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혜연은 속이 말이 아니었지만 계속 신무열의 방에 있으면 그가 화를 낼까 봐 바로 방에서 나왔다. 신무열의 심기가 불편해지는 것을 바라지 않았다.김혜연은 신무열 대신 법로 찾으러 갔다.법로는 눈시울이 붉어진 김혜연을 보더니 말했다.“무열이가 괴롭힌 거라면 내가 대신 혼내줄게.”다른 일은 몰라도 이 정도는 해줄 수 있었다.법로는 지금 이 위치까지 오르기까지 겪어보지 못한 것이 없었다. 오랫동안 신무열의 곁을 지켜온 김혜연이 무슨 마음을 가지고 있는지 진작에 알고 있었다.감정이라는 것은 억지로 될 일이 아니었다.그것도 모자라 신무열은 늘 자기주장이 강한 사람이었으니 말이다.김혜연은 법로가 단도직입적으로 말할 줄 몰랐는지 호흡을 가다듬으면서 말했다.“법로님, 저 좀 도와주면 안 돼요? 저 도련님을 정말 사랑해요... 도련님 곁에 여자도 없는데 제가 평생 옆을 지키면서 내조해 드릴게요.”어쩔 수 없이 법로한테 도움 청하러 온 김혜연은 울먹거리고 있었다. 그녀는 어릴때부터 지금까지 쭉 신무열을 사랑했었다.전에 고백하지 못했던 이유는 신무열의 곁에 있을 자격이 없을까 봐 공부도 열심히 하고 모든 노력을 다했다.겨우 고백할 용기와 기회가 생겨 고백했거늘 신무열이 거절할 줄 몰랐다.김혜연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나 정도면 나쁘지 않은데?’김혜연은 심지어 눈치없이 온지유한테 상처를 줘서 그런거라면 사과할 마음도 있었다.법로를 찾아온 것은 그저 신무열과 단둘이 있을 기회를 얻고 싶어서였다.그런데 법로가 이런 태도일 줄은 몰랐다.“김혜연, 너희 아버지가 Y 국에 큰 공헌을 하셔서 나도 너를 잘 챙겨주려고 했어. 다른 일이라면 도와줄 수 있지만 이 부분은 나도 어쩔 수 없어.”법로가 힘겹게 입을 열었다.전에 신무열한테 소개팅을 주선하려고 혹시나 하는 마음에 물어봤는데 신무열이 극구 싫다고 해서 다시는 물어본 적이 없었다.만약 신무열도 김혜연을 좋아한다면 그녀가 자기한테 도움을 청할 일도 없다고 생각했다.온지유와 여이현을 통해 중간에서
온지유는 그제야 깨닫고 여이현의 손을 잡았다.“체내에 독이 아직 남아있는 거예요?”“미안해...”여이현의 힘없는 목소리에 온지유는 가슴이 찢어지는 듯했다.“저는 이현 씨한테서 미안하다는 말을 듣고 싶지 않아요. 저희 이만 돌아가요!”온지유는 여이현을 데리고 다시 브람을 만나러 가고 싶었다. 여이현한테 아무런 이상이 없어 법로가 체내에 있는 독을 깔끔히 처리한 줄 알았다.그런데 여이현이 참고 있었을 줄이야...온지유는 너무나도 괴로웠다.그런데 여이현이 그녀의 손을 꽉 잡으면서 고개를 흔드는 것이다. 온지유가 지금 당장 브람 찾으러 가고 싶어 한다는 것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다만 브람이 만약 해독제를 줄 마음이 있었다면 아무 말 없이 보내주지 않았을 것이다.“순순히 줄 마음이 없을 거야. 우리랑 협상하려고 할 거라고. 난 그 사람이랑 협상하고 싶지 않아. 그렇다고 내가 죽게 내버려 두진 않을 거야.”여이현은 온지유의 손을 꽉 잡고 최선을 다해 버티고 있었다.그는 온지유가 자기 때문에 고개 숙이는 모습을 보고싶지 않았다.반대로 온지유는 여이현이 무사하기만 하다면 무슨 짓이든 할수 있다고 생각했다. 마치 여이현이 자신을 위해 목숨마저 내바칠 수 있는 것처럼 말이다.“이현 씨가 죽는 모습을 보고싶지 않았다면 왜 떠날 때 해독제를 주지 않았는데요.”브람은 사실 여이현이 돌아와서 비는 모습을 보고 싶었다.“지금 찾아가봤자 해독제를 주지 않을 거야. 지유야, 우리 이만 돌아가. 아버님이 별이를 치료해 주고 있잖아.”Y 국에는 법로 말고도 인명진이 있었기 때문에 어떻게든 해독제를 구할 방법이 있다고 생각했다.온지유는 여이현을 이해했지만 한 번이고 두 번이고 시도해 보는 것보다 차라리 브람을 찾는 것이 더 빠르다고 생각했다.다음 순간, 여이현은 온지유를 품에 안고 그녀의 등을 토닥토닥해 주었다.“괜히 걱정하지 마. 내가 있잖아. 널 혼자 내버려 두지 않겠다고 했잖아. 일단... 별이 찾으러 가. 우리를 보고 싶어 할 거야.”“그래요..
