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간 분위기는 조용해졌다.덩치 큰 남자는 눈을 가늘게 접었다. 술도 확 깨는 기분이었다.“네가 신무열이냐?”신무열은 그와 쓸데없는 대화를 주고받고 싶지 않아 바로 총을 들어 쐈다. 총알은 덩치 큰 남자를 아슬아슬하게 빗겨 나갔다. 남자는 순간 분노가 치밀어 올라 소리를 질렀다.“다들 뭘 멍하니 서 있어? 얼른 죽여!”그러나 신무열 옆에 있던 요한이 뭔가를 던졌던지라 그들은 앞이 보이지 않는다는 두려움에 움직일 엄두가 나지 않았다.덩치 큰 남자는 점점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이를 빠득 갈았다. 최대한 신무열을 찾아보려고 애를 쓰면서 신무열을 향해 총을 겨눴다.이내 남자의 얼굴에 비릿한 미소가 지어졌다. 눈엣가시인 신무열을 드디어 처리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가만히 있으면 천국에 갈 수 있는 것을 굳이 그가 있는 곳으로 찾아왔으니 반드시 지옥으로 보내주리라 생각했다.요한의 눈빛이 흔들렸다. 이때 누군가 신무열의 앞으로 확 나타나 총알을 대신 맞아주었다. 피가 사방에 튀었다.김혜연의 몸에서 힘이 빠졌다. 신무열은 얼른 손을 뻗어 그녀를 잡아주었으나 덩치 큰 남자는 기회를 놓치지 않고 또 한 발 더 쐈다.그녀는 고개를 들어 신무열을 보았다. 다소 은은한 미소를 지었다. 신무열의 품에서 죽는다고 생각하니 이상하게도 만족감이 느꺄쟜다.신무열은 있는 힘껏 그녀의 어깨를 잡았다.“김혜연, 이 멍청한 여자야! 내가 언제 죽으라고 허락했는데! 죽지 마, 내 허락 없이는 죽지 말라고! 이렇게 죽으면 내가 두고두고 후회하면서 죄책감에 시달릴 것 같아서 그러는 거야...? 난 절대 널 그리워하지도 않을 거라고! 그러니까 꿈 깨! 죽지 마!”신무열은 누군가에게 빚을 지고 싶지 않았다. 게다가 그는 김혜연에게 분명하게 말했었으나 김혜연은 그의 말을 귓등으로 들었다. 김혜연은 그의 품에 안겨 죽어가고 있었다. 그녀가 죽게 되면 그는 나중에 김씨 가문에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이 빚을 또 어떻게 갚아야 할까?김혜연은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온몸에 힘이 빠지면서
신무열은 아주 말도 하지 않았지만 입은 일자로 꾹 다물었다.잘생긴 그의 얼굴엔 안개가 낀 것처럼 마음이 복잡해 보였다.“내가...”“아니요. 필요 없습니다.”법로가 말을 꺼내기도 전에 신무열이 말했다.신무열은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감정은 제 앞길만 막을 뿐이에요. 더구나... 저는 지금 상태로 평범한 사람처럼 지낼 수 없죠.”가정을 꾸리고 직장에서 자리를 잡아 아내와 아이들과 행복하게 사는 삶은 대부분 사람에겐 아주 쉬운 일이었다.그러나 그는...어깨엔 Y 국을 향한 책임을 짊어지고 있었고 지금 그는 나라와 결혼했다고 할 수 있을 정도였기에 다른 사람에게 신경을 쓰며 가정을 꾸릴 시간이 없었다.제일 중요한 이유는... 그의 어머니였다.어머니가 세상을 뜬 후 법로는 피폐한 나날을 보냈었다.물론 법로의 곁에 새로운 여자가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그러나 그 여자들에게선 어머니의 그림자들이 보였다.그의 어머니는 희생을 당한 것이다.그는 지금 Y 국의 수장이 되었다. 그 말인즉슨 아버지인 법로와 같은 길을 걷는다는 것이었다.이런 신분으로 나라도 지키면서 행복한 가정을 동시에 꾸려나갈 수 없었다.그러니 차라리 결혼하지 않고 아이도 낳지 않는 것이 나았다.그렇다면 그의 아이가 그와 같은 길을 걸을 리가 없을 테니까.법로는 확고한 신무열의 눈빛과 표정에서 무언가를 깨달았다.그의 숨소리가 무겁게 들려왔다. 목에는 목줄이 채워진 것처럼 갑갑했다.몇 초 뒤 그는 결국 결정을 내렸다.“나라를 책임져야 한다는 것 때문에 부담을 느끼는 거라면 차라리 율이처럼 살 거라.”신무열과 대화를 할 땐 법로는 온지유를 항상 ‘율이'라고 불렀다.법로는 온지유에게 죄책감을 느꼈으나 신무열에겐... 자기 아들에게도 미안함을 느끼고 있었다.어릴 때부터 지금까지 그는 신무열의 곁에 있어 준 시간이 많지 않았다.심지어 예전에 자신이 저질렀던 일도 신무열에게 맡겨 처리하게 했다.신무열이 여자친구를 사귀지 않고 결혼할 생각도 없다는 것도 전부 그의 탓이었다.
