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 전부 지나간 일이야. 그러니까 자꾸 떠올리려고 하지 마. 지금은 우리 가족 모두 한곳에 있잖아. 별이도 치료를 받고 있으니 튼튼해질 거고 다른 아이들보다 더 씩씩하고 건강한 아이로 자랄 거야.”여이현은 울적해진 그녀의 기분을 눈치채고 위로했다.별이의 건강을 언급하니 온지유는 다소 기분이 나아졌다.‘그래, 고통은 전부 지나간 일이잖아. 우린 이제부터 현재에만 집중하면서 살면 돼.'어느새 돼지고기 죽은 완성되었다. 딴생각하고 있던 온지유는 뜨거운 냄비에 그대로 손을 가져다 댔다.“아!”뜨거운 것이 손에 닿자 온지유는 화들짝 놀라며 손을 떼곤 귓불을 만지며 식혔다.“괜찮아?”여이현은 다급하게 온지유의 손을 보았다.그가 가까이 다가가자 마침 온지유가 고개를 돌렸다. 두 사람의 입술이 맞물렸다.입술은 부드럽고 따듯했다.여이현은 그 순간 가슴이 간질거렸다. 시간을 멈추는 능력이 있다면 지금 당장 멈췄을 테지만 온지유의 손가락이 더 걱정되었다.“괜찮아. 그냥 조금 부은 것 같아.”온지유는 손을 내밀며 보여주었다. 손가락이 전부 빨갛게 되었고 손끝에는 물집도 생겨났다.여이현은 얼른 그녀의 손을 싱크대로 가져다 대며 물을 틀었다.“일단 물로 식혀. 남은 건 내가 할게.”그는 몸을 돌려 가스를 꺼버린 후 냄비를 들었다. 냄비 뚜껑을 연 순간 고소하고 향긋한 냄새가 주방에 퍼졌다.죽을 냄비에서 퍼낸 후 그릇에 담아 밖으로 가지고 나왔다.온지유도 수도꼭지를 닫은 후 따라갔다.별이에게로 가는 길에서 여이현은 먼저 법로에 대해 입을 열었다.“네가 아직 법로 님을 아버지로 받아들일 수 없다는 거 알아. 나도 네 선택을 존중해. 하지만 법로 님은 별이의 외할아버지잖아. 이건 바꿀 수 없는 현실이야. 별이도 알 권리가 있고...”온지유는 침묵했다.만약 법로가 아니라 다른 사람이 아버지였다면 그녀는 받아들였을 것이다.그러나 그녀의 친부는 하필이면 법로였고 수많은 악행을 저지르면서 손에 피를 묻혔다.그녀는 법로를 여전히 받아들일 수 없었다. 하
“얼른 데리고 와.”법로는 비록 S 국을 싫어했지만 온지유와 여이현은 서로 사랑하고 있을 뿐 아니라 아이까지 있었다.별이를 생각해서라도 그는 S 국의 체면을 지켜주며 잘 지내보려고 했다.물론 만약 브람이 그의 소중한 딸을 괴롭힌다면 당장이라고 뒤엎을 생각도 있었다....한편 온지유는 별이를 휠체어에 태우고 정원을 산책하고 있었다.꽃가루 날리는 철이 지났던 시기였던지라 정원의 꽃은 전부 고심히 골라서 심은 것이었기에 그녀는 안심하고 아이를 데리고 산책하러 나왔다.“엄마, 이 꽃이 너무 예뻐요. 처음 보는 꽃이에요!”오랜만에 바깥구경을 하게 된 아이는 바깥의 신선한 공기를 마시며 주위를 두리번댔다. 모든 것이 신기하고 궁금했다.만약 매일 이렇게 나올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아이는 정말로 매일 침대에 누워있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이 말을 입밖에 꺼내지는 않았다.여이현과 온지유가 걱정하는 것이 싫었기 때문이다. 말썽 피우고 싶지 않았다.여이현은 꽃을 딴 후 아이의 손에 쥐여주었다.“이 꽃이 좋으면 많이 따도 돼. 아니면 병실에도 꽂아둘까?”“네! 좋아요!”아이는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곧이어 아이는 많은 예쁜 곳을 구경하게 되었다. 