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이는 고개를 저었다.다만 아이는 별이의 손을 꽉 잡았다.심지어 천천히 손을 들기도 했다.여이현은 바로 손을 내밀었다. 아이가 무엇을 원하는 지 바로 눈치챘기 때문이다.온지유는 감정이 북받쳐 올라와 갈라진 목소리로 말했다.“별아, 엄마는 별이가 원하는 걸 전부 들어줄 거야. 우리 별이가 튼튼해지면 아빠랑 함께 엄마랑 아빠가 자랐던 곳으로 갈 거야. 엄마는 매일 우리 별이를 학교에 데려다줄 거고 학교 끝나면 데리러도 갈 거야. 그리고 별이 외할아버지랑 외할머니도 뵈러 갈 거야. 그곳은 별이가 살았던 곳과 달라. 전쟁이 없는 평화로운 곳이거든. 별이는 매일 즐겁게 놀 수 있고 매일 맛있는 음식도 먹을 수 있어.”별이는 고개를 끄덕이며 힘겹게 말했다.“네.”그 말을 법로도 들었다.온지유가 신경 쓰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알았지만 온지유를 탓할 수 없었다.온지유는 어릴 때부터 Y 국에서 자라지 않아 받은 교육도 달랐다.“엄마가 가서 맛있는 거 만들어 올게.”그녀는 아이의 손을 토닥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여이현은 침묵했다. 다소 슬퍼진 법로의 눈빛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그는 법로에게 얼른 온지유를 따라가라는 눈빛을 보냈다.별이는 말을 하기 싫어하는 아이였지만 법로를 본 순간 아이는 미소를 지었다.실험실에 누워있는 동안 법로는 매일 아이를 위해 바삐 움직였다.주사를 맞을 때면 법로는 아이의 눈을 가려주기도 했다.그리고 아주 다정한 목소리로 무섭지 않게 달래주었다.아이는 눈앞에 있는 법로가 아주 다정하고 좋은 할아버지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법로는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아빠랑 엄마는 별이를 위해 맛있는 거 만들어 주러 갔어. 별이는 착한 아이니까 얌전히 기다릴 수 있지? 별아, 최근에는 어때? 전보다 몸이 덜 아픈 것 같아?”별이에게 칠엽초를 먹인 후 혈색이 아주 좋아졌다. 게다가 실험실로 들어온 뒤로 천식 증상도 보이지 않았다.골수는 아직도 찾는 중이었다. 아이와 맞는 골수를 찾으면 바로 골수 이식할 생각이다.아이는 앞으로 건
“이미 전부 지나간 일이야. 그러니까 자꾸 떠올리려고 하지 마. 지금은 우리 가족 모두 한곳에 있잖아. 별이도 치료를 받고 있으니 튼튼해질 거고 다른 아이들보다 더 씩씩하고 건강한 아이로 자랄 거야.”여이현은 울적해진 그녀의 기분을 눈치채고 위로했다.별이의 건강을 언급하니 온지유는 다소 기분이 나아졌다.‘그래, 고통은 전부 지나간 일이잖아. 우린 이제부터 현재에만 집중하면서 살면 돼.'어느새 돼지고기 죽은 완성되었다. 딴생각하고 있던 온지유는 뜨거운 냄비에 그대로 손을 가져다 댔다.“아!”뜨거운 것이 손에 닿자 온지유는 화들짝 놀라며 손을 떼곤 귓불을 만지며 식혔다.“괜찮아?”여이현은 다급하게 온지유의 손을 보았다.그가 가까이 다가가자 마침 온지유가 고개를 돌렸다. 두 사람의 입술이 맞물렸다.입술은 부드럽고 따듯했다.여이현은 그 순간 가슴이 간질거렸다. 시간을 멈추는 능력이 있다면 지금 당장 멈췄을 테지만 온지유의 손가락이 더 걱정되었다.“괜찮아. 그냥 조금 부은 것 같아.”온지유는 손을 내밀며 보여주었다. 손가락이 전부 빨갛게 되었고 손끝에는 물집도 생겨났다.여이현은 얼른 그녀의 손을 싱크대로 가져다 대며 물을 틀었다.“일단 물로 식혀. 남은 건 내가 할게.”그는 몸을 돌려 가스를 꺼버린 후 냄비를 들었다. 냄비 뚜껑을 연 순간 고소하고 향긋한 냄새가 주방에 퍼졌다.죽을 냄비에서 퍼낸 후 그릇에 담아 밖으로 가지고 나왔다.온지유도 수도꼭지를 닫은 후 따라갔다.별이에게로 가는 길에서 여이현은 먼저 법로에 대해 입을 열었다.“네가 아직 법로 님을 아버지로 받아들일 수 없다는 거 알아. 나도 네 선택을 존중해. 하지만 법로 님은 별이의 외할아버지잖아. 이건 바꿀 수 없는 현실이야. 별이도 알 권리가 있고...”온지유는 침묵했다.만약 법로가 아니라 다른 사람이 아버지였다면 그녀는 받아들였을 것이다.그러나 그녀의 친부는 하필이면 법로였고 수많은 악행을 저지르면서 손에 피를 묻혔다.그녀는 법로를 여전히 받아들일 수 없었다. 하
