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고... 아빠!”이별은 원래 슬픈 것이었다. 그런데 별이의 이런 모습을 보고 있자니 온지유와 여이현은 가슴에 비수가 날아와 꽂힌 듯이 아파져 왔다.“별이 데리러 꼭 올 거야.”온지유와 여이현은 바로 이구동성으로 대답했다. 목이 메어와 고통스럽기 그지없었지만 어쩔 수가 없었다.그저 뒤를 돌아보지 않고 앞으로 나아갈 수밖에 없었다.별이는 떠나가는 이 둘의 모습을 보면서 울지도 않았다.이때 법로가 자상하게 물었다.“별이는 뭘 갖고 싶어? 할아버지가 뭐든지 사줄게. 나가서 놀고 싶어? 아니면 학교에 다니고 싶어?”Y 국에서는 다섯 살 된 별이 또래 아이들은 유치원을 마치고 곧 초등학생이 될 나이였다. 별이는 신체적 문제로 학교에 다닐 수 없었다.그런데 친구와 함께 노는 것을 한창 좋아할 나이였다.별이도 역시나 후자를 택했다.그는 고개를 쳐들고 기대가 가득찬 눈빛으로 법로를 쳐다보았다.“할아버지, 저... 학교 다니고 싶어요.”별이는 학교라는 두 글자를 유난히 느리게 말했다.별이가 학교 다니고 싶다는데 법로는 무조건 그의 소원을 들어주고 싶었다. 신무열은 전에 Y 국 북부지역에서 선생님을 했던 적이 있어 별이를 그에게 맡기는 것이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법로는 이참에 바로 실천에 옮기기로 했다.신무열은 별이가 학교 다니고 싶어 한다는 발에 더없이 기분이 좋았다. 일대일로 별이를 가르쳐주겠다고 하자 법로는 반대표를 던졌다.“별이가 학교 다니고 싶다잖아. 그러면 진짜로 학교에 가야지. 아니면 내가 왜 여기까지 데려왔겠어.”신무열이 전에 선생님을 해봤기 때문에 아는 사람이 많겠다 싶어 데려왔는데 일대일로 가르쳐주겠다고 할 줄 몰랐다.“저도 알아요. 그래도 미리 적응시키고 나중에...”“나중에 뭐? 별이가 얼마나 똑똑한데. 배우면 바로 알 텐데 미리 배워둘 필요가 뭐가 있겠어.”신무열이 아직 말을 끝내지도 않았는데 법로가 버럭 화를 냈다.신무열 역시 법로와 같은 생각이긴 했지만 문제는 별이가 다른 아이와는 달랐다.큰 수술을 받아
원래부터 말하기 싫어했던 별이는 낯선 사람 앞에서 더욱 말하기 싫어했다.녀석들은 별이가 아무 말도 하지 않자 깜짝 놀라고 말았다.“말도 하지 못하는데 뭘 배우겠다고 그래? 우리를 부르지 말았어야 했어. 장애인 특수학교에 가야 했다고.”“맞아.”...녀석들은 학교도 가지 못하고 여기 불려 온 것에 대해 불만이 많았다.‘친구 하나를 친해서 갈 줄 알았는데 벙어리일 줄이야.’별이는 녀석들을 힐끔 보더니 말했다.“미안해.”별이는 단지 말하기 싫어했을 뿐이지 벙어리도, 죽은 사람도 아니었다.녀석들이 계속해서 별이를 비웃으려고 했을 때, 신무열이 성큼성큼 걸어들어왔다.“선생님!”녀석들이 이구동성으로 맞이했다.별이는 아무 말 없이 부드러운 눈빛으로 신무열을 바라볼 뿐이다.신무열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고개 숙여 별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별아, 괜찮아?”“선생님, 별이가 저희랑 말도 하지않고 같이 놀자고 했더니 드림이를 밀쳐냈어요.”이때 까무잡잡한 피부에 흰 티를 입고있는 녀석이 별이를 가리키면서 말했다.순간 표정이 어두워진 신무열은 별이의 손을 잡고 차가운 눈빛으로 녀석들을 쳐다보았다.“별이한테 체험시켜 주려고 너희들을 불러온 거야. 왜 어린 나이에 거짓말을 하는거지?”신무열은 별이에 대해 무조건적인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온지유가 아직 별이가 자기 아이라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을 때부터 별이를 옆에 두었던 것은 녀석이 사람 마음을 끄는 무언가가 있어서였다.별이는 온지유 옆에 있으면서 한번도 뭘 사달라고 한 적이 없었다. 법로와 함께 실험실에 있었을 때도 한번도 뭘 원한다고 했던 적이 없었다.고통스러운 치료를 받았을 때도 불평불만 한번 없었다.“선생님, 저는 거짓말한 적이...”녀석들은 어두워진 신무열의 눈빛을 보고 깜짝 놀라 더는 말을 이어갈 수 없었다.“돌아가서 반성문이나 써. 그리고 다시는 여기에 올 필요 없어.”신무열이 엄격하게 호통을 쳤다.아무리 어린 나이라고 해도 잘못한 부분을 고쳐주지 않으면 영원히 그 버릇을 고칠
