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네가 지유랑 만나는 걸 반대하는 게 아니야. 다만 걱정이 돼서...”“걱정할 필요 없어요. 앞으로 무슨 일이 있더라도 저희는 함께 버틸 거예요.”온지유는 법로의 말을 끊으며 그들의 앞으로 걸어갔다. 여이현이 지금까지도 의지를 굽히지 않는 것을 보고 속상했던 것이다.그녀는 갑자기 가슴이 아팠다. 여이현은 그녀가 그를 걱정하는 것보다 훨씬 더 크고 진솔한 마음으로 그녀를 대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한마음으로 미래를 계획하지 않을 이유도 없었다.온지유는 여이현을 향해 미소 지으며 손을 꼭 잡았다. 법로는 당연히 온지유의 편에 서 있었다.“네가 결심했다면 난 전력을 다해 도울게. 앞으로는 둘 중 누구한테도 이런 얘기를 하지 않아. 브람의 독을 풀 수 없는 건 여전하지만, 여이현 네가 직접 나서서 해결해 봐.”법로는 아버지의 입장에서 브람의 행동을 이해할 수 있었다. 여이현이 그의 지시를 따르지 않는다면, 아무리 친자식이라고 해도 애초에 구하지 않는 것이 낫다고 생각할 만했다.말을 마친 법로는 뒤돌아서 떠났다. 그는 여이현이 온지유에게 할 이야기가 많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그의 예감은 틀리지 않았다.그가 떠난 후, 온지유는 여이현을 꼭 안으며 말했다.“이현 씨, 앞으로 무슨 일이 일어나도 우리 같이 맞서자. 우리 세 식구, 행복하게 같이 있어야 해!”“내가 너랑 별이를 지킬게. 아버지 쪽 문제는 법로의 제안대로 할 거야.”여이현은 자신의 생각을 온지유에게 말할 계획이었다. 하지만 미처 말하기도 전에 온지유가 입을 열었다.“알고 있어. 하지만 난 이현 씨가 너무 걱정돼. 무슨 일을 할 때는 나랑 별이를 생각하면서 항상 안전에 주의해 줘.”온지유는 여이현의 얼굴을 다정하게 쓰다듬었다. 여이현은 그녀의 손을 꼭 잡으며 말했다.“물론이지.”법로는 여이현이 움직이기 전에 먼저 행동에 나섰다. 그는 먼저 브람에게 연락했다.“당신이 보낸 사람들 내가 확인했어요. 요즘 S국 상황이 많이 어려운 것 같던데, 우리 쪽에서 약재와 군수품을 무상으로 지원할
여이현은 브람을 죽이지 않을 것이다. S국이 멸망하는 걸 눈 뜨고 보고 있을 수도 없었다. 결국 둘은 이렇게 대치하며 버틸 수 있는 한끝까지 버티기로 했다.여이현이 그렇게 하기로 결심했다.온지유는 매일 브람에게 삼시 세끼를 갖다주었다. 브람은 음식을 먹지 않고 온지유에게 차가운 태도로 빈정댔다.“네가 밥을 가져온다고 해서 내가 널 다르게 볼 것 같아?”온지유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당신은 이현 씨의 친아버지잖아요. 저는 두 사람이 계속 이렇게 대립하는 모습을 보고 싶지 않아요. 최대한 대화로 해결하고 싶어요. 그게 안 되겠으면 식사나 하세요.”온지유는 죄를 지은 적도 없는 자신을 브람이 왜 적대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브람은 온지유를 바라보았다. 온지유는 법로와 다르다. 법로는 실험에 몰두하며 온갖 나쁜 짓을 서슴지 않았다. 온지유와 여이현이 겪었던 일까지 포함해서 말이다.이때 온지유가 다시 입을 열었다.“지금 어떤 생각하는지 알아요. 당신이 선택한 약혼자가 이현 씨한테 도움이 될 거라고 생각하는 거죠.”브람은 대답하지 않았지만, 온지유에게 그 침묵이 곧 인정이었다.온지유는 미소 지었다.“저는 아직 아버지를 받아들이지 못했어요. 저한테 잘해 주시고 많은 부분에서 변한 걸 아는 데도요. 저는 전쟁에서 너무 많은 걸 봤어요. 그래서 받아들일 수 없었어요. 그런데 이런 식으로 밀어내는 것도 방법이 아니라고 생각해요.”브람은 여이현의 친아버지였다. 여이현이 죽기를 원했다면 애초에 구하지 않았을 것이다.그렇기 때문에 온지유가 이곳에 있는 것이다. 브람을 완전히 설득하지 못하더라도 그녀의 말을 통해 이해하기를 바랐다. 결국 그는 한 나라의 수장이니까.브람은 온지유의 말에 크게 동요했다. 맞다, 그는 국가를 위해 여이현이 곁에 남아 있기를 바랐다. 하지만 여이현은 전혀 관심이 없다는 사실을 망각했다.문득 브람은 아이디어를 떠올렸다.“둘이 같이 있는 걸 허락할 수도 있어. 너도 이현이랑 같이 S국에 온다면.”여이현이 나서며 말했다.“저는
