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혜연은 속이 말이 아니었지만 계속 신무열의 방에 있으면 그가 화를 낼까 봐 바로 방에서 나왔다. 신무열의 심기가 불편해지는 것을 바라지 않았다.김혜연은 신무열 대신 법로 찾으러 갔다.법로는 눈시울이 붉어진 김혜연을 보더니 말했다.“무열이가 괴롭힌 거라면 내가 대신 혼내줄게.”다른 일은 몰라도 이 정도는 해줄 수 있었다.법로는 지금 이 위치까지 오르기까지 겪어보지 못한 것이 없었다. 오랫동안 신무열의 곁을 지켜온 김혜연이 무슨 마음을 가지고 있는지 진작에 알고 있었다.감정이라는 것은 억지로 될 일이 아니었다.그것도 모자라 신무열은 늘 자기주장이 강한 사람이었으니 말이다.김혜연은 법로가 단도직입적으로 말할 줄 몰랐는지 호흡을 가다듬으면서 말했다.“법로님, 저 좀 도와주면 안 돼요? 저 도련님을 정말 사랑해요... 도련님 곁에 여자도 없는데 제가 평생 옆을 지키면서 내조해 드릴게요.”어쩔 수 없이 법로한테 도움 청하러 온 김혜연은 울먹거리고 있었다. 그녀는 어릴때부터 지금까지 쭉 신무열을 사랑했었다.전에 고백하지 못했던 이유는 신무열의 곁에 있을 자격이 없을까 봐 공부도 열심히 하고 모든 노력을 다했다.겨우 고백할 용기와 기회가 생겨 고백했거늘 신무열이 거절할 줄 몰랐다.김혜연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나 정도면 나쁘지 않은데?’김혜연은 심지어 눈치없이 온지유한테 상처를 줘서 그런거라면 사과할 마음도 있었다.법로를 찾아온 것은 그저 신무열과 단둘이 있을 기회를 얻고 싶어서였다.그런데 법로가 이런 태도일 줄은 몰랐다.“김혜연, 너희 아버지가 Y 국에 큰 공헌을 하셔서 나도 너를 잘 챙겨주려고 했어. 다른 일이라면 도와줄 수 있지만 이 부분은 나도 어쩔 수 없어.”법로가 힘겹게 입을 열었다.전에 신무열한테 소개팅을 주선하려고 혹시나 하는 마음에 물어봤는데 신무열이 극구 싫다고 해서 다시는 물어본 적이 없었다.만약 신무열도 김혜연을 좋아한다면 그녀가 자기한테 도움을 청할 일도 없다고 생각했다.온지유와 여이현을 통해 중간에서
온지유는 그제야 깨닫고 여이현의 손을 잡았다.“체내에 독이 아직 남아있는 거예요?”“미안해...”여이현의 힘없는 목소리에 온지유는 가슴이 찢어지는 듯했다.“저는 이현 씨한테서 미안하다는 말을 듣고 싶지 않아요. 저희 이만 돌아가요!”온지유는 여이현을 데리고 다시 브람을 만나러 가고 싶었다. 여이현한테 아무런 이상이 없어 법로가 체내에 있는 독을 깔끔히 처리한 줄 알았다.그런데 여이현이 참고 있었을 줄이야...온지유는 너무나도 괴로웠다.그런데 여이현이 그녀의 손을 꽉 잡으면서 고개를 흔드는 것이다. 온지유가 지금 당장 브람 찾으러 가고 싶어 한다는 것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다만 브람이 만약 해독제를 줄 마음이 있었다면 아무 말 없이 보내주지 않았을 것이다.“순순히 줄 마음이 없을 거야. 우리랑 협상하려고 할 거라고. 난 그 사람이랑 협상하고 싶지 않아. 그렇다고 내가 죽게 내버려 두진 않을 거야.”여이현은 온지유의 손을 꽉 잡고 최선을 다해 버티고 있었다.그는 온지유가 자기 때문에 고개 숙이는 모습을 보고싶지 않았다.반대로 온지유는 여이현이 무사하기만 하다면 무슨 짓이든 할수 있다고 생각했다. 마치 여이현이 자신을 위해 목숨마저 내바칠 수 있는 것처럼 말이다.“이현 씨가 죽는 모습을 보고싶지 않았다면 왜 떠날 때 해독제를 주지 않았는데요.”브람은 사실 여이현이 돌아와서 비는 모습을 보고 싶었다.“지금 찾아가봤자 해독제를 주지 않을 거야. 지유야, 우리 이만 돌아가. 아버님이 별이를 치료해 주고 있잖아.”Y 국에는 법로 말고도 인명진이 있었기 때문에 어떻게든 해독제를 구할 방법이 있다고 생각했다.온지유는 여이현을 이해했지만 한 번이고 두 번이고 시도해 보는 것보다 차라리 브람을 찾는 것이 더 빠르다고 생각했다.다음 순간, 여이현은 온지유를 품에 안고 그녀의 등을 토닥토닥해 주었다.“괜히 걱정하지 마. 내가 있잖아. 널 혼자 내버려 두지 않겠다고 했잖아. 일단... 별이 찾으러 가. 우리를 보고 싶어 할 거야.”“그래요..