온지유와 여이현은 Y 국으로 돌아가는 택시 안이었다.뒷좌석에 앉아있던 온지유는 수시로 여이현의 상태를 확인했는데 그래도 다행히 상태가 너무 나쁘지는 않았다.가는 도중에 누군가 길을 막길래 여이현은 직감적으로 브람이 시킨 짓이라고 생각했다.그는 온지유더러 차 안에 있으라고 했다.“내가 내려가서 확인해 볼게. 상황이 안 좋으면 기사님더러 가던 길 계속 가라고 해. 네 예상이 맞았어. 무조건 Y 국에 남아있어야 했어.”만약 브람이 국제포럼 반응을 신경 쓰지 않기로 마음먹었다면 여이현은 온지유와 별이의 안전을 위해서 이곳에 남아있기로 했다.그런데 온지유가 확신에 찬 모습으로 고개를 흔드는 것이다.“저한테 무슨 일이 있든 제 옆에 있겠다고 했잖아요. 그런데 이제 와서 저 보고 떠나라고요? 안 돼요. 이현 씨, 약속 꼭 지켜요.”온지유의 말이 끝나자마자 차 한 대가 앞을 막았다. 그 뒤에 있는 여러 대의 차량은 가까이 오지 않았고, 오히려 일정한 거리를 유지했다.여이현의 표정은 확 어두워지고 말았다.그런데 차에서 한 사람만 내리는 것이다. 여이현은 그가 브람의 보디가드라는 것을 한눈에 알아보고 아래위로 훑어보았다.다행히도 보디가드는 무기를 휴대하고 있지 않았다.보디가드는 성큼성큼 걸어와 차 옆에 멈추더니 공손하게 인사했다.“도련님, 대통령님께서 해독제를 보내오라고 하셔서요.”온지유와 여이현은 별로 기뻐하지 않았다. ‘떠날 때까지도 해독제를 줄 생각을 하지 않더니 보디가드한테 해독제를 보내주라고 했다고? 무조건 꿍꿍이가 있을 거야.’보디가드는 굳게 닫힌 문을 보고, 또 꼼짝하지도 않는 여이현의 모습을 보더니 계속해서 말했다.“도련님, 지금 전 세계에서 관심을 가지고 대통령님을 지켜보고 있습니다. 만약 대통령님께서 언론을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면 S 국에서 바로 처리했겠죠. 도련님한테 나쁜 마음을 품고 있다면 저만 보내지 않았겠죠. 정말 못 믿으시겠으면 이 해독제의 성분을 확인해 보시든가요.”보디가드는 거짓말을 하는 것 같지 않았다.여이현과
말을 마친 후 브람은 전화를 끊었다.끊어진 신호음만 여이현의 귓가에 들려왔다. 그는 알고 있었다. 브람이 확실히 명예를 신경 쓰는 사람이라는 것을.핸드폰을 넣은 후 온지유를 끌어안았다.“이제 돌아가면 확인해 보자. 이 약이 진짜 약이 맞는지.”만약 독이 아니라 진짜 약이라면 그는 온지유와 별이와 함께 경성으로 돌아가 온지유가 바랐던 삶을 살 수 있다....한편 별이네 상황.별이는 열이 펄펄 끓어 체온이 40도까지 올라갔다. 이건 정상적인 반응이 아니었던지라 법로는 다소 당황하며 움직이고 있었다.법로는 별이의 몸을 꼼꼼히 살폈다. 그저 감기라는 것을 확인한 후에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만약 다른 문제라도 생겼다면 그는 나중에 온지유에게 어떻게 말해야 할지 몰랐다.일단 별이에게 물수건을 올려주며 열을 내리게 하려고 했지만 별다른 효과가 없었다. 그래서 수액을 꺼내 아이의 팔에 주삿바늘을 꽂았다. 그는 별이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했고 수액이 텅 빌 때까지 곁에 있었다.점차 별이는 회복했다. 신무열도 별이가 걱정되어 직접 주방으로 들어가 죽을 만들었다.김혜연은 신무열이 혼자 주방에서 바쁘게 움직이는 모습을 보곤 바로 다가갔다.“Y 국을 이끄시는 분이 되었는데 누가 이런 모습을 보기라도 한다면 분명 비웃을 거예요. 아니면 도련님을...”“왜, 난 내 조카에게 죽 끓여주는 것도 남의 웃음거리가 될까 봐 걱정하면서 못 해주는 건가? 난 전부터 아이들에게 글을 가르쳤어. 그것도 나한테는 흑역사로 되나?”신무열은 김혜연에게 말을 끝마칠 기회를 주지 않았다. 그저 담담하게 심지어 고개를 돌려 그녀를 보지도 않고 반박했다.그런 그의 행동은 아주 가슴이 아팠다. 하지만 별다른 방법이 없었다. 신무열의 곁에 남기로 한 이상 열심히 신무열의 마음을 얻으려고 노력하는 수밖에 없었다.“전 그런 생각한 적 없어요. 방금 제가 한 말도 그런 뜻이 아니에요. 전 그냥 도련님이 걱정되어서 그랬어요. 지금은 예전이랑 신분이...”“난 그런 신분 따위 필요 없어.”