김혜연이 이번에 목숨을 던지며 그를 구했으니 그는 더는 무시할 수 없었다....한편 온지유도 신무열이 습격을 당하고 김혜연이 몸을 날려 구해줬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다.신무열이 다쳤을까 봐 걱정되어 가보려고 했으나 여이현이 그녀를 붙잡았다.“네 오빠가 다친 거라면 이 사람들이 조용할 리가 없겠지. 소식도 빠르게 퍼졌을 거야.”그의 말은 일리가 있었다. 하지만 그녀와 김혜연은 그다지 친한 사이도 아니었다.신무열이 무사하다는 소식을 들었으니 굳이 김혜연에게 가볼 필요도 없었다.그럼에도 온지유는 왔다.그런데 신무열이 김혜연의 곁을 지키고 있을 줄은 몰랐다.김혜연이 신무열을 좋아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던지라 두 사람 사이를 방해하지 않기 위해 묵묵히 걸음을 옮기려고 했지만 법로가 그녀를 불렀다.“지유야, 잠깐만.”온지유는 고개를 돌렸다. 법로가 어느샌가 그녀의 앞에 서 있었다.“아버지.”온지유는 법로가 자신을 왜 불렀는지 모르지만 일단 인사는 해야 했다.비록 그를 아버지로 받아들였다고 하나 일반적인 부녀 사이와는 달랐다.온지유는 먼저 법로를 찾아가지 않았다.법로는 한참 침묵하다가 말했다.“네 오빠 쪽은 네가 도와줬으면 한다.”법로가 이렇게 말하니 온지유는 바로 눈치챘다.“아버지, 오빠 쪽은 저도 도와줄 수가 없어요.”감정의 문제에서는 그녀도 어찌할 수가 없었다.법로는 신무열이 했던 말을 온지유에게 전부 말해주었다.그리고 자기 생각도 말해주었다.“너희 둘은 전부 내 아이다. 비록 너희들 엄마가 일찍 세상을 떠나긴 했지만 나도 그때는 정신을 놓아서 이런 일이 생긴 것이겠지. 하지만 난 지금 그때의 잘못을 전부 되돌리려고 한다. 무열이에게도 말이다. 난 무열이가 원치 않는 인생을 살면서 고통받기를 바라지 않는단다. 난 무열이가 행복하게 살았으면 좋겠구나.”“너도 행복하길 바라고 있단다.”행여나 신무열을 편애하는 것처럼 들릴까 얼른 한 마디 더 보탰다.온지유는 침묵했다.법로가 한 말의 의미를 아주 잘 알고 있다.신무열이 김
온지유는 복잡한 마음으로 옆에 있던 소파에 털썩 앉았다.여이현이 깨어날 때까지 눈 뜨고 있었다...여이현은 자신이 그대로 잠들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고 자고 나서도 몸이 뻐근하여질 줄도 몰랐다. 머리가 지끈거려 온몸이 무겁게 느껴지기도 했다.하지만 자리에서 일어났을 때 소파에 앉아 있는 온지유를 발견했다.온지유는 핸드폰을 보지 않았다. 방에 앉아 전등도 켜지 않은 채 가만히 앉아 있었다. 방 안에 켜진 불빛이라곤 침대 맡에 있는 스탠드 하나였다.여이현은 본능적으로 온지유의 상태가 이상함을 눈치챘다.“왜 그래?”온지유는 그의 목소리가 들려오자마자 고개를 돌려 그를 보았다.여이현은 은은한 스탠드 불빛 아래 따스한 분위기를 냈다.그러나... 지금 이 순간 그가 너무도 낯설게 느껴졌다.온지유는 솔직하게 말했다.“내가 돌아왔을 때 당신은 잠들어 있었어. 하지만 노승아의 이름을 중얼거리고 있더라고.”승아라니... 노승아는 바로 눈앞에 있지 않은가?여이현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방 안에는 정적이 흘렀다.온지유는 지금 느끼는 기분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몰랐다.5년이나 지나고 노승아가 한 악행이 그렇게도 많은데 여이현은 여전히 노승아를 기억하고 있었다.그런데 여이현은 그녀에게 성큼성큼 다가와 그녀를 안았다.“승아는 노승아가 아니야.”“그럼 누군데?”온지유는 고개를 들어 깊은 그의 두 눈을 가만히 보았다.승아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이 또 있을 줄은 몰랐다.온지유는 그 사람이 누구인지 꼭 알아내고 싶었다.그러면서 여이현의 손을 떼어버렸다.그러자 여이현은 그녀의 옆에 앉아 나직한 목소리로 말했다.“그동안 말하지 못했는데... 승아는 사실... 너야.”“뭐?”온지유는 황당했다.여이현은 그녀에게 그때의 일을 말해주었다.처음 온지유가 그에게 접근했을 때 본명이 아닌 ‘승아'라는 가명을 썼다.그때의 그도 몰랐다.그러다가... 온지유의 입에서 나온 ‘석이'라는 이름을 듣게 된 후 조사를 해보다가 그때 그가 만난 승아가 그녀였다는 것을