신무열은 별이를 안고서 밖으로 향했다....한편으로 온지유와 여이현이 탑승하기로 한 비행기에 문제가 생겨 비행장에서 대기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 모든 것은 온지유와 여이현의 계획대로였다.브람이 사람한테 시켜서 온지유와 여이현을 잡아 오라고 했고, 억지로 환승지인 S 국에 도착한 온지유와 여이현은 브람을 마주하게 되었다.브람은 이 둘을 갈라놓으려고 했지만 여이현이 워낙 온지유의 손을 꽉 잡고 있어서 보디가드는 결국 이 둘을 떼어내지 못하고 함께 브람 앞으로 데려갔다.“여이현을 좋아한다며. 함께하기로 했으면서 여이현 체내에 있는 독을 나 몰라라 할거야?”브람은 뒷짐을 쥔채 온지유에게 질문했다.그는 온지유를 싫어했기 때문에 말투가 상냥하지 못했다.이때 온지유가 콧방귀를 뀌면서 말했다.“대통령님께서 먼저 이현 씨를 찾았잖아요. 보상해 주기도 모자랄 판에 독이나 타고. 이런 일은 대통령님만 할수 있을 거예요.”여이현은 그동안 그래도 상태가 안정된 상태였다. 실험실을 계속 다니기도 했고, 법로도 그의 체내에 있는 독을 없애주려고 노력을 많이 했다.법로가 여이현을 완치해 줬다고 생각했는데 사실 여이현이 억지로 참고 있으면서 온지유한테 말하지 않았던 것이다.“너만 아니었으면 독을 타지도 않았어. 너는 네가 잘했다고 생각해?”브람은 한껏 가소롭다는 말투로 말했다.여이현이 떠돌이 생활을 하고 있을 때 큰 힘을 들여 그를 찾아냈지만 상업에 종사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상업에 종사하는 것과 정치에 종사하는 것은 엄연히 다른 일이었다. 그때는 별로 큰 기대를 하지 않았는데 여이현에게 또 다른 신분이 있을 줄 생각지 못했다.여이현을 자기편으로 만들고 싶었는데 여이현이 그의 뜻대로 움직여 주지 않았다. 온지유를 중독시켜서 아이를 뺏어오면 여이현이 흔들릴 줄 알았다. 그런데 여이현이 여전히 화국 부대에 남아있겠다고 할 줄 몰랐다.전쟁 중에 여이현이 총을 맞아 Y 국 강에 빠졌을 때, 큰 힘을 들여 강에서 건져내게 되었다.몇 해가 지나도 깨어나지 않
브람의 이미지는 순식간에 나락으로 떨어졌고, 국제포럼에는 온통 그에 대한 욕으로 도배되어 있었다.생방송에 그의 얼굴이 정면으로 잡힌 것이다.“너였어...”브람의 눈빛은 분노로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지금 드는 생각은 오로지 온지유를 죽이고 싶은 마음뿐이었다.‘이 모든 것은 온지유 때문이야! 저년이 없었더라면 이현이 저렇게 변하지도 않았고, 나한테 반항하지도 않았을 거야.’그런데 지금은 전 세계적으로 라이브 생방송 중이었기 때문에 온지유한테 손찌검할 수 없었다.이순간 온지유는 브람의 질문에도 전혀 흔들임 없이 두려워하지도 않았다.“저 맞아요. 대통령님께서 먼저 너무하셨잖아요. 저희는 그냥 우리끼리 잘살고 싶었는데 계속 방해하셨잖아요. 저희가 모를 줄 알았어요? 별이를 옆에 두면서 병도 치료해 주지 않았던 건 별이를 이용해 이현 씨를 협박하려던 거였잖아요.”여이현이 5년 동안 연락하지 않았던 이유는 혼미 상태에 빠져있었던 것도 있었고, 자기만의 생각이 있어 모든 것이 안정되면 식구들과 다시 행복하게 살고 싶었다.그런데 모든 계획이 틀어지는 바람에 온지유가 다칠까 봐 보다 일찍 모습을 드러낼 수밖에 없었다.다행히 별이를 온지유 옆으로 돌려보낸 건 맞는 결정이었다. 덕분에 별이를 Y 국으로 데려갈 수 있었기 때문이다.이순간 브람의 눈빛은 차갑기만 했다.“치료 방법이 있었더라면 내가 별이를 죽게 내버려 뒀을 것 같아?”“그런데 저희 아버지는 별이를 치료해 줬거든요.”온지유는 브람의 어두운 눈빛과 마주하면서 한마디 한마디 내뱉었다.브람은 더욱 가소롭다는 말투로 말했다.“그거야 너희 아버지가 실험하기 좋아해서 그렇지.”“그런데 대통령님은 왜 애초부터 해독제를 가지고 있었는데요?”온지유가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물었다.브람이 해독제를 가지고 있으면서 여이현과 거래하려고 했던 것이 핵심이었다.온지유가 카메라로 모든 것을 담고 있었기 때문에 말을 아껴야 했다.온지유는 그의 눈빛에서 모든 걸 깨달을 수 있었다. 이 시각, 국제포럼에는 브람을 향한
온지유는 브람이 다시는 찾지 않을 거라는 걸 알고 있었다.하지만 브람은 놔주어도 강서현은 불가능했다.이때 강서현이 여이현 앞에 나타나 이들의 길을 막았다.“이현 씨, 지유 씨를 데리고 가는 거, 제 의견을 물어봤어요? 저야말로 이현 씨 약혼녀잖아요! 절대 안 돼요!”“그건 대통령님이 엮어준 거잖아. 내가 원하는 건 아니었어. 지유야말로 내 아내라고. 너는 다른 인연을 찾아봐.”여이현은 바로 거절하고는 온지유를 감싸 안고 밖으로 향했다.강서현이 쫓아가려고 하는데 여이현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강서현, 따라오지 마!”강서현은 발걸음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강서현한테는 열 번 찍어 안 넘어가는 나무가 없었다.어떻게든 여이현을 자기 사람으로 만들려고 했고,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받은 이 치욕, 꼭 갚아주리라 다짐했다.‘아니면 내가 강서현이 아니지!’한편으로 신무열은 별이와 함께 외식을 마치고 녀석이 치료받을 수 있게 법로한테 맡기고는 방으로 들어갔다.일 시작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김혜연이 문 앞에 서 있는 것이다.그녀는 정성스레 직접 고른 셔츠 하나를 건넸다.