받아들일 수 있었다면, 내 친딸을 받아들이지 않는 이유는 무엇인가?”법로는 냉정하게 말을 이어갔다.“무열의 말대로 우리를 모욕하는 사람을 남겨두고 싶지는 않다. 떠나지 않겠다면, 쓸데없는 소리를 하지 마라. 별이는 내 외손자고, 지유는 내 딸이며, 여이현은 내 사위다. 만약 그들이 Y국 안에서 조금이라도 해를 입는다면, 그 사람을 반드시 찾아내어 천벌을 내릴 것이다!”법로의 단어 하나하나에는 차가운 위엄이 담겨 있었고 얼굴에는 엄숙함이 서려 있었다. 그는 온지유와 그녀의 가족을 인정하고 지키겠다는 의지를 분명히 했다. 특히 여이현에 대해서도 말이다.그가 이전에 여이현과 이야기를 나눈 이유는 그의 현재 신분 때문에 온지유가 상처받을까 염려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온지유가 그렇게도 확고하게 여이현 곁에
이 모든 건 그녀와 여이현의 결정이었다.신무열은 온지유의 자신감과 굳건함에 결코 말리지 못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하지만 언제나 늘 그랬듯이 온지유의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주기로 했다.“지유야, 여긴 언제든지 와도 돼. 전체 마을을 관리하고 싶다면 우두머리 자리까지 너한테 줄 수 있어. 그리고 도움이 필요하면 언제든지 나한테 전화해. 내가 최선을 다해 도와줄게.”재력을 따져보자면 여이현도 부족하지 않았고, 온지유도 어느정도 모아둔 재산이 있었다.권력이라면... 여씨 집안의 권력은 굳이 말하지 않아도 알았다. 떠나기 전 모든 지분을 여희영에게 넘겨준 것 같아도 사실 여희영의 것도 아니었다.지금은 여희영 명의인 지분을 돌아가서 다시 받아 여이현의 장사 머리까지 더하면 충분히 비즈니스 제국을 만들수 있었다.물질적으로든 환경 면으로든 부족한 것이 없었다.“너...”신무열은 결국 깊은 한숨을 내쉬고 말았다.온지유한테는 꼼짝하지 못했지만 여이현한테는 할 말을 해야겠다고 생각했다.“전에 있었던 일은 저도 다 들었어요. 제 동생이 이현 씨 곁을 7년이나 지킨 것도 모자라 5년이나 더 기다렸더라고요. Y 국에 남아있을 생각이 없다면 경성으로 돌아가자마자 결혼식부터 올리세요. 제 동생을 슬프게 하는 날엔 절대 가만두지 않을 거예요!”신무열의 눈빛은 순간 예리해졌다.여이현이 정말 잘못을 저지른다면 그 어떠한 대가를 치러서라도 그에게 본때를 보여주리라 다짐했다.“당연히 결혼식을 올려야죠.”여이현은 그윽한 눈빛으로 온지유를 쳐다보았다.정말 온지유한테 미안한 일들이 많았다. 전에는 자기감정을 헤아리지 못했고, 나중에는 죽은 지 5년이나 되었다고 오해하게 했으니 죽어도 쌌다.“그러면 돌아가는 대로 준비해 봐. 날짜가 정해지면 알려주고. 아버지랑 함께 참석할 거니까.”“알았어요.”여이현과 온지유가 동시에 대답했다.이 둘은 내일 경성으로 돌아가기로 했다.옷 몇벌 빼고는 별로 챙길 물건도 없었다.이때, 법로가 오면서 온지유에게 은행카드 한장을 건넸다.“
별이는 이곳에 있으면 좋은 일만 있었지 나쁜 일은 없을 것이 뻔했다.“네가 무슨 생각을 하고있는지 알아. 별이를 곁에 두면 브람이 너희가 정말 방심하고 있다고 생각할 수 있겠지. 그런데 뛰는 놈 위에 나는 놈이 있는 거야.”법로가 잠시 후 나지막하게 말했다.“절대 잊지 마. 브람은 S 국 대통령인 거. 만약 능력이 없다면 그 위치까지 올라갈수 있었겠어?”온지유는 잊고 있었던 사실에 결국 침묵하고 말았다.“그러면 별이를 여기에 남겨두고 저랑 이현 씨만 먼저 가볼게요.”“안전해지면 다시 데려가. 지유야, 난 너한테 못 해준 거 보상해 주고 싶어. 걱정하지 마. 내가 죽는 한이 있더라도 별이 안전은 꼭 책임질 거니까.”법로는 중저음의 목소리로 엄숙하게 말했다.이에 온지유는 한숨을 크게 들이마셨다.그녀는 법로가 별이를 위해 한 노력을 잘 알고 있었다.