“내가 너한테 왜 설명해줘야 하지?”김혜연은 순간 심장이 조여왔다.그녀와 신무열은 확실히 아무 사이도 아니었기에 신무열도 사사건건 그녀에게 설명해줄 필요가 없었다.마음이 괴로웠지만 어쩔 수 없었다.김혜연은 그를 보았다. 두 눈에 어느새 눈물이 맺혔다.“저도 알아요. 도련님께 이런 질문을 할 자격이 없다는 걸요. 하지만... 하지만 저는 정말로 도련님이랑 잘 되고 싶어요. 만약 정말로 그런 거라면 제가 도련님을 도와줄 수 있는 거잖아요.”두 사람은 가짜 결혼을 올려 사람들의 눈을 속일 수 있다.사람과 사람이 한 공간에서 같이 살다 보면 언젠가 그가 그녀에게 마음이 생겨날 거로 생각했다.그녀는 굳게 믿었고 언젠가 그가 자신을 사랑하게 만들리라 다짐했다.그러나 신무열은 차갑게 픽 웃었다.“넌 네 자신을 너무 과대평가하고 있군.”그는 고개를 돌렸다. 더는 그녀에게 눈길조차 주고 싶지 않았다.심지어 그는 김혜연을 공기 취급했다.김혜연은 이곳에서 그를 도와주려고 해도 도와줄 수 없었다.결국 그저 그가 죽을 만드는 모습을 지켜보는 수밖에 없었다.신무열은 따끈한 죽을 그릇에 담아 별이에게 갔다.별이는 힘없이 누워있었고 안색이 창백했다.신무열을 본 순간 아이는 갈라진 목소리로 말했다.“삼... 촌... 우리... 엄마...는요?”아주 느릿하게 물었다. 검게 빛나는 두 눈빛에선 기대가 가득했다.신무열은 왜 그런지 모르겠으나 순간 가슴이 미어지는 것 같았다.예전에 별이가 온지유의 아이라는 것을 몰랐을 때는 행여나 온지유에게 부담이라도 줄까 봐 아이를 다른 사람에게 보낼 생각도 했었다. 하지만 지금은 너무도 마음이 괴로웠다.이 어린아이가 대체 얼마나 더 아파야 한단 말인가?신무열은 죽을 뜬 후 후후 불었다.“엄마랑 아빠는 지금 일하고 있어. 이따가 삼촌이 문자를 보내 볼게. 내일, 내일 별이랑 전화 통화 해줘도 돼?”별이는 고개를 끄덕였다.신무열은 별이를 아주 세심하게 간호했다. 하지만 김혜연은 그보다 더 정성스럽게 간호해주었다.김
김혜연의 붉게 물든 눈가는 다소 슬퍼 보이기도 했다.그녀는 신무열은 오랫동안 짝사랑했던지라 가슴이 너무도 아팠다.김혜연은 자신이 신무열에게 고백하면 신무열이 어느 정도 그간 그녀의 행동에 감동을 받아 자신을 받아들일 수 있을 거로 생각했다.이렇게 생각한 그녀는 조금만 더, 조금만 더 노력하면 신무열의 마음을 얻을 거라 생각했지만 전부 그녀의 착각이었다.신무열은 날이 갈수록 그녀에게 차갑게 대했다.서늘함이 맴도는 그의 까만 두 눈은 그녀를 증오하는 것 같기도 했다.“만약 내 말을 귓등으로 듣는 거라면 내가... 어떤 짓을 하든 후회하지나 마.”신무열은 이를 빠득 갈며 말했다. 지금 이 순간 정말로 살기가 생겨났다.싫어하는 사람이 자꾸만 자신을 졸졸 따라다니며 눈치 없이 굴지 않는가.그는 절대 김혜연이 여자라서 봐줄 생각이 없었다. 왜냐하면... 이미 충분히 봐주고 있는 것이었으니까.김혜연은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신무열이 이런 위협까지 할 줄은 몰랐기 때문이다.할 말이 더 있었지만 신무열이 몸을 돌린 탓에 더는 할 수 없었다.그녀는 멀어져가는 그의 뒷모습을 보았다. 피가 통하지 않을 정도로 주먹을 꽉 쥐었다.‘안돼! 이렇게 포기할 수 없어. 포기하란다고 포기하면 그동안 노력한 게 뭐가 돼!'함께 있는 시간이 길어지고 그녀가 더 노력하면 언젠가 신무열이 자신의 진심을 받아주리라 생각했다.한편 신무열은 김혜연을 두고 나온 후로 다시 별이의 곁으로 돌아왔다.별이는 그가 혼자 돌아오자 호기심 가득한 눈빛으로 그를 보았다.나이가 어리긴 했지만 별이는 사실 아는 것이 많았다.김혜연이 자신에게 잘해주고 신무열을 좋아한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다만 별이가 말을 하기도 전에 법로가 먼저 나직한 목소리로 말했다.“별이도 아는 걸 네가 모르리라곤 생각하지 않는다.”신무열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는 당연히 법로가 한 말의 의미를 알고 있었다.하지만 그는 정말로 김혜연에게 관심이 없었다. 이런 일로 사랑하지도 않는 사람과 평생을 보낼 생각도