온지유와 여이현은 Y 국으로 돌아가는 택시 안이었다.뒷좌석에 앉아있던 온지유는 수시로 여이현의 상태를 확인했는데 그래도 다행히 상태가 너무 나쁘지는 않았다.가는 도중에 누군가 길을 막길래 여이현은 직감적으로 브람이 시킨 짓이라고 생각했다.그는 온지유더러 차 안에 있으라고 했다.“내가 내려가서 확인해 볼게. 상황이 안 좋으면 기사님더러 가던 길 계속 가라고 해. 네 예상이 맞았어. 무조건 Y 국에 남아있어야 했어.”만약 브람이 국제포럼 반응을 신경 쓰지 않기로 마음먹었다면 여이현은 온지유와 별이의 안전을 위해서 이곳에 남아있기로 했다.그런데 온지유가 확신에 찬 모습으로 고개를 흔드는 것이다.“저한테 무슨 일이 있든 제 옆에 있겠다고 했잖아요. 그런데 이제 와서 저 보고 떠나라고요? 안 돼요. 이현 씨, 약속 꼭 지켜요.”온지유의 말이 끝나자마자 차 한 대가 앞을 막았다. 그 뒤에 있는 여러 대의 차량은 가까이 오지 않았고, 오히려 일정한 거리를 유지했다.여이현의 표정은 확 어두워지고 말았다.그런데 차에서 한 사람만 내리는 것이다. 여이현은 그가 브람의 보디가드라는 것을 한눈에 알아보고 아래위로 훑어보았다.다행히도 보디가드는 무기를 휴대하고 있지 않았다.보디가드는 성큼성큼 걸어와 차 옆에 멈추더니 공손하게 인사했다.“도련님, 대통령님께서 해독제를 보내오라고 하셔서요.”온지유와 여이현은 별로 기뻐하지 않았다. ‘떠날 때까지도 해독제를 줄 생각을 하지 않더니 보디가드한테 해독제를 보내주라고 했다고? 무조건 꿍꿍이가 있을 거야.’보디가드는 굳게 닫힌 문을 보고, 또 꼼짝하지도 않는 여이현의 모습을 보더니 계속해서 말했다.“도련님, 지금 전 세계에서 관심을 가지고 대통령님을 지켜보고 있습니다. 만약 대통령님께서 언론을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면 S 국에서 바로 처리했겠죠. 도련님한테 나쁜 마음을 품고 있다면 저만 보내지 않았겠죠. 정말 못 믿으시겠으면 이 해독제의 성분을 확인해 보시든가요.”보디가드는 거짓말을 하는 것 같지 않았다.여이현과
말을 마친 후 브람은 전화를 끊었다.끊어진 신호음만 여이현의 귓가에 들려왔다. 그는 알고 있었다. 브람이 확실히 명예를 신경 쓰는 사람이라는 것을.핸드폰을 넣은 후 온지유를 끌어안았다.“이제 돌아가면 확인해 보자. 이 약이 진짜 약이 맞는지.”만약 독이 아니라 진짜 약이라면 그는 온지유와 별이와 함께 경성으로 돌아가 온지유가 바랐던 삶을 살 수 있다....한편 별이네 상황.별이는 열이 펄펄 끓어 체온이 40도까지 올라갔다. 이건 정상적인 반응이 아니었던지라 법로는 다소 당황하며 움직이고 있었다.법로는 별이의 몸을 꼼꼼히 살폈다. 그저 감기라는 것을 확인한 후에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만약 다른 문제라도 생겼다면 그는 나중에 온지유에게 어떻게 말해야 할지 몰랐다.일단 별이에게 물수건을 올려주며 열을 내리게 하려고 했지만 별다른 효과가 없었다. 그래서 수액을 꺼내 아이의 팔에 주삿바늘을 꽂았다. 그는 별이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했고 수액이 텅 빌 때까지 곁에 있었다.점차 별이는 회복했다. 신무열도 별이가 걱정되어 직접 주방으로 들어가 죽을 만들었다.김혜연은 신무열이 혼자 주방에서 바쁘게 움직이는 모습을 보곤 바로 다가갔다.“Y 국을 이끄시는 분이 되었는데 누가 이런 모습을 보기라도 한다면 분명 비웃을 거예요. 아니면 도련님을...”“왜, 난 내 조카에게 죽 끓여주는 것도 남의 웃음거리가 될까 봐 걱정하면서 못 해주는 건가? 난 전부터 아이들에게 글을 가르쳤어. 그것도 나한테는 흑역사로 되나?”신무열은 김혜연에게 말을 끝마칠 기회를 주지 않았다. 그저 담담하게 심지어 고개를 돌려 그녀를 보지도 않고 반박했다.그런 그의 행동은 아주 가슴이 아팠다. 하지만 별다른 방법이 없었다. 신무열의 곁에 남기로 한 이상 열심히 신무열의 마음을 얻으려고 노력하는 수밖에 없었다.“전 그런 생각한 적 없어요. 방금 제가 한 말도 그런 뜻이 아니에요. 전 그냥 도련님이 걱정되어서 그랬어요. 지금은 예전이랑 신분이...”“난 그런 신분 따위 필요 없어.”