꽃들은 하나같이 부드럽고 예뻤다.역시나 어머니는 아이의 마음을 잘 안다는 말은 틀리지 않은 것 같았다. 별이가 입을 열기도 전에 별이는 꽃을 따서 아이의 손에 쥐여주었다.“전부 우리 별이 꽃병에 꽂아 넣는 거야.”“네!”별이는 보물을 들고 있는 것처럼 소중하게 꼬옥 쥐었다.그 순간 새가 그들의 앞에 날아왔다. 새는 아주 늠름한 자태로 하늘을 날아다니고 있었다.별이는 부러운 눈길로 새를 보았다.“엄마, 저 새를 좀 보세요. 아주 빨리 날아요!”온지유의 눈시울이 붉어졌다.새는 빠르게 날 수 있었지만 그녀의 아이는 휠체어에 앉아 있었고 신나게 뛰어다닐 수도 없었다.여이현은 그녀의 눈가에 맺힌 눈물을 닦아준 뒤 허리를 굽혀 별이에게 말했다.“별이가 밥도 잘 먹고 치료 잘 받는다면 휠체어에 앉
온몸에서 전해지는 통증에 신무열은 너무도 괴로웠다.그는 작게 앓는 소리를 냈다.그 소리를 들은 김혜연은 깜짝 놀라 정신이 들었다. 눈을 뜬 신무열을 보았을 때 아주 기뻐했다.“도련님, 드디어 깨어나셨군요!”신무열은 김혜연을 본 순간 정신을 잃기 전 김혜연과 함께 적을 무찌르던 기억이 떠올랐다.그리고 자신이 정신을 잃던 순간 가슴 찢어지게 울어대던 그녀의 모습도 떠올랐다.그는 김혜연이 줄곧 자신의 곁을 지키고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신무열은 입술을 틀어 문 채 작게 말했다.“지유는 어떻게 됐어? 별이는 아버지가 치료하신 거야?”신무열은 몸이 부서질 듯한 고통을 참으며 침대에서 일어나 온지유에게 가려고 했다.김혜연은 신무열이 온지유을 엄청 신경 쓰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여하간에 온지유는 Y 국이 아닌 다른 곳에서 떨어져 자랐으니까 모든 사람들의 신경이 온통 온지유에게 가 있었다.하지만 아무리 여동생에게 신경이 쏠렸다고 해도 건강이 1순위가 아니겠는가.“도련님, 아직 일어나면 안 돼요. 그냥 다시 누우세요. 그쪽에서 좋은 소식이 들려오면 제가 바로 도련님께 전해드릴게요.”김혜연은 신무열을 부축하였다. 신무열이 몸 상태도 무시하고 멋대로 돌아다니지 않길 바랐다.신무열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저 심기 불편한 표정을 지었다.그러더니 고개를 돌려 차가운 눈빛으로 김혜연을 보았다.김혜연은 바로 그의 팔에서 손을 뗐다.그녀는 고개를 푹 숙였다. 하지만 신무열은 환자였고 침대에서 일어난다면 상처를 자극하게 될 것이었고 휘청이며 길도 똑바로 걸을 수 없을 것이다.결국 일어난 그는 휘청거리더니 몸이 기울어졌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김혜연은 서둘러 그를 부축했다.“도련님, 그만 고집부리세요. 아가씨가 만나고 싶은 거라면 제가 가서 불러올게요. 네?”“그럴 필요 없어.”신무열은 담담하게 말했다.아이의 병이 낫지 않았는데 온지유를 불러온다면 아이의 곁을 지키고 있는 그녀를 방해하는 것이 아니겠는가?김혜연은 멍한 표정을 짓다가 빠르게