심지어 김혜연은 신무열이 다른 여자를 좋아한다는 흔적도 찾지 못했다.그녀는 입술을 틀어 물었다. 총 맞은 곳보다 가슴이 더 아팠다.“왜 여자친구를 사귀지 않는 거예요? 혹시 어깨에 짊어진 책임감 때문에 그래요?”그렇지 않으면 말이 되지 않았다. 신무열에게서 아무런 흔적도 나오지 않았으니까.“이건 내 일이야.”신무열의 어투는 친절하지 못했다. 순간 그의 이목구비가 냉동실에서 꺼낸 듯 차가워지고 분위기도 서늘해졌다.김혜연은 신무열이 이런 반응을 보이는 것도 사실은 그녀가 포기하길 바라서 그러는 것임을 알고 있었다.그녀는 고개를 저으며 확고하게 말했다.“그래도 전 포기하지 않을 거예요. 무조건 도련님이랑 함께 할 거예요. 걱정하지 말아요. 전 도련님에게 짐이 되지 않을 거니까요. 그러니까...”“아직도 모르겠어?”신무열의 표정은 여전히 싸늘했다.“넌 내 취향이 아니라고. 그리고 네가 요즘 한 행동은 정말이지 짜증이나 나. 난 날 짜증이 나게 하는 사람이랑 사귈 생각 없어.”신무열은 김혜연이 자신을 깔끔하게 포기하고 이해해 주길 바랐다.하지만 김혜연은 그것을 거부하고 있었다. 정말이지 죽을 때까지 그를 쫓아다닐 생각인 것 같았다.그녀는 여전히 비굴하게 말했다.“그럼 어떤 여자가 취향인데요. 전 도련님을 위해서라면...”신무열은 픽 웃어버렸다.“나를 위해 모습이라도 바꿀 생각이야? 성형으로? 아니면 다른 방법으로?”“김혜연, 네가 성형을 하면 네가 여전히 김혜연인 것 같아?”신무열이 내뱉는 한마디 한마디가 날카로운 비수가 되어 그녀의 심장을 푹푹 찌르는 것 같았다.그랬다. 성형하면 더는 원래의 그녀가 될 수 없었다.하지만 지금 그녀의 모습은 신무열의 취향이 아니었다.그녀는 신무열이 방법을 알려주길 바랐다.결국 갈라진 목소리로 말했다.“왜, 왜 저한테 기회를 주지 않는 건데요? 전 그렇게 못난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해요. 도련님...”“그만 말하고 푹 쉬어. 네가 나 쫓아다니는 것에 대해 난 이미 분명히 대답했으니까.”신무열은
신무열은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돌려 김혜연을 보았다.김혜연은 확고한 눈빛으로 그를 보고 있었다.김혜연에게 이런 음모를 꾸밀 담은 없었다.더구나 그는 이미 요한을 시켜 문제를 만든 사람들을 조사해 보았다. 그저 불만이 많아 생긴 문제였다.그는 입술을 틀어 물며 낮게 깔린 목소리로 말했다.“믿어주지. 하지만 난 너한테 아무 마음도 없어.”“여전히 같은 말을 하시네요. 도련님, 방금 요구를 말하라고 하셨잖아요. 전 이미 요구를 말했어요.”김혜연은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녀는 지금 진심이고 진지했다.한 달이라는 시간은 길지 않았다.다만 신무열이 말을 하기도 전에 김혜연이 가벼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도련님, 전 도련님을 위해 목숨까지 바쳤어요. 그런데 고작 이런 요구도 들어주지 못하시는 거예요?”“나한테 그딴 말을 하면서 자극할 것 없어. 어차피 이 일은... 안 돼.”한 달 동안 그녀의 남자친구가 되는 건 어렵지 않았지만, Y 국의 모든 사람들이 두 사람 사이를 알게 된다면? 나중에 기간이 끝나고 헤어질 때 그들에게 무엇이라고 설명해야겠는가.그러니 애초에 시작하지 않는 것이 나았다.김혜연은 가슴이 미어졌다.중얼거리듯 입을 열었다.“도련님, 정말로 매정하게 거절하실 거예요?”그녀는 목숨까지 내던졌으나 신무열은 여전히 그녀에게 기회조차 주지 않았다.신무열이 말했다.“한 달 뒤에 그 연극이 끝나면 다른 사람들이 너랑 나를 어떻게 생각하겠어?”김혜연은 순간 목에 가시가 걸린 것처럼 말이 나오지 않았고 두 눈에 눈물이 맺혔다.신무열의 생각을 알게 되었으니 말이다.김혜연은 입술을 틀어 물더니 결정을 내렸다.“사람들의 시선이 두려운 것이라면 한 달 뒤에 제가 나서서 설명할게요. 제가 바람을 피웠다고요. 그러면 되는 건가요?”김혜연은 고개를 들어 그를 보았다. 여전히 기대하는 눈빛이었다.다만 그녀의 눈빛은 조금 전보다 더 확고했다.신무열은 변치 않는 그녀의 마음에 조금 흔들리기도 했다.다소 의아했다.“김혜연, 미쳤어?”그녀가