별이는 법로의 실험실에서 치료받고 있어서 안전했다. 하지만 여이현은 다르다.온지유는 지난 5년 동안 생활 기술과 방어술을 연습하며 여이현의 발목을 잡지 않겠다고 각오했다. 함께 생사를 하려는 마음으로 말이다.여이현은 온지유의 머리를 애정 어린 손길로 쓰다듬으며 말했다.“좋아.”셋째 날, 브람은 더 이상 버틸 수 없었다.여이현과 온지유는 시간 신경 쓸 것 없이 여유로웠지만 브람은 달랐다. S국을 노리고 있는 이들이 너무 많았다. 그는 한 나라의 대통령이었다. 이렇게 오랜 시간 나라를 비울 수는 없었다.브람은 여이현에게 해독제를 건네주며 말했다.“네 형들은 그렇게 원하는 대통령 자리를 넌 아무렇지 않게 포기하는구나. 네 어머니와 아주 똑같아.”‘어머니?’여이현에게 이 단어는 매우 낯설었다.그가 어머니로 알고 있던 사람은 여진숙이었다. 그는 항상 여진숙이 자신에게 냉정한 이유가 궁금했다. 그러다가 우연히 여진숙이 통화하는 것을 듣고 자신은 친아들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브람의 존재를 알게 되었을 때조차 그는 친어머니를 본 적이 없었다. 그의 마음속에 어머니란 존재는 아예 없었다.“그렇다면 저는 어머니를 닮아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드네요. 당신처럼 무정하고 싶지는 않거든요.”브람은 처음 여이현을 찾았을 때부터 해독제를 들고 협박했다. 협박의 조건은 온지유의 뱃속에 있는 아이를 데려가는 것이었다.온지유를 살리기 위해 여이현은 선택의 여지가 없었고 결국 타협했다. 나중에 그는 브람이 아이를 데려가려고 했던 것이 장차 그를 협박하기 위한 수단이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브람에게는 모든 것이 이익일 뿐이었다.그리고 브람이 지정한 약혼자는 S국 4대 가문 중 하나로, 그가 장차 대통령이 됐을 때 도움을 받아 번창할 것이라는 계산에 기반한 것이었다.“저를 협박하려고 하지 마요. 저는 절대 타협하지 않을 거니까요. 혼사도 알아서 취소해요. 그리고 다시는 제 인생에 끼어들지 마요.”“네가 막 산다고 네 자식까지 막 살게 할 생각이야? 원래 살던 곳에
“차라리 군대를 보내 Y국을 공격해서 도련님을 데려오지 않겠습니까?”“약혼식을 올리지 않았다고 해도 도련님과 서현이가 약혼한 건 모두가 아는 사실입니다. 도련님이 돌아오지 않는다면 우리 서현이의 체면은 어쩐다는 말입니까?”...사람들은 저마다 한마디씩 던졌다.브람은 입술을 굳게 다물고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지금 굳이 다른 적을 만들 필요는 없어요.”“저희에게는 무기가 있습니다. 저희가 겁을 낼 이유는 전혀 없어요. 최악의 상황에는 세계대전을 일으키면 됩니다.”“맞아요! 저희가 나서지 않으면 다른 나라들이 S국을 만만하게 볼 겁니다! 요즘 Y국조차 대놓고 무시하지 않습니까!”“제 생각에 모든 문제의 근원은 Y국의 마녀 때문입니다. 그 마녀만 죽이면 모든 문제가 해결될 겁니다.”브람은 어두운 안색으로 입을 다물었다. 그들의 말에도 일리가 있기 때문에 부정할 수는 없었다.여이현이 돌아오지 않으면 강서현은 우스갯거리가 되고 만다. 그리고 여이현이 돌아오지 않는 근본적인 이유는 온지유 때문이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금방 돌아와서 후계자가 되었을 것이다.브람은 생각에 잠겼다. 온지유를 죽이는 것은 괜찮은 방법이었지만 세계대전은 안 된다. 지금은 여러 나라가 살상력 높은 무기를 가지고 있어서, 때가 되면 싸움이 아닌 멸망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일단은 물러가요. 이 일은 제가 알아서 처리할게요.”브람이 결정 내리기도 전에 여이현은 이런 상황을 예상하고 있었다. 그와 신무열은 상의 끝에 온지유의 경호를 요한에게 맡기기로 했다.온지유의 주변에는 수많은 경호원이 배치되었다. 그러고 나서도 여이현은 온지유에게 주의를 당부했다.“아버지가 널 가만히 놔두지 않을 거야.”암살 시도도 한 번으로 끝나지 않을 것이다. 온지유가 살아 있는 한 브람은 쉽게 포기하지 않을 게 분명했다.온지유는 지난번 화국의 군대에 납치당했던 일을 떠올렸다. 그때 여이현이 제때 나타나지 않았다면 그녀는 이미 바다에 던져져 흔적도 없이 사라졌을 것이다."저번처럼 사람을 보낸다면