“얼른 데리고 와.”법로는 비록 S 국을 싫어했지만 온지유와 여이현은 서로 사랑하고 있을 뿐 아니라 아이까지 있었다.별이를 생각해서라도 그는 S 국의 체면을 지켜주며 잘 지내보려고 했다.물론 만약 브람이 그의 소중한 딸을 괴롭힌다면 당장이라고 뒤엎을 생각도 있었다....한편 온지유는 별이를 휠체어에 태우고 정원을 산책하고 있었다.꽃가루 날리는 철이 지났던 시기였던지라 정원의 꽃은 전부 고심히 골라서 심은 것이었기에 그녀는 안심하고 아이를 데리고 산책하러 나왔다.“엄마, 이 꽃이 너무 예뻐요. 처음 보는 꽃이에요!”오랜만에 바깥구경을 하게 된 아이는 바깥의 신선한 공기를 마시며 주위를 두리번댔다. 모든 것이 신기하고 궁금했다.만약 매일 이렇게 나올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아이는 정말로 매일 침대에 누워있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이 말을 입밖에 꺼내지는 않았다.여이현과 온지유가 걱정하는 것이 싫었기 때문이다. 말썽 피우고 싶지 않았다.여이현은 꽃을 딴 후 아이의 손에 쥐여주었다.“이 꽃이 좋으면 많이 따도 돼. 아니면 병실에도 꽂아둘까?”“네! 좋아요!”아이는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곧이어 아이는 많은 예쁜 곳을 구경하게 되었다. 꽃들은 하나같이 부드럽고 예뻤다.역시나 어머니는 아이의 마음을 잘 안다는 말은 틀리지 않은 것 같았다. 별이가 입을 열기도 전에 별이는 꽃을 따서 아이의 손에 쥐여주었다.“전부 우리 별이 꽃병에 꽂아 넣는 거야.”“네!”별이는 보물을 들고 있는 것처럼 소중하게 꼬옥 쥐었다.그 순간 새가 그들의 앞에 날아왔다. 새는 아주 늠름한 자태로 하늘을 날아다니고 있었다.별이는 부러운 눈길로 새를 보았다.“엄마, 저 새를 좀 보세요. 아주 빨리 날아요!”온지유의 눈시울이 붉어졌다.새는 빠르게 날 수 있었지만 그녀의 아이는 휠체어에 앉아 있었고 신나게 뛰어다닐 수도 없었다.여이현은 그녀의 눈가에 맺힌 눈물을 닦아준 뒤 허리를 굽혀 별이에게 말했다.“별이가 밥도 잘 먹고 치료 잘 받는다면 휠체어에 앉
온몸에서 전해지는 통증에 신무열은 너무도 괴로웠다.그는 작게 앓는 소리를 냈다.그 소리를 들은 김혜연은 깜짝 놀라 정신이 들었다. 눈을 뜬 신무열을 보았을 때 아주 기뻐했다.“도련님, 드디어 깨어나셨군요!”신무열은 김혜연을 본 순간 정신을 잃기 전 김혜연과 함께 적을 무찌르던 기억이 떠올랐다.그리고 자신이 정신을 잃던 순간 가슴 찢어지게 울어대던 그녀의 모습도 떠올랐다.그는 김혜연이 줄곧 자신의 곁을 지키고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신무열은 입술을 틀어 문 채 작게 말했다.“지유는 어떻게 됐어? 별이는 아버지가 치료하신 거야?”신무열은 몸이 부서질 듯한 고통을 참으며 침대에서 일어나 온지유에게 가려고 했다.김혜연은 신무열이 온지유을 엄청 신경 쓰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여하간에 온지유는 Y 국이 아닌 다른 곳에서 떨어져 자랐으니까 모든 사람들의 신경이 온통 온지유에게 가 있었다.하지만 아무리 여동생에게 신경이 쏠렸다고 해도 건강이 1순위가 아니겠는가.“도련님, 아직 일어나면 안 돼요. 그냥 다시 누우세요. 그쪽에서 좋은 소식이 들려오면 제가 바로 도련님께 전해드릴게요.”김혜연은 신무열을 부축하였다. 신무열이 몸 상태도 무시하고 멋대로 돌아다니지 않길 바랐다.신무열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저 심기 불편한 표정을 지었다.그러더니 고개를 돌려 차가운 눈빛으로 김혜연을 보았다.김혜연은 바로 그의 팔에서 손을 뗐다.그녀는 고개를 푹 숙였다. 하지만 신무열은 환자였고 침대에서 일어난다면 상처를 자극하게 될 것이었고 휘청이며 길도 똑바로 걸을 수 없을 것이다.결국 일어난 그는 휘청거리더니 몸이 기울어졌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김혜연은 서둘러 그를 부축했다.“도련님, 그만 고집부리세요. 아가씨가 만나고 싶은 거라면 제가 가서 불러올게요. 네?”“그럴 필요 없어.”신무열은 담담하게 말했다.아이의 병이 낫지 않았는데 온지유를 불러온다면 아이의 곁을 지키고 있는 그녀를 방해하는 것이 아니겠는가?김혜연은 멍한 표정을 짓다가 빠르게