유능한 도우미... 김혜연에게 감정이 없는 것과 마찬가지였다.김혜연은 정말이지 진심으로 신무열을 사랑했다. 그러니 신무열을 위해 이런 말까지 할 수 있는 것이다.하지만 신무열은 이런 이유로 그동안 마음을 열지 않았다. 만약 마음을 열기 시작한다면, 그녀를 진심으로 사랑하게 된다면 그녀를 책임을 지지 않으면 안 되었기 때문이다.그러니 더욱 장난으로 여겨서도 안 된다.“김혜연, 정신 좀 차려. 네 인생은 네 거야. 다른 사람을 위해 살면 안 된다고. 설령 내가 없다고 해도 넌 더 좋은 사람을 만날 수 있을 거야.”아직은 김혜연의 눈에 다른 사람이 들어오지 않는다고 해도 세상은 넓고 사람은 많았다. 김혜연도 시간이 지나면 점차 다른 사람을 받아들이고 사랑할 수 있게 된다.김혜연은 목구멍에 무언가 막힌 것처럼 말이 나오지 않았다.지금 이 순간에도 신무열은 여전히 그녀를 설득하면서 정신 차리라고 했다.“전 그렇게 모자란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해요! 제가 이 정도까지 말했는데도 들어주지 않으시는 거예요? 도련님이 절 책임지지 않아도 된다고요. 한 달만, 딱 한 달만 아무것도 신경 쓰지 말고 남자친구 역할을 해달라고요. 아니면 제가 도련님 앞에서 죽기를 바라시는 거예요?”이성을 잃은 김혜연은 히스테리를 부렸다.신무열은 그녀에게 정신 차리라고 했지만 그녀는 신무열을 사랑했다. 신무열을 위해서라면 모든 것을 포기할 수도 있다.설령 그가 그녀를 미친 사람 취급해도 그를 사랑했다.신무열이 동의만 한다면 나중에 죽어줄 수도 있다.그런데 신무열이 어떻게 그녀에게 죽으라고 하겠는가. 그녀가 신무열을 위해 대신 총에 맞을 때부터 그녀는 신무열의 결심을 눈치채게 되었다.“죽지 마. 그 한 달이... 네 유일한 요구라면 그럼 한 달만 해주지.”“정말요?”김혜연은 눈을 반짝였다. 믿어지지 않았다.그녀는 있는 힘껏 신무열의 손을 잡았다. 마치 유일한 동아줄을 잡는 것처럼.신무열이 동의만 한다면 그녀에게 희망이 있다는 것이었다. 그와 함께할 희망이 있다면 다시 진심
“그렇긴 하지만 나는 김혜연한테 아무 감정도 없다고. 김혜연이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 난 먼저 가볼게.”신무열은 느릿하게 말하며 걸음을 옮기려 했다.그는 더는 이 얘기를 하고 싶지 않았다.애초에 김혜연에게 다른 마음을 느껴본 적 없었으나 자꾸 주변에서 말하니 점점 피곤해졌다.“봐요, 지금도 혜연 씨가 기다린다고 가겠다고 했잖아요. 이래도 아무 감정도 없어요? 오빠, 여자는 말과 속마음이 다르다고 하지만 남자도 똑같아요.”온지유는 결국 참지 못하고 장난스럽게 말했다.“별이는 괜찮아? 별이를 내버려 두고 한가하게 나와 이런 말을 해도 되는 거야?”신무열은 일부러 정색하며 말했다.온지유는 가벼운 미소를 지었다.“아직 안 나았어요. 별이도 신경 쓰고 오빠한테도 신경 쓸 수 있으니까 그건 걱정하지 말아요.”“난 됐고, 별이한테나 신경 써.”말을 마친 신무열은 죽그릇을 들고 걸음을 옮겼다.온지유는 그런 신무열의 뒷모습을 빤히 보며 흐뭇하게 입꼬리를 올렸다.이런 농담도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을 보면 이미 김혜연에게 마음이 생긴 것이 분명했다.다만 고집이 센 신무열이 인정하지 않을 뿐이다....신무열은 죽그릇을 들고 김혜연에게 다가갔다.김혜연은 신무열이 들고 있는 죽그릇을 보았다. 아무리 평범한 흰 쌀죽이라고 해도 김혜연에겐 마음마저 녹일 수 있는 따듯한 죽이었다.“절 위해 만드신 거예요?”김혜연은 고개를 들어 신무열을 보았다. 반짝거리는 두 눈은 마치 밤하늘에 뜬 별 같았다.“그래. 난 이런 흰 쌀죽밖에 할 줄 몰라. 다른 건 못해.”신무열은 침대 테이블을 당기며 죽그릇을 내려놓았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김혜연을 일으켜 주었다.겉보기엔 평범한 쌀죽이었지만 김혜연은 이상하게도 달고 맛있게 느껴졌다.왜냐면... 이것은 신무열이 그녀를 위해 직접 만든 것이었으니까 신무열의 마음이 담겨 있었다.김혜연은 입술을 틀어 물며 나직하게 말했다.“도련님이 못하는 건 제가 할 줄 알아요. 앞으로도 제가 도련님께 맛있는 거 만들어 드릴게요. 도련님은 바
은서우도 뒤따라가려는데 간호사가 그녀의 팔을 잡으며 엄숙하게 말했다.“은 선생님, 아직은 따라가면 안 되죠. 어떻게 된 일인지 설명부터 하셔야 하는 거 아닌가요?”“정말 제가 밀친 게 아니에요. 혼자 병이 발작한 거라고요. 믿어주세요.”은서우의 말에도 간호사는 고개만 저을 뿐 다른 말은 하지 않았다.이때 보안팀 요원들도 현장에 도착했고 은서우를 사무실로 데려가 추가 처리를 기다렸다.은서우는 두 손으로 팔을 꽉 끌어안고 의자에 앉아 있었다.얼마 지나지 않아 병원 임원진들이 속속 도착했고, 그들은 어두운 표정으로 은서우를 바라보며 면전에 대고 욕설을 퍼부었다.“은 선생님, 의사이신 분이 어떻게 병원에서 이런 일을 저지를 수가 있어요? 