신무열은 온지유를 Y 국에 머물게 하고 싶었다. 온지유가 평생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그가 온지유의 생활을 안정적으로 보장할 수 있었다. 그리고 별이도 마찬가지였다. 아이가 건강해지면 더욱 활기차게 자라면서 친구도 사귀고 성인이 되어 결혼하고 가정을 이룰 것이다. 별이는 이곳에서 더 나은 미래를 가질 수 있었다. 하지만 온지유는 경성으로 돌아가려는 생각이었다. 신무열의 생각을 그녀도 알고 있었기에 미리 설명해야 한다고 느꼈다. “법... 아버지에 대한 부분은 무열 씨에게 맡길게요. 저는 아이를 데리고 경성으로 돌아가려고 해요.” “지유야, 뭐라고?” 신무열은 갑자기 흥분하며 온지유의 어깨를 꽉 잡았다. 온지유는 법로가 자신의 친아버지라는 사실을 알고 나서도 그동안 한 번도 인정하지 않았었다. 하지만 이제 온지유가 입을 열었다는 것은 곧 그녀가 아버지를 받아들이기 시작했다는 뜻이었다! 신무열이 ‘아버지’라는 호칭을 들었을 때조차 이렇게나 감격스러웠으니 친아버지에게는 얼마나 큰 기쁨일지 상상할 수 있었다. 온지유는 고개를 떨궜고 얼굴이 뜨거워지고 어색해졌다. 그녀는 그동안 목격했던 피비린내 나는 살육의 장면들이 떠오르기도 했지만 법로가 보여준 변화와 진심 어린 헌신을 부정할 수는 없었다. 만약 그가 아니었다면 별이의 몸 상태가 차츰 나아지는 것도 골수 기증자를 그렇게 빨리 찾는 것도 불가능했을 것이다. 법로는 별이를 위해 진심을 다하고 있었다. 여이현이 말했듯이 온지유는 본능적으로 그를 거부하고 있었다. 십여 년 동안 서로 왕래도 없이 아무런 감정도 쌓이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법로가 자신의 혈육임을 부정할 수 없었다. 온지유의 침묵은 묵인이나 다름없었다. 신무열은 너무나 기뻐하며 말했다. “바로 가서 아버지께 말씀드릴게. 지유야, 우리 가족이 함께 제대로 식사해 본 적이 없지 않니? 지금 바로 요리사에게 부탁해서 화국 음식을 잔뜩 준비하게 할게!” 신무열은 바로 요한에게 지시했다. “요한, 요리사들에게 진수성찬으로 준
온지유가 손목에 그 팔찌를 끼지 않았다면 그는 그녀를 알아볼 수 없었을 것이다. 그랬다면 노승아가 그녀의 자리를 영원히 대신하게 될 수도 있었고 그 결과는 상상조차 하기 힘들 정도로 끔찍했을 것이다. “이미 다 지나간 일이에요.” 온지유는 조용히 말했다. 여이현이 그녀에게 했던 조언 덕분이기도 했고 그녀는 또 별이를 떠올렸다. 남들은 외할아버지가 있는데 별이만 없게 할 수는 없었다. 부모로서 여이현과 자신이 별이 곁을 제대로 지켜주지 못했으니 이제 가족이 모두 모이기로 한 지금 별이에게 아쉬움을 남기고 싶지 않았다. “아니야. 그 일들은 결코 지나간 것이 아니야. 나와 아버지는 평생 너에게 빚을 졌어. 지유야, 나는 너를 위한 친자 인정 연회를 열고 싶어.” 비록 주변의 근신들이 온지유가 큰 아가씨임을 알고 있었고 신무열 역시 모두에게 온지유를 존중하라고 지시했으나 Y 국 내에서 온지유의 신분을 알지 못하는 사람이 많다는 것이었다. 예를 들어 지난번 김혜연이 온지유를 무례하게 대했던 일이 또 발생할 가능성이 있다면 왜 이 기회를 통해 온지유의 신분을 명확히 하지 않겠는가? 이를 통해 Y 국 사람 모두가 온지유의 신분을 알게 되어 감히 그녀를 무시하거나 상처 주려는 일이 없게 하자는 것이었다. 온지유는 서둘러 거절했다. “그런 거 필요 없어요...” 하지만 그녀가 말을 끝내기도 전에 신무열은 단호히 그녀의 말을 가로막았다. “안 돼. 내 여동생에게도 마땅히 이런 중요한 순간이 필요해.” 신무열은 이미 확고한 결심을 한 상태였고 그의 표정을 보아하니 무슨 말을 해도 바꿀 수 없는 단단한 결의가 보였다. 결국 온지유는 그의 뜻에 따를 수밖에 없었다. 다만 이번 친자 인정 연회는 별이의 골수 이식 수술이 끝난 후에 열리기로 했다. 신무열은 당연히 허락했다. 그리고 법로는 온지유가 그를 아버지로 인정했을 뿐만 아니라 친자 인정 연회까지 수락했다는 소식에 한없는 기쁨에 휩싸였다. 마치 어린아이처럼 그는 신무열의 의견을 조심스럽게 묻기까지 했다.