김혜연은 진지했다. 만약 신무열과 만날 수 없다면 그녀는 평생 혼자 살 것이다.침묵에 잠겼던 신무열이 무언가 말하려고 할 때, 김혜연이 먼저 입을 열었다.“도련님 곁에 이성이 나타난 걸 본 적 없는 것 같은데... 혹시 남자 좋아하세요?”말을 마친 김혜연은 신무열의 시선을 직시하지 못했다.신무열의 안색은 약간 어두워졌다. 그러나 그가 말하기도 전에 법로가 들어왔다.“일어났으면 됐다. 약 좀 먹으려무나.”법로는 가져온 약을 신무열에게 건넸다. 신무열은 말없이 꿀꺽 삼켰다.가만히 지켜보던 김혜연이 눈치껏 물을 건넸을 때 법로가 나가라는 눈치를 보냈다. 김혜연은 바로 몸을 일으켜서 자리를 피했다.“S국에서 사람이 왔어. 이제 몸 좀 괜찮으면 한 번 만나 봐.”신무열은 미간을 찌푸렸다.S국과 Y국 사이에는 별다른 교섭이 없었다. 이런 상황에 찾아온 것이면 여이현 때문일 수도 있었다.“알겠습니다.”신무열은 짧게 대답했다.그는 결국 다친 채로 S국에서 보낸 사람을 만나러 갔다. 상대는 아주 예쁘게 생긴 여자였다.그와 마주한 여자는 태연하게 말했다.“저는 Y국과 협력 건을 논의하기 위해 왔습니다. Y국에 저희가 대량으로 필요한 약재가 있거든요. 그리고... 여이현 씨를 소개해 줄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우리나라에 꼭 여이현 씨와 얘기해야 하는 중요한 일이 있습니다.”여자는 신무열을 바라보며 천천히 말했다. 신무열은 입꼬리를 씩 올렸다.“협력은 둘째 치고 여이현 씨를 찾으러 왔나 보네요. 찾을 사람이 있으면 알아서 찾으시면 됩니다.”여자는 안색 하나 변하지 않고 말을 이었다.“아무래도 Y국에서 찾아야 하니, 먼저 알리는 게 예의라고 생각했습니다.”단도직입적인 말이었다.Y국은 전쟁에 관심이 없었다. 하지만 이런 식으로 도발하는 사람이 있다면 가만히 참고 있을 이유도 없었다.“제 앞에서 도전장을 내민다면 참을 이유가 없겠네요. 우리 Y국은 완강하게 맞설 겁니다.”신무열의 태도도 분명했다. 기세는 다친 기색 하나 없이 강했다. 타고난 위엄
여자는 성큼성큼 여이현을 향해 걸어갔다.“이현 씨 애 있는 거 알아요. 근데 그 애는 대통령님이 직접 키우실 거예요. 그리고 아내라면... 온지유 씨랑 이혼하면 되는 일이잖아요?”“강서현!”여이현은 화난 표정으로 강서현과 거리를 벌렸다.여자의 이름은 강서현으로 브람이 그에게 배정한 약혼녀다. 하지만 여이현은 그녀와 만난 첫날 이미 그들은 불가능하고 밝혔다. 그의 마음에는 오직 온지유와 별이만 있었다.“억지 부리지 마요. 온지유 씨는 법로의 친딸이에요. S국에서 절대 허락할 리가 없는 혼사죠. S국을 제외하고 말한다고 해도 화국에서는 허락할 것 같아요?”“내 일에 네가 이래라저래라 할 건 없어.”여이현은 차갑게 말했다. 브람이 소개해 주기는 했지만 그들은 별로 친하지 않았다.“왜요? 저는 이현 씨 약혼녀예요. 이현 씨가 허락하지 않는다고 해도 부모님들끼리 한 약속은 어길 수 없어요. 그리고 이현 씨 대통령님이 구해주지 않았다면 진작 죽었을 몸이잖아요.”강서현은 이렇게 말하며 여이현의 앞으로 갔다. 그녀는 자꾸만 반항하려는 여이현이 답답하기도 하고 이해가 되지 않기도 했다. 여이현에게 첫눈에 반한 그녀는 잘살아 보고 싶었다.“당장 여기서 떠나. Y국도 전쟁을 원하지는 않아.”여이현은 그녀를 등졌다. 그러나 그녀는 포기하지 않고 다시 그의 앞으로 달려갔다.그녀는 여이현을 바라보며 또박또박 말했다.“별이를 데리고 있는 동안 호전을 보인 적은 있어요? 장담하건대, 별이 문제는 대통령님만 해결할 수 있어요.”여이현은 주먹을 꽉 쥐었다.만약 별이에게 법로와 인명진이 없었다면, 그는 이 말에 흔들렸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금은 힘써 주는 법로와 인명진이 있었다.게다가 온지유가 별이와 떨어지는 것을 원하지 않을 것이다. 전에는 말 한마디도 잘 안 하던 별이가 온지유와 만난 이후로 말이 많아지기도 했다.그는 별이와 온지유를 떼어낼 수 없었다. 그래서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당장 내 눈앞에서 꺼지지 않으면 사람을 부를 거야. 난 네 말을 따르지