그렇지 않았다면 두 사람이 위협을 받는 것이 아닌 사람들이 그들에게 엎드려 절하며 비위를 맞춰주려 했을 것이다.온지유는 아이의 이마에 자신의 이마를 가져다 대며 먹먹한 목소리로 말했다.“미안해, 별아. 엄마가 왔어...”“괜찮아요, 엄마...”별이는 느릿하게 말했다. 아이의 두 눈은 밝게 빛나고 있어 마치 밤하늘에 뜬 별 같기도 했다.아이가 온지유를 엄청 좋아했고 평생 온지유의 곁에만 붙어 있고 싶어 하는데 어떻게 온지유를 원망할 수 있겠는가.게다가 여이현도 돌아오지 않았는가.별이는 손을 뻗어 온지유의 눈물을 닦아 주었다.대부분 아이들은 토실토실했지만 별이는 아니었다. 야위었을 뿐 아니라 손에는 살집이 없었다.그녀는 여이현이 구해온 약이 떠올라 얼른 고개를 돌려 그를 보았다.“얼른, 얼른 그 약을 아버지한테 드려. 정말로 해독제가 맞는지 확인해야겠어.”만약 해독제가 맞는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을 것이다.아니라면 브람에게 속은 것으로 치면 된다. 잃은 것은 없었으니까.다만 약물을 검사한 뒤 얼른 여이현을 치료해야 했다.여이현은 고개를 끄덕였다.다음 순간 그는 온지유와 별이게게 다가갔다.온지유의 어깨를 꽉 잡더니 별이의 이마에 뽀뽀를 해주었다.“별아, 괜찮을 거야. 그냥 감기 걸린 거니까 아빠 금방 다녀올게.”별이는 고개를 끄덕였다.여이현은 또 온지유의 어깨를 토닥인 후 걸음을 옮겼다.그가 법로에게 해독제를 건네자마자 법로는 바로 성분을 검사했다.법로 뿐이 아니라 인명진도 도왔다.다행히 그 약은 해독제가 맞았다.여이현은 해독제가 맞는다는 소식을 들은 후 빠르게 먹어보았다.그리고 빠른 속도로 온지유를 찾아갔다.인명진은 당황한 얼굴로 서 있었다.그러자 법로의 낮게 깔린 목소리가 들려왔다.“넌 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거냐?”그는 줄곧 인명진을 관찰했다. 행여나 무슨 수를 쓸까 봐 말이다.그런데 인명진은 얌전했을 뿐 아니라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인명진이 어떻게 법로가 한 말의 의미를 모르겠는가.그저 씁쓸한 미소를 지
순간 분위기는 조용해졌다.덩치 큰 남자는 눈을 가늘게 접었다. 술도 확 깨는 기분이었다.“네가 신무열이냐?”신무열은 그와 쓸데없는 대화를 주고받고 싶지 않아 바로 총을 들어 쐈다. 총알은 덩치 큰 남자를 아슬아슬하게 빗겨 나갔다. 남자는 순간 분노가 치밀어 올라 소리를 질렀다.“다들 뭘 멍하니 서 있어? 얼른 죽여!”그러나 신무열 옆에 있던 요한이 뭔가를 던졌던지라 그들은 앞이 보이지 않는다는 두려움에 움직일 엄두가 나지 않았다.덩치 큰 남자는 점점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이를 빠득 갈았다. 최대한 신무열을 찾아보려고 애를 쓰면서 신무열을 향해 총을 겨눴다.이내 남자의 얼굴에 비릿한 미소가 지어졌다. 눈엣가시인 신무열을 드디어 처리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가만히 있으면 천국에 갈 수 있는 것을 굳이 그가 있는 곳으로 찾아왔으니 반드시 지옥으로 보내주리라 생각했다.요한의 눈빛이 흔들렸다. 이때 누군가 신무열의 앞으로 확 나타나 총알을 대신 맞아주었다. 피가 사방에 튀었다.김혜연의 몸에서 힘이 빠졌다. 신무열은 얼른 손을 뻗어 그녀를 잡아주었으나 덩치 큰 남자는 기회를 놓치지 않고 또 한 발 더 쐈다.그녀는 고개를 들어 신무열을 보았다. 다소 은은한 미소를 지었다. 신무열의 품에서 죽는다고 생각하니 이상하게도 만족감이 느꺄쟜다.신무열은 있는 힘껏 그녀의 어깨를 잡았다.“김혜연, 이 멍청한 여자야! 내가 언제 죽으라고 허락했는데! 죽지 마, 내 허락 없이는 죽지 말라고! 이렇게 죽으면 내가 두고두고 후회하면서 죄책감에 시달릴 것 같아서 그러는 거야...? 난 절대 널 그리워하지도 않을 거라고! 그러니까 꿈 깨! 죽지 마!”신무열은 누군가에게 빚을 지고 싶지 않았다. 게다가 그는 김혜연에게 분명하게 말했었으나 김혜연은 그의 말을 귓등으로 들었다. 김혜연은 그의 품에 안겨 죽어가고 있었다. 그녀가 죽게 되면 그는 나중에 김씨 가문에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이 빚을 또 어떻게 갚아야 할까?김혜연은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온몸에 힘이 빠지면서