온지유는 어머니로서 아이의 몸에 칼이 닿는 걸 보고 있을 수 없었다. 그녀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수술실 못 들어가. 나... 이현 씨, 나 진짜 무서워...”“알아. 이해해. 하지만 지유야, 별이는 이미 충분히 고통을 겪었어. 만분의 일 확률이 별이한테 일어나지는 않을 거야. 아버지의 기술을 믿어보자, 응?”“그래, 율아. 나도 있잖아. 내가 곁에서 도울게.”인명진은 그들이 서로 껴안고 있는 모습을 보며 마음이 아팠지만, 그래도 온지유가 신경 쓰였다. 그는 별이의 수술이 무사히 진행되도록 지켜줄 것이다.온지유의 눈가가 뜨거워졌다. 중독 사건 이후부터 지금까지 인명진은 그녀 곁에 늘 있어 주었다. 그건 정말로 감사하게 생각했다.온지유는 여이현의 품에서 벗어나며 말했다.“나 잠깐 명진 씨랑 얘기하고 싶어.”“그럼 난 별이를 보러 갈게.”여이현은 온지유의 머리를 다정하게 쓰다듬었다. 원래는 온지유에게 입맞춤을 하고 싶었지만, 인명진이 있기에 그러지 않았다.그와 온지유에게는 앞으로 많은 시간이 남아있었다. 그들은 앞으로 얼마든지 가까이할 수 있었다.인명진이 그들의 친구라는 것을 고려해, 여이현은 친구 앞에서 굳이 그들이 연인임을 과시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여이현이 자리를 뜨자, 온지유는 인명진을 바라봤다. 인명진은 온지유를 따라 함께 걸었다. 잠시 침묵을 지키던 온지유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명진 씨, 이렇게 오랜 시간 동안 제 곁에 있어 줘서 정말 고마워요. 명진 씨는 참 좋은 사람이에요. 그리고 명진 씨 마음 이해해요. 하지만 말해주고 싶은 게 있어요. 자만하는 건 아니고, 명진 씨를 위해서 하는 말이에요. 명진 씨는 아직 젊잖아요. 혜주 언니조차도 짝을 찾았는데, 명진 씨가 평생 혼자일 수는 없지 않겠어요?”인명진은 온지유가 자신을 붙잡은 이유가 설득하기 위해서일 줄은 전혀 생각지 못했다.그의 생각은 이랬다. 만약 남은 인생을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할 수 없다면, 차라리 혼자 사는 것이 나았다. 사랑하지 않는 사람과 함께하는
나아가 사랑하는 사람이 해준 소개팅이라면 도무지 받아들일 수 없었다. 지옥에 떨어지는 것도 이것처럼 고통스럽지 않을 것이다.“미안해요. 저는 명진 씨가 잘 살길 바라는 마음에...”“알아.”인명진은 부드럽게 웃으며 온지유의 말을 끊었다. 그의 부드러운 눈빛은 조용히 온지유에게 향해 있었다.“율아, 내가 한 번 안아봐도 될까?”이건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하는 말일 것이다.별이의 골수 이식이 성공적으로 끝나고 회복하면, 신무열과 법로는 온지유를 위해 가족 상봉 파티를 준비할 예정이다. 온지유는 Y국에 오래 머무르지 않고 여이현과 함께 경성에 돌아갈 계획이었다.인명진은 이미 S국에 자리 잡고 있었다. 만약 의원을 닫고 경성에 돌아간다면 그가 온지유에 대한 마음이 모두에게 드러날 게 뻔했다.온지유와 여이현은 그런 것에 개의치 않았지만, 다른 사람들은 달리 생각할 수 있었다. 그는 자신의 평판이 나빠지는 것은 상관없었지만, 온지유가 그런 오해를 받는 건 원치 않았다.온지유는 말없이 인명진을 껴안았다. 인명진은 조심스럽게 그녀를 안아주며 말했다.“너랑 여이현 씨가 결혼식을 올리면 내가 축의금 많이 줄게. 여이현 씨는 친구가 많아서 내가 굳이 필요 없고, 너도 혜주랑 친구들이 있으니...”“명진 씨는 제 가족이에요.”온지유의 이 한마디는 인명진의 위치를 인정해 주는 말이었다.인명진은 온지유의 행복한 결말을 기쁘게 여겼다. 하지만 동시에 마음속 깊은 곳에는 쓸쓸함이 자리 잡았다. 온지유와의 관계는 이제 여기까지였다....별이의 수술은 오전 9시로 예정되었다.그날은 날씨가 좋았다. 법로와 인명진은 함께 수술실로 들어갔다. 온지유, 여이현, 신무열, 강서현, 그리고 요한까지 모두 그 자리에 있었다. 심지어 하 장로까지 찾아왔다.하 장로는 온지유가 잘 기억하고 있는 인물이었다. 예전에 노승아가 온지유를 해치려 했을 때 그녀를 구해준 사람이 바로 하 장로였다. 온지유와 여이현이 이곳에 머무는 동안 하 장로가 모습을 드러낸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하 장