이건 명백히 병원 규정과 직업윤리에 어긋나는 행실이에요.”“이유가 뭐였든 간에 은 선생님의 이런 행동은 병원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어요.”은서우는 모든 걸 설명하고 싶었지만, 그녀의 목소리는 많은 비난 속에 묻힐 수밖에 없었고 어쩔 수 없이 그냥 고개를 숙인 채 눈물을 삼켰다.은서우가 절망에 빠져 있을 때 소상태와 연희진은 아들의 소식을 듣고 급히 병원으로 달려갔다.두 사람은 급하게 병실로 뛰어 들어갔고, 의식을 잃은 소태훈을 본 연희진은 바닥에 주저앉아 울음을 터뜨렸다.소상태는 노기등등한 표정으로 은서우가 있는 사무실로 들어가 그녀를 보자마자 서슬이 퍼런 눈빛으로 달려들어 때리려 했지만, 다행히 보안 요원이 달려와 그를 말렸다.“내 아들을 저렇게 만들어 놓고 무사할 줄 알아? 죽기보다 못하게 만들어 줄 거야!”소상태는 은서우를 향해 으르렁거렸다.“이 쓸모없는 년아, 내 아들을 저렇게 만들어 놓고 이제 어떡할래!”뒤따라온 연희진은 목이 쉬도록 고함을 지르며 은서우를 잡으려고 허공에서 손을 허우적거렸다.은서우는 울며 말했다.“제가 밀친 게 아니라니까요. 갑자기 병이 발작해서 쓰러진 걸 왜 제 탓으로 돌리는 거예요!”하지만 은서우의 말을 전혀 들을 생각이 없었던 소상태는 연희진보다 다소 진정된
“소연아, 너 그 말 들었어? 저쪽 병동에 있던 까다로운 환자 한 명이 오늘 의료진들한테 고맙다고 인사를 했대. 정말 해가 서쪽에서 뜬 거 아닌가 했다니까?”김소민의 신기하다는 듯한 말에 박소연이 웃으며 답했다.“우리가 정성스럽게 돌봐줘서 감동하였나 봐. 그건 그렇고, 은 선생님이 회진하러 간 지 한참 지나지 않았어? 왜 아직도 안 오지? 평소 같으면 이 시간에는 돌아왔을 텐데.”김소민은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며 말했다.“상태가 안 좋은 환자가 있으면 좀 걸릴 수도 있지. 은 선생님이 워낙 책임감도 강하고 뭐든 열심히 하시잖아. 너도 잘 알면서.”“그건 그렇지만 너무 오래 지난 것 같은데? 왜 나는 이렇게 불안하지?”박소연은 불안한 마음에 눈썹을 찡그렸다.“아이고, 쓸모없는 걱정하고 있어. 곧 돌아오시겠지. 병원이 이렇게 큰데 아는 사람을 만나서 얘기를 나눌 수도 있잖아.”김소민은 박소연을 안심시켰다. 하지만 시간이 아무리 지나도 은서우는 돌아오지 않았고 불안감이 더욱 커졌던 박소연은 몸을 일으키며 말했다.“걱정돼서 안 되겠어. 내가 가볼게. 이 밤중에 무슨 일이라도 생겼으면 어떡해.”진지한 박소연의 태도에 김소연도 즉시 몸을 일으키며 말했다.“그럼 같이 가보자.”두 사람이 간호사 스테이션을 나와 얼마 지나지 않자, 비상계단 쪽에서 은서우의 목소리가 섞인 듯한 시끄러운 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왔다.김소민과 박소연은 서로 눈길을 마주치더니 즉시 계단 쪽으로 달려가며 소리쳤다.“은 선생님!”두 간호사의 목소리를 들은 은서우는 젖 먹던 힘까지 다해 소리를 질렀다.“사람 살려요! 저 여기 있어요!”은서우는 자신을 잡아당기는 소태훈의 손을 있는 힘껏 뿌리치고 동료들을 향해 달려갔다.겨우 소태훈한테서 벗어났다고 생각하던 찰나 뜻밖의 사고가 벌어졌다.은서우의 뿌리치는 힘에 몸의 균형을 잃은 소태훈은 뒤로 몇 걸음 비틀거리더니 곧바로 바닥에 쓰러져 입에 거품을 물고 온몸에 경련을 일으키기 시작했다.막 계단 입구에 도착하던 간호사들은 은서우 옆에
은서우는 이 말을 내던지고 집에서 도망쳐 나왔다.그래봤자 갈 수 있는 곳은 병원밖에 없었던 은서우는 야간 근무를 다른 사람과 교대하고 병원에 남았다.이 밤, 병원 복도에는 가끔 들려오는 기계 소리만 들려올 뿐 매우 조용했다.은서우는 평소와 같이 병동 구역을 돌아보며 환자들의 상태를 살폈다.바로 이때 예상치 못한 한 사람의 그림자가 그녀의 앞에 나타났다. 그림자의 주인은 소태훈이었는데 그는 지팡이를 짚은 채 절뚝거리며 걸어오고 있었다.갑자기 이상한 냄새가 나자 은서우는 코를 찡그렸다. 몸에서 나는 것 같은 그 냄새는 은서우의 곁으로 다가오자 더욱 진해졌다.소태훈은 온몸에 술 냄새를 풍기며 흐리멍덩하면서도 광기 어린 눈빛으로 걸어왔다.“은서우.”소태훈은 혀 꼬부리는 말투로 은서우의 이름을 부르더니 갑자기 손을 뻗어 그녀의 손목을 확 잡아당겼다.깜짝 놀란 은서우는 벗어나려고 안간힘을 쓰며 말했다.“소태훈, 너 술 먹었어? 여기까지 어떻게 온 거야? 이 손 놔!”하지만 소태훈의 귀에 은서우의 말은 들릴 리가 없었고 그는 술기운을 빌어 은서우를 자신의 품으로 끌어당겨 한 손으로 그녀의 볼을 감싸고 강제로 입을 맞추려 했다.