같은 시각, 강서현과 만나고 난 여이현은 바로 온지유와 별이에게 갔다. 그러나 그는 도착하기도 전에 털썩 쓰러져 버리고 말았다.소리를 듣고 다가온 경비는 깜짝 놀랐다. 여이현은 Y국의 귀빈이었다. 그래서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그를 법로의 실험실로 데려갔다.정신을 잃은 여이현을 보고 온지유는 불안에 떨었다. 그녀는 경비 한 명을 잡고 물었다.“이게 무슨 상황이에요?”Y국 내부의 안전 시스템은 더할 나위 없이 훌륭했다. 그러니 여이현이 갑자기 쓰러지는 것은 말이 되지 않았다.‘혹시 전에 다쳤던 게 재발한 건가?’“저희도 갑자기 쓰러지신 것만 봐서 잘 모릅니다.”이때 법로가 나서서 말했다.“내가 확인해 보마.”확인을 끝낸 법로는 눈을 크게 뜨며 말했다.“중독 증상이야. S국에서 왔다는 여자 짓인 것 같군.”“네?”온지유는 안색이 확 변했다.‘S국... 그렇다면 브람의 사람이라는 말인데, 독을 써서라도 이현 씨를 되찾으려는 건가?’브람은 이런 식으로 여이현에게 굴복을 요구했다.온지유는 가슴이 아팠다. 역시 그녀의 인생은 순탄과 거리가 멀었다. 그녀는 잠긴 목소리로 물었다.“이현 씨 다시 깨어낼 수는 있어요?”“물론이지.”법로는 고개를 끄덕이고 인명진과 함께 여이현을 치료했다. 여이현은 장장 3시간이 지난 다음에야 가까스로 정신을 차렸다.그는 깨어난 다음에도 안색이 창백하니 아주 허약했다. 법로는 인명진에게 자리를 피하자는 눈치를 보냈다.온지유는 여이현의 손을 꼭 잡았다. 그러다가 결국 감정을 이기지 못하고 꽉 끌어안았다.“아버지 말로는 이현 씨 중독됐대. 내가 보기에는 S국 사람이 한 짓이 틀림없어. 아버지는 이현 씨가 돌아가는 게 낫다고 생각해. 이현 씨도 그렇다면... 돌아가도 괜찮아.”법로는 여이현의 반대 입장에 있었다. 그런데도 그를 도와주려고 했다. 돌아가라고 한 것도 그를 위해서 한 말이었다.여이현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는 온지유가 한 말을 생각하고 있었다.온지유의 말이 맞다. 그가 Y국에서 중독될 일은
“내가 전에도 말했지. 난 절대 널 포기하지 않아. 죽더라도 네가 있는 곳에서 죽을 거야.”여이현은 온지유의 손을 잡으며 다정하게 말했다. 붉어진 눈시울에는 여울이 생기기 시작했다.온지유는 가슴이 찢기는 것처럼 아팠다. 이토록 많은 일이 일어났는데도 신은 그들에게 해피 엔딩을 허락하지 않았다. 그들 사이에는 아직도 해결해야 하는 일이 너무 많았다.“알아. 하지만 난 이현 씨가 살아 있었으면 좋겠어. 살아 있어야 희망이 있는 거야. 죽은 정말 아무것도 남지 않아.”지난 5년 동안 그녀는 너무나도 많은 죽음을 봤다. 그런데도 전혀 무뎌지지 않았다.그녀는 여이현이 살아 있기를 바랐다. 물론 여이현도 온지유에게 똑같은 바람을 갖고 있었다.“지유야, 어떤 일이 일어나든 우리가 손을 잡으면 무조건 해결할 수 있을 거야. 난 쉽게 죽지 않아. 너와 별이 곁에 평생 같이 있을게.”이건 여이현의 선택이다. 온지유도 더 이상 할 수 있는 말이 없었다.브람은 여이현에게서 연락이 오지 않아 결국 먼저 전화를 걸었다. 여이현은 원래 받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할 말은 해야겠다는 생각으로 결국 전화를 받았다.브람은 나지막한 목소리로 비꼬았다.“넌 죽음도 두렵지 않나 봐? 언제까지 버틸 수 있을지 모르겠네.”여이현을 살려줬던 사람도, 지금 죽이려고 하는 사람도 전부 여이현이었다. 만약 여이현이 그의 명령을 따르지 않는다면 죽일 생각도 얼마든지 있었다.물론 여이현에게 그의 협박은 전혀 통하지 않았다. 여이현은 피식 웃으며 말했다.“어차피 그쪽이 살려준 목숨, 다시 가져가든 말든 알아서 해요.”그 말인즉슨 협박은 통하지 않는다는 뜻이었다.말문이 막힌 브람은 화가 치밀어 올랐다. 그는 더 할 말이 있었는데 여이현이 아예 전화를 끊어버렸다.여이현의 태도는 명확했다. 그는 절대 타협하지 않을 것이다.여이현은 약 때문에 생긴 고통을 항상 달고 살았다. 그저 온지유에게 숨기고 티를 내지 않았을 뿐이다. 하지만 치료를 도맡았던 법로는 모를 리가 없었다.여이현의 의지는