블랙 앤 화이트 컬러에 꽃무늬 자수가 박혀있는 것이 딱 신무열한테 어울렸다.그런데 신무렬이 죽어도 안 받는 것이다.“입을 옷이 많아. 없다고 해도 내가 직접 가서 사면 돼.”선물 따위는 필요없었다.김혜연은 그의 숨은 말뜻을 알아들었지만 이대로 포기하고 싶지 않았다.그래서 자세를 낮추고 애원하는 말투로 말했다.“도련님, 이거 제가 정말 오랫동안 고른 선물이에요. 한정판이라 어렵게 구한 건데 한번 입어보실래요? 마음에 안 들면 버리셔도 돼요.”김혜연은 이 셔츠를 보자마자 신무열한테 어울리겠다는 생각이 들었다.하지만 아무리 애원해봤자 신무열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이때 신무열이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김혜연, 내가 똑바로 말했을 텐데. 널 좋아하지 않는다고. 좋아하는 마음이 요만큼도 없다고.”김혜연도 당연히 알고 있었지만 신무열의 입에서 직접 듣자니 슬픈 마음에
김혜연은 속이 말이 아니었지만 계속 신무열의 방에 있으면 그가 화를 낼까 봐 바로 방에서 나왔다. 신무열의 심기가 불편해지는 것을 바라지 않았다.김혜연은 신무열 대신 법로 찾으러 갔다.법로는 눈시울이 붉어진 김혜연을 보더니 말했다.“무열이가 괴롭힌 거라면 내가 대신 혼내줄게.”다른 일은 몰라도 이 정도는 해줄 수 있었다.법로는 지금 이 위치까지 오르기까지 겪어보지 못한 것이 없었다. 오랫동안 신무열의 곁을 지켜온 김혜연이 무슨 마음을 가지고 있는지 진작에 알고 있었다.감정이라는 것은 억지로 될 일이 아니었다.그것도 모자라 신무열은 늘 자기주장이 강한 사람이었으니 말이다.김혜연은 법로가 단도직입적으로 말할 줄 몰랐는지 호흡을 가다듬으면서 말했다.“법로님, 저 좀 도와주면 안 돼요? 저 도련님을 정말 사랑해요... 도련님 곁에 여자도 없는데 제가 평생 옆을 지키면서 내조해 드릴게요.”어쩔 수 없이 법로한테 도움 청하러 온 김혜연은 울먹거리고 있었다. 그녀는 어릴때부터 지금까지 쭉 신무열을 사랑했었다.전에 고백하지 못했던 이유는 신무열의 곁에 있을 자격이 없을까 봐 공부도 열심히 하고 모든 노력을 다했다.겨우 고백할 용기와 기회가 생겨 고백했거늘 신무열이 거절할 줄 몰랐다.김혜연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나 정도면 나쁘지 않은데?’김혜연은 심지어 눈치없이 온지유한테 상처를 줘서 그런거라면 사과할 마음도 있었다.법로를 찾아온 것은 그저 신무열과 단둘이 있을 기회를 얻고 싶어서였다.그런데 법로가 이런 태도일 줄은 몰랐다.“김혜연, 너희 아버지가 Y 국에 큰 공헌을 하셔서 나도 너를 잘 챙겨주려고 했어. 다른 일이라면 도와줄 수 있지만 이 부분은 나도 어쩔 수 없어.”법로가 힘겹게 입을 열었다.전에 신무열한테 소개팅을 주선하려고 혹시나 하는 마음에 물어봤는데 신무열이 극구 싫다고 해서 다시는 물어본 적이 없었다.만약 신무열도 김혜연을 좋아한다면 그녀가 자기한테 도움을 청할 일도 없다고 생각했다.온지유와 여이현을 통해 중간에서
온지유는 그제야 깨닫고 여이현의 손을 잡았다.“체내에 독이 아직 남아있는 거예요?”“미안해...”여이현의 힘없는 목소리에 온지유는 가슴이 찢어지는 듯했다.“저는 이현 씨한테서 미안하다는 말을 듣고 싶지 않아요. 저희 이만 돌아가요!”온지유는 여이현을 데리고 다시 브람을 만나러 가고 싶었다. 여이현한테 아무런 이상이 없어 법로가 체내에 있는 독을 깔끔히 처리한 줄 알았다.그런데 여이현이 참고 있었을 줄이야...온지유는 너무나도 괴로웠다.그런데 여이현이 그녀의 손을 꽉 잡으면서 고개를 흔드는 것이다. 온지유가 지금 당장 브람 찾으러 가고 싶어 한다는 것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다만 브람이 만약 해독제를 줄 마음이 있었다면 아무 말 없이 보내주지 않았을 것이다.“순순히 줄 마음이 없을 거야. 우리랑 협상하려고 할 거라고. 난 그 사람이랑 협상하고 싶지 않아. 그렇다고 내가 죽게 내버려 두진 않을 거야.”여이현은 온지유의 손을 꽉 잡고 최선을 다해 버티고 있었다.그는 온지유가 자기 때문에 고개 숙이는 모습을 보고싶지 않았다.반대로 온지유는 여이현이 무사하기만 하다면 무슨 짓이든 할수 있다고 생각했다. 마치 여이현이 자신을 위해 목숨마저 내바칠 수 있는 것처럼 말이다.“이현 씨가 죽는 모습을 보고싶지 않았다면 왜 떠날 때 해독제를 주지 않았는데요.”브람은 사실 여이현이 돌아와서 비는 모습을 보고 싶었다.“지금 찾아가봤자 해독제를 주지 않을 거야. 지유야, 우리 이만 돌아가. 아버님이 별이를 치료해 주고 있잖아.”Y 국에는 법로 말고도 인명진이 있었기 때문에 어떻게든 해독제를 구할 방법이 있다고 생각했다.온지유는 여이현을 이해했지만 한 번이고 두 번이고 시도해 보는 것보다 차라리 브람을 찾는 것이 더 빠르다고 생각했다.다음 순간, 여이현은 온지유를 품에 안고 그녀의 등을 토닥토닥해 주었다.“괜히 걱정하지 마. 내가 있잖아. 널 혼자 내버려 두지 않겠다고 했잖아. 일단... 별이 찾으러 가. 우리를 보고 싶어 할 거야.”“그래요..