김혜연은 진지했다. 만약 신무열과 만날 수 없다면 그녀는 평생 혼자 살 것이다.침묵에 잠겼던 신무열이 무언가 말하려고 할 때, 김혜연이 먼저 입을 열었다.“도련님 곁에 이성이 나타난 걸 본 적 없는 것 같은데... 혹시 남자 좋아하세요?”말을 마친 김혜연은 신무열의 시선을 직시하지 못했다.신무열의 안색은 약간 어두워졌다. 그러나 그가 말하기도 전에 법로가 들어왔다.“일어났으면 됐다. 약 좀 먹으려무나.”법로는 가져온 약을 신무열에게 건넸다. 신무열은 말없이 꿀꺽 삼켰다.가만히 지켜보던 김혜연이 눈치껏 물을 건넸을 때 법로가 나가라는 눈치를 보냈다. 김혜연은 바로 몸을 일으켜서 자리를 피했다.“S국에서 사람이 왔어. 이제 몸 좀 괜찮으면 한 번 만나 봐.”신무열은 미간을 찌푸렸다.S국과 Y국 사이에는 별다른 교섭이 없었다. 이런 상황에 찾아온 것이면 여이현 때문일 수도 있었다.“알겠습니다.”신무열은 짧게 대답했다.그는 결국 다친 채로 S국에서 보낸 사람을 만나러 갔다. 상대는 아주 예쁘게 생긴 여자였다.그와 마주한 여자는 태연하게 말했다.“저는 Y국과 협력 건을 논의하기 위해 왔습니다. Y국에 저희가 대량으로 필요한 약재가 있거든요. 그리고... 여이현 씨를 소개해 줄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우리나라에 꼭 여이현 씨와 얘기해야 하는 중요한 일이 있습니다.”여자는 신무열을 바라보며 천천히 말했다. 신무열은 입꼬리를 씩 올렸다.“협력은 둘째 치고 여이현 씨를 찾으러 왔나 보네요. 찾을 사람이 있으면 알아서 찾으시면 됩니다.”여자는 안색 하나 변하지 않고 말을 이었다.“아무래도 Y국에서 찾아야 하니, 먼저 알리는 게 예의라고 생각했습니다.”단도직입적인 말이었다.Y국은 전쟁에 관심이 없었다. 하지만 이런 식으로 도발하는 사람이 있다면 가만히 참고 있을 이유도 없었다.“제 앞에서 도전장을 내민다면 참을 이유가 없겠네요. 우리 Y국은 완강하게 맞설 겁니다.”신무열의 태도도 분명했다. 기세는 다친 기색 하나 없이 강했다. 타고난 위엄
여자는 성큼성큼 여이현을 향해 걸어갔다.“이현 씨 애 있는 거 알아요. 근데 그 애는 대통령님이 직접 키우실 거예요. 그리고 아내라면... 온지유 씨랑 이혼하면 되는 일이잖아요?”“강서현!”여이현은 화난 표정으로 강서현과 거리를 벌렸다.여자의 이름은 강서현으로 브람이 그에게 배정한 약혼녀다. 하지만 여이현은 그녀와 만난 첫날 이미 그들은 불가능하고 밝혔다. 그의 마음에는 오직 온지유와 별이만 있었다.“억지 부리지 마요. 온지유 씨는 법로의 친딸이에요. S국에서 절대 허락할 리가 없는 혼사죠. S국을 제외하고 말한다고 해도 화국에서는 허락할 것 같아요?”“내 일에 네가 이래라저래라 할 건 없어.”여이현은 차갑게 말했다. 브람이 소개해 주기는 했지만 그들은 별로 친하지 않았다.“왜요? 저는 이현 씨 약혼녀예요. 이현 씨가 허락하지 않는다고 해도 부모님들끼리 한 약속은 어길 수 없어요. 그리고 이현 씨 대통령님이 구해주지 않았다면 진작 죽었을 몸이잖아요.”강서현은 이렇게 말하며 여이현의 앞으로 갔다. 그녀는 자꾸만 반항하려는 여이현이 답답하기도 하고 이해가 되지 않기도 했다. 여이현에게 첫눈에 반한 그녀는 잘살아 보고 싶었다.“당장 여기서 떠나. Y국도 전쟁을 원하지는 않아.”여이현은 그녀를 등졌다. 그러나 그녀는 포기하지 않고 다시 그의 앞으로 달려갔다.그녀는 여이현을 바라보며 또박또박 말했다.“별이를 데리고 있는 동안 호전을 보인 적은 있어요? 장담하건대, 별이 문제는 대통령님만 해결할 수 있어요.”여이현은 주먹을 꽉 쥐었다.만약 별이에게 법로와 인명진이 없었다면, 그는 이 말에 흔들렸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금은 힘써 주는 법로와 인명진이 있었다.게다가 온지유가 별이와 떨어지는 것을 원하지 않을 것이다. 전에는 말 한마디도 잘 안 하던 별이가 온지유와 만난 이후로 말이 많아지기도 했다.그는 별이와 온지유를 떼어낼 수 없었다. 그래서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당장 내 눈앞에서 꺼지지 않으면 사람을 부를 거야. 난 네 말을 따르지