“내가 너한테 왜 설명해줘야 하지?”김혜연은 순간 심장이 조여왔다.그녀와 신무열은 확실히 아무 사이도 아니었기에 신무열도 사사건건 그녀에게 설명해줄 필요가 없었다.마음이 괴로웠지만 어쩔 수 없었다.김혜연은 그를 보았다. 두 눈에 어느새 눈물이 맺혔다.“저도 알아요. 도련님께 이런 질문을 할 자격이 없다는 걸요. 하지만... 하지만 저는 정말로 도련님이랑 잘 되고 싶어요. 만약 정말로 그런 거라면 제가 도련님을 도와줄 수 있는 거잖아요.”두 사람은 가짜 결혼을 올려 사람들의 눈을 속일 수 있다.사람과 사람이 한 공간에서 같이 살다 보면 언젠가 그가 그녀에게 마음이 생겨날 거로 생각했다.그녀는 굳게 믿었고 언젠가 그가 자신을 사랑하게 만들리라 다짐했다.그러나 신무열은 차갑게 픽 웃었다.“넌 네 자신을 너무 과대평가하고 있군.”그는 고개를 돌렸다. 더는 그녀에게 눈길조차 주고 싶지 않았다.심지어 그는 김혜연을 공기 취급했다.김혜연은 이곳에서 그를 도와주려고 해도 도와줄 수 없었다.결국 그저 그가 죽을 만드는 모습을 지켜보는 수밖에 없었다.신무열은 따끈한 죽을 그릇에 담아 별이에게 갔다.별이는 힘없이 누워있었고 안색이 창백했다.신무열을 본 순간 아이는 갈라진 목소리로 말했다.“삼... 촌... 우리... 엄마...는요?”아주 느릿하게 물었다. 검게 빛나는 두 눈빛에선 기대가 가득했다.신무열은 왜 그런지 모르겠으나 순간 가슴이 미어지는 것 같았다.예전에 별이가 온지유의 아이라는 것을 몰랐을 때는 행여나 온지유에게 부담이라도 줄까 봐 아이를 다른 사람에게 보낼 생각도 했었다. 하지만 지금은 너무도 마음이 괴로웠다.이 어린아이가 대체 얼마나 더 아파야 한단 말인가?신무열은 죽을 뜬 후 후후 불었다.“엄마랑 아빠는 지금 일하고 있어. 이따가 삼촌이 문자를 보내 볼게. 내일, 내일 별이랑 전화 통화 해줘도 돼?”별이는 고개를 끄덕였다.신무열은 별이를 아주 세심하게 간호했다. 하지만 김혜연은 그보다 더 정성스럽게 간호해주었다.김
김혜연의 붉게 물든 눈가는 다소 슬퍼 보이기도 했다.그녀는 신무열은 오랫동안 짝사랑했던지라 가슴이 너무도 아팠다.김혜연은 자신이 신무열에게 고백하면 신무열이 어느 정도 그간 그녀의 행동에 감동을 받아 자신을 받아들일 수 있을 거로 생각했다.이렇게 생각한 그녀는 조금만 더, 조금만 더 노력하면 신무열의 마음을 얻을 거라 생각했지만 전부 그녀의 착각이었다.신무열은 날이 갈수록 그녀에게 차갑게 대했다.서늘함이 맴도는 그의 까만 두 눈은 그녀를 증오하는 것 같기도 했다.“만약 내 말을 귓등으로 듣는 거라면 내가... 어떤 짓을 하든 후회하지나 마.”신무열은 이를 빠득 갈며 말했다. 지금 이 순간 정말로 살기가 생겨났다.싫어하는 사람이 자꾸만 자신을 졸졸 따라다니며 눈치 없이 굴지 않는가.그는 절대 김혜연이 여자라서 봐줄 생각이 없었다. 왜냐하면... 이미 충분히 봐주고 있는 것이었으니까.김혜연은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신무열이 이런 위협까지 할 줄은 몰랐기 때문이다.할 말이 더 있었지만 신무열이 몸을 돌린 탓에 더는 할 수 없었다.그녀는 멀어져가는 그의 뒷모습을 보았다. 피가 통하지 않을 정도로 주먹을 꽉 쥐었다.‘안돼! 이렇게 포기할 수 없어. 포기하란다고 포기하면 그동안 노력한 게 뭐가 돼!'함께 있는 시간이 길어지고 그녀가 더 노력하면 언젠가 신무열이 자신의 진심을 받아주리라 생각했다.한편 신무열은 김혜연을 두고 나온 후로 다시 별이의 곁으로 돌아왔다.별이는 그가 혼자 돌아오자 호기심 가득한 눈빛으로 그를 보았다.나이가 어리긴 했지만 별이는 사실 아는 것이 많았다.김혜연이 자신에게 잘해주고 신무열을 좋아한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다만 별이가 말을 하기도 전에 법로가 먼저 나직한 목소리로 말했다.“별이도 아는 걸 네가 모르리라곤 생각하지 않는다.”신무열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는 당연히 법로가 한 말의 의미를 알고 있었다.하지만 그는 정말로 김혜연에게 관심이 없었다. 이런 일로 사랑하지도 않는 사람과 평생을 보낼 생각도