온지유와 여이현은 Y 국으로 돌아가는 택시 안이었다.뒷좌석에 앉아있던 온지유는 수시로 여이현의 상태를 확인했는데 그래도 다행히 상태가 너무 나쁘지는 않았다.가는 도중에 누군가 길을 막길래 여이현은 직감적으로 브람이 시킨 짓이라고 생각했다.그는 온지유더러 차 안에 있으라고 했다.“내가 내려가서 확인해 볼게. 상황이 안 좋으면 기사님더러 가던 길 계속 가라고 해. 네 예상이 맞았어. 무조건 Y 국에 남아있어야 했어.”만약 브람이 국제포럼 반응을 신경 쓰지 않기로 마음먹었다면 여이현은 온지유와 별이의 안전을 위해서 이곳에 남아있기로 했다.그런데 온지유가 확신에 찬 모습으로 고개를 흔드는 것이다.“저한테 무슨 일이 있든 제 옆에 있겠다고 했잖아요. 그런데 이제 와서 저 보고 떠나라고요? 안 돼요. 이현 씨, 약속 꼭 지켜요.”온지유의 말이 끝나자마자 차 한 대가 앞을 막았다. 그 뒤에 있는 여러 대의 차량은 가까이 오지 않았고, 오히려 일정한 거리를 유지했다.여이현의 표정은 확 어두워지고 말았다.그런데 차에서 한 사람만 내리는 것이다. 여이현은 그가 브람의 보디가드라는 것을 한눈에 알아보고 아래위로 훑어보았다.다행히도 보디가드는 무기를 휴대하고 있지 않았다.보디가드는 성큼성큼 걸어와 차 옆에 멈추더니 공손하게 인사했다.“도련님, 대통령님께서 해독제를 보내오라고 하셔서요.”온지유와 여이현은 별로 기뻐하지 않았다. ‘떠날 때까지도 해독제를 줄 생각을 하지 않더니 보디가드한테 해독제를 보내주라고 했다고? 무조건 꿍꿍이가 있을 거야.’보디가드는 굳게 닫힌 문을 보고, 또 꼼짝하지도 않는 여이현의 모습을 보더니 계속해서 말했다.“도련님, 지금 전 세계에서 관심을 가지고 대통령님을 지켜보고 있습니다. 만약 대통령님께서 언론을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면 S 국에서 바로 처리했겠죠. 도련님한테 나쁜 마음을 품고 있다면 저만 보내지 않았겠죠. 정말 못 믿으시겠으면 이 해독제의 성분을 확인해 보시든가요.”보디가드는 거짓말을 하는 것 같지 않았다.여이현과
그와 권다솔은 진심으로 사랑했고 서로에게 많은 것을 바쳤다. 그런데 어떻게 이런 상황에서 ‘호구 짓’ 같은 말이 나올 수 있단 말인가?“다솔 씨는 한 번도 나를 배신하거나 잘못한 적 없어. 오히려 내가 잘못했지. 그리고 어머니, 친아들한테 약을 먹이는 짓은 어머니밖에 못 할 겁니다.”배진호는 병상에 누운 어머니를 바라보았다.깊은 슬픔과 무력감이 그를 짓눌렀다.그는 지금도 어머니가 자기에게 약을 먹였다는 사실을 도저히 용서할 수 없다. 하지만 어머니가 아픈 상황에서 아들로서 그 과거를 들추거나 모른 척할 수도 없었다.결국 모든 감정을 억누르며 버틸 수밖에 없었고 그 기분은 정말 참기 어려웠다.배성연은 약을 먹인 일에 대해선 몰랐다. 그녀는 정미진을 바라보며 당혹스러운 표정을 지었다.처음 자신을 불렀을 때 이런 일까지 있었다는 말은 전혀 듣지 못했기 때문이다.이때 정미진은 갑자기 심하게 기침하기 시작했고 석규리는 급히 다가가 그녀의 등을 두드리며 말했다.“아주머니, 의사 선생님이 그러셨잖아요. 지금 몸 상태로는 절대 화내면 안 된다고요. 일단 진정하시고 쉬셔야죠.”“규리야, 봤지? 내가 이렇게 병상에 누워 아무것도 못 하는데도 일부러 나를 화나게 만드는 사람이 있어.”정미진은 특정 인물을 지목하진 않았지만 시선은 아들을 향하고 있었다.배진호는 더 이상 어쩔 수가 없었다.“아들이 병실에 있는 게 기분만 나빠진다면 차라리 나가는 게 낫겠어요. 그래야 어머니도 마음 편히 요양할 수 있겠죠.”그는 더 이상 이곳에서 억눌린 채로 있고 싶지 않았다. 상황이 계속된다면 정말로 견디기 어려울 것 같았다.왜 자신은 이런 부모를 만나서 이 고생을 해야 하는지 그저 답답할 뿐이었다.“가, 가려거든 이제 다시는 돌아오지 마. 네가 어릴 때 온갖 고생 다 하며 널 키웠는데 이젠 내가 늙고 병드니까 짐짝 취급을 받는구나. 됐다, 너희들 아무도 나를 신경 쓰지 않아도 좋아. 내가 죽더라도 너는 부르지 않을 거야. 밖에서 네 맘대로 살고, 네가 행복하면 그걸로 됐