하지만 감동보다는 오히려 속이 울렁거렸다. 속이 울렁거리는 느낌에 문지원은 당장 얼굴이 일그러지며 화장실로 달려갔다. 지석훈도 뒤따라 들어오며 물었다.“속이 안 좋아?”“그렇진 않은 것 같아요. 요즘 세 끼 식사도 꽤 규칙적으로 하고 날것 이거나 차갑거나 매운 음식도 먹지 않았는데...”문지원은 배를 움켜쥐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다 문득 한 가지 가능성이 떠올랐다.지석훈도 그녀와 같은 생각을 한 듯 방으로 가서 임신 테스트기를 가져왔다.문지원은 놀라며 물었다.“언제 산 거예요?”지석훈은 당연하다는 듯이 말했다.“만일의 사태에 대비해서.”문지원은 아무 말이 없었다.5분 후, 그녀는 복잡한 얼굴로 다시 나왔다. 한 손은 여전히 배 위에 올려져 있었고 눈에는 믿을 수 없다는 기색이 역력했다.정말 임신한 것이다!그녀와 지석훈이 결혼한 지 겨우 3개월밖에 안 되었는데 이렇게 빨리 임신하다니.지석훈은 오히려 태연해 보였다. 하지만 입가에 감출 수 없는 미소를 보면 그 역시 겉모습처럼 평온하지 않고 흥분을 억누르고 있는 게 분명했다.“정말 임신한 거예요?”문지원은 아직 믿기지 않는 듯 물었다. 왜냐하면, 그녀는 이번 달 초에 생리가 끝났기 때문이다.“아마 생리가 끝난 후 며칠 사이일 거야.”지석훈의 목소리는 문지원에게 그날의 기억을 떠올리게 했다. 당시의 기억을 떠올리니 그녀의 귀는 뜨겁게 달아올랐다. 결국, 그녀는 병원에 가보기로 했다. 임신 테스트기는 가끔 틀릴 수도 있으니 이런 일은 직접 검사를 받아보고 확인해야 마음을 놓을 수 있을 것이다.그리고 그녀는 손에 든 검사지를 보고 완전히 할 말을 잃었다.의사는 마침 지석훈과 알고 지내던 사람이었다.“축하합니다, 지 원장님. 부인께서 임신 2주 차입니다.”“감사합니다.”지석훈은 침착하게 그녀를 부축하며 밖으로 나갔다.병원 진료실을 막 나오자마자 지석훈은 문지원을 품에 안았다.“너무 좋아. 우리 아이가 생겼어.”문지원은 남자가 미세하게 떨리는 모습을 보며 멍하
물론 손에 있는 일을 무턱대고 모두 남에게 맡기는 것은 너무 과한 부담을 주는 일이다.문지원은 비서를 사무실로 불렀다.“올해 25살이죠?”비서는 잠시 멍한 표정을 지었다.그녀의 나이는 모두가 다 아는데 문지원 회장이 갑자기 이 얘기를 꺼낸다는 것은 혹시 소개팅을 시켜주려는 건가 싶은 생각이 들었다.비서는 고마웠지만 거절하며 말했다.“문 사장님, 저는 아직 젊어서 당장은 결혼할 생각이 없습니다.”“전 당신더러 결혼하라고 하는게 아니에요.”문지원은 펜으로 탁자를 두드리며 말했다.“그냥 평소에 잡다한 일들을 맡기고 싶어서요. 확인이 필요한 문서들은 평소에 굳이 내게 제출하지 않아도 돼요.”비서는 그 뜻을 이해했다.이건 곧 그녀에게 승진과 급여 인상을 주려는 것이다. 문지원이 그녀의 의견을 확인한 후 급여를 조금 올려줬고 비서에게 몇 명의 적합한 인재를 추가로 모집해서 예비 인력으로 두라고 지시했다.“평소에 내가 처리하지 못한 일들을 대신 처리해주고 만약 문제가 생기면 그때마다 보고하면 돼요.”비서는 한숨을 쉬며 안도의 표정을 지었다. 그녀 혼자서 이렇게 많은 일을 하지 않아도 되어 다행이었다.일정이 정리되자 문지원은 업무에서 상당 부분 해방되었다.예전에는 아침부터 저녁까지 바쁘게 일하다 보면 퇴근 시간이 되어도 일이 끝나지 않고 긴급 통지가 오면 또 회의를 위해 야근을 해야 했다.이제는 오후 4시 반쯤이면 일을 마치고 퇴근할 수 있게 된 것이다.비서가 몇 명을 더 찾아서 양성해 두었기에 업무가 적절히 분배되어 모두 바빠 죽을 정도가 아니라 적당히 딱 맞는 분량을 처리할 수 있었다.그 덕에 문지원은 지석훈과 함께 결혼 후의 삶을 더욱 즐길 수 있게 되었다.지석훈도 이에 매우 만족해했다.“널 주려고 선물을 챙겨왔어. 들어가서 한번 봐.”그가 집 문 앞에 다가서더니 걸음을 멈췄다.문지원은 열쇠로 문을 열고 들어가 보니 안은 어두컴컴했다.“뭐 숨겨놨어요? 아직 불도 켜지 않았네요, 수상하게.”탁! 하며 불이 켜지자 거실의 모든
문지원은 이 주제가 다소 위험하다고 느꼈다. 비록 그녀의 아버지가 그녀에게 물어본 적은 없지만 그렇다고 자신과 배석훈이 결혼한 후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에 대해 말할 필요도 없다고 생각했다. 돼지고기를 먹어보지 않았다고 해도 돼지가 뛰어다니 것을 본 적은 있을 것이다. 문지원은 그러면서도 반쯤 빚어놓은 만두를 내려놓으며 말했다. “저, 화장실 좀 다녀올게요.”이에 지석훈의 어머니가 그녀의 손을 잡았다. “너희들도 이제 나이가 들었으니 아이를 가져야지. 평소에 좀 더 노력해야 한단다.”문지원은 잔소리를 듣고 나서 나오니 기운이 다 빠져있었다.시어머니는 문지원에게 정말 잘해주었다. 거의 마음을 쏟아붓는 수준이었다. 비록 문지원의 집안 사정이 좋은 것을 알면서도 혼수 때 오랜 세월 모은 돈으로 집 한 채를 사서 선물해 주었다. 사실 지석훈도 자기 집이 있었지만, 시어머니는 선물하고 싶다고 하셨다. “너희 집도 너희의 것이지만, 이건 내가 어른으로서 선물하는 거란다.”