그렇지 않았다면 두 사람이 위협을 받는 것이 아닌 사람들이 그들에게 엎드려 절하며 비위를 맞춰주려 했을 것이다.온지유는 아이의 이마에 자신의 이마를 가져다 대며 먹먹한 목소리로 말했다.“미안해, 별아. 엄마가 왔어...”“괜찮아요, 엄마...”별이는 느릿하게 말했다. 아이의 두 눈은 밝게 빛나고 있어 마치 밤하늘에 뜬 별 같기도 했다.아이가 온지유를 엄청 좋아했고 평생 온지유의 곁에만 붙어 있고 싶어 하는데 어떻게 온지유를 원망할 수 있겠는가.게다가 여이현도 돌아오지 않았는가.별이는 손을 뻗어 온지유의 눈물을 닦아 주었다.대부분 아이들은 토실토실했지만 별이는 아니었다. 야위었을 뿐 아니라 손에는 살집이 없었다.그녀는 여이현이 구해온 약이 떠올라 얼른 고개를 돌려 그를 보았다.“얼른, 얼른 그 약을 아버지한테 드려. 정말로 해독제가 맞는지 확인해야겠어.”만약 해독제가 맞는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을 것이다.아니라면 브람에게 속은 것으로 치면 된다. 잃은 것은 없었으니까.다만 약물을 검사한 뒤 얼른 여이현을 치료해야 했다.여이현은 고개를 끄덕였다.다음 순간 그는 온지유와 별이게게 다가갔다.온지유의 어깨를 꽉 잡더니 별이의 이마에 뽀뽀를 해주었다.“별아, 괜찮을 거야. 그냥 감기 걸린 거니까 아빠 금방 다녀올게.”별이는 고개를 끄덕였다.여이현은 또 온지유의 어깨를 토닥인 후 걸음을 옮겼다.그가 법로에게 해독제를 건네자마자 법로는 바로 성분을 검사했다.법로 뿐이 아니라 인명진도 도왔다.다행히 그 약은 해독제가 맞았다.여이현은 해독제가 맞는다는 소식을 들은 후 빠르게 먹어보았다.그리고 빠른 속도로 온지유를 찾아갔다.인명진은 당황한 얼굴로 서 있었다.그러자 법로의 낮게 깔린 목소리가 들려왔다.“넌 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거냐?”그는 줄곧 인명진을 관찰했다. 행여나 무슨 수를 쓸까 봐 말이다.그런데 인명진은 얌전했을 뿐 아니라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인명진이 어떻게 법로가 한 말의 의미를 모르겠는가.그저 씁쓸한 미소를 지
순간 분위기는 조용해졌다.덩치 큰 남자는 눈을 가늘게 접었다. 술도 확 깨는 기분이었다.“네가 신무열이냐?”신무열은 그와 쓸데없는 대화를 주고받고 싶지 않아 바로 총을 들어 쐈다. 총알은 덩치 큰 남자를 아슬아슬하게 빗겨 나갔다. 남자는 순간 분노가 치밀어 올라 소리를 질렀다.“다들 뭘 멍하니 서 있어? 얼른 죽여!”그러나 신무열 옆에 있던 요한이 뭔가를 던졌던지라 그들은 앞이 보이지 않는다는 두려움에 움직일 엄두가 나지 않았다.덩치 큰 남자는 점점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이를 빠득 갈았다. 최대한 신무열을 찾아보려고 애를 쓰면서 신무열을 향해 총을 겨눴다.이내 남자의 얼굴에 비릿한 미소가 지어졌다. 눈엣가시인 신무열을 드디어 처리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가만히 있으면 천국에 갈 수 있는 것을 굳이 그가 있는 곳으로 찾아왔으니 반드시 지옥으로 보내주리라 생각했다.요한의 눈빛이 흔들렸다. 이때 누군가 신무열의 앞으로 확 나타나 총알을 대신 맞아주었다. 피가 사방에 튀었다.김혜연의 몸에서 힘이 빠졌다. 신무열은 얼른 손을 뻗어 그녀를 잡아주었으나 덩치 큰 남자는 기회를 놓치지 않고 또 한 발 더 쐈다.그녀는 고개를 들어 신무열을 보았다. 다소 은은한 미소를 지었다. 신무열의 품에서 죽는다고 생각하니 이상하게도 만족감이 느꺄쟜다.신무열은 있는 힘껏 그녀의 어깨를 잡았다.“김혜연, 이 멍청한 여자야! 내가 언제 죽으라고 허락했는데! 죽지 마, 내 허락 없이는 죽지 말라고! 이렇게 죽으면 내가 두고두고 후회하면서 죄책감에 시달릴 것 같아서 그러는 거야...? 난 절대 널 그리워하지도 않을 거라고! 그러니까 꿈 깨! 죽지 마!”신무열은 누군가에게 빚을 지고 싶지 않았다. 게다가 그는 김혜연에게 분명하게 말했었으나 김혜연은 그의 말을 귓등으로 들었다. 김혜연은 그의 품에 안겨 죽어가고 있었다. 그녀가 죽게 되면 그는 나중에 김씨 가문에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이 빚을 또 어떻게 갚아야 할까?김혜연은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온몸에 힘이 빠지면서