권다솔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고개를 숙였다.사실 그녀도 아이를 정말 좋아했다. 임신 소식을 처음 들었을 때는 너무나도 기뻤다.그런데 결과는?아이를 잃었고 깊이 사랑했던 남편도 잃었다. 한때 행복했던 순간들은 마치 환상처럼 손가락으로 살짝만 건드려도 깨져버렸고 남은 것은 산산조각 난 유리 조각들뿐이었다.“미안해. 내가 괜히 네 아픈 기억을 건드렸어. 다 내 잘못이야. 왜 그런 말을 했을까? 바보 같이...”남태건은 점점 초조해지며 자신의 뺨을 때렸다.두 번째로 자신을 때리려 했지만 권다솔은 그의 손을 잡으며 고개를 저었다.“그러지 마세요. 태건 씨를 탓하려는 게 아니에요. 이건 태건 씨 잘못이 아니잖아요.”그녀가 아이를 잃은 건 남태건과 전혀 상관이 없었다.게다가 방금 했던 말도 그녀에게 크게 상처가 되지 않았다. 아이를 잃었다고 해서 주변 모든 사람이 그녀 앞에서 아이 이야기를 꺼내지 않는 건 현실적이지 않았다.“그래도 네가 힘들어할까 봐 걱정돼. 다솔아, 기분이 안 좋으면 마음껏 화를 내. 나를 화풀이 대상으로 써도 괜찮아. 난 널 위해서라면 그 정도는 할 수 있어.”남태건은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말했다.권다솔은 휴대폰 잠금을 해제하며 시간을 확인하려 했지만 화면에는 끝없이 많은 메시지로 가득 차 있었다.모두 배진호가 보낸 메시지였다.그렇게 많은 메시지를 보냈지만 그녀는 단 하나도 읽고 싶지 않았다.권다솔은 모든 메시지를 선택하고 삭제 버튼을 눌렀다.남태건은 계속해서 그녀의 휴대폰을 흘끗거렸다.각도상 화면의 글씨는 보이지 않았지만 이 시점에 권다솔에게 장문의 메시지를 보낼 사람은 한 사람뿐임을 짐작할 수 있었다.배진호다!지금은 상황이 완전히 뒤바꼈다. 권다솔이 유산한 이후로 배진호는 남태건과 비교할 자격조차 없게 되었다.방금 일부러 떠본 결과 권다솔은 아직도 그 아이에 대한 미련을 떨치지 못하고 있다는 게 분명했다.두 사람 사이에는 생명의 무게가 가로막혀 있고 정미진이 적극적으로 방해하고 있는 상황에서 둘이 다시 함께할
아래층으로 내려간 두 사람은 거실 소파에 앉아 TV를 보고 있던 김영은과 마주쳤다.“어머님.”남태건은 정중하게 인사했다.김영은은 고개를 들어 남태건을 바라보며 점점 더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그녀의 시선이 권다솔에게로 향하자 눈에는 걱정이 어렸다.“다솔아, 어제는 괜찮았는데 오늘은 왜 이렇게 다크서클이 심하니? 설마 어젯밤 한숨도 못 잔 거야?”생각해 보면 권다솔과 배진호는 서로 깊이 사랑했던 사이였다.지금 이혼을 결정한 것이 그녀에게 고통스러운 일이라는 것을 김영은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하지만 오래 끌며 고통받느니 짧게 끝내는 것이 낫다고 김영은은 생각했다.가슴 아프지만 딸을 위해 다시 그런 잘못된 관계로 돌아가게 할 수는 없었다.“아니에요 엄마. 어젯밤에 창문을 열어놓고 자서 추워서 깼어요. 그래서 잠을 설친 거예요.”권다솔은 어머니를 걱정시키고 싶지 않아 대충 변명을 했다.하지만 엄마인 김영은이 딸의 마음을 모를 리 없었다. 그녀는 딸의 마음을 꿰뚫어 보았지만 굳이 지적하지 않고 말했다.“오늘 주말이니까 둘이 밖에 나가서 좀 돌아다니렴. 가면서 내 스킨케어 제품 하나 사다 줄래? 마침 다 썼거든.”“네, 알겠습니다.”남태건이 웃으며 바로 대답했다.그는 김영은을 기쁘게 만드는 데 능숙했다. 몇 마디 말로도 그녀를 웃게 만들었다.김영은은 시계를 한번 올려다보며 말했다.“그래, 이제 너희 둘도 여기서 시간 낭비하지 말고 빨리 나가 놀아. 젊은 사람끼리 얘기 나눌 거리가 있잖아?”권다솔은 어머니의 제안을 거절할 수 없었다.집으로 돌아온 후 어머니의 눈의 지울 수 없는 근심을 보며 그녀는 스스로를 자책했다. 자신이 잘못한 탓에 어머니까지 걱정하게 만든다는 생각에 마음이 무거웠다.지금 남태건이 어머니를 기쁘게 해주고 또 그녀와 함께 연기를 해 준다니 권다솔은 굳이 분위기를 깨고 싶지 않았다.“그럼 엄마, 저희 먼저 다녀올게요. 저녁에는 일찍 들어와서 같이 먹을게요.”“너희가 저녁을 안 먹고 들어와도 상관없어.