갑작스러운 소태훈의 행동에 혐오스러우면서도 두려워진 은서우는 고개를 돌려 피했다.“이 미친놈아! 이거 안 놔? 보안 요원 부르기 전에 당장 놔!”소태훈은 차갑게 웃으며 말했다.“보안 요원? 그 사람들이 나보다 더 빠를 것 같아? 넌 내 손바닥 안에서 못 빠져나가. 너는 내 것이야.”끔찍한 소태훈의 말에 은서우는 온몸에 소름이 돋아났다. 그녀는 필사적으로 발버둥 치다 무릎으로 소태훈의 배를 걷어찼다.갑작스러운 통증에 소태훈은 손에 힘이 풀렸고 은서우는 기회를 틈타 즉시 몸을 돌려 간호사 스테이션으로 달려갔다.그곳에는 간호사들이 있었고 은서우는 보안팀에게 연락해달라고 도움을 청할 예정이었다.하지만 술에 취한 채 이미 이성을 잃었던 소태훈은 아픔을 참으며 즉시 은서우의 뒤를 따라가 그녀의 등 뒤에서 손을 뻗어 입을 꽉 틀어
하지만 소태훈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왜 없어? 네가 이렇게 제 발로 찾아왔는데. 그러니까 돈을 달라고 할 때 줬으면 좀 좋아? 그럼 이런 일도 안 일어났을 거잖아. 후회되지?”“너!”“지금 줘도 안 늦었어. 네 이름 실시간 검색어에서 내리고 싶으면 일억 가져와.”터무니없는 액수에 은서우는 손도 떨리고 목소리로 떨려왔다.“일억? 사천만 원이라며?”소태훈은 휠체어에 기대앉으며 비꼬는 태도로 말했다.“그건 며칠 전 가격이지. 지금은 일억이 필요해. 백 원도 적으면 안 되는 정확한 일억.”노골적인 협박에 은서우는 피가 날 정도로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입안에서는 비릿한 피 냄새가 났지만, 그런 건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이십 년 넘게 해준 것도 없이 항상 요구하고 갈취만 하는 이런 사람들이 가족이라니, 은서우의 마음속은 분노와 실망으로 가득 차올랐다.다른 가족들은 자애로운 엄마, 다정한 아빠 그리고 효도하는 자녀로 식구들이 항상 화기애애한 분위기였는데, 왜 은서우의 가족은 이런 사람들인지 도대체 자신이 뭘 그렇게 잘못했는지 이해되지 않았다.“꿈 깨. 백 원도 못 줘. 실시간 검색 내리든 말든 네 마음대로 해. 나도 내 방법대로 할 거야. 고소해서 법원가면 지금까지 너한테 준 돈 전부 토해내게 할 테니까 너도 각오해.”은서우도 더는 참고 싶지 않았다.지렁이도 밟으면 꿈틀한다는데, 하물며 은서우도 사람인지라 쥐꼬리만 한 은혜를 갚겠다고 이렇게까지 했으면 충분하다고 생각했다.와장창!소상태가 들고 있던 유리컵을 은서우의 발 옆에 내 던졌다. 많은 유리 파편이 한순간 바닥에서 튕겨 오르며 사방에 뿌려졌고 날카로운 파편 하나가 은서우의 종아리를 스쳤다.은서우가 욱신거리는 통증에 고개를 숙여보니 종아리에서 피가 줄줄 흘러나왔다.소상태는 은서우를 손가락질하며 말했다.“이십 년을 키워줬더니 이런 배은망덕한 물건인 줄 몰랐네? 고소? 할 수 있으면 어디 한번 해봐. 오늘 이 집 밖으로 한발도 못 나갈 테니까.”상처가 참기 힘들 정도로 너무 아팠지만
은서우의 말을 듣고 있던 인명진은 잠깐 뭔가를 생각하다 말했다.“같이 가줄게요. 거절할 생각 하지 말고. 지난번에 거기 갔다가 무슨 일이 있었는지 말 안 해도 잘 알 거 아니에요. 나 아니었으면 그 집에서 나오지도 못했을 텐데.”지난번 소태훈의 기세에 눌려 아무것도 못 했던 생각이 떠올라 은서우는 숨을 깊게 들이마시고 웃으며 말했다.“또 원장님한테 신세를 지게 생겼네요.”인명진은 가벼운 미소로 화답했다.굳이 시간을 지체할 필요가 없었던 인명진은 은서우를 데리고 즉시 소씨 가문으로 향했다.집에 도착하자 은서우는 문 앞에 서서 잠깐 멈추고 말했다.“여기 계세요. 조금 있다가 상황이 안 좋은 것 같으면 도와줘요.”인명진은 은서우의 휴대전화를 보며 말했다.“연락해요.”은서우는 휴대전화를 들어 인명진한테 보여줬다.그녀는 이미 오래전에 인명진을 긴급 연락처로 설정해 놓은 상태였고, 따라서 위급한 상황이 닥친다면 인명진한테 제일 먼저 연락할 수 있었다.열쇠를 가지고 있던 은서우는 심호흡을 하고 현관문을 열고 들어갔다.집 안으로 들어오는 은서우를 보자 소상태는 즉시 얼굴을 구기며 말했다.“무슨 낯짝으로 들어오는 거야? 밖에서 죽은 줄 알았더니 살아 있었네? 태훈이가 그러는데 네가 태훈이 번호도 차단하고 돈도 안 준다고 그랬다며? 이제 큰 병원에서 일한다고 먹고살 만하니까 우리는 나 몰라라 내팽개치겠다는 거야?”“아니요. 오늘에는 이 문제 때문에 온 게 아니에요. 소태훈은 어디 있어요?”주방에 있던 연희진은 은서우를 보고 다정하게 맞아주며 인사를 하려다 소상태가 눈을 부릅뜨는 것을 보더니 주춤거리며 어색한 표정으로 말했다.“태훈이 방에 있어. 요즘 너랑 연락이 안 된다고 또 성질부리고. 어휴, 뭐 어쩌겠어. 그래도 너무 뭐라 하지 마. 나이 들면 나아질 거야.”은서우는 매번 반복되는 지겨운 말에 웃음을 터뜨렸다.“이미 23살이에요. 몇 살을 더 먹어야 나아지는데요? ”연희진는 우물쭈물하며 아무 말도 못 했다. 이런 상황과 태도를 먼저 예상했