“별이 아주 잘했어! 좋은 걸 나눌 줄도 알고. 우리 아들 정말 잘 크고 있네.”온지유는 아들에게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부모로서 그녀는 아들과 딸이 화목하게 잘 지내고 힘들 때 서로 도와주며 의지하길 바랐다.여하간에 부모를 제외한 두 사람이 세상에서 제일 가까운 사이였으니까.여이현은 딸을 안고 거실을 두어 바퀴 걸었다. 그러고 나서 다시 아기 흔들이 의자에 눕혀 김명자에게 맡겼다.저녁은 이미 준비되었다. 세 사람은 함께 레스토랑으로 가서 즐겁게 저녁을 즐겼다.저녁을 먹고 난 별이는 애니메이션을 보러 갔고 심심해진 온지유는 핸드폰을 들었다.그러다가 우연히 권다솔이 보낸 답장을 보았다.[다음 주에 진호 씨랑 가정 법원에서 만나기로 했어요. 이혼할 거거든요.]온지유는 믿어지지 않아 눈을 비볐다.‘두 사람 사이가 좋지 않았었나? 얼마 전만 해도 다솔 씨가 나한테 임신한 소식을 알려줬었잖아. 그런데 갑자기 이혼한다고.?'그녀는 누군가 권다솔 핸드폰을 해킹한 것은 아닐까, 아니면 게임을 하다 져서 벌칙으로 이런 문자를 보낸 것이 아닐까 생각했다.[농담이죠? 다솔 씨, 이런 농담은 재밌지 않아요. 이혼이란 단어는 함부로 꺼내는 게 아니에요.][전 농담이 아니에요. 정말로 이혼할 거예요. 무조건 이혼할 거예요. 전 이미 이혼하기로 마음먹었으니까 누구도 절 말릴 수 없어요.]권다솔은 답장하면서도 답답한 가슴에 짜증이 솟구쳤다.만약 부모님께 이 사실을 알린다면 무조건 남태건을 칭찬하는 말만 가득할 것이다. 어차피 그들은 그녀가 다른 남자를 찾아 상처만 준 배진호를 잊기를 바랄 테니까.하지만 친구들에게 털어놓기엔 입이 떼어지지 않았다.결국 고민 끝에 온지유에게 이 사실을 털어놓게 된 것이다. 온지유에겐 아이가 둘이나 있었으니 그녀의 마음을 잘 이해해줄 것으로 생각했다.[혹시 전화 통화 가능해요? 아니면 영상 통화라도 가능할까요?]온지유도 대체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고 싶었다. 그녀는 핸드폰을 들고 안방으로 들어온 뒤 문을 꼭 닫았다. 그리고 영상
온지유는 지금 당장 모임을 할 마음이 없었다.조직 문제도 아직 해결되지 않았는데, 괜히 권다솔과 배진호를 만나면 그 조직의 눈길이 그들한테까지 옮겨 갈 수 있지 않겠는가. 그건 감사가 아니라 민폐를 끼치는 일이었다.“집에 가서 내가 진호 연락해 볼게. 마침 회사에 진행 중인 프로젝트가 있는데 같이 해보고 싶었어.”여이현은 한편으로는 배진호를 도와주려는 마음이었고, 또 한편으로는 그의 성실한 인품을 믿었다. 큰 일이든 작은 일이든 맡기면 제대로 해낼 사람이라고 생각한 것이다.“됐어, 운전에 집중해. 내가 그냥 다솔 씨한테 문자나 보낼게. 이 시간대면 두 사람 다 일하고 있을 수 있어.”온지유는 휴대폰을 꺼내 권다솔에게 귀여운 이모티콘 하나를 보냈다. 상대가 답장을 하지 않자 더는 방해하지 않고 휴대폰을 넣었다.곧 차가 집 앞에 도착했고, 온지유는 포장된 음식을 들고 들어갔다. 집에 들어서자마자 별이가 후다닥 달려왔다.별이는 온지유 손에 든 음식을 신경 쓰지 않고 곧장 매달렸다.“엄마, 왜 이렇게 늦게 왔어요? 걱정했잖아요. 혹시 엄마한테 무슨 일 생긴 줄 알고 엄청 무서웠어요!”“엄마 괜찮아. 네가 좋아하는 치킨 사러 갔는데 사람이 너무 많아서 다 떨어졌었어. 그래서 새로 나오길 기다리느라 좀 늦어졌어.”온지유는 여이현과 눈이 마주치자 살짝 미소 지으며 선의의 거짓말을 했다. 두 사람 모두 아이에게 걱정을 끼치고 싶지 않았다.별이는 마치 어른처럼 깊은숨을 내쉬었다.“그렇다면 됐어요. 하지만 엄마 다음부터는 그런 상황이면 그냥 돌아와요. 굳이 거기서 기다릴 필요 없어요. 치킨 못 먹어도 상관없어요.”집에는 먹을 것도 많고 매일 식사도 푸짐하다. 굳이 치킨 하나 때문에 위험을 감수할 필요 없다.“우리 별이가 제일 착하네.”온지유는 별이를 번쩍 안아 한 바퀴 빙 돌았다.별이는 온지유에게 안겨 공중에서 빙글빙글 도는 느낌에 깔깔 웃었다. 그 모습에 온지유도 미소 지었다.한편 여이현은 온하윤 곁으로 다가가 그녀를 조심스럽게 안아 들었다. 손
여이현은 주변을 계속 돌며 온지유에게 전화를 하고 지나가는 사람들에게도 물어봤지만 아무런 성과가 없었다.바로 이때, 그가 거의 절망하려던 순간 뒤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여보.”온지유였다.여이현은 급히 돌아서서 성큼성큼 그녀에게 다가가 단숨에 안아 올렸다.“걱정했잖아. 널 찾을 수도 없고 전화해도 안 받고, 무슨 일 생긴 줄 알고 너무 무서웠어.”만약 온지유에게 큰일이라도 났다면 그는 어떻게 살아갈까 싶었다. 아이들도 아직 어린데 엄마를 잃으면 어떻게 건강히 자랄 수 있겠는가.“미안해, 방금까지 경찰서에서 진술하느라 휴대폰을 무음으로 해놨어. 나 멀쩡하니까 걱정하지 마.”온지유는 부드럽게 달래며 그의 등을 가볍게 토닥였다.“정말 괜찮아.”“근데 피가 묻었잖아.”여이현은 그녀를 놓고 위아래로 살펴보다 원피스 군데군데 묻은 핏자국을 발견하곤 마음이 덜컥 내려앉았다.