온지유는 소미가 어느 나라에서 왔는지 몰랐다. 그랬기에 종류별로 접시에 담아주었다.“먹어 봐, 입에 맞는 거 있으면 더 가지러 오면 되니까. 하지만 낭비하면 안 돼. 먹을 만큼 가져가야 해. 알았지?”“아주머니가 골라준 거라면 소미는 전부 좋아요.”소미는 정말로 음식을 낭비하지 않았다.온지유가 담아준 음식은 전부 먹어치웠고 수프도 한 방울도 남기지 않고 전부 마셨다.배를 채운 후 여이현은 그들을 데리고 놀이공원으로 향했다. 소미는 처음에 어색해하면서 편히 놀지 못하는 모습을 보였지만 몇 개의 놀이기구를 타고 난 뒤 신나게 놀았다.“오빠, 난 회전목마가 좋아. 우리 한 번 더 타면 안 돼?”“아까 내가 큰 말에 탔으니까 이번엔 네가 큰 말에 타. 내가 작은 말에 탈게.”별이는 소미의 손을 잡았다.두 아이는 아직 어렸기에 위험한 놀이기구는 탈 수 없었다. 어린아이들이 타도 위험하지 않은 놀이기구를 전부 타본 뒤 마지막엔 온지유와 여이현과 함께 관람차를 탔다.관람차가 제일 높은 곳까지 올라갔을 때 소미는 두 손을 꼭 모아 말았다.“관람차가 제일 높은 곳에 올라갔을 때 소원을 빌면 이루어진다고 들었어요. 전 오빠랑 오빠 가족이랑 평생 같이 살고 싶어요.”“그럴 거야.”온지유는 아이를 보며 온화한 표정을 지었다.가족 구성원이 넷이면 아주 좋았다. 다섯이면 더 말할 나위 없이 좋을 것이다.놀이공원에서 나온 뒤 여이현은 호텔로 운전했다. 돌아가는 길에 고속도로를 지나서 온하윤을 태우려고 했다.온하윤은 이틀 동안 아빠와 엄마, 오빠를 보지 못해 반가웠는지 작은 손을 접었다 폈다 하면서 아주 좋아했다.“소미야, 봐봐. 하윤이는 내 여동생이야. 귀엽지?”별이는 소미를 데리고 온지유 옆에 서 있었다. 두 아이는 온지유가 안고 있는 온하윤을 보았다.소미는 조심스럽게 손가락을 온하윤의 입가로 가져다 댔다. 온하윤은 먹을 것인 줄 알고 혀를 내밀며 소미의 손을 깨물려고 했다.여이현은 얼른 소미를 안아 올렸다.“안 돼. 하윤이한테 손가락 물리면 안
“그래, 별이한테도 친구가 생겼으니 우리도 둘만 있을 시간이 더 많아지겠지.”여이현은 손가락으로 온지유의 손등을 천천히 쓸어내렸다.따듯하면서도 간지러웠다.온지유는 붉어진 얼굴로 그를 밀어냈다.“그러지 마. 아이들이 밖에 있다고. 만약 소리를 듣기라도 한다면 안 좋아.”별이는 아주 똑똑한 아이였다. 만약 별이가 그것이 무슨 소리냐고 묻는다면 온지유는 정말로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몰랐다.그녀는 정말이지 너무도 민망했다.“이 호텔은 방음이 아주 잘 되어 있어. 더구나 꼬맹이들은 지금 티브이에 정신이 팔렸잖아. 그래도 걱정된다면 티브이 음량을 더 높이면 되지.”온지유가 반박의 말을 하기도 전에 여이현은 이미 손을 뻗어 리모컨을 들고 오더니 음량을 두 개 정도 높였다.그리고 몸을 돌려 그녀에게 키스했다.그의 리드에 온지유는 몸이 녹아내릴 것 같았다.하늘에 어둠이 깔리고 나서야 두 사람의 몸은 떨어지게 되었다. 온지유는 티브이를 끈 뒤 녹초처럼 침대에 흐느적 누웠다.땀에 몸은 끈적거렸기에 너무도 샤워하러 욕실로 들어가고 싶었으나 움직이는 것이 귀찮았다.여이현은 욕실로 들어가 욕조에 따듯한 물 받아놓았다. 그리고 다시 나와 온지유를 안은 후 천천히 그 욕조 안으로 내려놓았다.온지유는 몸을 감싸는 따듯한 온기에 온몸이 나른해졌다.“지유야.”여이현이 나직하게 그녀를 불렀다. 그의 목소리는 너무도 매혹적이었다.“나 오늘 너랑 같이 자면 안 될까?'온지유는 하마터면 그의 목소리에 홀려 고개를 끄덕일 뻔했다.다행히도 정신이 번쩍 들어 그의 요구를 거부했다.“안 돼. 꿈도 꾸지 마. 내일 아이들이랑 놀이공원도 가기로 했단 말이야.”이미 조금 전의 일로 힘이 전부 빠진 그녀였다. 만약 또 반복하게 된다면 내일은 아마 눈을 뜰 수 없을지도 모른다.여이현은 점점 더 짙은 미소를 지었다.“얼른 씻어. 밖에서 기다릴게.”그도 온지유를 피곤하게 만들고 싶지 않았다.목욕을 마친 온지유는 샤워 가운을 입고 나와 의자에 앉았다. 그러자 여이현은 자연스럽게
소미는 줄곧 여이현과 온지유 앞에서 좋은 모습을 보이려 애썼다.별이는 그녀를 무척 좋아했다. 온지유가 그녀를 보육원에 맡기려 했으나 소미는 온지유의 팔을 꼭 끌어안고 놓지 않았다.“이모, 지금 바로 이모네 집에 가면 안 돼요?”“이젠 우리 집이야.”옆에 있던 별이가 말했다.“네가 원하기만 하면 언제까지나 머물 수 있어. 우리 아빠, 엄마 모두 정말 좋은 분들이고 여동생도 아주 귀여워.”어떤 아이들은 낯을 가리지만, 온하윤은 절대 그러지 않았다. 낯선 사람을 보아도 웃으며 울거나 떼쓰지 않는 아이였다.“응, 응.”소미는 힘차게 고개를 끄덕이고 다른 한 손으로 별이의 손을 잡았다.“다 같이 있으니 정말 좋아.”원래 여이현과 온지유는 이 도시에 사흘쯤 머무르며 놀 예정이었지만, 지금은 소미가 있으니 집으로 빨리 돌아가고 싶어졌다.떠나기 전, 그들은 아이들에게 물었다.“별아, 소미야, 놀이공원에 가보고 싶어?” “가고 싶어요!”별이는 힘껏 고개를 끄덕였다. 예전에도 놀이공원에 가본 적은 있지만 늘 혼자서만 놀았다. 이번엔 엄마 아빠도 곁에 있고 방금 사귄 새 친구 소미도 있다. 그와 달리 소미는 좀 더 주저하는 듯했다.