하지만 부모라면 누구나 자신의 딸이 더 좋은 조건의 배우자를 만나길 바란다.지금 배진호가 약간의 성과가 있는 이유는 여이현의 지원 덕분이다.만약 어느 날 여이현이 돕는 것을 멈춘다면?혹은 배진호가 창업에 성공한 뒤 새로운 여자를 만나 권다솔을 이용만 하고 차버린다면?그렇게 되면 권다솔은 너무나 불행하지 않겠는가?김영은은 이전부터 이런 점이 걱정되었다.하지만 두 사람의 관계가 워낙 좋았기 때문에 딸의 행복을 막을 수 없었다.이번 다툼을 계기로 그녀는 더 확신하게 되었다.배진호는 절대로 적합하지 않은 사람이라고.“다시 같은 실수를 하지는 않을 거예요. 제가 직접 진호 씨가 다른 여자와 함께 있는 걸 봤거든요. 우리가 다시 화해하면 제가 뭐가 되는데요?”권다솔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김영은은 처음에는 단순히 다툼 정도로만 알았지만 이 말을 듣자 얼굴이 점점 더 굳어졌다.“참 기가 막히는구나. 지금부터 다른 여자랑 놀아났다면 나중에 창업 성공하면 두세 명씩 끌어안고 다니겠네? 이혼해라! 너희 둘, 내일 당장 가서 이혼하자. 이혼서류부터 받고 나서 다시 얘기하자.”권다솔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그러나 방으로 돌아간 뒤 달력을 보니 내일이 주말이라는 사실을 이제야 알게 되었다.주말에는 법원이 문을 열지 않으니 월요일까지 기다려야 했다.권다솔은 휴대폰을 꺼내 배진호에게 메시지를 보냈다.[다음 주 월요일 법원 앞에서 만나요.][다솔 씨, 법원에는 왜요?]배진호는 그녀의 메시지를 보자마자 답장을 보냈다.그는 휴대폰 화면을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었다.사실 그는 너무 잘 알고 있었다. 법원에 가자는 건 이혼증을 받으러 가자는 말이었다.하지만 그는 그 사실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한 번 더 그녀에게 매달려 보았다.[우리 둘이 먼저 한 번 만나요. 우리 사이에는 아직 오해가 많아요. 정말 이혼을 원한다면 오해를 풀고 나서 이야기해요.][둘이서 더 할 얘기는 없어요. 전에도 이혼 신고하러 가자고 했는데 당신은 나오지 않았죠.
“별로 중요하지 않은 사람이야. 너는 신경 쓰지 않아도 돼. 엄마랑 아빠가 처리할 거야.”온지유는 별이를 이 일에 얽히게 하고 싶지 않았다.별이는 아직 어리니까 행복하고 즐거운 어린 시절을 보내야 했다. 어른들의 문제에 휘말릴 이유가 없었다.하지만 별이는 그런 엄마와 아빠의 생각과 달랐다.“엄마, 아빠, 우리는 가족이잖아요. 제가 도울 수 있는 일이 있다면 돕고 싶어요.”“네가 네 자기 몸을 잘 돌보는 게 우리에게 가장 큰 도움이고 엄마랑 아빠는 너희를 잘 지킬 거야.”온지유는 손을 뻗어 별이의 작은 볼을 살짝 꼬집으며 말했다.그녀는 두 아이를 안전하게 보호할 것이고 검은 옷을 입은 남자의 정체는 여이현이 철저히 파헤칠 것이다.이제 집으로 돌아갈 시간이었다.“네, 저는 엄마 아빠를 믿어요! 두 분이 분명 잘 해내실 거라고요!”별이는 얼굴 가득 밝은 미소를 지었다.아이가 안전벨트를 바르게 착용한 것을 확인한 후 여이현은 차를 출발시켜 집으로 향했다....권다솔의 집.지난번 김영은과 권용민이 호텔까지 찾아온 뒤 권다솔은 정식으로 집으로 돌아와 살게 되었다.김영은은 집안의 가사 도우미들에게 말했다.“영양 있는 음식을 더 준비해서 다솔이의 건강을 잘 챙겨주세요.”“엄마, 정말 그러지 않으셔도 돼요. 저 정말 괜찮아요.”권다솔은 이 모습을 보며 속이 시큰해지고 쓰라렸다.역시 그녀를 가장 사랑해 주는 사람은 친부모라는 걸 깨달았다.그녀는 정말 큰 실수를 했었다.배진호 때문에 부모님과 다투다니, 그때 자신이 얼마나 어리석었는지 뼈저리게 느꼈다.“지금 네 모습을 좀 봐봐. 온몸에 살이 하나도 없잖니. 엄마는 이런 걸 다 겪어봤어. 여자는 아이를 낳든, 몸을 회복하든 반드시 영양을 잘 챙겨야 해. 그렇지 않으면 병을 남기기 쉽단다. 네가 지금 이렇게 좋은 환경에서 집으로 돌아왔는데, 왜 제대로 쉬면서 몸을 돌보지 않겠니?”김영은은 딸의 손을 꼭 붙잡고 진심 어린 목소리로 말했다.권다솔의 집안은 배진호의 집과는 전혀 달랐다.그들은 경