은서우는 인명진이 그런 눈빛으로 누군가를 바라보는 모습을 처음 보았다. 확실하게 티가 난건 아니지만 자세하게 보면 알아차릴 수 있었다.더욱이 은서우는 인명진 옆에서 한동안 머물렀던 사람이라 미묘한 그의 표정도 금방 알아차릴 수 있었다.“죄송해요. 원장님, 저 때문에 난처해진 거 아니에요?”고개를 들고 은서우를 바라보던 인명진은 그녀의 눈빛에 하고 싶었던 말을 또다시 목구멍으로 삼킨 채 다른 말을 꺼냈다.“앞으로 사석에서는 원장님이라고 부르지 마세요.”“그러면 뭐라고 부를까요? 인 선생님이라고 부를까요?”“이름 불러요.”인명진은 나이프와 포크로 접시에 놓인 스테이크를 자르며 태연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런데도 은서우는 기분이 좋은 듯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그러면 앞으로 병원에서는 원장님이라고 부르고 사석에서는 인명진 씨라고 부를게요.”은서우가 부르는 이름에 인명진은 잠시 흠칫했지만 이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그래요.”은서우는 식사 자리가 너무 좋았다. 돈에 대한 걱정과 집사람들 때문에 받았던 스트레스들이 전부 사라질 만큼 행복한 시간이었다.병원에서 인명진이 준 차트를 받아쥔 은서우는 뿌듯한 마음에 의기양양해지기도 했다.하지만 병원 내부에서는 점점 귀에 거슬리는 소문이 퍼지고 있었다.단순히 은서우가 인명진이 꽂은 낙하산이고 공평하지 못하다는 말이 퍼지고 있을 때는 인명진이 신경 쓰지 말라는 말에 은서우도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하지만 소문은 점점 더 허황한 쪽으로 퍼졌고 심지어 근무시간에 수군거리는 사람도 있었다.“은서우 같은 배경이 어떻게 우리 병원에 들어온 거예요? 여기가 무슨 개인 진료소도 아니고 시에서도 권위 있는 병원이잖아요.”“내가 뭐라 그랬어요. 무조건 낙하산이라니까요? 원장님과 엄청 가깝게 지내잖아요. 두 사람 사이에 우리가 모르는 뭔가가 있는지도 모르죠.”“그럼 설마...”은서우는 차트를 쥐고 있던 손을 부들부들 떨며 소리쳤다.“지금 무슨 말을 하는 거예요!”수군거리던 사람들은 은서우의 목소리에 깜짝 놀라며
은서우는 인명진에게 메뉴판을 건네며 말했다.“봐봐요. 못 드시는 음식 있어요?”인명진은 간결하게 대답했다.“없어요.”은서우는 다시 메뉴판을 받아 들고 현재 자신의 경제력으로 감당할 수 있는 요리를 몇 개 주문했다.“이 정도면 될까요?”인명진은 은서우를 힐끗 쳐다봤다.분명히 덤덤한 눈빛이었지만 은서우는 쪽팔려서 고개를 들 수 없었다. 그녀는 자신이 밥을 사주겠다고 큰소리쳐놓고 겨우 이 정도밖에 못 산다는 게 창피했다.‘분명히 날, 별로라고 생각하시겠지.’은서우가 이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인명진이 시선을 거두며 말했다.“좋아요. 그리고 내 생각만 하지 말고 은서우 씨가 좋아하는 걸 주문해요.”인명진도 은서우가 자신의 입맛을 고려해 주문했다는 걸 알아차렸다. 속마음을 들킨 은서우는 갑자기 얼굴이 화끈거렸다.얼마 지나지 않아 주문한 음식이 올라왔고 은서우는 익숙하게 젓가락을 가져왔다.“이 식당은 젓가락을 직접 가져와야 해요. 여기요. 전부 소독한 거예요.”은서우의 말에 인명진은 기분 좋게 젓가락을 받았다. 의사들은 아무래도 어느 정도 결벽증을 가지고 있었는데 인명진도 예외는 아니었다.그는 물끄러미 은서우를 보며 말했다.“이런 것까지 신경 써줘서 고마워요.”은서우는 인명진의 눈길을 알아차리지 못한 채 자리에 앉으며 말했다.“저도 의사잖아요. 직업병인가 봐요.”은서우의 말에 인명진은 은은한 미소를 지었다.무심코 주변을 훑어보던 인명진의 눈길은 갑자기 누군가에게 멈췄고 은서우는 자신이 제일 존경하던 원장의 표정이 갑자기 바뀌는 걸 즉시 알아차렸다.인명진은 누군가의 이름을 조용히 불렀다.“온지유?”자신의 이름에 여자는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돌렸고 여자의 얼굴을 올려다본 은서우의 눈에는 놀라움이 스쳤다.온지유는 인명진을 발견하고 놀라움을 금치 못하며 윤별의 손을 잡고 다가왔다.“명진 씨가 여기 왜 있어요? 병원이 바쁜 줄 알았는데 아닌가 봐요?”말을 마친 온지유의 눈길은 은서우에게 멈췄고 그녀는 잠깐 멈칫하더니 의미심장하게 말했다
“당장 카드에 사천만 원 보내. 휠체어를 좋은 거로 바꿔야겠어.”은서우는 미간을 찡그리며 말했다.“지금 타고 있는 휠체어도 산 지 얼마 안 됐잖아. 그건 그냥 핑계고, 또 다른데 탕진하고 싶은 거겠지.”속셈이 들킨 소태훈은 더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말했다.“헛소리 그만하고, 줄 거야 말 거야? 사천만 원만 보내주면 한동안 귀찮게 안 할 테니까 빨리 보내!”소태훈의 말에 지난 과거가 더욱 후회스럽고 원망스러워진 은서우는 휴대전화를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은서우는 그날 밖에 나가지 말걸, 그 차를 타지 말걸, 수없이 후회하고 또 후회했다. 