“그... 그런데 놀이공원이 뭐예요?” “엄청 재밌는 곳이야. 거기엔 놀이기구가 잔뜩 있고, 큰 목마를 탈 수도 있고, 공중에서 빙글빙글 돌 수도 있어. 사람보다 더 큰 인형들이 있고 맛있는 음식도 많아.”별이가 간단히 설명했다. 소미의 눈이 점점 반짝였다.“세상에 그런 곳도 있구나!” “당연하지, 혹시 지금까지 한 번도 못 가봤어?”이번엔 별이가 놀랐다. 해외에도 놀이공원은 있을 것이니 말이다.소미는 고개를 끄덕이며 점점 목소리를 낮췄다.“엄마 아빠는 나를 한 번도 데려가지 않았어. 갈 때마다 동생들만 데리고 갔거든.” 주변 사람들이 모두 얼어붙은 듯 잠시 말이 없었다. 한참 뒤, 별이가 먼저 사과했다.“미안해, 내가 그런 말을 하지 말아야 했는데...” 그는 생각할수록 자신이 너무
권다솔은 고개를 숙여 문손잡이를 보고는 찰칵 소리를 내며 문을 열었다.마침 석규리가 약기운을 이기지 못하고 배진호에게 달려들던 순간이었다.배진호는 잠시 방심한 채 도와주려고 했던 상대가 되레 등 뒤에서 들이받을 줄 몰라 예기치 않게 큰 침대 위로 쓰러지고 말았다.석규리는 손을 더듬어 그의 입술로 키스하려고 했다.배진호의 눈동자는 순식간에 어두운 그림자로 뒤덮이며 고개를 젖혀 피했고 그녀의 입술은 그의 턱 끝에 스칠 뿐이었다.그는 찌푸린 얼굴로 그녀를 피한 바로 그때 문이 열렸다.배진호는 깜짝 놀라 문가를 바라봤고, 거기에 서 있는 사람은... 권다솔이었다.권다솔은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다솔 씨, 잠깐만. 오해했어요!”항상 침착하고 무너지지 않던 그의 태도에 균열이 가고 허둥대며 일어서려 했다.하지만 권다솔은 그의 움직임에 겁이라도 난 듯 더 빨리 뒤로 물러났다. 그녀의 얼굴에는 슬픔이 가득했으며 몸을 돌려 곧장 밖으로 나갔다.배진호는 뒤쫓으려 했으나, 석규리가 그를 끌어안으며 막았다.그는 멀어지는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두 눈을 부릅떴다.얼마나 익숙한 장면인가.지난번 권다솔이 떠났을 때, 그는 하루 밤낮을 그녀를 찾아다니고 또 이삼일을 애타게 기다려서야 겨우 그녀를 곁에 둘 수 있었다.이번에는 얼마를 기다려야 할까?이번에도 돌아와 주기는 할까?...권다솔은 정신이 반쯤 나간 상태로 집에 돌아왔다. 마침 봄 휴가를 마치고 돌아온 도우미가 그녀를 보고 감추지 못할 놀라움을 드러냈다.“웬일이세요? 아직 병원에 계실 때 아닌가요?” 권다솔은 대답하지 않았다. 지금 이 순간 그녀는 누구와도 대화할 마음이 없었다.그녀는 자기 방 안에 스스로를 가둔 뒤, 배진호의 흔적으로 가득한 공간을 바라보았다. 칫솔은 그의 것이고, 컵도 그렇고, 수건마저 그에게 속한 것이며, 침대 위 이불조차도 반은 그의 몫이었다.그는 언젠가 말했었다. 그녀 외에는 그 누구도 원하지 않는다고. 하지만 그는 그 말을 지키지 못했다. 사람들은 모두
배진호는 냉담하게 그녀를 밀어냈고, 석규리는 침대에 쓰러지며 답답한 신음을 토해냈다.그가 약간 힘을 뺀 게 다행이었다. 그렇지 않았으면 아마 그녀는 바닥에 나뒹굴었을 터이다.“이미 말했잖아요. 다른 여자한테는 관심 없다고요.”배진호는 차가운 어조로 마지막 말을 던졌다.그는 곧장 문으로 가서 손잡이를 잡았다. 그러나 아무리 돌려도 문이 열리지 않았다.바깥에서 문을 잠근 것 같았다.뒤에서 훌쩍이는 소리가 작게 들려오자, 그는 뒤를 돌아보았다. 그녀도 피해자일 수 있다는 생각에 얇게 다문 입술을 살짝 움직였다.“차가운 물로 샤워라도 하는 게 어때요?”석규리는 붉어진 눈으로 그를 보며 중얼거렸다.“옷이 없어요.” 배진호는 잠시 침묵하더니 말했다.“...그럼 관두죠.”그에게 그녀가 입을 만한 옷은 전혀 없었다. 자기 옷을 빌려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한편, 권다솔은 몇 번이나 고민하다가 마침내 배진호의 집 초인종을 눌렀다.잠시 뒤, 정미진이 문을 열었다.결국 지난번과 같은 상황이 벌어지고 말았다. 그녀는 권다솔을 보자마자 반사적으로 문을 닫으려 했다.그런데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이상한 웃음을 흘리며 다시 문을 열고 말했다.“다솔 씨, 잘 왔어요. 들어와요.”권다솔은 정미진의 태도가 이상하다고 느꼈다.조금 전까지만 해도 그녀를 들여보내기 싫어하던 정미진이었다.그런데 왜 갑자기 마음을 바꿨을까? 혹시 동네 어르신들이 말했던 것처럼, 이 안에 배진호가 다른 여자와 있는 게 맞는 걸까?문턱을 넘어서면 두 사람이 정답게 대화를 나누거나 애정에 빠져 있는 장면을 마주하게 될지도 몰랐다. 그런 상상만으로도 가슴이 예리하게 찔렸다.권다솔은 심호흡을 하고 들어가기로 결심했다. 남은 미련이 있으니 직접 확인해야 했다.하지만 문턱을 넘어섰을 때, 그녀가 기대했던 충격적인 장면은 전혀 없었다. 배진호의 모습조차 보이지 않았다.거실에는 배상준만 덩그러니 앉아 있을 뿐이었다.‘내가 착각했나?’권다솔은 문득 스스로를 의심했다. 어쩌면 배진호는 정