소미는 필사적으로 몸부림쳤다.하지만 그녀는 너무 어렸고 직원의 품에 안긴 상태에서 아무리 발버둥을 쳐도 땅에 닿을 수 없었다.그저 온지유 가족 세 사람이 점점 멀어져 가는 모습을 바라볼 뿐이었다.소미를 떠나보냈지만 온지유와 가족들의 마음은 여전히 무겁기만 했다.“이미 다 끝난 일이니까 이제 신경 쓰지 말고 음악이나 들으면서 기분을 풀어볼래?”여이현이 침묵을 깨며 말을 꺼냈다.온지유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아무 노래나 틀어줘.”여이현이 자동차 키를 꽂자 차량 스크린이 켜졌고 그 화면에 검은 옷을 입고 가면을 쓴 남자가 나타났다.그의 얼굴은 온통 가면에 가려져 있었고 오직 두 눈만 보였다.그는 위협적인 눈빛으로 여이현을 응시했다.“당신 누구야?”여이현의 목소리가 차갑게 변했다.왠지 이 남자가 소미와 무관하지 않을 거라는 느낌이 들었다.검은 옷을 입은 남자는 그의 질문에 즉답하지 않고 한참을 비웃더니 되물었다.“여이현, 아이가 둘 있다며? 그런데 왜 차 안에는 한 명만 있지? 다른 아이는 데리고 나오기 싫었던 거야? 아니면 그럴 능력이 없었던 거야?”“네가 아무리 능력이 뛰어나도, 죽은 사람을 되살리는 능력까지는 없겠지.”여이현은 그 말속에 숨겨진 의미를 즉시 알아차렸다.그의 시선은 점점 더 차가워지며 단호히 말했다.“소미는 네놈이 보낸 거였군.”그의 말은 질문이 아니라 확신이었다.예전부터 그는 소미 뒤에 분명 누군가가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그렇지 않았다면 이렇게 어린아이가 어떻게 그런 독약을 구할 수 있었겠는가.검은 옷을 입은 남자는 인정하지도 부정하지도 않았다.그 대신 그는 여전히 여이현을 도발하며 말했다.“알고 싶다면 직접 조사해 보라고. 다만 누가 더 빠를지 지켜보자고.”그 말을 마친 뒤 차량 스크린이 갑자기 꺼졌다.몇 초 뒤 화면이 다시 켜졌을 때는 이미 평소 상태로 돌아와 있었다.온지유의 표정 역시 어두웠다.“소미를 대사관에 데려다준 지 얼마나 됐다고 벌써 소식을 알고 우리 차까지 해킹한 걸
여이현이 뒤에서 돕지 않았다면 배진호 혼자 힘으로 무슨 수로 회사를 설립하고 지금의 성공을 이룰 수 있었겠는가?예전에는 권다솔이 그를 너무나도 깊이 사랑했기 때문에 아무리 애를 써도 그 틈을 파고들 수 없었다.하지만 지금은 배진호의 행동으로 인해 그 사랑에 금이 갔다.지금의 남태건은 자신이 그 금을 점점 더 크게 만들고 결국 완전히 깨트릴 수 있을 거라는 자신감이 있었다!...대사관.소미는 울면서 여기까지 왔지만 온지유와 여이현의 결정을 뒤집을 수는 없었다.차가 멈추자 온지유는 문을 열고 차에서 내린 뒤 소미를 차에서 데리고 내려오려고 했다.“싫어요! 저 차에서 안 내려요!”소미는 작은 손으로 안전벨트를 꼭 움켜쥐고 놓지 않았다.손등에는 붉은 자국이 선명하게 남았다.커다란 눈에서 눈물이 뚝뚝 떨어져 볼을 타고 옷 위로 흘러내렸다.“부탁이에요. 저를 집으로 데려가 주세요. 전에는 저를 가족처럼 대해 주겠다고 했잖아요. 그런데 왜 저를 버리려는 거예요?”온지유는 그 말을 듣고 황당해서 웃음이 나왔다.지금 이 상황에서 소미는 아직도 도덕적 책임을 들먹이다니.온지유는 더 이상 불필요한 말을 하지 않았다.그녀는 허리를 숙여 소미의 손을 억지로 떼어냈다.그리고 강제로 그녀를 차에서 끌어내 대사관 안으로 데리고 들어갔다.직원들 앞에서 온지유는 간단하게 상황을 설명했다.“저는 안 가요! 저는 당신들 나라 사람이 아니에요. 이분들이 제 아빠, 엄마예요. 우리는 가족이고 별이는 제 오빠라고요!”소미는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발버둥 쳤다.직원들에게 거짓말을 하면 자신의 운명이 바뀔 거라고 믿고 있었다.하지만 어른들의 세계는 냉혹했다.사실이 아닌 몇 마디 거짓말로 모든 것을 뒤집을 수는 없는 것이었다.직원은 곧바로 소미의 입국 기록을 확인했다.이 기록은 그녀의 신원을 증명할 수 있었다. 직원은 온지유에게 말했다.“우리는 이 아이를 최대한 빨리 본국으로 돌려보내고 가족에게 연락할 것입니다.”가족이 그녀를 데리러 올지 말지는 그들 문제였다