“아버지...”온지유가 법로를 안았고, 법로는 그녀의 등을 토닥토닥해 주었다.“지유야, 사실 Y 국에 남아있는 것이 가장 좋은 선택일 수도 있어. 그런데 네가 가겠다고 하는데 억지로 잡지도 못하겠어. 꼭 무사해야 해. 난 너한테 무슨 일이 일어나면 감당할 자신이 없어...”법로는 울먹거리기 시작했다.전에 온지유가 종군 기자를 하겠다고 했을 때도 극구 반대했지만 결국 신무열의 설득에 넘어가고 말았다.온지유는 가시가 돋친 장미처럼 결정한 일은 아무도 말리지 못했다. 무엇을 하기로 했으면 무조건 행동으로 옮겨야 했다.법로는 그래도 마음이 안 놓이는지 온지유를 보호하라고 옆에 많은 사람을 붙여놓았다. 화국 부대에 있을 때는 신무열이 있어서 잠깐 방심한 적이 있었다. 화국 범위 내에만 있으면 절대적으로 안전하다고 생각했는데 브람의 팔이 그렇게 많이 뻗어있을 줄 몰랐다.노석명이 온지유를 데려왔을 때 진짜 딸인 줄 알고 저격술, 호신술을 가르쳐주면서 그동안 해주지 못했던 것을 보상해 주고 싶어 더없이 사랑을 쏟아주기도 하고, 엄격하게 대하기도 했다.그런데 나중에 가짜라는 사실을 알았을 때 첫 반응은 화
“그리고... 아빠!”이별은 원래 슬픈 것이었다. 그런데 별이의 이런 모습을 보고 있자니 온지유와 여이현은 가슴에 비수가 날아와 꽂힌 듯이 아파져 왔다.“별이 데리러 꼭 올 거야.”온지유와 여이현은 바로 이구동성으로 대답했다. 목이 메어와 고통스럽기 그지없었지만 어쩔 수가 없었다.그저 뒤를 돌아보지 않고 앞으로 나아갈 수밖에 없었다.별이는 떠나가는 이 둘의 모습을 보면서 울지도 않았다.이때 법로가 자상하게 물었다.“별이는 뭘 갖고 싶어? 할아버지가 뭐든지 사줄게. 나가서 놀고 싶어? 아니면 학교에 다니고 싶어?”Y 국에서는 다섯 살 된 별이 또래 아이들은 유치원을 마치고 곧 초등학생이 될 나이였다. 별이는 신체적 문제로 학교에 다닐 수 없었다.그런데 친구와 함께 노는 것을 한창 좋아할 나이였다.별이도 역시나 후자를 택했다.그는 고개를 쳐들고 기대가 가득찬 눈빛으로 법로를 쳐다보았다.“할아버지, 저... 학교 다니고 싶어요.”별이는 학교라는 두 글자를 유난히 느리게 말했다.별이가 학교 다니고 싶다는데 법로는 무조건 그의 소원을 들어주고 싶었다. 신무열은 전에 Y 국 북부지역에서 선생님을 했던 적이 있어 별이를 그에게 맡기는 것이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법로는 이참에 바로 실천에 옮기기로 했다.신무열은 별이가 학교 다니고 싶어 한다는 발에 더없이 기분이 좋았다. 일대일로 별이를 가르쳐주겠다고 하자 법로는 반대표를 던졌다.“별이가 학교 다니고 싶다잖아. 그러면 진짜로 학교에 가야지. 아니면 내가 왜 여기까지 데려왔겠어.”신무열이 전에 선생님을 해봤기 때문에 아는 사람이 많겠다 싶어 데려왔는데 일대일로 가르쳐주겠다고 할 줄 몰랐다.“저도 알아요. 그래도 미리 적응시키고 나중에...”“나중에 뭐? 별이가 얼마나 똑똑한데. 배우면 바로 알 텐데 미리 배워둘 필요가 뭐가 있겠어.”신무열이 아직 말을 끝내지도 않았는데 법로가 버럭 화를 냈다.신무열 역시 법로와 같은 생각이긴 했지만 문제는 별이가 다른 아이와는 달랐다.큰 수술을 받아
호텔 바닥은 아수라장이었다.잠에서 깬 지유는 온몸이 부서지는 것 같았다.지유는 미간을 주무르며 자리에서 일어나려는데 커다란 몸집을 가진 남자가 옆에 누워 있는 걸 발견했다.지나칠 정도로 잘생긴 얼굴은 조각과도 같았고 눈매도 깊고 진했다.아직 깊은 잠이 들어 깨어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지유가 몸을 일으키자 이불이 그녀의 몸에서 미끄러져 내렸고 뽀얗고 매혹적인 두 어깨에 어젯밤 남긴 흔적이 보였다.지유가 앉았던 자리에 선명한 핏자국이 보였다.