배진호는 마시고 싶지 않았다.그는 물건만 챙겨 가고 싶었지만, 정미진의 말투에는 미묘한 강압과 간청이 뒤섞여 있어 냉정하게 등을 돌리고 떠나기가 쉽지 않았다.게다가 그는 그 물건들을 권다솔에게 돌려주어야 했다. 아이를 잃은 경위를 그녀가 알 필요가 있었다. 또 다른 이유는 아무리 그래도 상대는 그의 어머니였다. 20여 년을 길러준 어머니 아니던가.배진호는 목울대를 조금 움직이며 잔을 들어 단숨에 들이켰다. 이 한 잔으로 인연을 칼로 베듯 끊어버리려는 듯이 말이다.다 마신 뒤, 그는 홍경천 통을 들고 문밖으로 향했다.“진호 씨, 왜 가는 거예요?”석규리는 깜짝 놀라 일어섰다. 그러나 말을 마치자마자 몸이 격하게 흔들렸고 양 뺨은 유달리 붉게 달아올랐다.이미 현관까지 다다른 배진호는 머리를 움켜쥐고 뒤로 비틀거리다 소파에 털썩 주저앉았다. 긴 다리가 탁자에 걸려 날카로운 마찰음을 냈다.아랫배 깊은 곳에서 불덩이 같은 열기가 타오르는 듯 격렬했고 땀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목젖이 오르내리며 형언하기 어려운 갈망이 몸속 어딘가에서 피어났다.곁에 있는 석규리는 훨씬 더 상태가 심각했다. 그래도 배진호는 자제력이 좋아 약간의 의식이라도 남아 있었지만, 그녀는 이미 더위를 참지 못해 스스로 옷을 벗으려 하고 있었다.배진호는 그쪽을 쳐다볼 엄두도 내지 못하고 최대한 떨어져 앉았다. 이 상황에서 그는 단번에 한 가지 가설이 떠올랐다.“어머니, 그 물에 약을 탄 거예요?”그는 믿을 수 없다는 듯 흔들리는 눈빛으로 정미진을 바라봤다. 설마 친모가 이런 짓을 할 줄은 누가 알았겠는가.하지만 지금 정미진은 대답할 여유조차 없었다.배진호의 상태를 보고 약이 듣는 것을 확인한 그녀는 방 안에 숨은 배상준에게 신호를 보냈다. 이 집의 방음이 꽤 좋은 탓에 배상준은 한참 뒤에야 밖으로 나왔다. “얼른 진호랑 규리 씨를 2층 침실로 옮겨.”정미진이 지시했다.2층에는 빈 침실이 세 개 있었고, 그중 두 개는 복도의 맨 왼쪽 끝과 맨 오른쪽 끝에 있어 거리가 멀었다
권다솔은 순간적으로 몸이 굳어버렸다. 주변에서 밀려오는 말들은 차디차고 날 선 바람결 같았다. 손가락은 경직되고, 팔다리는 감각을 잃은 듯했다. 이곳에 남은 것은 껍데기뿐인 육신밖에 없었다.‘진호 씨가 나한테 숨겼던 일이 이거였어?’한참이 지나서야 권다솔은 그 상태에서 벗어나 위층으로 올라갔다.그녀가 위로 향하는 동안, 배진호는 이미 거실에 앉아 있었다. 단지 그의 얼굴빛은 들어올 때보다 한층 더 싸늘했고, 눈동자 깊숙한 곳에는 얼음꽃이 맺힌 듯 미세한 온기조차 엿볼 수 없었다. 곁에 있던 석규리는 억울함이 거의 실체를 띨 듯했다. 그녀는 정미진을 바라보며 말을 건넸다.“아주머니...” 석규리는는 이해할 수 없었다. 자신의 조건은 분명히 뛰어난데 배진호가 왜 이러는 걸까. 게다가 그녀는 어머니의 명을 어기고 몰래 이곳까지 찾아온 상황이었다. 조연숙은 배진호가 결혼한 적 있다는 걸 알게 된 후부터 그를 원치 않았지만, 석규리는 쉽게 포기할 수 없었다. 그날 밤 처음 배진호를 만났던 순간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녀는 조연숙이 집을 비운 틈을 타 슬쩍 이곳으로 들어왔는데, 어째서 배진호는 여전히 차가운 태도로 일관하는 걸까? 전 아내와 비교해 그녀가 어떤 점에서 모자란다는 건가?“진호야, 규리가 틈내서 이렇게 어렵게 온 건데 얼굴 좀 피워봐.”정미진이 그를 나무랐다. 하지만 배진호가 이곳에 온 목적은 맞선이 아니었다. 그는 단지 정미진이 주겠다고 한 물건을 받기 위해 방문했을 뿐인데 도리어 속은 셈이다. 그런데 어찌 좋은 표정이 나올 리 있겠는가?그는 더 이상 인내심이 남아있지 않은 듯, 벌떡 일어나 한겨울 칼바람 같은 표정으로 말을 뱉었다.“물건을 줄 마음이 없으시다면 제가 괜히 헛걸음친 거네요.” 그는 정말 이대로 나가버릴 기세였다. 정미진은 가까스로 그를 속여 불러놓고 이렇게 그냥 보낼 수는 없었다. 그녀는 다급히 문 앞으로 달려가 가로막았고, 석규리 또한 긴장한 얼굴로 일어났다. “알았어, 알