게다가 그 집에는 문지원의 이름도 함께 올려져 있었다.그래서 시어머니의 출산 독촉에도 문지원은 어쩔 수 없이 버텨야만 했다. 다행히도 시어머니는 어린 이들에게 엄격하게 구는 편은 아니었다. 만두를 빚을 때 한 번 그런 말을 했고 또 떠나면서도 지석훈을 불러 몇 마디 잔소리했다. 문지원은 그 모자간의 대화를 듣지 못했다.돌아가는 길에 문지원은 약간 궁금해져 지석훈에게 물었다.“나갈 때 어머니께서 뭐라고 하셨어요?”“정말 알고 싶어?”“네.”그러자 지석훈은 문지원의 머리를 숙이게 한 후 그녀의 흩어진 머리칼을 살며시 넘겨주며 귀 옆에서 낮게 속삭였다.“우리 아이를 빨리 낳으라고 하셨어.”남자의 낮고 진한 목소리는 얼굴을 붉히고 심장을 뛰게 만드는 약보다도 중독성이 강해 문지원의 귀가 금세 붉어지고 말았다.저녁이 되자 지석훈은 몸소 행동으로 보여주기 시작했다. 한 손으로 문지원의 머리를 받치고 이마를 맞대며 낮은 숨소리를 내쉬었다. 문지원은 마치 파도 속에 잠긴 것
그 눈빛 속에서 조용히 터져 나오는 그 소유욕. 마치 옛 시대의 군벌과 그의 부인 같았다. 그리고 사진작가는 우연히 그 장면을 목격한 운 없는 사람이 되어 몰래 촬영을 하고 있었다. 사진작가는 자신의 상상에 자극받아 목소리가 떨렸다.“지석훈 씨, 고개를 들어 카메라를 봐주세요.”지석훈은 날카로운 눈빛으로 사진작가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사진작가는 재빨리 셔터를 눌렀다. 그 후에도 그들은 여러 세트의 사진을 찍었고 찍은 사진들은 모두 문지원에게 하나하나 보여주었다. 문지원은 모든 사진에 다 만족했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마음에 든 것은 민국 시대 주제의 사진이었다.“대략 며칠 안에 나오나요?” 그녀가 물었다.사진작가는 답했다.“빠르면 이삼 일정도 걸릴 겁니다. 그때 완성된 사진들을 택배로 보내드리겠습니다. 그런데 제가 개인적인 부탁이 하나 있는데 혹시 두 분께서 응해주실 수 있을지 모르겠네요.”“바로 아까 찍은 사진 중 몇 장이 제가 개인적으로 아주 마음에 들어서 사진관 벽에 걸어두고 싶습니다.”문지원은 사진관에 들어올 때 봤던 사진 벽이 생각났다.“그 벽에 걸어두시겠다는 건가요?”“네.”사진작가는 그 벽은 사진관의 특별한 기념 및 홍보 방법의 하나라고 설명했다. 잘 나온 사진들은 사진 주인에게 동의를 구한 뒤 동의하면 벽에 전시한다고 한다..문지원은 옆에 있던 지석훈을 바라봤다. “저는 괜찮은데, 당신은요?” 지석훈도 아무 문제 없다고 했다.“마음대로 하도록 해.”며칠 후 문지원은 사진작가가 보내온 사진을 받아 소중히 간직했다. 하지만 그녀는 몰랐다. 그 사진관 벽에 전시된 사진들이 곧 사람들의 눈에 띄어 사진이 찍혀 인터넷에 올라간 것이다.잘생긴 남성과 아름다운 여인의 조합과 최상의 촬영 기술 덕분에 순식간에 인터넷에서 화제가 되었다.네티즌들은 저마다 아아 소리를 냈고 많은 사람이 댓글을 달았다. “마치 옛 시대의 군벌 부인 같다.”“완전 대박이다.”“3분 안에 그들의 모든 정보를 알고 싶다.” 하지만 이 모
문지원은 약간 마음이 움직였다.하지만 웨딩 촬영은 이미 여러 번 한 적이 있었다. 그때 섬에서 몇 세트 찍었고 그 후 결혼식 현장에서 또 몇 세트 찍어 셀 수 없을 정도였다.게다가 이번 촬영은 개인 예약으로 진행되었는데 이 사진관이 꽤 유명하다고 들었다.물론 사진관 이름에 걸맞게 예약은 거의 하늘의 별 따기라고 한다..이 정도면 지석훈이 얼마나 큰 노력을 들여 예약을 잡았는지 알 수 있었다. 단순히 웨딩사진만 찍는 데 사용하기에는 너무 아까웠다.하지만 문지원 역시 이런 곳에 한 번도 와본 적이 없었기에 무엇을 찍어야 할지 몰랐다.“한번 보세요. 이건 저희가 예전부터 선보였던 스타일들이에요.”사진작가는 친절하게 앨범 한 권을 꺼내 보였다.앨범에는 이전 고객들이 이곳에서 찍은 사진들이 담겨 있었는데 정말 다양한 스타일이 있었고 모두 아름다웠다.이 사진관이 만들어낸 결과물은 정말 최고였다.문지원은 그중에서도 민국 시대 주제의 사진이 눈에 들어왔다.“이렇게 찍을 수 있을까요?”사진작가는 그녀가 가리키는 사진을 한 번 살펴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네, 됩니다. 먼저 메이크업하고 옷을 갈아입으세요. 직원들이 촬영 스튜디오를 설치할게요.”옷은 사진관에서 준비한 것으로 하고 지석훈의 요구에 따라 전부 새 옷이었다.사실 문지원은 소품용 옷을 입는 것에 크게 개의치 않았다. 어쨌든 한 번 입었다가 나중에 벗으면 되는 거고 몸에 달라붙지 않아서 안에 옷을 받쳐 입을 수도 있었다.하지만 지석훈은 직업병이 발동했고 그런 건 용납할 수 없었다.결국, 문지원은 어쩔 수 없이 그의 의견을 따를 수밖에 없었다.급히 새 옷을 가져와야 했기 때문에 원래 걸리던 시간에서 15분이 더 추가되었고 메이크업 등 기타 과정도 진행해야 했다.문지원이 모든 준비를 마치고 나왔을 때는 이미 2시간이 지난 후였다.그러나 결과는 확실했다.곧은 치파오가 그녀의 아름다운 몸매를 감쌌고 문지원은 옷자락을 살짝 들어 올렸다. 마치 지난 옛 시대의 그림 속에서 걸어 나온 듯한