“어디 다친 거야? 지금 당장 병원부터 가자.”“내가 다친 거 아니야. 이건 그 인간들 피가 묻은 거고 나는 멀쩡해. 믿기지 않으면 봐, 상처 난 데 있어 보여?”온지유는 일부러 소매를 걷어 올려 맨살을 보여주었다. 팔에는 약간의 멍 자국만 있을 뿐 큰 상처는 없었다.그렇다 해도 여이현은 여전히 안심할 수 없었다.“저 자식들 그냥 넘어가지 않을 거야. 분명 또 찾아올 텐데...”“물 들어오면 둑 막고, 적 오면 장수로 막는 거지. 난 안 무서워. 게다가 너도 있잖아. 네가 우릴 잘 지켜줄 거라고 믿어.”온지유는 부드러운 목소리에 단단한 신념을 담아 말했다.어떤 조직이든 둘이 힘을 합치면 해결할 수 있을 것이라는 자신감이 그녀에게 있었다. 오늘도 결국 그녀가 괴한들을 제압하지 않았던가.“그놈들은 벌써 경찰서에 넘겼어. 아무 말도 안 하긴 했지만 내가 이걸 챙겨왔거든.”온지유는 가방을 열어 포장해 둔 주삿바늘을 꺼내 여이현에게 건넸다.“그놈들이 이걸 내 몸에 주사하려고 했는데 실패했어. 도리어 내가 그중 한 놈한테 주사해 줬지. 여기 약물 조금 남았으니까 뭐가 들
여이현 쪽.회의를 마치고 나서 여이현은 온지유에게 전화를 걸고 싶었다.시간상 지금쯤이면 온지유는 이미 집에 돌아가 있어야 했다. 그래서 여이현은 바로 집 전화로 전화를 걸었다.벨이 몇 번 울리고 받아 든 건 별이였다. 아이의 목소리가 수화기 너머로 들려왔다.“아빠!”“별아, 네 엄마는 지금 뭐 하고 있어?”여이현은 별이와 이야기할 때 한결 부드럽게 말하는 편이었다.“저도 잘 모르겠어요. 엄마가 아직 안 돌아왔어요. 저는 아빠한테 묻고 싶었는데... 왜 엄마를 그렇게 오래 잡아줬어요?”별이는 살짝 불만스러운 듯한 톤으로 물었다.여이현은 순간 미간을 찌푸렸다. 뭔가 이상했다.온지유는 서류를 전달한 뒤 회사에서 나갔다. 설령 잠깐 다른 일을 보더라도 이 시각이면 이미 집에 돌아가야 했다. 그런데 왜 아직도 돌아가지 않았을까?“별아, 집에 무슨 일은 없어? 혹시 이상한 사람이 와서 문 두드린다거나 그런 거 없었어?”여이현은 점점 초조해지기 시작했다.아무래도 집에 직접 가봐야 할 것 같았다. 별일 없으면 좋겠지만 혹시 문제가 생기면 그라도 있어야 아이들이 안전했다.별이는 하품을 하며 휴대전화를 들고 방 안으로 들어가 집 안 모니터를 켰다. 화면 속 마당은 텅 비었고 경호원 두 명이 순찰 중이었다.“아무도 안 왔고 다들 괜찮아요. 동생도 방금 깨서 도우미 아주머니가 우유를 줬고, 제가 잠깐 놀아줬어요. 지금 다시 자고 있어요.”상황을 전부 설명한 뒤 별이는 잠시 고민했다. 여이현은 절대 쓸데없는 질문을 하지 않는 사람이기 때문이다.그는 예전에 소미를 대사관에 보낼 때 차 안에서 검은 옷을 입은 사람들의 대화를 직접 들은 적이 있었다. 혹시 그들이 다시 나타난 걸까 싶었다.그리고 집에는 아무 일이 없지만 온지유가 밖에 있었다.별이의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아빠, 빨리 엄마를 찾아줘요. 저 엄마가 위험할까 봐 걱정돼요. 엄마가 치킨을 사 온다고 했는데... 한 번도 약속 어긴 적 없는데 이렇게 오래 안 돌아올 리 없어요. 분명 무슨 일
온지유는 그 자리에서 미동도 하지 않고 마음속으로 끊임없이 생각을 굴렸다. 두목은 잠시 기다리다 더는 견디지 못하고 나지막이 말했다.“내가 하나 더 알려줄게. 보물과 관련된 비밀이 있어. 그 보물을 손에 넣으면 진정한 부귀를 누릴 수 있어. 온지유, 가까이 좀 와봐. 이 비밀은 너만 들을 수 있어.”엄청난 재물이 눈앞에 있다면 누구라도 솔깃하기 마련이다.역시나 온지유도 고민하는 듯 보였다. 그녀는 한 발 한 발 그를 향해 다가갔다. 두목은 타이밍을 재다가 주머니에서 작은 주사기를 꺼내 온지유 팔뚝을 향해 세게 찔러 넣었다.그는 정말 조직을 배신할 리가 없었다. 온지유가 아무리 싸움을 잘해도 여자일 뿐이고, 여자는 속이 얕은 존재라고 그는 믿었다. 그냥 허황한 보물 얘기만 하면 금세 넘어올 거로 생각한 것이다.이 약이 주사되고 나면 5분도 안 돼 약효가 나타나고, 그때가 되면 온지유가 매달려 빌게 될 것이다. 여이현이 그녀를 얼마나 아낀다고 했던가? 아내를 붙잡고 협박하면 결국 여이현도 고개를 숙일 거고 조직에 보고하면 실적금이 나올 게 뻔했다.그는 벌써 미래의 달콤한 보상을 상상하고 있었다. 그런데 뜻밖의 변수가 발생했다.온지유는 재빨리 팔을 빼고 그가 다친 발가락을 세게 짓밟았다. 동시에 반격하듯 주사기를 빼앗아 순식간에 그의 팔에 꽂고 남아 있던 약물을 주입했다.그 모든 동작이 한 흐름처럼 매끄럽게 이어졌다. 두목은 눈을 휘둥그레 뜨고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온지유를 바라봤다.“어떻게 이럴 수가? 너, 넌 애초에 날 믿지 않았던 거지!”사람의 반응속도가 이렇게 빠를 리 없다. 딱 한 가지 가능성뿐이다. 처음부터 온지유는 그를 전혀 신뢰하지 않았고, 그가 무슨 말을 하든 준비하고 있었던 것이다.그가 늘어놓은 말은 온지유 귀에 한 자도 들어가지 않았다는 뜻이다.“내가 너희 같은 놈들을 왜 믿어?”온지유는 냉소를 지었다.“조금 전까지만 해도 긴장해 있던 네 부하들이 보물 얘기를 시작하니 갑자기 태연해지더라고. 이건 네가 거짓말을 하고