은서우는 아무래도 설명해야 할 것 같았다.“뒤에서 제 얘기를 했다고 운 게 아니라 다른 것 때문에...”은서우는 말끝을 흐렸다. 하지만 이미 실시간 검색어를 봤고 며칠 전 은서우한테서 자초지종을 다 들었던 인명진은 즉시 어떻게 된 일인지 알아차렸다.인터넷에는 은서우의 몰래카메라 사건부터 시작해 과거에 일하던 곳부터 매일 밤 아르바이트를 했던 영상과 사진도 올라와 있었다.글을 올린 사람의 말에 의하면 은서우는 어릴 때부터 가정 형편이 좋지 못했고 회사에 들어갈 수 있었던 것도 전부 돈이 많은 남자 덕분이라고 설명했다.돈이 많은 남자는 누가 봐도 인명진이었다.은서우의 과거를 아는 사람은 병원에 한 사람도 없었고 심지어 인명진조차도 며칠 전 은서우가 직접 말해줘서 알게 된 거라 결국 이 사실을 알고 폭로할 수 있는 사람은 가족밖에 없었다.여기까지 생각한 인명진은 은서우가 불쌍하고 안쓰러웠다.지난날 은서우가 밤에조차 아르바이트했던 이유는 소씨 가문 사람들한테 돈을 주기 위해서였는데, 그들은 고맙게 생각하기는커녕 이제 와서 은서우가 더는 돈을 주지 않는다는 이유로 이렇게 뒤통수를 친 거였다. 이리저리 차이는 은서우의 처지가 마치 축구공 같았다. 인명진은 그윽한 눈빛으로 은서우를 바라보며 말했다.“인터넷에 돌아다니는 말들 너무 신경 쓸 필요 없어요. 은서우 씨는 자기 앞에 일만 잘하면 돼요. 그리고 내 생각이 궁금하다면 분명하게 말할게요. 나는 그런 걸 신경 쓰지 않습니다. 은서우 씨의 잘못이 아니잖아요.”멍하니 인명진을 바라보던 은서우는 코끝이 찡해지며 겨우 가라앉혔던 눈물이 다시 차오르는 것 같았다.“정말요?”“네.”도대체 어떤 삶을 살았기에 겨우 이런 말 한마디에도 감동받아 눈물을 글썽이는 건지, 인명진은 어이없는 표정으로 은서우를 바라봤다.하지만 도와주는 사람 하나 없는 무기력한 마음을 인명진도 잘 알고 있었다.인명진도 어릴 때 법로 밑에서 크면서 항상 그런 마음을 가지고 살았었다.그때 그는 매일 누군가 자신을 이해해 주기를 갈망했고
은서우는 믿을 수 없는 눈빛으로 간호사의 팔을 잡고 있던 손을 맥없이 툭 떨어뜨렸다.“뭐라고요?”‘어떻게 안 거지? 그 인턴이 말했나? 하지만 그 여자는 이미 병원을 나갔는데?’여자 간호사는 자기 팔을 툭툭 털며 냉소를 짓고 말했다.“모르고 있었나 봐요? 인터넷 찾아봐요. 누군가가 은 선생님이 한 짓들을 전부 다 까발렸으니까.”은서우는 심장이 내려앉는 것 같았다. 그녀는 얼굴이 하얗게 질린 채 비틀거리는 몸을 겨우 가누고 서둘러 휴대전화를 꺼냈다.초조함과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은서우는 제발 자신이 생각하는 그것만은 아니길 간절히 바랐지만 결국 그 바람은 산산조각이 났고 일은 결코 그녀가 바라는 대로 따라주지 않았다.인터넷에 들어가 보자 실시간 검색어에 ‘몰카’라는 단어가 올라가 있었다.은서우는 마치 누군가 팔다리의 힘을 쫙 뺀 것처럼 그 자리에 풀썩 물어 앉을 것 같았다.간호사는 괴상 야릇한 표정으로 은서우를 비꼬며 망했다.“우리 원장님이 누굴 제일 이뻐하죠? 바로 여기 있는 은 선생님이에요. 근데 이뻐하고 생각해 주면 뭐 해요? 은혜를 원수로 갚는데. 누가 감히 상상조차 했겠어요? 앞에서는 좋은척하면서 뒤에서 몰래 사진 찍어서 팔고 있을 줄?”꽉 쥔 주먹 때문에 손톱이 손바닥을 파고들었지만, 은서우는 아무 감각도 느끼지 못했다. 주위의 비웃음과 조롱이 끊임없이 은서우의 귓속으로 파고들어 그녀의 양심을 후벼팠다.은서우의 머릿속에는 약을 탔던 날 인명진이 그걸 발견하고 혐오하는 눈빛으로 그녀를 보고 있던 얼굴이 확대되어 둥둥 떠다니는 것 같았다.수군거리는 주변의 소리는 마치 인명진의 입에서 나오는 소리처럼 들렸다.“은서우 씨, 이렇게 배은망덕한 사람인 줄 몰랐네요. 내가 그렇게 많은 걸 도와줬는데 이런 식으로 보답하는 거예요? 사람을 정말 잘못 봤네요.”“은서우 씨가 이런 사람인 줄 몰랐네요. 애당초 좋게 보는 게 아니었는데.”“지금이라도 떠나세요. 내 눈앞에서 알짱거리지 말고.”은서우는 환청에 멍해진 채 아무 말도 못 하고 서있었다