결혼 후 문지원은 휴가를 내서 신혼여행을 갈까 고민해 본 적이 있었다.하지만 요즘 지석훈이 거의 계속 병원에 머무르며 집에 돌아오지 않는 것을 떠올리며 본의 아니게 한숨이 나왔다. 비록 이미 익숙해졌긴 했지만 실망을 감추기는 어려웠다.비서도 그녀에게 물었다.“문 사장님, 신혼여행 가고 싶지 않으세요? 제 동창 중 한 명이 며칠 전에 결혼했는데 요즘 여기저기서 신혼여행 정보를 알아보며 준비 중이에요. 신혼여행이 없는 결혼은 반은 실패한 거랑 마찬가지라고 하더라고요.”그 말을 들은 문지원은 손에 들고 있던 서류를 제대로 볼 생각조차 들지 않았고 비서는 무언가를 눈치챈 듯했다.“그렇지 않으면... 문 사장님, 지 의사님이 일하시는 곳에 한 번 가보시는 건 어떠세요?”그녀가 머뭇거리며 물었다. 어쨌든 문지원은 요즘 정신이 산만하여 업무에 집중할 기색도 없었다.문지원은 비서의 시선 속에서 정신을 차렸다. 요 며칠 동안 집에 돌아와도 지석훈을 보지 못해 한참 혼란스러워했던 자신을 깨달으며 약간 부끄러워졌다.“그건 나중에 얘기하고 기획서 한 부 복사해 가져다주세요.”점심 무렵, 문지원은 막 일을 끝내고 밥 먹으러 가려던 찰나, 핸드폰에 지석훈의 메시지가 떴다. 같이 밥을 먹자는 메시지에 문지원은 미소를 지었다. 멀리서 이 장면을 본 직원들은 서로 눈빛을 교환하며 웃음을 터뜨렸다.문지원은 재빨리 열쇠를 챙기고 회사를 떠났다. 지석훈은 그녀를 새로 오픈한 가게로 데려갔다.식사를 마친 후 문지원은 지석훈을 바라보며 머뭇거리다가 물었다.“병원에 다시 돌아갈 거예요?”“응?”지석훈은 눈썹을 치켜들며 고의적으로 물었다. “내가 돌아가길 바라는 거야?”그 말을 들은 문지원은 순간 당황했다. 사실 그녀는 지석훈이 자신과 좀 더 많은 시간을 함께 보내주길 바랐는데 이제 막 결혼한 신혼부부임에도 불구하고 각자 업무에만 매달려 밤에야 겨우 함께 잠자리에 들 수 있는 상황이었다.하지만 수줍음이 많은 그녀는 그 마음을 솔직하게 털어놓지 못했다.지석훈은
예전에는 이런 일이 있을 때면 지석훈은 항상 선을 지켰지만 오늘 밤엔 조금 달랐다. 그는 그녀를 침실에서 욕실로 다시 침대로 옮겨가며 몸 곳곳에 뜨거운 입맞춤을 했다.다음 날 아침에 일어났을 때도 문지원은 여전히 몸속 깊이 스며든 감각이 남아 있는 것만 같았다.그리고 그녀는 예상대로 휴가를 냈고 이틀이 지나서야 회사에 다시 나왔다.회사 사람들은 이미 예상이라도 한 듯 문지원이 출근하자 하나같이 말했다.“문 사장님, 결혼 축하드려요.’문지원은 무려 사흘이나 결근했지만 다들 그 사흘 동안 무얼 했는지는 굳이 말 안 해도 짐작이 갔다.분명 부부 생활이 아주 좋았겠지, 아니었으면 일까지 내팽개치고 안 나왔을 리가 없다.문지원은 직원들의 부담스러운 시선에 얼굴을 들 수도 없어 그저 아무렇지 않은 척할 수밖에 없었다.그래도 지난번에 당한 적이 있었던 터라 문지원은 이제 출근 전에 거울 앞에서 꼼꼼히 점검했다.몸에 키스 자국이 드러나지 않는 걸 확인하고 나서야 안심하고 회사를 향했다.그렇지 않았다면 그 흔적들을 들켰을 경우 정말 얼굴을 들고 다닐 수 없었을지도 모른다.문지원이 예상치 못했던 건 며칠 지나지 않아 결혼을 축하하는 선물이 회사로 배달됐다는 것이다.문지원은 처음에 여울이 보낸 거라고 생각했지만, 물어보니 아니었다.택배 상자의 외관을 살펴봐도 발신자가 적혀 있지 않아 더욱 수상했다.“이거 가져온 사람이 누가 보낸 건지 말했어요?”문지원이 로비 직원에게 물었다.로비 직원은 고개를 저었다. “아뇨, 그냥 두고 바로 가버렸어요.”문지원은 뭔가 직감적으로 찜찜한 마음이 들어 그 택배를 챙겼고 사무실에 들어와서야 상자를 열었다.그 안에는 브로치 하나와 축하 카드 한 장이 들어 있었다.문지원은 축하 카드를 집어 들어보니 카드 위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결혼 축하해요.”글씨체는 아주 정갈하고 예뻐 여성의 필체 같았다.그녀는 곧바로 짐작이 갔다.문지원은 그 브로치를 지석훈에게 보여주자 그는 눈빛이 살짝 흔들렸지만 아무 말 없이 브로치