그랬다면 죽는 사람이 자신이었을 거고, 그랬다면 최소한 이렇게 소씨 가문 사람들한테 시달리면서 살 필요도 없었겠지.소씨 가문 사람들은 흡혈 충처럼 그녀의 골수까지 다 빨아들일 기세였다.은서우는 무기력해져 맥이 빠진 목소리로 말했다.“지난번에도 말했잖아. 나 돈 없어. 몇 번을 물어봐도 내 대답은 똑같아. 인터넷에 올리고 싶으면 올려.”은서우는 지금까지 자신이 해야 할 일은 충분히 했으니 미안해할 것도 없다고 생각했다.소태훈의 협박도 오로지 그가 꼬투리를 잡은 거였다.말을 마친 은서우가 전화를 끊자, 소태훈은 끈질기게 다시 걸어왔고 지긋지긋해진 그녀는 아예 번호를 차단해 버렸다.은서우는 더 이상 소씨 가문 사람과 연계하고 싶지 않았다.몇 분 전의 기쁨은 전혀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생기를 잃은 채 은서우는 옷으로 뒤덮인 소파에 누워 멍하니 천장을 바라봤다.시간이 얼마나 지났을지 인명진한테서 전화가 걸려 왔다.“준비가 다 됐어요? 지금 데리러 갈게요.”은서우는 그제야 몸을 뒤척이며 일어나 앉았다.“아직이요. 조금만 기다려줘요.”인명진의 전화 한 통이 그녀를 다시 숨을 쉬게 한 것 같았다.즉시 옷을 차려입고 계단을 뛰어 내려간 은서우가 주위를 훑어보자 멀지 않은 잔디밭에 아우디 한대가 보였다.차 안에서 휴대전화를 보고 있던 인명진은 인기척에 고개를 돌렸고 그의 눈길은 은서우가 입고 있는 베이지색
구태원은 경찰에 체포되어 조사를 받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진상이 밝혀졌다.여자아이의 죽음은 우연이 아니라 구태원이 이식할 간을 몰래 바꿔치기했기 때문에 거부반응이 생겼던 거였다.조사가 끝난 뒤 병원은 구태원의 착오로 인해 많은 돈을 배상했지만, 여전히 가족들의 아픈 마음은 보상해 줄 수 없었다. 결국 돈이 죽은 사람을 대신할 수는 없는 법이었다.은서우도 슬퍼하는 것 외에는 할 수 있는 게 없었고 혐의를 벗은 인명진은 병원의 최신 연구 프로젝트에 참여시키겠다는 은서우와의 약속을 지켜주었다.나이도 어리고 실력도 인증되지 않은 은서우를 어려운 프로젝트에 참여시킨대고 생각했던 병원 사람들은 인명진의 결정에 불복했다.하지만 인명진은 확신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제 조수로 선택한 사람이에요. 무슨 일이 생기면 제가 책임지죠.”인명진이 자기 조수로 선택한 사람이라 굳이 다른 사람의 동의는 필요 없었다.그는 사람들의 불복에도 은서우를 연구에 참여시켰다.은서우는 프로젝트에 참여한 뒤 많은 전문 지식을 배웠고 실력도 나날이 발전했다. 그녀는 인명진에게 고마운 마음을 전하고 싶었다.“원장님, 시간 괜찮으세요?”은서우는 큰 용기를 내고 인명진의 사무실에 찾아가 문을 두드렸다.인명진은 얇은 입술을 달싹이며 말했다.“들어와요.”은서우가 들어오자, 인명진은 그녀를 쭉 훑어보았다. 은서우는 며칠 전과는 달리 자신감이 생긴 것 같았다.예전에 그녀는 업무 능력이 누구보다 뛰어났지만, 항상 자신을 보잘것없는 존재로 생각했고 자신감이 부족했다. 하지만 지금은 그녀의 눈빛도 일거수일투족도 지금껏 본 적이 없는 자신감 넘치는 여유가 느껴졌다.인명진은 뿌듯한 눈빛으로 은서우를 바라보며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무슨 일이에요?”은서우는 잠시 망설이다 말했다.“원장님한테 신세 진 게 너무 많아서 보답으로 음식이라도 대접하고 싶은데, 혹시 시간 괜찮으실까요?”인명진이 병원에 온 뒤로 많은 여자들이 은근히 마음을 표현하기도 했고 식사 약속을 건네기도 했지만, 그는 단 한
깜짝 놀란 은서우는 인명진의 손을 잡고 여기저기 살피며 가방에서 물티슈를 꺼내고 말했다.“손은 왜 이래요? 왜 방금 아무 말도 안 하고 가만히 있었던 거예요?”은서우의 손을 피하며 상처를 숨기는 인명진의 차가운 눈매는 가로등 불빛을 받아 더욱 지치고 피곤해 보였다.“괜찮아요. 큰 상처도 아니고 놔두면 괜찮아져요.”“안 돼요.”은서우는 다시 인명진의 손을 끌어당겨 물티슈로 피를 닦은 뒤 상처에 밴드를 붙였다.자신의 상처를 치료하는 은서우를 조용히 지켜보던 인명진의 머릿속에는 많은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그는 차갑게만 느껴지던 가로등 불빛이 조금 따뜻하게 느껴졌고 복잡하고 예민했던 마음이 조금은 편안해지는 것 같았다.다음 날, 두 사람은 구태원을 찾아갔다.구태원은 외과에서 권위 있는 의사였는데, 원장 선거에서 인명진 보다 표수가 조금 모자라 원장에서 밀려났고 어쩔 수 없이 계속 외과 의사로 일하고 있었다.구태원은 모든 사실을 부정했다.“나 때문이라는 증거 있어요? 장기이식이 거부반응이 일어나는 건 정상적인 현상이잖아요. 누굴 탓하겠어요?”“하지만, 거부반응이 있다고 무조건 죽는 건 아니잖아요. 