권다솔은 확실히 이 일을 부모님들이 벌일 수 있다고 생각했다.그녀는 더 이상 남태건에게 나가라고 말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와 대화를 이어가지도 않고 이내 창밖의 지나가는 차들을 바라봤다. 남태건이 뒤에서 무슨 말을 하건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하지만 그가 다시 부모님들을 언급하자 그제야 권다솔은 고개를 돌렸다.“다솔아, 네가 결혼을 했다 하더라도 넌 여전히 두 분의 딸이야. 설마 정말 두 분이 아무 말 없으실 거라고 생각한거야? 너와 진호 씨 일은 이미 다 알고 계셨어. 네가 묵은 이 호텔도 부모님이 지분을 갖고 계시는걸.”권다솔은 멍하니 그를 바라만 보고 있었다. 그 점은 눈치채지 못했다.권다솔은 급히 휴대폰을 꺼내 검색해 봤다. 아니나 다를까 부모님은 이 호텔 체인의 지분을 1% 갖고 있었다.이 정도 지분으로는 호텔의 경영에는 손을 댈 수 없었지만 투숙인을 찾는것 쯤은 식은 죽 먹기였다.정말 남태건을 오해했던 것이었다.권다솔은 남태건에게 사과했다.“미안해요, 조금 전에는 당연히 태건 씨가 부모님을 데려온 줄 알았어요. 하지만 저희는 정말로 함께 할 수 없어요.”“알아, 우리는 그저 친구일 뿐이라는 거. 하지만 너도 알다시피 부모님은 받아들이시지 않잖아. 예전부터 우리를 이어주려고 했던 분들이시고 지금 배진호와도 이런 꼴이 돼버렸으니 부모님들도 네가 빨리 다시 서길 바라는 거야.”남태건은 자신에게 아무런 사심도 없는듯한 프레임을 씌웠다.하지만 사실 이 모든 일은 그의 계산 아래 이루어진 일이었다.배진호의 일을 부모님에게 과장해 알린 것도, 권다솔이 묵고 있는 호텔을 알아내 직접 찾아온 것도 남태건이었다.그의 부모 역시 아들이 권다솔과 결혼하기를 간절히 원했으니 더는 반대할 이유가 없었다.양쪽 집안의 조건도 비슷했기에 혼사는 완벽한 선택이었다.“그러니까 우리 둘이 잠깐 연기를 하자. 부모님들께 보여주기 위해서 말이야. 당분간 아저씨랑 아주머니가 널 많이 신경 쓰시겠지만 시간이 좀 지나면 더는 우리에게 신경 쓰지 않으실 거야.”남태건
권다솔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어머니의 말을 거절했다.“엄마, 나 지금 겨우 진호 씨랑 헤어졌고 잠깐 머리 식히러 나온 거예요. 그런데 어떻게 벌써 다른 남자랑 결혼하라고 할 수 있어요? 난 정말 그렇게는 못 해요.”정말로 새로운 인연을 생각한다고 하더라도 시간이 지나야 가능한 일이었다.더구나 그녀는 지금 애초에 그런 생각 자체가 없었다.그녀는 남태건을 좋아하지 않았고 다시 결혼하고 싶지도 않았다.“다솔아, 엄마도 네 생각과 같았어. 네가 먼저 이 상황에서 벗어난 뒤에 다시 시작해 보자고. 그런데 지금 네가 혼자 호텔에서 배달 음식으로 끼니를 때우는 걸 보면 엄마랑 아빠가 어떻게 마음을 놓겠니?”김영은은 딸을 계속 설득했다. 차라리 남태건이 곁에 있어 준다면 최소한 서로 의지라도 할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었다.권용민은 더 진지하게 말했다.“태건이는 너에게 정말 진심으로 잘하려고 노력 중이야. 그런데 네가 그 마음을 계속 거부해서 무슨 좋은 점이 있단 말이냐?”집안에서 딸을 평생 부양할 능력은 있었고 그녀를 책임지는 데 문제도 없었다.그러나 부모라는 존재는 언젠가 나이가 들어 세상을 떠나는 날이 올 수밖에 없다. 그때가 되면 다솔이는 혼자서 어떻게 살아가겠는가?배진호는 바깥에서 다른 여자들과 마음껏 즐길 수 있는데 그들의 딸은 그런 쓰레기 같은 남자 때문에 평생 고통받아야 한다는 것인가!“아빠, 엄마. 제 감정도 좀 생각해 주세요. 전 방금 아이를 잃었어요. 그런데 바로 다른 남자를 받아들이라고요? 저도 사람이에요. 애완동물 가게의 고양이도 아니잖아요. 봄이 되었다고 아무렇게나 짝지어 새끼를 낳을 수 있는 존재가 아니라고요.”권다솔은 깊은 한숨을 쉬었다.그녀는 누구도 상처 주고 싶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자신을 희생하고 싶지도 않았다.권용민은 얼굴을 찌푸리며 말했다.“너 지금 그게 무슨 말이야!”권용민은 딸을 억지로 결혼시키려는 것이 아니었다. 문제는 권다솔이 배진호를 잊지 못하는 상태라는 점이었다. 만약 두 사람이 다시 이어지기라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