여울은 아직 최주하를 받아들이지 않았지만 최주하도 쉽게 포기할 생각이 없었다.문지원이 알기로 여울은 마음이 여린 사람이었고 결국 받아들이게 되는 건 시간문제일지도 몰랐다.그녀는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친구 일에 깊이 관여하는 것도 괜히 어색하고 조심스러웠다.게다가 얼마 전 지석훈이 슬쩍 귀띔하듯 말했다.“며칠 전에 여울 씨가 병원에 재검진받으러 왔는데 주하가 데리고 왔었어.”그 말을 듣고 문지원은 혀를 끌끌 찼다.평소에 말도 없고 조용하던 여울이 은근히 비밀 많은 타입이었던 모양이었다.그렇게 시간은 순식간에 흘러 어느덧 다음 달 중순이 되었다.지석훈은 아예 와인 농장을 통째로 빌려 며칠에 걸쳐 그곳을 자신이 원하는 모습으로 꾸며놓았다.결혼식을 올릴 장소는 바로 거기였다.그 와인 농장은 웬만한 호텔 못지않게 컸고 내부에는 수년간 숙성된 고급 와인들이 그대로 보관되어 있었고 결혼식 날 손님들이 오면 바로 꺼내어 대접할 수 있을 정도였다.그들은 결혼 소식을 널리 알리진 않았다.이건 문지원이 원한 방식이었다.그녀는 온 세상에 떠들썩하게 알리는 그런 결혼식보다는 가까운 가족과 친구들만 초대해서 조용히 축하받는 걸 선호했다.행복은 굳이 남들에게 증명하지 않아도 되는 것이니까.그런데 결혼식이 한창일 때 지석훈이 무대 위에서 다시 한번 프러포즈했다.해변에서 했던 프러포즈보다 훨씬 더 진지하고 진중한 분위기였다.“하고 싶은 말이 정말 많지만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어서... 예전엔 내가 사랑인 줄도 모르고 놓쳐버렸던 순간이 많아. 이제는 더 이상 놓치고 싶지 않아. 이렇게 내 곁에 있어 줘서 고마워. 앞으로 남은 인생... 너랑 함께할 수 있어서 정말 행복해.”그의 말이 끝나자 하객들 사이에서 박수 소리가 터져 나왔다.문지원은 무대 위에서 입을 손으로 가리고 눈물을 흘렸다.식이 끝날 무렵, 문지원은 멀리서 검은색 카이엔 SUV가 그녀의 친구 여울을 데리러 오는 걸 보았다.차창이 천천히 내려가자 예상대로 그 안에 앉아 있는 사람은 최주하였다
문지원은 문득 자신이 계획에 철저히 걸려들었다는 생각에 의심의 눈길을 보냈다.“처음부터 계획한 거죠?”“응.”지석훈은 미소 지으며 그녀의 입술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 사실, 그는 그녀를 향한 마음을 오래전부터 숨겨온 것이었다....해변에서의 프러포즈 이후 문지원에게 찾아온 가장 큰 변화는 손가락에 반짝이는 반지가 생겼다는 점이었다.이 반지는 지석훈이 특별히 맞춤 제작한 것이었다. 그녀는 우연히 그의 휴대폰을 보다가 두 달 전에 이미 주문이 들어가 있었다는 구매 기록을 발견하고는 깜짝 놀랐다. 그렇게 오래전부터 준비해 왔다니 감동하지 않을 수 없었다.두 사람의 결혼 소식을 접한 지석훈의 부모님은 곧바로 혼인신고부터 하라고 재촉하기 시작했다. 어느 날 문지원은 우연히 지석훈의 어머니가 그를 붙잡고 타이르는 말을 듣게 되었다.“네 아빠랑 난 애초에 너한테 기대도 안 했어. 하루가 멀다고 병원에서 살다시피 하니 너 같은 애한테 누가 시집오겠나 싶었거든. 그런데 다행히 네가 능력 있어서 지원이 같은 좋은 아이를 데려왔으니 얼른 확실히 붙잡아야지. 빨리 혼인신고부터 해. 나중에 그 아이가 너 버리고 떠나버리면 그땐 어디 가서 울어도 소용없어!”문지원은 그 대화에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몰랐다.그런데 신기한 건 지석훈이 워낙 점잖고 진지한 사람이어서 집안 분위기도 매우 조용할 줄 알았는데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는 점이었다. 아버지는 이미 퇴직해 한가로운 성격으로 매일 독서나 산책을 즐기는 조용한 스타일이었다. 어머니는 젊었을 때는 커리어 우먼이었고 호탕한 성격으로 남편에게 엄격하면서도 친화력이 강한 사람이었다.두 분 모두 차분한 듯하면서도 내면에 장난기를 숨기고 있는 아들을 낳을 것 같진 않았는데 이게 바로 유전자의 신비인가 싶었다.하지만 어머니가 그렇게 그녀를 좋아해 주는 모습에 문지원도 안심했다. 확실히 시부모님의 사랑을 받고 있다는 증거였다.한편 문지원의 아버지는 지석훈과 따로 대화를 나눈 이후부터 정확히 무슨 얘기를 했는지는 몰라도 그에 대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