원장님이 안 계셨으면 구 선생님이 수술했어도 되고 아니면 원장님한테 연락해도 되잖아요.”구태원은 얼굴빛이 싹 변하더니 가볍게 한마디 했다.“깜빡했어요.”어이없는 구태원의 대답에 멍하니 있던 은서우는 이내 분노가 치밀어 올라 이성을 잃었다.‘뭐 이런 사람이 다 있지? 자기 때문에 목숨을 잃었다는데 사과는커녕 잘못을 인정도 안 해? 그리고 그걸 전부 원장님한테 뒤집어씌운 거야?”인명진도 말은 하지 않았지만, 은서우와 똑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그는 듣기 거북한 욕을 듣는 것도 괜찮았고 다른 사람이 어떻게 자신을 평가하든 다 상관없었지만, 환자의 죽음만은 아무렇지 않을 수가 없었다.인명진은 만약 그 당시 자신이 있었다면 그 환자는 분명 살 수 있었을 거로 생각했다.짝!이성을 잃은 은서우는 자신이 무슨 짓을 했는지 미처 알아차리지 못한 채 화가
보통 사람들보다 피부가 하얗던 인명진의 등은 여드름 하나 없이 깔끔하고 매끈해 상처가 더욱 두드러지게 보였다.하지만 그런 건 신경을 쓸 여유조차 없었던 은서우는 약을 바르는 데에만 신경 썼다.반대로 인명진은 은서우의 숨결과 그녀의 손끝에 온 신경이 쏠려있었다.자신의 등이 이렇게 예민한지 이제야 알게 된 인명진은 늦은 후회를 하며 주먹을 꽉 쥐고 참고 있었다.갑자기 은서우는 상처를 입으로 호호 불어주며 말했다.“매우 아프죠? 좀 불어줄게요.”인명진은 순간 움찔하더니 즉시 셔츠를 잡아 올려 입고는 흰 가운을 걸치며 말했다.“이 정도면 됐어요. 고마워요.”텅 빈 사무실을 둘러보던 은서우는 그제야 단둘이 한 방에 있다는 걸 인식했다.누가 봐도 애매한 분위기였고, 자신이 무슨 짓을 했는지 떠오른 은서우는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라 말했다.“원장님, 죄송해요. 일부러 그런 건 아닌데...”인명진은 어색한 분위기가 싫어 은서우의 말을 잘랐다. 그녀의 말을 듣기 싫어서가 아니라 자신조차 모르겠는 기분이 이상해서였다.“설명할 필요 없어요. 그만 가죠.”경찰서로 간 두 사람은 진술서를 작성했고 경찰의 협조하게 합의하려고 했지만, 상대방은 원만한 합의를 원하지 않았다.심지어 그 사람들은 자리에 앉는 순간부터 욕설을 퍼부었다.경찰이 책상을 두드리며 말렸지만 전혀 소용없었고 그 남자는 오히려 인명진을 가리키며 분노했다.“저 새끼가 내 딸을 죽였다고! 목숨은 목숨으로 갚아야지!”경찰은 막무가내로 말이 통하지 않는 사람들 때문에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인상만 찌푸렸다. 은서우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말했다.“그렇다고 해도 법으로 해결해야지 이렇게 막무가내로 폭력을 쓰는 건 아니죠. 그리고 따지고 보면 이 일은 원장님과 아무 상관도 없는 일이잖아요.”은서우의 말에 가족들은 오히려 더 크게 소란을 피우기 시작했고 그녀가 심호흡하고 다시 사건의 전말을 설명하려는 찰나 인명진이 입을 열었다.“제가 설명할게요.”인명진은 짧고 명확하게 사건의 자초지종을 설명했
두 남자가 다시 손을 대려고 움찔하자, 크게 다치는 것보다는 쪽팔리는 게 차라리 낫다고 생각한 은서우는 당장이라도 인명진을 끌고 그 자리에서 도망치고 싶었다.방금 인명진이 등을 맞았을 때 은서우는 옆에서 보는 것만으로 간담이 서늘해 났다. 인명진의 등에 큰 멍이 생긴 건 아닌지 걱정스러웠지만 지금은 옷을 걷어 올려 상처를 살필 여유가 없었다.더 이상 이 자리에 있으면 안 되겠다고 생각한 은서우는 즉시 인명진의 손을 잡았다.그의 큰 손바닥이 그녀의 손을 감쌌지만, 은서우는 그런 걸 신경 쓸 여유조차 없었다.“원장님, 가시죠. 여기는 경찰들이 와서 처리할 거예요.”잡은 손을 은서우는 신경 쓰지 않았지만, 인명진은 반대였다.자기 손을 꽉 잡은 은서우의 손은 작고 따뜻했다. 인명진은 그녀의 손이 이렇게 작다는 걸 미처 몰랐고 조금만 더 꽉 잡으면 그녀의 손 전체를 감쌀 수 있을 것 같았다.인명진은 왠지 가슴이 뜨거워져 손을 풀며 말했다.“그럴 필요 없어요.”조급해진 은서우가 다시 입을 열려는 찰나 경찰들이 도착했다.이곳을 둘러싸고 있는 경찰들을 보고 나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던 은서우가 눈을 내리깔자, 한쪽 편에 떨어져 있는 인명진의 휴대전화가 보였다.상황을 보아하니 인명진은 이미 저 사람들이 눈치채지 못하게 신고를 한 뒤 휴대전화를 한편에 급하게 넣어놓은 거였다.어쩐지 침착하게 대처하고 있더라니, 경찰들이 이렇게 일찍 도착할 수 있었던 것도 인명진의 신고 때문이었다.경찰들은 빠른 속도로 소란을 피우고 있던 가족들을 제압했고 인명진과 은서우는 경찰서로 가 진술서를 작성해야 했다.일단 상처 치료부터 하기로 했던 인명진은 혼자 어떻게든 등 뒤에 약을 바르고 싶었지만, 눈이 뒤통수에 달린 것도 아니고 아무래도 혼자는 어려웠다.한참을 낑낑거리고 있는데 누군가 문을 두드렸다.인명진은 매서운 눈빛으로 문 쪽을 바라보며 어림짐작으로 말했다.“은서우 씨?”문밖에서는 쟁쟁한 은서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원장님, 저예요. 상처가 등에 있어서 혼자 치료