온지유가 한 걸음 한 걸음 다가가자, 두목은 손으로 바닥을 짚으며 무의식적으로 뒤로 물러섰다. 그의 눈엔 공포가 어렸다.온지유는 너무 강했다. 게다가 공격도 서슴지 않고 가차 없었다. 온몸이 쑤시고 아픈 와중에 특히 허리는 뼈라도 부러진 것처럼 견딜 수 없는 통증이 느껴졌다.“너... 너 오지 마! 우리한테 손대면 조직이 널 그냥 두지 않을 거야!”온지유는 비웃는 얼굴을 했다.“내가 바보로 보여? 지금 너희를 풀어준다고 해서 조직이 물러날 것 같아? 게다가 너희들도 그리 중요한 존재가 아닌 것 같은데?”솔직히 말해서 이들은 조직의 개나 마찬가지였다. 명령받은 대로 더러운 일을 대신하는 하수인에 불과했다. 일이 성공하면 서로 좋은 거겠지만 지금 상황은 실패로 끝나가고 있었다.“내가 너희를 보내준들 살아서 갈 수나 있을 것 같아?”온지유가 되받아쳤다.두목은 말없이 이를 악물었다. 그러다 결심한 듯한 표정으로 말했다.“온지유, 네 말이 맞아. 그러니 제발 우리를 놓아줘. 우린 조직으로 돌아가지 않을 거야. 대신 대가로 조직에 관한 비밀을 알려줄게.”“형님!”옆에 널브러진 부하들이 초조하게 외쳤다. 몸을 마음대로 쓸 수만 있다면 당장 달려가 그의 입을 막고 싶었을 것이다.지금 이 자리에서 조직을 팔아넘기는 건 자살 행위나 다름없다. 임무 실패 후 조직에 돌아가면 고생은 하겠지만 그래도 살아남을 여지는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조직을 배신하면 그때는 진짜 죽음뿐, 가족이나 친구들까지 몰살당할 수 있었다.“당신 부하들은 생각이 다르나 보네.”온지유는 그에게서 몇 걸음 떨어진 곳에 멈춰 섰다.“이 근처에 경찰서가 있어. 내가 경찰에 신고하면 5분 안에 출동할 거야. 너희 신분증 같은 건 없겠지? 불법으로 들어온 조직원일 테니까.”온지유는 조직의 실체를 몰랐지만, 이전에 소미가 외국 아이였던 점으로 미루어보면 아마 본거지는 해외일 가능성이 컸다. 이들 역시 비밀리에 들어온 범죄자일 가능성이 크다. 살인미수에 신분 미확인 불법입국자라면 잡혀도 결코
셋이 합세하면 온지유 하나 제압 못 할 리 없다고 생각했지만, 현실은 달랐다.온지유는 한 팔로 두목의 팔을 낚아채 뒤로 돌더니 다리를 들어 그의 허리에 세게 차올렸다. 끔찍한 통증이 밀려왔고 온지유가 팔을 꽉 잡아 허리를 펼 수도 없었던 두목은 독설을 퍼부었다.“놓지 못해? 안 놓으면 가장 독한 약을 주사할 거야. 그러면 넌 암캐처럼 땅바닥에 무릎 꿇고 구걸하게 될 거라고!”하지만 온지유는 이 말에 신경조차 쓰지 않았다.지금 그들을 놓아주고 웃는 얼굴로 화해를 청한다고 해서 그들이 물러나기라고 할까? 생각할 필요도 없다.이들은 목숨을 걸고 그녀를 잡으러 온 악당들이다. 이미 그녀를 납치해 약 실험을 할 생각인데 전력을 다해 저항해야 희미한 생존 가능성이 있을 뿐이다.울고불고 애원해 봤자 비참한 결말은 뻔하다. 차라리 부딪쳐보는 게 낫다.온지유는 몸을 홱 돌리며 두목의 팔을 놓아주고 동시에 엉덩이를 세게 걷어찼다. 강한 충격에 두목은 옆에 있던 사람에게 날아들었고, 그 사람은 예상치 못한 상황에 공격 태세를 취하던 중 그대로 두목의 얼굴을 주먹으로 후려치고 말았다.“멍청한 놈아!”두목은 화가 치밀었다. 결정적인 순간에 자기편을 때리다니 적이 무서울 게 아니라 이런 동료가 더 무서웠다.그러나 잘못된 부하를 둔 걸 후회해도 이미 늦었다. 다른 동료들이었으면 진작 온지유를 잡았을 것이고 시간도 낭비하지 않았을 것이다. 얼굴까지 한 대 맞았으니 그는 분통이 터질 노릇이었다.“죄, 죄송해요, 형님. 저도 반사적으로 그런 겁니다. 뭐가 갑자기 날아오길래 밀쳐내려다 보니...”남자는 허둥지둥 변명했다.조직 내 위계질서가 분명한 이상 두목은 그들의 목숨줄을 쥐고 있는 존재나 다름없었다. 두목이 마음만 먹으면 그는 내일까지 살지 못할 수도 있었다.“쓸모없는 놈.”두목은 이를 갈며 욕설을 내뱉었다. 하지만 지금 그걸 따지고 있을 시간은 없었다. 방금 굴욕을 당한 이상 이 치욕을 배로 갚아주고 싶었다. 그는 온지유를 개만도 못한 상황에 몰고 가리라 결심했