하지만 지금 권다솔이 과연 좋은 삶을 누리고 있는가?배진호의 눈동자에 흐릿한 망설임이 스쳤다. 그는 문득 자신이 고집해 온 길이 옳았는지 확신이 서지 않았다.아마 회사를 차리지 않아도 다른 방법으로 권다솔의 부모를 설득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랬다면 이런 사태까진 오지 않았을 수도 있지 않을까?“집으로 돌아가세요. 그리고 저는 앞으로 나오지 않을 겁니다.”배진호는 한 템포 쉬고 나서 등 뒤의 정미진에게 차분히 말했다.“남은 장홍화는 저한테 주세요.”그 말을 남긴 뒤 그는 곧장 자리를 떴다.이번에도 정미진과 배진호 사이에는 불협화음만 남았다.그 후로 배진호는 쭉 권다솔 곁에 머물며 회사 일조차 손을 놓고 남에게 맡겼다. 여이현이 선뜻 도와줘서 참 다행인 부분이었다.밤낮으로 곁을 지킨 덕분에, 권다솔의 상태는 한결 나아졌다. 아이를 잃은 상실감의 그림자에서 서서히 벗어나고 있었다. 드물게 어린아이 용품이나 작은 장난감을 멍하니 응시하기는 했지만 전반적으로 회복세를 보였다.그녀의 상태가 좋아지는 걸 보자, 늘 긴장하던 배진호도 마음을 조금 놓을 수 있었다.그러던 어느 날, 며칠간 잠잠하던 정미진이 마침내 전화를 걸어서 장홍화를 넘기겠다고 했다. 배진호는 바로 비서에게 심부름을 시키려고 했다. 하지만 정미진이 그 의도를 못 알아챌 리 없었다. “물건을 가져가려면 네가 직접 와.”배진호는 잠시 생각한 뒤, 권다솔에게 한마디 알리고 집으로 향했다.그는 짐작도 못 했다. 자신이 막 출발한 직후, 권다솔이 병원에서 빠져나와 뒤를 밟을 줄은 말이다.“기사님, 앞에 가는 저 차 따라가 주세요.”권다솔은 택시 기사에게 부탁했다. 기사는 자신과 두 대 앞서 달리는 검은색 차를 힐끗 보고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아가씨, 대낮에 이런 건 좀 그렇지 않나요.”그러고는 무언가 충고라도 하려는 듯 입을 열었다. “제 남편이 바람피우고 있어요. 증거 잡으러 가는 길입니다.” 권다솔의 짧은 한마디에 기사는 할 말을 잃었다. 뭔가 목이 막힌 듯
조연숙이 말을 꺼내자 순간 방 안은 조용해졌다.정미진의 표정이 순식간에 굳었다. 그녀는 조연숙 모녀의 달라진 기색을 인지하곤 허둥지둥 수습하려고 했다. 그러나 바로 그때 배진호가 입을 열었다. “저는 결혼했습니다.”석규리의 젓가락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그녀는 잠시 멍하니 있다가 눈시울이 붉어졌다. 조연숙은 분노에 들끓은 채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며 쏘아붙였다. “네 아들이 결혼했다는 걸 왜 이제 와서 말해?”“아니, 그게 아니고, 얘가 헛소리를...” 정미진은 황급히 배진호를 노려보곤 변명에 나섰다. “우리 집안에 얽혔던 여자가 있었던 건 맞지만, 두 사람은 이미 오래전에 헤어졌어.”하지만 조연숙은 냉소를 지었다. 이런 변명 따윈 세상 물정 다 겪은 사람들 눈에는 뻔히 보이는 허점 덩어리에 불과했다. 설령 정미진의 말대로라고 해도, 결국 배진호는 한번 결혼한 경력이 있는 남자라는 이야기다. 조건이 아무리 좋아도 무엇하랴? 잘 키운 딸을 돌싱에게 시집보낼 순 없었다.조연숙은 바로 석규리의 손을 잡아채며 노려봤다. “우리 딸은 그런 사람한테 시집갈 수 없어. 나가자.” 석규리는 아직 멍한 상태였으나 조연숙에게 이끌려 나가면서 미련 어린 시선으로 뒤를 돌아보았다.이렇게 상대를 떠나보내고 나서야 정미진은 속이 부글부글 끓어올랐다. 그녀는 답답한 듯 한심하다는 눈빛으로 배진호에게 소리쳤다. “왜 그런 말을 했어? 규리가 널 얼마나 마음에 들어 했는지 몰라? 네가 입 다물고만 있었으면 일이 순조롭게 진행됐을 텐데!”“어머니, 저는 오늘 물을 게 있어서 온 거예요.” 배진호는 느닷없이 정미진의 말을 끊어버렸다. 그의 눈동자는 한기 서린 빛을 품고 있었고, 그런 기세에 정미진은 본능적으로 한 걸음 물러났다. “뭔데?”“다솔 씨 일 어머니한테 책임이 있죠?”배진호는 또박또박 말했다. 기세도 점점 살벌해졌다.자신이 뒷걸음질 친 사실을 깨달은 뒤, 정미진은 고개를 떨구며 고약한 얼굴빛을 띠었다. “내가 네 엄마인 거 모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