젊은 남자가 먼저 달려들었다.인명진이 넋을 놓고 있을 때 예상치 못한 기습을 한 것이다.몽둥이가 그대로 등에 내리꽂혔다.무겁고 둔탁한 소리와 함께 짧은 신음이 터져 나왔다.은서우의 머릿속이 새하얘졌다.당황한 그녀는 어쩔 줄 몰라 하며 인명진을 부축했다.“원장님, 괜찮으세요? 왜 저 대신 맞으신 거예요!”몸을 곧게 세운 인명진은 그 와중에도 덤덤히 답했다.“은 선생님 대신 맞은 게 아니라 원래부터 저를 향해 오던 거였어요.”고개를 돌려 자신의 등을 확인한 인명진의 눈빛이 어두워졌다.충격이 상당했지만 그는 평범한 사람이 아니었다.과거 법로의 약인 이었던 그는 이런 고통에 익숙했다.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화가 나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그는 천천히 자신을 공격한 남자를 바라보며 차갑고 서늘한 시선으로 상대를 짓눌렀다.젊은 남자는 그 눈빛에 움찔했지만 순간뿐이었다.“다 너 같은 돌팔이 의사 때문에 내 동생이 죽었어! 겨우 열아홉 살이었어! 네가 아니었으면, 너만 아니었다면 내 동생은 지금도 멀쩡했을 거라고! 돌팔이 의사! 더러운 병원도 다 망해버려야 해!”은서우는 그 말에 화가 치밀어 올라 나섰다.“당신은 어떻게 우리 병원의 잘못이라고 확신해요? 사람을 살리려고 한 게 잘못인가요?”남자는 주먹을 꽉 쥐고 은서우를 노려보았고 그의 어머니가 눈물을 닦으며 입을 열었다.“당신들이 아니면 또 누가 있지? 간이식이 필요하다고 해서 보름 후로 수술을 잡았어. 하지만 병세가 악화해서 수술을 앞당겼지.”인명진은 미간을 찌푸린 채 여자의 말을 들었다.은서우는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인명진을 바라봤다.그녀는 인명진이 그런 사람이 아닐 것이라고, 분명 뭔가 오해가 있을 것이라고 확신했다.“우린 친척들에게 돈을 빌리고 또 빌려서 수술비를 마련해서 딸을 수술실로 보냈어.”은서우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끼어들었다.“수술실에 들어갔다면 잘 된 거 아닌가요? 병세가 악화했다면 이식을 빨리 진행하는 게 맞잖아요. 그렇지 않으면 환자는 죽었을 거예요.”눈이 붉
“모르겠어요. 본인 말로는 집에 급한 일이 생겨서 더 이상 머물 수 없었다면서 급히 떠났어요.”은서우는 무거운 마음으로 주먹을 꽉 쥐었다. 생각하면 할수록 뭔가 이상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마치 자신이 함정에 빠진 것만 같았다.‘세상에 이렇게 우연이 반복될 수 있나?’오히려 그 인턴은 들통날 걸 알고 단서를 끊어 그들이 더는 추궁할 수 없도록 미리 도망친 것처럼 보였다.은서우의 무거운 분위기와 달리 인명진은 담담했다. 그는 애초에 이럴 줄 알았다는 듯이 말했다.“고마워요. 수고했어요.”그는 곧 은서우를 잠시 바라보고는 뒤돌았고 은서우도 그를 따라 몸을 돌렸다.그때 간호사가 참지 못하고 은서우를 불러 세웠다.“은 선생님, 언제부터 원장님이랑 그렇게 친했어요? 그리고 요즘 다들 원장님이 선생님을 차기 부원장으로 키우려고 한다던데 진짜예요?”은서우는 순간 당황했다.인명진이 그런 말을 한 적은 있지만 아직 확정된 것도 없는 일을 떠벌일 순 없었다.“저도 잘 모르겠어요.”말을 마친 그녀는 간호사가 다른 질문을 이을까 봐 급히 자리를 떠났다.복도로 나왔을 때 인명진은 하얀 가운을 입고 두 손을 주머니에 넣은 채 아직 그 자리에 있었다.주위엔 많은 사람들이 오갔지만 아무도 감히 그에게 말을 걸지 못했다. 인명진은 마치 그녀를 기다리는 듯한 모습이었다.은서우의 심장이 천천히 뛰었다.조용히 그에게 다가갔지만 차마 방해할 수 없어 입을 열었다가 다시 다물었다.인명진이 먼저 고개를 돌려 그녀를 쳐다보며 차분하게 말했다.“나중에 다시 확인해 보면 돼요. 이름이랑 신분이 가짜일 리는 없잖아요.”그가 인턴을 두고 한 말이라는 걸 깨달은 은서우는 잠시 멍하니 있다 고개를 끄덕였다.그때 갑자기 뒤에서 거친 외침이 들려왔다.“엉터리 의사, 거기 서!”깜짝 놀란 은서우가 뒤를 돌아보니 며칠 전 병원에서 소란을 피운 환자의 가족들이었다.한 쌍의 부부와 젊은 남성이 함께였는데 그들의 손에는 벽돌이나 나무 몽둥이가 들려 있었다.은서우의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