시간을 보니 어느새 출근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지유는 바닥에 널브러진 출근룩을 다시 집어 들어 얼른 갈아입었다.스타킹은 이미 남자에 의해 찢겨 있었다.지유는 스타킹을 돌돌 말아 쓰레기통에 버리고는 하이힐을 신었다.그때 누군가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깔끔하게 차려입은 지유는 어느새 워커홀릭 비서로 완전히 돌아왔고 가방을 챙겨 밖으로 나갔다.들어온 사람은 청순한 미녀였다.지유가 부른 사람이었다.이현의 취향이 이런 여자였다.지유가 그 여자에게 이렇게 말했다.“침대에 누워서 대표님 깨나길 기다리면 돼요. 다른 건 한마디도 하지 마요.”지유는 고개를 돌려 아직 단잠에 빠진 남자를 힐끔 쳐다봤다. 억울한 마음에 코끝이 찡해졌지만 그래도 꿋꿋하게 방에서 나왔다.지유는 두 사람이 어젯밤 잠자리를 가졌다는 사실을 이현이 아는 게 싫었다.그들 사이에 계약에 의하면 아무도 모르게 3년간 결혼을 유지하면 바로 이혼할 수 있었다.이 기간에 선을 넘는 행동은 그 어떤 것도 용납되지 않았다.지유는 7년째 이현의 비서로, 3년째 이현의 와이프로 있었다.졸업한 그날부터 이현의 곁을 한시도 떠난 적이 없었다.같은 날, 이현은 지유에게 두 사람은 그저 상사와 부하의 관계일 뿐 이 관계를 뛰어넘어서는 안 된다고 했다.지유는 복도 창가에 서서 어제 일을 떠올렸다. 이현은 그녀를 안고 침대에 누워 ‘승아’라는 이름을 연신 불러댔다.지유는 가슴이 찢어지는 것 같았다.승아는 이현의 첫사랑이었다.이현은 지유를 승
이에 지유가 화들짝 놀라며 하마터면 발을 삐끗할 뻔했다.중심을 잘 잡지 못한 지유는 그렇게 이현의 몸에 기댔다.이현은 지유의 몸이 앞으로 쏠리자 손으로 지유의 허리를 잡아줬다.뜨거운 체온이 전해지자 지유는 어젯밤 그가 저돌적으로 그녀를 덮치던 화면이 떠올랐다.지유는 가까스로 진정하고 고개를 들어 이현의 깊은 눈동자를 마주 봤다.이현의 눈동자는 매우 진지했고 그 속엔 질문과 의혹도 담겨 있었다. 눈빛은 지유를 뚫어버릴 것만 같았다.지유는 심장이 벌렁거렸다.이현과 더는 눈을 마주칠 엄두가 나지 않아 자기도 모르게 고개를 숙였다.아까 나간 그 여자라고 생각했을 때도 이현은 불같이 화를 냈는데 여기서 만약 지유가 자신이었음을 인정한다면 후과가 그리 좋지는 않을 것이다.하지만 아니라고 하기엔 억울했다.만약 어젯밤 잠자리를 가진 사람이 지유라는 걸 이현이 알게 된다면 결혼 생활을 조금이라도 더 이어나갈 수 있지 않을까?그래도 지유는 그와 눈을 마주치는 게 겁나 고개를 숙인 채로 물어봤다.“그건 왜 묻는 거예요?”지유는 사실 남몰래 기대하고 있었다.하지만 이현이 코웃음을 치더니 이렇게 말했다.“너는 그런 용기가 없을 것 같아서.”지유는 멈칫하더니 시선을 아래로 축 늘어트렸다.어쩌면 이현은 어젯밤 잠자리를 가진 사람이 지유가 아니길 더 바랄지도 모른다. 계약 결혼일뿐이니 말이다.게다가 며칠만 더 지나면 계약도 끝나간다순간 이현이 지유의 손을 힘껏 낚아챘다.지유가 화들짝 놀라 고개를 들어보니 이현이 차가운 눈빛으로 그녀를 심사하듯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다.지유는 심장이 멎는 것만 같았다.발버둥 치며 손을 빼려 했지만 이현이 지유를 전신 거울 앞으로 바짝 몰아갔다.“뭐 하는 거예요?”지유는 애써 침착한 척했지만 떨리는 목소리가 그녀의 긴장과 두려움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었다.“너 정말 사무실에서 잠들었어?”지유는 칠흑같이 어두운 이현의 눈동자를 바라보며 혹시나 들킨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3년 전, 결혼한 첫날 밤, 지유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