은서우는 인명진이 그런 눈빛으로 누군가를 바라보는 모습을 처음 보았다. 확실하게 티가 난건 아니지만 자세하게 보면 알아차릴 수 있었다.더욱이 은서우는 인명진 옆에서 한동안 머물렀던 사람이라 미묘한 그의 표정도 금방 알아차릴 수 있었다.“죄송해요. 원장님, 저 때문에 난처해진 거 아니에요?”고개를 들고 은서우를 바라보던 인명진은 그녀의 눈빛에 하고 싶었던 말을 또다시 목구멍으로 삼킨 채 다른 말을 꺼냈다.“앞으로 사석에서는 원장님이라고 부르지 마세요.”“그러면 뭐라고 부를까요? 인 선생님이라고 부를까요?”“이름 불러요.”인명진은 나이프와 포크로 접시에 놓인 스테이크를 자르며 태연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런데도 은서우는 기분이 좋은 듯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그러면 앞으로 병원에서는 원장님이라고 부르고 사석에서는 인명진 씨라고 부를게요.”은서우가 부르는 이름에 인명진은 잠시 흠칫했지만 이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그래요.”은서우는 식사 자리가 너무 좋았다. 돈에 대한 걱정과 집사람들 때문에 받았던 스트레스들이 전부 사라질 만큼 행복한 시간이었다.병원에서 인명진이 준 차트를 받아쥔 은서우는 뿌듯한 마음에 의기양양해지기도 했다.하지만 병원 내부에서는 점점 귀에 거슬리는 소문이 퍼지고 있었다.단순히 은서우가 인명진이 꽂은 낙하산이고 공평하지 못하다는 말이 퍼지고 있을 때는 인명진이 신경 쓰지 말라는 말에 은서우도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하지만 소문은 점점 더 허황한 쪽으로 퍼졌고 심지어 근무시간에 수군거리는 사람도 있었다.“은서우 같은 배경이 어떻게 우리 병원에 들어온 거예요? 여기가 무슨 개인 진료소도 아니고 시에서도 권위 있는 병원이잖아요.”“내가 뭐라 그랬어요. 무조건 낙하산이라니까요? 원장님과 엄청 가깝게 지내잖아요. 두 사람 사이에 우리가 모르는 뭔가가 있는지도 모르죠.”“그럼 설마...”은서우는 차트를 쥐고 있던 손을 부들부들 떨며 소리쳤다.“지금 무슨 말을 하는 거예요!”수군거리던 사람들은 은서우의 목소리에 깜짝 놀라며
은서우는 인명진에게 메뉴판을 건네며 말했다.“봐봐요. 못 드시는 음식 있어요?”인명진은 간결하게 대답했다.“없어요.”은서우는 다시 메뉴판을 받아 들고 현재 자신의 경제력으로 감당할 수 있는 요리를 몇 개 주문했다.“이 정도면 될까요?”인명진은 은서우를 힐끗 쳐다봤다.분명히 덤덤한 눈빛이었지만 은서우는 쪽팔려서 고개를 들 수 없었다. 그녀는 자신이 밥을 사주겠다고 큰소리쳐놓고 겨우 이 정도밖에 못 산다는 게 창피했다.‘분명히 날, 별로라고 생각하시겠지.’은서우가 이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인명진이 시선을 거두며 말했다.“좋아요. 그리고 내 생각만 하지 말고 은서우 씨가 좋아하는 걸 주문해요.”인명진도 은서우가 자신의 입맛을 고려해 주문했다는 걸 알아차렸다. 속마음을 들킨 은서우는 갑자기 얼굴이 화끈거렸다.얼마 지나지 않아 주문한 음식이 올라왔고 은서우는 익숙하게 젓가락을 가져왔다.“이 식당은 젓가락을 직접 가져와야 해요. 여기요. 전부 소독한 거예요.”은서우의 말에 인명진은 기분 좋게 젓가락을 받았다. 의사들은 아무래도 어느 정도 결벽증을 가지고 있었는데 인명진도 예외는 아니었다.그는 물끄러미 은서우를 보며 말했다.“이런 것까지 신경 써줘서 고마워요.”은서우는 인명진의 눈길을 알아차리지 못한 채 자리에 앉으며 말했다.“저도 의사잖아요. 직업병인가 봐요.”은서우의 말에 인명진은 은은한 미소를 지었다.무심코 주변을 훑어보던 인명진의 눈길은 갑자기 누군가에게 멈췄고 은서우는 자신이 제일 존경하던 원장의 표정이 갑자기 바뀌는 걸 즉시 알아차렸다.인명진은 누군가의 이름을 조용히 불렀다.“온지유?”자신의 이름에 여자는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돌렸고 여자의 얼굴을 올려다본 은서우의 눈에는 놀라움이 스쳤다.온지유는 인명진을 발견하고 놀라움을 금치 못하며 윤별의 손을 잡고 다가왔다.“명진 씨가 여기 왜 있어요? 병원이 바쁜 줄 알았는데 아닌가 봐요?”말을 마친 온지유의 눈길은 은서우에게 멈췄고 그녀는 잠깐 멈칫하더니 의미심장하게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