같은 시각, 강서현과 만나고 난 여이현은 바로 온지유와 별이에게 갔다. 그러나 그는 도착하기도 전에 털썩 쓰러져 버리고 말았다.소리를 듣고 다가온 경비는 깜짝 놀랐다. 여이현은 Y국의 귀빈이었다. 그래서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그를 법로의 실험실로 데려갔다.정신을 잃은 여이현을 보고 온지유는 불안에 떨었다. 그녀는 경비 한 명을 잡고 물었다.“이게 무슨 상황이에요?”Y국 내부의 안전 시스템은 더할 나위 없이 훌륭했다. 그러니 여이현이 갑자기 쓰러지는 것은 말이 되지 않았다.‘혹시 전에 다쳤던 게 재발한 건가?’“저희도 갑자기 쓰러지신 것만 봐서 잘 모릅니다.”이때 법로가 나서서 말했다.“내가 확인해 보마.”확인을 끝낸 법로는 눈을 크게 뜨며 말했다.“중독 증상이야. S국에서 왔다는 여자 짓인 것 같군.”“네?”온지유는 안색이 확 변했다.‘S국... 그렇다면 브람의 사람이라는 말인데, 독을 써서라도 이현 씨를 되찾으려는 건가?’브람은 이런 식으로 여이현에게 굴복을 요구했다.온지유는 가슴이 아팠다. 역시 그녀의 인생은 순탄과 거리가 멀었다. 그녀는 잠긴 목소리로 물었다.“이현 씨 다시 깨어낼 수는 있어요?”“물론이지.”법로는 고개를 끄덕이고 인명진과 함께 여이현을 치료했다. 여이현은 장장 3시간이 지난 다음에야 가까스로 정신을 차렸다.그는 깨어난 다음에도 안색이 창백하니 아주 허약했다. 법로는 인명진에게 자리를 피하자는 눈치를 보냈다.온지유는 여이현의 손을 꼭 잡았다. 그러다가 결국 감정을 이기지 못하고 꽉 끌어안았다.“아버지 말로는 이현 씨 중독됐대. 내가 보기에는 S국 사람이 한 짓이 틀림없어. 아버지는 이현 씨가 돌아가는 게 낫다고 생각해. 이현 씨도 그렇다면... 돌아가도 괜찮아.”법로는 여이현의 반대 입장에 있었다. 그런데도 그를 도와주려고 했다. 돌아가라고 한 것도 그를 위해서 한 말이었다.여이현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는 온지유가 한 말을 생각하고 있었다.온지유의 말이 맞다. 그가 Y국에서 중독될 일은
“내가 전에도 말했지. 난 절대 널 포기하지 않아. 죽더라도 네가 있는 곳에서 죽을 거야.”여이현은 온지유의 손을 잡으며 다정하게 말했다. 붉어진 눈시울에는 여울이 생기기 시작했다.온지유는 가슴이 찢기는 것처럼 아팠다. 이토록 많은 일이 일어났는데도 신은 그들에게 해피 엔딩을 허락하지 않았다. 그들 사이에는 아직도 해결해야 하는 일이 너무 많았다.“알아. 하지만 난 이현 씨가 살아 있었으면 좋겠어. 살아 있어야 희망이 있는 거야. 죽은 정말 아무것도 남지 않아.”지난 5년 동안 그녀는 너무나도 많은 죽음을 봤다. 그런데도 전혀 무뎌지지 않았다.그녀는 여이현이 살아 있기를 바랐다. 물론 여이현도 온지유에게 똑같은 바람을 갖고 있었다.“지유야, 어떤 일이 일어나든 우리가 손을 잡으면 무조건 해결할 수 있을 거야. 난 쉽게 죽지 않아. 너와 별이 곁에 평생 같이 있을게.”이건 여이현의 선택이다. 