“당신들 누가 보낸 거지?”온지유는 고개를 돌려 눈앞에 있는 다섯 남자를 주의 깊게 살피며 이들의 전투력을 속으로 가늠했다. 충분히 상대할 만했다.이 골목만 빠져나가서 남쪽으로 백 미터 정도만 가면 경찰서가 있었다. 설령 이들을 이기지 못하더라도 경찰서까지 달려가기만 하면 안전해질 수 있었다.검은 옷을 입은 남자들은 온지유의 속내를 알 리 없었다. 그저 그녀가 겁먹어 차 안에서 내리길 주저한다고 생각할 뿐이었다.곰곰이 생각해 보면 가냘픈 여자가 이렇게 덩치 큰 사내 다섯 명을 보고 겁에 질려 몸도 못 가눌 만했다. 얼굴색 안 변한 것만으로도 대단하다고 여기는 중이었다. 반항할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이들은 남녀 체격 차이를 생각하면 원래부터 승산은 자기들에게 있다고 확신했다. 게다가 5:1이다. 온지유가 반항해 봤자 상대가 되겠냐는 식이었다.“누가 보낸 건지는 알 필요 없어. 조용히 내려오면 우리도 좀 부드럽게 대해줄 수 있어. 아니면 말이야...”우두머리로 보이는 남자는 차창 너머로 온지유를 음흉하게 훑어봤다.창문 너머로도 느껴지는 그녀의 좋은 몸매에 남자들의 시선이 더욱 탐욕스러워졌다. 애 키운 여자로는 안 보였다. 게다가 밤이라 주변에 사람은커녕 그림자도 없고 여기서 무슨 짓을 해도 막을 이가 없었다.“형님, 좀 있다가 저희도 한몫 챙겨주시면 안 되겠습니까?”옆에 서 있던 다른 남자들도 침을 흘렸다.두목은 크게 웃었다.“그래, 내가 먼저 놀고 끝나면 너희가 알아서 해. 단 숨은 붙여둬야 해. 조직에서 시킨 대로 살아 있는 상태로 데려가 약 실험해야 하잖아.”조직이라는 단어에 남자들의 얼굴에는 잠깐 긴장감이 스쳤다. 이 작은 표정 변화는 온지유의 눈을 피하지 못했다.이들이 속한 조직이 만만치 않은 모양이다. 약 실험이라는 단어에서 온지유는 바로 소미를 떠올렸다. 아마 그때와 같은 조직이 보낸 듯했다.저번에는 온하윤을 노리더니 이번엔 그녀를 목표로 삼은 것이다. 다행히 집으로 바로 돌아가지 않고 돌아다닌 덕에 이들을 집으로 유인
온지유는 별이를 향해 손을 흔들며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좋아, 다 들어줄게. 집에서 얌전하게 기다려, 엄마 금방 올게.”그녀는 운동화를 신고 집을 나섰다. 차고에 가서 아무 차나 골라 탄 뒤 빠른 속도로 회사 방향으로 차를 몰았다.온지유는 뒤따라오는 차량 같은 건 신경 쓰지 않았다. 그러나 사거리를 지날 때 멀리서 뒤따라오던 차 한 대가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며 따라붙고 있었다.곧 온지유는 회사가 보이는 곳에 차를 세웠다. 안으로 들어가자 안내 데스크 직원이 정중히 인사했다.“사모님, 안녕하세요.”“바쁘신데 신경 안 쓰셔도 돼요.”온지유는 발걸음을 재촉해 대표 전용 엘리베이터를 타고 꼭대기 층 회의실로 올라갔다. 그리고 여이현에게 서류를 건넸다.여러 사람 앞에서 둘은 별다른 말을 주고받지 않았다. 하지만 오래된 부부인 만큼 눈빛 하나로 서로의 뜻을 알 수 있었다. 그것은 두 사람만의 작은 비밀이었다.회의실에서 나오는 길에, 온지유는 여이현이 새로 채용한 비서와 마주쳐 가볍게 인사했다. 그녀는 별다른 의미를 두지 않고 회사를 나와 근처 쇼핑몰로 향했다. 거기에는 패스트푸드 가게가 있었고 별이가 좋아하는 장난감 가게도 가까웠다.주말이라 패스트푸드 가게에는 인파로 북적였다. 아이를 데리고 온 부모가 많았고 손님이 많으니 음식 나오는 속도도 더뎠다.종업원이 물었다.“손님, 에그타르트가 다 팔렸어요. 지금 굽고 있어서 20분 정도 기다리셔야 하는데 괜찮으세요?”별이는 에그타르트를 유난히 좋아하고 특히 이 집 것을 제일 좋아한다. 이미 온 김에 그냥 돌아갈 수는 없었다.“괜찮아요. 다 되면 불러주세요.”온지유는 기다리며 옆자리에 앉아 휴대폰으로 국제 뉴스를 훑어봤다.그때, 누군가의 시선이 그녀에게 꽂혀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몇 초 만에 온지유는 고개를 들어 주변을 살폈다. 주위엔 아이들이 시끄럽게 떠들 뿐 수상한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착각인가?‘하지만 그녀는 원래 직업상 위협에 민감하며 여성의 육감 역시 만만치 않다. 그러나 이곳에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