온지유도 더 이상 할 수 있는 말이 없었다.브람은 여이현에게서 연락이 오지 않아 결국 먼저 전화를 걸었다. 여이현은 원래 받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할 말은 해야겠다는 생각으로 결국 전화를 받았다.브람은 나지막한 목소리로 비꼬았다.“넌 죽음도 두렵지 않나 봐? 언제까지 버틸 수 있을지 모르겠네.”여이현을 살려줬던 사람도, 지금 죽이려고 하는 사람도 전부 여이현이었다. 만약 여이현이 그의 명령을 따르지 않는다면 죽일 생각도 얼마든지 있었다.물론 여이현에게 그의 협박은 전혀 통하지 않았다. 여이현은 피식 웃으며 말했다.“어차피 그쪽이 살려준 목숨, 다시 가져가든 말든 알아서 해요.”그 말인즉슨 협박은 통하지 않는다는 뜻이었다.말문이 막힌 브람은 화가 치밀어 올랐다. 그는 더 할 말이 있었는데 여이현이 아예 전화를 끊어버렸다.여이현의 태도는 명확했다. 그는 절대 타협하지 않을 것이다.여이현은 약 때문에 생긴 고통을 항상 달고 살았다. 그저 온지유에게 숨기고 티를 내지 않았을 뿐이다. 하지만 치료를 도맡았던 법로는 모를 리가 없었다.여이현의 의지는
호텔 바닥은 아수라장이었다.잠에서 깬 지유는 온몸이 부서지는 것 같았다.지유는 미간을 주무르며 자리에서 일어나려는데 커다란 몸집을 가진 남자가 옆에 누워 있는 걸 발견했다.지나칠 정도로 잘생긴 얼굴은 조각과도 같았고 눈매도 깊고 진했다.아직 깊은 잠이 들어 깨어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지유가 몸을 일으키자 이불이 그녀의 몸에서 미끄러져 내렸고 뽀얗고 매혹적인 두 어깨에 어젯밤 남긴 흔적이 보였다.지유가 앉았던 자리에 선명한 핏자국이 보였다.시간을 보니 어느새 출근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지유는 바닥에 널브러진 출근룩을 다시 집어 들어 얼른 갈아입었다.스타킹은 이미 남자에 의해 찢겨 있었다.지유는 스타킹을 돌돌 말아 쓰레기통에 버리고는 하이힐을 신었다.그때 누군가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깔끔하게 차려입은 지유는 어느새 워커홀릭 비서로 완전히 돌아왔고 가방을 챙겨 밖으로 나갔다.들어온 사람은 청순한 미녀였다.지유가 부른 사람이었다.이현의 취향이 이런 여자였다.지유가 그 여자에게 이렇게 말했다.“침대에 누워서 대표님 깨나길 기다리면 돼요. 다른 건 한마디도 하지 마요.”지유는 고개를 돌려 아직 단잠에 빠진 남자를 힐끔 쳐다봤다. 억울한 마음에 코끝이 찡해졌지만 그래도 꿋꿋하게 방에서 나왔다.지유는 두 사람이 어젯밤 잠자리를 가졌다는 사실을 이현이 아는 게 싫었다.그들 사이에 계약에 의하면 아무도 모르게 3년간 결혼을 유지하면 바로 이혼할 수 있었다.이 기간에 선을 넘는 행동은 그 어떤 것도 용납되지 않았다.지유는 7년째 이현의 비서로, 3년째 이현의 와이프로 있었다.졸업한 그날부터 이현의 곁을 한시도 떠난 적이 없었다.같은 날, 이현은 지유에게 두 사람은 그저 상사와 부하의 관계일 뿐 이 관계를 뛰어넘어서는 안 된다고 했다.지유는 복도 창가에 서서 어제 일을 떠올렸다. 이현은 그녀를 안고 침대에 누워 ‘승아’라는 이름을 연신 불러댔다.지유는 가슴이 찢어지는 것 같았다.승아는 이현의 첫사랑이었다.이현은 지유를 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